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opyright ⓒ 2023 by Wm. B. Eerdmans Publishing Co.
Originally published in English under the title
The Letter to the Ephesians by Constantine R. Campbell
Published by Wm. B. Eerdmans Publishing Co.
2006 44th Street SE Grand Rapids, MI 49546 U.S.A.
All rights reserved.
This Korean edition is published by arrangement of Wm. B. Eerdmans Publishing Co. through rMaeng2, Seoul, Republic of Korea.
This Korean translation edition ⓒ 2026 by Revival and Reformation Press, Seoul, Republic of Korea.
에베소서
발행일 2026년 5월 15일
지은이 콘스탄틴 캠벨
옮긴이 박문재
펴낸이 김은주
펴낸곳 부흥과개혁사
편집 권대영 디자인 박슬기 기획 이승영 마케팅 권성직
인쇄소 영진문원
판권 Ⓒ부흥과개혁사 2026
주소 서울특별시 마포구 양화로6길 9-20, 2층(서교동)
전화 Tel. 02) 332-7752 Fax. 02) 332-7742
홈페이지 http://rnrbook.com e-mail rnrbook@hanmail.net
ISBN 979-11-7540-064-1 (94230)
978-89-6092-448-2 (94230)(세트)
등록 1998년 9월 15일 (제13-548호)
이 한국어판의 저작권은 알맹2를 통하여 Wm. B. Eerdmans Publishing Co.와 독점 계약한 부흥과 개혁사에 있습니다. 저작권법에 의하여 한국 내에서 보호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 전재와 무단 복제를 금합니다. 는 교회의 부흥과 개혁을 추구합니다.
xiii
나는 에베소서 주석서를 써달라는 돈 카슨의 초대를 흥분과 두려움 속에 서 받아들였다. 내가 흥분한 이유는 에베소서가 내가 좋아하는 바울 ( ? ) 서신
이고, 이제 이 책이 일부가 된 필라 신약 주석 시리즈에 대해 큰 존경심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리즈에서 이 서신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은 순전한 기쁨이다. 이 책이 피터 오브라이언의 주석서를 대체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
을 알았을 때 두려움이 생겼다. 이것이 씁쓸하면서도 달콤한 특권이기 때문 이다. 오랜 기간 피터는 나의 교사, 동료, 멘토였고, 2006년에 무어 신학교 에서 에베소서를 가르치기 시작했을 때 오브라이언의 주석서는 내가 가장
먼저 찾는 자료였다. 다른 사람이 그렇게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지금까지 나는 내 주석서를 그의 주석서와 비교해 평가하고자 하는 유혹을 물리쳤다. 오히려 피터가 내게 심어 준 해석적 직관, 원칙, 기술을 바탕으로
나만의 주석서를 쓰기로 결정했다. 나는 이것이 그의 주석서가 출판되어 있 는지와 상관없이 수천 명의 삶에 자신의 흔적을 남긴 이 사랑받는 교사-학 자-목회자에게 합당한 헌사가 되기를 바란다.
에베소서에 대한 나의 사랑은 무어 신학교와 트리니티 복음주의 신학교 에서 에베소서를 가르쳤던 여러 해 동안 극적으로 커졌다. 내 경험에 따르 면, 교사는 흔히 학생만큼 많이 배운다. 이 경우가 특히 그렇다. 무어 신학
교에서 가르쳤던 처음 몇 년은 적어도 그 비율이 50:50이었다. 나는 ( 능숙하
게라도 )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많이 받았고, 해석과 관련하여 여러 문제에
대해 그때까지와는 다르게 생각해야 하는 도전을 받았다. 나는 에베소서를
가르칠 때마다 매년 생각이 바뀌었고, 새로운 것을 배웠으며, 이 주석서를
쓰면서 같은 경험을 한층 더 크게 겪었다. 이 서신을 계속해서 가르치다 보 면 언젠가는 이 주석서와 다른 견해를 갖게 되는 일이 벌어질 것 같기에, 앞 으로 결코 이 서신을 가르치지 않아야 할 것 같다.
신약 주석의 방대한 세계 속에서 내가 높이 평가하게 된 특징도 있고, 피 하려고 노력한 특징도 있다. 아마도 우리는 모두 마음속에 절실한 질문을 품고 방대한 주석서를 펼쳤을 때, 꼭 필요하지 않거나 도움이 되지 않는 ( 비
록 흔히 흥미롭기는 하지만 ) 정보를 많이 발견하면서도, 우리의 구체적인 질문에
대해 만족스러운 통찰을 찾지 못하는 좌절감을 느낀 적이 있을 것이다. 이
런 좌절은 충분히 자연스러운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에게 질문을 불러
일으키는 성경의 난해한 본문이 주석하기에도 난해한 경우가 많기 때문 이다. 그리고 주석은 난해하게 느끼는 문제에 부딪쳤을 때 그에 대해 많이 말하지 않거나, 아니면 너무 많이 말하는 경향이 있다. 이 책에서는 본문에 서 생겨나는 질문을 깊이 파고들려고 노력했다. 당혹스럽거나 어렵거나 외 관상 불가해하다고 보이는 문제에 대해서는 더 깊이 파고들었지만, 동시에 간결함도 유지하려고 했다. 독자가 이 해석의 여정 중 일부라도 나와 동참 하기를 바라고, 그 여정 중 많은 것이 유용하고 설득력 있는 목적지에 도달 하기를 바란다.
고도로 전문적인 주석서도 필요하다. 그런 주석서는 주로 다른 주석과 전 공 학자에게 유용한 경향이 있다. 나는 다른 주석과 신학자에게도 유용하면 서 동시에 특별히 교사, 설교자, 신학자, 학생에게 유용한 주석서를 쓰려고
애썼다. 에베소서의 풍부하고 심오한 메시지가 신약학계 논쟁의 거대한 무 게 아래 매몰되거나, 세부적인 사항에 지나치게 자세한 논의 가운데 익사해 서도 안 된다. 아울러 우리는 접근하기에 쉽지만, 솔직히 충분히 깊지 않은
주석서를 읽을 때의 좌절감도 알고 있다. 이것은 두 바다 괴물 스킬라와 카 리브디스를 절묘하게 피해 항해해야 하는 까다로운 일이다. 그러나 나의 내 면의 나침반은 내가 본문과 관련해 무엇을 알고 싶은지를 스스로에게 물음
으로써 설정되었다. 이 본문을 설교하거나 가르친다면, 무엇이 가장 도움이 될까? 본문의 어떤 특징을 놓칠 가능성이 있을까? 해석에서 어떤 실수를 벌일 수 있을까? 어떤 더 깊은 통찰로 다시 생각하거나 숙고하거나 경탄하 게 될까? 달리 말해, 나는 내가 읽고 싶은 주석서를 썼다. 이것이 다른 사람 도 읽고 싶어 할 주석서라는 것을 보장할 수는 없지만, 그러기를 바라는 것 은 진심이다.
이 주석서를 쓰도록 초대해 주고, 중요한 피드백, 통찰력, 도전을 준 돈 카슨에게 감사를 표한다. 이 책을 교정하고 편집한 제임스 스핀티, 어드만 스 출판사 팀, 특히 제임스 어니스트, 트레버 톰슨, 로렐 드레이퍼에게 감사 하다. 나와 함께 에베소서를 공부한 수백 명의 학생에게 감사 ( 그리고 사과? ) 를 표한다. 그들은 생각하는 것보다 많은 영향을 나에게 미쳤다. 그리고 물론 피터 오브라이언에게 감사를 표한다. 당신이 피터 오브라이언이어서 정말 감사하다. 이 주석서를 그에게 바친다.
The Letter to the Ephesians

신약학자 레이먼드 브라운은 “바울의 저작 중에서 기독교 사상과 영적
생활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후보를 고르라고 하면 오직 로마서만이 에
베소서와 경쟁할 수 있다”라고 주장했다.1 ) 사도 바울은 ( 예수 이후 ) 기독교 세 계를 주도한 신학자고, 지난 2천 년 동안 전 세계에 걸쳐 기독교에 광범위
하고 깊은 영향을 미쳐 왔다는 사실을 감안했을 때, 바울의 광범위한 영향
력에 필적할 역사적 인물은 거의 없다. 따라서 바울의 가장 영향력 있는 두 서신 중 하나인 에베소서를 인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서신 중 하나로 여
기는 것은 정당하다.
에베소서에 대해 아무리 엄청난 찬사를 한다고 해도 지나친 것이라고 말
하기 힘들다. 에베소서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장엄하고, 심오하며, 전율을
느끼게 해 주고, 그 메시지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경우는 땅을 뒤흔들기에 부족함이 없다. 에베소서의 범위는 물리적 영역과 영적 영역을 포함한 피조
세계 전체를 다룬다는 점에서 우주적이고, 세계의 기초가 놓이기 전부터
다가올 시대에 이루어질 궁극적 성취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다룬다는 점에서 영원하다. 그리스도는 만유의 중심이고, 하나님이 그리스 도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하나로 묶고 있다는 점에서, 에베소서가 제시하는
1 ) Raymond E. Brown, An Introduction to the New Testament, ABRL (New York: Doubleday, 1997), 620.

그리스도는 우주적인 그리스도다. 그리스도는 모든 경쟁적인 권세 위에 가 장 뛰어나고 지고한 분이지만, 인간의 마음과 삶 속에서 친밀하게 활동 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인류와 그 밖의 다른 모든 것을 위한 계획 속에 서 화해의 중심으로 삼아서, 한 백성을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고, 하늘에서 그와 함께 앉게 했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몸인 교회의
머리고, 교회는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자신의 고귀한 부
르심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임재는 우주의 높은 영역에서 가정
내의 관계에 이르기까지 존재의 범위 전체에 스며들어 있다. 그리스도는 자
기 백성 안 및 자기 백성과 함께 거하고, 그들을 새로운 피조물과 새로운 인
류로 변화시키는데,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찬양과 영광을 위한 것이다.
에베소서는 바울이 이 서신을 쓴 때로부터 거의 2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 계속해서 중요하게 여겨져 왔기 때문에 찬사와 함께 무수하게 면밀한 검토
와 토론을 불러일으켰다. 이 주석서는 그 모든 것을 다 다룰 수 없겠지만, 가장 중요한 쟁점에 대한 대표적인 학문적 논의를 소개할 것인데, 특히 현
대 학자들의 견해를 중심으로 다루겠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주석서는 에
베소서 본문, 곧 에베소서의 주제와 세부 내용, 논증과 난점, 신학과 그 함 의에 전념했다. 서론의 나머지 부분은 독자가 이 서신의 저작과 최초 청중, 주요 주제와 구조에 대한 중요한 논의를 이해할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
I. 저자
아마도 에베소서에 대한 학문적 논의에서 가장 논란이 되어 온 질문은 저
자에 대한 질문일 것이다. 이것은 통탄할 만한 일이다. 더 건설적인 질문에
쏟아야 할 힘과 관심을 상당히 많이 소모하기 때문이다. 다음의 ( 불행히도 필수 적인 ) 논의가 보여 주듯 에베소서의 저자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지금 은 대체로 신뢰를 잃은 신약 연구 방법론의 유산인 논점 흐리기다.
에베소서가 바울의 저작임을 부정하는 학자 대부분 이 서신은 익명의 어 떤 인물이 부정직한 의미에서가 아니라 “정직한” 의미에서 바울이라는 가 명으로 쓴 것이라고 설명한다.2 ) 오래전에 죽은 유명인의 이름으로 글을 쓰
2 ) Thielman, 1이 언급하듯, “어떤 영향력 있는 인물의 이름으로 기능적 서신을 작성하는 관행은 고 대 헬라-로마에서 상당히 흔했으며, 특히 BC 3세기부터 AD 1세기까지 성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는 것은 고대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던 현상이었고, 지금처럼 사기 행위로
여겨지지 않았다.3 ) 그것은 특정 저자가 썼다는 주장이 아니고, 권위와 오랜
전통에 기대어 글을 쓰는 것으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 방식이었다.4 ) 정
직한 의도로 가명을 사용해 글을 쓰는 것은 그런 것으로 이해되고 수용되
었으며, 따라서 기만적인 일로 여겨지지 않았다. 에베소서를 익명의 저자가 바울의 이름으로 쓴 서신으로 보는 오늘날의 학자도 이 서신이 마치 바울
이 쓴 것처럼 말하는 것에 기만적인 의도가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 ( 1:1; 3:1 ).
다음 내용은 이 논쟁을 철저하고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았다. 그런 설명은
대부분의 독자 ( 그리고 이 저자 ) 에게 지루할 것이기 때문이다.5 ) 여기서 일부 학
자로 하여금 에베소서가 바울의 저작이라는 것을 의심하거나 아예 부정하
도록 이끈 여러 쟁점을 간단하게 개관할 것이다. 결국 이 논의의 역사적 측
면에 가장 큰 비중을 둘 것이다. 이 논의가 거의 2천 년 동안 이어진 합의를
뒤집으려는 대담한 주장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런 합의
의 지속 기간이 아니다. 오히려 합의가 매우 이른 시기에 이루어져서 그 후
로 철저하고 일관되게 유지되었다는 사실이 가장 중요하다. 해럴드 회너가
말했듯, “초대 교회는 이 문제에 더 근접해 있었을 뿐 아니라, 저작의 진위
를 가려내는 데 매우 예리했다.”6 ) 먼저 논의 역사를 간단하게 살펴보자.
A. 저자 문제의 간단한 역사
18세기까지는 에베소서가 바울의 저작이라는 점에 대해 진지하게 의문
을 제기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신약 성경의 어떤 다른 부분과 달리, 초대 교회는 바울이 이 서신의 저자라는 것을 절대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에
베소서를 정경의 진정한 일부로 즉시, 그리고 만장일치로 받아들였다.7 ) 초
대 교회의 광범위하고 일관되며 이른 시기의 합의는 여러 가지 다양한 사 실을 통해 확인되는데, 카슨과 더글러스 무는 이렇게 요약한다.
3 ) 고대의 예로는 호메로스 찬가, 솔로몬의 송가, 에녹서, 모세 승천기 등이 있다. 그러나 심지어 오늘 에도 저자의 진위보다 내용과 메시지의 가치가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예외적인 경우가 있다. 에이 브러햄 링컨이 “인터넷에서 읽는 모든 것은 신뢰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는 인기 있는 인터넷 밈이 떠오른다.
4 ) Clinton E. Arnold, “Ephesians,” DPL, 242.
5 ) 최근 수십 년 동안 가장 철저한 논의 중 하나는 회너에게서 찾을 수 있는데, 그는 이 주제에 60쪽 을 할애한다. 이어지는 논의는 회너의 통찰에 크게 빚지고 있다.
6 ) Hoehner, 60.
7 ) Victor P. Furnish, “Epistle to the Ephesians,” ABD 2:539.
초기부터 이 서신은 널리 유포되었고, 그 진정성이 의심받은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이 서신은 마르키온에 의해 ( 라오디게아서로 ) 받아들여졌고, 무라토리 정경 목록에 포함되어 있으며, 정통파뿐 아니라 이단도 사용
했다. 이 서신은 이그나티오스, 폴리카르포스, 로마의 클레멘스, 헤르마
스, 그 밖의 다른 사도 교부에 의해 바울의 서신으로 여겨진 것으로 보 인다. 근대에 이르기까지는 바울이 저자라는 점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것 같다.8 )
회너가 강조하듯 신약 성경의 책 중에서 에베소서는 초대 교회 교부에 의 해 성경이라 불린 최초의 책이다.9 ) 서머나 주교 폴리카르포스 ( AD 69-135 ) 는
2세기 초에 “이 성경에 표현된 바와 같이,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라고 썼는데, 이것은 시편 4편 5절과 에베소 서 4장 26절을 성경으로 언급한 것이다.10 ) 회너는 에베소서가 바울의 저작 이라는 것과 성경인 지위에 대한 여러 다른 비슷한 증언을 제시하면서, “에 베소서가 바울의 저작이라는 것은 초대 교회에서 지역적으로 광범위하게
강력한 증언을 받았을 뿐 아니라, 최근에도 지속적인 지지를 받아 왔다”라 고 결론짓는다.11 )
에베소서가 바울의 저작이라는 점에 대한 최초의 의심은 1792년에 영국
의 성직자 에드워드 에반슨에 의해 제기되었는데, 에반슨은 바울이 에베소 에서 오랜 시간 사역을 했다는 사실 ( 행 19장 ) 은 이 서신의 명백히 비개인적인
어조 ( 비교. 1:15-16 ) 와 부합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12 ) 19세기에 다른 학자들
은 골로새서와의 유사성, 추정에 따른 장황함, 속사도 시대의 특징이 나타 난다는 것에 기초하여 이 서신의 진정성에 의문을 제기했다.13 ) 회너는
8 ) Carson and Moo, An Introduction to the New Testament, 2nd ed. (Grand Rapids: Zondervan, 2005), 480.
9 ) Hoehner, 3.
10 ) Hoehner, 3; Polycarp, AdPhilippenses 12.1 (PG 5:1020).
11 ) Hoehner, 6.
12 ) Hoehner, 6; Evanson, The Dissonance of the Four Generally Received Evangelists and the Evidence of Their Respective Authenticity Examined (Ipswich: Jermym, 1792), 261–262에 서 인용.
13 ) 골로새서와의 유사성: Leonhard Usteri, Entwickelung des paulinischen Lehrbegriffes mit Hinsicht auf dieübrigen Schriften des Neuen Testamentes, 3rd ed. (Zurich: Grill, Fussli, & Compagnie, 1831), 1–8. 장황함: Wilhelm Martin Leberecht De Wette, An Historico-Critical Introduction to the Canonical Books of the New Testament, trans. Lionel R. M. Strachan, 4th ed. (London: Hodder & Stoughton, 1927), 88–92.속사도 시대의 특징: Ferdinand Christian
1501년부터 2001년까지 학자들의 견해를 광범위하게 수집해 기록했는데, 이 연구는 전체적으로 학자 중 54%가 바울이 저자라는 것을 긍정했고, 39%가 부정했으며, 7%가 모르겠다는 입장이었다는 결과를 보여 준다.14 )
1960년까지는 바울의 저작을 부정하는 학자보다 긍정하는 학자가 더 많았 지만, 1971-2001년 사이에는 부정하는 학자가 아주 약간 우세했다.15 ) 회
너의 연구가 출간되고 20년이 지났지만, 그럼에도 에베소서가 바울의 저작
임을 부정하는 것은 현대적인 현상이고, 여전히 반대 주장이 있지만, 학자
들 사이에서 지배적인 견해와 거리가 멀다는 것은 분명하다.16 )
B. 에베소서가 바울의 저작임을 부정하는 근거
학계는 기본적으로 네 가지 분야에서 에베소서의 바울 저작성을 공격
했다. (1) 신학, (2) 문법, 어휘, 구문, (3) 역사적 상황, (4) 골로새서와의 관 계.17 ) 나는 이 공격의 성격을 예시하기 위해 각 분야의 대표적인 예를 제시 할 것이다. (1) 신학과 관련해 가장 중요한 주장 하나는 에베소서가 실현된 종말론의 관점을 보여 주고, 이것이 개시된 종말론을 보여 주는 “진정한 바울”과 충 돌한다는 것이다. 에베소서에서 그리스도가 이미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
과 주권보다 훨씬 위에 앉아 계신다고 말할 때 ( 1:20-22 ), 그것은 “진정한 바
울”이 지금이 아니라 미래에 보게 될 것을 지금 이미 이루어진 것으로 묘사 하는 것이다 ( 비교. 고전 15:24-28 ). 18 ) 마찬가지로 에베소서는 믿는 자가 하나님
의 진노에서 이미 구원받았다고 말하는 반면 ( 2:5b, 8 ), “진정한 바울”은 그들
이 장차 구원받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 비교. 롬 5:9-10 ). 그 밖의 다른 특징으로
는 에베소서가 “교회”라는 용어를 믿는 자의 모임 전체를 지칭하는 데 사용
Baur, Paul the Apostle of Jesus Christ, His Life and Work, His Epistles and His Doctrine: A Contribution to a Critical History of Primitive Christianity, ed. Eduard Zeller, trans. A. Menzies, 2nd ed. (London: Williams & Norgate, 1875), 1–44.
14 ) Hoehner, 9–19.
15 ) Hoehner, 20.
16 ) 1984년에 브라운은 “비평학계의 약 80%가 바울이
않았다고 주장한다”라고 말 했다. Raymond E. Brown, TheChurchestheApostlesLeftBehind (New York: Paulist, 1984), 47.
17 ) Cohick, 4.
18 ) 예컨대 퍼니시는 “가장
가르침이다”라고 말한다. Furnish, “Epistle to the Ephesians,” 540.
한 반면 ( 예.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5:23 ), 다른 서신은 이 용어를 지
역 공동체를 지칭하는 데 사용한다는 것 ( 예. 롬 16:4, 16; 고전 1:2; 4:17; 고후 8:1; 갈 1:2; 빌 4:15; 살전 2:14 ) 같은 여러 세부적인 내용이 있다.19 )
(2) 문법, 어휘, 구문과 관련해서 에베소서는 “진정한 바울”이 사용하지
않는 특정 단어를 여럿 사용한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또한 문법과 구문이 “진정한 바울”보다 복잡하고 정교하다는 주장도 제기되는데, “비정상적으 로 긴 문장, 중복 표현, 수많은 전치사 구문, 속격 구문, 분사 구문, 부정사 구문”이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20 ) 간단히 말해, 에베소서의 문체가 논란
이 없는 바울의 서신과 다르다는 것이다.21 )
(3) 역사적 상황과 관련해서는 에베소서의 비개인적 성격은 바울이 에베
소에서 거의 3년에 걸쳐 광범위하게 사역했다는 역사적 기사 ( 행 19장 ) 와 부 합하지 않는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에베소서는 심지어 마치 저자가 수신자 에 대해 개인적으로 알지 못한다는 듯이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1:15 ) 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또한 우리가 고
린도 서신에서 풍부하게 보는 것 같은 상황, 즉 교회가 직면한 구체적인 상
황에 대한 언급도 없다.
(4) 골로새서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누군가가 골로새서를 베끼고 확장해
에베소서를 쓴 것이기 때문에, 에베소서를 바울의 것이라고 하기에는 골로
새서와 지나치게 비슷하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22 ) 따라서 에베소서는 표
절임을 가리려는 설득력 없는 여러 가지 시도 가운데 골로새서를 표절한 경우라고 한다.
이 몇 가지 예는 논의를 지나치게 단순화한 것이긴 하지만, 논의의 성격 을 잘못 보여 주는 것은 아니다. 이 논의는 훨씬 많은 자료를 동원해 더 복
잡한 형태로 전개될 수 있겠지만, 결국 핵심 주장은 이 여러 가지 유형의 쟁
점으로 귀결된다. 간단히 말해, 일부 학자는 에베소서가 우리가 알고 있는 “진정한 바울”과 여러 가지 점에서 불일치한다고 본다. 에베소서가 바울의
저작임을 거부하는 주장은 이 둘 사이의 비교에 근거한다.
더글러스 캠벨은 에베소서가 바울의 저작이라는 주장에 반대하기는 하지
19 ) Luke Timothy Johnson, The Writings of the New Testament: An Interpretation, 3rd ed. (Minneapolis: Fortress, 2010), 363.
20 ) Furnish, “Epistle to the Ephesians,” 540.
21 ) 예컨대 “에베소서의 언어도 바울의 문체를 현저히 벗어나 있다.” Perkins, “Ephesians,” 355.
22 ) 예컨대 Lincoln, lv–lvi은 “두 서신을 전체적으로 볼 때, 골로새서의 자료에 대한 에베소서의 재 해석이라는 주된 흐름을 분명하게 볼 수 있다”라고 말한다.
만, 이 여러 쟁점을 기존의 논의와는 다른 관점에서, 그리고 더 생생하고 인 상적인 방식으로 요약해 제시한다.
이 서신에 담긴 교훈은 고도로 일반화되어 있고, 심지어 추상적이다.
특정 공동체와 관련된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내용이나 문제가 거의 또는
절대 거론되지 않는다. 이와 아울러 이 서신의 문체는 장엄하다고 판단
하든 지나치게 무겁다고 판단하든 상당히 독특해 보인다. 다양한 실질적
강조점도 독특한데,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통상적으로 “교회”라는
용어로 표현되는 그리스도인 공동체에 대한 지속적인 강조다. 결과적으
로 이 서신은 바울이 필요하다면 자신이 많은 사람의 이름을 댈 소규모
집단과 거칠게 싸우며 고군분투했던 시대보다 후대의 더 평온하고 더 교
회다운 시대의 서신에 속하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후대에 누군가가
바울의 이름을 빌려 쓴 것이라는 판단이 아주 신속하게 생겨난다.23 )
C. 평가
이제 우리는 에베소서가 바울의 저작이라는 점에 학계가 공격한 네 가지 분야를 다시 살펴보면서, 이번에는 평가와 관련된 몇 가지 성찰을 제시할
것이다.
(1) 신학과 관련해서는 에베소서와 “진정한 바울” 사이에 추정되는 차 이가 극적으로 과장되었다.24 ) 예컨대 에베소서는 많은 비판자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이 개시된 종말론의 신학을 보여 준다. 린 코힉이 말하듯,
23 ) Douglas A. Campbell, Framing Paul: An Epistolary Biography (Grand Rapids: Eerdmans, 2014), 309. 캠벨이 에베소서에는 특정 공동체와 관련된 구체적인 세부 사항이 결여되어 있다고
지적한 것은 이 서신이 속사도 시대에 쓰였다는 느낌을 주는 것으로 추정되는 점과 관련한 (3) 역사적 정황을 말해 준다. 그는 (2) 문법, 어휘, 구문과 관련된 이 서신의 문체를 지적한다. 에베
소서가 “교회”를 지속적으로 강조한다고 그가 말한 것은 (1) 신학과 관련 있다. 그리고 캠벨은 여기서는 이 서신과 (4) 골로새서의 관계를 언급하지는 않지만, 다른 곳(318-325)에서 그 문제 를 다룬다.
24 ) Cohick, 24는 이 유형의 추론 기저에는 순환 논리가 내재되어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지적하면 서, 이것은 “우리가 먼저 바울에게 본질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가정하고……그런 다음 미리 확정 된 기준과 일치하는 몇 가지를 기반으로 각 서신을 비교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Starling, 5는 “에베소서의 사상 세계와 논쟁의 여지가 없는 바울서신의 사상 세계 사이에 메울 수 없는 간극이 있다는 환상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갈라디아서와 로마서를
“에베소서가 오직 실현된 종말론만을 제시한다는 주장은 이 현재의 어둠의
시대, 그리고 빛 가운데 행하는 자가 정사와 권세에 맞서 싸우며 굳게 서기 위한 하나님의 전신갑주의 필요성에 대한 묵시론적 강조를 충분히 고려하 지 못한 것이다 ( 엡 1:10, 21; 2:7; 4:30; 또한 참고. 갈 1:4; 살전 5:8 ).”25 ) 에베소서에는 “이
미 그리고 아직”이라는 바울의 전형적인 종말론적 도식에서 “이미”에 대한 강력한 강조가 존재하지만, “아직”의 요소도 분명히 존재한다.
신학적 난점이라고 추정되는 다른 것도 비슷하게 해결할 수 있다. 에베소
서에서 “교회”가 지역 회중보다는 믿는 자의 모임 전체를 가리킨다는 것과 관련해서 루크 티머시 존슨은 “그 차이가 많은 지역 회중이 자신들이 단순
히 지역적인 모임이 아니라 전 세계적인 운동이라는 것을 의식하는 가운데
서로 연합하게 된 것을 되돌아본 바울 후계자의 관점을 드러내는 것인가?
아니면 그 관점은 바울도 연보와 관련해서 교회가 지역 회중 이상의 것임 을 알게 하려고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었던 관점이었던 것인가?”라고 묻
는다.26 ) 존슨의 질문이 암시하듯, 그런 관점이 바울에게 불가능했다고 반
드시 전제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클린턴 아널드는 이런 긴장 관계를 에베소서가 바울의 저작이 아니라는 증거로 해석하기보다는 “어둠의 권세에 대한 그리스도의 지배권을 상기시
킬 필요가 있었던 사람을 상대로 한 사도 바울의 능숙하고 상황에 적합한
말”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하는 쪽을 택한다.27 ) 라이트가 추측하듯, 바울이 “다소 현란한 아시아식 문체를 채택해서, 자신의 기본적인 가르침의 많은 부분을 요약한 형태로 그 문체에 통합하여, 그 지역의 모든 교회에 보낼 회
람용 서신을 쓰기로 결심했다면, 그 결과물로 에베소서를 상상하기가 쉽다.”28 ) 실제로 존슨은 에베소서를 바울 복음의 탁월한 요약으로 여긴다. 따라서 “바울은 자신이 사역하는 동안 생겨난 다양한 강조점을 제시할 때, 다른 서신에서 발견되는 주제를 발전시키긴 하지만, 요약적인 형태로 제시 한다.”29 )
(2) 문법, 어휘, 구문과 관련해서 에베소서가 바울의 저작이라는 점에 반
대하는 모든 주장은 바울이 어떤 단어를 사용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 알려
25 ) Cohick, 7.
26 ) Johnson, WritingsoftheNewTestament, 363.
27 ) Arnold, 47.
28 ) N. T. Wright, Paul and the Faithfulness of God, 2 vols. (Minneapolis: Fortress, 2013), 1515.
29 ) Johnson, WritingsoftheNewTestament, 364. 8
진 것이 아닌 비현실적인 추정에 근거한다. 대규모 본문 데이터베이스를 분
석하여 실제 언어 사용 패턴을 연구하는 분야인 코퍼스 ( corpus ) 언어학의 기
본 전제는 우리가 바울이 어떤 단어를 쓸 수 있었다거나 쓸 수 없었을 것
이라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바울의 현존하는 저작보다 훨씬 큰 규모의 표본
이 요구된다는 것이다.30 ) 간단히 말해, 바울의 가능하거나 불가능한 언어
선택에 판단 내릴 수 있게 해주는 언어학적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어떤 경
우든, 캠벨은 다음과 같이 성찰한다.
“에베소서”에 독특하게 나타나는 다양한 문체적 특징 ( 여기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한 문장의 길이다 ) 을 도표화할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바
울의 논란 없는 다른 서신과 자연스럽게 공유되는 문체적 특징도 많다.
따라서 또다시 핵심적인 질문은 “에베소서”가 독특한 문체적 특징을 가
지는지가 아니라 ( 실제로 그런 특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 그런 특징이 에베소
서가 바울의 저작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줄 정도로 충분히 바울의 다른
서신의 문체와 다른가 하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한 통계적 분석은 아무
리 좋게 보아도 모호하고, 가장 나쁘게 말한다면 부정적이다.31 )
실제로 이 질문은 충분히 자주 고려되지 않았다. 에베소서의 구조가 바울
의 논란 없는 다른 서신과 비슷하고, 에베소서가 바울의 다른 서신에서도 발견되지만 다른 신약 저자의 문체에서는 볼 수 없는 “바울적인” 풍부한 언 어를 보여 주기 때문이다.32 ) 따라서 캐드버리가 묻듯, 바울을 모방한 자가
바울의 문체와 95% 일치하게 썼을 가능성이 더 높은가, 아니면 바울이 자
30 ) 언어 연구에 대한 코퍼스(corpus, 말뭉치) 기반 접근법은 직관, 일화적 증거, 소규모 표본에 의 존하기보다는 진본 텍스트의 대규모 데이터베이스에 대한 경험적 분석을 사용한다. Douglas Biber, Susan Conrad, and Randi Reppen, Corpus Linguistics: Investigating Language Structure and Use, Cambridge Approaches to Linguistics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8), 9를 보라. Arnold, 48이 말하듯, “우리에게는 그런 중대한 판단을 내릴 만큼 충분히 많은 바울 저작 표본이 없다.” 바울의 전체 말뭉치는 헬라어 단어가 32,438개다(신 약 성경에서 바울의 이름으로 된 13편의 서신을 모두 계산하면). 참고로, 말뭉치 언어학 분석 에 사용되는 전형적인 기록 말뭉치는 백만에서 수천만 단어에 이른다(참고. Biber, Conrad, and Reppen, Corpus Linguistics, 281–282).
31 ) D. A. Campbell, FramingPaul, 334–335.
32 ) Carson and Moo, Introduction to the New Testament, 480; Nigel Turner, Style, vol. 4 of A Grammar of New Testament Greek, ed. J. H. Moulton (Edinburgh: T&T Clark, 1976), 84–85.
신의 현존하는 문체에서 5% 벗어나게 썼을 가능성이 더 높은가?33 ) 로버트 그랜트의 답변은 우리는 그러한 서신의 진정성을 판단할 위치에 있지 않기 때문에, 반대되는 설득력 있는 증거가 없다면 진정성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
이다.34 )
(3) 역사적 상황과 관련해서는 위작설에 의존하는 것보다 훨씬 설득력 있는 몇 가지 유력한 재구성이 있다. 예컨대 바울이 소아시아 서부 여러 교 회가 돌려 볼 수 있게 하려고 회람용 서신을 썼다면 ( 아래에서 논증하는 바와 같이 ),
대부분의 독자가 알지 못할 특정 개인에 대한 사적 언급을 배제하는 것이 자연스러웠을 것이다.35 ) 같은 논증은 특정 교회 상황에 대한 언급이 없다
는 사실에도 적용되지만, 또한 코힉은 “교회의 구체적인 상황에 대한 모호 함은……진정한 바울 ( 원문 그대로 ) 임을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로마서에도 똑 같이 적용할 수 있다”라는 말도 덧붙인다.36 )
존슨은 에베소서가 위작이라면, “이 경우에 저자는 바울과 바울이 분명 히 아주 잘 알고 있던 교회 사이의 친밀한 관계를 그럴듯하게 만들어 내는 데 실패한 것이다”라고 지적한다.37 ) 또한 6장 21-22절 같은 언급 ( 저자가 그들
에게 보낼 두기고가 그들에게 “바울의” 소식을 알려 줄 것이라고 약속하는 ) 은 이 서신이 바울의 저작이라는 주장이 뒤집히지 않을 것이라는 대담한 확신을 드러낸다.38 ) 이
서신이 위작이라면, 그런 언급은 굳이 할 필요가 없었을 것임은 말할 것도
없고, 오히려 위험했을 것이다.
(4) 에베소서와 골로새서의 관계와 관련해서는 어느 저자든 흔히 자신의
이전 저술에 나오는 내용을 차용한다는 이 단순한 이유로 인해, 이 질문 전
체가 논점을 흐린다.39 ) 설령 에베소서가 골로새서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
입증될 수 있다고 하더라도 ( 이 문제는 보기보다 복잡하다 ) 이것은 저자에 대해 아
무것도 증명해 주지 못한다.40 )
33 ) H. J. Cadbury, “The Dilemma of Ephesians,” NTS 5, no. 2 (1959): 101.
34 ) Grant, A Historical Introduction to the New Testament (London: Collins, 1963), 202.
35 ) Starling, 7.
36 ) Cohick, 10.
37 ) Johnson, WritingsoftheNewTestament, 359.
38 ) Carson and Moo, Introduction to the New Testament, 480.
39 ) 이 주석에는 내가 나의 이전 출판물을 언급하거나 인용하거나 표현을 가져와 단순히 다듬기만 한 경우가 여럿 있다.
40 ) 복잡성의 한 문제는 의존 방향이다. 베스트가 결론짓듯, “한 저자가 다른 저자를 모방했다면 누가 모방자였는지 말하기는 불가능하다.” Ernest Best, “Who Used Whom? The Relationship of Ephesians and Colossians,” NTS43, no. 1 (1997): 87. “골로새서와의 유사성이 여러 가 지 이유로 에베소서가 바울이 아닌 다른 사람에 의해 쓰였다는 결론으로 이어질 필요는 없다.”
일반적인 위작에 대해 고대의 위작 문헌은 여러 세기 전에 죽은 인물을
저자로 내세웠다고 코힉이 지적한 것이 옳다. “살아 있거나 최근에 죽은 인
물은 위작 서신의 저자로 내세우는 데 합당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졌다.”41 )
또한 유대교 내에는 ( 에녹1서, 솔로몬의 시편, 열두 족장의 유언 같은 ) 광범위한 위작 문
헌이 있었지만, 아널드 등이 지적하듯 “유대교 내에서 서신과 관련해서는
위작 서신임을 보여 주는 분명한 예가 없다.”42 ) 에베소서가 정말 위작이라
면, “이 서신에서 어떤 것도 일반 독자에게 이 서신이 허구의 성격을 지니
고 있음을 보여 주지 않는다”라는 점에서, 이 서신은 통상적인 기대에 부합 하지 않는다.43 ) 그리고 캠벨이 논평하듯 “위작설은 이 서신에서 부인할 수
없는 시대착오인 표현, 내용, 그와 비슷한 어떤 결정적인 증거도 이 서신에 서 찾아내지 못했다.”44 ) 정반대로, 프랭크 틸만은 “이 서신이 위작이라면, 이 서신의 모습은 기독교의 초석을 놓은 인물 한 명이 순교 직전에 쓴 것으
로 생각할 때만 이해될 수 있는 권위의 분위기를 이 서신에 부여하려는 시 도가 아닌 무언가 다른 것으로 보기가 어렵다”라고 말한다.45 ) 에베소서가
위작이라면, 이 서신의 저자는 거의 2천 년 동안 모든 독자를 성공적으로
속인 셈이 되고, 이 서신은 성경 정경에 포함되어서는 안 된다. 틸만이 다시
논평하듯 이 서신이 위작이라면, “이 서신은 독자에게 진실하게 말하라고 강력하게 촉구하지만, 어떤 분명한 도덕적 정당성도 없이 저자에 대해 거짓
말을 하면서 그렇게 말하는 셈이 된다.”46 )
위작설은 바울이 아닌 다른 어떤 사람이 초대 교회의 모든 사람을 속일 수 있을 정도로 바울처럼 설득력 있게 서신을 쓸 수 있었다는 전제를 받아
들일 때만 성립한다. 그리고 이것이 사실이라면, 바울과의 차이라고 추정되 는 것들이 실제로 위작설의 증거로 얼마나 설득력이 있는가 하는 질문을
제기한다. 에베소서의 위작설을 지지하는 학자는 이 서신을 바울서신이 아 니라고 말하면서도 ( 바울의 동시대인은 아무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지만 ) 이 서신이 극도
Cohick, 14.
41 ) Cohick, 18.
42 ) Arnold, 49(강조는 원저자); Carson and Moo, Introduction to the New Testament, 341. 분명히 하자면, 헬라-로마 세계에는 위서의 예가 여럿 있지만, 유대 문헌 내에는 없다(참고. Thielman, 1–2).
43 ) Thielman, 5.
44 ) D. A. Campbell, FramingPaul, 337.
45 ) Thielman, 5.
46 ) Thielman, 5. 다음도 참고. Stanley E. Porter, TheApostlePaul:HisLife,Thought,andLetters (Grand Rapids: Eerdmans, 2016), 391.
로 바울답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신약 성경이 쓰인 지 2천 년 후
에 신약학은 얼마나 놀라운 학문이 되었는가. 하지만 우리는 거의 2천 년이
지난 오늘날에 와서, 이 서신이 쓰인 때와 가장 가까운 시기에 살았던 사람
들의 논란의 여지가 없는 입장을 뒤집는 것이 과연 개연성이 있을지에 의
문을 제기해야 한다. 그것은 지금부터 2천 년 후에 어떤 학자가 게티스버그
연설을 한 사람이 에이브러햄 링컨이 아니었다고 주장하려고 하는 것과 같
을 것이다. 그런 시도는 오늘날 우리에게 터무니없어 보일 것이다. 우리는
바울의 동시대인이 2천 년 후에 사람들이 에베소서에 대해 어떤 주장을 할 것인지를 알았다면 무슨 생각을 했을지를 오직 상상만 할 수 있을 뿐이다.
II. 수신자
A. 이 서신은 누구에게 보낸 것인가?
이 주석은 에베소서가 바울의 저작이라는 전통적인 견해를 받아들이지
만, 이 서신의 원수신자와 관련한 전통적인 견해에는 도전한다. 에베소는
이 서신의 첫째 절에서만 언급되고, 가장 오래된 사본과 가장 신뢰할 수 있 는 사본에는 에베소라는 언급이 나오지 않는다.47 ) 이것은 몇 가지 질문을 제기한다. “에베소에 있는”이라는 어구가 일부 초기 본문에서 빠진 것은 우 연이었는가? 이 어구는 후대의 본문에 추가된 것인가? 이 서신이 에베소
교회에 보내졌다는 것을 밑받침하는 다른 어떤 증거가 있는가? 이 서신과 밀접하게 관련된 골로새서는 이 쟁점에 대해 어떻게 말하는가? 어떤 개연 성 있는 설명이 이 모든 증거를 설명해 줄 수 있는가?
캠벨이 “이 서신의 수신자가 에베소 교회라는 주장을 밑받침해 주는 근

거는 다소 약하다. 주요 대문자 사본, 파피루스 사본 46, 추적 가능한 가장 초기의 교부 주해는 모두 이 주장과 반대된다”라고 논평한 것은 이 상황을
잘 요약한 것이다.48 ) 주요 대문자 사본인 바티칸 사본 ( B ), 시내산 사본 ( a ),
47 ) 4세기의 바티카누스 사본(B); 4세기의 시나이티쿠스 사본(a); 3세기의 파피루스 사본 P46. 이 초 기 사본에 더하여 10세기와 13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두 사본(1739; 6)이 있다. 참고. Arnold, 23.
48 ) D. A. Campbell, Framing Paul, 311. 캠벨은 계속해서 이 서신이 원래 라오디게아 사람들에게 보내졌다는 고대의 견해를 주장하지만(비교. 골 4:16), 이 주장은 개연성이 있다.
극히 중요한 P46에 의해 확립된 가장 초기의 본문 전승은 1장 1절에서 “에
베소에”라는 어구를 포함하지 않는다. 그리고 사도 교부들이 이 서신의 수
신자가 에베소 교회라는 것에 대해 만장일치의 지지를 주지 않는다는 것도
중요하다.49 ) 사본에 의한 본문상의 지지도 초대 교회의 지지도 절대 받지
못하는 위작설과 달리, 이 서신의 수신자가 에베소가 아니라는 입장은 이
둘의 지지를 모두 받고 있다.
본문상의 증거와 관련하여 이 중요한 초기 사본에 “에베소에”라는 어
구가 없다는 것은 많은 신약 사본 사이의 수천 가지 다른 이독과 성격이 다
르다. 그런 이독은 대부분 서로 다른 어순, 단어 대체, 의도적이거나 비의도
적인 추가, 우연한 누락에 해당한다. “에베소에”라는 어구가 없는 모든 사
본이 우연히 이 어구를 빠뜨렸을 가능성은 극히 낮다. 첫째, 우리는 이 서신 의 첫째 절과 이 서신의 수신자에 대해 말하고 있고, 이것은 하찮은 문제가
아니다. 필사자가 실수를 자주 했지만, 이 어구가 중요하다는 점에서 이 누
락을 우연이라고 말하는 것에는 개연성이 없다. 1장 1절에 “에베소에”라는 어구가 없는 것은 의도적인 생략, 또는 이 어구가 가장 초기의 사본에 ( 따라
서 아마도 자필본[원본 서신]에도 )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을 가능성에 의해 설명 된다. 그러나 “에베소에 있는”이라는 어구가 원본에 없었다면, 왜 이 서신
이 에베소와 연관된 것인가? 그리고 기술적 관점에서 일부 학자는 1장 1절
의 헬라어 구문은 “에베소에”( 또는 어딘가“에” ) 라는 어구가 없이는 성립하지 않
는다고 주장해 왔다.50 )
“에베소서”와 골로새서의 관계와 관련해서는 몇 가지 단서가 있다. 아래
에서 더 깊이 탐구할 것이지만, 이 두 서신의 밀접한 ( 그리고 때때로 축어적인 ) 상
응 관계를 부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물론 이 두 서신은 각자 강조점이 다 르고, 에베소서가 골로새서보다 상당히 더 길기에, 이 상응 관계는 과장해
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이 두 서신은 태생적 관련성이 있다. 위에서 이미
시사했듯, ( 이 두 서신 각각의 저자가 흔히 자신의 글에서 차용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 두 서신의
이런 관계는 저자에 대해서는 거의 말해 주지 않지만, 의도된 청중에 대해
어느 정도 빛을 비추어 줄 수 있다. 에베소서와 골로새서의 뚜렷한 차이 중
49 ) 3세기에 오리게네스는 엡 1:1을 “에베소에 있는”이라는 말 없이 인용했고, 4세기에 대바실레이 오스도 그러했다. 테르툴리아누스(AD 155-220년)는 마르키온이 “에베소에 있는”이라는 어구가 없는 사본에 대해 분명히 알고 있었다고 보고했다. 대조적으로, 대부분의 다른 교부는 이 서신을 에베소 사람들에게 보낸 것으로 간주한다. 참고. Arnold, 24–25. 50 ) Thielman, 13.
하나는 에베소서가 극도로 비개인적인 반면, 골로새서는 정반대라는 것
이다.51 ) 에베소서는 저자와 이 서신의 전달자 ( 1:1; 3:1; 6:21-22 ) 외에 누구의 이
름도 언급하지 않는 반면, 골로새서는 디모데 ( 1:1 ), 에바브라 ( 1:7; 4:12 ), 두기 고 ( 4:7 ) , 오네시모 ( 4:9 ) , 아리스다고, 마가, 바나바 ( 4:10 ) , 예수/유스도 ( 4:11 ) ,
누가와 데마 ( 4:14 ), 눔바 ( 4:15 ), 아킵보 ( 4:17 ) 를 언급한다. “에베소서”의 수신
자가 실제로 에베소 교회 ( 바울이 자신의 3차 선교 여행에서 거의 3년을 보낸 곳; 행 19:10; 20:31 ) 였다면, 골로새 교회는 바울이 방문한 적도 없었다는 점을 감안했을
때 ( 골 2:1 ), 골로새서와 비교해 에베소서의 비개인적 성격은 극히 이상하다.
이 두 가지 사실 ( 에베소서와 골로새서가 태생적 관련성을 공유한다는 것과 전자는 고도로 비개인
적인 반면에 후자는 정반대라는 것 ) 을 함께 놓고 보면, 중요한 단서가 보인다. ( 대부분
의 학자가 믿는 바와 같이 ) 골로새서가 먼저 쓰였다면, 에베소서는 골로새서의 내
용을 차용하고, 상황에 맞게 고쳐 사용하고, 확장한다. 골로새서는 골로새 교회를 위해 쓰인 반면, “에베소서”로 알려진 서신은 소아시아 서부 ( 오늘날
튀르키예 서부 ) 전역의 여러 교회를 위해 회람용으로 쓰였다. 바울은 골로새 교
인에게 보낸 내용의 일부가 그 지역의 다른 교회에도 필요할 것이라고 느
껴서, 골로새서의 내용을 재사용하고 확장하여 일반적인 서신을 만들어 냈
을 수 있다. 따라서 “에베소서”의 비개인적 성격은 이 서신이 단지 하나의 특정 교회가 아니라 여러 교회에 똑같이 해당하는 내용을 담기 위한 의도
적인 것이다.
이 서신의 비개인적 성격은 이 서신의 가장 오래된 사본이 “에베소에 있
는”을 포함하지 않았지만, 개별 사본에 수신자를 추가할 수 있도록 여백으
로 남겨 두었을 수 있다는 의미다.52 ) 시간이 지나면서 필사자가 여백을 생 략했기 때문에, 우리의 가장 오래된 현존 사본은 수신지도, 수신지를 추가 할 수 있도록 비워둔 여백도 없게 되었을 수 있다.53 ) 그리고 에베소는 소아
51 ) “그는 문안 인사를 보내지 않고, 독자 중 누구에게도 감사 인사를 하지 않으며, 여행 계획을 검토 하지 않고, 독자의 상황에 대해 제한된 지식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Thielman, 11-12.
52 ) 이것은 B. F. Westcott and F. J. A. Hort, The New Testament in the Original Greek (London: Macmillan, 1896), 123–124; Nils Alstrup Dahl, Studies in Ephesians:Introductory Questions,Text-andEdition-CriticalIssues,InterpretationofTextsandThemes, WUNT 131 (Tubingen: Mohr Siebeck, 2000), 62–63에 의해 제안되었다. 다음도 참고. Bruce, 240. 이 가 능성은 현존하는 모든 사본이 상단에 “에베소 사람들에게”를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에 의해 약화 되지 않는다. 이것은 바울의 원본 서신에 포함되지 않았을 추가 사항이다.
대안적 설명은 필사자들이 일반 청중을 위해 이 서신을 재사용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에베소 에 있는”을 생략했다는 것이지만(Thielman, 15), 이것은 이 서신이 원래 에베소 교회에 보내진 것이라면, 왜 이미 일반 서신처럼 읽히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53 ) 일부 사람이 제안한 것처럼(예. Thielman, 13), “에베소”와 함께 “-에 [있는]”(ἐν, ‘엔’)가 생략
시아 서부의 여러 도시 중 하나 ( 실제로는 주요 중심지 ) 였기 때문에, “에베소에 있
는”이 추가된 에베소 교회를 위한 사본 ( “에베소서” ) 을 받았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그 지역에서 에베소라는 도시가 차지하던 중요성과
그 지역 그리스도인 공동체에서 에베소가 중심이었다는 것을 감안했을 때,
이 서신이 결국 에베소와 연관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54 ) 이렇게 해서
에베소서는 원래 회람용 일반 서신으로 의도되었음에도 “에베소서”로 알려
지게 되었다.55 )
이 모든 것을 종합하면, “에베소서”로 알려진 서신은 바울이 자기가 앞서
쓴 골로새서에서 영감을 얻어 ( 에베소를 포함하여 ) 소아시아의 여러 교회에 보낼
회람용 서신으로 쓴 것이지만, 나중에 에베소라는 도시와 연관되었다고 결
론 내리는 것이 합리적이다. 이것은 이 서신과 골로새서의 밀접한 관계, ( 골 로새서와는 대조적으로 ) 이 서신의 비개인적 성격, 일부 중요한 사본에 “에베소에 있는”이라는 어구가 없는 점, 초기 교회 기록에서 이 서신과 에베소의 관계 에 대한 약간의 모호함을 설명해 주는 한편, 이 서신과 에베소라는 도시의 연관성도 설명해 준다.
B. 지역의 중심지였던 에베소
“에베소에”라는 어구가 이 서신의 원본에 포함되어 있었는지, 아니면 에
베소에 보낸 사본에만 포함되어 있었는지와는 상관없이, 많은 주석은 바울
의 의도는 이 서신이 에베소라는 도시에서 및 이 도시를 중심으로 회람되
게 하는 것이었다는 데 동의한다.56 ) 이 서신이 쓰여질 당시 에베소라는 도 시 자체에는 둘 이상의 가정 교회가 있었을 것이고, 히에라볼리, 라오디게 아, 버가모, 서머나, 사데, 두아디라, 빌라델비아 같은 인근 도시에도 여러 교회가 있었다.
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이 가능성을 약화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헬라어의 전치사구는 별개의 단 위로 취급되었으므로, “-에 [있는]”를 남겨 두고 “에베소”만 생략하기보다는 “에베소에 [있는]” 를 생략하는 것이 자연스러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54 ) 에베소가 그 지역의 중심이었다는 것은 Paul R. Trebilco, EarlyChristiansinEphesusfromPaul to Ignatius, WUNT 166 (Tubingen: Mohr Siebeck, 2004), 71을 참고하라.
55 ) Arnold, 27–29는 원문에 “에베소에 있는”이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이 서신이 에베소와 그 주변 지역 교회 사이에서 회람되도록 의도되었다는 데 동의한다. Hoehner, 79; Wayne A. Meeks, TheFirstUrbanChristians:TheSocialWorldoftheApostlePaul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83), 64도 마찬가지다.
56 ) 예. Arnold, 29; Hoehner, 79.
에베소는 여러 면에서 소아시아 서부 ( 오늘날 튀르키예 서부 ) 의 “중심 도시”( 주
요 도시 ) 였다.57 ) 에베소는 당시 로마 제국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였고, 정치, 경제, 사회, 종교의 주요 중심지였다. 고대 세계의 7대 불가사의 중 하나 ( 아
데미 신전 ) 가 있던 에베소는 종교 숭배와 상업의 목적으로 꾸준히 방문하는 행렬을 끌어들였다. 번화하고 화려하고 거대했던 도시인 에베소는 사람들
이 방문하고 싶어 하는 곳이었다.58 )
에베소라는 도시의 이런 전략적 중요성이 바울이 자신의 2차 선교 여행
동안 짧게 방문한 후 3차 선교 여행에서는 에베소로 곧장 직행해서 거의
3년 동안 ( AD 약 52-55년 ) 이 도시에 머문 이유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골로새 교회는 바울에 의해 회심한 사람들에 의해 출발한 것으로 보이는
데 ( 골 1:7; 4:12-13 ), 에베소 근방의 교회 중 일부도 그렇게 시작했을 가능성이
있다.59 ) 에베소에서 바울에 의해 회심하여 가르침을 받은 선교사들이 이
도시를 기점으로 사방으로 뻗어나가 다른 여러 도시에 지교회를 세웠고, 이 것은 에베소를 이 지역의 기독교 중심지로 만들었을 것이다. 바울의 죽음 후에는 사도 요한이 에베소에 거점을 두고, 마찬가지로 이 도시를 중심으로
이웃 도시로 뻗어나가는 사역을 행했다.
에베소는 이 지역의 주요 중심지였기 때문에, 소아시아 서부 전체에 광범 위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에베소가 기독교 신앙 및 실천과 관
련하여 제기한 도전은 주변 도시와 공유되었다. 이것은 에베소서 같은 회람
용 일반 서신이 자매 서신인 골로새서에서 제기된 관심사 중 다수를 공유 할 수 있었던 이유를 설명해 준다. 골로새는 에베소에서 동쪽으로 160km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고, 이 두 서신의 공유된 내용은 골로새 교회가 직면한 것 같은 여러 문제를 그 지역의 다른 곳에 있는 신자도 직면하고 있 었음을 보여 준다.
C. 주술, 숭배, 권세
이 도전 중 하나는 주술, 숭배, 권세에 대한 이 지역의 관심이었다.60 ) 이
57 ) Arnold, 30.
58 ) Jerome Murphy-O’Connor, St. Paul’s Ephesus: Texts and Archaeology(Collegeville, MN: Liturgical Press, 2008), 132.
59 ) Arnold, 29.
60 ) 특히 Clint Arnold의 연구는 에베소에서 이교 숭배의 주술적 성격을 밝히는 데 많은 기여를 했다. 특히 참고. Arnold, Ephesians: Power and Magic; The Concept of Power in Ephesians in
도시에서는 유대인 공동체가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던 것은 물론이고,
50명에 달하는 신과 여신을 숭배할 정도로 종교적으로 다원주의적이었지
만, 에베소는 이 도시의 창건자이자 수호자인 아데미 여신 ( 에베소의 아르테미스로
도 알려진 ) 에 대한 숭배가 지배적이었으며, 이 여신의 웅장한 신전은 아테네
의 파르테논 신전의 4배에 이르렀다 ( Pliny the Elder, Naturalis historia 36.21.95–97 ). 61 )
아데미 여신은 하늘과 땅과 지하 세계에 대해 큰 권세를 휘두른다고 믿어
졌고, “주”와 “구원자”라는 칭호를 얻었다. 이 여신은 자신의 숭배자를 천
상과 지하 세계와 지상의 영들에게서 보호해 주어서, 그들이 질병과 해악을
피하도록 도울 수 있다고 믿어졌다.62 ) 아널드는 이렇게 요약한다.
이 여신과 이 여신의 제의가 가진 영향력은 에베소라는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삶의 모든 영역에 스며들어 있었다. 이 여신의 신전은 이 도시
의 주요 금융 중심지였고, 이 여신의 형상이 주화를 장식했으며, 한 해의 한 달의 이름을 이 여신의 이름을 따라 명명했고, 이 여신을 기리는 올림
픽 방식의 체전 ( 아르테미시아 ) 이 열렸으며, 이 여신은 이 도시의 수호신이
자 보호자로 신뢰받았다.63 )
아데미 숭배는 영적 세계에 대한 깊은 관심 가운데 행해졌다. 영적 권세
는 삶의 모든 영역에 관여하여 ( 좋든 나쁘든 ) 영향을 미쳤다. 이 세계관은 영적 권세를 이용해 삶의 도전에서 긍정적인 결과를 얻기 위해 사용되는 주술 의식, 주문, 신을 향한 기원을 장려했다. 주술은 “어떤 일에서 자신이 원하
는 결과를 보장받기 위해 영적 권세를 조종하는 방법”이었다.64 ) 주술적인 주문, 의식, 저주의 예는 애굽의 건조한 모래 속에 보존되어 있다가 발견된 수백의 주술 파피루스를 통해 알려졌다.65 ) 로마 제국에서는 주술 행위가
불법이었고, 사회적으로도 일탈 행위로 여겨졌지만, 그럼에도 에베소에서
LightofItsHistoricalSituation, SNTSMS 63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9).
61 ) 유대 공동체는 Meeks, First Urban Christians, 44–45를 참고하라. 다른 신과 여신으로는 아프 로디테, 아테나, 키벨레, 데메테르와 코레, 헤스티아 불리아, 헤카테, 튀케, 이시스, 제우스, 아스 클레피오스, 아폴로, 디오니소스, 헤파이스토스가 포함되었다. Arnold, 33. 아르테미스는 Cohick, 34–35를 참고하라.
62 ) Arnold, 31–32.
63 ) Arnold, 31.
64 ) Clinton E. Arnold, “Magic,” DPL, 580.
65 ) 참고. Hans Dieter Betz, ed., The Greek Magical Papyri in Translation, 1: Texts, 2nd ed.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2). 16
번성했다.66 ) 그래서 에베소는 “주술의 대도시”로 묘사되었고, 고대 세계에
서 광범위한 주술 행위로 명성을 얻었다.67 )
에베소와 그 주변 지역의 주술적이고 영적인 환경은 바울의 에베소서의
여러 구체적인 특징을 설명하는 데 크게 기여한다. 첫째로 주목해야 할 것
은 에베소서가 삶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미치고 상호 작용하는 영적 세력 에 대한 광범위한 문화적 신앙을 훼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반대로
에베소서는 그런 신앙을 인정한다 ( 1:21; 2:2; 6:12 ). 둘째, 이 서신은 직접 주술
행위가 마치 아무 효력도 없거나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없는 것으로 비판
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서신은 그리스도는 권세와 능력보다 더 우월한 존
재라고 말함으로써 ( 1:20-22 ), 영적 권세를 조종하기 위해 주술의 속임수에 의
존할 필요가 절대 없음을 보여 준다. 믿는 자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다른 모든 권세를 다스리는 분과 연결된다. 믿는 자는 공중의 권세 잡은 자
에게서 구원받은 자이고 ( 2:1-10 ), 하나님의 전신 갑주와 병기를 공유하는 자
이며, 이 갑옷과 병기는 악한 영이나 악의적인 존재에게서 믿는 자를 보호 해 주는 효과적이고 강력한 보호 장비기 때문에, 그런 영이나 존재를 두려
워할 필요가 없다 ( 6:10-17 )
III. 저작 장소와 연대
전통적으로 에베소서는 바울의 생애 마지막 몇 년 동안 로마의 감옥에
서 ( AD 약 60-62년; 행 28:30-31 ) 다른 “옥중 서신”( 골로새서, 빌레몬서, 빌립보서 ) 과 함께 쓰인 것으로 이해되었다.68 ) 에베소서와 골로새서의 자매 관계는 두 서신이 같은 시기에, 또는 적어도 얼마 안 되는 시간 간격을 두고 쓰여졌을 가능성
을 더욱 높여 준다. 두 서신은 분명히 같은 시기에 보냈으며, 두기고가 각 서신을 해당 목적지마다 전달했다 ( 엡 6:21; 골 4:7-9 ) 69 ) 골로새서는 바울을 통
66 ) 주술사는 처형되거나 추방될 수 있었다; Matthew W. Dickie, Magic and Magicians in the Greco-Roman World (New York: Routledge, 2001), 192, 420–426. BC 13년에 아우구스 투스 황제는 주술적인 주문을 담은 두루마리 2천 개를 불태우도록 명령했다(Suetonius, Divus Augustus, 31.1). Cohick, 41. 주술이 사회적 일탈이었다는 것은 참고. Arnold, “Magic,” 580.
67 ) 다음을 재인용. Rainer Schwindt, Das Weltbilddes Epheserbriefes: Eine religionsgeschichtlich-exegetischeStudie, WUNT 148 (Tubingen: Mohr Siebeck, 2002), 77. Arnold, Ephesians:PowerandMagic, 14–20.
68 ) Hoehner, 92.
69 ) 두기고는 에베소에서 사역한 후 바울과 함께 헬라에서 예루살렘으로 동행했다. 두기고는 아시
The Letter to the Ephesians

I.
인사(1:1-2)
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
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
노니
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
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
을지어다
1 Paul, an apostle of Christ Jesus by God’s will:
To the holy people (in Ephesus) and believers in Christ Jesus.1)
2 Grace to you and peace from God our Father and the Lord Jesus Christ.
에베소서의 시작 인사에서 바울은 자기가 하나님의 뜻으로 사도가 되었
음을 근거로 자신의 사도적 권위를 단언한다. 이 서신은 에베소와 그 주변
에서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자인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에게 보낸 서신이다.
유대인으로 이방인에게 파송된 사도인 바울의 은혜와 평화 선언은 헬라식
인사말과 유대식 인사말을 결합해서, 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이루어진 은 혜를 통해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게 된다는 바울의 가장 깊은 신학적 확신 을 표현한다.
1 ) CSB(이 주석서 전체에서 일차적 번역으로

1:1 바울은 그의 친숙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이라는 어구로
이 서신을 시작한다 ( 고후 1:1; 골 1:1; 딤전 1:1; 딤후 1:1 ). 2 ) 바울이 공동 발신자 없이 서신을 쓰는 것은 이례적이다.3 ) 또한 로마서와 목회서신이 공동 발신자가
없는 예이고, 그 밖의 다른 서신에서는 디모데 ( 고후 1:1; 빌 1:1; 골 1:1; 살전 1:1; 살후 1:1; 몬 1절 ), 실루아노/실라 ( 살전 1:1; 살후 1:1 ), 소스데네 ( 고전 1:1 ) 가 공동 발신자로 언급된다. 이 서신에 공동 발신자가 없는 이유를 사변적으로 추측하는 것은 현명하지 않고, 단순하게 바울이 이 서신을 보낼 때 혼자 있었던 것일 뿐
이라고 보는 것이 가장 좋은 설명이다.
사도로서(행 14:4, 14; 고전 9:1 참고),4 ) 바울은 자신을 그리스도를 대변
하기 위해 그리스도에 의해 보냄을 받은 대리자로 여긴다. 이 서신(에베소
서) 내에서 자신을 직접 ‘사도’라고 칭하는 곳은 이 서두뿐이지만, 일반적 인 의미에서의 사도는 다른 세 지점(2:20; 3:5; 4:11)에서도 언급한다. 오히
려 바울은 자신을 지칭할 때 ‘갇힌 자’라는 상태를 언급하는 쪽을 더 선호
한다(3:1; 4:1; 6:20).5 ) ‘그리스도 예수의’라는 속격 표현6 ) 은 몇 가지 다른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첫째, 소유(Possession)의 의미로 바울은 그리스
도 예수께 속한 사도라는 말이다. 둘째, 기원(Source)의 의미로 바울은 그
리스도 예수에 의해 보냄을 받은 사도라는 말이다. 셋째, 묘사(Description) 의 의미로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에 의해 규정(정의)되는 사도라는 말이다.
문장 구조와 뒤따르는(개역개정은 맨 앞에 나오는) 구절인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 암아”가 이 세 가능성을 모두 뒷받침하기 때문에, 어느 한 가지 해석만을 확신하는 것은 지혜롭지 않을 수 있다. 사실, 이 세 가능성이 바울의 사도직
의식 속에 한데 어우러져 있다고 받아들일 때 우리는 바울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즉, 바울은 그리스도께 소유되었고, 그리스도에 의해 보냄을 받았
으며, 그리스도에 의해 정의되는 존재다. 바울이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 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되었다는 사실은7 ) 그리스도와 맺고 있는 그의 사도적 관계(소유됨, 보냄 받음, 정의됨)가 무엇이든 그것이 결국 하나님께 서 결정하신 계획에 따른 것임을 나타낸다.
2 ) 에베소서의 서두와 인사말의 틀은 바울 시대 히브리어, 아람어, 헬라어 서신의 관례를 따른다. Thielman, 31.
3 ) Cohick, 78.
4 ) ἀπόστολος(‘아포스톨로스’).
5 ) Cohick, 78.
6 ) Χριστοῦ Ἰησοῦ(‘크리스투 이에수’).
7 ) διὰ θελήματος θεοῦ(‘디아 델레마토스 데우’).
“그리스도 예수”라는 용어는 나사렛 예수의 메시아적 지위를 가리킨다.
“그리스도”는 “메시아”, 즉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다윗 가문의 왕을 의미 하고, 예수의 성이 아니다.8 ) 이것이 유대교와 히브리어 성경의 다윗 전승에 깊이 젖어 있는 자에게는 명백해 보이겠지만, 바울이 사용한 “그리스도”라
는 용어는 이 칭호가 지닌 원래의 의미를 잃고, 사실상 고유명사로 기능 했다는 학문적 합의가 오랫동안 있었다.9 ) 그러나 조슈아 지프가 지적하듯, 이 합의는 뒤집히고 있다. “많은 목소리가 이 용어는 ‘메시아’를 의미하고 그 왕적 함의를 유지한다는 것을 보여 주는 증거를 집결시켰기” 때문 이다.10 ) 이 왕적 함의는 하나님이 다윗왕에게 준 약속에서 비롯한 것이어 서, 다윗 가문 출신으로 나라를 통치하는 왕은 누구든지 시편에서 추가적인 설명 없이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로 소개할 수 있었다 ( 예. 시 18:50; 20:6; 28:8; 또한 비교. 삼상 2:10; 합 3:13 ). 11 ) 이후 구약 성경은 하나님이 자신의 기름부음
13 ) τοῖς ἁγίοις(‘토이스 하기오이스’). 37
받은 왕을 통해 자신의 통치를 견고히 세우게 될 종말론적 황금시대에 대 한 소망을 발전시켰다 ( 예. 렘 23:5-8; 겔 34:23-24 ). 따라서 이 서신 전체에 걸쳐 “그리스도”는 이 메시아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전제될 것이다.
사도가 기술한 이 서신의 수신자를 직역하면 “에베소에 있는 자들, 거룩 한 자들 ( 성도들 ),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신실한 자들”로 기술된다.12 ) 바울이 일관되게 자신의 독자를 “거룩한 자들” 또는 “성도들”( 단 한 번도 단수형으로 사용
되지 않고 언제나 복수형으로 사용 ) 13 ) 로 언급하는 것 ( 엡 1:15; 3:8, 18; 4:12; 6:18; 롬 1:7; 고전 1:2;
8 ) 헬라어 ‘크리스토스’(Χριστός)는 ‘크리오’(χρίω, “기름 붓다”)에서 파생한 단어로, 헬라어 구약 성 경(70인역)에서 히브리어 ‘마쉬아흐’(hyXm, “기름부음 받은 자”)를 번역하는 데 사용되는데, ‘마 쉬아흐’는 대제사장과 왕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는 단어다. 둘 다 자신의 직분을 위임받을 때 기름 부음을 받았다. 오직 왕적인 존재만이 메시아 기대와 동일시되고,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왕 적인 통치와 관련 있다. 참고. Moisés Silva, “Χριστός,” NIDNTTE 4:688–690. 9 ) Joshua Jipp, ChristIsKing:Paul’sRoyalIdeology (Minneapolis: Fortress, 2015), 3–4. 지프는 이것을 부세의 영향력 있는 저작인 Kyrios Christos에서 기원을 찾는데, 그 저작에서 부세는 헬레 니즘 기독교에서 유대인의 다윗 전통이 평가절하되어, 바울이 예수의 다윗 혈통에 무관심하게 되 었다고 주장했다. 참고. Wilhelm Bousset, Kyrios Christos: Geschichte des Christusglaubens, FRLANT 4 (Göttingen: Vandenhoeck & Ruprecht, 1913).
10 ) Jipp, Christ Is King, 4; N. T. Wright, The Climax of the Covenant: Christ and the Law in Pauline Theology (Minneapolis: Fortress, 1991); Wright, Paul and the Faithfulness of God, 815–836; Adela Yarbro Collins and J. J. Collins, King and Messiah as Son of God: Divine, Human, and Angelic Messianic Figures in Biblical and Related Literature (Grand Rapids: Eerdmans, 2008), 101–122.
11 ) Silva, “Χριστός,” NIDNTTE 4:690.
12 ) τοῖς ἁγίοις
고후 1:1; 빌 1:1; 골 1:2 ) 은 이들과 여호와의 언약 관계가 전에 이스라엘 백성이 가
졌던 지위와 상응하는 것임을 보여 준다.14 ) 하나님은 자신이 거룩한 것처 럼 자기 백성도 거룩하도록 택하였고 ( 출 19:5-6; 22:31; 레 11:45; 19:2; 20:7; 시 34:9; 단
7:18-27 ), 이 백성이 구별되어 자기에게 속할 것을 기대한다.
바울이 독자를 “신실한 자들”이라고 한 것은 신뢰할 수 있는 개인이라는 그들의 성품을 가리키는 말이 아닐 것이다.15 ) 오히려 “신실한 자들”이라는
말은 본문처럼 형용사가 아니라 실명사로 사용되는 경우,16 ) 어떤 것에 대
한 ( 이 경우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 누군가의 믿음을 가리킨다 ( 비교 1:13 ). 17 ) 이것은 바
울이 고린도후서 6장 15절에서 이 단어의 실명사를 “믿지 않는 자들”의 반
대말로 사용한 것과 일치한다 ( 비교 딤전 4:10, 12; 5:16; 딛 1:6 ) 18 ) 달리 말하자면 바
울은 독자의 신실한 성품보다는 그들의 믿음의 대상에 초점을 맞추어 독자
를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자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신실한 자들”보다 더 나은
번역 ) 로 기술한다.19 )
이 후반절과 관련해 두 가지 주된 질문이 제기된다. 첫 번째는 가장 초기
에 속한 여러 사본에 빠져 있는 “에베소에”라는 어구다.20 ) 두 번째는 바울
이 말하는 대상이 두 집단 ( 거룩한 사람들과 믿는 자들 ) 인가, 아니면 한 집단 ( 거룩한
믿는 자들 ) 인가 하는 것이다. “에베소에”라는 어구가 없는 것 21 ) 은 바울의 다
른 서신 ( 진위의 논란이 있든 없든 ) 과 비교했을 때 이 서신의 다소 비개인적인 성
격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 서신에는 개인적인 인사가 없고, 이것은
바울이 에베소에서 2-3년을 보냈음을 고려하면 충격적이다 ( 비교. 행 19장 ). 또 한 이것은 바울이 로마서를 쓸 당시는 로마에 간 적도 없으면서 여러 사람
의 이름을 들어 문안 인사를 전하는 로마서 16장 3-16절과 비교했을 때도 이상해 보인다. “에베소에”가 이 서신의 원문에 없었다면, 이 서신은 여러 교회를 위해 쓰인 일반 서신이거나 회람용 서신일 것이다. 아마도 바울은
( 에베소가 그 주요 도시였던 ) 소아시아 지역 주변의 여러 도시에 있는 교회에 이 서 신을 회람시키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에베소에서 바울의 사역이 지역 전체
14 ) Cohick, 79. 15 ) Thielman, 34. 16 ) τοῖς … πιστοῖς(‘토이스……피스토이스’).
17 ) BDAG, s.v. “πιστός,” 821 §2.
18 ) Campbell, Paul and Union with Christ, 112.
19 ) Cohick, 79; Baugh, 58; Thielman, 34; Hoehner, 142; Lincoln, 6; Best, 101.
20 ) P46 a* B* 6. 1739; (McionT’ E cf Inscr.).
21 ) ἐν Ἐφέσῳ(‘엔 에페소’).
에베소서
에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 예컨대 골로새 교회는 바울의 에베소 사역에서 생
겨났을 수 있다, 비교. 골 1:7 ). 이 회람용 서신은 아마도 나중에 가서야 에베소와 연 결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것은 에베소가 이 지역의 주요 중심지였고,
고대 세계 전체에 걸쳐 유명했으며, 바울의 선교 여행에서 다른 어느 곳
보다 더 많은 시간을 이곳 에베소에서 보낸 까닭에 바울과 밀접하게 연관 되기 때문이다. 이 서신과 에베소라는 도시의 연관성이 확립되자, 후대의
필사자는 자신의 사본에 “에베소에”를 추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에베소
에”가 없으면 헬라어 원문의 문장이 어색하게 된다는 지적도 있을 수 있다. 이 어구가 없는 원문의 문장을 직역하면 “ ( 에베소에 ) 있는 거룩한 사람들에 게”가 된다.22 ) 그러나 나는 우리가 이 원문의 문장을 어색하게 느끼는 것은 “에베소에”를 본문의 일부로 읽는 데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자 한다. 처음부터 “에베소에”가 없는 헬라어 본문만을 읽어 왔다면, 이 문장 의 구문을 지금과는 다르게 읽었을 것이고, 그 문장이 반드시 어색하게 느 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고 믿는 자들에게.”23 ) 바울이 말하는 대상이 두 집단인가, 아니면 한 집단인가 하는 질문도 “에
베소에”가 있느냐 없느냐에 영향 받는다. 이 어구를 포함한다면, 이 어구를 포함하는 전치사구는 이 절 끝에 나오는 전치사구인 “그리스도 예수 안에
서”와 병행을 이룰 것이다. 이 병행은 바울이 말하는 대상이 두 집단 ( 에베소에
있는 거룩한 사람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신실한 자들 ) 이라는 쪽을 강화하는 것으로 해
석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바울이 독자 중 일부를 에베소에 있는 거룩한
사람들로 부르고, 일부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신실한 자들로 부르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물어야 한다. 설령 바울의 청중이 에베소에 국한하지 않는다고 해도, 모든 신자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따라 서 자신의 청중 중 일부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신실한 자들로 지칭하는 것은 거의 의미가 없다. 그것은 마치 서로 다른 두 집단을 지칭하기 위해 “거룩한 사람들과 그리스도인들에게”라고 말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어떤 이는 전자는 유대인 그리스도인을, 후자는 이방인 그리스도인을 가리킨다
22 ) τοῖς ἁγίοις τοῖς οὖσιν [ἐν Ἐφέσῳ](‘토이스 하기오이스 토이스 우신 [엔 에페소]’).
23 ) τοῖς ἁγίοις τοῖς οὖσιν καὶ πιστοῖς ἐν Χριστῷ Ἰησοῦ(‘토이스 하기오이스 토이스 우신 카이 피 스토이스 엔 크리스토 이에수’). 이것과 비슷하게 윈저는 이 어구를 “거룩한 자들(즉, 성도)에게, 즉 또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자들에게”라고 번역한다. 참고. Lionel J. Windsor, Reading Ephesians and Colossians after Supersessionism: Christ’s Mission through Israel to the Nations (Eugene, OR: Cascade, 2017), 81–82.
고 말한다.24 ) 실제로 이 두 집단의 관계가 이 서신의 주요 주제다 ( 예. 2:1122 ). 그러나 바울이 이 서신의 다른 곳에서 모든 믿는 자를 “거룩한 자들” 또
는 “성도들”로 지칭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 1:15, 18; 3:8, 18; 4:12; 5:3; 6:18 ), 이 해석은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25 ) 바울에게 오늘날 우리와 마찬가지로 “거
룩한 사람들”과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자들”(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 ) 은 같은
것을 가리키는 두 표현이다. 따라서 “에베소에”가 없는 경우 이 문장의 직
역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고 믿는 자들에게”가 될 것이다. 두 형
용사는 한 집단 (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한 믿는 자들 ) 을 수식한다.26 ) 이것은 두 명
사적 형용사가 하나의 관사에 지배되어 하나의 집단임을 보여 주는 헬라어
구문으로 더욱 강화된다.27 )
1:2 오직 데살로니전서만이, 그리고 아마도 의외로 골로새서만이 에베
소서 1장 2절에 나오는 바울의 인삿말과 다르다. 데살로니가전서 1장 1c절
이 가장 짧고 (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 골로새서 1장 2b절이 다음으로
짧다 ( “우리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 28 ) ( 진위 논란이 있든 없 든 ) 바울의 다른 모든 서신이 하나님 아버지뿐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에
게서 나오는 은혜와 평강 ( 평화 ) 을 표현하기 때문에 이 서신의 인사말과 어느
정도 일치한다 ( 롬 1:7b; 고전 1:3; 고후 1:2; 갈 1:3; 빌 1:2; 살후 1:2; 몬 3절 ).
바울은 독자에게 “은혜”를29 ) 선언하기 위해 자신의 신학적 확신을 반영
하여 헬레니즘 세계의 표준적인 인사말을 수정했다 ( 비교. 엡 2:8-9 ). 또한 유대
인의 전형적인 인사말인 ‘샬롬’( 평강, 평화 ) 의 헬라어 형태를 추가했다.30 ) 이
런 의미에서 “은혜와 평강”은 이방인에게 파송된 유대인 사도 바울의 “이
중언어적” 정체성을 나타낸다. 또한 이 어구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구원
24 ) 예. Kümmel, 355.
25 ) Thielman, 33–34.
26 ) 하지만 윈저가 이 어구는 “그리스도를 믿는 이방인들이 놀랍게도 전에 하나님의 옛 백성 이스라 엘의 특권이었던 거룩함에 참여하는 자가 되었다”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말한 것은 옳을 수 있다. Windsor, ReadingEphesiansandColossiansafterSupersessionism, 82.
27 ) Larkin, 2: “‘카이’(καί)로 연결된 사람들을 지칭하는 두 복수 형용사 중 첫 번째 형용사 앞에 관 사가 있지만 두 번째 형용사 앞에 없다는 것은 두 집단이 동일하다는 것을 나타낸다.” 다음도 참 고. Daniel B. Wallace, GreekGrammarBeyondtheBasics:AnExegeticalSyntaxoftheNew Testament (Grand Rapids: Zondervan, 1996), 282; Cohick, 79; Thielman, 34; Hoehner, 142.
28 ) 물론 여러 사본이 누락된 어구인 “그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추가한다(a A C F G I 075. 104. 365. 630. 1241s. 2464 Û it vgcl (syh**) bo; Hier).
29 ) 비슷하게 들리는 ‘카이레인’(χαίρειν , “기뻐하라”)이 ‘카리스’(χάρις , “은혜”)로 대체되었다; Judith M. Lieu, “‘Grace to You and Peace’: The Apostolic Greeting,” BJRL 68, no. 1 (1985): 166–167.
30 ) εἰρήνη(‘에이레네’).
에베소서
하는 은혜를 이루었고, 이 은혜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인류 사
이 ( 2:17 ), 그리고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평화와 화해를 가져온다는 바울의
메시지를 반영한다 ( 2:14-15 ) 31 ) 또한 이 인사말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은혜 베푸시고”32 ) 평강 주시기를 간구하는 민수기 6장 23-26절의 제사장
축도를 반영한 것일 수 있다.33 ) 바울이 이 축도를 염두에 둔 것이라면, 바
울은 자기가 독자에게 은혜와 평강을 선언하는 것을 유대인 제사장이 하나
님의 백성에게 복을 선언하는 것같이 독자를 향한 자신의 유사 제사장적
역할의 표현으로 보았을 수 있다.34 )
31 ) Hoehner, 150.
32 ) !n:x'(‘하난’)
33 ) ~wOlv'(‘샬롬’). 민 6:23-26은 Thielman, 35; Hoehner, 150을 참고하라.
34 ) Thielman, 35.

송영(1:3-14)
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
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
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
리에게 주시되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
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
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
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가 사
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
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
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8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9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3 Blessed is the God and Father of our Lord Jesus Christ, who has blessed us with every spiritual blessing in the heavens in Christ. 4 For he chose us in him, before the foundation of the world, to be holy and blameless in love before him. 5 He predestined us to be adopted as sons through Jesus Christ for himself, according to the good pleasure of his will, 6 to the praise of his glorious grace that he lavished on us in the Beloved One.
7 In him we have redemption through his blood, the forgiveness of our trespasses, according to the riches of his grace 8 that he richly poured out on us with all wisdom and understanding. 9 He made known to us the mystery of his will, according to his good pleasure that he purposed in Christ 10 as a plan for the right time—to bring everything together in Christ, both things in heaven and things on earth in him.
하신 것이니 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
게 하려 하심이라
11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
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12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
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
이라
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
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
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 치심을 받
았으니 14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
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
11
In him we have also received an inheritance, because we were predestined according to the plan of the one who works out everything in agreement with the purpose of his will, 12 so that we who had already put our hope in Christ might bring praise to his glory.
13
In him you also were sealed with the Holy Spirit of promise1) when you heard the word of truth, the gospel of your salvation, and when you believed. 14 The Holy Spirit is the down payment of our inheritance toward2) the redemption of the possession, to the praise of his glory.
1장 14절까지 이어지는 바울의 가장 긴 송영이 1장 3절에서 시작한다.
바울서신 중에서 고린도후서만이 시작 부분에 비슷한 송영이 나오며, 고린
도후서 1장 3a절의 표현은 에베소서 1장 3a절에서 발견하는 것과 같다.3 )
이 송영은 하나님의 성품, 행위, 초월적 본성을 찬송하는 유대교의 ‘베라카’
에 비추어 이해해야 한다. 이 서신의 경우 송영 전체 ( 1:3-14 ) 는 이 서신 전체 에 걸쳐 울려 퍼지는 여러 주제를 소개하는 조밀하고 신학적으로 풍부한
현관을 형성한다. 또한 이 송영은 각 부분이 삼위일체의 서로 다른 위격에 대응하는 세 부분으로 구성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4 ) 성부의 복과 성부가
믿는 자를 택하신 것이 1장 3-6절의 초점이다. 하나님의 복은 성자 안에서
1 ) “약속의 성령”이라는 어구는 1:13 주석을 반영한 것으로(참고. 아래 104-106쪽), CSB의 “약속된 성령”을 대체한다.
2 ) CSB의 “까지” 대신에 “향하여”로 번역한 것은 1:14 주석을 반영한 것이다(참고. 아래 106-109 쪽).
3 ) Εὐλογητὸς ὁ θεὸς καὶ πατὴρ τοῦ κυρίου ἡμῶν Ἰησοῦ Χριστοῦ(‘율로게토스 호 데오스 카이 파 테르 투 퀴리우 헤몬 이에수 크리스투’). 벧전 1:3a도 참고하라.
4 ) 바울을 설명할 때 삼위일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적절한지는 Wesley Hill, Paul and the Trinity:Persons,Relations,andthePaulineLetters (Grand Rapids: Eerdmans, 2015)를 참고하 라. 힐의 논지는 “후대에 발전된 삼위일체 교리를 시간을 거슬러 바울서신 본문에 적용하면 바울 서신이 쓰인 역사적 환경에서 그 서신을 조명하고 더 깊이 꿰뚫어 볼 수 있기 때문에, 후대 기독교 의 범주를 바울을 읽는 렌즈로 사용하는 것이 반드시 시대착오적인 것은 아니다”라는 것이다(p. 171, 강조는 원저자).
발견되고 ( 1:7-12 ), 믿는 자는 성령으로 인 침을 받는다 ( 1:13-14 ). 5 )
1:3 송영은 하나님께 찬송이나 송축을 드리는 것으로 시작하고, 이것이
합당하다. 회너가 요약하듯, 구약 성경에서는 통상 하나님의 돌보심 ( 시 28:6; 72:18; 144:1; 슥 11:5 ), 공급하심 ( 룻 4:14; 왕상 1:48; 대상 29:10 ), 기도 응답 ( 창 24:27; 왕상 8:15; 시 66:20 ), 원수에게서 구원하심 ( 창 14:20; 출 18:10; 삼하 18:28; 시 124:6 ), 악에서 구원
하심 ( 삼상 25:32, 39 ),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 시 72:19; 106:48; 135:21 ) 와 관련해 하
나님을 송축하거나 찬송한다.6 ) 그래서 이 서신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
게 베푸신 하나님의 복으로 인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마이
클 앨런이 주해하듯, “복의 언어 ( 하나님이 송축 받으심과 복을 베푸심을 가리키는 언어 ) 에
서는 하나님이 우리를 살리시는 것과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거나
높이는 것을 나타내는 데 같은 동사에서 나온 용어를 사용한다.”7 ) 하나님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자 아버지로 묘사된다.8 ) 이
렇게 하나님을 그리스도의 아버지라고 하는 것은 바울에게 전형적이다. 또
한 성부 하나님을 모든 복의 궁극적 근원, 따라서 찬송의 궁극적 대상으로
여기는 것도 바울에게 전형적이다. 믿는 자에게 모든 신령한 복을 주신 분
은 성부 하나님이다. 믿는 자가 받는 이런 복은 성경 헬라어의 표현 방식을
따라 이해해야 하며, 그에 따르면 복은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행하시는 선
한 일을 가리키고 ( 예. 창 14:20; 출 18:10; 룻 4:14 ), 사람들이 하나님에게서 받는 높
임 ( 통상적으로 복의 비성경적 의미 ) 을 가리키지 않는다.9 ) 하나님이 믿는 자에게 주신 복은 세 전치사구로 수식된다. “모든 신령한
복으로”, “하늘에 속한”, “그리스도 안에서.”10 ) 여기서 첫 번째 질문은 이 세 전치사구를 병렬로 이해해야 하는가, 아니면 전치사구가 각각 직전 전치 사구를 수식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하는가다. 전자로 이해하면, 1장 3b절은
5 ) Theodor Innitzer, “Der ‘Hymnus’ im Epheserbrief (1,3–14),” ZKT28, no. 4 (1904): 614. 1:3-14의 구조에 대한 학문적 논의의 상세한 요약으로 Hoehner, 153–161을 참고하라.
6 ) Hoehner, 162.
7 ) Allen, 11.
8 ) 회너는 “하나님”과 “아버지” 둘 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에 의해 수식되도록 의도되었다는 것을 올바르게 입증한다. 즉, 하나님은 단순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자 아버지라는 것이다. Hoehner, 164; Wallace, Greek Grammar, 270–274, 671, 735도 참고하라.
9 ) Thielman, 46; LSJ, s.v. “εὐλογέω,” 720.
10 ) 세 개의 전치사구는 모두 전치사 ‘엔’(ἐν)의 지배를 받는다. ἐν πάσῃ εὐλογίᾳ πνευματικῇ(‘엔 파세 율로기아 프뉴마티케’); ἐν τοῖς ἐπουρανίοις(‘엔 토이스 에푸라니오이스’); ἐν Χριστῷ(‘엔 크리스토’).
하나님이 모든 신령한 복으로, 하늘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복 주
셨다고 말한 것이 된다 ( 하나님의 복에 대한 세 병행 진술 ). 후자로 이해하면, 1장 3b
절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있는 모든 신령한 복으로
복 주셨다고 말한 것이 된다. 후자로 이해하는 경우 이 신령한 복에 대한 설
명이 점점 구체화한다. 이 복은 하늘에 있는 복이고, 이 복은 그리스도 안에 서 발견되는 복이다. 이 두 가지 선택지는 문법적으로는 어느 쪽이든 가능
하지만, 두 번째 접근법이 이 구절을 읽는 더 자연스러운 방식을 보여 주는 것이기 때문에 개연성이 크다. 하나님은 믿는 자에게 복을 주실 때 모든 신 령한 복으로 주셨는데, 이 복은 하늘에 있는 복이고, 그리스도를 통해 오는 복이다.
1장 3-14절 송영 전체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신령한 복”을 주셨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가운데, 1장 3b절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 서 및 그리스도를 통해 주시는 신령한 복 중 다수를 자세하게 말하는 1장 4-14절의 요약으로 기능한다.11 ) 1장 3b절은 이 송영의 성격이 “모든 신령 한 복”을 풀어서 설명하는 것임을 분명히 하는 데 도움을 주고, 마찬가지로
1장 4-14절은 바울이 어떤 복을 염두에 두는지를 명확히 함으로써 “모든 신령한 복”의 의미를 분명히 한다. 이렇게 이 신령한 복은 이후 여러 절에 서 명확히 설명된다.
장소를 나타내는 어구 “하늘에서”12 ) 의 의미가 약간 모호하지만, 두 가지
가능성 중 하나를 가리킬 것이다. 첫째, “하늘에서”는 단순히 하나님이 주
신 “신령한 복”이 지닌 영적 본질을 강조하는 것일 수 있다. 이 복의 기원과
원천은 땅의 영역에 있지 않고,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악한 영적 세력과 함 께 거하시는 하늘의 영역에 있다 ( 1:20; 6:12 ) 13 ) 둘째, “하늘에서”는 바울이 그 리스도 안에 있는 자를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은 자로 여긴다는 사
실 ( 2:6 ) 을 미리 보여 주는 것일 수 있다 ( 2:6 ). 이런 식으로 읽으면, “하늘에 서”는 신령한 복 자체보다는 복의 수혜자 ( 바울의 “우리” ) 를 묘사하는 것이 된다 ( 즉, 하나님이 우리에게……하늘에서 복 주셨다 ). 후자의 선택지도 가능하지만, 세 전치사구가 서로 수식한다고 본다면, 전자가 더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 위를 참고하라 ). 신령한 복이 하늘에 있고, 구체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다 ( 참고. 보론 “하늘” ). 두 번째 전치사구인 “하늘에서”가 신령한 복보다는 믿는 자를 수식
11 ) Hoehner, 162.
12 ) ἐν τοῖς ἐπουρανίοις(‘엔 토이스 에푸라니오이스’).
13 ) Thielman, 47.
한다면, 전치사구의 연쇄는 주어가 달라져서 ( 신령한 복을 수식하는 것에서 믿는 자를
수식하는 것으로 ) 중단된다.
1장 3절에서 마지막 전치사구는 “그리스도 안에서”인데, 이 아주 중요한
관용구는 이 서신의 앞부분에서 이미 한 번 나왔다 ( 비교. 1:1b ). 안타깝게도 많
은 독자가 이 관용구를 마치 구두점처럼 취급해 무시해 버리지만,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이 관용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신령한 복을 설명하는 송영의 나머지 부분을 꿰는 중심 실이기 때문이다.
서론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다룬 절을 참고하라. 이 경우에 “그리스
도 안에서”는 장소를 나타내는 것으로 읽는 것도 가능하지만, 기능상 도구
를 나타내는 것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14 )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도구로서, 하나님을 대신해 행하시는 분이다. 자기 백성에게 복 주고자 하시는 하나님 의 뜻은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된다.
1:4 바울이 열거하는 첫 번째 신령한 복은 택하심이다. 하나님이 그리스
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 영어 번역문의 처음에 나오는 전치사 “for” 15 ) 는 헬라어 본문에서 종속 접속사 역할을 하는 부사를 번역한 것인 데, 하나님의 복 ( 1:3b ) 을 풀어서 설명하는 말이 시작함을 나타내는 말로 이 해해야 한다( 개역개정의 “곧” ).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신령
한 복을 주셨고, 그 첫 번째 증거는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셨다는 것이다. 역
사적으로 이 절은 택하심의 개념을 둘러싼 신학 논쟁의 중심에 서 있었다.
이 절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택하신다고 분명하게 말한다. 그러나 이것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가? 첫째, “우리”는 누구를 의미하는가? 여기서 한
가지 분명하게 가능한 답은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모든 자, 14 ) Campbell, Paul and Union with Christ, 82–84의 논의를 참고하라. 앞에 나오는 어구인 ‘엔 토 이스 에푸라니오이스’(ἐν τοῖς ἐπουρανίοις)는 장소격일 가능성이 가장 높고, ‘엔 크리스토’(ἐν
Χριστῷ)는 그것과 동격으로 읽을 수 있다. 그러면 그것은 하늘에 있는 모든 영적 복(즉, 그리스 도의 영역 안에 있는)으로 의역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전에 주장했듯, “형용사 ‘에푸라니오이
스’(ἐπουρανίοις)에 대한 추가 탐구는 ‘엔 크리스토’를 ‘엔 토이스 에푸라니오이스’와 동격으로 보지 않는 것이 최선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시사한다. 엡 3:10과 6:12는 하늘들에 있는(‘엔 토 이스 에푸라니오이스’) 통치자, 권세, 어둠의 세력, 악의 영적 세력에 대해 말한다. 이것들은 확
실히 그런 세력에 대항 관계에 있는 그리스도의 영역 안에 포함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적들의
영역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하늘 영역을 명시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엔 크리스토’가 ‘엔 토이 스 에푸라니오이스’와 동격이라고 주장할 수 있지만, ‘엔 토이스 에푸라니오이스’는 모든 영적 실재를 가리키는 전문 용어일 가능성이 더 높으며, 그 안에서 그리스도의 영역은 어둠의 세력 영 역에 대항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영역이 그리스도-하늘들로 한정되더라도 하늘들로 묘사될 가능성은 낮다.” Campbell, Paul and Union with Christ, 83(강조는 원저자).
15 ) ‘카도스’(καθώς)는 “-를 위하여”(CSB, NIV, NLT), “-와 같이”(ESV), “-에 따라”(KJV) 등 다양 하게 번역된다.
곧 모든 믿는 그리스도인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이것은 집합적으로 이해해
야 하지만, (이런 구별이 의미가 있다면) 개인의 집합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개인 의 집합체”로 읽는 독법의 요지는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개별 신자가 하나
님에 의해 택하심을 받았다는 것을 단언하는 것이다. 이것은 칼빈주의의 지
지를 받는 입장이다. 개별 신자가 그리스도를 믿도록 하나님에 의해 예정되 었다. 그러나 “우리”는 일종의 “비개인적 집합체”( 구체적인 개인을 함축하지 않는 하
나의 집단 ) 를 가리킬 수도 있다. 그런 비개인적-집합체로 읽는 독법의 요지는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개별 신자를 반드시 예정하신 것은 아니라 는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은 한 민족을 예정하셨다. 이 입장은 택하신 자의
수와 택하신 자가 누구인지가 미리 결정되어 있지 않다고 주장하는 아르미 니우스주의의 지지를 받는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의 남 은 자로 이해되는 유대인 신자를 가리킬 수도 있다. 바울이 사용한 “우
리”라는 인칭대명사가 유대인 신자와 이방인 신자 모두 가리키는 것인가, 아니면 유대인 신자만 가리키는 것인가 하는 문제는 에베소서와 관련해 앞
으로 살펴보게 될 쟁점이지만, 여기서는 “우리”가 반드시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신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 일부인 유대인 신자만 가리킬 가능
성이 있다고 말해 두는 정도로 충분할 것이다.
“우리”가 누구를 가리키는지를 이해하기 위해 이 두 가지 선택지를 역으
로 검토해 보자. 첫째,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유대인 신자만 가
리키는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 바울의 청중이 당연히 일차적으로 이방인 청중이었다는 것
을 기억한다면 ) 이 서신에서 아주 일찍 등장하는 “우리”라는 인칭대명사를 바
울의 원독자가 전제했던 것보다 더 좁은 의미의 “우리”를 가리킬 것이라고 생각할 이유는 거의 없다. 앞뒤 문맥을 살펴보면, 오직 유대인 신자만을 염 두에 두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암시는 없다. 게다가 이 송영의 나머지 ( 1:414 ) 는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복을 열거한다는 점에서 “우리” 의 넓은 범위를 유지한다. 그렇게 열거된 모든 복은 유대인 신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신자에게 적용되기 때문에, 1장 3절의 “우리”가 그 리스도의 백성 안에서 이 ( 중요한 ) 부분 집합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단언 하기는 어렵다. 둘째, 여기서 “우리”는 비개인적 집합체를 가리키는 것이 전적으로 가능해 보인다. 개인적 정체성에 초점을 맞추는 현대 서구의 경향
은 바울이나 바울의 독자에 의해 공유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바울 이 모든 개인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집단을 지칭하기 위해 “우리”라는 표현 을 사용했다고 전제해야 할 선험적인 이유가 없다. 하지만 이 읽기는 과연
하나님이 집단을 구성하는 개개인을 정함이 없이 한 집단을 택하고자 하셨
을 것인가 하는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즉, 하나님이 한 집단을 구성하는 개
개인을 택하지 않으신 채 그 집단을 택하고자 하셨겠는가? 확고한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이 읽기를 배제하기는 어렵지만, 성경적 증언의 일반적 기조
는 이 읽기와 반대된다고 할 수 있다 ( 이것은 다음에 좀 더 살펴보자 ). 셋째, 개인의
집합체 읽기는 개인과 집단 둘 모두의 중요성을 단언하고, 이것은 성경적
증언의 일반적 기조와 일치한다. 성경은 개인주의적이지도 않고, 사회주의
적이지도 않다. 성경은 일반적으로 이 둘을 긴장 관계 속에서 함께 결합 한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집단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하나
님은 그 집단 안의 개인에 대해서도 합당한 관심을 보이신다. 개인의 권리
와 특권이 전체의 우위성에 의해 제거되지도 않고, 개인을 전체 위에 놓지 도 않는다. 성경은 개인-집단의 이분법에 대해 두 가지 입장을 모두 포용
한다. 따라서 전체적으로 살펴보았을 때,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백 성과 그 백성을 구성하는 개개인을 택하셨을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인다.16 ) 하나님의 택하심은 세 어구로 수식된다. 첫째, 하나님은 믿는 자로 하여
금 사랑 안에서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세계의 기초
를 놓기 전에 “그 안에서”17 ) 우리를 택하셨다. “그 안에서”라는 구절은 의
심할 여지 없이 성부 하나님보다는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하나님은 “그가
택하셨다”의 주어이고, 그리스도를 통해 이 택하심을 실행에 옮기셨다.18 ) 이것은 1장 3절로 쉽게 확증된다. 거기서는 성부 하나님을 복 주시는 분으 로 말하고, 성부 하나님이 그 복을 주실 때 사용하는 도구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관용구로 표현하기 때문이다.19 ) 이것은 송영 전체에 걸쳐 발견되는 패턴이다. “그 안에서”라는 어구는 “그리스도”를 인 칭대명사로 대체한다.
두 번째 어구인 “창세 전에”는 하나님의 택하심에서 하나님의 택하신 행 위를 강조한다. 즉,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택하신 것은 인간의 결정, 인간의
16 ) 동의. 아널드는 이런 말을 덧붙인다. “마찬가지로 엡 1-2장의 선택, 구속, 구원의 진리는 이 바 울서신의 수신자인 신자 공동체 집단에 해당한다고 진술되지만……항상 개인적으로 적용된다 는 것이 암시되어 있다.” 게다가 1:5a의 입양 은유는 개인적 적용의 필연성을 보여 준다. Arnold, 80; Trevor J. Burke, Adopted into God’s Family: Exploring a Pauline Metaphor, NSBT 22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06), 75.
17 ) ἐν αὐτῷ(‘엔 아우토’).
18 ) Campbell, Paul and Union with Christ, 177.
19 ) Campbell, Paul and Union with Christ, 82-8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