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비전 2026 추수감사절 감사노트
감사를 다시 만나다
월드비전 2026 추수감사절 감사노트
감사를 다시 만나다
감사 감사
4
감사챌린지 주제곡 기프티드 주제찬양 영상
6
감사챌린지 달력
7
감사챌린지 진행 방법
8
감사노트 콘텐츠 소개
10
감사메시지 묵상 프롤로그
17
1일차
24
2일차
30
3일차
36
4일차
42
5일차
48
6일차
감사메시지 묵상
예수님이라는 선물에 감사하기 감사메시지 묵상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심에 감사하기 감사메시지 묵상
세례 받으신 예수님께 감사하기 감사메시지 묵상
시험을 이기신 예수님께 감사하기 감사메시지 묵상
우리를 부르신 예수님께 감사하기 감사에세이
은혜가 빠지면, 정지입니다
57
1일차
64
2일차
70
3일차
76
4일차
82
5일차
88
6일차
감사메시지 묵상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예수님께 감사하기 감사메시지 묵상
헌신하신 예수님께 감사하기 감사메시지 묵상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께 감사하기 감사메시지 묵상
부활하셔서 우리를 부르신 예수님께 감사하기 감사메시지 묵상
헌신, 우리의 마땅한 감사 감사에세이
지금, 누구와 함께 걷고 있나요?
감사 내 갈급함
주제찬양영상 보기
내 갈급함 어느 것으로 채울 수 없네
내게로 나오라 가까이 가까이
내 갈급함 상한 나의 심령에
생수의 근원 되신 주께
내 갈급함 부르짖는 소리 들으소서
내게로 나오라 영원히 영원히
내 갈급함 주의 음성 들리네
목마름 전혀 없으리
내게로 나오라 영원히 영원히
내게로 나오라 가까이 가까이
목마름 전혀 없으리
생명의 근원 되신 주께
찬양의 고백처럼, 삶의 모든 순간에서 주님이 우리의 이유가 되심이 다시 감사가 되는 추수감사절이 되길 소망합니다.
전심으로 주님 손에 맡겨드리리
내가 믿는 분 예수
나의 삶 주님께
내가 속한 분 예수
주님 손이 나의 삶 붙드네
삶의 이유 되시네
나 주의 것 영원히
내 노래 되시네
내가 믿는 분 예수
전심으로
내가 속한 분 예수
경배하리 경배하리라
삶의 이유 되시네
경배하리 경배하리라
내 노래 되시네
[반복]
전심으로
내가 믿는 분 예수
주와 함께 걸어가리라
내가 속한 분 예수
모든 길을 주 신뢰해
삶의 이유 되시네
주 뜻 안에 나 살아가리
내 노래 되시네
주의 약속은 영원해
전심으로
5
감사
감사
1일차
2일차
3일차
감사메시지 이정규목사
감사메시지 이정규목사
감사메시지 이정규목사
마 1:1-16
눅 1:26-38
마 3:13-17
예수님이라는 선물에 감사하기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심에 감사하기
세례 받으신 예수님께 감사하기
4일차
5일차
6일차
감사메시지 이정규목사
감사메시지 이정규목사
감사에세이 정은지 집사
마 4:1-11
시험을 이기신 예수님께 감사하기
막 3:7-19
우리를 부르신 예수님께 감사하기
2일차
3일차
감사메시지 이정규목사
감사메시지 이정규목사 막 14:32-42
헌신하신 예수님께 감사하기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께 감사하기
4일차
5일차
6일차
감사메시지 이정규목사
감사메시지 이정규목사
감사에세이 김지희 사모
부활하셔서 우리를 부르신 예수님께 감사하기
헌신, 우리의 마땅한 감사
나누고 싶은 묵상이야기나 감사제목이 있다면 유튜브 댓글, 인스타그램 게시글, 월드비전 크로스 홈페이지에 남겨주세요.
요 19:30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예수님께 감사하기
막 14:1-11
나에게 주신 은혜와 오늘의 감사내용을 작성합니다.
은혜가 빠지면, 정지입니다
감사메시지 이정규목사
요 21:15-19
하루를 시작하기 전 감사노트, 유튜브에 올라온 콘텐츠와 함께 묵상을 시작합니다. (11.2~11.14)
에세이
1일차
마 7:13-23
감사노트에 있는 QR코드를 스캔해 유튜브 구독과 알림 설정을 합니다.
에세이
지금, 누구와 함께 걷고 있나요?
SNS 감사나눔, 이벤트, 후원참여에 대한 정보는 '월드비전 크로스' SNS나 홈페이지에서 확인 가능합니다.
감사를 다시 만나 감사 시
감사
이번 추수감사절, 나는 어떤 마음으로 이 여정을 시작하고 있나요?
말씀을 따라, 감사의 이유를 다시 발견하다
주님을 바라보며, 감사의 이유를 다시 만나다
지금 내 삶에서 감사하기 어려운 순간, 이미 감사하게 느껴지는 순간을
예수님의 삶과 말씀을 따라 걸으며
기프티드와 함께 다시 부르는 찬양의
감사하기 어려운 순간에도 우리에게
고백을 따라, 우리의 삶을 주님께
이미 주어진 은혜와 감사의 이유를
맡기고 그분을 다시 바라봅니다.
다시 발견하는 묵상 메시지를
찬양 속에서 우리가 감사할 수 있는
전합니다.
이유를 새롭게 발견합니다.
이정규목사
기프티드
자유롭게 적어보세요. 그리고 이번 여정을 통해 내 마음이 어떻게 달라지면 좋을지 함께 기록해보세요. · 요즘 내 마음을 가장 많이 차지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요?
시광교회 담임목사
· 지금 감사하기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무엇인가요?
감사 우리의 일상에서 더 가깝게 만나는 감사 이야기
거창한 순간이 아닌 우리의 일상 속에서의 감사의 순간을 이야기합니다. 솔직하고 따뜻한 글을 통해 나의 삶 속 감사도 함께 돌아봅니다. 김지희 사모
정은지 집사
신성감리교회 사모
정많은정집사
· 이번 여정을 통해 다시 발견하고 싶은 감사는 무엇인가요?
감사 시
감사
몇 년 전, 오랜 기간 동안 신앙을 떠나 있다가 다시 시광교회에서 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롬 7:25
앙생활을 하신 분과 대화를 나눌 일이 있었습니다. 그분의 인생에 대 해 여러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분이 가볍게 “내일 설교 주제는 무엇 인가요?”라고 물으셨지요(토요일이었거든요). 그래서 별 생각 없이 “감사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그분이 이렇게 반응하시더 라고요. “감사하라는 말은 제게 폭력처럼 느껴져요.” ‘폭력’이라는 단어와 ‘감사’라는 단어는 너무 안 어울리는 단어라서 적 잖이 놀랐습니다. 그래서 되물었지요. 왜 그렇게 생각하시냐고요. 자 세히 들어보니 예전에 다녔던 교회는 감사라는 이름으로 여러 헌신 을 강요했고, 따라서 ‘감사’라는 단어만 들어도 화가 났다는 것이지 요.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감사에 대해 이러한 오해를 가지고 있습니 다. 하기싫어도 억지로 해야 하는 무언가로 보는 것이지요. 하지만 감 사는 우리가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마땅한 의무이기 이전에, 하나님 게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에 대한 반응입니다. 여기에는 복음이 전제 되어 있지요. 감사를 이해하기 위해서, 저는 복음이 무엇인지를 먼저 설명해 보려 고 합니다. 복음은 우리가 하나님께 해야 하는 어떤 일이 아닙니다. 그 것은 윤리입니다. 오히려 복음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그 리고 지금도 하고 계신 일에 대한 소식입니다. 그리고 필연적으로, 이 복음은 우리로 하여금 감사를 불러일으키고 요구합니다. 예를 들어볼 까요? 대체로 그리스도인들은 식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그 본질은 감
감사
감사 시
사지요. 그리고 그 감사를 하기 위한 전제로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
니다.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
님께서 우리에게 이 음식을 주셨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어떤 그리스
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요 6:11) 여기 ‘축사
도인이 “생각해 보니 나는 내가 밥을 먹는 것이 내 힘과 능력으로 번
하신’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감사하다’는 말입니다(εὐχαριστήσας).
돈으로 내가 가지는 권리라고 여겼어. 하지만 내가 일을 할 수 있는 능
이 말씀을 묵상해 봅시다. 예수님이 식기도를 하실 때 감사하다고 하
력과 은사를 주신 것도 하나님이고, 번 돈으로 밥을 먹을 때 수많은 손
신 것을 말이지요.
길들이 있었는데, 그 모든 것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네.”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그는 이렇게 말할 겁니다. “따라서 당연히
그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이 원래 있던 자리는 하늘 보좌의 영광
그분께 감사를 표현하고 기쁨으로 이 식사를 하는 것이 옳아.” 이는 복
이었지요. 그분은 모든 천사들과 성도들에게 둘러싸여 찬양과 흠모를
음에 대한 반응이지요.
받으셨습니다. 무엇보다, 그분은 성부와 성령 하나님과 더불어 사랑 과 기쁨을 나누셨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죄인을 대속하시기 위해 이
모든 감사는 복음에 대한 반응이어야 합니다. 따라서 복음을 잘 모르
땅으로 오셨고(막 10:45), 그분이 이 땅에 오실 때 받으신 것은 영접
면 감사도 죽습니다. 우리의 입술과 삶에서 감사가 사라졌다면, 감사
과 환영이 아니라 거절과 적대감이었습니다. 보좌에 계신 분이 말구
의 회복은 복음의 재발견에서 시작되지요. 우리는 다양한 방식으로
유로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께서 목수의 아들로 오셨습니
감사를 훈련해야 하고 이는 대단히 유익하지만, 복음의 회복 없는 감
다. 기쁨과 환희의 찬송 소리 가운데 둘러 싸여 계셨던 분이 회의와 의
사는 또 다른 불평을 낳기 마련입니다.
심과 미움 안에서 사역을 하셨어야 했습니다. 제자들은 전적으로 그 분을 따르지 않았고, 예수님은 그러한 제자들에게 배신당하셨지요.
그래서 이번 2026년 감사챌린지에서는, 예수님의 행적 10개 정도를 생각하며 묵상해 보려고 합니다. 왜 복음이 중요하다면서 갑자기 예
그 가운데 그분은 자주 굶주리시고(막 11:12) 피곤해하셨습니다(막
수님 이야기냐고요? 하나님이신 동시에 사람이신 예수님의 행적을
4:38). 그 때 예수님께 주어진 푸석한 빵과 비린내 나는 물고기는 그
깊이 생각해 볼 때 복음을 가장 선명하게 알 수 있거든요. 옛 종교개혁
다지 좋은 음식이 아니었겠지요. 하늘의 아름다운 영광에 비하면, 이
자 장 칼뱅은, 예수님을 가리켜 “복음으로 옷 입으신 그리스도”라고
초라한 음식이 뭐가 감사거리였겠습니까? 우리가 비슷한 처지였다면
아름답게 표현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빵과 물고기를 보며 하나님을 원망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분의 삶에서 제일 놀라운 것 중 하나는 그분의 감사입니다. 예를 들
하지만 그분은 감사하셨습니다. 온전한 하나님이시지만, 연약한 육
어, 예수님은 오병이어 사건 직전에 떡을 가지시며 이렇게 말씀하십
체를 가지고 계신 사람으로서 굶주림을 채우고 삶을 유지시켜 나갈
감사 시
수 있는 음식을 보시며 자신의 아버지께 감사하셨습니다. 저 같으면 “성부여. 제가 인간을 구원하는 이 위대한 사명을 행하러 이 시궁창같 은 곳까지 왔는데 대우가 이 수준입니까? 파인다이닝 소고기 스테이 크를 주십시오!”라고 말했을지도요. 하지만 그분은 감사하셨습니다. 이 신비한 분을 바라봅시다. 이분이 결국 배신과 십자가 앞에서의 마 지막 만찬장 가운데서도 감사하셨음을 기억합시다. “이에 잔을 받으 사 감사 기도 하시고”(눅 22:17) 그리고 감사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봅시다. 우리의 감사챌린지 기간동안, 우리의 마음이 복음의 예수님 을 따라 충만해지기를 소원합니다.
감사
Week 1
Day MON
감사메시지 낭독 듣기
감사메시지 묵상
예수님이라는 선물에 감사하기
감사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심에 감사하기 세례 받으신 예수님께 감사하기 시험을 이기신 예수님께 감사하기 우리를 부르신 예수님께 감사하기
이정규목사
은혜가 빠지면, 정지입니다
마 1:1-16
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2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 3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4 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5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6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7 솔로몬은 르호보암을 낳고 르호보암은 아비야를 낳고 아비야는 아사를 낳고 8 아사는 여호사밧을 낳고 여호사밧은 요람을 낳고 요람은 웃시야를 낳고 9 웃시야는 요담을 낳고 요담은 아하스를 낳고 아하스는 히스기야를 낳고 10 히스기야는 므낫세를 낳고 므낫세는 아몬을 낳고 아몬은 요시야를 낳고 11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에 요시야는 여고냐와 그의 형제들을 낳으니라 12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에 여고냐는 스알디엘을 낳고 스알디엘은 스룹바벨을 낳고 13 스룹바벨은 아비훗을 낳고 아비훗은 엘리아김을 낳고 엘리아김은 아소르를 낳고 14 아소르는 사독을 낳고 사독은 아킴을 낳고 아킴은 엘리웃을 낳고 15 엘리웃은 엘르아살을 낳고 엘르아살은 맛단을 낳고 맛단은 야곱을 낳고 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감사 시
감사
왜 신약성경은 족보로 시작하는 걸까요? 처음부터 독자들을 지루하
그러한 의미에서 이 족보를 보면, 참으로 이상합니다. 예수님의 족보
게 할 의도는 아닐 테고 말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 부분을 건
는 오히려 (당시 사람들이 보기에) 수치스러운 사람들을 노골적으로
너뛰고 읽기도 합니다. 하지만 솜씨 좋은 저술가인 마태는 분명한 목
드러냅니다. 첫째, 이 족보에는 여성이 다섯 명이나 등재되어 있습니
표를 가지고 본문을 썼습니다. ‘마태복음’이라는 이름에 걸맞게도(물
다. 다말(3절), 라합(5절), 룻(5절), 밧세바(우리야의 아내, 6절), 그
론 ‘마태복음’이라는 제목은 후대의 사람들이 지었지만), 이 족보는 복
리고 마리아(16절)는 여성이었고, 당시에 예수님의 족보를 제외하고
음을 말해줍니다. 프레더릭 데일 브루너라는 주석가는 이 족보를 가
여자를 언급하는 문서는 없었습니다. 이는 당대에는 수치였습니다.
리켜 “마태는 재미없는 계보를 복음 전도로, 하나의 출생 이야기를 하
게다가 이 여성들은 마리아를 제외하고 모두 이방인이었지요. 다말과
나님 사람들의 이름들을 수록한 사전으로 만든다.”라고 말해주지요.
라합은 가나안 사람이었고, 게다가 라합은 기생이었습니다. 밧세바는
그렇다면, 족보가 어떻게 기쁜 소식이라는 것일까요?
헷 족속 사람이었고, 룻은 모압 사람이었습니다.
이걸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당대에 족보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알아
둘째로, 이 족보에는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3
야 합니다. 현대 문화에서는 자신이 누구인지 밝히기 위해서 ‘자신이
절에서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았다고 말하지요. 사실
한 일’을 소개하거나 말합니다. 모든 이력서는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다말은 유다의 며느리였고(!), 유다가 다말을 부당하게 대하자, 다말
정확히는 무엇을 성취했는지를 말하지요. 고대에는 달랐습니다. 고대
이 복수로 창녀로 변장해 유다와 동침하여 아들을 낳게 하지요. 그냥
사람들은 ‘자신의 핏줄’이 무엇인지를 말하며 자신을 소개했지요. 즉,
유다 지파 출신이니 “유다는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라고 하면 되는
본문은 족보인 동시에 이력서였습니다.
걸 꼭 다말을 집어넣어서 그 악한 사건을 생각나게 만듭니다. 이후 르 호보암(7절), 아비야, 요람(8절), 아하스(9절)는 악한 왕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력서를 위조하듯 족보를 위조하는 일도 흔했습니다. 헤롯 대제는 공식 족보에서 많은 이름을 삭제했습니다. 그는 절반만 유대
가장 충격적인 표현은 다윗에 관한 것입니다. 당시에 다윗의 자손이
인이고 절반은 에돔인이었습니다. 유대를 통치하는 왕이 순수 혈통이
라면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족보를 가진 사람일 것입니다. 하지만 6
아님을 사람들이 알면 싫어할 테니, 족보를 위조한 것이지요. 즉, 족보
절을 보십시오.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았다고 말
겸 이력서의 취지는 자신이 수준 높은 명문가 출신임을 내세워 주변
합니다! 그냥 밧세바라고 적어 놓았으면 구약 역사를 모르는 사람들
사람들의 환심을 사는 데 있었습니다. 사실 이러한 일은 지금도 아예
은 “다윗의 아내인가보다….” 했겠지요. 그런데 굳이 ‘우리야의 아내’
없지 않지요. 그만큼 자신의 가문에 수치스러운 일을 한 사람이 있으
라고 못박아 놓음으로 다윗이 간음을 했으며, 우리야를 죽여버렸다는
면 숨기게 되기 마련입니다.
것을 밝힙니다.
감사 시
감사
그래서 신약학자 클린턴 아널드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족보의 진정
이것이 우리의 감사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요? 우리는 문제가 있는 사
성과 (당혹스러운) 비현실성은 분명히 마태의 독자들을 깜짝 놀라게
람, 사회적으로 지탄받는 사람과 거리를 두거나 손절하려고 합니다.
했을 것이다. 예수님의 조상들은 이런저런 약점들을 가진 평범한 사
그들과 동일시되는 것을 싫어하지요. 하지만 우리 구주께서는 죄인들
람들이었다. 하나님은 그런 평범한 사람들을 통해 구속의 역사를 이
과 기꺼이 자신을 동일시하셨습니다. 족보는 가족들의 서사를 담습니
끌어 오셨다. 예수님의 족보에는 ‘의’에 관한 어떤 패턴도 등장하지 않
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이 내 가족이다.”
는다. 간통한 사람들, 매춘부들과 이방인들이 있을 따름이다. 악한 왕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르호보암은 악한 왕 아비야의 아버지였으며, 아비야는 선한 왕 아사 의 아버지였다. 아사는 선한 왕 여호사밧의 아버지였으며(8절), 그는 악한 왕 요람의 아버지였다. 하나님은 이렇게 모든 세대의 선과 악을 관통하시면서 그분의 목적을 이루어 가신다. 마태는, 하나님께서 비 록 소외되거나 멸시당하는 그 누구라도 사용하시고 그분의 계획을 이 루어 가시는 분이심을 보여준다. 예수께서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사 람들은 바로 이런 부류의 사람들인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줍니까? 이력서 안에 나쁜 이력이 잔뜩 있는 셈입 니다. 지금으로 치면, F 맞은 것과 정학 맞은 것, 토익 성적 900점 맞 은 것뿐 아니라 500점 맞은 것까지 이력서에 넣은 셈이지요. 그리고 이것이 이 족보의 핵심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지금 이렇게 외치고 계신 것이지요. “나는 히스기야와 요시야(착한 왕) 같은 사람들의 그 리스도일 뿐 아니라 므낫세와 아몬(나쁜 놈들) 같은 자들의 그리스도 이다! 나는 다윗 왕의 그리스도이긴 하지만, 그조차도 악한 면이 있는 왕이었다. 즉, 나는 죄인들의 구주다.” 이 구주께로 가십시오. 오늘도 이 구주를 신뢰하며, 이 구주 앞에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사랑하며, 염려를 내어놓으십시오. 이제 왕의 사역이 시작되었으며, 그 왕은 죄 인들을 부르시러 오신 왕입니다!
감사 시
세상은 끊임없이 완벽한 이력과 성취를 요구하지만, 복음은 죄인들의 수치스러운 족보 속으로 걸어오신 예수님을 선포합니다. 내 안에는 여전히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나의 공로와 의로움을 증명하려는 태도가 남아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죄인들과 자신을 기꺼이 동일시하셨는데, 나는 교회 안팎에서 연약하거나 흠이 있는 지체들을 바라볼 때 거리를 두거나 손절하려 하지는 않습니까?
Week 1
감사메시지 낭독 듣기
Day TUE
감사
감사메시지 묵상
누가복음 1장을 펼치면 천사 가브리엘이 갈릴리 나사렛의 한 처녀 마리아를 찾아와 인사를 건네는 경이로운 장면이 등장합니다. 천사 는 28절에서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
감사
시도다”라고 선언하고, 이어 30절에서도 “마리아여 무서워하지 말 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라고 거듭 말씀합니다. 여기서 ‘은혜’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카리스(χάρις)’입니다. 이 단어는 아 무런 대가 없이 거저 주어지는 ‘선물’을 뜻하지요. 그런 의미에서 인
이정규목사
류 역사상 최초로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은 인물은 바로 마리아였습
눅 1:26-38
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을 자신의 태중에 모시게 된 사
26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Incarnation)’이야말로 인간이 받을 수 있는 가장 위대하고 궁극적
27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에게 이르니 그 처녀의 이름은
인 선물입니다. 그렇다면, 성육신은 어떤 의미에서 우리에게 선물이
마리아라 28 그에게 들어가 이르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하니 29 처녀가 그 말을 듣고 놀라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가 생각하매 30 천사가 이르되 마리아여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 31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32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건, 즉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 삶 한가운데로 찾아오신 ‘성육신
되는 걸까요? 첫 번째로, 그 선물은 ‘소통’입니다. 인간관계에서 의사소통은 물리적· 심리적 거리가 멀어질수록 답답함과 오해를 낳기 마련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편리한 메신저나 SNS, 전화로 매일 소통하지만, 거리가 멀어 진 소통은 결코 얼굴을 마주 대하는 만남의 깊이를 따라가지 못합니
33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다. 장문의 카카오톡 메시지를 주고받는 것보다도, 싸우더라도 직접
34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눈을 맞추고, 따뜻한 밥 한 끼를 함께 먹으며 대화할 때 비로소 진정한
35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 36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임신하지 못한다고 알려진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37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38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38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마음이 전달되는 법이지요.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께 반역하여 그분과 의 온전한 관계와 소통이 완전히 단절되었다고 선언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저 멀리 하늘 보좌에 앉아 손쉬운 방식이나 몇 마디의 메시지로 우리를 대하지 않으셨습니다. 가장 높으신 창조주 하나님께 서 죄인을 향해 직접 몸을 입고 인간의 시간과 공간 속으로 걸어 들어
감사 시
감사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카카오톡을 하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을 제대로 가누지 못할 정도로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하셨습니다 (히 5:7). 주님께서 그토록 처절하게 우셨던 이유는, 선물을 받을 자
두 번째로, 그 선물은 ‘공감’입니다. 고통과 질병, 절망의 한복판을 지
격이 전혀 없는 ‘나쁜 아이’ 같은 우리들에게 값없는 구원의 선물을 안
나가는 이에게 진정한 위로는 단순한 ‘해결책의 제시’나 논리적인 설
겨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자기 의로움으로 설 수 없는 죄인을 구원하
명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백혈병이나 희귀병 환우 커뮤니티를 들여다
시기 위해 당신의 목숨을 쏟아부으신 분, 그분이 바로 성탄의 참된 주
보면 무수한 정보 너머에 말로 다할 수 없는 눈물이 서려 있습니다. 그
인이십니다.
곳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가장 깊이 어루만지는 것은 “나도 당신과 똑 같은 고통을 통과했습니다. 당신이 겪는 그 아픔의 무게를 내가 압니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선물을 어떻게 받아 누릴까요? 마리아의 반
다.”라는 이심전심의 진정한 공감입니다. 이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응을 보며 우리는 일종의 단계를 봅니다. 첫째는 ‘깊이 생각하기’입니
우리에게 하신 가장 위대한 일이지요. 그분은 직업을 가진 사람의 고
다. 29절은 마리아가 “그 말을 듣고 놀라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가 생
통을 아십니다. 그분도 목수라는 직업을 가져보셨으니까요. 그분은
각”했다고 말해줍니다. 여기서 ‘생각’했다고 번역된 단어는 그리스어
육체적 고통을 아십니다. 육체의 삶을 살고 십자가를 지셨으니까요. 그분은 인간이 겪는 배고픔과 피로, 사회적 냉대와 외로움, 억울함과
로 ‘감사(鑑査)를 실시하다’라는 의미입니다. 회계감사나 사무감사 같 은 것 말이지요. 마리아는 아직 십 대였지만 처음 들은 것을 바로 받
육체적 고통, 그리고 가장 비참한 죽음의 고통까지 친히 겪으셨습니
아들이고 수용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숙고하고 의심하며 두려워했
다. 거룩 그 자체이신 분이 우리의 일상을 사셨기에, 그분은 우리의 모
지요. 이후 아기를 잉태할 것이라는 메시지를 듣고도 마리아가 했던
든 연약함에 온전히 공감하실 수 있는 유일한 주님이십니다.
반응은 의심이었습니다. 34절에서 마리아는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 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라고 대답합니다. 고대인이라고 모든 신
세 번째 선물은 ‘조건 없는 사랑’입니다. 세상의 문화는 성탄절의 주
비적이고 기적적인 일들을 비판 없이 믿었던 것이 아닙니다. 당연히
인을 산타클로스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산타는 겉보기에 누가 착한
의심하고 이해하지 못했지요. 마찬가지로 기적의 주인공인 마리아 본
지 나쁜지 다 꿰뚫어 보는 전지함과 하룻밤 사이에 온 세상을 누비는
인도 기적이 일어날 것을 믿지 못합니다. 참된 믿음은 인간이 스스로
무소부재함을 지닌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산타는 오직 “울지 않고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기적이지
착하게 산 아이”에게만 선물을 주는 지극히 조건적이고 율법적인 존
요(엡 2:8).
재입니다. 세상의 논리는 끊임없이 자격을 요구하며, 실수하고 사고 치는 연약한 인간을 배제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예수 그리스도는 전
둘째는 수용이었습니다. 마리아는 천사에게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
혀 다릅니다. 주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를 앞에 두고 몸
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34절)라고 물었습니다. 메커니즘과 과
감사 시
정(Process)을 물은 것입니다. 그러나 천사는 구체적인 생물학적 설 명 대신,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37 절)라며 하나님의 절대적 전능하심을 선포합니다. 우리는 삶의 위기
감사 시
우리는 종종 하나님께 믿음을 드리기 전에 구체적인 과정 (Process)과 해결 방법을 먼저 요구합니다.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는 말씀 앞에 내가 먼저 내려놓아야 할 불신과 계산은 무엇입니까?
와 고난을 만날 때마다 하나님께 구체적인 해결 프로세스를 요구합니 다. “주가가 다시 반등할지, 새로운 의학 기술이 나를 고칠지, 어떤 조 력자가 나를 도와줄지” 그 방법을 먼저 보여달라고 호소합니다. 그러 나 성경의 일관된 응답은 프로세스의 공개가 아니라, “하나님이 전능 하시며, 그분이 너를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언약적 신실하심을 바라 보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마리아는 말하지요.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 1:38) 참된 순종은 모든 전개 과정을 다 이해해서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10 년 차 프로그래머가 갓 입문한 초보자에게 조언을 줄 때 초보자가 모 든 원리를 다 이해하지 못해도 전문가의 지도를 신뢰하며 따르듯, 유 한한 인간은 무한하신 하나님과의 지적·존재적 격차를 겸손히 인정해 야 합니다. 이것이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는 방법이며, 인간이 감사를 표현하는 방법입니다. 함께 감사를 표현합시다!
‘착한 아이에게만 선물을 주는 산타’와 같은 율법적 신앙관에서 벗어나, 겟세마네의 눈물로 값없이 주신 ‘성탄의 참된 선물 (카리스)’을 누리는 삶은 어떤 모습일까요?
Week 1
감사메시지 낭독 듣기
Day WED
감사
감사메시지 묵상
세례의 기원은 무엇일까요? 사실 구약성경에는 세례가 전혀 등장하 지 않습니다. 그런데 유대교로 개종하는 이방인들이 세례를 받는 의 식이 역사적으로는 신구약의 중간기에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방
감사
인이 유대교에 들어와 완전한 개종자로 인정되려면 그는 신앙고백 (유대교의 율법을 받아들임)을 하고, 할례를 받아야 했고 이방인의 부 정을 씻기 위해서 정결 의식인 세례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니까 세 례는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들이 받는 의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이 유대인들에게 세례를 받게 했으니, 이것은 매우 도발적인 메 시지를 전달하는 행위였습니다. "너희도 태생적 유대인이기는 하지 만 영적으로 하나님의 눈앞에서는 너희가 불결하게 여기는 이방인 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선포였습니다. 그리고 많은 유대인들이 여 기에 호응하여 세례를 받으러 나오는 일은 놀라운 기적이었지요. 그 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이 요한에게 이 세례를 받으러 나오신 것입니 다(3:13). 당연히 요한은 놀랄 수밖에 없습니다. 거룩하신 예수님을 알아본 선
마 3:13-17
지자 요한은 황급히 예수님을 말리며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 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3:14)라고 말합니다. 그런
13 이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부터 요단 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시니 14 요한이 말려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15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니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17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데 예수님께서는 놀랍게도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 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15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무 슨 의미일까요?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을 의롭다 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성취하셔야 하지요. 그것을 성취하시기 위해서는 자기 백성들의 대표가 되어 그들의 죄를 지시고 죽으셔야 했고, 따라서 자기 백성들과 동일시되어야 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 은 죄인이 아니시지만, 마치 죄인처럼 취급받는 세례를 받으신 것입
감사 시
감사
니다. 여기서 우리가 받는 세례와 예수님이 받으신 세례의 차이를 알
일시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성품이 나쁘고 인기가 없는 사람과 자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죄인이기에 죄를 씻고 깨끗해진다는 의
을 동일시하려 하지 않습니다. 내가 생각할 때 나보다 못생긴 것 같은
미에서 세례를 받지만, 예수님은 죄를 씻기시는 분으로서 우리와 똑
사람과 나를 닮았다고 할 때, 우리는 슬쩍 기분나빠 합니다. 제게도 이
같은 취급을 받고 우리의 대표가 되시기 위해, 우리의 자리에 서시기
런 일이 있었습니다. 제가 섬기는 교회의 청년을 만나기 위해 어느 광
위해 세례를 받으시는 것입니다. 이 세례의 의식으로 인해, 예수님은
장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큰 TV를 보고 있었지
우리의 언약적 대표가 되십니다!
요. 십수명의 사람들이 누군가를 기다리며 TV를 보고 있었고, 마침 나 오는 뉴스에서는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킨 한 목사의 일을 폭로하는
여기서 갑자기 삼위일체가 등장하십니다. 3:16-17은 성경에서 삼위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멍하니 그걸 바라보고 있는데 멀리서 제가 기
일체가 처음으로 함께 일하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이신 동시
다리던 그 청년이 손을 흔들며 반갑게, 그것도 아주 큰 소리로 이렇게
에 하나님으로서 자기 백성들의 대표가 되셨고, 비둘기처럼 화평하
외쳤습니다. “목사님!! 저 왔어요~!”
게 하시는 영이신 성령님은 그 위에 임하셔서 함께 하시며, 하늘에서 아버지는 그리스도를 기뻐하시며 그분의 아들이라고 확증하십니다.
거기 모여 있던 모든 사람은 저를 쳐다보았고, 저는 얼굴이 빨개졌습
여기서 우리는 경이로운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요한이 말했듯, 예수님
니다. 정말 너무 싫었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싶었습니다. “제가 목사
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성령과 불로”(3:11) 세례를 베푸시는 분이요,
긴 하지만, 저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라구욧!” 물론 그렇게 할 수 없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 버리시는 분
고, 저는 줄행랑을 쳤습니다! 그 청년은 얼이 빠져 있었지요. 그리고
이십니다(3:10). 그런데 그러한 분이 한 죄인처럼 취급받으시며 세
이후에 우리교회 청년들에게는 밖에서 저를 만나면 부장님이라고 부
례를 받으시다니! 그리고 그것을 보며 삼위 하나님의 모든 위격이 함
르라고 일러두었지요.
께 기뻐하시다니! 이것은 세례 요한이 상상도 하지 못했던 방식이었 을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메시아가 와서 군대를 모으고 로마 제국을
왜 저는 도망쳤을까요? 그 목사와 제가 동일시되는 것이 싫었기 때문
쑥대밭으로 만든 후 팔레스타인에 지상낙원을 세울 왕이 될 줄로 알
입니다! 저는 그런 류의 목사와 한통속으로 보이고 싶지 않았습니다.
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데 아주 놀라운 겸손의 왕이 오셔서 자기
저는 더 나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러나, 우리 구주께서는
를 낮추어 자기 백성들과 자신을 동일시하십니다. 이 왕은 결국 그 백
저와 자신을 동일시하셨습니다. 그분은 완전히 의로운 분이시지만,
성들을 위해 죽을 것이고, 부활할 것이며, 승천하여 통치할 것입니다!
최악의 죄인인 저와 같은 취급을 받으셨습니다. 제가 마땅히 받아야 하는 진노와 저주를 받으시되, 비난과 욕과 멸시를 받으셨습니다. 죄
동일시는 끔찍한 일입니다. 우리는 우리보다 못한 사람과 우리를 동
가 없는데도 죄인처럼 취급받으셨습니다. 그분은 살인자요, 강간범이
감사 시
요, 사기꾼이고 파렴치한이며 최악의 독재자처럼 취급받으셨습니다. 왜요? 죄인들과 자신을 연합시키기 위해서요!
감사 시
사람들은 누구나 나보다 못한 사람과 엮이기를 싫어하고 스스로를 높이려 합니다. 살인자, 사기꾼과 같은 최악의 죄인처럼 취급받는 것까지 마다하지 않으신 주님의 겸손 앞에, 내가 지키려는 자존심은 무엇입니까?
세상의 모든 사람이 나를 버려도, 그분은 나와 함께하십니다. 버리지 않으십니다. 이러한 그분을 바라본다면, 어찌 감사가 터져나오지 않 을 수 있나요? 그분을 생각하며, 우리도 이웃에게 그분이 하신 일들을 함께 행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를 절대 버리지 않으시고 끝까지 나와 함께하시는 주님의 연합을 묵상할 때, 내가 속한 공동체에서 품기 힘든 이웃과 어떻게 함께할 수 있을까요?
Week 1
감사메시지 낭독 듣기
Day THU
시
감사
감사메시지 묵상
시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시고 우리의 대표가 되셨습니다. 자기 백성들 의 대표로써, 옛적 대표가 실패했던 일을 성취하러 광야로 가십니다 (4:1-2). 바로 마귀에게 시험을 받는 일이었지요. 옛적. 모든 인간의
감사 이정규목사
대표였던 아담은 뱀(마귀가 그 안에 있는)에게 시험을 받습니다. 여기 서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예수님이 광야로 가서 금식하신 것은 “성령에게 이끌리어” 된 것이라는 점입니다. 즉, 예수님은 성령께서 시키셔서 광야로 가신 것이지요. 그래서 마가복음은 “성령이 곧 예수 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막 1:12)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작정하 시고 금식기도를 가신 것이 아니고, 성령님이 시키셔서 예수님은 광
마 4:1-11
야로 끌려가신 것이지요. 마귀는 유혹합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
1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2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3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4:3) 무슨 말입니까? “왜 하나님이 너를 이 렇게 굶주리게 하는가? 그분은 선하지 않은 분 아닌가? 너를 이렇게 광야에서 굶주리게 만들다니, 그분은 네게 선하지 않다. 너도 능력이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니, 네가 만들어 먹어라. 그 정도는 해도 되지 않 느냐?” 이는 마귀가 옛적 아담에게 한 시험과도 같습니다. 그는 “하나
5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6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창 3:1)면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게 만들었지요. 하지만 예수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님은 신명기 8:3을 인용하시면서 마귀를 물리치십니다. “사람이 떡으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7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8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9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10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11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4:4) 이는 이런 대답이었지요. “아니다! 내 아버 지는 선하시다. 나는 속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떡으로만 사는 존재가 아니라, 말씀으로 사는 존재라고 하셨다. 내가 하나님의 뜻에 이끌려 굶주리고 있지만, 그 뜻 자체가 내게는 양식이니 나는 굶주려
감사 시
시
감사
도 배고프지 않다!” 이렇게 예수님은 마귀의 유혹에 승리하십니다. 아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4:8-9)고 말합니다. 마귀는 천
담과는 달리 말이지요.
하만국과 그 영광이 자기 것이라 주장하며(실제로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 이것을 주겠다고 약속합니다. 자신을 경배하면 말이지요.
마귀는 두 번째로 시험합니다. 그는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마귀는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너는 메시아가 아니냐! 이제 로마제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
국을 정복해야지. 그러려면 내가 필요하다. 내가 이 모든 것을 이미 가
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지고 있기에 너에게 줄 수 있다. 나를 경배하라!” 그러나 예수님께서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4:6) 이 시험 역시 본질은
는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같습니다. 마귀는 말도 안 되는 짓을 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역시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4:10) 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신명기 6:13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신지, 그분이 진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을 인용하신 것으로서, 이러한 말입니다. “무슨 말이냐! 나는 이 세상
보호하시겠는지 알아보라고 하지요. 그러면서 심지어 시편 91:11-12
의 권세와 나라를 가지려고, 이 세상의 힘을 가지고 다스리려고 온 왕
을 인용하기까지 합니다! 마귀는 말합니다. “하나님도 시편에서 너를
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펼치고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러 온
보호하신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러니 뛰어 내려라! 진짜 하나님이 너
왕이다! 사탄아 내 경배를 받으려 하지 말라! 나는 하나님만 경배하겠
를 보호하시는지 그렇지 않은지 시험해 보라!”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다!” 아담과는 달리, 예수님은 승리하셨습니다. 세례를 받으심으로 우
대답하시지요.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
리의 대표가 되신 예수님은, 첫 번째 대표와는 달리 마귀를 이기셨습
였느니라”(4:7) 이는 신명기 6:16을 인용하신 말씀인데, 이렇게 말
니다. 이제 우리는 이 새로운 대표를 신뢰할 수 있습니다.
씀하신 것이지요. “나는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는다! 나는 그분이 나 를 돌보실 것을 믿는 것이지, 시험해 봐야 아는 것이 아니다! 그분은
이 사실, 즉 예수님이 승리하셨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선하시다. 나는 그분의 선하심을 의심하지 않겠다.” 하나님의 선하심
줄까요? 첫째로 우리는 마귀의 작전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는 속삭입
을 의심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니다. “네가 정말 하나님의 자녀라면 이런 일을 겪을 리가 없다. 이런
(창 3:3, 하나님은 ‘만지지도 말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라
비참한 일이 네게 일어나서는 안 되지. 너는 결코 자녀일 리가 없어.”
고 말한 아담(과 하와)과는 달리 예수님은 절대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또한 “하나님은 널 사랑하지 않아. 널 조종하려 할 뿐야.” 이는 에덴동
불신하지 않으십니다.
산 때부터 사탄이 늘 즐겨 쓰던 수법이지요.
마귀는 이제 본색을 드러냅니다. 마귀는 예수님을 데리고 “지극히 높
예수님은 어떻게 승리하셨을까요? “내가 비록 굶주림과 고난을 겪을
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지라도, 나는 나를 사랑하시는 성부 하나님을 불신하지 않는다. 나는
감사 시
그분의 선하심을 믿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따라서 어떻게 감사를 표현할 수 있을까요? 이렇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 고난이 무엇이든 간에, 이것은 형벌이 아니야. 하나님을 온전히 기쁘시게 했
감사 시
고난이나 결핍이 찾아올 때 마귀는 “하나님이 널 사랑하지 않는다”, “너는 버림받았다”고 속삭입니다. 최근 내 삶의 광야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게 만든 유혹은 무엇이었습니까?
던 독생자 예수님도 하나님께서 친히 광야로 이끄셔서 시험을 통해 단련하시고 그분을 통해 다른 이들을 구원하셨지. 오늘 내가 고난 중 에 있어도, 나는 여전히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야.. 그렇다면 이 일 은 하나님께서 내 안에서 구원의 역사를 깊이 이루어가고 계시거나, 나를 통하여 다른 이들에게 구원의 역사를 흘려보내기 위함일거야!” 감사는 당신을 승리하게 합니다.
“이 고난은 형벌이 아니라, 나를 단련하시거나 누군가에게 구원의 은혜를 흘려보내기 위한 과정”이라는 고백이 지금 나의 형편 속에서도 진정한 감사의 언어로 고백되고 있습니까?
Week 1
감사메시지 낭독 듣기
Day FRI
를
감사
감사메시지 묵상
를
7-12절은 무리들에 관한 이야기가, 그리고 13-19절은 제자들에 관 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둘은 어떻게 다를까요? 사실 기독교는 무리 가 되라는 메시지가 아닌, 제자가 되라는 메시지입니다. 미국의 목회
감사
자 카일 아이들먼(Kyle Idleman)은 『팬인가, 제자인가』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자처하는 사람은 널려 있지만 예 수님과의 관계를 진지하게 돌아보고 나서도 자신 있게 제자라고 말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제자가 아니라면 뭘까? 그들은 그냥
이정규목사
‘팬’이다. 팬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사전적 정의는 ‘누군가를 열정적으
막 3:7-19
로 좋아하는 사람’이다.”
7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바다로 물러가시니 갈릴리에서 큰 무리가 따르며
우리는 모두 제자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본문은 제자가 그
8 유대와 예루살렘과 이두매와 요단 강 건너편과 또 두로와 시돈 근처에서 많은
냥 팬과 무엇이 다른 지를 말해주지요. 우선 그냥 팬의 특징을 생각해
무리가 그가 하신 큰 일을 듣고 나아오는지라 9 예수께서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작은 배를 대기하도록 제자들에게 명하셨으니 10 이는 많은 사람을 고치셨으므로 병으로 고생하는 자들이 예수를 만지고자 하여 몰려왔음이더라 11 더러운 귀신들도 어느 때든지 예수를 보면 그 앞에 엎드려 부르짖어 이르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하니
봅시다. 여러 곳에서 반대가 있고, 예수님을 죽이려는 사람들이 생기 자 예수님은 바다(갈릴리 바다)로 물러가십니다(7절). 그러자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께로 몰려들지요. 그래서 예수께서는 큰 사고 가 날까 하셔서(9절,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배를 대기하고 피하십니다. 왜 무리들은 예수님을 그토록 따랐을까요? 병 을 고치기 위해서(10절), 그리고 귀신들을 쫓아내기 위해서(11절)였
12 예수께서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많이 경고하시니라
지요. 마가가 그리는 당시의 상황이 보이시나요? 예수님을 진정으로
13 또 산에 오르사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알려고 하는 사람들은 없었습니다. 한 무리는 예수님이 기적을 행할
14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15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 16 이 열둘을 세우셨으니 시몬에게는 베드로란 이름을 더하셨고 17 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 18 또 안드레와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및 다대오와 가나나인 시몬이며 19 또 가룟 유다니 이는 예수를 판 자더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알면서도 죽이려고 들었고(1-6절 의 이야기), 다른 한 무리는 예수님이 기적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 으니 이용만 하려고 들었습니다(7-11절의 이야기). 그 누구도 예수님 을 진정으로 알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감사 시
를
감사
슬프게도, 교회의 많은 사람이 이 둘 중 하나의 부류에 속합니다. 물
신이 어떤 존재인지 알게 하시지요. 그리고 자신과 같이 그들을 높이
론 드러내 놓고 예수님을 거절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한 부류
십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이 예수님을 적대한다면 그분의 심
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 지만 관심이 있
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당신이 예수님을 이용만 하려 한다면 그저 병
습니다. 그들은 남들이 율법을 어기는 것을 보며 정죄하거나 뒷담화
만 고침 받을 것입니다(그것도 하나님의 주권이지만). 하지만 당신이
합니다. 교회에서도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에 집중하며 인정을 받기를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면, 그분을 정말 알고자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바랍니다. 간혹 자신보다 더 신앙생활을 못 한 사람이 복과 인정을 받
당신을 높이실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늘 거하게 하실 것
게 되면 분노하거나 질투합니다. 다른 한 부류는 예수님을 이용하는
입니다.
데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긴 하지만, 예수 님이 자신에게 건강과 부와 명예를 주시는 한도 내에서만 예수님을 존
특별히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라는 말씀을 더 묵상해 봅시다. 왜 예
경합니다. 즉, 예수님은 그들이 사랑하고 섬기는 진정한 신이 아닙니
수님은 제자를 부르셨을까요? 사역을 위해서? 물론 그것도 포함되지
다. 건강과 부와 명예가 그들의 신입니다. 여기까지 누구도 ‘그가 누구
요. 하지만 함께 있게 하시는 것이 더 먼저 나옵니다. 이는 제게도 큰
인가? 그분은 내게 어떤 의미인가? 그를 정말로 알고 싶다.’라고 생각
도전이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며, ‘주님은 나와 함께 있고 싶
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예수께서 귀신들을 향해 “자기를 나타내지 말
어 하시는데, 나는 사역만 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님은
라고 많이 경고하신”(12절) 이유가 보이시나요? 예수님의 활동 범위
사랑의 관계를 원하셨는데, 나는 늘 거래관계를 원했구나.” 우리는 늘
가 커지면 커질수록, 예수님에 대한 오해는 깊어져 갔습니다.
제자가 된다고 하면 ‘훈련을 받는다’고만 생각하지만, 주께서는 제자 들을 사랑하시기 위해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세우십니다. 그분은 산에 올라가 12명 을 택하시고 제자로 삼으셨습니다(13-14절). 예수님을 이용만 하려
그 증거를 생각해 볼까요? 16-19절에는 열두 제자들의 이름이 나옵
고 했던 사람들을 벗어나셔서, 그분 자신을 가르치심으로 그분을 아
니다. 그런데 19절을 봅시다. “또 가룟 유다니 이는 예수를 판 자더라”
는 사람들을 만드시기 위해서였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12명을 “자기
마가는 열두 제자를 세우시는 이 아름다운 장면의 마지막에 어두운 그
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
림자를 드리워 놓습니다. 예수를 팔 자. 결국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
지게” 하셨습니다. 15절에 ‘권능’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원형도 역시
가에 못 박혀 죽도록 할 자인 유다를 기록해 놓지요. 마가의 의도는 무
‘엑수시아’입니다. 예수께서 권위를 가지신 것처럼 제자들도 권위를
엇이었을까요? “좋은 일에도 마가 낀다.” 뭐 이런 말을 하려고 한 것
가지게 하십니다. 예수께서 전도하시는 것처럼, 그들도 전도하게 하
일까요? 아닙니다. 병을 고치는 사역도, 복음을 전하는 사역도, 제자
십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그들과 계속 함께 하셨습니다. 그래서 자
를 삼는 사역도 이들을 변화시키지는 못합니다. 이 땅에 진정한 하나
감사 시
님 나라를 가져오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셔야 합니다. 그분이 이 모든 죄인들의 죄가 되셔서 십자가에서 정죄를 받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이들의 의로움이 되셔야 합니다.
감사 시
나는 예수님을 진정으로 알고 사랑하는 ‘제자’입니까, 아니면 필요할 때만 복과 유익을 구하는 ‘팬(무리)’의 자리에 머물러 있습니까?
그분께 감사합시다. 세상의 많은 신들은 “나를 알고 싶으냐? 너의 시 간, 재물, 생명을 바쳐라!”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너 희들은 나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너희들이 나를 알게 하려고 나는 너 희들에게 내 목숨을 바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우리를 부르신 첫 번째 목적은 사역과 성과 이전에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일이나 거래 관계로 변질되어,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놓치고 있지는 않습니까?
Week 1
에세이 낭독 듣기
Day SAT
다
감사에세이
제 이름은 정은지입니다. ‘은혜 은(恩)’이 빠지면 ‘정지’가 됩니다. 그
래서 저는 제 이름을 생각할 때마다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 으면 저는 멈출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다 정은지 집사
정은지로 살아가는 것 자체가 가장 큰 감사입니다. 어렸을 때 저는 하나님이 정말 계신 걸까 생각했습니다. 왜 하나님은 나에게만 이렇 게 어려운 길을 주시는 것 같을까, 불평하고 원망했던 시간도 많았습 니다. 41년 동안, 그리고 지금도 지하에서 목회를 이어가고 계신 아버지 목 사님의 딸로 살아가는 것이 분명 축복이지만, 어린 저에게는 참 힘든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성공해서 돈을 많이 벌고 아버지 목회를 도와 드리고 싶다.’ 화장실이 집 안에 있는 곳에서 사는 것이 저의 꿈이었거 든요. 그 마음으로 발버둥쳤습니다. 개그우먼이라는 꿈을 품고 열심 히 준비했고 공채 시험에도 도전했지만 떨어졌습니다. 그때 저는 제 인생을 마감하고 싶다는 생각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바 로 그 죽을 것 같았던 삶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저를 만나주셨습니다. 돌이켜보니 제가 혼자 걸어온 길이라고 생각했던 모든 순간에 하나님 께서 함께 동행하고 계셨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은혜로 신앙인답게 살아가려고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세상에서도, 하나님 나 라 안에서도 양다리를 걸치듯 살아왔던 것 같습니다. 사람들에게 인 정받고 사랑받는 것도 중요했고, 하나님도 믿었습니다. 그렇게 나름 대로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감사
다
그러던 어느 날, 둘째 딸이 9개월이 되었을 때였습니다. 떡국이 쏟아
미자립 교회를 찾아다니며 섬기는 사람이 되어라.” 그 말씀이 제 마
지면서 아이가 화상을 입었습니다. 치료하는 동안 아이의 피부가 벗
음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사역지를 다니면서 어려운 미자
겨지고 상처가 아물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너무나 힘들었습니
립 교회를 만나면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습니다. 더 섬기고 오고 있
다. 그 시간을 지나며 제 마음에도 우울함이 찾아왔습니다. ‘왜 이런 일
습니다.
이 나에게 일어난 것일까?’ 하나님께 묻고 또 물었습니다. 최근에는 개척교회 사모님들을 초대해 사모 콘서트도 열게 되었습니 그런데 어느 날, 제 마음 가운데 예수님께서 제게 질문하시는 것 같았
다. 맛있는 식사와 선물을 준비하려면 약 1천만 원이 필요했지만, 하
습니다. “네 딸의 피부가 벗겨지고 피가 나니까 아프니? 나는 너를 위
나님께서는 사람들을 통해 그 모든 것을 채워주셨습니다. 저는 원더
해 십자가에서 찢기고 피를 흘렸단다. 그런데 너는 나를 위해 울어본
풀우먼이라는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중입니다. 일반 집사인 제가 방
적이 있니?” 그 질문 앞에서 저는 처음으로 제 신앙을 돌아보게 되었
송에서 입을 옷을 준비하는 것도 사실 부담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
습니다. 사람들이 좋았습니다. 사람들과의 관계가 중요했습니다. 사
님께서는 그것까지 아시고 11% 대표를 만나게 하셨습니다. “집사님,
람들에게 인정받고 사랑받는 것이 제게는 너무나 중요했습니다. 또
옷 한 벌 만들어 드리고 싶어요.” 그렇게 시작된 만남을 통해 지금까
하나의 사건을 통해, 하나님 앞에 바짝 엎드리게 되었습니다.
지 방송 녹화 때마다 네 벌의 옷을 만들어 주고 계십니다. 저는 이런 순간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사역에 필요한 큰 것뿐 아니라 제가 말하
그때부터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기도하고, 말씀을
지도 않은 작은 고민까지 아시고 미리 준비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경
붙들고, 하나님과 이야기하는 시간이 조금씩 깊어졌습니다. 그리고
험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제게 ‘승리’라는 콘텐츠를 주셨습니다. 매일 승리를 외 치며 살아온 지 어느덧 2년. 생각지도 못했던 많은 사람들을 연결해
지하에서 지금도 목회하고 계신 아버지를 바라보며 ‘은퇴하시면 너
주시고, 팔로워도 붙여주시고, 사역의 자리도 열어주셨습니다.
무 속상하지 않을까. 왜 우리 아버지는 평생 이런 곳에서만 목회하셔 야 할까.’ 그런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역지를 다니면서 저희 아
그런데 제가 이 길을 걸으며 하나님께서 감사를 더해 주신 일들이 있
버지처럼 어려운 환경에서 끝까지 목회하시는 목회자들을 많이 만나
습니다. 20년 전, 지하 교회에 성탄절에 한 자매가 찾아오셨습니다.
게 되었습니다.
“아무것도 묻지 마세요. 목사님 식사하세요.” 그렇게 헌금을 놓고 가 셨고, 그 힘으로 아버지는 1년을 더 목회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 일을
그분들을 만나면서 이제야 알 것 같았습니다. 내가 지나온 삶의 과정
기억하신 아버지께서 딸 셋을 모아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도 나중에
도 누군가를 섬기기 위한 하나님의 준비였구나. 개척교회 목회자의
감사
다
자녀로 살아왔던 시간, 원망했던 시간, 성공하고 싶었던 마음, 눈물
오늘도 제가 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갑니다. 은혜가
흘렸던 시간까지도 하나님께서 하나도 버리지 않으셨다는 것을 알게
빠지면 멈출 수밖에 없는 사람, 그래서 더더욱 은혜를 붙들고 살아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더 많은 미자립교회를 섬기며 그곳에서 다시 “승
는 사람. 정은지로 살아가는 것이 가장 큰 감사입니다.
리”를 외치라고 하나님께서 제 삶을 준비하신 것 같습니다 부족한 정집사의 릴스를 보시며, 한동안 교회를 쉬고 계셨던 분들이 다시 교회로 발걸음을 옮기고, 예수님을 믿지 않으셨던 분들이 교회 에 나가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참 감사한 요즘입니다. 저 의 작은 릴스를 통해서도 복음이 전해지고, 누군가의 마음에 예수님 을 향한 작은 씨앗이 심겨진다는 것이 가장 감사한 요즘입니다. 감사하지 못했던 제 입술에 감사가 하나씩 채워지고, 불안했던 제 마 음에 평안을 주시고, 매일 넘어질 수밖에 없는 부족한 저를 ‘정집사’로 사용해 주시는 하나님. 그것이 제게는 가장 큰 감사입니다.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인기를 얻다 보면 저도 모르게 자꾸 높은 곳을 바라보게 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낮은 자리를 먼저 가서 섬기 는 자가 되고 싶습니다. 사람들이 알아주는 자리보다 하나님이 보내 시는 자리로. 사람들의 ‘좋아요, 구독’보다 하나님께서 정집사를 ‘좋아 요’ 하시기를. 오늘도 이 말씀을 붙듭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 고린도전서 10장 12절
감사
감사
지나올 때는 원망하고 힘들어했지만, 지금 돌아보니 하나님께서 나를 준비시키고 계셨음을 깨닫게 되는 삶의 순간은 무엇입니까?
Week 2
감사메시지 낭독 듣기
Day MON
감사메시지 묵상
시 감사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예수님께 감사하기 헌신하신 예수님께 감사하기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께 감사하기 부활하셔서 우리를 부르신 예수님께 감사하기 헌신, 우리의 마땅한 감사
이정규목사
지금, 누구와 함께 걷고 있나요? 마 7:13-23
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15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16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19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20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21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감사 시
시
감사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5-7장을 통해 긴 설교를 하십니다. 이 설교는
신앙인의 삶은 길. 즉 과정 역시 좁고 협착합니다. 이 길은 인기가 있
보통 ‘산상수훈’ 또는 ‘산상설교’라는 이름이 붙어 있지요. 그리고 13
는 길이 아닙니다. 신자들이 받을 수 있는 가장 커다란 유혹은, 이 날
절에서 그분은 이 설교 전체의 주제를 말씀하시지요. “좁은 문으로 들
카로운 대조를 피하려고 하는 태도입니다. 존 스토트의 말을 들어봅
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시다. “사람들은 중립적인 위치에 있기를 좋아한다. 모든 여론 조사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
는 ‘예’나 ‘아니요’라는 대답뿐만 아니라 ‘모른다’라는 대답도 인정한
음이라”(13-14절) 사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산상설교 전체를 통해 날
다. 사람들은 아리스토텔레스와 그의 중용을 좋아한다. 가장 인기 있
카로운 대조를 보여주신 적이 있습니다.
는 길은 중도(中道)이다. 중도를 벗어나면 ‘극단주의자’나 ‘광신자’라 불릴 수 있는 위험이 따른다. 모든 사람은 선택에 직면하는 것을 굉장
마태복음 속 예수님께서는 계속 ‘너희’와 ‘그들’을 대조하셨지요. ‘너
히 불쾌하게 여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우리가 선택을 피하도록 허
희’는 제자들이며, 제자들은 박해 받고(5:11-12), 세상의 빛과 소금
락하지 않으실 것이다.”
이며(5:13-16),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더 나은 의를 가져야 하고(5:20),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해야 하며
그리고 예수께서는 두려운 말씀을 하십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5:48), 사람에게 보이려고 의를 행하면 안 되고(6:1), 사람의 잘못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을 용서해야 하며(6:14-15),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21절) 이 모든 날카로운 대조 이
다(6:20-33). 반면 ‘그들’은 어떻습니까? 그들은 반대입니다. 그들
후에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구원의 확신이 있는 사람이라고 천국에 들
은 신자들을 핍박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축소시키며 의를 외면합니다.
어가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심지어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그리고 외식하며 자신을 드러내기 위하여 의를 행하고, 결국은 열매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
를 맺지 못합니다. 이러한 ‘너희’와 ‘그들’의 날카로운 대조는 산상설
을 행하였다” 하더라도(22절) 말입니다. 특히 히브리어의 표현에서
교 전체의 주제이며, 따라서 이 두 가지 부류. 두 길. 두 삶의 방식을
누군가를 ‘주여 주여’처럼 두 번 부르는 것은 특별한 관계에서 쓸 수 있
가리켜서 ‘좁은 문과 좁은 길’ 그리고 ‘넓은 문과 넓은 길’이라고 은유
는 표현이었습니다. 가족과 같이 말이지요. 즉, “주여 주여”라고 말하
하신 것입니다.
며 확신이 있어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지 않는다면 하 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잘 생각해 봅시다. 문만 좁은 것이 아니라 길도 좁습니다. 문만 넓은 것이 아니라 길도 넓습니다. 우리는 자꾸 ‘문’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절망하게 됩니다. 누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그래서 신앙을 가지기가 아주 어렵다는 것으로만 생각하지요. 그러나
있습니까? 누구도 들어갈 수 없습니다. 자신이 확신을 가진다고 갈 수
감사 시
시
감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후 복음서를 계속해서 읽어보면 두 가지를 알
는 것에 익숙합니다. 명문대나 유명한 기업들에 들어가려면 높은 점
수 있게 됩니다. 하나는 당시의 그 누구도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
수와 스펙을 쌓아야 할 것입니다. 모든 공동체는 자신만의 공로 코드
다는 사실입니다. 바리새인이나 서기관 같은 종교 지도자들도 그렇게
가 있습니다. “재산이 어느 정도 되지 못한다면 여기 들어오실 수 없
행하지 못했습니다. 제자들 역시 마찬가지였지요. 다른 하나는, 그래
습니다.” 우리는 거기에 절망하기도 하고, 안도하기도 하며, 자랑하기
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이 한 명 있다는 사실입
도 합니다. 여기서 질문해 봅시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어떤 점
니다. 누구일까요?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분이야말로 “너희 중에 누가
수와 공로를 쌓아야 할까요?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요 8:46)라고 말씀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답은 두 개입니다. 하나, 완벽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가 더 있습니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납니다. 그러한 분이 죄인에게 걸맞은 대우
다. 당신이 완벽하지 못하다면, 당신을 위해 완벽함이 되신 분이 계십
를 받으십니다. 죄인처럼 십자가로 끌려가시지요. 그리고 십자가에
니다. 그분이 당신을 천국으로 이끄시는 길이 되십니다. 그분께 감사
서 울부짖으십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이는 바로 “나의 하
합시다. 그분은 오늘도 당신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
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의미였습니다
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마 27:46). 여기서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몇 번 부르셨
(요 14:6)
지요? 두 번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예수님을 받아주셔야 하지 않 을까요? 그분이야말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신 분인데 말이지요. 하지만 하나님은 그분을 버리십니다. 그분은 저주를 받고 고통당하십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분은 우리와 자리를 바꾸셨습니다. 그분은 죄인이 아니시지만, 죄 인 취급 받으셨습니다. 우리는 의인이 아니지만, 그분 때문에 우리가 의인처럼 여김 받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우리는 어느 집단에 들어가려고 하면 어떤 점수나 공로를 쌓아야 한다
감사 시
입술로는 “주여 주여” 부르고 종교적 활동을 열심히 하면서도, 실제 내면에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보다 내 뜻과 인정 욕구를 앞세우고 있지는 않습니까?
완벽한 자만이 들어갈 수 있는 하나님 나라에, 완전한 순종을 이루시고 십자가에서 버림받으심으로 나의 완전함이 되어 주신 예수님 때문에 들어갈 수 있다는 복음이 내게 어떤 자유와 감사를 줍니까?
Week 2
Day TUE
감사메시지 낭독 듣기
감사
감사메시지 묵상
당신이 누군가와 점심 약속을 했다고 합시다. 하지만 그날 아침 당신 은 상대에게 문자를 보냅니다. “오늘 몸이 안 좋아서 못 갈 거 같아. 약 속을 미루거나 취소하면 안 될까?” 상대방은 흔쾌히 그러라고 하며
감사
몸 잘 챙기라고 해줍니다. 이 경우, 당신은 약속을 ‘안’ 지킨 것일까요?
이정규목사
아프다고 둘러댄 건 아니었을까요? 이렇게 생각해 보면, ‘못’ 지킨 것
막 14:32-42
과 ‘안’ 지킨 것의 경계는 모호합니다.
32 그들이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마가복음 14장의 겟세마네 동산 사건은 바로 이러한 ‘약속과 언약’에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33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새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34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 35 조금 나아가사 땅에 엎드리어 될 수 있는 대로 이 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여 36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못’ 지킨 것일까요? 당연히 못 지킨 것이겠지요. 하지만 질문은 남습 니다. 얼마나 아팠던 것일까요? 죽도록 아픈 것이었을까요? 그냥 피 곤했던 것일까요? 혹시 귀찮아서 보기 싫었는데 아픈 것 같으니 대충
관한 본문입니다. 주님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겠다고 호언장담했던 제 자들은 정작 주님이 가장 큰 고통 중에 계실 때 잠에 빠져듭니다. 반 면, 영원 전부터 맺으신 구원의 언약을 지키시기 위해 지옥의 공포와 진노의 잔 앞에서도 홀로 걸어가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하신 사랑 이 선명하게 대조됩니다. 본 설교는 제자들의 모습, 예수님의 기도와 고뇌, 그리고 성도의 삶에 주는 적용을 다룹니다.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37 돌아오사 제자들이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38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39 다시 나아가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시고 40 다시 오사 보신즉 그들이 자니 이는 그들의 눈이 심히 피곤함이라 그들이 예수께 무엇으로 대답할 줄을 알지 못하더라 41 세 번째 오사 그들에게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 되었다 때가 왔도다 보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42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유월절 만찬을 마치신 후 제자들과 함께 늘 기도하시던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여덟 명의 제자는 입구 쪽에 머물게 하시고,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 세 사람만을 데리고 동산 더 깊 은 곳으로 나아가셨습니다. 왜 열두 제자 중 굳이 이 세 명이었을까요? 이들이 다른 제자들보다 유독 영적으로 뛰어났거나 총애를 받았기 때 문이 아닙니다. 이 세 사람에게는 결정적인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바 로 과거에 “주님을 위해 죽음의 자리까지 함께하겠다.”라고 호언장담
감사 시
한 전력이 있는 인물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감사
제자들이 모두 잠든 사이,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 철저히 홀로 남 겨지셨습니다. 마가는 이때 예수님의 상태를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
야고보와 요한은 일전에 주님을 찾아와 “주의 영광 중에 우리를 하나
사”라고 묘사합니다. 헬라어 원문이 담고 있는 이 표현의 뉘앙스는
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마 20:21)라며
일상적인 슬픔이나 긴장감이 아닙니다. 그것은 온몸의 피가 얼어붙
세속적인 인사 청탁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고 사지가 덜덜 떨릴 정도의 극심한 충격, 영혼을 뒤흔드는 무시무시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
한 공포와 경악을 뜻합니다. 누가복음은 예수님이 얼마나 힘쓰고 애
냐”(마 20:22)라고 물으셨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잔은 곧 십자가
써 간절히 기도하셨는지, 그분의 땀방울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같이
의 수치와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야고보와 요한은
되었다고 기록합니다. 그분은 왜 이렇게 고통스러워하셨던 걸까요?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한 채 당당하게 “할 수 있나이다.”라고 큰소리쳤 습니다. 베드로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불과 몇 시간 전 만찬 자리에
예수님이 직면하셨던 것은 바로 성경이 끊임없이 경고해 온 ‘하나님의
서 주님이 제자들의 배신을 예고하셨을 때, 베드로는 “모두가 주를 버
진노의 잔’이었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잔’은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온
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우주의 죄악과 패역을 향해 쏟아부으시는 맹렬한 공의의 심판을 상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막 14:29)라고 결연하게 맹세했습니다.
합니다.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등 수많은 선지서에 기록된 대로, 그것은 죄인들이 마시고 비틀거리며 영원한 파멸에 이르러야 할 무서
그러나 현실은 어떠했습니까? 예수님께서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운 저주의 잔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시간, 성부 하나님은 성자께 그분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라고 애통해하시며
이 마실 진노를 보여주며 이렇게 제안한 것과 같았습니다.
기도를 부탁하셨지만, 세 제자는 기도를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깊은 잠에 빠져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찾아와 그들을 깨
“내 아들아, 보아라. 이것이 죄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진노의 잔이
우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눈은 피곤함에 짓눌려 있었고 주님께
다. 네가 저들을 구원하고자 한다면, 네가 직접 저 무시무시한 지옥의
드릴 변명의 말조차 찾지 못해 부끄러워했습니다. 이러한 제자들의
풀무불 속으로 뛰어들어 저 끔찍한 불꽃을 견뎌내야 한다. 저들은 너
모습은 곧 우리의 자화상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평소에 “주를 위해 살
를 사랑하지도 않고, 은혜를 알지도 못하며, 조금 전까지도 큰소리치
겠습니다.”, “내 삶을 주께 드립니다.”라고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그러
다가 지금은 쿨쿨 잠들어 있는 배은망덕한 자들이다. 그래도 너는 저
나 우리의 실제 기도 생활을 가만히 살펴보면,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
비참하고 무가치한 자들을 위해 이 잔을 마시겠느냐?”
하고 그분의 나라와 영광을 구하기보다 철저히 자기중심적인 동기에 갇혀 있을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은 그 잔이 얼마나 무섭고 쓰라린지 정확히 아셨습니다. 그 잔
감사 시
을 눈앞에 두고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 동안 피땀을 흘리시며 그 공 포를 뼈저리게 맛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불쌍한 죄인 들이 멸망당하는 것을 보느니, 차라리 자신이 대신 멸망당하고 버림
감사 시
“주를 위해 죽겠다”고 큰소리쳤지만 정작 위기의 순간 잠에 빠져버린 제자들의 모습에서, 결심은 앞서지만 쉽게 무너지는 나의 연약함과 자기중심성을 발견합니까?
받는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주님은 결코 “내가 왜 저따위 벌레 같은 죄인들을 위해 이 고통을 당해야 하는가.”라며 돌아서지 않으셨습니 다. 그분의 사랑은 변함이 없었고, 온전한 지식과 자유 의지 가운데서 기꺼이 그 쓴잔을 받아 드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나의 원대 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막 14:36) 우리는 늘 약속을 어깁니다. 때로는 ‘못’ 지켰다고 변명하지만, 자주 안 지킵니다. 예수님의 사정은 어땠을까요? 그분이야말로 못 지킬 상황 아니었을까요? 하지만 그분은 언약을 신실히 지키십니다. 약속을 쉽게 어기고 핑계를 대는 세상 속에서, 십자가의 참혹함 앞에서도 언약을 끝까지 지켜내신 주님을 바라보며 내가 하나님과 이웃 앞에서 지켜야 할 신실한 헌신은 무엇입니까?
Week 2
감사메시지 낭독 듣기
Day WED
를
감사
감사메시지 묵상
를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 로마의 군병들은 종종 죄수들에 대한 자비심 의 표현으로 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곤 했습니다. 이는 일종의 마취제 로서, 잠깐이라도 그 끔찍한 고통을 잊도록 해주는 것이었지요. 군병
감사 이정규목사
들은 예수께도 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었으나 마시지 않으셨습니다 (막 15:23). 하지만 십자가에 달리신 이후, 사람들이 예수님을 조롱하 고 괴롭히기 위해 준 신 포도주는 받으셨지요(요 19:29-30). 포도주 가 시게 되면 그냥 식초가 됩니다(아주 맛이 없고, 때로는 고통을 가 중시키는 식초지요). 왜 예수께서는 몰약을 탄 포도주는 거절하시면 서도 신 포도주는 받으셨을까요? 이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진노의 잔. 원래 우리가 받았어야 하는 진노의 잔을 남김없이 모조리 다 받으셨 다는 의미입니다. 그분은 십자가에서 타오르는 하나님의 진노라는 지 옥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다 이루었다!”라고 외치십니다. 이는 두 가지 뜻 이 있습니다. 하나는 그리스도께서 구약성경의 모든 예언을 완벽하게 성취하셨다는 의미입니다. 구약성경에는 예수님이 직접적으로 등장 하지 않지만, 사실 모든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말하고 있습니
요 19:30
다. 예수께서도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 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요 5:39) 라고 말씀하셨지요. 구약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율법들, 선지자들이
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말한 모든 소망은 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생각해 보십시오. 구약의 맨 처음 책인 창세기를 보면, 아담과 하와가 범죄해서 발가벗고 부끄러워할 때 하나님께서 한 짐승을 희생하시고 그들에게 가죽옷을 입히셔서 그들의 부끄러움을 가리십니다. 이 가
감사 시
를
감사
죽옷은 누구를 상징하겠습니까? 구약의 맨 마지막 책인 말라기를 보
“다 이루었다”라는 말의 헬라어는 ‘테텔레스타이’라는 단 한 단어로
면,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단어는 당시에 굉장히 의미가 있는 단어였지요.
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
고고학자들은 1세기 그리스-로마에서 ‘테텔레스타이’라고 적혀진 세
리라”(말 4:2)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공의로운 해’는
금 영수증을 많이 발견했습니다. 이는 빚이 완전히 청산되었거나, 세
누구를 가리키겠습니까? 이사야 선지자가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금을 완벽하게 지불했을 때 받은 쪽에서 주는 영수증에 쓰인 문구였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습니다. 즉, 예수께서 “테텔레스타이!”라고 외치셨을 때, 우리의 죄의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사 53:4)라고 말했을 때
빚은 완전히 갚아지고 그분의 의가 완전히 우리의 것이 되었다는 선포
‘그’는 누구이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를 하신 것입니다. 이로써 그분의 의가 우리의 의가 되었습니다. 우리
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시며 약속을 성취하십니다
가 불순종하더라도, 우리는 성부 하나님께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
(지키십니다).
니다. “아버지.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저는 아버지께 서 주신 율법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제 영원한 중보자께서 ‘다
“다 이루었다!”의 또 다른 의미는, 그분이 우리가 행해야 할 모든 율법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의 그 외침을 의지합
을 다 지키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분은 율법의 주인으로서, 하나님의
니다. 그 외침이 바로 제 영수증입니다. 저를 용서해 주시고, 저를 의
백성들이 지켜야 할 율법을 만드신 입법자요, 그 순종을 당연히 받으
롭다고 여겨주십시오.” 성부 하나님은, 당신을 불의하다고 거절하실
셔야 할 대상이셨고, 잘 지키는지 판단하실 수 있는 판사셨습니다. 그
수 없으십니다. 아들의 의를 보시고, 아들이 성취하신 완전한 율법 준
럼에도 그분은 사람이 되셨습니다. 자신의 백성들 중 하나가 되셨습
수를 보시고, 당신을 의롭다 하시며 기쁘게 받으실 것입니다!
니다. 그래서 마치 율법을 지킬 의무가 있으신 분처럼 율법을 지키셨 습니다. 지키시되, 하나도 어기지 않으시고 완전하게 지키셨습니다. 그것도 한 명의 사람으로 그냥 지킨 것이 아니라, 우리 중 모두의 대
그는 지옥에 들어가셔서 지옥을 굴복시키셨고
표로 완전하게 율법을 지키셨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 모두를
스스로 죄가 되셔서 죄를 무너뜨리셨으며
그분 안에 두시고, 자신의 운명과 우리의 운명을 하나로 만드셨습니
무덤에 내려가셔서 무덤을 파괴하셨고
다. 그리고 율법을 완벽하게 지킴으로 우리 역시 율법을 완벽하게 지
죽으심으로써 죽음을 베어버리셨다
킨 것으로 여기셨지요.
D. A. 카슨
감사 시
십자가의 마지막 외침인 “테텔레스타이(다 이루었다)”는 내 모든 죄의 빚이 완전히 청산되었다는 영수증입니다. 넘어지고 불순종할 때마다 자책감에 빠지는 대신, 이 영수증을 하나님 앞에 내어놓는 믿음이 있습니까?
나의 구원은 내가 율법을 지켜낸 행위가 아니라 오직 우리의 대표가 되신 그리스도의 온전한 순종에 기대어 있습니다. 이 진리가 내 일상의 염려와 영적 불안을 어떻게 덜어 줍니까?
Week 2
감사메시지 낭독 듣기
Day THU
를
감사
감사메시지 묵상
를
본문의 사건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베드로가 저질렀던 배신의 무게를 뼈아프게 인식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대제사장 가야 바의 뜰로 잡혀가셨을 때, 베드로는 자신이 죽을까 두려워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이 배신은, 생각보다 끔찍한 죄였습니다. 신 약학자 리처드 보컴(Richard Bauckham)은, 1세기 고대 사회에서 배신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파렴치하고 극악무도
감사 이정규목사 요 21:15-19
15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한 범죄로 취급받았다고 말해줍니다. 현대 사회는 개인주의와 감정의 자유를 절대시하여 관계의 신실함을 가볍게 여기는 경향이 있지만, 고대 사회에서는 신의를 저버리는 배신을 공동체의 근간을 파괴하는 최악의 죄악으로 보았습니다. 더욱이 마가복음에 따르면 베드로는 세 번째 부인할 때 예수님을 ‘저주하며 맹세’하기까지 했지요(막 14:71). 사실, 베드로는 자신이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며 결코 배신하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했던 유일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만찬 자리에서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막 14:31)라고 힘
16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어 맹세했지요. 그는 자신만만했습니다. 물론 베드로의 다짐 자체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는 진심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진심’을 곧 자기의 ‘능
양을 치라 하시고
력’으로 착각했습니다. “내가 주님을 이토록 뜨겁게 사랑하니, 나는
17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19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어떤 유혹과 시험이 와도 능히 버텨낼 수 있다”는 자기 과신에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기 신뢰는 결국 처참한 배신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러한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두 가지 무대장 치를 마련해 놓으시지요. 첫째는 ‘숯불’이었습니다. 요한복음은 예수
감사 시
님이 생선과 떡을 구우시던 불을 그냥 불이 아니라 ‘숯불’이라고 명확
를
감사
베드로의 무너진 자아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자 하셨습니다.
히 기록합니다. 신약성경에서 숯불이라는 단어가 쓰인 또 다른 유일 한 곳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저주하며 부인했던 대제사장의 뜰이었습
이때 베드로의 반응은 이전과 완전히 달라져 있었습니다. 과거의 베
니다. 둘째는 ‘날이 새어갈 때’, 즉 새벽닭이 우는 시간이었습니다. 예
드로라면 “물론입니다! 제가 주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주님이 보시지
수님은 베드로가 가장 비참하게 주님을 배신했던 그날 밤의 냄새와 소
않았습니까?”라며 자신의 열정을 자랑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베
리와 분위기를 고스란히 재현하신 것입니다.
드로는 철이 들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능력과 진심을 더 이상 과신하 지 않습니다. 세 번에 걸친 그의 대답은 한결같았습니다. “주님 그러
그 자리에서 조반을 먹이신 후,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물으십니다. “요
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주님은 베드로를 ‘반석’이라는 뜻의 영광스러운 이름인 ‘베드로’라 부르지 않
그리고 세 번째 질문에는 근심하며 고백합니다. “주님, 모든 것을 아
으시고, 실패하기 전의 옛 이름인 ‘요한의 아들 시몬’으로 부르십니다.
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여기서 ‘주
그리고 다른 제자들과 자신을 비교하며 우월감을 드러냈던 과거의 장
님이 모든 것을 아신다’라는 고백은 단순한 지적 정보를 의미하는 것
담을 상기시키시며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세 번
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 제 마
질문하십니다.
음에 주님을 향한 진심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저 역시 제가 언제 또 다시 무너지고 배신할지 저 자신을 도무지 믿을 수 없습니다. 나 자신
예수님께서 이토록 가슴을 후벼파는 질문을 세 번이나 반복하신 이유
도 나를 다 알지 못하지만, 나의 연약함과 한계, 그리고 그럼에도 주님
는 무엇일까요? 베드로를 정죄하거나 망신을 주려는 것이 절대 아니
을 향해 있는 이 작은 중심을 주님께서 다 아십니다.” 이제 베드로는
었습니다. 그가 세 번 부인했던 깊은 상처와 죄책감의 자리를 세 번의
마침내 자기 자신에 대한 ‘나의 지식과 확신’을 의지하는 자리에서 벗
사랑 고백으로 덮어주시고 그를 다시 온전히 세우시기 위함이었습니
어나, ‘나를 속속들이 아시는 주님의 은혜와 긍휼’만을 전적으로 의지
다. 부모는 어린 자녀가 용돈이 필요해서 “엄마, 아빠 사랑해요.”라고
하는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나의 의로움과 자격에 기초한 가짜 자존
말할 때, 그 말의 이면에 계산이 깔려 있음을 알면서도 그 고백 자체를
감을 버리고, 나를 위해 생명을 버리신 주님의 신실하심에 기초한 참
기뻐하고 사랑합니다. 예수님 역시 약함을 다 아셨습니다. 지금 베드
된 정체성을 발견한 것입니다.
로가 사랑한다고 고백해도 또다시 넘어질 수 있는 존재임을 아셨습니 다. 그럼에도 주님은 실패한 베드로의 입술을 통해 “내가 주님을 사랑
과거와 달리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을 배신하거나 떠나는 것이
합니다.”라는 고백을 듣기를 진심으로 기뻐하셨고, 그 사랑의 언어로
별것 아닌 죄인 양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일종의 방황 정도로만
감사 시
감사 시
취급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강간이나 살인 같은 죄, 즉 ‘인간에게’ 저 지르는 죄만 큰 것인 양 생각하지요. 물론 살인이나 강간이 가벼운 죄 는 결코 아니며, 역시 큰 죄입니다. 하지만 주님을 배신하는 것이 작은
베드로의 실패는 ‘진심’을 ‘자신의 능력’으로 착각한 자기 과신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나의 열정과 경력, 도덕적 자부심이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의 교만이 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죄는 결코 아니지요. 우리는 배신을 우리의 권리로, 용서를 그분의 의 무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분은 용서하실 의무가 없으셨습니다. 그 러나 우리를 찾아오시지요. 그리고 다시 세우십니다.
주의 사랑 항상 내 곁에 머무시네 나 주님을 모른다 하여도 주의 사랑 또 나를 믿어주시네 나 주님을 모른다 하여도 주의 사랑 날 포기치 않네 변함없으신 그 사랑 나도 주님을 놓지 않겠네 부족한 입술로 주 찬양하리라 나 주님을 모른다 하여도 - 팀룩워십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십니다”라는 베드로의 고백처럼, 내 불완전함과 연약함을 아시면서도 다시 찾아와 믿어주시는 주님의 은혜 위에 나의 참된 자존감과 정체성을 두고 있습니까? 자신을 의지하는 것과 주님을 의지하는 것의 차이를 나누어 봅시다.
Week 2
감사메시지 낭독 듣기
Day FRI
감사
감사메시지 묵상
우리는 누구나 살아가면서 시간과 감정, 재정과 노력을 끊임없이 투 자합니다. 학업에 매진하고, 취업을 위해 면접을 준비하며, 사업을 시 작하고, 사람들과의 관계를 가꾸어 나갑니다. 그러나 내가 쏟아부은
감사
노력과 희생에 걸맞은 합당한 대가나 열매가 돌아오지 않을 때, 우리 는 깊은 허탈감과 함께 “아깝다.”, “시간 낭비했다.”, “인생을 허비했 다.”라는 말을 내뱉곤 합니다. 세상이 정의하는 ‘좋은 삶’이란 대개 명 확합니다. 내가 투자한 만큼, 혹은 그 이상의 실리적인 성과와 유익을
이정규목사
거두어들이는 삶이지요.
막 14:1-11
마가복음 14장 1-11절은 바로 이 ‘허비와 가치’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 룹니다. 유월절을 이틀 앞둔 어느 날,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1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이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흉계로 잡아 죽일 방도를 구하며 2 이르되 민란이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하지 말자 하더라 3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4 어떤 사람들이 화를 내어 서로 말하되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 5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6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7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8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9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10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가 예수를 넘겨 주려고 대제사장들에게 가매 11 그들이 듣고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약속하니 유다가 예수를 어떻게 넘겨 줄까 하고 그 기회를 찾더라
한 여인이 예수님의 머리에 매우 값진 순전한 나드 향유 한 옥합을 깨 뜨려 붓습니다. 이를 지켜보던 제자들과 사람들은 “어찌하여 이 향유 를 허비하는가! 300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 었겠도다.”라며 몹시 분노하고 여자를 거세게 책망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평가는 세상의 반응과 완전히 달랐습니다. “가만두라. 너희 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사람들은 낭비라고 분노했으나, 예수님은 그것을 영원히 기억될 가 장 아름답고 ‘좋은 일’이라 칭찬하셨습니다. 세상이 말하는 허비와 예 수님이 보시는 거룩한 허비 사이에는 도대체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 까요? 마가복음 14장 전반부를 면밀히 관찰하면 마가 특유의 정교한 문학적 기법인 ‘샌드위치 구조’가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1-2절에서는 대제 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명절의 민란을 피해 예수를 흉계로 잡아 죽일 음
감사 시
감사
모를 꾸밉니다. 그리고 10-11절에서는 열두 제자 중 하나인 가룟 유다
이는 우리 구주께서 우리를 위해서 하신 일에 대한 반응이요 감사입니
가 대제사장들을 찾아가 돈을 받고 예수를 넘겨줄 기회를 엿봅니다.
다. 본문 9절에서 예수님은 놀라운 선언을 하십니다. “온 천하에 어디
그리고 이 잔혹하고 추악한 살인 음모의 한가운데(3-9절)에, 지극히
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
순결하게 예수님께 모든 것을 쏟아붓는 한 여인의 이야기가 샌드위치
억하리라.” 왜 예수님은 온 세상에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인
의 속재료처럼 배치되어 있습니다.
이 행한 일이 함께 선포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여인의 행동과 복음 사이에는 어떤 본질적인 상관관계가 있습니까?
마가가 이토록 선명한 대조 구조를 사용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인 간이 하나님을 대하는 방식은 본질적으로 딱 두 가지밖에 없다는 사
본문 4절에서 사람들이 여인을 향해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는
실을 폭로하기 위함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이용하든지’, 아니
가”라고 비난할 때 사용된 헬라어 단어는 ‘아폴레이아(ἀπώλεια)’입
면 ‘하나님을 예배하든지’입니다. 중간 지대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가
니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대부분 ‘영원한 멸망’, ‘파멸’로 번역되
룟 유다는 예수님을 철저하게 이용하려고 했던 인물이었고, 그는 결
는 단어입니다. 즉 사람들의 눈에 여인은 향유를 완전히 짓이기고 파
국 배신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의 동기가 철저히
멸시켜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곧이어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
하나님을 이용하는데 있었다면, 삶에서 고난과 어려움이 찾아올 때
스도께서 겪으셔야 할 사건의 정확한 예표였습니다. 복음이란 무엇입
우리는 그분을 떠날 것입니다.
니까? 하나님을 거역하고 반역하여 마땅히 영원한 저주와 멸망(아폴 레이아)을 받아야 할 비참한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죄 없으신 하
반면, 주님을 진정으로 ‘예배’하는 사람의 삶은 세상의 눈에 언제나 비
나님의 독생자께서 친히 저주를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온몸이 갈기갈
합리적인 ‘허비’로 비칩니다. 주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기 위해 손
기 찢기시며 자신을 ‘멸망’의 자리로 내던지신 은혜의 사건 아닙니까?
해를 감수하고, 원수를 용서하며, 시간과 재정을 쏟아붓는 삶을 향해 세상은 끊임없이 조롱합니다. “그렇게까지 신앙생활을 해야 하느냐?
여인이 향유 옥합의 뚜껑을 부러뜨려 그 진귀한 향유를 머리부터 발
적당히 타협하고 실속을 챙겨라. 그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낭비다!” 심
끝까지 아낌없이 쏟아부었듯이, 성자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의 영원
지어 우리 내면에서도 “내가 이렇게까지 헌신할 가치가 있는가”라는
한 구속 언약에 순종하사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몸이라는 가장 존귀
자기검열의 의심이 피어오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참되게 예
한 옥합을 깨뜨리셨습니다. (제 상상이긴 하지만) 천사들이야말로 이
배하는 자는 실리를 계산하지 않고, 온 우주의 주인이신 그리스도의
렇게 말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아니, 가장 소중한 우리 주님이, 어
영광 앞에 자신을 온전히 내어던집니다.
차피 구원해 줘도 계속 죄를 짓고 배신할 저 죄인들을 위해 고귀한 피 를 흘리시다니…. 이건 너무 심한 것 아닙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우
감사 시
리의 작은 헌신이 ‘어리석은 낭비’라면, 그분의 피 흘리심과 헌신은 얼 마나 큰 낭비일까요?
감사 시
옥합을 깨뜨린 여인을 향해 사람들은 ‘허비(낭비)’라고 비난했습니다. 내가 주님과 교회를 위해 드리는 시간과 물질, 마음의 헌신에 대해 세상이나 내 안의 실리적 계산이 “아깝다”고 속삭이지는 않습니까?
하지만 우리 주님은 계산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결코 우리를 자신의 유익을 위해 ‘이용’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십자가 우편의 강도 를 보십시오. 평생 죄악 가운데 살다가 죽어가는 그 강도는 구원받은 후에도 예수님을 위해 전도를 하거나 교회를 세울 수 있는 아무런 ‘이 용 가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를 도구로 보지 않으십니다. 강도는 그저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말했을 뿐이지만, 주님은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라고 선언하십니다(눅 23:43). “나 는 너를 그저 기억만 하기를 원치 않는다. 너와 함께하고 싶다!” 이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이분께 감사를 드리고 싶지 않으십니까? 이 분께 나아가, 엎드려 경배하며 한 해의 결실기인 지금 우리의 감사를 충만히 올려드립시다. 우리의 삶을, 고귀하게 허비합시다!
신앙생활의 중심에 ‘하나님을 나의 유익을 위해 이용하려는 가룟 유다의 마음’이 있습니까, 아니면 ‘조건 없이 나의 전부를 쏟아붓는 예배자의 마음’이 있습니까?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나누어 봅시다.
Week 2
Day SAT
에세이 낭독 듣기
나
감사메시지 묵상
감사 ; 고맙게 여김, 또는 그런 마음. “지희야, 넌 맨날 좋은 일이 있으면 감사하다고 하잖아. 다 네가 열심
나
히 해서 잘된 일인데 누구한테 감사하다는 거야?” 청년 때, 교회를 다 니지 않던 한 친구의 물음이었습니다. 이 물음이 저에게는 참 신선하 게 느껴졌습니다. ‘아, 그렇구나.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감 사의 대상이 없구나.’
김지희 사모 감사라는 단어의 사전적 정의는 ‘고맙게 여기는 마음’이라고 합니다. 그 단어에는 고마운 대상이 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대상이 없는 감사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에게 감사는 무엇일까요? 좋은 일이 생겼을 때 하나님께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입니 다. 오히려 내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에 누군가의 손길이 있었다는 사 실을 인정하는 것이 감사의 시작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감사가 쉽게 나오지 않는 순간을 만나게 됩니다. 기도한 일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내가 열심히 살아왔음에도 생각대로 되지 않을 때,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는지 이해할 수 없 을 때가 그렇습니다. 감사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음에서는 감 사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럴 때면 ‘나는 왜 이렇게 감사하지 못할까?’ 라고 스스로를 책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감사에 대해 조금 다르게 생각하게 되었습니
감사
나
다. 청년 시절 사명을 놓고 열심히 기도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하
그리고 한참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왜 불편하지 않을까? 왜 힘들다
나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라는 말씀으로 제게 응답하셨습
고 생각되지 않을까?’
니다. 그 응답은 제가 바라고, 꿈꾸고, 추구하던 삶이 넓은 길이었음
돌이켜보니 제가 감사했던 이유는 내 삶의 환경이 좋아서가 아니었습
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니다. 오히려 제가 원하던 것들을 내려놓고, 원하지 않았던 삶의 자리 로 들어왔는데도 감사했습니다. 그것은 제가 무엇을 얻었기 때문이
사업적으로 성공하고, 돈을 많이 벌고, 명예와 인기를 누리며, 취미생
아니라, 내가 지금 걷고 있는 이 길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길이라는
활을 즐기고, 여행을 다니는 삶. 그렇게 모두가 꿈꾸는 삶의 모습을 위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해 제게 주어진 시간과 에너지를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원하는 길을 포기한 것이었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을 걷고 좁은 길이 어떤 길일까 고민하며 말씀을 묵상하다가 ‘내가 바라던 것
있다는 사실은 포기가 아니라 순종이 되었습니다. 불편함은 사라진
과 정반대의 길을 가면 그것이 좁은 길이겠다’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
것이 아니라 여전히 있었지만, 그 불편함을 바라보는 제 마음이 달라
었습니다. 그 사이에 여러 긴 응답의 과정들이 있었지만, 결론적으로
져 있었습니다. 그때 조금 알게 되었습니다. 감사는 상황에서 나오는
저는 꿈꾸었던 모든 육신의 삶의 모습들을 하나님 앞에서 내려놓게 되
것이 아니라 내가 누구와 함께, 어떤 길을 걷고 있는지를 아는 데서 나
었습니다. 그리고 시골 오지 마을, 쥐가 나오는 컨테이너 사택에 살며
올 수 있구나.
연로하신 성도님 두 분과 목회를 하던 전도사님과 결혼하여 시골교회 에 사모로 가게 됩니다.
예수님의 삶을 바라보면 그것을 더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 께서 걸으신 길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좋은 삶’의 모습과는 달랐습
결혼 후의 삶은 제가 청년 시절 꿈꾸었던 삶과는 예상대로 정반대였
니다. 사람들에게 환영받고 인정받는 길만을 걸으신 것도 아니었고,
습니다. 비전교회 목회였기 때문에 당연히 물질적으로 부족했습니다.
고난과 배신, 외로움과 십자가를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세상의 기준
시골 오지 마을에 위치해 있어 편의점도 차를 타고 나가야 했고, 대한
으로 본다면 감사할 이유를 찾기 어려운 순간들이 오히려 많았습니
민국에서 그 흔한 배달조차 되지 않았습니다. 타지로 이사를 했기에
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그 길을 걸으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나
친구도, 만날 지인도 전혀 없었습니다.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제 마음
부활에 이르셨습니다.
에는 불편하다거나 외롭고 힘들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늘 기 쁘고 감사했습니다.
그래서 감사는 ‘내 삶에 좋은 일이 생겼기 때문에’ 시작되는 것이 아니 라, ‘내가 지금 어떤 길을 걷고 있는지를 알게 될 때’ 시작될 수 있는 것
감사
나
같습니다. 당장 눈앞의 상황만 보면 감사할 이유가 보이지 않을 때가
그러고 보면 감사의 가장 큰 이유는 결국 ‘무엇을 받았는가’가 아니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걷는 이 길이 생명의 길임을 깨닫는다면, 지금
라 ‘누가 나와 함께 하시는가’에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도 감사할 것
의 상황을 바라보는 눈도 달라집니다. 내가 실패라고 생각했던 일이
이 잘 보이지 않는다면, 잠시 멈추어 예수님을 바라보고 싶습니다. 내
나를 하나님께 더 가까이 데려다준 일이었음을 발견하기도 하고, 내
가 서 있는 이 자리에서 그분이 어디로 나를 이끌고 계시는지, 그리고
가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시간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나를 빚고 계셨
지금까지 나의 걸음을 어떻게 인도해 오셨는지를 다시 바라보고 싶
음을 깨닫기도 합니다.
습니다. 그러면 어쩌면 오늘도 감사할 이유 하나를 발견하게 될지 모 르겠습니다.
그때 감사는 ‘상황이 좋아졌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상황 속 에서도 나를 놓지 않으셨던 하나님을 발견했기 때문에 흘러나옵니다.
좋은 일이 있어서 감사한 것이 아니라, 좋지 않은 순간에도 나를 포기
어쩌면 감사는 내가 가진 것을 세어보는 일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
하지 않으신 하나님 때문에. 내가 잘해서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니라, 내
라, 나와 함께 걸어오신 분을 발견하는 일에서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
가 알지 못하는 순간에도 나와 함께 걸어오신 하나님 때문에. 그래서
르겠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감사가 쉽게 나오지 않는 삶의 자리에 있
오늘의 감사는 상황을 향한 감사가 아니라, 그 모든 상황 속에서 나와
을 때면 억지로 감사의 이유를 만들어내려고 하지 않습니다. 대신 예
함께하신 하나님을 향한 감사입니다.
수님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분이 걸으셨던 길을 생각합니다. 한 걸 음, 또 한 걸음 그분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알게 됩니다. ‘아, 이 자리에도 하나님이 계셨구나.’ 그때 비로소 내가 지나온 길을 다시 바라보게 됩니다. 힘들기만 했다 고 생각했던 시간에 은혜가 있었고,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다고 생각 했던 자리에서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셨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감사는 모든 것이 잘되어 있기 때문에 드리는 고백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내 뜻대로 되지 않아도, 여전히 나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드리는 고백입니다.
감사
감사
돌이켜보면 힘들고 이해되지 않았던 순간에도 하나님은 나와 함께 걸어오셨습니다. 지난 2주간의 여정을 통해 지금까지의 삶을 돌아볼 때, 다시 발견한 감사의 이유는 무엇입니까?
다시 감사챌린지를 시작하며 적었던 나의 마음과 삶의 자리를 다시 떠올려 보세요. 지난 2주 동안 예수님의 삶을 따라 걸으며 그때와 지금, 내 마음에는 어떤 변화 가 있었나요? · 지금 내 마음을 가장 많이 차지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요?
감사
를
다시
감사
· 감사하기 어렵다고 적었던 그 순간을 지금은 어떻게 바라보게 되었나요?
사 감사
· 이번 여정을 통해 다시 발견한 감사는 무엇인가요?
를
다
월드비전 2026 추수감사절 감사노트
감사를 다시 만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