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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고난주간 묵상챌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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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가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내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

2 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를 찾았으며 밤에 내 손을 들고 거두지 아니하였으나 내 영혼이 위로를 받지 못하였도다

3 내가 하나님을 생각하고 불안하여 근심하니 내 심령이

상하도다 (셀라)

4 주께서 나의 눈을 붙들어 깨어 있게 하시니 내가 괴로워 말할 수 없나이다

5 내가 옛날 곧 지나간 세월들을 생각하였사오며

6 밤에 한 나의 노래를 기억하여 마음으로 깊이 생각하니 내 심령이 궁금하도다

7 주께서 영원히 버리실까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실까

8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히 끊어졌는가 그의 약속하심이 대대로 폐하였는가

9 하나님이 은혜 베푸심을 잊으셨는가 노하심으로 그의 긍휼을 그치셨는가 (셀라)

10 또 내가 말하기를 이는 나의 괴로움이라 곧 지존자의 오른손의 해가 변하였도다 하였나이다

11 곧 여호와의 옛적 기사를 기억하리니 주의 옛날 이적을 기억하리이다

12 내가 또 주의 모든 일을 묵상하며 주의 행사를 깊이 생각하리이다

성경에서 ‘기억한다’라는 말은 단순한 정신 작용이

아닙니다. 이는 정보의 저장이나 회상의 기술도 아닙니다.

성경에서 기억은 언제나 관계적이며 신앙적인 행위입니다.

기억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맺은 관계를 현재 속에서

다시 붙드는 일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기억은 늘 행동을

요구합니다. 기억은 마음속에 머무르지 않고, 삶으로

흘러나옵니다.

우리는 흔히 기억을 과거의 일로 여깁니다. 이미 지나간

것,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시간에 대한 회상쯤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기억은 과거에 묶여 있지 않습니다. 기억은

현재를 규정하고 미래를 여는 신앙의 언어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셨는지를 기억하는 순간,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는지를 배우게 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노아를 “기억하셨다”라고 말합니다.

홍수는 여전히 세상을 덮고 있었고, 노아는 방주 안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노아를

기억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잠시 잊으셨다가 다시

떠올리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기억은

언제나 구원의 행동을 동반합니다. 하나님이 기억하시자

바람이 불고, 물이 물러가며, 땅이 다시 드러납니다. 기억은

정지 상태가 아니라 전환의 시작입니다.

이스라엘에게 ‘기억하라’라는 명령이 반복해서 주어진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출애굽을

기억하라고 하십니다. 이는 단순한 역사 교육이 아닙니다.

DAY2 | 오늘의 묵상

“너희가 애굽에서 종이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라는 말씀은, 그 기억을 근거로 지금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묻는 말씀이었습니다. 억압받던 기억을 잊은 민족은, 어느새 억압하는 민족이 됩니다. 기억을 잃어버릴 때, 신앙은 쉽게 권력과 자기 정당화로 변질됩니다.

성경에서 망각은 단순한 실수가 아닙니다. 도덕적

실패이며, 신앙의 붕괴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잊을

때, 그들은 사실을 몰라서가 아니라 감사를 잃어버렸습니다. 감사가 사라진 자리에는 언제나 교만이 들어섭니다. 교만은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는 착각을 낳고, 그 착각은 결국 이웃을 짓밟는 불의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성경은 기억을

‘마음을 지키는 울타리’로 여깁니다.

이 기억의 신학은 예수님의 식탁에서 절정에 이릅니다.

예수님은 떡을 떼시며 “나를 기념하여 이것을 행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기념’이란 단어는 단순한 추억이 아닙니다. 이는 그분의 삶과 죽음에 다시 참여하는 행위입니다. 성찬은 과거를 재현하는 의식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그리스도의 자기 내어주심을 다시 살아내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성찬의 기억은 슬픔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부활을 향해

열려 있는 기억이며, 하나님의 나라를 미리 맛보는 소망의 행위입니다.

기억에는 또한 치유의 능력이 있습니다. 시편의 기도는

우리에게 기억이란 무엇인지를 솔직하게 보여줍니다. 시편의

시인은 기쁨뿐 아니라 고통도 기억합니다. 배신, 상실, 억울함,

그리고 풀리지 않는 질문들을 하나님 앞에 가져옵니다. 성경적

기억은 고난을 지워버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하나님의

신실하심 안에 정직하게 놓아둡니다. 그렇게 기억된 고통은 더

이상 우리를 파괴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기억된 상처는,

하나님의 손에서 다시 다루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기억은 하나의 영적 훈련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매일 선택해야 합니다. 실패의 기억이 나를 규정하도록 둘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 나의 정체성을

말하게 할 것인지를. 두려움이 나의 언어가 되게 할 것인지,

아니면 은혜의 기억이 나의 이야기가 되게 할 것인지. 믿음은

새로운 정보를 끊임없이 덧붙이며 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오히려 잊지 말아야 할 진리로 반복해서 돌아가며

성숙해집니다.

빠르고 산만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기억은 조용한

저항입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요구하지만, 신앙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잊지 말라.”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우리가

누구였는지, 그리고 지금 누구로 부름을 받았는지를 잊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기억은 우리를 뿌리내리게 하고, 흔들리지

않게 하며, 끝까지 사랑하게 만듭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이 고백은 단순한 권면이 아닙니다. 이는 신앙이

스스로에게 건네는 약속이며, 오늘을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결단입니다. 기억하는 신앙만이, 끝까지 믿음으로 살아남을

것입니다.

묵상을 위한 질문

1. 내가 의도적으로 잊고 있었던 하나님의 일은 무엇입니까? 불편하거나 아픈 기억, 혹은 너무 익숙해져서 감사하지 않게 된 하나님의 은혜는 없었는지 돌아보십시오.

2. 지금의 나를

기도문

주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을 다시 기억하게 하소서.

십자가에서 끝까지 사랑하신 은혜를, 아무것도 할 수 없던

자리에서 구원을 시작하신 주님의 신실하심을 오늘의 삶

속에서 붙들게 하옵소서. 두려움과 상처의 기억이 아니라

주께서 행하신 일들이 우리의 정체성과 선택을 이끌게

하시고, 기억하는 믿음으로 부활의 소망을 향해 걷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3일차

| 오늘의 말씀

57 여호와는 나의 분깃이시니 나는 주의 말씀을 지키리라 하였나이다

58 내가 전심으로 은혜를 구하였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59 내가 내 행위를 생각하고 주의 증거들을 향하여 내 발길을

돌이켰사오며

60 주의 계명을 지키기에 신속히 하고 지체하지

아니하였나이다

61 악인의 줄이 나를 두루 얽었을지라도 나는 주의 법을

잊지 아니하였나이다

62 내가 주의 의로운 규례들로 말미암아 밤중에 일어나

주께 감사하리이다

63 나는 주를 경외하는 모든 자들과 주의 법도들을 지키는

자들의 친구라

64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땅에 충만하였사오니 주의

율례들로 나를 가르치소서

사순절은 속도를 늦추는 계절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잠시 멈추어 서서 방향을 묻는 시간입니다. 이 기간 동안

교회는 우리에게 더 많은 일을 하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조용히 묻습니다. “당신은 지금 어디를 향해 가고

있습니까?”

성경에서 돌아봄과 회개는 감정의 격앙이나 후회의

반복이 아닙니다. 단순한 자기 성찰도 아닙니다. 눈물의 양이나

죄책감의 깊이로 회개의 진정성이 측정되지는 않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회개는 언제나 방향의 전환입니다. 히브리

성경과 신약 성경 모두에서 회개는 “돌아오라”라는 초청의

언어로 들려옵니다. 잘못을 인정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하나님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일, 그것이 회개입니다.

시편 기자는 말합니다. “내가 내 행위를 생각하고.” 여기서 ‘생각하다’라는 말은 가볍지 않습니다. 이는 자신의 삶을 잠시

멈추고,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펼쳐 놓는 일입니다. 변명도, 자기 합리화도 내려놓고 자신의 발걸음을 그대로 바라보는

일입니다. 성경은 이런 멈춤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자주 당신의 백성에게 멈추어 서서 돌아보라고

요청하십니다.

그러나 “내가 내 행위를 생각한다”라는 이 고백은 용기를

요구합니다. 우리는 대개 자신의 삶을 깊이 들여다보는 일을

피하며 살아갑니다. 바쁨은 훌륭한 방패가 되어 주고, 익숙한

습관은 질문을 무디게 만듭니다. 하지만 사순절은 우리를 그

방패 뒤에서 조용히 불러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삶을 정직하게 펼쳐 놓고 묻게 합니다. “나는 어떤 마음으로 살아왔는가?”, “무엇이 나를 이끌어 왔는가?”

그러나 이 묵상은 자기 성찰로 끝나지 않습니다. 시편 기자는 곧바로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의 증거들에게로 내 발길을 돌이켰사오며.” 돌아봄은 자기 자신을 향한 시선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향한 방향 전환입니다. 회개는 자기비판이 아니라, 언제나 하나님 쪽으로, 말씀

쪽으로, 순종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결단을 포함합니다. 그래서 사순절의 회개는 절망이 아니라 희망의

언어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완벽해지기를 기다리시지

않습니다. 다만 잘못된 길에서 돌아서기를 기다리십니다.

돌아설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은혜입니다. 방향을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은, 아직 우리의 길이 끝나지 않았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종종 삶 그 자체가 아니라 방향입니다.

우리는 열심히 살고 있지만,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는 묻지 않습니다. 분주하지만 성찰하지 않고, 계속 움직이지만 돌아보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마음이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고, 발걸음이 말씀과 어긋난 길을 걷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돌아봄과 회개는 하나의 영적 훈련입니다. 하루의

끝에서, 혹은 인생의 한 고비에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무엇을 사랑하며 살고 있는가?”, “무엇이 나의

선택을 이끌고 있는가?”, “나의 시간과 에너지는 무엇을 향해

흘러가고 있는가?” 이 질문들은 우리를 정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다시 길 위에 세우기 위한 은혜의 질문입니다.

사순절은 십자가를 향해 걷는 시간입니다. 그 길은

화려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 부인과 침묵, 그리고 솔직한

고백의 길입니다. 그러나 이 길의 끝에는 정죄가 아니라

회복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실패를 폭로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 아니라, 돌아오는 자를 맞이하기 위해

세워진 표지판입니다.

“내 발길을 돌이켰다”라는 고백은 하루아침에 완성되지

않습니다. 돌아봄은 느린 작업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느림

속에서 신앙은 깊어집니다. 그것은 매일의 선택이며, 반복되는 결단입니다. 사순절 동안 우리는 하루하루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 오늘도 제 마음의 방향을 살펴 주소서.” “제가 다시 주의

말씀을 따라 걷게 하소서.”

회개는 신앙의 후퇴가 아닙니다. 오히려 회개는 믿음이

다시 길을 찾는 방식입니다. 사순절의 침묵 속에서 우리는

다시 묻고, 다시 돌아서며, 다시 걷습니다. 그리고 그 길

위에서, 하나님은 언제나 이미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묵상을 위한 질문

1. 최근 내 삶의 선택들은 어떤 방향을 향하고 있었나요?

2. 내가

주님, 사순절의 이 시간에 제 걸음을 멈추게 하시고 제 마음의

방향을 정직하게 보게 하소서. 은혜로 저를 부르시는 주의

음성을 듣게 하시고, 다시 말씀을 따라 걷는 용기를 주소서.

십자가 길에서 새 생명을 배우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4일차

잠언 16:1-9 수요일

1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부터 나오느니라

2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

3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

4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5 마음이 교만한 자는 여호와께 미움을 받나니 피차 손을

잡을지라도 벌을 면하지 못하리라

6 인자와 진리로 죄악이 속하게 되고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말미암아 악에서 떠나게 되느니라

7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의 원수라도 그와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

8 적은 소득이 공의를 겸하면 많은 소득이 불의를 겸한 것보다 나으니라

9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순종을 말할 때 우리는 흔히 크고 결단적인 장면을

떠올립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는 순간, 극적인 결심, 단번에

삶의 방향을 바꾸는 선택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순종은 대체로 그렇게 거창하지 않습니다. 성경의 순종은 대부분

작고 조용한 한 걸음으로 시작됩니다. 눈에 띄지 않고, 박수받지

않으며, 때로는 확신보다 떨림을 동반한 발걸음입니다. 잠언은

말합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이 말씀은 인간의

계획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생각하고 계획하며 선택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우리의 계획보다 더 깊은 차원에서

일하시는 분이 계심을 상기시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인생을 한꺼번에 펼쳐 보여 주시지 않습니다. 대신 오늘의 한 걸음을 인도하십니다.

순종이 어려운 이유는 우리가 종종 전체 지도를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묻고 싶어 합니다. “이 길의 끝은

어디입니까?”, “이 선택이 어떤 결과를 낳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대개 그 질문에 답하시지 않습니다. 대신 말씀하십니다.

지금, 여기에서 나와 함께 걸을 수 있겠느냐고.

성경에서 순종은 언제나 신뢰와 연결됩니다. 아브라함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길을 떠났습니다. 모세는 말이 서툰

자신을 안고 바로 앞의 한 발걸음을 내디뎠습니다. 베드로는 물

위를 끝까지 이해하지 못한 채 배에서 발을 내렸습니다. 이들의

순종은 완벽한 이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DAY4 | 오늘의 묵상

신뢰에서 시작된 작은 움직임이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순종을 완성된 상태로 생각합니다. 충분히

준비된 후, 모든 의문이 해소된 다음에야 비로소 순종할 수 있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성경은 다른 그림을 보여 줍니다. 순종은

준비의 끝이 아니라, 배움의 시작입니다. 순종하는 가운데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조금씩 알게 됩니다. 걸어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길들이 있습니다.

경건한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순종은 대개 사소해 보이는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오늘의 말 한마디, 미루고 싶었던

용서, 외면하고 싶었던 진실, 지나치고 싶었던 기도의 시간. 이런 작은 선택들이 쌓여 한 사람의 영적 방향을 만듭니다. 순종은

위대한 업적보다 일상의 방향성에 더 깊이 관여합니다.

그래서 순종은 종종 느립니다. 즉각적인 성취나 가시적인

성과를 보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느림 속에서 신앙은 깊어집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속도를 재촉하지 않으시되,

방향에는 분명함을 요구하십니다. 빠르지 않아도 좋습니다. 다만 하나님 쪽으로 향한 한 걸음이기를 원하십니다.

순종은 또한 실패의 가능성을 포함합니다. 작은 한 걸음을 내딛는다는 것은 넘어질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순종하지 않음으로 안전해지는 길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넘어질 위험을 감수하며 걷는 자리에서 우리를 만나십니다. 순종의 길에서 우리는 자신의 연약함을 더 깊이 알게 되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신실하심도 더 분명히 경험합니다.

잠언의 말씀은 우리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이 여호와이심을

말합니다. 이는 모든 책임을 하나님께 떠넘기라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작은 순종 위에 하나님의 크신 인도하심이

겹쳐진다는 고백입니다. 우리는 한 걸음을 내딛고, 하나님은 그

걸음을 길로 만드십니다.

오늘 우리에게 요구되는 순종은 거대한 결단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단순히 한 번 더 기도하는 일, 한 번 더 기다리는

일, 한 번 더 사랑하기로 선택하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작은 순종을 가볍게 여기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한 걸음을 통해 우리의 삶 전체를 이끌어 가십니다.

순종은 결국 삶을 하나님께 맡기는 방식입니다. 모든 것을

이해하지 못해도, 모든 것이 분명하지 않아도, 오늘의 한 걸음을

하나님께 드리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길 위에서 우리는 알게

됩니다. 우리가 길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를

위해 길을 예비하고 계셨음을. 유진 피터슨의 유명한 문구처럼

말입니다. “같은 방향으로 오랫동안 순종하기”(long obedience in the same direction).

묵상을 위한 질문

1. 오늘 하나님께서 내게 요구하시는

2.

기도문

주님, 큰 결단보다 작은 순종을 오늘 제 삶 속에서 살아내게 하소서. 모든 길을 보려 하기보다 오늘의 한 걸음을 주께

맡기게 하시고, 그 걸음 위에 주의 인도하심을 더하여 주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5일차

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11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고난주간은 사랑을 다시 정의하는 시간입니다.

우리가 익숙하게 사용하는 ‘사랑’이라는 말이 얼마나 쉽게

가벼워지는지를, 이 주간은 조용히 폭로합니다. 고난주간에

드러나는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사건이며, 말이 아니라

행동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인간을 향해 걸어오신 시간이며,

동시에 인간을 통해 다시 세상으로 흘러가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시간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이 한 문장은

사랑의 모든 조건을 무너뜨립니다. 사랑받을 자격이 생겼을

때가 아니라, 변화된 이후가 아니라,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의 반응을 기다리지 않습니다. 이는 먼저 다가오고, 먼저 감당하며, 먼저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입니다.

고난주간에 우리가 바라보는 십자가는 바로 이 사랑의

방식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

자리이지만, 동시에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자리입니다.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시고, 설명으로 설득하지 않으시며,

오히려 침묵 속에서 고난을 감당하시는 하나님을 우리는 그곳에서 만납니다. 이 사랑은 세상이 말하는 성공이나

효율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러나 성경은 바로 이 자리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확증되었다”라고 말합니다.

사랑은 하나님이 나에게 일하시는 시간입니다. 십자가

앞에 설 때 우리는 깨닫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나의

연약함과 실패를 통과해 왔다는 사실을. 그 사랑은 나를

평가한 뒤에 주어진 보상이 아니라, 나를 살리기 위해 감당된

희생이었다는 사실을. 그래서 고난주간의 묵상은 자기 성찰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는 나를 향한 하나님의 일하심을 다시

바라보는 시간입니다.

그러나 이 사랑은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나 흘러가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을 주시는 데서 만족하지 않으시고, 그 사랑이 사람을

통해 다시 움직이기를 원하십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감동시키기 위해 세워진 기념물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기 위해 세워진 부르심입니다.

고난주간에 우리는 자주 질문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 나에게 어떤 사랑을 감당하게 하시는가?” 그리고 “그

사랑은 누구를 향해 흘러가야 하는가?” 십자가의 사랑은

추상적인 감정이 아니라, 구체적인 선택으로 드러납니다. 용서하기 어려운 사람을 향한 인내, 외면하고 싶었던 고통을 함께 짊어지는 용기, 침묵 속에서도 진실을 붙드는 태도.

이런 선택들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통해 일하시는 시간입니다.

예수님은 고난주간 동안 제자들에게 많은 말을 남기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몸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발을 씻기셨고, 빵을 떼셨으며, 끝내는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사랑은 설명될 수

없을 때, 가장 분명해집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받은 사람은 더

이상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살 수 없습니다.

고난주간의 사랑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그 사랑은 나를 중심에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배우게 됩니다. 사랑은 나의 안전을 지키는 일이

아니라, 때로는 나의 안전을 내려놓는 일이라는 것을. 사랑은

감정을 따르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며 순종하는

일이라는 것을.

그래서 고난주간은 사랑을 연습하는 시간입니다.

거창한 행동이 아니라, 오늘 내가 감당해야 할 작은 십자가를

DAY5

받아들이는 시간입니다. 말 대신 경청으로, 판단 대신

기다림으로, 무관심 대신 동행으로 사랑이 구체화되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사랑으로 일하고 계시며, 그 일하심에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나에게 일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이미 십자가에서 충분히

드러났습니다. 이제 고난주간은 그 사랑이 나를 통해 다시

세상으로 흘러가도록 허락하는 시간입니다. 사랑은 여전히 고난의 한복판에서 가장 깊이 일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통해 조용히 일하고 계십니다.

묵상을 위한 질문

1. 고난주간에 내가 다시 바라보아야

2.

3.

주님, 십자가에서 나에게 보여 주신 사랑을 다시 바라보게

하소서. 그 사랑에 머무르는 데서 멈추지 않고, 나를 통해

흘러가게 하소서. 고난을 피하지 않되, 사랑 안에서 감당하게

하시고, 오늘도 주께서 일하시는 시간에 저를 사용하여 주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6일차

18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19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20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23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25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고난주간은 소망을 말하기에 가장 어울리지 않는

시간처럼 보입니다. 교회는 십자가를 바라보고, 침묵과 어둠,

배신과 고통을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이

주간은 모든 것이 닫히는 시간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시간

한가운데서 오히려 소망을 배우라 하십니다. 성경이 말하는

소망은 상황이 좋아질 것이라는 낙관이 아니라, 하나님이

미래를 여실 것이라는 신뢰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여기서 소망은 아직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이 소망이라면, 이미 소유한 것이지

더 이상 기다릴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성경적 소망은 언제나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향해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점에서

고난주간은 소망의 학교가 됩니다.

십자가 앞에서 제자들은 미래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보았던 것은 실패처럼 보이는 죽음, 모든 기대가 무너진

현재였습니다. 예수님의 길은 그들의 기대와 너무 달랐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그들이 보지 못한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이미 미래를 열고 계셨다고. 십자가는 끝이 아니라

하나님이 여시는 새로운 시작의 문이었습니다.

성경에서 소망은 고난 이후에 덧붙여지는 위로가

아닙니다. 소망은 고난 속에서 자라납니다. 로마서 8장은

탄식하는 피조물과 신자들의 현실을 숨기지 않습니다.

신음하고 기다리며, 아직 완성되지 않은 구원의 시간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바로 그 한가운데서 바울은 말합니다.

“우리는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다.” 소망은 고난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고난을 하나님의 미래 안에 위치시킵니다.

고난주간에 우리가 배우는 소망은 그래서 조용합니다.

이는 큰 소리로 외쳐지지 않습니다. 부활의 환호는 아직

이릅니다. 그러나 이 조용함 속에서 신앙은 중요한 진리를

배웁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언제나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속도와 방식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 이미 다음 장을 쓰고 계십니다.

소망은 하나님이 여시는 미래를 바라보는 눈입니다. 그

눈은 현재의 어둠을 부정하지 않지만, 그 어둠이 전부라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고는 부활을 말할

수 없듯이, 고난주간의 소망은 언제나 인내를 동반합니다.

기다림은 소망의 본질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문제는 종종 소망을 성급히 확인하려는 데 있습니다. ‘희망 고문’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결과를 보고 싶어 합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실지, 언제 바꾸실지, 어떤 모습으로 응답하실지를 알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소망은 보는 것이 아니라 바라는 것이라고. 하나님이 여시는 미래는 인간의 계산으로 미리 소유할 수 없습니다.

다만 신뢰로 기다릴 뿐입니다.

고난주간은 이 기다림을 배우는 시간입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토요일의 침묵 속에서,

신앙은 흔들립니다. 그러나 바로 그 침묵의 시간은 하나님이

일하지 않으시는 시간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장 깊은 준비가

이루어지는 시간입니다. 소망은 이 침묵을 견디는 힘입니다.

소망은 또한 우리를 현재로부터 도피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성경적 소망은 현실을 견디게 합니다. 십자가의

고난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그 고난이 마지막 말이 아니라는

사실을 붙들게 합니다. 그래서 소망은 현실 감각이 없는

낙관이 아니라, 현실을 끝까지 살아내게 하는 믿음의 힘입니다.

고난주간의 소망은 부활절을 미리 앞당겨 소유하려

하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여실 미래를 신뢰하며 오늘을

살아갑니다. 오늘의 눈물, 오늘의 침묵, 오늘의 기다림을

하나님께 맡깁니다. 그리고 고백합니다. 나는 아직 보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이미 보고 계신다고.

소망은 우리가 여는 미래가 아니라, 하나님이 여시는

미래를 바라보는 태도입니다. 그 미래는 십자가를 통과해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래서 고난주간의 소망은 값싸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무게 속에서, 소망은 가장 깊고

단단해집니다.

묵상을 위한 질문

1.

2.

3.

기도문

주님,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게 하소서. 십자가 앞에서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보일 때에도 하나님이 여시는 미래를

신뢰하게 하소서. 서두르지 않고, 도망치지 않고, 기다림

속에서 소망을 배우게 하시고, 오늘의 고난을 주의 약속 안에

맡기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히브리서 12:1-2)

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사순절과 고난주간 묵상은 멈추는 시간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는 기억했고, 돌아보았으며, 순종을 배웠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았고, 보이지 않는 미래를 소망하며

기다리는 법을 익혔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여정의 끝을

‘정지’로 남겨 두지 않습니다. 고난주간의 침묵은 다시 걷기 위한

침묵입니다. 십자가는 신앙의 종착지가 아니라, 변화된 삶으로

나아가는 출발점입니다.

먼저, 고난주간은 멈추어 서는 시간입니다.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말수를 줄이며, 하나님의 고난을

바라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멈춤이 목적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고난주간은 끝내 다시 걷기 위해 멈추는 시간입니다.

십자가는 신앙의 종착지가 아니라, 변화된 삶으로 나아가는

출발선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장에서 “그러므로”라는 말로

새로운 단락을 엽니다. 이 짧은 접속사는 매우 무겁습니다. 이

한 단어에는 앞선 모든 복음의 무게가 실려 있습니다. 로마서

앞부분에서 바울은 죄와 은혜, 심판과 자비, 십자가와 부활을

충분히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삶이

달라져야 한다고. 십자가와 부활의 은혜를 경험한 삶은 반드시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다시 말해, 구원은 멈추게

하지만, 동시에 다시 걷게 합니다.

바울은 변화된 삶을 “몸을 드리는 예배”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예배는 예배당 안에서 드려지는 행위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삶 전체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입니다. 고난주간

이후의 신앙은 감정의 여운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이는

일상의 자리에서, 몸으로 드러나는 순종으로 이어집니다.

다시 걷는다는 것은,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살지 않겠다는 결단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변화를 단순한 결심이나 의지의

문제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 다시

걷는 길에는 늘 유혹이 따릅니다. 이전의 익숙한 방식, 세상이

제시하는 안전한 길, 남들과 다르지 않게 사는 편안함이 우리를

붙잡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합니다. 변화는 겉모습이 아니라 마음이 새로워지는 데서 시작된다고. 고난주간의 묵상은

이 지점에서 우리를 정직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보며 감동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이후에도

여전히 같은 욕망, 같은 두려움, 같은 방식으로 살아간다면, 우리는 아직 다시 걷지 않은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변화는

서서히, 그러나 분명하게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다시 걷는 삶은 단번에 완성되지 않습니다. 이는 작은

걸음들의 연속입니다. 말 한마디를 삼키는 선택, 손해를 감수하는 정직, 용서하지 못할 것 같던 사람을 향한 기도. 이런

작고 느린 걸음 속에서 신앙은 현실이 됩니다. 하나님은 완벽한

변화를 요구하시기보다, 방향이 바뀐 삶을 기뻐하십니다.

고난주간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십자가를 지나온 당신은

이제 어디로 가고 있는가?”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 역시

십자가 이후 혼란에 빠졌습니다. 그들은 다시 예전의 길로 돌아가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은 그들을 다시 불러 세우셨고, 다시 걷게 하셨습니다. 실패와 두려움이 있었지만, 그들의 걸음은 이전과 같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라.” 다시 걷는

삶은 정해진 지도 위를 걷는 것이 아닙니다. 매 순간 분별이

필요합니다. 무엇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길인지, 무엇이 나를

다시 옛길로 끌어당기는지를 살피는 영적 감각이 요구됩니다.

고난주간의 침묵은 바로 이 분별을 배우는 시간입니다.

다시 걷는다는 것은 완전히 새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를 기억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한다”라고

말합니다. 변화는 정죄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변화는 자비에서

나옵니다. 십자가 앞에서 경험한 자비가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웁니다.

사순절과 고난주간 묵상을 마치며 돌아봅니다. 사순절은

우리를 십자가로 이끌었고, 고난주간은 십자가 앞에 머물게

했으며, 이제 복음은 우리를 삶으로 다시 보내십니다.

고난주간의 끝에서 우리는 부활을 기다립니다. 그러나

그 기다림은 멈춤이 아니라 준비입니다. 다시 걷기 위한 준비입니다. 이제 우리는 묻습니다. “십자가를 지나온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고난주간은 우리를 멈추게 했지만, 부활을

향한 기다림은 우리를 다시 길 위에 세웁니다. 느리더라도,

흔들리더라도, 방향이 분명한 삶의 길로 걸아가야 합니다.

십자가를 지나온 삶은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시 걷되, 변화된 마음으로, 다른 방향으로

걸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길 위에서,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와

함께 걸으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믿습니다.

묵상을 위한 질문

1.

2.

기도문

주님, 기억하게 하시고, 돌아보게 하시며, 순종과 사랑, 소망을

배우게 하신 은혜를 감사합니다. 십자가 앞에서 멈추게 하시고

다시 걷게 하시는 은혜를 감사합니다. 이전과 같은 방식이

아니라 새로워진 마음으로 주의 뜻을 분별하며 걷게 하소서.

느리더라도 방향이 분명한 삶으로 오늘도 한 걸음을 내딛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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