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신문 THE MIJUCHOSUN E*NEWS









































































‘바래’는 어머니들이 갯벌에서 조개, 미역, 고둥 등 해산물을 캐던 노동을 일 컫는 남해 토속어이다.
엄마들이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걸었던 ‘남해바래길’ 위에서 산, 바다, 다랑논, 죽방렴, 그리고 순박한 인정을 만난다.
◇바래길 7코스 화전별곡길
걷기의 보편화는 강릉 바우길, 부산 갈맷길 등 브랜드화된 도보여행 길을
등장시켰다.
‘꽃밭’ ‘보물섬’ 등으로 불리는 남해 섬을 한 바퀴 도는 둘레길인 남해바래
길도 그중 하나다. 총 263㎞, 27개 코스 에 이른다. 이 중 7코스인 화전별곡길은
경상남도 남해군 대표 관광 명소로 꼽 히는 독일마을을 지난다.
조선 초 남해에 유배돼 왔던 문신 김
구(1488∼1534)가 남해를 화전(花田, 꽃밭)이라고 예찬한 데서 길 이름이 유 래했다.
화전별곡길은 물건마을에서 시작해 독일마을을 지나 원예예술촌, 봉화, 내 산, 바람흔적미술관, 남해힐링숲타운, 국립남해편백자연휴양림, 천하마을로 이 어진다. 거리는 약 17㎞이다.

1 독일광장 시계탑 2 독일마을을 지나는 남해바래길 7코스.
전 구간을 걷기 어렵다면 물건마을에서 편백자연휴양림까지만 걸어도 좋을 듯하다.
이 구간만도 약 10㎞에 이른다. 곳곳의 볼거리로 인해 남해의 자연, 문 화, 역사를 느낄 수 있다. 청량감을 느끼게 하는 휴양림 편백숲 임
도를 따로 찾는 ‘뚜벅이’도 적지 않다. 화전별곡길의 출발점은
이 숲은 바다에 그늘을 드리우는데, 그늘을 플랑크톤 무리로 오인한 물고기 들이 모여든다고 한다. 물건리 숲은 방조림과 어부림의 역할 을 모두 해 방조어부림으로 불린다. 17세기에 조성됐다. 숲의 길이는 750m, 너비는 40m, 나무들의 높이는 10∼15m이다. 남해에는 침엽수가 많은데 방조어부 림에는 낙엽활엽수인 팽나무, 푸조나 무, 참느릅나무, 말채나무, 상수리나무, 느티나무, 이팝나무와 상록수인 후박나 무가 주를 이루고 있다. 이 숲은 2002 년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아름다 운 마을 숲’, 2006년 한국내셔널트러스 트 보전대상지 시민공모전에서 ‘잘 가 꾼 자연·문화유산’으로 선정됐다. ⇬7면으로 이어집니다

하늘에서 본 물건리 방조어부림 2 방조어부림 산책로.

장)에서 열린다.
◇‘용기’와 ‘창의’의 서사가 흐르
는 독일마을
‘한국 속 독일’이란 어떤 곳일까.
남해독일마을에는 몇 가지 특별함
이 있다.
우선 1960∼1970년대 파독 광부
와 간호사들이 귀국해 독일 문화
를 유지하며 실제 거주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둘째 지방자치단체가 성공시킨 해외 교포 이주 사업의 드문 사례
라는 점이다.
셋째 물건방조어부림과 새파란
남해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자리
잡고 있어 풍광이 아름답다. 넷째
교포 이주 사업이 관광업과 연결돼
이국적인 레스토랑, 카페, 민박 등
이 성업 중이라는 점이다.
1995년 지방자치제 본격 실시
이후 선출된 김두관 초대 민선 군
수는 외국에서 무엇이든 배워 오라
며 무작정 공무원들에게 해외 배낭
여행을 시킨다.
독일로 간 팀은 파독 광부와 간
호사들로부터 귀국해 고국에서 살
고 싶다는 말을 듣고, 돌아와 이를
보고한다.
이것이 파독 근로자 귀국 정착
사업의 시작이었다.
남해군은 10여 차례 독일을 방 문, 투자 유치 설명회를 열어 수 십 명으로부터 투자 의향을 받아 냈다.
교민들은 남해 곳곳을 돌아본
뒤 물건리 바다가 보이는 다랑논
지형의 언덕을 새 삶의 터전으로
직접 선택했고 남해군은 택지 조
성 후 땅을 분양했다.
교민들은 독일에서 직접 건축자
재를 들여와 전통 독일 양식으로
집을 짓고 독일에서 영위했던 생활
양식과 문화를 이어갔다.
오랫동안 살았던 독일을 새 터에
서도 느끼기 위해서였다.
2002년 독일마을이 문을 열었
을 때 이곳으로 이주한 독일 교민
은 30여 세대였다.
여기에는 한국인 간호사와 결혼
한 독일 남성들도 포함돼 있었다.
지금은 일부가 고령으로 별세하 거나 다른 곳으로 이사해 20여 세
대가 남아 있다.
2013년부터는 독일 교민이 아닌
일반인의 입주도 가능해졌다.
독일마을은
즐기려 는 관광객들로 붐빈다. 이 마을의 맥주 축제는 독일 뮌
2010년부터 시작된 이 축제는 남 해군의 대표 축제로 자리 잡았다.
◇글뤽 아우프(Gluck Auf, 살아 서 돌아오라)!
광장에 있는 파독 전시관은 파
독 광부와 간호사들이 8천㎞ 떨
어진 낯선 땅에서 감내해야 했 던 삶과 애환, 고향과 가족을 향 한 그리움, 그들이 남해 독일마을 에서 연 ‘인생 2막’ 이야기를 담 고 있다.
전시관에 설치된, 지하 1천200m 깊이까지 내려가는 탄광 갱도 모
형 옆의 스피커에서는 ‘글뤽 아우 프’(Gluck Auf)라는 외침이 쉴 새 없이 울려 퍼진다. ‘무사히 살아서 돌아오라’라는 뜻이다.
1960년대 태국, 필리핀의 1인당 국민소득이 각각 220달러, 170달러 였을 때 한국은 76달러였다.
1963년 8월, 서독 루르 광업소에 서 일할 광부 500명을 모집한다는 신문 광고에 온 나라가 술렁였다. 월급은 600마르크. 한국 직장인 평균 월급의 10배였다. 지원자는 4 천600여명, 경쟁률은 92대1이었다.
이렇게 해서 7천936명의 광부가 독일로 건너갔다.
석탄 가루와 30도 이상의 지열로 숨쉬기조차 힘들었던 탄광에서 한 국 청년 70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1966년부터는 간호사도 파견 됐다.
이들이 벌어들인 외화는 1억153
만달러로 한국에서 고속도로, 공장 등을 짓는 데 기여했고, 한국은 독 일 ‘라인강의 기적’에 견주는 ‘한강 의 기적’을 이룰 수 있었다.
◇피톤치드 풍부한 편백 휴양림
남해편백자연휴양림은 울창한 편백 숲에 자리 잡고 있다.
남해 본섬에서 유일하게 바다가
보이지 않는 곳, 섬 속의 육지라는
내산마을에 자리 잡고 있다.
휴양림 산자락에는 피톤치드 발
산량이 많은 편백, 소나무와 함께
단풍나무가 군락을 이룬다.
피톤치드는 숲속 식물들이 만들
어 내는 살균성 물질을 통틀어 지
칭한다.
사람의 심신을 안정시키고 건강 하게 만든다.
이 휴양림은 남해군에서 단풍이 화려한 곳으로 이름이
미술관은 예술 작품
물론 저수지를 바라보며 넋 놓고 물 구
경하기 좋은 곳이었다.
남해힐링숲타운은 얼마 전까지 만 해도 나비생태공원이었다.
숲의 치유 효과에 대해 높아지는
대중 관심을 반영해 힐링숲타운으
로 리모델링했다.
나비 생태관은 여전히 운영되고
있어 나비에 관한 흥미로운 자료와
전시를 만날 수 있다.
알이 애벌레, 번데기 과정을 거
쳐 나비가 되어 날 수 있는 확률은 2%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나비는 1만6천800여종이 전 세
계에 분포돼 있다. 현재까지 확인
된 한반도 서식 나비는 남북한을
합해 264종이다.
지구온난화의 영향으로 꿀벌과
마찬가지로 나비 개체 수도 급감하
고 있다고 한다.
벌, 나비 감소로 인해 식물이 수
분을 하지 못하면 식물 종과 개체
수가 줄어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구에서 가장 많은 에너지를 만
드는 주체는 사람이나 동물이 아니
라 식물이다. 식물은 햇빛과 이산
화탄소를 이용해 막대한 양의 전분
을 만든다.
식물이 감소하면 지구가 멸망할
수도 있다고 하는데 그저 이론이나
가설에 지나지 않길 바랄 뿐이다.
◇세계중요농업유산으로 등재된
죽방렴 멸치잡이
죽방렴은 대나무로 만든 발, 그
물이라는 뜻이다.
남해 특산품 중 하나는 죽방
렴 멸치, 즉 죽방렴으로 잡은 멸
치이다.
죽방렴 어업은 남해 지족해협의
거센 물살을 이용한 전통 어로 방
식이다.
‘대나무 어사리’라고도 부른다.
좁은 물목에 참나무 지지대 300
여개를 갯벌 속에 박고 대나무 발
을 조류가 흐르는 방향과 거꾸로 해서 V자 모양으로 벌려 둔다.
밀물 때 물살을 따라 들어온 물
고기가 썰물 때 빠져나가지 못하고
죽방렴의 원형 임통에 가두어지면
잡아들인다.
죽방렴에 포획되는
현 재까지 지속 발전했다. 해수부는 2015년 죽방렴어업을 국가중요어업유산으로 지정한 바 있다.
남해 지족해협에는 현재 총 23 개의 죽방렴이 있다. 남해 지족해 협 죽방렴어업은 2025년 11월 세 계식량농업기구(FAO)에서 지정하 는 세계중요농업유산으로 등재됐 다.
죽방멸치길은 바래길6코스로,
코스 화전별곡길과
지족해협은 화전별곡길에서 멀 지 않다. 청정 바다의 죽방렴 현장을 찾아 보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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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적 관객 2억명은 제가 잘해서가 아니
라 운이 좋았던 덕분입니다. 좋은 작품, 좋
은 감독, 좋은 스태프를 만난 덕분이고, 무
엇보다 관객들에게 감사한 마음입니다.”
국내 영화사상 처음으로 출연한 영화들
의 누적 관객 2억명 돌파라는 기록을 세운
부산 출신 배우 오달수(사진)의 말이다. 5일 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입장권통합
전산망에 따르면 오달수는 지난해까지 괴 물(1천300만명), 도둑들(1천298만명), 7번 방의 선물(1천281만명), 변호인(1천37만 명), 국제시장(1천426만명), 베테랑(1천341 만명), 암살(1천270만명), 신과 함께-죄와 벌(1천440만명) 등 천만 영화 8편을 비롯 한 작품 60여편에 출연해 누적 관객 수 1 억9천만여명을 기록했다.
또 최근 개봉한 ‘왕과 사는 남자’ 관객 수
1천500만명을 돌파하는 흥행 돌풍을 일으
켜 오달수의 누적 관객 수는 2억명을 훌 쩍 넘기며 ‘흥행 보증수표’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오달수는 1990년 부산에 있는 극단 ‘연희
단거리패’에서 연기를 시작한 것을 계기로
연극과 영화를 넘나들며 존재감을 뽐냈다.
개성 있는 외모와 친근한 연기, 자연스러
운 캐릭터 표현 등이 강점으로 꼽힌다.
특히 2003년 영화 ‘올드보이’에서 사설
감옥 간수 역할로 영화계에 강한 인상을
남겼고, 2015년에는 영화 ‘국제시장’에 출
연하며 한국 영화사 최초로 누적 관객 수
1억명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왕과 사는 남자’에도 조연이지만, 정감
있는 연기로 존재감을 뽐냈다.
오달수는 “영화가 코로나19 팬데믹(세
계적 대유행) 때부터 하향길이었는데 ‘왕

사남’은
양조집 딸 다슬(김승윤 분)은 막걸리를
너무나 사랑하는 18살 소녀다.
빈 화장품에 막걸리를 넣고 학교에서 몰
래 마실 정도로 막걸리를 좋아해 조그만
시골 동네에 소문이 다 났을 정도다.
다슬은 어느 날 막걸리 맛이 변했다는
걸 알아차린다. 그 원인이 막걸리 주재료인
누룩의 실종이라는 것을 알게 된 다슬은
사라진 누룩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된다. 그
런 그를 친오빠 다현(송지혁)을 비롯해 누
구도 이해하지 못한다.
“제가 믿고 있는 것에 용기를 얻어 힘 있
게 끝까지 살아갔으면 하는 마음을 관객들
이 얻어갔으면 하는 바람으로 영화를 만
들었습니다.”
배우 장동윤은 감독으로서 처음 선보이 는 장편 영화 ‘누룩’의 의도가 관객에게 믿
싶었
다”고 말했다. ‘누룩’은 양조집 딸 다슬이 사라진 누룩 을 찾아 나서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다슬
이 누룩에 집착하는 모습은 이해받지 못하
지만, 다슬은 잃어버린 소중한 누룩을 끝
까지 찾아 나선다.
장 감독은 코로나19 팬데믹 시절 영화를
처음 구상했다며, 막걸리와 누룩이라는 소
재로 작품을 만들고 싶었던 게 제작의 출 발점이었다고 돌아봤다.
그는 “사스(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
군)가 유행하던 때 ‘김치를 먹으면 다 낫는 다’는 얘기가 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래 서 막걸리가 질병을 다 치료한다는 발상으 로 가벼운 블랙코미디를 만들려고 했다”며 “그러다가 사람에게 집중하게 됐고 휴머니 즘이 있는 영화를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 에 시나리오를 썼다”고 했다. 장 감독은 ‘누룩’에 앞서 2023년 단편 ‘ 내 귀가 되어줘’를 먼저 선보인 바 있다. 그는 연출을 하게 된 계기에 관해 “거창 한 꿈을 갖고 시작한 게 아니다. 배우 활동 을 시작하면서 창작하고 싶다는 욕심이 점 점 많아졌다”며 “한 단계씩 밟아가며 하 게 됐고 개봉하게 돼 감격이 더 크다”고 기뻐했다. 다슬 역의 주연 김승윤은 장 감독의 단 편 ‘내 귀가 되어줘’에 이어 ‘누룩’까지 함 께했다. 그는 “‘누룩’ 대본이 술술 읽혔다. 슬프고 기쁘고 불안한 감정들이 다 느껴졌다”며 “
다슬이 귀여운 애라고 느끼며 스토리에 더 집중했다”고 했다. 장동윤과 작업한 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