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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보기] 전도서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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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POLLOS O LD T ESTAMENT

전도서·아가

ⓒby Daniel C. Fredericks and Daniel J. Estes 2010

All rights reserved. This translation of Ecclesiastes and the Song of Songs (Apollos Old Testament Commentary) first published in 2010 is published by arrangement with InterVarsity Press, Nottingham, United Kingdom

Licensed arranged through rMaeng2, Seoul, Republic of Korea.

This Korean Edition Copyright ⓒ 2018 by Revival and Reformation Press, Seoul, Republic of Korea

이 한국어판의 저작권은 알맹2 에이전시를 통하여 Inter-Varsity Press와 독점 계약한

부흥과개혁사에 있습니다.

신 저작권법에 의하여 한국 내에서 보호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무단복제를 금합니다. 는 교회의 부흥과 개혁을 추구합니다. 부흥과개혁사는 부흥과 개혁이 이 시대 한국 교회를 향 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으며, 조국 교회의

목차

시리즈 서문 | 8

약어 소개 | 10

전도서

저자 서문 | 20

서론 22

1. 인간이란 무엇인가? | 22

2. 유익이란 무엇인가? | 24

3. 하지만 모든 것은 일시적인가? | 27

3.1. 삶의 단명함과 고대 근동 • 28

3.2. 삶의 단명함과 구약 • 29

3.3. ‘헤벨’의 은유적 용법 • 32

3.4. 순간성을 묘사하는 성경 어휘군 • 33

3.5. 전도서에 나타난 시간의 의미 • 34

3.6. 삶의 일시성의 정도 • 35

4. 저자와 저작 시기 | 36

5. 기타 주제 | 43

5.1. 지혜 일반 • 43

5.2. 삶의 유익 • 44

5.3. 기쁨과 즐거움 • 45

5.4. 지혜롭고 즐거운 수고 • 46

5.5. 하나님의 주권 • 47

5.6. 현실주의 • 48

6. 해석사 | 49

6.1. 개요 • 49

6.2. 보수적 해석 • 50

6.3. 비평적 이해 • 52

6.4. ‘헤벨’에 대한 해석 • 55

7. 장르 | 64

7.1. 철학적 • 64

7.2. 범세계적 • 65

7.3. 시적 혹은 잠언적 • 66

7.4. 웅변적 • 66

7.5. 자서전적 • 67

7.6. 일상어적 • 67

8. 언어 | 68

8.1. 세 가지 “영향” 이론 • 69

9. 본문 | 73

10. 구조 | 73

참고문헌 | 343

목차

아가

저자 서문 | 360

서론 362

1. 정경성 | 362

2. 저작 시기 | 364

3. 저작권 | 366

4. 해석적 접근 | 368

4.1. 비문자적 접근 • 369

4.2. 예표론적 접근 • 375

4.3. 극적 접근 • 376

4.4. 제의적 접근 • 377

4.5. 문자적 접근 • 379

5. 문학 | 382

6. 통일성 | 385

7. 구조 | 387

8. 주제 | 389

9. 목적 | 398

성경 본문과 주석 399

참고문헌 | 577

아볼로 구약 주석 ( AOTC ) 은 가르침을 통해 위대한 지성을 열정적이고 강

력하게 전파할 수 있었던 알렉산드리아 출신 유대 기독교인의 이름을 따른

다 ( 행 18:24-25 ). 아볼로는 과거의 사건들을 통해 동시대 사회를 어떻게 이해 해야 할지 잘 알고 있었다. 이 주석 시리즈는 아볼로가 했던 일과 똑같은 목 적을 추구한다. 이 시리즈의 한쪽 발은 원문의 심대한 세계 속으로 언제나

굳게 내디디면서 다른 한쪽 발은 설교자와 교사와 성경을 공부하는 학생들

로 이루어진 폭넓은 독자 집단을 향해 뻗쳐 있다. 이 시리즈의 편집자들은 학문적 탁월성과 실제적 적용의 통찰을 겸비함으로써 이 두 가지 영역에서

모두 능숙한 학자들을 선발했다. 한 언어의 모든 의미를 다른 언어로 옮기기 위해서는 번역자들이 원문과 모국어의 언어적 관습이나 의미론적으로 미묘한 차이에 통달해야 한다. 그

러나 주석가들은 단지 원문의 번역자 역할이라기보다는 해석자 역할을 한 다. 주석가들은 번역자들보다 훨씬 더 견고하고 다양하게 이중적 입장을 가 질 필요가 있다. 즉 한편으로는 주석가들도 번역자들처럼 직접 탁월한 번역 을 해낼 수 있을 만큼 언어적 능력을 구비해야 한다. 더 나아가 주석가들은 문학적 관습들, 사회학적이고 문화적인 습관들, 본문의 생산자와 관계자들 의 역사적 환경과 이해와 신학적 관점들에 완전히 정통해야 한다. 또 다른 한편으로 주석가들은 자기들의 시대와 문화를 알아야 하고, 본문의 최초 청 중들과 동시대 독자들 사이의 접촉점이 어디에 있는지를 볼 수 있어야 한 다. 그러기 위해 주석가들은 본문뿐 아니라 청중까지도 해석할 필요가 있다.

전통적으로 주석가들은 고대의 본문에 빛을 비추고 뜻을 설명하는 데 만

족해 왔다. 그러나 더 최근에는 우리 시대 상황을 파고드는 주석의 필요성

이 더욱 분명해졌기에, 이 시리즈는 본문의 역사적 의미 규명과 그 현대적

적용을 결합한 방법론을 의식적으로 채택했다. 각 주석의 저자들은 새로운

번역, 본문 해설, 문학적 형식 및 단락의 구조 및 배경, 본문 주해에 따른 설

명 등을 통하여 원문을 철저히 분석한다. 저자들은 각 구절이 성경과 교회

안에서 어떤 해석적 발전을 거쳤는지 연구한 뒤, 현대 독자들에게까지 그 구절의 뜻을 있는 그대로 전달한다. 우리는 이 주석이 단지 학자들의 연구 를 위한 탁월한 수단만이 아니라, 더 나아가 목회자들의 설교를 위한 효율 적인 자료가 되기를 기대한다.

데이비드 베이커 ( David W. Baker ) 고든 웬함 ( Gordon J. Wenham )

ecclesiastes 전도서

성경 주석은 정경성에 대한 주석자의 전제에 기초한다. 성경을 삶의 한

측면에 대한 독자의 자유 연상의 촉매제로 여기든, 작가의 불가해한 정신에

서 비롯된 가공물로만 읽든, 역사와 개인적 경험과 경건의 문제에 대한 한 개인의 반응을 독자적이고 명료하게 언어화한 것으로 읽든, 주변 상

황 ( context ) 이라는 동심원과 조화 혹은 불일치를 이루는 책으로 보든, 주석에

는 정경성에 대한 판단이 들어 있다. 전도서가 이런 상황, 곧 그 역사적 배

경과 히브리 지혜 문학과의 관계, 아니면 더 넓게는 구약 시대 혹은 중간기

시대 히브리인들의 신학적 이해와 어느 정도 관련 있는가 하는 질문은 언

제나 있어 왔다. 하지만 신약의 역사나 신학이라는 콘텍스트 안에서 전도서

가 언급되는 일은 드물다.

필자의 전제는 전도서는 정경 안에서 발견된다는 것인데, 왜냐하면 전도

서는 누적된 구신약 신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누적된 신학이

얼마나 개연성 있는지, 응집력 있는지, 이해가 쉬운지도 역시 성경신학에 대한 주석자의 시각에 달려 있다. 그러나 전도서의 주제어와 구문을 히브리

식 목소리로 듣는다면, 건전하게 의심하며 주의 깊게 듣는다면, 청자는 전

도서에서 다른 구약들, 심지어 신약과도 비슷한 사상을 듣게 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주의 깊게 듣는다면, 전도서가 나머지 정경에 깊이와 질감을

더하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본 주석은 전도서가 구약의 율법, 시, 지혜서, 선지서뿐 아니라 그

리스도와 사도의 가르침과도 폭넓은 친화력이 있음을 보여 줄 것이다. 이에

대해 어떤 이는 노골적인 현실주의와 실용주의, 실패한 고백이라는 도전적

메시지 때문에 수세기 동안 성경신학 주변부에 머물렀던 책을 지나치게 과

대평가한 것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도서를 성경 문학계의 때 이

른 난처한 골칫거리인 양 봐준다거나, 성경 문학계 한 늙은 삼촌의 갈팡질

팡 두서없는 이야기인 양 들어줘서는 안 된다. 오히려 전도서는 삶에서 맞

닥뜨리는 경악할 만한 상황을, 성경적 논의 내에서 현실적이고 차분하게 온

건한 목소리로 이야기하기에 응당 존중받아야 한다. 본 주석이 목표하는 바

는 교회에서 전도서를 보다 정기적으로 설교하고 가르치는 것인데, 전도서

는 회중의 사고와 신앙에 깊이를 더해 주기 때문이다. 본 주석이 의도하는

바는,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에서 책임감 있는 성경적 삶으로 우리를 급박하

게 부르고 있었음에도, 들리지 않았기 때문에 그간 결여되었던 전도서에 대

한 신뢰를 구축하는 것이다. 이 주석을 목회자와 교사들, 곧 귀하고 심오하

나 순식간에 지나가는 삶 속에서 제자들을 축복하고 위로해야 할 소명을

받든 여러분들에게 바친다.

두 친구가 이 작업에 가장 도움을 주었다. 로즈 메리 폰크리에게 감사한

다. 그는 내 초고에 대해 지속적으로 용기를 주었으며 철저한 문법학자가

되어 내 혼란스러운 사고를 설득력 있게 만들어 주었다. 크리스 컬네인에게 도 감사한다. 그는 사서의 능력을 발휘해 내가 요청하는 모든 문헌을 실수

없이 찾아 주었다. 또 내게 기회를 주고 조언과 인내를 베푼 IVP와 아볼로

시리즈 편집자인 고든 웬함 ( Gordon Wenham ), 데이비드 베이커 ( David Baker ) 와

특별히 필립 듀스 ( Philip Duce ) 에게 감사한다. 이 책은 내가 이 모든 이들 덕에

온전히 즐길 수 있었던 수고의 열매다.

대니얼 프레더릭스 ( Daniel C. Fredericks )

1. 인간이란 무엇인가?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 시 8:3, 9 )

여호와여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알아 주시며

인생이 무엇이기에 그를 생각하시나이까

사람은 헛것 같고 그의 날은 지나가는 그림자 같으니이다 ( 시 144:3-4 )

나를 놓으소서 내 날은 헛 것이니이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크게 만드사 그에게 마음을 두시고 ( 욥 7:16-17 )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 약 4:14 )

1. 인간이란 무엇인가?

만일 하나님의 광대하고 영원에 가까운 우주 안에 존재하는 우리의 의미

를 두고 우리의 직관에만 의지한다면, 우리 자신은 무가치하다는 결론에 이 를 것이다. 다윗이 시편 8편에서 인간의 의미를 숙고했을 때 처음으로 가진

생각이 정확히 이것이었다. 다윗은 창조로 드러난 하나님의 무한하신 자기

표현과 비교할 때, 자신의 가치는 지극히 보잘것없을 뿐이라는 사실에 충격 을 받았다. 하나님의 광대하신 창조를 숙고할 때, 우리는 어찌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거대하고 영원한 우주 질서 안에서 어떤 의미라도 갖게 되는 것

인지 궁금해 하게 된다. 단지 오만한 자만이 우리를 둘러싼 창조세계의 뛰

어난 질서와 아름다움에 무관심한 채 삶을 한가로이 즐길 수 있는데, 창조

세계는 이 사람의 무질서하고 기괴한 오만에 맹렬하게 도전한다. 반면 신실

한 자들은 하나님의 사랑스런 보살핌과, 즐거운 삶을 위해 허락된 넉넉한

은혜를 누리고 받아들이는 가운데 동일하게 천상의 벅찬 절정으로 들려 올

라가는데, 절정 속에서 그들은 잠시 작아지게 된다. 다윗의 묵상은 따라서 개인적이고 정서적이며, 궁극적으로는 예배가 된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

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시 8:1, 9 ). 하나님의 창조가 갖는 놀라운 탁월함과 권능에 압도되고 하나님의 지극

한 보살피심에 겸손해진 나머지, 다윗은 이렇게 질문할 수밖에 없다. “어찌

하여 주께서 나를 돌보시나이까?” 그러나 대답은 질문자가 예상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훨씬 놀랍다. 하나님은 우리를 돌보시기만 하지 않고, 온 세상 을 우리에게 맡기셔서 우리를 통치의 조력자로 세우신다! 다윗은 창세기 1장 26-28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최초위임령을 기억한다.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하지만 동시에 그가 깨달은 건 자신이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 권한을 가지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최고 종으로서 주의 보살피심 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는 모순이다. 이 짧은 시편에 전체 성경신학의

씨앗이 담겨 있다. 우리의 주권자 창조주는 자신이 위임한 주권자 인류를

목자 같은 보살핌으로 복되게 하신다.

이같이 인간에게 위임된 세상에 대한 권한은 구약과 신약신학에 만연한

주제다. 인간은 마땅히 하나님의 율법과 지혜의 원리로 인도받는 가운데 경 건한 방식으로 땅을 경영함으로써 목적을 이뤄야 한다. 하나님의 우주 질서

에서 우리의 목적은 ( 온 세상을 가리키는 전도서의 표현대로 ) “해 아래에서” 하나님의

통치하는 종이 되는 것이다.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의 성육신뿐 아니라 왕이 신 하나님으로 영원히 통치하시기 위한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재림 역시

그 근본 목적은 동일하다. 바로 땅을 경건하게 통치하라는 최초위임령을 성

취하는 것이다. 첫 번째 책 첫 번째 장인 창세기 1장에 나타난 이 지배적인

주제는, 시편 8편과 히브리서 2장에서와 같이 성경 전체에 걸쳐 또렷하게 울려 퍼지다가 마지막 책 마지막 장인 요한계시록 22장 5절에서 절정에 이

른다.

전도서를 포함한 구약 지혜 문학의 역할은 하나님의 땅을 관리하는 우리

의 기능을 더욱 충실히 묘사함으로 이 위임의 신학을 반영하는 것이다. 지

혜 문학에서 우리는 성경의 표준에 따라 삶의 사적이고 일상적인 계획을

정리하고 환경을 정돈하기 위한 지식과 분별력의 근원을 발견한다. 구약에

서 최초위임령은 법률 문헌에서 이스라엘 공동체를 향해 확대되지만, 지혜

문학에서는 개인을 향해 매우 상세히 설명된다. 지혜 문학의 상당 부분은

우리가 날마다 깨어나 잠들기까지 겉보기에 무작위로 맞닥뜨리게 되는 문

제를 완화하는 데 매우 실제적인 교훈을 준다. 이 교훈은 다시 하나님의 주

권적 통치와 일치를 이루는데, 하나님은 미리 심어 두신 육체적, 사회적, 심

리적, 영적 원리에 따라 이 행성을 다스리신다.

전도서는 이 같은 방향성에 발맞춘 강도 높은 권면이다. 그러나 전도서로

불리는 이 담화에서 우리를 당황케 하는 것은, 특별계시와 무관한 탐구에 근거해 현실을 진단한, 확인되지 않은 최종 결론이다. 더욱이 전도서는 상 투적 신학 용어에 몰두하는 사람과, 칭의 신학 영역을 한 번도 벗어나 본 적

없는 사람에게는 입맛에 맞지 않는 책이다. 그러나 총체적 성화에 필요한 지혜를 갈망하는 사람이라면 이 성경 속 현자의 가르침에 철저히 귀를 기 울이게 될 것이다.

2. 유익이란 무엇인가?

전도서의 목소리는 시편 8편과 144편에서 들리는 다윗의 목소리와 닮아 있다. 예컨대 전도서 1장 5-7절, 3장 11절, 11장 5절에 나타난 창조 질서와 신비에 대한 감탄 어린 경외가 그러하다. 그러나 전도서는 ‘공간적’ 개념인 우주의 광대함에 견주어 인간의 의미를 묻는 게 아니다. 오히려 ‘시간적’ 개념에 근거해 인간의 의미를 묻는다. 정확히 이 질문을 제기하는 시편 144편처럼, 하나님의 창조에 담긴 가치를 감각하도록 자극하는 건 인간의 순간성이라는 주제이지 육체적 차원이 아니다. 한순간인 그림자요 순식간 에 사라질 호흡인데도, 어찌하여 하나님은 우리를 선하게 여기셔서 우리가

2. 유익이란 무엇인가?

경험하는 일상의 보살핌과 기쁨을 우리에게 베푸시는가? 사실 한 사람의 생명뿐 아니라 해 아래에서 평생 행하는 모든 일도 일시적이다. 생명 자체 의 순간성과 우리 수고와 기쁨의 순간성은 이 담화의 중요한 주제다. 그렇

다고 타락한 세상 현실 때문에 부정적 사고가 용인되는 건 아니다. 이 순간

적 삶에 ‘대처’하고 그 안에서 ‘성장’하는 것도 전도서의 보충 주제다. 야고

보와 베드로의 방식으로 보면, 이렇게 대처함으로써 우리의 지혜와 인내는

성숙한다 ( 약 1:2-5; 벧전 1:6-7 ).

시험과 비극의 폭풍을 인내로 견뎌 내는 가운데 지혜를 이해하게 될지라

도, 깨지기 쉬운 우리 영혼이 짧은 시간이나마 위기와 두려움으로 두들겨

맞는 건 견디기 힘든 일이다. 시련을 겪을 때 우리는 올바른 판단을 내리는

일에 취약해진다. 한때 단순하고 긍정적이던 우리 믿음은 시험을 마주 대할

때 인간이 가진 한계와 연약함으로 인해 부서진다. 이 한계로 인해 전도서

의 화자는 좌절을 겪고 다양한 방식으로 질문하게 된다. “우리는 왜 지혜로

워져야 하는가? 혹은 왜 의로워지거나 수고해야 하는가?” 삶에서 경험하는 슬픔과 수고의 원인을 창세기 3장 17-19절을 통해 설명할 수도 있다. “땅

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

리니……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 니.” 그러나 저주에 순응하든 혹은 그에 거역하든 수고함에 무슨 유익이 존

재하는지 묻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

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1:3; 2:22; 3:9; 5:11, 16; 6:8 )

창조세계는 그 모든 힘과 질서, 다양성, 일관성, 아름다움을 통해, 동시에

창조주에 대한 의존을 통해 우리에게 지혜의 중요성을 가르친다. 자연계의 속성이 우리에게도 있는 것은 자연계를 관리하기 위함이다! 우리는 똑같이 흙으로 지음받았으나 나머지 창조세계를 보살피기 위해 더 고귀하게 창조

되었다. 이것이 성경적 의미의 “세계 지배”라는 소명이다. 지배의 방식은

무고한 자를 때리고, 학대하고, 죽이는 것이 아니다. 그 방식은 기록된 하나

님의 말씀에 매일매일 순종하여 말씀을 세상 속에, 관계 속에, 생각 속에 적

용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삶의 목적이 이 행성을 경건함 가운데 지배하

는 것이라 해도, 삶과 그 내용을 영위하는 방식에서 우리가 그토록 결정적 으로 제한된 존재라면, 아무리 노력한들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우리 한계

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 전도서 곳곳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우리는 과거를 거 의 기억하지 못하며, 현재를 충분히 깨달을 능력이 없고, 미래를 예측해 내 지 못한다. 현 상태가 하나님이 결정하신 것이든, 날씨나 부와 같이 지배계

층이나 비인격적 힘이 결정한 것이든, 우리에겐 현 상태를 변화시킬 능력이 없다.

그럼에도 전도서 안에 드러나는 모든 좌절 가운데 문제는, 삶 가운데 어

떤 목적이라는 것이 과연 존재하는지에 대한 절망이 아니다. 오히려 전도서

는 누군가가 지혜로워지는 일에 시간과 노력을 투자했을 때, 그 수고에 유

익이 있는지를 평가한다. 전도서의 강조점은 인간의 의미가 아니라 수고의

유익에 대한 것이다. 전도서는 ‘행위’라는 단어 ( ‘마아세’ ) 를 60회 이상 명시적

으로 사용하며, 자주 ‘마 이트론,’ 곧 문자 그대로 ‘무엇이 남는가?’를 질문 한다. ‘무엇이 남는가?’에 대해 우리는 분명 사람의 현명한 행실에는 심오

하고 선하며 즐거운 유익이 존재한다는 답을 듣겠지만, 그럼에도 대답 밑바

닥에 깔린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은 이것이다. 영원한 유익은 없다, 해 아 래에서 모든 것은 일시적이다.

책임감 있는 삶을 향한 도전과 인간의 한계에 대해 전도서가 갖는 최우

선의 관심사는 우리의 수명이 매우 일시적이고 짧다는 것과, 우리가 이루 어 내는 가장 현명한 업적도 그 영향이 오래 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순간성이라는 주제를 담은 정형적 구문과 표현이 담화 ( speech ) 전반

에 만연해 있는 것이며, 극단적 표현으로 담화를 시작하고 마무리하는 데

이 주제가 선택된 것이다 ( 1:2; 12:8 ). ‘과거’와 ‘미래’에 계시는 하나님의 영속

적 실존에 비해 우리가 지상에 출현한 것은 최근의 일이기에, 우리가 있기

도 전에 일어난 모든 일을 알고 경험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게다가 기껏해

야 칠십 년 남짓한 우리 수명은 이 행성의 역사에서 보잘것없는 순간에 불

과하다.

하지만 시편 8편에 나타난 다윗의 비슷한 관심은 위로가 된다. 다윗이 말 하듯, 광대한 우주에 견주어 우리가 차지하는 비율이 하나님 나라에서 우리

가 얼마나 중요한지 판단하는 척도는 아니다. 전도서도 이것을 말하지만 공

간적 우주라는 맥락에서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 개인의 시간적 한

계에도 불구하고 우리 삶에는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우리의 목표와

인간적 한계로 인해( 우리의 작음과 짧음 ) 창세기 최초위임령에 제시된, 이 행성을

온전히 관리할 책임을 수행하는 일에 좌절할 수 있다. 하지만 전도서는 경이 로운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능력을 넘치도록 예비하시기에 우

리가 땅에서 우리에게 맡겨진 몫을 완수할 수 있다는 확신을 준다.

우리 삶이 일시적이라 해도, 그 때문에 우리의 삶과 지혜로운 수고가 갖 는 가치가 부정될 수는 없다. 결국 전도서의 첫 번째 질문이자 전도서 전체

3. 하지만 모든 것은 일시적인가?

에 걸친 질문 “무엇이 유익하랴?”에 대해, 청중은 기저에 흐르는 심오한 기

쁨 ( 가령 2:24-26; 5:20 ) 에서 만족 곧 샬롬을 얻도록 격려를 받음으로 답을 얻게

될 것이다! ‘유익’을 묻는 질문의 대답은 ‘유익은 없다’가 아니다. 오히려

선하고 유익한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수많은 설명, 또 하나님의 관대함으

로 말미암은 사람의 몫은 무엇인가에 대한 수많은 설명이 그 대답으로 주 어진다.

3. 하지만 모든 것은

일시적인가?

우리는 앞서 시편 144편 3-4절에서, 순간성이라는 관점에서 물을 수 있 는 인간의 가능한 의미들을 살펴보았다. “여호와여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 께서 그를 알아주시며……사람은 호흡[헛것] 같고……지나가는 그림자 같 으니이다.” 전도서 중앙에 위치한 핵심 지점에서도 매우 비슷한 언어로 질 문이 제기된다. “호흡 같은[헛된] 생명의 모든 날을 그림자 같이 보내는 일 평생에 사람에게 무엇이 낙인지를 누가 알며?”( 6:12 ). 여기에 욥기 7장 1617절 질문도 추가해야 한다. 욥의 질문엔 격렬한 고통이 배어 있는데, 그의 생각도 비슷했다.

나를 놓으소서 내 날은 헛 것이니이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크게 만드사 그에게 마음을 두시고

삶의 짧음이라는 주제는 여러 다른 단어와 어구와 다른 주제의 형태로 전 도서에 스며 있다.

시편 144편과 전도서에 있는 이 ‘호흡’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헤벨’이 다. 전도서에서 담화를 시작하고 끝맺는, 중간에도 여러 차례 나타나는 단 어가 바로 이 단어다. ‘하벨 하발림……하벨 하발림, 학콜 하벨’은 전도서라 부르는 담화를 시작하는 사상이자 매듭짓는 사상이다. 히브리어 최상급은 신약에서 그리스도의 탁월한 지위를 보여 주는 데 사용된 “만왕의 왕”이나 “만주의 주” 같은 표현과 유사하다. 이 어구는 모든 것이 그저 ‘헤벨’이나 “호흡”일 뿐이라는 최상의 진리를 표현하므로 전도서의 도입부와 종결부에 사용되었다.

구약에서 ‘헤벨’ 혹은 “호흡”이라는 은유의 근본 의미는 ‘일시적’이라는

뜻이므로, 전도서를 여는 말은 인류의 가장 큰 좌절을 선포하는 데 그 의도 가 있다. 곧 ‘모든 것은 일시적이다!’ 널리 쓰이는 ‘공허’나 ‘헛됨’이나 ‘무 의미함’ 같은 ‘헤벨’의 번역어가 어째서 상당 부분 칠십인역과 불가타역의

부적절한 번역 탓인지는 후에 설명할 것이다.

3.1. 삶의 단명함과 고대 근동

물론 전도서 홀로 인간의 삶과 활동이 갖는 순간성을 강조하는 것은 아니

다. 순간성은 고대 근동을 비롯한 모든 시대의 관심사였다.

사람이 하는 일은 무엇이든 영원하지 않다. 사람과 그가 이룬 업적도 끝이 있다.

( 메소포타미아의 현인; Lambert 1975: 109 )

잠자리는 껍질을 남기고, 그 얼굴은 해를 향할 수 있을 뿐이다.

예부터 영원한 것은 없었다.

( 길가메쉬 서사시; ANET 92 )

인간의 삶은 영원하지 않다.

( 에마르에서 발굴된 시; Lambert 1975: 39-40 )

땅에서 행해진 일의 지속성에 대해 말하자면, 그것은 하나의 꿈이다.

( 애굽의 하프연주자; ANET 34 )

보라, 죽은 사람치고 돌아오는 자가 없다.

( 애굽의 하프연주자; ANET 467 )

인생은 순간적이며, 나무도 쓰러진다.

( 애굽의 현자, 기원전 3천년기; Faulkner 1956: 27 )

극동에서도 티벳의 승려들은 아직도 정교한 모래 그림, 즉 만다

라 ( mandala ) 를 만드는데, 여러 예술가가 여러 날에 걸쳐 작품 하나를 완성하

전도서 1:1

번역 ( 개역개정 본문에 이어, 저자 사역 본문을 제공함 – 편집자 주 )

1:1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1:1The teachings of Qoheleth, son of David, king in Jerusalem.

본문 해설

나는 ‘디브레’를 “가르침”으로 번역하는데, 작품의 장르가 이 “말씀”의 성격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선지서의 시작 부분에서 도입의 ‘디브레’에 이

어지는 내용이 설교적인 데 비해, 전도서는 교훈적이다. ‘코헬렛’은 히브리어를 문자 그대로 음역한 것으로, 여성 단수 분사의 추 상형 주격 형태다. 이는 어떤 모임에서 갖는 지위를 묘사하는 호칭이지만, 특별히 종교적 의미가 내포된 것은 아니다. 이 단어가 총 여섯 번 나타나는

중에 다섯 번은 무관사로 사용되기에 이름으로 기능하는 것으로 보인다.

7장 27절에서 ‘코헬렛’이 무관사인 것은 단어 구분을 잘못했기 때문일 뿐

이며, 12장 9절은 관사를 갖고 있기에 지위를 의미하고 이름일 가능성은 없

다. 이는 1장 2, 12절과 12장 8, 10절에서 다시 사용된다.

“예루살렘에 있는 왕”이 다윗이 아닌 솔로몬을 지시한다는 것은 1장

12절과 2장 9절을 보면 분명하다.

형식과 구조

“-의 말씀”이라는 구는 구약의 다른 책에서도 도입부로 사용된다. 예컨

대 “하가랴의 아들 느헤미야의 말이라,” “힐기야의 아들 예레미야의 말이 라,” “아모스가……받은 말씀이라.” 마찬가지로 전도서도 이 방식으로 출발

하지만 가장 비슷한 것은 또 하나의 편집된 문서로서 솔로몬의 것으로 여

겨지는 잠언 1장 1절의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 왕 솔로몬의 잠언이라”다.

이 도입절은 담화의 틀로, 코헬렛이란 인물을 소개하고 그의 철학적 결론

을 소개한다. 마지막에는 순서가 역전되어 철학적 결론이 반복되고(12:8), 코 헬렛에 대한 전체 평가가 이어진다 ( 12:9-11 ). 편집자는 이곳 1장 1절에서 담

화를 시작하여 12장 9-14절에서 끝내는데, 가르침 중간에 7장 27절에서

이 교사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주석

이 담화의 암시적 배경은 어떤 집회에서 청중이 자신들을 모은 사람이 말 하기를 기다리는 상황이다. ‘카할’( 집회 ) 은 코헬렛, “소집자,” “주최자”가 요

청한 것으로, 우리는 지금 이 주최자가 말로 전한 가르침을 연구하려는 것

이다. 이 경우 문자적으로 “코헬렛의 말씀”은 “주최자의 가르침”으로 해석 되어야 한다. 그를 “교사”로 부르는 것은 지나치게 한정적이며 그의 공식

직무를 사실 그대로 묘사해 내지 못하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주최자는 이

상황에서 실제로 가르치고 있다. 솔로몬, 즉 구약의 이 주최자는 성전 봉헌

식을 위해 문자 그대로 백성을 “소집했다”( ‘카할’; 왕상 8:1; 대하 5:2 ). 그는 스바의

여왕과 외국 고관을 포함한 ( 왕상 4:34; 10:1 ) 다른 많은 사람을 매료해 자기 가

르침을 듣게 했다. 아마도 이런 방문에서 어떤 작가가 영감을 얻어 우리가 탐구하고자 하는 이 담화를 저술했을 텐데, 담화의 철학적이고 국제적인 성 격이 그런 배경에 적합하기 때문이다. 물론 궁정 공직자들을 위한 국내 연 수가 소집 배경일 수도 있다. 증거가 거의 없기에 확실히 알 수는 없다.

잠언의 방식처럼 코헬렛이 왕임을 서술한 것은, 담화 내용이 권력자의 시

각뿐 아니라 왕실 경험을 통한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다. 이 담화는 왕이 직

접 관찰하고 언급한 것으로 보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고 볼 수밖에 없는 관

점에서 자주 왕들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통치의 최정점에 오른 극소수의 인물은 왕이든 수상이든 전제군주나 대

통령이든 가장 심오한 철학적 신학적 질문을 공적으로 관찰하고 분석하며

언급하기를 열망한다. 최고위 지도자 대부분이 많은 것을 읽었을지라도, 한

사회가 허용하는 가장 큰 권력을 소유한다는 것과 삶에 대한 가장 심오한

질문을 두고 한 사람의 생각을 책으로 낸다는 것에는 무언가 조화롭지 못

한 구석이 분명히 존재한다. 솔로몬이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같은 철

인-왕은 존재한 적이 거의 없다. 지상 및 천상 왕국의 심오한 사상가와 시

민이 되길 열망하는 자들이 있었다면 우리는 더 나은 인류가 되었을 것이

다. 이것이 코헬렛의 목표였는데, 그는 존재의 본질 ( 비영속성 ), 하나님 ( 영원하시

고 공의로우신 ), 인간 ( 불완전하지만 책임이 있는 ), 윤리 ( 무엇이 선인가? ), 진리 ( 드러나고 발견되

는 ), 고된 노동의 가치, 압제의 비극을 포함한 지혜의 중요성을 두고 청중을

계몽하고자 했다.

전도서를 연구하려면 성경의 지혜를 이용하는 “통치자”가 되려는 목표를

가져야 할 것이지만, 그 지배 영역은 짧은 삶과, 곤궁하며 이내 사라질 주변 환경뿐이다. 코헬렛의 관점이 왕의 것이라 해도, 코헬렛은 왕이든 노동자든

모든 인간이 동일하게 매일의 일상 속에서 내재된 저주 및 타락한 세상과

싸워야 함을 알고 있다. 일상을 관리하는 이 일을 통해 우리는 모두 고유한 권한을 가진 주권자가 되는 것이다.

전도서 1:2-11

번역

2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3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4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5 해는 뜨고

해는 지되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6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아가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바람은 그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7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강물은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

8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는 것을 사람이 말로 다 말할 수는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아니하도다

9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

10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있기 오래 전 세대들에도 이미 있었느니라

11 이전 세대들이 기억됨이 없으니

2 ‘Breath of breaths,’ said Qoheleth, ‘Breath of breaths. Everything is temporary!’

3 What is the advantage to the one who labours laboriously under the sun?

4 A generation goes, a generation comes, yet the earth remains for ever.

5 So the sun rises, then the sun comes panting to its place, rising there again.

6 Going to the south and turning to the north, turning, turning, goes the wind, and upon its turns the wind returns.

7 All the rivers go to the sea, yet the sea is not full; to a place where rivers go, there they go again.

8 Everything is wearying beyond what one could say. Eyes are not satisfied by what they see, and ears are not full of hearing.

9 What has been, it will be, and what has been done is what will be done, so there is nothing new under the sun.

10 It is said, ‘See this? It’s new!’ Already it has existed for ages before us.

11 There is no memory of those who were earlier, nor of those to come will there be any memory by their successors. 본문 해설

2절. 여기서 “호흡들의 호흡”[헛되고

하발림’을 문자적으 로 번역한 것이다. 히브리어에서 최상급은 명사 연계형 어근과 연이은 같은 어근의 복수 절대형 형태로 표현된다. 예컨대 “하늘들의 하늘 ( 가장 높은 하 늘 ) 이라도 주를 용납하지 못하겠거든”( 왕상 8:27 ), “노래 중의 노래”( 최고의 노래, 아 1:1 ) 외에도 신약의 경우 그리스도를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요”( 딤전 6:15 ) 라고 표현하는 것에서 히브리어 최상급 어법을 볼 수 있다. 이 ‘헤벨’ 연 계형에서 모음 세골이 축약된 것은 성경 히브리어에서 다른 비슷한 모음 축

약과 유사한 것이기에 후대 아람어 영향의 증거는 아니다 ( Fredericks 1988: 122 ).

나는 2절에서 ‘헤벨’을 계속 문자적으로 “호흡”이라고 번역했는데, 다섯

번째 나타난 ‘헤벨’은 “일시적”으로 번역했다. “서론”에서 충분히 논의한

바와 같이, 구약에서 은유는 문자적 용법보다 훨씬 빈번한데, 특히 전도서

가 그렇다.

3절. “유익.” ‘이트론’은 단순히 “나머지”를 의미하며, 일부가 제안하듯이 “이익” 같은 상업적 함의는 없다. 이는 전도서에서 ‘-온’이나 ‘-우트’ 어미

를 가진 추상명사의 일례인데, 일부는 이를 아람어의 영향으로 여긴다. 하

지만 이런 어미는 성경 히브리어에서도 자연스럽게 나타나는데, 그것이 가

진 보다 추상적이고 철학적인 내용으로 인해 잠언이나 전도서 같은 문헌에

서 더 많은 비율로 나타난다 ( Fredericks 1988: 136-138 ). 이 단어의 해석에 대한

연구는 잉그램 ( Ingram ) 2006: 130-149를 보라.

“사람.” ‘아담’은 49회 나타나지만 ‘이쉬’는 10회만 나타난다. 스쿠어스가

분명히 보여 주듯이, 이 단어가 더 선호되는 것은 코헬렛의 담화가 가진 보

편적 속성 때문이다 ( 1998b: 17 ). 내가 이를 총칭적 인칭인 “자”( one ) 로 번역한

것은 그 때문이며, 히브리어에서 다른 적절한 선택지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 이다.

“수고하는 수고”( ‘아말로 셰야아몰’ ). ‘아말’과 그 파생어는 지혜 문학과 시편

에서 불균형적으로 나타나는데, 성경에 나타난 총 75회의 용례 중 지혜 문 학에서 63회 나타나고, 약 35회가 전도서에서만 나타난다 ( Foresti 1980: 420 )

그 맥락은 자주 슬픔과 고뇌, 폭력 등의 정서적 고통으로 가득하다 ( Seow

1997: 104 ). 1장 2절처럼 코헬렛은 시적 장치로서 어근을 반복한다. 동족 목적

격 구절 “그가 수고하는 수고”는 고된 일을 강조하는 것으로, 타락 후 저주

받은 인류는 힘써 노력해야 하는 운명에 처해졌다.

“해 아래에서.” ‘타하트 하샤메쉬’가 많은 이가 제안하듯 그리스의 영향

을 받은 것이 아닌 이유는 초기 구약 시대의 다른 문화에서도 보편적으로

사용됐기 때문이다 ( Murphy 1992: 6 ). 이 구는 코헬렛이 즐겨 쓰는 수식어구로

소개되는데, 전도서 담화에서 29회 사용된다. 유사구인 “하늘 아래에서”는 추가적으로 3회 사용된다 ( 1:13; 2:3; 3:1 ).

4절. “세대.” ‘도르’가 “주변”을 의미하기에 자체로 시적이며, 인간의 세대 가 아니라 자연의 순환을 지칭한다고 보는 이들이 있다 ( Ogden 1986: 91-92; Whybray 1988: 105-112 ). 하지만 아마도 인간의 세대를 의미하는 것 같아 보이는 건 사람이 1장 2절의 초점이며, 이 시가 선대와 후대의 사람을 언급하면서

끝나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것은 “영원히”와 짝을 이루는 경우의 통상적 의

미이며( 출 3:15; 레 6:18; 시 33:11; 146:10 ), 코헬렛은 다시 세대를 강조한다( 2:12, 18; 4:15 ). “땅.” 폭스는 ‘하아레츠’가 물리적 지구가 아니라 “인류”를 지시한다고 제안한다 ( 1999: 166 ). 그러나 시편 104편 5절이 이와 매우 유사한데, 거기서

도 땅은 마찬가지로 영원히 서며, 이곳 1장 4-7절처럼 자연 현상의 무대가 된다.

5절. 일부는 충분히 입증된 바브 연속법 ‘웨자라흐’( 뜨다 ) 를 두고 모든 주

변 동사 형태가 분사이기에 음위전환된 것이라고 의심한다. 이런 의심은 해 석자 개인의 예측을 불필요하게 본문에 적용한 것이다.

비슷하게 ‘바’( 오다; [지되] ) 는 1장 4절의 “오는” 세대와 평행을 이룬다.

7절. 전도서에서 축약된 형태의 관계대명사 ‘셰-’( 여기서는 “곳”으로 번역됨 ) 는

68회 사용되는 반면, 통상적 성경 히브리어 형태인 ‘아셰르’는 89회 나타난

다. 예레미야애가, 요나와 일부 시편도 마찬가지로 두 가지 형태를 모두 사

용한다 ( Fredericks 1988: 103 ). 축약형은 전도서의 저작 연대를 후대로 보는 근거

로 자주 인용되지만, 그보다는 언어의 일상성을 보여 준다 ( “서론”의 “언어” 부분

을 보라 ). 코헬렛은 삶의 가장 심오한 진리를 쉽게 전달하기 위해 구어체 축

약형을 자주 사용한다.

8절. ‘핫데바림’은 아마도 “물건들, 일들”을 의미할 것이다. 그럼에도

“눈”과 “귀”를 채워 줄 “말씀”으로 번역하려는 유혹이 강하다. 여기서 문법

적으로 비슷한 세 개의 절은 현실을 철저히 경험하는 일에 대한 인간의 한

계와 노고를 나타내는데, 이는 부정 ( negative ) 불변화사-미완료-동작주-부정

사의 형태를 띤다.

‘예게임’( 피곤하게 하는 ) 이 형용사로서 수동적 결과 ( 피곤한 ) 를 묘사하는 것인 지 아니면 능동 분사구문 ( 피곤하게 하는 ) 인 것인지는 모호하다. 그럼에도 이는

1장 3절의 수고로운 노동을 반향한다.

9절. “-한 것.” ‘마-셰-’는 후대의 형태라고 주장되어 왔다. 하지만 그 구성요소와 병렬 형태는 전형적인 성경 히브리어의 것이다 ( Fredericks 1988: 104-105 ).

10절. “이미”( ‘케바르’ ) 는 미쉬나 히브리어에서 사용되지만 많은 초기 성경 히브리어 본문이 해당 성경과 미쉬나 히브리어에서만 쓰인 단어들을 담고 있다 ( Federicks 1988: 228 ).

“영원히.” ‘올라밈’은 단수형 동사를 가진 복수형 주어로서 문법적으로 보면 G. R. 드라이버 ( 1970: 234 ) 의 말대로 “모든 구어체에 가장 흔한” 것이다.

전도서에서 ‘하야’( “있었다”; 1:9; 48회 ) 와 ‘올람’( “언제나”; 7회 ) 이 자주 등장하는 건

어휘 자체로써 담화의 철학적 성격을 드러내는 것으로, ‘하야’는 “존재”

를 ( Schoors 1998b: 21 ), ‘올람’은 무한한 시간과 그 함의를 보여 준다.

11절. ‘리쇼님,’ ‘아하로님.’ “앞의 것”과 “뒤의 것”은 보통 사물을 지시하

는가? 사람이나 세대를 지시하는가 ( 이것 모두 제안되고 있다 )? ‘리쇼님’이 신명기

19장 14절에서 “사람”을 의미하고, ‘아하로님’이 욥기 18장 20절과 전도서

4장 16절에서 미래의 사람을 지시하며, 이 명사가 남성이므로 ( “사물”은 여성이 게 마련이다 ), 이는 아마도 “사람”을 말할 것이다.

형식과 구조

일곱 개의 히브리 단어로만 이루어진 1장 2절에서 “순간성”이라는 중요 한 주제는 시적 뉘앙스로 가득하다. 첫째, 앞서 언급한 최상급 형태가 나온

다. 둘째로, ‘헤벨’이라는 단어는 의성어로서 단어의 의미와 유사한 발음으 로 소리 나는 것이다. 첫 헤-발음으로 시작하고 이어 다시 “-벨”( vel ) 로 발

음되는 약한 베트를 통해 기식음을 두 번 발음해야 한다. 화자는 호흡의 본

질이 무엇인지 간단하게 이 단어를 발음함으로 묘사하는 것이다!

셋째로, 호흡이 호흡 과정에서 스스로를 따라 나오듯이 본 절의 ‘헤벨’은

다섯 번 반복된다. 이는 생명의 호흡이 갖는 순환적 형태의 모범이 되는바, 4-11절에서 자연의 순환 형태로 그려지게 될 것이며, 인간 실존의 내부에

있는 이 순환 형태는 전도서 전체에서 관찰된다. 각각의 호흡은 호흡의 연

속적인 순환에서 하나의 단계일 뿐이다. 이는 삶과 삶의 행위와 결과가 갖

는 순환질서 안에 있으며, 여기에서 잠언적인 지혜 원리가 파생된다.

넷째로, 이 반복은 호흡을 모방한 것일 뿐 아니라 기억을 돕는 목적으로

이를 단순히 복습함으로써 주제를 강조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는 다

섯 번째 시적 장치, 곧 고도로 두운을 맞춘 문장을 위한 여지를 준다. ‘하벨 하발림……하벨 하발림, 학콜 하벨’( 1:2 ). 두운을 맞추면서 모든 것이 일시적

이라고 선포하는 이 같은 경향은 1장 14절과 2장 1, 11, 17절, 3장 19절에 서 반복된다. 우리는 1장 14절에서 두운을 맞춰 일시성을 표현하는 또 하나 의 빈번한 표현인 ‘레우트 루아흐’( 바람의 변덕 ) 를 소개할 것이다.

여섯째로, 담화의 마지막에서도 문장이 반복되지만, 약간 축약된 형태로 나온다 ( 12:8 ). 이렇게 짝을 이루는 구절은 담화의 알파와 오메가로서 시적이

며, 두운을 맞추며, 주제를 표현하는 서론과 결론이 되도록 의도되었다. 전

도서에서 거의 같은 형태의 이 두 문장 사이에 들어있는 것들 전체가 모든 것이 일시적이라는 근본적이고 결정적인 진리를 상세히 다루도록 의도된 것이다. 전도서에는 이 코헬렛의 주제가 나오지 않는 부분이 없는데, 모든

휴지부 ( 休止符 ) 하나까지도 이를 선언하기 위해 끌어들인 것이다.

이 절은 짝을 이루는 12장 8절처럼 하나의 단위로 독립해 있다. 이는 이

어질 질문을 강제하는 가장 중요한 현실을 표현한다. 3-11절에서 담화 전

체의 프롤로그를 시작하는 것도 이 질문이다. 뒤이은 3-11절은 지표면 위

에서 이루어지는 자연 현상의 반복을 통해 삶의 호흡이 되풀이되는 것을 그려 낸다.

지금까지 전도서에는 두 가지 도입적 요소가 나타났는데, 저자 ( 1:1 ) 와 순

간성에 대한 핵심 관찰 ( 1:2 ) 이 그것이다. 이제 3절은 2절에서 소개된 일시성

이라는 압도적 진리에 대한 첫 번째 응답으로서 코헬렛의 관심 대상이 될

수사적 질문을 제기한다.

구조:

1:3 = 피곤케 하는 인간의 노동에 허락된 유익에 대한 질문

1:4-7 = 자연 자체의 피곤케 하는 노동

1:4 = 일시적 변화, 그러나 ‘땅’의 지속되는 기초

1:5 = 일시적 변화, 그러나 ‘해’의 지속되고, 순환하는 일관성

1:6 = 일시적 변화, 그러나 ‘바람’의 지속되고, 순환하는 일관성

1:7 = 일시적 변화, 그러나 ‘강물’의 지속되고, 순환하는 일관성

1:8 = 1:3의 피곤케 하는 노동을 강조

1:9-11 = 일시적 변화, 그러나 “새로운 것”의 지속되고, 순환하는 일관성

3절에 제기된 수사적 질문의 중요성을 그려 내기 위해, 노동하는 세대의

순환성을 인간에게 있어 “새로움”은 이미 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 과 자연 현상의 순환적 흐름에 비교하는 일련의 예증이 4-11절에 나타난 다. 많은 이가 내용과 양식의 두 측면에서 전도서 전체로 확장되는 순환성 과 주기성의 모티프를 발견해 왔다 ( 그 실례로 카라식 [Carasik 2003] 을 보라 ). 이 단락 에서 매우 많은 분사와 고밀도로 반복되는 단어는, 반복을 통한 지속적인

변화라는 메시지에 어울리게 하기 위한 언어상 기법의 일환이다. 다음은 단

어와 그 파생형을 반복을 통해 가차 없이 집중함으로써 세대와 바람과 일

출과 강물의 지속적 흐름을 표현하는 분사구를 발췌한 것이다. ‘헤벨’( 5회 )

1장 2절; 수고 ( 2회 ) 1장 3절; 세대 ( 2회 ) 1장 4절; 오다 ( 2회 ) 1장 4-5절; 뜨

다 ( 2회 ) 1장 5절; 해 ( 2회 ) 1장 5절; 곳 ( 2회 ) 1장 5, 7절; 가다 ( 5회 ) 1장 6-8절; 돌다 ( 4회 ) 1장 6절; 바람 ( 2회 ) 1장 6절; 돌아오다 ( 2회 ) 1장 6-7절; 바다 ( 2회 )

1장 7절; 강물 ( 2회 ) 1장 7절; 채우지 못하다 ( 2회 ) 1장 7-8절; 하다 ( 2회 ) 1장

9절; 있다 ( 7회 ) 1장 9-11절; 무엇이든 ( 2회 ) 1장 9절; 새로운 ( 2회 ) 1장 9-10절.

2절. 이 주제가 본질적으로 ‘헤벨’이라는 단어 하나를 다양한 형태로 반

복하는 것이고 이 단어의 의미에 대해서는 “서론”에서 충분히 논의했기에, “모든 것”의 철저한 짧음이 이 절의 의미라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

것은 “모든 것이 일시적이니, 가능한 동안 지혜롭고, 근면하며, 감사하라”

라는 이 담화의 최종 결론에 대한 기본 전제다. 우리는 이 절이 문자 그대로

모든 것이 호흡처럼 일시적임을 강조한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물론, 이 절의 “모든 것”이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의 행위까지 포함하여 절

대적으로 모든 것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그럼에도 이것은 단순히 다음 절

에서 언급되는 인간의 노동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코헬렛은 결코 하나

님의 영원성을 의심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무한의 근원이시며 ( 3:11 ), 하나님

이 행하시는 모든 일은 영원히 지속된다 ( 3:14 ). 이어지는 두 절에서도 코헬

렛은 땅이 영원히 있을 것이며, 사라져 가는 인간 실존의 배경으로 하나님

이 창조하신 것 가운데 하나가 땅이라고 말한다.

독자는 이 해석이 대다수의 다른 주석이 가진 시각이나 여러 성경이 달리 번역한 것과 상충됨을 발견할 것이다. 그렇지만 “공허한, 헛된, 무의미한, 부조리한, 부정한, 잘못된” 같은 단어는 전도서의 명시적 내용과 상충되거 나, 구약 성경에 있는 ‘헤벨’( 호흡 ) 의 의미와도 이질적이다. 그러나 ‘헤벨’이 “일시적인”을 의미한다고 여기고 전도서를 조직적으로 연구한다면, 전도서 가 타락의 영향을 명료하게 말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이 서두의 모티프를 절망의 외침이라고 추정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담화에서 실제로 무언가의 짧음을 주장하는 실례를 많이 발견할 것이기 때문에, 우

리는 이 모티프가 정서적으로 미치는 저항하기 어려운 영향에 대해 판단하

는 일을 뒤로 미루고, 담화가 전개되기를 기다려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일 시적”이라고 이해하더라도, 이 말은 최소한 무한에 대한 한 사람의 직관적

인 이해와 대조를 이루는 어떤 사실에 대한 진술이다 ( 3:11 ). 반면에 짧음도

마찬가지로 전도서에서 가끔씩 위안이 되기도 하는 사실이다.

3절. 이 수사적 질문을 통해 단순한 일을 고달픈 노동으로 만든 타락과

하나님의 저주가 가진 본격적인 효력이 느껴진다. 일하는 것이 슬픔과 좌절

을 안기는 원인은 창세기 3장 17-19절에 나온다.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하지만 이 저주에 순응하여 혹은 그에 거슬려서라도 일하는 것에 무슨 유

익이 존재하는가? 코헬렛은 대담하게도 이성이 요구하는 질문을 한다. “모

든 것이 일시적이니, 타오르는 태양 아래에서 힘들게 노동한들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이 질문은 단순한 인간의 “행위”가 갖는 가치를 문제 삼는 것이 아니다. 일상의 일과 수고의 격하고 고된 고역을 두고 괴로워하는 것이다. 그래서 전도서의 관심사는 삶의 의미나 전체 인류의 조건에 대한 평가가

아니다 ( 반론 Fox 1998: 225 ). 이 말이 예리하게 초점을 두고 있는 것은 노예처럼 고되게 수고하는 것에 대해 구체적으로 묻는 질문에 대한 반응과 대답이다.

이것은 또한 너무 게으른 나머지 침대에서 나와야 할지도 고민할 정도인

사람을 의도적으로 괴롭힌다. “내가 왜 일어나서 그렇게 열심히 일까지 해 야 하는가?” 다른 말로 하면 이것은 근면을 다루는 전도서와 잠언에도 나오 는 수많은 구절들과 비슷하게 성품과 도덕성에 대한 질문이다 ( 참고. 잠 20:13; 22:13; 26:13-14 ). 결국 이 질문은 한 사람이 지혜롭고 근면하게 살아간다면, 그 삶 속에서 ‘이트론’( 유익 ) 과 ‘토브’( 선 ) 를 얻을 수 있음을 입증하는 많은 구절을 통해 긍

정적인 응답을 얻는다. 예를 들어 2장 13절, 7장 11-12절과 10장 10절은

지혜로운 처신의 유익을 말하고, 3장 13절, 3장 22절과 5장 18절은 노동 자

체에서 발견되는 기쁨의 유익을 취할 것을 권한다! ( “서론”을 보라. ) 코헬렛은

담화 전체에 걸쳐 지혜와 율법, 하나님의 선물과 기쁨을 포함하여 삶의 많 은 것에 큰 가치가 있음을 설명한다. ‘헤벨’의 의미를 “무의미한”이나 “공 허한”으로 보는 것에 기초한 전도서 해석은 자연스럽게 이를 수사적 질문 으로 보게 될 것이고, 그로써 추정되는 답은 “고된 노동에는 어떤 유익도

없다. 모든 것이 헛되다면, 어떻게 유익이 있을 수 있겠는가?”가 될 것이 다. 하지만 이렇듯 부정적인 답을 상정하는 것은 전도서의 ‘논지’가 아니

다 ( Fox 1999: 165 ). 오히려 이 핵심 질문에 대해서는 아직은 코헬렛의 담화가

완전히 이해될 때까지 어떤 답도 상정해 두지 않고, 인간의 실존과 수고에 대한 코헬렛의 완전한 논의를 통해 비로소 그에 대한 긍정적인 답이 결정

될 것이다.

수식어구인 “해 아래에서”의 의미는, 코헬렛이 일시적이라고 것으로 여

기는 것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 곁에서는 발견되지 않으며 ( 5:2 ), 서우 ( 1997: 105 ) 가 지적하듯이, 아래 흑암의 세계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는 말인데, 그

들 중 어느 것도 햇빛에 빛나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코헬렛은 이 절에서

해를 전도서에서 되풀이되는 모티프로서 현실의 저주뿐 아니라 복도 묘사

하는 것으로 소개한다. 해는 수고의 징벌을 강조하지만, 살아 있는 자만이

해를 보는 복을 갖는다 ( 7:11; 11:7 ). 그래서 “해 아래에서”라는 구절은 “해 아래 있는 동안”이나 “살아 있는 동안”과 같은 의미이다. 이런 식으로 인류의 공

간은 인류의 일시적 기간을 암시한다. 공간은 시간을 의미한다 ( 5:18; 6:5, 12; 8:15; 9:9-10; 11:7 ). 하나님이 해 위에, 하늘에 계시기에 ( 5:2 ) 코헬렛은 사람의 영 혼이 해 아래에서 수고한 후 하나님 곁에 있기 위해 해 위로 돌아가는 것을

말한다 ( 12:7 ).

4-7절. 코헬렛은 능숙하게 “해 아래”의 전체 규모를 한정한다. 바람의 소 용돌이는 명시적으로 북과 남에, 해의 경로는 암시적으로 동과 서에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지구 “표면”의 길이와 폭을 드러낸다. 게다가 수직의 규

모는 해가 있는 가장 높은 영역에서 출발하여 ( 1:5 ), 아래로 하강하여 바람이 있는 중간 영역에 이르고 ( 1:6 ), 더 내려가 마지막으로 강이 있는 평지에 이른 다 ( 1:7 ). 코헬렛은 1장 4절에서 세대가 빠르게 사라진다는 점과 땅은 영원히

있다는 점을 서술한 후 현실의 시공간적 한계를 설정한다. 그렇다면 해 아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가 1장 4-11절의 주제다. 코

헬렛이 간추려 말하는 내용은 지금 발생하는 일이 무엇이든, 과거에 발생한 적이 있는 일이며 앞으로도 막연하게나마 계속 발생할 일이라는 점이다. 여

기서 상대적으로 영원히 있는 땅에 견주어 모든 세대의 일시성이 강조되고

있는데, 땅은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인간과 자연의 순환을 받아들인다 ( Loader

1986: 20; Murphy 1992: 7; Garrett 1993: 284 ). 코헬렛은 여기서 우리의 “오고 감”을 소 개하나, 이는 항상 코헬렛의 마음 가운데 있는 것이어서, 5장 16[15]절과

6장 4절에서 구체적으로 이것을 말한다. 또 사람의 상속자에 대해서도 자

주 언급한다 ( 2:12, 18-19, 21; 3:2; 4:8, 13; 6:3 ). 사실 여기서 “감”을 먼저 언급하고

“옴”을 언급한 것은 본질적으로 시적인데, 코헬렛의 이야기를 듣는 모든 사

람에게는 도착이나 출생보다는 종결이나 죽음이 문제되고, 죽음 이전에 무

슨 생산적인 일이 수행되는지가 문제되기 때문이다. 코헬렛은 ‘감’을 죽음

의 의미로 거듭 사용하여, 근면하고 지혜로워지는 데 게으른 자들에게 경종

을 울린다 ( 3:20; 6:6; 9:10; 12:5; 참고. 시 39:14; 욥 10:21; 삼하 12:23 ) 해, 바람, 강물과 마찬가지로 세대도 오고 간다. “새”것이 옛것을 그저 반

복하듯 말이다. 모든 것은 거대한 규칙성과

띠고 순환한

다. 하지만 일련의 일시적 반복을 통해 영속적인 변화를 형성한다. 이 변화 는 전체적으로는 영속적이지만 부분적으로는 일시적이다. 파머 ( 1991: 153 ) 는 이 단락을 간추려서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창조과정은 순간적이거나 순식

간에 사라지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인간 경험의 쉬지 않고 변화

하는 표면에는 과소평가된 견고한 안정성이 존재한다. 땅 위에서 이루어지

는 변화가 결코 멈추지 않을지라도, 땅은 영원히 남는다. 그렇다면 와이브

레이가 옳다 ( 1989:40 ). “이 구절에서 자연력의 작용이 헛되다는 암시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반대로 코헬렛은 자연력의 격렬한 활동은 예측 가능하고 도 긍정적인 것으로, 땅의 안정에 기여함을 관찰한다 ( 4b절 ).”

실제로 다윗은 해의 주기라는 자연계시를 언어계시로 번역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솜씨를 표현한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해는 그의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그의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 같아서

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 그의 열기에서 피할 자가 없도다 ( 시 19:4b-6 )

땅이 존속하기 때문에 나는 “그래서 해가 뜨고……다시 거기서 뜨며”로 번역했다. 해, 바람, 강물이라는 세 가지 요소 모두 출발점으로 되돌아오는

순회자로 묘사된다. 그 순환에 따라 해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바람은 소

용돌이치며, 강물은 어떻게 해서든 결국 바다로 돌아온다. 해나 바람과 마

찬가지로 강물도 다시 그 근원으로 돌아온다. 근원으로 돌아온다는 게 증발 과 강수 과정을 암시한다 해도 ( 욥 36:27-28 ), 바다로 돌아가는 것은 강물이 돌

아오거나 무엇이든 “다시” 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다.

12장 2절에서 우리는 또 다른 자연적 주기를 듣게 된다. 그것은 구름도

비를 내린 후 ‘되돌아온다’는 것이다. 이것은 악한 일도 아니고, 바다의 흡

수하는 성질이 이를 막아서 해변을 뒤덮지 못하게 하는 것도 아니다.

일시적 반복적 순환을 통한 일관성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지쳐 가고 있다! 삶은 견디기 힘들게 도전한다. 고된 노동 ( 1:3 ), 헐떡이며 숨을 거

칠게 내쉬는 태양 ( 1:5 ), 끊임없이 휘도는 바람 ( 1:6 ), 채워지지 않는 바다 ( 1:7 ), 지치게 만드는 삶의 경험 ( 1:8 ), 이 모든 것은 “무엇이 유익한가?”라는 중심

질문을 힘주어 드러낸다. 해는 숨을 거칠게 내쉬며 헐떡거린 후에야 그 주

기를 마쳐, 1장 2절에서는 호흡 과정을, 1장 3절에서는 노동자의 고단한

노역을 상기시킨다 ( 사 42:14을 보라, 거기서 ‘샤아프’는 고통을 함축한다 ). 어떤 이들은 이

구절이 시편 19편 5-7절에서 해가 제왕적 인격을 갖는 것과 대조를 이룬

다고 본다. 하지만 거기서도 해가 뜨고 운행하여 끝마칠 때에는 확실히 거

칠게 숨을 내쉬는 것으로 말한다. 바람은 애써서 그 많은 주전원 ( epicycle )

위로 그 행로를 굽이치게 해, 꾸불꾸불 움직여 그 출발점에 이른다. 8-11절. 말하기, 보기, 듣기에 대해 문법적으로 평행을 이루는 세 구절이 현실을 경험하면서 얻는 고단한 좌절을 표현한다. 만물이 피곤한 것은 인간

과 자연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그것을 설명할 언어의 힘을 고갈시키기 때문 이다. 그럼에도 바다가 채워지지 않는 것처럼, 눈도 귀도 그들을 보거나 듣

는 일에 완전히 만족되는 법이 없다. 하지만 이는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것

으로 여겨지는 기쁨과는 극명하게 대조된다. 코헬렛은 담화 전체에 걸쳐 삶 에서 기쁨과 만족을 얻을 것을 권한다. 그러나 도입 단락에서는 피곤한 노 동으로 겨우 일시적 유익만 발생되는 가운데, 삶에서 기쁨과 만족을 얻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질문을 제기한다. 그의 관심은 1장 13, 18절에도 이

어지는데, 지혜로운 관찰에서 비롯된 좌절은 13, 18절에서 슬픔과 비탄으 로 심화된다.

구조적으로 1장 9-11절은 8절에 대한 설명이다. 특별히 9-10절은 8절이

진리인 이유를 설명한다. 새롭게 경험할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눈과

귀는 만족되지 않는다. 그들의 자극을 극대화하는 데는 제한된 수의 감동만

이 존재한다. 그래서 11절은 어떤 것을 새로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

를 설명한다. 그 이유는 우리가 과거에 이미 행해진 일에 대해 짧은 기억만 을 갖고 있기 때문에, 마치 무언가 새로운 것을 보거나 듣는 것처럼 여기기

때문이라는 데 있다!

바람과 강물이 영구한 땅 위에서 행하는 일은 순환적이고 일시적이며, 사

라져 가는 세대마다 인간이 영구한 땅 위에서 행하는 일도 같은 것이다 ( 참

고. 2:12; 6:10 ). 정의상 이런 반복은 순간적 사건들의 연속으로, 서로 동일하거

나 비슷할 수 있다. 그러나 반복은 그저 스스로 작동하는 자연주의에 불과 한 게 아니다. 3장 15절에서 우리는 순환성이란, 자연과 인간의 사건을 통 해 창조세계가 돌아가도록 하나님이 설계하신 것임을 듣게 된다. 하나님의

계획은 순환성을 보증하는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것이 없다고 해서, 우리

가 미래를 숙명론적으로 예측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코헬렛의 역사

기술은 순환적 역사를 제시하는 것도 아니고 결정론적인 것도 아니다. 하나

님이 땅의 현상을 전반적으로 반복되도록 명하셨다 해도, 또 그 부분적 현

상들이 새로운 것이 아니라 해도, 하나님이 우리의 때와 우리의 지혜롭고

어리석은 행동의 조합과 더불어서 주권적으로 신비롭게 역사하시므로 삶은

여전히 예측할 수 없는 것이 된다.

인간의 모든 행위와 그 업적이 일시적일 뿐이므로, 그것들이 기억될 것이

며 인간의 기억 속에서는 ‘영원할’ 거라고 소망하는 자연스러운 성향이 생 겨난다. 그러나 코헬렛이 거듭 주지시키는 것은 우리가 기억 속에 남아 우

리가 이룬 업적이 지속될 거라고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사실 이 서두

단락에서 강조되듯이 사정은 정반대다. 인간의 주의력은 어쩔 도리 없이 약 하고 궁극적으로 순간적일 뿐이어서 무언가 새로운 것이 이루어졌다고 어 리석은 선언을 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행위는 잊히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는 우리가 한 행위였음 에도, 다른 누군가가 같은 행동을 통해 “새롭다”고 인정받을 수도 있다. ‘기 억됨’과 ‘잊힘’에 대한 전도서의 여러 언급들을 단지 사실 회상의 문제로만

보는 건 피상적일 수 있다. 구약신학에는 하나님이 주의 깊게 돌보신다는 ‘기억됨’의 풍부한 의미들이 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 시 8:4 )

기억되거나 잊히는 일에 대한 코헬렛의 잦은 언급은 한 세대가 앞 세대에 대해 가지는 상대적 관심을 암시하는바, 앞 세대에 대한 회상은 단순히 이 문제의 징후다.

그래서 우리는 1장 8-11절에 이르러 1장 2-3절에서 시작한 것에 결론을

내린다. 해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우리의 모든 피곤한 수고 뒤에 무슨 유익 이 있는가? 우리의 힘든 일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면 왜 수고롭게 수고

하는가? 2장 16절을 참고하라. 마지막으로 1장 11절은 1장 4절에서 언급된

다음 세대의 물결에 대해 일깨우는데, 다음 세대는 우리가 알고 있듯이 새 로운 것을 중시하지도 않고, 훨씬 덜 발명한다.

해설

‘헤벨’이라는 한 단어가 다양한 형태로 반복되어 ‘순간성’이라는 주제를 표현하므로, 또 그 단어의 의미를 “서론”에서 길게 논의했으므로, 이 도입 단락에서는 “모든 것”이 몹시 짧다는 게 2절의 의미라고 말하는 것으로 충 분하다. 바로 이것이 담화의 최종 결론을 위한 기본 전제다. “모든 것이 일 시적이니, 할 수 있는 동안 지혜로우라, 부지런하라, 감사하라.”

순간적인 것은 본질적으로 무용한 것이어야 한다는 전제를 취하는 비논

리적 비약이 있다. 하나님은 궁극적 선이시며 영원하시므로 일시적인 것은 모두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일시적인”으로 번역되는 “호흡”이 곧

바로 “공허함”으로 껑충 뛰어오른다. 하지만 이런 사고 유형은 고대 영지주 의 이단의 기초로서, 인간의 육신을 포함해 일시적인 물리적 창조세계를 본 질적으로 악하다고 경시하는 것이다. 사실상 순간성은 창조 시 세상에 내재 된 것으로, 그때에도 ‘좋다’고 선포되었다. 나아가 3장 1-8절은 모든 지혜 로운 행위에는 잠정적인 때가 있다고 설명한다. 타락으로 말미암은 불가피 한 행위도 일부 언급되지만, 새 하늘과 새 땅에서도 날마다 자연스럽게 청

지기직을 수행하며 이뤄야 하는 행위도 존재하는 것이다. 코헬렛은 현실의 네 가지 범주를 일시적인 것으로 여기는데, 이들은 담화 전체에 걸쳐 자주 언급되는 것으로 삶 자체, 인간의 수고와 그 결과, 즐거 움, 비극이다. 코헬렛이 순간적인 것으로 여기는 것들의 더 구체적인 목록

은 36쪽 “서론”에 열거해 놓았다.

우리는 확실히 “거기서 나를 위한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충분히

아가 of songs

아가는 성경의 모든 책 가운데 가장 시적이며, 아름답고, 신비롭다. 아가

서 해석을 두고 학자들은 거의 모든 부분에서 다양한 견해를 제시한다. 주

석가들은 아가가 신학에서 자리하는 정당한 위치와 아가를 삶에 적절하게 적용하는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한다. 아가는 사실상 모든 절마다 본문, 문 헌학, 이미지, 문법, 구조상의 난제를 안겨 준다. 결과적으로 아가는 일면

수많은 주석서에 영감을 주었으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 수많은 독자들이 아 가의 의미를 깨닫는 일을 포기하게 만들기도 했다. 아가에 대한 연구물은 많아졌지만, 동시에 아가는 실상 교회의 설교나 교육에서 무시되어 왔다.

나는 본 주석을 통해 히브리 시라는 문학 장르 측면에서 이 고대의 연가 곡집 ( song cycle ) 을 해석하려 했다. 아가의 본문사, 문헌학, 문법학에 세심하 게 주의를 기울였을 뿐 아니라 직유, 은유, 반복, 대조, 음성유희, 구조적 장

치 같은 문학적 특징도 검토했다. 주해 전체에 걸쳐 항상 시인이 독자들 안

에 재현하고자 하는 정서에 섬세함을 유지하려 했다. 한 가지 특징은 어느 정도 설명이 필요하다. 본서 전체에 걸쳐 아가의 두 주인공을 언급할 때 솔로몬과 술람미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솔로몬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고 해서 내가 아가의 저자를 솔로몬 왕으로 추정하는 것은 아니고, 단지 시인이 솔로몬을 문학적 페르소나로 사용했다고 보는 것일 뿐 이다. 아가의 저작권에 대한 상세한 논의는 서론 부분에 설명해 놓았다. 또 아가 6장 13절에 언급된 여성인물은 한 개인의 이름이 아니라 아마도 ‘술 람미 사람’을 일컫는 말이라는 점도 나는 알고 있다. 하지만 내가 이 여인을

술람미라고 부르기로 한 것은 한 개인에 대한 생생한 느낌을 유지하고자 하는 의도 때문이다. 내 생각에, 아가 안에서 전개되는 두 등장인물 간의 강 렬한 사적 관계 때문에 이런 소소한 문학적 허용을 취해 두 인물 모두 고유 한 이름으로 지칭하는 것은 정당하며, 그렇게 칭하는 것이 사랑하는 자와

사랑받는 자, 남성과 여성, 남자와 여자 같은 무색의 칭호를 쓰는 것보다 낫

다고 본다.

책 한 권을 완성하는 일은 한 개인이 혼자 이루어 내는 일이 아니다. 나는

아볼로 구약 주석 시리즈 편집자인 데이비드 베이커 ( David Baker ), 고든 웬 함 ( Gordon Wenham ) 과 IVP 신학 서적 편집자인 필립 듀스 ( Philip Duce ) 가 이 책

의 저술을 요청하는 호의를 베푼 것에 감사한다. 또한 연구와 저술, 편집 등

전 과정에 걸쳐 지원과 조력을 베푼 것에도 감사한다. 이 책의 편집자인 엘

도 바쿠이즌은 출간용 원고 준비 과정에서 꼼꼼하게 작업했다. 철저히 검토 하고 열정적으로 확인해 준 것에 감사한다. 나는 25년 동안 린워쓰 ( Linworth )

침례교회와 시더빌 ( Cedarville ) 대학교에서 아가를 가르쳤는데, 학생들의 고무

적인 반응과 예리한 질문은 아가를 더 깊이 파고들게 하는 자극제가 되었

다. 시더빌 대학교의 안식년 허가가 없었다면 이 일을 마무리하는 것이 불 가능했을 것이다. 안식년 동안 집중 연구를 가능하게 만들어 준 듀에인 우 드, 잭 릭스, 크리스 밀러에게 특별히 감사한다. 내가 영국 케임브리지의 틴

데일 하우스에서 연구하는 동안 브루스 윈터는 나를 후대해 주었고 연구원,

방문 학자, 대학원생들도 지속적으로 격려해 주었다.

아이들 ( 조너선, 크리스티아나, 빌, 조엘, 샤론 ) 을 향한 내 깊은 감사의 마음을 말로

표현하기가 어려운데, 아이들은 흔들림 없이 나를 지원하고 내 아가 연구에 관심을 가졌다. 내가 기도하는 것은 아이들 모두 아가가 그리고 있는 친밀 함의 질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아내 캐롤에게 가장 깊이 감사하는데, 캐

롤은 주님과 아름다움와 문학과 삶과 나를 향한 사랑이 진정으로 뛰어난 사람이다. 이 오랜 저술 작업의 매 순간 무엇보다 아내가 내 마음 가운데 있 었으며, 나는 온 마음을 다해 이 책을 아내에게 헌정하는 바다.

대니얼 에스테스 ( Daniel J. Estes )

서론

1. 정경성

초기 유대 학자 가운데 아가의 정경적 지위와 관련한 유의미한 논쟁이 있

었는지에 대한 증거는 거의 없다. 실제로 랍비 아키바 ( Akiba ) 는 미쉬나에서 “언어 자체가 이 책이 이스라엘에 나타났던 시기의 것이 아니다”( Yadaim

3.5 ) 라고 주장한다. 아퀼라역과 심마쿠스역, 테오도션역 모두 아가를 포함하

고 있으며, 바벨론 탈무드 시기 ( AD 6세기 ) 에 랍비 사이에 합의를 이룬 것은

아가가 정말로 히브리 성경에 포함된다는 것이었다. 아가는 매년 주요 절기

에 유대인이 읽었던 다섯 두루마리 속에 포함되어 유월절 제8일에 읽혔다.

아가가 유대 정경에 포함되었기에, 그리스도인들은 아가를 구약의 일부 로 채택했다. 사르디스의 멜리토 ( Melito ) 주교는 자신이 모은 AD 2세기 말엽

성경 본문에 아가를 포함시켰다. 교부 중 어느 누구도 아가의 지위가 의심 스럽다고 주장한 경우는 없었다.

하지만 아가의 정경성 문제와 관련해 두 가지 질문이 존재한다. 첫째로

초기 랍비는 에스더와 전도서, 아가가 손을 더럽히는지에 대해 논의했으며, 랍비 다수가 이 책들이 손을 더럽히지는 않는다고 결론 내렸다. 이를 흔히 정경적 지위에 대한 논쟁으로 해석해 왔지만, 제의적 부정함에 대한 질문으

로 보는 편이 더 바람직하다. 문제되는 책 세 권에 여호와라는 이름이 없다

는 점이 독특하다. 브로이드 ( Broyde 1995: 73 ) 가 결론 내리듯이, “손을 더럽힌 다는 것을 면밀히 검토해 보면, 이것이 적어도 어느 정도 본문에서 하나님

의 이름이 있는지 여부와 관련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이 세 개 두루마리는

따라서 ( 이 책들이 손을 더럽힌다는 것을 부정하는 자들에 따르면 ) 성경 가운데 하나님의 궁극적이 없는 짧은 시처럼 취급되었다.”

두 번째 질문은 아가의 성애적 내용 때문에 촉발되었다. AD 5세기에 몹

수에스티아의 테오도르 ( Theodore of Mopsuestia ) 는 아가가 분명히 인간의 성애 적 사랑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정경에서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G. L. Carr

1982: 495 ).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는 그의 입장을 배척했으며, 이 때문에 그는

사후에 파문당한다. 16세기에 세바스티안 카스텔리오 ( Sebastian Castellio ) 는 자

신이 아가에서 선정적이라 여겼던 것을 가지고 비슷한 반론을 제기했고, 이

때문에 쟝 칼뱅 ( John Calvin ) 은 그를 제네바에서 추방했다 ( Baildam 1999: 140 ). 유

대 공동체 내에서도 일부가 아가를 연회에서 불리는 성애적 서정시로 다루 었다는 간접 증거가 랍비 아키바에게서 나오고 있다. 아가가 이스라엘을 향

한 여호와의 사랑을 다룬 것으로서 전형적으로 알레고리로 해석되었다는 것은 입증되었지만, 아가에 담긴 성애적 내용으로 인해 아가를 정경에 포함 시키기 거부했다는 직접 증거는 보이지 않는다.

아가가 솔로몬이라는 인물과 관련되어 있기에 아가의 정경성이 인정되는 것이라는 주장이 자주 있어 왔다. 모세를 율법 전수자로, 다윗을 이스라엘 의 시편 기자로 여기는 것처럼, 솔로몬도 성경에서 지혜의 모범이었다 ( 왕상

3:12 ). 이 관점에 따르면 아가 1장 1절의 표제인 “솔로몬의 아가라”는 아가와 솔로몬의 관련성을 통해 아가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 Saebø 1996: 270 ).

그렇다면 아가는 지혜 문학, 아마도 잠언 5장 15-19절에서 발견되는 인간

의 성애적 사랑이라는 주제에 대한 확장판으로 여겨질 수도 있을 것이다 ( 참

고. Murphy 1973: 422 )

아가를 자주 알레고리로 읽어 왔기에, 많은 해석자는 아가에 대한 알레고

리적 해석이 아가가 정경 안에 포함된 원인이 됐다고 여긴다. 예컨대 마스 맨 ( Marsman 2003: 80 ) 은 이렇게 주장한다.

랍비의 알레고리적 주해는 아가의 진정한 주인공이 솔로몬과 그 아내 가 아니라 신랑 되시는 하나님과 신부인 이스라엘이라는 태도를 견지해 왔다. 아가의 탈굼역은 이런 유형의 주해를 가장 풍부하게 예증한다. 알

레고리적 해석이 없었다면 아가가 정경 안에 포함될 수 있었을지 의심스 러울 정도다.

폭스 ( Fox 1985: 252 ) 는 아가가 세속 서정시로 출발했으나, 종교적 축일에 사

용되었기 때문에 결국 종교지도자들이 알레고리로 재해석해 합법화했을 것 이라고 추정한다. 그러나 바턴 ( Barton 2005: 2 ) 은 이 주장을 거부하고, “오히려

고대 시대에 알레고리 독법은 높은 위상을 차지하는 바로 그런 책들에 사

용되었다”라고 설득력 있게 주장한다. 그런 다음 바턴은 알레고리가 정경

성의 원인이 아니라, 정경성의 결과라고 결론 내린다. 그럼에도 D. M. 카 ( D.

M. Carr 1998b: 175-176 ) 는 초기 랍비 저작을 들어 알레고리적 접근은 주후 7세 기가 되어서야 유대 해석에서 미드라쉬를 대체했다고 주장한다.

부정할 수 없는 것은 유대 학자와 기독학자 모두 일찍부터 그리고 거의

만장일치로 아가를 정경에 속한 것으로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2. 저작 시기

아가의 저작 시기에 대한 해석자들의 의견은 상당히 다양하다. 세 가지

주요 견해는 BC 10세기 솔로몬 시대와 BC 8세기 후반 히스기야 시대, 포

로기 이후 시대로 보는 입장이다.

화이트 ( White 1978: 17 ) 는 BC 1550년부터 1080년에 이르는 신왕국 시대 고

대 애굽 연가와 아가 간의 수많은 언어적 주제적 유사성을 관찰한다 ( 참고.

Foster 1974; Lichtheim 1976: 181-193 ). 고이테인 ( Goitein 1993: 63-65 ) 은 이 유사성에 근거

해 애굽과 외교 및 혼인 관계를 가졌던 솔로몬 통치 시대에 아가가 지어졌

다고 주장한다. 반면 레이크( Leick 1994: 68-69 ) 는 아가보다 훨씬 이른 시기의

수메르 결혼 노래( BC 3천년기-2천년기 ) 와 아가 사이의 유사성을 지적하는데, 이 는 아가가 애굽 문서를 직접 차용한 것이 아니라 훨씬 보편적인 고대 문학

양식을 따른 것임을 암시할 수 있다( 참고. G. L. Carr 1982: 495-496; Loprieno 2005: 108 ). 10세기 저작설을 지지하는 추가적 근거는 아가에 언급되는 지역에서 드 러난다. 지리학적 위치로 언급된 것 가운데 분열왕국 시기 북이스라엘 왕국

에 위치한 지역이 다수 포함되어 있는데, 이는 “아가가 솔로몬 치하 이스라

엘 왕국의 경계가 최대한으로 확장되었을 시기에 지어졌다면 자연스럽게

여길 수 있는 것”( Goitein 1993: 63 ) 이다. 덧붙여 아가에 묘사된 시대의 번영과

평화는 솔로몬의 통치에 대한 성경의 묘사에 잘 들어맞고, 아가에 언급된

사치품은 솔로몬의 대규모 상업활동에도 상당히 부합된다 ( Rabin 1979: 216; 참고. 왕상 10:22-25 ). 그럼에도 말레나 ( Malena 2007: 182-183 ) 는 에스겔 27장의 유사 본

문을 들어 더 늦은 시기인 포로기 시대를 주장한다. 게다가 G. L. 카 ( G. L.

Carr 1984: 18 ) 는 일부 고어적인 문법상 언어상 양식뿐 아니라 우가릿 문헌과

의 축어적 유사성이 솔로몬 시대 무렵의 저작 시기를 지지한다고 말한다.

바벨론 탈무드에 연원을 둔 초기 유대 전통은 아가가 히스기야 시기에 지

어졌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당시 북왕국은 이미 앗수르의 포로가 되었고, 이로 인해 북왕국 지역의 지리적 특성을 언급하는 것이 가능했을 것이다.

더구나 앗수르의 다국적 포로 이주 정책으로 이스라엘에 난민이 유입되었

다는 사실은 ( 왕하 17:24-33 ) 아가가 고대 근동의 국제어인 아람어의 흔적을 상

당 부분 담고 있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당시는 또한 이스라엘과 아라비아 사이의 교역이 번창하고, 교역 대부분

이 아람 상인들에 의해 촉진되던 시기였다 ( Brenner 1983: 79 ). 닛시넨 ( Nissinen

1998: 624 ) 은 아가와 가장 비슷한 메소포타미아 문헌이 나부 ( Nabû ) 와 타슈메

투 ( Tašmetu ) 의 연애시에 담겨 있다고 주장하는데, 이 연애시는 BC 7세기의

것으로 이 시기는 앗수르가 이스라엘과 유다를 향해 정치적 문화적 패권을

확장한 시기와 같은 시기였다.

최근 학계의 지배적 견해는 아가가 포로기 이후에 지어졌다는 것인데, 이

시기에 이스라엘 땅은 바사와 헬라의 통치 아래 있었다. 본문의 어휘와 문법

에는 포로기 이후 시기를 가리키는 몇 가지 특징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예

컨대 아가에는 모음 표기가 높은 비율로 나타나며, 아람어 영향( Aramaisms ), 명백한 바사 용어, 헬라어로 추정되는 단어, 미쉬나 히브리어에 필적할 형 태들이 등장한다. 이 증거를 가지고 돕스-올소프 ( Dobbs-Allsopp 2005b: 71 ) 는

아가가 바사나 아케메네스 제국이 이스라엘을 통치하던 시기 ( BC 539323년 ) 의 후기 성경 히브리어로 쓰였다고 결론 내린다.

하지만 이 평가에는 비판이 따른다. 고이테인 ( 1993: 62 ) 은 바벨론 탈무드

훌린 ( Ḥullin 137b ) 에 근거해 미쉬나 히브리어가 후기 히브리어가 아니라 오히

려 토라의 언어와 같은 시기에 사용된 히브리어 지역 방언이라고 주장한

다 ( Garrett 2004: 17도 참고 ). 영 ( Young 1993: 161-162 ) 은 4장 13절의 ‘파르데스’라는

바사 외래어가 포로 후기를 나타내는 건 아니며, 다만 그 단어는 이른 시기 에 히브리어를 비롯한 여러 언어에 유입된 고대 용어이고, 3장 9절의 ‘아피

르욘’은 헬라어가 아닌 산스크리트어에서 파생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합

리적인 주장을 펼친다. 또한 시걸 ( M. H. Segal 1962: 484 ) 은 시로서 아가는 아마 도 문서화되기 전 기나긴 구전전승의 역사를 가졌을 것이기에, 아가가 지닌 후기 언어적 특징은 원저작 시기가 아니라 기록화되었던 시기를 가리킬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결론적으로 아가의 저작 시기는 몇 가지 다른 질문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전승사, 이스라엘 문헌과 다른 고대 근동 문화의 문헌 사

이의 관계, 아가의 저작권과 통일성에 대한 질문이 포함된다. 아직 아무도

아가의 저작 시기에 대해 확신을 주는 결정적 논증을 한 경우가 없다. 솔로

몬이 언급된 것은 저작권을 지시하는 것이거나, 아가에 대한 문학적 채색의

일환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6장 4절에서 북왕국의 초기 수도인 디르사가

언급된 것이 필연적으로 초기 저작 시기를 보여 주는 결정적 증거는 아니

다 ( Murphy 1990: 4; 반론 Garrett 2004: 20, 228 ). 아가가 시집이거나, 연가곡집이라면, 개별 서정시가 긴 시간적 간격을 두고 저작되었을 가능성도 상당히 크

다 ( Hubbard 1991: 257 ). 그것이 아니라면, 아마 솔로몬의 시기에 일찍이 통합된

노래가 존재했고, 이어지는 수세기 동안 몇 차례에 걸쳐 편집과정이 있었을 것인데, 그렇다면 아가의 독특한 언어적 특징은 설명이 가능하게 된다 ( Fox

1985: 190 ). 상반되고 불충분한 증거들을 고려하여, 아가의 저작 시기를 확정 적으로 주장하는 일에는 신중을 기하는 게 현명한 일이 될 것이다.

3. 저작권

1장 1절의 표제를 아가의 저작권에 대한 진술로 받아들인다면, 저자는 솔 로몬으로 구체화될 것이고, 그렇다면 아가의 저작 시기는 BC 10세기로 설

정될 것이다. 히브리어 전치사 ‘레’에 명사를 붙이는 것은 흔히 저자를 지시 하지만, 이것이 유일하거나 필연적인 의미는 아니다. 사실 이것은 여러 가

능한 선택지 가운데 “헌정”을 의미하거나 “양식을 따름” 혹은 “관련됨”을

의미할 수도 있다. 이 문법상의 모호성 때문에 해석자들은 아가의 가능한

저자를 두고 다양한 의견을 제시하게 되었다.

최근 수년 간 몇몇 학자는 아가의 자료를 근거로 여성이 부분저자 ( Murphy

1990: 70 ) 혹은 전체저자 ( Goitein 1988; 1993; LaCocque 1992: 139-140 ) 라고 주장해 왔 다. 라부아 ( Lavoie 2000: 76-77 ) 는 아가의 여성 인물이 남성보다 거의 두 배 정 도 많은 말을 한다는 것과 처음의 말과 마지막 말도 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 한다. 특히 1장 2-6절과 3장 1-4절, 5장 1-7, 10-16절에서 서정시는 자주 술람미의 감정을 생생하게 반영하기에 브레너 ( Brenner 1985: 56 ) 는 여성이 저 자일 가능성이 확실하다고 보지만, 그럼에도 브레너는 “남성 저자가 자신 의 심리학적, 시적 통찰력을 통해 실제 여성의 정서를 재현해 내는 것이 불 가능할 이유가 전혀 없다”라는 것도 인정한다. 성경의 몇 가지 구전 본문은

여성이 저술한 것으로, 창세기 21장 16-17절, 25장 22절, 29장 35절, 30장

24절, 출애굽기 15장 21절, 사사기 5장 1-31절, 룻기 1장 8-9절, 4장 14절, 사무엘상 1장 10, 12-15절, 2장 1-10절, 열왕기상 10장 9절, 잠언 31장이

이에 포함된다. 그럼에도 클라인스 ( Clines 2005: 99 ) 가 고대 이스라엘에서 여

성이 읽고 쓸 줄 알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어떤 결정적 증거도 없다고 지적

한 것은 옳다. 고대 근동을 통틀어 여성이 시와 산문을 지어 공연하는 경우

는 많았으며 ( Lavoie 2000: 80–81 ) 아가의 경우에도 그런 가능성은 고려되어야 한다. 최소한 저자는 여성의 기분과 욕망과 감성에 대해 놀랍도록 예리한

이해를 드러내고 있다. 표제에 솔로몬이 언급된 것은 아가가 전승 초기부터 어떤 식으로든 솔로

몬과 관련이 있음을 시사한다. 인간의 사랑이라는 주제는 지혜 교육의 필수

요소이며 ( 참고. 잠 5:15-19 ), 솔로몬이 열왕기상 3장 12절, 4장 29-34절[5장 9-14절]에서 지혜의 전형이 되는 인물로 드러나기에, 사랑을 하나님이 기

능하도록 의도하신 것으로 보고 찬사를 보내는 시와 솔로몬의 이름이 연결 된다는 게 놀라운 일은 아닌 것이다 ( Childs 1979: 574; Saebø 1996: 270 ). 그렇다면 스파크스 ( Sparks 2005: 142 ) 가 제안한 것처럼, “아가는 다양한 사랑 노래를 흡

수 결합하여 어린 유대 여성에게 사랑과 성에 대한 예절을 가르치기 위해

고안한 지혜 본문”일 것이다. 이 견해에 의하면 솔로몬이 언급된 것은 성경

의 지혜 전통에 대한 연결인 것이다 ( Gledhill 1994: 22 ).

전통적 견해이자 오늘날 일부 학자 ( R. M. Davidson 2007: 561-569 ) 가 여전히 고

수하고 있는 견해는 표제로 실제 솔로몬의 저작성이 인정된 것인데, 이는 본문이 BC 10세기에 기원함을 의미하게 될 것이다. 구약에서 저자를 드러

내는 표현양식은 상당히 많이 솔로몬을 잠언과 전도서, 아가, 시편 72편과 127편에 연결시키는 데 사용되고 있다. 더욱이 후대의 묵시서인 솔로몬의 지혜서는 솔로몬의 작품으로 돌려지고 있음에도, 결정적으로 포로기 이후 에 기록된 것이었다. 아가를 보면 솔로몬은 일곱 번 언급되고 있으며 ( 1:1, 5; 3:7, 9, 11; 8:11-12 ), 왕이라는 말은 1장 4, 12절과 7장 5[6]절에서 더 일반적으로 언급되고 있다. 아가는 번영과 평화의 상황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솔로몬의 빛나는 통치에 꼭 어울리며 저자가 궁정의 풍요에 친숙했음

을 명증한다. 투르네 ( Tournay 1980: 8-9 ) 는 아가와 고대 애굽 시 및 예술과의 몇 가지 연관성에 주목하는데, 이는 솔로몬과 애굽 사이의 상업적 관계뿐

아니라 ( 왕상 10:28-29 ), 솔로몬이 바로의 딸과 혼인한 것으로도 ( 왕상 7:8 ) 설명될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아가 랍바 ( Canticles Rabbah; 아가다식 미드라쉬의 한 종류인 미드

라쉬 랍바 중 아가에 대한 해설-옮긴이 ) 에서 랍비 요나단 ( Rabbi Jonathan ) 은 아가는 솔로

몬의 젊은 시절 문학적 성취였고, 솔로몬은 생의 후반부에 이르러 잠언과

전도서를 저술했다고 추론한다 ( Dell 2005: 11 ).

1장 1절 표제부에 있는 ‘레’의 문법적 모호함 때문에 아가의 저자를 최종

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다. 게다가 아가를 한 개인이 하나의 통일체로 저술한

것인지, 아니면 서로 다른 사람이 여러 시들을 짓고 그것을 한 편집자가 하

나의 선집으로 엮은 것인지는 검토해야 할 문제다. 아가의 지배적 관점이 여

성임을 부정할 수 없다 해도, 이것이 필연적으로 아가의 저자를 여성으로 국 한하지는 않는다. 문학적 탁월성의 핵심은 저작된 본문에서 인물을 통해 설

득력 있게 의사소통하는 능력이며, 이를 위해 작가는 자기와 다른 성, 민족, 계층, 문화, 경제적 지위를 갖는 사람들의 시각을 반영해야 한다. 아가의 경

우 술람미에 대한 묘사에서 드러나는 통찰력은 최고의 문학적 기교를 보여

주는 지표이지만, 필연적으로 저자가 여성이었음을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델 ( Dell 2005: 8-26 ) 이 상술한 아가와 지혜 문학 사이의 수많은 명시적 묵시

적 연관성은 아가를 지혜 문학의 하나로 읽는 일의 정당성에 강한 지지 기

반이 된다. 아가가 지혜와 관련하여 갖는 성격 자체가 솔로몬을 아가의 실

제 저자로 상정할 필요도 없이 솔로몬을 언급한 이유를 설명해 줄 것이다. 고려해야 할 필요가 있는 또 다른 관련 요인은 아가의 문학 장르다. 만일 아가가 현실의 자전적 내러티브가 아니라 상상이 동원된 시적 가사로 기록

된 것이라면, 등장인물인 솔로몬과 술람미는 사랑의 이상화로 간주할 수 있 을 것이다. 완전이나 완성을 의미하는 ‘샬람’이라는 어근에서 파생된 이 두 인물의 이름은 아가가 두 특정 개인의 관계에 대한 역사적 사실 기록이 아

니라 이상적 친밀함에 대한 장문의 잠언 ( ‘마샬’ ) 으로 읽히도록 의도된 것임을 드러낼 가능성도 꽤 크다.

4. 해석적 접근

아가는 유대 학자뿐 아니라 기독학자에게서도 폭넓고 다양한 해석을 끌 어냈다. 알렉산더 ( Alexander 1996: 14 ) 는 아가 해석사를 개괄하는 유용한 문헌 목록을 만들었다. 다양한 해석 가능성에 대한 간결하면서도 실질적인 개요

는 롤리 ( Rowley 1965: 195-245 ), 화이트 ( 1978: 20-28 ), 머피 ( Murphy 1990: 11-41 ), 개

릿 ( Garrett 2004: 59-91 ) 의 저술에서 볼 수 있다. 포프 ( Pope 1977: 89-229 ) 는 자신의 방대한 아가 주석에서 아가를 다양하게 이해한 긴 해석사를 보여 주고 있

다. 더 최근에, 펠러티어 ( Pelletier 1989 ) 와 드 에나 ( de Ena 2004 ) 는 해석사에 대 한 상세한 분석을 엮어 냈다. 아가가 오래도록 촉발했던 해석상의 도전을 돌아보면서, 브레틀러 ( Brettler 2006: 185 ) 는 훌륭하게 논평한다.

아가의 문제를 가장 올바르게 담아낸 진술은 10세기 바벨론 유대 공동

체의 대표자인 사아디야 가온 ( Sa’adiya Gaon ) 의 것으로 여겨지는 직유다.

“이것은 열쇠를 잃어버린 자물쇠 같기도 하고, 혹은 살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비싼 다이아몬드 같다.”……아가의 기품은 익히 알려져 있지만, 여

전히 아가는 열리기를 거부한다 ( 그럼에도 많은 이가 아가의 잃어버린 열쇠를 찾았

다고 주장해 왔다 )

4.1. 비문자적 접근 아가의 해석사는 비문자적 해석, 특히 본문의 의미에 대한 알레고리적 해

석으로 크게 점철되어 왔다. 알레고리적 해석은 그리스 문화에 기인하는 것

으로 보이는데, 테오게네스 ( Theogenes ) 는 알레고리화를 통해 문자적 지시대

상을 넘어섰다 ( Louth 1994: 242-243 ). 그리스 전통 신화와 전설을 철학적 관념의

관점에서 재해석하는 일이 일어나는 건 적어도 어느 정도는 고대의 이야기 가 본질적으로 문제가 많기 때문인데, 고대의 이야기들은 폭력적, 비도덕적

이거나 아니면 긍정적인 윤리적 가치를 분명히 결여하는 경우가 많다 ( Menn 2000: 425-426 )

플라톤 철학과 후기 신플라톤주의 모두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 사이의

이원론을 고수했는데, 이 두 철학은 초기 유대교와 초기 기독교 주석에서

알레고리적 해석을 위한 원동력이었다. 하먼 ( Harman 1978: 67 ) 은 이렇게 평한

다. “만일에 육을 더 저급하고 덜 영적인 요소로 보는 영과 육의 이원론이

유지된다면, 이것이 성경해석 일반, 그리고 특별히 아가 같은 책의 해석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보는 일은 쉬워진다.” 오리게네스 ( Origen ) 는 아가에 대한 초기 알레고리 학자로 가장 유명한데, 그는 물질계를 악한 것으로 보

는 금욕주의와 영지주의 경향에 크게 영향 받았다 ( Tanner 1997a: 27-28 ).

알레고리는 이미지의 개방성을 활용하는데, 이 개방성은 이미지를 재해 석할 수 있게 한다 ( Kirsten Nielsen 1998: 182 ). 이를 통해 알레고리는 원래 무언가

다른 것을 말했던 고전 본문에서 문화적으로 관련 있는 메시지를 발전시키 기 위해 애쓴다 ( Menn 2000: 426 ). 초기 유대교와 기독교 해석자들은 아가의 성

적 묘사가 곤혹스러울 정도로 사실적임을 발견했기에 아가의 언어를 재해

석해 아가를 다른 다양한 신학적 주제에 대해 말하는 책으로 만들려 했다.

이렇게 아가의 성애적 언어에 대한 회피가 최근까지 아가 해석을 지배해 왔다.

최초의 유대 저술은 아가에 대해 거의 완전히 침묵한다. 외경 문헌과 솔

로몬의 지혜서, 필론이나 요세푸스에는 아가에 대한 뚜렷한 언급이 전혀 없

고, 에스라4서 ( Stone 2007: 226-233 ) 와 집회서 ( Lyke 2007: 59-60 ) 에만 아가에 대한

약간의 암시가 있을 뿐이다. 미쉬나 가운데 ‘타아니트’( 4.8 ) 에서만 벗과 연

인의 노래라는 맥락에서 아가 3장 11절이 인용되고 있다.

유대 미드라쉬 문헌 가운데 아가를 다룬 세 가지 주요 저술이 있는데, 아

가 랍바 ( Canticles Rabbah ) , 아가 악가다 ( Aggadat Shir Hashirim ) 와 아가 미드라

쉬 ( Midrash Shir Hashirim ) 가 그것이다. 랍비들은 이 해석본에서 아가의 개별 구

절을 취해 다양한 상황에 폭넓게 관련지었다 ( D. M. Carr 1998b: 175-176 ). 케이 츠 ( Kates 2006: 213 ) 가 주목한 바와 같이,

아가는 랍비들로 하여금 이스라엘 역사를 사랑 이야기로 읽고, 토라를

하나님과 인류 사이의 사랑의 대화로 읽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랍

비들은 관계성에 대해 가장 심오하고 상세한 지식을 형성해내려고 모색

하는 가운데, 아가의 언어가 갖는 열정적인 에너지, 관능적인 특수성과

풍부함, 성애적인 힘을 활용했다.

성경 본문 상호 간의 이 선별적 언급은 알레고리를 위한 해석적 토대를

세웠지만, 오리게네스가 기독교 해석가 가운데 알레고리를 대중화시킨지 수세기가 지난 후에야 완전한 알레고리가 유대 전통에 들어오게 되었다.

AD 7세기 혹은 8세기의 아람어 탈굼역은 아가에 대한 유대 최초의 광범

위한 역사적 알레고리를 담아냈는데, 이는 승리에 도취한 기독교 독법에 대 항하기 위해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 Dove 2000: 136-137 ). 이전의 미드라쉬 가 절충적인 주해 선집으로 구성되었던 것과 대조적으로 탈굼역에서 “이스 라엘의 역사 내러티브는 아가 전체를 처음부터 끝까지 ( 다시 말해 출애굽부터 메시 아의 도래에 이르기까지 )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구조로 출현하게 된다”( Menn 2000: 424 ). 아가의 본문과 이스라엘 역사 사이에 있는 이 체계적 상관관계는

아가에 대한 역사적 알레고리의 원형이 되었다 ( Alexander 1996: 23 ).

중세 전체를 거쳐 후대의 많은 유대 주석가가 아람어 탈굼역의 알레고리 적 접근을 따랐는데, 여기에는 사아디아 ( Saadia 10세기 ), 라쉬 ( Rashi 11세기 ), 이븐

아가 1:1

번역

1솔로몬의 아가라

1 The most excellent song which is of Solomon.

본문

해설

1장 1절. ‘쉬르 핫쉬림’ 구에 이어 최상급을 위한 히브리어의 전형적인 표 현양식이 나오는데 ( Waltke 14.5d ), 비슷한 경우로 출애굽기 26장 33절의 “지성

소”( holy of holies ) 와 전도서의 “헛되고 헛되니”( vanity of vanities ) 가 있다.

‘슐로모’를 시작하는 전치사 ‘레’를 무리 없이 해석하는 몇 가지 방법이 있는데, “-에게 헌정하는,” “-의 양식을 따라,” “-에 대하여”가 있다. 시편

의 표제에 빈번하게 사용되는 유사표현인 ‘레다위드’는 ‘레’가 저작자를 지 시하는 것으로 읽힐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보여 주지만 ( Murphy 1990: 119 ), 이 것이 확실하게 입증될 수 있는 것은 아니어서 본서는 모호하게 “-의”로 번 역했다.

고이테인 ( 1993: 65 ) 은 ‘아셰르’( which ) 의 모음표기를 ‘아쉬르’로 바꾸어 “내 가 노래할 것이다”를 의미해야 할 것이라고 보는데, 비견할 만한 시편 59편 16절의 경우는 솔로몬에게 헌정된 것으로 보이지만, 마소라 본문 독법에서

모음의 정정을 정당화할 근거가 거의 없다.

양식, 구조, 배경

이 시작 절에서 음성유희는 ‘쉬’ 발음을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것으로 이

책이 시적 성격을 가졌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최상급 구문 ‘쉬르 핫쉬림’은

아가가 문학적으로 탁월한 노래임을 보여 주고, 단수형 ‘쉬르’도 아가의 본

질이 일관성 없는 사랑노래 선집 ( 選集 ) 이 아니라 중심 주제에 관련된 몇 편

의 노래로 구성된 연작 ( 連作 ) 임을 암시하는 것일 수 있다 ( Exum 2005c: 91 ).

주석

1절. ‘쉬르’라는 용어는 독점적으로 사용되는 것은 아니지만 서정시 노래

를 지시하는 데 흔히 사용되고, 구체적으로 사랑 노래를 가리킨다 ( 참고. 사 5:1; 겔 33:32 ). 쉬르는 결혼 노래를 가리킬 가능성이 큰데, 결혼예식에 일반적으로

음악이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 렘 7:34; 16:9; 25:10; 33:11; 참고. Murphy, ABD 6: 151 ). 솔로

몬이 언급된 점을 저작자를 지시하는 것으로 여긴다면 이는 아가의 배경을 제시하는 것 같지만, 전치사 ‘레’의 의미가 애매하므로 우리는 이 문법 구문

을 가지고 아가의 저자에 대해 결론을 끌어내는 일에 신중해야 할 것이다.

서론 부분에서 아가의 저자에 대한 질문에 대해 상세히 논의해 놓았다.

해설

이 ‘쉬르’는 큰 잔치의 노래다. 아가의 내용은 하나님의 계획의 경계 안에

있는 인간의 사랑을 축하하도록 의도된 것이다. 이 뛰어난 연가곡을 구성하

는 노래들은 서로 무관한 서정시들의 임의적인 선집이 아니며, 촘촘히 기술 된 극시를 구성하는 것도 아니다. 친밀함이 처음의 끌림에서 성숙으로 진전 해 갈 때 이를 축하하는 인상주의적인 연가곡집이다. 솔로몬이 이 연가곡집 의 저자든 편집자든 혹은 아니든 적어도 솔로몬의 이름은 아가와 지혜전승 사이의 모종의 연관성을 제시하는데, 마치 모세가 율법과, 다윗이 시편과 연관된 것처럼 솔로몬이 히브리 지혜에 있어 모범적인 인물로 여겨졌기 때 문이다 ( 참고. 왕상 4:29-34[5:9-14] ). 아가를 잠언 5장 15-19절의 지혜 교훈에 대 한 주석으로 이해한다면 유효할 수 있다. 잠언은 아내와의 감정적이고 성적

인 친밀함 안에서만 독점적으로 쾌락을 찾을 것을 젊은이에게 권고하며, 구

약에서 “성애적 사랑은 유일하게 결혼이라는 배경 안에서만 용납”( Dell 2005: 17 ) 가능하기 때문이다. 헤스 ( Hess 2005: 39 ) 의 논증은 훌륭하다.

이처럼 솔로몬과 관련되어 있으므로 아가는 성경의 지혜 전통에 닻을

내리고 정경 내에서 이 내용에 관계하게 된다. 아가는 더 이상 성경에서

분리된 사랑 노래 모음집이 아니다. 아가는 세속적 인본주의로 폄하될

수 없는 통일된 의미를 취한다. 육체적 사랑을 맥락으로 하는 아가의 이

미지는 무시될 수도, 또 순전히 알레고리적 해석으로 대체될 수도 없다.

솔로몬과의 관련성 때문에 이 책은 교회가 하나님의 영감을 담은 것으로

인정한 문학의 역사적 지혜 전승 안에 자리하게 된다.

그렇다면 아가는 세속 연애시 그 이상이다. 솔로몬, 곧 히브리 지혜 전통

의 수호자가 언급됨으로 아가는 인간의 사랑을 바라보는 여호와의 관점 안

에 자리하게 되기 때문이다.

아가 1:2-4

번역

술람미

2 내게 입맞추기를 원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로구나

3 네 기름이 향기로워 아름답고

네 이름이 쏟은 향기름 같으므로

처녀들이 너를 사랑하는구나

4 왕이 나를 그의 방으로 이끌어 들이시니

너는 나를 인도하라 우리가 너를 따라 달려가리라

우리가 너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즐거워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더 진함이라

처녀들이 너를 사랑함이 마땅하니라

SHULAMMITH

2 May he kiss me with the kisses of his mouth! Because your love is more pleasurable than wine,

3 Your oils are good in scent, Your name is like refined oil, Therefore the maidens love you.

4 Draw me after you, let us run! The king has brought me into his chambers. Let us rejoice and be glad in you, Let us extol your love more than wine.

Rightly do they love you.

본문 해설

1장 2절. “내게 입맞추기를 원하니.” 블로흐와 블로흐 ( Bloch and Bloch 1995:

137 ) 는 ‘잇샤케니’가 히브리어 동사 ‘샤카’( ( 술을 ) 마시게 만들다 ) 를 떠올리

게 한다는 점에 주목한다. 게다가 마리아셀밤 ( 1988: 64 ) 이 관찰한 것처럼 입 맞춤의 음성적 효과가 ‘잇샤케니 민네쉬코트 피후’의 발음으로 모사 ( 摹

寫 ) 된다. “네 사랑.” 복수형 ‘도데이카’는 칠십인역과 불가타역에서 “네 젖가슴”으

로 번역되고 있는데, 아마도 히브리 단어 ‘다다이임’과 혼동한 것 같다. 아

가 ( 잠 7:18; 겔 16:8; 23:17도 참고하라 ) 에서 복수형 ‘도딤’은 전형적으로 성교를 지시 하고 ( Bloch 2006: 155 ), 이는 이곳 1장 2절에서 여인의 상상 가운데 실현되고 있는 것이다.

3인칭에서 2인칭으로의 전환은 4장 2절과 6장 6절에서도 나타나는데, 아

모스 4장 1절과 미가 7장 19절 등 다른 성경 시나 페니키아와 우가릿 문헌

도 마찬가지다 ( G. L. Carr 1984: 72 ). 하지만 페리 ( Perry 2005: 529-533 ) 는 2절의 첫

행이 솔로몬을 향한 술람미의 욕망이 담긴 탄성이라고 설득력 있게 주장한

다. 그리고 술람미는 1장 3c절에서 솔로몬에 대한 자신의 긍정적인 평가에 처녀들이 동의하게 된 이유를 정당화하는 세 가지 이유를 1장 2b절-1장

3b절에서 진술한다.

3절. 그의 “이름”( ‘쉠’ ) 은 전도서 7장 1절처럼 “향기름”( ‘쉐멘’ ) 과의 발음 유 희다. ‘투라크’는 본문이 의심스럽고, BHS는 ‘탐루크’( 화장처리 ) 로 읽는 독법

을 제시하는데, 에스더 2장 3, 9, 12절과 비슷하다 ( BHQ 56 ). 칠십인역과 아퀼 라역, 불가타역의 해석은 ‘무라크’( 쏟은 기름 ) 로 추측한 것이다. 이는 최고급 품질의 기름일 것이다. 히브리 용어 둘 다 어근 ‘라야크’에서 파생된 것으로

‘레아흐’와 발음 유희를 이룬다.

4절. 청유형을 3개 사용한 것 ( ‘나루차,’ ‘나길라,’ ‘나즈키라’ ) 은 실제 사실을 묘사 하는 게 아니라 술람미의 욕망이 담긴 언어를 보여 주는 것이다. “우리가

너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즐거워하니, /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더 진함이라” 라는 행은 일반적으로 1장 3절에서 술람미가 언급한 처녀들의 말로 여겨져 왔다. 하지만 폴 ( S. M. Paul 1995: 596 ) 은 이 절의 복수를 황홀경의 복수로 읽는

확실한 실례를 보여 주는데, 이는 몇몇 수메르어와 악카드어 연애 서정시에 쓰인 용례와 비슷한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술람미는 “황홀경 속에서, 오로 지 짝과 더불어 경험할 성적 환희만을 말하고 있다.”

‘메샤르’는 여기서 칠십인역처럼 “정의”라는 도덕적 의미가 아니라 “올

바르게”라는 의미를 가지고 부사적으로 사용된 방식의 목적격 ( accusative of manner; Joüon 126d ) 이다.

양식, 구조, 배경

아가에서 이 첫 번째 서정시는 여섯 개의 반복된 단어로 결속되어 있다.

독백 ( 1:2a; 1:4b ) 에서 술람미는 솔로몬에 대한 마음속 생각을 드러내는데, 이

독백은 술람미가 자신이 말하거나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을 말로 표현하는

직접 화법 형식을 띤 점에서, 솔로몬과 대조를 이룬다. 폭스 ( 1983: 200-201 ) 는

애굽의 사랑 노래에서 전용어법 ( 轉用語法; enallage ) 이라는 문학 장치를 사용한 것과 비슷하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아가에 나온 이 구절에 대해 다음처럼 평한다.

갑작스러운 인칭의 전환은 관점의 전환을 담아낸다. 이 여자아이는

1인칭 복수와 3인칭 복수 사이를 오락가락하는데, 자기 연인의 아름다움

에 대해 감상하면서 다른 소녀들과 더불어 1인칭 복수를 구성하고, 자기

연인이 사랑받을 만하다는 공적 평가를 말한 것에 확실한 객관성을 부여 하기 위해 무리에서 나와 말 그대로 춤추면서 3인칭 복수를 사용한다.

1장 4a절에서 술람미가 말하는 욕망의 말은 “너는 나를 인도하라”에서 시작하여 “우리가 달려가리라”로, 그리고 “왕이 나를 그의 방으로 이끌어 들이시니”로 이르면서 더욱 격해진다.

주석

2절. 이 연가곡집은 현실적 내러티브 상황을 구성함이 없이 바로 상상력 을 발휘하여 시작한다. 술람미는 독백을 통해 자신이 솔로몬에 대해 처음

가졌던 긍정적 인상과 솔로몬을 향한 처음 욕망을 표현한다. 술람미는 솔로

몬에게 입맞춤하려는 열망으로 자신이 의례적인 인사가 아니라 육체적으로

순수한 감정을 표현하려 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8장 1절이 보여 주듯이 혈

연관계가 없는 남녀가 이런 행위를 공개적으로 보이는 것은 이 문화에서는

사회적으로 수용 불가능한 것이었다. 술람미는 아가의 첫 장면에서도 솔로

몬의 사랑에 대한 기대로 자신이 취하게 되었음을 인정하는데, 이것이 술람

미에게는 포도주보다 더 큰 쾌락을 가져올 것이기 때문이다 ( 참고. 시 4:7; 전

9:7 ). 케엘 ( Keel 1994: 44 ) 은 ‘도딤’이 여기서 전희와 성교를 지시한다고 주장하

면서, 이것이 시적 상상의 언어이고 현실적 묘사가 아닐 수도 있다는 가능

성을 고려하지 못한다. 술람미는 아가의 첫 지점에서 친밀함을 향한 자신의

욕망 ( 2절 ) 과 솔로몬과의 교제를 원하는 자신의 욕망 ( 4절 ) 을 표현한다.

3절. ‘알라모트’는 궁정의 젊은 여인들을 지시하는데, 다른 곳에서는 예루

살렘의 딸들로 불리는 자들로서 왕비나 후궁의 지위에 오르지 않은 자들을

말한다 ( 6:8 ). 술람미만 솔로몬에게 매료된 유일한 여인은 아니었다. 궁정의

다른 여인들도 솔로몬을 매력적으로 여겼다. 이름은 사람의 성품과 명성을

지시한다 ( 참고. 삼상 25:25 ). 술람미가 솔로몬을 마음에 생각하고 있다면, 두 번

째 단계의 언급 또한 수반될 수 있는데, 그의 이름이 동사 ‘샬렘’( 완벽하다, 성취 하다 ) 에서 파생되었기 때문이다. 술람미가 솔로몬의 부와 지위와 세련됨에 대해 알고 있을지라도, 술람미는 솔로몬의 이름이나 명성에 가장 크게 감동

을 받았다. 솔로몬의 훌륭한 성품은 궁정의 이 젊은 여인이 인지한 그대로 입증된 것으로서, 술람미로 하여금 솔로몬을 매력적인 사람으로 느끼게 만

든 그의 뛰어난 특징이다. 술람미는 솔로몬을 미학적으로 이해할 뿐 아니라 윤리적으로도 이해한다. 솔로몬은 술람미가 즐거움을 발견한 남자이고, 술 람미가 존경하는 남자다.

4절. 술람미는 욕망의 언어를 사용하면서 솔로몬이 자신을 뽑아 그의 뒤 로 이끌기를 열망한다. 술람미는 지금까지 먼발치에서 솔로몬을 관찰했고, 자신이 본 것을 좋아했지만, 이제는 솔로몬을 더 잘 알고 싶어 한다. 술람미

는 두 사람이 함께 달리기를 원해 최초로 비유적 언어를 사용하는데 이런 언어는 아가에서 우위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연가곡 전체에 걸쳐 둘의 사 랑은 도회적 궁정 생활 내에서가 아닌, 자유롭고 자연스러운 목가적 배경

안에서 커 가는 것으로 그려진다. 술람미는 상상력을 통해 왕이 자신을 은 밀한 공간으로 데려가는 것으로 그려 내지만, 그럼에도 주목해야 할 것은

많은 이들이 추정하듯이 “그의 방”( ‘하다라이브’ ) 이 필연적으로 솔로몬의 침실

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 참고. Bloch and Bloch 1995: 139 ). 솔로몬의 침 실이 마음에 떠오르더라도 ( 3:4에서 이 용어의 용도를 참고하라 ), 이것은 선취한다는

의미에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큰데, 이는 술람미가 말하고 있는 순간에 실

제로 일어나고 있는 사건을 묘사한다기보다는 독자에게 이 관계에 실제로

도달하게 될 것을 알리는 것이다 ( Garrett 2004: 127 ).

해설

2-4절. 아가는 시로 기록되었으며, 현실 묘사가 아닌 생생한 상상력의 언

어를 사용한다. 아가는 시작부터 여성의 관점이 우세한 상태에서 출발한

다 ( Lavoie 2000: 77 ). 솔로몬을 향한 친밀함의 열망을 술람미가 자신의 은밀한

생각과 소원을 담은 내적 독백을 통해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 Arbel 2000: 93 ). 성경은 아주 드물게만 여성의 관점에서 사랑을 보여 준다 ( 삼상 18:20, 26에 서 다윗을 향한 미갈의 사랑 참고 ). 아가는 술람미의 감정과 사고에 우선적으로 주목 한다. 솔로몬의 내적 사고는 시인에 의해 훨씬 덜한 정도로 전개된다. 진정 한 친밀함은 한 사람이 매력적이고 가치 있다고 평가한 사람을 향한 욕망 을 통해 시작된다.

ECCLESIASTES & THE SONG OF SONGS

아볼로 구약 성경 주석(AOTC)의 목표는 성경 말씀의 신성함과 인격적인 면을 동등하

게 다루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데, 이 성경의 의미를 온전히 깨닫기 위해서는 성경이 기록된 시대의 언

어, 사회, 문화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학문적인 접근을 통해 구약 성경을 그리스도인

들에게 상세히 설명하는 이 주석 시리즈는, 구약 성경이 현대 사회를 사는 독자에게 중

요하고 가치가 있음을 증명한다.

세계적인 학자들이 집필한 이 주석 시리즈는 우선적으로 구약을 설교하는 목회자들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기획되었다. 하지만 성경을 연구하는 학자나 학생 누구라도 구약

지은이 대니얼 프레더릭스(Daniel C. Fredericks)

미국 미시시피주 벨헤이븐 칼리지 성경학 교수이자 교무처장 및 수석부총장이다. 저서로

는 『순간성에 대처하기』(Coping With Transience), 『코헬렛의 언어: 성격과 연대 재평가』 (Qoheleth’s Language: Re-Evaluating Its Nature and Date) 등이 있다.

지은이 대니얼 에스테스(Daniel J. Estes)

미국 오하이오주 시더빌 대학교 성경학 교수이자 성경신학 학장이다. 저서로는 『내 아들 아 들으라』(Hear, My Son), 『지혜서, 시편 핸드북』(Handbook on the Wisdom Books and Psalms) 등이 있다.

옮긴이 권대영

총신대학교 신학과를 졸업하고(B. A.), 동대학교 신학대학원을 거쳐(diplom), 일반대학원에 서 구약신학을 전공했다(Th. M.). 독일 쾰른 대학교에서 법학을 수학하고, 주로 주석서 번역 가로 활동하고 있다. 역서로는 『NAC 창세기1』(부흥과개혁사), 『구원계시의 발전사』, 『NIV 적용주석: 베드로후서·유다서』, 『WBC 예레미야(상)』, 『WBC 사무엘하』 등이 있다.

ISBN 978-89-6092-524-3 978-89-6092-479-6 (세트)

성경을 깊이 배우기 원한다면, 이 주석 시리즈를 통해 그 필요를 채울 수 있을 것이다. 값 35,000원 www.rnrb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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