

앤드루 멀론은 사도 바울이 쓴 데살로니가서의 내용을 종합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순간부터 그리스도의 재림에 이르기까지 신자의 삶을 추적하는 일관
된 구원의 서사를 보여 준다. 목회 사역과 일상생활에 모두 적용하는 것을 염
두에 둔 이 책은 바울의 서신을 오늘날을 위한 말씀으로 전유하려는 모든 사람
에게 유용한 자료가 될 것이다. -티머시 브루킨스 휴스턴 기독교 대학교 초기 기독교학 교수
바울이 데살로니가 신자에게 보낸 서신들이 종종 우리의 독서 목록에서 뒷전
으로 밀려난다면, 앤드루 멀론은 이 서신들이 우선순위에 올라야 하는 이유를
분명하게 보여 준다. 멀론은 목회적으로 민감한 방식으로 바울의 복음 언어, 구
원의 심상, 그리스도의 분명하고 확실한 재림의 ‘지금’과 ‘아직’ 사이에서 하나 님을 기쁘시게 하려 노력할 때 거룩하게 행하라는 그의 부름을 자세히 분석 한다. 이 작은 책을 교회에 진심으로 추천한다.
-트레버 버크 전 무디 성경 연구소 성경학 교수, 객원 강사, 『하나님의 가족으로 입양되다: 바울의 은유 탐구』의 저자
To Walk and to Please God: A Theology of 1 and 2 Thessalonians
ⓒ 2024 by Andrew S. Malone
Published by Crossway, a publishing ministry of Good News Publishers Wheaton, Illinois 60187, U.S.A.
This edition published by arrangement with Crossway through rMaeng2, Seoul, Republic of Korea. All rights reserved.
This Korean edition copyright ⓒ 2025 by The Revival and Reformation Press, Seoul, Republic of Korea.
이 한국어판의 저작권은 알맹2를 통하여 Good News Publishers 와 독점 계약한 부흥과개
혁사에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후서 신학
발행일 2025년 10월 25일
지은이 앤드루 멀론
옮긴이 윤석인
펴낸이 김은주
펴낸곳 부흥과개혁사
편집 권대영 디자인 박슬기 기획 이승영 마케팅 권성직
인쇄소 영진문원 판권 Ⓒ부흥과개혁사 2025
주소 서울특별시 마포구 양화로6길 9-20, 2층(서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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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페이지 http://rnrbook.com e-mail rnrbook@hanmail.net
ISBN 979-11-7540-017-7 (94230)
978-89-6092-756-8 (94230)(세트)
등록 1998년 9월 15일 (제13-548호)
저작권법에 의하여 한국 내에서 보호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 전재와 무단 복제를 금합니다. 는 교회의 부흥과 개혁을 추구합니다. 부흥과개혁사는 부흥과 개혁이 이 시대 한국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으며, 조국 교회의 부흥과 개혁의 방향을 위한 이정표이자, 잠든 교회에는 부흥과 개혁을 촉구하는 나팔 소리요, 깨어난 교회에는 부흥과 개혁의 불길을 지속시키는 장작더미이며, 부흥과 개혁을
꿈꾸며 소망하는 교회들을 하나로 모아 주기 위한 깃발이고자 기독교 출판의 바다에 출항하였습니다.
┃ 시리즈 서문 10
┃ 감사의 글 13
┃ 약어표 15
서론: 바르게 선 교회 17

1장 하나님께로 돌아선 당신: 구원과
2장 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3장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현재)
5장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

바르게 선 교회
성경 연구의 많은 부분은 비교와 대조를 포함한다. 옛 언약에서
새 언약으로의 전환을 목격할 때, 하나님과 인간과의 상호작용 중
어떤 측면은 똑같이 유지되고 어떤 측면은 다르게 표현되는가? 우
리가 배우는 방식, 특히 성경에 대해 배우는 방식에도 똑같은 원
리가 적용된다. 우리는 자신에게 이미 친숙한 것과 비교하고 대조
하면서 새로운 주제를 탐구한다. 폴 엘링워스가 표현하는 대로, “우
리는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다른 것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새로운
것을 이해한다.”1)
1) Paul Ellingworth, “Hebrews and the Anticipation of Completion,” Themelios 14, no. 1 (1988): 6.
잘 알려지지 않은 교회
비교와 대조라는 짝을 이루는 도구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은 데
살로니가전후서에 접근하는 유용한 방법이다. 물론 이 서신들을 잘
아는 기독교인도 있다. 하지만 우리 중 많은 사람에게 이 서신들을
탐구하는 일은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가까운 나라를 방문하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캐나다를 방문하는 미국인이든, 뉴질랜드를 방
문하는 호주인이든, 스위스나 케냐 또는 중국을 방문하는 이웃 민
족이든 간에, 고향과 거의 같은 느낌을 주는 장소가 많더라도 우
리가 다른 곳에 있다는 것을 상기시킬 만큼 충분히 이질적인 광경
과 소리가 있다. 관광과 성경 연구에서 문화 충격을 유발하는 것은
큰 유사성 속에 존재하는 사소한 차이일 수 있다. 우리는 이런 차이
를 예상하여 대응하지 못할 때 실수를 저지른다.
공교롭게도 분량의 측면에서 보면, 데살로니가서는 교회에 초점
을 맞추는 바울 서신의 맨 끝에 놓여 있다. 정경 순서대로 바울 서
신에 접근하면 로마서, 고린도 서신,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
서, 골로새서 등 60장이 넘는 서신을 이미 접하게 된다. 공교롭게도 역사적 초점의 측면에서 보면, 이런 더 긴 서신 가운
데 상당수는 복음주의 교회와 신학교에서 더 많이 다루어지고 있다.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는 개신교 종교개혁으로 최고의 서신으
로 다루어지며 구원에 대한 많은 가르침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고
린도 서신은 신자들의 행동을 바로잡으려는 교회에서 인기가
있다( 고린도전서가 고린도후서보다 더 많이 사용되는 것은 사실이다 ). 에베소서
데살로니가전후서 신학
는 하나님의 장엄한 구원 사역에 나타난 영광으로 우리를 초대하
고, 골로새서는 혼합주의 이단에 대해 경고할 때 설교단에서 다시
강하게 역설할 기회를 주며, 빌립보서는 그리스도인의 행동에 대한
실질적인 조언으로 돌아간다. 교회 지도권에 대한 지침을 구할 때
는 디모데와 디도에게 전하는 교훈으로 넘어간다.
그래서 데살로니가 서신은 안타까운 위치에서 시들해진다. 데살
로니가서는 마치 우리가 길을 따라 있는 이전 명소들을 탐험하느라
지친 나머지, 앞의 일곱 곳 또는 두 곳의 관광지를 더 둘러보고 난
뒤에, 비슷한 상품을 판매하는 여덟 번째와 아홉 번째 상점과 같다.
관광 경로라는 언어도 우리가 사도행전을 읽는 방식을 설명할 수
있다. 사도행전 17장 1-9절에 나오는 데살로니가 교회 설립은 설
교자의 여정에서 강조되는 목적지가 아닌 경우가 많다. 그 이유는
앞선 장( 행 16:11-40 ) 에 나오는 빌립보에서의 사건처럼 세부 묘사나
극적 요소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17장의 나머지 부분에서
는 성경을 성실하게 공부하는 베뢰아 사람들의 모습( 행 17:10-12 ) 과
아덴의 이방 지식인들을 대상으로 복음 메시지를 상황에 맞게 전하
는 전도 방식( 행 17:16-34 ) 을 엿볼 수 있다. 일부 성공을 증진하는 한
구절을 제외하면 데살로니가와의 만남은 (1) 복음이 이방 유럽에
폭발적으로 전파되어야 할 때 구약 성경의 영역으로 이상하게 회귀
한다거나, (2) 복음의 진전이라는 측면에서 어느 정도 양가적이라
거나, (3) 특히 주변 본문에 나오는 빌립보, 고린도, 에베소에서 일
어난 더 자극적인 “능력의 만남”과 “승리”와 비교할 때 복음이 뉴스
가치가 있는 견인력을 얻는 데 완전히 실패한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이런 지역 중 일부에서는 성패가 엇갈리게 나타나지만, 우리가 그곳 교회들에
보내는 후속 서신들에 친숙해서 더 호감을 느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 우리는
각 서사에 대한 누가의 목적을 충분히 오해할 수 있다. 우리가 우리
의 읽기와 설교 프로그램에서 훈련을 받거나 철저하게 준비하지 않
는 한, 데살로니가에서 일어난 사건들은 우리가 충분히 기억할 만
큼 중요한 하이라이트로 여겨지지 않을 것이다.2)
과소 평가된 교회?
이런 외부 요인 외에도 데살로니가 서신의 내용 또한 이 서신들
이 소홀히 다루어지는 데 일조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데살로니가
서신은 어쩌면 너무 자전적이어서 현대의 신자와 설교자들은 교회
개척자들의 과거 행적보다 신자들의 행실에 대해 더 많이 듣고 싶어
할 것이다. 데살로니가 서신은 어쩌면 너무 반복적이거나 너무 짧
아 우리가 교회 개척 실무에 관심이 정말 있다면 고린도 서신의 해
당 부분에서 더 긴 세부 사항을 이미 면밀하게 검토했을 것이다. 데
살로니가 교회가 너무 수동적이라는 느낌을 주어 저자가 자신이 과 거에 했던 수고에 대해 말하는 인공 배경처럼 보일 수도 있다. 서신
2) 공정하게 말하면 데살로니가는 누가의 주요 기록에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누가 는 일반적으로 새로운 선교 모험을 시작할 때 후속 목적지(예. 데살로니가)에 대 한 본보기가 되는 상세한 설명(예. 빌립보에 대한 설명)을 곁들여 시작한다. 누가의 본보기적 접근의 예는 다음을 보라. Patrick Schreiner, The Mission of the Triune God: A Theology of Acts, NTT (Wheaton, IL: Crossway, 2022, ), 119–124.
데살로니가전후서 신학
의 분위기가 어쩌면 사도행전에 나오는 밋밋한 데살로니가 서사에
서처럼 너무 정적이어서 영적 은사에 대한 생생한 논쟁, 격렬한 교
리 논쟁, 또는 추악한 윤리적 위법 행위에 대한 활기찬 논쟁을 선호
할 수도 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어쩌면 정말 논쟁의 여지가 너무
없어 일부 현대 교회, 특히 일부 설교자는 악행을 저지르는 자들의
안일함을 일깨우기 위해 고린도전서나 갈라디아서 같은 불같은 이
야기를 원할 수도 있다.
외부적 요인과 내부적 요인은 모두 알렉산드리아 대도서관의 몰
락에 대한 도시 전설을 연상시킨다. 공격하는 장군은 도서관의 책
들이 침략자의 기존 세계관에 반하는 것이라면 위험하므로 파괴해
야 하고, 그 책들이 단지 그 세계관을 반복할 뿐이라면 어쨌거나 불
필요하다고 선언했다고 한다. 우리 중 많은 사람도 데살로니가전후
서에 이런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 서신들이 바울
의 더 인정받는 서신들에서 우리가 이미 숙지한 내용에 대한 축약
판이라고 상정한다면, 우리가 또 하나의 더 짧은 리믹스를 다시 읽
어야 할 이유가 있겠는가? ( 우리는 일단 감독 확장판을 보고 나면 “불완전한”
초안에 얼마나 자주 매력을 느끼는가? ) 데살로니가 서신의 어떤 내용이 다
른 바울 서신들과 상충한다고 주장할 신자는 거의 없지만, 혹시 불
일치가 제기되더라도 나는 그것이 더 뿌리 깊은 서신들을 지지하는 방향으로 해결될 것이라고 확신한다.3)
3) 존 바이런은 “어떤 면에서 데살로니가서는 바울 문헌의 의붓자식”이라고 한탄하 며 자기 주석을 시작한다. 바이런은 부분적으로 이것의 원인이 “종교개혁을 촉 진하는 데 도움이 된 신학적 주제의 부재”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1and 2 Thes-
비교와 대조
데살로니가서에 대한 필자의 걱정이 과장이었기를 바란다. 그러
나 이렇게 말한 것은 데살로니가서를 스스로 읽거나 다른 사람들과
공유할 때 직면할 수 있는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 저항에 대해 경각
심을 일깨우기 위한 것이다.
이 책의 접근 방식
서신들을 어떻게 비교하고 대조할지를 고민하는 것은 이 책의 접
근 방식을 소개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나와 같은 저자는 줄타기하
듯이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데살로니가 서신이 바울 서신과 성경
의 다른 곳에서 읽은 내용 대부분을 분명히 긍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데살로니가서 연구는 어느 정도까지 권장해야 할까? 데살로니가
서가 공헌하는 독특한 차이점은 어느 정도 강조해야 할까? 세 번째
중간 선택안도 있다. 즉, 다른 곳에서 발견되는 개념을 보강하고 자
세히 설명하는 두 가지 역할을 모두 하는 요소들은 어느 정도로 강
조해야 할까? 나는 위의 첫 문단에 인용한 엘링워스의 말을 염두에
두면서 이 모든 선택안을 시도해 보고 있다! 나는 데살로니가서가
나머지 정경과 일관성이 있으므로 경청할 가치가 있음을 확신시킬 것이다. 나는 특정 개념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넓히는 요소들을 소
salonians, SGBC 13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4), 1 (강조는 필자 의 것).
데살로니가전후서 신학
개하겠다. 그리고 하나님이 성경 중에 이 두 권의 책에서만 우리에
게 선물하시는 독특한 공헌에도 물론 특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비교와 대조는 성경신학의 핵심이자 이 시리즈에서 강조하는
방법이며, 정경의 각 책이 고유한 목소리를 낼 수 있게 하는 데 탁 월하다.4)
이런 형태의 균형은 이런 비교와 대조를 위해 선택한 범위에서도
나타난다. 분명히 나는 데살로니가서가 바울 문헌( 전통적으로 바울과 연
관시키는 13편의 서신을 모두 포함 ) 과 어떻게 조화를 이루고 거기에 공헌
하는지를 보이겠다. 그리고 바울 서신 외의 다른 서신들, 즉 사도의 서신 뒤에 배치되고 소개되어
겪을 수 있는 다른 서신들
과의 연결고리를 그리겠다. 삼위일체 하나님과 그분의 계획에 대한
신약 성경의 나머지 가르침을 확인하려면 나머지 책들에 대해 간혹
언급할 필요가 있다. 나의 성경 색인의 인용 빈도에서 알 수 있듯이
이런 균형은 바울 서신을 넘어 신약 성경의 더 넓은 부분으로 비교
범위가 넓어질수록 그 수준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또한 이 색인에
는 구약 성경과의 상호작용이 거의 없는데, 이것은 실망스럽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4장에서는 데살로니가 서신의 저자와 독자가 하나님의 기록된 계시의 전부였던 것이 그들에게 낯설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로마서나 히브리서와 같은 다른 서신들과는 대 조적으로 구약 성경의 교리와 심상들은 서신의 형태로 데살로니가
4) 미리 정해진 조직신학적 범주는 “개별 정경의 독특한 형태를 균일화하고 그 역 동적 신학을 모호하게 만들 수 있다.” Richard Schultz, “Integrating Old Testament Theology and Exegesis,” in NIDOTTE 1:186.
선 교회 23
교회를 양육하는 방식에서 중요한 도구가 아니었다.
많은 훌륭한 연구가 그렇듯이 나도 두 편의 데살로니가 서신을
함께 다루는 것에 대해 열려 있다는 점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발신자와 수신자가 동일하고 몇 달 간격으로 작성된 두 서신을 종
합할 때, 주제와 강조점이 상당히 겹친다는 사실을 발견하더라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두 서신을 체계적으로 다루는 사례가 드물므로, 독자들이 성경 본
문을 꾸준히 읽으면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책이 조명하고 섬기는 것
을 목표로 하고 학자들의 통찰과 종합보다 더 권위가 있는 것은 다
름 아닌 성경 자체의 말씀이다. 마찬가지로, 여기서 주석서만큼 자
세하게 구절을 풀어 나갈 수 있는 호사를 누리는 것은 일부 구절에
한정된다.
내용에 대한 전망
우리가 앞으로 발견할 내용을 여기서 미리 살펴봄으로써 데살로
니가전후서의 주요 공헌을 강조할 수 있다. 이런 내용은 읽기 쉽게
범주별로 정리했지만, 이런 범주의 선택은 서신 자체의 강조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라고 믿는다.
데살로니가 서신은 그리스도인의 여정이 얼마나 길고 지속적인
성격이 있는지를 잘 보여 준다. 데살로니가서는 신자가 어떻게 처
음으로 구원의 믿음에 이르게 되었는지에 대해 말하고, 이 땅에서
살면서 인내하는 동안에 기대되는 행실에 대해 고찰하는 데 상당한
부분을 할애한다. 데살로니가서는 또한 삼위일체 하나님이 어떻게
데살로니가전후서 신학
다시 한번 이 세상에 직접 개입함으로써 세상의 현존재를 마무리하
실 것인지에 대한 바울의 가장 명백한 가르침 중 일부를 제시한다.
이런 단계들에는 통찰력 있는 신학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지만, 지
적 호기심을 자극하거나 교리 논쟁을 일으키거나 종말론적 추측을
부추기기 위해 제기된 것이 아니라 모든 단계에서 그리스도인이 목
회적 돌봄을 받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걸어가는 여
정의 모든 단계에 있는 신자는 자기의 진척 상황을 점검하고 다른
신자들이 인내하도록 격려할 것을 권유받는다.
데살로니가서는 바울과 관련이 있는 다른 서신들 못지않게 바울
사역팀의 사역과 강조점, 그들이 교회를 개척하고 양육하는 초기
단계에 대한 상세한 통찰을 많이 준다. 오늘날 관련 사역에 종사하
는 일꾼들은 모든 신자가 참여하는 사역의 위치를 포함해 어떤 요
소가 여전히 관련성이 있는지를 살펴볼 것을 권한다.
일상적인 신자, 교회 지도자, 학자는 모두 자신이 섬기기 위해 사
역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바울의 이해를 탐구하는 데 관심이
있다. 데살로니가서는 특히 주 예수 그리스도께 드리는 기도를 통
해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을 일관되고 놀라운 방식으로 표현한다.
놀라우면서도 안심이 되는 것은 데살로니가서의 이런 모든 공헌
이 다른 바울 서신의 내용과 일치하고 그 내용을 확장하며 더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한다는 사실을 관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 신
자의 삶의 여정이나 신앙의 성장 과정 같은 일부 주제는 이 짧은 서
신에 압축되어 있어 유익하다. 우리가 데살로니가서의 사역 주제와 특별히 관련될 수 있는 것은 데살로니가 교회가 주로 이방인 교인
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이방인” 논쟁을 통해 양육받았기 때문이다.
바울과 초대 교회의 교리와 실천의 발전을 추적하는 사람에게는 두
편의 데살로니가 서신이 신약 성경의 현존하는 최초의 책 중에 하
나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갈라디아서가 더 일찍 작성되었을 수도
있지만, 그렇더라도 우리 앞에는 불과 1-2년 후에 기록된 하나님의
새 언약 교회에 대한 그다음으로 가장 이른 시기의 기록이 있다.5)
이와 동시에, 우리는 바울과 그의 사역팀을 초보 신학자나 초보 저
술가로 감히 오판해서는 안 된다. 이 서신들은 단지 지금까지 남아
있는 서신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에 기록된 것일 뿐이지 그들이 상
당한 경험을 바탕으로 기록한 것이다. 더글러스 무가 지적하는 대
로, “바울이 처음으로 양피지에 붓을 대기까지 10년 반 동안의 연
구, 설교, 다른 신자들과의 교류가 있었다.”6)
저작자와 구조에 대한 가정
복음주의 주석가들은 두 편의 데살로니가 서신이 교회 설립 직후
에 기록되었다는 데 일반적으로 동의하며, 그 저작 시기를 AD
51년경으로 보고 있다. 일부 회의적인 학자는 두 번째 서신이 몇 년
5) 지난 수십 년간의 보수적인 주석들은 갈라디아서가 사도행전 15장의 사건 이전 에, 그러므로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설립하고 해당 서신을 기록하는 후속 선 교 여행을 하기 전에 기록되었다고 주장한다. 주석가들은 Richard N. Longenecker, Galatians, WBC 41 (Dallas: Word, 1990), lxxii-lxxxviii의 상세한 분석을 계속 칭송한다.
6) Douglas J. Moo, A Theology of Paul and His Letters: The Gift of the New Realm in Christ, BTNT (Grand Rapids, MI: Zondervan Academic, 2021, 『바울 신학』, 부흥과개혁사 역간, 2024), 9–10.
데살로니가전후서 신학
후에 기록된 위작일 수도 있다고 의문을 제기하지만, 나는 두 서신
이 너무 비슷해서 표절이 틀림없다는 핵심 주장 중 어느 것도 설득 력이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실명이 거론된 세 명의 공동 저자가 있다는 사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해석자들에게 공감한다( 교회에 초점을 맞추는 바울
의 다른 서신에도 대부분 여러 명의 공동 저자가 나오는데, 가장 자주 언급되는 공동
저자는 디모데이며 이곳 데살로니가서에서도 언급된다 ). 대부분의 주석가는 이
런 인물들이 단순히 바울의 교회 개척 사역의 동료여서 서신 작성
에 중요한 공헌을 거의 하지 않은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랜돌프 리
처즈는 서신들이 집단적으로 작성될 수 있었다는 점을 매력적이면
서도 설득력 있게 주장한다. 우리는 때때로 바울이 깃털 붓으로 휘
갈겨 쓰거나 서기관에게 받아쓰게 하는 단독 사도로 상상할 수도
있겠지만, 이 서신들을 “공동 집필진의 산물”로 생각하는 것도 전적
으로 타당하다.7) 두 편의 데살로니가 서신은 거의 전적으로 복수형
으로 말하는데, “우리”와 “우리에게”와 관련된 용어가 최소 148개
이상 사용되고 있으며, 바울은 사역팀의 권위 있는 지도자로서 단
5회만 단수형을 사용해 개입한다( 살전 2:18; 3:5; 5:27; 살후 2:5; 3:17 ). 8) 일
7) E. Randolph Richards, Paul and First-Century Letter Writing: Secretaries, Composition, and Collection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04), 32–36; 참고. 45–46, 103–108, 118–121 등. “공동 집필진”
이라는 표현은 이 시나리오를 싫어하지만, 여전히 집단 의견의 가능성을 허용하 는 벤 위더링턴 3세의 표현이다. Ben Witherington III, 1 and 2 Thessalonians: A Socio-Rhetorical Commentary (Grand Rapids, MI: Eerdmans, 2006), 47.
8) 아브라함 말허브는 이런 빈도에 주목하지만, 무수히 많은 복수형에 대해 다른 설
부 주석가는 “공동 집필진”을 지지하는 성향이 있지만, 편의성이나
전통 때문에 종종 “바울”로 약칭하는 방향으로 회귀한다.9) 나는 데
살로니가서의 언어를 의도적으로 포괄적인 것으로 받아들여 이런
편의성을 거부하고 세 기고자 모두에 대해 말하려고 노력한다. 이
렇게 하더라도 바울은 여전히 사역팀을 이끌고 서신의 최종 형식은
아니더라도 핵심 사항을 승인하는 역할을 한다. 이와 비슷하게, 데
살로니가 서신에서 실루아노와 디모데를 “사도”로 표현하는 데 아
무 거부감이 없는 것처럼, 나도 이들에 대해
사용한다( 참고. 살전 2:6/7 ). 10)
명을 찾는다. Abraham J. Malherbe, The Letters to the Thessalonians: A New Translation with Introduction and Commentary, AB 32B (New York: Doubleday, 2000), 86.
9) 더 강력한 지지자는 Gene L. Green, The Letters to the Thessalonians, PNTC (Grand Rapids, MI: Eerdmans, 2002), 56–59; Gordon D. Fee, The First and Second Letters to the Thessalonians, NICNT (Grand Rapids, MI: Eerdmans, 2009), 4, 13–14가 있다. 그보다 덜한 지지자는 F. F. Bruce, 1 & 2 Thessalonians, WBC 45 (Waco, TX: Word, 1982), 6, 11; Gary S. Shogren, 1 & 2 Thessalonians, ZECNT 13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2), 55, 243이 있다. 실루아노와 디모데를 “공동 저자”라기보다는 “공 동 발신자”로 보는 학자들도 여전히 어느 정도의 공헌을 인정하는 경우가 많다. 복수의 기고자에 대한 견해는 이전 세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예. Origen, Commentary on Matthew 14.1 (ca. AD 250), in ANF 9:495; John Calvin, 1 & 2 Thessalonians (ca. AD 1550), Crossway Classic Commentaries (Wheaton, IL: Crossway, 1999), 17 (on 1:1); E. H. Harrison, “‘I’ and ‘We’ in the Thessalonian Epistles,” The Expositor, 8th ser., vol. 1, no. 2 (1911): 149–159.
10) 예수께서 임명하신 사도의 범주는 누구나 알고 있으며, “사도”라는 용어가 공식 적인 직분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사역을 위해 보냄을 받은 사람들(예. 교사나 선 교사)을 지칭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이 알고 있다. 일부 신자와 학자는 교회가 설립된 후 하나님이 가장 좁고 가장 공식적인 직책을 더 이상 위임하지
데살로니가전후서 신학
우리는 유대인인 사도 사울이 자기의 회심 때문이 아니라 복음이
더 유대적인 영역에서 더 분명하게 로마적인 환경으로 진행하는 것
을 따라 사역하므로 자기의 로마식 이름인 바울을 선택한 방식을
잘 알고 있다( 행 13:7-9 ). 때로 이것과 비슷한 방식이 실루아노에게도
적용되는데, 데살로니가 서신에는 이 로마식 이름으로 알려져 있으
며( 데살로니가서; 고후 1:19; 벧전 5:12 ) 사도행전 전체에는 그의 다른 이름
인 실라로 알려져 있다.
학자들은 데살로니가서의 구조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의견이
일치한다. 데살로니가서를 구성하는 장들은 그림 1과 같이 더 작은
주제별 부분으로 세분할 수 있지만 도움이 되는 지점에서 나뉘어
있다. 이런 부분들은 때로는 더 세분되기도 하는데, 때에 따라서는
연속된 부분이 어떻게 더 큰 움직임으로 이어지는지에 주목하는 것
이 유용할 때도 있다.
않으셨는지를 궁금해한다. 그러나 대다수 사람은 “사도”라는 명칭이 널리 사용 되지 않더라도 교사 또는 선교사라는 더 넓은 의미가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은 인정한다. 따라서 오늘날에도 하나님이 여전히 많은 능력을 부 여하신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송축하면서도, 1세기 사도들의 모든 사역과 권위
를 모방하려는 기대는 조심해야 한다. 예로 다음을 보라. Clinton E. Arnold, Ephesians, ZECNT 10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0), 255–259; Paul W. Barnett, “Apostle,” DPL1 45–50; Cynthia Long Westfall, “Apostle,” DPL2 49–53; Andrew Wilson,“Apostle Apollos?,” JETS 56, no. 2 (2013): 325–335. 그러나 그런 논의는 이 책의 범위를 벗어난다.
또한 “1 Thess. 2:6/7”이라는 표기도 아쉽다. 긴 헬라어 문장(2:5-7a)은 일부 영 어 번역본(ESV, NASV, NIV)에서는 2:6에, 다른 번역본(CSB, NRSB)에서는 2:7에 “사도들”이 나타나도록 배열되어 있다.
데살로니가전서
데살로니가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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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데살로니가서의 주제별 부분
이해를 돕기 위해 이런 부분들에 대한 몇 가지 기초적인 설명을 제시한다. 내용의 목적과 배치에 대해서는 이어서 논의할 예정이므
로 설명은 내용에 초점을 맞춘다.
데살로니가전서
1:1-10 신자들과 그들의 회심에 대한 감사
2: 1-16 사도들의 사랑의 사역에 대한 회상
2:17-3:13 방문과 더 큰 성장을 위한 열망과 기도
4:1-12 거룩한 행실을 지속하기 위한 자세한 지침
4:13-18 예수의 재림 시 죽은 신자들에 대한 확신
5:1-11 시기를 알 수 없는 예수의 재림에 비추어 살아 가기
5:12-28 그리스도인의 행실에 대한 간결한 지침들
데살로니가후서
1:1-12 신자들과 그들의 인내에 대한 감사
2:1-12 최종 심판이 아직 이르지 않았다는 확신
2:13-17 추가 확신, 지침 및 기도
데살로니가전후서 신학
3:1-5 그렇지만 인내에 대한 추가 확신
3:6-18 게으르게 행하는 방해자들을 대하는 지침
관련 교회
그래서 우리는 설립자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교회에 보내 진 서신을 탐구하기 시작한다. 이 교회는 아직 젊지만, 그 교회를 개
척한 사람들은 신자들이 어떻게 인내하고 노련한 베테랑으로 성숙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지침을 간절히 제시하려 한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처해 있는 사회적 상황도 21세기의 많은 교회
와 놀랍도록 유사하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신앙을 약화하려는 노골
적이고 은밀한 유혹에 직면해 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주로 이방
인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가르침이 성경 전체의 개념을 인유하
더라도 친숙한 새 언약의 범주를 통한 교육이 필요하다. 구성원들
이 연약한 양심으로 고통을 겪기 때문이든 지도자가 현명한 수사법
을 사용하기 때문이든( 또는 둘 다 ) 간에, 이런 지침은 공격적인 대립
보다는 지속적으로 부드러운 권면의 형태로 전달된다. 데이비드 윌 리엄스는 다음과 같이 밝힌다.
이 서신들은 크고 압도적으로 이교적인 사회에 있는 작은
교회에 보낸 것인데, 이 교회는 그 사회의 규범에 따라야 한다는 끊임없는 압박에 시달리고 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이런 상황에 있는 데살로니가 신자들에게 공감할 수 있으며,
거룩함에 대한 바울의 지속적인 요청을 통해 순응에 대한 압
박을 극복하려면 안일함이 아닌 거룩하게 구별됨이 필요 하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11)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잘 성장하고 있는 교회를 칭찬하고 격려
하는 이 정경적 서신을 연구할 수 있게 되어 매우 기쁘다. 교인들은
불완전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여정에서 모든 단계를 통해 행하고 목
회할 때 본받을 수 있는 대체로 긍정적인 일련의 모범을 발견하는
것은 고무적이다.
11) David J. Williams, 1 and 2 Thessalonians, NIBCNT 12 (Peabody, MA: Hendrickson, 1992), 16
데살로니가전후서 신학
하나님께로 돌아선 당신
구원과 그리스도인의 여정의 시작
데살로니가서는 갓 입교한 신자들을 응원하는 데 전념한다. 이것
은 부분적으로 신자들의 시선을 여정의 결말에 고정함으로써 달성
되는데( 참고. 빌 3:12-14; 히 12:1-2 ), 이 전략은 나중에 살펴보겠다( 참고.
3장 ). 또한 이 서신들은 이미 이룬 확고한 출발을 반복적으로 언급함
으로써 여정을 완주할 수 있는 자신감을 북돋는다.
성경에 나오는 구원의 심상
성경은 그리스도인이 위험에서 구원받는 것을 묘사하기 위해 놀라울 정도로 다양한 비유를 제시하는데, 여기에는 노예 상태에서
속량되어 더 나은 주인을 섬기게 되는 것, 화해하거나 한 가족으로
입양되는 것, 법적으로 의롭게 되어 새로운 삶을 살게 되는 것, 다시
태어나거나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 어둠 속에서 걸려 넘어
지던 사람이 빛 가운데로 걷게 되는 것, 하늘의 시민권이나 유업을
받는 것, 하나님의 안전한 현존으로 나아가는 특권을 부여받는 것
등이 있다. 이런 심상들은 종종 개별적으로 연구되는데, 이런 심상
들을 맞추어 보면서 그 다양성을 보여 주는 자료가 점점 더 많아지
고 있는 현상을 목격하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1)
대다수 신자와 설교자는 자신이 좋아하는 한두 가지 구원의 본보
기를 마음에 품고 있으며 그것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 우리는 때때
로 그런 본보기의 범위가 얼마나 넓은지를 알지 못한다. 바울, 실루
아노, 디모데는 데살로니가서를 통해 이런 다양성 중 일부를 알려
준다.
물론 데살로니가서에서 직접 가져온 심상은 아니지만, 나는 이 책
을 경주보다 더 오래 걸리고 순례보다 더 일상적인 여정이라는 주
제를 중심으로 구성하기로 선택했다. 이 은유는 귀중한 신학적 요
소를 전면에 내세운다. 이 비유는 우리가 여정의 시작에 주목할 수
있게 해 주는데, 이런 시작은 때때로 구원에 대한 학계와 대중의 논
1) 좀 더 대중적인 수준의 설명은 다음을 보라. Victor Kuligin, The Language of Salvation: Discovering the Riches of What It Means to Be Saved (Bellingham, WA: Lexham, 2015). 더 학술적인 책은 다음을 보라. Brenda B. Colijn, Images of Salvation in the New Testament (Downers Grove, IL: IVP Academic, 2010). 다른 중요한 조사로는 Michael F. Bird, Evangelical Theology:A Biblical and Systematic Introduction, 2nd ed. (Grand Rapids, MI: Zondervan Academic, 2020), 603–636; Douglas J. Moo, A Theology of Paul and His Letters: The Gift of the New Realm in Christ, BTNT (Grand Rapids, MI: Zondervan Academic, 2021, 『바울 신학』, 부흥 과개혁사 역간, 2024), 459–507 (특히 469–506)이 있다.
데살로니가전후서 신학
의에서 실질적이거나 유일한 초점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여정이라
는 은유는 또한 목표나 종착점도 인식한다. 이 은유는 시작과 결말
사이에서 겪게 되는 곤란한 대적이나 힘든 상황에 맞서 인내하는
데 필요한 노력도 인정한다. 그리고 이 은유는 그 과정에서 어떻게
처신하며 참고 견뎌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또한 이 은유
는 대담하게 나아가는 모든 사람이 반드시 완주할 수 있는 것은 아
니라는 가능성을 제기한다. 이것은 철저하게 성경적인 은유로서, 운
동경기나 기타 경쟁적인 원정의 심상으로 보완할 수 있다.2)
데살로니가서에 나타난 구원의 심상
데살로니가서에 나오는 은유를 간략하게 정리하는 것은 매우 유
용하다. 이런 은유들을 골라내면 익숙한 용어를 너무 피상적으로
또는 너무 획일적으로 사용하는 잘못을 피할 수 있다.
구원
데살로니가서는 “구원” 또는 “구원받음”이라는 명백한 표현을 5회 사용하는데, 한 번은 영적인 “구출”에 대해 언급한다. 가장 명 확한 두 가지 예는 현대 기독교의 용법과 잘 조화된다.
2) 여행과 운동의 심상은 앞 각주에 인용된 대부분의 저작에서 의외로 잘 드러나지 않는다. 이런 심상을 더 일관성 있게 적용하는 작품의 예는 다음을 보라. Thomas R. Schreiner and Ardel B. Caneday, The Race Set before Us: A Biblical Theology of Perseverance and Assurance (Downers Grove, IL: IVP Academic, 2001).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심 이라(살전 5:9).
하나님이 너희를 첫 열매로 택하사(개역개정은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받게 하심이니(살후 2:13).
두 인용문은 모두 아래에서 더 자세히 설명할 추가적인 언어를
도입한다. 또한 삼위일체의 세 위격이 인간의 구원에 모두 참여하
신다는 점도 엿볼 수 있다. 이 인용문들의 문맥은 데살로니가서에
서 “구원”이 특히 하나님의 최후 진노로부터의 구제로 이해되는 방
식을 강조한다.
물론 그리스도인이 구원에 대한 더 넓은 심상에 오랫동안 의존해
왔음을 보여 주는 다른 용어를 찾아야 하는 것도 알고 있다.
전해지고 받아들여지는 메시지
너무 분명해 누구나 다 잘 알고 있을 수도 있지만, 데살로니가 서
신은 구원의 심상이 어떻게 말씀 속에 담겨 전달되는지를 가장 명
확하게 보여 주는 서신 가운데 하나다. 기독교 복음은 말하기와 듣
기 또는 쓰기와 읽기와 같은 일상적인 통로를 사용해 한 집단에서
다른 집단으로 전달되는 메시지다. 다음 예시들은 이 점을 분명히
보여 준다.
데살로니가전후서 신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