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025 by David Vandrunen
Originally published in English as Faith in Exile: Psalm 119 and the Christian Life by Christian Focus Publications Ltd., Ross-shire, Scotland, UK. All rights reserved.
This Korean edition is published by arrangement of Christian Focus Publications Ltd. through rMaeng2, Seoul, Republic of Korea.
This Korean translation edition © 2026 by Revival and Reformation Press, Seoul, Republic of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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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흥과개혁사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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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배 중의 신앙
발행일 2026년 8월 1일
지은이 데이비드 반드루넨
옮긴이 권대영
펴낸이 김은주
펴낸곳 부흥과개혁사
편집 권대영 디자인 박슬기 기획 이승영 마케팅 권성직
인쇄소 영진문원
판권 Ⓒ부흥과개혁사 2026
주소 서울특별시 마포구 양화로6길 9-20, 2층(서교동)
전화 Tel. 02) 332-7752 Fax. 02) 332-7742
홈페이지 http://rnrbook.com e-mail rnrbook@hanmail.net
ISBN 979-11-7540-082-5 (03230)
등록 1998년 9월 15일 (제13-548호)
는 교회의 부흥과 개혁을 추구합니다. 부흥과개혁사는 부흥과 개혁이 이 시대 한국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으며, 조국 교회의 부흥과 개혁의 방향을 위한 이정표이자, 잠든 교회에는 부흥과 개혁을 촉구하는 나팔 소리요, 깨어난 교회에는 부흥과 개혁의 불길을 지속시키는 장작더미이며, 부흥과 개혁을 꿈꾸며 소망하는 교회들을 하나로 모아 주기 위한 깃발이고자 기독교 출판의 바다에 출항하였습니다.
제가 2019년 후반에 시편 119편을 처음 설교하기 시작했을 때, 그 설교를 책으로 엮을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저는 한 강단에서
만 설교하기보다는 여러 교회에서 설교하는 편이지만, 평소에는 보
통 성경의 한 권을 본문으로 시리즈 설교를 합니다. 회중이 시리즈
전체를 듣지 못한다 해도, 적어도 제게는 이런 방식으로 설교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제가 시편 119편을 설교하기 시작한 데는 두
가지 기본적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첫째, 그 무렵 저는 하나님의 율
법에 대한 폭넓은 연구를 포함하는 큰 프로젝트를 시작하고 있었으
므로, 시편 119편에 집중해서 시간을 들이는 것이 그 연구와 분명
히 관련이 있었습니다. 둘째, 시편 119편을 셀 수 없을 만큼 자주 읽었음에도, 이 시편 전체가 제 마음속에 제대로 와 닿은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특정 연들이 어떻게 어우러지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고, 어느 정도 만족감을 느꼈지만, 시편 전체가
어떻게 하나로 이어지는지는 전혀 명확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긴
시편을 일정 분량 설교해 보는 것이 이 문제에 좀 더 분명한 이해를
얻을 좋은 기회가 되리라고 기대했습니다.
저는 시편 전체를 끝까지 설교하겠다는 결심도 없었고, 그 당시에
는 어디까지 진행해야 할 줄도 알지 못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시편
119편 전체를 두 연씩 묶어 설교하게 되었습니다. 그 과정을 대단
히 즐겁게 누렸고, 거기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그럼에도 이 설교
들을 한 권의 책으로 엮어 출판한다는 것은 결코 당연한 일이 아니
었습니다. 저는 많은 책을 쓰고 편집해 왔지만, 이런 종류의 책은 한
번도 다루어 본 적이 없었습니다. 두 가지 강한 고려 사항이 제 마
음속에서 출판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냈습니다.
첫째 이유는 적어도 제 관점에서 본 설교의 본질입니다. 설교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교회를 통해 세우신 설교자가, 특히 주의 날
에 모인 자신의 언약 백성 공동체에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구
두 의사소통 양식입니다. 구두 의사소통은 문서 의사소통과 전혀
다릅니다.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언약 백성 사이의 역
동적 만남은 의자에 앉아 책을 읽는 것과는 다릅니다. 설교에서 설
교자는 성경 본문을 연구하고 묵상하고 그 본문을 두고 기도한 사
람으로서, 자신의 마음을 회중의 마음을 향해 엽니다. 사정이 그
렇다면, 문자로 옮겨진 어떤 설교든 중요한 무언가를 잃게 됩니다.
제게는 이 손실이 더 크게 느껴졌습니다. 저는 설교 원고를 작성하
지 않고 비교적 짧은 개요만 가지고 설교하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저는 애초에 설교를 글로 읽는다 는 것에 대해 약간 회의적이며,
게다가 시편 119편에 대해 참고할 만한 설교 원고가 없었습니다.
시편 119편에 대한 설교를 책으로 출판하는 것을 망설이게 된 둘
째 이유는, 제 설교가 어떤 면에서 최상급의 설교에 속한다거나 소
규모 청중을 넘어 더 널리 배포될 만하다는 착각을 전혀 품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설교들에 대해 깊이 숙고했지만, 시편
119편을 다루는 일이 제 인생의 가장 중요한 작업이었던 적은 전혀
없었습니다. 저는 다른 많은 책임을 감당하면서 이 설교를 준비하
고 전했는데, 그중 일부는 시편 119편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과 에
너지를 요구했습니다.
그럼에도 여러분이 이 글을 읽고 계신다는 사실은, 제가 이런 장
애물들에도 불구하고 이 설교들을 짧은 한 권의 책으로 엮어 냈다
는 뜻입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둘째 망설임과 관련해, 제가 드릴 수
있는 최선의 답은 이것입니다. 곧 저는 시편 119편을 처음부터 끝
까지 작업한 일을 진심으로 즐겼고, 많은 것을 배웠고, 그로 인해 복
을 받았으며, 배운 바를 다른 이들과 나누는 데서 어느 정도 만족을
얻습니다. 제가 수십 교회에서 이 본문들을 설교하는 동안, 평범한
그리스도인들이 시편 119편을 어떻게 읽고 연구하는지에 대한 많
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저와 안면이 없는 분들이 예배 후에 제게
다가와, 매일 아침 시편 119편의 한 구절을 읽고 묵상한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또 어떤 분은 시편 119편이 사용하는 하나님 말씀에
대한 모든 용어를 함께 살펴본 성경공부 모임에 대해 들려주었습
니다. 어떤 분은 감옥에 있을 때 시편 119편을 ( 거의 ) 전부 암송한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시편 119편을 사랑하
고, 이 시편에 대해 더 배우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제가 이 설교들을 책으로 엮기로 결정한 둘째 이
유로 이어집니다. 시편 119편을 하나의 일관되고 논리적으로 구성
된, 그리스도 중심적인 시로 다루면서, 이 위대한 시편을 지은 기자
가 철저히 구약( 옛 언약 ) 의 신앙을 따르면서도 신약( 새 언약 ) 과 새 창
조가 가져올 더 위대한 것들을 간절히 고대했던 경건하고 탁월한
시인이었다고 보는 철저한 연구는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시
편 119편에 대한 옛 설교집들이 있고, 그중 일부는 본서보다 훨씬
더 길지만, 그 책들은 시편 119편을 단일하고 상호 연결된 하나의
시로서가 아니라 176개의 개별적이고 경건한 진술로 다루는 경향
이 있습니다. 시편 119편을 이런 방식으로 강해하는 것이 분명 유
익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제 설교가 시편 119편을 다루는 방식이
아니며, 그런 방식이 시편 119편을 다루는 최선의 방식이라고도 생
각하지 않습니다. 더욱이 지난 여러 해 동안 저는 시편 119편에 대
해 목회자들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수없이 가졌는데, 시편 119편
중 몇 연을 설교했거나 언젠가 이 시편을 설교하고 싶다고 말한 분
은 많았지만, 시편 119편 전체를 다 설교했다고 말해 준 목회자는
한 분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책에 수록된 설교들이 지
금까지 쉽게 구하기 어려웠던 자료를 제공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
을 것입니다. 이 설교들은 시편 119편 연구를 좋아하고 더 배우고
싶어 하는, 성경을 사랑하는 평범한 그리스도인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고, 시편 119편을 설교하고 싶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분명하지 않았던 목회자들을 자극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저는 어떤 목회자에게도 이 본문들을 저와 똑같은 방식으로
설교하라고 기대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제 설교가 시편
119편 설교에 조금이라도 동기나 통찰을 줄 수 있다면, 저는 그에
유배 중의 신앙
대해 매우 감사할 것입니다.
위에서 설명드린 첫째 망설임과 관련해 말씀드리면, 비록 설교와
책 이 두 방식으로 정확히 같은 말이 선포되거나 기록된다 해도 하
나님의 언약 백성 공동체 가운데서 설교를 듣는 것은 책을 읽는 것
과 같지 않다는 사실은 결국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설교를
글의 형태로 보존하고 배포하는 기독교의 오랜 전통이 있으며, 두
가지가 서로 다르다는 것이 둘 다 유익할 수 없다는 의미는 아닙
니다. 이 책을 만들면서 저는 가능하고 또 읽을 만한 정도까지는 제
가 특정 설교에서 실제로 말한 바에 대체로 충실히 하려고 노력했
습니다. 저는 자동 음성 인식 서비스를 이용해 제가 설교한 교회들
에서 녹음된 설교의 전사 대본을 만들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 대
본을 손보았습니다. 일부는 대본의 오류를 손보아야 했습니다. 예컨
대 히브리어 알파벳의 첫 글자는 “알렙”( Aleph ) 이지 어떤 대본이 적
은 것처럼 “올리브”( Olive ) 가 아니며, 저는 “우리 시편 기자”( our psalmist ) 이라고 말했지 결코 “오사마”( Osama ) 라고 한 적은 없습
니다. 저는 또한 말하는 습관에서 비롯된 어색한 표현들을 걷어 내 고, 원고를 읽지 않고 즉흥적으로 말할 때 불가피하게 생기는 거친
부분들을 다듬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장들은 제가
실제로 전한 설교에 가깝습니다.
또한 시편 119편의 후반 연들을 진행하면서 배운 바에 비추어 이
전 설교들을 다듬으려는 유혹을 받았습니다. 어쩌면 이 설교들을
조금 더 낫게 할 수도 있었겠지만, 두 가지 주된 이유로 그렇게 하
지 않았습니다. 한 가지 이유는, 이 책을 만들 거라면 방금 위에 적
11
은 바와 같이 책에 실제 설교를 담고 싶어서였습니다. 대본을 수정
해 설교를 더 낫게 고친다면, 그것은 다른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시리즈의 첫머리에 전한 설교를 시리즈가 끝나는 지점에서 돌아보
며 부족함을 깨닫는 것은 설교자들에게 흔한 경험입니다. 성경의
한 권을 진지하게 연구하고 묵상한 설교자가 그 책 전체를 다 설교
한 뒤에, 몇 달 또는 몇 년 전에 설교했던 첫 장을 그때보다 더 잘
이해하게 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설교는 설교자가 끝없이 손보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설교자는 설교하고 나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후반 설교에 비추어 초반 설교를 다듬지 않기로 한 제 결정은, 그렇
지 않을 경우보다 이 설교들에 더 진짜에 가까운 느낌을 주리라 생
각하므로, 독자들이 그 점을 좋게 봐주시기를 바랍니다. 초반에서
후반 설교로 읽어 나가는 동안, 독자들은 이 시편에 대한 제 사고의
발전과 성숙을 인지할 수도 있습니다.
다만 이 책의 마지막 설교는 시편 전체에 대한 회고입니다. 그 설
교에서 저는, 특정 연에 초점을 맞춘 설교에서 충분히 다루지 못했
던 초반 연들의 주제와 강조점들을 끄집어냅니다. 마지막 설교를
전할 때, 저는 처음 시편 119편을 설교하기 시작했을 때보다 시편 119편 전체가 무엇에 대한 것인지를 더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이어지는 글이 설교이므로, 저는 그동안 도움을 받은 자료들에 대 한 각주나 다른 출처 표시를 일절 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특별히
감사를 표하고 싶은 두 자료를 여기서 언급해 두겠습니다. 제 친구
이자 캘리포니아의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이전 동료였던 하이웰 존
스( Hywel Jones ) 는 여러 해 전에 시편 119편으로 채플 설교를 했고,
그 후에 『시편 119편과 삶』( Psalm 119 for Life, Evangelical Press, 2009 ) 을
저술했습니다. 그의 설교와 책이 위대한 시편에 대한 제 사고를 자
극해 준 것에 감사합니다. 학술 자료들 가운데서는 윌 솔( Will Soll ) 의
『시편 119편: 구조, 형식, 정황』( Psalm 119: Matrix, Form, and Setting, Catholic Biblical Association, 1991 ) 이 각 연의 주제와 시편 전체에 걸친
주제의 전개를 이해하는 데 특히 도움이 되었습니다.
저는 설교집을 자주 읽지는 않지만, 설교집의 많은 저자가 독자들
에게 자신이 이 설교들을 출판한 것은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의 유
익을 위해 출판하라고 강권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제게 하나님 나라의 유익을 위해 이 설교들을 출판 하라고 강권하지 않았으므로, 독자들이 이 설교들을 유익하지 않다
고 여긴다 해도 저는 누구도 탓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제게 좋은
아이디어를 준 제 아들 잭에게 감사합니다. 저는 원래 시편 119편
에 대해 배운 것들을 담은 짧은 책을 처음부터 써 볼까 생각했습
니다만, 다른 여러 가지 일이 많다 보니 가까운 시일 안에 시간을
낼 수 있을지 막막했습니다. 잭은 그저 설교를 그대로 출판하면 어
떻겠느냐고 제안했습니다. 저는 그것이 정말 최선의 길이라고 판단 했고, 그 제안을 해 준 잭을 고맙게 생각합니다.
또한 저를 초청해 설교하게 하고 이 설교들을 경청하며 너그럽게
받아 주신 많은 교회에 감사합니다. 저는 에스콘디도 정통장로교
회( 캘리포니아주 에스콘디도 ), 크라이스트 연합개혁교회( 캘리포니아주 애너
하임 ), 웨스트민스터 정통장로교회( 캘리포니아주 웨스트민스터 ) 등 세 교
회의 녹음을 ( 양해를 구하지 않고 ) 사용했으므로, 누구나 접근할 수 있
게 최신 설교를 보관해 준 이 교회들에도 감사합니다. 에스콘디도
정통장로교회와 로스앤젤레스 개혁장로교회에서만 이 열두 편의
설교를 모두 전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사역 안에서 설교자와
회중이 함께 누리는 신비로운 교제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전인적 순종
시편 119:1〜16


로마서의 첫 주요 단락인 1장 중반에서 3장 중반까지에 해당하는

부분에서 바울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인류 전체의 죄성을 묘사
함으로써 구원 교리에 대한 그의 위대한 가르침의 토대를 놓았습
니다. 여러분도 기억하겠지만, 그 논의 가운데 바울은 자기 당대의
유대인들에 대해 말했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모세의 율법을 “지식
과 진리의 본체”( 롬 2:20, 개역개정 “지식과 진리의 모본” ) 로 여겼다고 말했 습니다. 로마서 2장의 더 큰 논증 가운데서 바울은 이 사람들의 죄 를 폭로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그들을 정죄한 것은 율법에 대해
이렇게 생각했다는 점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그들을 정죄한 것은 그들이 율법을 진리로서 행하지 않았다는 점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이 그들을 정죄한 것은 그들이 이 율법에 순종하지 않았다는
점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지식과 진리의 본체로
본 것은 옳았습니다.
진리의 본체 또는 진리의 모양이나 형태, 이 말은 흥미로운 표현
방식 아닙니까? 이 말은 모세의 율법 자체가 알 수 있는 모든 진리
를 계시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말은 모세의 율법이 어떤
특별하고 강력한 방식으로 하나님 백성이 정말로 알아야 할 진리를
요약해 놓았다는 사실을 분명히 말합니다.
자, 우리는 바울 당대의 유대인들이 그런 생각을 어디서 얻었는지
궁금해할 수 있습니다. 그에 대한 매우 그럴듯한 한 가지 답은 시편
119편입니다.
시편 119편은 뛰어난 시편입니다. 여러 이유에서 잘 알려진 시편
입니다. 한 가지 이유는 물론 그 길이가 길기 때문입니다. 이 시편이
“긴 시편” 또는 “위대한 시편”으로 불리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 시편은 성경에서 단일한 장으로는 가장 깁니다. 시편 119편은
또한 아크로스틱 시( acrostic poem ) 라는 점에서도 주목할 만합니다.
이는 히브리어 알파벳에 따라 이 시편의 구조가 짜여 있다는 뜻입
니다. 이 시편은 히브리어 알파벳의 스물두 글자에 맞추어 스물두
개 연을 형성합니다. 그래서 첫째 연에서는 매 절의 첫 글자가 알파
벳의 첫 글자인 히브리어 알렙( Aleph ) 입니다. 둘째 연에서는 매 절
의 첫 글자가 알파벳의 둘째 글자인 히브리어 베트( Beth ) 입니다. 이
런 식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이 시편의 또 다른 흥미로운 점은 하나님의 율법에 그 초
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시편 119편 전체 길이가 매우 길지만 다 읽
어 보십시오. 그러면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에 대한 어떤 것
도 찾지 못할 것입니다. 또한 애굽에서의 출애굽, 언약들, 예루살렘
의 성전, 다윗의 보좌에 대한 어떤 언급도 발견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들은 모두 구약의 중요한 주제이지만, 시편 119편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 대신 시편 119편은 율법에 대해 계속 말합니다. 이 시
편은 율법을 가리키는 여러 히브리어 용어를 반복해 사용합니다.
거의 모든 절에서 이 용어 가운데 하나가 사용됩니다. 하나님의 율
법은 시편 119편 안에서 분명 지식과 진리의 본체로 빛납니다.
그러나 시편 119편을 묵상하실 때 한 가지를 마음에 두십시오.
우리는 종종 “율법”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구원 약속을
선포하는 “복음”과 구별되는, 단지 하나님의 계명들로만 생각합
니다. 이는 분명 중요한 신학적 구별입니다. 그러나 “율법”은 또한
성경의 첫 부분 곧 구약의 처음 다섯 권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 책들( 창세기에서 신명기까지 ) 은 계명 이상의 것을 담고 있습
니다. 이 책들에는 또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이야기와 하나
님의 장차 임할 은혜에 대한 예언 같은 것들도 들어 있습니다. 시편
119편에 반복해 등장하는 그 용어들에 “길”, “약속” 및 단순히 “말
씀”이 포함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의 “율법”
은 단지 지켜야 할 규칙에 대한 정보뿐 아니라 온갖 종류의 “지식과 진리”를 계시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첫 두 연( 알렙과 베트 ) 을 살펴봅니다. 이 첫 두 연은 하나님의 율법이 하나님 백성 편에서 완전한 순종과 전인적 헌신을
요구한다고 가르칩니다. 먼저 첫 연인 1〜8절을 살펴봅시다.
* * * * *
1〜2절은 결정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어떻게
복을 받는가?’ 두 절이 어떻게 시작하는지 주목하십시오. “복이 있
음이여……. 복이 있도다…….” 연속된 두 절이 똑같이 시작합
니다( 원어 성경에서는 이 말이 맨 앞에 있음-옮긴이 ). 시편 119편 다른 곳에
서는 이런 것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복을 받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 백성은 자신들의 주께 어떻게 복을 받습니까? 이 첫 두 절
이 단순하고 분명한 답을 줍니다. 하나님 백성은 여호와의 율법을
따라 행하고 여호와의 증거들을 지킴으로 복을 받습니다. 곧 하나
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에 굳게 붙어 있음으로 복을 받는 것입 니다.
그러나 이 직설적인 답에는 약간의 부연이 필요합니다. 사실 1〜
4절은 그 이상이 있음을 보여 줍니다. 우선, 이 첫 절들은 복이 막연
하거나 일반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함을 통해서가 아
니라 포괄적이고 철저한 순종을 통해 온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우리는 이것을 첫 네 절 각각에서 봅니다. 1절, “행위가 온전하여 여
호와의 율법을 따라 행히는 자들은 복이 있음이여.” 조금도 흠이 없 습니다. 2절, “여호와의 증거들을 지키고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의 일부가 아니라, 마음 전부로 구하는 것 입니다. 3절, “참으로 그들은 불의를 행하지 아니하고.” 잘못을 거의
행하지 않는 자가 아니라, 잘못을 전혀 행하지 않는 자입니다. 그리
고 4절은 주께서 주의 “법도를 부지런히 ( 개역개정 “잘” ) 지키게” 명령
하셨다고 합니다. 때때로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성실하게
임하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가 이 진술들 가운데 하나만 지나가는
말로 했다면 간과하기 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편의 도입부
가 하나님의 복을 위해 율법이 요구하는 포괄적이고 전인적인 순종
에 대한 이 강조로 우리를 폭격한다는 사실이 얼마나 놀랍고 인상 적입니까!
자, 이것이 이 첫 절들에서 알아야 할 한 가지입니다. 둘째는 이것 입니다. 율법은 그 자체로 중요할지라도, 즉 율법이 철저하고 완전
한 순종을 요구할지라도 율법 자체가 목적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2절에서 시편 기자는 말합니다.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복
이 있도다.” 보십시오. 우리가 율법에 순종해야 하는 까닭은 율법이
우리를 주님께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찾는 더
넓은 여정의 일환으로 율법을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의 율법에 열
심인 것처럼 보이는 많은 사람이 이 일에 실패하는데, 이는 큰 잘못
입니다. 그들에게 율법은 그 자체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율법이 그
자체로 위대한 보상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은 우리
가 주님을 진심으로 알고 섬기도록 이끌 때만 우리에게 선하고 유
익한 것입니다.
시편 119편의 처음 네 구절은 상당히 인상적인 도입부를 보여 줍
니다. 그리고 다음 네 구절, 즉 알렙 연의 후반부로 넘어가면 우리는
다시 현실로 돌아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처음 네 구절은 하나님
과 하나님 율법에 대한 전면적인 순종이라는 위대한 이상을 우리
앞에 제시하지만, 이제 5절부터 8절에서 시편 기자의 어조가 어떻
게 바뀌는지 주목해 보십시오.
시편 기자는 5절을 이렇게 시작합니다. “내 길을 굳게 정하사.”
여기서 시편 기자는 기도합니다. 이것이 시편 119편의 첫 번째 기
도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어떤 의미에서 시편 119편 전체
가 하나의 긴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위대한 기도 안에는
짧고 개별적인 기도가 많이 담겨 있습니다. 일부 구절은 엄밀히 말
해 기도가 아니라 선언적인 진술입니다. 그러나 5절에서 우리는 첫
번째 소소한 기도를 만납니다. “내 길을 굳게 정하사 주의 율례를
지키게 하소서.” 이 기도는 우리에게 중요한 사실을 일깨워 줍니다.
우리는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달라고 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필
요하거나 원하는 것을 구합니다. 시편 기자는 한결같음을 구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마땅히 그래야 할 만큼 완전히 한결같지 못합니다. 그는 자신
의 한계와 연약함을 인정합니다.
다음으로, 6절에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주의 모
든 계명에 주의할 때에는 부끄럽지 아니하리이다.” 부끄럽다라는
표현은 부정적인 뉘앙스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편 기자의 마
음이 이 방향으로 향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는 하
나님의 복에 대한 묵상으로 시편을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복은
온전한 순종을 통해 임합니다. 그러나 그는 견고함을 위해 기도해
야 했는데, 이는 그가 자기 삶에서 어떤 연약함을 분명히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이런 질문을 하게 만듭 니다. ‘복이 온전한 순종을 통해 온다면, 우리가 마땅히 견고해야 할
만큼 견고하지 못할 때는 어떻게 되는가? 우리가 하나님의 길에서
유배 중의 신앙
온전히 신실하지 못하다면 어떻게 되는가?’ 복이 순종을 통해 온다
면, 그것은 곧 불순종을 통해서는 저주와 심판 및 수치가 임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5〜6절에서 시편 기자의 마음이
더 어두운 방향으로 향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의 말은 우리
로 하여금 하나님 백성이 과연 1〜2절에서 선포된 복을 경험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의구심을 품게 만듭니다.
이제 5〜8절은 전반적으로 긍정적인 초점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
을 확인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이 견고함을 허
락해 주신다면 자신이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7절에서는 하나님의 의로운 규례들을 배워 가면서 하나님을 찬양
하겠다고 고백하며, 8절에서는 하나님의 율례를 지키겠다고 선언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율법을 따르겠다는 다짐을 표명하지만, 그
럼에도 몇 가지 생각이 우리를 불편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율법
이 1〜4절에서 묘사하는 것처럼 완전하고 전적인 순종을 요구한다
면, 그리고 시편 기자가 완전히 견고하지 못한 상태라면, 그는 어떻 게 율법에 대한 불순종이 가져오는 부끄러움을 면할 수 있을까요?
더 나아가 이 연의 마지막 부분, 즉 8절의 끝 구절은 우리의 불안감
을 한층 더 고조시킵니다. 시편 기자는 첫 번째 연을 이렇게 마무리
합니다. “나를 아주 버리지 마옵소서.” 우리는 그가 이미 하나님께
버림받은 느낌을 받고 있으며, 하나님의 불쾌하심을 이미 경험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문을 품게 됩니다. 그렇지 않다면 왜 그가 아주
버림받지 않기를 구하겠습니까?
이 시편을 누가 썼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오랜 기독교 전통은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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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시편 기자였던 다윗왕이 썼다고 보지만, 실제로 시편 119편의
일부 내용은 다윗 시대보다 더 후대에 기록되었음을 시사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스라엘의 왕, 즉 다윗의 계보에 속한 누군가
가 썼을 가능성을 암시하는 특징들도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 첫 번째 연을 읽을 때 더욱 불안한 마음이 들 수 있습니다. 만약
이 시편을 쓴 이가 이스라엘의 왕이었고, 그가 자신의 흔들리는 신
앙과 불순종으로 인한 부끄러움을 걱정했다면, 이스라엘 백성 전체
는 어떠했을까요? 구약성경에서 왕이 불신실할 때 하나님 백성 전
체가 고통을 겪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연의 끝에 다다르면서 긴장감이 고조됩니다. 이 시편의
5퍼센트도 채 읽지 않았는데 벌써 하나의 긴장감이 드러나는데, 이
긴장감은 어떤 의미에서 시편 119편 전체를 통틀어 전혀 해소되지
않습니다. 시편 기자는 이 시편 전반에 걸쳐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열정을 표현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율법을 사랑합니다. 그는 율법을
부지런히 따르겠다고 헌신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완전한 순종
이 아무리 애써도 결코 이루어 낼 수 없는 것임을 끊임없이 깨닫습
니다. 그것은 언제나 그가 온 힘을 다해 손을 뻗어도 닿을 수 없는 곳에 있습니다. 그는 죄인입니다.
시편 119편의 많은 부분은 로마서 7장 후반부와 매우 닮아 있습 니다. 그 본문은 하나님의 율법을 사랑하고 율법을 행하기를 간절
히 원하면서도, 정작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사람의 마음 과 심정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로마서 7장에서 정말 아름다
운 것은 바로 그 결말입니다. 바울은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7:24 ) 라고 부르짖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7:25 ) 라고 외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율법을 사랑하면서도 그 높은 요구에 끊임없이 미
치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하는 사람들이 겪는 이 크나큰 긴장과 불
안에 대한 해답을 선포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시편 119편에서는 그런 명확한 답을 찾을 수 없습
니다. 잠시 이 시편의 마지막 구절인 176절을 생각해 보십시오. 시
편은 이렇게 끝납니다. “잃은 양같이 내가 방황하오니 주의 종을 찾
으소서 내가 주의 계명들을 잊지 아니함이니이다.” 이 시편은 영적
불안감에 대한 명쾌한 해답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시편 기자가 자
신이 길 잃은 양임을 고백하며 하나님이 자신을 찾아와 주시기를
간구하는 것으로 마무리됩니다. * * * * *
이제 첫 번째 연의 끝에 이르렀고, 두 번째 연으로 넘어가겠습
니다. 시편 기자가 율법은 완전한 순종을 요구한다는 생각을 더욱 강조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다른 각도에서 이 주제
에 접근합니다. 이제 그는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는 사람이 어떤 전인적인 헌신의 모습을 보이는지에 초점을 맞춥니다.
이 베트 연은 9절에서 시작됩니다.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 시편 기자가
왜 젊은 사람에 대해 말하면서 시작할까요? 아마도 한 가지 이유는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헌신의 전인적인 성격을 미리 전달하기 위해
서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헌신은 어른이 된 후에 시작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중년을 위한 과업도 아니고, 죽기 전에
현명하게 시작하면 되는 무언가도 아닙니다. 우리는 젊을 때부터 하
나님의 말씀을 따름으로써 우리의 길을 지켜야 합니다. 청년들은
경험도 적고 지혜도 부족합니다. 세상의 유혹과 사탄의 거짓말에
더욱 취약합니다. 젊을 때부터도 하나님의 율법에 헌신해야 합니다.
그런 다음 10〜11절에서 시편 기자의 시선은 다시 마음으로 향
합니다. 2절에서 그가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는다고 말했던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그는 두 번째 연의 두 번째 절에서 이 주제로 다 시 돌아옵니다. 10절입니다.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찾았사오니 주의
계명에서 떠나지 말게 하소서.” 11절은 이를 더욱 구체적으로 표현
합니다. “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은 그 말씀을 우리 마
음속에 소중히 간직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음이란 무엇일까요?
성경에서 마음은 보통 우리 가슴 속에서 뛰고 있는 장기를 가리키
지 않습니다. 마음은 우리의 가장 내밀한 성품, 즉 우리가 실제로 어 떤 사람인지를 가리킵니다. 자신이 진정 어떤 사람인지, 무엇이 자
신에게 진정으로 소중한지 알고 싶다면 자신의 마음을 살펴보십시
오. 의로운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히 여기고 그 말씀을 마음
에 간직하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에게 귀한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
씀입니다. 성경의 여러 곳에서 이런 생각들이 메아리처럼 울려 퍼
집니다. 잠언 4장은 마음이 생명의 근원이라고 말합니다. 마태복음
유배 중의 신앙
15장에서 예수님은 온갖 죄가 마음에서 흘러나온다고 말씀하십
니다. 마음은 여러분을 여러분답게 만드는 것입니다. 마음은 여러분
이 어떤 사람인지를 드러냅니다. 의로운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간직합니다.
시편 기자는 이 말씀을 전한 후 12절에서 잠시 여백을 둡니다.
“찬송을 받으실 주 여호와여 주의 율례들을 내게 가르치소서.” 그는
잠시 멈추어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는 앞서 우리가 살펴본 몇 가
지 내용을 떠올리게 합니다. 율법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가리킵
니다. 법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이 가장 중요한 분입니다. 12절에서
시편 기자는 또한 하나님께 자신에게 율례를 가르쳐 달라고 구합
니다. 그는 다시 한번 자신의 필요를 인정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율
법을 스스로 힘으로 이해하고 지킬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이 막간 이후, 우리는 두 번째 연의 마지막 네 절로 접어들게 됩
니다. 시편 기자는 다시 전인적 헌신이라는 주제로 돌아옵니다. 이
점을 생각해 보십시오. 9절은 율법을 젊은 시절부터 평생에 걸쳐 지
켜야 한다고 말합니다. 10〜11절에서는 말씀이 마음속에, 곧 사람
의 가장 깊은 내면에 간직되고 지켜집니다. 이제 13절에서 시편 기
자는 내면에서 외면으로, 말하자면 안에서 밖으로 나아갑니다. “주
의 입의 모든 규례들을 나의 입술로 선포하였으며.” 마음에 있는 것
은 입술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안에 있는 것은 밖으로 드러나야 합
니다. 이것은 사실이지 않습니까? 우리가 말로는 한동안 사람들을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내면에 있는 것을 영원히 감출 수는 없습
니다. 우리가 입술로 내뱉는 말은 우리 마음속에 있는 것을 드러내
는 경향이 있으며, 그것이 종종 우리를 당혹스럽게 만들기도 합
니다. 이 주제는 성경의 다른 곳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로마서
10장 9절을 떠올려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입으로 시인하고 하나님이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
음으로 믿는 사람은 구원받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마음에 있는 것
은 입술로 고백되어야 하며, 바로 그것이 시편 기자가 13절에서 전
달하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규례( 또는 판단 ) 를
선포합니다.
그런 다음 14절에서 시편 기자는 다시 내면으로 시선을 돌립
니다. “내가 모든 재물을 즐거워함같이 주의 증거들의 도를 즐거워 하였나이다.” 입술에서 나오는 것에 대해 말한 후, 시편 기자는 자
신이 무엇을 기뻐하는지를 다시 묘사합니다. 이는 다시 마음으로,
우리 존재의 핵심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재물을 기뻐하듯
하나님의 율법을 기뻐해야 합니다. 만약 제가 여러분에게 큰 돈이
생길 것이라고 말한다면, 기쁘지 않을 분이 과연 있을까요? 시편 기
자는 말합니다. 우리가 본능적으로 큰 재물을 기뻐하듯, 의로운 사
람은 하나님의 증거들을 본능적으로 기뻐한다고 말입니다.
시편 기자는 15절에서 다시 내면에서 외면으로 시선을 옮깁니다.
“내가 주의 법도들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며”라는 내면적 표현에 이
어, “주의 길들에 주의하며”라고 다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에 대한 헌신을 입술만이 아니라 눈으로도 표현합니다. 여기서도
비슷한 원리가 작동합니다. 마음속에 있는 것이 입술을 통해 드러
나듯이, 마음속에 있는 것은 눈을 통해서도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저는 이것저것에 눈독을 들이고 있습니다”라는 표
현을 씁니다. 이것은 원하는 무언가를 가리키는 비유적인 표현일
수 있지만, 아주 문자적인 의미로도 쓰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집착
하는 대상에서 눈을 떼기란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너무도 자주 부
러워하거나 탐내는 사람들 또는 욕심내는 것들에 시선을 고정합
니다. 눈은 마음을 비추는 거울입니다. 의인은 눈을 하나님의 길에 고정합니다.
그런 다음 마지막 절인 16절에서 시편 기자는 다시 내면으로, 마
음을 향해 돌아갑니다. “주의 율례들을 즐거워하며 주의 말씀을 잊
지 아니하리이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율례를 매우 기뻐하여 하
나님의 법을 잊지 않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왜냐
하면 잊어버리는 것은 쉬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나이가 들수록 더
욱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어떤 것들은 잊기 어렵다는 것
도 알고 있습니다. 때로는 잊고 싶어도 잊히지 않는 것들이 있습
니다. 무엇이 잊기 어려울까요? 바로 우리에게 중요한 것들입니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은 너무 쉽게 잊힙니다. 이것이 바로 배우자
나 자녀가 한 말을 잊어버렸을 때 그토록 민망한 이유입니다. 무언 가를 진정으로 소중히 여긴다면, 우리는 그것을 기억하게 됩니다.
시편 기자는 말합니다. “주의 율례들을 즐거워하며 주의 말씀을 잊
지 아니하리이다.” 하나님의 법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하여 결코 잊
을 수 없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시편 기자는 이 두 번째 연에서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전인적인
헌신을 매우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헌신은 우리의 마음,
눈, 기쁨, 기억, 입술을 모두 아우릅니다. 우리의 모든 부분이 하나
님의 율법에 헌신되어야 합니다. * * * * *
이 두 연의 끝에 이르렀을 때, 율법이 요구하는 것의 완전한 포괄
성과 율법을 따르는 사람의 전인적인 헌신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
니다. 시편 기자는 이 주제를 아직 자세히 전개하지는 않지만, 하나
님의 율법에 이렇게 순종하려 힘쓰는 가운데 자신의 연약함과 무력
함 및 실패에 대한 단서들을 이미 보여 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 연
에서부터 시편 기자는 하나님 심판의 위험과 자신의 부끄러움을 이
미 인식하고 있습니다.
이 시편을 묵상할 때, 우리는 바울이 로마서 7장 끝에서 제시한
답을 가지고 묵상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
님께 감사하리로다.” 이것은 시편 기자가 고대했으나 명확하고 구
체적으로 설명할 수 없었던 답이었습니다. 그는 그 답을 갈망하면
서도 그 답이 무엇인지는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에 대한 지식에 비추어 이 시편을
읽을 수 있는 큰 특권이 있습니다.
우리가 늘 그러하듯, 주 예수님의 절대적이고 완전한 순종을 묵상
하는 것보다 더 적합한 일은 없습니다. 이 교리는 우리 중 많은 분
에게 익숙합니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전하시며 죄가
없으신 분임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고백이 무엇을 의미
유배 중의 신앙
하는지 얼마나 깊이 묵상하고 있습니까? 완전함이라는 개념 자체가
우리의 이해를 벗어나지 않습니까? 우리 중 누가 전 존재적으로, 삶
의 모든 순간에, 평생토록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하는 경험을 조금
이라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삶 속에서 완전함을 조금이나마 엿
볼 수 있는 순간들이 있기는 합니다. 수학 시험에서 100점을 받은
우등생이나 300점을 기록한 볼링 선수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궁극
적으로 그런 것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것들을 하나님의
율법에 평생 절대적이고 완전하게 헌신하는 삶과 비교할 수는 없습 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이 절대적인 헌신을 이루셨습
니다. 예수님은 어린 시절부터 절대적으로 헌신하셨습니다. 누가복
음 2장에 나오는 그 놀라운 이야기를 떠올려 보십시오. 소년 예수께
서 하나님의 성전에 가셨을 때, 하나님 말씀에 대한 예수님의 지식
으로 율법 교사들을 놀라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흠이 없으셨습 니다. 예수님의 삶 전체를 통틀어, 아무도 예수님께 단 하나의 잘못
도 정당하게 지적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아무 죄도 짓지 않으
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언제나 하나님의 율법을 보배롭게 여겼 습니다. 예수님은 단 한 번도 하나님과 하나님 진리보다 세상의 부
를 더 탐하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그리고 주 예수님은 30여 년의 생
애 동안, 하나님과 하나님 말씀을 단 한 번도 결코 잊으신 적이 없
으셨습니다. 그럼에도 십자가 위에서 버림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부끄러움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시편 기자가 두려워했던 바로
그 일들을 몸소 겪으셨습니다.
이런 구주를 생각할 때, 우리는 진정으로 의지할 수 있는 분을 만
나게 됩니다. 개혁교회에서는 그리스도의 ‘전가된 의’에 대해 자주 말합니다. 즉,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돌려졌으므로 우리가 하나
님께 의롭다 함을 받아 보좌 앞에 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강단이 이 진리를 선포하고, 이 진리가 우리에게 친숙해지는 것은
참으로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단순한 추상적·교리적 진리
로 머물지 않게 하십시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의 위에 자신의 전
생애를 걸 수 있습니다. 시편 119편에 묘사된 이 절대적이고 완전
한 순종, 그것이 바로 여러분의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안식할 때,
여러분은 이 순종을 자신의 것으로 붙들게 됩니다. 여러분에게는
이 순간 성부의 우편에 계시며, 여러분을 돌아보시고, 여러분을 위
해 기도하시며,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시는 구주가 계십
니다. 주님은 완전히 의로우십니다. 주님은 여러분이 온전히 신뢰할
수 있는 구주이십니다.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시편 119편은 복 있는 사람을 선포하는 것
으로 시작합니다. 이것이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의 입술로 처음 들려
오는 말씀 중 하나인 팔복을 떠올리게 합니다. 복 있는 자 중에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
인들의 모습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로서, 우리는 의
에 주리고 목마릅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5장에서 몇 구절 뒤에 예수
님이 하신 말씀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
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율법이 가진 모든 목적과 요구를 이루
시러 오셨습니다. 그 주님이 그분 자신의 의에 주리고 목마르게 하
는 은혜를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길을 사랑
하는 은혜를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이토록 아름답고
완전하며 모든 것에 충분하신 구주를 흠모하고 신뢰하는 마음을 우 리에게 허락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땅의 나그네
시편 119:17〜32


긴 시편의 첫 두 연, 즉 1절부터 16절에서 우리는 시편 기자가 하

나님의 율법이 하나님 백성 앞에 제시하는 완전한 순종에 대해, 그
리고 그 율법이 요구하는 전인적인 헌신에 대해 묵상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헌신은 마음에서 우러나와 입술로 표현되고 눈으로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서두 연들에서 일종의
불안함도 발견했습니다. 시편 초반부에 긴장감이 드러납니다. 시편
기자는 이 율법을 온 마음으로 따르겠다고 헌신하면서도, 동시에 하나님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함을 절감합니다. 자신의 연약함 때문
에, 하나님의 율법의 완전함을 바라볼 때 부끄러움이 매우 현실적
인 위험으로 다가온다는 것을 그는 인식하고 있습니다.
다음 두 연인 기멜( Gimel ) 과 달렛( Daleth ) 으로 나아가면서, 우리는
더 많은 불안과 긴장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불안은 앞선 두
연에서 보았던 것과는 다른 곳에서 비롯됩니다. 지금 우리 앞에 놓
인 연들에서 시편 기자는 자신의 연약함이나 한결같지 못함을 묵상
하기보다는, 자신이 이 땅의 나그네라는 사실을 묵상합니다. 그는
유배자입니다. 그는 가나안 약속의 땅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살
아가고 있습니다. 더욱이 그는 하나님의 율법에 헌신하고 있음에도
다른 사람들의 조롱과 멸시를 받고 있습니다. 이런 내용들은 우리
의 주의를 끌어야 마땅합니다. 신약성경은 새 언약 안에 있는 그리
스도인인 우리 역시 나그네요 유배자라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그
것은 우리가 지상의 거룩한 땅에서 추방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우
리가 아직도 이 현재의 악한 시대 속에 살고 있으며 새 창조의 영광
에 아직 이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시편 119편은 나그네로 살아가
면서 경건한 삶을 추구하는 것에 대해 우리에게 분명 많은 것을 가
르쳐 줄 것입니다.
이전 본문에서 살펴보았듯이, 시편 119편도 시편 기자가 느끼는
불안함에 대한 최종적인 답을 제시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앞에 놓인 이 구절들조차도 하나님의 은혜로운 응답을 가리키
고 있습니다. 시편 기자가 부르짖을 때 하나님이 그에게 응답하십
니다. 시편 기자는 죄로 가득한 이 세상으로부터의 구원을 기대하
고 있는데, 이는 신약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믿는 자들이 이미 누리
기 시작한 것입니다. 비록 우리의 현재 지상 여정이 수많은 고난으
로 가득 차 있을지라도 말입니다.
* * * * *
먼저 시편 119편의 세 번째 연인 기멜 연을 살펴보겠습니다.
17절부터 24절까지입니다. 이 연은 다음과 같은 멋진 고백으로 시
작됩니다. “주의 종을 후대하여 살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주의 말씀
을 지키리이다.” 시편 기자가 하나님께 “후대하여 달라”고 구할 때, 그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을까요? 아마도 그는 하나님이 자기 백
성을 후대하셨던 시절을 되돌아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창조의 순간
을 떠올렸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첫 조상을 풍요로 넘
치는 동산에 두셨을 때, 그곳에는 좋은 음식과 귀한 금속과 풍부한
물이 가득했습니다. 또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로 통과시
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셨던 때를 기억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때 하나님이 얼마나 넉넉하게 자기 백성을 대하셨는지 생각해 보
십시오. 젖과 꿀이 흐르는 풍요로운 땅을 그들에게 주셨습니다. 시
편 기자는 하나님이 과거에 자기 백성을 후대하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의 종을 후대하여 살게 하소서”에 이렇게 덧
붙입니다. “그리하시면 주의 말씀을 지키리이다”( 영어 본문에서는 “주의
종을 후대하여 주소서 그리하시면 주의 말씀을 지키며 살리이다”로 되어 있음-옮긴
이 ). 역사의 초기 시절들 곧 에덴동산에서, 그리고 하나님이 이스라
엘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셨을 때 하나님은 자기 백성 앞에 생명
을 놓아 두셨습니다. 낙원에서는 생명나무를 그들 앞에 두셨고, 약 속의 땅에서는 장수를 허락하셨습니다. 두 경우 모두, 하나님은 하
나님 말씀을 지키라고 백성을 부르셨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이어지는 18절에서 시편 기자가 이렇게 고백하는 것은 자연스럽습
니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 하
나님이 자기 백성을 후대하셨던 풍요로움을 묵상하면서, 그는 자신
의 시대에도 하나님의 말씀에서 놀라운 것들을 보게 되리라 기대하
는 것입니다.
이것은 시편의 도입부로서 밝고 긍정적인 분위기를 담고 있습 니다. 그러나 19절에 이르면 분위기가 얼마나 급격하게 바뀌는지
주목하십시오.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땅에서 나그네
가 되었사오니.” 나그네란 끊임없이 이동하는 사람입니다. 나그네
는 한곳에 정착하지 않습니다. 나그네는 자신의 진정한 고향이 아
닌 곳, 자신이 진정으로 속하지 않는 곳을 떠돌아다닙니다.
성경 속 나그네 삶을 묵상할 때, 우리는 아브라함을 떠올릴 수 있
습니다. 창세기는 아브라함과 그의 가족이 이곳저곳을 떠돌며 살
았다고 여러 차례 기록합니다. 아브라함은 나그네처럼 이 땅 저 땅
을 옮겨 다녔고, 장막에서 생활했으며, 결코 한곳에 정착하지 않았
습니다. 그는 살아 있는 동안 하나님이 약속하신 기업을 손에 넣지
못했습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새 언약 아래 있는 우리 신자들도 마
찬가지로 나그네입니다. 예를 들어 베드로전서 2장 11절은 우리를
“거류민과 나그네”라고 부릅니다. 이 표현은 우리의 현재 정체성을
잘 설명해 줍니다. 신약성경은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다고 말
합니다. 그곳이 바로 우리가 진정으로 속한 곳이며, 우리의 궁극적
인 충성이 향하는 곳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이 땅에 있습
니다. 이 현재의 악한 세대 안에 있습니다. 비록 평생을 한 장소에서
살아왔다 해도, 그리스도인으로서 여러분은 나그네입니다. 여러분
은 여전히 여정 중에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진정한 고향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