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사회연구소 심포지엄
안보개발국가를 넘어, 평화복지국가로 - 독일의 경험과 한국의 과제
일시
| 2015
년
월 4일(금) 오후 1시
장소
|
가톨릭청년회관 다리(서울시 마포구 동교동)
주최
|
참여연대 부설 참여사회연구소
12
~
오후 6시
분
30
프로그램
13:00
개
회
윤홍식 참여사회연구소 소장, 인하대학교 교수
13:10
기조강연
정현백 참여연대 공동대표, 성균관대학교 교수
제1부
평화복지국가의 시각
사 회
김윤철 참여사회연구소 부소장, 경희대학교 교수
13:30발표1
한국은 평화복지국가를 건너뛰는가? 이병천 참여사회연구소 연구분과위원장, 강원대학교 교수
13:55발표2
한국 복지국가에서 한반도 평화체제 바라보기 윤홍식 참여사회연구소 소장, 인하대학교 교수
14:20발표3
탈식민·탈패권·탈분단의 한반도 평화체제 구갑우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
14:40
토론
임혁백 고려대학교 교수 최태욱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교수
15:10
휴식
제2부
통일과 체제전환
사 회
박영선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15:20발표4
통일독일의 사회통합과 복지국가의 전환 황규성 한신대학교 교수
15:40발표5
독일의 통일과 경제통합 – 평화복지의 조건 탐구 송태수 한국기술교육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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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0발표6
국가연합과 독일 통일 이동기 강릉원주대학교 교수
16:20
토론
정재훈 서울여자대학교 교수 정태석 전북대학교 교수
16:50
휴식
제3부
복지와 경제
사 회
장지연
17:00발표7
독일 사회국가의 역사와 과제
《시민과 세계》편집위원장 한국노동연구원 사회정책연구본부장 ,
이호근 전북대학교 교수 17:20발표8
독일 경제체제의 특징과 중소기업 이명헌 인천대학교 교수
17:40발표9
· 원승연 명지대학교 교수
유로위기와 독일 구춘권 영남대학교 교수
18:00
토론
김계환 산업연구원 국제산업협력실장 이창곤 한겨레신문 콘텐츠협력부국장
18:30
폐회
안보개발국가를 넘어, 평화복지국가로
3
목차
기조강연 담론으로서 평화복지국가
/
정현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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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평화복지국가의 시각 발제1 한국은 평화복지국가를 건너뛰는가?
/
이병천
발제2 한국 복지국가에서 한반도 평화체제 바라보기
·
·
발제3 탈식민 탈패권 탈분단의 한반도 평화체제
/
10 /
윤홍식
구갑우
39 78
제2부 통일과 체제전환 발제4 통일독일의 사회통합과 복지국가의 전환
/
황규성
발제5 독일의 통일과 경제통합
– 평화복지의 조건 탐구
발제6 국가연합과 독일 통일
이동기
/
116 /
송태수
146 166
제3부 복지와 경제 발제7 독일 ‘사회국가’(Sozialstaat)의 역사와 과제 발제8 독일 경제체제의 특징과 중소기업 발제9 유로위기와 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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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춘권
/
/
·
이호근
이명헌 원승연
190 217 255
기조강연
담론으로서 평화복지국가
정현백 / 참여연대 공동대표, 성균관대학교 교수
2015년도 이제 1달도 채 남지 않았다. 올해는 우리가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통치로부 터 해방된 지 70년이 되는 해이다. 또한 올해는 분단의 역사가 70년을 맞이하는 해 이다. 인류에게 끔찍한 재앙으로 다가온 원자폭탄이 사용된 지 70년이 되는 해이기 도 하다. 그래서 올해 벽두에 참여연대를 위시한 시민단체들은 ‘전쟁 종식’이라는 슬 로건 아래에서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고, 이 과정에서 한반도평화체제의 실현 을 위한 첫 발걸음을 내딛는 캠페인을 시작하였다. 이 과정에서 다자적 접근을 통한 평화체제의 실현은 평화에 이르는 효과적인 방안이 될 수 있고, 이런 맥락에서 중지 되어버린 6자회의의 재개를 요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6·15 남북공동선언과 해방 70년을 함께 기념하는 남북 공동행사는 실현되지 못하였다. 남북 민간단체 간의 교류 혹은 정부 간의 교류도 거의 휴지기에 있다. 그 래도 한반도에서 전쟁의 종식, 일본 평화헌법 9조 지키기 그리고 탈핵을 내세운 <2015 동아시아평화국제회의>가 성공리에 개최된 것이 해방 70주년을 장식한 유일 한 행사였다. 대회 말미에 발표된 평화선언문에서는 ‘한국전쟁을 끝내지 않고서는 동 아시아 평화를 상상할 수 없다’는 메시지가 강력하게 전달되었다. 한국, 일본, 중국, EU, 독일 대표단이 참석한 이 회의는 국제적으로 한반도 평화체제 실현의 중요성과 한/일 평화운동 간의 연대를 확인한 귀중한 자리였다. 하토야마 총리의 서대문 형무 소 방문과 무릎 꿇은 사죄로 더 잘 알려진 이 회의를 통해, 한반도평화체제 실현을 위한 국제연대의 당위성을 확인하였다. 주최 측의 조사에 따르면, 이 회의에 대한 기
안보개발국가를 넘어, 평화복지국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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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가 500개를 넘었다고 할 정도로 큰 성과를 거둔 행사였다. 동시에 이 회의는 이른 바 보수, 중도, 진보라는 경계 긋기를 넘어서, 다양한 인사들이 참여하면서 그간 우 리 시민운동이 꾸준히 만들어내고 주창해온 한반도평화체제 주창을 사회적으로 확산 하고 이에 대한 공동의 합의를 만들어내고 있음을 확인한 주요한 성과였다.
한 해가 끝나가는 세밑의 풍경에는 늘 우수의 분위기가 있다. 한 해를 돌아보면, 해 놓은 일은 별로 없는 것 같고, 우리의 운동은 그다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 같 은 자책감 같은 것이다. 우리가 주장해온 전쟁종식과 한반도 평화체제 실현을 향해 우리는 한 발자국이라도 더 나아갔는가를 자문하는 것이다. 더구나 역사 교과서의 국 정화 강행과 11월 14일 민중총궐기대회에 대한 경찰의 폭력적인 진압으로 인해, 이 런 자책감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바로 이런 시점에 참여사회연구소가 ‘평화복지국 가’를 주제로 심포지엄을 준비한 것은 큰 의미가 있다. 이번에 제기하는 평화복지국 가 테제는 지난 몇 년간 참여사회연구소의 구성원들이 진행해온 토론과 연구의 의미 깊은 성과물이라 생각한다.
지금 우리가 처한 현실을 돌아본다면, 평화복지국가라는 의제 자체는 그다지 실현가 능성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이런 현실 인식은 역으로 담론으로서의 한반도 평화체제가 더 유효한 담론이자 유의미한 작업도구라는 확신을 만들어 수 있다. 또한 담론은 담론 그 자체로서 힘을 가지고 있다. 보통사람들이 보기에 평화와 복지국가의 결합은 다소 어색한 조합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는 70년간이나 지속된 분단된 현실 의 극복과 복지체제 실현을 결합한 지극히 한국적인 개념체계이자 담론이다. 뒤이은 심포지엄의 발표에서 드러나는 대로, 분단체제와 성장중심주의에 매몰된 한국 사회, 그래서 끊임없이 분단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사회에서, 평화의 실현 없이는 사실상 제 대로 된 복지국가의 실현이 불가능하다. 평화복지국가는 여기에서 오는 고민을 녹여 낸 한국 지식인들의 이론모델이 평화복지국가라 할 수 있다. 이는 지극히 한국적인 담론체계이지만, 향후 지속적인 전쟁으로 고통을 당하면서, 복지와 인권이 희생되는 다른 제3세계 국가에도 하나의 모델로 수용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지난 70년간 한국 사회를 지배한 반공주의는 민주주의를 후퇴시켰고, 이는 복지국가 를 만들어갈 주체세력을 약화시켰다. 한국의 시민사회운동과 성찰적인 지식인들은 지 속적으로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힘겨운 노력을 해야 했다. 또한 경제제일주의, 나 아가 선성장 후분배라는 이데올로기는 지속적으로 복지체제의 도입과 그 현실화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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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연시켰다. 1987년 이후 형식적 민주주의는 일정 정도 실현되었지만, 반공주의는 반 북주의로 탈바꿈하였고, 개발국가는 신자유주의로 옷을 갈아입었다고 말한다. 더불어 지난 20년 사이에 소득의 불평등과 양극화는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고 있다. 바로 이런 현실에 대응하여 반북개발국가를 평화복지국가라는 대안개념으로 치환해가려는 것이 이 심포지엄의 주된 목표가 되었다. 새로운 대안체제의 제시와 새로운 대안 이 데올로기의 모색은 이제 출발을 선언하지만, 이는 멀고도 먼 그렇지만 현실을 조금씩 바꾸어가는 과정이 될 것이다.
최근 민주주의의 후퇴가 일어나는 여러 현실 정황들을 지켜보면서, 우리는 점점 더 적절한, 다시 말해 보통 시민들이 공감할 수 있는 대안담론을 창안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실감하고 있다. 동시에 경제민주화에 반대하는 세력들, 민주주의의 역행을 자초하는 집단들이 내세우는 담론이 얼마나 많이 대중을 현혹하고 있는가를 지켜보면서, 담론의 창안자로서의 우리 역할에 대한 자책과 반성을 할 때가 많다. 그 런 점에서 보통의 시민에게 좀 더 다가갈 수 있는, 좀 더 쉽게 설득할 수 있는 담론 의 개발이 필요할 것이다. 대안사회를 지향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주창들이 담론 투쟁에서 헤게모니를 창출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한 치열한 고민이 필요하다. 그런 점 에서 아직은 우리 사회에서 생소한 평화복지국가 담론을 보다 정교하게 다듬고 확산 하기 위한 방법론의 모색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과정에서 시민단체의 역할은 새 로운 담론(discourse)을 유통시키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참여사회연구 소와 참여연대와 같은 시민단체들과의 밀접한 소통과 연대, 공조가 필요하다.
이번 심포지엄에서 ‘안보개발국가에서 평화복지국가로 가는 길’을 독일의 경험과 비 교하면서, 한국의 미래 과제를 찾아내는 작업도 매우 필요한 과정이자 귀중한 성과이 다. 역사적 맥락이 다른 두 국가를 비교하는 것은 쉽지 않다.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 의 전쟁 책임을 상당수 안아야 했던 패전국이고, 동시에 천 만 명 이상의 희생자를 낸, 집단학살한 역사적 책임을 가진 가해국가이다. 그런 점에서 독일과 한국을 비교 하는 것에는 여러 한계가 따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일 이후 독일이 이루어낸 사 회복지국가의 성과는 여러 측면에서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주고 있다. 특히 독일이 소득보장이라는 윤활유를 통해서 옛 동독의 체제전환을 성공적으로 달성하였을 뿐 아니라, 나아가 사회서비스의 전반적인 확충을 통해, 옛 서독의 불완전한 복지인프라 까지도 발전시키는 성과를 거둔 점에 대한 분석은 앞으로 한국의 미래 통일과정에도 의미하는 바가 적지 않다. 이를 통해서 독일은 동독 덕에 ‘복지국가의 뒤늦은 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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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 성공한 경험은 우리에게도 매우 소중한 교훈으로 다가오고 있다.
한 가지 조언할 점은 오랫동안 성장제일주의 사회에서 길들여진 한국의 시민들에게 당위성이나 고매한 이상주의만으로 새로운 담론을 전달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이제 새로운 담론을 유포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평화복지국가야 말로 우리가 가장 잘, 안전하게 살 수 있는 길임을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맥 락에서 우리가 독일을 소개할 때, 항시 우리는 독일이 민주주의 발전이나 통일을 성 공적으로 달성한 성숙한 국가로, 이념적으로 진보적인 사회로만 설명하는 방식에 익 숙하다. 그러나 최근 구미 역사학계에서는 EU의 대표주자로 국제사회에서 주목 받는 독일의 역할과 관련한 논쟁이 있다. 이 논쟁에서 독일국가가 세계정치나 국내정치에 대한 대응의 이면을 들여다보자면 독일의 행위는 ‘경제적 발호와 군사적 자제의 교묘 한 결합(a strange mixture of economic assertiveness and military abstinence)’이라 는 해석이 더 지지를 얻고 있다. 즉 독일을 둘러싼 역사가나 사회과학자의 논의에서 이제 독일이 제4제국으로 가는 것이 아니냐는 ‘제4국 언설’이 나오지만, 제4제국을 지향하는 독일의 국가주의는 결국 실용주의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은 우리에게 환기하는 바가 적지 않다. 이런 맥락에서 독일이 걷고 있는 민주주의, 평 화, 복지국가의 길이 그 근저에는 실용주의적 정향을 지니고 있는 점을 우리 사회에 서도 강조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즉 독일과 마찬가지로 평화복지국가의 길이 우리 에게 더 많은 이익을 가져다주는 실용주의적인 길이라는 언설을 강조하는 방향에서 우리의 논의가 보완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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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평화복지국가의 시각
안보개발국가를 넘어, 평화복지국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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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제 1
한국은 평화복지국가를 건너뛰는가? 한국 모델의 성찰과 과제, 독일경험과 관련하여
이병천 / 강원대학교 교수, 참여사회연구소 연구분과위원장
1. 평화복지국가라는 시대 명제, 한국에 주는 독일의 충고 ○ 현대 한국은 60년대 이후 권위주의적 남북대결 산업화와 뒤이은 보수적 민주화를 통해 근대세계로 가는 특수한 ‘후발 이중혁명’의 경로를 거쳤다(이병천, 2007). 이후 한국은 국내적으로는 허약한 민주주의의 민주화를 통해 포용적 성장과 보편적 복지 가 동행하는 대안적 사회경제 발전 모델을 만들어 내고, 한반도 수준에서는 남북이 적대적으로 상호의존해온 냉전분단체제를 해체하고 교류협력을 통해 상호의존하면서 항구적 평화체제를 구축해야 할 책무를 부여 받았다. 이 과제는 보수정부의 경우 노 태우 정부에서 일부, 그리고 민주정부의 경우 김대중 정부 및 노무현 정부에 이르러 반쪽 정도 실현되었으나 심각한 내부적 모순과 객관적 조건의 제약 때문에 중도 좌 초하고 말았다. 지금 한국의 진로는 불행하게도 ‘박정희 체제의 신자유주의적 재림’ 이라고 할 만한 역사적 역류와 마주해 과거의 포로가 된 채 표류하고 있다. 이 시대 적 퇴행에 맞서 민주적 ‘평화복지국가’의 시대 명제를 높이 세워야 한다.
○ 평화복지국가는 권위주의적 안보개발국가의 반명제인 동시에 민주화 시대 취약한 민주주의를 짓밟고 등장한 안보시장국가의 반명제이기도 하다. 이 두 가지 의미에서 평화복지국가는 산업화 50년 민주화 30년의 대한민국이 새롭게 지향해야 할 일종의 ‘중간적 유토피아’의 대안체제이다. - 평화복지국가는 안보논리와 개발지상논리의 동맹체제, 그리고 ‘권력을 시장에게 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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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주고’ 좌절한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를 평화와 복지의 선순환 또는 공진화 논리로 발전적으로 대체하려는 것이다. 평화가 복지를, 복지가 평화를 북돋울 것이다. 남한 의 사회경제적 불평등과 불균형의 심화, 그에 따른 삶의 불안과 미래불안은 정치적 민주주의를 위험에 빠트리고, 다시 이는 한반도 평화의 진전도 위협한다. 남한사회가 사회경제적 양극화와 삶의 불안 상황, ‘권력이 고삐 풀린 시장으로’ 넘어간 상황을 극복해 다수 구성원들이 살만한 곳으로 바뀌지 않는다면 눈앞의 단기주의에 빠져 북 한발전에 대한 지원 여력도, 북한 개혁을 추동할 선도력도 갖지 못할 것이다. 또 남 한이 안보 종북몰이에 포획되어 있고 남북한간 평화공존과 교류협력이 진전되지 않 는다면 이는 민주-복지-포용적 성장의 길을 가로 막는 심각한 장애가 될 것이다. 또 한 평화복지국가는 산업화와 민주화 이후 남한의 새로운 중간적 대안체제이지만, 결 국 북한이 나아갈 미래 롤모델의 의미도 가질 수 있다. 이는 궁극적으로 미래의 한 반도 평화통일과 높은 발전 길로의 진화를 위해 남한이 정치경제적, 도덕적 이니셔티 브를 갖게 해 줄 것이다. - 평화와 통일의 가치, 그리고 그 도달 방법은 크게 다르다. 우리는 평화통일국가보 다 평화복지국가가 먼저라고 생각한다. 후자의 안정적 정착이 선차적 과제이며 전자 로 가는 민족적 과제는 이후 경로로 열려 있는 문제다(구갑우 2007). 최종목표 이전 에 과정의 변화가 더 중요하며, 통일을 주장할수록 역설적으로 통일의 미래는 더 멀 어질 수 있다. 이렇게 평화복지국가론은 한국과 한반도가 나아가는 발전경로와 전망 을 민족주의적 평화통일론 또는 보수적 ‘통일대박론’과는 다르게 바라본다. - 평화복지국가란 평화와 복지의 선순환을 추구하지만 그것만을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것은 평화복지국가의 좁은 의미일 뿐이다. 허약한 민주주의에서는 평화와 복지의 선순환도 취약할 수밖에 없다. 지속가능한 민주주의 기반 없이는 평화복지국 가도 지속가능하지 않다. 물론 우리는 민주주의와 평화의 관계가 그렇게 단순하지 않 음을 알고 있다. 민주주의가 곧 평화로운 것은 아니며 평화주의/호전주의와 민주주의 /비민주주의는 다른 심급이다. 민주적 국가도 폭력과 결합되고 호전적일 수 있으며 침략전쟁을 도모할 수도 있다(Galtung, 121-142; 주정립, 2006). 그렇다 해도 어떤 힘이 평화가 지배의 수단으로 악용되는 것을 막을 수 있나? 민주주의 더 정확히 공 화 민주주의는 의사결정의 참여, 권력감시와 견제, 정보전달, 시민사회 공론 형성 등 을 통해 평화복지국가의 길에 큰 진전을 가져온다(Kant, 2008[1795]; Sen, 2013[1999]).1) 민주주의의 진전 없이, 무엇보다 안보영역의 국가독점 해체와 시민 1). 갈퉁은 민주주의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나 민주주의의 평화촉진적 역할에 회의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는 평화/
호전주의를 규정하는 지배적 요인을 문화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나는 평화와 민주주의의 관계에 대한 그의 설 명이 일면적이라는 불만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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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권의 구축 없이, 자율적이고 성찰적인 시민사회의 발전없이 평화국가는 수립, 지속 되기 어렵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평화를 국익으로 복지를 투자로 인식하며 제도정 치와 광장정치의 두발로 걷는 ‘발전된 시민국가’(이태호, 2007; 사카모토 요시카즈)로 서 시민민주적 평화복지국가다. 이런 의미에서 평화복지국가는 전쟁 동원을 위해 복 지를 ‘엿’으로 던져준 지난 시기 전쟁복지국가에 대한 비판적 성찰 담론이기도 하다. - 민주적 평화복지국가론에서 각국은 타국의 비인간적, 비민주적 상황개선을 위해 평화적 방법으로 관여하고 지원해야 한다. 그러나 국제관계 그리고 ‘민족내부 특수관 계’에서 국가주권의 자율성은 존중되어야 한다. ‘인도적 개입’을 명분으로 자율적 주 권을 일방적으로 무시하는 오만한 패권적 ‘민주적 평화론’(Russett, 1993)은 거부되어 야 한다.2) 약소국들의 이해와 권리가 존중되고 그들이 정당한 발언권을 갖는 ‘국제 관계의 민주화’(구갑우, 2008)가 요구된다. - 우리는 정치적일뿐 아니라 경제적으로 민주적인 평화복지국가를 추구한다. 평화복 지국가는 권력 및 계급관계, 그리고 집단적 주체들의 시계(horizon) 등에 따라 불안 정하게 흔들린다. 규제 없는 자본의 독재와 투자의 사적 독점체제, 투기자본의 창궐 아래서 사회적 시민권은 불안정하다(Esping-Andersen). 평화복지국가의 운명과 지속 가능성은 시장자본주의에 대한 민주적 통제(대내외적인)와 ‘적극적 평화’를 지향하는 포용적 성장체제(발전체제로서 복지국가)를 어떻게 수립하느냐에 크게 달려 있다. - 한국의 복지국가는 남북간의 적대적 분단 종식과 평화공존, 상생적 교류 협력에 크게 의존한다. 이는 한국의 복지국가 길을 스웨덴적 길과 다르게 만드는 중요한 대 목이며 복지와 평화를 통합적으로 사고해야 하는 기본적 이유다. 다른 한편, 한반도 평화체제 수립 그 자체가 곧 남한의 복지국가 그리고 ‘더 많은 민주주의’를 가져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남북한 통일이 그러하듯이, 평화체제 또한 남한 민주주의의 빈곤, 허약한 복지와 결합될 수 있기 때문이다. 복지국가와 평화국가는 상보적으로 추구해 야 할 통합적 과제이자 구분되어야 할 이중과제(이병천, 2012)이다.
○ 독일은 한국에 무엇인가, 어떤 독일 모델인가? - 분단시대 서독은 ‘더 많은 민주주의 감행’(빌리 브란트)을 통한 복지국가와 경제민 주화, 평화체제가 공진, 선순환하는 민주적 평화복지국가의 선진적 경험을 보여주었 다. 서독이 달성한 평화복지국가의 기적과 역량의 축적 없이는 동서독의 평화적이고 사회적인 통일(‘평화복지통일!’)도 불가능했다. 따라서 우리는 평화통일의 ‘기적’에 앞 서, 라인강의 기적 이상으로 서독 ‘평화복지국가의 기적’을 말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 2) 박명림(2006)은 브루스 러셋(Bruce Russett)류의 패권적인 민주적 평화론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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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그 기적과 역량이 평화통일에 주는 함의가 무엇인지를 깊이 궁구할 필요가 있다. 서독 주도로 독일통일을 이룰 수 있었던 원동력은 서독인들이 서독사회가 다원성의 가치속에서 자유와 정치적 사회적 민주주의, 인권을 진지하게 추구한데 있었다(노명 환). 에곤 바르에 따르면, 서독이 동독에 대해 승리한 것은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평 등을 동시에 추구한 사회민주주의가 우월한 노선이었기 때문이었다. - 독일 발전모델은 복지국가측면에서는 분명히 스웨덴의 보편주의에 미달하며 그에 따른 약점을 갖고 있으나, 분단체제 아래 평화복지국가를 달성했다는 점에서 보면 스 웨덴보다 한국에 더 큰 함의를 줄 수 있다. - 독일은 사민주의적 평화복지국가의 한 가지 모델을 보여 준다. 그러나 평화복지국 가는 독일형의 선진적 사민주의적 평화복지국가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국가역 량, 사회역량에서 전반적으로, 현저히 독일에 미달하는 한국이 어떤 형태의 민주적 평화복지국가로 갈 수 있을지, 가야 하는지는 한국의 구체적 조건과 주체적 능력에 달려 있고 열려 있는 문제다. 우리는 이 과제에 대답해야 하는 숙제를 안고 있다.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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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복지국가와 한반도 선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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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한독일 모델의 공통계보와 진화적 분기,독일 평화복지국가의 기적과 역량 ○ ‘반동적 근대화’의 특수 경로와 독일 모델 - 독일의 발전모델은 한국 발전모델과 큰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ⅰ) 동서 냉전 대 립 최전선속의 분단국가임과 동시에 ⅱ) ‘보수/반동적 근대화’ 모델의 궤적(비스마르 크-나치즘 모델)이다. 시야를 넓히면 근대 세계로 가는 세 가지 길에서 보수/반동적 근대화라는 특수한 길이 존재한다. 독일, 일본이 대표적인 나라이며 한국도 이 계보 에 속한다(Moore; Johnson; 사카모토 요시카즈; 성경륭; 이병천). - 존슨의 경우, 자본주의 개발국가의 계보로서 독일, 일본, 한국에 대해 말하고, 보 수적 개발국가 모델과 파시즘간의 연속성에 대해 지적한 바 있다. “자본주의 개발국 가 모델의 중핵에는 엘리트 계층이 계속 권력을 장악하도록 하는 은밀한 보수적 동 맹이 존재한다. 이 배열의 중요한, 그러나 의도하지 않은 결과는 민주적 발전을 저지 하는 것이며 이는 다시 이후 파시즘과 군국주의를 위한 비옥한 토양을 제공하게 된 다.”(Johnson, 1995: 47) - 보수적 개발국가와 파시즘간의 관련성은 매우 논쟁적인 문제다. 과연 어떤 필연적 경향이 있는가? (독일에서 바이마르 공화국의 출현, 일본에서 다이쇼 민주주의 시대 등은 이러한 필연성에 반한다.) 그러나 강력한 힘으로 작동하는 경향성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3) 이 경향이 민주적 문명화의 힘에 의해 효과적으로 저지되지 않을 때 보 수적, 나아가 반동적 근대화의 길로 치닫게 된다(Habermas; Touraine). 그리고 국가 민족주의와 시장사회가 결합될 때 위험이 심화되기도 한다(아렌트; 폴라니). 존슨이 쓰고 있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라는 말의 문제점은 분명히 지적될 필요가 있다. 자 본주의 개발국가 모델이 민주주의를 저지하고 파시즘과 군국주의로 치닫는 것은 시 스템 수준의 동학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보수 지배동맹의 주체적 의지의 결과라고 보 아야 할 것이다.
○ 독일문제, 일본문제, 한반도 문제의 같은 점과 다른 점 - 이른바 독일 문제와 일본문제 - 한국/한반도 문제의 경우, 제국주의/전범국가였던 독일 일본과는 달리, 식민지종속 의 경험과 저항적 민족주의의 기조, 분단과 6.25 전쟁의 경험, 이후 남북간 적대적 3) 이와 관련해 안병직(2000)은 이렇게 쓰고 있다. “제국사에 대한 문제의식은 나치즘과 결부될 수밖에 없다. 물
론 제국의 역사는 나치즘의 전사로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서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제국이 사라진지 채 20여 년도 안되어 나치제국이 등장하였다는 사실을 무시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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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생, 권위주의적 근대화, 유신 독재와 그 재편, 보수적 민주화이후 민주주의의 취약 성과 힘이 센 과거
○ 전후 독일의 현대적 재생, 이중의 단절로서 ‘평화복지국가의 기적’ 실현 - 우리는 독일의 궤적에서 비스마르크-히틀러로 이어진 보수/반동적 근대화 모델과 함께 사회민주적 평화복지국가 모델을 본다. 1) 어두운 전범국가 구체제에 대한 이중 의 단절(전후 연합국 점령기 민주개혁과 탈냉전기 평화복지개혁)을 통해, 그리고 바 이마르 공화국 경험의 비판적 계승을 통해 새롭게 거듭난 현대적 정상국가 독일, 2) 평화복지국가의 축적된 역량이 평화적ž사회적 통일을 가능케 했던 튼튼한 기반이 되 었던 독일. - 독일은 구체제를 발본적으로 청산하고 민주적 평화복지국가의 높은 길로 진화했을 뿐 아니라, 비스마르크적 전쟁개발국가(warfare developmental state)조차 선도적 복 지국가와 동반 발전한 경험을 보여줌. 이는 복지국가가 부자 나라에서만 가능하다는 성장제일주의 변호론에 대한 강력한 역사적 반증이기도 함.
표
<
2>
독일 평화복지국가
이후 경과
ž 사민당과 자민당 연정(1969,최초의 여야간 정 권 교체 *기민/기사당과 사민당 대연정 1966-69) ž 연정, 합의제 민주주의(* 정당명부식 비례대표 제) ž 합의제 민주주의+강력한 시민운동 = 독일식 ‘이중 민주주의’
ž 82년 사민당 실각과 정권고체 ,콜 수상 취 임 ž 98년 사민당, 녹색당 연정 ž 05년 기민/기사당과 사민당 대연정
신동방정책- 아데나워 ‘힘의 우위‘ 정책에서 브란 트의 ‘접근을 통한 변화’ 정책으로
ž 기민/기사연의 변화와 적응, 콜정부의 동방 정책 계승, 연속 (*기민/기사연, 동서독기본조약 및 헬싱키 유럽안보협력회의 비준 거부 ) ž 미국 중거리 핵탄두미사일 배치결의, 대규 모 반핵시위, 녹색당의 연방의회 진출 (1982) ž 동서독 통일조약 발효(1990) ž 사민당·녹색당의 적녹연정, 코소보 참전(1999)
복지
사회국가/보수주의 복지국가틀 위에서 스웨덴화 (*모두를 위한 무상교육)
후퇴, 비스마르크 복지 모델의 딜레마
경제
ž 공동결정 확대와 경제민주화 진전 ž 호황 지속, 황금기 끝자락
평화복지국가의 약한 고리 (1982년 실업율 8.4%)->정치의 우경화 지속
민주
평화 및 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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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탈나치화/탈냉전화, 독일 전후 민주/평화주의의 재생과 성숙 ⅰ) 나치 반동적 우익 전체주의의 청산: 전쟁/반인륜적 야만에 대한 자기책임 인정과 과거사청산 ⅱ) 바아미르 공화국 경험에 대한 반성적 학습 - “본은 바이마르가 아니다” - 선거제도: 정당명부 비례대표제(1949) - ‘방어적 민주주의’(기본법 18, 21조), 56년 독일 헌재의 공산당 해산 판결(냉전시 대 취약한 민주주의 시기) ⅲ) 냉전시기 서독 구동방/독일정책의 핵심 - 동독을 국가로서 승인하지 않음 - 2차 대전 결과 발생한 독일영토 축소를 인정하지 않음 - 통일 방안은 힘의 우위를 통한 사실상 동독 흡수합병 정책 ⅳ) 사민당의 재생, 독일 민주주의의 성숙화 - 비스마르크와 히틀러의 철저한 탄압, 그리고 전후 기민/기사당 장기집권기를 견뎌 내고 재생 - 독일 사민당의 고데스베르크 강령(1959), 사회화론의 폐기와 진보적 국민정당화(이 후 베를린 강령 등으로 진화) - 대연정 시기이후 독일 반공주의 정치문화에서 결정적 변화(슈테판 크로이츠베르거, 2015), 탈냉전기 민주주의 성숙(※ 68년 서독공산당의 재창당) - 69년 최초로 여야 정권교체, ‘더 많은 민주주의’와 신동방정책을 추구하면서 평화 복지국가 실현(82년 실각까지 13년간 집권) - 연정과 합의제 민주주의(※ 일본의 55년 체제/자민당 장기 집권과 비교) ⅴ) 시민운동의 발전과 독일의 선진적 ‘이중 민주주의’(합의제 민주주의 + 시민운동) - 68운동과 그 이후, 평화/환경/여성 운동의 발전 ⅵ) 통일을 뒷받침한 역사적 변화의 세가지 구성요소(박순성, 2014: 134-5) - 동서독간의 지속적 교류와 협력, 화해와 접촉을 통한 동서독 지도부와 주민의 의 식변화 - 서독체제의 선진적 특징, 동독 주민의 정치적의식과 역량 - 독일통일과 유럽연합 출범을 동시에 이룬 서독 지도부의 외교적 역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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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은 구체제를 발본적으로 청산해 본 적이 없이 오늘에 이르렀음. - 민주화 시대에 들어와 냉전반공/개발지상주의를 넘어서기 위한 반쪽의 ‘평화복지 국가’ 추구, 중도 좌초. 보수/수구 정부에 정권 넘겨줌 - 박근혜 정부, 독일을 끌어들이며 무반성적 ‘통일대박’론과 시장안보국가 또는 신자 유주의적 안보국가 기조 추구 - 독일의 구체제 및 평화복지국가 모델의 반성적 학습 위에서 한국 평화복지국가의 진로를 생각할 필요.
3. 박정희의 시간, ‘반동적 근대화’ 경로와 잃어버린 평화복지국가의 기회
3-1. 박정희의 이중적 시간, ‘ 한강의 기적’ 과 ‘ 비스마르크적 시간’ ○ 박정희 모델의 이중성 = 후발 민족주의적 근대화 요소 + 후발 파시즘적 요소 - 5·16쿠데타는 일본의 “메이지유신과 2·26사건으로부터 영감”을 얻었으며, 유신체제 는 독일의 “비스마르크와 히틀러를 대충 버무린 듯한” 체제(권보드래 외, 2012: 97, 218)라는 견해가 있다. 이는 박정희 체제가 독일-일본식 ‘반동적 근대화’ 체제의 계 보 위에 있음을 적절히 짚고 있다. 박정희 모델은 경이적인 압축 추격근대화와 고도 의 정치적 반동의 모순적 혼합물이라는 성격을 갖고 있다. 이 모델의 모순적 성격과 그에 따른 현대 한국인의 고뇌는 많은 부분 메이지유신 이래 일본문제(이병천, 2003: 63; 2000: 84), 그리고 독일문제(안병직, 2000)와 닮은 부분이 많음.
○ 박정희의 독일, 일본 모델 인식 - 박정희는 “비스마르크나 히틀러에 이르러서도 그들의 정치가는 국민을 위하여 일 할 수 있는 인물이었던 것이 사실이다”라고 서슴지 않고 말했다(박정희, 1963: 258). - 박정희는 차관 도입을 위해 서독을 방문(1964. 12)했을 때도 유사한 생각을 보임. 독일 ‘라인강의 기적’을 바라보는 박정희의 생각. ⅰ) 게르만 민족의 기질(일치단결, 내핍절약 저축, 질서를 존중하고 복종하며 직업을 신성시), ⅱ) 좋은 지도자의 역할. 독일 언론 또한 박정희를 ‘아시아의 프로이센인(人)’이라고 지칭하고, 비스마르크에 비유. 주목해야 할 것은 박정희가 독일 근현대사에 대해 말할 때 나치즘과 전범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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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과오에 대해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는 라인강의 기적을 말할 때도, 그 시기가 냉전에 따른 한계를 가진 시기였지만, 2차대전후 독일이 연합군의 점령하에 과거사를 청산하고 ‘정상국가’로 재생한 시기임을 보지는 않는다(※ 1963년 7월 에곤 바르의 투찡(Tutzing) 연설 및 파독 한국인들의 독일 상황에 대한 회고). - 독일에 대한 박정희의 이런 사고방식은 일본 메이지유신에 대한 미화와 궤를 같이 하는 것이다(박정희, 1963). ⅰ) 메이지유신은 사상적 기저를 천황 절대제도의 국수 주의적인 애국에 두었음. ⅱ) 정치경제 양세력이 천황을 정점으로 귀족을 국가의 원 로로 하는 제국주의적 체제를 확립. 그러면서 “이와 같이 이들은 자신의 확고한 주체 성 위에 정치적인 개혁과 경제적인 향상, 사회적인 개혁을 수행하여 왔기 때문에 구 미체제에의 편중을 극복할 수도 있었다”고 언급. - 박정희는 2·26쿠데타에 대하여 “2·26 사건 때 일본의 젊은 우국 군인들이 나라를 바로잡기 위해 궐기했던 것처럼 우리도 일어나 확 뒤집어엎어야 할 것이 아닌가?”, “국수주의자들의 기백이 오늘의 일본을 만든 거야”라고 언급. 즉 2·26사건을 한국의 롤모델로 생각하는 박정희의 머리에는 군부 파시스트의 정신이, 그리하여 5·16 1차 쿠데타 및 10월 유신 2차 쿠데타에는 일본 천황제 파시즘의 정신이 흐르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이병천, 2003; 2011). 전후 개혁 관문을 통과해 민주평화국가로 재생 한 독일을 롤모델로 생각한 김대중과는 판이하게 대척적인 인식이다.
○ 그러나 이처럼 박정희가 공공연히 표방한, 위험한 극우 파시즘적 성향과 국가의 사회 지배 논리에도 불구하고 이는 60년대에는 상당히 통제되고 있었다. 60년대 박 정희 체제는 기본선에서 히틀러보다는 비스마르크쪽에 가까운 편이었다고 여겨짐. 이 는 4월 혁명의 여진(餘震), 야당과 시민사회의 견제력, 대외적으로 미국의 압력 등 여러 변수에 기인. - 60년대 정치체제(삼선개헌 이전까지)의 성격은 ‘준경쟁적 권위주의’(임혁백), 또는 권위주의와 민주주의라는 ‘이중적 정치질서의 중첩적 병존’(강정인)에 해당 - 그러나 60, 70년대를 기계적으로 구분할 수는 없음. 미국의 요구에 호응해 추진한 베트남 참전 및 한일협정에서 박정희 체제는 이미 호전적인 개발 국가주의(warfare developmental statism) 또는 ‘병영국가’ 성향을 드러냈음(과거사 청산 과제를 물려 줌). 그리고 69년 삼선개헌 단행.
○ 고도성장과 ‘한강의 기적’으로 불리기도 하는 한국경제의 도약. 개발주의와 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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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공주의, 경제기획원과 중앙정보부를 쌍두마차로 한 박 정권의 ‘조국 근대화’ 기획 (‘선건설 후통일’) 아래 한국 현대사에서 후발 민족주의 근대화 성공이 가시화되었음. 압축 개발주의는 산업화의 시대 과제에 부응함과 동시에 냉전반공주의에 물질적 토 대와 그에 따른 국민적 동의 기반을 제공하는 것이기도 했음. 이에 따라 떠오르는 ‘박정희의 시간’이 도래했음. - 정책적, 제도적 혁신: 한국형 개발주의(또는 개발국가 모델)로 불리는 권위주의적 ‘관민협력’ 자본주의 체제(동원과 ‘충성’ + 협력 + 시장경쟁). 그 발전론적 핵심은 산 업정책과 금융통제를 무기로 하는 개발국가와 고투자 재벌이 지배연합이 된 ‘위험의 공유’와 조건부 지대(contingent rent, 성과 규율을 강제하는 몰아주기 특혜의 유인체 계), 수출지향과 수입대체 및 계열상승과 계열하강이 결합된 이중의 복선형 산업화, 그리고 세계경제에 전략적 개방을 통한 개방이익의 확보. 이런 정책/제도적 혁신은 당대 국내외 전통적인 수입대체 일변도 자립경제론/민족경제론의 한계를 극복하는 내용을 가짐. 시야를 넓히면 레닌-스탈린식-북한식 국가독점사회주의 모델의 맹점을 넘어서는 요소도 가졌음. - 노동자와 국민 대중의 희생, 헌신(※ 전태일의 분신). 이는 계급구조적 측면에서 자본에 유인체계로 작동하여 개발주의의 ‘이중의 유인체계’ 구축. - 대외적으로 한미일 반공 삼각 동맹(한일국교 재개, 베트남 참전)과 당시의 개방적 인 세계경제적 조건 - 역사적 선행 조건: 여러 한계에도 불구하고 비교역사적으로 보면 이승만 정부시기 토지개혁과 교육개혁의 성과 중요
3-2. 유신 체제의 역코스, 평화복지국가의 기회를 상실하다 ○ 60년대말 ~ 70년대초의 이중 위기, ‘1972년의 선택’과 한국의 역코스 - 국내적으로 냉전개발주의 압축성장 체제의 구조적 모순이 초래한 위기 - 국제적으로 동서간 긴장완화, 냉전체제 이완 (데탕트) 국면의 도래 - 71년 제7대 대선에서 김대중과 경합한 박정희의 힘겨운 승리(634만표 대 540만 표) - 71년 12월 국가비상사태 선포, 72년 11월 17일 유신독재의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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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2년의 선택으로 ‘총력 안보’와 돌진적 개발을 추구한 ‘반동적 근대화’의 길로 탈 주. 박정희의 시간은 한국형 ‘비스마르크의 시간’에서 한국형 ‘히틀러의 시간’으로 타 락(※ 박정희는 히틀러가 ‘국민을 위하여 일할 수 있는 인물’이라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음). - 박정희는 71-72년 미중 화해에서 비롯된 데탕트를 안보위기로 받아들임. 긴장완 화와 이에 추동될 한반도의 평화의 길은 냉전 국가독점주의 안보를 핵심으로 해온 국정기조와 정면충돌하며, 정권의 존립 기반을 위협해 정권안보와도 충돌 - 7·4남북공동성명 발표, 3개월만에 10월 유신 단행. 전쟁 방지와 평화 통일, 남북대 화를 이용, 이를 구실로 삼아 ‘10월 유신’ 쿠데타를 정당화. - 평화 통일을 명분으로 내세운 것은 이전의 ‘선건설 후통일’ 노선과는 크게 달라진 태도로서 나름 데탕트 추세에 적응한 대응방식처럼 보임. 그러나 “조국의 평화통일” 을 구실로 한 유신의 안보국가독점 체제는 맹목적인 ‘통일=민족’ 의제가 얼마든지 독 재정권의 지배전략용으로 활용될 수 있는 양날의 칼임을 생생하게 보여줌. 박정희는 국민투표에서 이를 교묘히 활용(“국민여러분이 헌법 개정안에 찬성치 않는다면 나는 이것을 남북대화를 원치 않는다는 국민의 의사 표시로 받아들이고…” 운운). - 박정희는 자폐적인 자신의 권력욕 및 영도자적 극우 국가주의에 대한 뿌리 깊은 집착 때문에 권력의 자의적 오남용, 지극히 위험하고 무책임한 역사적 퇴행을 감행. 그런데 유신체제는 박정희의 개인적 지배체제 성격이 농후한 일종의 ‘집정관 체제’ (praetorian regime)로 제도화의 수준이 매우 낮은 불안정성을 내포(한배호), 유신독 재는 ‘대중독재’라기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됨. - 유신체제는 북한의 유일체제와 적대적 공생을 도모한 쌍둥이 독재. 이에 따라 유 신체제에는 북한을 닮은 요소들 존재. “유신체제는 북한과 대결과 북한을 반면교사로 삼으면서 성립되었지만 결과적으로 북한체제와 닮아가는 적대적 쌍생아의 성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북한을 능가하기 위해 추진되고 시행되었던 전략과 조치들이 결과 적으로 북한을 닮아가게 만든 것이다.”(이종석, 2003: 286; 조동준, 2014) - 대외적으로 박정희의 퇴행적 행보에 대해 미국의 압력은 미약했고, 사실상 묵인. 당시 미국은 제동을 걸 수 있는 지렛대를 상실한 형편(배긍찬)(※ 베트남전쟁 참전 요구 수용)
○ 잃어버린 민주적 평화복지국가의 기회 - 1970년대초 한국에는 평화와 민주주의, 복지 확대와 균형성장이 선순환하는 상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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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로 나아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의 창이 열렸다고 할 수 있음. 시대명제에 부응 하는 김대중의 대안도 제시된 바 있었음. 그러나 불행하게도 박정희의 72년의 역코 스 선택으로 이 기회는 봉쇄, 상실. - 세계적 데탕트의 흐름에 역행하는 박정희의 반동적 역코스는 당대 독일에서 빌리 브란트가 주도한 바, 신동방정책과 더 많은 민주주의가 선순환하는 민주적 평화복지 국가의 길과 완전히 대비됨(김연철). - 한편, 아시아에서 일본도 데탕트 흐름 속에서 다나카 정권이 탄생. 대외적으로 중 일 국교 정상화를 추진하고(손열, 2015), 대내적으로 지방공공사업 시행을 통한 자민 당식 분배정치을 완성하며, 노인의료비 무상화 추진 등으로 복지원년을 선언하는 등 전진적인 변화를 보임(일본식 평화복지국가의 길?). - 유신의 역코스는 브란트의 한국적 버전을 제시했다고 할 김대중을 죽음의 문턱으 로 몰아넣음. 동시에 결국 박정희 자신의 비극적 죽음과 정권 붕괴를 가져옴.
표3> 세계, 독일의 데탕트와 한국 유신의 역코스
<
미국 및 세계 시간
독일 시간
한국 시간
ž 1월 닉슨 대통령 취임, 닉슨 독트린 발표, 아시아 주둔 미 군 감축 시작 ž 바르샤바조약기구 유럽안보 회의 제의
ž 5월 할슈타인원칙 포기선언 ž 10월 사민/자민당 연립정부 (1969년 여야 정권교체), 브란 트 수상 취임, 동독실체 인정 하는 신동방정책 발표 * 63년 에곤 바르, “접근을 통 한 변화” 구상 발표
ž 1월 부실기업정리 ž 10월 박정희 삼선 개헌 ž 11월 박정희, 방위산업을 위 한 중공업 육성(4대 핵심공장 건설) 지시
ž 동서독 총리 정상회담, ž 8월 소련과 모스크바 조약 ž 12월 폴란드와 바르샤바조약
ž 11월 평화시장 노동자 전태 일 분신자살
1971
ž 7월 닉슨, 중공방문 예정 및 신경제정책 발표 ž 중국의 유엔가입과 대만의 유엔 축출
ž 5월 동독 호네크 서기장선출 (울브리히트 실각) ž 9월 4대 점령국과 베를린지 위에 관한 협정 조인 ž 12월 브란트, 노벨 평화상 수상 ž 12월 동서독 통행협정체결
ž 4월 7대 대통령선거(박정희 김대중 격돌) ž 7월 사법파동 ž 8월 광주대단지 사건 ž 9월 남북 적십자예비 회담 ž 11월 오원철, 경제 제1수석 비서관 임명 ž 12월 국가비상사태 선포, 국 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 제 정
1972
ž 2월 닉슨의 중국방문과 주은 래와 회담, 상하이 공동성명 발표(미국이 중국의 평화6원칙 수용) ž 7월 다나카 내각발족 ž 9월 중일 수교와 다나카 총 리 중공 방문 ž 10월 다나카 소련방문
ž 1월 개정경영조직법 발효(52 년 제정) ž 4월, 기민/기사당의 브란트 불신임안부결(2표 부족) ž 10월 제2차 연금개혁 ž 12월 동서독관계의 기본조약 체결 ž 11월 총선, 사민당 승리(제1
ž 7월 이후락의 비밀방북과 7·4 남북공동성명 발표(통일원 칙) ž 8월 남북적십자 회담 ž 8·3 비상조치(대통령 긴급명 령) ž 10월 유신 선포, 박정희 영 구집권시대 개막
1969
1970
안보개발국가를 넘어, 평화복지국가로 21
ž 닉슨 재선 성공
1973
ž 미국의 베트남전쟁 패배와 완전 철수단행 ž 헬싱키유럽안보협력회의 시 작(75년 최종결의안 채택) ž 1월 일본, 노인의료비 무상 화 등 복지원년선언
1974
당)와 제2차 사회/자유 내각 시작, 브란트 수상 재선
ž 5월 서독연방의회에서 동서 독 기본조약 비준(268 : 217) ž 5월 브레즈네프 소련 서기 장, 본 방문 ž 7월 연방 헌재, 동서독기본 조약 합헌 판결 ž 9월 동서독 유엔 동시가입
ž 1월 중화학 공업화 선언(100 억불 수출, 국민소득 1000불 달성목표), 방위산업육성책 마 련 ž 5월 중화학공업육성계획 발 표 ž 7월 포항제철 준공(68년 설 립) ž 8월 남북대화 중단 선언, 김 대중 납치사건발생 ž 10월 1차 석유파동
ž 5월 동독간첩 기욤사건으로 브란트 수상 사임 ž 슈미트 수상 취임, 동방정책 계승
ž 긴급조치 1호 선포(유신헌법 의 개정 또는 폐지운동 금지) ž 인혁당 재건위 관련자 사형 집행
3-3. 중화학공업 육성과 개발독재 ○ 중화학공업화를 위해 유신이 필요했는가? - “중화학공업화가 유신이고 유신이 중화학공업화라는 것이 쓰라린 진실이라고. 하 나 없이는 다른 하나도 존재할 수 없었다”(오원철)라는 주장이 있다. 그렇지만 1972 년 10월 유신 선언에서는 중화학공업 육성을 위해 유신체제가 필요하다는 말은 전혀 없었다. 그 이전 71년 7월 1일 7대 대통령 취임사에서 중화학공업 전환 필요성에 대 해 언급했는데 이는 71년 2월 확정된 제3차 5개년계획의 요점을 설명하는 수준에 그치고 있음. 73년 1월 연두기자 회견에서 비로소 ‘중화학공업화선언’으로 공식화하 고 1인당 소득 1000달러, 수출 100억 달러 목표 제시(공업구조 개편 ‘신계획’으로 약 칭, 73년 8월 3차계획을 대폭 수정한 <우리경제의 장기전망>).
○ 중화학공업화의 목포/성격 질적 변화와 사후적 정당화 - 애초에 의도했던 방위산업을 위한 중화학공업화로부터 이후 ‘경제산업적 필요’(공 업구조 고도화/수출 증대)를 위한 중화학공업화로 목표/성격상 근본적인 질적 변화가 일어남(병기생산을 위한 4대 핵심공장 건설계획 추진과 좌초). 국가안보라는 요인도 후순위로 밀려남. 방위산업육성은 중화학공업육성과 별개로 진행. 73년 1월 연두기자 회견의 ‘중화학공업화 선언’은 바로 이 질적 변화를 알려 주는 것임 (박영구, 2012: 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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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라서 중화학공업화가 왜 유신독재로의 전환을 필요로 했는지는 분명치 않게 된 다(한배호, 1994: 307). 중화학공업화는 유신을 유발한 원인이 아니라 결과(임혁백, 2005). 질적으로 성격이 변화된 중화학 공업화의 돌진적 추진은 유신을 사후적으로 정당화하는 성격을 가짐. 개발을 위해 필요한 독재라기 보다 10월 유신을 사후적, 결 과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한 독재의 성격 농후.
○ 제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71년 2월 확정)을 왜 폐기했나? ⅰ) “성장 안정 균형의 조화”를 추구. 안정 속에 성장을 이룩하고, 개발성과가 농어 민과 저소득층을 포함한 온 국민에게 널리 파급되어 국민복지 향상 ⅱ) 산업구조의 고도화와 국제수지의 개선 및 주곡의 자립을 실현함으로써 자립적 경제구조 이룩(제조업중 중화학공업비중 76년 39.6%, 수출의 중화학비중 69년 29.2 %에서 43.7%로, 72~76년 중화학제품 수출증가율 34.0%, 경공업 수출증가율 17.8%). ⅲ) 4대강 유역개발 등 국토의 종합적인 개발을 보다 촉진하여 지역개발의 균형 실 현 ☞ ‘상위 중진국’ 실현, 조국통일의 기반을 이룩하는 새 역사의 이정표를 다질 것. - 위와 같은 제3차 계획을 60년대식의 ‘준경쟁적 권위주의’ 체제 아래 추진하는 길 이 충분히 가능하지 않았나? 상황이 변했다 해도, 중화학공업화의 기본 목표에서 방 위산업 육성은 뒷전으로 돌려지고 별도로 추진하게 되었다면, “성장, 안정, 균형의 조화”를 추구해 상위중진국을 실현하고 조국통일의 기반을 이룩한다는 적절한 목표 를 가진 3차 계획을 폐기하고 엄청난 무리와 자의적 권력 오남용을 하면서 중화학공 업 ‘신계획’을 추진할 필요가 과연 있었는지 묻게 된다(이병천, 2014: 103). “만약 유 신이 없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유신이 아니어도 박정희는 3선개헌으로 1975년까 지 대통령을 하게 돼 있었다. 그랬으면 … 비록 중화학공업의 진척이 다소 늦어졌다 해도 경제정책뿐 아니라 전반적인 국정운영이 훨씬 합리적으로 균형 있게 전개됐을 가능성이 컸다고 볼 수도 있지 않겠는가.”(이장규, 2012: 181)
3-4. 소결 ○ 박정희 시대에 두 개의 시간의 ‘비동시성의 동시성’(임혁백, 2014). 한국형 비스마 르크적 시간과 히틀러적 시간. 두 시간의 단절과 연속 문제를 어떻게 봐야 하나? 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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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의 밝은 시간은 한국현대사에서 기적적인 압축산업화 성취를 이루고 이를 물려 준 시간. 이른바 ‘한강의 기적’은 분명한 실체를 가지고 있다고 할 것이며 박정희는 개발주의 압축성장체제 또는 보수적 근대화 수동혁명을 지휘한 CEO로서 역할 수행.
○ 그러나 무엇보다 유신 독재는 평화와 민주주의, 경제발전, 복지 증대가 선순환하 는 길, 즉 한국이 ‘아시아의 서독’으로 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상실케 한 역코스 의 시간이었음. 단선적 진화의 사고틀을 탈피해야. - 유신독재는 한국 민주주의와 인권의 암흑기. 나아가 민주주의/인권, 평화, 복지, 경 제민주화를 통합적으로 사고하는 민주적 평화복지국가 관점에서 박정희 체제가 가져 온 반동적 퇴행, 역주행을 직시해야 할 것임. - 권력 양식(국가/재벌의 독점적 동맹) 및 사회화 양식(안보/성장제일주의)에서 볼 때, 72년의 선택과 그 유산은 한국에서 평화복지국가의 경로가 지극히 곤란한 덫을 놓았음.
○ 박정희의 시간은 우리 사회의 경제력 집중, 사회경제 양극화와 이중구조적 불균형 을 심화시키고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 국민통합의 길에 덫을 놓는 원죄. 오늘의 재 벌공화국, 서울공화국의 뿌리. - 전두환 신군부독재가 죽은 박정희를 살려내고 이어받음. 한국 경제가 중화학공업 화 부실 늪에서 벗어나게 된 것은 대내적으로 금융자유화를 통해 재벌의 힘을 한층 강화하고, 노동자 서민 대중에 일방적 희생을 강요하며 비용을 사회적으로 전가한 구 조조정. 대외적으로 미일 보수 정권의 지원, 그리고 80년대 중후반 ‘3저 호황’
○ 복지 억압 - 박정희 모델의 복지함량은 박정희가 칭송한 독일 비스마르크 전쟁 복지국가/포섭 적 복지체제와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저발전. 박정희와 대조적인 비스마르크의 복 지 인식. “국가란 오직 유복한 사회계급의 보호를 위해서만 창안된 것이 아니라 무산 계급의 요구와 이익에도 봉사하는 복지기구”이며, 국가의 행정기관을 통해 운영되고 관리되는 보험제도 수립이 곧 “인륜과 기독교의 의무이자 국가를 수호하는 정치의 과제” - 박정희는 돌진적 안보/개발 제일주의로 복지 억압. 고개발비, 고군비(高軍費)와 저 복지. 그러면서도 기본원리는 보편주의가 아니라 비스마르크적 사회보험원리를 따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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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재정부담과 책임의 최소화(신동면, 2011: 331) - 생활보호법(저소득 극빈자의 자립과 자조원칙), 특수 직역연금(공무원, 군인, 사립 학교 교직원), 산재보험(1964), 의료보험(1977). 의료보험은 법제정후 14년이 경과된 유신 말기에야 수립되었고 그 조차 가장 필요로 하는 계층이 복지에서 배제(500인 이상 사업장 대상). 강제적용 대상은 16인 이상 사업장에 한정. - 국민연금제도는 73년 법제정했으나 무기한 연기(86년 법제정, 88년 도입) - 사회보장 재원에서 차지하는 보험료비중 증대에 따라 정부예산 비중 감소. GDP 대비 사회보장지출 비중은 62년 1.3%에서 79년 1.9%로 증가 - 한국, 일본, 대만의 비교. 79년 시점에서 한국은 사회보험의 제도적 정비가 가장 뒤늦었고, 내용면에서도 가장 뒤쳐짐(권순미, 2004) - 대기업을 중심으로 하는 기업복지의 발전과 ‘이중화 복지체제’ 형성(정무권, 2014) - 자산기반 생활보장체계
4. 김대중의 시간, 평화복지국가 반쪽 따라잡기와 중도 좌초
4-1. 김대중과 독일, 미국 ○ 김대중, 독일모델의 인식에서 박정희와 대척에 서다 - 박정희가 독일에서 비스마르크/히틀러의 구독일을 보았다면, 김대중은 전후 이중 적 단절을 통해 구체제를 청산하고 거듭난 평화와 민주주의, 대중참여경제, 복지국가 의 신독일을 보았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서독의 성숙한 민주주의에 대해 주목하고 강조. 그런 의미에서 일찍부터 “한국은 제2의 서독, 아시아의 서독이 되어야 한다”고 주창, 줄곧 역설했으며(김대중, 1971), 이후에는 전후 거듭난 서독 경제의 활력에 대 해 주목
○ 7대 대선(1971)에서 데탕뜨를 냉전반공/대결의 한국/한반도를 쇄신할 기회로 포 착. 4대국의 한반도 평화보장, 남북화해 협력과 평화통일 3단계론, 대중민주주의와 대중경제론을 주창, 박정희와 대척에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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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후 시기 김대중의 사상은 연속과 단절을 보인다. 옥중생활과 미국 생활을 통해 경제사상의 변화. 특히 가장 중요한 것은 미국 시기를 거치면서 경제 롤모델이 독일 에서 미국으로 변화된 것. 97년 외환위기 이전에 이미 변화를 보임(이병천, 2000; 2007).
4-2. 평화복지국가의 한국적 버전 ○ 97년 평화적 정권 교체와 한국 민주주의 절차적 공고화 진전 - DJP 연합 형성과 그 한계, 구체제의 중압
○ 대북 포용정책과 평화의 한반도 지향 - 2000년 남북정상회담 실현과 6·15선언. ‘남북미 삼각관계’에서 한국의 적극적 역할 수행. 이는 평화정착을 핵심으로 하는 한반도 미래에 대한 김대중의 확고한 철학과 의지, 정책능력 때문에 가능했음(김연철, 2010). 이로써 남북한이 “적에서 친구로”, 상호 체제의 공식적 인정과 교류 협력 증진의 과정이 진행되게 되었음. ☞ 이른바 “2000년 체제”의 도래. 이는 민주주의 공고화와 함께 김대중의 시간이 달 성한 최대의 성취에 해당.
4-3. 민주주의, 시장경제 그리고 생산적 복지 ○ 민주주와 시장경제의 병행 발전 - 97년 위기는 김영삼 정부가 물려 준 것 + 박정희 체제의 어두운 유산 + 보수세력 에 ‘포위된 개혁’ - 재벌개혁 5+3 원칙 - 노사정 위원회 - 질서 자유주의를 내포한 신자유주의/‘세계화’ 지향적인 경제개혁 추진(대중경제론 에서 디제이노믹스로). 대북정책에서는 민족주의적 포용주의. 그러나 경제정책에서는 탈민족주의적 세계시장화를 추구하는 역설. - 김대중은 “IMF맨”(커밍스). 한국은 IMF의 충실한 모범생이 됨. IMF 요구 훨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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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으로 시장화, 개방화를 추진(최장집, 2010; 이병천, 2013). 이때부터 “권력은 시 장으로” 넘어갔다고 보아야 할 것임. 신자유주의 착근(※ 김대중을 생각한다(삼인, 2011)에서 여러 논자들의 지적 참고).
○ 생산적 복지 -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으로 인해 국가복지 확대 필요성 증대. 비로소 복지가 핵심 적인 ‘사회문제’로 부상, 쟁점화 - 국민연금의 전국민 확대, 의료보험통합, 고용보험과 산재보험의 전사업장 확대, 국 민기초생활보장제도의 도입 등 복지 확대 추진
○ 조세정책 - 1997년 법인세수입 증가. 사회보험료 비중도 증가해 전체국민 부담률을 높임. 사 회보험료를 포함해 직접세 증가가 두드러짐. 이러한 변화는 조세문제가 정치적 이슈 가 되면서 ‘조세정치’가 등장하는 계기로 작용. 그러나 저부담 조세체제 지속(양재 진).
4-4. 소결 ○ 김대중 정부의 대북포용정책은 남북한이 ‘적에서 친구로’ 가는 정책. 한국판 ‘접근 을 통한 변화’의 좌표를 제시하고 현실화시킴. 이에 따라 남북한은 각각의 자기 발전 과 한반도 차원에서 민족적 진화의 길이 열림. 한국 현대사에서 민주적 평화복지국가 의 길로 가는 여정이 발을 내딛음. 이것이야말로 김대중 시간의 획기적인 성취.
○ 평화체제의 제도화 및 정치·군사적 신뢰구축을 진전시켜 내지 못함 - ‘포위된 개혁’. 취약한 국내 동의기반, 야당과 수구세력의 집요한 발목잡기(이른바 ‘남남갈등’). 이후 정권교체에 따른 역진. 이는 뿌리 깊은 ‘국내 냉전’의 지속과 얕은 민주주의의 기반, 그에 따른 민주화이후 민주주의의 취약성 불안정성에 기인. - 서독의 경우와 확연히 대비되는 것. 기민당식 합리적 보수의 실용주의는 반공냉전 주의를 자기정체성으로 하는 한국의 보수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음(김연철, 2003; 2011). 평화복지국가의 길에서 한국과 독일의 질적 시대격차이자 발전격차 존재.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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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은 중요대목(국민의식을 포함)에서 독일의 전전 시간대에 갇혀 있다고 해야 함. - 이전 시기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 1991년 남북 기본합의서)은 남북한의 신뢰 미비 상황에서 북한핵을 둘러싼 북미갈등 및 남한 내부 남남갈등으로 붕괴했지만, 김 대중 정부의 포용정책은 이 탈냉전 평화지향 보수의 긍정적 유산에 접속해 합의 기 반을 확장했어야 할 필요(임혁백, 2010). - 민족주의의 과잉과 “6·15담론”의 한계 문제. ⅰ) 선언의 내용. 특히 2항을 둘러싼 여러 논란. 통일 방안에 대한 합의라는 해석은 과도한 것임. 외형상 공통점. 그러나 본질적 이질성(최완규, 2002). ⅱ) 한국의 경우, 독일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냉전반공주의 족쇄가 가혹한 점을 고 려한다면 통일과 거리두기를 한 평화를, 그리고 어떻게 평화를 실현할 수 있는지에 대해 더 집중했어야. 독일이 주는 교훈도 여기에 있지 않나. “그것(6·15담론)은 평화 과정에 대한 기능주의적 가정의 한계다. 남북한의 군사적 대립구도가 남북한의 경제 적 교류와 협력만으로 해소되지는 않는다. 남북한 모두 안보담론의 전환을 이루지 못 한다면, 2000년 체제의 진화는 불가능할 수 있다. … 6·15담론은 통일된 한반도에 대한 주변국가의 안보적, 경제적 우려를 담고 있지 않다.”(구갑우, 2007: 73, 67) ⅲ) 대북포용정책은 브란트의 신동방정책에서 보는 바와 같이 평화와 통일을 확연히 구분하면서 통일의 길을 미제로 열어놓고 있지 않다. “동방정책과 비교하면 1972년 시작된 한국의 새로운 ‘북방정책’은 다른 시각에서 출발하였다. 동방정책이 의도적으 로 독일의 미래 지위가 어떻게 될 것인지를 미제로 남겨놓고 “국가 문제” 해결을 미 룬 데 반해, 한국의 북방 정책은 처음부터 통일이란 목표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적 문제’는 처음부터 여러 다른 이슈들과 구분할 수 없이 연결 지어져 버렸던 것이다. … 모든 다른 이슈들이 그때 이래 규정된 통일 목표에 맞추 어 측정되어져 왔다. 그 후 1992년과 2000년에 … 남북한간 이해증진은 기본적으로 동일한 원칙을 따랐다. 그리하여 남한의 북방정책과 독일의 동방정책간 중요한 차이 는 장기간 동안 협력의 전제로서 두 국가의 존재를 인정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통일, 협력, 통합은 모두 한 바구니에 담겨져 왔고 유사한(parallel) 일이라고 인식된다.”(한 스 기스만) - 국제적 조건의 중요성: 미국의 부시정권 등장과 ‘테러와의 전쟁’ 분위기, 대북포용 정책 압박 제동, 북미간 갈등 심화
○ 생산적 복지로 신자유주의 양극화 진전을 막아 내기에는 역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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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에 따라 복지국가 전환을 억압하고 건너띈 압축 불균형 산업화의 유산을 극복하 지 못한채 압축시장화를 초래한 결과(이병천·신진욱, 2015) - 부동산 규제 완화와 부채의존 성장체제 출현 - ‘권력이 시장으로 넘어가’ 대중의 삶의 불안 초래, 대중들은 각자도생하는 시장인 간으로 변모 - 정치적 민주주의 진전을 허무는 취약한 사회경제적 기반
○ ‘김대중 모델이 진정으로 박정희 개발주의 성장모델을 극복하는 대안모델이 되었 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회의적 - 경제 롤모델을 독일에서 미국으로 바꾼데 따른 발전 패러다임의 실패 - ‘개발주의 이후 한국경제의 대안적 경로 창조 형태는 어떠해야 하나?’라는 근본적 질문이 제기됨. 개발주의의 부정적 유산을 척결하고 긍정적 유산(특히 위험 공유, 지 원에 상응하는 제도적 강제 규율; 복선형 산업화)을 이어받아 독일형 사회적 조정시 장모델의 방향으로 길은 매우 좁은 문임은 분명. 이는 노동배제와 국가-재벌 동맹 중심의 수직적 조정형태로부터 노동 참여와 제도형태 배열의 수평적 조정 형태로 진 화하는 것이기 때문(이는 주거래 은행제도 또는 공적 기관투자가로서 국민연금을 지 렛대로 하는 새로운 재벌 규율방식 창조를 포함하는 것. Amsden(1990[1989]) 참조). 그러나 김대중이 롤모델로서 독일을 폐기한 이후에, 정치권 전반적으로 그런 방향의 사고 자체가 소멸하고 시장주의 득세. 97년 이후 국가의 자본통제와 규율은 역설적 으로 권위주의 시대에 현저히 미달. ☞ 압축 과잉 시장화와 ‘개발주의의 타락’(아오키)이 중첩된 결과 초래 ☞ 평화-독일 친화적인 대북포용주의와 시장-미국에 친화적인 디제이노믹스간의 미 스 매치. 97년 체제가 평화국가와 한반도평화의 길을 좌초시키는 ‘역습 효과’ 발휘 (이병천, 2000: 120). 또는 2000년 체제의 1997년 체제로의 포섭(구갑우, 2007: 57, 66-7). “사회적 양극화와 과잉자본이 공존하는 남한의 불균형이 민주주의를 위협하 고 이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가 한반도 평화 과정을 위협”하는 악순환 초래. ☞ 김대중식 평화복지국가/민주주의 공고화의 가장 약한 고리에 해당
○ 증세의 정치 실패 - 과잉 시장화과 불평등 심화의 폐해는 국가복지를 획기적으로 확대하면 해소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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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있겠으나 이는 매우 어려운 일 - 증세의 정치 실패: 복지증세는 전혀 새로운 의제인데다(복지비용 분담 문제를 둘 러싸고 첨예한 갈등) 경제위기로 과세기반 붕괴해 기존 조세개혁마저 후퇴. 중산층 서민 대책의 일환으로 다시 소득세 감면 조치
○ 자산기반 생활보장체계의 경로의존성, 부채 추동 성장체제 - 김대중 정부의 부동산 (및 신용카드) 규제완화 정책. 중산층 가계는 부동산(주택) 을 중심으로 하는 자산 증식. 재테크를 취약한 노동소득을 보완하는 중요한 생존 전 략으로 활용. 특히 금융시장 불안정으로 인해 민간연금과 같은 금융자산보다 생활 보 장수단으로서 부동산(주택) 취득의 심화. 일종의 투기적 시장 포퓰리즘. - 부동산에 대한 과도한 의존이 가계부채를 증대시키고 이것이 다시 자산가격을 상 승시키는 악순환. ‘자산기반 생활보장체계의 금융화’(김도균)와 부채로 추동되는 성장 체제(debt-driven growh regime)의 길을 열어 놓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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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독일의 평화복지국가 비교
한국 김대중의 시간
독일 브란트의 시간
평화
평화와 통일 연동
평화와 통일의 분리
복지
생산적 복지
비스마르크 복지의 스웨덴화
민주
자유-보수 연정, 미성숙 민주주의
사회-자유 연정, 성숙한 민주주의
경제
과잉 시장화 + 타락한 개발주의
사회적 시장경제, 공동결정 확대
5. 결론 - 한국은 평화복지국가를 건너뛰는가
5-1. 박근혜의 시간. 무반성적 건너뛰기와 ‘ 과거의 포로’ 로 붙들린 한국의 미 래 - 안보시장국가라는 괴물 ○ 시대교체의 기회, 평화복지국가 새 길의 희망 - 2012년은 이른바 ‘시대 교체’의 과제 실현을 지향하면서 보수와 진보가 경쟁하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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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 위기를 기회로 반전시킬 가능성을 보였던 국면 - 국내외 위기 상황과 ‘변화하라’는 시대명령 앞에 보수, 진보 각각 자신의 과거 과 오와 책임에 대해 나름대로 전향적인 반성적 학습의 자세를 보였음. 여전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평화, 복지국가 그리고 경제민주화의 세 가치를 지향하는 공통의 ‘대합의’ 로 수렴하는 듯한 모양새와 희망까지 보였음. 박근혜의 변신은 미흡하지만 탈냉전 ‘개혁적 보수’의 시대정신을 선보였다 하겠음. 관련하여 박근혜는 메르켈을 끌어 들 이기도 했음. - 박근혜의 승리로 한국의 ‘2013년 체제’의 시간은 보수 개혁의 시간으로 넘어감. 61년 체제, 87년 체제, 97년 체제의 성과를 이어받고 그 한계를 넘어 평화복지국가 로 가는 희망은 아주 짧은 시간이었으나 박근혜 집권 초기에도 유지되는 듯이 보였 음(“박근혜를 지켜라”라는 말까지 나왔을 정도).
○ ‘과거는 힘이 세다’, 두 과거의 악조합으로서 안보시장국가 - 박근혜의 전향적 변화는 진정성 없는 일시적 선거용으로 판명. 다시 비정상국가 시간으로 미끄러짐. 박근혜 대통령의 정신을 지배하는 뿌리 깊은 두 가지 생각을 발 견할 수 있음. ⅰ) “유신 없이는 아마도 공산당의 밥이 되었을지 모른다. … 시대상 황과 혼란 속에서 나라를 빼앗기고 공산당 앞에 수백만이 죽어갔다면, 그 흐리멍텅한 소위 민주주의가 더 잔학한 것이었다 말할지 누가 알 수 있으랴?”(박근혜, 1998) ⅱ) “줄푸세(세금과 정부규모를 줄이고, 규제를 풀고, 법질서를 세운다)는 경제민주화와 다르지 않다.”(대선후보 2차 TV토론 발언) - 안보/종북몰이와 흡수통일 생각에 기반하고 냉전적 미국 추종을 답습하고 있는 ‘통일대박’론 및 신자유주의적 줄푸세로 회귀. 박근혜식 ‘배신의 정치’와 무반성적 건 너뛰기. 박근혜의 시간은 빠르게 자신의 두 과거의 종합. 즉 유신독재에서 유래하는 안보국가주의 + 신자유주의적 줄푸세주의의 악조합 = 안보시장국가. 달리 말해 비정 상적인 한국판 ‘불량국가’(백낙청, 2014; 이병천, 2015)로 퇴행. 이렇게 안보보수(수 구)와 시장보수의 악조합은 ‘박정희 체제의 신자유주의 재림’이라 부를만한 것. - 세월호 참사는 안보시장국가와 무책임, 무능 리더십의 부메랑 효과 - 부동산 규제완화와 경제활성화 전략, 이어 4대 구조개혁 카드를 꺼내면서 쉬운 해 고를 핵심으로 하는 노동개혁의 강행. [저성장 기조 + 불평등 불안 심화 + 복지 통 제 + 부동산 중심 투기적 시장포퓰리즘] - 박근혜의 시간에서 평화복지국가 시대명제 죽이기와 안보시장국가로 퇴행 전략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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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적인가? 현재진행형. 박근혜 체제의 불안정성과 취약성에 주목할 필요. ⅰ) 박근 혜식 안보시장국가에는 박정희 시기 안보개발국가체체에서처럼 개발이 안보에 물질 적 토대를 제공해 주었던 내용이 비어 있음. 강압 일방주의 정치경제체제. 박근혜는 박정희를 계승(역사교과서 국정화 포함)하면서도 그보다 뒤졌다는 결론. ⅱ) 국민들 은 과연 박근혜의 대책 없는 대북강경책을 지지하나? 오히려 대북관계 개선을 바라 는 것이 아닌가? ⅲ) 야권의 혁신 실패/지리멸렬의 반사 효과. ⅳ) 국민 의식의 문제
5-2. 평화복지국가로 가려면 ○ 평화복지국가와 민주주의 - 독일 경험과 한국 경험의 비교로부터 나오는 교훈. 정권이 바뀌어도 지속될 수 있 는 평화복지국가에 대한 ‘대합의’ 요청. 요컨대 한국 민주주의의 ‘성숙화’(단지 ‘공고 화’가 아니라)가 절대적으로 필요 ⅰ) 한국에서 지속가능한 평화복지국가가 수립되는 한 가지 경로로서 보수 세력 재 생의 길. 한국의 비정상 보수가 수구적 잔재를 청산하고, 독일 수준까지는 아니라 해 도 그와 ‘가족유사성’을 갖는 평화복지지향의 정상적 보수로 거듭나기를 생각해 볼 수 있음. 이 경로는 여전히 열려 있다고 봐야. 지금 박근혜 정부에 절실한 것은 대책 없는, 비정상적 ‘통일대박’론이 아니라 평화공존/교류협력을 정상화하는 길. 남북 교 류협력은 북한뿐만 아니라 남한 저성장 함정을 타개하는데도 큰 도움을 줄 것이 분 명 ⅱ) 김대중의 평화복지국가 시간이 막혀 중도좌초한 큰 요인으로서 국내의 협소한 합의 기반 문제 - 민주화시대 노태우 정부가 쌓은 역사적 성과와 접속해 보수, 자유가 공유하는 역 사적 합의 기반을 확보하고 확장할 필요(임혁백) - 한국판 자유/사회 연합정치는 어떻게 가능할까? 오래된 숙제. 선거제도개혁(독일식 정당 명부 비례대표제)을 비롯해 정치적 대표체계의 개혁과 한국형 합의제 민주주의 를 실현해야. 민주적 조정시장경제와 보완성(최태욱). 연합정치 길을 둘러싼 견해 차 이 노정(고원, 이남주). 어떤 길이든 개혁자유주의 정당과 진보정당 모두 진정 거듭 나는 혁신 절대적으로 필요
○ 통일 이전에 평화공존/교류협력의 제도화, 평화국가화와 체제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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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화와 통일 과정에 대한 남남갈등의 공존과 조정은 어떻게 가능할까? (‘진보 대 보수’는 물론 범진보 내부에서) 통일론은 양날의 칼, 어떤 가치의 통일이냐가 문제. 평화통일에 대한 준비는 해나가되, 맹목적인 ‘통일대박’ 논의는 남, 북 모두에 위험. 오늘날 남한이 취해야 할 최우선적인 대북/한반도정책은 통일이어서는 안 되며 오히 려 ‘탈-통일론’이 필요하다고 말해야할 상황으로 여겨짐(박순성, 2014). 남한은 통일 대박이 아니라 평화/교류협력과 내부 개혁을 통해 발전적으로 진화할 수 있으며, 북 한도 실상은 통일을 두려워하고 있다고 봐야 - 평화정착/교류협력의 안정적 제도화. 종래의 기능주의 접근의 한계 문제. 정치군사 적 갈등을 의제화하고 군비경쟁을 일삼는 안보국가에서 평화국가 길로 전환하는 새 로운 지평을 열어야. 북한의 개혁개방/체제전환이 진전되는 미래를 기대하고, 이후 한반도 발전방향은 다양한 경로로 열어 놓을 필요(구갑우, 2007). 한반도 문제 풀이 를 위해 남북이 주도력을 발휘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민족주의적 자세는 더 높여야 하나, 평화와 통일을 일체화하는 식의 과잉 민족주의는 탈피해야. 이는 독일이 추구 했던 ‘화해를 통한 변화’(에곤 바르)에서 배워야 할 최대의 교훈일 것 - 결코 간과해서 안 되는 독일식 통일방식의 양면성, 그 빛과 그림자: ‘평화적 사회 적 통일’(황규성)의 빛과 함께 시장근본주의식 경제체제 전환과 그에 따른 동독 산업 파괴의 그림자(송태수, 김병연). 이는 북한의 전환과정/전략에서도 반드시 반성적으로 학습, 경계해야 할 대목이며, 북한에 대해 빅뱅식 파괴적 개혁론의 득세를 막아야 할 것임
○ 어떤 복지국가인가? - 스웨덴은 한국의 미래가 될 수 있나? - 이른바 ‘중부담 중복지’ 모델(임현진)은 부담과 지출측면을 같이 봐야 할 것. 또한 평화복지국가 ‘황금기’ 이후 노정된 독일식 복지국가의 딜레마를 돌아봐야 할 것임. ‘이중화’의 문제 - 복지국가를 위한 증세의 정치는 어떻게 가능할까?
○ 평화지향 포용적 성장체제 - 평화복지국가의 경제적 물질적 토대 - 민주정부가 추구했던 바, 즉 개혁적 자유주의 길을 극복하는 평화지향 포용적 성 장체제는 어떤 내용을 가져야 하는가? 새로운 발전경로를 창조해야 하는 과제. 민주 정부 10년에 대한 철저한 반성적 학습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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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제/복지/노동의 한국식 혼합 방식은 어떠해야 하나? - 독일식 조정 시장경제모델에 주목해야 할 부분들(기업의 공공성, 중소기업, 투기적 재테크 억제 → 소득주도 성장체제)
○ 시민참여형 평화복지국가의 길과 시민운동의 과제 - 아래로부터 안보권력의 감시와 민주적 통제, 평화복지국가 추동과 ‘이중민주주의’ - 평화복지국가의 시대명제 저변 확대를 위한 운동의 활성화, 시민(사회) 역량 증진 (civic empower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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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제 2
한국 복지국가에서 한반도 평화체제 바라보기 반공개발국가에서 평화복지국가로
윤홍식 / 인하대학교 교수, 참여사회연구소 소장
1. 문제제기: 왜 평화복지국가인가? 한국은 지난 반세기 넘게 놀라운 경제발전을 이루었다. 하지만 한국 복지국가의 확장 은 매우 지체되어 있다. 2014년 현재 한국의 GDP 대비 사회지출은 10.4%로 실질구 매력 기준으로 유사한 소득수준에 있는 스페인, 이태리, 뉴질랜드의 절반도 되지 않 는다(OECD, 2015, 2014).1) 한국보다 소득수준이 낮은 남유럽 국가들 중 그리스와 포르투갈, 최근에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로 체제이행을 경험한 동유럽국가인 슬로베 니아, 헝가리, 에스토니아는 물론이고, 터키보다도 낮은 수준이다. 왜 이런 일들이 벌 어진 것일까? 경제성장이 더 필요한 것일까? 다양한 설명이 가능하다. 하지만 우리 는 한국사회가 국가복지를 확장할 수 있는 경제적 토대를 구축했음에도 불구하고, 국 가복지의 확장으로 나아가지 못한 근본적 원인이 한반도 분단과 관련 있다고 생각한 다. 그리고 그 중심에 안보를 이유로 민주주의를 억압했던 반공주의와 선성장 후분배 로 포장된 개발주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반공주의는 민주주의를 유보시킴으로써 복지 국가를 만들어갈 주체세력을 괴멸시켰다. 민주주의가 유보된 상태에서 개발주의는 선 성장 후분배라는 이데올로기로 복지국가에 대한 대중적 요구를 무마했다. 물론 1961년 5월 16일 군사쿠데타를 통해 수립된 권위주의적 반공개발국가는 더 이 1) 각국의 소득은 실질 구매력 기준(PPP) 중위가구 소득을 표시한 것이다. 한국(USD 34,356, 10.4%), 스페인(USD 33,720, 26.8%), 이태리(USD 35,067, 28.6%), 뉴질랜드(USD 36,402, 20.8%), 그리스(USD 26,016, 24.0%), 포르투
갈(USD 28,317, 25.2%), 슬로베니아(USD 29,969, 23.7%), 헝가리(USD 24,466, 22.1%), 에스토니아(USD 26,902, 16.3%), 터키(USD 19,054, 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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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 우리 눈앞에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민주화이후에도 반공개발국가는 해체되지 않 았다. 권위주의적 반공개발국가의 유산은 악마의 맷돌처럼 한국사회를 짓누르는 무거 운 짐으로 남아있다. 권위주의적 반공개발국가가 만들어 놓은 권위주의적 정권과 정 권에 종속된 재벌의 지배연합은 재벌과 재벌에 종속된 정권이라는 변형된 형태로 시 민과 노동의 기본권을 지속적으로 제약하고 있다. 한반도 역시 종전이 아닌 정전상태 에 놓여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 이래 지금까지 한반도에서는 북한의 핵무기개 발, 미사일 발사, 목함지뢰 사건과 남한의 대응포격 등 크고 작은 국지전이 지속되고 있다. 1960년 장면정부로부터 시작된 “경제제일주의”는 지금도 한국사회의 지배 담 론으로서 지위를 잃지 않고 있다. 역설적이다. 내적으로는 민주화 운동과 외적으로는 국제적 냉전체제의 붕괴와 신자유주의 세계경제의 대두로 권위주의 정권은 몰락하고, 반공주의는 정당성을 상실되고, 권위주의 정권이 기획하고 주도했던 개발국가가 해체 되었다. 하지만 한국사회에서 권위주의적 반공개발국가의 유산은 여전히 민주주의와 복지국가를 유보시키는 강력한 이념으로 작동하고 있다. 절차적 민주주의를 쟁취한지 한 세대 가까이 흘렀지만 한국사회에서는 미군정과 한 국전쟁을 거치지면서 독재정권에 의해 강요되고, 세뇌된 반공주의와 개발주의가 ‘자 발적’ 반북주의와 개발주의가 되어 지속되고 있다. 실제로 역사교과서 국정화와 노동 개혁을 둘러싼 논란에서 보듯 변형된 반공주의인 반북주의가 정치적 반대세력을 무 력화시키는 강력한 무기로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권위주의적’ 개발국가를 대신한 ‘신자유주의적’ 개발국가는 변함없이 경제성장을 명분으로 시민들의 삶을 재벌기업의 이해에 종속시키고 있다. 비록 권위주의는 탈각되었지만 반공주의는 반북주의로, 개 발국가는 신자유주의로 옷을 갈아입고 민주주의의 심화와 복지국가의 확장을 저지하 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는 ‘신자유주의적’ 반북개발국가를 대신 할 대안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에 근거해 본 연구는 한국사회에서 반북개발국가를 대신할 대안체제 로서 평화복지국가가 갖는 의미를 검토했다.2) 대안체제로서 평화복지국가를 만들어 가는 과정은 한국사회에서 복지국가를 만들어가는 과정과 한반도에서 평화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 공진하는 과정이다. 본 연구는 한반도 평화정착이 민주주의로 대표되는 한국사회의 발전의 선결조건이라는 ‘분단체제’ 관점에 동의하지 않으며, 한국에서 복 지국가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한반도 분단과 무관하다는 ‘일국 복지국가’관점에도 동 의하지 않는다. 대신 본 연구는 한반도에서 평화를 정착시켜나가는 과정이 한국사회 2) 제목에서도 밝혔듯이 본 연구는 복지국가의 관점에서 한반도 평화의 문제를 바라보는 것이기 때문에 연구의
중심은 복지국가이지 한반도 평화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평화의 관점에서 복지국가를 조망하는 것은 본 심포지엄의 구갑우 교수의 글에서 다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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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복지국가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며, 한국사회에서 복지국가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한반도에서 평화를 정착시키는 과정이라고 주장한다. 한국 복지국가와 한반도 평화체 제의 이러한 결합은 해방이후 지금까지 한국사회를 지배했던 권위주의적 ‘반공개발국 가’에 대한 대안으로 ‘권위주의’를 대신해 ‘민주주의’를, ‘반공’을 대신해 ‘평화’를, ‘개 발국가’를 대신해 ‘복지국가’를 위치시키려는 시도이다. 먼저 제2절에서는 반공개발국 가의 기원, 궤적 그리고 특성에 대해 검토하고, 제3절에서는 평화복지국가의 성격과 주체를 중심으로 검토했다. 마지막 정리와 함의에서는 본 연구의 의미를 간단하게 정 리하고 본 연구가 한국사회에 주는 함의를 개략했다.
2. 반공개발국가의 기원, 궤적 그리고 특성 왜 복지국가 논의에서 ‘반공개발국가’를 주목해야할까? 이유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한국사회에서 ‘반공주의’는 복지국가를 만들어 갈 핵심 주체인 좌파 권력자원의 형성 과 확장을 억압했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한국의 ‘개발국가’는 경제성장을 통해 절 대빈곤과 불평등을 완화하는 것은 물론 교육기회를 보편적으로 확대함으로써 한국사 회에서 국가복지의 발전과 확대를 제약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식에 기반 해 제2절 에서는 반공개발국가의 기원, 궤적, 그리고 특성을 검토했다.
1) 반공주의의 기원 일부 연구는 한국의 반공주의의 기원을 1945년 해방과 함께 시작된 분단에서 찾는 다. 신광영(2015: 292)은 한국(남한)에서 반공주의의 등장을 해방이후 “남한 국내 정 치와 미군정의 역할, 미국 내에서 반공주의의 등장, 1945년 이후 미국과 소련의 갈 등 심화” 등과 같은 복합적인 요인들의 상호작용을 통해 형성되었다고 주장한다. 하 지만 한국에서 반공주의의 기원은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제는 가혹한 수 탈과 탄압에 저항하는 조선 민중과 독립운동을 억압하기 위한 수단으로 반공을 적극 적으로 활용했다(윤홍식, 2013). 대다수가 농민이었던 일제강점기 동안 일제가 행한 수탈은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커밍스(Cumings, 1974)에 따르면 1945년 당시 전 체 취업자 중 농업에 종사하는 비율은 75%에 달했다. 이중 94%가 소작농이었는데, 이들이 내는 소작료는 생산량의 80~90%에 달했다. 당시 일본 내지에서 소작인이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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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소작료가 생산물의 35% 정도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상상할 수 없는 수준의 수탈 이 이루어졌다. 물론 전체 농지 중 일본인이 차지하는 비중은 1935년 기준으로 10.2%, 논의 경우 18.3%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수탈이 전적으로 일본인에 의해 이루 어졌다고 할 수는 없다(허수열, 2007: 45). 그러나 일제가 조선을 강제 병탄하는 과 정에서 친일 조선인 지주들을 양산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더불어 1876년 개항이후 조선이 자본주의 세계체계에 주변부로 편입되면서 조선에서는 일본에게 미 곡과 콩으로 대표되는 원료를 제공하고, 일본으로부터 면화로 대표되는 자본재 상품 을 수입하는 소위 “곡면교환체제”가 구축되었다(차남희·윤형수, 2004:29). 일제강점기 지주들의 가혹한 수탈은 지주의 국적여부와 관계없이 당시 일본제국주의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조선과 일본의 분업체계인 “곡면교환체제”의 산물이었다. 일제는 억압적 수탈에 대한 조선민중의 저항과 독립에 대한 열망을 ‘반공’이라는 수 단을 통해 억압했다(박재권, 1989; 서중석, 1999:336; Cumings, 1983:139). 유럽에 서 파시즘의 출현이 반(反)사회주의를 전제하지 않고는 설명할 수 없듯이(Smith, 2007[1973]) 일본의 군국주의화 또한 반사회주의를 배제하고는 설명할 수 없다. 일 제는 반공단체를 조직하고, 조선독립운동세력을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탄압했다. 일 제강점기 기간 동안 조선에서 반공은 일본 제국주의를 의미했고, 사회주의(공산주의) 는 독립을 의미했다. 이러한 이유로 브루스 커밍스도 한국에서 반공주의의 기원이 1920년대에 시작되었다고 보았다(Cumings, 2001[1997]: 219). 한국(남한)사회에서 반공주의의 역사적 기원은 일제강점기이며, 반공주의의 주체는 조선민중과 독립운동 을 탄압했던 일제와 친일세력이었다.
2) 해방공간의 반공주의 한국인들에게 해방공간은 1910년 일제의 강제병탄에 의해 중단되었던 근대민족국가 를 스스로의 힘으로 만들어나갈 기회의 창이 다시 열린 시기였다. 당시 독립된 민족 국가, 민주주의, 근대화를 상징하는 경제발전은 좌우를 떠나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민족의 염원이었다. 하지만 이 시기는 근대민족국가의 수립을 둘러싼 좌우간의 극단 적 대립이 폭발한 시기이자 미국과 손잡은 친일우익세력에 의해 남한사회에서 독립 운동세력과 좌파세력이 정치적 근거를 상실해가던 시기이기도 했다. 미국과 친일세력 은 한반도 남단에서 자본주의 체제에 기반 한 남한 단독정부를 수립하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당시 해방된 조선의 인민들이 원하던 국체는 자본주의도 공산주의도 아닌 대 의민주주의에 기반 한 사회주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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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미국에게 조선민중이 어떤 체제를 지지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미 냉전 체제가 형성되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은 한반도에서 미국의 이해를 보장받기 위 해 직접통치를 했고, (소련의 잠재적 동맹세력이 될지도 모른다고 판단한) 남한 내 좌파에 대해 대대적인 탄압을 가했다(박재권, 1989). 군정청 감옥(監獄)에는 일제강 점기 보다 더 많은 정치범이 수감되었다. 미국, 이승만, 친일세력은 반공을 명분으로 남한 내 좌파세력을 무력화시키고 “48년 체제”를 출범시킨 것이다. 더욱이 48년 체 제는 우리 스스로에 의해 만들어진 체제가 아닌 미소에 의한 한반도의 분할 점령과 냉전체제의 “압도적 규정력” 하에서 만들어진 체제였다(박찬표, 2008:23).3) 미군정은 해방이후 조선사회에서 정치적으로 압도적 우위에 있던 좌파세력을 무력화시키고, 친 일친미 우파의 힘의 우위를 결정적으로 구조화시켜놓았다(윤홍식, 2013). 이렇게 미 군정이 구조화한 우파 우위의 정치지형에서 수립된 이승만의 남한 단독정부는 북진 통일을 주장하며 반공체제를 더욱 강화해나갔다. 조봉암의 사형이 상징하듯 1920년 대에 형성되어 독립운동의 중요한 주체 중 하나였던 좌파세력은 괴멸되었다. 이승만 정권의 핵심 이념인 일민주의도 단정수립이후 여순사건과 빨치산 활동 등과 같은 좌 파의 무장투쟁을 거치면서 반공주의와 일체화되었다. 특히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반공 은 독재정권에게 체제유지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가장 중요한 정치적 명분이 되었다. 심지어 야당조차도 반공을 이야기하지 않고는 정치적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없게 되 었다.4)
3) 한국 사민주의 정치세력화의 좌절5) 1920년대부터 시작된 한국 사회주의의 역사는 유럽과 달리 정치적 세력으로서 (러시 3) “48년 체제”의 역사적 기원에 대한 다른 견해도 있다. 고원(54)이 정리한 내용에 따르면 보수의 관점에서 ‘48
년 체제’의 기원은 개항 이후 개화파로부터 시작해 우익 민족주의자들의 의한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수 용”의 결과로 이해되고 있고, 제헌헌법의 이념에 기초해 ‘48년 체제’의 기원을 사민주의라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이병천도 대한민국의 건국이념을 “민주공화국과 경제적·사회적 민주주의”에 기초한 제헌헌법에서 찾으 며, 친일세력과 극우세력을 대표했던 이승만도 이러한 제헌헌법의 이념을 공유했다고 적고 있다(이병천, 2014: 63). 4) 서중석(2008:137)에 따르면 제5대 대통령선거(1963년)에서 야당 후보인 윤보선은 박정희가 여순반란사건에 관련
된 공산주의자(사상이 의심스러운 자)라는 이념 공세를 펼쳤다. 또한 장면정권이 반공법 제정을 추진했다는 사 실을 기억하라. 5) 여기서 사민주의는 복지국가를 만들어가는 주체세력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서구에서 복지국가의 발전이
사민주의 이념에 기반 한 사민당이 노동계급정당에서 국민정당으로 전환되는 과정과 함께 했다는 점을 고려해 본 글에서는 사민주의 정치세력을 노동계급과 중간계급으로 대표되는 시민사회의 정치세력이라고 포괄적으로 접근했다. 그러므로 반공주의에 의한 사민주의 세력의 약화는 곧 취약한 노동계급과 시민사회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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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혁명이후 계급독재를 주장하는) 혁명적 사회주의(공산주의)와 구분되는 (민주주의 를 전제한 사회주의 세력인) 사회민주주의로 성장하지 못했다. 더욱이 이러한 현상은 해방정국이 사민주의 정치세력에게 매우 우호적인 정치적 조건을 제공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더더욱 납득이 가지 않는다. 1946년 당시 조선인의 정치성향을 조사한 미군정 여론국의 조사결과를 보면 조사 대상이 되었던 조선인 중 70%가 사회주의를 지지했고, 자본주의를 지지한 비율은 14%에 불과했다(동아일보, 1946년 8월 13일). “貴下께서贊成하시는一般的政治形態는어느것임니까”라는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응답자의 85%가 대중정치(大衆政治), 즉 대의제 민주주의를 지지한 반면 (혁명적 사 회주의 즉 공산주의의) 계급독재를 지지한 비율은 3%에 불과했다. 사회민주주의라는 개념이 1917년 러시아 혁명이후 유럽 사회주의자들이 민주주의를 부정하고 노동계급 의 독재(계급독재)를 주장하는 혁명적 사회주의자들과 자신들(민주주의에 기반 한 사 회주의)을 구분하는 개념으로 사용되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Berman, 2010[2006]: 20). 당시 조선인민은 분명히 계급독재가 아닌 민주주의에 기반 한 사 회주의, 즉 사회민주주의를 요구했다. 심지어 미군정조차 극우세력인 이승만세력과 남로당으로 대표되는 극좌세력을 배제하고, 여운형과 김규식 등 중도 좌우파의 연대 를 추진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한국사회에서 왜 사민주의로 대표되는 중도좌파세력 이 해방시기와 이승만 정권 하에서 공산주의와 구별되는 대안 정치세력으로서 지위 를 잃게 되었는지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다양한 추론이 가능하다. 여기서 필자가 주목하는 북서유럽과 한국에서 사회주의가 사회민주주의로 진화하는 역사적 과정이다. 먼저 독일 사민당으로 대표되는 북서유럽 의 사민주의는 1917년 러시아혁명으로 대표되는 극좌세력과 1920년대부터 유럽에서 세력을 얻기 시작한 파시즘에 대항에 민주주의와 의회주의를 지키는 과정에서 형성 되었다. 사민주의는 계급독재를 주장하는 사회주의에 반대해 민주주의와 의회주의를 옹호하면서 만들어졌다. 제2인터내셔널시기까지만 해도 자본주의에 대항해 한 배를 타고 있던 사민주의와 사회주의는 1917년 러시아 혁명을 계기로 적대적 관계로 전환 된다. 레닌이 코민테른(제3인터내셔널)을 결성한 목적도 기본적으로 부르주아 세력과 싸우기 위한 국제연대를 구축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브란팅, 베른슈타인 등과 같은 사회민주주의자들과 투쟁하기 위한 것이었다(Brandal, Bratberg, and Thorsen, 2014[2013]: 5-6, 74-5). 코민테른은 혁명적 사회주의자들과 개량적 사회주의자들을 구분하기 위해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에게 당명을 사회(민주주의)당에서 공산당으로 변 경할 것을 요구했다. 사회주의의 최대 적(敵) 중 하나는 사민주의였고, 사민주의의 최대 적(敵) 또한 사회주의였던 것이다. 독일 공산주의자들은 바이미르공화국의 사민당 정부를 붕괴시키기 위해 폭력과 선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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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주저하지 않았다(Smith, 2007[1973]: 84). 독일에서 히틀러의 나치당(국가사회주 의 독일 노동자당, Nationalsozialistische Deutsche Arbeiterpartei)이 집권할 수 있었 던 이유 중 하나도 공산주의와 사민주의 적대적 대립에 있었다. 히틀러의 국가사회주 의당이 집권하기 직전인 1932년 11월 선거만 해도 국가사회주의당의 득표율은 33.1%에 불과했다. 반면 사민당과 공산당의 득표율은 각각 20.4%, 16.9%였다 (Wikipeida, 2015).6) 만약 사민당과 공산당이 연대했다면 파시스트의 집권은 불가능 했을지도 모른다. 결과적으로 좌파가 연대에 실패함으로써 1933년 3월 5일 선거에서 독일은 파시스트(국가사회주의당)에게 권력을 내주고 말았다. 이처럼 사회주의와 사 민주의 간의 적대적 관계는 북서유럽에서 사민주의가 사회주의(공산주의)와 구별되는 민주적 세력으로서 정치적 지위를 획득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사민당은 이렇게 국민정당으로서 북서유럽에서 중요한 정치적 세력으로 등장하 게 된다. 실제로 19세기 말부터 1940년대까지 사민당과 노동당으로 대표되는 사민주 의 정당에 대한 유권자들의 정치적 지지는 놀라울 정도로 확대되었다(Sassoon, 2014; 주성수, 1992). 다시 말해 북서유럽에서 사민주의와 사민당은 폭력혁명, 계급 독재, 사유재산제 폐지를 주장하는 사회주의(공산주의)와 공산당에 대항하는 과정에 서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반면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좌파세력은 북서유럽에서와는 달리 사회민주주의와 공산 주의로 분화될 수 있는 정치적 기회를 갖지 못했다. 다른 제3세계의 민족해방운동과 같이 식민지 조선의 주적은 일본 제국주의였다. 일제라는 커다란 적을 눈앞에 두고 있는 식민지 조선의 상황에서 사회주의가 사민주의와 공산주의로 분화될 수 있는 현 실적 정치공간은 거의 없었다. 민족해방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사민주의와 공산주의가 지향하는 계급해방 또한 성취될 수 없기 때문이다(임대식, 1994:157). 혁명적 사회주 의(공산주의)를 대표하는 코민테른의 지침 역시 제3세계 (반)식민지 지역에서 사회주 의 세력은 사민주의는 물론 민족적 자본가계급을 포함한 반제국주의 통일전선을 구 축하는 것이었다. 특히 “27년 테제”로 알려진 일본 좌파정치세력의 연대를 결의한 코민테른의 결정은 일제의 식민지였던 조선의 사회주의 운동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 쳤다(정혜선, 1995). 당시 중국 공산당은 1923년 당 대회에서 이미 코민테른의 권고 를 받아들여 광범위한 반제통일전선을 구축하고 있었다(김금수, 2013:15-7). 해방이후 미군정과 친일세력이 일본제국주의를 대신해 남한의 지배세력이 되었다. 격 화되기 시작한 냉전은 친일세력이 반공을 명분으로 다시 한 번 사회주의 독립운동세 력을 탄압할 수 있는 정치적 조건을 만들어주었다. 이러한 조건에서 남한 내 사민주 의 세력이 극좌파인 공산주의와 극우파인 이승만과 친일세력을 대신하는 제3의 대안 6) 1932년 11월에 실시된 독일 연방정부 선거결과는 위키페디아(Wikipedia)를 참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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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구축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앞서 언급했듯이 한때 미군 정의 지원을 받았던 중도세력(중도좌파와 우파)조차 정치적 공간이 좌우 양극단으로 나누어진 해방공간에서 대안세력이 되지 못했다. 북서유럽과 달리 사민주의가 반공의 주체가 아닌 대상이 된 한국의 특수한 상황이 사민주의가 반공의 희생양이 되는 역 사적 상황을 만든 중요한 원인 중 하나였던 것이다. 둘째, 사회주의가 독일과 한국에 수용된 ‘시점(timing)’의 상이함은 독일에서와 달리 한국에서 사회주의가 복지국가를 만들어가는 국민정당인 사민주의로 전화되지 못한 중요한 이유이다. 독일은 냉전이 본격화되고, 분단이 고착화되기 이전에 이미 사회주 의가 사민주의와 공산주의로 분화되어 이었다. 사민당은 혁명적 사회주의(공산당)와 는 달리 복지국가 건설의 핵심 정치세력이 되어 있었다. 독일 사민당은 1945년 이후 냉전이 본격화되기 이전에 이미 30% 내외의 득표를 얻었다(Sassoon, 2014; 주성수, 1992). 북서유럽의 다른 사회민주주의 계열의 정당들도 냉전 이전에 대중들로부터 상당한 지지를 확보한 상태였다. 반면 한국에서 사회주의 이념의 도입은 1920년대 초반에 이루어졌다. 1920년대 초라 는 시점이 중요하다. 1920년대 초의 상황은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성공으로 사회주 의가 단지 공상적 유토피아가 아니라 실현 가능한 대안적 정치체제라는 것을 보여주 었기 때문이다. 조선민중들은 러시아 혁명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을 것이 다(임대식, 1994:159). 하지만 조선민중은 사회주의 러시아가 착취와 억압이 없는 노 동자와 농민이 주인이 되는 새로운 사회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을 것이다. 특히 러시아 사회주의 정권은 서구의 제국주의와 달리 제3세계 민족해방운동을 지지하고 지원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20년대 초 조선은 사회주의가 사민주의와 사회주의로 분화하는 역사적 과정 없이 혁명적 사회주의(볼셰비즘)를 유일한 사회주의 이념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1920년대 이후 조선에서 사회주의 운동은 북서유럽의 민주주의 와 의회주의에 근거한 개혁적 사회주의 운동이 아닌 자본주의를 전복시키고 사회주 의를 혁명적으로 건설하려는 혁명적 사회주의 노선을 걸었다. 실제로 조선의 사회주 의 운동은 개혁적 사회주의에 비판적이고, 적대적이었던 제3인터내셔널(코민테른)의 승인과 지원을 받았다. 한국에서 사회주의 운동은 계급연대를 통해 복지국가를 건설 하는 운동이 아닌 최종 목표인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전위당의 역할에 집중되었다. 더욱이 이러한 혁명적 사회주의 정치세력은 분단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우파세력과 돌이킬 수 없는 적대행위(학살)를 자행했다(서중석, 2000).7) 한국사회는 사회주의가 혁명적 사회주의와 개혁적 사회주의(사민주의)로 분화되어, 사민주의가 대중적 정치 세력으로 성장하기 어려운 시점(timing)에 사회주의를 수용한 것이다. 7) 좌우 진영이 자행했던 학살에 대해서는 다음 글을 참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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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북서유럽에서는 사회주의정당이 사민당과 공산당으로 분화되기 이전에 행했던 극좌모험주의 실패로 사민주의가 현실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개혁을 모색하는 정치 세력으로 전환되었다. 북유럽 사회주의 정당들은 제1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부터 제2 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간헐적으로 집권했다. 사회주의 정당들은 집권기간 동안 생산수단의 사회화로 대표되는 사회주의화를 추진했지만 처참한 실패를 맛보아 야했다. 예를 들어, 노르웨이에서는 1927년 선거를 통해 크리스토페르 호른스루드 (Christopher Hornsrud) 노동당이 집권에 성공해 생산수단의 사회화를 포함한 사회 주의로의 이행을 시도했다. 하지만 자본과 우파정당은 물론 중도정당들까지도 노동당 정부를 실각시키기 위해 단결함으로써 집권은 18일 천하로 막을 내렸고 권력은 다시 우파에게 넘어갔다(Brandal et. al., 2014[2013]: 87). 영국에서도 유사한 일이 벌어 졌다(김금수, 2013ㄱ: 522). 한국에서는 소위 모험주의적 사회주의를 실천할 수 있는 가능성 자체가 봉쇄되었기 때문에, 실천의 경험도, 실패의 경험도 없었다. 좌파 내에 혁명적 사회주의와 개혁적 사회주의가 정치적으로 명확하게 분화되지 않은 혼재된 상태로 남아있었다. 한국의 초기 사회주의자들의 사회주의에 대한 인식수준은 일천했다. 아나키스트부터 공상적 사회주의까지 다양한 이념들이 혼재되어 있었다. 대부분 소비에트정부 수립을 목표로 내거는 등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 모델을 그대로 따르는 관념적 급진성을 보였다(임 대식, 1994:166). 이후 조선공산당이 창당, 해체, 재건되는 과정에서 이념적으로 성 숙해갔지만 관념적 급진성은 해소되지 않았다(임경석, 1994; 임대식, 1994). 식민지 조선의 사회주의는 코민테른이 극좌모험주의라고 비판했던 일본 공산당의 후쿠모토 (福本和夫)주의의 이념적 영향력 하에 있었다(김금수, 2013ㄱ:550-1; 임대식, 1994:182). 이러한 조건에서 미소의 분할점령, 분단과 한국전쟁은 한반도 남과 북에 서 극단적 좌우세력의 정치적 실험이 가능한 조건을 창출했다. 한국전쟁이후 한국(남 한)은 극우파의 실험장으로 북한(조선)은 극좌파의 실험장으로 변화했다. 남북 모두 에서 사민주의가 국민정당으로 극우파와 극좌파에 맞설 수 있는 정치적 조건은 만들 어지지 않았다. 넷째, 북서유럽에서 사민주의는 공산주의만이 아닌 파시즘과의 투쟁을 통해 노동계급 정당에서 민주주의와 의회주의를 지키는 국민정당으로 전환된다. 실제로 1920년대부 터 급격히 세를 얻어가던 파시즘은 민주주의와 의회주의를 부정하고, 사회주의에 대 한 적대행위를 노골화했다. 파시즘이 사민당의 실질적 위협세력으로 등장한 것이다 (Smith, 2007[1973]: 31-2). 데이비스 스미스는 “반공주의는 그 동기가 무엇이든 간 에 모든 계급사회에서 지원을 얻어내는데 있어서 가장 잠재적인 슬로건”이었고, 파시 즘은 바로 이러한 반공주의에 기반 해 집권할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Smi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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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973]: 92-3). 파시즘의 대중동원은 반사회주의와 반공산주의에 기반 해 이루 어졌기 때문에(김금수, 2013ㄴ:283), 사민주의의 생존은 파시즘에 대항해 의회주의와 민주주의 질서를 지키는 것에 달려있었다. 반면 한국에서는 독재에 대항해 민주주의와 의회주의를 지키기 위한 투쟁의 주체는 좌파가 아닌 자유주의적 우파세력이었다. 왜냐하면 분단과 한국전쟁으로 좌우가 극단 적으로 대립하는 상황에서 ‘반공’이라는 이념을 공유하지 않는 정치세력이 현실정치 세력으로 존재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집권을 희망하는 모든 세력은 반드 시 자신이 반공주의자(여기서 반공주의는 공산주의와 사민주의 모두를 포함한다)라는 사실을 증명해야만 했다. 1959년 7월 31일 사민주의를 주장했던 조봉암을 사형시킨 이승만 정권, 반공법을 제정한 장면정권, 1962년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의 박정희 후보를 공산주의자라고 비난한 민주당의 윤보선후보 등은 한국사회에서 반공주의가 갖는
정치적
의미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이다(강명세,
2015:160;
서중석,
2008:104, 137). 마지막으로 북서유럽과 한국이 자본주의 세계체계에서 갖는 상이한 지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북서유럽 사민주의의 본산이라고 할 수 있는 독일은 19세기 말과 20세 기 초 미국과
자본주의 세계체계의 패권을 놓고 경쟁하던 핵심부의 국가였다
(Arrighi, Ahmad and Shin, 2008[1999]; Arrighi, 2008[1994]). 반면 한국은 19세기 말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자본주의 세계체계의 주변부로 강제로 편입되었고, 1945년 해방이후에는 미국이라는 자본주의 세계체계의 패권국의 지배(또는 강력한 영향력)하 에 놓여있었다. 유럽에서 사민주의의 정치세력화는 상대적으로 국민국가 내에서 자본 가계급, 파시스트, 공산주의세력 등간의 권력관계였다. 반면 한국에서 사민주의의 정 치세력화는 국민국가(식민지) 내의 권력관계인 동시에 자본주의 세계체계 내의 권력 관계를 의미했다. 베링턴 무어(Moore, 1966)가 지적한 것과 같이 한국과 같은 소국에서 정치경제는 국민국가 내의 세력관계에 의해 결정되기 보다는 강대국에 의해 결정된다. 이러한 이 유로 해방이후 한국에서 사민주의의 정치세력화는 동북아시아에서 미국이 구축해 놓 은 냉전이라는 국제질서에 대한 도전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완범(2015:323) 은 “대한민국 탄생에서 미국이 ‘산파’였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미국의 역할을 과소평 가한 것이고,” 미국은 대한민국을 탄생시킨 “창조자”였다고 했다. (반)주변부 국가인 한국의 좌파세력은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질서를 거스를 수 있는 객관적 역량을 갖고 있지 못했다. 더욱이 한국전쟁을 경험한 대중들에게 반미로 비추어질 수 있는 사민주 의는 용인될 수 있는 정치이념이 아니었다. 적어도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 이전 까지 한국에서 친미는 반공(모든 좌파에 반대한다는 의미로서 반공)과 동일한 의미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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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완범, 2015:322). 1945년이 독일과 한국은 분단이라는 동일한 상황에 직면했지만 독일과 달리 한국에 서 복지국가의 주체세력인 사민주의의 정치세력화가 쉽지 않았던 이유는 당시의 미 국 패권하의 자본주의 세계체계와 주변부로서 분단, 한국전쟁 등과 같은 한국의 특수 한 조건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결국 이러한 특수한 조건들은 한국에서 사민주의가 자신을 공산주의와 구분하는 대중적 정체성을 형성해가는 것을 어렵게 만듦으로서 사민주의의 대중적 정치세력화를 좌절시켰다. 1948년 남한 단독정부 수립과 1950년 한국전쟁 이후 한국사회에서 “반공”은 공산주의만이 아닌 사민주의를 포함한 모든 좌파와 진보세력을 탄압하는 정치적 명분이 되었다. “반공”은 어떤 현실 정치세력도 거스를 수 없는 이념이 되었다.
4) 반공주의와 개발국가의 결합: 반공개발국가 한국 반공개발국가에 대한 다양한 정의가 가능하겠지만 우리는 한국의 ‘반공개발국 가’를 분단과 미국패권의 냉전체제 하에서 국가안보를 이유로 반공(反共)을 국시(國 是)화하고, 이를 명분으로 노동계급과 시민의 민주적 기본권을 통제·억압하는 (권위 주의적) 지배연합이 자신들의 지배체제의 취약한 민주적 정당성을 재벌중심의 경제 개발과 미국의 직간접적 묵인과 지원을 통해 확보하려고 했던 국가로 정의하고자 한 다. 특히 여기서 주목해야할 점은 한국의 반공개발국가는 미국 패권의 냉전체제 하에 서 형성되었다는 사실이다(Berger, 2004; Dobbins, McGinn, Jones, Lal, Rathmell, Swanger, and Timilsina, 2003:xiv). 반공개발국가 대신 이병천(2003ㄱ)의 ‘개발독재’ 라는 개념을 사용할 수 있다. 하지만 ‘개발독재’라는 개념은 절차적·형식적 민주주의 가 이루어진 1987년 이후 한국사회에서 반공주의와 개발국가가 지속되고 있는 상황 을 설명하기 어렵다는 제약성이 있다. 또한 개발독재라는 개발주의와 권위주의에 대 한 노동계급과 시민들의 암묵적 또는 명시적 동의를 전제하고 있다는 점에서 논란의 여지가 크다.8) 이러한 이유로 본 글에서는 개발독재 대신 반공개발국가라는 개념을 사용했다. 역사적으로 반공주의와 개발주의가 결합된 반공개발국가는 한국사회만의 고유한 특 성은 아니다. 베링턴 무어(Moore, 1966)가 전근대사회에서 근대사회로 이행하는 세 가지 길 중 두 번째 길이라고 일컬은 독일과 일본의 길은 반공개발국가의 전형이다. 독일 비스마르크 정권은 사회주의자들이 독일사회의 발전을 저해하고, 혼란을 야기한 8) 이병천의 개발독재 개념에 대한 비판은 다음 문헌을 참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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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는 이유로 1878년 사회주의자법(공안을 해치는 사회민주주의 동원에 관한 법률)을 제정했다. 사회주의자법은 선거운동을 제외한 모든 사회민주주의의 집회와 활동을 불 법화하는 반(反)사회주의(반공주의)를 전면화했다. 또한 비스마르크 정권은 선발산업 국인 영국에 비해 뒤쳐진 독일 산업(중화학공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국가가 경제개발 을 적극적으로 주도했다(Ritter, 2005[1983]). 잘 알려져 있는 것과 같이 비스마르크 가 사회보험을 제도화하려고 했던 가장 중요한 이유도 사회주의자들을 노동계급으로 부터 분리시키기 위한 것이었다(Silver and Slater, 2008[1999]: 297). 비스마르크는 노동계급을 독일 산업에 충성할 수 있는 산업전사로 만들어 영국에 비해 후진적인 독일 중화학공업의 국제경쟁력을 높이려고 했다. 또한 사회보험을 제도화함으로써 중 화학 공업에 보다 안정적으로 노동력을 제공할 수 있는 조건을 창출하려고 했다 (Ritter, 2005[1983]; Stolleis, 2013). 비스마르크 정권은 사회보험을 도입해 중화학 공업에서 노동 강도를 높이고, 노동력을 효율화시켜 노동비용을 절감함해 1870년대 초반부터 계속된 장기불황의 돌파구를 마련하려고 했던 것이다. 산재보험을 제도화하 려고 했던 것도 독일 철강 산업이 자본주의의 경기변동에 유연하게 대응하게 하고,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노동자 관리를 수행하기 위한 것이었다. 일본도 국가주도적인 개발국가와 반공주의가 결합된 사례이다. 제1차 대전을 계기로 국가가 주도한 중화학공업의 발전은 중공업분야에서 남성 노동자의 수를 비약적으로 증가시켰다(Duus, 1983[1976]: 194-6). 전전에 비해 중화학공업에 종사하는 노동자 의 수는 10배 이상 증가했다. 파업도 1914년 50건에서 1918년 417건으로 증가했다. 1919년 기준으로 노동분쟁은 무려 2,388건이나 발생했다. 전전(戰前) 40여개에 불과 했던 노동조합도 300개 이상으로 증가했다. 사회주의운동 또한 급격히 성장하고 있 었다. 노동계급과 사회주의 세력의 성장은 독일에서와 같이 일본의 권위주의 체제와 자본에게 직접적 위협이 되었다. 일본은 1925년 4월 치안유지법을 제정해 일체의 반 체제 운동을 탄압했다. 독일의 사회주의자법은 사회주의를 탄압하기 위한 법이었지만 사회주의정당의 선거참여를 막지는 않았다. 반면 일본의 치안유지법은 체제에 반대하 는 모든 정당을 불법화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치안유지법은 일본 공산당을 비롯해 사회주의 계열의 정당을 탄압하는 효과적인 무기로 사용되었다. 치 안법은 조선에서도 4차례에 걸친 조선공산당에 대한 대규모 검거와 탄압의 제도적 근거가 되었다(김금수, 2013ㄱ:548-51; 임대식, 1994:172-180). 일본에서 반공주의 와 개발국가가 결합된 반공개발국가는 노동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을 탄압하고, 대자본 을 중심으로 경제를 개발하기 위한 권위주의적 후발 국가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한국 반공개발국가는 위로부터의 산업화를 추진한 독일과 일본과 유사한 특성을 공 유하고 있다. 다만 한국의 반공개발국가가 독일과 일본 반공개발국가와 상이한 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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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반공개발국가가 내적으로는 민족분단과 외적이라는 냉전이라는 역사적으로 특 수한 조건 하에서 형성되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권위주의적 반공개발국가도 후후발국가인 한국이 선진산업국가들을 따라잡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을까? 한국 반공주의와 개발국가, 그리고 반공개발국가는 어떤 특성을 갖고 있는 것일까? 먼저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은 후후발산업국가가 선발 산업국가를 따라잡기 위해 반드 시 권위주의와 결합될 역사적 필연은 없다는 것이다. 이병천(2003ㄱ:51)도 개발이 반드시 독재와 결합될 필요는 없다고 했다. 하지만 이병천은 “일정 정도 권위주의적 조절이 불가피했을 것이라고 여겨진다”는 최장집과 김호기의 글을 인용하면서 권위 주의적 통제의 불가피성을 받아들인 것 같다. 이병천(2003ㄴ)은 개발국가를 “… 본질 적으로 절차적 정당성에 의존하는 규칙 기반 국가가 아니라 권위주의적인, 재량적 개 입국가 …”로 정의했다. 이러한 인식은 로스토우류(類)의 개발경제학(dveleopmental economics)의 주장과 유 사하다.
밀리칸과
로스토우(Millikan
and
Rowstow,
1957)는
저개발국가
(underdeveloped nations)에 대한 미국의 외교정책을 검토하면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한다. 제3세계 국가들이 선진국을 따라잡기 위해서는 강력한 정부에 의해 개발정책 을 추진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때 민주주의는 유보될 수 있다. 제3세계에서 민주주 의의 유보는 문제라기보다는 오히려 제3세계의 특수성으로 인식될 필요가 있다는 것 이다. 더 나아가 제프 엘리(Geoff Eley)는 민주주의와 산업화가 동시에 진행되었다는 영국의 사례는 신화일 뿐이고, 영국조차도 독일 등 후발산업국가들과 같이 산업화에 서 민주화로 나아갔던 것이 일반적이었다고 주장한다(Eley, 1984: 62-74). 민주화에 산업화가 선행하는 것은 제3세계만의 예외적인 현상이 아니라 서구 국가들의 초기 산업화과정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보편적인 현상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관점은 역사를 역사적 맥락에서 설명하지 않고, 현재의 관점에서 설명 하려고 할 때 발생하는 오류일 수 있다. 산업화에 대한 고정된 실체가 존재하지 않 듯 민주화 또한 시대적 맥락에 따라 다른 모습을 띄고 있다. 우리가 산업혁명 당시 민주주의와 산업화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그 당시의 관점에서 민주주의를 시공간적으 로 비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당시가 그 이전에 비해, 다른 사회(국가)에 비해 더 민주적이었는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당시 영국은 독일로 대표되는 대륙 유럽 국가들에 비해 더 민주적이었고, 산업자본주의 이전의 자본주의 사회에 비해 더 민주적이었다. 이러한 관점을 적용하면 박정희의 반공개발국가는 다른 사회와 비교해 더 권위주의적인 것은 물론 박정희 독재이전과 비교해서도 더 권위주의적이었다. 그 러므로 박정희 정권이 산업화를 위해 민주주의를 희생시킬 어떠한 세계사적 보편성 도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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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 분명한 역사적 사실은 국가가 경제개발을 주도하는 개발국가가 반공주의와 권위주의가 아닌 민주주의와 사회주의와도 결합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잘 알 고 있는 것과 같이 스웨덴, 노르웨이 등 북유럽 국가들의 산업화 과정은 국가가 주 도한 개발국가의 전형이다. 하지만 개발국가는 반공주의가 아닌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가 결합된 사민주의적 개발국가였다. 윤홍식(2015)이 정리한 바에 따르면 보편주의 복지국가의 전형이라고 평가받고 있으며, 사회정책이 다른 정책과 비교해 특권적 위 치에 있다는 스웨덴(Holliday, 2000)에서도 국가는 사회정책이 경제성장에 긍정적 영 향을 줄 수 있는 방법을 지속적으로 찾았다(Andersson, 2014). 사실 스웨덴 경제학 자 군나르 미르달(Gunnar Myrdal)의 “사회정책은 비용이 아닌 생산적인 투자”라는 생각 또한 (존슨이 일본 개발국가가 계승했다고 하는) 독일 역사학파의 경제담론, 즉 개발국가의 담론을 사민주의적인 방식으로 계승한 것이다. 1960년대 스웨덴 경제정 책의 지침이 된 「조정된 경제정책(Samordnad näringspolitik)」과 「결과와 개혁 (Resultat och reformer)」도 스웨덴 복지국가가 사민주의에 기반 한 강력한 개발국 가의 특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개발국가에는 권위주의의 길과 사민주의의 길이라는 두 가지 길이 있다. 이는 1930 년대 독일 국가사회주의당과 스웨덴 사민당을 비교해보면 극명하게 드러난다. 1930 년대 독일의 국가사회주의당과 스웨덴 사민당의 선거 포스터를 비교해보면 두 정당 모두 “모두에게 일자리를”이라는 구호를 선거의 주요 공약으로 담고 있다. 독일포스 터는 “일과 빵(Arbeit und brot),” 스웨덴 포스터는 “모두에게 일(arbete åt alla),” “늘어난 구매력 (Ökad Köpkraft)”이라고 쓰여 있다. 독일 나치당과 스웨덴 사민당 모두 경제 불황과 실업에 대한 국가의 적극적인 역할을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중요 한 차이가 있다. 스웨덴 사민당의 국가개입은 민주주의에 근거한 것인 반면 독일의 나치당은 권위주의적 방식으로 국가가 개입했다. 우리에게도 짧고 불완전했지만 민주주의와 개발국가를 결합하려는 역사적 시도가 있 었다. 성과를 판단하기에는 집권기간이 너무 짧았다. 하지만 1960년 4월 혁명이후 민주적 과정을 통해 집권한 장면정권(1960년 6월 15일~1961년 5월 16일)은 국가주 도 ‘경제제일주의’를 전면화했다(김기승, 2003).9) 장면정권은 1961년 5월 16일 박정 희에 의한 군사쿠데타가 발생하기 직전인 4월말 ‘경제개발5개년계획안’을 발표했다 (김기승, 2003). 성과가 아주 없었던 것도 아니다. 사회적 혼란이 정리되지 않아 9) 장면정권의 국가주도적 경제제일주의는 1961년도 예산편성 지침에 잘 나타나있다 (김기승, 2003:141). “4월혁명
과업의 완수와 경제자립의 목표 달성을 촉진하기 위하여 부패된 관권경제를 일소하고 경제제일주의를 표방하 며, 계획성있는 자유경제체제 하에 국민경제의 균형된 발전을 이룩할 수 있는 제반 시책을 단계적으로 실현하 는 방향에서......예산을 편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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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경제성장률은 2.1%에 불과했지만 1961년 2월 무역량은 1960년 3월 대비 60%나 증가했다(서중석, 2005:193). 다시 말해 개발국가가 권위주의와 함께 한다는 어떤 역사적 필연은 존재하지 않는다. 개발국가의 성공 여부 또한 권위주의와는 무관 하다. 한국 개발국가의 핵심적 성공요인 중 하나인 복선형 경제개발 방식도 독재와 무관하게 이루어졌다(이병천, 2003ㄱ).
5) 한국 반공개발국가의 특성 다음으로 한국 반공개발국가가 형성된 내외(內外)조건과 특성을 검토해보자. 한국에 서 반공주의와 개발국가가 결합된 반공개발국가의 형성은 역사적으로 내외적 요인들 의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상호작용을 이해해야한다. 먼저 내적 조건을 보자. 미군정 이후부터 이승만 독재정권까지 지속되어온 반공주의는 1961년 5월 군사쿠데타를 통 해 집권한 박정희 정권에 이르러 권위주의적 개발국가(개발독재)와 결합된다. 사실 개발국가 자체만 놓고 본다면 1955년 2월 17일 기획처를 개편해 산업경제발전에 관 한 전반적인 계획과 실시를 관리 조정했던 부흥부(復興部)의 신설에서 그 기원을 찾 을 수도 있다. 5·16 군사쿠데타 직후 만들어진 최고 권력기관인 ‘국가재건최고회의’ 에서 발표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장면정부의 경제개발계획(경제개발5개년 계획)을 토대로 작성된 것이었다(김기승, 2003:192-3). 물론 이후 미국과의 조율과정 에서 수정계획이 발표되지만 개발국가 차원에서 보면 박정희 독재정권의 경제개발은 장면의 제2공화국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하지만 박정희 독재정권이 추진한 개발국 가는 장면정권의 개발국가와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바로 개발국가와 반공주의가 권 위주적 방식으로 결합되었다는 점이다. 장면정권의 ‘경제개발5개년계획(계획)’과 박정희 군사정권의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제1차 계획)’의 근본적 차이는 ‘계획’과 ‘제1차 계획’의 전제(前提)에서도 드러난 다. ‘계획’은 통일과 단일민족경제를 전제하고 냉전으로 인해 부득이하게 남한만의 독자적인 경제개발을 추진할 수밖에 없다고 전제했다. 반면 ‘제1차 계획’은 북한과 소련이 남한을 적화시키기 위해 광분하고 있다는 군사적 위협을 강조했다. 즉, 남한 을 지키기 위해 자립경제와 국방력을 강화할 필요가 있고, 이를 위해 미국의 원조확 대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김기승, 2003:200-1). 이는 군사정권이 추진하는 경 제개발의 목적이 북한이라는 ‘사회주의’체제와의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체제경쟁을 위한 프로젝트라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박정희 독재정권이 1970년대 중반 중화학 공업으로 경제개발의 방향을 전환한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도 미중수교로 대표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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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냉전질서의 이완에 따른 미국의 군사원조 감소에 대한 대응이었다. 즉, 한국에서 반공개발국가는 선진국을 따라잡기 위한 후후발 국가의 개발프로젝트인 동시에 한반 도 분단이라는 특수한 조건에서 남북 간의 체제경쟁의 산물이다. 집권기간 내내 박정 희 독재정권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북한과의 체제경쟁에서 승리하는 것이었다. 내적 조건의 또 다른 측면은 앞서 언급했듯이 근대화를 위한 한국민들의 열망에 부 응하는 것이었다. 일제의 수탈로부터 벗어나면 모두가 잘사는 세상이 올 것 같았다. 하지만 1945년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국가가 되 었다. 일제의 직접적인 수탈이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봄’은 오지 않았다. 조선경제 통신사 자료에 따르면 해방직후인 1946년 공업생산액은 일제강점기였던 1939년의 25% 수준에 불과했다. 더욱이 한국전쟁은 한국의 공업생산력을 전쟁전의 ⅓수준으로 격감시켰다(최상오, 2003:132) 1957년 당시는 농사를 짓는 농민들조차도 하루 세끼 를 해결하지 못하는 비율이 50%를 넘는 상황이었다(서중석, 2005:138). 이승만 독재 정권 하에서 교육기회의 확대와 농지개혁이 이루어졌지만 본격적인 산업화가 이루어 지지는 못했다. 박명림(1996:237)은 이러한 1950년대에 이루어진 한국의 근대화를 “산업화 없는 근대화”라고 부른다. 이병천(2014:27)도 1950년대를 한국 자본주의의 시작(한국 자본주의 1.0)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평가를 했다. 박정희 정권은 바로 이 러한 조건하에서 반공과 경제개발을 명분으로 군사쿠데타를 단행했다. 제1차 경제개 발계획(1962~1966) 기간 동안 한국경제는 연평균 7.9%라는 높은 경제성장을 달성했 다. 근대화를 열망했던 한국 민중은 이병천의 주장처럼 경제성장에 성공한 권위주의 적 반공개발국가에 암묵적 동의를 했을 수도 있다. 이병천(2003ㄱ:48)의 주장을 들 어보자.
“한국의 개발주의 성장체제는 재벌이 성장의 대표 주자가 되고 ‘병영적 노동통제’하 에서 대중의 삶이 소수 재벌집단의 성장성과에 의존하는, 고생산성과 저임금이 결합 된 ‘선성장 후분배’체제였고 후분배의 약속을 담보로 노동대중이 현재의 희생을 감수 하며 선성장 프로젝트에 동의하고 헌신한 체제인 것이다.”
개발국가의 대표적 이론가인 존슨(Johnson)도 개발국가가 추구하는 고도성장이라는 목표를 성공적으로 달성하기 위해서는 개발국가의 목표에 대한 광범위한 사회적 합 의가 전제되어야한다고 했다(Johnson, 1994:43). 다시 말해, 개발국가의 본질적 속성 은 국가권력이 경제개발에 대한 민족적 요구에 조응함으로써 그 정당성을 인정받는 다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박정희 독재정권의 반공개발국가는 19세기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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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 이래 한국 민중들의 염원이었던 산업화로 대표되는 근대화라는 민족적 염원을 수렴한 것이다. 한국민중은 민주주의의 유보에도 불구하고 국가안보와 경제성장을 위 해 박정희의 권위주의적 반공개발국가를 용인했을 수도 있다. 재벌문제와 관련해서 이병천과 대립적인 견해를 보이는 장하준(2006[2003])도 한국의 개발국가가 한국사 회 전체의 이해를 대변했다는 주장을 편다. 실제로 1960년 11월 정무원 사무처에서 실시한 여론조사에 의하면 국민의 70%가 한국사회의 가장 긴급한 과제로 “경제문 제”를 해결하는 것이라고 응답했다(김기승, 2003:142). 이병천이 주장하는 것과 같이 한국 민중들이 권위주의적 반공개발국가에 동의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민중의 암묵적 동의유무와 관계없이 박정희의 권위주의적 반공개발국가는 탄생부터 매우 취 약한 사회적 동의기반을 갖고 있었다. 민주주의를 억압하면서 수립된 박정희의 권위 주의적 반공개발국가에 대한 사회적 동의는 살얼음판과 같았다. 1961년부터 1979년까지 박정희 독재정권은 계엄령, 위수령, 긴급조치 등 반민주적인 억압조치 없이는 단 하루도 지속될 수 없었다.10) 집권이후 두 차례의 경제개발5개년 계획(1962년~1971년)에 의해 박정희 정권은 연평균 8.7%라는 높은 성장률을 기록했 다(강광하, 2000). 하지만 1969년 3선 개헌반대운동,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 열사 의 분신사건, 1971년 4월부터 시작된 교련철폐운동, 공정선거운동, 6월 국립의료원의 의료파동, 7월 28일 사법파동, 8월 10일 광주대단지사건, 9월 15일 한진상사 파월 노동자들의 KAL빌딩 방화사건 등 셀 수 없는 민중의 저항이 연이어 발생했다. 이에 대응해 박정희 정권은 10월 15일 위수령(衛戍令), 12월 6일 국가비상사태선언, 1972 년 8월 8.3조치, 10월 장기독재를 위한 유신체제를 선포했다. 사실이 이와 같다면 이 병천이 이야기하는 동의와 헌신은 존슨이 이야기한 사회적 합의가 아닌 “강요된 동 의와 헌신”이였다고 할 수 있다. 소위 ‘막걸리 보안법’이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사람 들의 일상의 사적인 대화까지 가로막고, 처벌했던 군사독재가 갖고 있는 가공할만한 폭압적 물리력 하에서 민중들의 유일한 선택지는 민주주의와 인권의 희생위에 올라 선 권위주의적 ‘반공개발국가’ 이외에는 없었다. 그리고 이러한 강요된 동의와 헌신 에 대한 저항이 박정희 군사독재 기간 내내 끊이지 않았던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 지식인, 학생 등의 반독재민주화운동이다. 강요된, 강제된 동의와 헌신은 존슨이 이 야기한 개발국가의 성공을 위한 ‘광범위한 사회적 합의’도(Johnson, 1994), 그람시가 이야기한 공통의지와 사회적 합의도 아니다(김수행·박승호, 2007:33). 권위주의적 반 공개발국가에 대한 민중의 명시적 동의도, 암묵적 동의도 없었다. 박정희 독재 체제 가 유지되었다는 사실이 곧 민중의 암묵적 동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10) 박정희 군사독재의 억압적 조치들은 다음 글을 참고하라. 조희연. (2004). “박정희 시대의 강압과 동의: 지배
전통강압과 동의의 관계를 다시 생각한다.”
『역사비평』,
67:135-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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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사회연구소 세미나에서 구갑우가 지적했던 것처럼 북한 체제가 유지된다는 것이 북한 민중이 체제에 동의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구갑우, 2015). 외적으로 한국 반공개발국가의 탄생은 1945년 이후 만들어진 자본주의 세계체계의 성격과 한국이 세계체계에 편입되는 방식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물론 월러스틴 (Wallerstein, 2005[2004])이 주장한 것과 같이 한국의 권위주의적 반공개발국가가 전적으로 자본주의 세계체계의 필요에 조응하는 방식(promotion by invitation)으로 구성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1945년 이후 국가 간 체제11)에 기반 한 미국 패권의 자본주의 세계체계, 미국과 소련의 대립으로 대표되는 냉전체제, 일본을 중심 으로 한 동아시아의 분업구조,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확대 등을 고려하지 않고는 한국 에서 반공을 명분으로 민주주의와 인권을 유린한 독재체제가 어떻게 개발국가와 성 공적으로 결합되었는지를 설명하기 어렵다. 1961년 군사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박정희 정권이 직면한 한국의 1960년대 상황은 1950년대와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먼저 미국의 대한(對韓)정책이 무상원조에서 유상 원조(차관)로 변화하기 시작했다(김수근, 1988:20-1; 김창근, 2007:414). 미국의 대 한 무상원조는 1957년 3억8천3백만 달러로 정점에 이르렀다가 점차 감소하기 시작 해 박정희가 집권한 1961년부터는 차관이 무상원조를 대신하기 시작했다. 5·16 쿠데 타가 일어나기 직전인 1960년 만해도 한국 정부 세입 중 미국의 원조(대충자금)가 차지하는 비중은 35.2%나 되었다(정일준, 2013:469). 이처럼 한국정부에 막대한 재 정적 지원을 하던 미국의 원조가 감소한 것이다. 1965년에 이르면 미국의 대한원조 중 차관이 무상원조보다 더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된다. 미국의 이러한 대한정책의 변 화는 크게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는데 하나는 제3세계에 대한 미국의 원조정책이 공산주의 세력에 대한 군사적 대응에서 경제지원으로 변화했기 때문이다. 1950년대 를 거치면서 소련이 제3세계 국가들에 대한 경제적 지원을 강화했다. 그러자 미국은 공산주의와의 체계경쟁 차원에서 제3세계 자본주의 신생국가들에 대한 지원을 군사 원조에서 경제지원으로 전환한 것이다(정일준, 2013:459). 1961년 미국 케네디 정권 이 발표한 ‘신대외원조법’은 이러한 미국의 정책변화를 반영한 것이다(윤상우, 2003). 다른 하나는 쿠바 미사일 위기로 인해 미국의 대외정책의 관심이 동아시아에서 중남 미로 전환된 것도 미국의 대한(對韓) 정책 변화의 중요한 원인이 된다. 쿠바 미사일 위기 이후 미국의 대외원조중 동아시아가 차지하는 비중은 1950년대 33.8%에서 21.8%로 감소했다. 반면 중남미에 대한 미국의 지원은 7.3%에서 26.6%로 급증했다. 둘째, 1960년대 당시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예외성이다. 한국이 권위주의적인 방식으 11) 개별 국민국가의 주권은 제한적으로 인정되지만, 핵심부 국가의 헤게모니가 반주변부와 주변부 국가에 영향
을 미치는 체제를 의미한다(윤상우, 2006: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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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반공주의를 개발국가와 결합시켜 고도성장을 시작했던 1960년대는 1940년대 후 반부터 지속된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팽창이 지속되고 있던 시기였다. 이러한 조건하 에서 미국으로 대표되는 선진 산업국들은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eneral Agreement on Tariffs and Trade) 체제하에서 한국과 같은 제3세계 국가들과의 비 대칭적 무역관계를 용인했다(윤상우, 2006).
한국이 수출지향적 성장정책을 추구하
는 동시에 자국 내 산업에 대한 보호주의 정책을 실시하는 것을 용인했다. 더욱이 당시 수출지향적 산업화정책을 추진한 제3세계 국가는 한국, 대만 등을 제외하면 거 의 없었다. 브라질, 멕시코 등 제3세계 국가들에게는 20세기 초 수출지향적 정책을 추진하다가 1929년에 발생한 대공황으로 혹독한 대가를 지불했던 기억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강동훈, 2011:159-60).12) 1970년대 들어 박정희 독재정권은 1973년 1월 30일 ‘중화학공업정책 선언에 따른 공업구조개편론’을
확정하고,
6월에는
‘중화학공업육성계획’을
발표한다(구현우,
2009:161). 이처럼 권위주의적 반공개발국가가 1970년대 들어서면서 경공업 중심의 산업화에서 중화학공업 중심으로 전환한 것도 1970년대에 나타난 미국 중심의 자본 주의 세계체계의 변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김창근, 2007). 가장 중요한 변화는 미 국의 대 동아시아 정책의 변화이다. 베트남 전쟁의 패배를 계기로 미국은 대 아시아 안보정책의 기조를 적극적 개입에서 아시아 국가가 스스로 자신의 안보를 책임지는 방식으로 전환했다(윤상우, 2003). 이러한 변화의 일환으로 미국은 1971년 한국에서 주한미군 제7사단이 철수시켰고, 무상군사 원조 또한 1975년을 마지막으로 중단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1977년 출범한 미국의 카터정권은 주한미군의 단계적 철수를 한 국정부와 상의 없이 일방적으로 발표했다. 동아시아의 안보환경 변화가 권위주의적 반공개발국가로 하여금 경공업 중심의 산업정책을 중화학 공업 중심으로 전환하게 하는 중요한 계기를 제공했던 것이다. 그러나 안보환경의 변화로 인해 자주국방이 필요했다는 당위만으로 권위주의적 반공 개발국가가 중화학공업 중심의 산업화를 추진했다고 볼 수는 없다. 1970년대에 들어 서면 자본주의 세계체계에서 미국의 패권의 기반이 되었던 국가 간 체제의 중요한 축들이 변화했다. 1971년 닉슨의 금 태환 중지 선언은 브랜트-우드체제가 붕괴되었 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Schwartz, 2015[2010]). 미국은 재정과 무역적자의 감소를 위해 한국과 같은 개발도상국가로부터 수입되는 상품에 대한 수입규제를 실 12) 내수시장 중심의 발전전략은 단기적으로 브라질 등에서 대성공을 거두었다. 1932년부터 1939년까지 브라질은
연평균 10% 이상의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던 것도(강동훈, 2011:160) 이들 국가들이 수출지향적 산업화를 추구 하지 않았던 이유로 보인다. 또한 일부 연구자들은 1960년대의 이러한 특수한 상황을 고려해 당시 한국의 경 제발전을 “편승론과 무임승차론”이라고 평가절하하기도 하고, 당시의 국내외 조건에 대한 단순한 순응이었다 고 평가하기도 한다(김창근, 2007:414; 윤상우, 2006: 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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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한국은 1971년부터 한미직물협정에 의거해 미국에 대한 섬 유수출의 쿼터를 적용받고 있었다. 1973년 12월부터는 미국, 유럽, 캐나다 등 선진국 시장에 대한 수출물량을 제한하는 다자간 섬유협정(Multi-Fiber Arrangement: MFA)을 받아들여야했다(신현종·노택환, 1992; 전창원, 1978).13) 경공업 중심의 수출 전략만으로는 산업화의 진전이 어려워졌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은 일본과의 신국제분업 관계를 구축해 일본으로부터 중화학공업을 유치해 중화학공업 중심의 발 전의 길을 가게 되는 것이다(윤상우, 2003).14) 오일쇼크이후 중동지역의 특수 또한 한국 반공개발국가의 경제성장이 지속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였다. 1979년을 기 준으로 중동에 송출된 노동자가 국내로 송금한 외화는 GDP 대비 2.7%인 11억 5천 만 달러에 달했다. 미국이 1957년부터 1980년까지 24년 동안 한국에 공여했던 무상 원조의 ⅓이 넘는 규모였다. 중동 건설특수가 시작된 1975년 8억불이었던 해외건설 수주액은 1981년 137억불로 증가했다(김명수, 2012:12). 이제 이상의 내외적 조건에 의해 형성된 한국 반공개발국가의 특성에 대해 개략해보 자. 한국 반공개발국가의 첫 번째 특성은 경제발전을 위해 국민을 동원하는 체제를 구축했다는 점이다.15) 하지만 앞서 내적 조건을 다루면서 언급했듯이 경제발전을 위 한 반공개발국가의 동원은 민주주의에 기반 한 동원이 아닌 ‘강요된 동의’였다. 박정 희는 서구식 민주주의와 정당정치가 비효율적이고, 낭비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선 거, 정당, 의회로 대표되는 민주주의를 유보해야한다고 생각했다(강정인, 2014:226). 박정희의 반공개발국가에서 동원 방식은 반공과 경제개발을 이유로 정치적 민주주의 에 기반 한 동의에 의한 동원이 아닌 국가의 물리력에 의한 강제된 동원이었다. 권 위주의적 반공개발국가는 민주주의 과정을 생략함으로써 시간과 노력이 가장 적게 드는 경제적 방식이었을지 모른다. 로스토우는 이러한 이유로 반공주의가 한국과 같 은 제3세계 국가에서 국민을 경제개발에 동원하는 중요한 모토가 될 수 있다고 평가 했다(박태균, 2009:31). 물론 형식적 민주화가 이루어진 1987년 이후 한국 반공개발 국가의 동원기재는 ‘강요된 동원’에서 절차적 민주주의에 따른 ‘자발적 동원’으로 성 격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13) 1974년 체결된 다자간 섬유협정은 1994년 세계무역기구(WTO) 출범이후 ‘섬유와 의류에 관한 일반협정 (Agreement on Textile and Clothing: ATC)로 전환되어 10년 간 이행기를 거친 후 2004년 종료되었다(고희원, 2005: 77). 14) 윤상우(2006:84-5)가 정리한 바에 따른 한국과 일본의 이러한 신분업질서는 1969년 한일 각료회의에서 한국에
일본의 자본과 기술협력을 통해 포항제철을 건설하기로 하고, 1970년 4월에는 한일 간의 경제협력을 유럽의 EEC 수준으로 발전시키고, 일본에서 환경과 노동 문제 등으로 한계에 다다른 중화학 공업을 한국에 이전시키
며, 합작과 장기협력을 위한 정책을 시행한다는 야스다(安來) 시안을 발표했다. 15) 여기서 효율적 또는 효과적이라는 용어대신 경제적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이유는 경제적이라는 용어가 시간과
노력을 가장 적게 들인다는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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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한국 반공개발국가는 에반스(Evans, 1995)가 이야기하는 연계된(착근된) 자율 성을 갖춘 국가였다.16) 1960년대 당시 한국은 토지개혁(1949~1953)과 한국전쟁 (1950-1953)을 거치면서 전근대적 지배층인 지주세력이 몰락하고, 자본가계급은 아 직 지배적인 정치세력으로 등장하지 못한 상태였다(강동훈, 2011:147). 그렇다고 노 동계급으로 대표되는 좌파세력이 힘을 갖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한국에서 사민주 의로 대표되는 중도좌파세력을 포함한 모든 좌파세력은 미군정, 한국전쟁, 이승만 독 재정권을 거치면서 이미 궤멸된 상태였다(윤홍식, 2013). 이러한 조건 하에서 군사쿠 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 정권은 제(諸)사회세력으로부터 손쉽게 자율성을 확보 할 수 있었다. 한국의 권위주의적 반공개발국가는 웨이드가 이야기한 강한국가와 약 한사회라는 1960년대의 조건에서 형성되었다(Wade, 1990). 다만 반공개발국가가 추 진한 경제개발의 핵심주체였던 재벌로 대표되는 자본가계급이 국가와 긴밀한 연계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반공개발국가의 자율성은 연계된 자율성이라고 할 수 있다. 하 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자본이 국가의 하위 파트너로 결합된 형태였다. 개발을 위한 자본이 부족한 상황에서 자본가계급은 국가가 강제적 저축을 통해 마련된 내자와 원 조와 차관을 통해 조성된 외자를 배정받기 위해 국가의 요구와 통제에 순응할 수밖 에 없었다. 이를 바탕으로 반공개발국가는 실적(수출)에 대한 평가를 통해 자본을 규 율할 수 있었다(Amsden, 1986). ‘유능한 관료 조직’은 한국 반공개발국가의 연계된 자율성을 유지·강화하는 중요한 요인이 다. 장하준(2006[2003]:104)은 한국의 관료 엘리트들은 “다른 나라의 엘리트 집단보다 더욱 다른 나라의 경험에서 배우고자 하고, 또 배울 수 있는” 집단이었다 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반공개발국가를 주도했던 유능한 관료 조직은 박정희의 권위 주의적 반공개발국가가 지속되었던 1960년대와 1970년대 “광범위한 공무원 제도 개 혁”을 통해 형성되었다고 했다(장하준, 2006[2003]:234). 한국 공무원들이 1960년대 말까지만 해도 파키스탄과 필리핀으로 연수를 갔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놀라운 반전 이었다. 다만 한국에서 유능한 관료 조직이 형성된 기원은 권위주의적 반공개발국가 가 아니라 4·19혁명이후 민주적 절차를 통해 집권한 장면정권이었다. ‘경제제일주의’ 를 내세웠던 장면정권은 전력, 경지정리, 산림녹화, 교량, 도로, 댐 건설 등 인프라 확충을 위해 1961년 학사학위가 있는 사무직 1,614명과 기술직 452명을 공채로 선 발했다(서중석, 2005:192). 해방이후 친일파의 독무대였던 관료조직에 공무원 공채제 도를 통해 유능한 관료들이 수혈되기 시작했다. 장면정부에서 출발한 공채제도는 1960년대 말에 이르러 공무원 임용의 가장 일반적인 제도가 된다. 이러한 조건하에 서 권위주의적 반공개발국가는 암스덴(Amsden, 1989)이 이야기한 국가의 지원과 지 16) 에반스의 동아시아 개발국가에 대한 저작들의 종합적인 내용은 김태수의 논문에 잘 정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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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이 수반되는 규율을 강제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일반적 통념과 달리 한국 반공개발국가의 산업화 과정은 수출주도형이 아니었다. 한국의 산업화 과정은 라틴아메리카의 개발국가들과 달랐다. 한국은 수입 대체산업 대신 수출산업을 중심으로 산업화를 추진한 것이 아니라 수입대체산업과 수출산업을 효과적으로 결합시켰다. 한국의 초기 산업화 과정은 순수한 수입대체산업 으로 출발했지만, 1960년대 들어서면서 수입대체산업과 수출산업이 결합되는 양상으 로 전개되었다(Donbusch and Park, 1987: 405). 1960년대 식품과 같은 비내구재 소비재의 수입대체화를 통한 성장이 정체에 직면했을 때 한국은 작은 내수시장으로 인해 기계, 내구재 소비재 등으로 수입대체산업을 확대할 수 없었다. 한국은 대신 수 출지향적 산업화로 전환한다. 그러나 이러한 전환은 단순히 수입대체산업에서 수출지 향산업으로 전환한 것이 아니다. 수입대체산업화를 통해 국내 유치산업이 세계시장에 서 어느 정도 경쟁력이 있는 수준으로 성장하면 보조금, 신용, 환율정책, 조세정책 등의 지원을 통해 수입대체산업을 수출산업으로 전환하는 방식이다.
이병천
(2000:124-5)은 이러한 산업화 방식을 “수입대체와 수출촉진이 결합과 상호 강화방 식”에 기반 한 복선형 산업화 방식이라고 불렀다. 더불어 한국의 복선형 산업화는 단 순히 기업에게 수출실적을 부과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반공개발국가 가 “수출용 원자재의 국내생산품을 동제품의 세계시장 가격수준으로 공급하게 하여 수입대체산업을 국제경쟁에 노출되도록 규율을 강제함으로써 수입대체와 수출촉진의 상호 강화메커니즘이 작동하게 했다는 점이다.” 반공개발국가는 산업정책을 통해 기 업을 지원하는 동시에 엄격한 규율 적용해 기업을 통제하는 방식으로 복선형 산업화 를 추진했다.
6) 반공개발국가와 한국 복지국가 권위주의적 반공개발국가의 놀라운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는 왜 국가복지 의 확대가 지연되었을까? 한국은 한국과 유사한 수준의 산업화를 이루었던 개발도상 국가들과 비교해도 국가복지수준이 매우 낮았다. 김연명(1993:51)의 분석에 따르면 1986년 당시 한국 중앙정부 예산 중 사회복지예산이 차지하는 비율은 8.7%로 한국 (1인당 GNP USD 2,370)과 유사한 중상위수준국가(1인당 GNP USD 1,890)의 평균 인 22.4%보다 낮았다. 더욱이 한국의 사회지출은 한국보다 경제적 수준이 낮은 중하 위소득국가군(1인당 GNP USD 750)의 13.1%는 물론 저소득국가군(1인당 GNP USD 200)의 9.8% 보다도 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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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공개발국가는 적어도 두 가지 측면에서 한국 복지국가의 탄생과 발전을 지연시켰 다고 할 수 있다. 하나는 우리가 앞서 반공주의의 기원에 대해 검토하면서 반공주의 가 정치적으로 한국사회에서 복지국가를 만들어갈 좌파 권력자원을 무력화시켰다는 것을 확인했다. 김동춘(2015:176)의 주장과 같이 한국에서 반공주의는 서구와 달리 자유민주주의의 하위 범주가 아닌 초헌법적, 종교적 가치로 군림했기 때문에 가능했 을 수도 있다. 그러나 반공주의로 좌파세력을 궤멸시킨 것만으로는 더 나은 삶을 원 하는 사람들의 욕구를 대신할 수는 없다. ‘반공’이 한국사회에서 모든 것을 초월하는 절대적 가치를 가치고 있다고 해도, ‘반공’이 1876년 개항 이래 한국민(韓國民)의 염 원이었던 ‘자주적 근대국가수립’을 대신할 수는 없었다. 4월 혁명 이후 집권한 장면 정권이 “경제제일주의”를 내세운 것도, 4·19 혁명이후 학생들의 조국통일에 대한 염 원도(박세길, 1989: 95-7; 서중석, 2005:188-203)17) ‘자주적 근대국가수립’에 대한 민중들의 바람이 반영되고 표출된 것이다. 특히 장면정권이 경제제일주의를 들고 나 온 것은 일제강점기, 미군정기, 한국전쟁, 이승만 독재를 거치면서 가난에 짓눌려있 던 민중들의 요구를 반영한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권위주의적 반공개발국가 하에서 이루어진 고도성장이었다. 권위주의적 반공개발국가의 고도성장은 한국사회에서 사회적 분배체계 대신 시장적 분배체계를 제도적 유산으로 고착화시킴으로서 반(反)복지국가의 제도적 유산이 되었다. 박정희 독재로부터 시작된 한국의 반공개발국가는 1997년 경제위기 이전까지 현상적으로 공 적 사회지출의 증가 없이 경제성장을 통해 빈곤과 불평등을 완화시켰기 때문이다. 박 정희와 전두환 독재시기(1961~1987) 동안 GDP 대비 사회지출은 2%를 넘지 않았다 (주학중, 1992; 문형표, 1999; 전병유 외, 2008; OECD, 2015). 1987년 민주화이후 1997년 경제위기 이전까지도 5%를 넘지 않았다. 하지만 절대빈곤율의 감소는 경이 적이었다. 김미곤(2014:8)이 정리한 자료에 따르면 한국의 절대빈곤율은 1965년 40.9%에서, 1976년 14.8%로 낮아졌다. 1980년에 이르면 9.8%로 낮아졌고, 1997년 경제위기 직전인 1996년에는 3.0%로 감소했다. 김낙년(2015:140-1)에 따르면 상위 1%의 소득집중도도 해방 전 17%를 넘었지만 권위주의적 반공개발국가가 본격적으 로 이륙한 1960년대에는 7%대로 낮아졌다. 상위 1%에 대한 소득집중도가 다시 높 아진 것은 1997년 경제위기 이후였다. 박정희와 전두환 독재 기간 동안 지니계수로 측정한 불평등수준은 감소하는 추세에 있었다(주학중, 1992; 문형표, 1999; 전병유 외, 2008). 1997년 이전까지 지니계수로 본 불평등 수준은 GDP 대비 사회지출 수준 17) 당시 통일운동에 참여한 학생들의 침묵시위에 들여 있던 플래카드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이 땅이 뉘 땅
인데 오도 가도 못하느냐, 언론인 사회단체 남북교류, 이북 쌀 이남 전기, 민족자주통일, 외세는 물러가라, 남 북 서신 교환, 실업자의 일터는 통일에 있다, 한국문제는 한국인의 손으로” (박세길, 1986: 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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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무관하게 낮아지고 있었다. 물론 반론도 존재한다. 제조업의 노동분배율은 1962년 26.1%에서 1970년 25.0%로, 1973년에는 23.0%로 낮아졌다(이정우, 2003:231). 한국과 같은 분단국가였던 서독의 지표가 절대적 수준에서 높은 것은 물론 동기간 동안 38.0%, 40.9%, 44.1%로 높아 졌던 것과 대비된다. 더욱이 자산 불평등을 고려하면 소득불평등만으로 반공개발국가 의 성과를 논할 수 없다. 이정우의 추계에 따르면 1963년부터 1979년까지 17년 동 안 지가는 무려 180배나 상승했다. “1963년에 돈 100원을 은행에 예금했다면 1979 년에 1,760원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런데 같은 돈 100원으로 땅을 샀다면 1979년에 1만 8,700원의 가치”가 되었다는 것이다. 자산을 포함한 불평등을 고려한다면 반공 개발국가가 경제성장을 통해 불평등을 완화했다는 것은 신기루에 가까운 주장일 수 있다. 한편 김연명(1993)은 한국에서 국가복지의 확대가 지체된 것이 분단이라는 특수성과 관련된 과도한 국방비의 지출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권위주의적 반공개발국가 시기 동안 국방비와 복지지출은 상호 대체관계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논리적 타당성을 갖고 있지만 현실적 정합성은 낮아 보인다. GDP 대비 국방비 지출 과 사회복지지출은 대체관계에 있지 않았다. 적어도 1962년부터 1983년까지 GDP 대비 국방비와 사회지출은 반대방향으로 움직이기 보다는 같은 방향으로 움직였다 (한국통계연감, 각년도; World Bank, 2015; 양운철·정성장·김치욱·오경석·김영윤, 2011). 국방비가 증가하면 사회지출도 증가했고, 국방비가 감소하면 사회지출도 감소 했다. 김연명이 이야기한 대체관계는 1983년부터 1997년 경제위기 직전까지 단기간 동안 “단순상관관계” 형태로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는 1970년대 후반부 터 시작된 GDP 대비 국방비가 낮아지는 경향이 반영된 것이다. 국방비의 지출감소 가 사회지출 증가로 대체되었다는 인과관계는 확인할 수 없다. 특히 2000년대 들어 서면서 GDP 대비 국방비는 일정수준을 유지했지만 사회지출은 급격히 증가했다. 물 론 분단으로 인한 과도한 국방비의 지출이 사회지출을 낮은 수준으로 유지해야했던 이유 중 하나일 수는 있다. 하지만 지난 반세기 동안의 낮은 사회지출 수준을 단지 과도한 국방비 지출과 관련시켜 설명할 수 없다. 분명한 것은 경제성장을 통해 국민들을 절대빈곤에서 벗어나게하고, 삶의 수준을 높 였던 반공개발국가의 경험이 한국사회에서 복지국가와 같은 사회적 분배체계에 대한 필요와 대중적 지지를 약화시키고, 경제성장을 통한 시장적 분배체계에 대한 맹신을 가져온 것이다. 1993년을 지나면서, 특히 1997년 경제위기 이후 경제성장을 통해 불 평등과 빈곤을 완화하는 반공개발국가의 방식이 이미 작동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지 난 두 차례의 대선(2007년과 2012년)에서 보듯 한국사회에서는 여전히 성장을 통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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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적 분배에 대한 지지가 복지국가라는 사회적 분배에 대한 지지를 압도하고 있다. 반공개발국가의 유산은 현재 한국사회에서 복지국가 확대의 가장 큰 걸림돌로 작동 하고 있다.
3. 반공개발국가의 대안으로서 평화복지국가 대안은 무엇일까? 우리는 그 대안이 평화복지국가에 있다고 주장한다. 여기서는 평 화복지국가의 정의로부터 시작해 왜 평화복지국가가 반공개발국가의 대안이 될 수 있는지, 왜 평화와 복지국가라는 생소한 결합이 한국사회의 대안체제에서 요구되는지 를 검토했다. 이를 통해 평화복지국가가 전통적 서구 복지국가와 어떤 차이가 있는 지, 왜 이런 차이가 한국사회에 중요한지를 논하며, 이러한 평화복지국가를 만들어갈 주체가 누구인지에 대해 검토했다.
1) 한국사회의 위기와 반북개발국가 국내적으로는 민주화로 인한 권위주의체제의 해체와 1997년 경제위기, 국외적으로는 동구권의 몰락과 신자유주의 이념의 확산은 아래로부터는 물론 위로부터도 한국사회 를 지배하고 있던 권위주의적 반공개발국가의 변형을 요구했다. 보수적 민주화세력이 주축이 된 야당의 10년 집권이 있었지만 반공개발국가는 반북개발국가로 이름을 바 꾸어 여전히 그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하지만 권위주의적 반공개발국가를 대신한 신 자유주의적 반북개발국가는 시민들이 기대한 그런 사회가 아니었다. 시민들은 권위주 의 체제가 해체되고 민주화가 되면 더 나은 삶을 보장 받을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그 런 세상은 오지 않았다. 건강, 거주 지역, 교육 등 인간의 삶의 질과 기회를 결정하 는 대부분의 사회지표의 불평등은 1990년대 이후 점점 더 악화되고 있는 양상이다 (김창엽, 2015; 신명호, 2015; 조명래, 2015). 예를 들어, 지역 간 불평등의 사례를 보면 지난 2002년부터 2006년까지 신규 일자리의 단지 2%만이 비(非)수도권 지역에 서 만들어졌다(조명래, 2015:247).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게 해주었다고 믿었던 교육도 이젠 더 이상 계층상승의 계기가 되지 못하고 있다. 부모의 경제적 지위가 자녀의 학벌을 결정하는 사회가 되었기 때문이다(김세직, 2014). 신자유주의적 반북 개발국가는 과거 권위주의적 반공개발국가와 달리 복지국가의 기능적 등가물로서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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득 불평등과 절대빈곤을 완화하는 역할조차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 김낙년(2012)에 따르면 지난 1996년 이후 한국사회에서 소득불평등은 점점 더 악화되고 있다. 경제 가 성장할수록 불평등이 점점 더 악화되는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 OECD 방식으로 노동소득분배율을 계산한 분석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김유선, 2015:152).18) 노동 소득분배율은 1997년 경제위기 직전인 1996년 98.5%에서 2014년 85.5%로 무려 13.0%포인트나 감소했다. 권위주의적 반공개발국가 시기에 (최소한 소득) 불평등 완 화에 기여했던 시장의 분배기능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것이다. 5년 후인 2020년 이 되면 한국이 OECD 국가들 중 가장 불평등이 심한 국가가 된다(고세훈, 2015:84). 더 심각한 문제는 반북개발국가가 이러한 사회적 위기의 대한 대안과 이를 만들어갈 주체세력의 형성과 성장을 가로막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 2012년 대통령 선거에서도 NLL로 대표되는 반북주의와 경제성장이 우선시되는 (김준철, 2013: 15) 반북개발주 의는 한반도 평화와 분배이슈를 제치고 유권자들로부터 차기정부의 추진해야할 가장 중요한 정책 아젠다로 선택되었다. 최근 국정화와 노동개혁을 둘러싼 논란에서도 반 북주의와 개발주의는 여전히 집권여당의 지배적 담론의 지위를 지키고 있다. 집권여 당(새누리당)의 김무성 대표는 “지금 대한민국의 국사학자들은 90%가 좌파로 전환돼 있다”라고 주장하는가 하면(경향신문, 2015년 10월 17일), 새누리당은 “김일성 주체 사상을 우리 아이들이 배우고 있다”는 현수막을 거리 곳곳에 내걸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새누리당 원유철 원내대표는 “북한 통일전선부와 정찰총국 등 대남공작기관 이 역사교과서 관련 반대 투쟁과 선동전을 전개하도록 하는 지령문을 보냈다고 한 다”라고 발언했다. 서청원 최고위원은 북한의 지령에 대한 공안당국의 수사를 촉구했 다(경향신문, 2015년 10월 29일). 또한 박근혜정부는 노동계, 시민사회, 야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경제성장을 명분으 로 기업친화적인 방식으로 노동시장을 유연화 하는 노동개악(勞動改惡)을 추진했다. 일반해고 제도를 도입하고, 임금체계, 취업규칙을 노동자들의 동의 없이 기업이 임의 로 변경할 수 있게 했다.
기간제 사용기간을 연장하고, 불법파견을 합법화 시키는
등 그야말로 시장과 기업친화적인 노동개악을 강행하고 있다. 반북개발국가는 시장규 제와 복지국가와 같은 국가의 역할을 확대하려는 시도에 반대하는 정치적 수단으로 확장되고 있는 것이다. 시민의 저항에 대해서도 지난 2015년 11월 14일에 있었던 “국정화와 노동개악에 반대하는 민중총궐기”를 폭력적으로 진압했던 것처럼 권위주 의적 반공개발국가의 방식을 답습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복지국가의 주체를 만 들고 확장하는 일은 매우 어려운 과제이다. 설령 보수와 재벌의 지배연합이 복지국가 18) OECD 방식이란 자영업자의 노동소득을 임금 노동자의 임금에 포함시켜 계산하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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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化)의 불가피성을 받아들인다 해도, 친(親)복지 정치세력이 존재하지 않는 한 한 국의 국가복지는 빈곤층에 대한 최소한의 생존만을 보장하는 잔여주의 복지체제를 넘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2015년 현재 권위주의적 반공개발국가는 신자유주의적 반 북(反北)개발국가라는 변형된 모습으로 존속되고 있다. 대안이 없다.
2) 평화복지국가 반북개발국가는 반공개발국가처럼 재벌과 보수 세력을 제외한 모든 집단의 정치세력 화와 시장을 사회적으로 통제하려는 국가의 개입을 반북주의와 경제성장 제일주의로 무력화시키고 있다. 평화복지국가는 반북개발국가를 대신해 한국사회가 직면한 문제 를 해결하는 대안이 될 수 있을까? 평화복지국가에 대한 선험적(先驗的) 정의란 존 재하지 않는다. 모든 사회체제의 성격이 그렇듯 평화복지국가는 한국사회의 사회·정 치·경제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정의되는 것으로 1960년대 이후 한국사회를 지배했던 (권위주의적) 반공개발국가의 대척점에 서있는 대안체제이다. 반공개발국가는 앞서 정의한 것과 같이 분단, 미국패권, 냉전체제라는 조건에서 국가안보를 이유로 반공 (反共)을 국시(國是)화하고, 이를 명분으로 노동계급과 시민의 민주적 기본권을 통제· 억압하는 (권위주의적) 지배연합이 자신들의 지배체제의 취약한 민주적 정당성을 재 벌중심의 경제개발과 미국의 직간접적 묵인과 지원을 통해 확보하려고 했던 국가였 다. 평화복지국가는 이러한 반공개발국가의 안티테제(antithesis)이다. 평화복지국가는 남북한의 극한대결을 조장하고, 한국사회 내부에서는 반대세력과 진 보적 정치세력을 탄압하며 민주주의를 무력화·형애(荊艾)화시키는 반공주의(반북주의) 의 존립근거인 한반도의 적대적 분단 상황과 동북아시아의 냉전적 대결상황을 평화 체제로 대체한다. 이를 통해 평화복지국가는 한국사회에서 실질적 민주주의를 심화시 키고, 양극화와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재벌중심의 신자유주의적 개발주의 성장방식을 지양하는 사회가 시장경제에 대한 통제권을 회복함으로써 성장의 결과가 공정히 분 배되는 복지체제이다. 물론 평화복지국가는 한국사회가 지향하는 최종목표가 아니다. 스웨덴 복지국가가 그랬던 것처럼 한국사회가 실현해야할 평화복지국가는 우리들의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잠정적 유토피아(Provisoriska utopie)가 되어야한다. 그렇기 때 문에 평화복지국가는 고정된 어떤 도그마를 주장하지 않는다. 평화복지국가의 모습은 국내외적 조건의 변화에 따라 유연하게 변화할 수 있는 그런 대안체제이다. 평화복지 국가가 우리가 꿈꾸어야하는 최종목적지가 될 수는 없지만 평화복지국가는 우리가 매 시기 직면하는 구조적 조건이라는 가능성의 한계 내에서 모든 시민들이 선택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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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의 대안이 될 수 있어야한다. 이를 위해 평화복지국가는 1945년 해방공간에서 해방된 민족의 절대다수가 지지했던 민주주의에 기반 한 사회주의, 즉 사회민주주의 의 전통을 21세기 한반도에 창조적으로 재건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평화복지국가인가? 우리는 그 이유를 이미 ‘반공개발국가의 기원, 궤적, 그리고 특성’에서 이미 검토했다. 반복하면 한반도에서 남북 간의 적대적 대결이 해 소되지 않는 한 한국사회 내에서 민주주의도, 복지국가도 완전할 수 없다. 첫째, 반 공주의(반북주의)는 단순히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것을 넘어 (권위주의) 정권에 반대 하는 정치세력과 진보세력을 억압하는 효과적인 수단으로 동원됨으로써 한국 복지국 가를 건설할 주체인 친복지 정치세력의 형성과 성장을 불가능하게 했기 때문이다. 실 제로 한반도 분단은 남한에서 사회민주주의로 대표되는 모든 좌파적, 진보적 이념과 그 결사체를 불법화하고 탄압하는 강력한 반공국가를 출현시켰다. 둘째, 평화복지국 가는 한국사회에서 복지국가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일국적 과제가 아닌 국제적 과제 라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세 차례에 걸친 북한의 핵실험은 한반도 평화문제가 더 이상 일국적 차원의 문제가 아닌 동북아시아와 세계적 차원의 안보문제로 확대되었 다는 것을 의미한다.19) 즉 한국사회에서 복지국가를 만들어가는 과제는 일국적 차원 을 넘어 한반도에서 냉전과 대립을 종식시키고, 평화를 확대하는 과정을 전제하지 않 고는 상상할 수 없다. 한반도에서 평화를 정착시키는 과제는 남북한의 대립은 물론 한반도를 둘러싸고 지 속되고 있는 한미일과 북중러 간의 냉전적 대립관계를 해소하는 것이다(구갑우, 2010; 김연철, 2013; 황지환, 2009).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1953년 이후 지속되고 있는 정전체제를 종식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현재는 1953년 전쟁당사국들 이 맺었던 정전협정이 지켜지고 있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정전협정의 틀도 해체된 상태이다. 2013년 3월 5일 북한이 정전협정의 백지화를 선언했다. 단지 서로에 대한 물리적 위협만이 공포의 균형 상태를 유지시키고 있다(김연철, 2013). 중장기적으로 한반도가 단일한 국가로 통일되어야하겠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최종목표이고 현실적 과제는 남북한을 둘러싼 적대적 대립관계를 해소하고, 현재 상태를 평화적으로 관리 할 수 있는 체계를 구축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정전협정을 종전협정으로 전환하는 것은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에서 남북한, 미중일러가 참여하는 동북아시아의 평화체제의 구축과 궁극적으로 통일이라는 최종목표에 다다르는 임시정거장이라고 할 수 있다. 종전협정은 한반도 남북 모두에서 서로를 적대시하는 논리와 이념의 정 당성을 약화시킴으로써 남북한 모두에서 분단으로 인한 이념적 제약에서 자유로운 19) 북한은 2006년 10월 9일 1차 핵실험을 강행했고, 계속해서 2009년 5월 25일 2차 핵실험, 2012년 2월 12일 3차
핵실험을 했다. 더욱이 북한은 2012년 4월 헌법 개정을 통해 헌법에 핵보유국이라는 사실을 명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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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적 정치활동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종전협정으로 조성된 평화적 여건은 한국사 회가 ‘반공주의(반북주의)’라는 냉전적 이념 구도에서 벗어나 국가가 시장의 이해를 사회적으로 통제하는 경제와 복지가 선순환 되는 복지체제를 만들어갈 수 있게 할 것이다.
3) 평화복지국가의 주체와 복지체제 그렇다면 누가 평화복지국가를 만들어갈 수 있을까? 한반도 평화구축이 그렇듯이 복 지국가를 만들어가는 과정 또한 철저하게 정치적인 과제이다. 그렇기 때문에 평화복 지국가를 만들어갈 주체가 형성되지 않는다면 평화복지국가는 단지 탁상공론에 불과 하다. 서구 복지국가의 경험에 비추어 보았을 때 복지국가는 어느 한 정치세력(예를 들어 노동계급)의 힘만으로 만들어진 체제가 아니다. 복지국가는 정치세력 간의 연대 (노동계급과 중간계급의 연대)의 산물이다. 문제는 그 주체와 연대세력이 누구인가이 다. 서구의 경험을 보면 노동계급이 복지국가의 주체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노동계 급이 당시 자본주의 체제에서 가장 고통 받고 불안정한 계급이었기 때문이다. 엄밀히 이야기해 노동계급이 의식적으로 복지국가의 주체가 되었기 보다는 자본주의 사회에 서 가장 취약한 계층이 자본주의의 모순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노동계급’이라는 정체 성을 구성하게 되고, 이렇게 구성된 노동계급이 자신들을 사회적 위험으로부터 지켜 내기 위해 중간계급과 연대해 복지국가를 구성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평화복지국가의 주체는 현재 한국사회에서 반세기가 넘게 지속된 분 단과 (권위주의적) 개발국가로 인해 가장 고통 받는 집단이다. 분단과 신자유주의화 로 인해 언론, 출판, 결사, 사상의 자유를 보장 받지 못하고, 생계의 위협에 내몰리고 있는 진보적, 자유주의적 지식인, 비정규직, 영세자영업자, 여성, 농민, 청년 등이 그 들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직면한 사회적 위험을 완화하기 위해 평화복지국가의 주체 가 되어야하는 당위성과 필요성은 존재한다. 그러나 문제는 이들은 권위주의에 대항 했던 민주화 투쟁을 제외하고는 자신들이 당면한 사회적 위험, 즉 생활의 문제를 해 결하기 위해 함께 싸워온 연대의 역사적 경험이 전무하다는 것이다. 평화복지국가를 만들어가는 과정은 바로 이들이 현실 생활문제에 대해 타협하고 연대해 반북개발국 가와 맞서는 연대의 경험을 만들어가는 역사적 과정이 될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하나의 주체로 구성된다는 것이 불가능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역사를 보면 노동계급 또한 처음부터 단일한 정체성을 가진 계급 이 아니었다. 19세기 말 이탈리아 토스카나에서는 대장장이, 벽돌공, 제화공 등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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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보면 자영업자들이 자신들을 노동계급이라고 선언했고, 영국에서는 술집주인, 서적판매인, 전문직업인, 수직공, 면방적공, 장인, 소마스터 등을 노동계급이라고 분 류했다(Sasson, 2014[2014]:66; Thompson, 1966: 610, 771; ). 중요한 것은 이토록 상이한 집단들이 노동계급이라는 단일한 정체성을 구성하고, 현실사회의 모순을 해소 하기 위해 조직화되고, 정치세력화 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를 밝히는 것이다. 현 실 자본주의로부터 고통 받고 있다는 당위만으로는 이들을 정체성을 공유한 정치적 세력으로 만들어 갈 수 없다. 당위를 실천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힘은 바로 현실보 다 더 나은 미래를 제시하는 ‘전망’이다. 서구의 역사적 경험을 보면 1860년대부터 1917년 러시아 혁명 이전까지는 마르크스주의가, 1917년 이후부터 1970년대까지는 사민주의가 노동계급의 정치적 실천을 위한 대안이념이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반북주의와 신자유주의적 개발국가로부터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지금보 다 더 나은 미래를 보여줄 실현가능한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 전망을 분단으로 비롯된 반공(반북)주의를 대신해 ‘한반도 평화’를, 경제성장 제일주의에 의 존하는 (신자유주의적) 개발국가를 대신해 복지국가를 한국사회에서 실현하는 ‘평화 복지국가’라고 주장한다.
4. 정리 및 함의 본 연구는 한국사회에서 복지국가의 확장을 가로막는 반공개발국가를 대신할 대안체 제로 평화복지국가가 갖는 의미를 검토했다. 이를 통해 우리는 한반도와 동북아시아 에서의 대립과 갈등을 허무는 평화의 과정과 경제성장제일주의에 기반 한 신자유주 의적 개발국가를 대신해 복지국가를 확장하는 과정이 분리된 과정이 아닌 공진의 과 정임을 살펴보았다. 권위주의는 반공주의와 결합하면서 한국사회에서 복지국가의 주 체세력을 괴멸시키는 가공할 위력을 발휘했다. 또한 권위주의는 개발국가와 결합하면 서 경제성장을 통해 절대빈곤에서 벗어나려는 시민의 욕구에 조응함으로써 국가복지 의 확대를 가로막았다. 몇 가지 주목할 만한 사실도 확인했다. 서구 복지국가들과 달 리 한국에서 좌파의 정치세력화가 어려웠던 이유는 단지 분단상황에서 권위주의 체 제가 좌파세력을 탄압했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권위주의 체제가 좌파세력을 억압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한국역사에서 좌파가 형성되는 역사적 특수성에 기인한다. 서구사 회에서 복지국가를 탄생시켰던 사민주의는 1917년 러시아 혁명을 계기로 혁명적 사 회주의와 결별했다. 사회주의가 사민주의와 공산주의로 분기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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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이러한 경험을 갖지 못했다. 1945년 해방공간에서 다수의 조선인민들이 민주 주의와 사회주의를 지지했지만 곧이어 닥친 냉전은 한국사회에서 사민주의가 존립할 수 있는 정치적 공간을 제거했다. 더욱이 민중들의 사민주의에 대한 열정은 한국전쟁 을 거치면서 모든 좌파이념에 반대하는 반공주의화 되었다. 권위주의적 반공주의로 인한 취약한 정치적 정당성은 개발국가를 통해 보완되었다. 경제성장과 안보가 모든 것에 우선하는 사회가 되었다. “반공”과 “개발”은 그야말로 그 어떤 현실 정치세력도 거스를 수 없는 초월적 이념이 되었다. 내외적 조건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반공주의는 반북주의로, 권위주의적 개발국가는 신 자유주의적 개발국가가 되어 2015년 현재 한국사회에서 여전히 막강한 위력을 발휘 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신자유주의적 반북개발국가는 한국사회가 직면한 사회적 위험을 해소하기는커녕 점점 더 악화시키고 있다. 더 나아가 신자유주의적 반북개발 국가는 과거 권위주의적 반공개발국가처럼 신자유주의적 반북개발국가를 반대하는 국민과 정치세력에 대한 물리적 탄압을 주저하지 않고 있다. 더욱이 민주주의를 유보 하는 대신 소득 불평등과 절대빈곤을 완화시켰던 권위주의적 반공개발국가의 기능조 차 신자유주의적 반북개발국가에서는 작동하지 않고 있다. 평화복지국가는 이러한 한국사회의 위기를 해소하기 위한 대안체제로 제기된 것이다. 평화복지국가는 반공(반북)주의를 대신해 평화를, 신자유주의적 개발국가를 대신해 보편적 복지국가를 현재 한국사회가 직면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체제로 제기 하는 것이다. 앞서 검토했던 것처럼 우리는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에서 적대적 대립이 평화적 관계로 해소되지 않는 한 한국사회의 민주주의와 복지국가는 불완전한 상태 에 머무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제 한국사회의 과제는 평화복지국가를 만들어갈 주체를 구성하는 것이다. 주체는 현재 한국사회에서 반북주의와 신자유주의적 개발주 의로 가장 고통 받는 비정규직, 영세자영업자, 여성, 청년, 농민, 진보적 지식인이다. 조직노동이 평화복지국가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담당할 수 있을지는 유 보적이다. 복지국가의 전통적 주체였던 대기업 중심의 조직노동이 평화복지국가를 만 들어갈 주체가 될지 아니면 주체의 연대의 대상이 될지는 현재로서는 판단하기 어렵 다. 판단하기 어렵다기 보다는 현 상태에서는 대기업 노동자들이 평화복지국가를 만 들어갈 주체가 될 가능성은 높아 보이지 않는다. 조직노동을 주체가 아닌 연대의 대 상으로 설정하는 것은 서구의 경험에 비추어보면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 나 서구의 경험이 우리에게 주는 함의는 특정계급이 주체가 되어야한다는 고정된 경 험이 아니다. 상대적으로 안정적 고용, 소득, 기업복지를 보장 받는 조직노동에게 국 가복지를 확대하는 것은 그리 매력적인 대안이 아니다. 이러한 현실에 근거했을 때 서구의 경험이 우리에게 주는 함의는 “주체”는 그 시대의 역사적 맥락에 따라 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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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조직노동은 서구에서 중간계급이 했던 (연대의 대상이라 는) 역할을 한국사회에서 수행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이들 주체에 의해 만들어질 평화복지국가는 주체들이 직면하는 사회위험에 대응하는 복지체제가 되어야한다. 평화복지국가는 중장기적으로 공공부문에서 좋은 일자리를 확대함으로써 이들에게 안정적 일을 보장해 주어야한다. 하지만 안정된 일은 단기간 에 성취될 수 있는 과제가 아니다. 평화복지국가는 시민들의 노동시장 지위와 관계없 이 시민들의 기본생활을 보편적으로 보장하는 제도를 확대하는 복지체제가 되어야한 다. 기여금에 기반 한 사회보험을 폐기하지는 않겠지만 대부분의 비정규직, 영세자영 업자, 청년, 농민, 여성들이 전통적 사회보험으로부터 배제되고 있는 상황에서 기여 금에 기반 한 사회보험을 평화복지국가의 분배제도의 근간으로 둘 수는 없다. 평화복 지국가의 근간은 기여와 관계없이 시민권에 기반 해 생활(소득과 사회서비스)이 보장 되는 사회적 분배중심의 복지체제를 구축해야한다. 사회보험의 강화는 평화복지국가 를 만들어갈 주체의 연대세력인 정규직 중심의 조직노동의 이해를 보장하는 정책으 로 배치될 수 있다. 평화복지국가는 시민의 기본생활을 보장하는 것을 전제로 각자의 성취에 따라 급여를 차등적으로 보장하는 복지체제로 구축될 필요가 있다. 한국사회 가 반드시 서구사회가 걸어갔던 복지국가의 길을 걸어가야 할 이유도 당위도 없다. 모든 사회는 분배체계와 함께 존속될 수 있고, 최선의 분배체계는 그 사회가 직면한 역사적 현실에 근거해 구성되는 것이다. 평화복지국가는 분단과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세계체계에서 한국사회가 만들어갈 역사적 분배체계이자 1945년 해방공간에서 우리 민족이 꿈꾸었던 사민주의를 이 땅에 실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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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제 3
탈식민·탈패권·탈분단의 한반도 평화체제
구갑우 /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
1. 문제설정 1953년 7월 한반도에 정전체제가 수립된 이후, 정전체제를 대체하는 평화체제의 건 설은 잠재적 또는 명시적 의제 가운데 하나였다. 정전협정(Armistice Agreement) 제4 조 60항에는,1) “한반도문제(Korean question)의 평화적 해결을 보장하기 위하여 쌍 방 군사령관은 쌍방의 관계 각국 정부에 정전협정이 조인되고 효력을 발생한 후 3개 월 내에 각기 대표를 파견하여 쌍방의 한 급 높은 정치회담을 소집하고 한반도로부 터의 모든 외국군대의 철수 및 한국문제의 평화적 해결 등의 문제들을 합의할 것을 이에 건의한다”고 규정되어 있다. 이 항에 의거하여, 1954년 4월-6월 남북한과 미 국, 중국, 소련 그리고 한국전쟁 참여국 등 19개국이 참여한 제네바 정치회담이 열리 기도 했다. 이 회담의 의제는, ‘외국군대의 철수’와 ‘한반도문제의 평화적 해결’이었 다. 그러나 제네바 정치회담에서는, 예측되었던 것처럼, 두 의제에 대한 어떠한 합의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남북한에 주둔하고 있는 외국군 문제와 통일방식 - 남한의 유엔 1) "Agreement between the Supreme Commands of the Korea People's Army and the Command of the Chinese People's Volunteers, on the one hand, and the Commander-in-Chief, United Nations Command, on the other hand, Concerning a Military Armistice in Korea"(“국제연합군 총사령관을 일방으로 하고 조선인민
군 최고사령관 및 중국인민지원군 사령원을 다른 일방으로 하는 한국 군사정전에 관한 협정,” 1953년 7월 27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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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시 인구비례 총선거 대 북한의 중립국 감시 지역비례 총선거 - 을 둘러싼 말의 공 방이 회담의 주요 내용이었다. 북한은 제네바 정치회담에서 남북한의 군대를 평화상 태로 전환시키기 위한 남북협정을 제안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제안은 평화체제의 한 구성요소인 평화협정을 체결하자는 것은 아니었다. 정전의 공고화를 통해 평화의 실 질적 조건 - 남북한의 불가침, 군축, 미군철수 - 을 마련하자는 것이 핵심 내용이었 다. 1958년 중공군이 북한에서 철수한 상황에서, 북한은 1960년대에 들어서 이 주장 을 반복했고, 1970년 조선로동당 제5차 대회에서는 선(先) 미군철수, 후(後) 남북협 정으로 자신의 입장을 정식화했다(김일성, 1971). 남북관계에서 정전협정을 대체하는 남북한의 평화협정은, 1972년 1월 김일성이 일본 요미우리신문 기자와 대담하는 과정에서 처음으로 제기되었다. 평화협정의 체결을 통 해 한국전쟁을 종결하면, 주한미군의 주둔을 위한 명분이 없어진다고 판단했던 것처 럼 보인다. 선 평화협정, 후 주한미군 철수로 정리할 수 있는 북한의 제안에 대해, 1974년 1월 남한의 박정희정부는 남한의 군사력을 무력화하려는 시도라도 평가하면 서 공식적으로 거부했다. 그리고 북한에 대해 남북 불가침협정을 역제안하기도 했다. 북한은 1974년 3월 최고인민회의에서 평화협정의 주체를 남북한에서 북한과 미국으 로 변경했다. 미군철수와 평화협정을 연계했던 북한이 미군철수를 미국에 제안하면서 평화협정의 당사자가 바뀐 것이다.2) 1970년대 이후 평화협정을 포함한 한반도 평화체제는 북한이 선점한 의제였다. 남한 정부는 서울올림픽 직후인 1988년 10월 노태우대통령의 제43차 유엔총회 연설 “한반도에 화해와 통일을 여는 길” - 을 통해 처음으로 정전체제를 ‘항구적 평화체 제’로 전환하는 문제를 공식 의제화했다.3) 노태우정부는 1991년 남북한의 유엔가입 과 더불어 남북한을 당사자로 하는 평화협정 체결을 다시금 제안하기도 했다. 남한의 ‘민주화’로 1960년대 4·19혁명 직후처럼 한반도문제가 국내정치의 의제로 상정되면서 정부가 한반도 평화체제를 언급할 수 있는 국내적 계기가 마련되었다면(Koo, 2011), 냉전체제의 한 극인 소련의 붕괴로 발생한 ‘탈냉전’은 국제적 계기였다. 냉전체제의 비대칭적 해체로 한반도 힘의 균형에서 우위를 점한 상태에서 남한정부는 한반도 평 화체제를 의제화할 수 있었다. 남북한 모두 한반도 평화체제를 의제화했지만, 제네바 정치회담부터 제기된 두 쟁점 2) 남북의 제안과 역제안은, 김일성(1973); 박정희(1975); 허담(1988) 등을 참조. 북한 최고인회의 제5기 재차회의에
서는 북미 평화협정을 요구하는 “미합중국 국회에 보내는 편지”가 채택되기도 했다. 북한은 1973년 1월 미국베트남 전쟁이 파리평화협정으로 종료되자 이에 고무되어 평화협정의 주체를 변경했다는 해석이 있다. 이 협 정에서는 미국, 북베트남, 남베트남, 남베트남 해방전선 등이 참여했지만 실질적으로는 미국과 북베트남이 당 사자 역할을 했다. 이 해석은, 장달중 외(2011, 248) 참조. 3) 한국 대통령 최초의 유엔총회 연설이었다. 원문은, 허문영 외(2007)에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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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군철수와 평화협정의 당사자 - 의 해결은 지난한 과제였다. 1990년대 중후반에 개최된 남북한, 미국, 중국의 4자회담에서도 한반도 평화체제와 관련된 이 두 쟁점은 반복되었다. 4자회담 이후 2003년부터 개최된 북한 핵문제의 해결을 위한 6자회담에 서 한반도 평화체제는 다시금 의제로 상정되었다. 2005년 9․19공동성명에서는 한반 도 비핵화와 함께 한반도 평화체제의 구축을 위한 다자회담이 동시 의제화되기도 했 다. 그러나 한반도 평화체제의 형태와 내용 그리고 평화체제에 이르는 과정을 둘러싼 남북한과 관련국가들 그리고 시민사회의 동상이몽(同床異夢)은 지속되고 있다. 이 글은 탈식민․탈패권․탈분단의 시각에서, 민주화와 탈냉전시대에 등장한 한반도 평 화체제라는 의제의 역사와 쟁점을 검토한다. 탈식민․탈패권․탈분단은 세계사적 맥락에 서 동시에 한반도적 맥락에서 국제관계의 진보를 지향하는 담론이다. 이 진보적 지향 은 현실에 근거하고 있다. 힘의 균형 또는 힘의 우위에 기초한 평화가 아니라 협정 을 포함한 다양한 제도의 건설을 통해 평화를 추구하는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이, 다 양한 정치사회세력들에게 지속가능한 평화와 통일을 위해 필요한 정책대안일 수 있 기 때문이다. 흡수통일이든 국가연합을 통한 단계적 통일이든 통일이 권력게임임을 고려할 때, 정전체제에서 통일로 직접 이행하는 경로가 아니라 정전체제의 다음 단계 로 평화체제를 설정하는 것은, 평화적 방법에 의한 평화를 추구하는 규범적, 현실적 경로일 수 있다. 또한 한반도 평화체제는, 정전체제와 통일이 야기하는 갈등의 실재 를 인정하고 그 갈등의 전환(transformation)을 시도하려는 접근이기도 하다.
2. 탈식민·탈패권·탈분단의 평화체제: 이론적 논의
2-1. 탈식민· 탈패권· 탈분단의 담론4) 탈식민주의(postcolonialism)는 식민현상의 역사와 유산을 피식민인의 시각에서 분석 하고 비판하는 담론과 이론을 포괄하는 개념이다(Brydon, 2000). 제국주의와 식민주 의란 개념이 중심부 국가들에 대한 비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탈식민주의는 그 초점과 비판을 탈식민국가의 식민성으로 이동시키고자 한다. 그러나 탈식민 이후에도 식민현상이 계속되고 있다면, 신식민주의(neocolonialism)가 보다 적절한 개념일 수 있다. 예를 들어, 가나의 은쿠루마(Kwame Nkrumah)는 1965년 신식민주의: 제국 4) 이 부분은, 구갑우(2012, 192-198)의 수정보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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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의 마지막 단계에서 신식민주의는 식민주의의 미국적 단계, 즉 식민지 없는 제 국을 표상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신식민주의는 다른 수단에 의한 전통적 식민지배의 연속, 즉 제국주의의 연장에 기초하고 있는 개념이다(Young, 2001: 46-49). 따라서 탈식민주의 개념이 정당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신식민주의 개념과 차별성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이 차별성은, ‘초국적 사회정의’(transnational social justice)를 향한 정치적 이상으로 표현되기도 한다(Young, 2001: 57-58). 탈식민주의는 비영토적 제국주의적 패권의 유지 및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의 역사를 비판하면서, 동시에 운동적 개입 및 새로운 정치적 정체성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신식민주의와 차이를 가지는 개념으로 정의된 다. 즉 탈식민주의는 탈제국주의 및 탈패권을 지향하지만,5) 세계체제 또는 국제체제 로부터의 단절이 아니라 초국적 사회정의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다양한 개념의 앞에 놓인 ‘탈’(post)이란 접두사는 비판적 분석과 실천의 새로운 형태와 전략 의 도입을 표현하는 역사적 계기를 의미하는 것으로 규정된다.6) 즉, 특정한 정치적 입장에서의 정의이기는 하지만, 탈식민주의의 개념은 식민현상에 대한 비판적 분석과 실천을 넘어 행위자의 적극적 개입을 가능하게 하는 인식론적 원천까지를 포괄하고 있다. 구래의 개념보다 탈식민주의를 옹호하는 정당화의 논리다. 그러나 탈식민주의의 수용자에게는 postcolonialism의 번역 자체가 논란의 대상이다. 번역은 수입된 개념의 수용과 변용의 과정이다. 변용은 보다 정확히 이야기한다면, 자국의 전통에 의한 외래문화의 변용이다(마루야마 마사오·가토 슈이치, 2000).7) 특 히 쟁점이 되는 것은, 식민주의 앞에 붙어 있는 접두사 post다. 포스트는, ‘이 후’(after)일 수도 있고, ‘넘어서’(beyond)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후’라면 탈식민주 의는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적 패권질서의 유산과 연속을 의미하고, 반면 ‘넘어서’라면 식민주의와 패권적 질서의 해체와 극복을 의미한다. 이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 한글로 5) 패권(hegemony)의 개념과 패권에 대한 순기능적·역기능적·절충적 해석들에 대해서는, 백창재(2009, 81-130) 참
조. 6) Young(2001: 4-5)은 탈식민주의를 ‘트리콘티넨탈리즘’(tricontinentalism)으로 표현하는 것이 보다 적절하다고 말
하고 있다. 그에게 탈식민주의의 실천적 기원은, 1966년 쿠바의 아바나에서 개최된 아프리카, 아시아, 라틴아메 리카 인민연대기구의 첫 번째 회의다. 영은 반맑스주의적이고 위계의 사다리의 밑을 지칭하는 것처럼 보이는 제3세계라는 표현 대신에, 세 대륙을 지칭하는 three continents 또는 tricontinental이란 표현을 선호하고 있다. 7) 고부응(2003)은 탈식민주의를 수입이론으로 본다. 그 책의 필자구성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한국에서의 탈식
민주의 연구는 주로 문학연구자와 역사학자 등 인문학 연구자들이 중심이다. 탈식민주의 논의를 사회과학 영 역으로 확장할 때, 탈식민주의 담론은 한반도의 분단, 두 국가의 형성, 두 국가의 발전과정, 그리고 현재 등을 해석하는 틀로 기능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주체’를 내세운 북한에 대한 탈식민주의적 시각에서의 연구는 매우 역설적인 결과를 발견하게 할 수도 있다. 김일성은 1967년 8월 탈식민주의 잡지 Tricontinental에 “반제반 미투쟁을 강화하자”는 논설을 발표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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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콜로니얼리즘으로 쓰기도 한다. 번역이 불가능하다는 의사일 것이다.8) 번역뿐만 아니라 탈식민주의 개념의 모호성 때문에 이 개념의 도입에 문제를 제기하 기도 한다(이경원, 2011). 첫째, 이 개념을 통해 식민지 이전과 이후를 구분하는 것 이 서구중심주의적이라는 비판이다. 둘째, 탈식민주의란 개념이 탈식민시대에도 재생 산되고 있는 서구와의 경제적 격차를 은폐하는 도구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셋 째, 탈식민주의란 개념이 서구에서만 통용될 뿐, 식민적 현실을 경험하고 있는 지역 에서는 생소하다는 것이 이 개념의 도입을 비판하는 또 다른 이유다. 서구에서 서구 란 주체를 스스로 해체하고자 했던 탈구조주의(poststructuralism)를 서구의 밖으로 확장하여 중심과 주변의 인식론적 자리바꿈을 시도하는 전형적인 서구적 상품이라는 것이다. 이 비판들에도 불구하고 탈식민주의가 의미를 가진다면, 현실의 패권질서와 식민성의 극복을 위한 이론적, 실천적 담론으로 기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구래의 개념과 달 리, 식민주의의 역사적 맥락은 물론 지구화라는 정치적 맥락을 동시에 고려하면서 탈 식민·탈패권의 대안을 모색하고 있기 때문이다. 1960년대 말 1970년대 초반에 사용 되기 시작한 탈식민이 1980년대에 제도적 공고화를 획득한 것도 지구화라는 맥락에 대한 고려가 작용했기 때문일 것이다(Brydon, 2000). 탈식민주의의 기원이 가까운 과거인 이유는, 탈식민주의가 “민족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사이에 생겨난 혼종”일 수 있지만(이경원, 2003: 44), 동시에 또는 ‘특히’, 민족주의가 설정하고 있는 우리와 그 들의 이항대립을 넘어서려는 담론이라는 사실과도 연관되어 있다. 탈식민주의 담론의 주창자들도 민족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의 간극만큼이나 다양한 지향을 보이고 있다. 민족주의를 탈식민화를 위한 장치로 생각하는 이들은, “민족주 의가 이론적으로는 ‘구식’이라고 해도, 그것은 여전히 동시대 포스트식민성의 혁명적 아카이브를 구성한다고” 말할 정도다(Gandi, 2000: 142). 그러나 식민주의 앞에 붙 은 접두사 포스트가 포스트모더니즘이나 포스트구조주의처럼 거대담론과 이항대립의 지양을 의도한다고 할 때, 민족주의란 대안을 선택한다면 탈식민주의란 새로운 개념 을 도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민족주의는, 서구를 문명으로 동양을 야만으로 인식 하는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에 대해 같은 이항대립의 논리구조를 가진 옥시덴탈리 즘(occidentalism)으로 맞서게 한다. 오리엔탈리즘의 극복은(강상중, 1997), 즉 탈패권 을 포함하는 탈식민의 과제는, 이항대립의 한 축인 열등한 쪽에 설 때 그 열등한 주 8) Gandi(2000)를 번역한 이영욱은, postcolonialism을 ‘포스트식민주의’로 변용한다. 명분은, “‘포스트’가 ‘탈’의 의
미보다는 식민 이후의 정황을 그 자체로 지시하는 중립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decolonization’의 ‘de’가 갖는 ‘탈’의 의미와 ‘포스트’를 구분해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또 다른 번역의
명분을 덧붙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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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들을 재현할 수 있다거나 또는 특정한 시각만이 그 주체가 말할 수 있게 한다는 배타주의를 넘어설 때, 새로운 지평을 가지게 된다. 그렇지 않을 때, 우리는 제국주 의 대 민족주의와 같은 ‘힘의 정치’(power politics)만을 생각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 다.
2-2. 탈분단의 평화체제 탈식민주의적 시각에서 볼 때, 한반도의 사회적 장벽(social partition)과 분단은 전형 적인 식민적, 패권적 유산이다. 독일의 경우는 다르지만 한반도를 포함하여 베트남이 나 예멘 그리고 아일랜드섬 등은 식민지의 결과로 분단을 경험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이들 분단국가들은 식민지시대 이전에는 하나의 국가를 유지하였으나 식민지 경험 이후 패권적 질서 때문에 원래의 국가로 회귀되지 못하고 두 개의 독립적 국가 로 나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분단으로 성립된 두 개의 국가는 서로 다른 이 념과 전략을 가지고 독자적으로 발전을 추구하면서도 하나의 국가를 지향하는 과정 에서, 심각한 갈등을 겪게 되며 이 갈등의 중심에 식민적 유산인 사회적 장벽이 존 재한다고 할 수 있다. 사회적 장벽은, 과거 행정적으로 하나의 단일한 실체였지만 패권적 질서가 지속되는 탈식민시대에도 두 개 또는 그 이상의 새로운 국가들로 분할되고 새로운 개체 가운 데
적어도
하나가
이전의
국가와의
직접적인
연계를
주장하면서
형성된다
(Waterman, 1989: 117-32). 그 연계는 분리된 행정단위의 영토에 대한 독점적인 합법적 계승자임을 그 영토에 대해 헌법적 지위를 표현하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따라서 사회적 장벽은 민족적 정체성이 작동하는 공간적 범위의 문제를 야기하게 된 다(Cleary, 2002: 20). 민족적 정체성은 통일을 가정하고 분단된 국가들 모두에 적용 될 수도 있고, 또는 특정 분단국가 내부에서만 작동할 수도 있다. 정상적 국민국가와 달리, 민족주의가 사회적 장벽을 야기한 외부적 요인인 패권국가에 대한 저항을 담은 진보적 이념으로 기능하면서 정치사회세력을 호명하곤 하는 이유도 사회적 장벽으로 설명 가능하다. 현실과 담론으로서 탈식민주의는, 한반도 분단의 재해석 및 분단의 극복과 관련하여 새로운 상상력을 가능하게 한다. 예를 들어, 강한 민족주의적 전통을 가지고 있는 아 일랜드섬에서는, 영국의 아일랜드섬 지배와 이에 대한 아일랜드인의 저항이라는 악과 선의 이항대립을 비판하는 수정주의 역사학의 등장 이후, 논쟁과정에서 탈식민이론을 도입한 역사서술이 시도되고 있다(박지향, 2008). 한국에서도 ‘식민지 근대’라는 개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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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도입을 통해 이 이항대립을 넘어서는 역사서술을 모색하기도 한다. 식민지 근대 는, 식민지를 근대의 전형으로 바라보지만 근대를 비판적으로 재해석하려 한다는 점 에서 탈근대적 개념화의 시도다(윤해동, 2007). 다시 반복하지만, 탈식민주의는 제국 주의 대 민족주의라는 이항대립을 넘어서려는 담론이다. 한반도의 탈식민적 분단에 담겨 있는, ‘이후’와 ‘넘어서’의 긴장은, 탈식민적 분단의 극복을 통일이 아닌 ‘탈분단’으로 개념화할 수 있게 한다. 탈분단은, 북한을 타자화 또는 도구화하는 태도를 비판하고 또한 폐쇄적 민족주의에 기초한 통일을 반대하면 서도 분단의 부정적 효과를 극복하자는 담론이다(조한혜정·이우영, 2000). 즉 탈분단 의 담론은 사회적 장벽이 야기하는 갈등의 전환을 위해 민족주의에 의존하지 않으려 한다. 우리와 그들의 이항대립을 생산하는 민족주의로는 그들을 배제할 가능성이 높 기 때문이다. 즉, 탈분단은 갈등행위자들이 갈등의 전환(transformation)을 위해 미래 의 기억을 공유하며 공존을 추구하는 평화과정이다. 탈분단적 평화과정의 한 구성요소가 평화의 제도화인 ‘평화체제’다. 한국어 평화체제 는 영어로 peace regime 또는 peace system으로 번역될 수 있다. 한반도 핵문제 해 결을 위한 6자회담에서는 peace regime이란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평화는 하나의 번역어가 존재하지만, 체제에는 두 가지 다른 번역어가 있다. 그리고 두 개념, 평화 와 체제의 정의를 둘러싸고도 남북 및 주변국가는 물론 남한 내부에도 서로 다른 의 견이 경쟁하고 있다. 정전체제를 대체하는 평화체제를 의제화할 때 그것이 peace regime이든 peace system이든, 평화는 전쟁이 없는 상태인 ‘소극적 평화’를 넘어서는 개념이 될 수밖에 없다. 반면, regime과 system은 국제관계이론의 맥락에서 상이한 개념이다. regime은, 행위자들 사이의 규칙, 기대, 처방의 틀을 지칭하고, 분명하게 정의된 이슈 영역(issue area) 안에서 작동한다(Krasner, 1983). 반면, system은 일반적으로 개별행 위자들이 고려해야 하는 구조의 개념과 연관되어 있다. 두 개념 모두 행위자에게 부 과되는 구조적 제약을 담고 있지만, system은 regime보다 포괄적 개념이다. 따라서 peace system은 peace regime을 구성요소로 하면서 공동의 인식과 상호성의 원칙에 기초하여 협력적 관계를 수립한 상태로 정의될 수 있다. 그러나 유념해야 할 것은, 평화는 regime 또는 system이 형성되기 어려운 정치적으로 가장 논쟁적인 이슈영역 이라는 점이다. 기능주의(functionalism) 이론가 미트라니(D. Mitrany, 1943)가 지적하고 있는 것처 럼, 일하는 평화(working peace)는 보호되는 평화와는 대조적 개념이다. 평화에 대한 기능주의적 접근은 공동의 필요를 제공하는 것이 국경을 가로질러 사람들을 통합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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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있다는 단순한 명제에 기초하고 있다. 즉 기능주의적 접근은 연방주의적 (federalist) 접근과 달리 기능이 형태에 우선한다고 주장한다. 한반도에서 대북화해협 력정책으로 명명된 기능주의적 접근은, 이명박정부 등장 이후 중단된 상태다. 기능주 의적 접근이 정치군사적 영역으로의 침투확산(spill-over)의 효과를 산출하지는 못했 다. 따라서 형태가 기능에 우선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이 견해에 따르 면, 평화의 제도화를 의미하는 peace regime은 한반도에서 기능주의적 협력을 촉진 할 수도 있다. 한반도 핵문제의 해결을 위한 6자회담의 9·19공동성명은, 비핵화가 peace regime과 함께 가는 과정을 제안한 바 있다. 물론 평화체제가 반드시 지속가능한(sustainable) 평화를 산출하는 것은 아니다. 정전 체제가 한반도에서 전쟁의 재발을 막기 위한 유효한 장치일 수 있다. 정전체제의 폐 기가 한반도를 새로운 혼란에 빠뜨릴 수 있는 판도라의 상자가 될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이근욱, 2007). 한반도문제의 당사자들 사이에 신뢰구축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평화체제는 기능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평화조약을 포함한 평화의 제도화는 한반도에서 지속가능한 평화에 기여할 가능성이 높다. 제도가 주는 제약은 행위자들 이 과거의 선택으로 회귀하는 것을 억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전체제가 약한 의미 의 평화체제(peace regime) 또는 기능주의적 협력을 포함한 강한 의미의 평화체제 (peace system)로 전환되는 것은, 한반도의 갈등행위자들이 미래의 기억을 공유하면 서 공존과 공생의 단계에 접어들었음을 의미한다.
3. 탈냉전·민주화와 한반도 평화체제9) 1987년 6월 한국의 민주혁명은, 국가권력으로부터 자율적 행동의 영역으로서 시민사 회를 재발견하게 한 계기였다. 1987년 민주혁명의 의도하지 않은 효과는 한국사회에 서 정치적, 경제적 자유주의의 확산이었다. 다른 한편 1987년 6월항쟁은, 냉전체제의 해체에 앞서서 그리고 분단체제의 이완이 발생하기는 했지만 냉전적 분단체제가 지 속되는 상황에서 일어난 민주혁명이었다. 1987년 민주혁명은 권위주의적인 냉전적 산업화세력과 민주화세력 사이의 힘의 균형으로 귀결되었지만, 그 변화조차도 냉전적 분단체제의 지각변동을 야기할 수 있는 동력이었다(김종엽, 2009). 1987년 6월을 계 기로 발생한 지배세력의 재편은, 지배세력 내부에서 분단체제의 극복에 기여할 수 있 는 새로운 세력의 발생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9) 3장과 4장은, 평화체제의 시각에서 구갑우(2008) 14장의 내용을 재정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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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한의 공식대화는 중단되고 비밀대화의 끈은 유지된 상태에서,10) 군사독재정권의 유산을 간직하고 있었지만 첫 민주정부였던 노태우정부가 출범한 이후, 남한의 시민 사회는 한반도 분단체제의 지각변동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주목되 는 것이, 1989년 2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발표한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이다(이만열, 2001). 이 선언은, 1972년 7․4남북공동성명의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정신을 재확인하고, “통일이 민족이나 국가의 공동선과 이익을 실현하는 것일 뿐 아니라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을 최대한 보장하는 것이어야 한다” 는 원칙을 제시하면서, 남북정부에 대해 5가지 사항의 건의 - 분단으로 인한 상처의 치유, 분단극복을 위한 국민의 참여, 사상․이념․제도를 초월한 민족적 대단결, 남북한 긴장완화와 평화증진, 민족 자주성의 실현 - 를 담았다. 이 선언에는 당시로서는 상 상하기 힘든, 휴전협정의 평화협정으로의 전환, 남북불가침조약, 주한미군의 철수, 유 엔군 사령부의 해체, 군축, 한반도 핵무기의 철거 등의 군사적 문제와 관련된 내용을 담고 있었다. 남북의 화해와 협력 그리고 올림픽 공동개최를 요구하는 시민사회의 평화·통일운동에 대해 노태우정부는 ‘창구단일화’ 논리로 맞섰다.11) 그리고 1988년 7월 7일의 “민족 자존과 통일 번영을 위한 특별선언(7·7선언)”으로 대응했다.12) 남북의 ‘평화공존’을 지향하는 7·7선언의 주요 내용은, 자유왕래, 이산가족의 교류, 남북교역의 민족내부교 역으로의 인정, 민족경제의 균형적 발전, 남북의 협력외교와 민족의 공동이익 추구, 주변 4강의 남북한에 대한 교차승인 등이었다. 이 선언에는 평화적 방법에 의한 평 화를 추구하는 자유주의적 대북정책의 골간이 담겨 있었다. 이 선언의 출현은, 민주 화의 효과로 지배세력 내부에 탈냉전적 보수세력이 형성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 었다. 북한과의 적대와 경쟁의 지속을 원하는 냉전적 보수세력과 달리 탈냉전적 보수 세력은, 북한에 대한 포용 또는 관여(engagement)를 시도하고자 했다. 노태우정부의 포용정책은, 부분적으로는, 북한은 물론 사회주의국가라는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게 할 수 있는 경제적 논리에 의해 뒷받침될 수 있었다. 정치공학적 측면에서 보면, 7·7 선언은 임박한 올림픽에 사회주의국가들의 참여를 유인하는 효과를 가질 수 있었다. 10) 1988년으로 예정된 서울올림픽 공동개최의 문제를 둘러싸고 1984년부터 남북한의 공식대화와 비밀대화가 재
개되었다. 공식대화가 중단된 상태에서도 남한의 박철언과 북한의 한시해를 대표로 하는 비밀대화는 지속되고 있었다(Koo 2009: 63-74). 11) 그러나 시민사회에는, “창구일원화를 가급적 거부하는 훈련”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었다(백낙청 2007: 372). 1989년에는 국가보안법에서 반국가단체로 규정하고 있는 북한을 방문하는 시민사회 인사들의 방북
이 이어졌다. 소설가 황석영, 문익환목사,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의 임수경대표 등이 그들이다. 민주화 이후 폭발적으로 나타났던 한국 시민사회의 통일운동에 대해서는, Koo(2011) 참조. 12) 시민사회의 제안이 7·7선언의 등장에 기여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임동원(200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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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10월 노태우대통령은, 유엔총회 연설에서 한반도 평화체제의 구축을 남한정 부로서는 처음으로 의제화했다. 또한 남북과 미일중소가 참여하는 ‘6개국 동북아평화 협의회’를 제안하기도 했다. 1989년 9월 발표한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에서는 남북 한이 공존·공영을 통해 연합을 거쳐 완전한 통일국가로 가는 경로가 제시되었다. 「남 북교류협력에관한법률」과 「남북협력기금법」은 이 경로를 담보하는 법적, 재정적 장치 였다. 남한의 이 제안들은, 비밀대화의 선을 통해 북한에 전달되고 있었다. 비밀회담 의 대표였던 박철언이 회고하는 것처럼, 노태우정부의 전향적인 대북제안에 대해, “친미 일변도의 시각과 극우 보수주의 측”에서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았다고 한다(박 철언, 2005). 대북정책을 둘러싸고 지배세력이 분열할 가능성이 높았다고 할 수 있 다. 지배세력 내부에서의 갈등과 협력은, 국가와 시민사회의 갈등과 협력만큼이나 대 북정책의 향방을 결정할 주요 변수였다. 1988년이 “가장 긴장하고 복잡한 시기”가 될 것이라는 “깊은 우려를” 표명했던 북한 은 7·7선언을 “영구분렬안”이라고 비판했다. 그리고 노태우정부의 자유주의적 대북정 책에 대해 북한은 1990년 5월 최고인민회의에서 다섯 개의 방침으로 대응했다.13) 주 요 내용은, 남북의 불가침선언과 ‘북미평화협정’, 남한의 시민사회세력이 포함된 자유 왕래와 전면개방, 남북의 협력외교, 전민족적인 남북대화, 전민족적인 통일전선의 형 성 등이었다. 탈냉전시대의 정세와 힘관계를 고려할 때, 북한의 선택은 ‘체제보위’에 맞추어질 수밖에 없었다. 북한은, 하나의 국가 하나의 제도로 통일하자는 한민족공동 체 통일방안이 흡수통일을 하자는 것이라고 비판하면서, 하나의 국가, 두 개의 제도, 두 개의 정부가 상당 기간 공존하면서 남북쌍방대표의 동수로 민족통일기구를 구성 하는 방식으로 권력을 대칭적으로 배분하는 통일의 형태인 ‘느슨한 연방제’를 정초하 기도 했다.14) 북한은 담론으로는 두 개의 ‘조선’정책에는 반대하면서, 실제로는 지역 정부가 상당 기간 공존을 하는 연방국가를 지향하고자 했다.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 남북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국제적 변수인 북미관계, 한미관계, 북일관계에도 변화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1988년 12월 미국은 베이징에서 북한과 외교적 접촉을 시작했다. 미국 국방부는 1989년의 ‘넌-워너(Nunn-Warner) 수정안’에 따라 1990년 4월 ‘동아시아전략구상’을 제출하면서, 주한미군을 3단계에 걸쳐 감축하는 한미동맹 재편안을 제출했다. 노태우정부도 북한의 군사적 위협이 소 멸된다면, 주한미군의 감축에 동의할 것이라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1991년 10월 한 국과 미국은 주한미군의 전술핵무기를 전면 철수하는데 합의하기도 했다. 1991년 1 13) 로동신문 1988년 1월 1일; 7월 11일; 로동신문 1990년 5월 25일. 14) 느슨한 연방제 또는 낮은 단계의 연방제는 1989년 문익환목사가 북한을 방문하여 김일성주석과 회담하면서
처음 논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장석 2002; 이승환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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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북한은 일본과 국교정상화를 위한 본회담을 시작했다. 북미관계의 개선과 한미동 맹의 구조조정, 북일수교 회담의 시작은 한반도 평화과정에 긍정적 효과를 가져 올 수 있었다. 1991년 9월 북한은 종래의 입장을 변경하여 남한과 함께 유엔에 가입했다. 그리고 1991년 12월 남북한은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기 본합의서’)에 합의했다. 이 ‘기본합의서’를 통해 남북은 정치군사적 대결의 해소와 교 류와 협력 그리고 남북관계를 규율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의 마련이 공동의 이익이 될 수 있음을 확인했다. 특히 제5조는, “현 정전상태를 남북 사이의 공고한 평화상태 로 전환시키기 위하여 공동으로 노력하며 이러한 평화상태가 이룩될 때까지 현 군사 정전협정을 준수한다”는 내용이었고, 따라서 공고한 평화상태로의 전환은 평화협정을 포함한 평화체제로의 이행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기본합의서’의 서명 직후 남북한은 ‘한반도의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에 합의했다. 노태우정부의 자유주의적 접근은 이 두 문서를 통해 절정에 오른 듯했다. 북한은 1991년 12월 라진·선봉 자유 무역지대 설치를 결정했고, 1992년 1월에는 국제원자력기구(International Atomic Energy Agency, IAEA)와 핵안전협정에 서명하기도 했고, 북한과 미국은 한국전쟁 이후 최고위급 회담을 미국의 뉴욕에서 개최했다. 탈냉전시대 한반도 평화과정은 순 조롭게 진행되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기본합의서’를 매개로 한 ‘1991년체제’는 평화체제를 만들기도 전에 좌초했 다. 이 실패의 과정에서 우리는 탈냉전·민주화시대에 한반도 평화과정에 영향을 미치 는 구조의 원형을 발견할 수 있다. 탈냉전의 효과로 북미접촉이 발생하면서 남북관 계·한미관계·북미관계가 상호작용하는 남북미 삼각관계가 새롭게 형성되었다. 이 삼각 관계로, 대북정책의 결정과 연관된 변수가 증가했다. 북미관계의 개선은 남북관계에 긍정적 영향을, 한미동맹의 강화는 남북관계에 부정적 영향을, 남남갈등의 격화는 남 북관계에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 ‘1991년체제’의 붕괴는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었 다. 첫 번째 원인은, 북한과 미국의 핵문제를 둘러싼 갈등이었다. 북한은 1992년부터 1993년 1월까지 여섯 차례 IAEA 사찰을 수용했지만, IAEA는 특별사찰을 요구했고, 북미관계와 북일관계의 개선도 미국과 합의했던 남한에 대한 사찰도 이루어지지 않 았다. 이 시점의 북미갈등을 제1차 북핵위기로 부르고 있다. 1991년체제를 붕괴시킨 제1차 북핵위기는 두 요인 때문에 비롯된 것처럼 보인다. 하나는, 미국의 정책전환이 다. 1991년 11월 제23차 한미연례안보협의회에서는 북한의 핵무기개발에 우려를 표 명한 후 주한미군의 감축계획을 철회했다. 다른 하나는, 남한정부의 선택이었다. 남 한정부는 미국의 정책전환을 제어할 의도와 능력이 없었던 것처럼 보인다. 미국의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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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전환과 한국의 그 전환에 대한 동의는 북한의 이른바 ‘벼랑끝 핵외교’를 야기했다. 1991년체제와 한미동맹 강화가 공존할 때, 대북정책의 목표는 흡수통일일 수밖에 없 었다. 두 번째 원인은, 남북한의 신뢰와 공동이익의 부족이었다. 남북관계는 미국의 대한반 도정책의 종속변수였고, ‘기본합의서’는 남북의 화해와 협력에 기초한 장전(章典)은 아니었다. 세 번째 원인은, 남북한의 국내정치에서 찾을 수 있다. 노태우정부의 대북정책은 집 권층 내부 보수세력의 동의를 받지 못했다. 시민사회세력은 노태우정부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았고, 노태우정부도 시민사회의 평화·통일운동을 불법적 사회운동으로 간 주했다. 대북정책의 국내적 토대가 취약한 상황에서, 1991년체제를 안정화할 수 있는 국제적 조건 - 한미동맹의 민주적 재편과 북미, 북일수교 - 을 조성하는 정책을 만 들기는 불가능했다. 북한은, 1990년 한소수교와 1992년 한중수교가 북미, 북일수교와 연계되지 않으면서 고립의 위기가 심화되었다고 평가했을 것이다. 기본합의서에 동의 했음에도 불구하고 북미, 북일수교의 전망이 불투명해지자, 북한은 체제보위를 위해 남북관계보다 북미관계를 우선하는 정책선택을 했다. 북한은 기본합의서 이후에도 평 화협정은 북한과 미국이 체결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북한은 남북대화가 진행되던 시점인 1991년 3월 한미가 군사정전위원회 유엔군 수석 대표를 한국군 장성으로 교체하자, 기본합의서 체결 이후인 1992년 8월 북한측 군사 정전위원회
수석대표를
소환했다.
북한은
1993년
3월
핵확산금지조약
(Non-Proliferation Treaty, NPT)을 탈퇴하고, 남북접촉에서 북한대표가 ‘서울 불바 다’ 발언을 하면서 남북대화는 중단되었다. 그리고 1993년 4월에서 1995년 2월에 걸 쳐 중립국감독위원회에서 체코와 폴란드의 대표단을, 군사정전위원회에서 중국대표단 을 철수시켰다. 북한은 정전협정을 무력화하면서 1994년 4월 “정전협정을 평화협정 으로 바꾸고 현 정전기구를 대신하는 평화보장체계”의 수립을 위한 협상을 미국에 제안했다(조선중앙년감 1985). 그리고 1994년 5월에는 이른바 ‘조선인민군 판문점 대표부’를 설치했다. 1994년 6월에는 한반도 전쟁위기까지 발생했다. 이 위기는 민간외교관 카터 전 미국대통령의 방북으로 해소되었다. 카터대통령과 김 일성주석의 회담에서, 남북정상회담이 논의되었고, 김영삼대통령은 이 제안을 수용했 다. 그러나 1994년 7월 김일성주석이 갑자기 사망하면서 남북정상회담은 무산되었다. 이후 전개된 남한내부의 김일성주석 조문을 둘러싼 논쟁은, 국내정치적 요소가 남북 관계를 적대화하는 주요한 요인 가운데 하나임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1993년 취임사 에서 어느 동맹국도 민족보다 더 나을 수 없다고 했던 김영삼대통령은, 1994년 광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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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 경축사에서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을 발표하면서 통일한국의 이념 및 체제로 자유 민주주의를 천명함으로써 명확하게 북한을 흡수통일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1994년 10월 북한 핵시설과 경수로의 교환 및 북미관계의 정상화를 담은 제네바합의에 대해 서도,15) 김영삼정부는 북한과의 타협이 북한정권의 생명을 연장시킬 뿐이라며 북미 합의에 반대하는 입장을 보이기도 했다. 제네바합의 이후 1995년 1월 미국이 북한에 대한 중유지원을 시작하고, 같은 해 3월 북한에
경수로를
제공하기
위한
다자기구로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orean
Peninsula Energy Development Organization, KEDO)가 설립되고 12월 북한과 KEDO 사이에 경수로 공급협정이 체결되고 있는 상황에서, 북한은 정전체제의 무력 화를 계속 시도했다. 북한은 1995년 6월 유엔군사령부의 해체를 요구하면서, 1996년 2월에는 새로운 평화보장체계의 수립을 위한 협상을 다시금 미국에 제안했다. 핵심 내용은 평화협정 체결 이전에 정전협정을 대신할 ‘잠정협정’을 체결하고, 군사정전위 원회를 대체하는 북미군사공동기구를 만들자는 것이었다.16) 1996년 4월에는 조선인 민군 판문점대표를 통해 군사분계선 및 비무장지대 관리업무를 포기하겠다는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북한의 정전협정 무력화는 평화체제 구축 전까지는 정전협정이 준수되어야 한다는 남한정부의 입장과는 배치되는 것이었다. 북한은 남북불가침협정이 체결되어 있는 상 태에서 북미의 잠정협정이 한반도의 평화와 연방제 통일의 실현을 위한 전제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남한은 한반도 평화체제의 당사자가 남북한이 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남한과 미국은 북한의 제안에 맞서 1996년 4월 제주도에서 열린 정상회담에서 4자회담을 제안했다.17) 그러나 1996년 9월 발생한 북한 ‘잠수함 사건’ 으로 4자회담의 개최전망이 불투명해졌다. 김영삼정부는 북한의 사과를 요구하며 제 네바합의 사항인 경수로의 지원을 재고하겠다고 발표했다. 1996년 12월 북한이 이례 적으로 잠수함 사건에 대한 사과를 하고 북한이 4자회담과 인도적 지원을 연계하는 전략을 선택하면서, 1997년 3월 미국의 뉴욕에서 4자회담 공식 설명회가 개최되었 다. 4자회담은, 1997년 ‘남북미’가 참여하는 세 번의 공동설명회와 ‘남북미중’의 세 차례 의 예비회담을 거쳐 1997년 12월부터 1999년 8월까지 ‘남북미중’이 참여하는 여섯 15) 제네바합의가 이루어질 즈음에 북한은 ‘선군정치’를 시작했다. 제네바합의가 북한의 자연사(自然死)를 이끌어
낼 것이라고 생각했던 미국도 그리고 제네바합의를 수용한 북한도 서로를 신뢰하지 않았다(이정철 2005). 16) 로동신문, 1996년 2월 23일. 17) 김영삼정부의 대응은, 탈냉전·민주화시대의 한미관계에서 한국의 발언권이 제고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구
갑우·안정식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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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의 본회담이 스위스의 제네바에서 개최되었다. 4자회담이 열리게 되는 과정에서 볼 수 있듯이, 어느 국가가 참여하는가가 첫 번째 쟁점이었다. 북한은, 1979년 7월 한미가 제안한 남북미 3자회담을 북미대화와 남북대화를 분리해야 한다는 이유로 거 부했지만, 1984년 1월 입장을 바꾸어 남북미 3자회담을 제안할 때, 남한은 “군통수 권과 작전지휘권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제한적 당사자이고, 중국은 한반도에 서 중국군을 철수했고 한반도 위기에 책임이 없기 때문에 당사자가 아니라는 입장을 밝힌 바 있고(공제민, 1989), 4자회담과 관련하여서도 이 주장을 반복했다. 반면, 남 북미 3자회담을 제안했던 한미는 북한의 3자회담 제안이 북미대화를 중심으로 남북 대화가 보조하는 형태라 해석하고 역으로 남북미에 중국이 참여하는 4자회담을 제안 한 바 있다. 결국 북한은 남북미 사전 협의 이후 중국이 참여하는 3+1 형식의 회담 을 수용했다. 1997년 10월 미중정상회담에서는 다시금 북한에게 4자회담에 참여하라 는 압박이 있었다. 탈냉전 시대, 미중관계와 한반도문제의 연계였다. 결국 북한은 4 자회담 본회담에 참여하게 된다. 1954년 제네바 정치회담 이후 한반도문제와 관련한 최초의 ‘다자회의’였던 4자회담 에서는 의제설정 자체가 쟁점이었다(박영호, 2000; 김용호, 2002; 장달중 외, 2011). 남한은 ‘한반도 평화체제’와 ‘군사적 긴장완화 및 신뢰구축’을, 북한은 ‘주한미군 철 수’와 ‘북미평화협정’을 의제로 설정하고자 했다. 결국, ‘평화체제 구축 분과위’와 ‘긴 장완화 분과위’가 설치되었고, 북한이 주장한 의제는 분과위에서 논의하는 것으로 절 충이 이루어졌다. 이 절충은 4자회담에 참여하는 주체들의 평화협정 당사자 문제에 대한 동상이몽의 결과였다. 남한은 탈냉전·민주화 이후 평화체제를 의제화하면서 ‘남 북’이 주도하고 미중이 동의하는 방식을 제안했다. 반면, 북한은 ‘북미’를 중심에 두 는 북미평화협정을 생각하고 있었다. 미국은 북미보다는 ‘남북’을 우선했고, 중국은 미국을 견제하고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 확보를 위해 북미보다는 ‘남북’이 중심이 되 는 평화체제를 선호했다. 주한미군 철수문제와 관련하여서도 한미는 주한미군이 정전 협정과는 무관한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따른 주둔이기 때문에 4자회담과는 무관하다는 입장이었던 반면, 북한은 긴장완화를 위한 ‘근본문제’로 주한미군의 철수를 제기했다. 중국은 한편으로는 쉬운 것에서부터 어려운 것으로 나아가자는 이른바 선이후난(先 易後難)의 한미의 입장을 지지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북미관계 개선과 같은 의제 를 상정하면서 북한의 입장을 수용하는 태도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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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대북 화해협력정책과 한반도 평화체제 한반도 평화체제를 논의하는 최초의 다자적 틀이었던 4자회담은 1999년 8월 6차 본 회담을 마지막으로 종료되었다. 4자회담의 진행과정에서 1998년 집권한 남한의 김대 중정부는, ‘흡수통일 배제’, ‘상호 무력 불사용’, ‘화해 및 교류협력 추진’이라는 대북 정책의 3대 원칙을 천명하고,18)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하는 문제를 다시금 의 제화했다. 그리고 4자회담을 그 전환을 위한 유효한 협상의 틀로 생각했다. 주한미군 과 관련하여서는, 전임 정부의 입장을 계승하면서도,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에 실질적 진전이 있을 경우 주한미군 문제가 의제화될 수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평화체제가 구축되고 통일이 되더라도 주한미군은 동북아 평화유지군으로 계속 주둔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 김대중정부의 공식 입장이었다(박종철, 2006). 김대중 정부의 자유주의적 대북정책은, 북한과의 공존‧공영을 도모하는 것이었고 따라서 평 화체제는 공존·공영을 위한 제도적 장치였다. 김대중정부는 4자회담을 지속하면서 동시에 광의의 평화체제의 한 구성요소인 ‘기능 적 협력’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1998년 3월 세계식량계획(World Food Programme) 을 통해 북한에 식량을 지원하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이어 대북민간지원 활성화 조치 및 투자업종의 규모의 제한을 완화하는 남북경협 활성화 조치를 발표했다. 6월에는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소떼를 트럭에 태우고 판문점을 통해 방북하는 초유의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김대중정부는, 1998년 8월 북한이 미사일을 시험 발사해 긴장된 분위기가 조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1월 금강산 관광선을 출항시키기도 했 다. 1999년 6월 서해교전이 발생했을 때도 금강산 관광을 중단하지 않았다. 김대중정부 대북정책의 또 다른 특징은, 북미, 북일관계의 개선이 남북관계 개선에 선행해도 개의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북한이 국제사회에서 정상국가로 인정받게 되 면 남북 관계의 개선에도 득이 될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김대중정부 들어서서 북미 대화는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1999년 5월 미국의 윌리엄 페리 대북조정관이 북한 을 방문했고, 9월에는 페리보고서를 발표했다. 주요 내용은, 북한이 핵 및 장거리 미 18) 김대중정부의 공존·공영을 지향하는 자유주의적 대북정책은 김대중대통령의 개인적 신념의 산물이기도 하지
만, 몇 가지 역사적 사건을 고려하지 않고는 설명되기 어려울 수 있다. 첫째, 1997년 남한이 겪은 전대미문의 위기였던 IMF 위기를 계기로 북한을 흡수할 수 있다는 남한 사회 일각의 논의가 흡수되었다. 둘째, 김대중 정 부도 연립정부이기는 했지만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자유주의적 세력의 지지를 바탕으로 집권했기 때문에 전향 적 대북정책을 추진할 수 있었다. 셋째, 북한의 변화다. 북한은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을 겪으면서 체제 보위를 위해서는 경제위기의 해결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국제적 제약이 완화되었다는 점 을 지적할 수 있다. 1994년 10월 제네바합의 이후 북한과 미국 사이에 합의의 실행을 둘러싸고 간헐적 긴장이 있기는 했지만, 핵위기와 같은 심각한 갈등은 존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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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일을 포기하면 미국은 대북 경제제재 조치를 완화하고 남북대화 및 북미, 북일 수 교를 지원하겠다는 것이었다. 페리프로세스의 내용은 선 남북대화, 북미‧북일 수교, 후 평화체제 구축으로 요약할 수 있다. 즉 김대중정부는 평화협정으로 환원되는 좁은 의미의 평화체제(peace regime)보다는 보다 기능적 협력이 포함된 넓은 의미의 평화 체제(peace system)를 구축하고자 했다. 북미관계의 진전이 이루어지자 김대중정부는 2000년 3월 베를린선언을 통해 한반도 냉전구조의 해체를 목적으로 하는 남북경제공동체 건설계획을 북한에 공식적으로 제 안했고, 6월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되었다. 2000년 6월의 남북정상회담은 ‘한반도문제 재한반도화’의 계기였을 뿐만 아니라 남북이 서로의 ‘국가적 실체’를 인정한 사건이 었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의 성과는, 6‧15남북공동선언 다섯 개 항에 응축되어 있 다. 경제교류를 포함한 다방면의 교류와 협력, 그리고 이산가족의 만남은 새로운 내 용이 아니었다. 논란이 되었던 부분은 1항과 2항이었다. 1항에서는 ‘자주’라는 용어 를 둘러싸고 논쟁이 전개되었다. 자주를 북한이 주장해 온 반미(反美)로 해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남한의 ‘연합제’와 북한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의 공통성이 있다고 규정한 2항을 둘러싸고 남한사회에서는 격론이 벌어졌다. 평화와 평화체제의 단계를 거치지 않은 통일방안에 대한 합의는 자유주의적 궤도를 이탈한 비약일 수 있기 때 문이다. 이론적으로도, 연합제와 낮은 단계의 연방제가 남북의 공존을 추구한다는 점 에서 형식적 공통성은 있지만, 전자가 2국가가 공존하는 통일 전의 상태라면, 후자는 1국가 2정부가 공존하는 통일 후의 상태다. 2000년 정상회담 이후 남북은 ‘6‧15 시대’라는 시기구분을 공유하면서 남북관계의 제 도적 기초에 합의했다. 장관급 회담의 정례화와 제도화, 국방장관 회담, 남북경제협 력추진위원회 구성, 3대 경협 사업 - 금강산관광, 개성공업지구 건설, 남북의 철도‧도 로 연결 - 추진, 이산가족 교류의 활성화 등이 그것이다. 남북을 거미줄처럼 엮는 기 능망 및 그 기능망을 뒷받침하는 제도적 장치가 남북한의 신뢰구축 및 화해와 협력, 그리고 궁극적 평화의 성취를 위한 디딤돌이라는 인식도 확산되었다. 김대중정부는, 6·15공동선언에서 평화체제 그 자체를 의제화하지 않았지만, 광의의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토대의 마련을 통해 한반도 분단체제의 구조적 변화를 추동하고 있었다. 다른 한편, 2000년 정상회담 이후 북미관계도 매우 빠른 속도로 진전되었다. 2000년 7월 아세안지역포럼(ASEAN Regional Forum, ARF)에서 북미 간에 첫 외무장관 회 담이 개최되었다. 2000년 10월에는 북한의 조명록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이 미국을 방문했고, 그 결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미합중국 간의 공동 코뮤니케”가 만 들어졌다. 서로의 적대적 관계를 종결하는 선언을 첫 중대 조치로 명기한 이 공동 코뮤니케의 주요 내용은, 북미관계의 전면적 개선, 정전협정의 평화보장체계로의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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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 자주권의 상호 존중 및 내정불간섭, 호혜적인 경제협조와 교류, 북한의 미사일 실험 유예, 한반도의 비핵·평화, 미국의 대북 인도적 지원, 반테러 협력, 남북관계의 진전에 대한 미국의 협력 등이었다. 북한과 미국이 관계정상화 및 한반도 냉전체제의 해체를 약속한 것이다. 그러나 한반도 평화과정은 2001년에 들어서면서 다시금 조정기를 맞이했다. 세 가지 정도의 요인을 지적할 수 있다. 첫째, 2000년 말 북미가 공동 코뮤니케를 만들어 냈 음에도 불구하고, 클린턴대통령의 방북 또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방미가 무산되면 서, 북미는 관계정상화의 마지막 계단을 밟지 못했다. 2001년 미국에 부시행정부가 들어서면서 클린턴행정부의 대북정책을 원점에서 재검토하기 시작했다. 2001년 12월 미국은 “핵태세 보고서”(Nuclear Posture Review)에서 북한을 핵 선제공격이 가능한 대상 가운데 하나로 지정했고, 2002년 1월 미국의 부시대통령은 북한을 ‘악의 축’으 로 규정했다. 북미관계는 다시금 냉각되었다. 둘째, 남북관계의 진전을 위해서는 남북한의 정책의 상호 조정이 이루어져야 한다. 남한이 자유주의적 접근을 계속하고 있는 상태에서 북한이 과거로 회귀하거나 회귀 하려는 유인이 발생했을 때, 북한을 제어할 수 있는 정책수단이 많지 않았다. 특히 남북관계가 진전되면 될수록 흡수통일 또는 체제붕괴에 대한 우려를 가질 수 있는 북한이 그 우려를 불식시킬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 남북관계의 딜레마를 제어하기 위해서는 평화체제와 같은 제도적 장치 및 정치·군사적 신뢰구축이 필수였다. 그러나 2000년 정상회담 이후의 6‧15 시대에는 이 부분이 결여되어 있었다. 2002년 6월에는 서해에서 남북의 무력충돌이 발생하기도 했다. 셋째, 남북관계의 경색은 남한의 국내정치 때문에 발생하기도 했다. 김대중정부 대북 정책의 의도하지 않은 결과 가운데 하나가, 북한이 적인가 아닌가를 둘러싼 남남갈등 의 증폭이었다. 김대중정부 대북정책의 결함 가운데 하나로 지적되는 것이, 좋은 정 책인데 왜 지지하지 않느냐는 일방주의적 태도였다. 평화적 방법에 의한 평화를 대북 정책의 원칙으로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김대중정부는 그 정책을 추진하는 동력이라 고 할 수 있는 정치적‧사회적 합의를 만들어 내지는 못했던 것처럼 보인다. 김대중정부의 대북 화해협력정책을 계승하고자 했던 노무현정부는 민주화 이후 어떤 정부보다 강한 구조적 제약과 함께 대북정책을 전개해야 했다. 세 가지 제약에 주목 할 수 있다. 첫째, 2002년 10월 미국의 제임스 켈리(J. Kelly) 대북한특사가 고농축우 라늄을 이용한 북한의 핵무기 개발 의혹을 제기하면서 시작된 제2차 북핵위기는 국 제적 제약이었다. IAEA가 북핵문제를 유엔에 회부한 시점인 2003년 2월, 노무현 정 부가 출범했다. 제2차 북핵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2003년 8월부터 시작된 남북미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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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과 러시아가 참여한 6자회담으로 노무현정부의 대북정책은 동북아 질서의 재편 과 연계될 수밖에 없었다. 둘째, 남북관계 수준의 제약이 존재했다. 노무현정부는 정치·군사적 협력이 부재했던 6‧15시대의 한계와 6‧15시대에 대한 남북의 인식 차이를 넘어서야 했다. 남한은 6‧15 시대의 특징을 남북의 기능적 협력으로 해석했고, 북한은 6‧15시대에서 외세를 배격 하는 ‘우리 민족끼리’를 강조했다(강충희·원영수, 2005). 특히 6·15가 평화의 제도화 로서 평화체제를 결과하지 못한 조건에서 남북관계의 진전에도 한계가 노정될 수밖 에 없었다. 셋째, 2000년 정상회담을 둘러싼 대북송금 특검은 국내적 제약으로 작용했다. 노무현 정부가 출범한 다음 날 야당인 한나라당은 국회에서 단독으로 대북송금 특검법을 통 과시켰다. 북한은 노무현정부가 대북송금 특검을 수용하게 되면 남북관계는 동결로 갈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노무현정부는 대북정책의 투명성 제고를 위해 대북송금 특 검에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았다. 이 제약을 고려한 노무현정부의 대북정책이 ‘평화번영정책’이었다.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을 동북아 구상과 연계하고자 했던 평화번영정책에는 노무현정부가 직면하고 있 던 구조적 제약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북핵문제의 평화적 해결과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이 미국을 포함한 동북아 국가와의 협력 없이는 달성될 수 없 다는 문제의식이었다고 할 수 있다. 북핵위기를 남한정부의 주도적 역할을 통해 동북 아 협력을 위한 기회로 만들고자 하는 적극적 발상이었다. 노무현정부의 평화번영정책은 김대중정부 대북정책의 성과와 방법론을 계승함으로써 가시적 결과를 내기도 했다. 김대중정부 대북정책의 성과 가운데 하나는 2000년 정 상회담 이후 만들어진 남북관계를 규율하는 제도적 장치들이었다. 이 장치들 덕택에 남북대화 및 교류가 ‘자기 조직화’(self-organization) 경향을 보일 수 있었다. 남북대 화는 정치, 군사, 경제, 사회, 문화 등 거의 모든 영역에서 전개되었다. 2002년 10월 시작된 제2차 북핵위기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금강산을 관광지구로, 개성을 공업지구 로 지정하면서 남북경협의 새로운 장이 열리게 되었다. 노무현정부에 들어서서 남북 교역도 빠르게 증가했다. 이산가족 상봉과 같은 남북한의 사회‧문화교류도 확대되었 다. 경제협력을 위한 새로운 제도적 장치도 추가되었다. 2005년 7월 북한의 최고인민회 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북남경제협력법」을 채택했다. 남북경제협력의 “제도와 질서”를 세우기 위해 제정된 이 법을 계기로, 북한에서도 경제협력을 위한 법적‧제도 적 기초가 마련된 셈이다. 2004년 9월 남북간 투자보장합의서 등 13개 합의서가 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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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에서 비준되어 국내법적 효력을 가지게 되었다. 2005년 12월 남한에서는 여야 합 의로 「남북관계발전에관한 법률」을 제정했다. 사회‧문화 교류와 관련하여 주목해야 할 조직은 2005년 3월 남북과 해외의 민간단체들이 결성한 ‘6‧15공동선언실천민족공 동위원회’다. 합법적 조직인 ‘6‧15위원회’의 출현으로 남북관계에 시민사회가 개입할 수 있는 제도적 토대가 마련되었다. 이런 양적 지표와 제도적 장치로 노무현정부 대북정책의 성과를 높이 평가할 수도 있다. 노무현정부는 남북경제협력과 사회‧문화교류의 자기 조직화 원리에 제동을 걸 지 않았다. 그러나 평화를 전면에 내세웠던 노무현정부는 군사적 신뢰구축이 결여된 6‧15시대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남북한의 정치·군사적 관계는 북미관계와 6자회담 에 종속되었다. 중견국가인 남한이 통제할 수 없는 구조적 제약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남북 관계의 주기적 단절도 구조적 제약으로 환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북한 이 군사적 신뢰 구축에 동의하지 않기도 했지만, 노무현정부도 평화번영정책의 기조 와 모순될 수 있는 정책을 선택함으로써 한계를 드러냈다. 2004년 후반부터 2005년 5월 대북 비료 지원을 위한 차관급 회담이 개최될 때까지 10개월 정도 남북대화가 중단되었다. 김일성 주석 10주기를 조문하려는 방북단 불허 와 동남아 국가를 통한 대규모 탈북자 입국 때문이었다. 남한정부가 이라크에 대한 추가 파병을 결정하고, 남한의 헌법재판소가 국가보안법 7조인 찬양‧고무죄 및 이적 표현물 소지죄를 합헌이라고 결정한 것도 남북관계를 경색시킨 또 다른 요인이었다. 노무현정부도 남북관계의 적대화를 야기하는 남남갈등을 전환시킬 능력은 없었다. 2006년 7월 북한이 미사일을 실험발사하고 유엔이 대북제재 결의안을 채택하자, 남 한정부도 쌀과 비료, 경공업 원자재, 화상상봉 자재와 장비, 철도‧도로 자재와 장비 등의 지원을 중단했다. 통일부는 그 규모가 약 3억 5,000만 달러에 달한다고 추정했 다. 이 제재가 적절했는가를 둘러싸고 논쟁이 있었다. 이후 남북대화는 2007년 2‧13 합의라는 6자회담의 성과가 나오기 전까지 사실상 중단되었다. 첫 번째 남북대화의 단절은, 2005년 6월 남한정부가 북한이 핵폐기에 합의하면 북한 에 200만kw의 전력을 제공하겠다는 이른바 ‘중대 제안’을 하면서 극복되었다. 이 중 대 제안은 2005년 9월 4차 6자회담에서 합의된 9‧19공동성명의 도출에 부분적 기여 를 한 것처럼 보인다. 9‧19공동성명의 주요 내용은, 북한의 핵 폐기와 북한에 대한 미국의 안전보장, 북미 관계와 북일 관계의 정상화, 6자의 경제협력, 한반도 평화체 제 구축과 동북아 다자간 안보 협력의 증진 등이었다. 9‧19공동성명은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넘어 ‘한반도 평화체제’ 및 동북아 다자간 안보 협력의 대강이 담긴 문건으로 평가되고 있다. 9‧19공동성명 이후 남북대화는 재개되었지만, 북한에 대한 미국의 금융제재가 의제로 부상하면서 북미갈등이 발생하고, 2006년 10월 북한이 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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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험을 하면서 다시금 남북 관계가 경색되었다. 남북대화의 단절은 우연적 사건이 중첩되면서 발생한 것처럼 보이지만, 근본 원인은 군사적 신뢰의 결여였다. 남북한은 2004년과 2005년의 장성급 회담에서 서해상의 북 방 한계선 문제를 논의했지만 해답을 찾지 못했다. 남한내부의 ‘친미=반북 대 친북= 반미’의 이원적 대립 구도도 남북한의 군사적 갈등 해소를 방해한 요인이었다. 미국 이 한반도 이외의 분쟁 지역에 주한 미군이 개입할 수 있게 하는 기동군화 - 전략적 유연성 - 를 포함한 한미동맹의 재편을 추진하고자 했을 때, 노무현정부는 그것을 수용하면서 이른바 ‘협력적 자주국방 정책’을 추진했다. 2005년 9월의 ‘국방개혁 2020’은 한국군을 50만으로 감축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기는 했지만, 군비증강 계획 이기도 했다. 재래식 군사력이 남한보다 열세인 북한이 1990년대부터 핵과 미사일과 같은 비대칭적 군사력을 증강해 왔다는 점을 고려할 때, 노무현정부의 자주국방 정책 은 탈냉전 시대에 남북의 안보딜레마를 부활시키는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다. 남북한 의 군사적 신뢰구축이 지속가능한 평화체제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남북한이 절대안보 가 아닌 공동안보의 관념을 공유해야 한다고 할 때, 노무현정부의 국방정책은 사실상 공동안보를 부정하는 선택이었다. 군비증강을 목표로 하는 국방정책으로는 억지력 확 보를 명분으로 내세운 북한의 핵실험과 같은 행위를 예방하기 어려울 것이다. 2007년 2월 13일 ‘9·19공동성명의 이행을 위한 초기 조치’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 다. 2·13합의는 북한 핵시설의 단계적 폐기에 대해 6자회담 참여국들이 경제·에너지· 인도적 지원을 늘려가는 인센티브 방식으로 구성되었다. 2월 23일에는 한국군의 전 시작전통제권을 미국으로부터 환수하는 합의가 이루어졌다. 노무현정부는 한국이 자 국군의 전시작전통제권을 보유하지 못한 상황에서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의 당사자로 나서기 힘들다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다(이수형, 2009). 2‧13합의가 이루어지면서, 남북관계에 새로운 동력이 부여되었고, 남북한은 2007년 8월 제2차 정상회담에 합의 했다. ‘노무현 대통령의 평양 방문에 관한 합의서’에서는 한반도의 평화, 민족 공동의 번영, 조국통일의 전환적 국면이 정상회담의 의제로 설정되었다. 2007년 10월 평양 에서 열린 정상회담에서 합의된 “남북 관계 발전과 평화 번영을 위한 선언”은, 10월 3일 북한 핵시설을 2007년 말까지 불능화한다는 내용의 6자회담 합의문이 발표된 직후에 나왔다. 2007년 남북정상회담 공동선언인 ‘10·4선언’의 내용과 의미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6‧15공동선언의 정신을 계승하면서 남북한이 서로의 체제를 인정하고 평화공존하겠다는 약속으로 읽힐 수 있다. 합의문 2항에 명시되어 있는 것처럼, 남북 은 “사상과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남북 관계를 상호 존중과 신뢰 관계로 확고히 전환시켜 나가기로 했다.” 둘째, 10‧4선언에서 남북한은 한반도 평화 및 평화체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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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르는 두 경로에 합의했다. 하나는 경제와 평화가 선순환 구조를 가지는 것이다. 서 해 북방한계선 주위를 평화협력특별지대로 만들겠다는 약속이 그 사례다. 이 구상은 군사적 긴장완화와 신뢰구축을 필요로 한다. 다른 하나는 정전체제를 항구적 평화체 제로 전환하기 위해 관련국 3자 또는 4자의 정상이 한반도 지역에서 만나 종전선언 을 하는 것이었다. 즉, 10·4선언에서는 정전체제와 평화체제 사이에 ‘종전선언’이란 단계를 설정했다. 셋째, 2007 남북정상회담은 2000년 정상회담과 달리 실무형 정상 회담의 성격을 띠었다. 개성-신의주 철도와 개성-평양 고속도로의 보수, 경제특구의 건설과 해주항의 활용, 조선협력과 같은 기능적 협력의 구체적 내용이 10·4선언에 담 겨 있었다. 따라서 10‧4선언 이행의 관건은 정책의 실행이었다. 북한도 10‧4선언에 대해 긍정적 평가를 했다. 재일조선인총연합에서 발간하는 신문인 조선신보는 2007년 10월 4일자 평양발 기사에서는 10‧4선언을 “‘북남 수뇌 상봉’ 선언의 채택, 변혁 주도하는 최고 령도자의 의지”라고 평가했다. 주목되는 내용은 다 음과 같다. 첫째 6‧15시대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의 사상과 체제를 부인하고 대결을 고 취하는 행위가 근절된 것은 아니었고 민족경제의 균형적 발전을 추동하는 투자도 없 었다는 지적이다. 둘째, 북한은 10‧4선언을 ‘우리 민족끼리’의 실천으로 평가하고 있 다. 셋째, 10‧4선언을 통해 6‧15와 9‧19의 교차점이 마련되었다는 평가를 하고 있다. 북한도 남북관계가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치와 연계되어 있음을 인정하고 있는 것 이다. 10·4선언은 남북한의 기능적 협력, 평화체제의 수립, 한반도 비핵화를 아우르는 광의 의 평화체제에 대한 합의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하려 는 포괄적 기획으로 평가될 수도 있다. 그러나 5년 단임의 대통령제 하에서l, 10·4선 언은 ‘너무 늦게’ 제출된 평화기획이었다. 김대중정부 대북정책을 제약했던 남남갈등 도 노무현정부에 들어와서 더욱 증폭되었다. 10‧4선언이 노무현정부 말기에 등장함으 로써, 한반도 평화체제의 구축 및 대북정책에 대한 정치적‧사회적 합의를 위한 제도 적 장치의 마련은 이명박정부의 과제가 되었다. 그러나 이명박정부의 이른바 ‘비핵개 방 3000’과 ‘상생공영정책’에는 평화체제에 대한 기획이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5. 핵문제와 한반도 평화체제 김대중․노무현정부의 대북화해협력정책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핵개발을 통해 전쟁 억 지력을 확보하고자 했다.19) 2005년 2월 10일 외무성 성명을 통해 북한은 핵무기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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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를 선언했고, 2006년 10월 9일 핵실험을 했다. 이명박정부의 대북강압정책에도 불 구하고 북한은 2009년 5월 25일 두 번째 핵실험을 했다. 북한은 ‘자위적핵억제력’을 다시금 강조했다. 이 두 번의 사건은, 남한의 대북정책이 북한의 핵정책에 영향을 미 치는 주요 변수가 아닐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남한은 북한의 핵무기를 ‘위협’ 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는 지리적으로 인접한 이웃국가다. 북한의 핵무기에 대한 남한 의 대응은, 한미동맹을 통해 미국의 핵우산을 재확인하는 것이었다. 핵문제와 평화체제의 관계를 생각할 때, 발견할 수 있는 유의미한 합의들이 1992년 1월 20일의 한반도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 2005년 9월 19일의 제4차 6자회담의 공동성명, 2005년 11월 17일의 한미동맹과 한반도 평화에 관한 공동선언 등이다. 이 문건들에는 한반도 핵문제의 직접 당사자들인 남북미의 비핵화에 관한 입장들이 담 겨 있다. ‘한반도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은, “남한과 북한은 핵무기의 시험, 제조, 생산, 접수, 보유, 저장, 배비, 사용을 하지 아니”하며, 또한 “핵재처리시설과 우라늄 농축시설을 보유하지 아니한”고 비핵화의 내용을 규정하고 있다. 9․19공동성명은 한 반도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을 수용하면서 한반도의 비핵화와 평화체제를 연계했다. 2007년 2․13합의와 10․3합의를 거치면서 2008년 하반기에 북한 핵시설의 불능화 미 국의 북한에 대한 테러지원국 해체가 교환되면서 북미관계는 정상화로 가는 종착역 에 접근하는 듯했다. 그러나 다시금 말 대 말, 행동 대 행동의 방법론은 지켜지지 않 았다. 6자회담 참여국 내부에 핵문제의 해결에 동의하지 않는 세력이 있음을 보여준 다. 결국 북한은 2009년 5월 25일 두 번째 핵실험을 했고, 남한정부는 5월 26일 PSI 참여를 선언했다. 2009년 4월 5일 북한이 로켓을 발사하고 4월 14일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가 ‘의장성명’을 통해 북한을 비난하자 북한은 외무성 성명을 통해, 6자회담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2009년 6월 12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대북제 재안인 결의안 1874호가 발표되자 외무성 성명의 형태로, 새로 추출되는 플루토늄의 전량 무기화와 우라늄 농축작업에 착수하겠고 대응했다. 그러나 2009년 9월 4일 유 엔주재 북한 상임대표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의장에게 보내는 편지에는, 대화와 제 재 모두에 대처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하며 대화의 가능성을 열어 놓기도 했다. 2009년 10월 24일 북한 외무성의 리근 미국국장과 미국 국무부의 성 김 북핵담당 19) 2003년 1월 10일 ‘공화국 대변인 성명’을 통해 NPT 탈퇴를 밝힌 후 2003년 3월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즈음 한 같은 해 4월 6일 “군사적 억제력”만이 전쟁을 막을 수 있다는, 외무성 대변인 성명을 발표했다. 제1차 6자
회담(2003. 8.27-29)이 시작되기 전인 8월 18일에는 미국이 “대조선정책전환용의를 표시하지 않는다면 핵억제력 을 포기할 수 없다”는 조선중앙통신 “론평”을 발표하기도 했다. 2003년 9월 29일에는, 외무성 대변인 대답의 형태로, “미국의 핵선제공격 막는 핵억제력강화의 실제적조치를 취해 나가고 있다”는 글이 나오기도 했다. 북 한의 대외발표문의 중요도는, 정부성명, 외무성 성명, 외무성 대변인 성명, 외무성 담화, 외무성 대변인 담화, 외무성 대변인 대답 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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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사가 뉴욕에서 만났다. 20여 년간 타협과 결렬을 반복해 온 북미대화의 또 다른 시작이었다. 그리고 2009년 12월 8-10일 미국의 보즈워스 대북정책특별대표가 북한 을 방문했다. 북미가 만나기 전인 2009년 10월 5일 중국의 원자바오총리가 평양을 방문하여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회담을 했다. 양제츠 중국 외교부장은 한반도 비핵화 를 이루는데 큰 진전이 있었다고 이 회담을 평가했다고 한다. 중국, 미국과 접촉한 후 북한은 평화체제와 평화협정을 다시금 의제화했다. 2010년 1월 1일 신년공동사설 에서는 “조선반도의 공고한 평화체제를 마련하고 비핵화를 실현하겠다”고 밝혔다. 선 평화체제 후 비핵화로 읽히는 대목이었다. 북한은 2005년 7월 22일 외무성 대변인 담화의 형식으로,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하게 되면 핵문제의 발생근원으로 되 고있는 미국의 대조선적대시정책과 핵위협이 없어지는 것으로 되며 그것은 자연히 비핵화실현에로 이어지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2010년 1월 11일 북한은 평 화협정의 체결을 정전협정 당사국들에게 제의하면서, 평화협정의 체결을 위한 회담은 9․19공동성명에서 합의한 것처럼 별도로 진행될 수도 있고, 6자회담의 테두리 내에서 진행될 수도 있다는 유연한 입장을 보이기도 했다. 비핵화와 평화체제를 연계하는 북한의 전략은 미국 오바마정부의 핵무기 없는 세상 정책에 대한 나름의 독해에 기초하고 있었다. 2009년 5월 핵실험 이후 북한은 미국 에게 핵군축과 CTBT의 규범을 한반도에 적용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북한은 “국제적 인 핵군축, 핵철페의 움직임”과 연계하여 “조선반도비핵화”를 추진하려 했다. 한반도 비핵화는 동북아시아의 핵군축, 핵철폐와 직결된 문제라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미국은 2010년 4월 핵태세보고서에서 비확산의 의무를 준수하지 않고 있는 북한을 잠재적 적으로 설정하고 있지만, “지구적 핵전쟁의 위협은 감소했지만, 핵공격의 위 험은 증가했다”는 표현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미국의 주 관심사는 핵물질에 대한 통제를 통해 핵확산을 막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2010년 4월 12-13일 열린 ‘핵 안보정상회의’는 안보의 대상으로 공동체가 아니라 핵이라는 무생물을 설정하는 핵안 보(nuclear security)라는 ‘기묘한’ 표현에서 볼 수 있듯이, ‘핵물질의 안전한 관리’가 가장 중요한 의제였다. 2010년 4월 9일 미국의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이 북한이 1-6개의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고 발언한 것은, 미국이 북한의 핵을 사실상 인정하 면서 핵확산만을 막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으로 해석될 수 있었다. 따라서 만약 북한 이 미국에게 핵확산금지조약(NPT) 복귀라는 선물을 줄 수 있었다면,20) 북미 핵갈등 이 새로운 차원으로 ‘전환’되는 한 계기가 될 수 있을 수도 있었다. 북한이 2010년 4 월 21일 핵무기의 과잉생산을 하지 않을 것이며, 비확산과 핵물질의 안전관리에 기 20) 2005년 9월의 외무성 대변인 담화이기는 하지만, 북한은 미국이 경수로를 제공하는 즉시 NPT에 복귀하겠다
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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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하겠다는 외무성 비망록을 발표한 것도 국제적 맥락에서 갈등의 전환을 염두에 둔 포석이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남한정부의 선택이 핵문제의 향방을 결정하는 변수의 역할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었다. 이명박정부는 북한이 핵을 포기하면, 이라는 단서를 설정해 놓고, 남북한의 교 류와 대화를 사실상 중단했다. 또한 이명박정부의 ‘비핵개방 3000’ 정책은 북한을 개 발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발전주의적 사고의 전형이기도 했다.21) 2010년 3월 천안함 사건 이후 이명박정부의 대북강압정책이 강화되었다. 2010년 5월 20일 이명박정부는 천안함 사건이 북한의 어뢰공격 때문이라는 조사결과를 발표했고, 5월 24일 남북교 역 중단, 한미연합 대잠수함훈련 실시,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 천안함 사건의 회부, 한미동맹 차원의 제재 협의 등을 내용으로 하는 조치를 발표했다. 남북관계가 정지된 상태에서, 6자회담이 재개된다 하더라도, 이명박정부가 북한의 선 핵포기를 고수한다 면, 비핵화와 함께 평화체제가 의제화되는 것은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이명박정부는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과 9․19공동성명에 대해 모호한 입장을 견지했다. 그럼에도 2012년 2월 북한과 미국은 다시금 비핵화와 평화체제를 교환하는 919공동 성명의 이행을, 229합의의 형태로 약속했다. 그러나 2012년 4월 북한의 위성발사로 이 합의는 다시금 붕괴되었다. 2012년 12월 북한은 다시금 인공위성 ‘광명성’을 발사 했다. 2013년 1월에는 미국의 재균형정책을 위한 군사전략이 “유엔군사령부를 다국 적련합기구로 둔갑시켜 아시아판 나도의 모체로 삼으려 하고 있다”는 외무성 비망록 21) 이명박 대통령의 ‘비핵 개방 3000’ 구상은, 북한이 핵 폐기의 대결단을 내리면 국제사회도 그에 상응하는 대
결단을 내려 북한경제의 재건을 지원하겠다는 기획이다. 비무장지대의 한강 하구에 남북경제협력을 위한 ‘나들 섬’을 만들어 ‘한반도의 맨해튼’ ‘동북아의 허브’로 조성하겠다는 구상도 비핵 개방 3000의 구체적 실천 방안 가운데 하나다. 비핵 개방 3000은 매우 구체적으로 북한에 대한 지원내용을 밝히고 있다. 300만 달러 이상 수 출 기업 100개를 육성하고, 30만의 산업 인력을 양성하며, 400억 달러 상당의 국제 협력 자금을 투입하고, 에 너지, 기간통신망, 항만, 철도, 도로, 운하 등의 인프라 건설에 협력하며, 인간단운 삶을 위한 복지를 지원하겠 다는 것이, 비핵 개방 3000의 청사진이다. 이 구상이 실현되면, 북한경제는 현재 1인당 소득 500달러 기준으로 매년 15~20%의 성장을 지속하여 10년 후에는 국민소득 3,000달러 경제로 도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까지 어떤 정부도 내놓지 못한 파격적인 공약임에는 틀림없다. 문제는 실현가능성이다. 비핵 개방 3000 구상의 몇 가지 전제 조건은 이 구상의 실현에 걸림돌로 작용할 것처럼 보인다. 첫째, 비핵 개방 3000 구상에 따르면 북 한에 대한 경제적 지원은, 북한의 핵 폐기가 이루어져서 한반도 평화체제가 정착되고 북미 북일 관계가 정상 화된 이후에 시작된다. 비핵 개방 3000은 오랜 시간에 걸쳐 이루어질 수도 있는 한반도 평화 과정에서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6자회담 이외에는 아무런 정책 대안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비핵 개방 3000 구상은 개성 공 업지구와 같은 남북 경제협력이 한반도 평화 과정의 한 구성 요소임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 셈이다. 둘째, 비핵 개방 3000은 남이 북의 경제정책을 좌지우지하겠다는 개발독재식 발상을 담고 있다. 비핵 개방 3000의 실현을 위해서는 북의 체제 전환이 이루어져야 할 뿐만 아니라 북이 남의 ‘사실상의 식민지’로 기능해야 한다. 비핵 개방 3000은 상대방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구상일 수 있다. 외교는 상대가 있는 게임이다. 비핵 개방 3000 구 상은 남북 공영의 가능성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는 진일보한 정책으로 평가될 수 있다. 그러나 이 구상의 실현 가능성과 수용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비핵 개방 3000에 이르는 과정에서 반드시 필요한 남북의 화해와 협 력을 위한 정책이 제시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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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발표했다. 북한의 위성발사에 대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대북제재 결의 2087호 를 채택하자 “세계의 비핵화가 실현되기 전에는 조선반도비핵화도 불가능하다는 최 종결론”에 도달했고, “6자회담 9·19공동성명은 사멸되고 조선반도비핵화는 종말”을 고했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박근혜정부의 출범에 앞서 2013년 2월 12일 북한은 3차 핵실험을 했다. 북한은 핵실험 이후 핵무기가 “소형화”, “경량화”되었고, “핵억제력의 다종화”가 이루어졌다고 주장했다. 핵억제력의 확보를 위한 물리적 능력의 강화였다. 2013년 3월 북한의 3차 핵실험에 대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대북제재 결의가 채 택되고 같은 시기에 전개된 한미합동군사훈련에 대한 북한의 반발이 증폭되면서 동 아시아의 불안정을 야기하는 북미갈등, 한미협력, 남북갈등의 악순환이 다시 시작되 었다. 북한은 3월 8일 남북한의 불가침과 비핵화에 관한 합의의 폐기를 선언했고, 판 문점 연락통로를 폐쇄했다. 그리고 다음 날 “핵보유국 지위의 영구화”와 “정전협정의 백지화”를 선언했다. 그리고 3월 30일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에서 “경제건설과 핵무 력건설을 병진”하는 노선을 공표했다. 헌법전문에 핵국가를 명시하는 사상 유례가 없 는 사건과 더불어, 국내법의 제정을 통해 핵보유의 영구화를 다시금 확인했다. 긍정 적으로 해석한다면, 핵보유를 통해 억제력을 확보한 상황에서 경제에 나머지 자원을 투입하겠다는 의지로 읽힐 수도 있다. 2013년 4월 북한은 남북한 협력의 유일사례인 개성공업지구를 잠정폐쇄했다. 북한의 이른바 병진노선을 한미는 인정하지 않았다. 핵문제를 둘러싼 미중대립은, 2013년 6월 미중정상회담에서 나타나듯, 미국의 ‘비핵 화를 전제로 한 대화’와 중국의 ‘비핵화를 위한 대화’로 엇갈리고 있었다. 미국은 북 한의 병진노선을 수용할 의사가 없음을 밝혔지만, 중국은 병진노선을 언급하지 않았 다. 중국은 한반도 비핵화,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 대화와 협상을 통한 문제해결이라 는 자신들의 3원칙을 고수했다. 미중정상회담의 효과는 북한이 북미 고위급회담을 제안하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북한 은 군사적 긴장상태의 완화, 정전체제의 평화체제로의 전환, 핵 없는 세계의 건설 등 을 의제로 제시했다. 그러나 6자회담 참여국들이 개별적으로 또는 집단적으로 참여 하는 다양한 조합의 회담개최에도 불구하고, 6자회담은 재개되지 않았다. 남한이 북 한의 핵무기에 대해 킬체인과 한국형미사일방어체계로 대응하겠다는 10월 1일 한국 대통령의 발언 이후, 북한의 핵무기를 매개로 한 한반도의 안보딜레마는 보다 심화되 는 모습이다. 동북아 차원에서 안보딜레마도 확산되고 있다. 중국은 2015년 현재 6 자회담 의장국으로서 6자회담을 재개할 수 있는 능력이 없음을 보여 주고 있다. 북한의 제3차 핵실험과 함께 출범한 박근혜정부는 과거정부의 화해협력정책과 강압 정책의 사잇길이라 할 수 있는 한반도신뢰프로세스와 동북아평화협력구상을 통해 한 반도문제에 접근하고자 했다. 그러나 비핵화를 위한 다자협상으로서 6자회담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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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는 재개의 입장을 명확히 밝히지 않았다. 집권 초기 개성공업지구의 폐쇄와 같은 극단적 남북갈등을 겪었음에도 간헐적 남북대화는 만들어졌다. 반면 비핵화를 위한 협상의 실종으로 북한의 핵능력은 점진적으로 제고되는 현실을 맞이하고 있다. 6자 회담 재개를 위한 최소조건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특히 미국의 북한에 대한 전략적 인내와 맞물리면서, 박근혜정부 하에서 비핵화와 평화체제를 함께 논의 하는 6자회담이 재개될지는 불투명한 상태다. 박근혜정부가 평화체제란 의제를 완전 히 제외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2014년 벽두부터 등장한 이른바 '통일대박론'은 평 화체제를 포섭하지 않는 논리를 담고 있다. 통일의 경제적 효과만 강조될 뿐, 통일의 주체와 방법은 생략되어 있는 담론이다. 통일대박론은 북한을 포함한 타자에 대한 인 정을 담고 있지 않기 때문에, 북한으로부터 이른바 흡수통일의 담론으로 읽힐 수밖에 없다. 평화체제가 통일대박론을 대체하지 않는다면, 남북한이 서로의 필요에 따라 한 정된 대화를 진행하는 형태로 남북관계가 유지될 가능성이 높다. 만약 남북대화, 북미대화, 6자회담이 선순환하는 국면이 도래하지 않는다면, 미국과 중국이 사실상 북한 핵무기의 ‘실존적 억지력’을 인정하면서 핵확산을 막기 위해 ‘공 동관리’하는 형태의 미봉책이 장기화될 수도 있다. 아시아로의 복귀를 선언한 미국과 신형대국관계로 미국과 맞서고자 하는 중국이 갈등의 관계로 간다면, 한반도를 둘러 싸고 힘의 정치가 반복될 가능성이 높은 상황이다. 북한은 자신의 ‘지정학적 이점’을 활용하여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등거리외교를 하고(김철우, 2000), 남북관계가 간헐 적 대화만을 유지하는 상태가 계속될 수도 있다. 한반도를 둘러싸고 전개되는 힘의 정치는 한반도의 평화를 위태롭게 한다. 남한은, 북미대화를 강제하거나 6자회담을 소집할 능력은 없지만, 북미대화의 촉매로 서 역할을 할 수 있고, 만약 6자회담이 재개된다면 6자회담과 같은 다자외교에서 영 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중견국가’(middle power)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김치욱, 2009). 만약 남한이 ‘평화국가’(peace state)를 지향한다면,22) 국제적 맥락에서 핵군 축과 핵폐기를 향한 흐름, 동북아 비핵지대화 구상, 그리고 한반도 비핵화와 관련된 22) 평화국가는, “국가의 폭력성과 폭력적, 억압적 국가장치에 기초한 평화가 아니라 평화적 방법에 의한 평화를
추구하는 새로운 정치체”다. 평화국가를 구성하는 기본원칙은 다음과 같다. 첫째 평화국가도 물리적 폭력의 정 당한 독점이 유지되는 국가이지만 평화국가는 물리적 폭력의 적정 규모화 및 최소화를 추구한다. ‘비도발적 방 어’ 또는 ‘방어적 방어’의 개념이 그 사례일 수 있다. 둘째, 평화국가는 평화외교와 윤리외교를 지향하는 국가 장치를 필요로 한다. 셋째, 평화국가는 정치경제적인 측면에서 구조적 폭력이 제거된 ‘적극적 평화’를 지향하 는 축적체제에 기초한다. 평화의 이념도 녹색의 이념처럼 궁극적으로는 반국가적이지만, 국가의 존재를 인정하 는 한 녹색․평화국가가 시민권을 획득하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현실에서는 ‘과정-구조’의 성격을 지닌다. 국가 와 시민사회의 다양한 행위자의 역할조화 및 관계형성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평화국가의 형태로, 안보국를 지 양하려는 평화지향적 안보국가와 앞서 지적한 구성의 원칙을 충족하는 평화국가를 설정할 수 있다. 그리고 평 화국가의 외곽에 국가성을 넘어선 정치체를 상정해 볼 수 있다. 구갑우(200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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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의에서 주도권을 행사할 수도 있다. 만약 북한에 급변사태가 발생할 경우에도 국제 적으로 통일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다. 물론 남한의 평화국가 구상에 대해 북한이 반응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북한과 같은 약탈․군사국가와 소통하려는 노력이 남 한에게 손실을 야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최소한 남한 내부의 진화를 가능하게 할 뿐 만 아니라 세력균형정책보다는 평화의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 한반도 평화체제의 의 제화 자체가 쟁점이지만, 남한정부가 적극적으로 비핵화와 평화체제의 연계를 의제화 하는 것이 비용-편익의 관점에서도 유용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이 의제화에서 발생할 수 있는 쟁점에 대한 나름의 대안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6. 한반도 평화체제의 쟁점23) 한반도 평화체제는 1953년 정전체제의 대체물이다. 북한은 평화체제를 의제화하려 하고 있지만, 노무현정부와 달리 이명박정부의 입장은 불분명했다.24) 전쟁이 일시적 으로 중단된 상태인 정전체제의 새로운 체제로의 전환이 필요한가, 라는 질문에 대해 아니오와 예로 나누어질 수 있다. 정전체제 또는 분단체제의 유지에 이해관계를 가지 는 정치사회세력들은 분단체제의 재안정화를 선호할 것이다. 예를 들어, 한미동맹에 는 그것의 유지․강화에 이해관계를 가지는 이익집단들이 연루되어 있다. 만약 평화체 제가 한미동맹의 유연화를 결과한다면, 평화체제의 의제화에 강한 반대세력이 될 것 이다. 북한을 적으로 유지해야만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정치사회세력도 같은 의사를 보일 것이다. 반면 정전체제의 새로운 체제로의 전환을 생각하는 좌우파 정치사회세력들도 존재한 다. 보수우파 가운데는 북한의 붕괴 가능성을 고려하며 ‘흡수통일’을 지향하는 세력 이 있다. 만약 한반도에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는 패권국가 미국과 잠재적 패권국가일 수 있는 중국이 분단의 평화적 관리를 선호한다면, 흡수통일을 추구하는 이른바 ‘통 일외교’와 충돌할 수도 있다. 진보좌파 가운데는, 정전체제 극복의 대안으로 ‘국가연 합’을 제시하는 세력이 있다. 남북의 협력을 기반으로 한반도를 포함한 동북아질서의 지각변동을 시도하는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박세일, 2009; 백낙청, 2009). 그러나 흡수통일과 국가연합 모두 정전체제를 대체하는 현실적 대안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23) 6장은 구갑우(2010)의 일부를 수정·보완한 것이다. 24) 이명박정부는 2010년 8․15 경축사에서, 통일세를 의제화하고, 평화공동체-경제공동체-민족공동체로 연결되는
통일방안을 제시했다. 통일세는 통일을 비용의 측면에서 생각하게 한다. 북한은 통일세 제안이, “《북급변사 태》를 념두에 두고 도이췰란드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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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제통일》을
꾀하는 극히 불순한 망동이”라고 강력히 반발한 바 있다.
두 대안 모두 중간단계를 결여한 비약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치적 다수의 동의를 얻기 어려울 수 있다. 정전체제를 대체하는 새로운 체제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정치사회세력들에게 정전체 제의 평화체제로의 대체는, 너무 앞서 가지 않는 현실적 대안일 수 있다. 뿐만 아니 라 평화체제는 지금-여기서 흡수통일과 국가연합에 동의하지 않는 국내적 좌우파는 물론 국제적 행위자를 설득할 수 있는 의제기도 하다. 그러나 평화체제로 가는 길에 는 국내적으로, 국제적으로 논의해야만 하는 피해갈 수 없는 쟁점들이 있다. 이 쟁점 들의 조정과정이 평화체제를 둘러싼 협상의 주요 내용이 될 것이다. 주요 쟁점들을 살펴보자. 첫째, 평화체제는 남한과 북한, 북한과 미국이 서로 더 이상 적과 위협이 아닌 상태 다. 따라서 평화체제 협상과정에서 적과 위협에 기초한 안보담론의 변경이 요구된다. 평화체제 논의는 안보담론의 평화담론 내지는 평화지향적 안보담론으로의 전환과정 일 수밖에 없다. 즉 관련 당사자들의 공동안보에 입각한 관여가 재개되는 것은, 평화 담론에 기초한 평화체제 구축의 출발점이다(Kim, 2010). 평화체제의 구축과정에서, 안보담론의 법적, 제도적 장치들인 남한의 헌법 3조 영토조항이나 국가보안법 그리 고 북한의 조선로동당 규약 등의 수정이 의제화될 것이다. 둘째, 평화체제와 비핵화의 관계다. 이명박정부와 박근혜정부는 사실상 선 비핵화 후 평화체제의 입장을 견지했다. 박근혜정부는 2014년 7월 청와대 국가안보실 명의로 발간한 국가안보전략 보고서에서 “여건이 성숙되는 경우” 평화체제를 논의할 수 있 다고 밝힌 바 있다. 박근혜정부가 최초로 평화체제를 공식적으로 언급한 문건이 이 보고서다. 이 “여건”은 최소한의 비핵화 프로세스의 시작을 의미할 것이다. 반면 북 한은 2015년 남북한의 8·25합의 이후 선 평화협정 후 비핵화로 해석될 수 있는 북미 평화협정 체결제안을 하고 있다. 과거 선 비핵화 협상과 비핵화와 평화체제의 동시 협상이 실패로 돌아간 이유가 북미 적대 때문이었다는 논리가 그 제안에는 내장되어 있다(2015년 11월 14일 북한 외무성 대변인 대담). 북한은 북미 평화협정의 양심적 중재자로서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의 역할을 기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 러나 한국을 배제한 평화협상 및 협정은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 9․19공동성명처럼 다 자협상을 통해 비핵화와 평화체제를 동시 의제화하는 길 이외에 다른 대안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누군가의 ‘양보’가 필요하다. 남한정부가 비핵화와 평화체제 의 동시 진행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한반도 평화체제 논의는 가장 큰 장벽을 만나게 될 것이다. 셋째, 평화체제의 내용과 형태도 논란의 대상이 될 것이다. 평화체제(peace reg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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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평화라는 이슈영역에 만들어진 규범, 규칙, 원칙, 절차 등과 같은 제도의 집합이 라고 할 수 있다. 간략히 정리하면 평화체제는 평화의 제도화다. 핵심 구성요소는 전 쟁의 종료를 선언하는 평화조약이다. 쟁점은 평화조약이 각 국가에서 비준을 요구하 는 강제성이 있는 형태가 될 것인지의 여부다. 다른 쟁점은, 평화조약의 서명국이 누 가 될 것인지의 여부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2007년 노무현대통령과 김정일위원장의 10․4공동선언에서는 3자 또는 4자의 정상이 참여하는 종전선언에 대한 언급이 있었 다. 1953년 정전협정에 유엔과 중국과 북한이 서명했다는 점을 생각할 때, 논란을 야기할 수 있는 표현이었다. 남한이 정전협정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평화조약의 당사자가 될 수 없다는 주장은 적절하지 않다. 남한은 연합군의 형태를 취했던 유엔 군의 일원이었고, 무엇보다도 북한이 정전협정을 위반했다고 문제제기를 하곤 했던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정전협정의 당사자와 평화조약의 당사자는 일치하 지 않는다. 그렇다면, 평화조약은 최소한 남북미, 그리고 여기에 중국이 참여하는 방 식이 될 가능성이 높다. 9․19공동성명도 6자회담과는 별도의 한반도 평화포럼을 통해 평화체제를 논의하는 방식을 제안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북한은 평화협정의 당사자를 미국으로 제한하려 했다. 그러나 남한의 남북당사자주의와 북한의 북미당사자주의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보다 많은 국가의 참여하는 평화조약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넷째, 비핵화 평화체제가 함께 논의될 때 비핵화의 의미를 둘러싼 논쟁이 예상된다. 북한이 주장하는 “조선반도 비핵화”는 북핵의 폐기는 물론 한미동맹에 의해 남한에 제공되는 미국의 핵우산 및 동북아 차원의 핵군축 및 핵철폐와 연계되어 있다. 비핵 화의 의미를 둘러싸고 북미는 물론 한미와 남북한 사이에도 이견이 표출될 가능성이 있다. 북한의 핵개발이 한미동맹의 군사력에 대응하는 정책이라면, 북한이 추구하는 비핵화는 한반도에서 핵의 반입과 반출을 금지하는 ‘비핵지대화’의 성격을 가지고 있 다.25) 따라서 한미동맹에 대한 근본적 문제제기도 불가피할 것이다.26) 한미동맹의 법적 기초인 한미상호방위조약에는 북한의 위협이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한미동맹은 25) 한반도 비핵화를 동북아 비핵지대화와 연계하는 것도 평화체제 구축과 관련된 과제다. ‘한반도 비핵화-동북아
시아 비핵지대-핵 없는 세상’을 연결하는 ‘3차원 비핵화’도 주목의 대상이다. 한반도 비핵화를 북한 비핵화가 아니라 동북아 비핵지대화로 확장하자는 주장이다. 동북아 비핵지대화는, 비핵국가인 남한, 북한, 일본에 대한 핵보유국 미국, 중국, 러시아가 소극적 안전보장을 제공하는 것을 핵심 내용으로 하고 있다. 2009년 11월 23일 핵군축 및 비확산을 위한 의원 네트워크(PNND) 한국위원회가 주최한 한반도 비핵화와 동북아비핵지대를 위 한 한일국제회의 자료집 참조. 다른 지역의 비핵지대화와 관련하여서는, Acharya and Boutin(1998); Redick(1981) 참조. 26) 정전협정 4조 60항에 따르면, “한국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보장하기 위하여 쌍방 군사령관은 쌍방의 관계각국
정부에 정전협정이 조인되고 효력을 발생한 후 3개월 내에 각기 대표를 파견하여 쌍방의 한 급 높은 정치회담 을 소집하고 한국으로부터의 모든 외국군대의 철수 및 한국문제의 평화적 해결 등의 문제들을 협의할 것 이에 건의한다”고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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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을 적과 위협으로 설정해 왔다. 미군이 한국에 주둔하는 이유도 북한의 위협 때 문이었다. 평화체제 논의에서 한미동맹과 북한이 중국과 맺고 있는 군사동맹의 형태 변환 또는 정치동맹화 또는 폐기가 의제화될 수 있다. 핵에너지의 평화적 이용권은 비핵화와 연관된 또 다른 쟁점이다. 북한은 9․19공동성 명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경수로 제공을 요구하고 있고, 우라늄농축을 통해 핵에너 지를 사용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남한은 2014년 만료되는 한미 원자력협정 개정협상에서 사용후 핵연료의 재처리 권한을 얻는 것을 협상의 주요한 목표로 설정 한 바 있다. 1974년 체결된 한미 원자력협정은 사용후 핵연료의 재처리를 제한하고 있기 때문이다. 남한은 건식처리 공법인 ‘파이로프로세싱’(pyro-processing)은 핵물질 을 분리할 수 없기 때문에 재처리가 아닌 재활용이라고 주장하면서, 사실상 재처리의 권리를 확보하려 했다. 2015년 11월 25일부터 발표된 한미 신원자력협정에 따르면 한미합의와 미국의 동의를 필요로 한다는 전제가 있지만, 우라늄저농축과 파이로프로 세싱을 위한 길을 열면서 제한적이지만 사용후 핵연료의 재처리를 할 수 있게 되었 다. 핵비확산에 협력한다는 규범이 관철되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지만, 한미 신원자 력협정은 향후 비핵화 협상에서 핵에너지의 평화적 이용권 그리고 사용후 핵연료의 재처리를 문제를 둘러싸고 쟁점이 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다섯째, 평화체제가 만들어진다고 할 때 정전협정을 관리하고 있는 유엔군사령부의 존폐여부도 쟁점이 될 것이다. 유엔군사령부의 성격과 관련하여, 유엔군사령부가 유 엔의 보조기관이라는 견해와 유엔군은 미국을 중심으로 한 참전국들의 연합군이라는 견해가 대립하고 있다. 전자라면 유엔군사령부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로 해체 되는 것이고, 유엔군사령부가 한미연합군으로 해석하는 후자의 입장에 서면 평화협정 체결 이전에도 유엔군사령부를 해체할 수 있다(정태욱, 2009).27) 평화체제와 관련하 여, 유엔군사령부를 대체하는 새로운 평화관리기구를 만들 것인가 아니면 유엔군사령 부를 존속시키면서 새로운 평화관리의 임무를 부여할 것인가를 둘러싼 논쟁도 있다. 유엔군사령부의 해체를 전제로, 새로운 평화관리기구로, 남북미중의 4자 공동군사위 원회 또는 남북의 공동평화관리위원회, 또는 국제평화감시단 등을 제시하는 의견들이 경쟁하고 있다(평화·통일연구소, 2010). 여섯째, 한반도 평화체제와 동북아 다자간 안보협력의 관계설정도 논의될 수 있다. 동북아에는 유럽과 달리 양자동맹 - 한미동맹, 미일동맹, 북중동맹 - 이 군사협력의 지배적 형태다. 미국의 재균형정책에는 한미일 삼각동맹에 대한 구상도 담겨 있다. 동맹 대 동맹이 대립하는 구조를 넘기 위해서는 동북아 수준에서 안보에 대한 대안 27) 정태욱(2009)은 유엔군사령부의 정식명칭이, United Nations Command가 아니라 미국 지휘 하의 ‘통합사령
부’(Unified Command)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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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 개념화에 다양한 행위자들이 동의해야 한다. ‘공동안보’(common security)를 지향 하는 한반도 평화체제는 최소한의 동북아 다자간 안보협력에 의해 담보되지 않는다 면, 지속가능성이 훼손될 수밖에 없다. 한반도 평화체제와 동북아 다자간 안보협력은 선후관계의 문제가 아니라 한반도 평화체제를 매개로 동시적으로 진행되는 사안이 될 필요가 있다. 일곱째, 한반도 평화체제의 구축과정에서 다루어야 할 또 다른 쟁점들이 ‘군축’과 ‘군 비통제’, 북한과 미국, 북한과 일본의 ‘관계 정상화’ 그리고 ‘남북관계의 정의’ - 민족 내부의 관계인가, 국가 대 국가의 관계인가 - 를 둘러싼 논쟁이다. 군축과 군비통제 는 평화체제의 필수적 구성물이다. 또한 한 논자의 지적처럼 북미관계의 정상화가 한 반도 평화를 위한 추진장치가 될 수도 있다(Park, 2009). 그러나 북미관계의 갈등의 역사를 생각한다면, 관계정상화는 추진장치라기보다는 최종 결과물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남북관계의 정의와 관련하여 평화체제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서로의 국가성에 대한 인정이 필수적이라고 할 때, 평화체제는 남북관계를 국가 대 국가의 관계로 정 의하게 할 수도 있다.
7. 한반도 평화체제의 길: 결론에 대신하여 공포의 균형이 부활할 수도 있고, 한반도와 동북아에서 새로운 평화과정이 시작될 수 있는 이 지각변동의 정세에서, 평화의 길을 가고자 하는 세력들은 무엇을 할 수 있 을 것인가. 민주화와 탈냉전 이후 남한의 국내정치는 한반도를 포함한 동북아 국제정 치의 향방을 결정하는 핵심 변수의 역할을 하고 있다. 한반도 평화체제를 둘러싼 논 의도 예외는 아니다. 남한 내부에서 평화체제를 둘러싼 쟁점에서 실현가능성을 고려 한 단계를 설정하고 합의를 도출할 수 있을 때, 국제적 수준에서 평화체제에 대한 합의가 가능할 것이다. 따라서 한반도 평화의 길을 둘러싼 국내에서의 담론투쟁이 가 지는 파급효과를 고려해야 한다. 무엇을 할 것인가는 세 수준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지구적 수준과 동북아 수준과 남북한 수준이다. 각 수준을 관통하는 실현가능한 연대의 원칙으로 우리가 제시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반전․반핵․평화의 원칙’이다. 다른 하나는, ‘평화적 방 법에 의한 평화’의 원칙이다. 소극적 평화의 원천인 반전의 원칙과 더불어 우리는 사 람의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는 적극적 평화의 의제를 제기해야 한다. 첫째, 한미일의 동맹강화를 핵심으로 하는 미국의 재균형정책과 미중이 서로의 핵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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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익을 존중하며 협력해야 한다는 중국의 신형대국관계가 맞서고 있는 동북아에서 역설적이지만 비핵화를 매개로 한 한반도 평화체제는 미중의 협력은 물론 동북아 다 자안보협력을 도출할 수 있는 의제다. 둘째,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남한의 국가와 시민사회는 현실주의적 세력균형론에 얽 매어 있는 두 대안인 자주냐 동맹이냐를 넘어서서 동북아 수준에서 냉전체제의 해체 를 유도하고 동북아 군축과 비핵지대화를 실현할 수 있는 동북아 다자간 안보협력체 의 건설을 의제화할 수 있어야 한다. 동북아 다자간 안보협력은 한반도 평화체제의 구축을 위한 국제적 조건이다. 한반도 핵문제의 해결을 위한 6자회담은 동북아 수준 에서 다자간 안보협력을 구축할 수 있는 기회로 활용되어야 한다. 셋째, 남북관계 수준에서는 이른바 6․15담론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필요하다. 남북의 경제협력이 한반도에서 일하는 평화체제의 건설을 위한 토대가 될 수 있지만, 기능주 의적 접근이 자동적으로 정치군사적 협력을 결과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북한의 핵실험은 기능적 접근의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 다른 하나는 보다 근본 적인 것으로 남북관계의 화해와 협력이 진행될수록 남한은 비용을 북한은 체제의 붕 괴를 고민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달리 표현하면 통일을 이야기하면 할수록 누가 통일의 주체가 되어야 하는가라는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는 것이다. 남북관계의 딜레 마를 극복하는 한 방향이 한반도 평화체제의 구축이다. 평화체제 구축 이후에 대해서는 두 견해가 있을 수 있다. 첫째, 평화체제의 구축을 통일과정의 한 구성요소로 생각할 수 있다. 둘째, 평화체제가 남한과 북한이 국가 대 국가의 관계로 참여하는 국제레짐으로 정의된다면, 평화체제 이후의 남북관계는 열린 상태가 될 수 있다. 평화체제 이후의 남북관계가 통일지향적일 수도 있고,28) 두 국가 로서 공존을 지향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29) 두 선택 모두 한반도의 미래일 수 있다. 평화체제 구축 이후, 서론에서 지적한 것처럼, 북한의 급변사태가 발생한다면, 흡수 통일이 대안으로 부상할 것이다. 그러나 평화체제의 구축 이후 한반도가 안정화된다 면, 남한과 북한이 서로를 설득하고 합의를 도출하는 방식으로 한반도의 미래를 결정 하게 될 것이다. 평화체제의 구축이 동북아 수준에서 미국과 중국을 비롯한 주변국의 동의 없이 이루 어지기 어렵다고 할 때, 평화체제 구축 이후 통일은 남한과 북한의 국내적 수준과 28) 예를 들어, 평화․통일연구소(2010)는, “외국의 간섭 없이 자주적이고 평화적인 방식으로” 통일에 합의하는
것을, 한반도 평화협정의 한 조문으로 설정하고 있다. 29) 통일이 불가피하게 야기할 수밖에 없는 강행적 동질화와 그 과정에서 발생할 수밖에 없는 권력투쟁의 문제를
제기하면서 통일을 담론과 실천의 영역에서 추방하려는 정치사회세력 또는 통일이 남한식 신자유주의의 수출 이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통일을 반대하는 정치사회세력이 등장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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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수준의 변수에 의해 그 향방이 결정될 것이다. 미국과 중국이 분단의 평화적 관리를 선호한다고 할지라도 남한과 북한이 국내적 수준에서 통일에 대한 합의를 도 출하고 그것을 기초로 서로 협력할 수 있다면, 통일의 가능성은 높아질 것이다. 즉 남한과 북한 내부에서 통일에 대한 선호가 높아지고,30) 그 선호를 형성하게 하는 통 일담론을 가진 정치사회세력이 남한과 북한에 형성되고, 서로 협력할 수 있을 때, 평 화체제는 통일의 길의 기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통일에 대한 동의가 이루어질지라 도, 통일국가의 형태는 선험적으로 결정되지 않을 것이다. 통일국가의 형태로 단일민 족국가, 복합국가, 네트워크 지식국가 등의 다양한 대안들이 경쟁하게 될 것이다(전 재성, 2009). 마지막으로 지속가능한 한반도 평화를 위해서는 남북한 각 국가 내부의 체제전환이 필수적임을 다시 강조한다. 평화국가론은 이 지점에 주목한다. 남북한 두 국가가 군 비증강을 중단하고 적극적 평화를 실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북한의 핵무장은 북한 주민의 삶의 질을 악화시키는 행위다. 가용한 자원의 배분에서의 우선성 문제만 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다. 북한의 핵무장은 주민의 평화와 녹색에 대한 감수성을 심 각하게 훼손한다. 뿐만 아니라 억지의 상호작용을 통해 만들어지는 군사적 긴장은 한 반도를 포함한 동북아에서 군산복합체의 입지를 강화하고, 평화지향적 세력의 입지는 약화시킨다. 남한에서는 무엇보다도 평화와 녹색 그리고 복지를 연계하는 정치적 기 획이 필요할 것이다. 복지와 녹색을 실현하는 국가 만들기는 한반도에서 적극적 평화 를 담지한 평화국가 만들기의 원천이다. 또한 평화국가 만들기가 없는 복지국가 만들 기는 보수세력의 기획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남북한의 체제전환을 기초로 그리고 남북한 각자의 체제전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남북한의 기능적 교류에서, 그리고 북한에 대한 개발지원에서 복지·녹색․평화의 가치를 공유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
30)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소의 2010 통일의식 조사에 따르면, 통일의 필요성과 기대감은 높아지고 있지만, 현실주
의적 접근태도도 뚜렷하다고 한다. 통일이 필요하고 통일이 남한에 이익이 된다는 비율은 50%를 넘고 있지만, 통일이 자신에게 이익이 된다는 응답은 약 24%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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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통일과 체제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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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제 4
통일독일의 사회통합과 복지국가의 전환
황규성 / 한신대학교 교수, 참여사회연구소 『시민과 세계』 편집위원
1. 서론
4반세기에 가까운 세월이 통일독일에 내려앉았다. 200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휘 청거렸던 독일이 승승장구하자 유럽의 환자에서 슈퍼스타로 거듭나고 있다는 찬사가 이어지고 있다. 독일 통일을 바라보는 우리의 담론도 “통일 후유증”에서 독일 배우기 로 바뀌는 분위기다. 우리의 담론지형은 독일의 경제적 성과에 따라 진자운동을 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독일통일에서 정치적·경제적 통합의 중요성을 부인할 사람은 없겠지만 사회적 통합은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아 왔다. 독일 안에서도 통일 당시 우려와 희망이 교차했던 것이 사실이다. 동독출신과 서독출 신의 이질성, 동독주민의 2등 국민 의식이 녹아있는 “오씨-베씨”(Ossi-Wessi), 과거 동독시절을 그리워하는 “동독향수”(Ostalgie)와 같은 언어들이 통일 이후 사회통합이 순탄치 않음을 말해준다. 하지만 뿌리는 같아도 40년을 헤어져 살아온 부부가 살림 을 합친 것 치고는 대단히 성공적인 재혼으로 보인다. 사회통합은 항상 역행의 가능 성을 내포하고 있는데 독일의 경우 적어도 ‘괜히 합쳤으니 다시 갈라서자’는 목소리 는 듣기 어려우니 스스로 A+는 아니더라도 A나 B+정도는 매기는 것 같다. 사회통합은 개념규정하기 쉽지 않다. 강신욱 외(2012)는 “다양한 특성을 지닌 구성원 들이 공동체에 대한 소속감을 갖고 공동의 비전을 공유하며 긍정적인 관계를 유지하 는 상태”로, UN 경제사회이사회는 “모든 구성원이 평화로운 사회적 관계를 달성, 유 지하는 역동적 과정"으로 보고 있다(UNDESA). 이 글은 사회통합을 ‘모든 구성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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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하여 포용 사회를 만들어 가는 역동적 과정’으로 정의한다. 이런 개념규정은 세 가지 요소를 포함한다. 첫째, 사회통합은 모든 구성원의 참여를 전제한다. 사람들을 사회적 지위로 갈라놓을 수 있는 요인들인 인종, 성별, 학력, 재산, 지식 등을 막론하고 모든 구성원이 참여하 는 것을 요구한다. 사람들이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수동적인 대상에 머물러 있는 상 태는 사회통합이라고 보기 어렵다. 둘째, 사회통합의 지향점은 포용사회(inclusive society)다. 포용사회란 불평등, 격차, 사회적 배제가 최소화되는 사회를 의미한다. 포 용사회는 개인적, 집단적 차원의 다양성이 인정되어야 하며 이런 의미에서 억지로 하 는 같아짐(coerced assimilation)과는 다르다. 셋째, 사회통합은 상태(state)가 아니라 과정(process)이다. 따라서 사회통합에는 최종 종착지가 있을 수 없고 오직 더 나은 사회를 향한 끊임없는 과정으로서 종착역 없는 여정이다. 복지국가는 통일독일의 사회통합에 기여해왔다. 복지제도는 소득보장과 사회서비스로 대별할 수 있는데 소득보장제도가 임노동자의 소득상실에 대한 사회보장으로서 시장 의 역할을 보완하는 데에서
출발한 반면 사회서비스는 구성원의 구체적인 삶을 지
원하는 제도로서 가족의 역할을 보완하는 데에서 출발했다(박수지, 2009; Bahle, 2007:19). 뿐만 아니라 두 가지 제도는 서로 상이한 방식으로 사회통합에 기여한다. 물질적 생활조건을 마련하는 소득보장제도가 오래된 사회적 위험에 대처하는 사회정 책의 하드웨어라면 새로운 사회적 위험에 대처하는 사회서비스는 소프트웨어에 해당 한다. 이 글은 통일독일의 복지국가 변동과 사회통합의 관계를 조명하고자 한다. 2절에서 는 통일 이전 동서독 복지체제와 사회통합의 관계 및 통일 당시 복지제도 통합을 평 가한다. 3절에서는 통일 이후 독일 복지국가의 변화를 소득보장과 사회서비스의 결 합 측면에서 파악한다. 4절은 실업과 소득불평등을 중심으로 사회통합의 실태를 점 검하고, 5절에서는 통일 이후 약 25년을 종합적으로 평가하고 결론에서 시사점을 제 시하고자 한다.
2. 동서독 복지체제와 사회통합, 그리고 제도이식
1) 서독 복지국가와 사회통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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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기본적 특성이 유지되고 있는 독일(서독) 복지국가의 작동방식은 <그림 1>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
그림
<
1>
서독 복지국가의 작동방식
복지제도 사회보험 공공부조
노동시장 완전고용 표준고용관 계
물리적 기반
연금보험 실업보험 질병보험 산재보험
사회서비 스
노사관계 거시조합주의 산별포괄협약 공동결정
규범적 기반
자료: 황규성(2011, 28)
1949년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전성기를 구가하던 독일 복지국가는 안정적인 경제 성장, 노동과 자본 간 세력 균형이라는 물리적 기반과, 복지에 대한 합의가 튼튼히 결합되어 있었다. 독일 복지 제도의 근간을 이루는 노동 세계는 노동시장과 노사 관 계로 구성된다. 노동시장의 핵심적인 문제는 고용의 양과 질이다. 1970년대 중반까지 는 실업률 1%대의 완전고용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고용의 양적 측면에서 완전고 용이 달성되었다면, 고용의 질적 측면에서는 기간의 정함이 없는 전일제 노동, 이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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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 표준 고용 관계(Normalarbeitsverhältnis)가 일반적인 고용 형태였다. 독일 모델은 노동시장 제도와 부문별・전국적 임금 협상에 의존해 작동한다는 지적이나, 노동시장 정책은 독일 사회국가성의 본질적이고 특수한 요소라는 지적은 노동 세계와 복지 제 도의 강력한 상관관계를 일컫는 말이다(Gottschall & Dingeldey 2000; Wiesenthal 2004). 연금보험, 실업보험, 산재보험, 질병보험 등 사회보험이 노령, 실업, 산업재해, 질병 등 사회적 위험에 대하여 보험방식으로 대처하는 것이 복지제도의 근간을 이룬다. 사 회정책은 정규직 노동자를 핵심적인 대상으로 설계되어 “임금노동중심 사회정 책”(lohnarbeitszentrierte Sozialpolitik)이라 불린다. 따라서 서독 복지국가는 노동시 장에서 완전고용이 이루어지고 정규직 고용형태가 지배적일 때 원활하게 작동하는 구조다. 노동시장이 고용의 양 측면에서 완전고용이 달성되고 질 측면에서 정규직으 로 균질화되어 있는 상태에서 은퇴, 실업 등 소득상실 요인이 발생할 때 연금보험과 실업보험은 넓은 포괄범위, 높은 급여, 재정안정을 동시에 확보할 수 있다. 서독이 추구했던 복지제도는 남성이 사회보험에 가입하는 정규직 일자리를 통해 가 족을 부양하고 노령․질병․실업․산업재해 등 사회적 위험에 직면했을 때 사회보험을 통 해 남성 소득자와 그 가족이 성취한 생활수준을 보장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Bleses & Seeleib-Kaiser, 2004: 19; Butterwegge, 2005: 272). 서독 복지국가의 제도적 설계는 높은 수준의 소득보장 등 강점을 가지고 있음에 틀 림없지만 사회통합의 관점에서는 몇 가지 구조적 취약성을 안고 있었다. 첫째, 복지 제도의 핵심 적용 대상자는 사회보험이 적용되는 ‘정규직 임금노동자’로서 이들과 타 자들 사이에 내부자-외부자 문제를 안고 있다. 비정규직이나 가정주부 등 비경제활 동 인구는 복지참여에서 배제되는 경향이 있다. 둘째, 불평등과의 관계에서 서독 복 지국가는 재분배가 상대적으로 약하다. 사회보험 중심의 복지제도는 수지상등의 원리 에 의해 대체로 낸 만큼 받아가는 구조로서, 노동시장의 불평등은 복지의 불평등으로 연결된다. 여기에서 다시 한 번 노동세계의 중요성이 부각되는데, 산업 및 지역수준 에서 맺어지는 단체협약의 포괄범위가 임금소득 불평등 뿐 아니라 복지급여의 평등 에도 영향을 미친다. 셋째, 성 역할의 분리를 전제한다. 젠더의 관점에서 복지국가를 파악하는 연구들은 독일을 남성과 여성의 역할이 분리된 “남성 생계 부양자 모델”로 묘사한다(Lewis, 1992; Sainsbury, 1996). 남성은 돈벌이, 여성은 가정주부 역할이 결합된 모델(Ernährer-Hausfrau-Modell)이 성립하면서 엄격하지는 않더라도 온건한 성별분업이 이루어졌다. 이런 성격은 사회서비스의 미발달로 이어졌다. 특히 성 분업 에 입각한 보수적 가족주의와 가족정책으로 사회서비스, 특히 보육 서비스는 발달되 지 못했다. 사회보험이 차지하는 중요성 때문에 “사회서비스 국가”인 스웨덴과 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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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독을
“사회보험국가”(Sozialversicherungsstaat)로
지칭하기도
한다(Kaufmann,
2003:194). 결국, 서독 복지국가는 남성의 정규직 완전고용에 의존하는 제도적 설계를 갖추고 있 었다. 전후 약 1970년대 중반까지 약 30년간은 이런 조건이 충족되었지만 그 이후 노동시장이 동요되면서 복지제도의 작동 자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 고 통일 이전까지 커다란 제도적 변화를 수반하지 않은 상태에서, 다시 말하면 구조 적 취약성을 유지한 채 부분적으로 수리하면서 복지국가를 지탱하고 있었다.
2) 동독 호네커가 집권한 1971년 이후 틀을 갖춘 동독 사회정책은 제도적으로 ① 노동권 (Recht auf Arbeit), ② 일원적 사회보험(Einheitsversicherung), ③ 재생산 영역의 사 회정책, ④ 기업 차원의 사회정책, ⑤ 특권층의 부가 규정 및 특별규정 등 다섯 가지 축으로 구성되었다(Schmidt, 2004). 동독에서 복지제도와 사회통합의 관계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모든 이 에게 일자리를 권리로 부여했다. 1949년 헌법에서 노동권은 국가기구에 의해 실현된 다고 천명했고, 1974년 헌법 24조는 “독일민주공화국의 모든 시민은 노동권을 가진 다. 동독의 모든 시민은 사회적 요구와 개인의 자질에 맞게 일자리에 대한 권리와 자유로운 직업 선택권을 가지며, 노동의 양과 질에 따라 임금을 요구할 권리를 가진 다”라고 규정했다. 사회적 기본권인 노동권은 모든 주민에게 일자리가 보장된다는 의 미였다(Bouvier, 2002: 117-18). 1977년 노동법은 기업이 노동자를 해고할 수 있는 경우와 절차를 규정하기는 했지만 실제로 행사되는 경우는 드물었다. 고용을 복지의 요소로 본다면 일자리가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됨으로써 포괄성은 매우 높 았다. 복지제도 적용 대상자의 폭 가운데 여성은 서독과 크게 대비된다. 재생산 영역의 사 회정책으로 지칭되는 여성 및 가족정책, 아동보육정책 측면에서 양성평등이 강하게 추진되었다. 노동권은 남녀를 가리지 않아 통일 직전인 1989년에 여성 고용률은 90%대에 이르렀다. 여성의 노동은 노동력 동원과 같은 경제적 동기도 작동했다. 여 성의 임금은 남성보다 약 1/3이 적었지만 여성은 가구소득의 약 40%를 기여했다고 전해진다(Geißler, 2006: 307; Merkel, 1994: 372). 둘째, 동독의 불평등은 임금소득보다는 특권층의 존재라는 정치사회적 측면에 좌우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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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다. 국가가 설정한 임금표는 “동일성과 동일임금” 원칙에 입각하여 성과에 따라 책 정되었고, “모든 계급과 계층의 수렴”이라는 사회주의적-평등주의적 원리에 따라 노 동자의 임금은 평준화되었다(Geißler, 2006: 85). 최고 소득층과 최저 소득층의 평 균임금은 1:3 정도에 불과했고 여기에 가족소득을 따지면 1:2 정도로 낮아졌다고 한 다(Wehler, 2008). 서독의 불평등이 주로 시장소득에 의해 발생된다면 동독에서는 권력과 지위에 기인하는 바가 컸다. 동독의 계급은 사회주의 통일당 독점엘리트, 행 정관료계급, 실무행정계급, 산업노동자계급, 농업노동자계급, 기타계급으로 분류된다 (Wehler, 2008). 이런 지위의 차이에 따른 불평등은 작업장의 소득격차에 그치지 않 고 주택과 소비재까지 연결되었다(Engler 1999: 180-81). 특권층의 존재로 인해 일 원적 사회보험은 모든 사회구성원을 평등화하는 효과는 제한적이었다(Hoffmann, 2005: 112).
3) 복지제도의 이식 상이한 복지체제를 가지고 있었던 동서독은 1989년 여름부터 시작된 동독의 동요로 부터 1990년 10월 3일 통일될 때까지 짧고 굵게 통일독일의 복지체제에 대한 협상 을 거쳤다. 체제전환 국면을 맞이한 동독은 여성단체가 나서 사회헌장(Sozialcharta) 을 채택하면서 “사회적 성과”로 자랑스럽게 여겼던 사회정책적 요소들을 가능한 한 유지하고자 했다. 1항에는 노동권, 2항에는 노동생활의 민주화 인간화에 이어 제3항 에는
양성평등과
아동양육을
다루었고
제9항에는
사회보험이
다루어졌다
(Unabhängiger Frauenverband 1990). 사회헌장은 소득보장과 사회서비스에 선차성 을 부여했다기보다는 사회정책에 대하여 포괄적으로 요구를 담아냈다. 사회헌장은 1990년 3월 2일 인민의회의 의결을 거쳐 체제전환을 맞이하는 동독의 입장으로 정 리되었다(Ritter, 2006). 그러나 공식적인 입장정리와는 별개로 대중적 요구는 생활수준 향상에 무게중심이 쏠렸다. 동독의 시위에서 주민들은 민주화를 요구하는 “우리가 국민이다”에서 출발하 여 통일을 요구하는 “우리는 같은 민족이다”를 거쳐 “(서독) 마르크화가 우리에게 오 면 우리는 여기(동독)에 있을 것이지만 아니면 우리가 마르크화로 다가갈 것이다”로 구호를 바꾸어 나갔다(황규성, 2011). 사회주의권 가운데 경제발달 수준이 높은 것으 로 인정되었던 동독에서조차 생활수준의 향상, 구체적으로는 서독 마르크화와 구매력 에 대한 열망이 얼마나 강했는지를 짐작케 한다. 그러나 통일 독일의 복지제도는 서독이 설계했다. 1990년 5월 18일 동서독 사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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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결된 국가조약은 동독이 서독의 사회적 시장경제체제를 도입함과 동시에 사회정책 도 서독의 것을 수용하도록 합의되었다. 국가조약 4장은 사회공동체를 다루고 있는 데 노동법 질서상의 기본원칙(17조), 사회보험의 원칙(18조), 실업보험 및 고용촉진 (19조), 연금보험(19조), 건강보험(20조), 보건의료제도(21조), 산재보험(22조), 공공부 조(22조)가 포함되어 서독의 제도를 동독에 이식하기로 결정되었다. 조항의 제목과 순서만 보더라도 서독 복지제도의 체계가 그대로 반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국가조약 1조에 “사회공동체가 화폐동맹 및 경제공동체를 보충한다”고 명시하고 있 다는 점이 눈에 띤다. 여기에서 “보충”의 의미가 해석을 필요로 하는 지점이다. 국가 조약의 핵심은 화폐통합과 동독의 경제개혁인데 사회공동체는 경제적 체제전환을 보 충적으로 지원하는 것으로 역할을 설정했다. 사회공동체의 조항 구성은 노동질서를 먼저 내세우고 사회보험을 그 다음에 배치한 후 공공부조를 맨 마지막에 위치시켰다. 사회서비스에 대한 언급은 없다. 사회정책은 동독의 경제적 체제전환을 노동관계, 고 용촉진, 사회보험, 공공부조로 지원한다는 뜻으로서 소득보장과 사회서비스의 결합이 라는 관점에서 보면 소득보장제도를 통해 체제전환을 지원한다는 것이다. 소득보장 중심의 체제전환 지원은 서독 사회정책의 특징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거 니와 동서독 당사자의 의지가 교묘하게 합쳐진 결과였다. 동독 체제전환에서 사회정 책 분야의 핵심인물인 서독 노동사회부 장관 블륌(Blüm)은 사회정책의 역할을 동독 지역의 체제전환을 측면지원(soziale Flankierung)하는 것으로 여겼다(Ritter, 2006: 196). 소득보장정책에 돈을 풀어 체제전환이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겠다는 뜻이다. 결과는 그렇게 되었다. 동독의 체제전환은 서독과의 협상을 거쳐 통일이라는 형식으로 진행되면서 동독의 사회주의 계획경제를 서독의 ‘사회적 시장경제’로 온전하게 대체했다는 의미에서 제 도이식(Institutionentransfer, Lehmbruch, 1991)을 특징으로 한다. 이 과정에서 동독 의 체제전환에는 수혜와 피동성의 이중주가 만들어졌다. 당시 우수한 사회경제적 성 과를 구가하고 세계적으로 공인된 서독의 “사회적 시장경제”를 도입할 수 있었으니 다른 나라와 비교하면 동독에게는 일종의 “특권”이었던 셈이다(Wiesenthal, 1996). 그 특권의 알맹이는 높은 소득보장이었다. 동독도 소득보장 중심의 사회정책이 싫지 않았다. 동서독 마르크화의 화폐교환비율을 원칙적으로 1:1로 설정했다는 점과 사회 보험, 특히 연금보험에서 동독의 수급권을 서독의 제도 안에서 흡수했다는 점에서 동 독 체제전환에서 소득보장에 무게중심을 실었다는 것이 드러난다. 소득수준의 향상에 대한 기대감, 면적은 넓지 않지만 일단 그 마당에 들어서면 높은 탑을 쌓을 수 있다 는 희망은 동독이 서독의 사회적 시장경제 체제를 체제전환의 모델로 수용하게 하는 데 주요한 역할을 했다. 원칙적인 1:1 화폐교환, 연금 및 실업보험의 적용은 체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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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 초기 생활수준의 향상을 요구했던 동독주민의 기대를 충족시키기에 부족하지 않 았다. 그러나 제로에 가까운 체제전환 탐색 비용은 공짜가 아니었다. 이웃 나라들은 망망대 해에서 난파선을 수리해야 했던 반면 동독은 서독으로 피항할 수 있었지만, 스스로 배를 수리하지 못한 채 남의 손에 맡기는 대가를 치렀다(Offe, 1996: 151). 피동성의 대가 중 하나가 동독적 사회통합이다.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로의 체제전환은 필연적 으로 국가의 완전고용 보장을 포기하게 만들었다. 제도적으로는 양성평등과 여성의 높은 경제활동참여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했던 보육제도 역시 놓아버릴 운명에 처했다. 이런 결과는 동독의 고도로 발달된 보육의 사회화가 서독의 가족주의로 대체됨을 예 견하는 것이었다. 높은 수준의 소득보장을 대가로 사회서비스를 희생한 것이 동서독 협상이 선택한 길이었다. 그러나 피동성의 대가는 당시에 민감하게 인식되지 않았다.
3. 통일 이후 복지국가의 변동 소득보장과 사회서비스의 결합이라는 관점에서 세 시기로 나누어 복지국가의 변화과 정을 살펴본다.
1) 소득보장의 적용(1990~1997) 동독이 독일연방공화국(서독)에 편입되면서 동독의 체제전환은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오래되었지만 동독지역에는 새로운 사회적 위험이 현실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동독지 역의 실업률은 1991년에 10.2%에서 출발하여 1997년에는 19.1%로 치솟았다 (Bundesagentur für Arbeit). 대량실업은 소득상실의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서 그만큼 의 정책수요를 발생시켰다. 노동시장에서 은퇴할 연령에 도달한 동독지역의 노인 역 시 연금정책의 수요를 일으키는 집단이었다. 독일 전체 기준으로 65세 이상 노인인 구는 1991년에 15%에 이르렀다(DRV, 2014: 290). 실업이나 노령과 같은 사회적 위험이 정책수요의 폭발로 이어진 것과는 정반대로 여 성 노동시장의 변화에 따라 보육서비스 수요는 급감했다. 동독시절 약 90%에 달했 던 여성 고용률은 체제전환 직후 55~57%로 뚝 떨어졌다(WSI). 여성의 활발한 직업 노동 참여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던 보육시설은 다수가 문을 닫아 3세 미만 아동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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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명 당 어린이 집 자릿수가 1990/91년에 52.6개였던 것이 1998년에는 31.7개로 급격히 떨어졌다(DJI, 2005). 고도로 발전되었던 동독지역의 보육 서비스는 가파른 내리막길을 걷게 되었다. 체제전환 2기에 동독지역의 소득보장정책 수요는 급증한 데 반해 보육서비스 수요는 비자발적으로 크게 위축되었다. 오래된 사회적 위험과 새 로운 사회적 위험이 압축적으로 공존했지만 전자는 정책수요의 팽창, 후자는 정책수 요의 대폭 축소라는 상반된 양상을 띠게 되었다. 통일 초기에는 통일 협상 당시 체제전환 특수적인 사회정책이 집행되었다. 노동시장 정책 전체 중에서 실업급여, 조기퇴직 수당, 실업부조 등 임금대체 급여에 투입된 재 정의 비중은 1991년에 42.6%에서 1994년에는 63%를 차지했다(황규성, 2011: 140). 연금은 1992년에 연금이양법이 시행됨으로써 몇 가지 특수한 규정을 제외하고는 제 도적으로 연금제도가 통합되었다. 동독지역 연금수급자 수는 1992년에 3,817,484명 에서 1995년에 4,533,646 명으로 늘어났다. 월 평균 연금 수급액은 1990년에 302 유로에서 1995년에는 658유로로 5년 사이에 2배 이상 증가했는데 1995년에 서독지 역의 월 평균 수급액이 638유로였다(DRV, 2014: 168, 208). 사회서비스 중에서 서독이 장기간에 걸쳐 준비해 온 요양보험제도가 1995년부터 시 행됨으로써 동독지역은 앉은 자리에서 서독이 마련한 예기치 않은 혼수를 받게 되는 행운을 누렸다. 더구나 노인 서비스의 발달수준이 높지 않았던 동독지역으로서는 요 양보험 도입은 축복이었다. 그러나 보육은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보육서비스의 비자 발적 위축에 대한 정책적 조치는 뚜렷한 것이 없었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서독의 전통적인 가족주의에 뿌리를 둔 소극적인 보육정책이 동독지역에 닻을 내리게 되었 기 때문이다. 이 시기 정책공급은 특히 약 4년간은 동독의 체제전환을 대상으로 하는 정책이 구사 되었지만 그 이후 체제전환 특수성을 서서히 걷어 내고 독일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정책으로 서서히 변화하기 시작했다. 사회보험은 가입경력을 요건으로 급여가 지급되 는 것이 원칙이지만 체제전환을 맞이하여 가입한 적이 없었던 동독 주민을 일종의 가입의제를 통해 적용한 것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특수규정들은 효력을 상실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제도별로 차이가 있다. 실업급여는 수급기간 이 경과하면 더 이상 급여대상자가 되지 않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특별규정의 적용에 서 벗어나게 되지만 연금은 일단 한번 적용대상자가 되면 계속 적용을 받게 된다. 체제전환 비용 중에 연금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구조적 원인도 여기에 있다. 사회정책은 동독지역의 체제전환에 이중적인 효과를 나타냈다. 하나는 상당한 수준의 소득보장이 이루어지면서 동독주민의 생활수준 향상 욕구를 충족시켰다는 점이다. 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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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연금의 경우는 수요를 충족시키고도 남을 만큼 충분한 수준으로 정책이 공급됨으 로써 잠재적인 체제전환 역류요인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효과를 낳았다. 화폐의 1:1 교환과 후한 연금수급액 및 실업급여는 동독주민이 소득보장의 풍요로움을 만끽하기 에 충분한 것이었다. 통일이 가져온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 동독 지역 설문 조사에서 1993년 11월에는 고용 창출 조치가 1위로 꼽혔고, 1996년에는 재정 지원, 연금 등이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Ritter, 2006: 299). 직간접적으로 소득을 보장하는 제도와 정책이 동독주민에게 호소력이 있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소득보장으로 동독의 체제전 환을 사회적으로 측면지원한다는 서독 노동사회부 장관 블륌의 구상이 실질적인 효 과를 낳음으로써 체제전환의 동력을 제공했던 셈이다. 반면, 보육서비스는 체제전환에 역효과를 낳을 가능성을 안고 있었다. 여성에게 일과 가정의 양립이 규범으로 정착되었던 동독이 독일의 동독지역으로 바뀌었지만 가치지 향은 급격히 변동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동독지역 여성들에게 노동시장 상황과 보 육 서비스의 후퇴는 성역할에 관한 가치와 실제 사이에 부정교합을 초래했다. 이런 점에서 사회정책이 체제전환에 미친 영향은 집단별로 착종되어 노인은 체제전환에서 득을 본 집단이, 여성은 손해를 본 집단이 되었다. 노인이 소득보장을 통해 통일의 승리자이긴 했지만 보육시설의 와해로 인해 손자․손녀들을 돌보야 하는 의무감을 떠 안게 되는 양면성이 있었다(Thelen, 2014: 195). 그러나 전반적인 사회정책의 효과는 두 방향의 상대적 힘의 크기에 의해서 좌우될 것인데, 이 시기에는 소득보장정책이 보육서비스의 와해를 덮고도 남을 만큼 위력이 충분했던 것으로 보인다. 서독 제도의 이식에 대한 무한한 신뢰가 작동되어 제기될 문제는 오랫동안 무시되었다(Thelen, 2014: 79).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육의 사회화와 여성의 역할에서 경험하게 된 후퇴 는 잠재적인 불안요인으로 남게 되었다.
2) 소득보장의 한계 노정(1998~2004) 1990년대 중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에 걸쳐 동독지역의 체제전환 뿐 아니라 독일 전체의 위기가 고조되었다. 세계경제에서 경쟁력이 흔들리면서 독일이 “유럽의 병자” 로 불린 것도 이 시기였다. 독일의 위기는 동독 지역의 체제전환의 위기이자 “통일의 위기”였다. 동독지역의 실업률은 2003년에 이르면 20%를 넘었고 2005년에는 20.6% 에 이르렀다. 독일 전체에서 65세 이상 고령자가 차지하는 비중도 2000년대로 접어 들면서 17%로 진입했다(DRV, 2014). 고실업과 고령화는 소득보장 사회정책의 수요 를 더욱 배가시켰다. 1997년에 이르면 독일 역사상 최초로 복지수급자 수가 취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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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를 상회하기 시작했다(Czada, 1998). 독일 사회국가의 위기 징후가 명확했다. 반면에 동독지역에서 보육서비스는 여성 노동시장과 궤를 같이 하는데, 여성 고용률 은 이전 시기보다 1~2%p 높아진 57~58%선에서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1998년 에 31.7개였던 3세 미만 아동의 100명 당 어린이 집 자릿수는 2002년에 37개로 소 폭 상승했다(DJI, 2005). 여성 고용률이 소폭 높아지기는 했지만 정체가 지속되는 가 운데 보육 인프라는 소폭 늘어나는 현상이 나타났다. 보육서비스 수요는 소폭 움직이 기는 했지만 체제전환 2기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이 시기에 이르면 체제전환 특수적인 정책은 자취를 감추고 사회정책이 독일전역을 대상으로 하는 정책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런데 독일 전체적으로 사회경제정책의 흐 름을 주도했던 것은 세계화, 경쟁력, 산업입지와 같이 사회정책이 경제에 부담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복지를 축소해야 한다는 담론이었다(황규성, 2011). 이런 진단은 다 소 과장된 측면이 없지 않지만 소득보장 사회정책의 공급역량이 임계점에 도달했음 을 알리기도 했다. 복지제도의 지속가능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고용이 지속적으로 증대되어야 하지만 조기퇴직과 같이 노동력을 줄이고 이들을 복지제도에서 떠안으려 는 처방은 “일자리 없는 복지”(Esping-Andersen, 1996)로서 “고용위기에 대한 잘못 된 대응”(Manow & Seils, 2000)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이 시기에는 사민당과 녹색당의 적녹연정이 집권했지만 소득보장 정책에서는 충분한 소득보장이 아니라 재정안정화와 경쟁력 강화로 방점이 옮겨졌다. 노동시장정책 영역 에서는 널리 알려진 하르츠 개혁이 시행되어 실업급여의 수급기간을 대폭 축소했다. 연금정책에서는 2001년에 공적연금이 아니라 민간연금을 활성화하는 리스터 연금이 도입되었다. 이 연금 개혁에서는 공적 연금의 운영 목표 자체가 바뀌었다. 연금보험 은 60% 후반 내지 70% 전반의 높은 소득대체율을 유지해 생활수준을 보장한다는 것이 오래된 목표였지만 연금개혁은 목표와 수단의 관계를 거꾸로 세웠다. 즉, 보험 료율 인상 억제를 목표로 삼아 이에 따라 지출이 결정되는 ‘수입 중심 지출 정책’으 로 변화했다. 그 결과 노령 시 수입을 보장한다는 오래된 연금 정책의 목표도 달라 졌다(Schmähl, 2004: 183). 2004년에는 지속성 요소가 도입되면서 급여수준을 인구 구조와 경기변동에 연동시켜 사실상 급여액을 하향시키는 조치가 취해졌다. 독일 사회경제정책의 방향전환이 있었지만 동독지역에서 체제전환 2기부터 적용된 연금은 이미 정착단계에 접어들었다. 연금수급자는 2002년에 들어 5백만명을 넘어섰 고 월평균 수급액도 1999년부터 600유로를 넘어 섰다(DRV, 2014: 168, 208). 즉, 커다란 정책의 변화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체제전환에서 연금이 가지고 있는 힘은 타격을 입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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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육정책 영역에서는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적녹연정의 집권기였음에도 불구하고 뚜 렷한 변화가 나타나지는 않았다. 다만,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를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보육시설 인프라를 확충해야 한다는 주장은 서서히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었다. 이는 후술하는 체제전환 4기의 보육인프라 확충에 밑거름을 뿌리는 역할을 했다. 이 시기에 이르면 소득보장정책이 동독의 체제전환에 미치는 영향은 안정성과 한계 가 동시에 나타났다. 연금의 경우 이전 시기부터 적용되었던 제도가 이미 완전히 굳 어져 노후소득을 충분히 보장하고 있었다. 2000년 현재 서독지역의 월평균 연금수급 액이 682유로였는데, 동독지역은 759유로였다(DRV, 2014: 208). 그러나 이런 안정 성 속에서도 정책의 기조는 축소로 방향을 잡았기 때문에 종전과 같은 추세로 확대 되기는 어렵다는 것이 명확해졌다. 소득보장정책이 동독의 체제전환을 지원하는 능력 은 포화상태에 이르렀다. 보육서비스가 체제전환에 미치는 영향은 체제전환 2기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보 육시설 이용률과 여성 고용률이 소폭 상승했다 하더라도 동독지역 여성의 가치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2000년에 시행한 조사에 의하면 동독지역에서는 남성과 여성 모두 유자녀 여성의 고용에 대하여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Rosenfeld et al., 2004). 체제전환 이후 10년이 경과했지만 보육 인프라는 여성노동에 부여하는 가치 와 부조화를 낳았고, 체제전환 2기에 통일의 “잃어버린 자”가 된 동독지역의 여성은 지위를 회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 독일 전체의 위기와 사회경제정책의 방향전환은 체제전환에서 맡은 사회 정책의 역할에서도 변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동독지역에 이식된 소득보장정책은 고용 확대를 전제로 작동가능했다. 고용이 늘어야 더 많은 사람이 조세와 사회보험료를 내 고 이를 기반으로 연금과 실업급여와 같은 소득보장정책이 움직일 수 있는데, 고용의 정체는 소득보장 정책이 임계점에 달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반면 고용, 특히 여성고 용을 늘이기 위해서는 보육시설 인프라가 확충될 필요가 있지만 단지 정책담론 수준 에 머물 뿐 정책으로 현실화되지는 않았다. 서독모델의 이식에 의한 체제전환, 구체 적으로 사회서비스를 희생한 소득보장정책 확대가 가지는 구조적 한계가 이 시기에 뚜렷하게 드러났다.
3) 사회서비스 사회정책의 부활과 역수출(2005~) 2005년부터 독일 경제는 반등하기 시작했다. 독일 경제의 국제경쟁력도 회복되었고 실업률도 낮아졌고,
유럽의 환자가 슈퍼스타로 거듭났다는
평가가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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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stmann et al., 2014). 동독의 체제전환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동독지역의 실업률은 2005년에 20.6%에서 2014년에는 11%로 급락했다(Bundesagentur für Arbeit). 오래된 사회적 위험 가운데 실업의 위험은 급속도로 감소해 갔다. 노후소득 보장이 요구되는 고령자의 숫자는 점점 늘어갔다. 독일 전체적으로 인구 중에서 65 세 이상 고령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2007년에 이르면 20.1%에 달했다(DRV, 2014: 290). 동독지역의 여성 고용률은 2005년에 58.9%에서 2012년에는 69.3%로 급격히 높아졌 다. 같은 기간에 3세 미만 유자녀 여성의 고용률은 43.7%에서 60.6%로 가파른 상승 세를 보였다(Statistisches Bundesamt). 경기호조에 힘입은 전반적인 고용의 상승세는 특히 여성에게 실현되어 가면서 일과 가정의 양립이라는 새로운 사회적 위험이 동독 지역에서도 현실로 나타나게 되었다. 소득보장정책은 체제전환 3기에 이미 더 이상 확대는 불가능하다는 점이 명확해졌다. 2007년에는 연금수급 개시연령을 65세에서 67세로 변경하는 법안이 통과되었는데, 이는 취업자 수와 연금수급자 수의 불균형을 조정하는 시도로서 연금제도의 틀은 유 지한 채 인구구조의 변화에 대처한 정책이었다. 체제전환 3기에 이미 소득보장정책 의 확대 가능성이 차단된 데 이어 수급연령 자체가 점진적으로 밀리게 설계함으로써 복지에서 고용으로 방점을 이동시키는 정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체제전환 2기 부터 적용된 연금제도는 동독지역에서 꾸준히 진행되었다. 2013년 현재 동독지역에 서는 5,034,218명이 월평균 873유로의 연금을 받고 있었다(DRV, 2014: 168, 208). 이 시기 보육서비스 정책은 획기적인 변화를 맞이한다. 2005년 선거에 의해 기민당 과 사민당의 대연정이 성립되면서 보육시설은 획기적인 전환을 맞이한다. 연정협약서 에서는 보육시설 확충을 “긴요한 사회적 과제”로 보고 2010년까지 전국적으로 보육 시설을 23만개 만들 것이라고 밝혔다(CDU, CSU & SPD, 2005). 그러나 보육시설 확충은 전통적인 가족주의로부터 이탈하는 정책이었기 때문에 기민당 내부에서도 반 대를 낳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8년에 법안이 통과됨으로써 보육시설은 대폭 확 충되기 시작했다. 전통적인 가족주의로부터 이탈은 패러다임적 변화로 지칭된다. 이 런 정책이 가능했던 것은 여성의 노동공급이 시대적 과제로 등장했고 이를 실현하는 중요한 수단이 보육시설의 확충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동독출신 메르켈 총리, 동독출신 가족부 장관 폰 데어 라이엔 장관이 포진하고 사민당이 연정 파트너로 참여하고 있었다는 점, 사용자 단체도 일가족 양립을 요구했다는 점 등이 전통적인 가족주의를 고수하려는 거부 행위자를 우회할 수 있었던 요인이었다 (Henninger & von Wahl,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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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책에 힘입어 보육서비스는 확산일로에 있다. 체제전환 이후 줄곧 내리막길을 걸 었던 보육서비스는 2006년부터 급속하게 늘어났다. 2006년에 39.9%였던 3세 미만 아동의 보육시설 이용률은 2013년에 49.8%로 급증했다(Statistisches Bundesamt, 2014). 아직 체제전환 이전 수준으로 회복하지는 못했지만 체제전환 이후 약 15년 동안의 추세와 비교하면 반등경향이 역력하다는 점에서 과거와 뚜렷이 대비된다. 소득보장정책의 확대가능성이 봉쇄되었다 하더라도 제도의 안정성은 동독지역 체제 전환의 경로를 순탄하게 하는 기능이 훼손되지는 않고 있다. 일정한 궤도에 오른 소 득보장정책은 이미 하나의 체계로 정착된 상태였기 때문에 다소간의 위축은 체제전 환에 그다지 중요한 역할을 하지는 않은 상태에 까지 이르렀다. 이 시기에 이르러 보육서비스는 소득보장정책의 한계를 메우면서, 혹은 그 이상으로 체제전환에 신작로를 놓게 되었다. 보육시설만큼은 과거의 모델로 복귀하면서 동독지 역의 주민, 특히 여성의 가치정향에 부합하는 제도 설계를 갖추면서 체제전환의 정당 성을 확보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여성 고용률의 상승과 보육 인프 라의 확충은 고용형태의 악화라는 그림자를 동반하는 것이기도 하다. 1991년에 동독 지역에서 여성은 81.2%가 전일제로 일하고 있었지만 2012년에는 그 비중이 57.3% 로 줄어들었다(WSI).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과 가정의 양립을 당연시하는 동독지역의 가치관을 기준으로 보면 이전 시기와는 다른 획기적인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다. 보육서비스의 확대는 동독지역에서 발달된 것이 서독지역으로 역수출되고 있다는 점 에서 주목을 끈다. 서독지역에서 3세 미만 아동의 보육시설 이용률은 2006년에 7.9%에 불과했으나 2013년에는 24.2%로 급증했다(Statistisches Bundesamt, 2014). 이 정책을 추진할 때 통일 이후 계속 동독지역의 부흥에만 매달려 왔지만 보육시설 만큼은 “서독지역 건설”이라고 천명한 바 있다. 이것은 보육인프라 측면에서는 서독 제도의 동독지역 이식이 아니라 동독제도의 서독지역 이식이 이루어졌음을 시사한다. 보육 인프라의 확충은 사회정책이 동독의 체제전환 과정을 지원하는 데 그치지 않고 독일 전체의 체질변화를 일으킬 잠재력을 가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4. 통일 이후 사회통합의 실태
1) 동독지역의 사회통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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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이후 동독지역의 실업률은 <그림 2>에서 보는 바와 같이 체제전환 초기에 급증 했다가 1997년부터 2005년까지는 약 20%에 이르는 고실업 상태를 면치 못했다. 2005년 이후로는 실업률이 급락하여 2014년에는 11%로 거의 체제전환 초기 수준으 로 회복했다. 실업률의 급락을 반영하듯 고용률도 초기에 낮아졌다가 2005년 이후 급증하고 있다.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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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동독지역의 실업률과 고용률 추이
자료: Statistik der Bundesagentur für Arbeit, Arbeitslosigkeit im Zeitverlauf, WSI GenderDatenPortal, Statistisches Bundesamt
고용증가의 이면에는 고용형태의 악화가 자리하고 있다. 동독은 남녀를 가리지 않고 전일제 근로가 일상화된 사회였지만 체제전환 이후 <그림 3>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전일제의 비중이 줄어들고 시간제의 비중이 늘어나고 있다. 특히 여성을 중심으로 시 간제가 급속히 확산되어 2012년에는 일하는 여성 중에 35%가 시간제로 일하고 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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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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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동독지역의 고용형태 추이
자료: WSI GenderDatenPortal
<그림 4>는 통일 이후 동독지역에서 1인당 가구소득은 꾸준히 늘어났음을 보여준다. 1991년에 각각 7,023유로에 불과하던 1인당 가구소득은 2012년에 18,005유로로 늘 어났고, 1인당 가처분 가구소득은 같은 기간에 8,388유로에서 17,614유로로 급격히 증가했다.
그림
<
동독지역 1인당 가구소득의 추이
4>
자료: Statistisches Bundesamt.
그러나 소득의 증가는 <그림 5>에서 보듯 소득 불평등과 빈곤의 확산과 공존하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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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가처분 소득 기준 지니계수는 1992년에 0.205에 불과했지만 2012년에 0.257로 늘어났다. 중위소득의 60%를 기준으로 한 빈곤율은 20%대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다.
그림
<
5>
동독지역의 지니계수와 빈곤율(%)
자료: SOEPMonitor, Statistisches Bundeamt.
2) 동서독 지역간 비교 통일 이후 실업률은 M자 곡선의 형태를 보이고 있다. 동독지역의 실업률은 체제전 환 초기에 급증했다가 1997년부터 2005년까지는 약 20%에 이르는 고실업 상태를 면치 못했다. 2005년 이후로는 실업률이 급락하여 2014년에는 11%로 거의 체제전환 초기 수준으로 회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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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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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동서독 지역의 실업률 추이
소득불평등과 빈곤을 보면 <그림 7>처럼, 동독지역의 소득불평등은 서독지역보다 낮 은 반면 빈곤율은 서독지역보다 높게 나타난다.
그림
<
7>
동서독 지역의 지니계수와 빈곤율 비교
주: 지니계수는 가처분 소득 기준, 빈곤율은 중위소득 60% 기준 자료: Statistisches Bundesamt.
한편, 복지지출의 동서독 지역간 차이에 대한 자료는 2003년까지 발표되었는데, GDP 대비 복지지출은 동서독 지역별로 편차가 큰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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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
8> GDP
대비 복지지출의 동서독 지역간 차이(%)
자료: BMGS, Sozialbericht 2005. 192-193
독일 사회경제패널(SOEP)1) 조사결과에 따르면 <그림 9>와 같이 전반적인 삶의 만 족도를 0점부터 10점까지 응답한 결과 동독지역 주민의 생활만족도는 1991년에 6.04점에서 출발하여 2012년에는 6.73점으로 높아졌다. 생활만족도의 수준은 동서독 지역간 격차가 점점 줄어들어 조만간 근접할 것으로 예측된다.
그림
<
9>
전반적 생활만족도의 추이
자료: SOEP
1) Sozio-oekonomische Panel, http://www.diw.de/soe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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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평가 통일 독일의 사회통합에는 빛과 그림자가 공존해왔다. 동독의 순조로운 체제전환, 소 득의 향상, 생활만족도의 점진적 상향 등이 빛이라면 불평등의 확대, 고용형태의 악 화 등은 그림자에 해당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독의 체제전환과 통일이 거대한 사 건임을 고려한다면 독일은 통일 이후 성공적인 사회통합의 길을 걷고 있다고 판단된 다. 성공적인 사회통합은 사회적 시장경제라는 사회경제 체제의 생명력을 증명한다. 1990년대 중후반부터 나타난 독일 경제의 침체는 사회적 시장경제의 위기 담론을 낳 았고 동시에 동독 체제전환의 위기를 상징하기도 했다. 그러나 2005년 이후 독일 경 제의 회복에 힘입어 체제전환도 순조롭게 이루어지고 있다. 상대적으로 성공적인 동 독의 체제전환은 사회적 시장경제라는 서독의 사회경제체제가 동독지역에 뿌리내리 는 과정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사회적 시장경제라는 사회경제 모델의 생명력은 동독의 체제전환에서도 입증되고 있다. 복지국가는 성공적인 사회통합의 과정에서 상당한 기여를 해오고 있으며 동시에 복 지국가 자체가 변동되고 있다. 복지국가는 사회보험을 중심으로 후한 소득보장체제를 독일 전역에 확장함으로써 생활수준의 향상과 빈곤의 방지를 도모해 왔다. 사회정책 에 투입한 재정지출의 비중이 계속 증가추세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림 10> 에서 보듯 전체 이전지출액 가운데 주로 투자지원에 쏟았던 성장지향적 지출은 1994 년까지 20% 초반대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2005년 이후 10%선에서 머물렀다. 일반행 정이나 조세 및 균형재정 차원의 지출도 등락이 있지만 20%를 넘은 적은 없다. 지 출 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사회보험으로 1991년에는 47.1%에 머물렀 지만 2010년에는 69.6%에 이르렀다. <그림 11>은 체제전환 비용 전체 중에서 사회보험에 투입된 재정을 종류별로 나누 어 본 것이다. 연방정부가 사회보험에 지급한 보조금은 1991년에 16.8% 정도였으나 2010년에는 34.4%로 급격히 늘어났다. 사회보험 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연금보험으로서 1991년에 16.5%에서 2010년에는 25.7%로 급증했다. 반면에 실업급여 지급이 핵심을 이루는 실업보험은 비중이 급속도로 줄어들고 있다. 체제전 환 비용 중에서 연금보험이 차지하는 비중을 단순하게 연 평균으로 보면 25.5%에 이른다. 연금이 체제전환 비용 중 1/4을 차지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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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
10>
재정이전의 용도별 구성
자료: Kloß et al.(2012: 83-86). 재구성
그림
<
11>
재정이전 중 사회보험의 구성(%)
자료: Kloß et al., (2012: 84). 재구성.
그러나 3절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통일 이후 복지국가는 통일 이전 서독 복지국가와 는 다소 상이한 궤적을 그리고 있다. 복지제도의 변화를 놓고 보면 세 가지 성격 변 화가 감지된다(황규성, 2015). 첫째, 소득보장 중심에서 사회서비스 확대로 나아갔다. 약 15년 정도는 소득보장 일변도의 체제전환 지원방식이었다. 그러나 소득보장제도 가 동독의 체제전환을 지원하는 데에는 한계도 분명하다. 무엇보다 소득보장제도는 취업자 수, 고용률, 고용형태 등 고용에 크게 의존하는 데 노동시장 상황이 점점 경 색되고 노동시장 참여자 수와 복지제도 적용 대상자 사이의 비례가 깨진다면 소득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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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제도의 지속가능성에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동독 체제전환 이후 약 15년 동안 줄기차게 전개되어 왔다. 독일은 사회보험 중심의 사회보장체제가 새로운 사회적 위험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 하는 사례로 지적된다(Aust & Bönker, 2004). 동독의 체제전환은 서독 복지제도가 안고 있는 이러한 구조적 한계까지 이식했다. 체제전환 이후 약 15년 정도는 그 한 계가 수면 아래로 잠복해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사회서비스는 유력한 구원투수 노릇 을 했다. 특히 동독지역에서 보육서비스가 확대되면서 여성의 고용률은 전반적으로 높아졌고, 그 중에서 3세 미만 아동을 둔 여성의 고용률은 2005년에 43.7%에서 2012년에 60.6%로 급상승했다(Statistisches Bundesamt). 보육인프라 확충은 여성의 고용률 제고에 그치지 않고 동독 주민의 가치관에 부합하는 정책으로서 체제전환의 정당성을 높이는 유력한 수단으로 작동했다. 둘째, 소극적 사회정책에서 사회형성적 사회정책으로 나아갔다. 체제전환이라는 디렉 토리에는 사회적 위험이 압축파일 형태로 담겨있다. 오래되고 새로운 사회적 위험이 압축파일에서 풀어지는 순간 버퍼링을 일으키지 않으려면 사양도 좋아야 하지만 양 질의 프로그램도 있어야 한다. 소득보장정책과 사회서비스 정책은 독립적인 기능이 있다. 엄격히 구별되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소득보장정책은 오래된 사회적 위험에 대한 소극적 대응인 반면 사회서비스는 새로운 사회적 위험에 대한 대응임과 동시에 사전적·예방적인 성격을 가진다. 소득보장정책은 대표적인 사후적·교정적 사회정책이다. 다른 체제전환국과 마찬가지 로 동독 체제전환의 핵심은 경제적 체제전환이다. 소득보장 사회정책은 경제적 체제 전환 과정에서 나타나는 실업, 소득의 상실, 빈곤, 불평등은 계획경제에서 시장경제 로 이행할 때 반드시 부딪히는 난관을 사후적으로 교정하는 역할을 한다. 시장에서 불평등과 양극화, 빈곤이 확대되면 될수록 소득보장 사회정책의 수요는 늘어간다. 반 면에 사회서비스, 특히 보육인프라 확충은 사후적·교정적 차원의 사회정책이 아니라 사전적·예방적 사회정책에 해당된다. 사회서비스의 확대는 고용 증대에 기여한다 (Heinze, 2011). 보육인프라가 확충되면서 여성 고용이 늘어나는 현상은 그 증가폭만 큼 사후적·교정적 사회정책의 잠재적 수요를 사전적·예방적으로 줄인다는 의미를 함 축한다. 사회서비스, 특히 보육서비스는 서비스 수요를 증대시키는 사회구조의 변동 에 의해 형성되는 수동적 반영물이기도 하지만, 그 자체가 사회변화를 촉진시키는 요 인이기도 하다(Dahme & Wohlfahrt, 2013: 26-34; Evers et al, 2011: 10). 이런 측면에서 사회정책은 사회문제에 대한 대응의 차원을 넘어 사회를 만들어 가는 기능 을 하는데, 동독의 체제전환에서도 보육서비스의 회복은 여성 노동시장 참여의 활성 화를 통해 고용측면에서 양성평등을 실현하는 기제로 작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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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복지국가는 동독의 체제전환 지원하는 데에서 독일 전체의 변화를 추동해 왔 다. 사회정책은 동독의 체제전환에 소득보장이라는 윤활유를 주입하도록 설계되었고, 소득보장에 힘입어 체제전환이라는 기관차는 출발한 지 약 15년 동안 커다란 고장 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동독의 체제전환을 지원하는 소득보장 사회정책’은 체제전환 초기 15년 정도 일정한 성공을 거두었다. 반면, 사회서비스의 확대를 특징 으로 하는 2005년 이후의 변화는 ‘독일 복지국가의 변화를 견인하는 사회정책’으로 변모했다. 그 대표적인 정책영역이 가족정책과 보육정책인데, 이는 동독의 체제전환 과정에서 사라졌던 요소들이 독일복지국가의 위기와 한계를 극복하려는 시도의 일환 으로 다시 도입되고 있다. 보육인프라가 서독지역에서 대폭 확충되고 있는 현상은 제 도이식 테제가 체제전환 초기에는 타당할지 모르지만 체제전환이 독일 전체의 변화 를 초래할 잠재력이 약 15년이라는 시간을 경과한 후 실현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 다. 적어도 사회서비스 영역만 놓고 보면 독일은 동독 덕에 “복지국가의 ‘뒤늦은’ 건 설”(Bahle, 2007: 281)에 나섰던 것이다. 이렇듯 초기에 동독의 체제전환과 사회정책 이라는 협소한 관계가 동독의 체제전환을 넘어 독일 복지국가의 변화를 가져오는 데 에까지 나아갔다. 넷째, 독일 복지국가는 통일 이후 성격이 변화해 왔다. 보수적·조합주의적 성격으로 부터 북유럽형 공동체주의적 요소와 영미형 자유주의적 요소가 가미되어 이중적 전 환을 하고 있다는 진단이 있다(Bleses & Seeleib-Kaiser, 2004). 이 가운데 가족정책 이나 보육 인프라는 공동체주의적 요소에 해당하는데, 이는 동독의 체제전환과 통일 로 인해 독일 복지국가 전체의 성격이 변화하는 징후인 것이다. <그림 12>에서 보는 바와 같이 독일 복지국가의 복지예산의 구성비를 보면 2005년 이후 사회보험의 비중 이 60% 중반대에서 초반대로 떨어지고 있다. 반면에 “촉진체계”로 불리는 아동, 가 족, 구직자 기초생계보장, 공공부조 등에 지출하는 비중은 증가추세에 있다. 물론 사 회보험의 비중이 여전히 높지만 가족정책과 보육 인프라 등의 확산이 복지국가의 성 격변화를 초래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산업별 단체협약의 약화에 대응하여 최근에 도입된 전국적 최저임금제도 역시 임금소득 불평등에 대한 복지국가적 대응 의 일환으로 해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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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
12>
독일 복지국가의 복지예산 구성의 변화
자료: BMAS, Sozialbudget 2013, Tabelle 1-2. p. 10
6. 시사점 독일의 통일에서 사회통합과 복지국가를 검토하면서 우리가 찾을만한 시사점을 정리 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한반도의 ‘사회적인 것’을 담아낼 사회경제체제에 대한 적극 적인 구상이 요구된다. 복지국가에 대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독일 복지국가가 영미 국 가들과 같이 급격히 일방적으로 재편되지 않았던 이유는 ‘사회적인 것’에 대한 비교 적 강고한 사회적 합의가 존재했기 때문이다(이호근, 2004: 88). 이러한 진단은 한반 도 통일에서도 ‘사회적인 것’에 대한 고민을 요구하게 한다. 독일처럼 북한의 체제전 환이 한국의 모델을 적용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면 과연 ‘2015년 현재 한국의 사회 경제체제는 무엇이며, 이 모델은 북한지역에 이식이 가능한가?’라는 근원적인 문제가 제기된다. 한국의 급속한 경제성장을 가능하게 했던 성장의 공유(shared growth, World Bank 1993)는 1997년 경제위기 이후 양극화와 이중구조화가 진행되면서 깨 져 나가고 있다. 이를 대체할만한 모델도 가시적이지 않다. 북한의 체제전환에 앞서 우리가 성장과 분배가 선순환을 이루는 모델을 새롭게 찾아내야 한다는 다소 엉뚱한 제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북한의 체제전환이 동독과 유사하게 한국의 모델을 수용한다는 전제하에 논의되어야 할 사안이고, 북한 체제전환의 방향은 점치기 쉽지 않다. 그러나 최소한 체제전환의 방향을 제시할 때 흡인력이 중요하다는 점에서 한국 사회경제모델의 정비는 그 자체로도 중요하지만 북한 체제전환의 관점에서도 시급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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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제다. 둘째, 위의 제도이식 테제와 관련된 이론적·정책적 함의로서, 체제전환은 일방이 자 신의 제도를 타방에 ‘덮어쓰기’ 방식으로 진행된다 하더라도 양 당사자 전체의 변화 를 초래할 수 있다. 제도이식 테제는 암묵적으로 서독은 변할 것이 없고 동독만을 변화의 대상으로 간주하고 통일로 인해 독일 전체에 변화를 유발할 수 있다는 점을 깊이 고려하지 않는다(Czada, 1998; Gissendanner, 1996). 하지만 통일은 동독의 체 제전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서독의, 더 나아가 독일 전체의 변동을 가져올 잠재력 을 가진다. 보육서비스는 동독 체제전환에서 교호작용이 일어나고 독일 복지국가 전 체의 미묘한 성격변화를 초래하고 있는 대표적인 사례다. 독일 사회정책이 동독의 체 제전환을 지원하는 것을 뛰어 넘어 독일 복지국가의 변화를 가져오는 데에까지 나아 갔다는 점은 제도이식 테제의 타당성이 부분적이라는 것을 말한다. 제도이식 테제가 가지는 이론적 한계는 한반도 통일시 사회정책의 설계도를 그릴 때 에도 유념해야 할 지점이다. 이 주제와 관련된 정책연구의 흐름은 우리의 제도를 적 용할 것인가 말 것인가, 적용한다면 시기와 범주를 어떻게 할 것인가, 비용을 감당할 능력은 있는가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문제들은 사회정책 구상에서 중요한 쟁 점임에 틀림없지만 통일이 한국 복지국가가 한 단계 더 도약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는 적극적인 사고는 찾아보기 어렵다. 보다 더 적극적으로 복지국가가 통일 사회가 지향하는 국가목표로 설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셋째, 통일복지의 철학과 정책의 결합에 관한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독일의 경우 에는 생활수준의 균등화를 최우선의 복지철학으로 세우고, 제도의 얼개 역시 이에 맞 게 구성했다. 이는 독일적 상황에서 동독 주민의 욕구와 서독 복지국가의 특징이 맞 아 떨어진 것이었다. 특히 체제전환 초기 국면에서 이 전략은 주효했다. 이와 관련하 여 사회정책을 둘러싼 초기조건(initial condition)에 대한 적극적 고려와 더불어 복지 의 미래에 대한 사고가 요구된다. 독일의 경우 복지제도의 짜임새를 선 소득보장, 후 사회서비스 확대로 가져갔다. 소 득보장을 든든히 한 연후에 사회서비스를 확대하는 방식은 독일적 길이 발현된 것이 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에는 복지제도의 결합을 순서(소득보장이 먼저 냐 사회서비스가 먼저냐)와 방점(소득보장 중심이냐 사회서비스 중심이냐)을 이분법 에 입각하여 상호배타적으로 따지기보다는 양자를 동시에 확충할 필요가 있다. 동독 의 상황에 비추어 보면 북한의 상황은 우선순위를 설정하기 보다는 동시병행할 필요 가 있어 보인다. 북한의 체제전환에는 오래된 사회적 위험과 새로운 사회적 위험이 동시다발적으로 압축되어 현실화될 가능성이 농후해 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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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독일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사회정책과 복지국가 개혁논의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통일당시에도 서독의 제도를 일방적으로 동독에 이식하지 말고 동서독 제도 중에서 좋은 점을 골라 새로운 사회보장 시스템을 만들자는 논의가 있었다 (Fischer, 2009). 결국 사회서비스는 동독적 가치가 나중에 부활한 사례에 해당된다. 독일에서 복지국가 개혁담론들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이런 논의들은 복지국가의 한계를 뛰어넘고자 하는 독일인들의 자기성찰임과 동시에 향후 개혁의 방향을 예견 해 볼 수 있는 시금석이다. 모든 이에게 인간다운 삶의 조건을 만들어야 한다는 “사 회적 인프라” 개념(Hirsch et al., 2013)이나 사회보험의 적용범위를 임금노동자에서 시민으로 넓히자는 “시민보험”(Bürgerversicherung) 개념들이 여기에 해당된다. 이런 개혁담론들로부터 착안하여 복지국가의 독일적 우회로를 답습하지 않고 신작로를 놓 을 수 있는 방법을 구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통일과 복지국가 건설의 후발 국으로 우리가 누리는 이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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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제 5
독일의 통일과 경제통합 - 평화복지의 조건 탐구
송태수 / 한국기술교육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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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제 6
국가연합과 독일 통일
이동기 / 강릉원주대학교 교수
“국가연합, 그것 말고 더 무엇이 있단 말인가” (Norbert Kostede와 Helmut Wiesenthal, 1989년 12월 19일 서독 녹색당 토론회 발제문)
I. 국가연합: 분단 독일의 ‘유령’을 찾아서 역사에서 패배하거나 망각된 발전 경로를 찾아 나서는 것은 역사를 이미 지나가버린 상태가 아니라 열려있는 미완의 운동으로 보는 현실비판적 역사 인식의 일차적 과제 다. 현실화되지 못하고 파묻혀버린 역사 발전 경로에 “호랑이의 도약”으로 “내딛는” (발터 벤야민 W. Benjamin) 것은 평평해진 과거로부터 억압된 희망과 더 나은 삶의 가능성을 폭파시켜 끄집어낸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1990년 통일 후 독일 의 경제적 위기와 재정적 부담 및 해결되지 않는 국제적, 국내 정치적 곤경과 사회 문화적 난제를 목전에 두고 흡수 통일 과정의 여러 문제점들에 대한 비판이 날로 쌓 이고 있다. 이에 1989/90년의 ‘전환(Wende)’기 지나치게 성급하고 일방적인 동화/흡 수 과정으로서의 통일에 대한 비판으로 ‘제3의 길’, ‘중립주의’ 또는 ‘국가연합’의 우 회로가 거듭 주목되고 있지만 그것의 구체적 내용에 대한 분석 및 그 대안적 가능성 과 현재적 함의에 대한 논의는 여전히 부족한 실정이다. 물론 ‘가지 않은 길’로서의 다른 대안적 통일구상들에 대한 관심이 탈맥락화와 과도 한 정치화로 성급하고 단선적인 실천적 결론으로 귀결되는 것은 여전히 경계할 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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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다시 말해 ‘지나간 것 속에 희망의 불을 지피는 것’이 곧장 대안적인 특정 정치 적 모델을 이상화하는 것으로 귀결될 필요는 없다. 다만 역사를 패권적 승자들의 ‘일 방통행로’로 보지 않는 것이 거듭 필요하다. 파묻혀 버린 것들이 애초 벼리고 있었던 실천적 문제의식 및 제한적이나마의 현실화 가능성을 송두리째 부정할 이유도 없거 니와 ‘무승부를 내버려 두지 않는 역사’(스테판 하임 Stefan Heym)의 무게에 짓눌려 역사적 현실이 지닌 다층적 깊이와 맥락을 가벼이 볼 구실도 없다. 각 역사 국면에 서의 다기한 갈래 길의 (재)등장과 지속 내지 동시성을 확인하고 특정 경로로의 선택 과 배제의 배경과 양상 그리고 의미를 복합적으로 드러내고 해명하는 것이 관건이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라면 흡수통일과는 다른 여러 대안적인 민족재결합의 길들, 그 중 에서도 특히 국가연합이 1949년부터 1990년까지 분단 독일에서 시종 통일의 모델로 구상, 제안, 토론, 언급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 자체가 아주 중요하다. 독일에서 국가연합 모델은 1989/90년의 ‘전환’기에 잠시 또는 통일 후의 후유증 때문 사후적 으로 망상되어 등장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한국은 물론 독일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국가연합 통일안은 1949년부터 1990년까지 분단 독일에서 오랫 동안 다양한 정치 세력 및 행위자들에 의해서 줄기차게 주장되어왔다. 먼저 국가연합안은 분단 독일의 정부간 공식적 통일 정책 대결에서 두 차례나 독일 통일의 길로 큰 정치적 관심을 끈 적이 있었다. 1957년 초부터 1966/67년까지 동독 정부는 국가연합을 자신의 민족/통일 정책의 근간으로 삼아 그 구체적 모델들을 서 독 정부에 연이어 제안했다. 한편 1989년 11월 말 동독 체제의 붕괴 국면에서 헬무 트 콜(Helmut Kohl) 당시 연방수상은 동독과의 국가연합을 연방국가로의 통일을 위 한 과도적 이행기로 구상한 ‘10개조 강령’을 세상에 내놓았다. 그런데 정부 차원의 이 두 국가연합 제안의 전사(前史)와 배경 및 그 반응과 영향의 역사를 세밀히 탐구 하면 할수록 분단 시기 전체에 걸쳐 점점 더 다채롭고 흥미로운 많은 국가연합안들 을 만나게 된다. 1970년대 초중반을 제외하면 1949년 “이중 건국”(크리스토프 클레 스만 Christoph Kleßmann)부터 1990년 통일 국면까지 독일에서 국가연합이 통일안 으로 제시, 논의되지 않은 적이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국가연합은 “이국가상태 (Zweistaatlichkeit)”의 분단 독일에서 “유령”처럼 떠돌았다. 물론 독일에서 국가연합 안은 현실화되지 않았기에 탐구 대상은 기본적으로 독-독 국가연합을 민족통일의 길 로 구상하거나 추구한 사유 흐름과 사상들, 제안들과 구상들 그리고 강령과 계획들이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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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개념과 관점
1. ‘ 운동’ 내지 ‘ 과정’ 으로서의 국가연합 이미 1949년 건국 직후부터 초기 몇 년 사이에 서독의 비판적 정치그룹들의 몇몇 중 심적 인물들이 독일문제의 국가연합 방식의 해결책을 처음으로 제시했다. 또 1950년 대 후반과 60년대에 걸쳐 서독에서는 다양한 정치 스펙트럼 출신의 국가연합 주창자 들이 등장했다. 그들 중 일부 그룹들이 앞서 제시된 동독의 국가연합안에 투항해버린 것이 사실일지라도 당시 서독에서 등장한 다양한 국가연합 지지와 적극적 관심을 순 전히 동독의 대서방활동의 결과로 돌릴 수는 없다. 그렇기에 다양한 국가연합 주창자 들, 즉 국가연합 방식의 통일의 길을 지지하며 나름의 독자적인 내지 대안적인 국가 연합 통일안을 제시했던 서독의 야당정치가들, 지식인들 및 언론인들의 자기이해를 통해 그들 나름의 다양한 통일안 구상의 성격과 특징들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한편,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전반기 하나의 독일민족의 존재를 거듭 확인하며 국가연합안을 통한 재(또는 새)통일 논의를 새롭게 개시시킨 이들은 일단 동독의 반 체제 인사들이었고 다음으로는 무엇보다 서독의 민족 좌파 및 우파 민족 혁명가들이 었다. 다소간 식상한 공통 논점들의 차원을 넘어서 그 국가연합구상들 사이의 미세한 차이들에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아울러 그 과정에서 중점적으로 살펴보아야 할 것 은 1980년대의 국가연합안 주창자들이 어떤 지점에서 1950년내의 국가연합안 논의 와 맞닿아 있으며 또 기간의 정세 변화에 조응해 어떤 새로운 사고의 단초를 발전시 켰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상의 문제제기를 통해 이미 암시한대로 1949년에서 1990년 분단 독일에서 국가연 합안은 - 토마스 니퍼다이가 연방주의에 대한 언급한 표현방식에 의거한다면 - 정 적인 개념이 아니라 “역동적”이고 “역사적인 개념”이었다. “과정” 또는 “운동”으로서 의 국가연합안의 이 역동적인 복합성과 차이들을 제대로 파악하려면 “야당, 언론매 체, 학자나 지식인들 등의 공적 공개적 견해들이 표명되는 반배후 영역”에서의 국가 연합 논의에 대한 특별한 관심과 집중적 탐구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그들의 국가연합 안 문제의식은 지속성, 다양성, 강도 등으로 인해 동베를린과 본에서의 정부 차원 국 가연합 정책 제안에 매개 내지 자극제적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권력중 심부 바깥의 광범위한 공공사회 영역에서 제출된 국가연합 사상과 숙고들 그리고 그 것과 정부정책으로 제출되었던 국가연합 구상들과의 연관관계들을 포괄적으로 다룰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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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국가연합과 연방국가의 구분? 국제법에서 양자의 차이들(국제법상 주체, 국가성, 결합의 방식과 안정성, 대내적 통 치권, 외교, 군대 소유 등)은 충분히 엄격하거나 명료하지 않다. 역사와 현실 속 양자 의 이행기나 중첩기 내지 모순적 발전들이 다양하게 존재. 양자는 법적 규정의 질적 인 차이가 아니라 공통 정치체의 권능 분할의 양적 구분이 중요. 해당 국가들 사이 의 정치적 의지와 정치적 주체들의 전망이 중요하다.
3. 전독일적 통합사적 관점 서독과 동독의 다양한 국가연합안들 사이에 여러 가지 차원의 연루와 상호의존이 존 재했다는 점에서 1949년에서 1990년 사이 분단독일에서의 국가연합안에 대한 총체 적 서술은 “통합 독일전후사의 관점”을 그 방법론적 전제로 필요로 한다. 이 관점은 이미 오래 전부터 크리스토프 클레스만을 중심으로 한 포츠담의 일군의 현대사가들 그리고 여러 다양한 저자들이 제기하고 일구어 왔던 것이다. 최근에 이 관점은 더 큰 주목을 받고 있다. 이 “전독일적 통합사적 관점”에서 이제 중요한 것은 동서독간 차이 내지 대립보다 유사성과 동등 비중성이 더 크고 중요함을 확인하는 것도 아니고 또 이 통합사적 관점을 수용하면서도 다시금 민주주의와 독재 사이의 규범적인 대립에 과도한 의미부여를 하며 연구 관점과 방법론들을 제한하는 것도 아 니다. 그것보다는 오히려 “불균형 연루”의 “다양한 형식들” 내지 “연관영역과 단계 들” 그리고 “동서 양측 독일인들의 공통의 경험공간 요소들”을 밝혀내는 것이 중요 하다. 그런데 인상적인 것은 전독일적 연관관계 내지 그것의 다양한 차원들에 대한 이 시 각이 아직까지도 여전히 독일정책 연구분야에서는 제대로 발전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다. 국가연합안의 발전과정에서 나타난 다양한 내독간 의존과 영향에 특히 무게중심 을 둠으로써 독일 통일을 위한 민족내부 국가연합을 동서독인들 ‘공통의 사유공간’ 내지 ‘전독일적 기대지평’으로 파악하며 그럼으로써 더 확대된 독-독간 관계 차원의 맥락에서 한 독일(통일)정치적 미래 지향을 국가연합안을 통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렇기에 이 연구는 흔히 이해되는 바로의 사상사 내지 관계사가 아니다. 또 이 연 구가 무엇보다 국가연합안을 단순히 정적이고 이미 확정된 개념세계로 전제하지 않 고 “과정”이나 “운동”으로 다룬다는 점에서 그리고 더 나아가 - 이미 강조했듯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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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의 주요 정치가들 내지 이론가들을 넘어서 다양한 행위 주체들의 상호교차적 인 지와 정치적 실천 또한 함께 주요한 연구대상으로 다룬다는 점에서 특히 일반적 의 미의 사상사 내지 양독 관계사의 시각을 넘어선다.
III. 분단 독일에서의 국가연합안들
1. ‘ 경계인’ 의 시간: 1949에서 1956년까지 국가연합안의 발생 1) 울리히 노악: 나우하이머 그룹 내부 토론 기록과 선언들, 독일중립화선언, 1949년 8월 26일 바이마르 연설
- 이상주의(역사발전 과정에서의 “더 나은 가능성” 전제), 중립주의(중립이나 중립주 의 보다는 “중립화” 개념 사용, 독일의 영구 비무장 중립화 주장, 소련의 안전과 경 제적 이익 고려의 필요와 동서상호간 이해조정에서의 경제교류의 매개적 역할 강조), 평화주의(오더 나이세 국경 인정, 민족주의적 내지 권력정치적 요구와의 근본적 단 절, 소국가들과의 연대와 그들의 역사적 역할을 자기화할 필요 제기) 기본적으로는 서방의 자유주의적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전제에 입각해 있고 외교나 안보내지 통일 문제외에 사회경제적으로는 제3의 길을 추구한 것은 아님, 그러나 “동서간 점진적인 정치적 사회적 조정 내지 동화” 예견. - 연방주의적 원칙 견지: 의회이외에 국가평의회 설치 주장, 주 대통령직 설립 필요, 전국적 차원의 연방경찰제가 아니라 주별 경찰제 주장, 삶과 문화의 다양성 인정과 보장, -
“탈군사적
독-독
연방(Foederation)”.
“연방제적
연방국가(foederative
Bundesstaat)“, “서로 다른 사회경제적 구조의 유지한 중립 연방(Foederation)”, 대립 적인 양 체제의 “평화적 경쟁”, 동독의 사회경제적 변화 내지 성과는 동서독 체제간 조정과 동화가 이루어질 때까지 존속할 수 있을 것이고 구체적으로 미래에 어떤 사 회경제적 구조로 주조할 지는 향후의 민족적 과제로 남겨두어야 함을 강조.
2) 헤르만 에첼: ‘평화보장체로서의 독일 연방제적 구성’ 1954년 3월 16일, ‘독일통 일의 예상가능 국면들. 평화보장이자 통일의 길로서의 독일 연방제적 구성’ 195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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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3일.
- 바이에른당의 지도적 이론가로서 1948/49년 독일국가재건의 모델로 ‘국가연합’ 주 창. 연방주의는 철학적 근본이념(삶의 다양성 존중과 자유 이념의 근간 - “사회적 윤리적 원리”이자 “정신적 혁명적 원칙”)이면서 “진정한 민주주의”의 정치사상적 토 대로 인식, 1871년, 1918년, 1933년의 역사적 연속성을 비판하며 나치즘의 근원을 프로이센주의 또는 중앙집중주의 정치 발전의 필연적 결과로 인식. 그렇기에 진정한 연방주의는 국가연합(독일 국가공동체)뿐이라고 강조. 한편으로 바이에른주의 분리주 의자 그리고 다른 한편의 연방국가 건설을 지지했던 대다수 서독 정당 지도자들과의 양면 대결. 서독연방 건설 반대. 에첼은 독일민족적 연방주의자, - 아데나워 서방통합정책에 대한 완강한 투쟁. 특징적인 것은 대립적인 블록 체제내 에서의 분단국가 건설을 에첼은 무엇보다 2개의 “중앙집중주의적 체제로의 강제적 편입”으로 해석했다는 것, 다시 말해 냉전과 분단은 이데올로기나 사회경제적 입장의 차이와 대결의 문제가 아니라 양 체제 모두에서 중앙집중적 정치 및 권력지향적 요 소의 강화 그리고 그로 인한 대결적 “공격체제”의 형성의 문제였다는 것. 바이에른당 탈당 후 ‘독일클럽 1954’와 ‘독일 정치와 국제정치학보’ 창립자 및 핵심 지도자로 활 동했다. - 독일의 양 사회경제체제를 그대로 유지한 채 국가연합적 협력체제로 결합할 것을 주장. 중요한 것은 처음으로 그 “전체 독일의 연방제적 구성”을 평화협정 내지 유럽 공동안전체제의 문제와 연결시킴. 이 때 독일 양국이 아니라 전체 독일이 유럽안보체 제의 회원국이 되어야함을 강조(소련의 유럽안보체제 제안과 다름). 왜냐하면 소련식 의 유럽안보체제는 독일분단을 확정짓고 연장시킬 수 있기 때문이라고. 5단계 통일안: ⅰ) 동서독 간 관계 정상화, ⅱ) 점령군 철수 및 동서독의 블록 이탈 과 평화협정시까지 일시적 중립화, ⅲ) 국가연합적 협력을 가능케 할(하지만 연방국 가적 틀이 아닌) 제한적인 권능과 기능을 지닌 양독간 기구의 설치, ⅳ) 통일독일의 내외적 지위에 대한 협의와 준비: 통일 독일의 내적 구조 그리고 미래 통일 독일의 국제적 지위 및 전유럽 안보체제에로의 편입에 대한 양국과 4대강국 간 협의, ⅴ) 평 화협정 체결과 자유선거 및 전유럽안보협약에 독일의 귀속 및 독일 내부의 연방제적 구성을 담은 헌법제정의 준비. 에첼에 따르면 국가연합은 이 과정에서 이행기적 성격을 띠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 서 연방국가를 위한 준비단계는 아니다. 오히려 에첼이 국가연합적 협력을 “이행기” 라고 말한 이유는 전독일의 “진정으로 연방제적인 건설”의 지속적인 구현과정을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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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했기 때문이다.
3) 빌헬름 엘페스: ‘독일인의 시간’ 1955년 12월 3일, 1956년 9월 12-15일 동독-기 민련 제8차 당대회에서의 연설
- 카톨릭 노동운동 출신의 기민련 내 기독교사회주의자, 전후 가장 대표적인 중립주 의 정치가, 그의 사상과 활동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처음부터 동독과의 접촉 내지 협상을 강력히 주장하고 직접 수행했다는 것(‘경계인’). 바이마르 시기 제국수상이었 던 요셉 비르트의 전후 정치적 동반자로서 소련 및 동독과의 정치 협상을 통한 통일 주창. 이미 1951년부터 동독 및 소련 방문 및 정기적 접촉. 애초 엘페스는 노악이나 에첼과는 달리 유럽사상이나 연방주의보다는 동일한 언어와 동일한 역사에 기반한 민족적 공속감에 의거했고 아울러 아시아-아프리카 민족해방운동에 대한 지지와 관 심이 상당했다(“중립화”보다는 “중립(성)”이란 개념을 채택, 반둥회의와 네루에 대한 관심). 이와 같은 민족 사상 외에 특히 사회경제적 차원의 ‘제 3의 길’에 대한 정치 적 사상적 지향도 그로 하여금 동독과의 접촉 내지 독-독간 대화와 협상을 통한 독 일문제 해결에 대한 관심과 신뢰를 갖도록 만들었다. - 이미 1954년 엘페스는 에첼의 자극을 통해 연방제적 사상과 그 방식의 독일문제 해결책을 자신의 것을 삼았다. 그 후 자신이 (공동) 당대표로 있던 ‘독일인동맹’ 내에 서 연방제적 통일안을 발전시켰다. 1955년 10월 7일 비르트는 연방제적 길을 통한 통일의 길을 동독정부에 타진해 보았고 1955년 12월 3일 엘페스는 “하나의 연방제 적 독일” 주창. 그런데 그것에는 서독과 동독과 함께 자르 지역이 독립 주체로 참가 하는 것이었다. 서로 이질적인 경제체제는 동일에 전혀 방해가 되는 것이 아님을 강 조. 1956년 1월에 ‘독일인 동맹’ 최고회의에서 연방제적 통일안 심의 및 결의. 하지 만 공식적 선언은 다소 지체. - 1956년 9월 중순 동독-기민련의 제 8차 당대회에 초청연사로 참가한 엘페스는 자 신의 연설에서 ‘독일국가연합’을 통일의 길로 제시하며 이를 동독의 정치가들이 토론 하여 민족 정책으로 끌어올려 줄 것을 제안했다. 엘페스의 “연방제적 국가연합”은 연 방국가로의 통일을 위한 과도기라는 의미에서 에첼의 국가연합안과는 차이. 자유선거 를 통한 하나의 공동의 독일 의회와 전독일적 정부를 가진 “임시 연방”. 26개의 독 일국가들이 함께 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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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연합 창안자로서의 경계인 전후 분단 독일에서 일찍이 국가연합에서 분단극복의 모델을 찾았던 선구적 주창자 들, 노악, 에첼, 엘페스 및 그들의 정치적 동반자들은 사상적으로나 정치적 실천의 차원에서 세 가지 중요한 공통점을 가졌다. 먼저, 이들 중립주의자들은 서구 민주주 의나 정치적 자유의 원리를 의문시하지 않으면서도 사회경제영역에서는 서방의 자본 주의적 체제와 동구의 공산주의체제 사이의 적대적 대결을 극복할 대안을 모색했다. 그리고 바로 이점에서 외교와 안보문제에서 중립주의를 지지하면서도 사회경제적 “제3의 길”에 관심을 전혀 갖지 않았던 또는 적극적으로 반대했던 일부 중립주의들 과는 분명히 차이가 있다. 노악은 다소간 소극적으로 “동서간 조정”을 통한 차이 극 복의 가능성을 언급하는데 그쳤지만 에첼은 좀 더 분명히 “소시민적-중간층적 사회 지향”을 체제대결의 돌파구로 생각했다. 기독교 사회주의자인 엘페스는 세 사람 중 가장 분명하고 적극적인 방식으로 사회경제적 차원의 “제3의 길”을 주장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바로 이와 같은 사회정치적 지향으로 인해 그들 모두는 동독의 사회 경제적 현실에 뒷걸음치지 않았고 오히려 동독과의 협상이 가능하다고 믿었다는 사 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동독의 새로운 사회적 변화가 분단 양 독일국가들 간의 접 근이나 협상의 방해물이 아니라 다만 독일 전체의 새로운 지속적 변화의 출발점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은 이데올로기적 사회정치 강령을 그들의 정치사상과 실 천에서 전면에 내세우지 않았다. 평화주의자인 그들에게 중요했던 것은 독일의 평화 적 통일과 새로운 유럽 평화 질서의 확립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사회경제적, 이 데올로기적 제3의 길을 적극적으로 주창했던 또 다른 중립주의자들과는 달리 두 가 지 차원의 구분되는 문제의 병행적 해결, 즉 분단 문제 해결과 내정 상의 사회경제 적 제 3의 길의 추구 간의 긴밀한 결합 내지 동시적 발전을 구상하지 않았다. 이 선구적 국가연합주창자들의 또 다른 공통점이자 그들을 여타 중립주의들, 특히 ‘제3의 길 지지자’들과 가장 분명하게 경계 짓는 것은 연방주의 사상이었다. 기실 연 방주의는 당시 연방주의적 지향을 가진 다수의 서독 정치가들에게 동구 권력블록에 의해 전복될 위협을 방지할 수단으로 간주되었다. 이를테면 분단 초기에 에첼과 함께 ‘바이에른 이데올로기’의 독일-연방주의적 사유 구성 원리를 공유했던 대다수 바이에 른당의 연방의회 의원들은 1951/52년에 이르러 기독교적 바이에른과 서구의 방어라 는 사상을 전면에 내세웠고 이를 통해 아데나워 수상의 서방통합노선과 화해하고 냉 전의 논리를 체화했다. 그렇기에 민족 통일 지향의 국가연합 사상은 연방주의적 중립 주의자로서 동독 공산주의 체제를 현실로 존재하는 실질적 위협이 아니라 여전히 하 나의 다른 종류의 사회질서로 간주했던 이들에게서만 발전될 수 있었다. 결국 통일을 지향하는 국가연합안의 최초 발의가 전후 시기 초기에 연방주의 논의가 가장 활발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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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 지역인 바이에른 주 출신의 두 연방주의적 중립주의자에게서 나온 것은 우연이 아니었던 셈이다. 그들은 1949년 시기까지 자신들이 가졌던 독일 국가재건의 연방주 의적 해결책에 대한 정치적 신념을 1950년대 초반과 중반 서독 정치 지도부의 서방 통합정책에 반대하는 투쟁의 와중에서 민족 통일을 위한 합의를 위해 새롭게 끌어올 릴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 때 바이에른 출신의 두 연방주의자, 노악과 에첼이 동일한 구상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노악은 “다양한 사회 경제 체제를 가진 연방주의적 연방국가”라고 언급 했던 반면 에첼은 “국가연합”만을 “진정으로 연방주의적” 것으로 간주했다. 또 에첼 의 연방주의에 자극을 받았던 엘페스는 국가연합을 단지 연방국가로의 “이행기적 해 결책”으로 간주했고, 이는 에첼의 애초 구상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었다. 이 세 선구적 국가연합 주창자들 사이의 또 다른 주요 차이점은 동독 공산주의 체제 에 대한 그들의 입장 내지 동독 지도부와의 관계에서 잘 드러났다. 노악은 사통당 지도부와 벌인 두 차례의 정치적 논쟁 후 관계를 단절하고 서독 내에서의 선전활동 에 집중했다. 반면 에첼과 엘페스 및 그들의 정치적 동반자들은 동독 공산주의 체제 에 대한 그들의 불편함을 감추지 않았지만 사통당 지도부와의 정치적 대결을 피하며 그들과의 정치협상과 대화를 지속함으로써 분단극복의 돌파구를 찾으려고 애를 썼다. 물론 그들 또한 사통당 지도부들로부터 일방적으로 조종되는 허수아비가 되기를 원 치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이 말이 사유 전개와 정치 활동에서 그들이 양 체제 사이 에서 정치적 중용의 길을 제대로 걸어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들 에게 중요했던 것은 동독 공산주의에 대한 규범적 비판이 아니라 오히려 양독간 대 화를 막는 서독 내 비이성적인 반공주의와의 비판적 대결이었다. 선구적 국가연합 주창자들의 마지막 공통점은 그들의 독특한 정치 실천에서 찾을 수 있다. 국가연합의 초기 주창자들은 한결같이 자신들을 “유랑인”, “편력자”, “중매자”, “중개인” 등으로 규정했다. 민족 분단 초기에 양독 국가를 자신들의 국가연합안으로 중개시키고자 냉전과 분단의 경계를 가로질렀던 이 “정치적 경계인”들은 동서 모두 를 넘나들며 대립적인 세계의 돌파구를 타진했다. 그리고 그 과정을 더 정밀하게 살 펴보면 그들은 동독 및 소련의 정치가들과의 접촉과 대화 준비 과정에서 바로 국가 연합 통일안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즉 완성된 국가연합안이 이미 그들의 머릿속에 자리를 잡았던 것이 아니라 “경계를 뛰어넘는” 정치 실천의 과정에서 중립주의와 연 방주의의 사상을 결합하고 가능한 독-독 정치 협상의 근거를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이 다. 아울러 이들의 앞선 발의와 제안은 그 후 동독 지도부가 1956년 말 국가연합 사 상을 수용하여 자신들의 민족 정책의 정수로 서독 정부에 제안하는데 중요한 자극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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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좌파 부르주아적 비판 정치가들, 특히 에첼과 엘페스 그리고 그들의 정치 그룹, ‘독일 클럽 1954’와 ‘독일인동맹’은 시종 서독 정부 뿐 아니라 대부분의 체제 내 기 성 정당들로부터 “공산주의의 등자”로 의심 내지 경멸받았고, 다른 한편 사통당 지도 부로부터는 일종의 “특수병기”로 간주되었다. 바로 이렇게 양독의 지배적 정치집단으 로부터 배제 내지 도구화되었던 ‘정치적 경계인’들은 1950년대 전반기 자신들의 독 특하고 선구적인 통일안을 통해 다른 여타 중립주의자들 및 동독 공산주의자들을 시 기적으로 앞서 나갔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공식적인 양독 정부간 ‘대화부재’ 시기에 독-독간 접촉과 대화의 시원을 열었고 분단 극복 논의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
2. 투쟁수단이자 망상으로서의 국가연합안: 1957년에서 1966/67까지 동독 사 통당의 통일안
1) 1954년 10월 27일 그로테볼의 동독정부 선언 초안 2) 1956년 12월 30일 울브리히트 “우리가 원하는 것과 원하지 않는 것” 3) 1957년 1월 30일 울브리히트의 연설 4) 1957년 7월 27일 동독 정부 선언 5) 1958년 2월 15일 ‘남독 신문’과의 울브리히트 인터뷰 6) 1959년 1월 15일 사통당 중앙위에서의 울브리히트 연설 7) 1962년 6월 17일 사통당의 ‘민족 자료’ 8) 1966년 4월 21일 사통당 창당 20주년을 맞이한 울브리히트의 기념연설: “향후 독일인들의 조국의 길” 9) 1966년 12월 31일 국가평의회 의장 울브리히트의 신년사
※ 사통당 국가연합: 선전 책략이자 망상적 미래 구상 사통당의 국가연합안은 계급투쟁의 도구로서의 성격 때문에 당시 오히려 양독간 ‘진 지한’ 대화와 협상을 방해한 측면이 있었고 또 상당기간 국가연합을 공산주의자들의 정치 책략 정도로 오해하게 만들며 국가연합안의 정치적 함의를 축소내지 변질시켰 다. 그렇지만 이미 보았듯이, 동독 지도부가 국가연합을 제안하면서 독-독간 정치협 상을 원천적으로 배제하며 단지 음험한 정치 책략으로만 접근했다고 해석할 수는 없 다. 서독 ‘노동계급의 혁명화’라는 비현실적 정세 파악과 ‘사회주의의 최종적 승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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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망상적 미래상은 -역설적이게도- 사통당 지도부로 하여금 국가연합 제안시 오히 려 그들 나름의 실제적 접근을 갖도록 만들기도 했다. 1950년대 후반부터 사통당은 서독의 정치변화에 대한 낙관적 기대에 기초해 더 많고 다양한 양독간 교류를 적극 주창했으며, 그 이전 서독 중립주의자들의 국가연합안들에서는 아직 보기 어려웠던 양독간 경제협력의 강화에 특히 ‘진지한’ 관심을 두었다. 게다가 1966/67년 사통당이 10년 동안의 국가연합 통일강령을 포기했을 때 중요한 작용을 한 것은 사민당의 새로운 정치적 방향 선택 -기민련과의 대연정 구성-에 대 한 실망 및 서독과의 경쟁에서 승리할 것이라는 망상적 미래관의 기각이었다. 1970 년대 초 국가연합을 통한 사회주의 독일통일의 이상을 지녔던 울브리히트가 권좌에 서 물러나고 ‘현실주의적 서방정책’을 내건 에리히 호네커(Erich Honecker)가 전면에 등장했다. 사통당 국가연합안이 역사의 뒷무대로 물러나면서 같이 데리고 간 것은 공 산주의 정치 고유의 선전이나 책략이 아니라 1950년대 후반 울브리히트 중심의 고참 혁명가들이 특수하게 지녔던 망상적 현실인식과 미래구상이었다. 이를 통해서도 다시 금 사통당의 국가연합안이 공산주의 일반의 정치 선전이나 우연적인 책략의 산물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형성된 특정한 정세관과 미래상에 얼마나 결합되어 있었는지 확 인할 수 있다.
3. “ 공을 받아 되치자!” : 1957년부터 1960년대 후반까지 서독의 국가연합안 1) ‘독일평화연합’의 국가연합안 강령 그리고 그 변화
2) 볼프 셴케와 잡지 ‘새로운 정치’의 국가연합안들: 제 3의 길 지향의 민족혁명과 국가연합안의 긴밀한 결합, 국가연합안의 주체로 양 체제내의 새로운 민족 세력에 의 거. 국가연합추구 과정에서 이미 양독의 지배세력이 정치적으로 몰락할 것임을 강조.
※ 셴케의 분단인식과 통일구상 1940년대 후반부터 1950년대 중반까지 가장 격렬히 냉전과 분단에 대항한 정치 세 력 중 하나는 우파 민족주의 지향의 다양한 그룹들이다. 우파 민족주의 또는 심지어 극우적 민족주의 지향에서 출발해 점차 냉전과 분단의 문제 해결을 고심하다 점차 ‘민족중립주의’에 기반을 둔 ‘제3의 길’을 대안으로 내세운 대표적인 정치 그룹은 볼 프 센케(Wolf Schenke)와 ‘제3전선’(Dritte Front) 그룹과 아우구스트 하우스라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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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ust Haußleiter)와 ‘독일공동체’(Deutsche Gemeinschaft) 그룹이다. 이 두 단체 의 지도자들은 나치 가담 전력을 생애사적 배경으로 지녔고, 다른 어떤 세력과도 구 분될 정도로 분명한 민족주의적 성격을 드러냈다. 또 다른 공통점은 둘 모두 냉전과 분단의 극복 대안을 단순히 외교나 안보상의 제 3의 길만이 아니라 사회경제 체제와 정치 제도 등 모든 영역에서 자유주의-자본주의 체제와 공산주의 양 체제를 극복하 는 새로운 제3의 길을 지향했다는 것이다. 두 그룹 모두 냉전체제 극복의 근거로서 민족주의적 관점과 그 ‘제3의 길’을 대안으 로 제시하면서 ‘제3세계’의 탈식민화와 독자적 체제 발전 시도에 크게 공감하고 의존 했다. 특히 지도자인 셴케와 하우스라이터는 1950년대를 넘어 1980년대 까지도 민족 중립주의와 대안 체제 주창자로서의 역정을 이어갔고, 1980년 녹색당 창당 주역으로 서 당내 한 조류를 대표했다. 그 중 셴케의 반냉전 사상과 활동은 여러 모로 더욱 인상적이었다. 생애사의 결정적 계기는 그의 청년기에 찾아왔다. 1914년생 셴케는 일찍부터 나치 청년 조직에 가담 했고 곧 나치당원이 되었지만, 1935/36년 중국과 일본 등 동아시아를 여행하면서 중 국 문화에 큰 자극을 받았다. 1936년 그는 중국으로 건너가 1945년 종전까지 자유 기고가 내지 나치 당 기관지인 ‘민족관찰자’(Vö lkischer Beobachter)의 통신원으로 활동하다 상해 전범재판에서 무죄 방면되어 독일로 귀환했다. 1949년 셴케는 함부르크에서 ‘현실정치’라는 잡지를 발간하며 언론인으로서 아데나워 의 서방통합 정책에 반대하고 민족중립주의 운동의 선두에 나섰다. 그는 자신의 잡지 외에도 1950년 ‘제3의 전선’이라는 조직을 내세워 중립화에 기초한 독일통일을 주창 하고 나섰다. 아울러 중립화된 독일과 유럽은 평화와 안보의 관점에서만이 아니라 삶 의 가치와 지향에서도 미국식 자유주의-자본주의(“미국주의”)와 러시아 볼셰비즘 모 두를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곧 아데나워의 서방통합정책을 비판하는 수많 은 다양하고 이질적인 중립주의 세력들을 결속시켜 공동 행동을 조정하고 매개하는 역할을 떠맡으며 독일 중립화 운동의 중심 인물로 부상했다. 그러나 당시 모든 종류 의 중립주의 정치가들과 셴케를 결정적으로 구분해준 것은 그의 민족해방 사상이었 다. 그는 미국과 소련의 양 체제를 극복하는 ‘제3의 힘’은 단순히 탈냉전의 평화적 국제질서를 보장해주는 것만이 아니라 식민주의의 역사적 지속과 잔재를 극복하고 ‘정신적 노예상태’에 종지부를 찍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때 셴케와 그의 동지들은 냉전과 분단 인식에서 또 다른 독특함을 선보였다. 먼 저 그들은 20세기 세계정치의 발전을 규정하는 것은 동서 냉전의 대결이 아니라 식 민화와 탈식민화의 세계적 긴장이라고 보았다. 셴케는 1955년의 저서에서 식민지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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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대한 피억압 민족의 저항이야말로 현 시대의 진정한 조류이고 탈식민화를 “20세 기의 세계혁명”으로 규정했다. 그리고 단지 50년만 지나면 아시아의 두 거인, 중국과 인도가 세계열강으로 부상해 세계의 역사적 흐름을 주도할 것이기에 독일은 하루빨 리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반식민 운동 내지 탈식민 국가들과 연대를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일찍부터 독일은 미래를 내다보고 ‘제3의 권력블록’과 동맹을 강화해 야한다고 주장했다. 더욱이 셴케는 독일 또한 순전히 외정 상으로만 본다면 기본적으로 제3세계의 많은 국가들처럼 피점령 상태에 놓여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주문했다. 그가 보기에 독일 분단은 이데올로기적 정치적 냉전의 관점에서 볼 문제가 아니라 전 세계적 탈 식민화의 관점에서 보아야 해결될 과제였다. 독일의 민족 혁명적 해방을 위해서는 서 독과 동독을 각각 점령 지배하고 있는 미국과 소련의 동맹블록 자체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내세웠다. 그런데 셴케가 보기에 분단 극복과 평화 정착의 출발은 미국과 소련의 지배에 추종 하고 있는 동서독 양 분단국가의 지배엘리트를 몰아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분단 양국 가의 지배자들은 ‘적대적 의존(feindselige Abhängigkeit)’에 의거해 서로 공생하고 있 기에, 동서독 양 국가에서 동시적으로 ‘제3의 힘’이 결집하고 연대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셴케의 탈냉전, 탈분단의 해법이었다. 셴케에게 분단 양국의 지배체제를 극복한 그 ‘제3의 힘’을 통한 독일통일은 그 자체로 독일이 미국과 소련을 대체할 열강이 되 는 길이 아니었다. 오히려 통일독일은 핀란드, 스웨덴, 오스트리아와 유고슬라비아와 함께 유럽 평화지대를 형성할 것이고, 그것을 통해 다시 중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 전역의 탈식민 운동의 큰 역사적 흐름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셴케의 민족 혁명적 지향이 탈-파시즘의 과제를 안고 있던 서독에서 아무 런 오해와 의심의 눈길 없이 받아들여지기는 어려웠다. 실제로 셴케의 동료와 지지자 들 중에는 극우 파시즘과의 경계를 명료하게 긋지 못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하지 만 셴케의 독특한 시대인식과 탈냉전 탈분단 사상과 정력적인 활동이 독일에서 냉전 인식과 평화 사유의 지평을 확대하는 결과를 낳은 것은 분명했다. 당시 이들만큼 열 정적으로 제3세계의 다양한 반식민 운동과 탈식민주의적 발전을 소개하고 자기화하 는 사회 세력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반둥회의를 비롯한 제 3세계 지역의 냉전 극복을 위한 다양한 평화 사상과 정치적 실험들이 독일의 반냉전 중립주의자들 에게 유입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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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자민당 내 국가연합 지지자들: 1957년 9월 21일 함부르크의 경제부 장관 에른스 트 플라테는 “통일, 그렇지만 어떻게”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독창적인 국가연합안을 제안. 동독의 ‘주회의’와 서독의 ‘연방평의회’간 대화와 협상을 통한 통일의 길 제시. 주별 대표자들로 구성된 전독일 평의회 제안.
4) 사민당 내 국가연합 지지자들: 1959년 3월 ‘독일계획안’ - 군비확장중단, 비핵지 대 설정, 외국군대철수, 양독의 군사블록 탈퇴, 집단안보체제, 전독일회담. 수적 동등 성에 기초한 전독일 평의회에서의 점진적 독독간 합의를 통한 통일. 많은 부분에서 사통당 국가연합안과의 유사성 존재
5) 헤르베르트 베너의 ‘독일경제공동체’안: 사민당내 에을러와 바 노선과는 대조적으 로 베너는 일찍부터 독독간 대화와 협상에 더욱 무게중심을 두었다. 사민당 내 누구 보다도 사통당과의 이데올로기적 정치적 대결과 비방을 주고 받았지만 울브리히트의 국가연합안에 대해 처음부터 전향적으로 관심을 보였고 독자적으로 ‘독일경제공동체’ 를 통일안으로 제시 심지어 1960년대 내내 심지어 1979년에도 같은 안을 제안. 4단 계안: 독독간 교류를 원활히 하기 위해 화폐결산제도도입, 공통의 이익에 기여할 양 독 공통 투자펀드 조성, 화폐통일, 그리고 마지막으로 국제적 긴장완화(라파키안을 토대로)를 배경으로 국가통일. 동독의 사실상 인정 주창, 자유선거나 정당활동의 자 유등은 언급되지 않음. 가장 일찍 인도주의적 문제 햐결과 경제교류가 독독간 관계개 선과 통일에 미칠 장기적 영향에 주목, 실용적 국가연합안의 초석. 유럽 사상이나 연 방주의보다는 민족국가의 재통일 방식. “큰걸음과 동시에 작은걸음” 정책.
6) 파울 빌헬름 벵어의 지역연합론: 연방주의 유럽 사상, 전유럽적 지역연합들의 틀 내에서 독일문제 해결 주장
7) 울리히 노악의 새 국가연합안: ‘이행연합’
8) 발터 메더의 “베를린계획”
9) 헬무트 퀼츠의 “독일국가연합의 가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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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귄터 그라스의 국가연합 사상: 연방주의와 초민족 지향과 결합
11) 쿠스북에서의 국가연합안: 발터 오이너, 게으트 셰퍼, 디더 젱하스. 탈이데올로기 적 실용주의적 접근.
12) 뤼드거 알트만의 가상다큐 영화 “독일국가연합”
4. “ 민족대타협” : 1980년대 국가연합안 1) 1978년 1월 동독의 반체제 그룹, “독일민주공산주의자 동맹”의 선언
2) 민족 좌파들의 국가연합안1: 페터 브란트와 허버트 아몽/베를린과 독일정책 연구 모임,
3) 민족 좌파들의 국가연합안2: 롤프 스톨츠
4) 민족좌파와 뉴라이트 그룹들의 일시적 연대: “1985년 평화조약-독일국가연합-유 럽안전체제”
5) 사민당 계열 공법학자 테오도르 슈바이스푸르트의 “독일국가연합 - 새로운 유럽 평화질서를 담보할 대민족타협”
6) 볼프강 벤오어의 “국가연합 독일” 10단계 통일안: 양독간 국가연합 체결시 일시 적으로 나토와 바르샤바조약회원으로 동시가입된 상태 유지. 내독간 협력와 결속에 집중하는 것이 국제적 동의나 새로운 안보질서 확보에 매달리는 것도 더 중요함을 강조.
7) 볼프강 자이페르트의 “독일국가들의 연방” 제안: 15년간의 이행기를 전제하고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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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과 동독, 그리고 오스트리아까지 같이 연방조약결성. 군사블록과 경제블록에 따로 소속되어 있더라도 단일한 경제단위 구성할 것 강조. 외교적 안보적 문제는 모두 사 후 혐상의 주제로. 중립화 지지않고 오히려 동구와 서구와의 이중적 연결기능을 긍정 적으로 활용할 것 강조. 이미 1989년 동독의 임박한 붕괴를 예견하며 국가연합안제안 포기. 급속한 통일 주 창.
8) 홀거 발의 “국가대항전”
5. “ 역사가 결정하리라” : 1989/90년 국가연합안들 1) 1989년 11월 17일 동독 모드로 수상의 “계약공동체” 제안
2) 1989년 11월 28일 헬무트 콜의 10개조 강령 다섯가지 차원의 분석 - 10개조 강령은 1980년대 지속된 연방정부의 외교적 입장과 1989년 10월 말이 후 나타난 정책 전환의 결절점이다. 연속과 단절의 접점 - 10개조 강령은 외교와 통일문제에서의 내정 요인의 역할을 잘 보여준 예이고 이는 통일문제를 보는 콜 정부의 권력지향적 성격을 잘 드러낸 것. - 10개조항은 동독과 소련 정부의 통일안 내지 있을 수 있는 대안적 통일안들의 여러 핵심 요소들을 자기화함으로써 대안적 통일안들의 파급력을 사전에 봉쇄하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안보체제문제가 통일논의의 전면에 부상하지 않도록 함. - 정치적 적대자들의 국가연합안들 내지 통일안들의 부분적 수용과 핵심문제에서 의 배제라는 방법을 통해 10개조항은 당시 통일논의의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외교나 안보문제를 국가연합적 전망의 연결을 끊어내고 중립화가 아니라 유럽공동체 의 동구지역으로의 확대라는 문제를 통해 안보문제를 우회하였고 아울러 유럽통합의 전망을 제시함으로써 좌파적 통일논의도 미리 봉쇄한 성과를 이룸, - 1989년 연방정부의 10개조항은 1950/60년대 동독 사통당 정부의 국가연합안이 추구했던 것과 동일한 정치전략을 사용했다. 국가연합안을 주창함으로써 사실상 국가 연합의 토대가 되는 체제인정과 존중 등을 붕괴(체제전환)시키고 했다. 결과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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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략이 성공을 거둔 것은 당시 사통당과는 달리 대항 분단국 내에서 그 정치적 의도와 목표를 지지하는 “국가연합의 동반자”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3) 1989년 12월 10일 사민당의 “베를린선언”
4) 1990년 1월 녹색당 지도자 안트예 폴머 중심의 “출발그룹”의 “양독간 생태주의 국가연합” 제안
5) 데오도르 슈바이스푸르트와 볼프강 벤오어의 구체적 제안들
6) 귄터 그라스의 국가연합안: “부담의 배상”
7) 사통당/민사당 지도자 그레고어 기지의 국가연합안“: 유럽국가연합틀속의 독-독 국가연합
8) 볼프강 하리히의 단계적 국가연합안
9) 하인리히 아우구스 빙클러의 “시험대로서의 국가연합”
10) 1990년 2월 1일 모드로의 정부선언 “독일을 위해, 조국을 통일하자”
※ 1989년 겨울 국가연합 토론의 양상 1989/90년 겨울 독일 정계와 여론사회는 국가연합을 둘러싼 격렬한 토론에 휘말렸 다. 먼저 이 토론에서 가장 특징적인 양상은 국가연합 개념이 이전과 달리 그 외연 이 확장되어 다양하게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국가연합 개념이 다양한 정치 세력들에 의해 자기화되면서 이제 하나의 단일한 상은 불가능해졌던 것이다. 1989년 가을이전 까지 국가연합은 오랫동안 국제법적 주체인 양 독일 국가가 국민국가적 재통일을 전 제로 결합하는 이행기로서 한편으로는 양독간 협력관계의 질적 전환과, 다른 한편으 로는 군사동맹의 해체와 결합된 통일 방식이었다. 독일민족의 지속적 존재나 민족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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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성의 확인에 기초한 신우파(Neue Rechte) 세력들이나 민족문제를 사회해방과 연계 해 정치의제의 중심으로 삼고자 했던 일부 민족좌파(Nationale Linke)들만이 1980년 대 내내 그와 같은 국가연합을 통일안으로 적극 내세웠다. 그러나 1989/90년 겨울 더 이상 “국가연합 구상을 그 자체로 선전하”는 것은 불필요한 일이 되었다. 누구나 국가연합을 주장하는 형국이었다. “이제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어떻게 만들어낼 수 있 을지에 대해 토론하는 것”이었다. 콜 총리가 국가연합을 통일의 이행기로 제시하면서 국가연합을 둘러싼 토론은 완전히 새로운 국면에 들어섰던 것이다. 당시 콜 총리는 국가연합을 국민국가적 재통일의 이행기이면서 동시에 동맹문제와는 분리해서 이해했다. 그런 한 국가연합은 연방국가로의 통일 과정이자 그 형식이었다. 그러나 사민당과 녹색당 소속의 많은 좌파 정치가들은 독-독간 국가연합을 국제법적 조약의 결과로 이해했고 그렇기에 급속한 통일과정에 대한 저지책 또는 유럽 통합을 내세우며 국민국가적 독일통일을 건너뛰려는 초민족적 정치 발전의 매개 구상으로 제시했다. 사민당의 일부 민족 지향의 정치가들은 콜의 10개조 강령에 기본적으로 반대할 이유를 찾지 못했지만 오스카 라퐁텐(Oskar Lafontaine)을 비롯한 탈민족 지 향의 많은 사민당 정치가들은 독-독간 국가연합을 독일 통일과 유럽통합의 동시적 병행적 계기로 삼으려고 했다. 특히 사민당 정치가들은 1989년 12월 ‘베를린 선언’에 서 “국가연합은 다수파 획득에 의한 일방주의 내지 후견감독을 피하도록 해주며 양 주권국가들로 하여금 현존 동맹조약 체제와 경제공동체에서 유럽 평화질서와 유럽합 중국 탄생에 기여하도록 해줄 것이다”고 밝혔다. 즉 독일 국가연합은 서독의 동독 흡 수 통합을 저지하면서 동시에 유럽통합을 매개한다는 것이 사민당의 기본입장이었다. 녹색당 내에서도 또한 유사한 흐름의 국가연합안들이 등장했다. 특히 녹색당 연방의 원단
대변인
안트예
폴머(Antje
Vollmer)를
중심으로
한
‘출발그룹
(Aufbruch-Gruppe)’은 ‘그들은 ‘생태국가연합’을 통해 성급한 통일 추구와 경직된 이국가상태의 옹호 사이에서 중도적 길을 개척하고자 했다. 그들은 국가연합이 민족 간 결속을 현실화하면서도 양 독일의 국가적 존속과 정치적 자치를 보장해줄 것이라 고 믿었다. 결국 1989년 12월과 1990년 1월 사이에 독일에서 국가연합은 이제 누구 나 자신이 원하는 정치적 방향으로 늘려 끌어댈 수 있는 고무줄 같은 것이 되었다. 이제 어떤 국가연합안이 현실적 타당성을 인정받고 정치적 동력을 확보하는지가 관 건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주목할 것은 1980년대 내내 국가연합 통일안을 주창했던 일부 세력들 의 변화였다. 신우파의 지도적 인물이자 국가연합의 열렬한 주창자였던 볼프강 벤오 어(Wolfgang Venohr)는 원칙적으로는 여전히 독일의 군사동맹 이탈과 양독 내 점령 군의 동시 철군 등을 국가연합과 연계시켰지만 1989/90년 겨울 당시 콜의 통일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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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과 정책에 반대하지 않았다. 민족좌파의 대표자이자 동시에 국가연합의 또 다른 옹 호자였던 페터 브란트(Peter Brandt)와 헤르베르트 아몬(Herbert Ammon) 또한 콜의 강령에 비판적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통일로의 상황 전개를 기쁘게 맞이했다. 그들이 보기에는 군사동맹의 해체 내지 중립화 등의 문제는 더 이상 결정적인 것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결국 독일인들의 자결권이자 주권이며 국민국가적 통일의 구 현 그 자체였다. 그런 한 이 오랜 국가연합 주창자들이 콜의 통일강령을 거부할 이 유는 없었고 콜이 주도하는 상활 전개에 순응했다. 한편, 탈민족 지향의 좌파 정치가들 또한 정치적 수세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그들 이 제시한 독일문제 해결책은 한편으로 동독의 국가적 독자성 유지에 기초한 독일 국가연합의 형성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독일민족의 재결합과 유럽통합의 동시적 발 전이었다. 그러나 1990년 1월 중순 이후 동독의 국가적 존재가 점차 위기에 빠졌고 유럽통합 내지 유럽공동안보체제의 형성이 현실화될 가능성이 사라지면서 ‘좌파적 국 가연합안’은 정치적 설득력이 급격히 떨어졌다. 게다가 1월 중순 이후 국가연합 토론 을 둘러싼 상황은 다시 급격히 변화했다. 즉 콜 총리는 자신의 애초 계획을 수정하 여 1월 중순부터 급속한 통일로 방향을 전환했다. 동독의 국가적 존속에 기초한 유 럽통합지향의 탈민족적 국가연합 뿐만 아니라 국민국가적 재통일의 이행기로서의 국 가연합 자체가 의문시되었던 것이다.
※ 콜과 국가연합 1989년 10월 말 콜 총리는 국제정치의 변화와 동독의 체제붕괴에 직면해 신중하면 서도 단호한 독일정책의 전환을 감행했다. 이 때 콜은 “경제 지원과 정치 개혁”을 직 접 연계시킴으로써 동독 체제의 민주적 전환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통일 문제 와 관련해서 콜은 초기에는 원칙적인 입장을 반복적으로 선언하면서도 구체적으로는 매우 신중하게 행동했다. 베를린 장벽 붕괴 후에도 콜은 당분간 동독 체제의 근본적 변화의 초석을 놓는 당면 과제에 집중했다. 독일통일의 가장 중요한 추진력이 동독 주민들이었다는 사실에 이견을 달기는 어렵 다. 그러나 그것으로 곧장 콜이 11월 말 통일강령을 발표했을 때 그 강령은 이미 통 일을 요구하는 동독 주민들에 의해 추월되었다는 평가는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11 월 중순부터 점차 동서독 모두에서 통일 논의가 시작되었을 때 아직 통일 과정과 기 간 및 방식 모두가 불투명했기 때문이다. 모드로우를 비롯한 동독의 집권자들은 조약 공동체를 통해 동서독간 긴밀한 협력 관계는 진전시키되 통일은 피해가려 했고, 반체 제운동의 지식인과 운동가들은 동독에서 ‘제3의 길’을 살리기 위해서는 서독과 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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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한편 서독의 좌파 야당 내 이국가주의자들은 개 혁된 사회주의 동독의 존속과 이국가상태의 유지에 기초해 국민국가적 통일을 건너 뛰고 곧장 유럽통합으로 들어서고자 했다. 아울러 소련에서도 곧 그들 나름의 공세적 독일통일안이 나올 것이라는 -실제는 전혀 그렇지 않았지만- 우려가 있었다. 1989 년 11월 말 콜 총리는 이 불투명한 혼재의 국면에서 10개조 통일강령을 제시함으로 써 모든 통일 논의를 흡수, 압도했다. 동독 주민들에게 체제 개혁의 청사진만이 아니 라 통일 전망을 분명하게 제시함으로써 서독으로의 대량탈출을 부분적으로 억제할 수 있었고 동독 내부의 혼란과 불안을 잠재울 수 있었다. 10개조 통일강령의 또 다 른 강점은 그것이 민족통일의 단계적 발전 과정을 일차적 과제로 잘 제시함과 동시 에 유럽 통합의 전망을 놓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콜의 통일강령은 독일내 국민국가로의 재통일에 대한 여러 회의론자들의 다양한 주장을 제압할 수 있었다. 비 록 몇몇 문제로 외교적인 갈등이 없지 않았지만 콜은 이 10개조 통일 강령으로 급변 하는 정세를 잘 조정하고 스스로 맨 앞에 서서 향도할 수 있었다. 물론 당시 콜과 유사한 국가연합 내지 그보다 “더 나은 안”을 제안한 세력들이 없지 않았다. 사실 콜이 10개조 강령을 선언하기 전부터 국가연합은 정치과 여론 사회의 주요 토론 주제로 등장했다. 그리고 콜의 통일강령 발표 후에는 국가연합 방식의 통 일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어떤 형식과 내용의 국가연합이냐가 문제인 듯 보였다. 대부 분의 국가연합안과는 달리 콜의 10개조 통일강령은 동서독의 국가연합적 발전과 안 보 및 외교 문제를 완전히 분리시킴으로써 군사동맹 문제를 둘러싼 쟁점이 통일 논 의의 전면에 등장하지 않도록 만들었다. 아울러 동서독 사이의 국가연합적 협력과 동 독 체제의 근본적 변화를 연계시킴으로써 ‘제3의 길’ 같은 정치적 대안에 쇄기를 박 았다. 사민당과 녹색당 등의 대안적 국가연합안들은 콜의 통일강령에서 벗어나 정치 적 파괴력을 지니기에는 힘이 부쳤다. 게다가 1990년 1월 중순 콜이 급속한 흡수 통일의 전망을 제시했을 때 이미 국가연 합안은 통일안이라기보다는 통일을 반대하며 독일민족의 이익에 반하는 비애국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애초 통일의 한 방식으로 대부분의 정치세력이 공유했던 국가연 합안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오히려 반(反)통일 구호로 현상했던 것이다. 국민국가로 의 재통일에 반대하는 서독의 탈민족주의자들이나 흡수통일로 동독 사회가 나름 발 전시킨 가치와 업적이 사라질 것을 우려한 일부 동독 정치가들이야 여전히 국가연합 안을 붙들고 있었지만 그들과 무관하게 이미 통일 열차는 빠른 속도로 내달렸다. 국 가연합이라는 간이역은 들러 보지도 못한 채 점차 시야와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요컨대 콜은 애초에는 그 나름의 독특한 국가연합안을 통일의 길로 제시함으로써 통 일 논의들을 압도하더니 곧 정세 변화에 기민하게 대응해 다시 그것을 폐기함으로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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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대안적인 여러 국가연합안들을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1989/90년 누구도 헬무트 콜만큼 당시 상황을 정확히(“주의 깊게”) 파악하지도 못했 고 누구도 그처럼 탄력적으로(“실용적으로”) 정세에 대응하지도 못했으며, 또 누구도 그처럼 그렇게 “권력 지향적”으로 행동하지도 않았다. 누구도! 그런데 동독의 비판 작가 슈테판 하임(Stefan Heym)이 말한 대로, “역사는 무승부를 내버려 두지 않는 다.”
IV. 국가연합안의 다양성 1949년에서 1990년까지 분단독일에서는 대략 30여개의 국가연합안들이 등장, 세 가 지 조류들로 구분가능. 정치선전으로서의 국가연합안, 즉 1957년부터 1966년까지 동 독 사통당의 국가연합 강령들을 제외.
1. 연방주의적 정치원리와 탈(post)-국민국가적 지향에 충실한 국가연합론 1950년대 중립주의 지향의 경계인들(울리히 노악과 헤르만 에첼)과 1980년대 동방정 치가이자 언론인인 귄터 가우스(Günter Gaus), 작가 귄터 그라스(Günter Grass), 1989/90년 녹색당에서 등장한 생태국가연합(Ökologische Konföderation) 등: 소국가 론, 삶의 다양성 존중, 지역과 개별 정치 단위의 정치적 자치권에 기초한 국가연합, 중앙집중적 국민국가로의 통일 반대, 독일국가연합은 ‘독일연방국가’의 중간단계가 아 니라 유럽국가연합의 매개로 인식.
2. ‘ 제 3의 길’ 내지 중립주의 강령과 결합한 국가연합론 1950년대 1980년대 대다수 중립주의자들의 국가연합안(1950년대 빌헬름 엘페스에서 1960년대 볼프 셴케에서 1980년대 롤프 슈톨츠와 페터 브란트 같은 평화운동과 녹 색당내 중립주의자들의 다양한 국가연합안들), 1989/90년 겨울의 서독 내 좌파 지식 인들과 동독 반체제 그룹 일부의 국가연합론: 국가연합을 통해 외교, 군사 뿐 아니라 사회경제적으로도 ‘제 3의 길’ 대안을 추구, 사회혁명 지향의 국가연합론, 중립주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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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적 지향의 결합, 독일국가연합은 독일국민국가 재탄생의 전단계로 인식.
3. 실용적 관점의 국가연합론 1950년대 후반부터 사민당 지도자 헤르베르트 베너의 ‘독일경제공동체’안과 1980년 대 양독의 중간협상인들 사이에서 논의되었던 ‘취리히 모델’과 ‘국가대항전’: 주로 양 독간 경제 내지 재정적 협력에 초점, 경제적 협력의 진전에 의거해 실제 이루어진 양독간 발전의 성과에 기초해 국가연합을 선언하는 것, 또는 1989년 11월 28일 헬무트 콜의 10개조 통일강령도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차원 을 보임: 독일통일의 외교, 안보 성격 문제와 양독간 경제협력에 기초한 ‘국가연합적 구조’의 발전을 분리시켜 후자에 집중함.
V. 분단 독일에서 국가연합 방식의 통일이 불가능했던 요인들
1. 구조적 조건들 - 나치의 ‘갈색그림자’로 인해 전후 독일 사회는 민족문제 해결에 대한 정치적 자기 검열과 규제 작동, 국가연합 등의 통일론을 근본적으로 제약, 4대열강과 주변국의 동 의가 중요, 민족 내부 협상을 통한 통일론의 정치(강령)적 발현 저해 - 동서독 분단 상황의 극심한 불균형 또한 국가연합이라는 정치적 상상력을 구속, 동독의 (장기적) 국가적 생존은 40년 내내 불안했고 동서독간 정치경제적 차이는 끝 내 좁혀지지 않았고, 이는 서로 다른 두 체제의 공존 및 균등한 협력 관계라는 국가 연합안의 정치적 확장을 방해.
2. 행위주체의 차원 - 국가연합 주창자들의 구상에서 실용적이고 실제적인 접근 부족, 및 독-독간 관계 발전과 국제정치적 냉전 해체의 상호관련에 대한 정태적 분석에 갇힘, 전자의 독자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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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동성 주목할 필요. - 1989/90년 통일 과정에서 동독 체제 붕괴와 급속한 흡수통일은 자동적 과정이 아 님에 유의, 당시 헬무트 콜 서독 수상은 단지 신중하면서도 단호하며, 권력지향적이 면서도 실용적이고 탄력적으로 통일 과정을 주도했던 반면, 서독 야당과 동독 반체제 운동은 동독 주민들의 ‘민족적 열망’에 제대로 조응 못했고, 극히 일부가 단지 ‘중립 화’나 ‘유럽공동안보체제’를 내세운 국가연합안에 고착
:: 국가연합의 길과 흡수통일 과정을 대립적으로만 볼 것이 아님, 분단 상황이 급변 해 국가연합이 아니라 흡수통일이 현실로 닥치더라도 다양성의 존중과 차이의 공존 이라는 원래의 연방주의적 정치 원리와 덕목은 여전히 중요하고 그것이야말로 ‘민주 적’ 통일 과정의 하나로 인식될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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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부
복지와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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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제 7
독일‘사회국가’(Sozialstaat)의 역사와 과제
이호근 / 전북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1. 서론: 독일 ‘사회국가’(Sozialstaat)의 개념 독일 ‘사회국가’(Sozialstaat)는 역사적 형성물이다.1) 이 개념은 영미권의 현대국가의 특징을 일컫는 ‘복지국가’(Welfare State 또는 독일에서는 다소 부정적인 의미의 권위 주의적 국가하의 Wohlfahrtsstaat)와도 비교되고 있다. 즉, 독일 ‘사회국가’의 개념은 크게 보아 19세기 이래 뒤늦은 산업화, 영미나 프랑스에서와 같은 성공적인 시민혁 명의 경험이 결여된 반면, 국가의 중립적 조정자의 역할이 강조된 정치적 전통, 20세 기 양차 세계대전, 전후의 분단과 통일 그리고 60년의 역사적 발전과정을 보이고 있 는 유럽통합과 현대의 세계화 등의 굵직한 세계사적 발전과 맥을 같이 하고 있거나 그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무엇보다 독일 ‘사회국가’ 이념은 보다 근원적인 ‘사회조 직의 원리이자 기반’으로 인식되고 있다.2) 즉, 독일 사회국가는 사회정책의 한 부분 으로 복지 차원을 넘어 ‘정치’, ‘경제’, ‘사회’ 질서(Ordnung)의 근간이라 할 수 있 다.3) ‘법치주의’(Rechtstaatlichkeit), ‘사회적 시장경제’(Soziale Marktwirtschaft), ‘사 회국가’(Sozialstaat)의 개념은 이른바 이러한 독일모델(Modell Germany)의 삼각추를 형성하고 있다. 현대 독일 사회국가에서는 헌법적 질서로서 ‘민주주의와 법치국 가’(Demokratie und Rechtstaat) 이념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독일의 사회국 1) E. Eichenhofer, Sozialrecht, 8. Auflage, Mohr Siebeck, Tuebingen, 2012, pp. 15-53 참조. 2) Gerhard A. Ritter, Der Sozialstaat, Muenchen, 1989 참조. 3) F. X. Kaufmann, Sozialpolitik und Sozialstaat, Opladen 200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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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념은 이제 도전과 많은 과제를 안고 있다. 본고에서는 역사적 형성물로 발전하여 온 이러한 독일 사회국가의 이념과 지속가능한 미래의 대안모델로서 독일 사회국가 의 과제와 전망을 다루고자 한다. 먼저, ‘사회국가’의 이념은 무엇인가? 사회국가란 헌법에 규정된 ‘사회적 정 의’(Soziale Gerechtigkeit)의 구현을 통해 궁극적으로 개인의 ‘실질적인’ 자유와 평등 의 실현을 추구하는 국가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인간은 각자가 독립적으로 ‘합리적 선 택’(rational choice)을 추구하는 고립된 주권적 개인인 동시에 사회 속에서 상호 의 존하는 유기적인 ‘연대성’ 속에 있다고 할 수 있다.4) 그런데, 사회국가가 ‘정의’에 대 해 개인적 정의를 넘어 ‘사회적 정의’의 실현을 강조한다는 것은 현대 사회에서 개인 의 자유와 평등만을 통해 실현될 수 없는 정의의 사회·경제적 여건이 존재하며, 사회 국가는 이러한 모순을 시정하고, 구조적 불이익으로부터 사회적 약자를 보호할 의무 를 규정하고 있으며 이를 헌법적 요청으로 본다는 점이다.5) 따라서, 사회국가는 그 러한 사회·경제적 조건에의 실질적 자유와 평등을 보장하여 사회적 정의의 실현을 목 표로 한다. 이는 우선적으로 사회경제적 약자에 대한 ‘배려’와 ‘부조’를 지향하는 것 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이 국가에 의한 시혜적인 행위가 아니라 사회적 약자 의 법적 권리 내지 인권으로 본다는 점이 사회국가의 특성이다.6) 따라서, 사회국가 원리는 국가에게 사회적 정의의 이념 하에 모든 국민에게 인간의 존엄에 상응하는 최소한의 물질적인 기초를 제공하며 사회구조적인 종속성과 차별을 제거함으로써 사 회적 약자도 자율적인 삶을 형성 및 유지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하여야 할 적극적인 과제와 의무를 지우는데, 사회국가의 적극적인 활동은 개인의 자율성내지 자기책임성 에 대하여 ‘보충적’인 것에 머물러야 하며 이것을 약화시키거나 대체하려해서는 안된 다. 이를 ‘보충성의 원리’(Subsdiaritaetsprinzip)라 한다.7) 독일 기본법(Grundgesetz) 제20조에 따르면 독일의 ‘정체’는 ‘민주적이고 사회적인 연방국가’(ein demokratischer und sozialer Bundesstaat)라고 하고 있는데, 이것은 독일이 헌법적으로 공화국, 민주주의, 연방국가, 법치국가임과 동시에 사회국가 즉, ‘사회적 정의’(soziale Gerechtigkeit)와 형평성을 추구하는 국가임을 천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독일 헌법의 천명은 이른바 사회주의적인 계획경제 체제 국가와 구분 4) 차진아, 사회국가의 이념과 그 현실적 한계 (연방) 헌재 판례를 중심으로 -, in:
– 소득세를 통한 혼인과 가족생활의 보호에 관한 한국과 독일의
「헌법학연구」
제13권 제3호, 2007.9, pp. 167-168 참조.
5) Hans F. Zacher, Das soziale Staatsziel, in: J. Isensee/P. Kirchhof (Hrsg.), Handbuch des Staasrechts der Bundesrepublik Deutschland, Bd. 1. 1 Aufl., 1987, S. 1045. 참조. 6) 차진아 상동, p. 171 참조. 7) 상동, p. 17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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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어 독일은 모든 국민들의 사회적 형평성의 추구를 주요 통치목적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러한 사회적 형평성은 기본법 제 1조에 ‘모든 국민에게 최소한의 생활보장을 위한 국가’로 표현되고 있으며, 국가주도의 사회보험, 공공부조 및 사회서비스제공 등이 보장되는 20세기 들어 보편적으로 발전한 서구의 복지국가의 성격을 띠고 있 다. 그럼에도, 영국이나 스웨덴 등 복지국가의 경우 전 국민들이 가능한 높은 사회적 안정성을 갖게 할 목적으로 ‘복지정책’이 시행되며 특히 높은 수준의 ‘고용보장’을 통 해 이것이 추구되고 있다.8) 이에 비하여 독일의 사회국가는 ‘사회보험’이 그 핵심에 있는 ‘사회적 시장경제’ 또는 ‘사회적 자본주의’라 할 수 있는데 이것은 국가적인 행 위의 일정한 형태라는 것에 그 제도의 본질이 있다. 이러한 특징은 독일이 역사적으 로 조합주의적이며 국가주의적 유산을 물려받아 이루어졌고 국가기구가 복지공급자 로서 시장을 대체할 준비를 완벽하게 갖추고 있는 조건하에서 이 체제가 도입되었다 고 본다. 결국 그 차이는 복지국가가 그 ‘정책의 목적’에 주목하는 반면, 사회국가의 경우 ‘정책에서 작동하는 국가역할’이라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는 점이다. 결국 복지 국가든, 사회국가이든 복지정책을 모두 ‘공적인 개입’으로 보고 있으며 이들을 목적 에 따라 ① 각기 사회적 권리를 보장하고 보호하는 경우, ② 소득수준에 영향을 행 사하는 경우, ③ 사회여건과 환경시설을 개선하기 위한 경우, ④ 개인능력을 증진시 키기 위한 경우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2. 독일 ‘사회국가’(Sozialstaat)의 주요 요소
2.1. 사회적 시장경제(Soziale Marktwirtschaft) 먼저,
독일의
사회국가의
대표적인
특징은
Marktwirtschaft)
체제라
할
수
‘자유시장경제’(LME,
economy)체제에
비하여
이른바
있다.
‘사회적
‘조정시장경제’(CME,
시장경제’(Soziale liberal
market
coordinated
market
economy)라 불리는 이 사회적 시장경제 체제는 2차 세계대전 직후 콘라드 아데나우 어(Konrad Adenauer)수상의 집권기 이래 자유주의자인 알프레드 뮐러-아르막 (Alfred Mueller-Armak)과 루드비히 에르하르트(Ludwig Erhard)에 의해 주도되고 확립되어 전후 경제부흥의 제도적 바탕이 된 독일의 정치·경제·사회체제를 뜻한다.
8) 나혜심, 독일 사회국가의 기원과 성격, in: 사림, 제31호, 2008, pp. 321-34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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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정통 자유방임주의적 경제적 자유주의(laissez-faire economic liberalism)와 사회민주주의적 혼합경제(social democratic mixed economy) 사이의 제3의 길이라 할 수 있다. 그 기원은 ‘전간기’(interwar)에 프라이부르그학파 발터 오이켄(Walter Eucken)의 경제사상인 ‘질서자유주의(Ordo-liberalism)’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카톨 릭 사회교리’ 또는 ‘기독교 윤리’의 전통에 의해 강하게 영향을 받았다.9) 그 특징으 로 사회적 시장경제 체제는 정치경제적으로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면서, 사회 정의, 사회보장의 실현을 목표로 하는 체제이다. 사회적 시장경제는 빈부격차, 도시 근로자의 빈곤문제, 독점재벌의 등장 등의 문제를 야기한 ‘고전적 자유주의에 대해서 반대’하며, 동시에 ‘국가주도의 경제적 결정체제로서 전체주의에도 반대’하는 그 대안 적 시도라 할 수 있다. 사회적 시장경제의 주요 요소로는 다음을 들 수 있다. 첫째, 자유시장경제의 중심적 요소로서 ① 사적소유, ② 자유로운 대외무역, ③ 상품의 교환 그리고 ④ 자유로운 가격의 형성 등이 그것이다. 둘째, 자유 시장경제 상황에 대하여 국가가 수동적이지 않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규제정책을 수행한다는 점이다. 연금보험, 보편적 의료보험 및 실업보험과 같은 요소들은 사회보장제도의 핵심이며 이러한 사회보장제도는 근로 자, 사용자 그리고 국가에 의한 보조로 이루어지며, 사회정책은 고용, 주거 그리고 교육정책과 사회정책적인 소득분배와 자유 시장경제를 제한하는 규정들도 포함하고 있다. 즉, 여기에는 자유로운 경쟁을 제한하는 독과점을 금하는 ‘경쟁제한법’(GWB: Gesetz fuer Wettwerbsbeschraenkung) 및 시장권력남용 제한 등이 포함된다. 이러한 조처들이 자유시장경제에서 발생하는 많은 문제들을 감소시킬 수 있다고 본다. 이러한 사회적 시장경제 체제는 독일의 오랜 사회적 그리고 사회정책적 위기에 대한 역사적 경험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독일사회가 안고 있는 19세기 후반이래의 사회문제, 1930년대 촉발된 자유 자본주의의 실패, 나치의 제3제국 및 동유럽의 사 회주의 등 전체주의와 집산주의에 반대하며 ‘사회보장의 국가적 개입’과 ‘개인의 경 제적 자유’의 결합을 지향하는 것이다. 발터 오이켄(Walter Eucken), 프란츠 뵘 (Franz Boehm) 그리고 콘스탄틴 폰 디체(Constantin von Dietze) 등은 국가가 경제 를 위한 ‘적절한 법적인 환경’을 창출하여야 한다고 보고 시장원리를 따르는 건강한 경쟁의 수준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오이켄은 경제를 향상시킬 수 있는 Erhard는 그의 박사학위 논문의 지도교수였던 Franz Oppenheim과 ‘경제적 인본주의’(Economic Humanism)를 내세웠던 Wilhelm Roepke의 경제이론에 영향을 받았는데, 그는 자유시장 경제는 ‘사회적’일 필요가 없으며 그 기원자체가 ‘사회적’인 것이 라고 믿었다. Erhard는 이러한 신념을 이론가가 아닌 행정가 Mueller-Armack과 공유하며 전후 ‘사회적 시장 경제’의 이론을 실천해 나갔다. Mueller-Armack은 1946년 12월 그의 저술에서 ‘사회적 시장경제’란 조어를 처 음으로 사용하며 경제조건을 향상시킬 ‘국가의 책임’과 동시에 ‘사회적 균형’을 강조하였다.
9) 전후 Adenauer수상시절에 경제장관을 지내고 이후 1963-66년에 수상을 지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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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의 수단이 제도적 틀 또는 ‘질서’(Ordo)를 향상시키는 것이라고 본다.
2.2. 높은 수준의 ‘ 법제화’(Verrechtlichung) 독일의 사회적 시장경제는 전후 순차적인 입법과정을 거쳐 정착되었다. 무엇보다도 그 특징은 우선 높은 수준의 ‘법제화(Verrechtlichung)’로 나타나게 되었다. 즉, 2차 대전 전후 독일의 단체교섭법(Tarisvertragsgesetz, 1949)과 직장평의회법 (Betriebsverfassungsgesetz, 1952)의 제정 그리고, 50년대 독일 사회국가의 발전에 큰 사회적 파장을 나았던 연금개혁법(Rentengesetz, 1957)의 제정 등이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아울러, 사회적 시장경제 체제의 또 다른 주요 특징이라 할 수 있는 경 제의
운용방식을
위해
정치적
영향으로부터
중립적인
독일연방은행법
(Bundesbankgesetz, 1957)과 독점금지와 공정거래를 확립하기 위한 경쟁제한법 (Gesetz fuer Wettberbsbeschraenkung, 1957) 제정 등 높은 제도화의 과정을 밟았 다. 그 외에도 1954년 아동수당법(Kindergeldgesetz) 제정, 1961년의 연방사회부조법 (Bundessozialhilfegesetz) 제정, 1969년 법정병가보상법제정(Bundesurlaubsgesetz), 1969년 고용증진법(Arbeitsfoederungsgesetz)과 1949년, 1955년 그리고 1969년의 재 정균등화법(Finanzausgleichgesetz) 제․개정 등이 이루어졌다. 아울러, 랄프 다렌도르프 (Ralf Dahrendorf)가 ‘계급투쟁의 제도화’라 부르는 사회적 대화와 합의를 통해 발전 해 온 복지국가 모델 등 법제화가 지속적으로 확대되어 왔다. 노사관계 측면에서도 직장평의회의 선출·구성관련 규정과 함께 직장평의회의 파업권 불허규정, 반면에 ‘노동법원(Arbeitsgericht)’과 ‘사회법원(Sozialgericht)’제도를 통해 지방·지역·전국수준에서의 노사분규 이슈와 사회보장관련 다양한 개별적 분쟁을 법적 절차를 통하여 해결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아울러, 노동조합에는 ‘파업 권’(Streik)을 인정함과 동시에, 사용자에게는 ‘직장폐쇄권’(Aussperrung)을 인정하는 등 노사간 힘의 균형을 추구하고 있으나 파업권과 직장폐쇄권의 요건을 엄격하게 법 으로 제한하고 있다. 법 위반시에는 ‘법치주의’(Rechtstaatlichkeit)에 입각하여 처벌규 정을 엄격히 하는 등, 작업장 노사관계와 기타 노사분규관련 주요 내용을 법적으로 규율하여 처리하고 있다. 개인은 파업권이 없고 노동조합만이 단체협약 체결이 목표 인 경우에만 파업이 가능하며 분쟁이 발생하면 법원이 이를 해결한다. 대량해고와 직 장폐쇄가 불러올 결과에 대항하는 파업은 허용되지만 사측이 취한 조치가 어떤 수준 일 때, 그리고 그 피해가 어느 정도 일 때 파업의 합법성이 인정되는 지는 아직 불 분명하다. 단체협약의 효력기간에는 평화의무를 준수하여야 하며 그 기간에는 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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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체협약이 정한 사항에 대해서는 파업을 할 수 없다.10) 독일 노동조합의 가장 큰 특징은 법률존중주의를 들 수 있다. 독일노총 산하 노조들은 스스로를 사회적 평화의 수호자로 간주하고 법에서 허용한 제한적 범위 내에서 파업이 이루어지고 있다.11) 경제정책 차원에서도 전후 직후에 대외적으로는 자유주의 원칙에 따라 관세인하, 수 량제한철폐, 자본이동의 자유화, 통화의 완전한 태환 등을 제도화하였다. 1960년대 이후
경제침체
시기에는
경제안정
및
성장촉진법(Wirtschaftstabilitaet
und
Wachstumsfoederunggesetz, 1967)을 제정하여 케인즈적 총량조정(Globalsteuerung) 정책을 실시함으로써 시장경제원칙에서 후퇴 수정자본주의를 시도하였으나 1980년대 신자유주의의 흐름 속에서 시장친화적 질서정책으로 회귀하였다.
2.3. 비스마르크 사회보험(Sozialversicherung)형 복지국가 독일은 ‘사회국가’(Sozialstaat)라 불리우는 높은 수준의 복지국가체제를 발전시켜왔 다. 이것은 사회적 정의를 헌법의 주요 규정에 천명하고 민주적 법치국가 (demokratischer Rechtstaat)와 사회국가(Sozialstaat)를 직접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독 일은 사회정책(Sozialpolitik)과 경제정책을 아우르는 사회국가를 지향함을 천명하고 있다. 이러한 사회국가는 역사적으로 19세기말부터 산업화의 진전과 더불어 가장 먼 저 ‘국가복지’를 제도화하여 ‘사회보험형 복지국가’ 모델을 발전시켜왔다. 독일의 사 회국가체제의 주요 구성요소로 이 사회보험형 복지국가 모델의 특징은 조세방식으로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 스칸디나비아의 보편적 복지국가와 비교하여 노동시장에서 제외된 국민을 배제하고 있는 이른바 ‘대륙형의 보수적인 복지국가모델’로 분류된 다.12) 이러한 이른바 이 비스마르크형 독일의 사회보험체계는 임금체계, 공동결정제, 10) 공무원(대부분 교사, 경찰, 공공행정 부문종사자)들은 파업권이 없으며 공무원노총(DBB)도 여기에 동의하고
있다. 단, 독일노총연맹(DGB)산하 노동조합들은 공무원 파업금지제도에 반대하고 있다. 또 파업에 참가하는 조합원들에게 노동조합 차원에서 재정적 지원이 이루어지는데 통합서비스노조Verdi.)는 전일제 근로자가 파업 에 참가하면 월 회비의 2.5배를 파업지원금으로 지급한다. 11) 1950년대 이후 유지된 불법파업에 대한 높은 손해배상제도도 법률 존중주의가 정착되는데 일조하였는데 노조
들은 모든 형태의 규정위반 행위를 배척하는 등 노사 간에 법 존중문화가 지배하고 있다. 1970년대 이래 주로 ‘경고파업’(Warnstreik)이 흔하게 적용되었는데 이는 단기적 조업중단을 통해 사측에게 노동자들의 파업의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최근 공공서비스, 금속산업, 보건, 철도부문 등에서 횟수가 늘고 있고 기간도 길어지고 있다. 70년대까지 노동조합이 주도하지 않거나 노조의 일부가 일으키는 ‘살쾡이 파업’(wilder Streik)이 빈발했으나
이후 노조가 주도하지 않은 파업은 매우 드물게 되었다. 아무튼, 독일에서 파업은 협상이 완전히 결렬되었을 때 선택하는 최후의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다. 하이너 드립부쉬/페터 비르케, 독일의 노동조합 여건, 도전과제, Friedrich Ebert Stiftung FES Information Series 2014-03, p. 17참조.
– 조직, 제반
12) Esping-Andersen, G. The Three Worlds of Welfare Capitalism, Cambridge 1990 참조
안보개발국가를 넘어, 평화복지국가로 195
노동법, 공공부조, 가족정책, 재분배소득정책, 재정균등화법에 의해 지방정부에 의해 조직되는 공적서비스 등과 함께 독일 사회모델의 중요한 축을 형성하고 있다. 한편, 많은 유럽국가에 비하여 독일은 지난 30여년간 복지국가의 재편과정에서 총량 적인 측면에서나 복지프로그램 면에서 복지국가가 크게 축소되지 않은 모델에 속한 다.13) 독일모델은 2차 세계 대전 이전에는 주로 근로자중심의 사회보험모델이었으나 전후에는 중산층까지를 포괄하는 보편적인 사회안전망을 구축하며 이른바 ‘내포적 비 스마르크 모델’(Inclusive Bismarckian Model)로 점진적으로 발전하였다. 이러한 요 소들은 보편적인 사회보험제도의 확장과 함께 임금확정제도, 노동법적용범위의 확대, 근로자참여의 보장, 적극적 고용노동시장정책. 가족친화적 정책, 사회통합적인 사회적 대화체제 구축, 공적서비스의 역할과 보편적 서비스의 확대, 지역의 결속과 발전 등 을 통해 나타났다. 이 결과 첫째, 사회국가의 발전으로 ‘사회급여비율’(social benefit ratio)이 1950년대 19%에서 2009년 현재 32.9%로 꾸준히 증가하였다. 둘째, 근본적인 사회권의 확장을 위해 강력한 법적 기반이 확대되어 왔는데, 1947년에 제정된 기본법(Grundgesetz)상 의 사회국가(Sozialstaat) 원칙과 연방헌법재판소(Bundesverfassungsgericht, BVG)를 중심으로 하는 헌법재판 등은 보편적인 사회국가모델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런 가운데 독일의 사회보험 모델에서는 ‘등가의 원칙’(parity principle)이 적용되었 으며 사회보험에서 노사의 부담은 1970년에 26.5%에서 2003년에는 42.1%로 지속적 으로 증가하였다. 이런 환경에서 사용자의 비용부담은 ‘누진적으로 축소’되는 경향을 보였다. 동시에 중앙정부에 의해 지원되는 복지지출의 비중은 2007년에 스웨덴과 같 은 수준인 47.3%에 이르렀다. 2011년 현재 사회급여률이 국민총생산의 29.9% 수준 인데, 사회적 지출 중 연금의 비중은 40.2%, 보건의료는 33%에 달하고 있다.14) 한 편, 경제위기에도 불구하고 실업급여는 ‘어떤 비용을 치르더라도 일자리로의 배치라 는 새로운 철학’에 기초하여 특히 2008년 이후 경제위기에도 불구하고 감소하는 경 향을 보이고 있다. 이처럼 사회보험에 기초하면서도 내포적인 비스마르크 모델로 발 전해 온 사회보험제도역시 독일의 중요한 사회국가의 주요 요소라 할 수 있다.
13) Bosch, G. The German Welfare State; From an Inclusive to an Exclusive Bismarckian Model, in: Vaughan-Whitehead. ed. The European Social Model in Times of Economic Crisis and Austerity Policies, ILO 2014, p. 134 참조. 14) 상동, p. 139 참조.
196
2015. 12. 4
표2> 독일 사회지출예산 급여와 기금,
<
1991-2011(%)
사회예산 2011
1991
1995
2000
2005
2009
2010
2011
유형별 재원
100.0
100.0
100.0
100.0
100.0
100.0
100.0
사회보험기여
70.3
68.6
65.6
62.9
62.7
61.5
62.9
사업주부담
42.2
39.9
38.0
35.1
33.7
32.9
33.2
실질부담
27.9
27.5
26.0
24.5
23.2
23.0
23.3
전가된 부담
14.4
12.5
12.0
10.6
10.4
10.0
9.9
피보험자기여
28.1
28.7
27.6
27.8
29.0
28.6
29.7
피고용인
23.7
23.5
22.6
21.9
21.8
21.5
22.3
자영업자
1.1
1.3
1.2
1.4
1.8
1.7
1.7
급여수급자 자신의 기여
2.1
2.3
2.5
2.9
3.7
3.6
3.7
기타
1.1
1.6
1.3
1.6
1.7
1.7
2.0
국가 보조
26.3
28.8
31.1
35.1
35.5
36.7
35.2
기타수령
3.4
2.7
2.3
2.0
1.8
1.8
1.9
기능별 I 급여
100.0
100.0
100.0
100.0
100.0
100.0
100.0
의료
31.4
31.0
29.4
28.5
32.1
32.2
33.0
장애
8.7
9.2
8.4
8.4
8.1
8.2
8.3
노령
30.3
31.0
32.8
34.4
33.1
33.0
33.2
유족
10.7
10.2
8.9
8.1
7.3
7.2
7.2
아동
7.7
6.9
10.2
9.8
9.8
10.2
10.5
배우자
1.0
0.9
0.8
0.6
0.3
0.3
0.3
모성
0.4
0.3
0.3
0.4
0.4
0.3
0.3
실업
8.4
8.5
7.5
7.3
6.3
5.8
4.7
주거
1.0
1.0
1.1
2.1
2.1
2.1
2.0
일반생계보조
0.4
0.9
0.3
0.6
0.6
0.6
0.6
출처: Bosch, 2014, p. 139
2.4. 이중 구조(Dualstruktur)의 노사관계 독일 노사관계의 주요 특징은 이른바 ‘이중적인 이익대변 구조’(Dualstruktur)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즉, 독일 노사관계 체제는 사업장 수준과 초기업단위가 분리된 이원 적 구조를 갖고 있는데 이것은 독일 노사관계의 역사적 발전과정과 깊은 관련을 갖 고 있다. 먼저, 사업장 수준에서 노동의 조직은 1차 세계대전 전 사회자유주의적 기 업에 의해 임의로 도입된 노동자위원회(Arbeiterausschuss)와 바이마르(Waimar)공화 국 당시의 ‘위원회 민주주의운동’(Raetedemokratie Bewegung)의 유산 속에 전후 ‘1946년 연합군 통제위원회 제22호’에 의해 ‘직장평의회’(Betriebsrat, work council) 가 도입되게 되었다. 이것은 작업장 밖에서 노동조합이 주도하는 단체교섭 체계와는
안보개발국가를 넘어, 평화복지국가로 197
분리된 것으로 사업장차원에서의 전체 종업원 대표기구라 할 수 있다. 이 직장평의회 는 초기에는 작업장 내에서 소수 급진세력을 다수 온건세력으로부터 분리시키고자 하는 의도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후 목적이 변화하여 작업장 내에서 종업원 의 이익대표기구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동시에, 각 산업에서 ‘부문’(sectoral)과 ‘지역’(regional)차원의 초기업단위에서는 직장 평의회가 아닌 ‘노동조합’(Gewerkschaft)과 사용자단체 간 단체교섭이 이루어진다. 이러한 이원적 구조가 독일 노사관계의 특징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이중구조는 사업 장차원에서 노사간 상시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대립과 갈등을 제한하는 동시에, 사업 장 밖에서 활동하는 노동조합에 의해 각 주요 산별로 조직되는 단체교섭은 그 규모 나 대표성에서 사용자 또는 사용자 연합에 대하여 상당한 교섭을 발휘할 수 있는 특 성을 지녔다. 결과적으로 산별수준에서 노사간 대등한 교섭력이 유지되어 오히려 이 것이 상호간의 존재를 인정하며 힘의 사용을 자제하며 가급적 대화와 협상을 통해 노동문제를 초기업적으로 해결해나가는 전통을 확립하게 되었다. 동시에, 사업장 수 준에서 직장평의회와 초기업단위에서 조직되는 노동조합은 상호 밀접한 연계를 갖고 있다. 즉, ‘사업장 노조대표’(Vertrauensmann, shopfloor union delegates)는 사업장 내에서 종업원들의 노동조합의 가입독려, 홍보 및 지지를 동원하는 역할을 하며 실제 로 직장평의회는 노동조합원이 다수로 이를 사실상 지배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 따라 서, 이 둘의 관계는 형식적으로 분리되어 있으나, 내용적으로는 상당히 밀접한 연계 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15) 노동조합과 직장평의회는 전체근로자의 이름으로 결 정을 할 수 있다. 사용자단체역시 산업 내 모든 사용주를 대표하고 전국적인 중앙단 체의 경우 전체 경제를 대변하는데, 이들 각각은 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조직의 힘에 의해 대변되고 있다. 아울러, 직장평의회는 법적 규정에 따라, 그 활동에 있어 경제적 목표를 고려하게 되 고, 노동조합역시 노동과 자본의 이익중재 및 사회적 파트너쉽 전통의 기조 하에 서 있어 이들 노사대표기구가 각각 단순한 이익대변기구를 넘어서 노사관계의 ‘중재 적’(intermediary)성격이 강한 특성을 갖고 있다.
2.4.1.
독일의 노동조합
독일 노동조합의 두 가지 대표적인 특징은 ‘산별노조’(Industriegewerkschaft)와 ‘단일 15) 2010년도 실시된 직장평의회 구성원에 관한 분석결과 직장평의회 위원의 약 77%가 독일노총산하 노동조합
의 조합원으로 나타나고 있다. FES 2014-03 전게서, p. 15참조.
198
2015. 12. 4
노조주의’(Einheitsgewerkschaft)라 할 수 있다. 이 원칙은 전후 확립되어 전후 재건 시기에 정착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첫 번째 원칙은 한 기업에 하나의 조합만이 허용되는 것으로 모든 근로자들이 직종이나 생산직 및 사무직에 상관없이 하나의 노 조에 가입하고 있다. 두 번째 원칙은 노동조합이 정치적인 정당에 가입할 수 없도록 하고
있다.
노동조합의
상급단체는
독일노동조합총연맹(Deutscher
Gewerkschaftsbund, DGB)으로 로비를 포함한 정치적 활동에 책임을 지고 있다. 그 러나, 산별노조 중심의 교섭력에 비하여 총연맹의 정치적인 직접적인 영향력은 상대 적으로 약하다. 또한, 독일노동조합총연맹은 각 회원노조가 수행하는 단체교섭에 참 여하지 않는다. 독일에는 총연맹으로서 독일노동조합총연맹 외 기독교노동조합 (Christlicher
Gewerkschaftsbund,
CGB)
및
독일공무원연합(Deutscher
Beamtenbund, DBB)가 있다. 현재, 독일노동조합총연맹 산하에는 8개 산하연맹에 615만 조합원이 있으며 기독교 노동조합은 약 30만명, 그리고 독일공무원연합은 120 만명의 조합원이 있으며 이는 공공부문의 공무원들을 조직대상으로 하고 있다.
표3> 독일노동조합총연맹(DGB) 산하 노동조합
<
노동조합
주요 분야
독일 금속노조(IG Metall)
금속 및 전기, 철강, 섬유, 및 의류, 세탁, 목재 가공, 자동차, 전자, 목재, 위생 등
독일 통합서비스노조(Verdi)
공공 서비스, 상업, 은행 및 보험, 보건, 교통, 항만, 미디어, 사회복지 및 교육서비스, 인쇄업, 민간 서비스, 소방서 등
독일광산․화학․에너지노조(IG BCE)
화학산업, 제약산업, 광산업, 에너지공급기업 등
독일 건설․농업․환경노조(IG BAU)
건설업, 건물청소, 농업부분
독일 철도․교통노조(EVG)
철도, 선로교통
독일 교육․학술노조(GEW)
교사, 보육교사, 대학
독일 식품․요식업노조(NGG)
식품산업, 제분업, 숙박업, 식당
독일 경찰노조(GdP)
경찰
출처: 드립브쉬/비르케, 2014, p. 3
한편, 공무원신분이 아닌 공공부문의 일반근로자는 독일노동조합총연맹 산하 서비스 노조(Verdi.)에 가입하고 있다. 또 다른 총연맹으로 종래, 사무직노조(Deutscher Angestelltengewerkschaft, DAG)가 있었는데 이는 특정 사무직 종사자집단에 속하는 약 46만명의 조합으로 이후 노동조합간 합병이 이루어져 2001년까지 존속하였으며 노동조합원은 80%이상이 DGB조합원이었다.
안보개발국가를 넘어, 평화복지국가로 199
독일 노동조합은 1990년대 중반이후 17개 노조로 구성되어 있었던 DGB의 안정적인 조직구조에 큰 변화가 있었다. 즉, 동서독 통일 직후 91년에 41.6%에 이르는 높은 조직률을 보였으나 이후 하락하여 90년대 중반에는 35%, 현재에는 20%대로 조직률 이 격감한 실정으로 노조의 교섭력이 상대적으로 많이 약화된 실정이다.
표4>
<
년 독일 노총 산하 노동조합 조합원 수
2010-2011
노동조합
2011년
2010년
2011-2010년 증감률(단위%)
2010년 여성조합원 비율(단위 %)
독일 금속노조
2,245,760
2,239,588
0.28
17.7
독일 통합서비스노조
2,070,990
2,094,455
-1.12
50.5
독일 광산․화학․에너지노조
672,195
675,606
-0.50
19.8
독일 건설․농업․환경노조
305,775
314,568
-2.80
21.1
독일 철도․교통노조
220,704
260,297
-5.07
21.0
독일 교육․학술노조
263,129
232,485
1.09
70.0
독일 식품․요식업노조
205,637
205,646
0.00
40.6
독일 경찰노조
117,709
170,607
0.65
22.3
독일 노총 전체
6,155,899
6,193,252
-0.60
32.4
출처: 드립브쉬/비르케, 2014, p. 5
2.4.2.
독일의 노사관계와 단체협약
독일의 단체교섭은 ‘중앙화’와 부문수준에서의 교섭당사자 상호간의 정책조율의 기능 을 갖고 있다. 노동조합은 처음에는 지역적 자치보다는 중앙화를 추구하였고 이후, 직능·직업조직보다는 ‘산별노동조합주의’(Industriegewerkschaft)를 선택하였다. 1945 년 이후에는 이전 노동조합의 정치적 분열은 ‘통일노조’(Einheitsgewerkschaft) 원리 에 의하여 대체되게 되었다. 이후 독일은 노조간 생산직/사무직노동자, 민간부문/공 공(공무원)부문노동자, 일반노동자/기독교노조 노동자간의 조직적 경쟁은 거의 없거 나, 있어도 사실상 큰 의미가 없게 되었다. 사용자단체 역시 초기부터 중앙연맹에 가 입하는 경향이 강하여 노사 각자가 상대의 ‘중앙화’와 ‘집중화’를 촉진하게 되었다. 이 결과 넓은 영역에 걸쳐 상대적으로 중앙화 된 교섭체계가 발달되었다. 다른 한편, 반대로 1960/70년대 비판적 사회주의자와 노조활동가는 이러한 이중구조로 인하여
200
2015. 12. 4
노동조합이 전투성을 상실하였다고 비판하고 이를 대체코자 사업장 노조대표 (Vertrauensleute)의 역할을 증대시키고자 하였으나 큰 성과가 없었으며 독일 노사관 계의 특징인 이중구조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지는 못하였다. 이러한 노사관계의 특징 에 힘입어 독일 노사는 각각 교섭력 면에서는 상당한 자율성을 갖고 있으면서도 서 로가 그 힘의 사용을 제한하며 전후 장기간에 걸친 산업관계의 장기적인 평화와 안 정적 관계를 지속하며 이른 바 ‘독일모델’(Model Germany)의 상징이 되었다. 단체협약은
두
가지
특징을
갖고
있다.
먼저,
포괄적
‘광면협약’(Flaechen
Tarifvertrag)과 ‘기본협약’(Mantel Tarifvertrag)이라는 특징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포괄단체협약은 한 산업분야전체 또는 부분에 통일적으로 적용되는 것을 의미하는데, 단협을 체결한 사용자단체에 가입하고 있는 전국과 지방의 모든 기업은 이를 준수해 야 한다. 이러한 포괄적 단체협약의 적용범위는 통일적인 임금과 근로조건을 유지하 는 중요한 요소라 할 수 있다. 두 번째로 독일의 단체협상 제도는 단체협약에 대하 여 높은 ‘노사자치’(Tarifautonomie)인 ‘교섭자율주의’를 보장하고 있다. 즉, 교섭자율 주의는 단체협약체결 과정에서 정부나 국가가 간섭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16)하는 독일 모델의 중요한 특징이다. 그러나, 이 교섭자율주의는 사실상 당사자 간의 교섭 에 의한 노동문제의 해결을 우선시하고 당사자간 단체협약에 의해 높은 법제화에 의 해 보장되는 고용관련 조건과 그 수준을 적용제외토록 하는 방식에도 활용되고 있 다.17) 따라서, 기본적인 최소기준을 정하거나 경제내외적인 여건의 변화에 따라 법적 강행규정을 직접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어렵거나, 한계가 있을 때 주요 법률규정은 단 서로 단체협약에 의해 그 법적규정 적용의 예외를 인정하고 있다. 이러한 교섭자율주 의는 높은 법제화와 더불어 독일모델의 중요한 보완적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그럼에 도, 독일 단체협약은 90년대 통일이후 그리고 최근 2000년대 들어 두 가지의 중요한 변화와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18) 16) 독일에서 국가의 단체교섭 결과에 대한 개입금지는 바이마르 공화국(1929-1933)당시 강제 중재의 경험이 남긴
뼈아픈 역사적 교훈에서 비롯되고 있다. 연방정부는 연방정부에 고용된 노동자들과 단체협약을 체결하는 과정 에서 협약당사자로서 참여하고 교섭하는 과정에서만 직접 관여한다. 17) 독일에서는 노동조건과 임금수준에 대한 결정에 법을 통한 개입이 제한적이다. 법정 일일 노동시간이 최대 10시간으로 제한되어 있고 연간 휴가일수가 법적으로 최소 4주로 정해져 있다. 이런 기본적인 사항 외에 근로
시간, 연간휴가일수, 임금수준 등은 단체교섭을 통해 결정된다. 독일 노조들은 저임금노동자가 많은 서비스노 조를 제외하고 대부분 법정최저임금도 ‘교섭자율주의를 침해한다는 이유로 거부’했으나 최근 입법이 결정되어
2015년부터야 법정 시간당 8.5유로의 최저임금제가 시행에 들어갈 예정이다. 단체협약은 노사 대표자 동수로 구성되는 ‘임금위원회’의 동의를 얻어 연방노동부장관에 의해 일반적 효력을 갖는 협약으로 고시될 수 있다. 일부업종, 특히 건설부문에서는 근로자파견법에 의거 이미 보편적 최저임금이 도입되어 운용중이다. FES 2014-03 전게서, p. 10 참조 18) 독일 단체협상제도가 최근 직면하고 있는 대내외 도전요인들에 대하서는 다음 자료 참조. Bispinck, R.
(Hg.), Wohin treibt das Tarifsystem?, VSA, Hamburg, 2007.
안보개발국가를 넘어, 평화복지국가로 201
첫째, 고용관계의 분절화와 파편화 현상이 강화되며 이것이 결국 노조의 조직률 감소 로 이어지고 노사간 대등한 교섭력이 종전과 같지 못하다는 점이다. 이 결과 단체협 약은 부문별, 지역별 많은 ‘개방조항(Oeffnungsklausel)’을 받아들이며 단체협약이 적 용되는 노동자군과 그렇지 않은 노동자군사이의 임금·근로조건의 양극화가 커지고 있 다는 점이다.
표5>
<
년 동서독 지역 소재 기업과 노동자의 단체협약 적용률(단위:
2010
포괄단체협약
%)
단체협약 없음(이중 단체협약을 참조하는 비율)
기업단체협약
서독지역
동독지역
서독지역
동독지역
서독지역
동독지역
기업
34
17
2
3
64(40)
80(39)
노동자
56
47
7
13
37(50)
51(47)
출처: 독일노동시장 및 직업연구소(IAB) Betriebspanel, 2010
둘째, 독일 통일로 인한 단체협약의 ‘분절화’ 현상이다. 독일 통일은 실로 사회경제적 으로 전례없이 막대한 파급효과를 갖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구 동서독 지 역간, 부문간 임금과 사회경제발전의 수준의 차이가 상당한 여건에서 통일로 인하여 동일한 수준의 임금이나 사회보장을 적용하는 것이 무척 어려운 과제가 되었다. 즉, 통일은 이미 동원가능한 많은 수단 즉, 국채발행으로 인한 국가채무증가와 조세부담 증가, 임금억제 등을 추진해 왔음에도 이것이 독일 노사관계에 주는 영향은 상당한 것이었다. 1990년대 초 통일초기에는 독일 노동조합은 동독지역 노동자의 조합원 가입으로 일 시적으로 상당한 조직률 증가를 보였다. 그러나. 그러한 효과는 단기에 그치고 조직 률은 지속적으로 감소되어 조직률은 현재 통일이전 수준으로 다시 환원되었다.19) 단 체협약은 이후 고실업과 저성장여건 속에 지속적으로 일자리 중심의 ‘양보교 섭’(Concession
Bargaining)이
강조되었고,
지역적으로나
부문별로
‘분권
화’(decentralization)와 동독지역 등에 단협적용관련 ‘개방조항’(Oeffnungsklausel, opening clause)의 도입을 통하여 많은 ‘적용제외’를 인정하게 되며 협약의 적용률도 19) 이 직후 구 동독지역 가입자 중 150만 명이 실직으로 대량이직하고, 구 서독지역의 60만 명의 실직으로 조합 원이 급감하였고 이것은 노조의 재정압박으로 이어지며 노조 간 통합움직임이 가속화되었다. 통합과정에서 주
목되는 것은 공공부문과 민간부문에서 5개 노조가 통합하여 일시적으로 조합원 300만 명에 달하는 세계 최대 규모의 서비스노조(Verdi.)가 탄생하였다. 그러나, 이후 조합원 수가 감소하여 현재에는 207만 명에 이르러 금 속노조(IG Metall) 다음으로 큰 노조로 활동하고 있다. 한편, 독일 노조조직률에 있어 또 다른 주목되는 현상 은 노조원 중 퇴직한 노령자 회원이
1/5이상에 이르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이 20%대의 통계적 노조조직률에도
불구하고 현장에서 동원가능한 노조원의 감소로 인하여 노조의 활력과 실질적 교섭력 약화로 나타나고 있다.
202
2015. 12. 4
상당히 감소하게 되는 등 독일 단체협약제도는 많은 대내외의 도전에 직면해 있다. 실제로 독일 모델이 EU 내에서 현재 강한 경쟁력을 보이고 있는 주요 요인으로 지 난 10여년간 이러한 임금교섭에 있어 양보교섭이 지속된 가운데 정체상태를 보이고 있는 독일의 상대적으로 낮은 임금 수준에서 찾는 시각이 있다.
표6>
<
년 임금 및 실질소득 추이
2000-2010
출처: 독일 연방통계청(Destatis), WSI-Tarifarchiv, 기준 2001년 1월
그럼에도, 단체 협약의 자치(Tarifautonomie)와 금속노조(IG Metall)과, 서비스노조 (Verdi. Gewerkschaft), 화학·광산·에너지노조(IG Chemie, Bergbau und Energie, IG BCE) 등을 중심으로 한 주요 산별노동조합들의 교섭력은 큰 틀에서 지속되고 있으 며 이것이 독일의 산업체제와 함께 독일 사회국가 협약체제의 근간을 형성하고 있다 고 할 수 있다.
2.5. 공동결정권(Mitbestimmung) 독일 노사관계에서의 또 다른 핵심적 특징은 ‘직장평의회’(Betriebsrat)를 통한 사업장 공동결정제와
대기업
‘감독이사회’(Aufsichtrat)를
통한
‘기업공동결정
제’(Mitbestimmung)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공동결정은 사업장이나 초기업단위에서 노사가 기업의 경영이나 정책협의에 공동으로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20) 가장 대표적으로 최근 경제와 노동 및 고용이 상대적으로 균형발전을 하고 있는 것 으로 평가받고 있는 독일의 경우 바로 이러한 공동결정권21)이 2차 대전이후에 장기 20) 박종희, 근로자 경영참가제도의 기본구조와 방향성에 관한 법적 검토, in:「산업관계연구」 제13권 2호, 한국 (고용)노사관계학회, pp. 117-135, 2003. 참조
안보개발국가를 넘어, 평화복지국가로 203
적 번영은 물론, 90년대 전례 없는 대내외적인 도전 속에서도 통일의 대업을 비교적 성공적으로 달성하며, 강한 경쟁력을 보이고 있는 ‘독일모델’(Model Germany)의 핵 심이 바로 이 공동결정권제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독일 사회국가아래 노동법은 먼저, 노사간 갈등을 해소할 방안으로 오래 전에 이러한 ‘공동결정권’(Mitbestimmung)을 제도적으로 발전시켜왔다. 특히 2차 세계대전이후 이른바 ‘독일모델’(Model Germany)의 전형으로 여겨졌던 두 축의 하나가 바로 이 공동결정권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영미식의 ‘주주자본주의’(Shareholder Capitalism) 이자 ‘자유시장경제’(Liberal Market Ecomomy) 모델에 비교되는 이른바 독일과 대 륙권의 ‘이해관계자 자본주의’(Stakeholder Capitalism)로 불리는 ‘사회적 시장경 제’(Soziale Marktwirtschaft)가 바로 독일 모델의 핵심 두 요소이다. 독일은 노사관계에서 갈등과 중재의 이원적 체계를 갖고 있다. 노사관계는 거시적으 로 산업별차원에서 노사교섭과 갈등 과정이 ‘단체협약법’(Tarifvertragsgesetz)에 의해 규율되고,
‘공동결정권법’(Mitbestimmungsgesetz)과
‘직장평의회
법’(Betriebsverfasungsgesetz), ‘공공부문 직장평의회법’(Personalvertretungsgesetz) 등 이 구성되어 균형을 이루고 있다. 공동결정권이란 근로자들이 경영에 참여하는 권리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것은 독일 바이마르공화국 이래의 전통이다. 먼저, 1920년대 전력노조의 대표자들은 모든 사업 장에 직장평의회를 구성한 바 있었다. 이후 2차 세계대전이후 연합국은 ‘국가사회주 의’ 패망이후에 노동과 사회의 민주화를 강화하고자 이 직장평의회법을 제정하게 된 다. ‘1946년 연합군 통제위원회령 제22호’에 의거하여 이 직장평의회가 공식적으로 인정된 노동조합과 기능적으로 조정토록 되었는데, 기업단위 밖에서 구성된 노동조합 과 작업장내의 모든 근로자를 대상으로 구성된 직장평의회가 사업장내외의 교섭과 정책 사안에 대하여 공동결정하도록 하여 이원적 노사관계 체계가 전후 독일 모델의 요체로 자리잡게 되었다. 공동결정권은 사업장차원과 산업차원에 적용되었는데 기업 이 규모나 크기에 따라 여러 가지 형태의 공동결정의 형태가 존재한다. 현대적 공동 결정은 1951년 ‘석탄철강부문 공동결정권’(이른바 Montan-Mitbestimmungsgesetz)에 서 최초로 수립되었다. 이 법은 철강과 석탄산업 두 부문 노조에 의한 극한 파업에 직면하여 독일정부에 의해 시행되었는데, 노동조합은 이 법 제정의 반대급부로 연방 차원의 경제, 외교정책 그리고 국방부문에 대한 정치적 지원을 하게 되었다. 초기이래 석탄철강부문 공동결정권은 기업의 민주화에 대한 노동조합 요구의 산물이 다. 이 공동결정권은 노동자들에게 경영문제에 대하여 전례 없는 영향력을 허용하게 21) 방준식, 독일 공동결정제도의 성립과 발전, in: 한양대학교,「법학논총」, 제24권 제1호, pp. 217-236, 2007. 참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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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었는데
1천명
이상
대기업에
영향을
미치게
되어
회사의
감독위원회
(Aufsichtsraete)는 1인의 중립적 위원을 포함하여 노사동수의 대표로 구성되게 되었 다.22) 동 법은 1957년 개정이후 점차적으로 석탄·철강 산업의 퇴조와 함께 석탄·철 강 산업 이외에 종업원 2천명 이상인 모든 기업에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공동결정권 제가 1976년에 새롭게 제정되었다. 이는 회사의 경영과 작업장배치에 있어 노동자의 권리를 증가시켰다. 즉, 1976년 제정된 공동결정제 가운데 감독위원회의 구성에 관한 기본적인 규정은 석탄철강공동결정과 동일하였지만 세부적인 사항은 부분적으로 노동의 영향을 제한 하였다. 즉, 이 법에 따라, 노동자 측 대표 중 1인은 이사회 위원(Arbeitsdirektor, 이 른바 노동이사)이 되며, 이는 노동자의 이해를 필수적으로 반영하지 않는 것이었다. 게다가 감독위원회 의장은 사용자의 동의 없이는 임명될 수 없도록 하였는데, 의장은 위원회가 교착된 상황에서 캐스팅 보우트 역할을 수행하는 것으로 중요한 사항이었 다. 그럼에도, 사용자단체는 연방헌법재판소(BVG)에 공동결정권법에 대한 위헌법률 심판을 제청하였고 독일연방헌법재판소는 1979년 최종적으로 공동결정권에 대하여 합헌결정23)을 함으로써 공동결정권은 독일 모델의 중심적인 축으로 발전하게 되었 다. 1972년 직장평의회법(Betriebsverfassungsgesetz)은 중소기업에서의 노동자 대표를 규 정하는 것이다.24) 한편, 2천명까지 적용되며, 5백-2천명의 종업원을 갖는 회사는 감 독위원회 노동자대표의 비중은 1/3이었다. 보다 규모가 적은 소기업에서 종업원들은 22)
2008년 현재 노사동수의 공동결정제를 도입한 기업은 694개에 이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석탄·철강 30여개 기업이 석탄·철강 공동결정제를 채택하고 있으며, 종업원 500인 이상 대기업 1,100~1,200여 개는 1/3 참여제를 채택하고 있다. 1/3 참여제는 노동자 및 노동조합의 대표가 감독이사회의 1/3 산업 분야에서
을 차지한다. FES 2014-03 전게서, p. 15참조 23) BVerfG v. 1. 3. 1979 - 1 BvR 532, 533/77 u. a. -, BVerfGE 50, 290ff. + AP. Nr. zu §1 Mitbestimmungsgesetz. 참조. 위헌논쟁에서 공동결정권제의 반대론자들은 기업단위의 공동결정제도와 사기업
의 원리가 양립할 수 없고, 기업의 성질을 보아 민주적 제도의 모든 내용을 기업에 도입하는 것이 불가능하며, 이 제도의 도입으로 근로자의 소외감 극복이 가능하다는 이론은 허구라는 입장에서 위헌을 주장하였다. 그러 나, 최종적으로 독일 연방헌법재판소는 이 공동결정법이 기업의 사유재산권을 침해하지 않는다고 결정하여 위 헌시비를 종결지었다. 상기 논문 방준식, p. 230 참조. 24) 선거를 통해 구성되는 직장평의회의 구성은 사업장의 모든 노동자에 의해 선출된다. 매니저급 직원과 회사경
영진은 노동자평의회에 참여할 수 없다. 종업원 수 5인 이상 기업에서는 직장평의회를 구성할 수 있으며, 직장 평의회가 없는 기업에서 노동조합은 직장평의회 ‘설립을 추진할 수 있는 권한’을 갖는다. 직장평의회 설립은 법적인 강제사항은 아니다. 현재, 5인 이상기업이 독일에서 전체 고용의 장평의회를 설치하고 있다. 단,
45%를 차지하고 있는데 10%만이 직 500인 이상 대기업의 90%(구 동독지역은 85%)에 직장평의회가 설치되어 있다.
6개월 이상 근무한 성인노동자는 평의회 위원 피선거권을 갖는다. 직장평의회 구성원 수는 사업장 규모에 따 라 달라지며 종업원 200인 이상 대기업에서는 직장평의회 위원은 기존 업무에서 전적으로 평의회 활동만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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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진에 영향력을 더 확대하지 못했다. 그러나, 적은 규모의 기업에서는 즉, 피고용 인 5인 이상 모든 기업에서는 직장평의회(Betriebsrat)를 구성할 수 있었고 이 평의회 가 특히 사업장내 사회적·인사상의 문제에 공동결정권을 갖게 되었다.25) 법은 직장평 의회를 통하여 대립보다는 회사와 협력하도록 하였으며 이것은 노동자의 공동결정을 인정하는 만큼 회사에 압력행사를 금하였다. 직장평의회법은 노동조합원과 비노동조 합원 모두의 대표권을 보장하였으나 노동조합조직률이 상대적으로 높은 독일에서는 노동조합이 사실상 대부분 평의회를 지배하였다.
<표7> 산업 부문별 직장평의회 2010년 기업과 노동자 비율(단위: %) 분야
직장평의회가 있는 기업
직장평의회가 있는 기업의 노동자
광산/에너지
41
81
제조
16
66
건설
3
21
상업
10
31
교통/운송
14
47
정보/통신
15
47
금융서비스
29
73
숙박, 기타 서비스
4
15
건강, 보육, 교육
11
44
경제 및 학문 관련 서비스
8
33
전체
10
44
출처: 독일 노동시장 및 직업연구소(IAB) Betriebspanel, 2010
독일 노사관계의 이원적 구조하에서는 산별차원에서 교섭력이 있는 강한 노동조합, 결속력이 있는 사용자 단체가 각각 존재하여 노사 교섭이 이루어지고 작업장에서는 모든 근로자를 대변하는 직장평의회가 구성되어 사업장내 노동사회적 이슈들에 대하 여 공동협의하고 있다. 이러한 조직력과 교섭력 그리고 공동결정의 제도화 된 틀은 전후 독일의 강한 경제를 지탱하는 지주로 여겨지고 있다. 직장평의회 구성 범위(5인 이상)에 대한 논의가 있었음에도 노사공동결정에 대한 기본 구도는 변화되지 않고 25) 직장평의회는 ‘정보권’(예: 신규채용 및 보직이동시 등), ‘협의권’(예: 구조조정시 등), ‘공동결정권’(예: 출퇴근시
간결정시 등)을 갖는다. 직장평의회는 회사 측이 내린 해고결정을 거부할 수 있으며 해고결정이 무조건 취소
되는 것은 아니다. 직장평의회는 단체교섭을 할 수 없으며 파업을 주도 할 수 없고, 노동조합이 체결한 단체협 약에 위배되지 않는 범위에서 해당사업장 사용자측과 합의를 도출한다. 공무원에게는 별도 적용되는 '공무원직 장평의회법'(Personalvertretungsgesetz,
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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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sVG)이 있다.
남아있다.26) 공동결정권은 독일이 내부적으로 통일과 유럽통합 그리고 외부적으로 세계화라는 대내외적인 압력에도 불구 강한 경제와 더불어 어느 나라보다도 강한 민 주주의를 발전시키고 있는 배경으로 평가되고 있다.
3. 전후 독일 사회국가의 발전과 통일 후 재편과정: ‘내포적 비스마르크모델 (Inclusive
Bismarckian
Model)’에서
‘배제적
비스마르크모델
(Exclusive Bismarckian Model)’로? 독일 사회국가는 복지와 사회적 안전망의 관점에서 볼 때 ‘수동적 corporatism’에서 ‘경쟁적 corporatism’의 전환을 나타내는 모델로 볼 수 있다. 이 새로운 모델에서는 ‘분배보다 효율과 경쟁력이 강조’된다. 그러나, 이것은 전후 보편적 복지국가모델로 발전해 온 기존의 ‘내포적 비스마르크모델(Inclusive Bismarckian Model)’이 점차 ‘배 제적 비스마르크모델(Exclusive Bismarckian Model)’로 변화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27) 특히, 그간의 독일 모델의 일정한 성공에도 우려되는 것은 다른 나라에서와 같이 역시 심화되는 ‘노동시장 양극화’와 서비스부문 등에서 ‘저임금 노동’문제이다. ‘Agenda 2010’과 ‘Hartz Plan’이 이런 배제적 복지국가 모델을 더욱 심화시킨 것인 지에 대한 논란이 되고 있다. 우선 노령화 등 인구학적 도전요인으로 인하여 사회지출비용 증가의 압박이 늘어가 고 있고 그와 반대로 사회급여는 하락하는 경향이 주목된다. 연금은 그간 수차례 개 혁조처를 통하여 급여의 수준이 하향 조정되었다. 반면, 연금의 수급개시 연령은 2012년에서 2029년 사이에 67세로 상향 조정될 예정이며, 조기퇴직연금은 그 수령 이 63세부터 가능하게 되었다. 특히 연금은 1992년 연간 연금의 상향이 총소득이 아 닌 ‘순소득’기준으로 조정토록 됨에 따라, 수급자의 실질 연금수준이 점차 하락될 전 망이다. 즉, 그간의 반복적인 연금개혁을 통해 표준연금의 경우 45년 기여경력을 기 준으로 할 때 급여의 수준이 1985년에 57.4%에서 2012년 49.6% 그리고 2026년까 지 46%로 낮춰질 전망이다. 또한, 45년 가입기준 46%의 급여수준을 유지하기 위해 서는 2020년까지는 기여금이 20% 그리고 2030년까지 26% 요구되는데 이 때 인상 되는 26%의 기여금을 22%로 유지하며 차액 4%를 지원해주는 연금의 부분 민영화 26) 독일의 직장평의회법(Betriebsverfassungsgesetz), 1972.1.15. 제정, 2013.4.20 최종개정안 참조 27) Bosch, G. The German Welfare State; From an Inclusive to an Exclusive Bismarckian Model, in:
Vaughan-Whitehead. ed. The European Social Model in Times of Economic Crisis and Austerity Policies, ILO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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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이른바 Riester연금제도28)가 도입되었다. 그럼에도, 수급대상 예정자중 40%만이 이에 가입한 상태인데 특히 저임금 근로자의 경우 소득인하로 가입을 기피하고 있어 장차 이들 그룹을 중심으로 노인빈곤이 우려되고 있다. 둘째, 실업급여의 하락이다. 실업급여제도는 Hartz개혁을 통해 수급기간과 급여의 수 준이 대폭 조정되었다. 먼저, 종전에는 구직급여의 수준이 소득비례로 소득의 63-68%였다. 이어 1년 이상 장기실업자에게는 자산조사를 거쳐 소득의 53-58%가 실업부조로 보장되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회부조가 모든 장기실업자에게 자산 조사를 거쳐 종전소득의 1/3 수준이 지급되었다. Hartz 개혁의 첫 번째로 실업자에 게 모든 급여가 일괄 처리되는 one-stop center의 설립이 추진되었다. 이어 소득비례 ‘실업부조제도’는 폐지되어 사회부조와 통합되어 새로운 ‘실업급여 II’가 되었다. 실업 급여 I의 수급기간도 12개월로 대폭 줄어들게 되었다. 50세 이상자의 경우 종전 14-32개월의 지급기간이 15-18개월로 축소되었다. 장기실업자에게는 지역 통상임금 의 30%까지 지급되는 일자리의 수용이 강제되었다. 아울러, ‘실업급여 II’에서 1일 3 시간 근로가능자를 분리하여 Hartz IV로 분류하였다. 한편, ‘이전급여’의 수급자는 488만 명에서 512만 명으로 증가된 반면, 미등록 수급인은 하락하였는데 이유는 사 회부조보다는 실업급여 II가 낙인효과가 적었기 때문이었다.29) 셋째, Agenda 2010과 Hartz 개혁의 결과 저임금노동이 크게 증가하였다. 즉, 월 400유로 미만의 Mini-Job이 증가하였다. Hartz 개혁의 결과 가장 영향을 받은 수급 자는 종전 실업부조수급자와 기존의 노령실업자이다. 실업부조와 사회부조가 통합된 결과 가장 큰 문제는 실업보험제도가 비례적으로 작고, 실업급여 II가 지나치게 크다 는 점이다. 따라서, 이러한 Hartz 개혁의 실질 효과는 정확히 평가하기가 어려운 실 정이다. 아울러, 기간제 계약자와 파견근로의 활용이 크게 증가하였다. 특히, 파견회 사가 90,000개로 대폭 증가하였다. 한편, Mini-Job종사자가 750만 명으로 추산되며, 제2의 직업으로 Mini-Job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의 수도 260만 명에 달하는 등 저임 금(Mini-Job 종사자의 71%, 파견근로자의 2/3가 저임금근로자로 추산), 불안정고용 계층이 크게 증가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다시 말해, 독일에서 현재 저임금근로자 의 비중이 23.8%에 달하고 있는데 2011년 현재 610만 명이 최저임금이하에 일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그 가운데 290만 명은 6유로 이하에서 일하고 있는 등 저임금 근로층이 확대되었다. 이러한 저임금 근로층의 만성화는 독일사회시스템의 통 합성 기능을 약화시키고 독일모델의 기반을 약화시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반면, 저 숙련근로자의 ‘고용가능성’(Employability)제고를 위한 Hartz법의 효과는 달성되지 못 28) 위 논문 p. 149 참조. 29) 동 논문 참조
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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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 단체협약 적용률이 하락하여 2012년 현재 구 서독지역의 경우 단협 적용률은 60%, 구 동독지역은 48%에 머물고 있다. 반면에, 서비스노조를 제외한 대 부분의 노조들이 단체협약의 노사자치를 약화시킨다는 이유로 반대해 온 법정 최저 임금제도(Mindestlohnsystem)는 그 입법화가 추진되어 2015년부터 시행되고 있다. 기타, 복지제도에서 사회서비스부문 아동정책과 관련 2007년부터 14개월 유아휴직기 간이 도입되었고, 가족수당은 GDP의 5%에 달하고 있어 보육과 육아지원강화와 비 용증가현상으로 인하여 ‘가족정책은 딜레마’에 처해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표12> 독일 가족정책의
<
의 비중 및 분배
GDP
현금급여
현물급여
조세경감
전체
영국
2.46
1.38
0.38
4.22
프랑스
1.44
1.76
0.78
3.98
스웨덴
1.58
2.17
0.00
3.75
덴마크
1.63
2.27
0.00
3.90
독일
1.16
0.89
1.01
3.07
이탈리아
0.78
0.80
0.00
1.58
미국
0.11
0.59
0.52
1.22
OECD 평균
1.41
0.94
0.28
2.61
출처: Bosch, 2014, p. 153
건강보험의 경우 노사 ‘동등비율원칙’이 무너지고 노동자가 더 많은 비율로 노사가 각기 8.2% : 7.3%를 부담하고 있으며, 민간보험 가입자가 1970년 420만 명에서 2011년에 9백만 명으로 증가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한편, 장기요양보험의 경우 보험료율을 총보수의 1%로 하고 있는데 증가하는 노인 요양과 돌봄의 수요로 인하 여 보험제도의 지속가능성이 현재 논란이 되고 있다. 이러한 독일 사회적 안전망의 다양한 위험요인들은 현재 독일 사회국가 모델이 봉착하고 있는 주요한 새로운 도전 요인들이다, 독일의 사회국가는 이러한 노동시장과 복지제도의 개혁요소들에 대한 해 법을 찾아가며 독일모델의 미래 지속가능성을 담지 해나가는 데 새로운 대응능력을 보여 줄지는 두고 볼 문제이다. 그러나, 전후 오랜 기간 확립되어 온 이른바 ‘내포적 비스마르크 모델’은 점차 ‘배제적 비스마르크 모델’로 이동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으 며 그럴수록 산적한 사회적 과제의 해결을 위하여 사회국가의 ‘지속가능성’은 도전에 직면해 있다.
안보개발국가를 넘어, 평화복지국가로 209
표13>
<
년 이래 독일 모델의 주요 변화와 결과
1990
변화의 추동자
변화 산별교섭의 침식; 산업최저임금의 도입; 강한노조가 있는 산업에서 단협의 현대화; 근로시간유연성 증가(예: 근로시간계좌제)
결과 단체협약 적용감소; 저임금부문 급속한 증가; 빈곤률 증가; 12개 산업에서 창출된 임금 floor; 위기시 정리해고를 피하는 중요한 요소 근로시간계좌제 파견근로자에 대한 동일임금규정 이탈은 예외가 아닌 규칙; 단일직업(mono-jobs)에 대해 동일임금규정 강행 안함
임금확정 체계
감소하는 노동비용; 증가하는 경쟁력과 외부 유연성
노동법
외부유연성 증가와 노동비용감소
근로자참여
노동조합 및 직장평의회와 협상회피
고용/노동시 장
직업훈련의 현대화; 직업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실업자에 대한 압력 증가; 재정위기시 사회적 긴장을 회피, 인적자본보호
복지체제/사 회적보호
새로운 수요에 대한 대응; 특히, 노인돌봄, 아동보육; 노인돌봄에 대한 지자체의 경감; 인구학적 변화로 인한 노령연금보험의 재정문제; 사용자를 위한 노동비용감소; 민간 은행 및 보험회사의 지원
가족정책
여성고용 선호의 변화; 현대화된 가족모델에 대한 유권자 지지의 증가, 그러나 여전히 남성소득자모델에 대한 강력한 지지
사회적대화; 인정과 사회적파트너 참여증가
사회적 대화를 강조하는 정부의 우선권의 변화
2002년 폐지된 적녹연정에 의해 도입된 고용을 위한 연대; 재정위기시 중앙단위 사회적 대화의 재활성화
공공서비스 역할과 보편적 이익의 서비스
공공서비스의 민영화에 대한 EU지침의 이행; ‘부채브레이크’를 통한 비용절감 압력을 높은 수준에서 유지; 공적설비 통제의 반환; 저임금부문의 외주화감소
공공부문 고용의 감소; 공적서비스 민간공급자에 개방 및 많은 서비스 민영화; 조세감면 재정지원 예산삭감; 많은 도시와 구의 공적시설의 재 지자체화
1991년과 2012년 사이 32%까지 감소된 공공부문고용; 공공부문투자 감소-2005년 이래 마이너스 순투자감소; 재 지자체화를 통한 지역경제의 강화
지역결속/발 전
재정균등화 체계와 독일복지체계로의 (구)동독지역의 통합; (구)동서독지역간 생활조건과 생산성의 균등화
독일 ‘주’간 두개의 연대협약; 독일통일로 발생한 추가비용에 의해 정당화된 소득, 자본, 법인세에 대한 연대세 도입
2019년까지 구 서독지역에서 구 동독지역으로 높은 (재정)이전률; 마이너스 순국가투자(주로 지자체들); 지역적 차이 증가; 일부 구 서독 지자체들 예산문제 적극 대처 않음
출처: Bosch, 2014, p. 159-160
210
2015. 12. 4
파견근로 규제완화; 미니잡 규제완화
직장평의회가 없는 중소기업으로 외주화; 공격적인 노조와 직장평의회 파열의 증가 직업훈련의 급속한 현대화; 실업자에 대한 압력의 증가(하르쯔 법령); 조업단축을 통한 내부유연성 촉진 새로운 장기요양제도의 도입; 조기퇴직의 폐지와 퇴직연령 67세로 점진적 상향조정; 연금수준의 감소와 비 법정 보조 민간연금의 도입; 의료와 장기요양보험의 비용절감 예산규칙; 의료보험 공급자간 위험의 균등화 아동보육시설과 전일제학교의 증가; 소득비례육아휴직수당도입; 자녀를 공적 아동보육시설에 보내지 않는 부모에 대한 아동보육지원증대
직장평의회가 없는 회사에서 단체협약과 노동법 강제 적용이 약함 좋은 직업을 위한 접근에 요구되는 직업훈련; 저임금직업에서 전직 증가; 2008년 중견 및 대기업부문 해고없음 지자체 비용경감; 노령근로자 고용률 증가; 표준연금 실질감소; 미래 연금빈곤 위험증가; 예산규칙의 결과 특히 노인돌봄에서 서비스질의 감소; 사업주 노동비용감소(낮은 부담); 의료보험제도 재정안정화 젊은 부모의 일과 가족생활의 균형개선, 그러나 폭넓은 지역적 차이를 감안; 주변적 파트타임보다 기혼여성의 일에 대한 여전한 강한 탈동기부여 아젠다 2010동안 사회적 대화의 역할감소(하르쯔법); 전국수준에서 정규의 그러나 형식화되지 않은 사회적 대화
4. 결론: 독일 사회국가의 도전과 과제 본고에서는 독일의 사회국가의 개념과 역사적 발전과정 그리고 최근에 직면하고 있 는 안팎의 도전요인들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제한없는 무조건적인 자유시장경제가 성 장과 복지 그리고 사회적 보장을 약속한다고 믿는 자유시장경제 모델은 오늘날 고용 과 성장의 분리, 소득분배 등 사회적 불평등의 심화, 양극화되는 일자리의 질은 물론 경제적 성과 면에서도 성공적이지 못하며 효율적이지 않다고 비판되고 있다. 그러나, 독일은 ‘사회국가’의 역사적 발전과정 속에서 ‘사회적 시장경제’체제라는 독자적인 모 델을 발전시켜왔고 이것은 자유시장경제와 비교되는 ‘조정시장경제’(coordinated market economy)로서 ‘자본주의 다양성’(Varieties of Capitalism) 모델의 대표적인 국가로 분류된다. 이러한 독일 사회국가는 ① 19세기 이래 후발산업화 과정을 경험 한 나라로서 ② 20세기 들어 중간에 전간기에 민주정으로 이행하면서 자유주의적 바 이마르공화국의 짧은 과도기를 거쳐 두 번의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전체주의’의 정치 적 극단과 패전의 결과, ③ 전후 의회와 정당민주주의 그리고 시민 민주주의발전과 꾸준한 학습과정 등을 공유하며 발전해 온 독자적인 ‘역사적 경험’에 근거하고 있다, 그 특성은 또한 ① 산업조직과 생산능력에 기반한 ‘사회경제발전의 수준’, ② 연방제 와 분권화 그리고 비례대표제, 의회민주주의 등 ‘정치체제’와, ③ 핵심 경제주체의 조 직화와 동원능력 등 ‘사회적 세력관계’ 그리고 ④ 정책 주체에 의해 ‘전략적으로 선 택된 정책의 결과’ 등 복합적 요인에 기인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독일 사회국가의 발전과 한계 그리고 최근의 도전 요인은 지극히 ‘경로의존적 (path-dependent)’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독일 사회국가 모델의 경로의존성은 다시 ① ‘사회적 시장경제(Soziale Marktwirtschaft)’, ② ‘법치국가성(Rechtlichkeit)’ 과 높은 수준의 ‘법제화(Verrechtlichung)’, ③ 복지나 경제체제의 운용에 있어서의 ‘국가의 개입과 적극적 조정역할(Steuerungsstaat)’, ④ 사업장과 산별로 이원화 되어 있는 ‘이중구조(Dualstruktur)의 노사관계’, ⑤ 독립적인 ‘연방중앙은행(Bundesbank)’ 제도, ⑥ 포괄적 적용과 높은 자치를 누리는 ‘단체협약제도(Tarifautonomie)’, 그리고 ⑦ 참여와 협력 그리고 책임의 원리에 입각한 사업장수준에서의 ‘직장평의회 (Betriebsrat)’와 기업경영에의 참여를 보장하고 있는 ‘공동결정권(Mitbestimmung)’제 도 등에 기인하고 있다는 점을 분석하였다. 독일 사회국가의 이런 주요 요소들은 최근 글로벌 경제위기시 돋보였다. 하나의 대표 적 사례로 2008/9년 글로벌 경제위기시 독일은 선진경제를 강타한 산업생산의 축소 와 경제성장의 둔화로 인한 똑같이 고용의 위기를 맞았다. 그런데, 독일은 독자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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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도적 기반 위에 사회적 주체들의 능동적 대응을 통하여 이러한 위기를 상대적으로 효율적으로 극복하였다. 즉, 이 시기 독일 사회국가는 자유시장적 구조조정과 달리 1 차적으로 노사간 ‘근로시간단축’(Arbeitszeitverkuerzung, working time reduction)을 통하여 고용의 위기에 대응하고, 2차적으로 근로자의 절반이상이 참여하고 있는 ‘근 로시간계좌’(Arbeitszeitkonto, working time account)를 통하여 개별적으로 근로시간 단축에 따른 소득단절을 상쇄하고, 마지막으로 높은 수준의 제도화로 사회법상 제 95~109조에 상세히 법제화되어 있는 ‘조업단축지원금제도’(Kurzarbeitergeld, short working time fund)를 통해 1/2근로시간단축과 이로인한 소득상실을 2/3까지 보전 을 전 산업에 순차적이고 전면적으로 활용하는 방식으로 체계적으로 고용의 위기에 대응하였다. 동시에 독일 사회국가는 경제위기시에 사회법상 6개월 한시적으로 제도 화 되어있는 ‘조업단축지원금’을 경제주체들의 사회적 대화를 통하여 최대 24개월까 지 연장하며 위기에 효과적으로 공동 대응하는 유례없는 국가적 대응능력을 새롭게 보여주었다.30) 이런 점은 오늘날 독일이 거시적인 경제조정정책을 지향하던 70년대와는 다르다 하 더라도 여전히 사회국가의 다양한 기제를 활용한 사회 및 경제정책적 조율능력을 보 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독일 사회국가 모델은 역사적 경험에 근거하여 농축 된 제도화의 결과가 표출된 것이라 평가할 수 있으며 그것이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첫째, 독일 사회국가와 사회적 시장경제 체제의 발전은 내외의 도전 속에서 반복된 시행착오, 지속적인 좌절과 응전과 함께 끝없이 단련되어 온 ‘사회적 학습’의 결과이 다. 다시 말해, 독일 사회국가의 발전은 그것이 갑작스럽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이 나라의 후발 산업화, 다른 나라에 비하여 중립적 조정자로서 국가를 상정하는 국가주 의적 전통, 영미나 프랑스와 달리 성공적인 시민혁명을 겪지 않고 보수주의적 지배계 층에 의한 사회통합 전략, 전간기 바이마르 공화국의 과도기, 이후 파멸로 치달은 전 체주의적 극단주의, 이후 패전과 함께 밖으로 강요된 분단구조 하에서 냉전체제의 핵 심 보루로서 전후 확립된 시민민주주의 확산과 함께 복지국가가 안정기와 개편기, 그 리고 통일이라는 전례없는 사회통합의 과제 등, 지속적인 도전요인들 속에 형성되어 온 ‘장기적 투쟁과 갈등의 결과’라는 점이다. 둘째, 독일 사회국가와 독일 사회적 시장경제 모델의 발전은 경제주체들 간의 사회적 대화에 대한 지속적인 학습과 민주적 토론의 결과라는 점이다. 즉, 이것은 주기적으 30) Burda, M. C. and Hunt J. What Explains the German Labor Market Miracle in the Great Recession?, The Evolution of Inflation Dynamics and the Great Recession, in: Spring 201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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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정권교체기에 슬로건처럼 등장하는 일거에 노동과 복지, 경제성장 등 모든 문제의 해결을 기대하는 이른바 선언적 ‘사회적 대타협’ 구호와 다른 것이다. 오히려 ① 상 시적으로 작동하는 의회민주주의와 정당체제의 발전, ② 그 기반아래 적극적 개입국 가이자 효율적인 공급자로서 국가의 균형잡힌 사회·경제정책의 추구, ③ 사업장 수 준·산별수준의 공동결정 및 공동협의과정과 거시적인 정책결정 과정에서 주요 경제주 체들의 민주적 참여가 다양하게 보장되는 틀 속에서 가능했던 것이다. 즉, 이것은 반 복적인 민주적 토론과 타협구조 발전의 결과이며, 따라서, 꾸준한 ‘제도화와 주체들 의 전략적 선택의 결과’라 할 수 있다. 셋째, 독일 사회국가와 사회적 시장경제 체제의 발전은 국민경제 규모의 크기나 대외 경제 체제에 의존하는 정도에 반드시 비례하지는 않았다. 예를 들어, 독일의 경제체 제는 세계 4위 규모임에도 가장 개방적인 경제체제로 글로벌 개방경제 하에서도 역 사적으로 발전되어 독자적으로 구축된 토대 위에 역사적으로 형성 발전하여온 ‘사회 국가의 병존하는 생존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적정 경제규모, 대외의존성 정도, 능동 적 국가의 역할, 민주적 의사결정구조 등은 사회국가 이러한 성공의 필요한 요건들이 며, 민주적 시장경제(democratic market economy)와 사회적 정의나 사회통합(social integration)의 실현은 사회국가 발전의 충분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중요한 ‘사회적 선택’(social choice)의 결과이다. 결론적으로 오늘 독일 사회국가의 성공이나 사회적 시장경제 모델은 바로 이러한 역 사적 경험과 법·제도적 기본 틀의 구축 그리고 학습과 토론을 통한 사회적 합의를 추구하는 민주적 대화의 구축 능력과 타협의 결과라 할 수 있다. 이는 경제적 위기 시 만이 아니라 평상시에 상시적으로 기능하는, 예방적인 정책적 토대가 될 것이다. 그간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독일 사회국가는 전술한 바와 같이 내부적으로 소 득분배의 악화, 저임금노동자의 증가 등 노동시장 양극화, 사회보장 안전망의 약화 등 많은 과제를 안고 있다. 독일의 사회국가모델이 전후 성공적인 복지국가의 황금기 이후 유럽통합과 세계화라는 파고에 나름의 능동적인 대응력을 보이며 발전해왔었다. 무엇보다 90년대 이후 통일이라는 누구도 준비되지 않았던 상상하기 힘든 도전과 사 회적 과제를 국외자의 시각에서 보면 놀라울 정도로 탁월하게 해결해왔다. 그런데, 향후 이처럼 그간 구축된 역사적 전통 속에 새로운 도전과 과제에 직면하여 독일의 ‘사회국가’가 과연 다시 종전의 ‘배제적 비스마르크형모델로 회귀’하고 있는지는 주목 되고 있다. 독일 사회국가가 이런 도전에 어떻게 또 다시 대응해 나갈 것인 지가 직 접적으로 독일, 나아가 재정위기와 난민과 테러 등 위기의 전체 유럽의 미래, 그리고 전 세계적인 관심사항이 되고 있다. 역사는 어리석은 과거를 반복하는 것인가? 아니 면 진화할 것인가? 독일 사회국가의 성공과 한계는 새로운 도전 앞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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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제 8
독일 경제체제의 특징과 중소기업1)
이명헌 / 인천대학교 교수, 원승연 / 명지대학교 교수
1. 서론 ○ 이글은 독일의 경제체제의 모습을 생산물 시장, 노동시장, 금융시장, 기술 및 혁 신, 대외 경제관계 등으로 나누어 살펴보고 그 속에서 중소기업의 위상이 어떠한 지를 검토한 후, 거기서 나타나는 특징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근본 배경이 무엇인 지를 논하고자 한다. - 현재 이글의 완성도는 매우 낮으며 필자가 이전에 쓴 글들, 특히 옥우석 외 (2012)와 이기영 외(2013) 중 관련부분을 가져다 편집한 부분이 많음을 밝혀둔다. - 앞으로 이글의 맺음말 부분에 적은 생각을 발전시켜 보다 완성된 글로 가다듬고 자 한다.
○ 독일은 이른바 ‘보수주의적 대륙모델’ 복지국가이다(옥우석 외(2012);77). 보편적 복지국가형태로 분류되는 스웨덴 등 북구국가들과는 적지 않은 차이를 보이는 경 제체제를 가지고 있다.
○ 1980년대 이래 위기와 변용을 겪어 왔으나 복지체제를 유지하면서, 2000년대 중 1) 이 글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초고이므로 인용하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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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이후 비교적 견조한 경제성장과 양호한 고용성과를 내고 있으므로 우리의 관 심 대상이 된다.
○ 또한, 최근에는 우리나라에서 성장의 과실이 대기업에 집중되면서, 독일의 강력한 중소기업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2. 독일경제체제의 역사적, 이념적 배경 가. 역사적 조건 ○ 역사적으로 볼 때, 서구 국가 중에서는 산업화가 늦게 시작되었고, 권위주의적 프 로이센 국가권력 주도로 근대화가 이루어졌으며, 19세기말 복지체제도 그러한 기 획의 일부로 도입되었다는 특징이 있다.
○ 산업화 과정에서 저변이 넓은 노동조합과 사회주의 정당(SPD)이 형성되어 전자는 강력한 산별노조 체계를 통해서, 후자는 2차 대전후 마르크스 주의와 결별한 후의 대중정당화를 통해서 정치경제 체제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다.
○ 20세기 초반부터 내려온 ‘경제민주화’ 및 경영평의회 운동의 전통과 2차 대전후 독일에서의 군국주의 국가 부활 차단을 위해 미국이 추진한 정책이 결합하여 다 른 자본주의 국가와 여러 면에서 구별되는 경제체제가 형성되었다. (‘라인형 자본 주의’) - 연방카르텔청에 의한 반독점규제, 산별노조에 의한 임금교섭, 기업차원에서의 노 동자와 경영진의 공동결정제도(Mitbestimmung), 기업의 이중(二重) 이사회 체계 를 통한 은행과 대기업의 긴밀한 관계, 민간 은행 이외에 공공은행과 협동조합은 행의 발달, 임금기반에 기반한 사회보험 중심의 복지체계, 현장밀착형 산업인력 양성체계, 공공연구소를 매개로 하는 산학연 연계에 의한 혁신체계를 그 특징으로 한다(옥우석 외(2012)). - 정치적으로는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와 달리 좌우 중도 정당들을 중심으로 한 연 립정부가 안정적으로 운용되었고, 각 주의 자율권이 상당히 존중되는 연방제가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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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적으로 정착되었다. · 중도우파 기민련(CDU)/기사련(CSU), 중도좌파 사민당(SPD), 자유주의 성향의 자민당(FDP), 녹색당(die Grünen)이 연방과 주정부에서 다양한 조합으로 연정을 형성하면서 타협적인 정치문화가 자리잡았다2).
나. 이념과 구호로서의 ‘ 사회적 시장경제(soziale Marktwirtschaft)’
○ 2차 대전 이후 독일의 경제체제 및 정책의 대전제가 되는 ‘이념’ 또는 ‘구호’이다 - 뮐러-아르막이 순수한 자유주의 시장경제와 계획경제와 구분되는 제 3 형태의 경제체제로 제시하였고, 이를 통해서 시장에서이 자유의 원리와 사회적 균형을 결 합하려 시도하였다.(도그마티즘과 상대주의 사이의 'Irenik')(wikipedial.de) - 질서자유주의자들은 이론적으로 사회적 시장경제의 구성요소들을 제시하였다3). . · 경쟁질서를 창출하는 원리로서는 작동가능한 완전경쟁 가격체계의 창출, 확고한 준칙에 입각한 통화량 통제를 통한 화폐가치의 안정, 자유로운 시장진입(자유무역, 직업선택 및 산업 진입자유, 특허권 제한), 사유재산, 계약자유, 법적 안정성을 통 한 불확실성의 최소화 등을 들 수 있다. · 또한 경쟁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원칙으로서 독점의 통제, 적절한 소득의 재분배, 비정상적 공급의 시정 등을 들 수 있다. · 이러한 원칙의 실현을 위해서는 ‘작은 정부’가 아니라, 경제력을 가진 집단으로 부터 독립적이고 중립적인 ‘강하고 행동력 있는 정부’가 바람직한 것으로 생각된 다. - 질서자유주의자들 중에서도 뢰프케는 폭넓은 문명사적 관점에서 현대사회와 복지 국가를 비판하면서 '인본적(human)' 사회질서의 형성을 주창했는데 그 중요한 내 용은 독점금지, 중소기업 육성, 대중의 재산형성, 부르주아 윤리의 확립, 도덕적 지도층의 역할, 권력과 인구의 분산 등 이다.
○ 실제 정치의 장에서는 서독 초기 시장지향적 중도우파 정당 기민당(CDU)이, 당 2) 연방정부는 CDU/CSU-FDP 보수연정(1949-1966), CDU/CSU-SPD 좌우대연정(1966-1969), SPD-FDP 사민-자민
연정(1969-1982), CDU/CSU-FDP 보수연정(1982-1998), SPD-녹색당 좌파연정(1998-2005), CDU/CSU-SPD 좌우 대연정(2005-2009), CDU/CSU-FDP 보수연정(2009-2013), CDU-CSU-SPD 좌우대연정(2013-)을 거쳐왔다. 3) 이 단락은 김종걸 외(2009) “경기침체기 각국의 재정, 조세정책”과 이근식(2007) “서독의 질서자유주의: 오위켄
과 뤼프케”를 주로 참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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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상당히 대중적 인기가 있던 계획경제지향에 맞서는 정치적 구호로 사용하였다. - 중도좌파 사민당(SPD)는 처음에는 이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고 ‘민주적 사회주의’ 나 ‘경제 민주주의’라는 구호로 맞섰으나, 1990년대에 들어서는 이 표현을 수용하 였다.(wikipedia.de)
○ 사회적 시장경제의 이념은 헌법에 명시되어 있지는 않으나 기본권, 경제활동 관 련 법규들이 그러한 방향을 지향하고 있으며, 1990년 동서독 통일의 법적 기초가 된 ‘통화경제사회연합 창설조약’에 경제질서의 원칙으로 명시되었으며 중요한 정 당들이 모두 이 이념의 중시를 표방하고 있다.
3. 거시 경제의 추이와 구조 ○ 독일의 인구 2013년 기준 8,077만 명, GDP는 3조 7465억, 1인당 GDP 46,386 달러로 각각 우리나라의 1.61, 2.88, 1.78 배 이다.
○ 1990년대 저성장, 고실업, 재정위기로 경제체제가 위기에 처하였다. - 전후의 혼란을 수습한 서독은 1960년대까지 고도 성장과 물가 안정, 완전고용을 보이는 이른바 ‘라인강의 기적’을 달성하였지만, 1970년대에 전세계적인 석유위기 와 경제구조 조정이 진행되면서 경제지표가 다소 악화되었고, 1980년대 성장과 물가는 크게 악화되지 않았으나 실업문제가 심각해졌다. - 1990년 통일 이후 저성장과 고실업의 문제가 계속되었다.
○ 그러나 2000년대 중반 이후로는 사회보장과 노동시장정책의 개혁, Euro 권의 창 출, 세계경기의 호전이 맞물리면서 성장률도 상승하고 실업률도 지속적으로 하락 하였다. - 특히 고용상황이 크게 개선되고, 2008년 세계경제위기의 충격 속에서도 좋은 고 용성과를 보여줌으로써 주목을 받고 있다. - 수출이 급격히 확대되면서 경상수지가 크게 흑자를 내고, 정부의 수지도 호전되 어 재정건전성도 개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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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독일의 거시경제지표
(1980~2014)
12 10 8 6 4 2 0 -2 -4
0 8 9 1
1 8 9 1
2 8 9 1
3 8 9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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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0 0 2
0 1 0 2
1 1 0 2
2 1 0 2
3 1 0 2
4 1 0 2
-6 -8 GDP성장률
CPI 변화율
실업률
일반정부구조수지
경상수지/GDP
출처: IMF(2015) World Economic Outlook Database
○ 독일의 산업과 고용의 구조를 보면 다른 EU 국가들에 비해 2차 산업의 비중이 높다. 특히 제조업은 2010년에 GDP기준 20.9%로 EU평균 14.9%에 비해 현저히 높다. 반면, 농림수산업, 건설, 도소매,교통,숙박,음식점 등의 서비스 산업의 비중이 낮다.
○ 독일경제의 또하나 중요한 특징은 경제규모가 큰 선진국으로서는 예외적으로 수 출입의 의존도가 높다는 것이다. 아래의 표에서 보듯이 독일의 무역의존도는 90% 에 가깝다. ○ 독일의 경제규모 중 정부부문이 차지하는 비율은 일반정부4) 지출기준으로 45~48% 수준으로 EU국가 중에서는 평균적인 수준이다. - 재정수지와 국가부채는 EU국가 중 평균 또는 양호한 편에 속한다.
4)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그리고 사회보험을 합한 개념
안보개발국가를 넘어, 평화복지국가로 221
표
1
독일의 산업 및 고용구조
년)
단위:%)
(2010
(
EU-27 GDP
고용
독일 GDP
고용
농림수산업
1.7
6.0
0.8
2.0
2차산업(건설업제외)
18.8
16.7
24.7
19.1
14.9
15.1
20.9
17.6
건설
6.4
8.0
4.3
7.0
공공행정,국방,교육,건강,복지
19.5
20.7
18.3
22.8
도소매,교통,숙박,음식점
19.1
25.5
15.2
23.1
부동산 관련 활동
10.6
1.0
11.9
0.9
전문,과학기술,관리등
10.0
10.9
10.8
12.5
금융,보험
5.7
2.7
5.3
3.3
정보통신
4.7
2.8
4.0
3.2
그 중 제조업
예술,오락,기타서비스
3.5
5.6
4.7
6.0
합계
100.0
100.0
100.0
100.0
자료: OECD Stan Data Base
표
2
독일과 주요 외국의
GDP
대비 상품 및 서비스 수출입 비율(2010년) (단위:%)
수출 40.7 46.8 53.6 25.5 30.1 12.7 15.2
EU-27 독일 스위스 프랑스 영국 미국 일본
표
3
독일의 정부부문(일반정부)의
정부수입 EU-27 독일 정부지출 EU-27 독일 정부부채 EU-27 독일 출처: Eurostat
222
2015. 12. 4
수입 39.8 41.4 42.2 27.8 32.6 16.2 14.0
GDP
합계 80.5 88.2 95.8 53.3 62.7 28.9 29.2
대비 비중
단위:%)
(
2000
2005
2006
2007
2008
2009
2010
45.3 46.2
44.3 43.6
44.8 43.7
44.7 43.7
44.7 44.0
44.1 44.9
44.1 43.6
44.7 45.1
46.8 46.9
46.3 45.3
45.6 43.5
47.1 44.0
51.0 48.1
50.6 47.9
61.9 60.2
62.8 68.6
61.5 68.1
59.0 65.2
62.5 66.7
74.7 74.4
80.1 83.2
○ 독일의 정부지출 구조를 보면 사회보장 관련 지출이 GDP의 21.2%에 달하여 EU 국가의 평균을 상회하고 그 외 분야의 비중이나 비율이 낮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표
4
독일의 정부(일반정부)지출 항목별
대비 비율
GDP
년)
(2009
(단위: %)
EU-27
독일
합계
일반 공공
국방
치안
경제
환경
주거
의료
문화
교육
사회 보장
51.0
6.7
1.6
1.9
4.5
0.9
1.1
7.5
1.2
5.6
20.0
(100)
(13.1)
(3.1)
(3.7)
(8.8)
(1.8)
(2.2)
(14.7)
(2.4)
(11.0)
(39.2)
48.1
6.2
1.1
1.6
3.9
0.8
0.7
7.3
0.8
4.3
21.2
(100)
(12.9)
(2.3)
(3.3)
(8.1)
(1.7)
(1.5)
(15.2)
(1.7)
(8.9)
(44.1)
출처: Eurostat 주 : 괄호 안은 정부지출 대비 비율
4. 경제제도
4. 1. 생산물시장5) ○ 독일은 유럽에서 가장 먼저 독점규제에 관한 제도를 만들고 발전시켜온 나라이 다.
○ 2차 대전 후 ‘사회적 시장경제’의 틀이 짜여지는 과정에서 카르텔을 금지하는 명 시적 입법이 필요하다는 질서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의 주장에 기초하여 1957년 ‘경 쟁제한규제법(Act against restraints on competition: GWB)이 제정되었고 이를 집행하는 기구로 연방카르텔청(Bundeskartellamt)이 설립되었다. - 경쟁제한규제법은 행정부가 재량적으로 해석하여 카르텔을 규제할 여지를 제한하 고 카르텔 규제에 관한 특정한 규칙들을 확립하였다. - 연방카르텔청은 강력한 독립성을 보유한, 법원과 유사한 전문가 집단으로 형성되 었다.
5) 이 절에서는 OECD(2004)를 주로 참고하였다.
안보개발국가를 넘어, 평화복지국가로 223
○ 독일의 경쟁제한규제 체계에서는 수평적 협약과 수직적 협약은 다른 방식으로 규 제된다. - 수평적 협약은 법적으로 허용된 경우를 제외하고는 기본적으로 금지된다. - 수직적 우월적 지위의 남용(abuse)인 경우 사후적으로 규제의 대상이 된다. ○ 기업합병도 일정 규모 이상의 건은 사전심사 대상이 되며 이때 우월적 지위 (dominant position)가 창출하거나 강화할 것으로 판단되는 합병은 불허될 수 있 다. - 합병관련 기업들의 시장점유율이 낮다고 하더라도 기타 요인들(금융상의 강점, 수직통합, 근접한 경쟁자의 부재)로 장기적으로 부정적인 결과가 초래될 것으로 판단되면 그 합병은 불허되기도 한다.
○ 국제비교 - OECD ‘경쟁법과 정책 지표’(OECD(2013))에 따르면 독일은 경쟁강화적인 제도 를 잘 갖추고 있는 나라로 평가된다. 표
5 Cross-country differences in competition laws and policies, indicator set 2
(자료: OECD(2013))
Scope of action
Policy on anticompetitive behaviour
Probity of investigation
Germany
Japan
Korea
United States
Competences
0.00
0.00
0.00
1.50
Powers to investigate
0.00
0.00
0.00
1.00
Powers to sanction remedy
0.00
1.20
0.60
0.00
Private enforcement
0.00
0.00
2.00
0.00
Horizontal greements
0.00
1.71
0.00
0.00
Vertical agreements
0.00
1.50
0.00
0.00
Mergers
0.00
0.00
0.00
0.00
Exclusionary conducts
0.00
2.40
0.00
0.00
Independence
0.50
0.00
0.00
0.00
Accountability
0.00
0.00
0.00
0.00
Procedural fairness
0.30
0.00
0.00
1.50
0.86
0.86
0.43
1.29
Advocacy
주: 지표는 0-6 사이이며 작을수록 경쟁유도적임 자료: http://www.cesifo-group.de/ifoHome/facts/DICE/
224
2015. 12. 4
4.2. 노동시장6)
(1)
노동시장 상황
○ 독일의 노동시장은 전후 급속한 경제시장의 시기에는 노동시장이 거의 완전고용 에 가까웠으나 1970년대 경제위기 이래 그리고 특히 1990년의 통일 이후 실업률 이 높아지고, 독일 경제체계 전체에 심각한 문제를 불러일으키기에 이르렀다.
○ 그러나 2000년대 중반 이래 일련의 노동시장 개혁이 이루어지고, 유로의 발족으 로 인하여 대외경제조건이 유리해지고, 제조업 분야에서의 경쟁력이 유지, 강화됨 에 따라 노동시장 상황이 주목할 정도로 개선되었다.
표
6
독일, 한국, 미국의 노동참가율, 실업률, 장기 실업자 비율(%)
15-64세 노동참가율 실업률 실업자 중 1년 이상 실업자
독일 미국 독일 한국 미국 독일 한국 미국
2000
2005
2006
2007
2008
2009
2010
2011
2012
2013
2014
71.3 77.1
74.2 76
75.5 76.1
76.2 76.2
76.6 76.2
77.1 75.5
77.3 74.8
78.3 74.1
78.4 74.5
78.9 74.4
79.2 ..
7.8 4.4
11.2 3.7
10.3 3.5
8.7 3.2
7.6 3.2
7.8 3.6
7.1 3.7
5.9 3.4
5.4 3.2
5.2 3.1
5 3.5
4 51.5
5.1 53
4.6 56.4
4.6 56.6
5.8 52.6
9.3 45.5
9.6 ..
8.9 ..
8.1 ..
7.4 ..
6.2 ..
2.3 6
0.8 11.8
1.1 10
0.6 10
2.7 10.6
0.5 16.3
.. ..
.. ..
.. ..
.. ..
.. ..
자료: https://stats.oecd.org/Index.aspx?DataSetCode=STAN08BIS# (2015.11.29.)
○ 고용율과 실업률이 눈에 띠게 개선되었다. - 고용율은(피고용인/인구)는 2000년 71%으로 미국보다 낮았으나 꾸준히 상승하여 2014년 79%로 미국을 앞질렀다. - 실업률은 2005년 11.2%로 미국의 5.1%의 두 배 수준이었으나, 지속적으로 하락 하여 2014년 5%로 미국보다 낮아졌다. - 단, 실업자 중에서 장기 실업자의 비율이 높다. 전체 실업자 중 1년 이상 실업자 의 비율은, 2000년대 후반에 전반적 고용상황의 개선과 더불어 그 비율이 상당히 감소하였지만 여전히 매우 높은 편이다.
6) 이 절에서는 유경준 외(2011)의 내용을 많이 참고함
안보개발국가를 넘어, 평화복지국가로 225
○ 노동시장 성과 중 독일의 두드러진 특징은 청년실업률이 낮다는 점이다. - 2005년 20-24세 연령층의 실업률이 15.4%였으나 지속적으로 낮아져서 OECD 국가 중 가장 낮은 수준이다.
표
7
독일, 한국, 미국,
20 24세
25 29세
독일 한국 미국 OECD 독일 한국 미국 OECD
평균 청년실업률
OECD
2000 8.6 9.9 7.2 11.4 6.9 6.0 4.1 7.5
2005 15.4 9.9 8.8 12.4 12.5 6.4 5.8 8.4
2010 9.3 9.4 15.5 15.2 8.4 7.0 10.9 10.6
2011 8.0 9.4 14.6 14.9 6.9 6.5 10.3 10.2
2012 7.7 9.0 13.3 14.9 6.5 6.6 8.9 10.2
2013 7.6 9.2 12.8 15.0 6.7 7.1 8.1 10.4
2014 7.4 10.2 11.2 13.9 6.1 8.3 7.2 9.7
자료: https://stats.oecd.org/Index.aspx?DataSetCode=STAN08BIS# (2015.11.29.)
(2)
노동조합과 공동결정제도
○ 제조업의 높은 비중과 오랜 노동운동의 전통으로 인하여 노조조직율이 높은 편이 었지만, 최근에는 산업구조와 노동고용형태의 변화로 인하여 조직율이 하락하고 있다. - 노조조직율은 2000년 24.6%로 OECD평균보다 다소 높았으나 2010년에는 18.6%로 OECD 평균 수준에 달하였다. 이것은 미국이나 프랑스 보다는 높은 것 이지만, 노조 조직율이 약 70% 정도인 북유럽 국가들에 비해서는 현저히 낮은 것 이다.
표
8
노조조직율
독일 프랑스 미국 OECD
2000 24.6 8.0 12.9 20.4
단위:
(
2001 23.7 8.0 12.9 20.1
2002 23.5 8.1 12.8 19.8
2003 23.0 8.0 12.4 19.6
2004 22.2 7.8 12.0 19.1
2005 21.7 7.7 12.0 18.8
2006 20.7 7.7 11.5 18.2
2007 19.9 7.6 11.6 18.0
2008 19.1 7.6 11.9 17.9
2009 18.8 11.8 18.4
%)
2010 18.6 11.4 18.1
○ 최상위 노조 연합조직은 독일노조현합(Deutsche Gewerkschaftsbund: DGB)이며
226
2015. 12. 4
여기에 8개의 산별노조가 속해 있다. DGB의 조직원은 1991년 약 1180만 명이었 지만 지속적으로 감소하여 2014년에는 약 610만 명이었다.
○ 사용자 단체 최상위 조직은 독일 사용자 연방협회(Bundesvereinigung der Deutschen Arbeitgevervbände:BDA)이며 여기에는 14개의 주 단위로 조직된 사용 자 협회와 하부 지역 및 산업별 단위 협회들이 소속되어 있다. 약 1백만의 고용 주가 이러한 회원 협회에 소속해 있으며 이들이 독일 전체 피용자의 약 70%를 고용하고 있다. - BDA 소속 협회 중 산업단위 조직들은 회원사를 대표하여 단체교섭을 행하며, 여타 조직들은 지역 단위, 산업 단위에서 정책 형성과정에 이익대표 역할과 회원 들에 대한 정보제공 역할을 한다7).
○ 독일에는 전국적이고 중앙집중적인 단체교섭은 발달되어 있지 않으며, 단체교섭 은 그것을 자율적으로 체결한 당사자 간에 유효하다. -
그러나
단체교섭과
관련하여
독일의
특징적인
제도로서
‘일반의무화
(Allgemeinverbindlicherklärung)’ 제도가 있다. · 특정한 단체교섭 결과를, 그 체결자 중 한쪽이 신청할 경우,
정부가 고용주와
피용자 산업최고 대표기관(Spitzenorganisation) 각각의 대표자 3인으로 구성되는 위원회와의 협의를 거쳐, 해당 산업 전체에 일반적으로 의무화하는 것이다. · 단, 이를 위해서는 교섭결과에 제약되는 고용주들이 산업 전체 고용자의 절반 이 상을 고용하고 있어야 하며, 일반효력화가 공공의 이익에 부합해야 한다. 이 제도 에 따라 현재 약 73,000개의 등록된 단체협약 중에서 476개가 일반의무화 되어 있으며, 그 중 173개는 동독지역에서도 의무화되어 있다8).
○ 독일에는 2015년에야 처음으로 모든 고용관계에 적용되는 일반적 최저임금(현재 8.5유로)이 도입되었다. - 2015년부터 시간당 8.5유로의 최저임금이 도입되었다. - 적용예외는 직업교육법에 따른 직업교육생, 1년 이상 실업상태에 있었던 피용인 등이다.
7) www.wikipedia.de 'Arbeitgebervarband' 항목 8) http://www.bmas.de/DE/Themen/Arbeitsrecht/Tarifvertraege/inhalt.html 2011.10.28 접근
안보개발국가를 넘어, 평화복지국가로 227
○ 독일의 노사관계에서 특징적인 요소로 공동결정(Mitbestimmung) 제도가 있다9). 공동결정 이루어지는 구체적인 방식은 크게 종업원평의회를 통한 것과 감사회 참 여를 통한 것으로 나누어진다. - 노동자는 기업단위의 종업원평의회(Betriebsrat)를 통해서 근무시간, 급여, 기계의 도입, 노동방식 등 노동조건과 관련된 결정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 직접적 노동조건의 범위를 벗어나는 기업의 경영상의 결정에 대해서는 노동자는, 2중 이사회 제도 내에서, 상위 이사회라 할 수 있는 감사회(Aufsichtsrat)에 참여 함으로써 영향력을 행사한다. - 노동조건에 대한 종업원평의회를 통한 공동결정권은 기본적으로 모든 기업에 적 용되지만, 기업의 경영상 결정에 대한 참여권리는 대규모의 회사조직에 대해서만 적용된다.
※ Hartz 개혁 ○ 2000년대 전반까지 계속된 심각한 고실업 상황은 독일의 경제사회체제 전체를 불안하게 하는 요인이었으며 여기에 대응하기 위한 일련의 개혁정책이 2002년부 터 2004년에 걸쳐 당시 사민당-녹색당 연립정부에 의하여 ‘하르츠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시행되었다.
○ 하르츠 개혁의 내용은 경직적인 노동시장제도에 일부 유연성을 도입하고, 사회보 장제도를 보다 고용촉진적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 즉 산업구조의 변화로 말미암아 노동시장에서 중요한 고용형태로 나타난 시간제 노동, 파견노동 등을 인정하고 이에 대한 제도를 정비하였으며, 수공자영업에 대 한 진입장벽을 완화하였다. 또한 저임금, 단시간 고용에 대하여 사회보장관련 노 동비용을 경감하고, 실업자 또는 구직자에 대한 사회보장급여 수급의 조건으로 구 직활동 조건을 강화하였다. 또한 노동시장정책을 행하는 연방노동청의 조직과 서 비스를 개선하였다.
○ 그러나 이러한 하르츠 개혁이 과연 2000년대 중반 이후 고용상황 개선에 결정적 기여를 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논쟁이 존재한다. 9) Bundesministerium für Arbeit und Soziales (2010)을 참조
228
2015. 12. 4
- 세계적인 경기회복, 유로화 출범에 따른 수출의 증대, 그리고 독일경제의 경쟁력 강화 등의 호조건들이 맞물린 효과이다.
(3)
직업교육
○ 독일의 직업교육은 ‘이중체계(dual system)’라고 불리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경 우가 많으며, 이 체계의 핵심은 이론적 학습과 근로경험을 결합시키는 것이다.
○ 듀얼 직업교육은 기업 내에서의 실습과 직업학교에서의 학습을 결함한 직업교육 이다. - 교육생은 특정한 기업과 직업교육계약(Ausbildungsvertrag)을 맺고, 기업 내에서 의 실습과, 관련 직업학교에서의 이론 및 기초 소양 학습을 병행한다. · 일반적으로는 주당 3, 4일의 기업 내 실습과 1,2 일의 학교 수업으로 이루어짐 - 교육 기간은 직업 종류에 따라서 2~5년이 소요된다. - 교육의 수료는 직업별 자격 시험을 통해서 이루어는데, 이 시험은 영방직업교육 법이 정하는 ‘관리조직(zuständige Stelle)’, 즉 상공회의소(IHK), 수공업회의소 (HWK) 등이 관리한다. · 회의소는 교육생과 기업간의 계약이 직업교육법 규정과 일치하는지를 확인하고 이를 직업교육목록에 등재하여 관리한다.
○ 듀얼 직업교육의 제도적, 법적 기초는 ‘직업교육법(Bundesbildungsgesetz)’에 의해 서 주어진다. - 직업교육계약에 담길 기본적 내용(교육생과 기업의 권리, 의무)과 원칙을 규정한 다.
○ 직업교육법이 정하는 틀 속에서 직업교육규칙(Ausbildungsordnung)은 듀얼 직업 교육의 직업별로 연방전체에 걸친 통일적인 표준을 정한다. - 교육과 관련한 내용적, 시간적 표준을 규정함(직업교육법 5조) · 직업명칭, 교육기간, 직업교육을 통해 도달해야 할 지식, 능력, 숙련 상태에 대한 개관, 교육기본계획((Ausbildungsrahmenplan): 직업상에 대한 자세한 서술, 교육 의 내용적 시간적 진행에 대한 지침), 수료시험의 내용,
안보개발국가를 넘어, 평화복지국가로 229
- 이 규칙의 결정에는 전문협회, 고용자 단체, 노동조합, 또는 연방직업교육연구소 가 이니셔티브를 가진다. - 규칙의 결정은 연방의 교육담당부처가 주정부와 협의를 거쳐서 행한다.
○ 교육생은 교육을 위해서 지불하는 것이 아니라
실습기업으로부터 수당
(Vergütung)을 받으며, 실습과 직업학교의 운영을 위한 비용은 기업과 주정부, 연 방정부가 부담한다.10) - 기업 내 실습의 비용(인건비, 물재비)은 기업이 담당 - 직업학교의 인건비는 주정부가, 물재비는 소재지의 기초자친단체(시(Stadt), 군 (Landkreis))가 담당한다. - 통합실습시설(überbetrieblichen Ausbildungsstätten)의 재정은 연방정부와 주정부 가 담당한다.
○ 기업이 이러한 직업교육에 중요한 주체로 참여하는 까닭은 그 기업들이 자신의 사업장에서 요구되는 특정한 숙련과 노동습관을 가진 근로자들을 육성할 수 있다 고 보기 때문이다. - 즉, 이러한 교육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기업들은 자신이 필요로 하는 노동력을 일반 노동시장에서 구하는 것이 용이하지 않다고 보는 경우가 많다. - 또한, 기업들은 직업교육을 제공함으로써 생산물 시장에서 소비자들에게 기업제 품의 품질에 대해서 확신을 주는 효과가 있다고 인식한다.
○ 최근(2013년)에는 대학진학자의 숫자가 신규 이중체계 직업교육생을 처음으로 앞 지르기 시작했다. - 경제전체의 고숙련화와 정부의 대학진학자 증가 정책이 맞물린 결과이다. - 다른 한편, 대학교육에 듀얼교육방식을 접목시키는 대학과 학과가 증가하고 있다.
4.3. 사회보장11)
(1)
개황
10) http://wirtschaftslexikon.gabler.de/Definition/duale-berufsausbildung.html. 2015. 10.21 접근 11) 이 절은 한국개발연구원(2012)의 내용을 주로 참고함
230
2015. 12. 4
○ 독일의 사회보장 체계는 사회보험제도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다. - 사회보장 관련 지출 중에서 사회보험 관련 지출이 약 80%를 점하고 있으며 그 외에는 가족지원 및 사회부조, 청년지원 등의 프로그램들이 있다.
표
9
독일의 공공부문 사회보장 관련 지출
년)
(2008
(단위: 백만 유로)
구분
총액
합계
경상지출
585,957
582,791
자본지출 3,166
행정
3,397
3,356
41
사회보험(고용보험포함)
478,702
477,891
811
가족,사회부조
31,833
31,445
388
상해보험, 난민구호
23,576
23,303
272
전쟁, 정치적결과에 대한 사회적급여
3,869
3,604
265
청년지원(시설포함)
22,832
22,017
815
방과후 어린이돌봄
11,183
10,553
629
출처: Statistiches Bundesamt (2011)
○ 독일은 선진국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공식적인 사회보험제도의 역사를 가지고 있 다. 비스마르크 시기인 1880년대 건강보험(1883년), 상해보험(1884년), 연금보험 (1889)이 도입되었고 그 후 대공황 직전인 1927년 실업보험이, 그리고 1995년에 수발보험이 도입되었다.
○ 독일의 사회보험 제도는 몇 가지 중요한 특징을 갖고 있다. - 사회보험의 혜택을 받기 위해서는 고용관계가 전제된다. 즉 사회보험의 혜택을 받기 위해서는 현재 고용되어 있거나 과거에 고용되었던 경력이 필요하다. - 사회보험의 재원은 피용자와 고용주가 우선적으로 부담한다. 사회보험재정이 부 족할 경우 국가의 일반재정으로부터 지원을 받게 되지만, 기본적으로는 각 사회보 험별로 기여금 수입으로 재정을 상당부분 충당하여 일반재정의 부담을 과도하게 늘리지 않는 것이 중시된다. - 사회보험의 관리가 분산화, 분권화되어 있으며 당사자 관리가 원칙이다. · 각 사회보험의 가입 및 수혜요건, 급여의 내용과 수급 조건, 기여금 요율 등의 기본적 사항은 법률로 정해지지만, 그 구체적 집행과 관리는 고용보험을 제외하고 는
각
보험별로
지역별,
산업별로
존재하는
다수의
보험기관들
안보개발국가를 넘어, 평화복지국가로 231
(Versicherungsträger)에 이루어진다. 또한 이들 보험기관들의 집행기구는 가입한 피용자들과 고용주들이 행하는 사회보험선거에 의해서 선출된다.
(2)
재정적 측면
○ 독일의 임금대비 사회보험 기여금 요율의 합계는 해마다 약간의 변화는 있지만 약 40% 수준이다. 사회보험들 중에서 연금보험이 현재 19.5%로 요율이 가장 높 으며, 1990년대 중반의 사회보험 기여율 상승의 주된 요인도 연금보험 요율이 상 승이었다. 그 다음으로 요율이 높은 것은 현재 14.6%인 건강보험으로 1990년대 중반이래 현재까지 상승추세가 이어지고 있다.
○ 재정부족분은 연방정부의 지원을 받게 되며 2010년의 경우 사회보험 전체의 국 가지원율은 23.43%였다. 이것은 연방재정에 중요한 압박 요인으로 작용한다. 특 히, 제도의 속성상 고령화의 영향을 많이 받는 연금보험(32.05%)과 국가노동시장 상황의 영향을 많이 받는 실업보험(33.27%)에서 국가지원율이 높게 나타난다.
표
10
독일 사회보험 재원(2010년 추정치) (단위: 백만 유로, %)
사회보험 합계 연금보험 건강보험 수발보험 상해보험 실업보험
재원총액 482,342 256,172 178,515 21,727 12,436 39,488
기여금 367,017 173,510 160,695 21,626 11,199 25,980
(비율) (76.09) (67.73) (90.02) (99.54) (90.05) (65.79)
국가지원 113,004 82,097 17,111 658 13,138
(비율) (23.43) (32.05) (9.59) (0.00) (5.29) (33.27)
기타 2,323 565 708 101 579 369
(비율) (0.48) (0.22) (0.40) (0.46) (4.66) (0.93)
출처: Bundesministerium für Arbeit und Soziales (2011) 주: 사회보험계 합계는 다른 보험간의 지불 등 이중계산을 조정한 것이므로 개별 보험 수치 합계와 일치하지 않음
(3)
개혁노력
○ 사회보험의 재정을 임금에 부과하는 방식은 독일의 고용상황이 좋았던 시기에는 큰 특별한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국민 전체가 폭넓게 복지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232
2015. 12. 4
해주었다. - 그러나 1980년대 이후 세계화와 기술혁신으로 인한 경제구조 변화와 통일로 인 한 경제부담 등으로 고용시장이 악화되는 과정에서는 ‘고실업-> 보험재정의 악화 -> 이에 대응하기 위한 기여금 요율의 인상으로 노동비용 상승 -> 노동수요 위 축에 따른고용악화’라는 악순환을 낳는 것으로 비판받았다. - 1990년 통일 이후 이러한 문제점들이 누적되면서 사회보험 제도의 개혁은 독일 경제 전체의 핵심문제가 되었다.
○ 이러한 문제점에 대응하기 위해서 독일은 사회보험제도 전반에 개혁을 시도해왔 다. - 첫째, 보험재정이 균형을 확보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들을 도입하고, 경쟁과 가 격의 원리를 강화하였다. · 연금보험: 확정급부형으로부터 확정기여형으로 전환(지급되는 연금의 수준이 고 용 및 경제상황에 연계되어 변동되는 방식)과 소득대체율 하락, 사적 연금보호에 대한 정부의 보조금과 세제상의 혜택 · 건강보험: 보험기관별로 재정수지 균형을 위해서 소득과 연계되지 않은 추가부 담금을 부과할 수 있도록 하면서, 피용자들이 보험기관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 도록 함으로써 가격과 경쟁의 원리를 도입 - 둘째, 고용촉진적으로 개선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 실업관련 보험: 실업보험 급여 지급기간 단축, 실업자에 대한 조기 연금지급개시 연령하한선을 인상, 또한 실업보험 지급기간이 만료된 후에는 소득과 무관하게 기 초생활을 보장하는 실업급여제도(Arbeitslosengeld2)를 도입 - 셋째, 저임금, 소규모 고용에 대해서는 사회보험 가입의무를 면제하거나 보험료 를 지원 · ‘미니잡’: 임금이 월 400유로 이하의 고용관계에 대해서는 사회보험 가입의무를 면제해주고 있으며 · ‘미디잡’: 월 400유로에서 800유로 사이의 고용관계에 대해서는 피용자의 보험 료를 경감
4.4. 금융시장12) 12) IMF(2011b)를 주로 참고함
안보개발국가를 넘어, 평화복지국가로 233
○ 독일의 연방은행은 전세계적으로 가장 강력한 독립성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잘 알려졌으며, 이것은 전후 독일의 물가안정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 - 유럽중앙은행도 여러면에서 독일의 연방은행을 모델로 하였다. - 연방은행은 1999년부터 유로 체계의 일원으로서 유럽중앙은행의 통화정책결정에 참여하고 그것을 독일 내에서 집행하는 책임을 진다.
○ 금융감독기구는 종전에는 은행, 보험, 증권별로 3원화되어 있었지만 2002년부터 연방금융감독원으로 통합되었다. - 단, 독일의 은행법은 금융기관들과 금융시장에 대한 관측과 분석과 관련한 연방 은행의 전문성을 고려하여 은행감독 업무에 연방은행이 참여하도록 정하고 있다.
○ 독일경제에서 금융부문은 은행부문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주식시장의 비중은 상 대적으로 낮다. - 독일의 시장자본화(market capitalization)의 GDP 대비 비율은 EU 평균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40% 수준이며, 절대적 규모면에서는 영국의 절반도 되지 않으며 프랑스보다도 작다(아래의 표 참조).
표
11
독일의 시장자본화 액수와
대비 비율
GDP
액수(십억유로)
비율(%)
연도
2006
2010
2006
2010
EU-27 독일 프랑스 영국
10,289.95 1,241.96 1,841.59 2,876.99
8,086.24 1,065.71 : 2,693.18
87.99 53.67 102.42 147.62
65.97 43.03 : 158.41
- 다른 한편 독일의 은행부문도 규모면에서는 국민경제규모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큰 편은 아니다. 은행부문의 자산은 GDP 대비 약 300% 수준으로 600%에 달하 는 영국은 물론 약 400%에 달하는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프랑스에 비해서는 낮 은 비율이다.
○ 독일의 은행체계는 흔히 ‘3개의 기둥’체계로 불리운다. 즉, 독일의 은행부문의 주 축은 민간은행, 공공은행, 소규모 협동조합 은행 등 3가지 종류가 점하고 있으며 이들 3가지 종류의 은행들은 그 소유구조와 목적이 서로 다르다(IMF 2011).
234
2015. 12. 4
- 그 중 민간은행과 공공은행이 각각 은행부문 자산의 1/3씩을 점하고 있으며 협 동조합 은행의 자산 점유율은 11%로 그에 미치지 못하지만 기관의 숫자 면에서 매우 중요하다.
○ 민간은행은 3개의 대형 민간은행, 중소규모 은행, 그리고 외국은행의 지점으로 구 성된다. 그 중 대형 민간은행은 소매, 기업금융 및 투자금융 등 전반에 걸쳐 활동 한다.
○ 공공은행에는 ‘저축은행(Sparkasse)’ 및 그와 관련된 '주은행(Landesbank)'이 있으 며 이들은 각자의 기반이 되는 지역에서 경제발전을 지원하고 지역적 공공재를 지원하는 임무를 지니고 있다. - 저축은행은 대부분 기초자치단체들이 소유하며, 금융활동 전반을 담당하지만 특 히 소매기업과 중소기업에 대한 금융 서비스에 초점을 둔다. 이들은 각자의 지역 에서 민간은행이나 협동조합 은행과 경쟁하지만 다른 저축은행과는 경쟁하지 않는 다. - 주은행은 원래 저축은행의 중앙은행 역할을 하도록 고안되었으나 최근에는 도매 금융, 투자금융, 국제금융활동에 진출하여 민간은행과 경쟁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 공공은행들은, 연방 혹은 지역의 개발은행과 연계하거나 또는 독자적으로, 정부 를 대신하여 정책금융을 공급한다.
○ 협동조합 은행들은 소규모이며, 그 수는 전체 은행개수의 2/3을 점한다. 협동조합 은행은 조합원 소유이며 ‘저축은행’과 비슷하게 소규모 지역에 기반을 두고 조합 원에게 대출과 예금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 공공은행과 협동조합 은행이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므로 독일의 은행들은 EU의 다른 국가들에 비하여 사적인 주식소유에 적게 노출되어 있다. 주식시장에 상장된 은행주식의 비율은 45%로 프랑스(약 60%), 영국(약 75%) 등 다른 주요국 들에 비해서 상당히 낮은 편이다.
○ 지배구조의 속성으로 인해 저축은행과 협동조합 은행은 이윤최대화를 추구하는 은행에 비해서 고객들에게 더 많은 접근성과 보다 장기에 걸친 저비용의 대출을
안보개발국가를 넘어, 평화복지국가로 235
제공할 유인이 있고 이것이 독일 은행부문의 장점이 될 수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13). 실제로 독일의 은행들은 자산과 부채 구조면에서 비금융 부문 경제주체들 간의 자금융통 비중이 압도적으로 매우 높고 이를 통해 독일 산업부문의 뒷받침 역할을 하고 있다.
○ 소규모의 저축은행과 협동조합 은행들은 자금조달을 주로 전체적 규모가 크고 안 정적인 가계예금을 통해서 하면서 비은행 부문에 대한 신용공급의 절반 이상을 담당하고 있다. 이러한 구조는 2008년의 세계적 금융위기에도 독일의 금융부문이 비교적 안정성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었다. 반면, 시장경쟁과 이윤동기의 압력이 낮기 때문에 은행의 운영의 효율성과 수익성은 유럽 내의 비교가능 국가에 비하 여 낮은 것으로 나타난다.
4. 5. 과학기술14) ○ 독일은 과학기술 강국이며 이것이 독일 경제 특히 제조업 분야의 경쟁력의 원천 이 되고 있다. - GDP 대비 연구개발지출의 비율은 2.8%로 EU내 최상위 그룹에 속한다. - 연구개발의 재원 공급면에서는 기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2/3에 달하여 유럽 국가 중에서 가장 높은 편에 속한다. - 연구개발의 수행 측면에서는 기업이 2/3을 담당하며 그 외에는 정부가 14%, 대 학이 18%를 담당한다. 많은 재원의 투입과 잘 발달된 연구개발 인프라에 힘입어 특허, 학술논문, 기업의 혁신 등의 측면에서도 좋은 성과를 보이고 있다.
13) IMF(2011b) 14) European Commission Enterprise-General (2008), 이명헌(2010)을 주로 참고함
236
2015. 12. 4
표
12
독일의
대비 연구개발 지출의 재원공급과 수행
GDP
(단위: %)
재원공급
수행
구분 전체 기업 정부 대학 비영리민간 외국 기업 정부 대학 비영리민간
EU-27 2.00 (100.0) 1.08 (54.1) 0.70 (34.9) 0.02 (1.0) 0.03 (0.6) 0.17 (8.4) 1.23 (61.5) 0.27 (13.5) 0.49 (24.5) 0.02 (1.0)
독일 2.82 (100.0) 1.86 (66.1) 0.84 (29.7) . 0.01 (0.3) 0.11 (3.8) 1.90 (67.4) 0.41 (14.5) 0.51 (18.1) .
출처: Eurostat 주1: 재원공급은 2009년, 수행은 2010년 기준 주2: 괄호 안은 백분율
○ 과학기술 발전과 관련된 기관들로는 공공연구기관, 대학, 기업 등이 있는데, 독일 의 경우는 공공연구기관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점과 이들 세 가지 종류의 기관들 사이의 협력, 즉 산학연(産學硏) 협력이 발달되어 있다는 점이 중요한 특징이다. - 공공연구기관으로 독일에 특징적으로 발달되어 있는 것이 공공 연구회 조직이다. 연구회에는 인문사회과학을 포함한 순수과학 중심의 막스플랑크 연구회, 거대 장 치를 필요로 하는 응용과학 중심의 헬름홀츠 연구회, 응용기술 중심으로 기업과의 협동을 중시하는 프라운호퍼 연구회와 라이프니츠 연구회가 있다. - 각 연구회들은 그 산하에 수십 개의 전문영역별 연구소들을 두고 있다. 이들 연 구회들은 그 성격에 따라서 차이는 있지만 연방정부로부터 기본적 재정지원을 받 는다. 그러나 연구주제의 선정, 재원배분, 조직 운용에 등에 대해서는 매우 큰 자 율성을 가진다. - 연구회 산하의 연구소들은 연구뿐 아니라 교육기능도 겸하고 있다. 즉, 이들은 대학과 연계하여 프로젝트 베이스로 박사과정 학생들을 고용하며 이 학생들은 진 행되는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그 내용을 자신의 학위논문으로 발전시키게 하고 있 다. 이를 통하여, 젊은 연구인력들은 현장 지향적 응용연구를 할 수 있는 역량을 기르고, 대학, 연구소, 기업 간의 네트워크 형성의 고리 역할을 하게 된다. - 혁신적인 기업들의 비율이 높고 이러한 기업들은 대학이나 외부 연구소들 혁신활 동의 파트너로 삼는 경우가 많다. 또한 대학과 연구기관의 연구개발 지출 중 기업 의 지원이 차지하는 비중도 높다. 이와 같은 산학연 연계에 있어서 연구회 특히 프라운호퍼 연구회 산하의 연구소들과 다수의 분산적인 기술이전 조직들이 중요한
안보개발국가를 넘어, 평화복지국가로 237
역할을 하고 있다.
○ 독일의 연구개발체계는 몇 가지 문제점도 가지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 혁신활동의 좋은 성과가 독일이 오랜 전통을 가진 산업분야들 - 예컨대,
자동
차, 기계, 화학, 전자 - 과 관련된 연구개발에 집중되어 있다. 반면, 최근에 중요 성이 커지고 있고 향후에도 빠른 세계적으로 빠른 성장이 기대되는 정보통신기술, 생명공학, 의학, 지식집약적 분야에서는 그 혁신활동 성과가 상대적으로 부족하다. - 보수적인 금융시장의 특성으로 인하여 소규모의 혁신적 기업들의 초기 투자를 위 한 자금공급이 용이하지 않다. - 연구인력 면에서 현재 연구개발에 종사하는 인원의 비율은 EU에 평균에 비하여 높은 편이지만 과학 및 공학 전공 졸업자나 청소년의 학업성취 수준은 EU 평균을 약간 밑도는 수준이어서 지속적 성장을 뒷받침하는 데에 애로가 있을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 정부의 연구개발 지원정책의 추진책임은 연방과 주 사이에, 그리고 각 정부수준 에서 여러 부처들 사이에 분권화되어 있고, 개별 부처의 지원정책들도 일반적으로 목표나 우선순위 수립에 있어서 전략적 성격이 적다.
4.6. 대외부문 ○ 독일은 경제대국 중에서는 예외적으로 대외의존도가 높은 나라이다. - 2002년 일차 완결된 EU 공동통화 유로의 도입은 유럽시장의 통합강도를 높이는 효과가 있음은 물론, 유로 도입 이전 독일 통화였던 마르크에 대한 고평가 압력을 완화시킴으로써 수출경쟁력 확보에 도움을 주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 독일의 수출 중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특히 높은 품목은 수출액의 거의 절반을 점 하는 기계, 전자, 수송장비이다. - 독일의 수츨과 수입의 상대는 액수 기준으로 모두 60% 이상이 EU국가이므로 EU에 대한 의존도가 높으며 이것은 EU국가들 대부분과 유사하다.
238
2015. 12. 4
표
13
독일의 수출, 수입 구조
(2014)
수출 액수(십억달러)
수입 비중(%)
액수(십억달러)
비중(%)
산 동물과식료품
69.8
4.67
75.9
6.28
음료와담배
11.2
0.75
9.4
0.78
원료품
26.5
1.77
44.5
3.68
광물,연료,윤활유등
38.1
2.55
148.3
12.27
동식물유,지방
2.9
0.19
4.2
0.35
화학제품
237.5
15.91
155.5
12.86
가공품
187.6
12.57
155.8
12.88
기계,전자,수송기계
722.6
48.41
413.1
34.16
기타공산품
153.5
10.29
148.0
12.24
상품거래절차
42.9
2.87
54.5
4.51
1,492.5
100.00
1,209.3
100.00
계
출처: https://www-genesis.destatis.de/genesis/ (2015.11.29.)
○ 독일은 지속적으로 무역수지에서 흑지를 실현하고 있으며 그 규모는 1990년 이 래 지속적으로 증대하여 최근에는 GDP 대비 8%내외에 달한다. - 이러한 흑자는 독일이 특화하고 있고 높은 세계시장점유율을 점하고 있는 자본 재, 내구소비재, 제약품 분야에서의 강한 경쟁력에 기초한 것이다. - 특화된 품목의 수출시장에서 저임금을 경쟁력의 기초로 하는 중국이나 유럽 내 국가들과 경쟁관계에 놓여있지 않으며, 주로 EU 국가들을 상대로 무역흑자를 실 현하고 있다.
5. 독일 중소기업 경쟁력의 기반
5.1. 독일 중소기업의 현황15) ○ 독일의 중소기업은 고용과 직업훈련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 - 정책적 논의에서는 보통 고용규모 500인 미만의 기업을 중소기업으로 정의함 - 중소기업은 독일 기업수의 99.6%, 고용의 60.0%, 직장내 직업훈련의 약 83%,부 15) Bundesministerium für Wirtschaft und Technologie
안보개발국가를 넘어, 평화복지국가로 239
가가치의 56%, 매출액의 35%를 점하고 있음
표
14
독일경제에서 중소기업의 비중
기업 수(백만):2012 사업체 등록 1) 매출(십억유로): 2012 사업체 등록 1) 사회보험의무 고용자(백만명):2013 고용통계 2) 직장내 직업훈련(백만 명):2013 2) 부가가치(2012) 3): IfM 추정치
전체
중소기업
3.66 6,096 27.72 1.54
3.65 2,149 21.90 1.27
중소기업 비중(%) 99.6 35.3 79.0 82.2 56.5
자료: http://www.ifm-bonn.org/statistiken/mittelstand-im-ueberblick/#accordion=0&tab=1 주: 1) 중소기업 정의는 고용자 수와 매출액 규모를 결합 2) 중소기업 정의는 고용자 수 기준(500인) 3) 중소기업 정의는 매출액 기준
○ 특히 최근의 독일 고용 증가는 중소기업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음
표
15
기업규모별 고용자 수의 증감(2001-2009년 사이)
증가 진입 기존 감소 퇴출 기존 순증
미소(微小)
소기업
중기업
중소기업전체
대기업
58.4 43.3
25.2 21.9
24.8 21.6
34.8 28.1
17.5 16.5
-21.6 -34.1 46.1
-19.0 -30.2 -2.1
-16.3 -27.6 2.5
-18.8 -30.5 13.6
-16.3 -19.0 -1.2
자료: IfM(2013) "Der nachhaltige Beschätigungsbeitrag von KMU"
- 제조업 고용이 감소하고, 서비스업 고용이 증가하는 과정에서 중소기업의 경우 제조업 고용 감소 정도는 대기업에 비해서 완만하고, 서비스업 고용 증가는 대기 업에 비해서 더 빠름
240
2015. 12. 4
표
16
서비스업 분야 기업 규모
제조업
중소
대기업
서비스 전체 중소
대기업
중소
기타 서비 스
기업 서비스
유통 대기업
중소
대기업
중소
대기업
증가 진입
22.3
13.7
43.5
20.3
33.8
16.1
47.2
16.8
71.2
28.6
기존
18.2
9.9
34.9
22
27.9
22.7
36.8
25.4
56.7
18.1
-19
-16.9
-18.7
-15.7
-19
-19
-18.8
-12.7
-21. 3 10.6
-17. 5 2.2
-30.3
-22.4
34.8
7
감소 퇴출 기존
-29.9
-19.3
-31.1
-18.7
순증
-8.3
-13.4
28.7
7.8
-17. 2 -29. 3 81.4
-14.4 -16.8 15.4
자료: IfM(2013) "Der nachhaltige Beschätigungsbeitrag von KMU"
- 독일은 다른 국가들에 비해서 규모가 큰 중소기업들의 비중이 높다는 중요한 특 징을 갖고 있음 - 독일의 중소기업 중 소규모(고용규모 10~49인) 또는, 중규모(50~249인)의 비중 이 17%로 EU-27 국가 평균인 8%보다 훨씬 높음 · 이 비율은 프랑스나 스페인의 경우 5~6%에 불과함
5.2. 독일의 중소기업 인력 육성 ○ 중소규모 기업은 직업교육 기회의 80% 정도를 제공함(IfM(2013))
○ 기업의 규모가 클수록 이중체계 직업교육 제공에 많이 참여하고 있지만, 중소기 업의 제공도 상당함 - 고용규모 10-49명인 기업들도 40%이상이 직업교육을 제공하고 있으며, 100-249명 규모의 기업도 2/3이 직업교육에 참여하고 있음 - 직업교육 제공 자격 기업의 비율은 56%이며, 1-9명의 최소규모 기업에서도 그 비율은50% 정도로 낮지 않음(BMBF(2014);45)
안보개발국가를 넘어, 평화복지국가로 241
표
17
이중체계 직업교육 제공기업의 수 (단위: 개, %)
고용자 수 1-9명 10-49 100-249 250-499 500 이상 계
전체 기업 1,668,601 345,209 82,257 9,370 5,529 2,110,966
직업교육제공 기업 215,345 154,371 55,611 7,554 4,840 437,721
비율 12.9 44.7 67.6 80.6 87.5 20.7
(출처: https://www.bibb.de/datenreport/de/2015/31157.php (2015.11.28.)
○ 전체적으로 자사에서 직업교육을 받은 인력을 고용하는 비율은 55%~65%이며 그 비율은 기업규모가 작을수록 낮아짐 - 소기업은 40~50% 수준이며, 중기업은 50~65% 수준인 반면 대기업은 그 비율 이 70~80% 수준임
표
18
기업 규모별 자사에서 교육을 수료한 교육생을 채용하는 비율 (단위: %)
2000
2001
2002
2003
2004
2005
2006
2007
2008
2009
2010
2011
소기업
45.8
41.7
43.4
51.1
40.9
44.9
48.0
48.5
44.3
48.9
45.9
54.3
중기업
61.1
58.2
55.5
52.1
53.8
52.4
54.0
59.2
61.4
56.2
59.3
64.9
대기업
78.4
78.3
74.6
71.5
71.3
73.2
78.9
76.6
77.5
73.1
75.1
80.4
계
60.2
58.0
55.8
55.1
54.0
54.6
57.4
60.6
61.5
58.4
60.7
66.4
자료: IfM(2013), 이기영 외(2013)에서 재인용 주: IfM(2013)의 대중소 기업의 정의는 기본적으로 고용자수(9명 이하, 10-499명, 500명 이상)를 기준으로 하되 매출액을 감안하였음
○ IfM(2013)은 중소기업의 경우에는 교육생을 생산일선에 더 일찍 투입하는 경향 이 있어서 직업훈련에 비용절감 유인이 강하게 작용하고, 대기업의 경우는 보다 긴 순수 교육기간을 가짐으로써 스크리닝 기능을 중시하는 것으로 보고 있음
○ 독일의 우량 중소기업도 대기업으로의 ‘인력 유출’ 위험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니
242
2015. 12. 4
지만, 비교적 어린 나이부터 사내 훈련을 통해서 기업특정적 숙련을 축적시킴으로 써 인력을 확보하고 경쟁력을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5.3. 중소기업의 혁신활동 가. 중소기업 혁신활동의 특징
○ 중소기업은 대기업에 비해서는 R&D 지출 등 혁신활동의 규모나 빈도가 낮지만, 상당한 정도로 혁신을 행하고 있음 - 그 배경은 장기적 경영방식, 견실한 연구개발 지원체계, 경쟁이 강한 세계시장에 대한 수출지향성 등이라고 볼 수 있음
○ 만하임 혁신패널(MIP) 포함 기업들에 대한 자료에 따르면, 중소기업은 비기술적 혁신(마케팅 등)을 행하는 비율이 기술적 혁신을 행하는 비율보다 높음
표
년 고용규모별 혁신 비용과 매출액 대비 비율(MIP자료)
19 2009
고용규모(인)
혁신 비용 총액(십억 유로)
매출액 대비 비율(%)
5-49
4.93
2.5
50-99
8.18
2.3
100-499
9.26
2.3
500이상
62.01
6.8
5-49
5.19
1.2
50-99
3.40
0.7
100-499
4.17
0.9
500이상
14.97
1.7
전체
112.12
2.7
제조업
서비스업
자료: IfM(2002)
안보개발국가를 넘어, 평화복지국가로 243
표
20
고용규모별 혁신 종류별 혁신을 행한 기업의 비율(2008,
2009)
(MIP 포함 기업에 대한 Eurostat 조사 결과)
고용규모(인)
기술혁신만
비기술혁신만
기술혁신과 비기술혁신 모두
합계
10-49
11.2
17.7
48.8
77.7
50-249
10.1
12.8
61.3
84.2
250 이상
8.9
7.3
78.4
94.6
전체
10.9
16.2
52.9
79.9
자료: IfM(2002)
○ R&D 활동과 관련해서 주목할만한 점은 R&D 파트너로서 학계나 전문적 서비스 제공자의 비율은 중소기업의 경우가 대기업에 비해서 눈에 띠게 낮지만, 기업-고 객의 비율은 그렇게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표
21 R&D
협력계약 파트너십 대상
년),
(%) (2005-2007
MIP
자료
고용규모(인)
기업-고객
공급자
서비스 제공자
경쟁기업
학계
5-49
25
14
25
7
17
50-99
24
15
30
5
14
100-499
25
17
31
6
20
500 이상
30
31
49
13
32
전체
25
15
26
7
17
자료: IfM(2002)
나. 관련제도와 정책
○ 독립적 R&D를 행하기에는 규모가 부족한 중소기업들의 역량을 보조하는 제도로 산업별 연구조합과 연구지원조직(AiF)이 발달해 있음 - 산업별로 연구조합(Foschungsvereinigung)들이 존재하며, 이들과 정부의 지원을 매개하는 조직으로 산업연구연대(Allianz Industrie Forscung: AiF)가 존재함 · AiF 산하에는 약 100개 연구조합들, 약 5만개의 기업들이 포함되어 있으며, AiF 는 이들 중소기업들의 산업단위의 공동연구를 지원함 · AiF는 산업단위의 공동연구(IGF), Fachhochschule 연구지원, 중소기업들의 협동 연구 등의 정부예산을 관리하며 그 총규모가 2012년 기준 4.8억 유로 규모임
244
2015. 12. 4
표
가 관리하는 정부예산 프로그램
22 AiF
(단위: 백만 유로)
2009 2010 2011 2012
산업공동연구 (IGF) 128.1 129.6 135.4 141.5
Fachhochschule 지원 32.4 35.9 35.8 6.2
중소기업 협동연구 (ZIM-koop) 248.5 389 504.6 337.1
합계 409.0 554.5 675.8 484.8
자료: http://www.aif.de/fileadmin/user_upload/aif/aif/PDF/Foerdermittel_09-12.pdf
- AiF는 연방경제부의 산업공동연구(industrielle Gemeinschaftsforschung: IGF) 지 원 프로그램의 통로가 됨 ·
IGF는
AIF의
회원인
연구조합만이
신청할
수
있으며,
산업공동성
(betriebsübergreifend)이 인정되는 연구과제만을 지원함 · IGF를 통해서 연구조합에 참여한 중소기업들이 연구의 방향설정에 영향을 미치 고 여기에 정부의 지원자금이 공급되어 동종 산업 내의 기업들이 공동으로 수요 하는 기술혁신이 이루어지게 되고 그 결과는 공유됨(아래 그림 참조) · IGF의 예산규모는 2012년 기준 1억 4150만 유로였음16)
16) http://www.aif.de/home/detailansicht/news/aif-vorstand-zieht-positive-bilanz.html
안보개발국가를 넘어, 평화복지국가로 245
그림
[
의 산업공동연구 추진 개념
2] AiF
지원추 연방
천 자금관리
평가 과제신
경제기술
지원결
부
정
과제 채택
청
산업별 회원 연구조합
연구기관
협력
상 -아이디어 검토,선택
-컨설팅
-과제 기획
-재교육
향
-대학
과제집행
식
-연구조합의
-과제자문위를 통한
결과보고
접 근
직
지도 필
연구조
-프라운호퍼 연구소
이전
이전
요 -아이디어
결과 활용
-문제
5만 회원사 대부분 중소기 업
자료: www.aif.de
- 기술연구조합은 산업별 협회의 일부로서 해당 산업 공통의 기술적 관심사에 대한 연구를 추진함 · 기술 연구조합은 AiF와의 관련 속에서만 연구지원 활동을 하는 것은 아니며, 자 체의 연구조직을 갖거나17), 자체의 예산으로 제3의 연구기관에 연구용역을 발주하 기도 함
※ 이러한 연구조합 모델은 우리나라에도 1986년 산업기술연구조합육성법 제정으로 도입되었으나 그 실효성이 크지 않은 상황임
○ 분산적 기술이전 체계 - 전술한 바와 같이 대학 특히 응용과학대학(FH)들은 기술이전에 적극적이며, 역적 기반의 기술이전 조직이 발달되어 있음 17) 연구조합의 1/3정도가 자체 연구조직을 보유하고 있음 (http://www.aif.de/aif/mitglieder.html)
246
2015. 12. 4
지
- 분산적 기술이전 조직의 대표적인 사례인 쉬타인바이스 연합(Steinbeis verbund)은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의 중소기업들에 대한 기술이전 조직으로 공공 목적의 재단 산하에 기술이전, 연구, 컨설팅 관련 기구를 두고 중소기업들을 지원 함 · 대학교수를 중심으로 한 900여개의 소규모 기술이전기업(쉬타인바이스 센터로 불리움)들을 통해서 이루어지며 이들은 대학 등에 형성된 지식을 그것을 수요로 하는 기업에게 시장원리에 입각하여 연구개발, 컨설팅, 교육 등의 형태로 가공하 여 이전하고 있음 · 쉬타인바이스 재단은 산하의 기술이전 센터들과 그 수요자들 사이의 계약과 관 련한 위험을 최소화하는 역할을 함 · 재단은 센터들이 수행하는 프로젝트 수입의 9%를 관리비로 받으며 이 수입은 일선 기술이전 조직이 쉬타인바이스 네트워크의 일원이 되는 프랜차이즈 fee로 인 식됨
○ 연방정부의 중소기업 R&D지원 프로그램: ZIM과 ERP-Innovationsprogramm18) - ZIM(zentrales Innovationsprogramm Mittelstand)은 보조금 정책이며, 그 중 ZIM-solo는 중소기업 단독의 R&D를, ZIM-koop은 다수의 중소기업들의 협동 연구 혹은 중소기업과 연구기관과의 협동연구, 다수 기업간의 네트워크 형성 등을 지원함 - ERP-Innovationsprogramm 은 정책금융기관 KfW의 장기대출 프로그램 중의 하 나로, 중소기업들의 연구개발에 대해서 장기저리의 자금을 공급함
5.4. 독일의 중소기업 금융환경 가. 독일 금융산업의 일반적 특징과 중소기업 금융
○ 중소기업과 관련하여 중요한 역할은 저축은행과 협동조합 은행들이 수행함 - 지배구조의 특징상 공공은행과 협동조합 은행은 단기적 이윤최대화를 추구하는 18) http://www.bmwi.de/DE/Themen/
Technologie/Innovationsfoerderung-Mittelstand/technologieoffene-projektfoerderun g.html
안보개발국가를 넘어, 평화복지국가로 247
은행들에 비해서 장기적 견지에서 자금을 공급하는 경향이 강한 것으로 알려져 있음 - 저축은행의 영업목적, 조직등은 연방의 금융기관법과 각주의 저축은행법에 의해 서 규율되며, 법적으로 이윤추구가 목적이 아님을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음
○ 일선의 협동조합은행과 저축은행은 지역밀착성에 기초하여 미소(微小)기업, 중소 기업, 중견기업(larger SME)에 자금을 공급하고, 협동조합의 중앙은행(DZ Bank, WGZ Bank)과 주은행(Landesbank)은 중견기업을 보다 집중적으로 대출대상으로 함(아래 표 참조) - 중소기업의 중견기업으로 성장과정에서 협동조합 중앙은행이 일정한 역할 · 기업과 지역 협동조합 은행사이에 이미 형성되어 있는 신뢰관계에 기초하여 협 동조합 중앙은행이 활동 표
[
23]
기업 규모별 주 거래 은행
다국적기업
규모 (매출액 백만 유로) 5000~
대기업
500~5000
약 800
중견 기업
50~500
약 8,770
중소 기업 미소 기업
5~50 ~5
약 73,000 3백만 이상
기업 수
주 거래 은행 Deutsche Bank, 외국계 은행, Commerzbank Deutsche Bank, 외국계 은행, Commerzbank, 주립은행, DZ Bank(VR-corporate coverage) 협동조합은행, 저축은행, DZ Bank(VR-Mittelstand), 주립은행 Commerzbank, 외국계 은행 협동조합은행, 저축은행, 우체국은행, Kommerzbank 협동조합은행, 저축은행, 우체국은행
자료: DZ Bank 인터뷰 자료에 근거하여 필자 작성 (원자료는 IfM의 2010년 연방 통계청 자료 분석)
○ 중소기업에 대한 대출에 있어서도 장기자금 위주의 공급을 하고 있음. - 정남기(2005))에 따르면 단기대출의 비중은 30% 수준에 불과하여, 한국의 단기 대출 비중이 70%에 이르는 것과 큰 대조를 이루며, 그 중 신용대출의 비중도 독 일은 50%에 이르지만, 한국은 30%정도임
○ 중소기업에 대한 정책금융 공급은 재건은행(KfW)에 의해 이루어짐 - KfW는 자산규모 5천억 유로(2011년)로 전세계에서 가장 큰 정책은행 - 정책금융을 집행하는 방식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on-lending 방식 · KfW는 기업과 직접 거래하지 않고 기업과 직접거래하는 은행(Hausbank)에 자 금과 가이드라인을 제공하고, 구체적 지원대상의 선정과 관리는 on-lending 은행
248
2015. 12. 4
이 담당하는 방식 - 이같은 방식은 정책당국이 대출 대상을 직접적으로 상대하지 않고 금융기관이 일 선에서 자원배분을 담당하게 함으로써 가격원리가 관철되게 하고, 정책당국이 자 금수요자들의 개별적, 정치적 압력에 직접 노출되지 않게 한다는 장점이 있는 것 으로 평가됨 - 이러한 방식이 작동가능한 중요한 구조적 전제는 다수의 지역밀착형 협동조합은 행 및 저축은행들이 존재한다는 것임
표
[
의 사업영역
24] KfW-Mittelstand
지원 프로그램 스타트 업 ERP 스타트업 대출 ERP-스타트업 자본
일반 기업금융 KfW-앙트레프레노어 대출 ERP-지역진흥 프로그램
혁신 ERP-혁신 프로그램 ERP-스타트업 기금 성장, 혁신, 승계를 출자 자금
대출
환경 기후 보호 KfW-환경 프로그램 KfW-에너지 효율 프로그램 재생에너지 KfW-프로그램 KfW-해상풍력 에너지 프로그램
메자닌 금융
특수 기금 투자 KfW, 경제부 스타트업 하이테크 기금 KfW, Commerzbank등 독일 SME 자본 기금
출자 자본
자료: KfW 인터뷰 자료에 따라 필자 작성)
5.5. 독일 중소기업의 해외시장 지향성 ○ IfM(2014)의 2010년 기업매출액 통계분석에 따르면 제조업 분야에서 5천만 유로 이상 기업(대기업)의 96%가 수출매출액이 있으며, 1-5천만 유로 규모 기업(중기 업)도 그 비율이 90%, 매출액 0.2--1 천만 유로 규모 기업(소기업)도 73%에 달 함 - EU 역외 수출이 있는 기업의 비율은 대기업 90%, 중기업 77%, 소기업 55%임 - 이들 수출기업의 매출 중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대기업 42%, 중기업 31%, 소 기업 21%로 중소기업의 경우에도 장식적 의미에 그치는 것이 아님 - 제조업 분야에서도 중소기업의 수출매출액 비중(전체 기업 매출 대비)이 높은 분
안보개발국가를 넘어, 평화복지국가로 249
야는 섬유(31%), 화학제품(32%), 데이터 처리 전자 및 광학제품(32%), 기계 (34%) 등임
표
25
제조업 기업규모별 수출기업 비율과 수출액의 중요도
매출액 규모 (백만 유로) 수출매출이 있는 기업 비율(%) EU 내 EU 외 수출액/전체기업 매출액 (%) 수출액/수출기업 매출액 (%)
년)
(2010
1.75-2
2-10
10-50
50 이상
20.6 16.4 12.1 5.5 15.0
73.2 67.8 55.1 16.3 21.4
89.7 87.1 77.3 28.3 31.2
96.4 95.2 89.6 40.7 41.6
자료: IfM(2013) "Außenwirtschaftsaktivitäen von kleinen und mittleren Unternehmen im Lichte der amtlichen Statistik"
○ 해외 시장 진출을 고려하는 중소기업들에게 정보제공의 통로로 가장 중요한 역할 을 하는 것은 상공회의소, 수공업자 회의소, 재외회의소 등의 회의소 조직들임 - 기업들 대부분은 해외 시장 진출과 관련하여 상공회의소가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으며(71.1%), 실제 그 서비스를 이용하는 비율도 상당함 (11.3%) - 기업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상공회의소의 서비스는 설명회, 박람회 참여 등 정 보의 제공임
○ 연방정부는 물론, 주정부가 해외시장 진출 및 국내 투자 유치를 위한 공공조직을 운영함 - 연방정부는 중소기업에 대한 해외시장 정보 제공과 해외자본 국내 투자 유치를 위하여 Germany Trade and Invest(GTI)를 운영함
○ 연방의 조직 이외에도 주정부 차원의 해외 시장 정보 제공, 투자유치 조직들이 활동함 - 예를 들어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의 경우 Baden-Würtemberg International을 통 해서 주 내의 중소기업들에게 해외시장 정보와 네트워크를 제공함 · BWI는 유한회사 형태를 띠고 있으며 그 사원은 주정부, 주 신용은행(L-Bank Landeskreditbank), 주 산업협회(Landesverband der B-W Industrie), 주 상공회 의소 협회, 주 수공업회의소 협회 등임
250
2015. 12. 4
· 제공하는 서비스는 국내외 기업간의 네트워크 구축과 협력, 국내 기업들에 대한 해외시장 정보 제공, 박람회 참여 지원, 시장 탐색 및 기업 소개를 위한 해외여행 지원, 외국의 지역단위 기업, 협회, 네트워크 및 클러스터에 대한 접근 중개 등이 있음
○
이상과
같은
연방과
주정부의
조직
이외에
외국상업회의소
(Aussenhandelskammer : AHK)가 해외 시장 현장에서 기업활동을 지원함 - AHK는 외국에 진출한 독일기업과 해당국의 기업들의 자발적 조직이며 전세계적 으로 80개국 120여개소, 4만여 개의 기업들이 회원으로 가입되어 있음 - GTI가 국내에서 제공하는 것과 기본적으로 비슷한 서비스를 해외현장에서 밀착 적으로 제공함
6. 맺음말 ○ 독일 경제에서 생산측면의 특징을 이루는 직업훈련, 금융, 혁신활동, 대외시장 진 출 등에서는 모두 관련 민간 주체들 사이의 장기적 관계에 기초한 협력이 중요하 다. 국가는 제도적 틀을 만들고, 필요한 경우 재정지원을 하되 기본적으로 보조적 지원자의 역할을 한다. - 예를 들어서 직업훈련에서는 직업훈련생과 기업간에 장기적 관계가 형성되고, 그 러한 관계가 제도적 특을 가지는 데에는 상공회의소, 산업별 협회 등이 중요한 역 할을 한다. 정부는 직업훈련관계가 고용관계와 구별되는 법적 범주로 존재할 수 있도록 틀을 마련하고 그 속에서 교육생의 권리를 규정하고 보호하는 역할을 한 다. 또한, 직업교육의 표준(직업의 종류, 교육내용, 시간 등)을 마련함으로써 노동 자의 숙련에 대한 정보 비대칭성을 완화하는 역할을 한다. - 금융에서도 은행과 기업은 장기적 관계형성을 통해서 정보의 비대칭성을 완화하 며, 이를 통해서 기업은 장기적 시야에 입각하여 안정적으로 경영을 할 수 있게 된다. - 혁신활동에서도 고객이나 공급자로부터의 제안과 자극, 그리고 기업 내에서 숙련 을 축적한 노동자의 역할이 중요하다. 또한, 지역 내의 다른 기업 및 대학, 연구기 관과의 협력을 통해서 혁신활동이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정부는 공공연구기관들
안보개발국가를 넘어, 평화복지국가로 251
을 재정지원하고 그들의 기업과의 협력을 장려한다.
○ 또한 분배측면에서 중요한 임금 및 노동조건에 대한 협상, 사회보험의 관리에 있 어서도 노사간 타협과 협력의 전통이 뿌리 깊다. - 산별노조의 영향력이 강하지만 투쟁적 노사관계가 아니라서 쟁의 발생율이 낮다. - 대기업에서는 노동자의 감사회 참여를 통해서 기업 최고위 정보와 결정과정에 참 여함으로써 타협을 제도화하고 있다. - 중소기업에서는 경영평의회를 통한 노동조건의 조정과, 많은 경우 가족기업 소유 주인 경영자와 노동자 사이의 일상적이고 친밀한 접촉을 통해서 협조적 노사관계 가 유지되는 경우가 많다. - 최저임금이 2015년까지 도입되지 않았던 것도, 노동조건을 국가의 획일적 규제에 맡기기보다 산업별로 노사가 협상을 통해서 결정하는 전통이 강했기 때문으로 이 해할 수 있다.
○ 중소기업에게는 이러한 주체들 사이의 협력이 더욱 큰 의미를 가지며, 특히 자신 이 자리잡은 지역내의 파트너들과의 협력이 중요하다. - 직업 교육생, 노동자의 채용이 지역 내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 금융에서도 지역 내 인접한 협동조합 은행이나 공공은행과의 관계를 통한 자금조 달이 중요한다. - 혁신 활동을 위해서도 지역 내의 다른 기업, 연구서비스 업체, 대학(특히 파흐호 흐슐레)들이 파트너가 된다. - 해외시장 진출에서도 지역의 상공회의소, 주정부 지원조직으로부터 도움을 받는 경우가 많다.
○ 이처럼 경제주체들이 단기적-전국 및 세계적-가격 중심의 관계 못지 않게 장기 적-지역적-평판 중심의 관계를 중시하게 된 배경에는 다음과 같은 독일 특유의 요인들이 있다. - 정치, 행정, 조세재정 측면에서의 지역적 분권 - 산업별로 강력하게 조직되어 있으면서 각종 자원의 배분과 분배 결정에 참여할 권리를 확보하고 있는 노조 - 국가의 직접적 규율과 행정기구에 의한 관리보다 해당 당사자들의 대표조직을 통 한 이해 조정과 자율적 관리를 중시하는 기독교 민주주의(Christian Democracy)
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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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전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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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옥우석, 정세은, 이명헌, 옥규성 (2012) , 『유럽지역경제론』,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출 판부 이기영 외(2013) 『중소기업 창조경제 위한 정책금융 역할 연구』, 한국금융연구센터 이명헌(2010) “신재생에너지 기술개발 지원정책: 독일의 경험 및 교훈”, 한진희, 윤경 수 편 『기후변화 문제의 주요 이슈 및 정책방향』, 한국개발연구원 연구보고 서 2010-02 유경준 외(2010) “취약계층 고용안전망 강화방안 연구”, 고용노동부 연구용역 보고서 한국개별연구원(2012) “성장과 고용의 선순환을 구축을 위한 패러다임 전환(II) - 고 용창출을 위한 사회안전망 구축”
European Commission Enterprise-General (2008) “INNO-Policy Trendchart Policy Trends and Appraisal Report: Germany" Bundesministerium für Arbeit und Soziales (2010) "Mitbestimmung - eine gute Sache" Federal Ministry of Education and Research (2003) "Germany's Vocational Education at a glance" Institut für Mittelstandforschung Bonn (2013) “Außenwirtschaftsaktivitäen von kleinen und mittleren Unternehmen im Lichte der amtlichen Statistik” Institut für Mittelstandforschung Bonn (2012) “Innovationstäigkeit im Mittelstand – Messung und Bewertung” Institut für Mittelstandforschung Bonn (2013) “Der nachhaltige Beschäaftigungsbeitrag von KMU” OECD(2004) "The Role of Competition Policy in Regulatory Reform, OECD Reviews of Regulatory Reform, Regulatory Reform in Germa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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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제 9
유로위기와 독일
구춘권 / 영남대학교 교수
I. 들어가는 말: 그리스의 채무협상과 독일 2015년 7월 5일 전 세계는 그리스를 주목하였다. 이 날 그리스는 이른바 “트로이 카”, 즉 유럽연합집행위원회, 유럽중앙은행(ECB), 그리고 국제통화기금(IMF)이 제안 한 두 개의 문서1)에 대해 찬반을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했다. 유럽연합 및 주요 채권 국들을 대표하는 여러 정치인들이 반대가 다수일 경우 그리스의 유로존 퇴출, 즉 그 렉시트(Grexit)가 현실로 등장할 것이라며 강력히 경고했기에 이 국민투표의 결과는 큰 관심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리스의 시민들은 이 문서에 대해 뚜렷한 반대의사로 답했다. 총 유권자의 62.5%가 참여한 이 투표에서 참가자들의 61.31%는 그리스의 채무위기와 함께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단어인“오히(OXI)”를 선택했던 것이다. 많은 관찰자들은 그리스의 국민투표 결과가 유로존 재무장관들의 모임인 유로그룹 (Eurogroup)과의 협상과정에서 벼랑 끝에 몰렸던 시리자(Syriza) 정부에게 상당한 힘 이 될 것으로 보았다. 국민투표라는 예상치 못한 카드를 꺼내든 치프라스(Alexis Tsipras)의 “정치적 도박”2)에 대한 비난은 그리스 헌법재판소가 이 투표의 절차적 1) “Reforms for the completion of the Current Program and Beyond”와 “Preliminary Debt sustainability analysis”가 그것이다(Referedum, 2015). 2) 국민투표 이전 실시된 대부분의 여론조사는 찬성과 반대가 매우 팽팽한 균형을 이루고 있음을 보여준다. 즉
시리자 정부조차 유리한 투표결과를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여러 매체들은 이를 치프라스의 “정치적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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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성을 인정함으로써 사그라졌고, 결국 국민투표의 “오히”는 2010년 이후 그리스 가 감당해야 했던 가혹한 긴축프로그램에 대한 국민적 반대를 의미한 것으로 해석되 었기 때문이다. 치프라스의 계산은 국민투표라는 민주주의적 수단에 의존해 긴축정책 에 대한 국민적 반대를 시위함으로써 협상과정에서 일종의 배수의 진을 치는 것이었 다. 이 전술은 최소한 지금까지 유럽연합이 회원국들 내부의 민주주의적 정당성을 직 접적으로 훼손하는 어떠한 결정도 내린 적이 없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설득력이 있 는 것처럼 보였다. 많은 관찰자들은 국민투표라는 예기치 못한 반전이 그리스 정부의 협상공간을 확대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국민투표라는 반전은 이후 유로그룹과의 협상과정에서 보다 극적인 반전에 직면한다. 독일의 재무부장관 쇼이블레(Wolfgang Schäuble)가 채무조정을 위해 필요 하다면 최소한 5년 이상 그리스의 한시적인 유로존 탈퇴를 고려해야 한다는 방안을 제출한 것이다. 그리스 국민투표의 결과에 대한 우려와 경고로서 그렉시트가 언급된 적은 있지만, 유로존의 가장 비중 있는 국가의 재무부장관이 협상과정에서 그렉시트 를 공식적으로 제안한 것은 분명 놀라운 사실이었다.3) “쇼이블레 플랜”(Schäuble, 2015)으로 알려진 이 짧은 문서는 특히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사실을 고려할 때 매우 충격적인 것이었다. 첫째, 지금까지 유럽통합은 회원국 정부들 사이의 대등한 협상에 기반해 왔고, 이는 누구보다 독일의 전 수상인 콜(Helmut Kohl)이 매우 강조했던 원칙이기도 하다. “쇼 이블레 플랜”은 그리스 정부와의 어떠한 협상 없이 제안되었고, 독일의 여러 매체들 은 이를 “콜 원칙”에 대한 배신으로 평가하고 있다. 둘째, 마스트리히트 조약을 비롯한 유럽연합의 입헌적 장치들은 유로존의 가입에 대 한 규정을 명시하고는 있지만, 특정 회원국을 유로존으로부터 퇴출시키는 어떠한 방 법과 절차를 명시하고 있지 않다. 유럽연합 차원의 조약적·입헌적 근거가 부재한 상 황에서 등장한 “쇼이블레 플랜”은 일종의 초법적인 조치로서 법치주의의 문제를 야 기함은 물론이다. 셋째, 많은 관찰자들은 그렉시트가 그리스의 “예측하기 어려운” 좌파 정부가 협상과 정에서 사용할 수 있는 최후의 카드4)가 될 수는 있어도 독일이 먼저 꺼낼 수 있는 박”으로 해석했었다. 3) “이것은 쿠데타다(ThisIsACoup)”라는 메시지는 쇼이블레의 제안이 알려진 7월 10일 이후 페이스북과 트위터
등 소셜 미디어를 뜨겁게 달구었다.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바 있는 미국의 저명한 경제학자 크루그먼은 쇼 이블레의 아이디어를 “유럽 프로젝트를 살해하는” 것이라 칭했으며, 덧붙여 “앞으로 누가 독일의 좋은 의도를 믿을 것이냐”며 반문했다(Krugman, 2015). 4) 국민투표 직후 사퇴한 그리스 재무부장관 바루파키스(Yanis Varoufakis)는 나중에 최후의 비상플랜으로 드라크
마를 재도입하는 비밀계획을 준비했었다는 발언을 해 큰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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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드로 생각하지 않았다. 지난 수십 년 동안 프랑스와 함께 유럽통합의 쌍두마차의 역할을 해왔을 뿐 아니라, 최근 유럽의 경제화폐 통합과정으로부터 최대의 수혜를 누 리고 있는 독일이 전체 유로존에서 채 2%도 안 되는 경제규모를 갖는 그리스를 유 로존으로부터 강제로 내팽개친다는 것은, 지금까지 유럽통합의 대의와 명분을 고려할 때 쉽게 수긍하기 어려운 방안임은 분명하다. “쇼이블레 플랜”이 논의된 유로그룹의 장시간의 협상은 타협안을 찾지 못했고, 공은 결국 유로존 정상회의로 넘어갔다. 7월 12일 오후에 시작해 무려 17시간이 넘게 걸 린 유로존 정상회의는 제3차 구제금융의 협상을 시작하기 위해 그리스가 수용해야 하는 전제조건들을 타결하는 데에 성공한다. 7월 13일 오전에 발표된 일곱 쪽에 걸 친 유로정상성명은 “쇼이블레 플랜”이 요구한 한시적 그렉시트를 배제하기는 했지만, 제3차 구제금융 협상을 시작하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그리스 정부에 매우 강경한 조 치들을 요구하고 있다(Erklärung des Euro-Gipfels, 2015). 이 성명은 그리스의 채무 위기라는 긴박한 경제적·금융적·재정적 비상사태에 대한 유로존의 대응과 요구를 담 고 있다는 점에서 뿐만 아니라, 유로위기 이후 유럽통합의 성격이 변화하고 있는 여 러 징후들을 함께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도 아주 흥미로운 문서이다. 특히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첫째, 유로존 정상들은 그리스 의회가 7월 15일까지, 즉 사흘 안으로 부가가치세 인 상을 포함한 세제개혁의 실시, 연금체계의 지속성을 위한 긴급조치들의 도입, 통계청 의 완벽한 법률적 독립성의 확보, 그리고 안정성장협약의 주요 규정들의 완전한 실행 을 법안으로 통과시킬 것을 요구했다. 또한 열흘 안으로 법적 소송의 가속화 및 비 용절감을 목표로 민법체계의 조항과 규정들을 근본적으로 개정하고, 유럽연합집행위 원회의 지원 아래 금융기관들의 회생과 퇴출을 위한 지침들을 실행하도록 요구했다. 여느 민주주의 국가라면 수년의 논쟁이 걸릴 법한 세제개혁과 연금개혁 및 민법체계 의 개선이 눈 깜짝할 사이에 이루어져야 했으며, 실제 이루어졌다. 이 조치가 실행되 지 않고서는 새로운 구제금융에 대한 협상이 아예 시작되지도 않을 것이었기 때문이 다. 둘째, 위의 급격한 조치들을 넘어 유로존 정상회의가 그리스에게 요구한 것들은 매우 광범위하고 포괄적인 사안들을 담고 있다. 그리스 정부는 재정균형을 달성하기 위해 향후 구제금융 주관 기관들과 합의된 조치들을 2015년 10월까지 실행해야 한다. 또 한 확실한 일정표 아래 생산품시장을 OECD의 기준에 상응하도록 개혁해야 하며, 에너지시장과 관련해 송전 및 전력망사업을 민영화하여야 한다. 특히 노동시장과 관 련해서도 정상회의는 임금협상 과정 및 노동쟁의 조치들의 근본적인 검토와 현대화 를 요구했으며, 대량해고의 경우에도 구제금융 기관들과 합의된 일정과 평가를 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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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도록 했다. 또한 노동시장정책이 국제적·유럽적 절차에 맞추어져야 하며 과거로 복 귀해서는 안 된다고 추가로 명시했다. 정상회의는 금융영역을 강화하기 위해 부실 대 출에 대한 보다 단호한 조치를 요구했으며, 정부가 인사 등을 통해 그리스금융안정기 금(HFSF)과 은행들에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완전히 차단하도록 명문화했 다. 이와 같은 요구사항들은 유럽연합집행위원회와 유럽안정화기제(ESM) 등 구제금 융 주관 기관들이 그리스의 재정, 행정, 시장, 금융, 노동시장 및 노사관계 등 정치와 경제의 전반적인 영역에 대해 직접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들어 놓은 것이 라 할 수 있다. 셋째, 유로존 정상회의는 민영화 및 다른 경로를 통해 매각할 수 있도록 그리스 정 부의 자산들을 독립적 기금에 신탁할 것을 요구했다. 이 방식으로 500억 유로를 마 련해 절반은 향후 구제금융의 상환에, 그리고 나머지 절반의 절반은 채무의 축소에, 남은 마지막 4분의 1은 투자에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쇼이블레 플랜”은 이 기금 을 룩셈부르크에 설치할 것을 요구했으나, 정상회의는 그리스에 설치하되 유럽 기관 들의 엄격한 감독과 관리 아래 두게 했다. 또한 정상회의는 향후 그리스 정부가 주 요 분야들의 모든 법률초안을 의회에서 논의하거나 일반에 공개하기 이전에 구제금 융 담당 기관들과 먼저 상의해야 한다고 못 박았다. 그리스 정부자산의 소유권이 대 폭 제한되었을 뿐만 아니라, 주권국가로서 입법적 자율성이 크게 훼손되었다. 향후 그리스의 주요 법안들은 민주주의적 의견 수렴의 결과물이라기보다는 구제금융 담당 기관들의 선호에 의해 좌우될 위험이 결정적으로 커졌다. 이번 유로존 정상회의의 성명은 그리스 정부와의 기존의 어떤 협상보다도 훨씬 강력 하고 단호한 조치들을 담고 있다. 많은 관찰자들에게 이 요구사항들은 너무도 과도한 것이라, 예컨대 철학자 하버마스는 정상회의가 스스로 “정치적 파산”을 선언했다고 분개하며 “한 회원국을 실질적인 보호령의 상태로 강등하는 것은 유럽연합의 민주주 의적 원칙에 명백히 위배되는 것”임을 강조했다(Habermas, 2015). 그렉시트조차 배 제하지 않겠다는 “쇼이블레 플랜”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이러한 강경한 조치들은 특히 독일이 앞장서 요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5) 5) 2015년 8월 14일 유로그룹과 그리스 정부는 총 860억 유로까지 지급 가능한 제3차 구제금융에 합의했다. 이
중 260억 유로는 곧 바로 지불되며, 나머지 600억 유로는 2015년 10월부터 구제금융의 조건과 요구사항들의 이행을 점검하면서 단계적으로 지불하게 된다. 그러나 제3차 구제금융의 대부분도 이전 두 차례의 구제금융처 럼 원금과 이자 상환 등 채무의 이행에 사용됨으로써 유럽중앙은행과 채권국들로 다시 돌아오며, 상대적으로 적은 액수만이 그리스로 흘러 들어갈 뿐이다. 게다가 실제 투자에 사용할 수 있는 액수는 매우 적다. 또한 제3 차 구제금융은 그리스 정부에 대한 한층 가혹한 조건들과 결부되어 있다. 그리스 정부는 민영화, 행정개혁, 세 금개혁, 연금개혁, 구조개혁에 동반하는 조치들을 실행함과 동시에 당장 내년부터 국내총생산의 0.5%에 달하 는 재정흑자를 달성해야 한다. 이 흑자 규모는 2017년 1.75%, 2018년 3.5%까지 커져야 하며, 중기적으로 3.5% 를 유지해야 한다(Eurogroup, 2015). 지금까지 유로존의 어떤 국가도 달성하지 못한 재정흑자의 규모를 매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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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독일은 왜 이처럼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는가? 이는 그리스에 대해 가장 많 은 청구권을 지닌 채권국으로서의 이해관계 때문인가? 독일의 입장이 궁극적으로 채 권국의 이해관계와 무관하지 않을지라도, “쇼이블레 플랜”이나 유로존 정상회의의 성 명은 채권국과 채무국의 이해관계의 차이, 그리고 전자의 후자에 대한 과도한 요구의 차원으로 축소되어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여타 다른 지역 및 국가들과 달리 그리스 는 유럽연합의 회원국이며, 그리스의 채무위기 또한 유로위기의 연장선 위에서 발생 했기 때문이다. 그리스 채무위기의 총체적 진실은 유로위기의 배경을 이해할 때만이 제대로 밝혀질 수 있으며, 그리스와의 채무협상 과정에서 유럽연합과 독일이 보인 강 경한 입장 역시 유로위기에 대한 유럽연합의 대응의 변화를 파악할 때만이 그 의미 를 제대로 포착할 수 있다. 이 글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과제를 수행함으로써 유로위기의 과정에서 독일의 역 할과 위상을 조명하려 한다. 첫째, 유로위기의 배경을 논의하고, 여기에서 특히 유로 존의 구조적 불균형과 독일모델의 경쟁력의 관계를 분석한다. 주지하듯이 자본주의의 다양성 논쟁을 비롯하여 기존의 제도주의적 접근으로부터 제출된 독일모델에 대한 여러 해석들의 근본적 한계는 독일모델의 특수성을 주로 일국적 차원에서 분석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주로 산업관계, 직업교육, 기업 거버넌스와 기업 내부 관계, 고용자 와 피고용자의 관계의 독특함에서 독일모델의 특수성을 찾았다. 독일모델의 성공을 가능케 한 거시경제적 측면에 대한 논의, 그리고 특히 국제 환경에 대한 논의는 거 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수출강국으로서 전후 독일모델의 성공은 GATT나 브 레튼 우즈 체제와 같은 국제교역 및 국제금융체제의 작동방식과 밀접한 연관이 있었 음은 물론이다. 마찬가지로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유럽의 병자”로 취급받던 독 일이 지구적 금융위기 및 그 연장선상의 유로위기를 거치면서 “유럽의 슈퍼스타”로 부상한 것은 경제화폐연합, 즉 유로존의 작동방식과 무관하지 않다. 이 글은 유로존 의 구조적 불균형이 독일의 경쟁력을 어떻게 강화시켰는지에 대해 주목한다. 둘째, 유로위기에 대한 유럽연합의 대응의 변화를 추적하고, 여기서 특히 독일의 역 할을 분석한다. 유로위기에 대한 유럽연합의 대응은 크게 두 단계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위기 대응의 첫 번째 단계에서는 개별 회원국들 차원에서 은행에 대한 긴 급 구제와 경기부양 정책이 이루어졌고, 유럽연합 차원에서는 금융시장의 재규제가 취약한 경쟁력을 지녔으며, 거기에 투자할 여력도 거의 없는 그리스가 달성할 수 있을지는 매우 의심스럽다. 설령 달성하더라도 이는 사회적 긴장과 갈등을 동반하는 가혹한 개혁조치들, 즉 부가가치세와 같은 간접세의 대폭적인 인상, 연금의 대대적 축소와 개시연령의 연장, 사회적 지출의 대규모 삭감 등을 가차 없이 실행함으 로써만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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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의되었다. 그러나 2010년 이후 유로위기가 금융위기로부터 재정위기로 전화하면서, 유럽연합의 대응도 두 번째 단계에 들어선다. 이 단계에 들어서면 위기 대응은 유로 존의 안정화, 긴축정책의 공고화, 그리고 구조개혁과 경쟁력 강화를 핵심적 목표로 설정한다. 독일은 이와 같은 위기 대응의 변화과정에서 주도적 역할을 행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로위기에 대한 유럽연합의 대응이 변화하는 맥락을 파악한다면, 그리 스와의 채무협상 과정에서 독일과 유럽연합이 보인 강경한 입장은 사실상 놀라운 것 이 아니라 일관되며 논리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II. 유로위기의 배경 2007년 미국에서 시작된 금융위기는 유로위기라는 이름으로 유럽을 타격했고, 유럽 통합에 심각한 시련을 가져다주었다. 유로위기는 유럽통합의 성공 기에 잘 드러나지 않았던 유로존의 구조적 불균형과 유럽통합의 제도적 취약성을 그대로 드러냈음은 물론이다. 유로위기는 그리스, 포르투갈, 아일랜드, 스페인, 이탈리아 등 유로존 주변 국가들의 채무위기로 표출되고 있지만, 단순한 국가채무 위기가 아니다. 예를 들어 스페인과 아일랜드는 금융위기 직전인 2006년과 2007년만 해도 재정흑자를 기록했 으며, 공공부채도 2007년 국내총생산의 36.3%(스페인)와 24.9%(아일랜드)에 불과할 정도로 매우 적었다. 포르투갈의 공공부채 역시 2007년 국내총생산 대비 68.4%로 이는 독일(65.2%)보다 약간 높은 수준에 불과하다. 같은 해 그리스(107.4%)와 이탈 리아(103.3%)의 공공부채는 과도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과거에 비해서 약간 개선되 고 있는 실정이었다. 유로위기는 이들 국가에서 누적되어 가는 공공부채 때문에 일어 난 것이 아니라, 금융위기가 먼저 발생하고 이에 대한 대응이 국가의 채무를 폭발적 으로 증가시켰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6) 유로위기는 금융위기, 즉 부실한 유가증권이나 채권을 보유했던 은행들의 위기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신용시스템의 전면적 붕괴를 우려한 국가가 대규모 구제금융을 실행함으로써 은행위기는 재정위기로 전화하였다. 구제금융이든, 양적 완화든, 긴급구 제든, 그 이름이 무엇으로 불리든 간에 국가의 “소방관” 역할은 화폐자산의 대규모 손실을 막기는 했지만, 반대로 국가의 공공부채를 폭발적으로 늘렸다. 유로위기는 위 기 이전의 민간채무가 국가의 개입과 함께 공공부채로 전환될 뿐이며, 화폐자산의 손 6) 2014년 이들 국가에서 국내총생산 대비 공공부채의 규모는 그리스 177.1%, 이탈리아 132.1%, 포르투갈 130.2%,
아일랜드 109.7%, 스페인 97.7%를 기록했다. 같은 해 유로존 17개국의 평균은 92.2%이다(Eurostat,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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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이 거의 일어나지 않는 역설을 보여주고 있다.7) 이는 특히 채무에 의존해 거대한 부동산 붐이 일었던 스페인과 아일랜드에서 거의 극적이었다. 1980년대 라틴아메리 카의 외채위기에서처럼 유로위기에서도 일종의 “채무의 국유화” 또는 “채무의 사회 화”가 일어나고 있으며, 이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놀라운 역설이라고 할 것이다 (Vuolo, 2014).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로위기는 여느 채무위기와는 상당한 차별성이 있다. 1980년대 중반 단일유럽의정서(SEA)에 대한 합의를 계기로 거대한 동력을 얻고 진행된 유럽통 합이 유로위기의 배경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유럽통합은 어떻게 유로위기 라는 시련을 불러내었는가? 여기서는 먼저 경제화폐연합의 완성 이후 유럽연합이 야 심차게 추진했던 금융시장 통합의 효과를 간략히 살펴본 뒤, 유럽연합이라는 초국적 국가성의 제도적 결함에 주목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유로존의 구조적 불균형 이 독일의 경쟁력 강화에 어떻게 기여하고 있는지에 대해 논의할 것이다.
1. 유럽연합의 금융시장 통합 2000년대 유럽연합의 가장 중요한 프로젝트는 금융시장의 통합이었다. 단일시장과 경제화폐연합을 계승하면서 완성하는 프로젝트로 이해된 금융시장 통합은 1999년 금 융서비스행동계획(FSAP)을 출발점으로 본격적으로 가동되었다. 이 행동계획은 투자, 자기자본, 위험자본, 유가증권, 연기금 사업, 주식양도, 결산 및 회계 감사, 기업의 인 수와 합병, 기업조직 등을 망라하는 다양한 영역의 (탈)규제와 관련하여 수많은 지침 들을 만들어냈고, 2007년까지 유럽연합에 새로 가입한 국가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회 원국들에서 적용을 완료했다(FSAP, 2007). 금융시장 통합의 핵심 목표는 유럽 금융 기관들의 경쟁력을 강화해 역동적인 금융시장을 창출하는 것이었으며, 이는 주로 미 국의
금융혁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다(Bieling,
2006;
Cafruny/Ryner, 2007). 미국의 금융혁신과 시장중심적인 금융체계는 유럽의 전통적 인 은행중심적 금융체계보다 우월한 것으로 진단되었고, 유럽의 금융시장을 발전시키 는 것은 무엇보다 유가증권 시장을 발전시키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당시 집행위원회 7)
이 역설 덕택에 극적인 금융적·경제적 파국을 모면할 수 있었지만, 동시에 위기의 “정화기능 (Bereinigungsfunktion)” 또한 사라졌다(Deppe, 2013: 41-42). 통상 과거의 금융위기에서는 차입자들의 파산과 함께 화폐자산이 대규모로 손실됨으로써 위기 이후 실물경제와 금융영역의 균형이 다시 회복되었다. 즉 화폐 자산의 과도한 청구권은 소실되고, 금융의 권력은 실물경제가 감당할 수준으로 복귀하는 것이다. 바로 이 점에 서 위기는 실물경제와 금융영역의 불균형을 “정화”하는 역할을 하고 새로운 도약의 디딤돌을 놓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위기에서는 바로 이 “정화기능”이 사라졌기에 위기로부터의 회복이 더디며 위기가 지속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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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역내시장과 서비스를 책임지며 막중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볼켄슈타인 (Frits Bolkestein)의 표현을 빌리자면“라인지역(Rhineland)의 안락한 환경을 떠나 보 상도 크지만 위험도 높은 앵글로-색슨의 차가운 기후와 험한 조건으로 다가 설”(Bieling, 2006: 431 재인용) 때만이 유럽연합이 미국만큼 경쟁력이 있는 지역으 로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을 모델로 한 유럽연합의 금융시장 통합은 두 가지 효과를 가져왔다. 첫째, 금융 화와 관련된 모든 거시경제적 지표들이 미국의 궤적을 따라 가파르게 상승하였다. 유 가증권 시장, 특히 주식시장의 중요성이 모든 회원국들에서 지속적으로 증가했다. 독 일과 프랑스와 같이 과거 독자적인 금융체계를 가진 나라들에서도 주식시장이 빠르 게 확대되었고, 주주자본주의적 성향이 뿌리를 내렸다(Goyer, 2006: 407; Bischoff, 2008: 61-62). 투기적 목적의 차액 실현을 목표로 한 유가증권의 거래가 대단히 활 발해졌으며, 빈번한 거래와 재판매 때문에 시장 규모도 폭발적으로 커졌다. 또한 여 러 회원국들에서 실행된 연금제도의 부분적 민영화와 함께 연금펀드와 보험회사와 같은 기관투자가들의 역할이 결정적으로 중요해졌다. 비금융기업들의 금융자산 역시 주목할 정도로 늘어났다. 요컨대 금융시장 통합과 함께 유럽연합에서도 금융화가 빠 른 속도로 진행되면서 유로자본주의의 구조적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Crotty, 2009; Van Treeck, 2009; Stockhammer, 2008). 둘째, 금융시장 통합과 함께 몸집을 불린 유럽의 많은 은행들이 직접적으로 미국의 금융혁신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뉴욕과 런던에 개설된 유럽 은행들의 지점 숫자가 가 파르게 늘어났으며, 첨단 영업전략이 도입되었다. 특히 유럽의 15대 은행들은 헤지펀 드와 유사하게 고위험·고수익 투자에 집중하는 자회사들을 설립하면서 거대한 금융그 룹으로 전환한다(박상현, 2013: 164). 이들은 미국의 금융혁신—그리고 이에 따르는 위험—을 유럽으로 전파하는 선봉장의 역할을 했다. 서브프라임 주택대출 관련 파생 상품들은 위기 이전 두 자리 숫자의 놀라운 수익률을 가져다주었고, 유럽의 많은 은 행들 역시 여기에 투자했음은 물론이다. 영국의 Nothern Rock과 RBS, 독일의 HRE, IKB, Sachsen LB, 그리고 스페인, 아일랜드, 아이슬란드의 여러 은행들이 서 브프라임 사태에 연루되어 직접적인 타격을 받았다. 유로위기는 은행위기로부터 시작 되었는데, 그 선두에는 월스트리트 파생상품에 적극적으로 투자한 유럽의 은행들이 있었던 것이다. 미국의 금융혁신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던 유럽연합의 금융시장 통합은 유로자본주의 의 금융화를 가져왔다. 이미 금융시장 통합 이전에 진행되었던 탈규제화와 경쟁적 자 유화는 회원국들의 독자적인 금융 규제망과 제도적 장치들을 해체함으로써 유럽연합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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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시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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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적
자본주의의
금융적
흐름,
즉
달러-월스트리트-체제
(Dollar-Wall Street-Regime)8)에 합류하도록 만든 바 있다. 그런데 이제 금융시장 통합이 완성되면서 유럽연합의 금융시장은 달러-월스트리트-체제에 한층 더 깊숙이 연계되었다(구춘권, 2013: 161-167). 미국의 위기가 유럽으로 전이되는 탄탄한 가교 가 구축된 셈이다.
2. 초국적 국가성의 제도적 결함 유럽연합은 연방국가와 국가연합의 중간지점 어딘가에 놓여 있는 아주 “독특한 체계 (System sui generis)”로 얘기된다. 유럽연합은 “국가보다는 약하더라도 국제기구보다 는 훨씬 더 강력하며”(Keohane/Hoffman, 1990: 279), “연방에 미치지는 못하더라도 레짐 이상”(Wallace, 1983)의 것이기 때문이다. 법률적 측면에서도 유럽연합의 모습 은 독특하다. 유럽연합은 국민국가가 갖는 포괄적 권능을 부여받지 못하고 있으며, 따라서 제한된 목표들을 기능적으로 수행하는 조약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점을 강조 할 때 유럽연합은 일종의 “목적연합”에 불과하다. 그러나 공동체법이 갖는 초국가성, 즉 공동체법의 자율성과 직접적 효력 및 국내법에 대한 우선적 적용에 주목한다면, 유럽연합은 기능적 조약의 차원으로 축소되지 않는 독특한 국가성(Staatlichkeit)을 보유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유럽통합의 역사는 바로 이 독특한 국가성을 발전시켜 온 역사이다(구춘권, 2004). 주목할 점은 이 국가성이 균질적이기보다는 파편적으로, 균등하기보다는 선택적으로 발전해 왔다는 사실이다. 그 결과 이 독특한 국가성을 떠받치고 있는 제도적 기반들 은 영역에 따라 매우 불균등한 모습을 띠고 있다. 오늘날 유로위기를 통해 유럽통합 이 경험하고 있는 긴장과 딜레마는 정책영역에 따라 다르게 발전한 초국적 제도들의 긴장 및 비대칭과 무관하지 않다. 주지하듯이 유럽통합은 시장을 창출하는 권능과 결정과정, 그리고 시장을 교정하는 권능과 결정과정의 극단적인 비대칭성 위에 구축되었다(Platzer, 2005). 유럽연합은 경쟁정책 및 화폐정책과 관련하여 강력한 권능을 보유하고 있다. 질이 신입헌주의 (new constitutionalism)라고 지칭했듯이, 단일유럽의정서나 마스트리히트조약과 안정 성장협약은 일종의 헌법적 위상을 지닌 경성법(hard law)의 특징을 갖고 있다(Gill, 1998). 요컨대 단일시장의 창출과 경제화폐연합의 실현은 입헌적 효력을 갖는 강력 8) 고완이 명명한 달러-월스트리트-체제는 개방된 자본시장, 자유로운 변동환율, 그리고 국제적인 통화경쟁을 원
칙으로 구성되었고, 자본통제, 고정환율, 금태환 약속에 기반한 달러 기축통화체제였던 브레튼 우즈 체제와 극 적으로 대비된다(Gowan,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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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조약에 의해 추동되었던 것이다. 모든 회원국들은 단일시장과 단일화폐와 관련해 결정된 사항을 반드시 지켜야하며, 이 영역에서 타협은 일종의 타부로 여겨진다. 유 로위기가 보여주듯이 여러 회원국들이 안정성장협약의 재정적자 기준을 지키지 못할 때조차, 이 기준의 합리성이 다시 논의되기보다는 원래의 기준을 지키거나 강제하기 위한 새로운 장치와 제도들이 모색되는 실정이다. 그러나 시장을 교정하는 영역에서는 여전히 국민국가적 단위가 중요하다. 세금·환경· 에너지 분야와 같은 중요한 정책 분야는 여전히 국민국가적 권능영역에 속한다. 노동 정책과 사회정책의 영역에서 등장한 다양한 유럽연합의 지침들이 일정한 지향점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임노동관계의 법적·제도적 조절과 관련해서는 국 민국가적 차원이 압도적으로 중요하다. 사회적 영역의 초국적 조절은 대부분 구속력 이 없는 추천적 성격의 연성법(soft law)이다. 시장 및 화폐영역과 달리 사회영역의 정책들은 훨씬 유연하게 접근되며 대부분 정부들 사이의 반복된 협상과정을 거치고 있다(이호근, 2000). 지금까지 유럽통합은 경제요소들의 이동성을 높이고 경제적 효 율성을 증대하는 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 사회적 재분배에 대해서는 주로 상징적 인 의미 이상을 부여하지 않고 있다(Schulten, 2004). 유럽연합의 초국적 국가성을 떠받치는 제도들은 정책영역에 따라 매우 강력하고 완 고하거나 또는 반대로 상당히 느슨하고 유연한 형태를 띠고 있다. 유럽통합이라는 초 유의 역사적 실험이 국민국가에 구현된 균질적인 국가성을 재현하리라 기대하는 것 은 무리겠지만, 정책영역에 따라 다르게 작동하는 국가성은 지금까지 유럽통합의 심 각한 딜레마인 것은 분명하다. 유로위기를 통해 다시금 드러났듯이 유럽연합 차원의 위기정책은 이러한 제도적 결함으로 말미암아 상당히 모순적으로 작동한다. 중앙은행 의 독립성이라는 제도적 위상 덕택에 2011년 이후 유럽중앙은행은 시중 은행들에 대 해 대규모의 유동성 공급 및 양적완화라는 팽창적인 화폐정책을 실시하고 있다. 그러 나 재정정책은 2010년 이후 긴축 일변도이다. 특히 위기국들에서 “트로이카”는 극단 적인 긴축을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정책적 불일치는 위기로부터의 탈출을 더욱 어렵 게 만들고 있음은 물론이다. 유럽연합이라는 독특한 국가성의 제도적 결함, 즉 화폐·재정·사회·임금정책의 불균등 한 발전과 불일치는 회원국들 사이의 경제적 격차를 축소하기보다는 확대할 위험이 크다. 강력한 경쟁정책과 화폐정책과 달리 유럽연합이 회원국들의 격차를 축소하기 위해 동원할 수 있는 수단은 매우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화폐정책이 유럽중앙은행의 배타적 권한이 되면서 회원국들은 자국 화폐의 평가절하와 같은 중요한 환율적응 수 단을 상실했다. 대량실업과 같은 심각한 사회문제에도 불구하고 회원국들의 적극적 재정정책은 재정안정협약의 기준에 의해 제한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유럽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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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줄곧 경쟁국가적인 체계를 강조함으로써 오히려 회원국들의 격차를 벌이는 데 기 여한 셈이 되었다(Busch/Hermann/Hinrichs/Schulten, 2012).
3. 유로존의 구조적 불균형과 독일의 경쟁력 유로위기가 터지자 유럽에서 미국식 금융혁신에 대한 강력한 비판이 제기되었던 것 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위기 직후 유럽은 지구적 금융개혁이라는 야심찬 의제를 설 정하는 듯 했으나, 유럽의 금융시장이 점차 안정화되고 금융시장 행위자들이 귀환하 면서 이 개혁의 야망은 수그러지고 말았다(Bieling, 2014a). 그렇다면 만약 미국의 서 브프라임 사태가 없었더라면 유로위기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인가? 월스트리트 파생 상품에 투자했던 유럽 은행들의 파산은 연기되었겠지만, 어떠한 형태로든 유로위기는 발생할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다. 앞에서 본 것처럼 유럽연합의 금융시장이 통합되면 서 유로자본주의의 금융화가 진행되었고, 금융화의 심화는 금융적 취약성을 높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주지하듯이 금융적 취약성은 채무가 증가하면서 눈덩이처럼 커진다. 민스키를 비롯한 여러 학자들이 증명하려 시도했듯이(Minsky, 1995; Wolfson, 1996; 킨들버거/알리 버, 2006), 과도한 채무의 상황에서는 아주 작은 쇼크라도 금융적 수익과 생산적 수 익 사이의 잠재적 불균형을 표면화시키면서 위기를 촉진하기 때문이다. 세계에는 물 론 유로존에도 어마어마한 화폐자산이 존재하고, 그 반대편에는 채무가 있다 (Lapavitsas, 2012). 화폐자산과 채무는 마치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데, 화폐자산이 놀 라운 속도로 증가하면서 채무 역시 크게 늘어났다. 그런데 채무의 증가는 채무관계의 취약성을 높이며 금융위기의 가능성을 증폭시킨다. 특히 유로존에서 채무관계의 취약 성은 유로존의 구조적 불균형으로 말미암아 지속적으로 커져 왔다. 설령 서브프라임 사태가 없었더라도 결국 채무위기가 터질 수밖에 없을 정도로 유로존의 구조적 불균 형은 확대되었고, 바로 이 점에서 유로위기는 독특한 유럽적 문제를 표현하고 있다. 유로존의 불균형은 단일통화를 탄생시킨 마스트리히트조약의 구성적 결함에 의해 보 다 강화되었다. 마스트리히트조약은 물론 이후 안정성장협약(Stability and Growth Pact)도 유로존의 가입기준을 재정적자의 규모와 인플레이션율과 같은 순전히 화폐적 인 지표로 제한했고, 회원국 국민경제의 실물경제적인 능력을 고려하지 않았다. 예컨 대 각 국가의 생산성, 경상수지로 표현되는 경쟁력, 실업률과 같은 고용상황 등 실물 경제적으로 중요한 지표에 대해 마스트리히트조약은 언급하지 않았으며, 이들 지표는 유로존의 가입기준에서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는다(Zinn, 2013: 55). 그런데 유로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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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그 출범 이전부터 독일,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핀란드와 같은 경상수지 흑자국과 스페인, 포르투갈, 그리스, 이탈리아와 같은 경상수지 적자국으로 양분되어 있었다. 즉 회원국들 사이에 상당한 수준의 실물경제적 격차가 이미 존재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격차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유럽중앙은행은 유로존의 평균을 기준으로 이 자율정책을 수립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상대적으로 높은 인플레이션율을 기록하고 있었던 적자국들에게 유럽중앙은행의 이자율은 매우 낮은 수준을 의미했고, 실제 실 질이자율은 종종 마이너스 대를 기록하기도 했다. 낮은 이자율이 지배적인 상황에서 실물경제적으로 취약한 적자국들이 채무의 차용에 대한 강력한 유혹을 받았음은 당 연하다. 특히 공동의 화폐인 유로의 도입과 함께 환율변동의 위험이 사라지면서 흑자 국들로부터 금융투자가 크게 늘었다(Casis, 2006: 255). 앞에서 지적한 유럽연합의 금융시장 통합은 채무의 조달을 더욱 쉽게 했음은 물론이다. 통합된 금융시장이라는 새로운 조건 아래서 적자국들은 낮은 이자율의 채무를 손쉽게 조달할 수 있었고, 따 라서 경상수지 적자를 줄이기 위한 노력은 뒷전으로 밀렸다. 그리스, 스페인, 포르투 갈과 같은 적자국의 채무가 빠르게 늘어났다. 만약 이 채무가 생산적으로 투자되었더라면 유로위기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투자 는 일자리를 창출하고 이윤을 낳음으로써 이자의 변제 및 미래의 채무 상환가능성을 높이고, 따라서 채무관계의 취약성을 완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채무가 주로 주택건 설과 민간소비에 사용된다면 당장의 경제성장에는 기여한다 치더라도 채무관계의 취 약성은 강화된다. 이 성장은 결국 채무에 의존한, 즉 미래의 소득을 당겨쓴 결과물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이 상황이 유로존의 적자국들에서 벌어졌다. 채 무에 의존한 주택건설과 민간소비의 확대는 일단 높은 경제성장률을 낳았다. 유로존 의 출범 이후 상당기간 적자국들의 경제성장률은 흑자국들의 성장률을 능가했다. 고 용이 증가하고, 실질소득도 늘었지만, 동시에 단위노동비용의 상승이 일어났다. 수출 경쟁력은 갈수록 저하되었고, 수입이 늘어났으며, 경상수지 적자가 빠르게 커져갔다. 적자국과 흑자국의 경쟁력 및 경상수지의 격차라는 유로존의 거시경제적 불균형이 단일화폐의 도입 및 금융시장의 통합과 함께 더욱 악화되고 있었던 것이다(Scharpf, 2011; Becker/Jäger, 2009). 한편 독일과 같은 흑자국에서는 그 반대의 현상이 일어났다. 흑자국의 인플레이션율 은 유럽연합의 평균 이하였기 때문에 실질이자율은 상대적으로 높은 수준이었다. 유 럽중앙은행의 일괄적인 이자율정책은 적자국과 달리 흑자국의 실물영역을 화폐적으 로 제약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결과 실물경제로의 투자는 지체되었고, 경제성장률은 보잘 것이 없었다. 이자율정책이라는 적응수단을 상실한 독일이 선택할 수 있는 대안 은 일종의 “내부적 평가절하(innere Abwertung)”를 통해 경쟁력을 강화하는 것이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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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전형적인 내부적 평가절하 수단인 임금인상 자제와 강력한 긴축정책을 택했을 때 등장할 내수의 부족은 공격적인 수출을 통해 만회되어야만 했다. 주지하듯이 독일모델은 “장기적인 임금인상 자제에 특별히 특화”되어 있고(Hassel, 2015: 122), 이는 유로존이 출범한 이후에도 변하지 않았다. 2000년대에 들어 독일 의 실질임금은 정체했으며, 경기침체와 함께 단위노동비용은 오히려 하락하고 있었 다. 2002년에서 2007년 사이 독일의 단위노동비용은 무려 12퍼센트가 하락했다 (Scharpf, 2015: 88). 독일의 국내수요는 의심할 여지없이 감소했지만, 독일 수출품 의 가격경쟁력은 큰 폭으로 개선되었다. 더욱이 유로존 전체적으로 단위노동비용이 상승하고 있는 상황에서 독일의 단위노동비용이 하락한 것은 적자국과 흑자국의 경 쟁력의 격차를 더욱 크게 벌였다. 독일의 흑자 규모는 빠르게 커져갔고, 적자국은 그 반대의 상황에 직면했다. 유럽중앙은행의 일괄적인 이자율정책은 처음부터 독일에게 축복을 의미하지는 않았 지만, 유로라는 단일화폐는 독일의 공격적인 수출에 적지 않게 기여했다. 만약 단일 화폐가 도입되지 않았더라면 독일과 같은 흑자국의 화폐는 엄청난 평가절상을 경험 했을 것이며, 수출을 통한 경기회복은 어려웠을 것이다. 유로 덕택에 독일은 실질적 인 평가절하라는 외부 효과를 누릴 수 있었으며, 적극적인 수출을 통해 내수 부족을 만회할 수 있었다. 유로존이 출범했던 1999년 24.7%였던 국내총생산 대비 수출액은 2011년 39%를 넘어섬으로써 독일은 전통적인 수출강국을 넘어 매우 수출의존적인 나라가 되었다(Statistisches Bundesamt, 2015). 유로위기의 발발 이후에도 독일은 유 로존의 수요 감소를 미국과 특히 중국시장으로의 적극적 수출을 통해 상쇄하고 있으 며, 최근 해마다 엄청난 규모의 무역수지 흑자 신기록을 갱신하고 있는 실정이다. 독 일이야말로 단일화폐의 최대의 수혜자가 된 셈이다(Schulten, 2015).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유럽의 병자”로 취급받던 독일이 최근 “유럽의 슈퍼스 타”로 부상한 데는 유럽통합의 심화, 즉 경제화폐연합의 실현과 금융시장의 통합이 적지 않게 기여했다. 경제화폐연합이라는 새로운 화폐적 조건, 즉 화폐정책의 공동체 화는 독일의 경쟁력 강화를 위한 강한 압력으로 작용했다. 반대로 적자국들에서 화폐 정책의 공동체화와 이를 잇는 금융시장 통합은 채무의 확대를 향한 강한 유인이 되 었다. 경제화폐연합이 작동하면서 독일의 흑자는 큰 폭으로 늘어났고, 적자국에서는 반대의 현상이 일어났다. 유로존의 구조적 불균형이 더욱 커졌으며, 적자국들의 채무 가 크게 증가하였다. 요컨대 유로위기로의 길이 열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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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유로위기에 대한 유럽연합의 대응과 독일의 역할 유로위기는 지금까지 유럽통합의 역사에서 가장 극적인 변곡점으로 기록될 것이다. 70년에 달하는 유럽통합의 역사에서 위기와 후퇴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이번 유로위기에서처럼 유럽통합의 이상이 실험대에 들어선 적은 없으며, 유럽통합에 대한 지지가 가파르게 감소한 적은 없다. 그렇다면 이 극적인 위기에 대해 유럽연합은 어 떻게 대응하는가? 2010년 6월, 당시 유럽연합집행위원회의 위원장이었던 바로소 (José Manuel Barroso)는 유럽연합 차원에서 경제정책의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고 강조하며, 이를 “조용한 혁명”에 비유했다. 바로소에 따르면 이 “조용한 혁 명”의 내용은 “회원국들이 유럽의 제도들에게 경제적 감독의 강력한 권력수단과 공 공재정의 엄격한 통제를 위임하는 것을 받아들인”것이다(EUobserver, 2011). 주지하 듯이 유로위기 이후 유럽연합은 유럽재정안정화설비(EFSF)와 유럽안정화기제(ESM), 식스팩(Six Pack)과 유럽재정협약(European Fiscal Compact), 그리고 유럽학기 (European Semester)와 유로플러스협약(Euro-Plus Pact)과 같은 새로운 제도들을 도 입하고 시행했다. 아래에서는 이 새로운 제도들을 비롯하여 유로위기에 대한 유럽연 합의 대응을 네 가지 측면, 즉 금융시장의 재규제와 좌절, 주변국들의 재정위기와 유 로존의 안정화, 긴축정책의 공고화, 구조개혁과 경쟁력의 강화로 정리하여 평가하고 자 한다. 이 글이 특히 주목하려는 것은 유로위기가 두 번째 단계에 들어서면서, 즉 은행위기가 재정위기로 전화하면서, 유럽연합의 대응이 긴축정책 및 구조개혁과 경쟁 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선회했다는 점이다. 긴축정책과 경쟁력 강화는 21세기에 들 어 독일모델이 가장 선호했던 어젠다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1. 금융시장의 재규제와 좌절 유로위기와 이에 대한 유럽연합의 대응은 시기적으로 두 단계로 구분해 볼 수 있다 (Bieling, 2014b). 2007년 여름 미국에서 서브프라임 사태가 일어나고 2009년 말까지 이르는 시기를 위기의 첫 번째 단계로, 그리고 위에서 얘기한 유럽연합의 새로운 제 도들이 논의되기 시작한 2010년 이후의 시기를 위기의 두 번째 단계로 구분할 수 있 다. 위기의 첫 단계에서는 주로 파산 위험에 처한 은행들을 긴급 구제하는 조치, 그 리고 금융위기로 인해 위축된 실물경제를 지원하기 위한 경기부양 정책이 등장하였 다(Pisani-Ferry/Sapir, 2010: 353-359; Heinrich, 2012: 397-398). 후자와 관련해 서는 예컨대 폐차지원금과 같이 소비의 촉진을 통해 수요를 안정화시키는 조치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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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행되었다. 주지하듯이 금융위기가 발생하자 이 위기를 진단하는 담론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었 다. 우선 유럽의 정치적·경제적 엘리트들이 공유했던 담론은 서브프라임 사태를 기본 적으로 미국의 문제로 진단하고 위기의 외적 성격을 강조하는 것이었다(조홍식, 2014: 20; Heinrich, 2012: 398). 미국과 달리 유럽의 위기는 단기적인 유동성의 문 제이며, 설령 유동성의 고갈로 말미암아 은행들에 대한 긴급 구제나 경기부양 정책이 시행될지라도, 이는 일시적이며 예외적인 상황으로 인식되었다. 따라서 이 담론은 유 동성 위기가 해결되고 나면 유로존은 다시금 재정 규율과 건전화라는 기존의 노선으 로 복귀할 것으로 전망했다. 반면 시민사회의 다양한 이니셔티브들이 공유한 담론은 유럽의 위기를 탈규제화된 지구적 금융시장의 불안정과 관련된 문제로 이해했다. 유 럽의 위기 역시 지구적 금융시장의 위험한 파생상품 거래가 붕괴하면서 낳은 연쇄작 용의 일부라는 것이다(Mügge, 2011: 58). 이 담론은 위험도가 높은 유가증권과 파 생상품의 거래에 대해 유럽은 물론 지구적 차원에서 강력한 규제를 요구하고 나섰다. 금융위기는 새로운 금융형태가 낳은 구조적 불안정의 문제이기에 이에 대한 재규제 없이는 언제든 반복될 수 있는 문제라는 것이다. 위기의 첫 번째 단계만 하더라도 금융시장에 대한 적극적인 재규제를 요구하는 담론 은 상당한 호응을 얻었다. 파생상품과 같은 위험한 금융거래와 이에 대한 규제의 부 족이 금융위기를 낳은 것은 명백해 보였기 때문이다. 경쟁적 탈규제화의 시기에 타부 로 여겨지던 여러 제안들, 즉 금융거래세의 도입, 오프쇼어 금융센터의 폐쇄, 헤지펀 드에 대한 규제, 신용평가 회사들에 대한 감독 등이 매체들의 관심을 끌면서 격렬하 게 논의되었다. 금융시장과 관련된 이슈는 정치화되었고, 향후 재규제의 틀과 관련된 논쟁이 유럽연합의 핵심의제로 부상했다(Engelen et al., 2011: 165). 이 문제에 대한 회원국들 사이의 입장 차이와 상이한 인식도 드러나기 시작했다. 국내총생산에서 금 융서비스의 비중이 큰 영국이 금융시장의 재규제에 대해 시종일관 회의적인 입장을 드러내었던 반면, 이 비중이 상대적으로 작은 독일은 보다 엄격한 규칙 위에서 안정 적으로 작동하는 금융시장을 선호했고 재규제에 긍정적이었다. 금융시장의 재규제에 대한 논쟁은 유로위기의 첫 단계에서 상당한 파장을 불러일으 켰지만, 이로 인한 변화는 조촐한 편으로 평가된다(Bieling, 2014a). 더욱이 재규제의 담론이 유럽은 물론 나아가 지구적 금융시장의 재규제를 요구했다는 점을 고려한다 면, 이 재규제의 전망은 일단 좌절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프쇼어 금융센터의 폐쇄, 헤지펀드에 대한 규제, 신용평가 회사들에 대한 감독의 요구는 시간이 지나면 서 슬그머니 종적을 감췄고, 금융거래세만이 의제로서 살아남았다. 그러나 이 또한 여러 정부와 금융기관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쳐 합의가 요원한 실정이다. 그렇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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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연합에서 금융시장의 재규제는 왜 좌절했는가? 우선 금융시장의 재규제는 시장을 교정하는 조치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유럽연합의 초국적 국가성은 시장의 자유화와 관련해서 강력한 입헌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지만, 시장을 교정하는 영역에서는 국민국가의 역할이 압도적이다. 후자의 영역에서 유럽연 합의 국가성은 “미봉책(half-measures)의 챔피언”(Aglietta, 2012: 18) 격이라 할 수 있다. 요컨대 회원국들 간의 길고 복잡한 협상과정을 통해 정치적 타협의 결과물이 가시화될 즈음이면, 초기에 가졌던 원래의 문제의식은 타협에 희석되어 약화되거나 실종된 경우가 허다하다. 주지하듯이 유럽연합은 은행위기에 대한 대응의 결과물로 2014년 5월 은행연합을 출범시켰다. 은행연합은 유럽 은행들의 자기자본비율, 예금 보호한도, 파산에 대한 감독을 유럽적 차원으로 옮겨옴으로써 은행들의 전반적인 위 기관리 능력을 강화하기는 했다(Demary, 2014: 11). 그러나 은행위기의 진정한 원인 으로 지목되었던 사안들에 대한 조치는 담고 있지 않다. 즉 위기의 첫 단계에서 논 의된 금융시장의 재규제와 관련된 조치들은 은행연합에 전혀 수용되지 않았다. 시장 을 교정하는 영역에서 유럽연합의 초국적 국가성의 취약함이 다시금 드러난 것이다. 금융시장의 재규제가 좌절된 또 다른 이유는 정부의 구제금융을 통해 급한 불이 꺼 지고 나자, 유로위기를 동반한 담론이 점차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담론의 초점 은 금융시장의 재규제로부터 주변국의 국가채무의 문제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유로위 기의 두 번째 단계에서 들어서면 금융시장의 재규제는 슬그머니 꼬리를 감추고, 적자 국들의 방만한 재정운용이 주로 논의되면서 긴축정책에 대한 요구가 담론을 지배하 게 된다. 유로위기의 첫 단계에 미국의 서브프라임 사태라는 위기의 외적 원인을 강 조하던 유럽의 정치적·경제적 엘리트들의 담론은 이제 유로위기를 주변국들의 국가채 무라는 내적 원인에 초점을 맞추는 형태로 변화했던 것이다(Heinrich, 2012: 400). 특히 독일의 엘리트들이 이러한 변화의 선봉에 서고 있음은 쇼이블레, 메르켈 등 여 러 정치인들의 발언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2. 주변국들의 재정위기와 유로존의 안정화 유로위기의 첫 번째 단계를 지나고 나자 대부분의 회원국들에서 공공부채가 크게 늘 어났다. 그리스, 포르투갈, 스페인, 이탈리아, 아일랜드에서 공공부채는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독일에서도 국가채무는 15% 이상이 늘어 국내총생산의 80%를 넘어섰다. 유로존의 주변국들은 물론 독일에서도 공공부채의 급격한 증가의 대부분은 파산 위 험에 처한 민간은행들에 대한 대규모 구제금융 때문이었다(Lehndorff, 2014). 정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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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제금융 덕택에 은행들은 파산을 면했지만, 은행위기는 이제 재정위기로 전화했다. 2010년 이후 유로존의 주변국들은 가파르게 증가한 공공부채 때문에 자금을 조달하 는 데에 큰 어려움을 겪는다. 크게 늘어 난 국가채무와 만성적인 경상수지 적자로 인해 주변국들의 신용도는 큰 폭으로 하락했고, 거기에 대규모의 자본 이탈이 겹치면 서 이 국가들에 대한 위험프리미엄이 급격히 오른 것이다. 특히 그리스, 아일랜드, 포르투갈의 상황이 심각해져 공공부채의 재융자를 위해서는 턱없이 높은 이자를 지 불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보통의 국가라면 중앙은행이 “최후의 대부자(lender of last resort)” 의 역할을 수행하는 방식으로 위기에 대응하겠지만, 유로라는 단일화폐를 사용하는 유로존에서는 사정이 복잡하다. 마스트리히트조약과 유럽중앙은행헌장 제21조는 유럽 중앙은행이 회원국의 국채를 직접 매입하는 것을 회원국의 재정적자에 대한 화폐적 지원 또는 신용제공으로 비칠 수 있다는 이유에서 금지하고 있다. 그러나 다행히 유 럽중앙은행헌장 제18조는 동 은행이 금융시장에서 “시장적 도구들(marketable instruments)”을 거래하는 것을 허용하고 있고(ECB Compendium, 2002: 7), 회원국 의 국채는 당연히 여기에 포함됨은 물론이다. 2010년 이후 유럽중앙은행은 독일연방 은행의 강력한 경고와 반대에도 불구하고 위기국들의 국채를 시장에서 간접적으로 매입하는 담보시장프로그램(Security Market Programme)을 시행함으로써 유로위기 의 첫 번째 단계의 관망하는 자세로부터 탈피했다. 주지하듯이 독일연방은행을 모델로 만들어진 유럽중앙은행은 회원국들의 정치적 영 향력으로부터 강력한 독립성과 자율성을 누리는데, 역설적으로 이 독립성 덕택에 유 럽중앙은행은 기존의 인플레이션 억제를 목표로 한 통화주의 일변도의 노선으로부터 일정하게 선회할 수 있었던 것이다(Zinn, 2013: 48). 유럽중앙은행은 2010년에서 2012년 초반까지 담보시장프로그램을 통해 약 2,200억 유로에 달하는 주변국들—이 탈리아, 스페인, 그리스, 포르투갈, 아일랜드—의 국채를 매입했다(Eser/Schwaab, 2013: 6). 이밖에도 유럽중앙은행은 기준금리를 단계적으로 0.05%까지 내렸고, 저금 리의 장기재융자프로그램(Long Term Refinancing Operation)을 통해 대규모의 유동 성 공급에 나서는 한편, 2012년 9월에는 위기 발생 시 위기국의 국채를 무제한으로 매입하겠다는 계획까지 발표했다. 2015년 3월 유럽중앙은행은 2016년 8월까지 18개 월에 이를 수 있는 대규모의 양적 완화(Quantative Easing)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유럽중앙은행은 회원국들의 국채를 포함해 매달 약 600억 유로에 달하는 채권을 매입함으로써 유로존의 안정화에 보다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다 (ECB, 2015). 유럽연합 차원에서도 주변국들의 재정위기에 대응하고 유로존을 안정화시키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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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구제 전담기구가 만들어졌다. 2010년 6월 그리스, 아일랜드, 포르투갈에 구제금 융을 제공하기 위해 임시적으로 유럽재정안정화설비(EFSF: European Financial Stability Facility)가 출범했으며, 이는 나중에 유럽안정화기제(ESM: European Stability Mechanism)라는 이름으로 항구적인 기구가 되었다. 유럽재정안정화설비는 17개 회원국들의 지불보증을 통해 4400억 유로에 달하는 구제기금을 마련했다. 여기 에 600억 유로에 달하는 집행위원회의 유럽재정안정화기제(EFSM: European Financial Stabilisation Mechanism) 자금을 더하면 유럽연합 차원에서 5,000억 유로 의 긴급구제 자금이 마련된 셈이다.9) 유럽재정안정화설비는 그리스, 아일랜드, 포르 투갈에 1800억 유로—이 중 그리스에만 1309억 유로—의 구제금융을 제공하였고 (EFSF, 2015), 2012년 12월 이후에는 유럽안정화기제가 스페인과 사이프러스에 500 억 유로에 달하는 긴급구제를 실시하였다(ESM, 2015). 올해 그리스에 대한 제3차 구제금융 역시 유럽재정안정화기제가 담당하고 있다. 그런데 이 구제금융은, 앞에서 그리스의 채무협상을 통해서도 보았듯이, 수혜국이 받 아들여야 하는 가혹한 조건들과 결부되어 있다. 수혜국은 재정긴축을 강제하는 직접 적인 조치들은 물론, 공공지출의 삭감, 사회보장의 축소, 사회하부구조에 대한 투자 의 연기, 임금 인하, 노동시장 보호조항의 제거, 대규모의 민영화와 같은 궁극적으로 경제성장의 지반을 위협할 수 있는 논쟁적인 조치들을 수용해야만 한다(Bieling, 2014a: 354; Busch/Hermann/Hinrichs/Schulten, 2012: 8-27). 유로존의 안정화를 위한 노력은 역설적으로 주변국들의 정치적 선택의 폭을 크게 제약하고, 초국적 기구 들의 감독 권한을 대폭 강화하는, 지금까지 유럽통합의 역사에서 경험하지 못한 새로 운 장을 열었다.
3. 긴축정책의 공고화 유럽재정안정화설비와 유럽안정화기제는 구제금융의 수혜국들에게 강력한 긴축정책 적 조치들을 관철시켰다. 그런데 이 긴축정책이라는 의제는 유로위기의 두 번째 단계 에서 들어서자 위기국들뿐만 아니라, 유로존 전체의 문제로 부상했다. 유로위기의 첫 번째 단계에서 실행된 은행에 대한 긴급구제와 함께 재정적자가 큰 폭으로 커지자, 누적된 국가채무 역시 크게 늘어났기 때문이다. 2011년 유로존 17개국의 공공부채는 국내총생산의 86%에 달했으며, 2012년 거의 90%에 육박했다(Eurostat, 2015). 유로 9) 유럽안정화기제는 이 자금의 규모를 회원국들의 800억 유로 출자금을 포함해 총 7,000억 유로로 늘렸고, 이 중 5,000억 유로를 대부할 수 있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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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의 경제대국인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공공부채가 빠르게 늘어나는 것도 우려스럽게 보였다. 독일의 경우 은행구제와 경기부양책으로 인해 공공부채의 비율이 2010년 국 내총생산의 80%를 넘어섰으나, 다시 강력한 긴축정책이 실시되면서 2011년 이후 하 향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전통적으로 인플레이션의 억제와 더불어 균형재정을 중요한 정책목표로 삼았던 독일에게 유로존 전체에서 공공부채가 빠르게 증가하는 것은 매 우 위험한 발전으로 비쳤음은 물론이다. 마스트리히트조약과 안정성장협약에서 독일 이 강력하게 추구했던 재정 안정화의 기준—국내총생산의 3% 이하의 재정적자와 60% 이하의 국가채무율—이 심각히 훼손될 위험에 처했기 때문이다. 위기의 두 번 째 단계에 들어서자 유로위기는 더 이상 은행위기나 금융위기가 아니라, 무엇보다 재 정위기로 의미가 부여되었다. 긴급구제나 수요창출과 같은 재정팽창에 대한 요구는 사라지고, 이제 강력한 긴축정책이 위기에 대한 대응책으로 제시되었다.10) 2010년 9월 논의를 시작해 2011년 12월 발효된 이른바 식스팩(Six Pack)—다섯 개 의 규정과 한 개의 지침으로 구성된—은 기존의 안정성장협약을 보다 엄격히 정의하 고 강화함으로써 유로존 차원에서 긴축정책에로 큰 발을 내딛었다. 식스팩은 안정성 장협약의 재정적자와 국가채무율 기준을 지키지 못하는 회원국들에게 과도한 적자를 해소하기 위한 이른바 “과잉적자절차(Excessive Deficit Procedure)”를 밟도록 강제하 고 있다(EUR-LEX, 2015a). 이 절차에 들어선 회원국은 기준을 초과한 재정적자를 바로 그 해에 감축하여야 한다. 또한 국가채무율이 국내총생산의 60%를 초과하는 회원국의 경우, 설령 한 해 재정적자의 규모가 국내총생산의 3% 이하일지라도 공공 부채를 감축하는 조치를 강구해야 한다. 재정적자와 관련해 유럽연합의 경고와 조치 를 거부하는 국가는 국내총생산의 0.1%에 달하는 예치금을 내야하며, 위반이 지속될 경우 이 예치금은 벌금으로 바뀐다. 요컨대 재정 안정화 기준을 지켜내기 위한 유럽 연합 제재의 예방적이고 직접적이며 강제적인 성격이 대폭 강화되었다. 만약 개별 회 원국이 이 제재에 대항하려면 회원국들 3분의 2의 동의를 확보할 때만 가능하다 (EUR-LEX, 2015b). 한편 식스팩은 거시경제적 불균형의 문제에도 관심을 촉구하고 있다. “과잉적자절차” 와 동일하게 회원국들에서 과도한 거시경제적 불균형이 등장할 경우 자동적으로 “과 잉불균형절차(Excessive Imbalance Procedure)”가 개시된다. 이 절차에 들어서는 국 가는
구체적인
구조정책적
조치들과
달성시한이
담긴“교정행동계획(Corrective
Action Plan)”을 제출해야 하며, 이를 제출하지 않거나 제대로 시행하지 않을 경우 10) 이러한 위기정책의 선회의 배경에는 집행위원회, 유럽중앙은행, ECOFIN과 같은 유럽적 기구들은 물론, 특히
독일을 필두로 한 채권국들의 강력한 요구가 있었음은 물론이다(Bieling, 2014b). 광범위한 긴축정책에 대한 제 안은 2010년 3월 독일정부에 의해 처음으로 제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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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잉적자절차”와 마찬가지로 국내총생산의 0.1%에 달하는 재정적 제제를 받게 된 다. 거시경제적 불균형에 대한 판단은 대외경제 및 경쟁력의 불균형, 그리고 국내경 제의 불균형과 관련된 다양한 지표11)를 모니터링 하는 “스코어보드(Scoreboard)”를 통해서 이루어진다(European Commission, 2015). 식스팩을 매개로 대폭 강화된 유로존의 긴축정책은 절차국에 대한 강력한 모니터링 을 명시한 두 개의 규정—이른바 투팩(Two Pack)—에 의해 보완되었고, 2012년 3월 유럽재정협약(European Fiscal Compact)12)을 통해 잠정적으로 완성되었다. 유럽재 정협약은 재정적자를 경기변동에 의한 적자와 구조적 적자로 구분하고, 구조적 적자 가 국내총생산의 0.5%를 초과할 수 없도록 규정했다(European Fiscal Compact, 2015). 즉 전체 적자에서 경기변동에 따른 세입과 세출의 변화에 의한 적자를 뺀 나 머지 적자를 구조적 적자로 정의하고, 이에 대한 보다 엄격한 관리를 요구한 것이다. 이는 정부 재정지출과 관련해 구조적 차원의 개혁을 강제하는 것임은 물론이다. 또한 유럽재정협약은 새로운 채무를 제한하기 위해 2009년 독일헌법의 채무브레이크(debt brake)와 유사한 규정을 도입하여, 채무기준이 준수되지 않을 경우 자동교정기제가 발효됨을 회원국들의 헌법 또는 이에 상응한 수준에 명시할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이 사항의 이행을 유럽법원이 감독하도록 했다. 식스팩, 투팩, 유럽재정협약을 거치면서 긴축정책은 회원국들의 헌법적인 목표로 자 리 잡았다. 질(Gill, 1998)이 신입헌주의라고 지칭했던, 단일시장의 창출과 경제화폐 연합의 실현을 목표로 한 단일의정서와 마스트리히트조약의 강력한 입헌적 효력은, 유로위기를 경험하며 위기입헌주의(crisis constitutionalism)로 발전하고 있다(Bieling, 2013; 2014a). 그런데 위기입헌주의는 신입헌주의의 조약적 차원의 위력을 넘어, 긴 축정책과 재정규율의 강화를 회원국의 헌법적 목표로 삽입할 것을 강제한 셈이다. 여 러 회원국들, 특히 주변국들에서 재정주권은 심각하게 제약될 것이 명백한데, 이를 상쇄할 장치들, 예컨대 흑자국에서 적자국으로 공적 이전을 내용으로 하는 지불연합 (transfer union)은 여전히 아이디어 수준에 머물고 있는 실정이다.13)
4. 구조개혁과 경쟁력 강화 11) 이 지표는 경상수지, 순 해외투자, 수출시장 점유, 단위노동비용, 실질유효환율, 민간부채율, 민간 신용흐름,
주택가격, 정부부채율, 실업률, 전체 신용부문 부채 등 11개를 망라하고 있다(European Commission, 2015). 12) 공식 명칭은 “Treaty on Stability, Coordination and Governance in the Economic and Monetary Union”이
다. 13) 최근 프랑스 경제부장관 마크롱(Emmanuel Macron)이 지불연합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시한 바 있다 (EUobserver,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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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축정책과 더불어 유로위기의 두 번째 단계에서 등장한, 유로존을 위기로부터 탈출 시킬 또 다른 대응책은 구조개혁과 경쟁력 강화였다. 2010년 유럽이사회는 구조개혁 의 지원, 지속가능한 재정정책의 확립, 거시경제적 불균형의 완화라는 세 가지 과제 의 수행을 목표로 유럽학기(European Semester)의 도입을 결의한다(European Council, 2015). 유럽학기는 회원국들의 경제·재정정책은 물론 노동·사회정책적 전략 을 유럽적 차원에서 미리 조율하기 위해 만들어진 제도라고 할 수 있다. 유럽학기는 집행위원회가 매년 초 경제성장과 고용에 관한 유럽적 차원의 통합된 보고서를 작성 하여 주요 행동영역들을 정의함으로써 시작된다. 회원국 정부들은 4월까지 개별 보 고서를 통해 재정 안정화 및 수렴, 그리고 구조개혁에 대한 계획을 제시한다. 회원국 들의 계획은 수집되어 일련의 자문단계를 거친 뒤 집행위원회에 의해 검토된다. 집행 위원회는 이후 유럽이사회에 의해 채택되는 일반적인 추천 및 개별 회원국에 대한 특별 맞춤형 추천을 마련한다. 회원국들은 그 해의 남은 기간 동안 이 추천을 행동 으로 옮기는 국가학기(national Semester)를 시행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유럽학기 를 통한 유럽연합의 정책적 개입이 매우 구체적이고 지시적이며 또한 예방적이라는 점에서 기존 유럽연합 통합양식의 지배적인 조절원칙, 즉 제어된 자기조절(regulated self-regulation)이나 개방적 조정방식(open method of coordination)과는 사뭇 다른 성격의 통합양식의 출현을 암시하고 있다. 2011년에는 유럽학기를 보완하면서 보다 강력한 경쟁력 담론을 담은 유로플러스협약 (Euro-Plus Pact)이 등장했다. 유로플러스협약은 “유럽경제정부”에 대한 프랑스의 요 구에 대해 독일이 “경쟁력 협약”이라는 이름의 역제안으로 맞받아치며 성사된 것이 다. 따라서 이 협약에는 독일의 공급 주도적인 경쟁력 담론이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 고 있다. 유로플러스협약은 유로위기의 원인을 더 이상 금융시장의 불안정의 문제가 아닌 경쟁력의 문제로 진단했고, 따라서 무엇보다 노동시장을 유연화하여 임금 및 노 동비용을 낮추고, 국가의 사회적 지출을 감축하고 제한하며, 나아가 기업에 대한 세 금의 수렴을 주 내용으로 담고 있다(Gros/Alcidi, 2011). 유로플러스협약은 회원국들 의 자발적 책임과 이행에 기반한다는 점에서 강제적 성격의 긴축정책적 조치와는 일 정하게 구분된다. 왜냐하면 유로플러스협약은 노동·사회·조세정책의 영역을 포함하고 있고, 앞에서 강조했던 바와 같이 이 영역에서 유럽연합의 국가성은 여전히 국민국가 적 조절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유로플러스협약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경쟁력 담론의 강화는, 유로위기의 두 번 째 단계에 들어 유럽연합의 위기 대응에서 독일의 영향력이 한층 강화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벡에 따르면 이러한 변화는 기존 독일과 프랑스의 쌍두마차, 즉 “메르코지 (Merkozy)”―독일 수상 메르켈과 당시 프랑스 대통령인 사르코지를 합친―의 시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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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터 “메르키아벨리스무스(Merkiavellismus)”의 시기로 힘이 이동하는 것을 보여준다 (Beck, 2013). 아글리에타는 메르켈과 쇼이블레 같은 독일 지도자들이 위기에 대한 도덕적 해석에 익숙하며, 위기의 원인을 유로존의 구조적 문제보다는 주변국의 무책 임으로 진단함으로써 위기의 해법을 전체 유로존을 독일처럼 경쟁력 있게 만드는 것 에서 찾고 있다고 지적한다(Aglietta, 2012). 어쨌든 확실한 점은, 유로위기의 두 번 째 단계에 들어서면 독일의 질서자유주의(Ordoliberalismus)―시장경제의 전제로서 강력한 규칙과 이를 관철하는 정부의 역할에 대한 강조―의 전통에 선 사고가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점이다. 헌법적 목표로 부상한 재정규율의 강화는 물론, 구조개혁과 경쟁력 강화를 위한 매우 구체적이고 지시적인 규칙들, 그리고 이를 위반 할 경우 수반하는 강력한 제재와 처벌은 매우 “독일적인”―보다 정확히 독일의 질서 자유주의적인―것임은 물론이다.14)
IV. 나오는 말 이 글은 유로위기에 대한 유럽연합의 대응이 초기에 금융시장의 재규제로부터 2010 년 이후 유로존의 안정화, 긴축정책의 공고화, 그리고 구조개혁과 경쟁력 강화로 이 동하고 있음을 유럽연합이 새로 만든 다양한 제도의 핵심적 내용을 분석함으로써 확 인했다. 이 변화의 맥락을 이해한다면 이 글의 도입부에서 논의한 그리스의 채무협상 과정에서 벌어진 극적인 상황은 사실상 놀라운 것이 아니다. “쇼이블레 플랜”이나 유 로존 정상회의의 성명은 그리스 입장에서 아무리 강경하고 가혹하게 보일지라도 유 로위기에 대한 유럽연합의 대응의 변화라는 관점에서는 일관적이며 논리적이다. 긴축 정책과 재정규율의 강화, 그리고 이를 위한 구조개혁은 유럽통합에서 새로운 입헌적 위상을 확보했고, 이는 어떤 경우에도 지켜야하기 때문이다. 치프라스는 이 의미를 과소평가하였고, 국민투표라는 배수의 진을 치고 협상에 임했지만, 결국 굴복할 수밖 에 없었던 것이다. 2015년 9월 25일, 올해에만 두 번째 실시된 그리스 의회선거에서 시리자는 35.46% 의 지지를 얻어 다시금 제1당으로 부상하였다. 구제금융의 협상과정에서 치프라스의 좌절에도 불구하고 시리자는 지난 1월의 선거에 비해 채 1%도 안 되는 표를 잃었을 뿐이다. 그러나 다시 집권당이 된 시리자와 치프라스의 미래는 희망적이지 않다. 구 14) “독일적인 유럽(deutsches Europa)”에 대한 우려와 비판은 독일 재무부장관 쇼이블레가 “우리는 독일적인 유
럽을 원하지 않는다”는 글을 기고해야 할 정도로 커진 것이 사실이다(Schäuble,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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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금융의 조건과 요구사항을 지속적으로 이행하고 점검받아야하기 때문이다. 구제금 융의 조건 아래서 그리스의 사회적 현실의 개선은 요원하다. 2015년에도 여전히 25%에 달하는 실업률과 무려 50%를 넘어선 청년실업률, 전체 인구의 60%에 달하 는 630만의 빈곤인구―이 중 250만이 정부가 인정하는 공식 빈곤인구―, 의료보험조 차도 없는 인구의 30% 등 그리스의 현실은 거의 절망적이다(Eichner, 2014). 그러나 이 현실의 개선은 더 이상 그리스의 정치적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유럽연합 및 특 히 강력한 긴축을 주도하고 있는 독일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근 유럽으로 쇄도하는 분쟁지역의 난민들을 수용할 것을 회원국들에게 호소하면서 독일은 올해에만 80만 명의 난민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다. 자신의 과거를 뼈아프게 기억하는 국가로서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책임감 있는 조치를 선택한 것이다. 그렇다 면 채무위기에서 인도주의는 불가능한가? 채무위기와 관련된 자본주의의 역사는 이 에 대한 부정적인 답변을 제시하며, 이번 유로위기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화폐와 관련 된 권리관계, 즉 채권·채무관계에서 인도주의는 자본주의적 질서의 근간을 뒤흔들 위 험이 있기 때문이다. 독일의 질서자유주의는 이 점을 일찍 간파했고, 경쟁적 시장경 제가 작동하는 틀, 즉 강력한 질서(Ordo)의 확립을 국가의 과제로 설정했다. 그리스 에 대한 독일의 강경한 대응은 바로 이 맥락을 고려할 때 제대로 이해될 수 있다. 그렇다면 유럽통합은 어디로 가는가? 독일 지도자들의 꿈처럼 전체 유로존이 독일처 럼 경쟁력을 갖게 될 것인가? 불가능하지는 않을지라도 쉬워 보이지는 않는다. 긴축 정책의 공고화 및 구조개혁과 경쟁력 강화라는 목표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등장할 모 순과 긴장이 너무도 크기 때문이다. 이 과정은 아마도 유럽통합에 대한 지지를 더욱 감소시킬 뿐 아니라, 민족주의적이고 대중영합적인 극우 세력들의 정치적 기회를 확 대할 가능성이 크다. 마찬가지로 쉬워 보이지는 않지만, 민주주의적으로 정당화된 유 럽 재정연합을 실현하여 중장기적으로 재정정책과 관련된 주권을 통합하고, 이 재정 연합의 발전에 기반해 유럽중앙은행의 권한을 확대함으로써 주권에 의해 뒷받침되는 완전한
유로를
실현하는
방안도
존재한다(Bordo/Jonung/Markiewicz,
2013;
Aglietta, 2012). 물론 이는 유럽통합을 “새로운 토대” 위에 올려놓는, 즉 통합의 질 적 심화를 전제하고 있다. 프랑스의 젊은 경제부장관 마크롱은 이 “새로운 토대”가 만들어지는 시점이 2017년 독일과 프랑스의 선거가 끝난 이후인 2018년이나 2019년 이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EUobserver, 2015). 만약 그의 예측이 실현된다면, 유로위 기는 유럽통합의 전환을 준비한 역사적 사건으로 기억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 경우 유럽통합은 지금처럼 상당한 긴장과 딜레마를 내포한 채 불투명한 미래 속으로 빠져들어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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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보개발국가를 넘어 평화복지국가로 발행일 2015. 12. 4 발행처 참여연대 부설 참여사회연구소 (소장 : 윤홍식 인하대 교수) 담 당 이기찬 간사 02-6712-5249 kclee@pspd.org 김태일 간사 02-6712-5248 tae1l@pspd.org Copyright ⓒ참여사회연구소, 2015 ※본 자료는 참여연대 웹사이트에서 다시 볼 수 있습니다. 정부보조금 0%, 참여사회연구소는 참여연대 회원의 회비로 운영됩니다. 대표전화 02-723-5300 회원가입 02-723-4251 홈페이지 www.peoplepower21.org (참여연대) www.ips.re.kr (참여사회연구소) 공식SNS 트위터 페이스북 @peoplepower21 주소 03036 서울 종로구 자하문로9길16 (통인동) 참여연대 3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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