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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보기_인간 모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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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 by Carl R. Trueman Originally published in English under the title The Desecration of Man: How the Rejection of God Degrades Our Humanity by Sentinel, an imprint of Penguin Publishing Group, a division of Penguin Random House LLC at 1745 Broadway, New York, New York 10019, USA. All rights reserved including the right of reproduction in whole or in part in any form. No part of this book may be used or reproduced in any manner for the purpose of training artificial intelligence technologies or systems. This edition published by arrangement with Sentinel, an imprint of Penguin Publishing Group, a division of Penguin Random House LLC This Korean translation copyright © 2026 by Revival and Reformation Press, Seoul, Republic of Korea 이 책의 한국어판 저작권은 알렉스리 에이전시 ALA를 통해서 Sentinel, an imprint of Penguin Publishing Group, a division of Penguin Random House LLC 사와 독점 계약한 부흥과개혁사에 있습니다. 저작권법에 의하여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 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 인공지능 기 술 및 시스템의 학습을 위해 이 책의 일부 혹은 전부를 사용하거나 복제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지합니다.

인간 모독 발행일 2026년 10월 10일 지은이 칼 트루먼 옮긴이 권대영 펴낸이 김은주 펴낸곳 부흥과개혁사 편집 권대영 디자인 박슬기 기획 이승영 마케팅 권성직 인쇄소 영진문원

판권 Ⓒ부흥과개혁사 2026 주소 서울특별시 마포구 양화로6길 9-20, 2층(서교동) 전화 Tel. 02) 332-7752 Fax. 02) 332-7742 홈페이지 http://rnrbook.com e-mail rnrbook@hanmail.net ISBN 979-11-7540-091-7(93230) 등록 1998년 9월 15일 (제13-548호)

는 교회의 부흥과 개혁을 추구합니다. 부흥과개혁사는 부흥과 개혁이 이 시대 한국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으며, 조국 교회의 부흥과 개혁의 방향을 위한 이정표이자, 잠든 교회에는 부흥과 개혁을 촉구하는 나팔소리요, 깨어난 교회에는 부흥과 개혁의 불길을 지속시키는 장작더미이며, 부흥과 개혁을 꿈꾸며 소망하는 교회들을 하나로 모아 주기 위한 깃발이고자 기독교 출판의 바다에 출항하였습니다.


목차

서론

광인과 메시아 7

1장

인간이란 무엇인가 21

2장

광인이 올 길을 닦다 47

3장

광인의 시간 77

4장

끝없는 성 103

5장

기계 복제 시대의 인간이란 무엇인가 145

6장

마지막 원수 173

7장

다시 포장된 허무주의인가, 되살아난 기독교인가 205

┃후기 241 ┃감사의 글 243 ┃미주 245 ┃색인 255


서론

광인과 메시아

이

책은 최근 몇 해 동안 동료들과 친구들과 나눈 수많은 대화 에서 나왔다. 주제는 현대 문화의 형편이었다. 대화는 대개

어떤 구체적인 물음에서 시작되었다. 기술의 역할, 포르노의 확산, 젠더를 둘러싼 격렬한 논쟁 같은 것들이었다. 그러나 이야기는 곧 그 물음들 뒤에 실제로 놓여 있는 일반적인 물음으로 옮겨 가곤 했다. 오늘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더 간단히 말해 “인 간이란 무엇인가?” 한때 서구에서 이 물음의 답은 어렵지 않았다. 인간은 피조물이며 자신을 지으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고, 그 형상에 따르는 목적에 맞추어 삶을 정돈해야 하는 존재다. 이 생각의 출처인 창세 기는 그 목적을 이렇게 규정한다. 나아가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 땅 을 정복하는 것, 창조주 하나님의 권위 아래에서 사는 것이다. 우리 는 이제 그 정의에 더는 동의하지 않는 세계에 산다. 우리가 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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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흔히 주술이 걷힌 세계로 경험된다. 내재적인 것 안에서 의 미와 중요성을 찾게 해 줄 초월적인 무엇이 있다는 생각을 도무지 그럴듯하게 여기지 않는 세계다. 막스 베버를 이어받은 사회학자들 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지난 200년 동안 진행된 사회의 산 업화와 관료화가 세계에서, 또 그 안에 사는 남녀에게서 마법과 신 비를 벗겨 냈다는 것이다. 인간은 특별히 어디를 향하지도 않는 진 화 과정이 가장 최근에 던져 올린 우연한 개체로 축소되었다. 오늘 우리가 느끼는 만사가 무너지고 있다는 감각은 이 탈주술화 과정의 논리적 귀결일 뿐이다(베버는 근대화 과정을 “세계의 탈주술화”라고 불렀다. 즉 전근대 사회는 주술화한 세계로서 세상이 신비, 정령, 마법적 힘으로 가득했다면, 근대 사회는 과학적 합 리성, 관료제, 계산 가능성이 지배하면서 그런 신비로움이 사라진 탈주술화한 세계라는 것이다. 베 버에게 있어서 “탈주술화”는 세상이 더 이상 마법적이지 않고, 모든 것이 합리적으로 설명·예 측·계산 가능해진 상태를 뜻한다 - 옮긴이).

우리 문화를 이렇게 해석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산업과 관료제 의 부상이 삶의 경험을 바꾸어 놓은 것은 분명하다. 카를 마르크스 는 19세기에 이미 이 점을 보았다. 공장 노동의 등장이 노동자와 그가 만들어 내는 것 사이의 관계를 바꾸어 놓았다고 지적한 것 이다. 토머스 하디와 프란츠 카프카처럼 서로 딴판인 소설가들도 근대 세계의 산고가 낳은 불안을 문학으로 표현했다. 그러나 인간 이 탈주술화되었다는 생각은 지금 우리 문화 풍토의 가장 두드러진 몇 가지 특징을 설명하지 못한다. 타라 이사벨라 버턴이 보고했듯 이 우리 시대의 특징은 초자연적인 것, 기이한 것, 놀라운 것에 대한 믿음이 사라졌다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새로운 종교가 만발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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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1) 종교적 믿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고를 수 있는 종교가 많아졌을 뿐이고 오늘날에는 자기 종교를 직접 만들어 낼 수도 있다. 우리 세계의 특징은 본래 종교적 신앙에 뿌리를 두었던 가치들에 대한 환멸 어린 무관심이 아니다. 오히려 한때 성스럽게 여겨졌던 모든 것을 황홀하게 파괴하는 데서 즐거움을 찾는 쪽에 가깝다. 예 를 들어 북아일랜드는 얼마 전까지 종교적 보수주의의 보루였다. 그런데 2025년 5월 벨파스트 시장은 시청에 새 “프라이드” 창을 공개했다. 스테인드글라스에는 한 청년이 그려져 있고 그가 입은 티셔츠에는 “얼스터에서 소돔 행위를 구하라”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이 문구는 1977년 이언 페이즐리[Ian Paisley]가 북아일랜드에서 벌인 동성애 비범죄화 반 대 운동의 구호 “소돔 행위에서 얼스터를 구하라”[Save Ulster from Sodomy]를 그대로 뒤집은 것이다-옮긴이 ). 시장은 이 행사를 알리는 트윗에서 이 창이 벨파스트가

“환대하며 포용하는 도시”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전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 창이 하는 일은 그보다 훨씬 많다. 성적 지향 때문에 두 려워하며 살지 않아도 되는 시민 문화를 장려하는 것은 하나의 일 이다. 공적 공간에서 항문 성교를 두고 고소해하다가 그것을 온라 인에서 신이 나서 떠벌리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도덕적 우려는 잠시 접어 두더라도, 1940년대 영화에 흡연 장면이 있다는 이유로 아마도 건강상의 위험 때문에 트리거 경고( trigger warning: 콘텐츠[글, 영상, 강의, 책 등]를 접하기 전에, 그 내용이 특정 독자/시청자에게 심리적으로 고통스러운 반응을 유발 할 수 있음을 미리 알려 주는 문구나 표시를 말한다-옮긴이 ) 가 붙는 세상에서 위험한

부작용이 충분히 기록된 성행위를 홍보하는 창이 시청에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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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은 아무리 보아도 이상한 일이다. 무엇이 이것을 설명하는가? 현대 사회는 위반을 자랑스러워하며 위반은 짜릿하다는 것이다. 현대 문화의 병리를 예언자처럼 분석한 도스토옙스키는 옥중 수 기 『죽음의 집의 기록』에서 이 점을 살핀다. 겉보기에 특징 없는 평 범한 사람이 어떻게 연쇄 살인자가 되는지 성찰하면서 그는 이렇게 논평한다.

그가 처음 죽인 사람은 압제자였고 원수였다. 그것은 범죄 지만 이해할 수는 있다. 그에게는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이 제 그는 원수가 아니라 처음 마주친 사람을 죽인다. 재미로 죽이고, 거친 말 한마디 때문에 죽이고, 눈길 한 번 때문에 죽 이고, 사소한 일로 죽이고, 그저 “비켜, 내 앞을 가로막지 마, 내가 지나간다”라는 이유로 죽인다. 마치 술에 취한 사람 같 고 열에 들떠 헛소리를 하는 사람 같다. 자기에게 성스러웠던 선을 뛰어넘고 나서 이제 자기에게 거룩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는 사실에 스스로 감탄하기 시작한 사람 같다. 모든 법과 권위 를 단번에 뛰어넘으려는 충동, 가장 끝없고 고삐 풀린 자유를 마음껏 누리려는 충동,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이 공포의 전율을 마음껏 누리려는 충동에 사로잡힌 사람 같다.2)

여기서 눈여겨볼 것은 모독의 언어다. 살인자가 그토록 짜릿하게 느끼고 그래서 자기 범죄에 그토록 중독되는 것은 성스러운 경계를 부정하고 거룩한 모든 것을 속되게 만드는 데서 온다. 규칙을 깨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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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 때, 그것도 이 경우에는 가장 큰 규칙을 깨뜨릴 때 그가 느끼는 힘의 분출이 그의 행동을 설명한다. 이것은 합리적이지 않다. 도스 토옙스키는 이어서 살인자가 무서운 형벌이 자기를 기다린다는 것 을 알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그 위험조차 그의 행위에 짜릿함 을 더한다. 물론 우리 가운데 연쇄 살인자는 거의 없다. 그러나 그런 일탈의 정서는 현대 세계 문화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토마스 만의 소설 『마의 산』에서 클라우디아 쇼샤는 도덕을 미덕이 아니라 죄에서 찾 아야 한다고 선언하며 이 음조에 목소리를 더한다. 그렇게 함으로 써 쇼샤는 오늘날 문화 엘리트에게서 특히 두드러지는 지배적인 문 화적 병리를 대표한다. 한때 성스럽게 여겨진 것을 위반하는 일이 그들의 으뜸가는 과업이 된 것이다. 그리고 성스러운 것을 위반하 는 일이 짜릿한 이유는 바로 그것이 우리를 신처럼 곧 우리 자신의 의미와 우리 자신을 지어내는 창조자처럼 느끼게 해 주기 때문 이다. 하나님이라는 관념이 전에 지켜 세우던 선을 넘기만 하면 우 리는 그로써 신의 자리를 차지한다. 이런 일은 우리 주변 어디에서나 보인다. 우리 사회가 “포르노화” 된 방식에서 이것이 드러난다. 성의 신비는 벗겨졌고, 당사자들의 동의라는 요건이 부과하는 것 말고는 어떤 한계도 남지 않았다. 한 때 일탈자나 괴짜로 여겨졌을 포르노 배우들이 이제 주류 유명인으 로 떠받들어진다. 기독교 도덕은 억압적이며, 그 금기를 깨뜨려야만 우리가 자유로운 존재로 자신을 실현하는 짜릿함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낙태를 옹호하는 이들은 한때 낙태가 ‘안전하고 합법적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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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물게’ 이루어지기를 바랐다. 낙태 자체가 좋거나 바람직한 일 이라는 생각을 피하면서 불완전한 세상에서 어쩔 수 없는 불행한 필요로 두는 표현이었다. 이제 그들은 자신의 낙태를 축하하고 심 지어 “외치며” 그것을 기본권으로 주장한다( 낙태 경험을 숨기지 말고 공개하 자는 취지로 2015년 미국에서 시작된 “네 낙태를 외쳐라”[#ShoutYourAbortion] 운동을 가리 킨다-옮긴이 ). 그리고 위반을 기뻐하는 이 태도는 어느 한 정치 진영에

국한되지 않는다. 온라인에 깊이 발 담근 우파 사이에서 최근 홀로 코스트 부정론과 히틀러 복권론이 인기를 얻는 것도 같은 방식으로 작동한다. 그 옹호자들은 자기들의 이념적 위반을 세상 앞에 늘어 놓고 반대자를 조롱하는 데서 기쁨을 느낀다. 더 주류에 속한 보수 정치도 여기에 취약하다는 것이 드러났다. 불법 이민자를 추방해야 한다고 믿는 것은 하나의 일이다. 소셜 미디어 계정으로 그 일에 얽 힌 아이들의 고통과 괴로움을 기뻐하고 즐기는 것은 전혀 다른 일 이다. 백악관의 X 계정조차 그런 신난 심술궂음에서 자유롭지 않다 는 것을 보여 주었다. 기독교 윤리에 뿌리를 둔 오래된 품위와 친절 의 기준을 부수는 일은 재미있고 진정성 있어 보이려면 그렇게 해 야 할 지경이 되었다. 이념적으로 미흡하다고 판정된 사람을 다룰 때 우파와 좌파의 각본은 똑같다. 비판자의 인격은 반드시 더럽혀 지고 비판은 반드시 조롱당한다. 물론 이런 행동은 하나같이 우리가 그들보다 우월하다고 느끼게 해 준다. 적어도 우리 눈에는 우리를

신처럼 만들어 준다. 실제로 소셜 미디어와 함께 현대인은 이런 위반 행위에 탐닉할 완벽한 수단을 손에 넣었다. 소셜 미디어는 조롱과 독설을 비교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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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 없는 일로 만들어 줄 뿐 아니라 그런 행동을 부추긴다. 클릭을 원한다면 터무니없거나 심술궂어야 한다. 자기 영향력을 키우는 일 에서 친절과 진실은 아무래도 덜 매력적이다.3)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우리 세계가 내놓은 답은 이런 것으로 보인다. 인간이란 한때 성스럽게 여겨진 것을 위반함으로써 자신이 신과 같은 존재임을 입증하는 자다. 그러나 그런 위반을 기 본값으로 삼는 기획은 갈수록 파산해 가는 것처럼 보인다. 흥미롭 게도, 어쩌면 필연적으로, 이 때문에 저명한 지식인과 문화계 인사 여럿이 현대 문화가 그토록 적으로 여기는 기독교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이런 일이 전례 없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짚어 둘 만하다. 1950년 「파르티잔 리뷰」는 “종교와 지식인”이라는 제목으로 당대 를 대표하는 문화계 인사들의 글을 연재했다. 필자로는 한나 아렌 트, W. H. 오든, I. A. 리처즈, 존 듀이, 로버트 그레이브스, A. J. 에이 어, 시드니 훅, 폴 틸리히가 참여했다. 종교에 대한 이 관심의 부활 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이 2차 세계대전 직후에 곧 아우슈 비츠와 원자폭탄의 현실이 인간 존재에 대해 이제껏 마주한 적 없 는 물음을 제기하던 때에 일어났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여기 참여한 지식인들은 인간에 대한 물음이 곧 하나님에 대한 물음이기 도 하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하나님이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는 인류를 완전히 파멸시킬 수도 있는 홀로코스트 이후 핵 시대의 인간학적 도전에 세계가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가의 토대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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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후반과 21세기 초에도 종교적 신앙의 상실과 임박한 서 구 문화의 파산 사이의 연관을 본 목소리들이 있었다. 로저 스크러 턴 경은 건강한 문명에 성스러움의 감각이 얼마나 중요한지 논증하 는 데 수십 년을 바쳤다. 알렉산드르 솔제니친도 기독교의 중요성 을 비슷하게 호소했다. 그는 1997년 모스크바에서 한 “문화의 고 갈”이라는 연설에서 문화가 계속 쇠퇴하고 시들어 가는 근본적이고 내재적인 이유가 그 세속화에 있다고 말했다.4) 여기에 한 가지만 덧 붙이고 싶다. 눈앞에 닥친 이 문화적 궁핍은 성스러운 것이 그저 희 미해져서가 아니라 능동적으로 파괴되었기에 더욱 부추겨졌다. 문화 엘리트들 사이에서 종교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난 것은 반가 운 일이다. 그러나 그 관심이 기독교가 준다고 여겨지는 문화적 유 익만이 아니라 기독교의 진리 주장과도 씨름하지 않는다면, 20세기 중반의 종교에 대한 관심만큼이나 덧없이 지나가고 말 것이다. 성가대가 팔레스트리나의 다성 음악을 부르는 라틴 미사에 참석하 는 것은 사람을 사로잡는 미적 경험일 수 있다. 『공동기도서』는 주 일 아침에 어떤 즐거움을 줄 수 있다. 기독교가 낳은 위대한 건축과 예술이 삶을 풍요롭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의 바탕에 있는 종교적 교의가 사람을 고양하는 허구가 아니라 참되다고 믿지 않는다면, 그것은 더 넓은 문화가 스스로 소진되어 갈 때 버텨 낼 신앙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현대 문화의 가장 독특하고 문제적 인 측면 하나를 되풀이할 뿐이다. 취향을 진리로 착각하는 일이다. 이어지는 장들에서는 모독이야말로 현대 문화의 역학과 그것이 구현하는 인간학적 혼란을 이해하는 열쇠임을 논증하려 한다. 한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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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스럽게 여겨진 경계를 넘어설 수 있다는 데서 자유롭고 자율적임 을 입증하는 현대적 인간관이 모순되게도 인간을 아무것도 아닌 것 으로 축소했다는 것이 그 논지다. 하나님을 모독함으로써 인간은 얄궂게도 자신을 모독했다. 그러므로 답은 세계를 어떤 식으로든 다시 주술화하는 막연한 일이 아니다. 버턴이 보여 주었듯이 이 현 대 세계에는 주술적 기회가 넘쳐난다. 답은 오히려 성별( 聖別 ) 이다. 그러나 성별은 그것이 응답해야 할 모독이 그렇듯 구체적인 형태를 지닌다. 인간이 참되게 성별될 때만 그의 모독은 극복된다. 그러려 면 기독교 신앙과 실천이 준다고 여겨지는 문화적 유익으로 돌아가 는 것으로는 안 되고 실제의 기독교 신앙과 실천으로 돌아가야 한다. 1장 “인간이란 무엇인가?”는 지금 우리의 풍토가 인간학의 위기 로 특징지어진다고 논한다. 여기서는 하나님에 대한, 그리고 하나님 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에 대한 정통 기독교의 입장과 거기서 따라 나오는 함의를 제시한다. 핵심 관심사는 하나님의 형상을 지 닌다는 것의 의미다. 곧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은 사물이 아 니라 인격이며, 하나님 자신의 도덕적 구조에 상응하는 도덕적 구 조를 지닌 도덕적 존재이고, 이 형상이 규정하는 구체적이고 주어 진 한계와 의무 및 의존, 그리고 구체적인 목적을 지닌다는 것이다. 현대인은 자율을 주장하면서 그런 한계와 의무와 목적을 억압적이 고 진정하지 못한 것으로 배격한다. 그러므로 신학적으로 말하면 그는 모독의 기획으로 자신을 규정한다. 곧 자신이 하나님의 형상 을 지닌 자라는 관념에 전통적으로 근거를 두고 있던 한계와 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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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목적을 위반함으로써 자신을 규정하는 것이다. 2장 “광인이 올 길을 닦다”와 3장 “광인의 시간”은 니체의 유명 한 우화에서 출발한다. 『즐거운 학문』에 나오는 이 이야기에서 한 광인이 광장으로 뛰어들어 거기 모인 무신론자들을 향해 열변을 토 하며, 자기들의 무신론이 지닌 문화적·도덕적 의미를 보지 못한다 고 그들을 몰아세운다. 그들은 하나님을 치워 버렸다는 것이, 니체 의 표현을 쓰자면 하나님을 죽였다는 것이 이제 자기들이 신이 되 어 자기 가치와 자기 의미를 형성해야 함을 뜻한다는 사실을 깨닫 지 못한다. 무신론자들은 처음에는 조롱으로, 이어서 어리둥절함으 로 그를 맞이한다. 그러자 그는 자기가 너무 일찍 왔다고 선언한다. 그들의 무신론이 지닌 함의가 드러나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 함의가 분명해지는 때 곧 광인의 시간이 이제 우리에 게 닥쳤다는 것이 이 두 장의 논지다. 우리 세계는 광인이 묘사한 바로 그 세계이며, 하나님의 죽음이 지닌 함의가 분명해지고 있는 세계다. 하나님을 거부한 우리 세계는 초월적인 무엇도 믿지 않으 므로 자기 자신에 근거해 자기 가치를 만들어 내야 한다. 창조주가 없는 세계에서 창조의 과업은 우리 몫으로 남는다. 우리는 자기 창 조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좋게 보든 나쁘게 보든, 우리가 광인이 내놓은 도전에 부응하고 있다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다. 실 제로 우리 자신을 이해하는 지배적인 방식인 표현적 개인주의는 자 기표현과 자기 창조를 그 심장에 두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위반을 향한 우리의 취향을 강화하고 부추긴다. 무엇보다 기술은 우리 자신을 만들어 가면서 우리의 몸조차 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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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수 있다고 여기게 할 만큼 막대한 힘을 우리 손에 쥐여 주었다. 그리고 이것이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는 자리는 인간 존재의 가장 중요한 영역인 성과 생식과 죽음이다. 4장부터 6장까지는 이 세 영 역을 살피며, 현대의 기술 사회에서 이것들이 어떻게 변형되었고 어떻게 인간의 모독을 드러내는지 검토한다. 4장 “끝없는 성”은 성 혁명을 다룬다. 성 혁명은 해방을 약속했지만 성을 더 큰 목적론에 서 떼어 내고 성을 이 시대의 중심 강박으로 만듦으로써 모순되게 도 인간을 대상으로, 사물로 축소했다. 5장 “기계 복제 시대의 인간 이란 무엇인가?”는 이 이야기를 이어받아, 체외수정 같은 생식 기술 이 그 의도가 아무리 선했다 해도 아기를 상품으로 만들었고 우생 학의 부활을 가능하게 했음을 살핀다. 여기서도 인간의 막대한 기 술적 힘은 오래된 자연적 한계와 목적을 넘어서게 해 주었지만, 그 대가는 인간 자신의 축소였다. 6장 “마지막 원수”는 죽음을 대하는 현대의 태도를 평가한다. 죽음도 성과 출산처럼 한때는 의례로 둘 러싸여 있었고 성스러운 의미를 부여받았지만, 이제 우리는 죽음을 외면하거나 사소하게 만들거나 관리하려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 리는 다시 우리 삶의 가치를 떨어뜨리고 한때 거룩하게 여겨진 것 을 모독한다. 실제로 성과 생식과 죽음이라는 이 세 영역 모두에서 현대 문화는 기독교가 이것들에 부여한 한계와 의무와 목적을 신처 럼 통제하려 들며,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을 모독해 왔다. 마지막 장 “다시 포장된 허무주의인가, 되살아난 기독교인가?”는 이 모독의 문화에 대한 세 가지 응답을 살핀다. 앞의 둘은 교의가 아닌 “문화적” 기독교에 최근 호소하는 리처드 도킨스의 인간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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및 기독교의 여러 측면을 우호적으로 전유하는 로저 스크러턴 경의 태도다. 도킨스와 스크러턴은 서로 다르지만 둘 다 니체가 말한 허 무주의라는 고발 앞에 취약하다. 기독교 신앙의 진리에 대한 견고 한 헌신 없이 기독교의 관념만 사용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현대 문 화의 문제가 인간의 모독이라면 그 답은 인간의 성별이다. 여기서 세 번째 응답에 이른다. 곧 기독교에 대한 깊이 뿌리내린 헌신, 다시 말해 기독교의 교의와 예전적 실천과 도덕적 규범으로 돌아가는 것 이다. 신조가 되는 신앙의 교의에 헌신하지 않으면서 기독교가 준다고 여겨지는 문화적 유익만 유지하려는 것은 니체가 규정한 의 미의 허무주의에 빠지는 일이다. 도킨스의 인간주의도, 기독교의 미 학과 문화적 유산을 좋아하는 지식인들이 기독교를 피상적으로 전 유하는 것도, 모독으로 가득한 이 세계에서 인간을 참되게 성별하 기에는 너무 약하다. 끝으로 두 가지를 덧붙여 둔다. 첫째, 기독교인 자신이 인간을 모 독하는 주체였던 때가 있었다. 특히 다른 인간을 사물처럼 대할 때 그러했다. 근대 초기 노예무역을 기독교인이 지지한 것이 가장 뚜 렷한 예다. 기독교와 오늘의 문화가 다른 점은 이것이다. 전자에게 그런 모독은 교회가 자신의 가르침, 특히 하나님의 형상을 지님에 대한 가르침을 일관되고 포괄적으로 적용하지 못한 결과였다. 후자 에게 모독은 현대인을 움직이게 하는 바로 그 심장에 놓여 있다. 둘째, 이 책은 기독교가 참되다는 것을 논증하지 않는다. 이것은 기독교 변증서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마주한 문제의 성격을 밝 히려는 시도다. 산업화와 관료제의 탓으로 흔히 돌려지는 탈주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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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모독


는 우리로 하여금 자신을 사물이나 숫자로, 사회라는 기계의 톱니 로 여기게 만든다. 그러나 이것은 문제의 크기를 보기에는 너무 좁 은 개념이고 게다가 재주술화라는 좀 막연한 해법을 가리킨다. 한 때 거룩하게 여겨진 것을 파괴하며 즐거워하는 문화를 규정하기에 는 모독이 훨씬 나은 말이다. 요컨대 이 책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답하는 길이 둘뿐이라고 논한다. 우리는 니체의 도전을 받아들여 자기 창조의 기획을 이어 가며 스스로 신이 될 수 있다. 아니면 교의와 예전적 실천과 윤리를 지닌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일 수 있다. 우리는 니체 주의자가 되거나 기독교인이 될 수 있다. 안정된 제3의 길은 없다. 우리는 오늘 누구를 따를지 택해야 한다. 기독교의 메시아인가, 니 체의 광인인가? 그 밖의 모든 것은 허무주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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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인간이란 무엇인가

몇

해 전 나는 영국에서 영향력 있는 팟캐스트 ‘트리거노메트 리’에 출연했다. 진행자는 둘 다 무신론자였다. 두 사람은

전통적 자유주의 가치, 특히 표현의 자유를 강하게 옹호하는 이들 이었고, 그 가치를 위협하는 새로운 진보적 관념들을 불편해했다. 그들에게는 중요한 물음이 하나 있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 없이 도 도덕적인 사회를 세울 수 있는가?’ 이 물음은 수사적인 것도 아니었고 “걸렸다” 하고 몰아붙이려는 덫도 아니었다. 진심에서 나온 물음이었다. 그들은 사회의 도덕적 혼란이 점점 심해진다고 보았고, 어떤 형태의 실용주의나 공리주의 에 근거하는 답변들이 허약하다는 것을 알고 씨름하고 있었다. 내가 보기에 그들은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증거를 찾으려고( “도덕 질 서가 있다면 반드시 하나님이 계셔야 하는가?” ) 물은 것이 아니었다. 자기들이 헌

신하고 있는 인간주의적 가치를 떠받치기에 무신론이 정말 튼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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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다고 내가 생각하는지 정말로 도덕규범 궁금해한 것이다. 그 가 치들 가운데 다수는 나 자신도 공유하는 것이다. 우리 시대가 깊고 때로는 불안한 문화적 현기증에 시달리고, 도덕 적·정치적 지형을 가늠할 만한 단단한 발판을 어디서도 찾지 못하 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한때 아무도 의심하지 않던 사회적 선들 이 엄청난 압력을 받고 있다. 표현의 자유, 종교의 자유, 부모의 권 리 같은 것들이다. 도덕규범은 끊임없이 흔들리며 자리를 잡기가 무섭게 낡은 것이 되어 버린다. 어제까지 동성 결혼을 위해 앞장서 싸운 영웅이 생물학적 성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순간 오늘의 트랜스 혐오자가 된다. 정확히 누구를 여자라고 부를 수 있는가를 놓고 급 진 페미니즘 진영이 이토록 험악하게 갈라지리라고 20년 전에 누가 예상할 수 있었겠는가! 생명 자체의 가치조차 의문에 부쳐져 여러 서구 민주주의 국가가 조력 자살을 합법화했다. 50년 전이라 면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 일이다. 게다가 이 변화는 초당적으로 상 당한 합의를 얻었는데, 우리 시대의 큰 쟁점들이 좌파 대 우파라는 전통적 정치 분류에 잘 들어맞지 않는다는 것을 이 사실이 잘 보여 준다. 실제로 인간됨의 의미에 가해지는 압력은 좌파가 선호하는 트랜스 로비와 퀴어 이론가들에게서만 오지 않는다. 우파에서 우생 학과 트랜스휴머니즘에 대한 관심이 떠오르는 것 또한 이 문화적 국면을 상징한다. ‘트리거노메트리’ 진행자들에게 나는 이렇게 답했다. 가능한 모든 세계를 다 상상할 수는 없으니 신적인 것을 참조하지 않고도 도덕 질서를 세울 수 있는 세계가 어딘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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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론적 맥락에서 그 일을 해내기가 훨씬 어려우리라는 것만은 분명 하다고 말이다. 그때는 더 풀어 놓지 않았지만 여기서 한 가지를 덧 붙이고 싶다. 그런 도덕규범은 불안정하다는 사실, 즉 자기 자신 말 고는 그 규범을 정당화할 근거를 전혀 갖지 못한다는 사실 때문에 문제는 더 커진다. 도덕은 사회적 취향에 좌우되는 것으로 전락하 고 말 것이다. 완전한 군중 지배라고까지는 할 수 없어도, 그보다 딱 히 더 예측 가능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이 물음 뒤에 놓인 또 하나의 물음에 있다. 무신론자들 이 “하나님 없이 도덕적 사회를 세울 수 있는가?”라고 물을 때 그들 이 묻는 것은 그런 세계가 어떤 가치를 반영할 것인가만이 아니다. 그들은 서로 무관한 여러 위기가 우연히 겹친 사태에 반응하고 있 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총체적인 인간학적 난제에 반응하고 있다. “무엇이 도덕적인가?”라고 묻는 것은 곧 “인간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라고 묻는 것이다. 그리고 그 물음에 답하려면 “인간”이 무 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인간의 삶에는 특정한 목표나 목표들이 있 어야 하는가? 그 목표는 모든 인간이 공유하는 것인가, 아니면 특정 공동체나 심지어 개인이 만들어 내거나 선택하는 것인가? 우리는 우리 자신을 스스로 규정하는가? 아니면 우리가 누구이고 무엇인지 는 우리 모두 “인간 본성”이라 불리는 무엇을 공유한다는 사실이 곧 우리가 도덕이라 부르는 행동상의 기대치가 주어져 있다는 사실 이 어느 정도 결정하는가? 인간으로 산다는 것이 주어진 도덕적 구조를 포함한다는 생각은 유래가 오래되었다. 고대 이래 철학자들은 인간의 삶에 도덕적 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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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가 있다고 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이상적인 인간은 폴리스 의 공적 삶에 참여하는 정치적 인간이었다. 그 반대편에 있는 사람 곧 자기 사적인 일( 문자적으로 “the idiotic man”, 아리스토텔레스가 쓴 그리스어는 이디 오테스 [idiōtēs] 로, 공적 삶에 참여하지 않고 사사로운 일에만 매인 사람을 가리켰다. 영어 ‘이디 엇’ [idiot] 의 어원이며, 저자가 문자 그대로 옮기면 “이디엇 같은 인간”이 된다고 말한 것은 이 어 원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 - 옮긴이 )에만 관심을 두는 사람은 열등한 존재였고

인간이 마땅히 되어야 할 모습이 아니었다. 칸트에게 인간은 인격 이며, 사물처럼 대우받아서도 안 되고 다른 이를 사물처럼 대해서 도 안 되는 존재다. 인간은 주체이지 객체가 아니다. 다른 사람을, 이를테면 자기 아내를 사물처럼 대하는 남자는 자기 아내를 비인간 화하며 그로써 자기 자신도 비인간화한다. 아리스토텔레스와 칸트 는 서로 달랐지만 둘 다 인간에 대한 물음이 도덕의 물음 곧 인간이 어떻게 행동하기로 택하는가의 물음과 얽혀 있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하나님 없이 도덕적 사회를 세울 수 있는가?”라는 물 음은 이렇게 바꾸어 쓸 수 있다. “하나님을 참조하지 않고도 인간을 도덕적 존재로 이해할 수 있는가?” 더 간단히 말해 “인간이란 무엇 인가?” 인간은 어떤 의미에서 자기 본성이 그에게 부여한 방식대로, 기독교인이라면 하나님이 주신 본성이 부여한 방식대로 행동하게 되어 있는 피조물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고 묻는 것은 어떤 답을 내놓기도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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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인간됨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를 드러낸다. 지구상의 다른 어떤 피조물도 자기 자신에게 그런 물음을 던지지 못한다. 아메바 는 아메바의 존재가 어떤 것인지 성찰하려고 걸음을 멈추지 않 는다. 여러 면에서 인간과 가깝기는 하지만 침팬지와 고릴라도 자 기 존재의 의미를 묵상한다고 볼 근거는 없다. 오직 인간만이 자기 본성과 자기 의미에 대한 물음을 제기할 능력이 있다. 철학자들은 “자의식”이라는 말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 규정하느라 애를 먹 을지 모른다. 그러나 인간이 그 말에 상응하는 무엇을, 다른 어떤 생 명체도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경험한다는 것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 물음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모든 것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일상 언어가 이를 보여 준다. 어떤 끔찍한 사건이 뉴스로 보도될 때 우리는 그런 짓은 “인간답지 못하다”라고 말한다. 모든 인간에게 규 범이 되어야 할 도덕적 행동에 그 일이 어긋난다는 뜻이다. 반대로 이타적인 친절을 다룬 보도라면 우리는 그 소식이 “인간 본성에 대 한 믿음을 되찾아 준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 일이 우리 모두 감 탄하며 마땅히 지향해야 할 도덕적 목표로 여기는 어떤 자질을 구 현한다는 뜻이다. 인간 본성을 어떻게 이해하는지 곧 “인간이란 무 엇인가?”라는 물음에 우리가 어떻게 답하는지가 삶에 대한 우리의 도덕적 관점을 형성하고 타인과 세계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를 이 끈다. 그 문제를 깊이 성찰해 보았든 그저 직관만 지니고 있든 마 찬가지다. 그러나 이 물음의 함의는 도덕을 넘어선다. 그것은 인간 마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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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깊은 외침과도 맞닿아 있다. 나는 누구이며, 나 자신과 내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 같은 물음을 지극히 개인적인 방식으로 던진 것이다. 우리 가운데 언젠가 한 번쯤 이 물음을 던져 보지 않은 사 람이 있겠는가! 알베르 카뮈는 이 문제를 아마 가장 극적으로 표현 했다. 그는 자살이야말로 다른 모든 것이 거기 딸린 철학의 근본 물 음이라고 보았다. 다른 어떤 물음을 던지기 전에 먼저 계속 살기로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카뮈만 한 철학적 통찰이 없어도 우리는 자기 삶에서 같은 문제와 마주한다. 내가 하는 일 가운데 가 치 있는 것이 있는가? 아침에 왜 일어나야 하는가? 남편, 아버지, 직 원, 이웃, 시민, 소비자처럼 이토록 여러 역할을 오가는데 나는 도대 체 누구인가? 아니, 내 존재의 한복판에 “나”라는 것이 있기는 한가? 그리고 그 가운데 무엇이라도 존재의 큰 그림 안에서 의미가 있는가? 대체 무엇 하러 이 모든 일에 애를 쓰는가? 이것은 모두 저 하나의 물음을 개인의 삶에 적용해 변주한 것이다. 인간이란 무엇 인가? ‘트리거노메트리’ 팀이 하나님 없이 도덕적 사회를 세울 수 있겠 느냐고 내게 물었을 때 그들은 이 더 깊은 물음을 다른 말로 옮겨 놓고 있었다. 그렇다면 바로 이 물음이 성경에 나온다는 것도 놀랄 일이 아니다. 구약의 시편 기자는 시편 8편에서 이렇게 묻는다. “사 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1) 여기서 “주”는 물론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며, 물음을 이렇게 던지면서 시편 기자는 인간 과 그의 의미에 대한 물음이 하나님에 대한 물음과 떼어질 수 없음 을 드러낸다. 그는 자기 물음에 스스로 이렇게 답한다. “그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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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요 컨대 인간이 지금의 그인 것은 하나님이 그를 그렇게 지으셨기 때 문이다. 인간이 지닌 모든 의미와 모든 뜻과 모든 가치는 하나님이 신적 창조주로 실재하심을 전제하는 저 신적 창조 행위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 하나님을 신화로, 허구로, 경건한 헛소리로 거부할 수도 있다. 어떤 신의 존재도 통째로 부정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우리의 답도 달라진다. 그 답은 언제 나 신학과 종교에 대한 우리의 견해가 형성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는 기독교인과 무신론자가 의견을 같이할 수 있다. 인간학은 신학과 떼어 놓을 수 없다.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 유대교와 기독교는 하나님과 인간의 이 연결을 자기 신앙 안에서 명시한다. 창세기 1장에서 끌어낸 믿음 곧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믿음이 그것이다. 모든 정통 기독교 전통, 다 시 말해 역사적 기독교 신앙에 헌신한 모든 기독교 전통은 이 주장 을 인간됨의 의미를 이해하는 열쇠로 본다. 그리고 이 가르침이 하 나님께 부여하는 우선성 때문에, 기독교가 “하나님”이라는 말로 무 엇을 뜻하는지 이해하는 일이 중요해진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 요 소를 요약한 성공회의 39개조 신조는 제1조에서 하나님을 이렇게 서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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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은 오직 하나이시니, 영원하시 며, 몸과 부분과 정념이 없으시고, 능력과 지혜와 선하심이 무한하시며,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지으시고 보 존하시는 분이다. 그리고 이 신성의 하나 됨 안에 세 위격이 계시니, 본질과 능력과 영원하심에서 하나이신 성부와 성자 와 성령이시다.2)

삼위일체의 세밀한 문제들을 여기서 다 다룰 필요는 없다. 요점은 이렇다. 하나님은 여기서 스스로 충족하시고 영원하시며 지성을 지 니신 존재로 제시되며, 의도를 가지고 세계를 창조하시고 그 존재 를 유지하시며 자신의 지혜와 선하심에 따라 자기 능력으로 세계를 이끄시는 분으로 제시된다. 또한 하나님은 인격적 존재이시다. 하나 님의 지혜와 선하심이 이를 가리키며, 기독교 신학에 따르면 영원 한 인격적 교제 안에 계시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존재하신다는 사실도 이를 가리킨다. 덜 전문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은 중력에 견 줄 만한 비인격적이고 도덕적으로 무심한 힘이 아니시다. 정통 기 독교 신학은 창조가 유출이 아니라고 곧 햇살이 해에서 필연적으로 뻗어 나오듯 하나님이 존재하시므로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무엇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창조는 자유로운 행위이며, 하나님은 창조하지 않기로 택하셨더라도 여전히 하나님이셨을 것이다. 창조에는 목적 도 있다. 창세기 1장과 2장의 창조 서사는 그 구조에서 하나님의 행 위가 나름의 논리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 준다. 그 논리는 하나님이 자신이 하신 모든 일을 기뻐하며 안식하시는 데서 절정에 이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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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남자와 여자가 땅에 충만하도록 그들을 이어 주는 결혼과 성적 연합으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는 것은 무슨 뜻 인가? 가톨릭교회의 『간추린 사회교리』는 이 교리와 그 함의를 유 익하게 요약해 준다.

성경의 근본 메시지는 인간이 하나님의 피조물임을 선포하 며(비교. 시편 139,14-18), 인간이 하나님의 모형이라는 점을 인간을 특징짓고 구별하는 요소로 본다. “하느님은 이렇게 자

신의 모상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느님의 모상으로 사람 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그들을 창조하셨다”(창세 1,27). 하나님은 인간이라는 피조물을 창조 질서의 중심이자 정점에 두신다. 사람(히브리어로 ‘아담’)은 흙(‘아다마’)으로 빚어지고 하나님은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신다(비교. 창세 2,7). 그러므로 “하느님의 모상이기에 인간 개개인은 인 격의 존엄을 지닌다. 인간은 그저 ‘어떤 것’이 아니라 ‘어떤 이’다. 인간은 자기를 알고 자기를 소유하며 자유로이 자기를 내주고 다른 인격체들과 친교를 이룰 수 있다. 나아가 인간은 은총으로 자기 창조주와 계약을 맺도록, 다른 어떤 피조물도 대신할 수 없는 믿음과 사랑의 응답을 하나님께 드리도록 부 르심을 받았다.”3)

이 진술은 여러 중요한 점을 짚는다. 첫째, 인간은 예외적인 피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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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이며 하나님의 창조 질서의 정점에 놓여 있다. 성경은 다른 어떤 동물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고 서술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 인간 예외성을 여러 방식으로 확인한다. 우리는 본능에 따라서 만이 아니라 의도를 가지고 무엇을 만들 수 있다. 집을 지으려는 사 람은 설계와 재료를 자유롭게 고르지만, 참새는 그저 본능에 따라 둥지를 지을 뿐이다. 달리 말해 우리는 미래를 그려 보고 과거의 교 훈을 기억하며 스스로 그 미래를 향해 자유롭게 나아간다. 물론 인 간에게도 본능은 있다. 길에서 누가 내게 벽돌을 던지면 나는 본능 적으로 몸을 피한다. 그러나 우리 삶의 아주 많은 부분에서 우리의 행위는 자유롭고 의도적이다. 식당에서 무엇을 고를지에서부터 누 구와 결혼할지에 이르기까지 그렇다. 우리는 자유롭고 의도를 지닌 존재로서 우리의 미래를 향해 행동한다. 둘째, 인간은 사물이 아니라 인격이다. 더 철학적인 표현으로 돌 아가면 우리는 객체가 아니라 주체다. 이것은 우리가 특별한 존엄 곧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위 교리서 진술이 가리키듯 자의식적 자 유로 특징지어진다는 뜻이다. 세속의 시대인 지금도 우리는 인간 존엄과 인권을 말하는데, 이 언어가 그 점을 직관적으로 반영한다. 사회로서 우리는 다른 종조차 객체가 아니라 주체로 대하려는 경향 이 점점 강해지고 있다. 그리고 얄궂게도 이 의인화 행위 자체가 우 리의 예외성을 드러낸다. 다른 어떤 피조물도 권리라는 틀로 생각 하지 않으며, 그 개념을 다른 종에게까지 확장하는 일은 더욱 없다. 이 인격적 차원은 타인과의 관계도 형성한다. 기독교 신학이 삼위 일체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영원한 인격적 교제로 제시하듯이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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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인 우리도 서로 인격적 교제를 누린다. 우리는 사랑과 우정을 경 험한다. 모든 피조물이 번식하고 먹어야 하지만, 인간은 이 기본적 인 행위를 종의 존속이나 잃어버린 열량의 보충을 훨씬 넘어서는 의미로 둘러싸 왔다. 우리는 마음에 둔 상대의 마음을 얻으려 섬세 한 춤을 추고, 그 춤이 성공하면 그와 사랑을 나눈다. 음식을 먹는 일도 의례로 둘러싸며, 벗들과 식사하고 포도주를 나누며 좋은 사 람들과 대화하는 자리를 기뻐한다. 요컨대 우리는 이런 행위에 다 른 어떤 동물도 부여하지 않는 인격적 의미를 부여한다. 그리고 우 리가 그렇게 하는 것은 우리가 인격이기 때문이다. 셋째, 인간은 하나님이 주신 능력을 지니며 그 능력은 책임과 이 어져 있다. 우리는 고립된 개인이 아니라 서로 교제하고 하나님과 교제하도록 지음 받았다. 달리 말해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피조물이라는 사실로 말미암아 주어진 목적이 있다. 앞 서 말했듯이 우리는 우리의 미래에 대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자유는 하나님이 주신 본성에 의해 제한되며, 우리의 목 적을 온전히 스스로 정하는 데까지 미치지는 않는다. 인간 존재에 는 주어진 목적론이 있다. 성경 서사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다는 것 안에 그의 목 적론적 실존을 명시적으로 포함한다. 이 목적 가운데 어떤 것은 신 학자들이 “자연적”이라 부르는 것이다. 수평적이고 지상적인 영역 의 활동을 가리킨다. 우리는 생육하고, 우정을 누리고, 이웃을 섬기 고, 손님을 대접해야 한다. 이 목적 가운데 일부는 성경에 명시되어 있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에게 그들을 지으신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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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을 정복하고 다른 피조물을 다스리는 데 있다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인간이 자기 목적을 위해 마음대로 땅 을 착취해도 좋다는 무제한의 승인이 아니다. 신의 형상은 본래 그 신이 그 영토를 소유하고 있음을 표시하는 것이다. 힌두교 사원 안 에 힌두교 신들의 형상이 놓여 있는 것도 그래서다. 하나님의 형상 을 지닌 인간은 하나님이 이 세계의 주인이심을 나타내는 표지이 며, 그 안에서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로 행동하여 자기 욕망이 아 니라 하나님의 뜻을 수행해야 한다. 실제로 창세기 서사는 인간이 자기 길을 가며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하나 님의 명령을 어긴 순간을 인간이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에서 떨어 져 나와 결국 동산에서 쫓겨나는 순간으로 본다. 달리 말해 인간에 게는 하나님이 주신 목적이 있으며, 성경 서사에서 재앙을 불러오 는 것은 그 목적에 맞게 행동하지 못한 그의 실패다. 이것은 기독교에서 인간에게 초자연적 목적 곧 하나님과 나누는 친밀한 교제라는 목적이 있음도 보여 준다. 창세기는 동산에서 있 었던 아담과 하와의 실패를 수직적 의미를 지닌 사건으로 제시하 며, 성경 서사의 나머지 전체는 이 상황을 해결하는 일에 전력한다. 그 해결은 마침내 하나님 자신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로 성육신하 여 육신을 입으시고 그로써 인간을 하나님과의 온전한 인격적 관계 로 되돌리심으로 이루어진다. 창세기의 타락 기사와 그것이 자연적 목적과 초자연적 목적을 이어 놓는 방식은 자의적인 것이 아니다. 자연적 목적의 추구는 최종적인 초자연적 목적과 어긋나지 않는 방 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달리 말해 기독교는 이 지상 영역의 도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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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하나님의 성품과 궁극적 목적에 따라 결정적으로 형성된다고 본다. 우리는 주변 세계에 하나님의 성품을 비추어야 하고 이 삶을 영생을 위한 준비로 써야 한다. 이 삶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 은 우리 신분이 우리 삶을 하나님께 성별( 聖別 ) 해 드리는 것으로 특 징지어지는 삶이다. 넷째, 위의 논의에서 흘러나오는 것으로, 우리는 또한 몸을 지닌 존재다. 정통 기독교는 하나님 자신이 몸을 지니신다는 것을 부정 한다. 앞에서 인용한 성공회 39개조 신조 제1조가 그렇다. 그러나 창세기 기사는, 그리고 뒤이은 성경 전체의 증언은 몸을 지닌다는 것을 ‘우리가 누구이며 하나님이 주신 목적을 어떻게 이루어 가는 지’에 결정적인 것으로 만든다.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지만, 생육 하라는 명령이 이루어지는 수단인 성적 연합은 몸으로 하는 행위이 며 실로 인간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친밀한 인격적 상호작용 이다. 그리고 성행위는 다른 여러 종교 전통에서도 그렇듯이 성경 전체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 것으로 다루어진다. 몸은 우리 자신 과 분리될 수 있는 것으로 취급되지 않는다. 성에 대한 기독교의 가 르침은 유대교와 이슬람의 가르침과 마찬가지로 성을 인간됨의 의 미에 본질적인 것으로 본다.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우리가 반영하고 대리하는 일은 성적 관계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난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몸에 목적론을 부여한다. 실로 그것은 인격으 로서 우리가 지닌 목적론의 한 측면이다. 이 모든 것은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 일련의 의존성과 의무와 한계와 목적을 지닌 존재로 창조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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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다.’ 뒤에서 우리 시대의 병폐에 몇 가지 해법을 제시할 때 이 요 약이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는 이성적이고 의존적이며 유한하고 목적론적인 존재다. 우리가 이 특성들을 규범으로 정식화한 것이 곧 인간됨의 의미를 규정하는 도덕규범이다.

하나님 없는 인간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지 않았다면 이야기는 전혀 달라진다.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또는 우리가 누구인지와 무 관하다면, 또는 우리가 자기 창조자 노릇을 하도록 거들기 위해서 만 존재한다면, 인간됨의 의미에 대한 우리의 생각도 달라져야 한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는 것이 함축하는 한계도, 의 무와 의존성도, 주어진 목적도 우리에게는 없다. 우리는 자유롭게 태어났고, 자율로 규정되며, 자기 운명의 주인이다. 어떤 한계와 어 떤 목적을 존중할지는 우리가 정한다. 요컨대 우리는 우리 자신을 창조한다. 우리가 자율적이며 아무것에도 매이지 않은 자기 창조자라는 이 믿음이 우리 시대 인간학적 혼란의 한복판에 놓여 있다.4) C. S. 루 이스는 1940년대에 『인간 폐지』에서 이 점을 가리켰다. 그는 현대 세계에서 인간이 내재적이고 필연적인 도덕적 구조를 빼앗겼다는 것을, 달리 말해 그들에게 주어진 본성을 이루던 저 한계와 목적을 빼앗겼다는 것을 보았다. 루이스가 보기에 그런 인간에게는 아무런 참된 의미도 없는 존재가 될 운명만 남아 있었다. 독일 신학자 헬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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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 틸리케도 현대 허무주의를 다루면서 실질적으로 같은 점을 짚 었다. 인간 본성에 한계와 목적이 있음을 부정하는 것은 인간 본성 에 의미 있는 실질( substance ) 이 있음을 부정하는 것이다. 도덕적 한 계와 도덕적 목적 곧 텔로스를 지닌 것으로 인간 본성을 이해할 때 만 삶이 의미 있을 수 있다.5) 사실 이 자기 창조의 인간학은 목적의 상실만 불러오지 않는다. 그것은 한계와 목적이라는 관념 자체에 대한 특정한 태도까지 길러 낸다. 자신을 이렇게 이해하는 사람은 목적과 한계를 문제로, 밖에 서 부과된 것으로 보게 된다. 참으로 인간답다는 것이 참으로 자율 적이라는 뜻이라면, 거기에는 타율적이거나 스스로 택하지 않은 모 든 “자연적” 요구를 배격하는 일이 따른다. 진정성이 으뜸가는 개인 적 미덕으로 떠오르고, 그 미덕은 우리를 외부의 요구와 기대를 거 스르는 쪽으로 몰아간다. 그리고 서구에서 그런 제약을 부과한 가 장 큰 원흉은 물론 전통적 기독교와 그 기독교가 예배하는 하나님 이다. 그러므로 현대 서구 문화의 인간학은 전통 종교, 특히 기독교 에 자연히 적대적이며, 우리의 자율에 맞추기 위한 극적인 수정이 나 전면적 폐기 가운데 하나를 요구한다. 이것 자체가 성스러움에 관련된 사안이다. 하나님이 주신 의무를 거부하고 하나님이 주신 한계를 위반하며 하나님이 주신 목적을 배 격하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는 생각을 배격 하는 일인 동시에 하나님 자신을 배격하는 일이다. 2장에서 보겠지 만 니체는 19세기에 이 점을 분명히 이해했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 이 자율적이라는 이 현대적 관념을 종교의 언어로 고쳐 말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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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 그것은 모독 행위를 그 본질의 한복판에 놓는 인간학이다.

모독이란 무엇인가 “모독”은 강한 말이다. 현대 세계를 서술하는 데 쓰여 온 “탈주술 화” 같은 말보다 강하다. 이 말은 거룩한 것 곧 예사롭지 않은 의미 를 지닌 것을 의도적으로 짓밟거나 파괴한다는 뜻을 함축한다. 누 군가 집이나 자동차를 부술 수 있다. 그것들이 주인에게 아무리 귀 한 물건이라 해도 그 훼손을 보통 모독이라고 이해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누군가 묘비에 낙서를 뿌리거나 교회나 회당이나 모스크를 부수면 우리는 그 행위를 서술하려고 직관적으로 성스러움의 언어 를 끌어온다. 신성모독이 일어났다고, 훼손된 그 대상이 모독당했다 고 말하는 것이다. 벽돌과 회반죽이 무너져 내렸다는 것만이 문 제가 아니다. 거룩한 무엇이 침해당한 것이다. 기독교의 관점에서 보면 같은 것을 인간에게도 적용할 수 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기에 우리는 초자연적 목적 곧 흔히 지복직관이라 불리는 영원한 하나님 향유를 향해 맞추어진 도덕적 구조를 지니고 지음 받았다.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자로서 인간은 자기 모든 행동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비추어 내는 과업을 맡는다. 우리의 목적이 주변 세계에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는 데 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이것이 구약 윤리의 한복판에 놓여 있다. 토라에서 하나님은 나그네에게 친절을 베풀라고 이스라엘에 명하 시는데, 그들이 애굽에서 나그네였을 때 하나님이 그들에게 친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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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모독


베푸셨기 때문이다( 신 10:18–19 ). 그러므로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은 개인적 차원을 넘어서는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의 이 름을 더럽힌다. 그것은 모독이다. 가톨릭교회를 뒤흔든 사제 성 학 대 사건을 떠올리기만 해도 이것이 실제로 무슨 뜻인지 알 수 있다. 아이들에 대한 학대는 피해자에게 상처를 입히고 하나님의 형상대 로 지음 받은 그들을 모독했을 뿐 아니라, 마땅히 거룩해야 할 사제 직과 교회를 더럽고 부패한 것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이것은 현대에만 있는 일이 아니다. 창세기 서사에는 동산의 모독 이 나온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대한 규칙을 위 반한 사건이다. 앞에서 이 일이 곧바로 종교적 결과를 낳아 그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에서 쫓겨났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이야기가 곧바로 형 가인이 동생 아벨을 살해하는 데로 옮겨 간다는 사실도 분명 의미가 있다. 아벨의 제사는 하나님이 받으셨고 가인의 제사 는 받지 않으셨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 서사는 신학적으로도 인간학적으로도 깊은 의미를 지닌다. 가 인은 자기 동생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격으로 대하지 않고 없애 버려야 할 문제로 대하며 그를 죽인다. 그는 먼저 동생을 사물로 생각했고 그다음에 그의 생명을 빼앗았다. 그는 말 그대로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한 것이다. 모독이라는 주제 곧 거룩한 것을 속되게 만든다는 주제는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실이다. 제사장들은 여호와께 “다른 불”을 드 리다가 죽는다( 레 10:2 ). 사울왕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아 왕국 을 빼앗긴다. 복음서의 광야 시험 기사에서는 사탄이 그리스도께

1장 ┃ 인간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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