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차

시리즈 서문 | 6
저자 서문 | 8
약어 소개 | 9
서론 14
1. 책의 명칭 | 14
2. 레위기의 배경 | 14
3. 레위기와 레위기의 저자에 대한 현대의 연구 | 15
4. 레위기의 구조 | 18
4.1. 1-7장 • 18
4.2. 8-16장 • 21
4.3. 17-22장 • 22
4.4. 23-26(27)장 • 23
4.5. 계명과 관련 용어 • 23
5. 레위기의 독특한 특징들 | 26
5.1. 문체 • 26
5.2. 내용 • 28
6. 상징으로서의 의식 | 31

7. 레위기의 핵심 주제 | 34
7.1. 인간의 근본적인 측면 • 35
7.2 죄 • 39
7.3 정결함/부정함 • 40
7.4. 거룩함 • 43
7.5. 하나님의 진노 • 51
8. 레위기와 그리스도인 | 52
9. 레위기에 대한 새로운 접근 | 53

아볼로 구약 주석 ( AOTC ) 은 가르침을 통해 자신의 위대한 지성을 열정적
이고 강력하게 전파할 수 있었던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유대 기독교인의 이
름을 따른다 ( 행 18:24-25 ). 아볼로는 과거의 사건들을 통해서 자신의 동시대
사회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잘 알고 있었다. 이 주석 시리즈는 아볼로가 했던 일과 똑같은 목적을 추구한다. 이 시리즈의 한쪽 발은 원문의 심대한
세계 속으로 언제나 굳게 내디디면서 다른 한쪽 발은 설교자와 교사와 성 경을 공부하는 학생들로 이루어진 폭넓은 독자 집단을 향해 뻗쳐 있다. 이 시리즈의 편집자들은 학문적 탁월성과 실제적 적용의 통찰을 겸비함으로써
이 두 가지 영역 모두에서 능숙한 학자들을 선발했다. 한 언어의 모든 의미를 다른 언어로 옮기기 위해서는 번역자들이 원문과 모국어의 언어적 관습이나 의미론적으로 미묘한 차이에 통달해야 한다. 그
러나 주석가들은 단지 원문의 번역자 역할이라기보다는 해석자 역할을 한 다. 주석가들은 번역자들보다 훨씬 더 견고하고 다양하게 이중적 입장을 가 질 필요가 있다. 즉 한편으로는 주석가들도 번역자들처럼 직접 탁월한 번역
을 해낼 수 있을 만큼 언어적인 능력을 구비해야 한다. 더 나아가 주석가들
은 문학적 관습들, 사회학적이고 문화적인 습관들, 본문의 생산자와 관계자 들의 역사적 환경과 이해와 신학적 관점들에 완전히 정통해야 한다. 또 다 른 한편으로 주석가들은 자기들의 시대와 문화를 알아야 하고, 본문의 최초 청중들과 동시대 독자들 사이의 접촉점이 어디에 있는지를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주석가들은 본문뿐 아니라 청중까지도 해석할 필요가
있다.
전통적으로 주석가들은 고대의 본문에 빛을 비추고 뜻을 설명하는 데 만
족해 왔다. 그러나 더 최근에는 우리 시대 상황을 파고드는 주석의 필요성
이 더욱 분명해졌고, 이 시리즈는 본문의 역사적 의미 규명과 그 현대적 적
용을 결합한 방법론을 의식적으로 채택했다. 각 주석의 저자들은 새로운 번
역, 본문 해설, 문학적 형식 및 단락의 구조 및 배경, 본문 주해에 따른 설명
등을 통하여 원문을 철저히 분석한다. 저자들은 각 구절이 성경과 교회 안
에서 어떤 해석적 발전을 거쳤는지 연구한 뒤, 현대 독자들에게까지 그 구
절의 뜻을 있는 그대로 전달한다. 우리는 이 주석이 단지 학자들의 연구를
위한 탁월한 수단만이 아니라, 더 나아가 목회자들의 설교를 위한 효율적인
자료가 되기를 기대한다.
데이비드 베이커 ( David W. Baker )
고든 웬함 ( Gordon J. Wenham )
나의 레위기 연구는 영국의 챌트넘에서 박사 학위 논문을 작성하던
1980년대 초반에 시작되었다. 이처럼 난해한 책을 풀어 나가는 일이 내게
는 20년 넘도록 엄청난 지적 도전이었지만, 이 주석의 출간으로 마침내 기
나긴 탐구의 시간이 열매를 맺게 되어 비로소 큰 해방감을 맛보게 되었다. 하지만 다른 분의 도움이 없었다면 이 과업을 마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래서 나는 박사 학위 지도 교수였던 웬함 ( G. J. Wenham ) 교수와 베이커 ( D. W. Baker ) 교수에게 깊은 감사를 표하고 싶다. 두 분 모두 여러 해 전에 나를 초
대해 레위기 주석을 집필하게 만들었고, 원고를 개선하는 데 도움이 될 만
한 충고도 아끼지 않았다. 초고를 읽고 영어를 교정해 주면서 내게 자극이
되는 말을 해 주었던 트레바스키스 ( L. Trevaskis ) 박사에게도 특별히 감사하다
말하고 싶다. 지금까지 내가 계속 레위기 연구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허
락해 준 도쿄 크리스천 대학교 ( Tokyo Christian University ) 의 동료와 직원들이 베 푼 친절에도 깊이 감사한다.
마지막으로, 이 책을 신속하게 고품질로 제작해 준 IVP의 두체 ( P. Duce ) 박
사와 직원들에게 특별히 감사한다.
이 책이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되기를 기도한다.
노부요시 키우치 ( Nobuyoshi Kiuchi )

1. 책의 명칭
영어의 “Leviticus”란 명칭은 라틴어 ‘레비티쿠스’에서 비롯되었으며, 이
라틴어 명칭은 70인역의 ‘레위티콘’에 근거한다. “레위인”이란 명칭이 레위
기 25장 32-33절에서만 언급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왜 70인역의 번역자들
이 이 책과 레위인을 그토록 강하게 연관시켰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후기
유대교에서 이 책에 붙인 “제사장들의 가르침” ( ‘토라트 하코하님’ ) 이란 명칭을
근거로 판단하자면, 70인역 번역자들은 이 책의 내용이 제사장의 직무와 가장 깊이 관련되어 있다고 여겼을 수도 있다.
일반적인 히브리어 명칭은 책을 시작하는 첫 어절에서 가져온 ‘바이크
라’ ( “그리고 그가 불렀다” ) 다. 또 다른 아람어 명칭은 ‘시프라’ ( “그 책” ) 인데, 이 명
칭은 유대 전통에서 모세의 것으로 여겨지는 다섯 책 가운데 레위기가 특
별히 중요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2. 레위기의 배경
레위기는 역사적 출애굽, 시내산 언약 수여, 성막 건축, 제사장이 성막에 서 행하게 될 기본적인 의식과 관련된 지침에 대한 기사가 나오는 출애굽 기 다음 순서 책이다. 이 두 책이 연속적임을 보여 주는 분명한 표지가 존재 한다 ( 참고, Rendtorff 1996: 22-35 ). 이와 관련해서 출애굽기와 레위기의 문학적,

주제적 관계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 1 ) 출애굽기 28-29장에 나오는 제사장 임직과 관련된 규범을 레위기 8장이 규정했다.
( 2 ) 여호와가 자기 백성에게 가시적으로 나타나는 시간의 길이가 출애굽
기와 레위기를 지나면서 점점 길어진다. 처음에 여호와는 불이 붙은 떨기나
무에서 모세에게 아주 짧게 나타난다 ( 출 3장 ). 이후 그분의 영광의 현현은 시
내산에서 7일 동안 나타나고 ( 출 24장 ), 레위기 9장에 기록된 첫 날의 제사 이
후에는 마침내 여호와의 가시적 임재가 영구적으로 이르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 레위기의 시작 부분은 여호와의 뜻이 발전하는 새로운 단
계를 분명히 제시한다. 레위기는 제사장과 일반 백성이 성막에서 해야 할
일과 관련한 제사 규정으로 시작하는데, 그 내용은 출애굽기 28-29장을 제 외하면 출애굽기에서 언급하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출애굽기 40장 3435절과 레위기 1장이 연결된다는 점은 레위기에서 더 깊은 사안을 다룰 것 임을 암시한다 ( 참고, Auld 2003: 43 ). 레위기 9-27장의 내용은 그것이 원리적으
로는 출애굽기에 이미 예견되어 있는 것이긴 해도 새로운 것이다. 출애굽기
와 대조되는 레위기의 일관성과 통일성은 이후에 레위기의 구조를 논할 때
좀 더 분명해질 것이다.
따라서 레위기는 시내산에서 맺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좀 더 심층적
으로 펼쳐 보이는 것이라 볼 수 있다.
3. 레위기와 레위기의 저자에 대한 현대의 연구
19세기 이래로 레위기는 오경 연구의 중요한 대상이 되었다. 벨하우젠 ( J.
Wellhausen ) 이 제시한 문서설에 따르면, 레위기는 네 개의 문헌 자료 ( J, E, D, P ) 가운데 가장 늦은 시기의 것인 P ( 제사장 자료 ) 에 속하는데, P는 포로기 이후 공동체의 사회적, 종교적 상황을 반영한다.
문헌 자료를 결정짓는 일에는 언어적 문체, 역사적 불일치의 암시, 중첩 되면서 차이를 보이는 신학적 경향 등 여러 추정이 생산된다. 이와 같은 사 항들은 오경의 구성 역사를 밝히려는 과정에서 이스라엘의 종교 역사에 특
수한 진화적 관점을 사용함으로써 해석된다. 이뿐 아니라 레위기와 소위 P 문서의 상당 부분을 특징짓는 “종교적” 규칙을 해석하기 위해 사용하는 방 법은 어떤 관점으로 그 자료를 보는지와 다소 관련된다.
벨하우젠의 방법론은 그것이 제시된 19세기 말 이후를 시작으로 오경을 연구하는 지배적인 방식이 되었지만, 그의 방법론이 근본적으로 가정하는 것들에 대한 최근의 비평은 일반적으로 수용되는 문서설의 결론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다른 학자들, 즉 카우프만 ( Kaufmann ) 을 필두로 하는 이스라
엘 학자들은 사회학적, 언어적 증거에 근거해서, P 문서가 벨하우젠이나 기 타 학자들이 제안한 것보다 더 이른 시기에 나온 것이라고 주장한다 ( Kaufmann 1937-1956; Weinfeld 1972; Hurvitz 1982 ). 이와 같은 신랄하고 타당한 비평에도
불구하고, 현대의 많은 학자들은 여전히 문서설을 수용한다. 특히 레위기와 관련해서, 19세기 말에 클로스터만 ( Klostermann ) 은 레위기 17-26장이 에스겔서와 유사점을 보인다고 결론을 내리면서, 17-26장이 P
와는 다른 문헌 층을 형성한다는 점에 주목했다 ( Klostermann 1983 ). 클로스터만 은 이 문헌집이 명백하게 거룩함에 대해 강조한다는 점에 근거해서 그것을 H ( Heiligkeitsgesetz 또는 Holiness Code[성결 법전] ) 라 부르기를 제안했다. 뿐만 아니
라, 클로스터만은 H를 P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기록된 것으로 여긴다. 일부
학자들이 P 문서 내에서 별개의 문헌 층을 구별하기도 했지만, 놀 ( Knohl ) 의 최근 연구가 있기 전까지는 P가 H를 편집한 것이라는 일반적인 견해가 이
견 없이 받아들여졌다. 놀은 그로 하여금 H를 P의 최종 편집자로 가정하게
만든 다양한 사항에서 자신의 관점을 발전시킨다 ( Knohl 1995. 참고, Joosten 1996 ).
비록 일부 사항에 대해서는 놀과 차이를 보이긴 하지만, 밀그롬은 자신의
방대한 레위기 주석에서 기본적으로 놀의 논지를 따른다 ( Milgrom 1991-2001 )
예를 들어, 이 견해는 P가 제물이나 성소 같은 물건의 거룩함 ( 고정적 거룩함 ) 에
집중하고 인간의 거룩함 ( 역동적 거룩함 ) 에는 집중하지 않는 것처럼 H도 물건
의 거룩함에 관심을 갖는 것이 분명하다는 입장을 고수한다. 뿐만 아니라, 이 학자들은 더 후대의 편집자인 H가 P의 시대와는 다른 시대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H는 P의 규칙을 변경했던 것이 아니라 그 규칙에 새로
운 의미를 부여하면서 통합시켰다고 주장한다. 밀그롬 ( 1991: 34 ) 은 P의 기원
을 실로의 성막까지 추적하는 한편, H의 기록 연대를 히스기야 왕의 시대
로 추정한다.
밀그롬은 자신이 P와 H의 관계로 제안했던 것을 뒷받침하면서 많은 증거 를 발전시켜 나간다. 그러나 내게 밀그롬의 입장은 한편으로는 “고정적 거 룩함”과 “역동적 거룩함” 가운데 거룩함의 동일한 본질이 상정되어 있음을 보지 못한 결과로 보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레위기 내에 주제적 발전이 있 음을 보지 못한 결과로 여겨진다. 주제적 발전과 관련해서 밀그롬이 놓친
것은, 한 책에서 주제적 발전이 화제, 용어, 문체, 관점의 차이에 상당 부분
의존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남아 있는 유일한 질문은 내용상의 불
일치, 특히 거룩함의 개념과 관련된 불일치가 있는지 여부가 될 것이며, 이
부분은 후에 ‘7.4 거룩함’ 단원에서 다룰 것이다.
최근 학계에서는 밀그롬과 놀이 가정했던 것처럼 레위기를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 책으로 보는 일이 적합한지 여부에 대한 문제를 중심으로 논
의가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밀그롬을 비롯한 학자들은 점차 레위기
를 있는 그대로 해석하려 하고 있다. 레위기의 수사적 측면과 관련된 워닝
의 연구는 레위기에 있는 문헌 층과 관련한 전통적인 비평적 판단들에 대
해 심각한 도전을 포함할 수 있다 ( Warning 1999 )
다른 학자들은 P의 존재에 대해서만 아니라 P에 상정된 전통적인 연대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예를 들어, 웬함은 창세기 2-3장 연구에서
P의 존재를 가정하면서 P가 네 개의 문서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의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고 제안했는데 ( Wenham 1999 ), 이런 생각은 이미 19세기에 딜
만 ( Dillmann ) 같은 학자들이 지지했던 것이다. 그러나 웬함은 일반적으로 P를
식별하는 데 사용되는 특징인 성막 상징주의가 전통적으로 JE로 여겨졌던
창세기 2-3장에 포함되어 있다는 점도 지적한다 ( Wenham 1986 ). 19세기의 레위기에 대한 소위 “비평적 연구”와 더불어, 쿠르츠 ( Kurtz ), 켈
로그 ( Kellogg ), 카일 ( Keil ) 을 비롯한 보수적 학자들이 의식의 상징적 의미를 탐 구하는 일에 상당한 힘을 쏟아 부었다는 점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와 같
은 연구는 특히 신약에서 동기를 얻었으며, 때로는 결론이 억지스럽고 사변
적으로 보이긴 하지만, 레위기가 상징적 행위로 가득하다는 점을 고려할 때
그들의 관심은 여전히 타당하다. 이 주석에서는 앞서 “비평적 연구”가 만들 어 낸 문헌 층과 관련 추측의 상당 부분이 제의와 의식이 지닌 상징적 의미
에 대한 불충분한 이해에서 발생한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상징적 의미를 이 해하기 전까지는, 레위기에서 문헌 층을 식별하려는 시도는 잠재적으로 잘 못된 것이다.
이것을 염두에 두고, 이 주석은 문헌 층과 자료로 제안되는 것에 대한 논 의에는 집중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이 주석에서는 레위기를 하나의 책으 로 여기며, 문헌 층 가설에 의존하지 않으면서 올바른 의미를 밝혀낼 것이
다 ( 참고, Wenham 1996 ).
레위기에 대한 현대의 연구 대다수는 모세를 레위기의 저자로 인정하지
않는다 ( Harrison 1980: 15–25와 Rooker 2000: 38-39는 예외다 ). 내가 보기엔 학자들이
레위기의 기원을 이스라엘 역사의 여러 단계에 할당하는 것 같은데 ( 참고, Gerstenberger 1993: 9-13 ), 그 원인 중에는 그들이 레위기의 제의적, 의식적 규정
이라는 형식적 측면에 매여 여호와가 이스라엘 백성과 제사장에게 부여한
고도의 실존적 요구를 간과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자기중심적 본성 ( 아래를 보
라 ) 을 무너뜨려야 할 필요성 같은, 이 요구들에 대한 합당한 설명을 취하게
되면, 제사장들 같은 이스라엘 역사 속 특정 집단이 레위기를 기록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불가피해 보인다. 이 사람들에게는 너무 수준
높은 것이 요구된다. 레위기는 그 기원을 하나님에게 둔다. 비록 레위기가
스스로 저작 연대를 밝히진 않지만, 레위기가 묘사하는 것을 조합해 보면
그것이 모세 시대에 기록되었다는 관점이 지지를 받는데, 이는 레위기의 기
록 시기를 BC 1천년기 어느 시점으로 보는 전통적 비평 이론보다 훨씬 이
른 시기다 ( 참고, Kiuchi 2003c: 523 ).
4. 레위기의 구조
레위기에 대한 전통적 비평 연구가 제사장 자료의 삶의 배경으로 상정한 선입견들로 인해 극소수의 학자들만이 레위기를 전체로서 이해하려 한다.
그렇게 이해하려는 소수의 학자들 가운데 하나인 메리 더글러스 ( Mary Douglas ) 는 “고리 구조”라 부르는 것을 제안하는데, 이 구조에서는 레위기 전체
가 19장을 중심으로 교차대구를 이루는 형태로 배열된다 ( Douglas 1993: 3-23 ).
더글러스의 시도는 칭찬할 만하지만, 내가 보기에 더글러스가 제시하는 각 부분의 특징은 다소 자의적인 것처럼 보인다 ( Kiuchi 1999a: 50-53을 보라 ). 고리 구조로 보기보다는 선형적으로 보는 것이 더 나아 보인다.
선형 구조는 레위기의 일반적인 내용을 제시하는 방법으로 후에 논의할 것이다.
4.1. 1-7장
레위기 1-7장은 1장 1절-6장 7절 ( MT 5:26 )과 6장 8절 ( MT 6:1 ) -7장 38절의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I 1:1-6:7[MT 5:26]
번제(1장)
충성제(2장)
친교제(3장)
속죄제(4:1-5:13)
배상제(5:14-6:7[MT 5:26])
II 6:8[MT 6:1]-7:38
번제(6:8-13[MT 6:1-6])
충성제(6:14-23[MT 6:7-16])
(제사장 위임식에서 드려지는 충성제 포함)
속죄제(6:24-30[MT 6:17-23])
배상제(7:1-10)
친교제(7:11-21)
음식 문제와 관련된 명령(7:22-27)
친교제에서 제사장들의 몫(7:28-36)
설명될 수 있다. 이 두 묶음
사이에 나타나는 명백한 반복은 모종의 편집 과정에서 비롯된 결과로 추정 되곤 한다. 이 긴장을 해결하는 가장 단순한 방법은 묶음 II를 나중에 추가 된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다 ( 예, Hartley 1992: 94–95; Gerstenberger 1993: 76 ). 그러나
이 두 묶음을 최소한 두 관점, 즉 수신자와 관련된 관점 및 내용과 관련된 관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는 것도 가능하다.
수신자와 관련된 관점에서 보자면, 묶음 I은 수신자가 넷이다 ( 1:1-2[이스라엘
백성에게], 4:1-2[이스라엘 백성에게], 5:14[모세에게], 6:1[MT 5:20, 모세에게] ). 이스라엘 백성이 나 제사장에게 알려야 하는 지침이 없는 배상제와 관련된 여호와의 지
침 ( 5:14; 6:1[MT 5:20] ) 을 제외하면, 이 모든 말씀은 이후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알려야 했던 모세가 먼저 받았다. 그러나 배상제를 제외하면, 묶음 I은 대부 분 이스라엘 백성과 관련된다.
묶음 II의 6장 8-9절 ( MT 6:1-2,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 6장 19절 ( MT 6:12, 모세에게 ), 6장 24-25절 ( MT 6:17-18,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 7장 22-23절 ( 이스라엘 백성에게 ) 에 는 여호와의 말씀이 들어 있다. 묶음 II는 분명하게 제사장에게 주는 것이지
만,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지침이 있는 7장 22절 이하는 예외다. 7장 2227절 부분은 제사장과 헌제자 전체가 제물의 고기를 공유하는 친교제를 가 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친교제를 제외하면, 묶음 II는 대부분 제사장 과 관련된다.
위의 표에서 분명히 볼 수 있는 것처럼, 묶음 I과 II에서 친교제의 위치가 다르다. I에서는 친교제가 충성제 다음에 나오는 반면, II에서는 마지막에 나온다. 이 순서는 여러 방식으로 설명된다 ( 참고, Wenham 1979: 116-119; Milgrom 1991: 382 ). 두 묶음의 관계를 말하려면, 먼저 각 묶음의 특징을 논할 필요가 있다.
묶음 I에 있는 제사의 순서는 어느 정도 의식을 진행하는 절차에 따라 정 해진 것이다. 일부 요소는 이전 제사에서 이미 언급한 것을 근거로 한다 ( 참
고, 3:5; 4:8-10, 26, 31, 35; 5:7-8, 11 ).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제사의 다섯 유형이 분
명히 여호와에게 기쁨을 주는 정도에 따라 배열된다는 것이다. 번제는 그
제물이 온전히 태워진다는 점에 있어서 다른 모든 제사의 원형이다. 충성 제 ( 개역개정 “소제” ) 규정은 헌제자의 실존적 측면을 특정 죄에 대한 언급 없이
다루면서, 진정시키는 향기를 강조한다. 이어서 친교제 ( 개역개정 “화목제” ) 가 나
오는데, 이는 친교제가 감사를 돌리고 서원을 하는 경우에 드려지기 때문이 다. 친교제는 영적인 면에 대해 충성제만큼 집중 조명하지 않는다. 마지막
으로 오는 것은 속죄제와 배상제 ( 개역개정 “속건제” ) 인데, 이 두 제사는 여호와
의 구체적인 계명 위반과 관련된다. 즉, 앞서 나오는 제사를 드리도록 만들
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상황보다 훨씬 여호와에게 공격적인 경우와 관련된
다. 덧붙이자면, 레위기 11장 이후에 나오는 A-B-A'-B'의 문학 양식을 레
위기 1장 1절-6장 7절 ( MT 5:26 ) 에서도 볼 수 있다. A ( 번제 ), B ( 2:1에서 ‘네페쉬’로 시
작하는 충성제 ), A' ( 친교제; 3:1이 1:3과 평행한다는 점에 주목하라 ), B' ( 속죄제와 배상제; 4:1-6:7[MT 5:26]에 나오는 사례의 조건절에서 죄인이 ‘네페쉬’로 불린다는 점에 주목하라 )
밀그롬은 묶음 II에 나오는 제사의 배열이 각 제사가 지닌 신성함의 정도 에 근거한 것으로 설명한다 ( Milgrom 1991:382. 참고, Wenham 1979: 118-119 ). 따라서 친
교제가 마지막으로 나오는 이유는 친교제에서는 헌제자와 제사장이 제물을
공유하게 되면서, 소제, 속죄제, 속건제 같은 가장 거룩한 것이라 불리는 제
사들 ( 6:25[MT 6:18]; 7:6 ) 보다 덜 신성한 것에 속하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만일 친교제가 레위기 3장에서 주어진 지침들에 따라 드려진다면, 친교 제가 속죄제보다 더 여호와를 기쁘게 하는 제사가 된다는 말이다. 그러나
친교제가 오염될 가능성이 가장 높기 때문에, 친교제는 거룩한 것이라 불리
지 않고, 그 규정도 묶음 II의 마지막에 나온다.
묶음 I을 II와 비교해 보면, 한 가지 특징을 알 수 있다. 묶음 I이 의식의 앞 부분, 특히 여호와에게 가는 것, 즉 여호와 앞에서 수행되는 것을 강조하는
반면, 묶음 II는 분명히 제물의 남은 부분에 대한 처리를 강조한다 ( 6:16-18[MT 6:9-11], 충성제; 6:26[MT 6:19], 29-30[MT 6:22-23], 속죄제; 7:6-7, 배상제; 7:14-21, 친교제 ). 따라 서, 묶음 I은 이스라엘 백성이 제사를 통해 여호와에게 나아가는 것을 강조 하는 반면, 묶음 II는 거룩한 것에 대한 제사장의 처리와 책임을 강조한다. 이 두 묶음을 초월하는 또 하나의 문학적 특징이 남아 있다. 5장 7-13절 의 번제 및 충성제에 대한 언급과 7장 8-10절의 번제 및 충성제에 대한 언
4. 레위기의 구조
급은 문학적으로나 신학적으로도 이전 규정을 결론짓는다. 그래서 묶음 I에 서 속죄제 다음에 나오는 배상제와 묶음 II에서 배상제 다음에 나오는 친교 제는 그 규칙이 거룩함의 훼손에 대한 극단적 사례와 관련되고 그것들을
포함한다는 점에서 예외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묶음은 명확하게 이해되지 않는다. 5장 14절6장 7절 ( MT 5:26 ) 에 있는 배상제의 위치가 묶음 I에 대한 적합한 결론이므로,
배상제가 거룩한 것을 침해하는 죄를 다루는 것처럼, 묶음 II는 하나님의 임
재를 확보하기 위해 거룩한 것을 보호하는 주제로 시작한다.
레위기는 회막 건축 이후에 나온다. 레위기는 실제적인 의식을 상정하면 서, 이스라엘 백성이 어떻게 제사를 통해 여호와에게 나아갈 수 있는지를
묘사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 레 1-5장 ), 이어서 거룩한 것의 거룩함을 보존하는
방법, 즉 하나님의 임재를 확보하는 방법을 세부적으로 다룬다 ( 레 6-7장 ). 이
모든 것은 실제 예배가 시작하는 레위기 8-9장 이전에 놓여 있다. 거룩한 것의 보호가 갖는 의의를 고려한다면, 적어도 주제적인 관점에서는 묶음 II 가 묶음 I을 “보완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두 묶음 사이에서 반복되거나 중복되는 것과 관련된 사소한 문제는 본문
해설 부분에서 다룰 것이다.
4.2. 8-16장
레위기 8-16장은 출애굽기 28-29장에 제시된 지시 사항에 대한 성공적
인 수행과 관련된다. 레위기 8-16장이 레위기의 시작 부분에 올 수 있었다
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본문이 현재의 순서로 된 것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 다. 첫째, 1-7장이 없으면 8-10장의 대부분이 설명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 게 된다. 둘째, 1-7장과 8-10장 사이에는 인간이 어떻게 거룩해지고 여호
와가 받을 만하게 되는지와 관련한 내용에 있어서 주제적인 변화가 있다.
1-7장에서는 거룩한 제사를 다루는 한편, 헌제자에게는 암묵적으로 거룩하 게 될 것이 요구된다. 8-10장은 부르심으로 인해 거룩하게 된 제사장에 대 해 다룬다. 따라서 1-7장을 8-10장 앞에 삽입된 것으로 보기보다는 ( 반대 견
해로 Milgrom 1991: 61; Rendtorff 1996: 25-26을 보라 ), 레위기 1-10장이 자연적이고 논
리적인 순서로 배열되어 있다고 봐야 한다 ( 레 12장 “양식 및 구조”를 보라 )
레위기 10장은 나답과 아비후 사건 및 그 여파와 관련된다. 10장이 이스라
엘에서 제사장이 수행해야 할 역할과 관련된 지침을 담고 있다는 점에
서 ( 9-11절 ), 이어지는 11-16장은 제사장의 역할 수행을 위한 방편을 제공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규례를 백성에게 가르치고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 거룩 한 것과 보통의 것을 구별하라고 가르치는 10-11절의 내용은 27장까지 이 어지는 모든 장의 내용을 어렴풋이 드러낸다.
레위기 11-16장의 기본적인 구조는 앞서 제안했듯이 ( Kiuchi 2003c: 524를 보 라 ), 다음과 같다.
11장 서론
12장 A
13-14장 B
15장 A'
16장 B'
서론 A-B-A'-B'의 문학 패턴은 ( 23-26장에는 서론이 빠져 있지만 ) 26장까지 반 복한다.
11장 마지막에 나오는 거룩함에 대한 요구가 19장에 이르기까지 다시 반 복되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어떤 학자들은 이 표현을 후대 의 H 편집자가 11장에 나오는 규칙을 도덕적/윤리적인 것으로 해석하면서
삽입했거나 제의 규례를 도덕적/윤리적 규례로 변모시키는 일환으로 삽입
했다고 가정한다. 그러나 이런 결론은 학자들이 레위기 11장의 규례가 지 닐 수 있는 상징적 차원의 의미에 대한 접근 없이 거룩함을 도덕적/윤리적
인 것으로 가정한다는 점에서 지나치게 성급한 것이다.
레위기의 현재 형태로 보면, 11장 43-45절에 있는 거룩함에 대한 요구가 12-26장을 포괄하기 때문에, 역사-비평적 근거를 바탕으로 레위기를 단순
하게 1-16장과 ( 17 ) 18-26장으로 나누는 것은 편협한 것이다. 오히려 11장 43-44절에 있는 거룩함에 대한 계명은 12-16장보다 18-26장과 더 관련이 깊다. 11장의 거룩함에 대한 계명은 18-26장에 있는 구체적인 행위 지향적 계명으로 표현된다. 이것이 맞다면 ( 나는 그렇다고 믿는다 ), 원래의 입법자 또는 편 집자가 비평학에서 흔히 제시하는 “제의적인 것” ( 1-16장을 지칭함 ) 과 “윤리적 인 것” ( 18-26장을 지칭함 ) 사이의 구분을 생각했는지는 매우 의심스럽게 된다.
4.3. 17-22장
비록 17장이 새로운 부분을 시작하는 것처럼 보이긴 해도, 17장은 17장
이후에 반복되는 용어와 개념, 그중에서도 ‘킵페르’와 ‘네페쉬’ ( “인간의 영혼” )
사이의 관계를 예견하는 명확하게 과도기적인 16장 마지막 부분 본문에 이 어 나온다.
17-23장의 구조는 다음과 같다. 17장 ( 서론 ), 18장 ( A ), 19장 ( B ), 20장 ( A' ),
21-22장 ( B' ). 18장은 20장과 밀접하게 관련되는 반면, 이스라엘 백성의 거
룩함에 집중하는 19장의 관심사가 21-22장의 거룩한 제사장에 적용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첫째, 다양한 가나안 관습을 금지하는 18장은 그들의 위반 결과로 얻게
되는 형벌에 더 강조점을 두는 20장에서 여러 변형된 형태로 반복된다.
18장과 20장을 나누는 것은 거룩함과 관련된 19장이다. 19장은 백성에게 거룩해질 것을 강력하게 명한다.
둘째, 21-22장은 제사장과 제물의 거룩함에 대해 말한다. 19장과 비교해 볼 때, 21-22장에서는 거룩함의 주제가 절정을 이루어 나온다. 19장에서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에게 상당한 거룩함이 요구되는 반면, 이제는 똑같은 거 룩함이 외적으로 신성하게 된 제사장과 그들이 거룩한 제물을 다루는 일에 서 기대된다.
4.4. 23-26(27)장
23장은 거룩한 시간의 주제를 도입하고, 이것은 25장에서 안식년과 희년 으로 발전된다. 이전까지의 주해학자들은 24장이 23장과 25장 사이에 끼어 있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 회막 안에서 행해지는 특정 의식에 대한
24장의 규정은 주변 장과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만일 24장 의 두 부분이 ( “주석” 부분에서 제안되는 것처럼 ) 각각 영원한 축복과 신적 처벌을 다 루는 것으로 해석된다면, 24장은 축복과 저주를 다루는 26장에 나오는 이
스라엘 백성의 구체적인 역사적 실체와 관련되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따라서, 23-26장은 11장이나 17장 같은 서론이 없지만, 12-16장과 1822장에서 발견되는 것 같은 A-B-A'-B'의 패턴으로 되어 있다.
4.5. 계명과 관련 용어
여호와의 계명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된 ‘미츠보트’ ( “계명들” ), ‘토라’/‘토로 트’ ( “가르침들” ), ‘훅코트’ ( “법규들” ), ‘미슈파팀’ ( “규례들” ) 같은 용어는 레위기의 구조에 영향을 미친다 ( 아래에서 개정되어 제시되는 Kiuchi 1999a: 33-64를 보라 ). ‘토라’/ ‘토로트’ ( “가르침들” ) 는 레위기의 앞부분에 나오고 ‘미슈파팀’은 뒷부분에 나
오는 반면, ‘훅카’/‘훅코트’는 두 부분 모두에서 사용된다. 이것을 염두에
두면, 다른 문헌 층, 특히 P와 H에 대한 논의는 레위기의 올바른 해석과 무 관해 보이기 시작한다.
첫째, 4장 2절에 대한 주석에서 언급되듯이, ‘미츠보트’는 다른 모든 관련
용어 ‘훅킴’, ‘미슈파팀’, ‘토로트’의 의미를 모두 아우르는 가장 포괄적인 용어다. 따라서 27장 34절에 ‘미츠보트’가 나오는 것은 입법자가 단순히
27장의 계명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레위기 규정 전체를 가리킨다는 증 거다. 그러므로 26장의 마지막에 ‘미츠보트’가 없는 것은 의도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곳에서는 ‘미츠보트’보다 덜 포괄적인 ‘훅킴’이 사용된다. 그럼에 도 불구하고, 26장 14-15절에서 ‘미츠보트’가 사용됨으로 인해서, 26장 이 전에 주어진 모든 규정이 ‘미츠보트’로 여겨진다는 것이 드러난다. 26장 14-15절은 다음과 같다. “그러나 너희가 내게 청종하지 아니하여 이 모든 계명들 ( ‘미츠보트’ ) 을 준행하지 아니하며 내 법규들 ( ‘훅코트’ ) 을 멸시하며 마음 에 내 규례들 ( ‘미슈파팀’ ) 을 싫어하여 내 모든 계명들 ( ‘미츠보트’ ) 을 준행하지 아
니하며 내 언약 ( ‘브리트 ) 을 배반할진대.”
15절에서 계명에 사용된 용어는 그것들이 가진 확장적인 의미 폭을 반영 하는 순서로 언급되었을 가능성이 높고, 그래서 “계명들” ( ‘미츠보트’ ) 은 “법규
들” ( ‘훅코트’ ) 과 “규례들” ( ‘미슈파팀’ ) 을 포괄하는 반면, “언약” ( ‘브리트’ ) 은 앞서
나온 모든 용어가 지닌 의미의 영역을 포괄한다. 또한 22장의 결론부인
22장 31절에 나오는 “계명들” ( ‘미츠보트’ ) 도 최소한 21-22장의 규칙을 가리 킨다는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둘째, ‘토로트’는 1-7장에서 의식 규정에 대한 규칙을 가리키고 ( 7:37을 보라.
또한 6:9[MT 6:2] “주석” 단원을 보라 ), 11-15장에서는 정화 의식을 가리킨다 ( 11:46; 12:7; 13:59; 14:54, 57; 15:32를 보라 ). 그러나 ‘토라’가 ‘훅카와 비슷한 의미를 가질 때
가 있긴 해도 ( 3:17; 7:36 ) 레위기의 이 부분이 ‘미슈파팀’이라 불리는 일은 결 코 없다.
셋째, “법규들”을 의미하는 ‘훅코트’는 “법도들”를 의미하는 ‘미슈파팀’
과 비슷한 의미를 갖지만 ( 참고, 18:4-5, 26; 19:37; 20:22; 25:18; 26:15, 43 ), ‘훅코트’가
동사 ‘할라크’ ( “걷다” ) 와 함께 사용되는 반면 ‘미슈파팀’은 ‘아사’ ( “행하다” ) 및 ‘샤마르’ ( “지키다” ) 같은 동사와 함께 나온다는 사실에 입각해서 보면, ‘훅코 트’는 “행동 원리”를 의미한다. ‘미슈파팀’은 ( 5:10과 9:16에서 ‘카미슈파트’[“그 규칙에 따라서”]의 형태로 나오는 경우를 제외하면 ) 레위기 1-17장에서는 나오지 않기 때문에, ‘미슈파팀’이 ‘토로트’와 다른 의미를 가진다고 추론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
러나 ‘토로트’가 사용되는 일부 본문 ( 예, 19:5-8 ) 이 처벌을 명시한다는 사실은 ‘토로트’가 어떤 면에서는 ‘미슈파팀’과 겹쳐진다는 것도 의미한다. 끝으로, ‘훅킴’은 10장 11절과 26장 46절에 나타난다. 10장 11절에서 언 급된 ‘훅킴’이 적어도 26장 46절에서 끝나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1026장에는 ‘토로트’인 11-15장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훅킴’은 1-7장도 포
함해야 한다. 따라서 ‘훅킴’은 ‘훅코트’, ‘미슈파팀’, ‘토로트’보다 더 포괄적
인 용어다.
그러므로 각 용어의 의미 범주에 대해 살펴본 지금까지의 연구는 다음과 같은 ‘미츠보트’의 집합 관계를 드러낸다.
‘토로트’
이와 같은 관계는 26장 46절과 27장 34절에 있는 요약 진술이 서로 연결
되어 있는 이 의미 영역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졌음을 강하게 암시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토라’/‘토로트’는 1-15장을 포괄하고, ‘미슈파팀’은 18-25장에 한하여 사용되는 반면, ‘훅카’/‘훅코트’는 두 부분 모두 사용된
다. 따라서 전체적으로 보면, 레위기는 의식들로 표현되는, 하나님-인간의
관계와 관련된 율법들을 먼저 말하고, 이어서 더 구체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행동 ( ‘미슈파팀’ ) 을 이야기하는 반면, 행동 원칙들 ( ‘훅카/‘훅코트’ ) 은 전체 적으로 발견된다.
의식을 말하는 16장이 ‘토라’가 아닌 ‘훅카’의 특징을 갖는다는 점과 17장이 7절에서 ‘훅카’에 대한 언급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 다. 레위기는 ‘토라’가 지배적인 장들에서 ‘훅코트’/‘미슈파팀’이 지배적인 장들로 점차 이동하고, 이 관점에 따르면 16-17장은 과도기적인 역할을 수 행한다. 따라서 비평학자들이 종종 결론 내리는 것처럼 17장 이후의 본문
이 전혀 새롭고 이전 장들과 완전히 구별된다고 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5. 레위기의 독특한 특징들
5.1. 문체
5.1.1. 말씀을 받는 대상들
레위기는 여호와가 모세를 통해 말씀하였던 율법으로 가득하다. 말씀을
나타내는 어구는 “여호와가 X에게 말씀하였고, X는 Y에게 말했더라”의 형
태를 취한다. 아론에게 직접 말씀이 주어지는 10장 8절을 제외하면, 레위기
에서 X는 언제나 모세다. Y는 보통 이스라엘 백성이나 아론과 그의 아들들
이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때로는 아론이고, 빈번하지는 않지만 Y가 언급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럴 때는 단순히 “여호와가 모세에게 말씀하 였다”라고만 말한다. 이곳에서 주어지는 다양한 해설을 통해 볼 수 있듯이, 이런 이형 ( 異形 ) 들은 우연한 것이 아니라 의도적인 것처럼 보인다. 일반적으
로 주어지는 율법의 성질에 따라 사용되는 말씀의 형태가 좌우된다. 모세는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중재자이고, 제사장직을 처음 시작한 자이기도 하
다 ( 레 8-9장 ). 따라서 해당 율법이 언약의 기초 자체와 관계될 때는 언제나
모세가 말씀을 받는다. 반면에, 제사장과 관련된 문제를 다룰 때는 아론이
말씀을 받는다 ( 1:2; 5:14; 6:19[MT 6:12]의 예를 보라 ). 이것에 대한 그 이상의 함의에
대해서는 Greenberg 1990을 보라.
5.1.2. 규정의 신학 비록 율법, 특히 의식과 관련된 법은 의식이 어떻게 수행되어야 하는지를
묘사하는 지침 설명서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간주되지만, 그 형식과 표현은
이 법들이 다른 의제를 가지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 형식을 통해, 특히 그
안에서 발견되는 의식들의 상징적 의미를 통해 그 법들이 목표로 하는 것
은 어떤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다 ( 아래를 보라 ). 예를 들어, 7장 30절의 “여호와
의 음식 제물들은 그 사람이 자기 손으로 가져올지니”라는 조항은 만일 그 것이 단지 규정일 뿐이라면 불필요해 보인다. 따라서 우리는 다양한 형식이 나타나는 근본적인 이유를 조사할 필요가 있다. 더 광범위한 문학 현상은 그 규정에서 나타나는 반복성 또는 비반복성의 사용이다. 이것들은 다양한 범주를 따라 분류할 수 있다. 레위기 4장에 나
5. 레위기의 독특한 특징들
오는 네 경우의 조건절이 설명의 목적에 적합하다.
( 1 ) 순전히 문체적인 관심사에 영향을 받은 것처럼 보이는 문체상의 이 형이 있다. 예를 들면, 28절에 나오는 “혹은 만일 그가 자신의 죄를 깨닫게
되면”이 32-33절에서는 언급되지 않는다. 이는 32-33절이 하위 사례이기 때문일 것이다. 추가적인 세부사항 ( “그가 범한 죄” ) 과 함께 35절에 다시 나타나
는 31절의 죄 사함 문구는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이 예들은 의미상으로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 2 ) 그러나, 어떤 이형들은 해당 사례의 특징을 반영하는 것일 수도 있
다. 예를 들어, 2절의 내용은 3, 13, 22, 27절을 망라한다. 정형화된 문구가
다른 형태로 나타나는 것은 단순히 문체적인 것이 아니라 의식의 특징, 특
히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사람을 특징짓는 죄악의 정도에 따른 것이다 ( “주석”
을 보라 ). 제사장에게는 죄책을 깨달아야 한다는 말씀이 주어지지 않는다. 이 는 3절의 “백성이 죄책을 깨달았으면”이란 문구가 한층 높은 긴박감을 전 달한다는 것이 전제되기 때문이다. 두 번째 경우 ( 13절 ) 에는 공동체가 죄책을 깨닫고 죄를 알게 된다. 세 번째 ( 22절 ) 와 네 번째 ( 27절 ) 의 경우 이 두 조건, 즉 죄책을 깨닫는 것 그리고 죄를 알게 되는 것이 23절과 28절에서 ‘오’ ( “또
는”; 개역개정은 생략 ) 로 연결되면서 두 어구가 서로 대체될 수 있는 것으로 나타 난다.
( 3 ) 다른 경우와 비교가 가능할 때는 무언가를 명시적으로 가리키는 것
이 암시적 가정과 어떻게든 관련되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 면, 기름을 태우는 규정에서는 번제의 특징인 “진정시키는 향기”라는 문구
가 눈에 띄는데, 이는 이 문구가 평범한 개인의 경우에 대해서는 4장에서 처음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세 경우 기름을 태우는 것이 “진정시키는 향기”를 만들지 않았다고 추측해서는 안 된다. 이 문구는 다른 경우에 생략됨으로써 문학적 기능을 성취한다. 이 생략은 그 의식들이 지닌 기쁨의 특징보다는 엄숙함의 특징을 강조한다.
( 4 ) 제사장의 경우 죄 사함 문구뿐 아니라 ‘킵페르’도 언급하지 않는 것 은 의도적으로 이면에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이 문제는 1012절에 대한 본문 문제와는 관련이 없고, 관념적인 이유와 관련 있다. 즉, 하나님과 죄인 사이를 중재하는 기름부음 받은 제사장 역시 죄인이라는 것 이다.
따라서 규정이 가진 명시성과 암시성은 단순히 문학적 목표만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이념적 원칙을 반영하기도 한다. 이 주석의 주해는 그런 문학
현상에 특별히 관심을 기울인다. 그뿐 아니라, 만일 ‘킵페르’, ‘네페쉬’, ‘레
아흐 니호아흐’ 같은 중요 핵심 용어를 깊이 살펴보면 레위기, 특히 레위기 초반부에서, 하나님-인간관계에 대한 그림을 이전에 인정되던 것보다 훨씬
생생하게 볼 수 있을 것이다.
5.2. 내용
5.2.1. 출애굽과의 이념 관계
레위기를 어떻게 출애굽 사건과 관련시켜 읽어야 하는가? 이 질문은 이 스라엘 백성이 애굽의 속박에서 구속된 이후 이들을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
으로 빚기 위해 레위기 법이 제정되었다는 사실을 중심으로 한다. 웬함은
오경 율법의 언약/조약 배경에 근거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 1979: 31 ).
율법은 은혜의 배경에서 주어진 것이다. 율법 조약의 형식을 보면, 역 사적 서언이 나온 후에 조항들이 뒤따른다. 이 순서는 역사적인 상황과 유사하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구원을 확보하는 수단으로 자신의 법을
준 것이 아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구속받은 이후에 법을 받았다. 하나님 이 이스라엘을 자신의 거룩한 백성으로 부른 것이 시내산에서 율법을 계
시한 것보다 먼저였지만, 오직 순종만이 거룩함을 살아 있는 실재가 되
게 할 수 있었다. 레위기에서 출애굽은 항상 율법을 지키는 일에 대한 동 기로 언급된다 ( 예, 11:45; 18:3; 23:43 )
이런 관점이 겉보기엔 옳은 것 같지만, “은혜”, “구속”, “거룩함” 같은 용 어는 현실적인 관점에서 재고되어야 한다. 십계명이 “은혜”의 배경에서 주
어졌던 것처럼 보이긴 하지만, 그것을 지키는 일이 어렵다는 것과 ( 제3계명을
제외하면 십계명 자체에서는 언급되지 않긴 해도 ) 그것을 어겼을 때 받게 될 엄청난 형벌
이 그와 같은 결론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가? 애굽에서의 구원이 하나님
의 은혜로운 행위였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시내산 이전에 이스라엘 백
성은 음식에 대해 불평했고 ( 출 16장 ),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은 이후에는 금송
아지를 만들었다 ( 출 32장 이하 ). 만일 이스라엘 백성이 스스로 이 세상에서 여 호와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면, 율법을 지키는 것은 극히
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간단히 말해,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 마음을 검증해
보지 못하고 애굽을 떠났다. 그들의 마음을 율법으로 다루는 일이 불가피하 게 되었고, 이것이 그들이 애굽에서 물리적으로 떠난 후에 율법을 받은 이
유다.
뿐만 아니라, 앞서 인용한 글에서 웬함이 “거룩함”이 목표나 이상으로 간
주될 수 있다는 것에 주목했던 반면, 나는 “거룩함”이 인간 마음의 특정 상
태, 즉 자기중심적 본성이 없는 상태를 가리키는 용어라고 제안하고 ( 아래, 특
히 7.4를 보라 ), 이는 출애굽기 19장에서 여호와 앞에 서 있는 이스라엘 백성이
자기 죄에서 아직 구속되지 ( 구원받지 ) 못한 상태, 즉 자기중심적 본성을 가진
것과 거의 동일한 상태임을 가리킨다고 본다. 달리 말하면, 출애굽 사건을
애굽의 속박에서의 구원뿐 아니라 그들의 죄에서의 구원 ( 참고, 고전 10:1-4 ) 으
로도 말하는 차원이 있는 반면, 이스라엘 백성의 영적 현실은 죄로부터 전
혀 구원받지 못했음을 보여 주었다.
레위기는 시내산 언약을 확장시킨 책으로서 제사, 정결함/부정함, 거룩함
에 대한 규정을 통해 인간의 마음에 대한 문제를 다룬다. 비록 대부분 가설
적 형태로 제시되긴 하지만, 레위기의 규정은 여호와와 이스라엘 백성 사이
에 영적 간극이 존재함을 전제한다. 뿐만 아니라, 백성은 여호와와 언약 관 계에 있다고 여기는 반면 레위기의 모든 규정은 언약 내용 자체로 여겨진
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이 구원받았고 그래서 레위기의 규정은 순전히 이 스라엘 백성과 여호와 사이의 언약 관계를 강화하거나 향상시키기 위해 더 해졌을 뿐이라고 가정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거룩하게 되지 못하는 자는
자기 죄, 즉 그의 자기중심적 본성에서 구원받지 못한 상태로 남는다고 결
론 내리는 것이 불가피해 보인다 ( 참고, 26:41. Kiuchi 2003b: 1-30을 보라 )
출애굽기의 자연스러운 후편이 되는 레위기는 출애굽기에 대한 언급을
적지 않게 많이 포함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주석” 부분에서 언급할 것 이다.
5.2.2. 타협 없는 거룩함
제사장 문서의 다른 부분들처럼, 레위기는 거룩함의 문제에 있어 어떤 타 협도 용납하지 않는다. 어떤 제사인지, 회막의 외부인지 지성소인지, 제사 장인지 일반 백성인지에 따라 거룩함의 정도가 다르긴 해도, 거룩함을 속되 게 하는 일에는 끔직한 결과가 수반한다. 이와 관련해서 레위기의 규범과 규정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주어진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원칙적으로 여호
와는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의 계명을 지킬 수 있느냐 없느냐에 대한 질
문에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규정을 더 면밀히 살펴보면, 규정이 진술되는 문구에 죄와 부정에
대한 인간의 경향성이 가정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여기 몇 가지 사례가 있 다. 제사가 다섯 종류 있다. 여호와가 보기에 가장 큰 기쁨을 주는 것은 번
제며, 가장 기쁨이 작은 것은 속죄제와 배상제다 ( 위의 4.1을 보라 ). 친교제의 남 은 부분과 관련된 규정은 헌제자의 탐욕스러운 본성을 반영한다. 레위기
17장 7절은 레위기가 사람들이 우상숭배 관습과 관련되어 있음을 인식한
상태에서 주어졌음을 드러낸다. 특히 레위기 26장은 이스라엘 백성의 완고
함을 분명히 반영한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의 계명을 지킬 수
있는지 여부와 관련하여 어떤 언급도 나타나지 않지만, 여호와는 그 대답을
알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이 부정적인 대답은 그 규정이 진술되는 방식에
반영되어 있다.
이 모든 것을 고려해 보았을 때, 여호와는 자신이 인간에게 요구하는 표
준을 확실히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호와는 거룩함에 대해 어떤 타협도
용납하지 않는다.
5.2.3. 창세기와의 개념적 관계
레위기에서 제정되는 율법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높은 표준을 요구한다는
점은 레위기가 창세기의 타락 이야기를 직접적인 배경으로 둔다는 점을 깨
달았을 때 더욱 분명해진다. 카일, 쿠르츠 같은 19세기의 학자들은 레위기
와 창세기 1-3장 ( 특히 3장 ) 사이에 있는 죄와 부정의 영역에서 문학적이고 개
념적인 관련성에 주목했다. 쿠르츠가 이 본문을 연결하는 방식에는 설득력 이 없지만, 이와 같은 관련성은 최근에 웬함 ( 1986 ), 세일해머 ( Sailhamer 1992: 3941, 334-337 등 여러 부분 ), 패리 ( Parry 1994: 126-152 ) 같은 보수 학자들 사이에서 다 시 주목받게 되었다. 특히 웬함과 패리는 창세기 2-3장에 성막에 대한 상 징이 있음을 지적한다.
아래와 “주석”에서 설명하듯, 정결함/부정함 규정은 해당 규정의 직접적
인 배경을 창세기 3장으로 가정할 때 가장 설명이 쉽다. 처음에 남자와 여 자가 자기 하체를 가린 일과 여호와가 출산과 관련하여 고통을 증가시킨
일을 포함해서 적지 않은 타락 요소가 남성과 여성의 생식기와 관련된 부
정과 연관되는 것처럼 보인다. 뱀이 야기한 동물 세계에 대한 저주는 레위 기 11장의 부정한 피조물의 근본 원리에 대해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타락과 레위기의 관련성은 다른 곳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지 성소 앞 그룹들의 존재는 레위기 4장 2-12절과 16장 1-22절의 의식에 가정 되어 있다. 지성소에 있는 궤 위의 그룹 너머 어딘가에 타락 전 에덴동산의
세계가 놓여 있다. 이와 비슷하게 성소 안에 있는 일곱 가닥의 등잔대 ( 24:24 ) 는 생명나무를 상징할 수 있다 ( Meyers 1976: 5-9 ). 창세기 3장과 관련된 다른 연결점은 이 주석 곳곳에 언급되며, 그 모든 것은 거룩함이 처음 남자와 여 자가 타락 전에 가졌던 상태라는 메시지와 레위기의 다양한 규정이 이스라
엘 백성을 이와 같은 존재 상태로 돌아가도록 이끄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아래의 7.3.2에서 설명하겠지만, 타락 전 거룩함의 상태
로 돌아가는 것은 하나님에게서 숨는 것을 의미하는 소위 “죄” ( ‘하타’ ) 로 불
리는 것을 제거할 것과 인간 마음의 존재 상태를 나타내는 자기중심적 본
성을 파괴할 것을 요구한다.
마지막으로, 창세기에서 이야기하는 제물 ( 노아[창 8:20-21]와 아브라함[창 22:2, 9]이
드린 번제 및 가인과 아벨이 드린 제물[창 4:3-4] ) 의 희생 개념이 레위기 법의 기저에 깔 려 있다.
6. 상징으로서의 의식
의식 행위가 그 자체로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수 용된다. 그러나 17장 11절이 피의 의미에 대해 설명하는 것을 제외하면, 레
위기에서 이 상징적 의미는 거의 설명되지 않는다. 최근에 클링베일 ( Klingbeil
2004: 502 ) 은 상징적 의미를 밝히려고 시도하면서 의식과 관련하여 본문에 적합한 방법론을 제안했다. 특히 클링베일은 내가 동의하는 바와 같이, 이
영역이 역사 연구가 아닌 신학에 속한다는 점에서, 주해를 위한 기본 자료 로 구약의 현재 형태를 취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레위기의 의식 행위가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는 것은 다음과 같이 추론된다.
( 1 ) 제사의 경우, 먼저 감사나 회개와 같은 헌제자의 동기가 존재한다.
어떻게 보면 제사와 그 의식이 헌제자의 동기와 관련되는 것은 당연하다 ( 참 고, Kiuchi 1999b: 23–31 ). 만일 피가 인간의 생명을 상징한다면, 그 의식의 다른
요소 역시 상징적 의미를 갖는 것이 마땅하다. 특히 이것은 제물을 잡기 전
에 행하는 안수의 상징적 의미를 통해 충분히 지지될 것이다. 제물을 잡기
전에 안수하는 것은 헌제자 스스로 제물로 바치는 동물과 동일시된다는 상 징일 것이다.
( 2 ) 레위기 11-15장의 부정함과 관련된 규정에 대해 말하자면, 그 규정
들의 상징적 차원이 창세기 3장과의 문학적이고 개념적인 관련성을 통해
드러난다 ( 11-13장, 15장 “주석”을 보라 ). 그 규정들의 직접적인 배경이 타락 사건이
므로, 그 규정들은 타락 후 인간의 영적 상태를 다룬다고 추론할 수 있다. ( 3 ) 레위기 19장은 거룩함에 대해 말하는 중요한 장으로서, 직물 및 농
업과 관계된 몇몇 규례를 담고 있다 ( 레 19:19, 23-25 ). 그러나 19장에서는 거룩
함이 인간의 내적 특성과 관련되기 때문에 ( 2절 ), 혼합된 직물 자체를 금지한
다거나 여호와가 순전히 나무의 열매에 관심을 두었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
둘 다 인간의 거룩한 마음과 상징적 관계를 갖는 것으로 보인다.
( 4 ) 보통 “율법” 또는 “규례”로 번역되는 히브리어 ‘토라’는 레위기 6장
9절 ( MT 6:2 ) -7장 37절과 11-15장에 있는 규정 모음과 결부된다. 이 주석에 서 제안되는 것처럼 이는 또한 1장 1절-6장 7절 ( MT 5:26 ) 도 포함하면서 “가
르침”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 율법은 단순한 규례 이상이다. 즉, 율법은 “가르침”에 유익한 규례다. 만일 그렇다면, 의식이 갖는 상징적 의미를 연 구하는 일은 필수적이다. 따라서 레위기의 의식은 인간을 대상으로 삼고 인 간에게서 분리할 수 없을 가능성이 높다. “상징”이란 말은 보통 의식과 관련하여 사용되는 반면, “은유”는 일반적
으로 시적 묘사를 가리키는 데 사용된다. 둘은 모두 그 대상과 나타내는 것 사이의 관계를 다룬다는 점에서 서로 매우 비슷하다. 그러나 상징적 의미는 고정적인 반면, 시적 은유의 의미는 탄력적이다. 예를 들면, 동물의 피가 “생
명”이라 불릴 때, 상징적 의미는 그렇게 고정된다. 그와 반대로, 피가 은유
적으로 사용되면 빨간 색, 온기, 점성 등의 의미로 사용될 수 있다.
상징적 의미가 변경할 수 없는 본성을 갖는다는 일반적인 가정에도 불구
하고, 여러 시대 동안 성경 해석학자들은 레위기의 다양한 의식 행위가 갖
는 상징적 의미를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의식 행위 또는 의식에서 사용되는 물건이 어떤 변경할 수 없는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면, 성경 해석학자가 해야 할 일은 그 상징적 의미가 무언인지를 밝히는 것이
다 ( 참고, Meyers 1976: 5–9 ). 이 주석서에서는 레위기의 상징적 차원에 대해 가
능한 대로 최대한 조사를 했다. 독자는 다양한 제안이 전체 문맥에서 잘 들
어맞는지 여부를 고찰하게 될 것이다. 레위기 본문은 이 상징적 의미에 대
해 전혀 침묵하지 않는다. 그중에서도 ‘아담’ ( “사람” ), ‘네페쉬’ ( “영혼” ), ‘킵페 르’ ( “속죄하다” ), 또는 ‘하타’ ( “숨기다”[4:2 “주석”을 보라] ) 와 같은 용어들이 이 문제를 해결할 유익한 단서를 제공한다. 만일 레위기에서 어떤 단서도 찾을 수 없 다면, 우리는 제사장 문서가 아닌 본문에 눈을 돌려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수순을 밟는 것은 다양한 상징적 의미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의 기본적인
관점이 시간이 지나도 쉽게 변하지 않았다는 가정을 통해 정당화된다.
레위기에서 의식 상징주의가 갖는 주요 특징 가운데 상징을 그것이 상징 하는 대상에서 분리시킬 수 없다는 점이 있다. 즉, 둘은 하나로 간주된다 ( 레
위기 상징주의의 “고유한” 특성에 대해서는, Wenham 1982: 118–125를 보라 ). 예를 들면, 10장
16-20절에서 모세는 아론이 속죄제물의 남은 부분을 처리한 것에 대해 아 론을 질책한다. 두 사람의 대화 ( 17-19절 ) 는 속죄제의 고기와 그것이 상징하는
것이 하나임을 보여 준다. 의식이 행해질 때 그 의식의 상징적 의미 역시 여
호와 앞에서 성취된다는 것이 이 사건을 통해 암시된다. 똑같은 상황이 다
른 모든 제사와 각 제사 의식에 적용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가정은 필연적으로 우리에게 규례에 대한 표면적이고 문자적인 준
수와 그 규례가 상징하는 것 사이의 관계를 숙고하게 한다. 만일 의식이 상
징적 의미를 갖는다면, 그것을 표면적으로나 문자적으로 지키는 것만으로
는 불충분하다. 따라서 규례를 읽을 때 우리는 표면적인 준수와 그것이 상 징하는 것을 잠정적으로 구별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레위기의 규례에는 그것을 규례 이상으로 만드는 차원이 있지만, 이 규례를
문자적으로 지키는 것이 그 요구를 충족시키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많이 있다. 예를 들면, 레위기 3장의 규례를 따르는 것은 여호와가 요구하는 것
을 충족시키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만일 기름을 태우는 일이 이 주
석이 제안하는 것처럼 ( 레 3:3-4 “주석”을 보라 ) 헌제자에게 있는 자기중심적 본성
의 소멸을 상징한다면, 단순히 그 규례를 표면적으로 따르는 것은 그 규례 가 요구하는 것과 거리가 먼 것이다. 마찬가지로, 11-15장의 부정함과 관
련된 규정을 따르는 것은 우리를 정결하게 만든다. 그러나 만일 “부정함”이
인간 존재의 상태를 상징한다면, 이 규정을 문자적으로만 지키는 것은 사람 을 단순한 위선자로 만들 뿐일 것이다. 달리 말하면, 여호와가 명하는 것이
우리의 외적 행위를 통해 상징적 의미를 준수하라는 것임을 깨닫는 일이 지극히 중요하다. 따라서 규례에 대한 준수를 외적 행위로 제안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무의미한 일이다.
상징적 의미로 가득한 의식을 제안하는 것의 근본적인 원리가 여럿 있다.
우선, 비록 이스라엘 백성을 거룩하게 만들도록 율법을 준 것이지만, 그런 일이 부정하거나 죄 많은 개인에게 직접적인 방식으로 발생하는 일은 불가 능하다 ( “부정함”, “죄”, “거룩함”의 개념들에 대해서는 아래를 보라 ). 뿐만 아니라, 늘 영적인 것에 무지한 인간이 가시적인 것에 의존하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이 영적 인 문제는 교육적인 목적으로 주어진 실체적인 물건을 통해 전달된다. 희생
이 무엇인지 배우기 위해 사람들은 값진 짐승을 가져와야 한다. 또는 거룩 함이 무엇인지 배울 수 있도록 많은 제약이 만들어지고, 그중 어떤 것은 사 람의 육체적 생명도 요구할 것이다.
규례에 대한 외적 준수와 그것이 상징하는 영적 진리 사이의 구별에 근거
해서, 나는 외적 정결함/부정함과 내적 정결함/부정함 사이를 구별했고, 외 적 거룩함과 내적 거룩함을 구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구별이 설명
을 위한 것이라는 점과 외적 정결함/부정함 또는 거룩함은 그 자체로 소중
하며, 내적 정결함/부정함과 거룩함을 암시한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제사가 지닌 상징적 의미를 진실 되게 구현하지 않는 사람이 드리는 제사
를 여호와가 받겠는가? 그렇지 않다. 만일 헌제자의 마음이 그 제사의 상징
적 의미를 구현하지 않는다면, 제사는 거룩함을 모독하는 것이 된다. 물론
이것은 과연 누가 참다운 의미의 제사를 드릴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야 기한다.
예를 들어, 제사와 헌제자 사이의 영적 간극에 대한 깨달음은 우리를 의
식의 또 다른 측면으로 인도한다. 이 간극을 메우는 일이 극히 어렵기 때문 에 희생제사와 오염에 대한 규례는 우주적 또는 생애적 차원을 갖는다. 만
일 누군가가 ( 이삭을 바쳤던 아브라함처럼, 창 22장 ) 참다운 의미의 번제를 드릴 수 있
다면, 여호와는 그를 받아들일 것이다. 똑같은 것이, 내가 제안하는 부정함
의 상징적 의미, 즉 숨기는 상태 ( 아래를 보라 ) 를 고려하면, 정결함/부정함과
관련된 규정의 준수에도 해당될 것이다.
그러므로 상징과 상징화되는 것이 실제로 하나가 되면, 더 이상 희생제사
와 제물이 필요 없게 된다. 구약은 시편 40편 6절이나 51편 16-19절에서
이와 같은 영적 실재 또는 가능성을 언급한다 ( 아래의 8을 보라 )
7. 레위기의 핵심 주제
레위기의 근본적인 메시지를 이해하려면, 먼저 레위기의 핵심 개념 및 용
어를 설명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인간의 본성과 관계되어 있으며 정결 함과 부정함, 거룩함이 갖는 상징적 의미,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 ( ‘킵페르’ 및 관련
용어 ) 와 관련된다.
7.1. 인간의 근본적인 측면
레위기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엄격히 다룬다. 그러므로 레위기가 인 간을 어떻게 보는지를 반드시 알아야 한다. 인간은 결코 중립적으로 여겨지
지 않는다. 인간은 희생제사를 드림으로 여호와에게 가까이 나아갈 수 있
다. 자격 없이 성소에 나아가게 되면 인간은 반드시 죽어야 하고, 무엇보다
인간은 스스로를 더럽게 하는 경향성이 강한 것으로 여겨진다.
세 가지 중요한 용어 ( ‘이쉬’, ‘아담’, ‘네페쉬’ ) 가 같은 개인을 법적으로 가리키기
위해 사용되지만 면밀히 살펴봐야 할 필요가 있고, 비록 현대의 번역가들이
이 용어들을 거의 동의어로 취급해 오긴 했지만, 의미에서 구별할 필요가 있다. 관련 본문에 대한 주해적 세부 사항은 “주석”에서 다루도록 남겨 두
고, 아래에서는 레위기에서 이 용어들이 갖는 의미에 대한 결론만 피력하도 록 하겠다.
7.1.1 ‘이쉬’(“사람”) ‘이쉬’란 용어는 레위기에서 94회 사용된다. ‘이쉬 이쉬’란 문구는 15장
2절, 17장 3절, 8절, 10절, 13절, 18장 6절, 20장 2절, 9절, 22장 4절, 18절, 24장 15절에서 “누구든지”란 의미로 사용된다. ‘이쉬’는 보통 ‘잇샤’와 대
조된다 ( 13:29, 38; 15:18; 19:20; 20:10-11, 13-14, 18, 21, 27; 21:7; 24:10 ). ‘이쉬’의 재귀적 용
법은 “각각”이란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 7:10; 10:1; 19:3, 11; 25:10, 13, 17, 46; 26:37 ). 나머지는 “사람이 ~할 때”로 시작하는 경우를 도입하는 데 사 용된다.
따라서 ‘이쉬’란 용어는 인간 상호 관계 ( 동료 이스라엘 백성 사이 또는 남편과 아내 사 이 ) 의 한 개인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고, ( ‘네페쉬’와 대조되는 ) 개인의 내적 본질 이나 동물 세계와 대조되는 개인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 아래의 ‘아담’을 참고 하라 ).
7.1.2. ‘아담’(“인간”)
‘아담’이란 용어는 레위기에서 15회 나온다 ( 1:2; 5:3-4, 22; 7:21; 13:2, 9; 16:17; 18:5; 22:5; 24:17, 20-21; 27:28-29. Maass 1973: 85-94를 보라 ). 그 용례가 갖는 일반적 특징은 아래에서 열거된다. ‘아담’의 다양한 측면을 쟁점으로 삼기 때문에, 그것은
중복될 수도 있다.
‘아담’은 (1) 인간이 동물 ( ‘베헤마’ ) 과 대조될 때 ( 24:21; 27:28, 29 ), (2) 인간의 육체적 측면이 강조될 때 ( 5:3; 7:21; 13:2, 9; 18:5; 22:5; 24:17, 20-21; 27:28, 29 ), (3) 인류
를 총괄적으로 지칭할 때 사용된다. 이 경우에 ‘아담’은 “인간”으로 번역되
며, ‘아담’ 앞에 정관사가 선행한다 ( ‘하아담’; 5:4; 6:3[MT 5:22]; 18:5 ). ‘아담’과 결합하여 사용되는 동사에는 ‘히크리브’ ( “바치다”, 1:2] ), ‘빗테’ ( “말하 다”, 5:4 ), ‘아사’ ( “행하다”, 6:3[MT 5:22]; 18:5 ) 가 있다. 그러나 6장 3절 ( MT 5:22 ) 을 제
외하면, 레위기에서 ‘아담’은 ‘하타’의 주체가 전혀 아니다. ‘아담 키’라는 문구는 두 가지 주요 규정, 즉 번제에 대한 규정 ( 1:2 ) 과 ‘차
라아트’의 다른 관련 사례에 대한 규정 ( 13:2 ) 을 도입한다. 주석가들은 보통
이 상황에 여성도 해당한다고 추정해 왔지만, ‘아담 키’는 아마도 “여자”가 아닌 “남자”만을 가리킬 것이다 ( 해당 “주석”을 보라 )
7.1.3. ‘네페쉬’(“영혼” 또는 “자기중심적 본성”)
명사 ‘네페쉬’는 레위기에서 60회 사용되며 “사람”, “살아 있는 존재”, “생명”, “영혼”, “시체”로 번역된다 ( 참고, Seebass 1986: 531–555; Schwartz 1991: 4041 ). 일반적으로 영어 번역은 ‘이쉬’나 ‘아담’의 의미와 대조되는 ‘네페쉬’만 의 독특한 의미를 번역해 내지 못했다. 하지만, 문맥상 ‘네페쉬’가 ‘이쉬’ 및 ‘아담’과 다른 의미를 제시하는 것으로 해석되는 경우가 있다. ‘네페쉬’의 사용과 관련된 특징 하나에 특별히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 다. 즉, ‘네페쉬’는 ‘카레트’ ( “끊는” ) 형벌과 관련되어 사용된다 ( 7:20-21, 25, 27; 17:10, 14; 18:29; 19:8; 20:6; 22:3; 23:29 ). ‘카레트’ 형벌은 그 자체로는 죽음의 형벌이 아니지만, 한 사람이 소속 공동체에서 제명당하는 것을 가리킨다. 22장 3절 에서는 이 형벌이 “여호와 앞에서” 끊어지는 것으로 나타난다.
‘네페쉬’가 26장에서 ‘레바브’ ( “마음”, 26:36, 41 ) 의 동의어로 사용된다는 사 실에서 ( 참고, 26:15-16, 43의 ‘네페쉬’ ), 우리는 ‘네페쉬’가 인간의 보이지 않는 부분
을 지칭한다고 추론할 수 있다. 이런 추론은 동사 ‘니크라트’ ( “끊어지다” ) 가
‘아담’ 또는 ‘이쉬’와 결합되는 사례와 비교해 보면 더욱 확실해진다. ‘카레 트’ 형벌은 주로 ‘네페쉬’와 관련되며 ( 출 12:19; 31:14; 레 7:20-21, 25, 27; 17:10, 14; 18:29; 19:8; 20:6; 22:3; 23:29; 민 9:13; 15:30-31; 19:13, 20 ), 드물게 ‘이쉬’와도 관련된다 ( 출 30:33, 38; 레 17:4, 9; 20:3, 5, 17-18 ). 레위기 17장 10절과 민수기 9장 13절 같은 소수의 본문에서 ‘네페쉬’와 ‘이쉬’가 교차적으로 사용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적어도 오경에서 율법을 다루는 부분에서는 ‘카레트’ 형벌이 ‘아담’과 관련
되는 경우는 전혀 없다. 반면에 mwt는 ‘이쉬’와 관련되거나 ( 출 21:12, 14; 21:16, 18, 20, 28–29, 35; 레 19:20; 20:2, 4, 9–13, 15, 20, 27; 24:17; 민 15:35; 26:10, 65; 27:8 등 ), 흔한 경우는 아니지만, ‘아담’과도 관련된다 ( 레 24:21; 27:29; 민 16:29; 19:14 ). 주목해야
할 것은 mwt가 ‘네페쉬’와 직접적으로 관련되는 경우가 전혀 없다는 점이
다. 이 다양한 관계는 다음과 같은 도식화를 통해 더 쉽게 이해된다.
‘니크라트’, ‘네페쉬’, ‘이쉬’ ( ‘아담’은 krt와 직접적으로 관련되지 않음 )
mwt, ‘아담’, ‘이쉬’ ( ‘네페쉬’는 mwt와 직접적으로 관련되지 않음 )
기본적으로 ‘카레트’ 형벌이 사람의 육체적인 생사를 문제 삼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하면, ‘아담’이 krt와 관련되지 않은 것은 이해할 만하다. 이것은 앞서 제시했던, ‘아담’이 사람의 현세적이고 육체적인 측면을 가리킨다는
추론과 일치한다. ‘네페쉬’가 mwt와 직접적으로 관련되지 않는다는 것은 ‘네페쉬’가, 사람의 육체적 죽음과 함께 썩어 없어지거나 소멸되지 않는 사 람의 영적 측면을 가리키는 용어라는 상황을 잘 반영한 것일 수 있다. 위의 도식은 또한 ‘이쉬’가 ‘카레트’ 형벌과 죽는 것 모두와 관계된다는 것을 가
리킨다. 이는 ‘이쉬’가 사람의 영적인 측면과 육체적인 측면을 모두 가지고
있는 반면, ‘아담’과 ‘네페쉬’가 공유하지 않는 다른 의미 요소 ( 대인 관계를 암시
하는 것 ) 도 가지고 있음을 나타낸다.
앞서 살펴본 것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죽음
끊음
‘네페쉬’ ‘이쉬’ ‘아담’
‘네페쉬’와 관련하여 비슷하게 중요한 현상은 레위기에서 ‘네페쉬’가 순
전한 실체로도 나타나고, 죄에 대한 강한 경향성을 가져서 스스로를 더럽히 는 실체로도 나타난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11장 43-44절 ( 20:25도 보 라 ) 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희는 기는 바 기어다니는 것 때문에 너희 영 혼 ( ‘나프쇼테켐’; 개역개정 “자기” ) 을 가증하게 되게 하지 말며……땅에 기는 길짐승
으로 말미암아 너희 영혼 ( ‘나프쇼테켐’; 개역개정 “스스로” ) 을 더럽히지 말라.”
이 경우에 ‘나프쇼테켐’은 본질적으로 순수할 수 있는 실체로 보인다. 그 러나 동시에, 레위기에서 다른 모든 규정이 암시하는 것처럼, 인간의 ‘네페
쉬’는 죄에 대한 강한 경향성을 가져서 스스로를 더럽힐 수 있는 것으로 여 겨진다. 비록 그 규정들이 “만일 ~하면”이나 “~하는 때에는” 같은 가설적 형태로 제시되긴 하지만, 인간의 영혼이 중립적으로 나타나는 곳에서 ‘네페
쉬’가 ‘하타’ ( 4:2 ), ‘쉭케츠’ ( 11:43; 20:25 ), ‘팀메’ ( 11:43 ), ‘인나’ ( 16:29, 31; 23:27 ) 같은
동사와 결합한다는 사실은 ‘네페쉬’가 자기중심적 본성으로 여겨지고 있음 을 암시한다. 21장 1절과 11절에서 인간의 ‘네페쉬’는 단순히 더럽히는 무
언가가 아니라 오염의 원천으로 여겨진다. 창세기 2장 7절의 “살아 있는 ‘네페쉬’” ( 개역개정 “생령” ) 가 아니라 지금은 파멸의 ‘네페쉬’다. 나는 이 ‘네페
쉬’가 타락 ( 창 3장 ) 이후에 나타났을 것으로 추정되는 자기중심적 본성을 필
연적으로 가리킨다고 이해한다. 첫 남자와 여자의 “죄”로 인해 그들의 영혼
은 죽었다. 하나님의 친밀한 임재에서 분리되었고 창세기 3장 22절에 언급 된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네페쉬’가 인간의 비가시적인 측면을 지칭하므
로, ‘네페쉬’가 순수한 핵심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보통 의식 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하나님에 대항하는 자기중심성으로 스스로를 드러 낸다는 이해에 근거해서 ( 참고, 합 2:4 ), ‘네페쉬’는 “영혼”으로 번역해야 한다.
따라서 나는 ‘네페쉬’를 설명할 때는 “자기중심적 본성”이란 용어를 사용하 겠지만, 번역은 “영혼”으로 할 것이다.
비록 하나님의 영과 대조되는 인간의 영이 인간의 비가시적인 요소 가운
데 하나인 것은 분명하지만, 레위기에서 “영” ( ‘루아흐’ ) 이란 단어가 사용되지 않는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성경에서 인간의 영은 자만과 교만으로 부풀
어 오르게 된, 그래서 파멸해야 할 실체로 여겨진다 ( 시 34:18; 51:17[MT 51:19]; 사 57:15; 66:2; 마 5:3 ). 아마도 ‘네페쉬’라는 용어는 인간의 영이 의미하는 것을 포 괄할 것이고, “영”이 레위기에서 언급되지 않는 것은 레위기가 인간의 ‘네 페쉬’에 집중함으로써, 육체의 생명과 인간 영혼의 파멸적 상태의 관계 및 하나님 앞에 있는 생명과 파멸적 영혼의 관계를 강조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 참고, 17:11 ). 이는 ‘네페쉬’가 “생명”과 “영혼” 모두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여호와가 자신의 ‘네페쉬’ ( 개역개정 “마음” ) 를 갖고 있다는 점이 주목 할 만하다 ( 26:30 ). 그러므로 다양한 의식과 규정은 이스라엘 백성을 처음 남자와 여자가 타 락 이전에 가지고 있던 것과 같은 살아 있는 영혼을 가진 백성으로 바꾸는
것을 목표로 둔 것처럼 보인다.
7.2 죄
최근의 레위기 주석은 당연히 “죄”를 여호와의 계명 가운데 어떤 것에 대
한 위반을 의미한다고 여기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죄에 대한 이와 같은
행위 지향적인 이해는 ( 일반적으로 “죄를 범하다”로 번역되는 ) 히브리어 단어 ‘하타’
와 ( 일반적으로 “죄”로 번역되는 ) ‘핫타트’의 사용이 레위기 4-5장의 문맥과 어울
리지 않는다는 사실로 인해 도전을 받는다 ( 이어지는 논의에 대해서는 Kiuchi 2003a를
보라 ). 예를 들면, 레위기 4장 2절에서 동사 ‘하타’는 금지된 것에 대한 위반
보다 더 포괄적인 의미를 갖는다 ( 4:2 “주석”을 보라 ). 이는 5장 1-5절이 ‘하타’
를 사용하는 데서 더 분명히 나타난다. 5장 1-5절의 문맥에서 ‘하타’는 특
정 계명에 대한 위반을 가리키지 않고, 분명히 죄인의 마음 상태를 가리킨
다. 동사 ‘하타’가 “벗어나다”라는 의미를 가진 ‘샤가’ 및 ‘샤가그’와 동일한
의미를 갖기 때문에, ‘하타’는 존재적 의미를 갖는다. 비록 ‘마알’ ( “신의를 깨뜨 리다” ) 과 관련된 문맥에서는 ‘하타’가 특정 금지 계명을 위반함으로써 발생 하긴 하지만, ‘마알’처럼 ‘하타’와 함께 사용되는 다른 관련 단어를 재검토
해 보아도 역시 ‘하타’가 인간의 마음 상태를 가리킨다고 추론하게 된다. 포괄적이면서도 존재론적인 ‘하타’가 갖는 더 특수한 의미는 다음의 세
가지를 통해 유추할 수 있다. (1) 4장 1절-6장 7절 ( MT 5:26 ) 의 규정에서, 죄 인은 자신에게 숨겨졌던 자기 죄를 인식하는 가운데 스스로를 여호와 앞에 바친다 ( 나는 보통 이곳 등에서 남성형 대명사를 사용하는데, 이는 간략하게 표현하기 위함이란 점을
알아주기 바란다. 본문은 여성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 (2) 5장 4절의 죄에 대한 인식 이후에 자복 ( ‘히트밧다’, “고백하다” ) 이 뒤따른다 ( 5:5 ). (3) 구약의 나머지 본문에
나타나는 ‘하타’와 ‘핫타트’의 동의어와 반의어는 그것들이 “숨기는” 개념
과 관련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 이와 같은 사실을 가지고 ‘하타’가 “스스로
를 숨기다”를 의미한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하타’가 사용되지 않고 ‘핫타트’가 나오는 다른 문맥은 부정한 것의 정화 와 관련된다. 이런 문맥에서는 ‘핫타트’에 가정되어 있는 존재적 의미가 훨 씬 강조되는데, 이는 그 문맥들이 하나님의 금령에 대한 위반을 가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핫타트’는 스스로를 숨기는 상태를 나타낸다는 점
을 추론할 수 있다.
‘하타’와 ‘핫타트’의 주요 특징 가운데 하나는, 이 용어들이 표현하는 것
이 존재적이므로, 행위자가 자신의 마음 상태를 자각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타’와 ‘핫타트’가 각각 “스스로를 숨기다”와 “스스로를 숨기는” 상태
를 의미하므로, 우리는 속죄제의 기능이 헌제자의 마음을 드러내 보이는 것
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비록 죄가 어떻게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는지를 말하는 창세기 3장에는
‘하타’나 ‘핫타트’가 나타나지 않지만, 창세기 3장의 이야기는 ‘하타’와 ‘핫 타트’의 주요 특징과 관계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창세기 3장의 이야기가
여자를 향한 뱀의 말로 시작하므로, 죄가 인간 내면의 생각에서 시작한다는 점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하타’와 ‘핫타트’의 나머지 측면에 대해서는
11-13장과 15장의 “해설” 단원을 보라.
이 주석은 이와 같은 발견에 근거하며, 이 발견들이 부정함과 거룩함 같 은 다른 주제들에 미치는 영향은 광범위하다.
7.3 정결함/부정함
정결 및 부정 관련 규정이 11-15장에 집중되어 있지만, 그보다 앞서 나
오는 5장 2-3절과 7장 19-21절 같은 자료에도 가정되어 있다. 제사장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 규례들을 알게 하라는 지침을 받는다 ( 10:11 ). 레위기 1115장에는 본질적으로 다음과 같은 규정이 세 묶음 나온다. 동물 및 피조물 의 정결함/부정함 ( 11장 ), ‘차라아트’라 불리는 심각한 피부 질환 ( 13-14장 ), 생 식기의 배출 ( 12, 15장 ). 이 본문에서는 똑같이 “정결하다” ( ‘타헤르’ ) 와 “부정하
다” ( “타메” ) 란 용어가 등장하지만, 세 종류의 규정 각각 이 용어에 대한 원리 가 발견된다.
7.3.1. 레위기 11-15장의 “부정함”의 근거에 대한 전통적 설명 레위기 11장의 부정한 생물과 관련된 근본 원리가 무엇인지에 대해 다양 한 견해가 발전했다 ( 세부 내용은 Jenson 1992: 75-83; Houston 1993: 68-123을 보라 ). 해리
슨 ( Harrison 1980 ) 을 포함한 일부 학자는 부정한 생물을 택한 배후에 위생과 관련된 관심이 있다고 보는 “위생적” 설명을 지지한다. 그러나 이 설명은
최소한 두 가지 질문을 불러일으킨다. 첫째, 왜 다른 해로운 동물과 식물은
금지하지 않는가? 둘째, 만약 부정한 생물을 택하는 데 위생과 관련된 관심 이 반영된 것이라면, 어째서 레위기 11장의 규정은 오순절이 지난 후에는
실행되지 않는가 ( Rooker 2000: 172를 보라 ) ? “제의적” 설명은 레위기 11장에서
금지된 부정한 동물이 가나안의 종교 관습에서 사용되었다고 추정한다 ( Noth 1965: 92 ). 그러나 웬함이 지적하듯 ( 참고, 1979: 167 ), 이스라엘에서 정결한 것으로
레위기의 핵심 주제
여겼던 소를 가나안 제의에서 바쳤다는 점을 고려하면, 제의적 설명은 개연
성이 없어 보인다. 필론 ( Philo ) 이 옹호했던 전통적 견해인 “상징적” 설명은 정결한 생물과 부정한 생물이 영적인 진리를 가르치기 위한 방편으로 사용
되었다 ( 참고, Houston 2003: 144–147 ). 부정한 생물이 죽음을 나타낸다고 생각하
는 초기 및 최근의 학자들이 이 방법론을 채택한다 ( Dillmann 1880: 479; Paschen 1970; Wenham 1979: 169-171; Milgrom 1991: 704-742 ). 비록 현대의 주석가들은 종종 이
방법론이 제시하는 상징적 의미를 부적절하다고 판단하기는 하지만 ( 예, Rooker 2000: 171 ), 내가 보기에 이 상징적 의미는 진실에 가깝다.
정결한 생물과 부정한 생물에 대한 근래의 지배적 접근법은 더글러스가 기여한 접근법으로, 레위기에 열거되어 있는 여러 동물의 정상 또는 비정상
을 가리는 기준이 이동 기관과 소화 유형이라고 제안한다. 만일 어떤 생물
이 창조 때 부여 받은 고유한 특징에서 벗어나는 특징을 보이면 그것은 부
정하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 Douglas 1966 ). 퍼미지 ( Firmage ) 는 더글러스가
제안한 기준, 특히 이동 기관에 대한 기준이 레위기 11장의 부정한 생물과
부합하지 않는다는 점에 근거해서 더글러스의 관점을 비판한다 ( Firmage
1990 )
마지막으로, 어떤 학자들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별된 백성이 되게 하려 고 레위기 11장의 규정들을 독단적으로 지시하였다는 입장을 취한다 ( Rooker
2000: 171–172 ).
생식기의 배출 ( 12장과 15장 ) 및 나병과 관련된 피부 질환 ( 13-14장 ) 에 대해 때
로는 서로 결합되는 두 가지 접근법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위생적
접근법이고 다른 하나는 “죽음”의 개념이 그 규정의 기저에 깔려 있다고 보 는 상징적 접근법이다 ( Dillmann 1880: 478-479; Wenham 1983: Milgrom 1991: 766-768, 816820 ).
따라서 지금까지 제안한 것 가운데 부정함과 관련된 경우를 모두 포괄할 수 있는 유일한 원리는 “죽음”의 개념인 것으로 보인다.
7.3.2. 부정함의 상징적 의미와 죄의 의미
전체적으로 봤을 때, 일부 새로운 접근법을 포함하여 다양한 전통적 접근 법이 대체로 부정함과 관련된 규정의 근본적인 원리를 포착하는 데 실패했 다. 내가 보기에 이와 같은 실패는 단순히 레위기 11-15장의 일부 규정이 아닌 전체 규정을 아우르는 부정함에 대한 일관된 원리를 찾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똑같은 단어 “부정한”이 역력하게 전혀 다른 주제에 사용되
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앞서 언급했듯이, 성경의 부정함에 대한 규정은 인간의 출생, 남성과 여
성의 생식기에서의 배출, ‘차라아트’ ( “나병” ) 와 관련된 주제들 및 레위기
11장에 열거된 생물에 한정된다. 따라서, “죽음”을 11장과 13-14장까지 부
정 개념의 배후에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지만, 인간 육체에
있는 단순한 상처가 더럽히는 것으로 표현되지 않는 것으로 볼 때, 이 규칙
의 요점은 육체적 생명이 아니며, 만일 “죽음”이 가정된다면, 그것은 육체
적인 죽음이 아니라 영적인 죽음이라는 제안이 성립된다.
최근에 나는, 레위기 13장에 묘사된 나병과 관련된 규정을 바탕으로, ( 웬함
과 밀그롬이 부분적으로 관찰했던 것처럼 ) 나병은 병리학적이고 의학적인 관심사와 전
혀 관련이 없으며, 오히려 이 질병이 죄악을 숨기려는 인간의 경향성을 묘 사하는 기능을 한다고 제안했다. 감염된 부위를 감추려는 정상적인 인간의 반응 및 나병의 지속성 같은 병증은 인간의 죄악을 묘사하는 데 매우 적절
하다 ( Kiuchi 2001a ).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나는 나병에 대한 묘사가 창세 기 3장의 타락 사건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제안한다. 주석을 하면서 보여 주겠지만, 정결함/부정함에 대한 이 본문은 창세기 3장 기사와의 관련성을 나타낸다. 이 관련성은 문자적으로도 영적으로도 자신을 숨기는 것 ( 창 3:79 ), 출산 ( 창 3:14 ), 남자와 여자 같은 주제뿐 아니라 “배로 다니다” ( ‘할라크 알 가 혼’ ) 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 ( 창 3:14와 레 11:42 ) 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이와 같 은 창세기 3장과의 문학적이고 개념적인 관련성은 레위기가 창세기 3장의 속편으로 기능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또한, 통상적으로 “죄를 짓다”와 “죄”로 번역되는 ‘하타’와 ‘핫타트’의 의
미를 통해서, 이 단어들이 각각 “스스로를 숨기다”와 “스스로를 숨기는 상 태”를 의미한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 Kiuchi 2003a ). 따라서 ‘하타’와 ‘핫타트’의
동의어인 ‘타메’/‘투므아’ ( “부정한/부정함” ) 가 특정 계명에 대한 위반을 표현하 기 위해 사용되지 않을 때는 스스로를 숨기는 상태를 가리킨다. 더 나아가, 나는 이 주석에서 나병이 인간의 자기중심적인 모습을 상징한다고 제안한
다 ( 13장 “주석”을 보라 ). 부정함을 상징하는 것에 생식기의 배출이나 나병 같은 특정 주제만 선별 한 이유는 입법자가 인간의 타락한 상태를 묘사함과 동시에 이스라엘 백성
을 거룩하게 만들려는
상태라는 점을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한다. 따라서 부정함은, 본질적으로 인
간의 마음이나 영혼의 문제인 인간의 실존 상태를 표현한다.
그러므로, 부정함의 배후에 죽음이 있음을 보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
만, 부정함이 더 분명하게 상징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를 숨기는
인간의 상태다 ( 11장과 13장 “주석”을 보라 ).
정결함/부정함을 연구하는 데 있어 발생하는 주된 문제들 가운데 하나는 학자들이 “제의적”이란 용어를 “윤리적/도덕적”이란 용어의 반대 의미로
사용함으로써 “제의적”이란 용어를 도덕적 개념을 전혀 갖지 않는 것으로
암시하는 경향을 강하게 보인다는 것이다 ( 예, Schwartz 1999: 26; 클라반스[Klawans 2000: 21-42]의 최근 논의를 참고하라 ). 최근의 연구에서 휴스턴 ( Houston ) 은 음식법을
윤리화하는 일을 피하면서 그것을 언약의 여호와에 대한 충성 표현으로, 그 리고 “윤리적이고 우주론적인 사고라는 훨씬 큰 구조의 일부로” 보기를 제
안한다 ( Houston 2003: 160 ).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존재 상태를 가리키
는 데 한해서만 부정함이 윤리적인 것을 포함하는 것이지 다른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 아래의 “거룩함”에 대한 논의도 보라 ).
내가 알기로는 현대의 어떤 주석가도 레위기 11-15장의 정결함/부정함 규정을 창세기 3장의 타락 기사와 관련해서 설명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 지만, 이 주석서는 그것을 집중적으로 다룰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규례들에 대한 문자적 준수와 그것의 상징적 의미와 관
련해서 편의상 정결함/부정함 규례들에 대한 문자적 준수는 “외적 정결함/ 부정함”이라 부르고 그것의 상징적 의미는 “내적 정결함/부정함”이라 부르
도록 하겠다. 외적 부정함은 입법자가 독자로 하여금 내적 부정함을 깨닫게
할 의도를 보여 주는 창문으로 드러나며, 이는 정결함의 경우도 마찬가지
다. 그래서 규례에 대한 단순하고 외적인 관찰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독자
에게 원하는 것을 성취하지 못한다.
희생제사는 성막에서 행해지므로, 부정한 상태의 사람은 희생제사를 바 칠 수 없다. 그러나 만일 전 인류가 부정하다면, 그들은 어떻게 희생제사를
바칠 수 있을까? 독자들은 여호와가 레위기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요구하 는 높은 기준을 놓쳐서는 안 된다.
7.4. 거룩함
레위기 율법에서는 인간, 사물, 시간이 거룩하다고 일컬어진다. 즉, 제사 장 ( 21:7 ), 제물 ( 예, 6:17[MT 6:10] ), 성소 ( 회막과 그 안의 모든 집기와 제단; 예, 16:16 ), 시간 ( 안식
일, 희년, 절기; 예, 25:12 ) 이 거룩하다 일컬어진다.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의 계
명을 지킴으로써 거룩하게 되라는 지시를 받기는 하지만 ( 11:44; 20:7 ), 결코 거 룩하다 서술되지는 않는다. 거룩함이 적어도 “신적인 영역에 속하는 것”을
의미하기는 하지만 ( 참고, Schwartz 2000 ), 이 정의는 여전히 거룩함과 부정함/ 정결함의 관계를 분명히 밝히지 못한다. 특히 부정함/정결함이 지니는 각 각의 상징적 의미, 즉 부정함은 스스로를 숨기는 상태를 의미하고 정결함은
스스로를 드러내는 상태를 의미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거룩함 ( ‘코데쉬’ ) 의 개념은 이 주석 전체에 걸쳐 논의되지만, 이 중요한 용 어와 관련해서 도출되는 주요 결론을 요약하는 것이 유익할 것 같다. ( 1 ) 희생제사의 개념은 거룩함의 본질이 죽음, 특히 인간의 자기중심적
본성의 죽음에 근거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특히 자기중심적 본성의 죽음은 기름을 태우는 것에서 상징화되는데, 이는 헌제자의 온전한 마음 ( ‘타밈’ ) 이
전제된 행위일 것이다.
( 2 ) 레위기 13장 규칙은 어떤 사람이 정결하다 판정 받은 때에도 그것이 일시적인 상태일 뿐이며, 나병이 상징화하는 자기중심적 본성은 잠복된 채
로 남아 있음을 보여 준다.
( 3 )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라는 레위기 19장 18b 절의 황금률은 자신의 자기중심적 본성에 대해 죽을 때에만 지킬 수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을 비롯한 여러 주해적 관찰을 바탕으로 나는 거룩함
이 소극적으로는 자기중심적 본성이 없는 인간 내면의 상태를 가리킨다고 제안한다.
7.4.1. 거룩함과 정결함/부정함의 관계
레위기 10장 10절에서는 거룩함이 보통 상태와 반대되는 것으로 나오고
정결함이 부정함과 반대되는 것으로 나온다. 우리는 이 반대되는 각각의 쌍, 즉 거룩함/보통 상태와 정결함/부정함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밀그롬은 “보통 상태”로 지정된 것이 때로는 “정결하다”고 묘사되는 것을 포함한다는 점에 주목한다 ( Milgrom 2000b: 29-30; 참고, Péter-Contesse 1993: 241244 ). 그러나 이것은 오직 정결함과 부정함이 거룩함과 직면할 때만 옳고 의 미가 있다. 예를 들면, 레위기 8-9장의 의식은 그 의식에 참여하는 모든 사
람이 거룩한 상태를 받기 전까지는 부정한 상태로 간주됨을 나타내며, 이는 정결한 것이 거룩해지기 전에는 여전히 부정한 것으로 여겨진다는 의미다. 그뿐만 아니라, 이 규칙은 그 상징적 의미를 고려할 때 정결함이 단순히
7. 레위기의 핵심 주제
일시적 상태일 뿐임을 보여 주며 ( 13장과 15장을 참고하라 ), 정결함과 부정함에 대 한 여러 규칙의 배후에 인간이 자기중심적 본성을 가지고 있는 한 항상 본 질적으로 부정하다는 가정이 전제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 이는 21장 1절에
서 가장 분명하게 나타난다 ( 해당 “주석”을 보라 ).
7.4.2. 외적 거룩함과 내적 거룩함
나는 외적 정결함/부정함과 내적 정결함/부정함에서 그랬던 것처럼 외적
거룩함과 내적 거룩함을 구별하기를 제안한다. 외적 거룩함과 내적 거룩함
이란 용어는 레위기의 규칙을 설명하는 데 용이한데, 그 이유는 내적 거룩 함이 실제적인 차원과 상징적 차원을 모두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정 결함/부정함의 경우를 다룰 때 그랬던 것처럼, 내적 거룩함과 외적 거룩함
의 구분은 설명을 위한 것이며, 내적 거룩함과 외적 거룩함 사이의 관계는
정형적/논리적이지 않고 역동적이다. 이런 관점을 바탕으로 나는 거룩하다
일컬어지는 것, 즉 제물, 제사장, 성소, 시간과 관련해서 살펴봐야 할 내용을
미리 다루도록 하겠다.
a. 희생제사와 제물 다섯 가지 제물 유형이 거룩한 것으로 가정되거나
명시적으로 언급된다. 충성제 ( 소제 ), 속죄제, 배상제 ( 속건제 ) 는 명시적으로 거 룩하다고 묘사되는 반면, 번제에 대해서는 거룩하다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번제가 거룩하다는 말이 나오지 않는 이유는 “거룩한” 또는 “거룩함”이란
용어의 본질에 근거한다. 입법자는 독자로 하여금 제물에 대한 오용의 위험 성을 인식하게 만들고 제물의 남은 부분을 제사장에게 속하는 것으로 지정
하기 위해서 거룩함에 대한 용어를 선택한다. 번제에서는 제물이 완전히 소
멸하기 때문에 이와 같은 오용의 가능성이 존재하지 않고, 오히려 번제와
관련해서 거룩함에 대한 용어가 사용되지 않는 것은 번제가 거룩함의 본질
을 상징한다는 점을 암시한다 ( 아래와 레위기 1장 “주석”을 보라 ). 다른 한편으로, 친 교제 ( 화목제 ) 가 명시적으로 거룩하다고 묘사되지 않는 이유는 아마도 모든
제물 가운데 친교제의 제물이 가장 더럽혀질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반영하
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다섯 가지 유형의 제물 사이에는 거룩함의 정도
차가 존재한다.
동물에게 손을 얻는 것의 상징적 의미와 그 본문이 지닌 다른 암시들을 고
려해 볼 때, 제물들은 헌제자의 영적 실재를 상징한다. 따라서 정결함과 부
정함의 연관성을 다룰 때 그랬듯이, 나는 외적 거룩함과 내적 거룩함의 개
념 설명을 위한 목적으로 사용한다. 외적 거룩함은 내적 거룩함을 암시하며,
외적 거룩함 그 자체로는 의미가 없다. 거룩함을 외적 거룩함과 내적 거룩 함으로 구별하는 것이 필수적인 이유는 거룩한 제물과 헌제자 사이에 영적 간극이 전제되기 때문이다. 헌제자는 거룩해질 것으로 기대되지만, 상징적 의미가 완전히 구현되면 제물은 불필요하게 된다.
강조되어야 할 것은 비록 레위기가 헌제자의 외적 행위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이 외적 행위가 내적 동기를 표현하는 것으로 나타나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마치 저자가 순수하게 의식에만 관심을 갖는 것처럼 생각
해서 레위기 본문을 단순히 정형적인 규정으로 보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b. 제사장 아론과 아론의 아들들이 제사장으로 임명된다. 위임식을 마쳤
을 때, 그들은 여호와 앞에서 거룩하다 여겨졌는데 ( 레 8장 ), 이 거룩함은 단
순히 외적 거룩함이 아니라 내적 거룩함이다. 그러나 이 내적 거룩함이 제
사장 위임식을 통해 성취되었을 가능성은 없다. 그래서 만일 그들이 내적
거룩함을 품지 않은 상태에서 제사장 활동을 지속한다면, 그들은 지속적으 로 거룩함을 더럽히는 것이 된다. 외적 거룩함과 내적 거룩함의 관계는 역 동적이다. 비록 위임식 이후에 이들이 외적으로 거룩하게 되었지만, 이들에 게는 내적인 거룩함을 지닐 것이 요구된다. 레위기 1-16장에 나오는 규정
들은 제사장들이 헌제자와 여호와 사이를 잇는 중재자로서, 제물을 다루는 일에 거룩해야 함을 자주 암시한다.
제사장들이 외적인 거룩함뿐 아니라 내적인 거룩함도 지녀야 한다는 것
이 레위기 21장에서 특별히 강조된다 ( 7b절을 보라 ). 21장은 제사장들을 거룩 하다 말하지만, 그와 동시에 하나님에 의해 거룩해져야 한다 ( 개역개정 “하나님에
게 대하여 거룩하고” ) 고도 말한다 ( 6a절 ).
외적 거룩함과 내적 거룩함 사이의 간극은 내적 거룩함이 자기중심적 본
성이 없는 인간의 마음을 나타낸다는 사실에서 발생한다 ( 21장 “주석”을 보라 ).
하지만 제사장들은 거룩해지기 전에 정결해져야 한다. 즉, 그들은 스스로를 여호와 앞에 드러낸 상태에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일반 백성이 제사 장에게 가져온 제물은 제사장들의 손에 의해 더럽혀질 것이다 ( 레 22장 )
제사장들은 거룩하다고 일컬어지는 반면 ( 21:7 ), 제사장직을 임명하는 모세 가 거룩하다는 말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이것이 제시하는 것은, 모세와 관 련해서 거룩함에 대한 용어가 나타나지 않는 것이 번제 및 시간과 관련된 경우처럼 ( 아래를 보라 ) 모세가 이미 거룩함의 본질을 대표하고 있음을 암시한
다는 것이다.
c. 성소 ( 거룩한 장소들 ) 주요한 질문 하나가 장소들의 거룩함을 중심으로
제기된다. 거룩함이 거룩한 장소와의 관계에서 무슨 의미를 갖는지, 특히 그것이 어떻게 인간과 관계되는지는 의문이다.
무엇보다도, 성소는 레위기에서 인간과 별개의 것으로 가정될 수 없다.
헌제자-동물과 피-제단의 상호관련성이 17장 11절에서 분명하게 피력된
다. 그뿐 아니라 위임식에서 제단의 정화/성별은 아론과 그의 아들들의 정 화/성별과 동시에 발생한다 ( 8:24 ). 더럽혀진 제단의 정화/성별은 속죄일 의
식에서 다시 한번 제사장들의 정화/성별과 동시에 행해진다 ( 레 16장 ). 다른
일반적인 경우 동물의 피는 제단에 발라지거나 뿌려지며 ( 레 1-5장 ), 이는 당
사자에게 죄에 대한 용서와 정결을 제공한다. 이와 같은 사례는 제단이 제
사장이나 일반 백성의 영적 상태를 반영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이것은 인간의 몸이 성막을 상징한다는 사실과 관련된다 ( 비록 다른 관점을 가
지고 있긴 하지만 Douglas 1999: 80을 보라 ). 14장 10-20절에서는 나병 환자였던 사람
이 제단처럼 다뤄짐으로써 높은 지위를 얻은 것처럼 보인다. 이 사례는 제
단이 사람의 영적 상태를 나타낸다는 것을 다시 한번 강하게 암시한다 ( 14장 “해설”을 보라 ). 더 나아가, 레위기 11-16장을 문학적 통일체로 볼 때, 11장
44절에서는 인간의 영혼 ( ‘네페쉬’ ) 이 더럽혀지는 반면, 15장 31절에서는 여호 와의 거처가 더럽혀진다고 말한다 ( 16장 “해설”을 보라 ).
인간 ( 이스라엘 백성 ) 과 성막/회막의 관련성은 부정함, 정결함, 거룩함의 상징
적 의미를 고려할 때 훨씬 분명히 드러난다. 또한 성막, 특히 회막이 인간의
내적 상태에 대한 여호와의 일반적인 평가를 나타낸다고 추론할 수 있다.
일반 백성은 바깥뜰까지 나아갈 수 있는 반면, 제사장들은 보통 회막의 휘
장 바깥쪽에서 일한다. 하지만 회막의 휘장 안쪽인 지성소에 들어가는 것은
대제사장 아론과 그의 후계자들에게 1년에 한 번만 허용될 뿐 다른 누구에 게도 허용되지 않는다. 회막의 구조와 여호와가 제사장들에게 부과한 임무
는 지성소가 인간 마음의 가장 깊은 곳과 상응한다는 근본적인 가정을 입 증한다. 만일 거룩함이 자기중심적 본성이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면 지성소 의 구조와 그곳으로의 접근 제한은 인간 영혼의 근본적인 또는 철저한 정
화가 여호와에 의해 일방적으로 행해진다는 것과 이것이 극도로 어려운 일 이라는 원리를 입증한다.
따라서 거룩한 장소들과 백성이 상응한다는 점에 근거해서, 성소의 정화
또는 성별이 백성의 정화 또는 성별이 된다. 그러므로, 예를 들어, 제사장이 동물의 남은 고기를 거룩한 장소에서 먹어야 한다고 말할 때, 그것은 이 특
정한 장소가 본질적으로 거룩하다거나 어떤 면에서 그 남은 고기를 먹는
사람과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제사장이 그것을 거룩 한 방식으로, 즉 자기중심적 본성 없이 먹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 참고, Klingbeil 2004: 514 )
왜 의식이 필요하며 어째서 백성과 여호와 사이에 매개 역할을 하는 성소 가 있어야 하는지에 의문을 품을 수 있을 것이다. 그에 대한 답으로는 서로
관련되어 있는 두 개의 근거가 있다. 첫째, 인간은 가시적인 것 없이 비가시
적인 것에 다가갈 수 없다. 자신이 소유한 동물, 새, 곡물 가루 등을 바치는
실체적인 가시적 희생제사 없이 희생제사의 참된 의미를 알 수 없다. 궁극
적으로는 가시적 성막을 없애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나 인간은 대부분 자
신의 영적 상태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제물이나 성막 같은 가시적 물체가
교육적인 목적을 위해 필요하다. 둘째 근거는, 인간이 너무 위선적이기 때
문에 스스로 의식을 준수하기만 하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는 것이다 ( 참고, 암 5:21-24 ). 의식은 인간을 두 종류, 즉 위선적인 인간과 그 의
식의 배후에 있는 영적 진리를 추구하는 인간으로 구분하는 기능을 한다. 한 마디로 말하면, 인간은 너무 완고하고 하나님에게서 자신을 숨기려는 성 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신적인 진리를 간접적으로만 배울 수 있다는 것 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이 자신을 인간의 영적 상태에 맞춰 준다는 것이다. 인간이 자신을 숨기려는 경향이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의식을 통
해 자신의 메시지를 간접적으로 전달한다. 이 상황은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 한 것에 반영되어 있는 상황과 동일하다 ( 예, 마 13:34; 막 4:34 )
d. 시간 레위기 23장과 25장은 거룩한 시간, 즉 안식일, 다양한 연간 절
기, 안식년 및 희년을 규정한다. 이 모든 시간은 안식일 원리에 기초한다.
그러나 시간 자체가 거룩하다 일컬어진다고 해서 시간이 이스라엘 백성과
별개의 것으로 여겨진다는 의미는 아니다. 제물과 성소의 경우와 마찬가지
로, 시간에 “거룩한” ( ‘코데쉬’ ) 이란 말이 언급되는 것은 인간이 시간을 성별해 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렇지 않으면 거룩한 시간은 속되게 된다. 이곳 의 절기에서 최소한으로 요구되는 외적 준수 사항은 일상적인 일을 멈추는 것이지만, 거룩함이 인간 마음의 문제라는 점에 있어서 이 절기는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
뿐만 아니라 모든 시간은 여호와에게 속해 있는 것으로 여겨지고,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이 모든 시간을 성별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특정한 기 간을 “거룩하다”고 일컫거나 어떤 기간을 성별하도록 요구하는 것은 이스
라엘 백성을 위해 고안된 것이다.
명시적으로 “거룩하다”고 일컬어지는 시간 외에도, 레위기의 초반부, 특
히 정화 의식과 성별 의식에 대한 부분에서는 시간을 언급하는 경우가 많 이 있다. 사람이 “저녁까지” 부정하다는 표현 ( 예, 11:24-25; 14:46; 15:5 ), “칠 일 동
안”이란 표현 ( 12:2; 15:13, 19, 24, 28 ), 제사장이 될 사람들을 성별하는 데 “칠 일”
이 소요된다는 내용 ( 8:33 ) 이 나온다. 레위기에서 발견되는 창세기 3장에 대 한 다른 언급까지 고려하면, 이와 같은 시간의 특정화는 창세기 1장에 나오
는 하나님의 천지창조를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정화와 성별이 사람들을 부정함에서 정결함으로, 정결함에서 거룩함으로 이끄는 여호와의
재창조 사역이라는 점을 추론할 수 있다. 하나님의 사역에 참여하는 일의 핵심은, 지정된 기간을 기다리는 일 외에는 하나님의 어떤 새 창조 사역에
도 자신을 개입시키지 않으면서 자신의 부정함 ( 스스로를 숨기는 것 ) 을 인식하는 것으로 보인다.
7.4.3. 1-16장의 거룩함과 18-26장의 거룩함 사이의 관계 앞서 언급했듯이 비평학자들은 대부분 P ( 1-16장의 대부분 ) 의 거룩함 개념이 H ( 18-26장 ) 의 거룩함 개념과 다르다고 본다. 밀그롬은 다음과 같이 말한
다 ( Milgrom 1996: 67 ).
H는 P의 거룩함 개념에 세 가지의 근본적인 변화를 가한다. 첫째, H는
제사장과 일반 백성 사이의 벽을 허문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거룩한
속성에 접근할 수 있다. 둘째, 거룩함은 단순히 금지 계명, 즉 금기 제도
를 고수하는 문제가 아니다. 거룩함에는 본질적으로 윤리적인 적극적이
고 실천적인 계명이 포함된다. 셋째, 제사장을 포함한 이스라엘 전체는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준수하는 데 비례해서 그들의 거룩함을 증진시키 거나 감소시킨다.
밀그롬의 세 번째 가정은 레위기 본문에 전혀 맞지 않는다. 만일 어떤 사
람이 모든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그는 거룩하지 않다. “거룩함을 증진시키
고 감소시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두 번째 가정은 부정확하다. 예를 들면, 레위기 1장은 “금기”에 속하지 않는다. 내가 보기에 첫 번째 가정은 잘못되
었고, 이는 앞서 7.3.2에서 설명한 것과 같은 외적 거룩함과 내적 거룩함 사
이의 관계를 알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위의 4.1에 근거해서, 나는 거룩함을 다음과 같이 서로 다른 두 개의 관점
으로 본다. ( 1 ) 1-16/17장은 제물, 성소, 제사장의 외적인 거룩함에 강조점
을 두는 반면, ( 2 ) 18-27장은 그 안에 들어 있는 행위 지향적 계명을 통해
인간의 내적 거룩함에 강조점을 둔다. 이와 같은 접근법에 따라, 레위기 전
체는 점차적으로 이스라엘 백성과 제사장의 내적 거룩함을 향해 다음과 같
은 방식으로 이동해 간다고 볼 수 있다.
1-7장에서 제물의 거룩함은 규정의 전경에 남아 있지만, 이것은 암묵적
으로 헌제자나 제사장이 거룩해야 할 것을 요구한다. 8-10장에서 아론과
아론의 아들들은 외적 의미에서 거룩하게 되지만, 그것이 그들의 내적 거룩 함을 요구한다는 사실은 나답과 아비후의 사건 및 그 여파를 통해 나타난
다. 11장 43-45절은 여호와가 거룩한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도 거룩해야 한
다는 것을 처음으로 명시적으로 나타낸다.
11-16장은 거룩함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잠재적 부정 상 태를 다룬다. 한편, 16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입법자는 제물과 정결함/부정 함의 규칙, 특히 그것의 상징적 의미를 통해서, 거룩함의 본질이 인간의 이
기심과 교만은 물론 자기중심적 본성이 없는 데 있음을 확증했다 ( 1, 6, 13장 “주
석”을 보라 )
17장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구원받아야 할 절박한 필요성과 그것을 위 한 방편인 피를 강조한다. 이와 같은 17장의 강조점에 근거해서 18-26장의
규례는 스스로 인간, 즉 ( 제사장을 포함한 ) 이스라엘 백성에게 알림으로써, 이번
에는 특정한 행위 지향적 계명을 통해 그들이 거룩하게 되도록 한다. 그러
나 이 계명은 사람들을 거룩한 제물이 상징하는 마음과 영혼의 거룩한 상
태로 이끌기 위해 만들어졌다. 거룩함에 대한 요구는 1-16장보다 더 명시
적이고 직접적으로 나타나지만, 거룩함의 본질은 여전히 같다. 바로 자기중
심적 본성이 없는 상태다. 그러므로 강조점의 변화를 P와 H에 있는 서로 다
른 거룩함의 개념으로 설명할 필요가 없다. 18장은 1-16장의 거룩함에 근
거해서 거룩함에 대한 요구를 점점 더 강조해 나갈 뿐이다.
종교인 중에는 거룩함이 “윤리적” 계명의 준수에 기초한다고 생각하는
강한 경향성을 겉으로 드러내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이 그 자체로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계명의 목적과 거룩함의 본질을 깨닫지 못하는 것 은 필연적으로 그들을 율법적이고 위선적으로 만드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율법의 목적이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그들의 자기중심적 본성을 알게 하고, 이 본성을 파괴하며, 그것을 통해 그들을 자기중심적 동기가 없는 마 음을 특징으로 하는 거룩함의 상태로 이끄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위의 두
7. 레위기의 핵심 주제
가지 접근법은 동일한 하나님이 준 것이지만,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 ( 정결해지
는 것 ) 은 거룩하게 되는 데 있어 필수 불가결한 일이다. 스스로를 드러내는 일 없이는 거룩함을 향해 만들어지는 어떤 노력도 무익하고 위선적이며, 자
신을 율법주의의 끔찍한 영역 안에 두는 것이다.
7.5. 하나님의 진노
레위기는 간결한 문체를 가지고 있고 여호와의 진노를 명시적으로 언급
하는 일이 거의 없기 때문에, 여호와의 진노라는 주제를 전혀 다루지 않는 것 같은 인상을 줄 수 있으며, 독자가 이스라엘 백성이 “구원받았다”라고
추정하는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
레위기에 가정되어
있는 죄와 죄악, 특히 부정함과 그 상징적 의미 ( 스스로를 숨기는 상태 ) 는 이스라
엘 백성이 잠재적으로 여호와의 진노의 대상으로 남아 있었음을 분명히 보
여 준다.
레위기에서 성막 안에 나오는 여호와의 진노에 대한 표현은 26장에서 가
상적으로 제시되어 있듯이, 이스라엘 백성의 영적 상태를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성막을 떠나는 경우의 하나님의 진노와는 구별해야 한다.
성막 예배에 가정되어 있는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주제는 ( 일반적으로 “대속/ 속죄를 이루다”로 번역되는 ) ‘킵페르’와 ( 일반적으로 “기쁘게 하는 냄새”나 “진정시키는 향기”로 번
역되는 ) ‘레아흐 니호아흐’ 같은 히브리어 단어 및 어구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진정시키는 향기”가 진노가 별로 기대되지 않는 문맥에서는 발생하
면서 ( 1:9, 13, 17; 2:2, 9, 12; 3:5, 16; 4:31 ) 진노가 가장 크게 기대되는 문맥 ( 4장의 첫 세
경우를 참고하라 ) 에서는 발생하지 않는 흥미로운 문학 현상이 존재한다. 따라서
여호와의 진노 수위는 어떤 특정 의식에서 진정시키는 향기가 명시적으로
언급되는 빈도수와 반비례 관계에 있다고 추론된다. 그뿐 아니라 ‘킵페르’
와 진정시키는 향기의 관계에 근거해서, 진정시키는 향기가 ‘킵페르’의 일
부라고 결론 내리는 것이 적합하다. 그러므로 ‘레아흐 니호아흐’가 여호와
의 진노의 마지막 단계를 나타낸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 더 많은 세부 사항에 대해서
는 Kiuchi 2005를 보라 ).
‘킵페르’ 자체에 대해 말하자면, ‘킵페르’는 기름을 태우는 것의 상징적
의미 ( 헌제자의 자기중심적 본성의 소멸 ) 뿐만 아니라 피 처리의 상징적 의미 ( 헌제자의
영적 죽음 ) 도 포함하는 포괄적인 용어다. ‘킵페르’가 ‘나사 아본’ ( “죄책을 짊어지
다” ) 의 동의어라는 사실 ( Kiuchi 2005: 53 ) 은 예를 들어 제사장이 ‘킵페르’한다고
말할 때 그 제사장은 성소를 “정화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헌제자의 죄책을
짊어지기도 하는 것임을 나타낸다. 대리인 ( 제사장 ) 과 관련해서 발생하는 이 중 반전이 추정되는 행위는 ‘킵페르’가 재귀적 의미를 갖는다는 추론으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킵페르’는 “속죄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다”나 “속죄를
이루다”로 번역해야 한다 ( 1:4 “주석”과 Wright 1992: 737을 보라 ).
따라서 속죄의 희생제사로 불리는 속죄제나 배상제뿐 아니라, 비속죄의 제사로 불리는 충성제나 친교제에서도 헌제자는 여러 수위를 가진 여호와 의 진노 대상으로 여겨지며, 제물은 여호와의 진노를 달래는 헌제자를 상징 한다.
만일 제사에서 여호와의 진노가 추정된다면, 어떤 사람이 부정해서 성막
으로 나아갈 수 없을 때 어떤 일이 발생하겠는가? 정결함/부정함 규정은 가
설적인 경우로 상정되어 있지만 ( “~하는 때에는”이나 “만일~하면” ), 그 규정들의 상
징적인 차원은 이스라엘 백성이 본질적으로 부정함 ( 스스로를 숨기고 있음 ) 을 암
시한다 ( 15장 “해설”을 보라 ). 따라서 인간은 끊임없이 여호와의 진노 아래 살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런 관념이 현대에는 인기가 없지만, 나는 이것이 레위기가 전하는 메시지라고 확신한다.
실제로, 사람들이 여호와에게 나아올 수 있게 하려는 목적으로 세운 규례
에서는 여호와의 은혜가 여호와의 진노와 혼합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 많은 인간 사이에 있는 간극을 직접 깨닫지 못한다
면 여호와의 이 은혜에 감사할 수 없을 것이다.
8. 레위기와 그리스도인
레위기에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더 구체적으로는 인간이 어떻게 여호
와의 가까이에서 살 수 있는지와 관련된 문제에 대한 규정과 내러티브가
담겨 있기 때문에, 레위기는 신학적으로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과 가장 관련 이 깊다. 그리스도는 전 인류를 위한 최상의 희생 제물이 되었다. 그리스도
의 십자가 죽음은 제물이 지닌 상징적 의미를 능가했다 ( 히 9:11-14, 25-26; 10:1418 ). 특히, 그리스도가 성막 예배가 지닌 모든 상징적 의미를 성취하였다는 사실은 신약이 그리스도를 레위기 16장에 나오는 속죄일 의식의 시은좌 ( ‘캅 포레트’, 롬 3:25 ) 와 대제사장 ( 히 4:14 등 ) 에 비유하는 것을 통해 나타난다 ( 참고, Head 1995; Beckwith 1995 ).
율법은 전통적으로 도덕법, 시민법, 의식법의 범주로 구분되지만, 앞서
9. 레위기에 대한 새로운 접근
4.1과 7.4.3에서 다룬 레위기의 구조는 최소한 도덕법과 의식법의 구분은
옹호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준다. 따라서 그리스도가 거룩한 인간으로서
십자가에서 죽은 것은 여러 제사와 관련된 개념의 성취뿐 아니라, 거룩함을
목표로 하는 레위기 뒷부분의 규정과 관계된 개념의 성취도 나타낸다. 레위
기의 기독교적 해석에 대해 말하자면, 우리는 레위기 원문의 문맥에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본문의 의미를 발견해야 하고, 오직 그렇게 한 후에만 밝혀진
원리를 현대의 그리스도인의 삶에 적용해야 한다 ( 참고, Wenham 1979: 34–35 ).
신약에서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사역이 자신들을 위해 행해진 것임을 믿 음으로써 구원받는다. 실제로 신자들은 제사장 ( 벧전 2:5 ) 과 희생 제물 ( 롬
12:1 ) 이 되도록 기대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약에서 희생제사와 관련된
언어가 많이 언급되고 신약이 레위기보다 훨씬 강하게 거룩할 것을 요구한
다는 사실에 근거해서, 신자들이 택함을 받은 것과 관련해서는 “거룩하다” 고 일컬어지지만 ( 엡 5:27 ), 아직 거룩함에 이르지는 못한 것으로 가정하는 것
이 일반적이다. 비록 자기중심적 본성과 결합된 믿음이란 말이 본질적으로
용어적 모순이기는 하지만, 신약의 기자가 ( 바울 사도가 “육체”라고 부른 것에 상응하
는 ) 신자 안의 자기중심적 본성의 존재를 가정한다는 점을 알고 있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참된 믿음은 자기중심적 본성이 없는 상태, 즉 거룩함을 가 정한다. 비록 우리는 자기중심적 본성의 소멸보다 먼저 “믿음의 단계들”을
상상하는 경향이 있지만, 긴급한 것은 육체에 따라 살 것인지 영에 따라 살 것인지에 대한 문제다 ( 갈 5:16-21 ). 인간이 자신의 육체를 따라 산다는 점에 있어서는 레위기가 가정하는 인간의 상태와 신약에서 가정하는 인간의 상
태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 이런 의미에서 레위기의 어떤 부분을 문자 적으로 준수하는 일은 더 이상 필요치 않지만, 그 규정의 목표 ( 거룩함 ) 는 레 위기와 신약 모두 여전히 동일하다.
거룩함으로 가는 길은 인간의 눈에는 어려운 것인데, 그 이유는 그 길에 자기중심적 본성의 파괴가 수반하기 때문이다 ( 참고, 마 7:13-14 )
9. 레위기에 대한 새로운 접근
것을 목표로 한다. 특별히 의식과 제물의 상징적 의미를 강조할 것이며, 레
위기를 새롭게 읽게 만든 ‘핫타트’와 ‘하타’, 레위기 13장에 대한 나의 독립
적인 연구의 결과도 특별히 강조할 것이다. 이 관점은 레위기를 해석할 때
일반적으로 “제의적” 범주와 “윤리적” 범주에 의존하는 레위기에 대한 현
대의 전통적 접근을 전반적으로 재고할 것을 요구한다. 나는 독자들이 이
주석에 있는 해석을 보면서 지금까지 학자들이 생각하던 것과 다소 다른
책이 등장했다는 것을 깨닫기 바란다.
상징적 의미를 설명하는 데 지면을 크게 할애했고 글의 분량이 제한되는 관계로, 다른 레위기 연구에 대한 참고 문헌 및 본문비평에 대한 해설은 최
소화했다. 그러나 통찰력 있는 독자들은 이 주석 등 여러 주석 사이의 차이
점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레위기 1:1-17

번역
1:1 여호와께서 회막에서 모세를 부르시고 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이스라엘 자 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려거든 가축 중에 서 소나 양으로 예물을 드릴지니라 3 그 예물이 소의 번제이면 흠 없는 수컷으로 회막 문에서 여호와 앞에 기쁘게 받
으시도록 드릴지니라 4 그는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할지니 그를 위하여 기쁘게 받으 심이 되어 그를 위하여 속죄가 될 것이라
5 그는 여호와 앞에서 그 수송아지를 잡을 것이요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피를
가져다가 회막 문 앞 제단 사방에 뿌릴 것이며 6 그는 또 그 번제물의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뜰 것이요 7 제사장 아론의 자손들은 제단 위에 불을 붙이고 불 위에 나무를 벌
여 놓고 8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뜬 각과 머리와 기름을 제단 위의 불 위에 있는
나무에 벌여 놓을 것이며 9 그 내장과 정강이를 물로 씻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 전부
를 제단 위에서 불살라 번제를 드릴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10 만일 그 예물이 가축 떼의 양이나 염소의 번제이면 흠 없는 수컷으로 드릴지니
11 그가 제단 북쪽 여호와 앞에서 그것을 잡을 것이요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것 의 피를 제단 사방에 뿌릴 것이며 12 그는 그것의 각을 뜨고 그것의 머리와 그것의
기름을 베어 낼 것이요 제사장은 그것을 다 제단 위의 불 위에 있는 나무 위에 벌여 놓을 것이며 13 그 내장과 그 정강이를 물로 씻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 전부를 가져다
가 제단 위에서 불살라 번제를 드릴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14 만일 여호와께 드리는 예물이 새의 번제이면 산비둘기나 집비둘기 새끼로 예물 을 드릴 것이요 15 제사장은 그것을 제단으로 가져다가 그것의 머리를 비틀어 끊고 제단 위에서 불사르고 피는 제단 곁에 흘릴 것이며 16 그것의 모이주머니와 그 더러 운 것은 제거하여 제단 동쪽 재 버리는 곳에 던지고 17 또 그 날개 자리에서 그 몸을 찢되 아주 찢지 말고 제사장이 그것을 제단 위의 불 위에 있는 나무 위에서 불살라

1:1 The LORD called Moses and spoke to him from the Tent of Meeting, saying, 2 ‘Speak to the Israelites and say to them, If a man among you offers an offering to the LORD, you must make your offering of domestic animals from the herd or from the flock.
3 ‘If his offering is a burnt offering from the herd, he must offer a male without blemish. He brings it to the entrance of the Tent of Meeting, so that he may be accepted before the LORD. 4 He lays his hand on the head of the burnt offering, so that it may be accepted on his behalf to sacrifice itself for him.
5 ‘The young bull is to be slaughtered before the LORD and the sons of Aaron, the priests, offer the blood and dash it over the altar which is at the entrance of the Tent of Meeting. 6 The burnt offering is to be flayed and chopped into pieces. 7 The sons of Aaron, the priest, light a fire on the altar, lay wood on the fire, 8 and the sons of Aaron, the priests, lay the pieces of the animal, including the head and the fat, on top of the firewood on the altar. 9 Its intestines and hind legs are to be washed in water and the priest burns the whole lot as a burnt offering, an offering for annihilation with a soothing aroma for the LORD.
10 ‘If his burnt offering comes from the flock, from either the sheep or the goats, he offers a male without blemish. 11 It is to be slaughtered on the north side of the altar before the LORD, and the sons of Aaron, the priests, dash its blood over the altar. 12 Having chopped it into pieces, the priest lays them, including the head and the fat, on top of the firewood on the altar. 13 Its intestines and hind legs are to be washed with water; the priest offers the whole lot and burns it as a burnt offering. It is an offering for annihilation with a soothing aroma for the LORD.
14 ‘If his burnt offering for the LORD is of birds, he is to offer either doves or pigeons as his offering. 15 The priest brings it to the altar, wrings its head off and burns it on the altar and lets its blood drain down the side of the altar. 16 He removes the crop with its contents and throws it on the east side of the altar into the ash pit. 17 He splits it open by the wings without tearing it apart, and the priest burns it on the altar on top of the firewood. It is a burnt offering, an offering for annihilation with a soothing aroma for the LORD.’
1절. “여호와가 불렀다”: 마소라 본문에서 “여호와”는 “그가 말씀하였 다” ( ‘바예답베르’ ) 뒤에 나온다. 시리아어 역본은 사자신명 ( Tetragrammaton ) 인 “여 호와”를 ‘바이크라’ ( “그가 부르셨다” ) 뒤에 두지만, 이것은 사마리아 오경, 70인역,
타르굼 요나단이 입증하듯 원래의 순서가 아니다.
2절. “너희 중 한 사람이” ( ‘아담-믹켐’; 개역개정 “너희 중에 누구든지” ) : ‘믹켐’은 ‘아
담’과 연결된다. 이스라엘 백성을 호칭하는 데 3인칭 ( ‘아담’ ) 과 2인칭 ( ‘믹켐’ ) 이
결합되는 것은 구약에서 독특한 일이다. 보통 ‘아담 키’나 ‘이쉬 키’나 ‘네페
쉬 키’ 뒤에는 3인칭 동사가 온다 ( ‘아담’에 대해서는 레 13:2; 민 19:14를 참고하고, ‘이쉬’에
대해서는 레 13:29; 15:16; 19:20; 20:27 등을 보고, ‘네페쉬’에 대해서는 레 2:1; 4:2; 5:17; 6:2[MT 5:21] 등
을 참고하라 ). 그러므로 “너희 가운데 아무든지 ~할 때에는” ( JPS, NRSV ), “너희
가운데 어느 하나가” ( ESV ), “너희 중 누구든지” ( REB ) 같은 번역은 정확하지 않다. 정확한 번역은 “ein Mensch von euch”라고 번역한 독일어 역본 엘버 펠더판 ( Elberfelder ) 에 반영되어 있는 것처럼, “너희 중 한 사람이”다.
“너희의 예물 ( 단수형 ) 을” ( ‘코르반켐’; 개역개정의 두 번째 “예물을” ) : 사마리아 오경과
70인역에는 “예물”이 복수형으로 되어 있지만, ‘코르반’의 복수형이 레위기
7장 38절에만 나타난다는 점을 고려하면, 마소라 본문을 선택한다.
5절. “도살될” ( ‘샤하트’; 개역개정 “잡을” ) : 희생제사 의식에서 ‘샤하트’는 주로 친교제물의 도살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는 ‘자바흐’와 구별하여 사용된다.
70인역은 3인칭 남성 단수형으로 사용된 동사 ‘샤하트’를 3인칭 남성 복수 형으로 번역하고, 1장 11절과 3장 13절에서도 그렇게 한다. 이는 아마도 ‘샤하트’의 수를 그 뒤에 나오는 동사의 수와 조화시키기 위함일 것이다.
‘샤하트’의 주어가 비인칭이기 때문에, ( 대부분의 주해학자가 보는 것과 달리 ) ‘샤하
트’가 단수형으로 사용되는 것이 도살의 주체를 헌제자로 암시하는 것일
필요는 없다. 이것은 도살하는 주체가 아론의 아들들 가운데 하나일 필요가
없는 ‘히프쉬트’ ( 1:6a ), ‘닛타흐’ ( 1:6b, 12 ), ‘라하츠’ ( 1:9, 13 ), ‘쉿사’ ( 1:17 ) 와 같은
다른 단어들에도 적용될 것이다 ( 참고, 겔 44:11 )
“어린 소” ( ‘벤 합바카르’; 개역개정 “수송아지” ) : 이 구문에서 ‘벤’은 주해적으로 아
무런 의미도 없는 것으로 해석되거나 ( Rendtorff 1985: 50 ) 소의 종류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된다 ( Péter-Contesse 1993: 43 ). ‘벤’은 나이를 가리키는 것일 가능성 이 더 높다 ( “주석”을 보라 )
7절. “제사장” ( ‘학코헨’ ) : 사마리아 오경과 70인역은 “제사장들”이라고 읽 는다. 1장 5b, 7a, 8a, 9b절에 나오는 동사의 주체와 비교해 보면, 이 이문 이 의도적임을 알 수 있다. 이는 9b절의 제사장은 아론이지만, 모든 준비는 아론의 아들들이 행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9절. “소멸을 위한 제물” ( ‘잇셰’; 개역개정 “화제” ) : ‘잇셰’가 일반적으로 “불에 의 한 제물”로 번역되기는 하지만, 실제적으로 ‘잇셰’는 불 자체와는 구별된다.
“음식 제물”도 마찬가지로 정확하지 않은데, 그 이유는 ‘잇셰’가 3장 11절 과 16절에서 ‘레헴’ ( “음식” ) 과 중첩되어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24장 7절에서 ‘잇셰’로 불리는 열 두 개의 떡덩이는 태우지 않는다. 2장
11절도 ‘잇셰’가 항상 불을 수반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에쉬’ ( “불” ) 와 ‘잇셰’ 사이의 음의 유사성은 ‘잇셰’가 불로 태우는 대상을 지 칭한다는 것을 나타내는데, 왜냐하면 ‘잇셰’는 태우는 과정의 끝에서 두 번
째 단계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멸을 위한 제물”이 제안된다.
10절. 사마리아 오경은 10절의 시작 부분을 14절처럼 만드는 반면, 70인 역은 “그리고 그는 그의 손을 그것의 머리 위에 얹는다”를 추가한다. 그러
나 소의 경우에서 언급되었던 것은 일반적으로 생략되는 경향이 있다는 점
을 고려하면, 70인역의 추가는 이차적인 것으로 보인다.
15절. 사마리아 오경은 mṣʾ를 어근으로 취하면서, 약화된 ‘헤’ 대신 ‘알레 프’를 가져옴으로써 ‘님차’ ( nimṣâ ) 를 ‘님차’ ( nimṣā᾽ ) 로 이해하는 반면, 70인 역 ( ‘스트랑기에이’ ) 과 불가타 역본 ( ‘데쿠레레 파치에트’ ) 은 능동의 의미 ( “비틀다” ) 를 취 한다. 아마도 이 능동의 의미가 의도되었을 것이다. 5장 9절을 참고하라.
형식과 구조
1장의 구조는 단순명료하다. 도입 진술 ( 1-2절 ) 에 이어 각각 “만일” ( ‘임’ ) 로 시작하고 비슷한 구성 ( “만일 그의 제물이 ~이면” ) 을 가지고 있는 번제의 세 경우
가 나온다 ( 3, 10, 14절 ). 세 경우 모두 똑같이 “소멸을 위한 제물이라, 여호와를 진정시키는 향기니라” ( 개역개정 “화제라 여호와에게 향기로운 냄새니라” ) 라는 표현으로 끝맺는다.
2절을 제외하면, 모든 규정이 3인칭으로 표현된다. 첫 번째 경우는 거의 똑같은 길이를 가진 나머지 두 경우보다 더 길다. 소의 제물을 위한 의식 순 서는 다음과 같다.
1. ‘올라’를 가져온다.
2. 손을 얹는다.
3. 동물을 죽인다.
4. 피를 뿌린다.
5. 가죽을 벗긴다.
6. 각을 뜬다.
7. 씻는다.
8. 불사른다.
이 행위의 주체는 1장과 2장에서는 헌제자이며, 4, 6, 8장에서는 아론의 아들들이다. 3, 5, 7장에서는 행위의 주체가 누구인지 불분명한데, 그 이유
는 그 구절이 3인칭 단수이며 70인역에서는 모호하게 표현되기 때문이다.
둘째 부분, 즉 작은 동물의 제물에서는 2번과 5번 행위가 생략되어 있다.
셋째 부분인 새의 제물에서는 다른 두 부분의 제물의 경우와 매우 다르게
제시되는데, 이것은 아마도 새의 크기 때문일 것이다.
레위기 규정의 일반적인 특성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둘째 범주와 셋째 범
주를 해설하는 일이 필수적이다. 둘째 부분 ( 10-13절 ) 은 양이나 염소의 번제
를 다룬다. 양이나 염소는 더 작고 더 싼 동물이다. 5-9절에 상술되어 있는
몇몇 항목은 10-13절에는 생략되어 있다. 예를 들면, “회막 문 앞” ( 11절과 5절
을 비교해서 참고하라 ) 이라는 위치와 동물의 가죽을 벗기는 것과 관련된 규정이
빠져 있다 ( 6a절을 보라 ). 반대로, 도살하는 장소가 “제단 북쪽”인 것은 5절에
서는 언급되지 않았던 새로운 특징이다. 앞에서 언급된 두 개의 생략은 어
떤 규정의 변화도 만들지 않지만, 11절에서 첨가된 “제단 북쪽”은 5절의 도
살이 제단의 북쪽에서도 발생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그렇지 않을 이유는
전혀 없어 보이며, 만일 그렇다면, 이 세부 규정이 11절에 이르기까지 생략
되어 있는 것은 의미심장할 것이다 ( “주석”을 보라 ).
셋째 부분은 2절에서 언급되지 않았던 희생 동물을 소개한다. 그러나 연속
되는 세 경우 ( 3-9, 10-13, 14-17절 ) 에서 점차적으로 작은 생물을 다루므로 ( “해설”을
보라 ), 그것을 단순히 첨가된 것 정도로 일축할 수 없다. 3-13절의 번제물과
비교해 보면, 손을 얹는 의식과 제물의 성별을 특정하는 것이 빠져 있다.
그러므로 명백한 첨가나 생략은 단순히 문체의 문제로 해석해서는 안 되 고 입법자의 목적을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올라’ ‘올라’는 일반적으로 “번제”로 번역되거나 간혹 “전번제”로 번역된
다 ( Hartley 1992: 17; Porter 1976: 18 ). 엄밀히 말하면, “온전한”의 개념은 “번제”라
는 번역어로는 표현되지 않는데, 이는 가죽을 태우지 않기 때문이다 ( 참고, 7:8 ). 더군다나 만일 저자가 온전히 태우는 제물을 의도한 것이라면 저자는
“온전히”를 의미하는 ( 6:22[MT 6:15] ) ‘칼릴’이란 용어를 사용할 수 있었다. 그
러므로 전통적인 번역에는 심각한 문제가 없다.
주석
1:1–4
1절. 1-2a절은 ‘올라’에 대한 서론일 뿐만 아니라, ‘민하’ ( 레 2장 ) 와 ‘슐라
밈’ ( 레 3장 ) 의 서론이기도 하다. 핵심 단어는 “가까이 가져오다” ( ‘히크리브’ ) 다.
일반적인 용어 ‘코르반’ ( “제물” ) 이 ‘히크리브’에서 나온 것이다. ‘히크리브’의
배후에는 인간이 자격 요건에 부합하지 않으면 여호와에게 다가갈 수 없다
는 가정이 전제되어 있다. 이것은 시내산 언약에서 명백하게 입증된다 ( 출 19:10-13 ). 레위기의 첫 장은 인간이 번제물을 가지고 여호와에게 다가가는 경우를 다룬다.
레위기의 시작 부분은 출애굽기의 마지막 부분 ( 출 40:35 ) 과 긴밀하게 관련
되어 있다. 모세는 회막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했기 때문에 회막에 들어
갈 수 없었다. 그래서 레위기 1장 1절에서 하나님은 모세를 회막에서 부른
다. 이것은 하나님이 시내산 정상에서 모세를 불렀던 것 ( 출 24:16 ) 과 평행을
이룬다 ( Knierim 1992: 6을 보라 ).
2절. “이스라엘 자손”: 이 표현은 레위기에서 53회 등장하지만, 그것이 지칭하는 범위는 각 경우마다 신중하게 판단해야 한다. 여기서는 제사장이
의식을 집행하고 있으므로 제사장은 배제되는 것처럼 보인다.
“만일 어떤 사람이” ( 개역개정 “누구든지” ) : 이 경우에 “사람” ( ‘아담’ ) 은 남자와 여자를 포괄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 예, Knierim 1992: 14-16 ).
그러나 수컷 동물이 헌제자를 대표한다는 가정을 고려하면 ( 아래의 3절에 대한 주
석을 보라 ), ‘아담’이 남성과 여성 모두를 의도했을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아 담’은 레위기에서 비교적 적게 사용되며 ‘이쉬’나 ‘네페쉬’와는 구별되어야 한다. 법적으로는 이 세 용어가 동일한 개인을 가리킬 수 있지만, 레위기에 서는 세 용어가 같은 인간의 서로 다른 세 측면을 가리킨다 ( 서론 7.1과 아래의 2:1과 4:2 “주석”을 보라 ). ‘아담’은 인간의 세속적 실존과 피조성을 나타낸다. ‘아
담’은 인간의 영적 측면 ( ‘네페쉬’ ) 이나 대인적 측면 ( ‘이쉬’ ) 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러므로 레위기 1장에 있는 번제물을 위한 규정은 인간의 세속적 실존을 온전히 여호와에게 바치는 것과 관계된다.
희생 제물에 대한 일반적인 조건이 제시된다. 희생 제물은 반드시 “가축”
이어야 한다. 야생 동물은 금지되고, 제물은 진정한 의미에서 헌제자의 “희 생”이었다.
3절. 번제물로 사용되는 소는 두 가지 자격 요건을 만족시켜야 했다. 첫
째, 소의 번제물은 수컷이어야 했다. 레위기에서 수컷 동물은 항상 암컷 동 물보다 더 큰 가치를 지녔다. 둘째, 소의 번제물은 “흠 없는” ( ‘타밈’ ) 것이어 야 했다. 이 자격 요건은 특별히 더 주목해야 할 가치가 있다. 비록 22장
17-25절이 동물은 심각한 결함 없이 정상적인 상태여야 함을 제시하긴 하 지만, 그런 동물을 찾는 일은 극히 어려웠을 것이다 ( 22:17-25 “주석”을 보라 )
헌제자가 스스로를 동물과 동일시한다는 가정 아래 ( 아래의 4절 “주석”을 보라 ),
헌제자는 상징적인 의미에서 흠이 없어야 한다. 헌제자는 그가 바치는 동물 처럼 ‘타밈’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그러나 ‘타밈’이 “흠 없는”을 의미하긴 하지만, 도덕적인 완벽함을 암시할 가능성은 없는데, 그렇게 되면 헌제자가 여호와의 진노의 대상이라고 가정하는 레위기 1장 및 헌제자가 죄를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4장 3절과 모순되기 때문이다. ‘타밈’은 헌제자의 마음의 문제일 가능성이 더 높기 때문에, “온전한 마음” 또는 “완전한 정직” ( 심지어 는 “결백” ) 이 요구된다. 노아가 그런 사람이었고, 아브라함에게도 똑같은 것이 기대되었다 ( 창 6:9; 17:1; 참고, 시 15:2; 84:11[MT 84:12]; 101:2, 6; 119:1; 잠 28:18 ). 모든 동물 희생 제물이 ‘타밈’이어야 했다는 점 ( ‘슐라밈’의 ‘타밈’은 3:1, 6; ‘핫타트’
의 ‘타밈’은 4:3, 23, 28, 32; ‘아샴’의 ‘타밈’은 5:15, 18; 6:6[MT 5:25]을 보라 ) 과 이들 제물이 “거 룩하다” 일컬어졌다는 점을 고려하면, ‘타밈’인 것이 거룩함의 본질 가운데
일부를 구성할 가능성이 있다 ( “해설”을 보라 ).
3b절은 제물을 바치는 위치를 특정해서 회막 입구를 향하도록 하는데, 회막 입구는 아마도 제단 북쪽에 있었을 것이다 ( 참고, 1:11 ).
“그가 받으시도록” ( ‘리르초노’; 개역개정 “기쁘게 받으시도록” ) 은 헌제자가 의식을 행하는 목적을 요약한다. ‘라촌’은 “호의”를 의미하고, ‘리르초노’같이 구를 이룰 때는 헌제자가 하나님의 호의에 의해 받아들여지는 것을 묘사한다 ( 참 고, 22:19. 또한 19:5; 22:29; 23:11을 보라 ). 그뿐 아니라 이 목적구는 헌제자가 이전에
는 하나님으로 하여금 불쾌감을 느끼게 하는 대상이었음을 암시한다. 4절. 손을 얹는 의식의 의미에 대한 폭넓은 논의가 있었으며 ( Rodriguez 1979: 193–208을 보라 ), 대표적인 제안은 다음과 같다. (1) 제물로 바치는 동물과 헌 제자를 동일시하는 것, (2) 대체의 개념을 표현하는 것, (3) 제물로 바치는 동물이 헌제자의 소유임을 표현하는 것. 헌제자의 손을 얹는 동작에 반영된
일차적인 관심사가 특정한 죄나 죄책 같은 헌제자의 내부적인 무언가라고
추정하기는 어렵지만 ( 레 4장 속죄제의 경우와 비교하라 ), 희생 제물로 바치는 동물이 헌제자의 소유로 여겨진다는 것 역시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 ( 제물로 바치는 동물
이 헌제자의 소유란 것은 “가축 중에서” 드리라는 것에서 이미 가정되어 있다 ). 오히려, ‘아담’ ( “사 람” ) 이란 단어가 나타내는 바와 같이 손을 얹는 동작은 헌제자의 전 존재를 여호와 앞에 바치는 것을 표현한다. 이 개념은 앞에서 설명한 ‘라촌’을 통해
이미 표현되었다 ( 3b절 ). 레위기에서 ‘라촌’이 나타나는 다른 관련 본문 역시
이 견해를 뒷받침한다 ( 22:20, 29를 보라 ). 그렇게 되면 손을 얹는 동작은 최소한
제물로 바치는 동물을 헌제자와 동일시한다는 개념을 표현하는 것이다. 즉, “이것은 제 자신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번제물의 머리에”: 동물의 머리 위에 손을 얹는다 ( ‘사마크 야드’; 레 1:4; 3:2, 8, 13; 4:4, 15, 24, 29, 33; 8:14; 16:21 ). 육체의 이 중요한 부위에 손을 얹음으로써 헌제 자는 동물의 전 존재가 상징하는 것과 자신을 동일시하게 될 것이다 ( 참고, 창 3:15 ). ‘하올라’는 제물로 바치는 동물을 가리키지만, 그 동물의 번제물로서 의 목적을 강조한다. ‘하올라’가 9b절에서 다시 언급되기 때문에, ‘아담’ 헌
제자는 자신을 완전한 소멸을 향해 바치는 것이다.
손을 얹는 동작에 이어 ‘니르차’가 나온다는 점으로 볼 때 ( 4b절 ), ‘니르차’
는 3b절에 있는 ‘라촌’ 개념의 구체적인 표현일 것이다.
“그를 위하여 그것 스스로를 희생하도록” ( ‘르캅페르 알라이브’; 개역개정 “그를 위하
여 속죄가 될 것이라” ) : 히브리어 ‘킵페르’는 4-5장의 속죄 희생제사와 관련되어
자주 나타난다 ( 4:20, 26, 31, 35; 5:6, 10, 13, 16, 18; 6:7[MT 5:26] 등 ). 번제물만 다루는 본
문에서 ‘킵페르’가 번제물과 관련되어 사용되는 경우는 구약에서 이곳이 유 일하다 ( “해설”을 보라 ). 그뿐 아니라 레위기 1장 4절은 ‘킵페르’의 주체가 동물 이라는 점에서 독특하다. 이것은 헌제자가 번제물 자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
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이며, 손을 얹는 의식의 해석에 대한 앞선 주장을 뒷 받침한다. 결국 이것은 번제 의식 규정에서 ‘킵페르’의 독특한 위치 ( 도살하기 전 ) 를 설명해 준다. 다른 곳에서 ‘킵페르’는 규정의 마지막 부분에 나온다. 사람이 아닌 물체가 ‘킵페르’의 주체인 경우에 대해서는 출애굽기 30장 15절 ( 속전 ), 레위기 16장 10절 ( 아사셀 염소 ), 17장 11절 ( 피 ) 을 보라. ‘킵페르’ 개념은 레위기에 나오는 제의들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 매우 중요하다. 그렇지만 ‘킵페르’ 개념은 오랜 세월 동안 주석가들을 좌절에 빠뜨
려 왔다. 다른 곳에서 주장했던 것처럼 ( Kiuchi 2005: 56을 보라 ), ‘킵페르’가 명사 ‘코페르’ ( “속죄금, 속전”; 참고, 출 21:30; 민 35:31-32 ) 에서 유래했다고 추정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것처럼 보인다 ( Sklar 2001을 보라 ). 그뿐 아니라, 주해학자들이 ‘킵페르’의 의미를 각 제물의 기능, 즉 문맥과 관련시켜서 결정짓는 경향이 있지만, ‘킵페르’는 각 희생제사 의식에서 동일하게 일반적인 의미로 되풀 이되는 것으로 보인다. ‘킵페르’가 ‘핫타트’의 문맥에서 “오염을 제거하다”
라는 의미를 갖는다는 일반적인 가정을 우선한다면, ‘킵페르’는 “속전을 지 불하는” 개념이나 “배상하는” 개념과 관련될 가능성이 더 높다. 더 나아가
‘킵페르’의 용례에 대한 연구는 ‘킵페르’의 의미에 대한 해석이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개념을 고려해서 이루어져야 함을 나타낸다. 이와 같은 관점에 근거하면, “속죄 배상”과 “속죄”에 대한 논의는 불필요하다. 이 주석에서는
‘킵페르’를 “자신을 ( 그것 스스로를 ) 희생하다” 또는 “속죄를 이루다”로 번역한
다 ( 서론의 7.5를 보라 ). ‘킵페르’ 앞에서 사용된 전치사 ‘라메드’는 목적을 나타내는 데 사용되었 으며, 따라서 “~하기 위해서”로 해석해야 한다. 그럼에도 ‘킵페르’는 이어
지는 의식 행위나 선행되는 동물 헌납 및 안수 의식과 관련되는가? 레위기 17장 11절을 고려하면, 1장 5절의 피 뿌림 없이는 ‘킵페르’가 성취될 수 없 으므로, ‘킵페르’ 이전 ( 2-4a절 ) 의 절차를 ‘킵페르’의 선행 조건으로 해석하고 5-9절을 ‘킵페르’의 실제적인 절차를 말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비록 4절의 ‘킵페르’가 오직 5절의 피 뿌림으로만 효력을 발한다는 것이 미리 가정되어 있지만, 4장 31절에 근거하면, 1장 9절에 언급된 “진정 시키는 향기” ( 개역개정 “향기롭게” ) 도 ‘킵페르’ 개념의 일부라고 보는 것이 가능 해 보인다 ( Kiuchi 2005: 52–58과 아래의 “해설”을 보라 ).
헌제자에게 요구되는 일, 즉 흠 없는 수컷 동물을 바치고 그 동물의 머리 에 자기 손을 얹는 일을 통해, 헌제자는 제사 의식에서 자신이 해야 할 역할 을 완수한다.
1:5-13
5절. 예를 들면 레위인과 같은 헌제자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 제물로 바치
는 동물을 죽였을 가능성이 있다 ( 아래의 11절도 보라 ). 그 후에 제사장이 그 동물 의 피를 다룬다.
이 동물은 추가적으로 “어린 소”로 특정된다. 그러므로 헌제자는 자신을 어린 소와 동일시하는 동시에 부모/자식의 정서적인 고통에 동질감을 갖게 된다. 이 고통은 아브라함이 자기 외아들을 번제물로 바치기 위해 준비했을 때 느꼈던 고통과 유사하다.
제물로 바치는 동물의 피의 역할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없지만, 17장
11절의 내용을 토대로 추정할 수 있는 것은 흘린 피가 생명을 준다는 것이 다. 번제뿐 아니라 레위기의 모든 희생제사 의식에서도 이 “생명”의 본질은
즉각적으로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더 넓은 문맥에서 보자면, 치유된
나병 환자를 위한 의식의 경우 ( 14:13, 19-20 ) 가 이해를 도울 수 있다. 번제물은
나병환자의 육체적 치유를 위해 바치는 것이 아니라 ( 그는 이미 치유받았다 ), 나병
환자와 여호와의 깨진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바쳐진다. 이 기능은 레위기
1장에서는 명시적으로 나타나지 않는데, 이것은 아마도 동물을 연기 가운 데 태워서 진정시키는 향기를 일으키는 것에 대한 입법자의 집중적인 관심
을 반영할 것이다.
“제단” ( ‘미즈베아흐’ ) : 희생제사 동물은 뜰 안 제단에서 도살되었다 ( 참고, Hawk 2003: 35–36 ). 이어지는 장들에서 상술하겠지만, 제단은 제사자가 여호와를
만나는 장소다 ( 출 29:43 ). 제사자와 제단 상태의 평행은 의식 규정 전체에 걸
쳐 발견된다. 그러므로 제단을 정화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 ( 16:19, 30 ) 및 제 사장이 될 자들 ( 8:15 ) 을 정화하는 것과 상응한다. 제단은 그 앞에 서 있는 제
사자와 상응한다 ( 4:7 “주석”도 보라 ). 이것은 피의 절반을 백성에게 뿌렸던 출애
굽기 24장 5-8절의 시내산 언약이 제도적으로 발전한 것이다.
6-9절. 제물로 바친 동물을 태우기 전에 제사장은 가죽을 벗기고 몸을 각
뜬다. 몸 전체가 불살라진다는 점을 고려하면, 머리와 내장 같은 몸의 부위
를 언급하는 것은 불필요해 보인다.
머리와 기름을 포함해서 제물을 제단 위에서 불태우는 마지막 행위는 헌
제자의 세속적 가치를 소멸시키는 것을 상징하며 ( 참고, 창 37:23; 겔 16:39; 23:26; 호
2:3[MT 2:5]; 미 3:3 ), 그와 동시에 여호와를 진정시키는 향기로 기능한다. 여호 와가 헌제자의 마음에 있는 것을 혐오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것이 바로
제물이 불로 완전히 소멸되는 것이 여호와를 기쁘게 하는 이유다. 상징적으 로 그것은 헌제자에게 고통을 주지 않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영적인 의미에 서 그가 죽은 이후에 발생하기 때문이다.
“소멸을 위한 제물” ( ‘잇셰’; 개역개정 “화제” ) : 이 번역에 대해서는 9절 “본문 해 설”을 보라.
번제물의 결정적인 특징은 그것이 ( 가죽을 제외하고; 7:8을 보라 ) 불에 의해 완전 히 파멸되어 여호와를 진정시키는 향기가 된다는 것이다 ( 참고, 창 8:21; 레 26:31 ). 그러므로 번제에 피 뿌림이 포함되기는 하지만, 피 뿌림은 제물 전체가 태
워져 여호와를 “진정시키는 향기” ( 개역개정 “향기로운 냄새” ) 로 바뀌는 데서 절정
에 이르는 번제 의식의 첫 단계를 시작할 뿐이다. ‘레아흐 니호아흐’ ( “진정시키
는 향기” ) 가 다른 구약 본문에서 명사 ‘라촌’이나 동사 rṣh의 칼형/니팔형과
자주 관련된다는 사실 ( 레 26:31, 34; 겔 20:40–41; 암 5:21–22 ) 역시 4절의 ‘킵페르’가
이어지는 모든 의식 행위의 상징적 의미를 나타낸다는 해석을 뒷받침한다. 10-11절. 소의 경우가 그랬던 것처럼, 번제물로 바치는 양과 염소는 흠 없
는 수컷이어야 한다. 제물로 바친 양과 염소는 “제단 북쪽”에서 도살된다.
만일 “제단 북쪽”이란 위치에 상징적 의미가 의도되었다면, 그것은 아마도
북쪽이 사람이 동쪽을 향했을 때 왼쪽에 있는 것과 관련될 것이다. 만일 그
렇다면, 비교적 작은 반추 동물을 도살하는 것은 그 동물의 무력함을 상징 할 텐데, 왜냐하면 구약에서 누군가의 왼쪽은 때때로 패배를 나타내기 때문
이다 ( 참고, 렘 1:14; 4:6; 겔 1:4; 9:2; Porter 1976: 23도 보라 ). 12절. “제사장”은 아마도 아론일 것이다 ( 12절 “본문 해설”을 보라 ). 이 경우에는
아론이 각 뜬 부분을 배열해 놓는데, 이것은 어린 소의 번제에서 했던 것보
다 이른 단계에 발생한다 ( 참고, 1:8 ). 소의 희생제사는 아론의 아들들이 집행 하는 반면, 양과 염소의 희생제사는 아론과 관계되는데, 이는 아마도 양과 염소의 작은 크기를 상쇄하기 위함일 것이다.
13절. 13절 상반절은 사실상 9a절과 동일하지만, 10절 이후로 언급되지 않았던 동사 ‘히크리브’ ( “가까이 가져가다” ) 가 13절 하반절에 나온다. 달리 말하 면, 3절에서 헌제자의 행동으로 두 번 나타나는 ‘히크리브’가 이 부분의 시 작 ( 10절 ) 과 끝 ( 13절 ) 에 나온다. 이것에 대해서는 문체적인 이유를 근거로 설 명하기보다 동물을 여호와에게 가까이 가져가는 사람이 제사장, 즉 아론이 기 때문에 헌제자가 제사장인 아론의 도움을 받는다고 제시하는 편이 더 낫다.
1:14-17
14절. 번제물로 바치는 새는 산비둘기나 집비둘기 새끼여야 한다. 어린 소의 경우처럼 ( 5절 “주석”을 보라 ), 작은 비둘기나 어린 비둘기 ( 참고, Ahitub 1982: 468–469 ) 는 그것을 부모에게서 떼어 놓는 것에 대한 헌제자의 감정 이입을 상징할 뿐 아니라, 헌제자가 자신을 비둘기와 동일시하는 것을 상징한다. 새의 번제는 큰 동물의 희생제사 절차를 따른다. 새를 바치는 주체가 사 람 ( ‘아담’; 1:2 ) 이라는 가정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므로 새의 번제는 작은 새를 바치는 사람을 번제물로 보면서, 그 사람의 모든 세속적 욕구의 파멸을 상 징한다. 이 의식의 결과인 진정시키는 향기 역시 이전 경우와 동일하다 ( 1:9,
13을 보라 ). 이 목적의 성취가 제물로 바치는 동물의 크기보다 우선한다는 점
이 주목할 만하다.
비둘기는 레위기에서 정화의 문맥에서도 사용되는 정결한 새다. 새의 번
제에서는 헌제자의 경제적 상황이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에, 다양한 종류의
정결한 새 가운데서 왜 비둘기가 선택되었는지는 설명이 필요하다. 산비둘
기나 집비둘기가 가진 순결함이나 메시지를 전해 주는 것 ( 예, 전령 비둘기 ) 같
은 특징이 ‘아담’이 자신의 모든 세속적 욕구를 버린다는 개념을 반영한다.
바꿔 말하면, 비둘기는 ‘타밈’의 특성을 상징한다. 노아는 홍수가 멈추었는
지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세 번에 걸쳐 비둘기를 놓아 준다 ( 창 8:8, 10, 12 ). 더
나아가 창세기 저자는 “쉴 곳” ( ‘마노아흐’; 개역개정 “발 붙일 곳” ) 을 ‘타밈’인 노아 ( 창 6:9 ) 의 이름과 연관시킴으로써 언어유희를 만들어 낸다. 창세기 15장의 불 가사의한 언약 의식에서도 비둘기들은 아마도 여호와의 보호의 임재를 상 징함으로써 중요한 역할을 감당한다. 그러므로 이 상징적 의미는 헌제자에 게 비둘기같이 되어 세상에서 완전히 자유하게 될 것이 기대된다는 점을
나타내는 것처럼 보인다. 특히, 비둘기의 상대적으로 작은 크기는 이전의 동물 희생 제물의 경우보다 더 많이 헌제자와 여호와의 관계에 있는 보이
지 않는 측면을 주목하게 만든다 ( 참고, 2:2의 “한 움큼” ). 이런 식으로 생각해 보 면, 인간의 영혼 ( ‘네페쉬’; 2:1 “주석”을 보라 ) 이 ‘민하’ 제사의 주체로 규정되는 레
위기 2장이 1장에 이어 나오는 것은 자연스럽다.
15절. 새를 바치는 번제 의식의 본질과 관련된 내용 이후에, 새의 번제에 대한 실제적인 절차가 규정된다 ( 16-17절 ). 새를 “바치는” 자는 아마도 아론일
것이다 ( 위의 12절 “주석”을 보라 ). 번제물인 새의 작은 크기를 상쇄하기 위해 아론
이 새의 번제를 수행한다는 점이 훨씬 중요하다. 3-13절의 번제와 비교해
보면 이곳에서는 손을 얹는 의식과 제물의 성별을 특정 짓는 것이 빠져 있
다 ( “형식과 구조”를 보라 ).
머리를 “비틀어 끊는 것” ( ‘말라크’ ) 은 이곳과 5장 8절에서만 나온다. 이 구
절 및 이어지는 구절을 고려할 때는 새의 크기가 작고 피의 양이 적은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의 피는 새 전체가 불에 태워지
기 전에 제단 벽에 흘려진다.
16절. 새의 내장은 제물로 요구되지 않으며, 제사장은 내장을 제거해서
제단 동쪽의 재 버리는 곳에 던진다. 이곳의 규정은 다른 희생 제물의 재가
그곳에 던져진다는 사실을 말해 줄 뿐만 아니라 새의 경우가 갖는 중요성
을 강화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성막과 관련해서 “동쪽”은 처음 방향이고 ( 참
고 민 2:3; Ashley 1993: 71; Drinkard 1992 ), 그런 점에서 “동쪽”에 대한 언급은 성막
전체가 에덴동산의 대응물로 여겨진다는 점을 제시하는 것일 수 있기 때문
이다 ( 창 3:24를 보고, 레 16:14 “주석”도 보라 )
17절. 잘라서 조각냈던 다른 동물의 희생제사와 대조되게 ( 참고, 1:6, 12; 창
15:10도 보라 ), 새는 절단 없이 찢어서 그 모양을 보존한다. 특히, 해체하는 행
위 ( ‘야브딜’ ) 와 관련해서 머리를 강조하는 5장 8절의 경우와는 달리 이곳에서
는 새의 날개가 강조된다는 점도 새가 ( 이 세상을 상징하는 ) 저주받은 땅을 떠나
는 개념이 존재한다는 입장을 뒷받침한다. 태우는 것이 헌제자의 세속적 욕
구의 소멸을 상징한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절단 없이 찢는 것은 새를 바치
는 헌제자가 소멸되는 것과 갖는 관련성이 작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새 번제의 최종적인 결과는 반추동물 번제의 결과와 동일하다. 새의 번제
는 “여호와를 진정시키는 향기”를 만든다.
해설
성막 건축 및 성막 집기류의 제작을 완료한 후에 여호와는 다섯 가지 주
요 제사와 관련된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하게 하기 위해 모세를 부
른다. 다섯 가지 주요 제사 가운데 처음은 번제다. 번제는 개념적이고 절차
적인 면 모두 나머지 제사의 기초가 되는 양식을 형성한다.
번제의 기능은 ‘아담’, rṣh, ‘킵페르’, ‘레아흐 니호아흐’ 같은 주요 용어나
어구에서 추론할 수 있다. 번제의 주요 메시지는 사람이 여호와 앞에서 완
전하게 굴복하고 자기중심적 본성을 드러내지 않으면 여호와에게 받아들여 질 수 없다는 것이다.
번제의 의미
번제 규정은 헌제자가 번제물을 바침으로써 요구하는 바가 자신이 여호
와에게 받아들여지는 것이라고 가정하며, 이는 더 나아가 헌제자가 여호와 의 진노의 대상이라는 점을 암시한다. 이것은 “그래서 그가 받아들여지도
록” ( 1:3b; 개역개정 “기쁘게 받으시도록” ) , “그를 위하여 그것 스스로를 희생하도
록” ( 1:4b; 개역개정 “그를 위하여 속죄가 될 것이라” ), “진정시키는 향기” ( 1:9b; 개역개정 “향기
로운 냄새” ) 같은 표현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다른 곳에서 주장했던 것처
럼 ( Kiuchi 2005: 53–55. 또한 서론 7.5도 보라 ), ‘킵페르’의 의미는 레위기 전체에 걸쳐
동일하며, “진정 ( 속죄 ) 을 위해 자기 ( 그것 ) 스스로를 희생하다”라는 의미다. 반
복되는 “진정시키는 향기”라는 표현이 진정의 마지막 단계를 나타내지만, 여호와의 진노의 더 심각한 측면은 레위기 4-5장의 속죄 배상 제사를 통해
다뤄진다.
제물이 좁은 의미로는 예물일 뿐 아니라 제사자를 상징하기도 한다는 점
은 다음과 같은 사항을 통해 나타난다. (1) 손을 얹는 의식은 아마도 동일
화의 개념 그리고/또는 대체의 개념을 상징할 것이다. (2) 제물에게 요구되
는 중요한 선행 조건 가운데 하나인 ‘타밈’은 상징적으로 온전한 마음을 의
미한다 ( 아래를 보라 ). (3) 번제물을 바치는 주체는 ‘아담’으로 특정되는데, ‘아
담’은 ‘네페쉬’와 구별되며 ( 2:1 “주석”을 보라 ) 타락 후 인간의 죄악 된 세속적 실 존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번제의 규정은 헌제자의 동기가 무엇이든 간에 그 가 여호와에게 자신을 받아 줄 것을 요구함을 암시한다.
어찌 됐든, 헌제자의 동기는 번제 의식의 전체 목적을 고려해서 해석해야 한다. 번제물은 헌제자의 일반적인 죄악에 대한 여호와의 진노를 진정시키 기 위해 헌제자를 대신한다. 그러므로 번제의 목적이 종종 자기 헌신의 개
념과 관련되지만, 그 본질은 사람의 죄 많고 세속적인 욕구의 죽음 ( 이 세상을
버리는 것 ) 에 있다.
번제를 드리는 경우
다른 제사와 마찬가지로 헌제자는 반드시 자신의 제사에 대한 주관적인
동기 ( 원인 ) 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구약에서 번제가 발생하는 다른 경우를
봤을 때, 번제는 감사를 표현했을 뿐 아니라 여호와의 진노를 누그러뜨리는 역할을 했던 것이 분명하다. 이 자료가 제시하는 경우의 다양성은 하나님의
진노가 헌제자의 기쁨과 조화를 이루는 일이 분명히 어렵다는 것을 나타낸 다. 그러나 이런 구분은 잘못된 것이다.
레위기를 보면 번제는 정화 ( 12:6; 14:13; 15:15 ), 제사장 후보자의 위임 ( 8:18-21 ), 여덟째 날 제사 ( 9:2-3 ), 속죄일 ( 16:5-6 ) 의 다양한 상황에서 드려진다. 레위기
7장과 22장에서 우리는 번제가 서원을 하거나 감사를 표현하는 경우에 드
려진다는 것을 배운다. 또한 번제의 연기를 진정시키는 향기로 묘사하는 것
역시 속죄제 의식에 포함된다 ( 4:31을 보라 )
제물이나 제사자의 동기는 바뀌어도 요구되는 것이 여전히 동일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뿐 아니라, 앞서 언급했듯이, 번제는 여호와의 진노를 진
정시키는 마지막 단계를 다룬다. 분명히 주석가들은 번제의 상징적 의미에
반영되어 있는 헌제자를 향한 여호와의 요구를 보지 못했다. 이스라엘 백성
은 번제물을 바칠 이유가 전혀 없을 때 여호와에게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
니다. 오히려 헌제자가 받아들여지기 전에 헌제자의 모든 세속적 욕구가 소
멸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헌제자가 다른 때에는 더 격한 여호와의 진노 아
래 있음을 제시한다. 이 긴장은 제사장이 매일 번제를 드림으로써 완화된
다 ( 출 29:38-39 ). 그러나 만일 이 번제가 사람들의 마음에서 구현되지 않는다
면, 그것은 효과가 없다. 이것은 11장부터 시작되는 정결함/부정함의 규례
를 통해 더 분명히 입증된다.
그러므로 만일 이스라엘 백성이 서원을 하거나 감사를 드리는 특별한 경
우 ( 참고, 22:18 ) 가 아니면 인간은 여호와의 진노의 대상으로 남게 된다는 점이
암시된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 사실을, 특히 그들이 번제를 드릴 때, 얼마나
인정하고 있었는지는 레위기 1장에 대한 주해를 뛰어넘는 문제다. 그러나 이 기본적인 전제를 인정하는 것은 물론 레위기 희생제사 의식의 모든 규 정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다 ( 서론 7.5를 보라 ).
제물로 바치는 동물 종류의 선택
제물로 가축을 바칠지 아니면 새를 바칠지는 헌제자가 결정하지만, 1장
의 본문은 헌제자의 경제 상태를 언급하는 5장 7-13절과 달리 헌제자의 경
제 상태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새를 바치든 아니면 다른 가축 가운
데 하나를 바치든 번제는 유효하다. 여호와가 보기에는 새가 헌제자를 상징 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예를 들어, 부유한 사람은 소를 바칠 것이 기대되지만 그렇게 하지 않을 수도 있다. 사실상 가난한 사람이 소를 바칠 수도 있다. 특정 동물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은 오히려 헌제자의 마음 상태를 강조한다 ( 참고, 막 12:42//눅 21:2 ).
하지만 헌제자가 동물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은 독자로 하여금 번제물 로 바치는 동물이 헌제자의 마음을 반영했을 가능성을 보게 한다. 소는 값 비싼 희생 동물이었고, 일반적으로 사람의 부를 나타냈다. 만일 헌제자가
자신의 세속적 욕구를 자신의 물질적 소유에 두었다면, 당연히 소를 바쳤을 것이다. 양과 염소 같은 동물은 소보다 작은 동물이지만, 그렇다고 그것들
이 열등한 희생 제물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양이나 염소가 목자의 관 리를 요하는 힘없고 약한 동물을 상징하기는 하지만, 영적으로는 그들이 상 징하는 연약함이 소가 상징하는 세속적인 부귀에 대한 연약함보다 상대적
으로 더 낫다. 그러므로 헌제자가 자신을 양이나 염소로 바칠 때, 그는 자기
스스로 힘없는 피조물로 여호와에게 드리는 것이었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
은 더 영적인 것이고, 죄악 된 인간의 힘의 소멸을 상징하는 번제의 목적에
있는 그대로 더 가깝게 나아가는 것이다. 집비둘기와 산비둘기는 번제로 바
칠 수 있는 세 종류의 동물 가운데 가장 작은 것이지만, 비둘기가 인간의 메
시지를 전한다는 점에서는 투명성을 상징하고 또한 세속적인 것에서의 탈
피도 상징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어떤 의미에서는 비둘기가 가장 바람직한
번제물이다. 산비둘기나 집비둘기를 번제물로 바치는 자들은 그들이 가진
욕망의 물질적 측면의 소멸에는 관심이 적었다.
번제물-거룩함의 본질
레위기 어디에서도 번제물을 “가장 ( 개역개정 “지극히” ) 거룩한 것” ( ‘코데쉬 코다 쉼’ ) 이라 칭하지 않는다 ( 참고, 2:3, 6:17[MT 6:10], 충성제물; 6:25[MT 6:18], 속죄제물; 7:1, 배상제
물 ). 친교제물의 경우 ( 22:2-4, 6-7 등 ) 처럼 “거룩한” ( ‘코데쉬’ ) 제물로 불리지도 않는다. 왜 번제물은 그렇게 불리지 않는가? 분명히 다른 학자들은 이 질문
을 다루지 않는다. 세 가지 근본적인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첫째, ‘코데쉬
코다쉼’은 항상 제물의 먹을 수 있는 부분이 언급될 때, 따라서 가시적인 부
분이 언급될 때 나타난다. 둘째, 번제에서는 헌제자와 제사장을 위해 남기
는 것이 전혀 없다. 셋째, 다른 종류의 제물 역시 여호와에게 온전히 바쳐진
다. 이와 같은 관찰 결과는 번제물이 “가장 거룩한 것”의 본질을 보여 준다
는 것을 암시한다. 즉, 번제물은 완전히 타서 재가 된다. 그러나 어째서 번
제물만 가장 거룩한 것으로 묘사되지 않는가? 번제물은 불에 완전히 소멸 되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제물의 남은 부분을 만지지 말라고 경고할 이유가 없었다. ‘민하’, ‘핫타트’, ‘아샴’은 일부가 남기 때문에 헌제자에게
제물의 남은 부분이 지닌 거룩한 본질에 대해 경고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는
데, 이는 제물의 남은 부분이 여호와에게 온전히 바쳐야 했던, 즉 소멸해야 했던 것을 대표하기 때문이다. 이 남은 부분은 제사장 또는 일반 백성 개인
이 먹었다. 따라서 ‘민하’, ‘핫타트’, ‘아샴’을 “가장 거룩한” 것으로 언급하
는 것은 단순히 이스라엘 백성에게 제물의 남은 부분이 극도로 조심스럽게
다뤄져야 함을 경고하는 기능을 갖는 것일 뿐이다. 이것은 결코 이 제물들
이 번제물보다 더 거룩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따라서 거룩함의 본질은 명 시적으로 “거룩한” 것이라 불린 적이 없는 번제물에 의해 표현된다.
그렇다면 거룩함의 본질은 이 세상 것들에 대한 욕망을 버리는 데 있다.
다른 말로 하면, 거룩함은 본질적으로 인간 마음의 문제다. 또한 성막과 그곳
에서 사용하는 모든 집기들처럼 여호와에게 완전히 바쳐진 것이 “거룩한” 것으로 일컬어질 때는 “거룩한”이란 칭호가 이 세상과 얽혀 있는 인간 본
성, 즉 자기중심적 본성과 대조된다 ( 서론 7.4를 보라 ).
이제 번제물의 거룩함은 헌제자 역시 거룩해야 함을 암묵적으로 요구한 다. 다시 말해서, 번제의 상징적 차원은 제물이 단순히 외향적인 요구 사항
을 충족시켜서 자격을 갖추게 된다는 일반적인 가정을 약화시킨다. 제물로
바치는 동물이 거룩해야 하는 것처럼, 헌제자도 거룩해야 한다. 그리고 헌
제자의 거룩한 본성은 무엇보다도 온전한 마음과 기꺼이 모든 세속적인 욕 망을 버리고자 하는 의지로 구성된다. 이것은 헌제자가 거룩하지 않으면 ( 이
조건을 충족시키지 않으면 ) 여호와가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 헌제자가 번제를 드릴 자격을 얻지 못한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사람이
온전한 마음을 가질 수 있거나 완전히 신실할 수 있는지는 의문인데, 특히
이런 마음 상태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오래 지속된다는 의미에서 보면
더욱 그렇다. 거룩함이 본질적으로 윤리적 개념이라는 점은 레위기 19장을
다룰 때 논의할 것이다.
번제물의 본질은 노아와 아브라함을 통해 잘 묘사된다. 노아는 마음이 온
전했고 ( 창 6:9 ) 홍수 후에 번제를 드렸다 ( 창 8:20 ). 노아가 번제물을 바칠 수 있
었던 것은 그의 마음이 여호와 앞에 온전했기 때문이다. 창세기 17장 1절에
서 아브라함은 “마음이 온전하라”라는 말씀을 받지만, 이것은 그런 행동을
그 순간부터 시작하라는 명령이 아니다. 아브라함이 이미 여호와를 믿었다
는 사실 ( 창 15:6 ) 은 그의 마음이 온전했음을 보여 준다. 온전한 마음은 아브 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을 바칠 각오를 하는 데 있어 중요한 전제 조건이다.
따라서 노아와 아브라함의 인격에는 희생 제물의 특징이 분명히 나타난다.
실제로 그들의 온전한 삶은 번제물의 본질을 구현했다.
많은 주해학자들이 노아가 홍수 후에 번제물을 바쳤던 동기가 노아가 여 호와에게 받아들여져서 다른 피조물들과 함께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고 암묵적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노아의 번제물은 그가 이 땅의 그 무엇도 바라지 않음을 상징했다. 이와 비슷하게 아브라함은 여호와에게 자 손의 복을 받은 후에 그의 독자를 번제물로 바치라는 말씀을 받았다. 이삭 을 번제물로 바치라는 여호와의 명령은 아버지와 아들 모두에게 이 세상의 소망을 버리도록 요구했다. 따라서 이 두 인물의 온전한 마음은 그들이 이 세상의 모든 소망을 잃을 것을 각오한다는 점에서 표현된다.
다시 말하면, 사람이 여호와에게 받아들여지려면 그/그녀가 이생의 모든
소망을 잃고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의 마음 상태가 이와 같을 때, 그/그녀는 희생 제물의 값을 상관하지 않게 된다.
그러나 일부 시편에는 자기 헌신의 수준에도 정도차가 존재한다는 개념
이 반영되어 있고 ( 참고, Greenberg 1976 ), 그것은 시편 51편 17-19절에서 절정 에 이른다. 시편 기자의 마음과 영혼이 부서진 후에야 그의 번제가 받아들
여졌다 ( 시 51:19 ).
신약과의 관계
신약에서 예수가 십자가에서 행한 사역은 진정시키는 향기를 본질로 하
는 번제물의 성격을 지닌다 ( 엡 5:2 ). 이 궁극적 희생 제물의 등장으로 신자도
여호와에게 바치는 제물이 되라는 권고를 받는다 ( 롬 12:1 ). 로마서 12장 1절에 서 신자들은 자기 몸을 “살아 있는, 받아들일 만한, 거룩한 희생 제물” ( 개역개
정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 ) 로 드리라고 권고 받는다. 번제물은 이 세 가지 요건
을 탁월하게 나타낸다. 그러나 구약의 번제물과 로마서 12장 1절의 그리스
도인 희생 제물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레위기 1장에서는 여전히 동
물과 희생 사이에 외형적인 간극이 있지만 그리스도인 신자에게는 희생 그
자체가 되라는 권고가 나온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번제물이 되라는 기대는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에게 훨씬 크게 강요된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이것
은 이 세상에 대한 신자의 소망이 소멸할 것을 전제로 한다. 사도 바울도 신 자의 생활양식을 묘사하면서 희생제사의 비유를 사용한다. 무엇보다 신자
는 ‘아모모스’ ( “흠 없는” ) 여야 한다. ‘아모모스’란 단어는 이전에 윤리적인 완 벽함을 지칭하는 데 사용되지만, 위에 제시된 것처럼 사용해야 한다. ‘아모 모스’는 신자들의 마음 상태를 나타낸다. ‘아모모스’는 여호와의 계명을 가
능한 한 많이 지키려 노력하는 데 있지 않고, 여호와 앞에 마음을 드러내는 것과 완전히 정직하게 되는 것에 있다. 이것이 없다면 어떤 경건한 노력도 위선이다. 마지막으로, 에베소서 5장 27절과 골로새서 1장 22절에서 ‘아모 모스’가 ‘하기오스’ ( “거룩한” ) 와 함께 나온다는 점도 언급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레위기 1장은 헌제자의 마음이 온전해야 함을 제시하지만, 인간의 자기중심적 본성을 고려하지 않고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린다고 말할 수 없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이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통해 분명 해진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에 제자들은 자신들이 모든 것을 버린 줄로 알고 있었지만 ( 참고, 마 26:31-46, 69-75 ), 십자가를 향한 예수님의 길
은 제자들의 결정이 그들의 자기중심적 본성으로만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드러냈다. 사람들이 여호와에게 바치는 희생제사에 대해 남의 시선을 의식 하게 되면, 그들은 필연적으로 그 일의 공을 스스로에게 돌리게 되며, 이는 그들의 전 인격을 바치는 데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스스로를 여호와에게
번제물로 바치려면, 그들의 온전한 마음은 무의식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