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집]
해방․분단 70년 2015 평화기행
일시 | 2015년 8월 8일 ~ 8월 11일 장소 | 서울, 안산, 화천, 철원, 동두천, 양주 주관 | 역사문제연구소 인권재단사람 참여연대 ASCK(한반도문제를걱정하는학자모임) 주최 | (사)한국민족예술단체총연합 4.9통일평화재단 금정굴인권평화재단 시민평화포럼 아시아평화와역사교육연대 천주교인권위
2015 평화기행은
의 2015 변화의 시나리오 스폰서로 지원됩니다
목차
환영의 말
p.4
평화기행 프로그램
p.8
주관단체 / 주최단체
p.10
참가자 명단
p.15
학술행사 발제자료
p.18
세션1 | 동아시아 전후 질서와 한반도 분단체제, 그리고 역사전쟁 발제1 : 동아시아 대분단체제와 한반도 - 이삼성(한림대 교수) p.20 발제2 : 역사교과서 논쟁과 뉴라이트의 역사인식 - 김정인(춘천교대 교수) p.88 발제3 : 북조선의 분단체제와 조선(한국)전쟁 – 김수지(럿거즈 대학 교수) p.101 세션2 | 해방·분단 70년, 한반도의 현재와 미래 발제1 : 미국의 대아시아 전략변화와 동아시아 군사갈등–서재정(일본국제기독대학 교수)
p.111 발제2 : 한국 정치의 우경화와 대중적 극우단체의 등장 – 김동춘(성공회대 교수) p.120 발제3 : 남한의 평화운동과 통일운동 - 박정은(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 p.132 세션 3 | 분단 그리고 전쟁을 거부하는 이들 초대1 : 전쟁과 분단에 대한 예술적 성찰 - 제인진 카이젠 (영화감독) p.144 초대2 : 조선적 - 리정애 (조선적 재일교포) p.149 초대3 : 반군사주의의 목소리를 만들어온 병역거부운동 - 임재성 (병역거부자) p.155
환영의 말
해방·분단 70년 평화기행을 맞이하여 김성보 역사문제연구소 소장 지금으로부터
년 전 한국 사회가 맞이한 해방은 어떤 사회를 만들 것인지에
대한 여러 가지 가능성을 제기해 주었습니다 전쟁과 폭력이 마침내 끝났다고 인 식하는 순간들은 새로운 사회를 향한 갈망을 더할 나위 없이 강하게 만들었습니 다 그리고 그 갈망이 강했던 만큼 그것을 실현시키려는 실천도 다양하게 분출되 었습니다 폭발적인 환희 속에서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희망찬 생각은 바로 평 화 속에서 나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미소 양군의 분할점령과 한국전쟁은 분단을 고착시켰고 그것이 야기한 온갖 폭력들이 평화를 침범하였습니다 그 폭력이 구조화되면서 만들어낸 정치 사 회적 갈등은 지금도 적나라하게 지속되고 있습니다 한반도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많은 형태의 군사적 행위들 우리를 일상적으로 옥죄고 있는 종북 이라는 혐오 인권의 보편적 속성에 대한 완전한 무감각 등등 이러한 현상을 예민하게 느끼고 그 감각을 현실에서 실천하고자 치열하게 고민하는 것이 평화운동 의 방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평화운동 의 역사는 매우 고단한 역사였지만 결코 중단된
적이 없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해방과 분단이라는 역사적 분기점이 지금
주년을 동시에 맞이했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 이는 지금의 한국 사회를 괴롭히는 폭력의 기원을 정확히 직시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해줍니다 또한 마치 좌절된 것처럼 보였던 해방이 사실은 언제나 우리 곁에 존재하고 있었음을 말해줍니다 폭력을 구체적 으로 진단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실천의 다양한 결들을 고민하는 것이 해방의 과정을 끝내지 않는 방법일 것입니다 그 어느 때보다 평화의 가치를 되새기게 하는 요즘입니다 이런 시기에 국내외의 시민단체와 연구단체가 연대하여 우리는 이미 지난
년에
해방 분단
년 평화기행 을 기획하였습니다
정전 주년맞이 평화기행 을 통해 새로운 형태의 연
대를 시험해 본 적이 있습니다 평화를 실천하는 행위로서 이론과 현장을 아우른 다는 의미를 우리는 평화기행 이라는 이름을 통해 구현하고자 했습니다 부터
4
월
일
일까지 진행되는 다양한 프로그램은 우리 모두가 평화운동의 주체가 될
수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운동이 결코 끝나지 않으리라는 점도 결의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 참여하는 행위 자체가 이미 평화운동의 한 부분임 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이미 평화를 다지기 위한 실천에 참여하시게 된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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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CK를 대표하는 환영사 Owen Miller 오웬 밀러 런던대학교 한일 언어/문화학 교수 여러분 반갑습니다 저는 런던 대학교
에서 코리아 한국
역사를 가르치는
입니다 한반도 문제를 걱정하는 학자연맹 참가해주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애스크 를 대표해서 년 뉴욕에서 결성된
평화기행에 는 미국인과 남
북의 한국인 사이에서 상호 이해를 촉진시키기 위해 전념하고 있습니다 제가 북 미에서 오지 않았다고 여러분들이 말을 하실 수 있기에 저희 단체의 더 작은 유 럽지부를 대표해 이 자리에 섰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의
목표 중 하나는 학자 학생 그리고 일반대중들이 정확하고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분석을 통해 남북한에 대해 배우는 것을 돕는 것이기에 이 평화기행을 인권재단 사람 참여연대 그리고 역사문제연구소와 함께 주관하게 되어 기쁩니다 저는 이번 중요한 평화기행의 매우 국제적인 특징에 대해 강조하고 싶습니다 이 번 해에
참가자들은 태국 이탈리아 영국 일본 미국 스위스에서 왔고 몇
몇은 대한민국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온 참가자도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지만 그것은 나중을 위한 의미있는 목표로 남겨둡시다 우리의 배경과 관심사도 매우 다양합니다 우리 중 다수는 학자이고 일부는 학생 들 그리고 일부는 활동가들 입니다 아마 우리들 중 몇몇은 학자면서 학생이고 활동가일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한국 역사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는 한편 우리들 중 일부는
예를 들어 한국의 진실화해위원회 북한의 사회사 혹은 한중 관계사
와 같은 주제에 매우 집중적인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들 중 일부는 한국어를 할 수 있지만 일부는 하지 못합니다 우리들 중 일 부는 한국계이지만 일부는 아닙니다 우리가 공통으로 갖고 있는 것은 한국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의 정의와 평화 이슈에 대한 깊은 관심입니다 우리는 국제적인 연 대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고 사람들을 개인적으로 알게 되는 것은 연대를 더 쉽고 오래 지속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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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번 기행에 처음 참가하는 것이고 개인적으로 매우 기대가 됩니다 제가 배우게 될 것과 영국에 돌아가 제 학생들에게 한국 역사와 마주침을 더 풍성하게 하기 위해 무엇을 갖고 돌아갈 수 있을지에 대해 기대가 큽니다 이번 평화기행은 다른 방법으로는 얻기 어려운 색다른 방식으로 직접적인 배움의 기회를 제공할 것입니다 이번 평화기행은 사건이 일어난 장소에서 어떤 운동을 직접 조직하는 사람들로부터 직접 배움을 얻고 한국 현대사의 실제 유적을 근거리에서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물론 이번 평화기행은 흥미롭고 자극을 주는 다양한 사 람들을 만나는 기회이며 바라기는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거나 새로운 동료들을 만 날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마지막으로 여기 계신 모든 분들에게 이번 여행이 매우 안전하고 즐겁고 유익한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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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기행 프로그램 학술행사 일시 장소
해방 분단
년
월
년 한반도의 현재와 미래
일 토요일 오전 시
오후
시
참여연대 층 아름드리홀
순서 접수 사회 이태호 참여연대 사무처장 홍승혜 연세대 교수 환영사 김성보 역사문제연구소 소장 오웬밀러 런던대 교수
세션
동아시아 전후 질서와 한반도 분단체제 그리고 역사전쟁 사회 양미강 아시아평화와역사교육연대 발제 동아시아 대분단체제와 한반도 이삼성 한림대 교수 발제 역사교과서 논쟁과 뉴라이트의 역사인식 김정인 춘천교대 교수 발제 북조선의 분단체제와 조선 한국 전쟁 김수지 럿거즈 대학 교수 점심 해방 분단 년 한반도의 현재와 미래 사회 홍승혜 연세대 교수 발제 미국의 대아시아 전략 변화와 동아시아 군사갈등 서재정 교수 발제 한국 정치의 우경화와 대중적 극우단체의 등장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 발제 남한의 평화운동과 통일운동 박정은 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 휴식
세션
저녁 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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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 그리고 전쟁을 거부하는 이들 사회 이태호 참여연대 사무처장 초대 제인진 카이젠 영화감독 리정애 조선적 재일교포 임재성 병역거부자 환영의 밤
참여연대 인근 식당
평화기행 년 평화기행은 안산과 서울 일대의 국가폭력 인권탄압
현장과 화천 철원의
비무장지대와 동두천의 주한미군 피해현장을 찾아간다 화천 철원 동두천은 분단과 전쟁의 상흔이 생생히 남아있는 비극적 현장이자 대규 모 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냉전의 최전선 이다 화천 베트남 참전기념관의 깨어진 조각상을 통해 여전히 진행 중인 베트남전쟁을 둘러싼 기억투쟁의 현장을 목격할 수 있다 끊어진 금강산전기철도교량 평화전망대 승일교 노동당사를 둘러보는 길 위에서는 해방의 꿈을 산산이 부셔버린 분단과 전쟁의 아픈 상처와 마주하게 될 것이다 폐허로 버려져 있는 기지촌여성 성병검사소 이름 대신 번호가 새겨진 나 무 묘지석이 줄지어 늘어선 초라한 기지촌여성 공동묘지 미선이 효순이 참사현장 에 새워진 미군추모비는 저마다 간직하고 있던 억울한 사연을 들려줄 것이다 또 한 분단현장에서 힘겨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 민통선마을 사람들과 지뢰피해주민 들 현장 활동가들의 가슴 아픈 사연도 듣게 될 것이다 평화기행은 국내외 연구자와 활동가들 그리고 일반 시민들이 함께 분단과 전쟁의 비극적 현장을 둘러보며 분단 극복과 한반도 평화운동의 방향을 고민해 보는 소 중한 시간이 될 것이다 일차 월
일일
안산 서울
안내
인권재단사람 참여연대 역사문제연구소
코스
서울 경복궁역 출발 유가족과의 만남
일차 월
일월
안산 기억저장소
단원고
의릉 전 중앙정보부 강당
안산합동분향소 방문
서대문형무소역사관
화천 철원
안내
역사문제연구소
코스
서울 경복궁역 출발
화천 베트남 참전기념관
철원 금강산전기철도교량
유곡리 통일촌
화천 꺼먹다리
멸공
철원 두루미평화관 지
뢰피해자와의 간담회 일차 월
일화
철원 동두천 양주
안내
역사문제연구소
코스
철원 노동당사 간담회 서울
동두천 기지촌 여성 성병검사소 기지촌 활동가 두레방
상패동 기지촌여성 공동묘지
양주 효순이 미선이 참사 현장
해단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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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관단체 소개 역사문제연구소 인권재단 사람 참여연대 한반도문제를 걱정하는 학자연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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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제연구소 역사문제연구소는 우리 역사의 여러 문제들을 공동연구하고 그 성과를 일반에 보 급함으로써 역사발전의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고 이를 통하여 사회의 민주화와 통 일에 기여 하는 것을 기본목적으로 년 월 일 설립된 순수 민간 연구단체 입니다 연구소는 역사학 및 역사에 관심을 가진 여러 분야의 연구자와 시민들이 함께 참 여하여 운영해 왔습니다 년 창간한 대중학술계간지 역사비평 은 역사학 연구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하고 있습니다 년부터는 한국근현대사 분야의 전 문 학술지 역사문제연구 를 발행하여 새롭고 깊이 있는 연구를 촉진하고 있습 니다 연구원들이 중심이 되어 역사학계의 쟁점이 될 문제들로 매년 심포지엄을 개최해 왔으며 토론마당과 학술발표회 등을 통해 비판적 역사연구를 이끌어 왔습니다 이 런 전문연구를 널리 알리는 것 또한 연구소의 중요한 활동입니다 시민 대상의 강 좌와 토론회 역사기행 등을 개최하는 등 시민과 함께 하는 역사 연구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국내의 역사단체 및 관련 시민단체 외에도 일본 중국 대만 독일 등 여러 해외 연구단체와 정기적인 학술교류를 진행하고 있으며 동아시아의 평화와 인권을 위 한 국제 연대 활동에도 적극 참여하고 있습니다 역사문제연구소는 올바른 역사인식이 오늘날 우리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함께해주세요 그것은 인권과 평화 정의를 위한 힘이 될 것입니다
인권재단 사람 인권재단 사람은 인권을 옹호하는 단체 개인을 지 원하고자 년 설립되었습니다 재정이 열악한 인권단체들의 모금과 배분사업을 지원해온 재정발전소 인권전문잡지 세상을 두 드리는 사람 의 발간 인권도서 전문 도서출판 사람생각 운영 등을 통한 인권담 론의 확산 인권문화행사와 인권현장기행으로 인권감수성을 확산하는 등 소박하게 인권운동에 기여해왔습니다 년에는 시민들의 참여로 민간독립 인권센터 인권중심 사람 을 세웠습니다 이 곳에서 사람들이 모여서 인권에 대해 배우고 고민하고 실천하면 인권을 존중하 는 사회의 새로운 길이 열리리라 생각합니다 모두가 차별 받지 않고 평등하게 존 중받으며 사는 아름다운 공동체 억압의 주체가 아니라 의무의 주체로 국가가 자 신의 역할을 다하는 그런 세상에 대한 꿈 인간의 존엄성과 더불어 자연과 조화롭 게 살아가는 평화가 실현되는 그런 세상에 대한 꿈을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밀고 나갑니다 11
참여연대 참여연대는 한국의 독립적인 권력감시단체로서 참여민주주의 와 인권의 향상을 위해 년 발족했다 년 군부독재가 무너진 이래 한국사회에 시작된 민주화 과정을 보다 공고하 게 하고 시민의 정치적 사회적 권리를 제도화하려는 목적에 서 출범하였다 참여연대의 시도는 년 한국에 찾아온 금융위기를 계기로 결실을 맺기 시작했 다 부패방지제도 도입과 정치개혁을 위한 캠페인들 보편적 복지제도와 국가 복지재정 확대를 위한 캠페인들 그리고 기업지배구조의 개혁과 회계 투명성을 제고하기 위한 캠페인들이 성공하면서 참여연대는 한국 시민사회의 가장 영향력 있는 단체의 하나로 성장했다 참여연대는 년 월 현재 여명 회원의 회비를 재정적 기반으로 명 내외의 상근활동가와 명 내외의 전문가 자원활 동을 통해 운영된다 참여연대는 년 남북정상회담 개최를 계기로 한반도에 가시화되는 분단구조 해체 과정에 주목하였다 특히 한반도 분단 반세기만에 시작된 해빙 분위기에 새 롭게 장애물로 등장한 북한 핵문제와 미국 주도의 테러와의 전쟁 이 미칠 영향에 대한 토론을 시작하였다 이 과정에서 참여연대는 민주화와 남한 내부의 사회정의 를 위주로 활동해온 한국의 사회운동이 이제는 한반도 분단극복의 과정과 국제 무장갈등 예방에 보다 명확한 비전과 책임감을 가지고 대응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참여연대는 년가량의 준비과정을 거쳐 년 월 평화군축센터를 정 식으로 발족하였다 평화군축센터 발족 전부터 참여연대는 군수산업 비리 관련 내 부고발자 보호활동 등 반부패 운동의 맥락에서 국방 분야의 투명성과 책임성을 개선하기 위한 활동을 진행해온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평화군축센터의 발족은 차적으로 참여연대가 진행해온 국가권력에 대한 시민의 감시의 경험을 국방 안보 영역에 대한 시민감시와 정책대안 제시로 확대하는 것 을 의미했다 평화군축센터의 준비주체들은 공포나 안보를 이용한 국가의 시민통 제 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국가와 안보전문가들의 위협 해석 독점 에 도전하고 안보 영역을 민주화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사회와 세계를 바라 보는 평화 패러다임을 마련하고 새로운 철학과 비전을 가진 주체들과 연대하는 것의 중요성에 주목했다 참여연대 평화군축센터의 사업 방향은 다음과 같다 한반도 및 동북아 평화 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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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비 감시와 군축
시민 평화주체 형성
한반도
문제를
걱정하는
학자연맹(The
Alliance
of
Scholars
Concerned about Korea, ASCK) 년 월 일에 창립된 는 미국의 한반도 정책 등 한반도 문제를 걱정하는 학자들의 연맹입니다 우리는 한반도를 둘러싸고 있는 문제와 미국과 한반도 사이의 문제가 대화 협조 그리고 평화 추구를 위한 노력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동북아시아의 긴장 상태를 고조시키고 또 다른 비극적 전쟁을 야기할 수 있는 정책에 맞서 목소리를 높일 책임감을 느낍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한반도가 미국을 포함한 이웃 국가와의 조화를 이루는 평화적이고 통일된 한반도를 달성할 수 있는지에 대한 건설적인 토론에 우리의 목소리를 더하길 바랍니다 한반도문제를 걱정하는 학자연맹은 미국과 한반도 간의 상호 이해를 높이는 데에 헌신합니다 한반도문제를 걱정하는 학자연맹의 목표와 활동은 아래의 내용 등을 포함합니다 정확하고 역사적으로 현명한 분석을 토대로 학자 학생 정책 입안자 일반 대중이 한반도 남북한 모두 에 관해 배울 수 있도록 돕는다 2. 건설적이고 평화적인 한국 미국 그리고 북한 미국 관계 발전에 공헌한다 1.
우리는 현재 미국 한반도 관계에 있어 중요한 순간에 놓여있습니다 본 조직은 정확하고 인도적이며 모든 사람의 상호 이익에 부합하는 미국의 한반도 정책을 촉진하기 위해 헌신합니다 한반도문제를 걱정하는 학자연맹 은 년 월 일 콜롬비아대학에서 창립식을 갖고 출범했습니다 역사문제연구소 역사문제연구소는 우리 역사의 여러 문제들을 공동연구하고 그 성과를 일반에 보 급함으로써 역사발전의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고 이를 통하여 사회의 민주화와 통 일에 기여 하는 것을 기본목적으로 년 월 일 설립된 순수 민간 연구단체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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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최단체 (사)한국민족예술단체총연합 4.9통일평화재단 금정굴인권평화재단 시민평화포럼 아시아평화와역사교육연대 천주교인권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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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가자 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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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건한 강혜빈 권영태 권유경 김국환 김난 김대용 김덕자 김도민 김미원 김민화 김상균 김선영 김손자 김수지 김승환 김영미 김원식 김은경 김정아 김종백 김태경 김현숙 난새 데이비스찰스 로빈슨태미고 마츠사카히로 매리김 문선영 박강성주 박미경 박수홍 박주연 박현숙 배건욱 배경식 배지우 벨로스조슈아 사토유코 서재정 세토토모코 쉐논츄 스탁제프리 신수정 신지현 심기호 애퍼제시존 양수빈 엘빈웡 여재희 오웬밀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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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ng, Geon Han Kang, Hye-bin kwon Young tae Kim, Kook-Hwan Kim, Nan Kim, Dae Yong Kim Duk ja Kim domin Kim Mi won Kim Sang gyoon Kim Seon young Kim, Sonja Kim, Suzy KIM Seung Hwan Kim Young mi Jason Wonsihick Kim Kim, Jung Ah Kim Jong back Kim Tae kyung Kim hyun sook Nanse Davis, Charles Tammy Ko, Robinson Matsusaka, Hiro Kim, Mary Moon sun young Park-Kang, Sungju Park Mi kyung Park Su hong Park, Joo Yeun Park, Hyun Suk Bae, Kun Wook
Bellos, Joshua Sato Yuko Suh, Jae-Jung Tomoko, Seto Chew, Shannon Stark, Jeffery Shin Su jeong Shin, Jihyun Sim, Ki-Ho, Eperjesi, John Yang Su bin Wong, Alvin Yeo, Jae Hui Miller, Owen
유다정 유왕선 이진 이경숙 이경주 이경희 이광희 이규정 이미현 이상희 이숙현 이영아 이용덕 이지원 이지혜 이태호 이현옥 이혜정 이효성 임광순 임지현 임헨리 장완익 전영욱 정욜 정근식 정다혜 정민주 정병욱 정혜민 제인진카이슨 조진석 줄리아니조르지아 찬로카나키트판디트 최덕효 최명운 최현모 케빈그레이 킴벌리정 프리데릭바르타사트 한준구 홍승혜 홍천희 황수영
Yoo da jeong Yu , Wang-Seon Lee, Jean H Lee Kyeong suk LEE Kyeong Ju Lee, Kyunghee Lee Kwang hee Kyujeong LEE LEE Mihyeon Lee, Sang Hee Lee, Sookhyun LEE Youngah Lee Yong-Duk Lee Ji Won Lee Ji hye LEE Taeho Lee, Hyeon-Ok LEE Hea Jeong Lee Hyo sung Lim gwang soon Lim, Jeehyun Em, Henry Chang Wan Ick Jeong, Yol Jung, Keun-sik Chung Hye min Jung Byung Wook Chung Min ju Kaisen, Jane Jin Cho jin seok Giuliani, Giorgia Chanrochanakit, Pandit Choi, Deokhyo Choi Myung Woon Choi, Hyun Mo Gray, Kevin Chung, Kimberley Barthassat, Frederic Hong,
Seunghei Clara
Hwang Soo yo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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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행사 발제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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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그램 진 행
세션 1
이태호 참여연대 사무처장
홍승혜 연세대 교수
| 동아시아 전후 질서와 한반도 분단체제, 그리고 역사전쟁
사 회
양미강 아시아평화와역사교육연대
발제
동아시아 대분단체제와 한반도 이삼성 한림대 교수
발제
역사교과서 논쟁과 뉴라이트의 역사인식 김정인 춘천교대 교수
발제
북조선의 분단체제와 조선 한국 전쟁 김수지 럿거즈 대학 교수
세션2
| 해방·분단 70년, 한반도의 현재와 미래
사 회
홍승혜 연세대 교수
발제
미국의 대아시아 전략 변화와 동아시아 군사갈등 서재정 일본 국제기독대학 교수
발제
한국 정치의 우경화와 대중적 극우단체의 등장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
발제
남한의 평화운동과 통일운동 박정은 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
세션 3
| 분단 그리고 전쟁을 거부하는 이들
사 회
이태호 참여연대 사무처장
초 대
제인진 카이젠 영화감독 리정애 조선적 재일교포 임재성 병역거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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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션1: 동아시아 전후 질서와 한반도 분단체제, 그리고 역사전쟁] 발제1
동아시아 대분단체제 : 전후 동아시아 질서의 개념적 재구성1)
이삼성 (한림대학교)
세기 동아시아 질서의 소묘 세기 동아시아의 국제질서의 전체상을 그려본다면 아시아 태평양전쟁 의 종결 시점인
년 태평양전쟁 혹은
년을 기점으로 하여 둘로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해왔다 전반은 제국체제 후반은 몇 년의 과도기간을 거친 후의 대분단체제 이다 제국체제는 크게 세 묶음의 사회들 사이의 상호작용의 질서였다 미국과 일본이 라는 두 개의 상대적 신흥 제국들 간의 긴장과 협력의 관계를 중심으로 하여 구 성된 제국주의 콘도미니엄이 그 첫째이고 필리핀과 대만 한국을 비롯해 아태지 역 전반에 존재한 식민지들이 그 둘째이며 중국대륙에 존재한 거대한 반식민지가 그 셋째 주요 구성요소였다 즉 한 지역 안에 복수의 제국 식민지 그리고 반식민 지의 구성이 갖추어져 있는 질서였다
제국 중심부의 양대 축이었던 일본과 미
국은 상호 갈등하면서도 러시아를 견제하는 가운데 중국대륙을 경영한다는 공동 의 목표를 위해서 권력정치적인 흥정을 통해 상호적응하며 협력했다 필자는 이것 을 미일 제국주의 콘도미니엄 이라고 불러왔다
이들은 동아시아 연해지역과 대
륙의 동북지방에 대한 식민지 경영을 발판으로 중국대륙에 대한 반식민지적 경영 이 글은 지난 월에 열린 한국냉전학회 창립기념학술회의 성균관대학교 주년기념관 년 월 일 에서 동아시아 대분단체제 전후 동아시아질서의 개념적 재구성과 냉전 이라는 제하에 행한 필자의 기조발표문 내용이며 오늘 참여연대 주최 세미나에서의 발표를 위한 참고자료로 제출함을 밝힙니다 필자가 말하는 제국체제 는 제국들과 식민지 및 반식민지가 하나의 지역적 공간 안에 공존하는 시스템이 기 때문에 유럽이 갖고 있던 제국체제적 조건은 차대전의 결과로 해체된 것으로 본다 독일제국 오스트 리아 합스부르그제국 그리고 터키제국이 붕괴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년까지는 유럽과 동아시아 모두 를 포함한 세계질서는 제국주의 시대 였지만 제국체제 는 유럽에서는 년에 종식되었으며 동아시아 에서는 년까지 지속된다 졸고 동아시아 제국주의의 시대구분 제국주의 카르텔 로 본 근대 동아시아질서 국제정치논총 제 집 호 년 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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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그들 대외정책의 핵심으로 삼았다 그런 만큼 제노사이드를 포함한 제국체제의 폭력은 중국인들에 대해 가장 큰 스케일로 자행된다 이 질서는 사회간 공식적 위계 사이의
긴장된
공존과
협력의
그리고 제국들 관계
가 그 핵심이다 이러한 질서는 제국을 문명에 식민 지 및 반식민지 사회는 미개와 야만에 일치시키는 사유와 담론을 수반한다 인종 주의와 함께 사회라는 집단적 단위를 매개로 하는 비인간화와 차별의 논리가 그 가운데에 있었다
이런 조건에서 제노사이드를 포함한 대규모 폭력은 사회간
현상이었다 제국들의 대외정책의 요체가 식민지 경영에 기초한 반식민지 중국의 경영이었 다면 식민지와 반식민지의 조건에 처한 사회들은 한편으로 적응하고 한편으로 저 항하면서 대안의 질서를 향한 고통스런 모색에 나섰다 그 모색은 자기정체성의 재구성을 통한 근대화의 추구였다 제국체제의 붕괴는 동아시아적 차원에 국한해 말한다면 두 가지 조건에서 나왔 다 첫째는 반식민지의 내적 동학 즉 중국대륙 내부의 정치적 재구성이었다 그것 은 이중적이었다 중국에서 국민당정부에 의한 정치적 통합을 한편으로 하고 래디 컬한 대안의 질서를 추구하는 공산주의 운동의 성장을 다른 한편으로 하는 정치 적 재구성이다 이 변화는 우선 동아시아 제국체제가 처음부터 안고 있던 심오한 모순 즉 영토와 인구의 크기 및 역사와 문명의 깊이에서 반식민지 중국의 거대 성 이 내포한 긴장 그것을 증폭시키고 현실화시킨다 중국의 내적인 정치적 진화 는 일본 제국 자체의 존립에 대한 위협으로 인식되고 일본 제국주의의 과격화를 촉진한다
대동아공영권 이라는 이름의 중국대륙에 대한 전면적 지배와 서양의
자유주의 근대문명의 초극 에 대한 추구가 그것이다
그것은 중국에 대한 공동
경영이라는 미일 제국주의 콘도미니엄의 대전제를 또한 심각하게 위협한다 제국 체제 중심부 안의 잠재적 모순이 더 이상 평화적 봉인 상태에 머물 수 없게 된다 즉 제국체제 붕괴의 두 번째 조건이 마침내 작동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결국 유럽에서 발원한 제 차 세계대전과 결합하여 동아태지역의 패권전쟁으로 연결되 고 그 제국 간 전쟁의 결과로서 제국체제는 해체된다 동아태지역 해상패권을 장악한 미국은 스스로 식민지와 반식민지 경영을 해온 제국이었지만 다분히 폐쇄적인 공식제국체제에 주로 의존한 유럽 제국주의의 퇴 장을 관리한다 전후 피식민지역들에서 조직화된 민족주의의 저항 그리고 민족해 방을 대안의 세계질서 구축의 일차적 원리로 주창하는 공산주의 이념의 확산 속 에서 서구의 식민주의 질서 재건 시도는 설 자리가 더 좁아지고 마침내 해체된 졸고 제국과 식민지에서의 제국 제정치논총 제 집 호
세기 전반기 일본과 한국에서 제국 의 개념적 기능과 인식
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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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제국체제의 해체와 함께 전후 동아시아와 한반도의 운명을 지배해온 질서를 필 자는 동아시아 대분단체제 라고 정의해왔다 여기서 필자가 유의하는 것은 동아 시아에서 미소 냉전의 시작과 전후 동아시아질서의 구축 시점을 구분하는 것이며 냉전 혹은 냉전체제라고 하는 것으로부터 전후 동아시아질서의 정의를 개념적으 로 구분하는 것이다 필자는 동아시아 미소 냉전의 본격적인 시작은
년
에 걸친 시기라고 본다 그러나 전후 동아시아질서의 본질은 미소 냉전 자체가 아 니라 중국대륙과 미일동맹 사이의 대분단 기축의 대립을 골격으로 하는 동아시아 대분단체제 가 성립한 데 있다고 본다 그리고 그러한 체제 구성의 뿌리는 중국 내전과 그 결과 그리고 신중국 성립 직후인
년 말에서
년 초에 걸친 시
기 미국과 중국 관계의 향방이었다고 판단한다 제국체제에서 전쟁은 우선 식민주의 전쟁 즉 약소사회에 대한 침략전쟁의 모습 을 띠었다 미국의 필리핀 식민화 전쟁과 일본의 대만 식민화 전쟁 그리고 중일 전쟁 등이 그러했다 또한 지역내 패권전쟁의 모습도 보였다 쟁과
세기 초의 러일전
년대 초반의 태평양전쟁이 그러했다 난징학살을 포함한 제노사이드적 전
쟁범죄는 그러한 사회간 폭력의 형태로 나타났다 반면에 전후의 대분단체제에서 는 사회간 침략전쟁은 찾아보기 어렵다 미국의 베트남전쟁을 약소사회에 대한 침 략전쟁으로 볼 측면이 있으나 형태상으로는 내전적 상황에 편승한 군사개입이었 다 대분단체제에서 모든 전쟁은 내전적 상황과 결합해 있었다 강대국들이 전쟁에 개입하지만 사회 내적 혹은 민족 내적인 이데올로기 갈등의 폭력화와 연계되면서 그 개입이 이루어진다 전쟁도 전쟁범죄도 강대국의 군사개입도 모두 식민주의적 인 사회간 갈등의 형식으로서가 아니라 이념 갈등을 주요 요소의 하나로 내포한 사회 내적인 분쟁의 조건과 결합하여 전개된다 어떤 의미에서는 대분단체제에서 는 제국주의적 폭력이 사회 내적 이념 갈등에 대한 개입이라는 형식 속에 은폐되 었다고도 할 수 있다 어떻든 강대국 간의 긴장과 대립은 그들 간의 직접적인 총 력전
으로는 발전하지 않았다 대분단 기축의 긴장은 소분단체제들과의
연계 속에서 폭력적인 형태를 취했다 그런 의미에서 전후 동아시아질서에서 대부분의 사회들은 내전과 그 상처를 안
미소 냉전과 중국 내전은 동아시아의 식민주의 해체에 이중적인 영향이 있었다 미국을 포함한 서방은 소 련과 중국이 주창하는 민족해방 이념과의 경쟁으로 약소국 주권국가 체제 약소사회들에 대해서도 베스트 팔렌적 주권국가의 형식적 원리를 적용하는 질서 를 앞당긴다 반면에 소련과의 냉전이 발전하면서 소련 의 영향력과 지역 내 공산주의 세력의 억압을 위해서 유럽 식민주의의 부활을 일정하게 지원했다 이로써 특히 동남아에서 유럽 식민주의의 완전한 해체는 지연되었다 전후 동남아시아에서 유럽 식민주의의 작동 에 대해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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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채로 있다 중국 한국 베트남과 같이 형식에 있어서도 분단체제에 있거나 분 단을 경험한 사회들뿐 아니라 필리핀 인도네시아 캄보디아도 내전적인 상황을 거쳤다 중국의 힘과 미국의 힘이 부딪치며 교착상태를 이룬 곳에서는 그 상황이 소분단체제로 굳어졌다 미국의 힘이 일방적으로 미치는 사회들에서는 사회 내적 갈등의 위태로운 균형 위에 유지되던 중립주의 정권이 미국이 조종한 군사쿠데타 로 무너지면서 우파 독재에 의한 광범한 학살이 자행되기도 했다 인도네시아
역
시 미국이 후원한 군부 쿠데타가 중립정권을 전복시켜 초래된 혼란과 내전 속에 서 유토피안 좌파가 집권하고 이어서 전례 없는 이념형 제노사이드 혹은 폴리티 사이드 가 전개된 사회도 있다 캄보디아
필리핀의 전후는 미국의 질서 속에 편입
되어 있으면서도 존재한 내전적 상황 속에서 강성 권위주의와 허약하고 무능한 과두정적 민주주의 사이에서 진동해왔다 이처럼 전후 동아시아질서를 특징짓는 일련의 사회 내적 폭력의 상황은 제국체 제에서 경험한 동아시아 사회들 내부에서 축적된 외세의 지배 혹은 압박과 연결 되어 구성된 사회 내적 긴장들과 깊은 관련이 있다 구래의 전통적 질서나 외세가 구축한 질서에 안주하거나 적응한 세력과 외세와 기성의 체제를 거부하고 대안의 질서를 추구하는 세력들 사이에 존재하고 발전한 내면적인 긴장은 전후 미소 간 냉전 그리고 중국 요인의 결정적 매개에 의해 구성된 대분단체제와 얽혔다 그로 써 외세의 개입과 사회 내적 긴장이 불가분하게 얽힌 전쟁과 폭력의 시대를 겪어 야 했다 여기에서 중국 내전과 그 결과는 다른 동아시아 사회들에게 깊은 정치 적 군사적 그리고 이념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중국 내전 은 다른 동아시아 사회들 자신 안에서 반세기에 걸친 제국체제의 역사를 거치는 동안 형성된 사회 내적 긴장 전반을 비추어주는 거울이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소련과 동구 공산권의 붕괴로 미소 냉전이 사라지면서 동아시아에도 많은 변화 가 있었다 그러나 미소 냉전과 구분되는 전후 동아시아 질서를 구성하는 주요 요소들에 대한 보다 포괄적인 혹은 총체적인 인식을 담아내는 동시에 전후 유럽 질서와 구분되는 동아시아 구체적인
고유성 에 주목하기 위해
제시한 개념으로서의 동아시아 대분단체제 는 일정한 변화와 함께 연속성을 띠고 있다 무엇보다 동아시아는 냉전과 탈냉전 사이의 불연속보다는 냉전기와 탈냉전 기를 관통하는 역사적 연속성이 못지않게 커 보였다 세계화와 경제통합에 의한 경제적 상호의존의 시대에도 지속되는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역사적 연속성의 구 조는 무엇인가 그 연속성의 실체를 개념화하는 것이 전후 동아시아 질서의 고유 한 실체에 접근하는 열쇠가 아닐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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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동아시아 질서의 고유성 전후 유럽은 냉전에도 불구하고 존 루이스 개디스의 말대로 의 시대였다
반면에 동아시아의 전후
긴 평화
는 중국 내전 한국전쟁 그리
고 베트남전쟁을 포함한 크고 작은 군사적 충돌로 점철된 열전과 냉전의 범벅이 었다 제국체제 안에서 발전한 파시즘과 전쟁이 수반한 야만과 폭력은 동아시아에서 보다 유럽에서 더 체계적이고 광범하게 자행되었다 그러나 그 상처가 전후 질서 에서 남긴 역사적 유산은 유럽이 아닌 동아시아에서 더 심각했다 오늘에 이르기 까지 그 차이는 여전하다 유럽은 경제와 외교안보에서 모두 공동체를 지향하고 있지만 동아시아에게 공동체 는 여전히 신기루와 같다 전후 동아시아 질서는 유럽질서와 달리 냉전 탈냉전을 넘어 고유한 연속성이 있 다 이것을 어떻게 개념화할 것인가 전후 세계에 대한 국제정치학의 지배적 개념 틀은 냉전 탈냉전 담론이다 이것으로는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본질을 포착하기 어렵다
동아시아 대분단체제 론은 냉전 탈냉전의 이분법을 넘어 전후에서 오늘까
지 지속되는 이 질서의 연속성을 개념화하려는 한 시도이다 냉전기와 탈냉전기의 동아시아 질서는 물론 크게 다르다 중국이 자본주의 세계 경제에 통합된 후 경제적 상호의존은 심화되었고 지역내 국제제도적 변화도 진행 되었다 그러나 동아시아 대분단선 을 따라 존재하는 긴장은 여전히 뿌리 깊다 탈냉전에도 불구하고 미 일동맹 주축의 동아시아 안보질서는 쇠퇴하기는커녕 갱 신되고 재활성화 되어왔다
년대 들어서 가시화된 중국의 부상은 동아시아질
서의 지정학적 긴장을 더욱 촉진했다
년대 탈냉전과 더불어 동아시아 국가들
간의 역사논쟁도 활성화되었다 이 모든 것은 어떻게 서로 연관되는가 그 구조를 부각하여 개념화할 필요가 있었다 또한 동아시아 질서 전체와 그 일부인 한반도는 어떻게 상호작용하는가 그 상 호작용은 어떤 지속적 패턴을 갖고 있는가 이것을 개념화할 필요가 있었다 통합 과 상호의존의 외관 뒤에 도사린 동아시아적 갈등의 함정에 한반도는 가장 취약 하다 그만큼 치열한 체계적 인식의 필요성에 직면해 왔다
동아시아 대분단체제
라는 개념은 이 물음에 나름의 답을 모색하고자 한 것이다 냉전 혹은 냉전체제 라는 개념은 그 안에 많은 요소들을 포괄하는 것은 사실 이지만 전후 미소
관계가 다른 모든 요소들을 지배하고 결정지었다는 관념
이 그 핵심을 이루는 개념인 것 또한 사실이다 그래서 냉전은 탈냉전과 마찬가지 로 미소관계가 개념적 헤게모니를 장악한 가운데 다른 모든 인과관계에 열쇠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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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을 해온 개념이다 동아시아 대분단체제론은 전후 동아시아질서를 해명함에 있 어서 미소관계와 냉전 탈냉전 개념이 헤게모니적 위치를 장악해온 그 간의 담론 체계를 일정하게 극복하고자 한 시도였다
냉전 탈냉전 개념의 효용과 한계 냉전 탈냉전이라는 대단히 일반화된 이분법적 개념을 넘어서서 동아시아 질서 의 전체상에 대한 새로운 개념화의 필요성을 필자가 절실하게 느끼게 된 것은 무 엇보다 냉전 개념 자체의 한계에 대한 의식이었다 동아시아 질서에 지속되는 갈 등을 많은 경우 냉전의 잔재 혹은 탈냉전의 지체 라고 설명한다 동아시아 질서 의 성격을 유럽과 마찬가지로 냉전 탈냉전의 개념틀에서 설명해내는 것인데 이 는 동아시아 질서에 관한 우리의 개념화의 빈곤을 반영한다 냉전 이라는 개념은 두 가지의 성질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포괄성과 환원성이 다 많은 현상을 충분히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은 포괄적 의미로 흔히 사용된다 그러나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미소를 양극으로 하는 정치군사적 및 이념적 긴 장 을 의미하는 다분히 환원주의적인 개념인 경우가 또한 많다 이러한 포괄성과 환원성은 많은 경우 개념 적용의 무차별성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지나치게 포괄적 이거나 지나치게 환원적이어서 이 개념을 사용하는 사람 저마다 각자의 정의를 먼저 내려야만 하는 상황이 되곤 한다 냉전 이 미소 양자관계가 개념적 헤게모니를 장악한 모든 역사적 인과관계 해 명의 열쇠를 쥔 개념이라는 사실은 그간의 냉전 연구에서 전형적으로 냉전의 기 원에
대한
세
가지
시각
즉
전통주의
수정주의
그리고
탈수정주의
의 논리적 골격에서도 드러난다 전통주의는 냉전 발전의 주된 책임을 소련의 팽창주의와 이에 대한 미국의 대응으로서의 봉쇄정책으로 설명하 고 수정주의는 주로 미국 측에 책임을 묻는다 탈수정주의는 일종의 죄수의 딜레 마라는 개념틀에서 양자의 절충을 모색하는 성격을 띤다
기본적인 공통점은 미
소 중 어느 하나 혹은 양자 간 상호작용의 양상을 냉전의 원인에 관한 핵심적 요 소로 본다는 점이다 그처럼 냉전 개념은 포괄적인 것 같으면서도 매우 흔하게 미소 양극체제적 긴 장으로 환원되는 성격을 지니는 탓으로 전후 동아시아 질서의 기원과 형성과정 그리고 그 실체를 규명하는데 중요한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전후 동아시아 질서의 향방을 결정한 요인으로서 중국이 가진 역할과 의의를 충 분히 주목하는 개념화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또한 전전과 전후를 관통하는 동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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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의 지정학적 구조의 고유성이 존재하며 계속 작동하고 있다고 할 때 냉전이라 는 용어로는 그러한 지정학적 차원을 포착하기 어렵다 뿐만 아니라 지역질서의 사회들 사이의 역사적 상처 와 같은 역사심리적 요인이 유럽의 전후와 동아시아 의 전후에서 작용하는 방식은 다른데 이 역시 냉전 탈냉전 개념틀로는 포괄하기 어렵다 미소 양자관계 혹은 정치사회적 체제와 이념의 차원으로 환원되기 쉬운 탓이다 냉전 이란 용어는 조지 오웰 신념 사회구조와 함께 이들
이
년에 소련과 미국의 세계관
차 대전 종전 후에 두 나라 사이에서 전개될 선포
되지 않은 전쟁상태
를 비판하기 위해 처음 사용했다
년대 말에는 역사가들이 이 용어를 채택하여 미국 및 영국과 소련 사이의 전 시 동맹의 붕괴를 해명하려 노력하면서 그 개념이 널리 쓰이게 된다 그 후 첫 년 동안 이 개념의 주요 사용자는 미국의 역사가들이었고 이들은 소련 스탈린이 차 대전 말기부터 서방에 대해 채택한 대결적인 정책들을 가리키기 위해서 냉전 용어를 채택했다
미국과 영국을 핵심으로 한 서방에 대해 소련이 냉전 을 전개
했고 서방은 자신의 가치체계를 방어하기 위해 응전하게 되었다는 취지였다 요 컨대 냉전은 처음 한동안은 미국 정통파 역사가들의 미국 중심적 세계인식과 불 가분하게 얽힌 개념이었다 베트남전쟁 이후 서방에서 래티컬한 역사가들이 등장하여 냉전의 원동력에 대 한 전혀 다른 해석을 제기하기에 이른다 이들에게는 미국의 반집산주의적 어젠다 가 최소한 소련 못지않게 냉전을 촉발하고 영속화시킨 원인이었다 이로써 냉전 개념은 소련이라는 특정한 국가 혹은 지도자의 정책에 대한 일방적인 비판으로서 가 아니라 전지구적 시스템으로서의 의미를 더 강하게 띠게 되었고 그럼으로써 조지 오웰이 처음 그 용어를 사용했을 때의 의미를 회복하게 된 것이라고 오드 아르네 베스타는 설명한다
문제는 글로벌 시스템으로서 냉전을 논할 때 글로벌
하거나 지역적인 모든 문제들을 미소 양자관계의 연장 혹은 그 투영으로서 사고 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사실이다 멜빈 레플러는 오늘날 국제적인 냉전연구에서 일반적인 냉전 의 개념에 대한 정의의 전범
을 보여준다 그는 냉전을
보편주의적인 이데올로기와 갈등하
는 정치경제체제를 가진 두 개의 강력한 국가들 사이의 대립으로 특징지어지는 복잡한 현상 으로 규정하고 그러한 대립이 독일과 유럽의 분단 과 주변부에서의 대립 그리고 전략적 군비경쟁을 초래했다 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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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대 이래의 신냉전사 연구가 소련과 중국의 체제 내적 요인들
특히 공산권 이데올로기와 지도자 개인들의 성격에 초점을 맞추는데 비해서 레플 러는 이를 비판하고 보다 포괄적인 연구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학자이다 그러나 그의 개념정의에서도 냉전은 미소 간의 대립적인 양자관계가 핵심을 이루고 있으 며 동아시아의 냉전은 그러한 미소관계가 주변부에 미친 영향의 한 측면으로 파 악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베스타는
년에 발표한 글에서 냉전 연구에서 미소 양자관계에 집중하는
상태에서 벗어날 필요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소 양자관계였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고
그만큼 냉전 연구에서 핵심은 미
냉전기 전반에 걸쳐서 냉전 개념의
중심에 미소 양자관계가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이 글의 서두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필자는 과
동아시아에서 미소 냉전의 시작
전후 동아시아질서의 구축 을 구분하고 분리하여 파악한다 필자는 동아시아
미소 냉전의 본격적인 시작은
년에 걸친 시기에 진행되었다고 본다 그
러나 전후 동아시아질서의 본질은 미소 냉전이 아니라 중국대륙과 미일동맹 사이 의 대분단 기축의 대립을 골격으로 하는 동아시아 대분단체제에 있다고 본다 그 체제 구성의 뿌리는 중국 내전과 그 결과로서의 신중국 성립 직후인 서
년 말에
년 초에 걸친 시기 미국과 중국 관계의 향방이었다고 판단한다
존 루이스 개디스가 동아시아 냉전이 시작한 시점을 한국전쟁으로 잡은데 대 해
토마스 패터슨은
개입을 중시했다
년 기간의 중국 내전 기간의 미국의 대륙에 대한
이로써 그는 중미 갈등의 뿌리 깊음과 그 안에서 미국의 역할
의 중요성을 강조함으로써 개디스의 논리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었다 마이클 섈 러는 또 다른 차원에서 개디스류의 동아시아 냉전론에 대한 비판적 서술체계를 제시했다 개디스가 동아시아 냉전의 본격화를 그 결정적 시점은
년이었다
년
월로 잡았다면 섈러에게
미국이 일본을 중심으로 동아시아 전반에서 공
산주의세력의 승리가 예상되는 아시아대륙을 고립시키고 봉쇄하기 위한 안보질서 를 구상하고 그 체계 속에서 대륙의 일부인 동남아 인도차이나에 대한 정치군사 적 개입을 본격화하기 시작하고 있었으며 그러한 구상이 본격화된 시점이 이라고 섈러는 인식한다
년
중국 내전이 매듭지어져 하나로 통일된 중국의 대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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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모습을 드러내기 전에 아시아 전반에서 미국의 주도로 냉전의 전선이 구축 되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미소간의 대립적 관계는 물론 전후 냉전체제의 핵심인 것이 사실이며 그 냉전 이 동아시아질서에 깊은 영향을 미쳤고 전후 동아시아도 결국 그 냉전체제에 편 입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레플러가 요약한대로 냉전을 미소 양국을 중심에 둔 공 산주의 자본주의라는 정치경제적 체제와 이념들 사이의 대결적 상황이라는 의미 로 이해할 경우에도 전후 동아시아 역시 분명 미소가 주도하는 냉전체제에 편입 되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러한 인정에 기초하여 곧바로 전후 동아시아 질서를 단순히 냉전체제 로 규정하는데 만족하게 되면 이 질서의 기원과 존재양식에 대 해 중요한 점들을 놓치게 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첫째 전후 동아시아 질서의 기원과 형성 그리고 존재양식에 대하여 그 인과관 계를 미소관계 중심으로 환원하는 결과를 낳는다 전후 동아시아질서의 냉전체제 편입 자체도 미소관계의 작용이 아니라 중국 내전을 거치면서 결론에 도달한 중 국사회의 선택이 결정적 매개변수였다는 사실은 흔히 간과될 수 있다 중국사회의 그 선택이 한국전쟁을 포함하여 그 후 동아시아 질서의 향방에 결정적 변수로 작 용한다는 점이 충분히 주목받지 못하게 된다 둘째 전후 유럽질서와 동아시아질서의 작동체계의 차이에 대해서 충분히 주의 를 기울이지 않게 된다 전후 동아시아질서가 유럽질서와 달리 가진 주요한 고유 성의 한 측면은 이중적인 역사적 연속성의 차원이다
세기 전반기의 제국체제와
전후 냉전기 동아시아 질서 사이의 연속성이 그 하나이고 냉전기와 탈냉전기의 동아시아에 존재하는 연속성이 다른 하나이다 냉전 탈냉전이라는 개념적 틀은 동아시아에 존재하는 그러한 연속성을 개념적으로 포착하기 어렵다 냉전 개념은 유럽과 동아시아를 포함한 세계질서에서 그 이전 시기와의 수직적 역사적 혹은 통시적 단절 그리고 유럽과 동아시아 모두에서의 수평적 공시적 동질성을 부각 시킨다 동아시아 대분단체제론은 동아시아에서는 그 이전 동아시아 제국체제와의 사이의 수직적 역사적 통시적 절
연속성 유럽의 경우는 전전 시기와의 역사적 단
그리고 냉전 시기 유럽과 동아시아의 수평적 공시적 차별성을 주목하여 부각
시키는 성격을 가진다 셋째
냉전 은 나라들 사이의 정치사회적 체제와 이념의 이질성에 초점을 맞춘
개념이다 지역질서 내부의 지정학적인 역사적 성격이나 역사심리적 차원 등은 논 의의 중심에서 제외되거나 부차화된다 즉 긴장구조를 해명함에 있어서 정치사회 적 체제와 이념의 차원으로 환원시키는 성격을 내포한 개념이다 그러나 전후 동 아시아질서를 해명함에 있어서는 이 지역 내부의 지정학적인 역사적 성격과 역사 심리적 차원의 의의와 그 연속성이 강하다는 점을 필자는 주목해야 한다고 말해 왔는데 이런 측면에 대해서 냉전체제 혹은 냉전 탈냉전 용어들은 중요한 개념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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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계를 갖는다 이 점을 의식하면서 동아시아 대분단체제론은 동아시아 지역질서 의 구체성과 고유성을 설명하기 위해서 정치사회적 체제와 이념의 차원과 함께 지정학적 차원 그리고 역사심리적 차원이라는 적어도 세 가지의 주요 요소들을 통합적으로 고려하는 방식을 모색하려 하였다
동아시아 대분단체제 개념화의 궤적 위와 같은 문제의식들로부터 전후 동아시아 질서의 역사적 성격을 냉전 탈냉전 의 문제와 전적으로 분리하지 않으면서도 보다 총체적이고 풍부한 방식으로 개념 화할 방법은 없을까 하는 것이 필자의 고민이었다 전후 동아시아 질서의 전체상 에 대한 개념화를 위한 필자의 시도는 다른 한편으로는 전후뿐만 아니라 근대 동 아시아 그리고 더 나아가 전통시대
천년의 동아시아 질서의 전체상에 대한 재개
념화를 포함한 고대에서 현재에 이르는 동아시아 질서의 전체상에 대한 필자 나 름의 개념화 추구의 일환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역시
년대 말에서
년대
초에 이르는 시기에 시작된 모색이었다 필자가 전후 동아시아 질서의 전체상의 개념화를 대분단체제 라는 개념을 통해 서 시도하게 되었지만 그것은 한국 학계에 이미 통용되고 있던 분단체제 라는 개념이 존재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기존의 분단체제 개념
은 한반도를 대상으로 하고 있었고 그 개념을
년 이래 가장 본격적으로 활용
한 백낙청 교수의 경우 한반도의 분단체제를 월러스틴의 세계체제 개념을 빌어서 체계화를 시도했다고 생각된다
동아시아 라는 시공간에 대한 개념적 매개가
없는 점이 필자에게는 공백으로 느껴졌었다 필자는 한반도의 분단 문제는 세계체 제적인 차원에서의 해명도 필요하지만 보다 가깝게는 동아시아의 지역질서의 균 열구조와 더 직접적인 개념적 연결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동아시아질서와의 연결 내지는 매개의 개념화를 빠뜨리면 세계체제론은 공허해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 다 필자의 이러한 문제의식은
년대 말 이후 필자가 제기한 아시아적 전망 의
필요성에 대한 논의와 연결되어 있었다
년의 글에서 필자는 우리의 국제정치
송건호 강만길 편 한국민족주의론 창작과비평사 편자들은 서문 책 머리에 에서 분단체 제 개념을 회에 걸쳐 사용했다 서중석도 같은 책에 실린 논문 민족사학과 민족주의 에서 분단체제 라는 개념을 사용했다 그 이듬해에 출간된 한국민족주의론 송건호 강만길 편 창작과 비평사 의 책을 내면서 에서도 편자들은 차례에 걸쳐서 분단체제 개념을 사용했다 같은 책에 실린 이순권의 논문 역사교육과 민족주의 도 학생들에 대한 설문지에서 분단체제 개념을 사용했다 적어도 년대 초에는 분단체제 개념이 한국 지식인사회에서 일반화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 다 백낙청 분단체제 변혁의 공부길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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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이
아시아적 전망을 지향해야 한다 고 주장했는데 그것은 한편으로
반도적 시각을 벗어나는 것 을 의미한 것인 동시에 중심의 아시아전략
혹은
년의 논문에서
미국이 주도하는 동맹정치
미국의 아시아인식의 틀 로부터 자율적인
의 아시아인식 을 지향한다는 것을 뜻했다
좁은 한 우리 자신
같은 문제의식의 연장선에서 필자는
우리가 불가피하게 개발해나가야 할 관점 을 아시아적 전망
이라는 개념으로 요약한 바 있음을 상기시키면서 이렇게 밝혔다
분단과 한국전
쟁 이래 우리 국제정치학이 전개해온 전쟁과 평화에 대한 논의는 한편으로 한반 도적인 집중이었던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의 어깨에 얹혀진 채 세계로 건 너뛴 보편적 논의로 구성되곤 하였다 여기에는 우리 한반도의 지정학을 보다 직 접적으로 연결하는 동아시아질서에 대한 우리 자신의 전망 즉 아시아적 전망은 생략되었거나 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필자가 처음부터 동아시아 대분단체제 라는 개념을 채택한 것은 아니었다 세미 나 등에서 발표하는 형식으로 이 문제의식을 동아시아의 분단구조 라는 식으로 표현한 것은
년대 말부터였다고 기억된다
동아시아질서의 차이를 주목하면서 동아시아의
년의 한 논문에서 유럽질서와 지역내 균열의 구조적 지속 을
거론한 것이 출판된 글의 형태로는 처음이었던 것 같다
유럽의 북대서양조약기
구와 동아시아 미일동맹은 미국의 동일한 세계전략에서 비롯된 것 이지만 그것들 이 두 지역에서 매우 다른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 것이었다 의 나토는
유럽
차대전시 서로 적대적이었던 독일과 프랑스 영국 및 이탈리아 등을
하나로 묶어 하나의 안보공동체로 만들어낸 의미 가 있었지만
반면에 동아시아
에서 미국 주도의 군사동맹체제는 동아시아의 두 핵심국가들인 일본과 중국을 동 맹체제의 안과 밖으로 분할시키고 그 상태를 지속시키는 의미 를 갖고 있다고 지 적했다 결국 만
유럽에서 나토는 잠재적 적대국들 사이의 정치적 통합 을 의미하지
동아시아의 미국 주도의 미일동맹은 이 지역내 균열의 구조적 지속을 의미하
는 측면이 있다 고 지적했다 년의 글에서는 아시아적 분단질서 혹은 동아시아 분단체제 라는 용어들을 사용했다
그러나 백낙청 교수의 평론을 포함한 기존 학문적 담론에서 이미 한
반도의 분단구조를 가리켜 그 개념을 사용하고 있는 점을 고려할 때 분단체제 라 는 개념을 동아시아 질서에 그대로 채용하는 것은 부적절하게 생각되었다 동아시
이삼성
세기 미국과
한반도
오기평 편저
세기 미국패권과
국제질서
오름
이삼성 이삼성 미국의 동아시아 동맹정치와 한반도 평화 미일 한미동맹 강화의 역기능과 그 대안모색을 위한 시론 호남정치학회보 제 집 같은 해 전북 익산에서 한국정치학회 및 호남정치학회 공동주최의 학술회의에서 발표한 글이 실린 것 졸고 한반도의 평화에서 동아시아 공동안보로 미국 미사일 방어 추진의 문제점과 동북아 비핵지대화 의 시대적 요청 이삼성・정욱식 지음 한반도의 선택 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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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 갖는 공간적 규모와 차이를 고려한 개념적 차별화를 모색하면서 동아시아 대분단 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게 된 것은
년의 논문에서였다
이후 대분단의
구조적 성격에 대한 체계적 이론화를 모색하면서 동아시아라는 공간의 스케일에 어울리는 대분단 이라는 용어와 구조적 체계성을 표현하는데 적합해 보인 체제 라는 단어를 결합하여 대분단체제 라는 개념을 만든 것이었다
년 이후의 논
문들에서 동아시아 대분단체제 라는 개념을 채택하였다 이런 모색 과정에 비추어보면
대분단체제 는 분단체제 개념에 대 라는 접두어
이삼성 한미동맹의 유연화 를 위한 제언 국가전략 제 권 호 이 논문에서 는 동아시아의 역사심리적 대분단상태 또는 동아시아 대분단구조 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졸고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성격과 미국의 동아시아전략 동아시아 대분단체제 의 구조와 그 함의 년 한국정치학회 하계학술회의 대전 호텔 스파피아 년 월 일 자료집 면 졸 고 동아시아 대분단체제와 공동체 사이에서 민주주의와 인권 제 권 호 졸고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성격에 관한 일고 대분단체제 로 본 동아시아 한국과 국제정치 제 권 제 호 졸고 동아시아 질서의 시대구분 중화질서의 형성과 그 내적 구분을 중심으로 한국정치학회 년 연례학술회의 년 월 일 졸고 동아시아 대분단체제를 넘어서 제 주 오키나와 타이완의 동아시아 평화벨트를 상상하기 참여연대 평화군축센터 주최 대안적 동북아 평 화구상과 평화국가 만들기 국가인권위원회 층 배움터 년 월 일 졸고 세기 동아시아의 지정학 미국의 동아태지역 해양패권과 중미관계 국가전략 제 권 호 년 봄 동아시아 대분단체제 의 영문 표현은 이하의 글들을 통하여 혹은 등으로 제시해왔다
동아시아 대분단체제론 에 기초한 비교적 최근의 필자의 발표들은 다음을 포함하며 오늘의 발표는 이 하의 발표들에 기초하고 있어서 내용이 중복적임을 밝혀둡니다 한반도와 동아시아 평화와 민주주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주최 아시아의 평화 개발 민주주의 서울올림픽 파크텔 년 월 일 이 시기 동아시아의 평화에 대하여 김근태재단 주기 학술세미나 한 반도 정세와 일본의 우경화 그리고 동아시아 평화 한국언론재단 프레스센터 년 월 일 발표문 은 동일 제목으로 프레시안 에 전재 년 월 일 분단체제 개념 동아시아에 적용하려면 대 분단체제 가 적절 한겨레 기고문 년 월 일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거시적 개념화 천하체 제 제국체제 그리고 대분단체제 한국정치학회 년 춘계학술회의 목포대학교 사회과학관 년 월 일 천하체제 제국체제 대분단체제 그리고 한반도 연세대 국학연구원 주최 심포지엄 힘 의 동학 틈 의 지정학 동아시아 질서 변동의 역사와 전망 연세대 학술정보원 층 세미나실 년 월 일 전후 동아시아 질서의 변화와 연속성 동아시아 대분단체제 론의 시각에서 한국국제 정치학회 하계학술회의 제국질서와 국제질서 속의 조선과 한국 세션 속초 마레몬스호텔 년 월 일 자료집 동아시아 대분단체제와 출구 모색의 방향 한겨레 부산 국제심포지 엄 제 회 아시아가 주도하는 새로운 아시아는 가능한가 파라다이스호텔 부산 년 월 일 자료집 동아시아의 질서와 평화 제주 평화의 섬 지정 주년 평화워크숍 동북아 한반도 그리고 제주의 년 제주는 평화의 섬으로 남을 것인가 초청강연 제주도의회 도민의 방 년 월 일 동아시아의 질서와 평화 천하체제 제국체제 그리고 대분단체제 네이버문화재단 민음사 주최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밖 안국빌딩 신관 층 스테이지 년 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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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추가한 것이라기보다는 대분단 과 체제 의 합성개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어 떻든 최종적으로 대분단체제 개념으로 귀착한 것은 한반도의 분단체제 를 구성 하는 분단의 구조나 긴장의 차원들과는 다른 구조와 차원들이 동아시아 지역질서 의 균열구조에 작동하고 있다는 점도 고려한 것이었다 동아시아 대분단체제는 한반도 분단체제 와 달리 분단 구조가 중층적일 뿐 아니라 긴장의 구성요소 역 시 한반도 분단체제의 경우와는 또 다른 다차원성 즉 정치사회적 체제와 이념의 차원뿐 아니라 지정학적 차원과 역사심리적 차원 등과 같이 매우 다른 수준과 내 용의 분석적 개념화가 필수적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전후 동아시아 질서에 대한 전체적 개념화는 전통시대 와 근대 동아시아에 대한 필자 나름의 재개념화 작업과 맞물려 있는 것이었다 근대와 전통시대에 대한 개념화의 문제를 재정리하려고 한 것은 근대 특히
세
기 전반기의 제국체제가 전후 질서에서 유럽과는 유다르게 동아시아 대분단체제 에 깊은 유산을 남겼기 때문에 그 연속성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 다
왜 대분단체제 인가 이론적 전제 세계질서와 지역질서 초강대국과 차상위강대국 국제정치학에서 오늘날 핵심 주류로 통하는 구조 현실주의 시각은 국제질서의 성격을 판단할 때 주요 강대국의 수를 뜻하는 극성
을 중시한다 물론 그
것은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다 저마다 국 가와 사회는 역사적으로 확인되어온 지정학적 전통과 정체성이 있을 수 있다 적어도 부분적으로 그 영향을 받아 특히 지역 질서에서는 국가들 간에 갈등과 연 합의 구조가 일정한 지속성을 띨 수 있다 그 갈등과 연합의 구조는 특히 지역 질 서에서 중요한 위상을 갖는다 세계질서 전반에서는 초강대국의 숫자와 그들 사이 의 관계양식이 결정적일 수 있다 그러나 지역 질서의 경우는 그것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들
세계 수준의 권력분포에서 보면
이류 국가들
혹은
차상위 강대국
이 지역질서의 차원에서는 세계적 초강대국보다 더
결정적인 변수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지역질서의 구조를 이해하려면 그 지역을 구 졸저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 전통시대 동아시아 천년과 한반도 한길사 동아시아의 전 쟁과 평화 근대 동아시아와 말기조선의 시대구분과 역사인식 한길사 여기서 필자가 말하는 지정학적 구조 는 주요 정치체들의 지리적 배치 주요 정치체의 갈등・연합의 패턴 이데올로기 요소 포함 을 가리킨다 어떤 사회 혹은 국가의 지정학적 정체성 이란 그 사회가 처해 있는 지정학적 구조 그 사회 국가 의 지정학적 대전략 갈등과 연합에 관한 사유 및 선택의 장기적 패 턴 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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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하고 있는 차상위 강대국들이 초강대국들과 함께 어떻게 갈등하고 연합하면서 지역질서를 규정하고 있는가를 주목해야 한다 태평양전쟁 종결 즈음에 한반도에 그어진
선은 미소 냉전의 기원과 관련이
있지만 그 분단선을 고착화시키고 마침내는 한국전쟁의 발발로 나아가게 되는 것 은 중국 내전과 그 결과 라는 중국 내적 요인이 결정적인 요소였다
년 일본
이 항복한 시점의 중국에서 중국 공산당이 만주를 포함한 중국대륙 전체에 대한 지배자가 되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중국 내전의 결과는 대체로 년
월에서
년 초에 걸쳐 전개된 세 차례의 결정적인 전투 만주에서 중국 중
부 후아이아이에서 그리고 베이징 톈진 전투 에서 공산당의 승리를 통해서였다 이렇게 전개되는 중국 내전의 결과를 결정한 것은 미소관계 및 미소 간 힘의 역학이 아니었다 당시 공산당은 소련과 가깝고 국민당은 미국이 지원하고 있었 던 것은 사실이며 그런 의미에서 중국 내전은 미소 냉전과 깊은 관계가 있다 그 러나 중국 내전과 그 결과를 결정한 것은 미소관계도 미소 간 힘의 역학도 아니 다 내전이 본격화하기 전에 공산당은 국민당에 비해 현저히 열세였다 또한 국민 당에 대한 미국의 지원 규모는 공산당에 대한 소련의 지원규모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이 컸다 그런데 내전의 결과는 중국대륙 전체에 대한 공산당의 장악이었다 요컨대 중국의 향방을 결정한 것은 중국 사회 내적인 선택이었다 미소 냉전은 분명 그 배경의 하나였지만 그것은 오직 중국 사회의 선택이라는 결정적 매개를 통해서만 전후 동아시아질서와 한국의 운명에 영향을 미쳤다
미소 간 냉전의
존 루이스 개디스는 년에 쓴 글에서 그 이전까지 일반적인 냉전사 연구의 경향의 하나로 다음을 지 적했다 즉 미국과 소련을 초강대국 으로 규정하고 이 두 초강대국이 모든 다른 나라들의 행동을 결정할 수 있었다는 것 모든 영향력은 그 두 초강대국들로부터 더 작은 나라들로 중심에서 주변 으로 행사되는 것이었음을 당연시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말한다 신현실주의 종속이론 세계체제론은 매우 다른 성격을 가진 시각들이지만 그러한 전제에서는 동일했다는 것이다 그는 냉전 안에서 소련의 영향권 과 미국의 영향권 모두에서 상대적인 자율성의 지대 가 존재했다고 말한다 작은 나라들이 자주 초강대국들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위치에 있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서 개디 스는 냉전사 연구에서 흔히 간과된 차원의 하나로 지리 를 들었다 미소 대결 을 전지구적인 현상으로 우리는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냉전을 비켜간 지역들 이 항상 있었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로 개디스는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는 중국 에서 마오쩌둥이 승리하기 전까지 그리고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실질적으로 냉전에 편입되지 않았 다고 간주한다 그는 또 다른 예로 년대 초까지는 중동과 라틴아메리카에도 초강대국 경쟁이 이렇다 할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것을 거론했다 결국 지리 자체가 상대적 자율성의 지대를 가능 하게 했으며 초강대국들의 영향력은 모든 곳에서 강력하게 작동할 만큼 충분히 수퍼 이지 않았다는 것이 다
동아시아에서 중국 요인의 의의에 대한 논지에서 보면 개디스의 주장은 필자의 대분단체제론과 일맥상 통하는 바가 있다 그러나 중요한 차이가 있다 필자는 년 봄 이후 혹은 적어도 년 초 미국의 트 루만독트린 이후에는 동아시아에서도 분명 냉전이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고 판단한다 뿐만 아니라 더 근본적인 논점의 차이가 있다 냉전을 미소 양극 사이의 정치군사적 이념적 대결상태 로 정의하든 혹 은 더 넓은 의미로 서방과 공산권 사이의 정치군사적 이념적 대결 상태 로 정의하든 동아시아 전반과 함께 내전 기간의 중국도 냉전의 상황에 있었다고 할 수 있고 그런 의미에서 적어도 년 이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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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전은 대분단체제 원형의 성립과 한국전쟁의 발발에 필수적인 전제조건이었지만 충분조건은 아니었다 또 다른 필수조건이 있었고 이 두 번째의 필수조건과의 결 합에 의해 충분조건을 이루게 된다 그 두 번째의 다른 필수조건은 중국의 선택 즉 중국 내전에서의 공산당의 승리와 그 신중국과 미국의 관계의 향방이었던 것 이다
그래서 전후 동아시아에서 중국과 일본이 미소 간 냉전의 구조와 결합하
면서 지역질서를 규정해온 방식이 특히 그런 면에서 중요하다 필자는 이러한 중국 요인의 이론적 중요성을 설명하기 위해서
년의 논문에
서는 지역질서에서 미들파워 의 결정력이라는 문제를 부각시킨 바 있고 의 논문에서는 차상위강대국 혹은 중대국 의 개념을 얘기했다
년
세계질서는 초
강대국 및 그들 사이의 관계가 그 틀을 결정하지만 지역질서의 틀은 그 지역의 지리정치적 공간을 채우고 있는 차상위강대국들이 초강대국들과 어떤 갈등과 연 동아시아는 개디스 자신의 주장과 달리 이미 냉전 혹은 냉전체제에 편입되어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런데 이러한 의미의 냉전 혹은 냉전체제는 필자가 말하는 동아시아 대분단체제 개념과 다르다 대분단체 제 는 중국대륙 전체와 미일동맹이 지정학적 차원 정치사회적 체제와 이념의 차원 그리고 역사심리적 간 극의 차원에서 대분단의 기축을 구성하는 것을 전제한다 요컨대 개디스가 말하는 의미에서의 냉전은 그 자신의 주장과 달리 년이 아니라 적어도 년 내지 년에 이미 동아시아에 존재하고 있었지만 필자의 대분단체제 론은 년 신중국의 성립과 그 후 반년 이내에 고착된 미국과의 관계설정의 향방이 전후 동아시아질서의 틀을 결정했다는 논지이다 그리고 이러한 질서의 구성에 결정적인 첫 계기인 중국 내전과 그 결과는 미소 냉전의 영향을 받았으나 근본적으로는 중국 사회의 자기결정이었다는 사실을 강 조하는 것이다 이 점은 필자가 동아시아 대분단체제 론을 처음 제기할 때부터 그 역사적 형성 계기에 관련한 핵심 논지 의 하나였다 년의 논문 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전후시대는 물론 미 소관계의 영향을 받았으나 보다 결정적으로는 중국대륙에서의 내전이라는 아시아대륙 내면의 역사적 전 개 그리고 그 결과로서 탄생한 중국의 새로운 정치세력과 미국의 관계 특히 미국의 전략적 인식과 선택 에 의해서 결정되었다 아시아의 차상위 강대국이라고 할 중국과 전지구적 초강대국인 미국 간의 관계 즉 중미관계 가 중대변수로서 자리 잡고 있었다 일본은 물로 미국의 동맹네트워크의 일부였지 만 중국은 미소의 양극구조의 한쪽인 소련과 연결되어있으면서도 상당한 독립성을 갖고 있었다 그런 의 미에서 중국은 미소 양극질서에 편입되어있지 않은 독자성이 있었다 중국공산당이 년 통일을 이룩한 이후 미국과의 관계정상화를 진정으로 원하였는가는 아직도 치열한 논쟁의 소재로 남아있다 각주 이것 은 년 중국공산당의 대미 외교정상화의지를 부각시키는 터커 코언명제와 이에 대해 특히 최근 제기된 첸 지안 등의 반론 등으로 논쟁이 지속되고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분명한 것은 년 말 과 년 초 중국을 통일한 공산당정권을 미국은 소련이 지도하는 공산주의의 일부로 간주하고 외교적 승인을 거부하는 대중국 봉쇄정책을 선택했다는 점이다 중미관계의 이 같은 전개는 머지않아 한국전쟁에 서 미국과 중국이 격돌하는 결과를 낳는다 이삼성 다만 미국이 중국에 대한 외교승인 을 거부한 이유에 대해서는 훗날의 글에서는 일정한 수정을 가했다 이 점은 이 글의 동아시아 대분단체 제의 역사적 형성 부분에서 상술하였다 전후 동아시아에서 중국과 일본이 차상위 강대국에 불과하면서도 지역질서에서 결정적 변수가 된 데에는 적어도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지정학적 차원이다 아시아대륙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통일 중국은 그 영토와 인구의 규모 그리고 통일된 역사적 단위로서의 시간적 유구함과 문명의 깊이에서 갖는 거대성 이 중요한 원인이 된다 경제력과 군사력에서의 단순비교로 재단할 수 없는 차원이 있다 둘째 역사의식 의 차원이다 일본은 패전 후 미국에 점령당한 사회로서 미국의 하위 동맹파트너로 전락했지만 그 이전 의 제국체제 시기에 일본이 질서 중심부로서 존재한 사실과 바로 그 시기에 전통시대 문명의 중심으로서 의 중국에 일본이 가한 역사적 심리적 상처의 깊이 그리고 그것이 전후 동아시아 전반의 사이키 에 갖는 의미의 심중함에서 또한 그러하다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지정학적 권력의 투사는 일본열도와의 연대 없이는 지극히 제한적이고 취약할 수밖에 없는 점도 유의해야 한다 이삼성 제 절 지역 국제질서의 요소들 폴라리티와 미들파워 그리고 갈등 동맹의 구도 이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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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상위 강대국 중대국 들의 문제
합의 관계를 구성하느냐에 의하여 결정된다는 논지였다 지역 국제질서와 역사 및 역사의식의 차원 어떤 지역의 국가 사회들의 상호관계의 역사와 그에 대한 사람들의 역사의식은 그 지역 국제질서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서도 영향을 미친다 이것은
년대 이
래 구성주의 라는 이름 아래 국제정치 이론에서 유력해진 논의이다 하지만 그러 한 인식 자체는 결코 구성주의 학자들이 처음으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그 지역 사회들 사이의 관계의 과거와 현재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그 지역 미래 국제관 계에 깊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인식은 국가들 사이의 권력분포가 국제질서를 결정하는 데에 결정적이라는 현실주의 인식만큼이나 인류의 세계인식에서 유서 깊은 관점이다 어떻든 동아시아 대분단체제론은 역사와 역사의식이 미래의 전망 과 그 미래 속에서 사람들의 행위양식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아울러 역사와 역사인식의 문제는 사회들 사이의 집단적 기억의
정치화의 문제도 포함한다
기억의 정치
개념은 이 문제의
분석에 중요한 실마리의 하나를 제공할 수 있다 경제통합과 경제적 상호의존 심화의 갈등억제 기능의 한계 동아시아 대분단체제론은 경제적 상호의존이 이미 심화되고 있던
년대 말
이후의 시점에서 동아시아 질서에 존재하는 냉전 탈냉전을 넘어선 통시적 연속성 을 이해하기 위한 시도였다 경제적 상호의존의 심화 여부는 지역질서에 물론 깊 은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러한 경제적 교류협력과 상호침투의 심화에 의해서도 결코 해소되지는 않는 긴장 지속의 구조가 있다고 보고 그것이 무엇이 냐를 묻는 개념화이다 초국경적 교류 확대와 경제적 상호의존이 반드시 안보와 같은 다른 영역의 공동체 형성을 촉진하는 것이 아님은 멀리는
세기 전의 제 차
전후 동아시아에서 중국과 일본은 냉전시기에는 차상위 강대국들이었다 탈냉전 시기를 넘어 년대에 들어선 동아시아에서는 중국과 미국이 초강대국이라면 일본과 러시아는 차상위 강대국들이라 말할 수 있 을 것이다 알렉산더 웬트 등의 구성주의론이 국제질서에서 역사심리적 차원에 대한 이론적 지원 으로서 갖는 의미를 년의 논문에서 검토했다 행동의 상호작용과 그 인식이 국가들의 관계 즉 국제정치질서와 그 구성에 존재론적 의미를 갖는다는 인식은 결국 역사 와 역사의식 이 현재와 미래의 국제질서의 구성에 미치는 영향을 주장하는 것으로 수렴된다 그래서 웬트 등의 구성주의는 근본적으로 현재의 상황에 대한 행위자들의 인식의 틀을 과거 가 어떻게 결정하는가를 주목하는 관점이다 졸고 특히 국제질서와 역사 및 역사인식 기억의 정치 란 집단적 기억 의 처리과정의 정치적 성격을 주목하는 개념이다 집단기 억의 생산 유통 증폭 폐기 망각 등이 모두 정치적 과정의 소산이라는 성격을 갖는다고 보는 것이다 필 자는 년 기억의 정치 개념을 한국 학계에 소개한 바 있다 졸저 세기의 문명과 야만 전쟁과 평 화 인간의 비극에 관한 정치적 성찰 한길사 특히 세기 제노사이드와 기억의 정 치 한국전쟁과 충북 영동 그리고 기억의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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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대전 가장 최근에는 지난
년의 동아시아 국제관계가 말해준다
경제통합과 경제적 상호의존 심화가 사회들 사이의 갈등의 폭력화를 억제할 가 능성과 그 한계에 대한 논의는 크게 두 가지 내용을 가질 수 있다 하나는 경제통 합 이외의 다른 요인들과 그들 사이의 상호연계성이 경제통합에도 불구하고 긴장 을 지속시키는 현상에 대한 개념화이다 동아시아 대분단체제론에서는 지정학적 차원 정치사회적 체제와 이념의 차원 그리고 역사심리적 차원 등 셋을 기본개념 으로 하여 그들 사이의 상호작용성을 개념화하려 했다 다른 하나는 경제통합과 상호의존 자체가 사회들 사이의 갈등에 미치는 이중적 관계이다 근현대사는 경제 통합 혹은 시장통합 내지 세계화가 나라들 사이의 갈등을 억제하기도 하지만 갈 등을 증폭시키는 장치로 작동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대분단체제론은 그 이중성을 주목한다 체제 란 무엇인가의 문제 동아시아 대분단의 구조를 질서 가 아닌 체제 로 개념화한 것은 질서라는 개념 은 그것을 구성하는 인자들과 그 인자들 사이에 지속성 있게 존재하는 상호작용 패턴을 강조하는 성격이 약하기 때문이다
체제 는 그것을 구성하는 인자들 사이
의 뚜렷하고 체계적으로 존재하는 지속적인 상호작용 패턴을 더 주목하는 개념이 다 그래서 어떤 질서를 체제 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작업이 필요해진다 먼저 체제의 전체를 구성하는 인자들을 개념적으로 명확히 해야 하고 이에 바탕 하여 그 인자들 사이의 지속성 있는 상호작용 패턴의 존재를 밝혀야 한다 대분단체제론에서 다루는 주요 의제 필자가
년대 중엽 이래 발표한 동아시아 대분단체제에 관한 글들을 통해서
세계화와 경제적 상호의존 심화가 전쟁과 평화에 부정적 기능을 하는 방식은 크게 네 가지를 우선 지적 할 수 있다 첫째 레닌이 지적한 바 있는 국가들 간의 불균등발전 의 문제이다 시장통 합은 국가들 간의 불균등발전을 촉진한다 급속한 불균등발전은 국가들 사이의 역학관계 변동을 가속화시 켜서 기존의 국제질서에 대한 수정을 추구하는 신흥세력과 현상유지세력 사이의 갈등을 심화시킨다 세 기 말 시작된 시장과 금융의 세계화 속에서 급속히 성장한 독일과 영국 및 프랑스 사이의 세력균형 변동 이 차대전의 원인의 하나로 꼽힌다 둘째 세계시장의 실패 혹은 오작동의 문제이다 어떤 요인으로 국제 시장이 붕괴하면 국가들 사이의 국제주의적 협력의 토대가 위축되거나 붕괴된다 년대의 세계 경제공 황과 국제주의의 해체는 차대전 발발의 주요 원인으로 꼽혀왔다 셋째 경제적 상호의존은 국가들이 군 비경쟁에 몰두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권력집단과 대중 모두 평화가 지속될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하는 경 향이 있다 그 결과 국가와 사회들은 군비통제를 위한 노력과 자원 투입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차대 전 발발 직전까지도 유럽 각국 정치지도자들은 경제적 상호의존이 전쟁을 막아줄 것이라는 생각을 많이 갖고 있었다 넷째 경제적 상호의존이 심화된 상황에서 국가들은 분쟁의 자기중심적 해결을 위한 벼랑끝 전략 의 유혹에 더 취약해질 수 있다 상대국이 경제적 이해관계 때문에 극단적 선택을 하지 않을 것이라 는 가정 하에 위험한 군사적 조치로 상대를 압박할 수 있고 그것이 끝내 분쟁의 폭력화를 불러올 수 있 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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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명하고자 노력해온 구체적인 문제들은 크게 다음 여덟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 다 전후 동아시아질서를 미소 냉전이라는 새로운 전지구적 현상에만 의거하지 않고 그 이전 시대 동아시아의 국제질서와의 연속성에 주목하는 것이기에
세기
전반기 동아시아질서로서 제국체제 에 대한 규명이 전제된다 대분단체제론이 냉전 탈냉전 개념틀과 갖는 이론적 긴장을 가급적 명료히 하 면서 그 논리적 구성단위들과 그 단위들 사이의 상호관계성을 명확히 개념화한다 여기에는 동아시아 대분단체제가 내포하는 분단의 중층성과 긴장구조의 다차원성 에 대한 개념화 그리고 중층적 분단 사이의 상호작용 및 긴장의 다차원적 요소들 사이의 결합방식에 대한 논의가 포함된다 이렇게 형성된 구조로서의 동아시아 대분단체제는 중국대륙의 동해안선을 따라 대분단선
으로 그려지는 지리적 형상화가 가능하다는 점을 아울러 유의
한다 대분단체제의 역사적 형성 계기들을 분명하게 개념화한다 여기에서 전후 동 아시아질서의 구축 요인으로서 중국 내전과 그 결과 신중국 성립을 전후한 시기 미중관계 그리고 한국전쟁에서 중국이라는 요인의 의미를 주목하여 밝힌다 냉전기 동아시아 대분단체제의 내면적 변화에 대해 주목한다 비타협적 국면 과 타협적 국면의 구분이 그것이다 이러한 구조와 그 안의 체계적 상호작용 패턴이 탈냉전 이후 변화와 함께 견 지하는 역사적 연속성을 밝힌다 여기에는 경제통합과 경제적 상호의존의 심화에 도 불구하고 갈등을 지속시키고 심지어 폭력화시킬 수 있는 요인들에 대한 역사 적 및 국제정치경제학적 논의도 포함된다 대분단체제가 내포한 역사적 연속성의 구조와 상호작용 패턴이 지금 현재 어 떠한 조건 속에 있는가를 분석하는 일이다 대분단 기축관계에서의 긴장 지속의 양상 소분단체제와 대분단선의 전략적 충돌 지점에서의 긴장의 양상들을 기축관 계와 소분단 사이의 상호작용 방식 그리고 긴장의
차원적 요소들 지정학적 긴
장 정치사회적 체제와 이념의 긴장 역사심리적 긴장 각각의 상황과 그들 사이 의 상호작용 양상을 분석하는 일이 포함된다 이 논의에는 동아시아 대분단선에 놓여있는 전략적 긴장의 지점들 오늘날은 남 중국해 타이완해협 센카쿠 댜오위다오 를 포함한 오키나와 해역 및 동중국해 그 리고 한반도 서해상과 휴전선의 상황에 대한 일정한 분석과 평가가 포함된다 동아시아 대분단체제의 갈등이 폭력화되는 사태를 예방하기 위해 우리를 포 함한 동아시아 사회들이 함께 추구해야 할 가치와 방안에 대한 논의이다 대분단체제 안에서 한국의 위치와 선택의 문제에 대한 논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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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발표에서는 시간과 지면의 제약상 위의 처음 다섯 가지 주제에 한정한 다
동아시아 대분단체제의 개념적 구성
분단의 중층성과 긴장의 다차원성
동아시아 분단 구조의 중층성 대분단의 기축과 소분단체제 대분단체제는 분단의 이중구조를 내포한다 먼저 중국대륙을 한편으로 하고 미 국과 일본 사이의 해양동맹을 다른 한편으로 하는 대립구조가 있다 이것이 대분 단의 기축관계이다 이 기축관계와 깊은 관련을 맺으면서 전후에 적어도 세 지역 에서 형성된 소분단들이 있다 이것은 국지적 분단체제 또는 민족분단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한반도 타이완해협 인도차이나
에서의 분단들이 그것이다
동아시아 대분단 기축의 긴장 구조와 제국체제와의 연속성 전후 동아시아질서의 가장 큰 특징은 제국체제의 균열구조가 미소 냉전구조로 대체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있다 전후 동아시아 질서는 분명 새로운 것이지만 그 이전의 제국체제와 간과할 수 없는 강한 연속성이 있다 제국체제가 전후 동아시 아 질서에 남긴 유산이 그만큼 크다는 말이다 적어도 세 가지 차원에서 그 유산 과 연속성에 대해 얘기할 수 있다 첫째는 지정학적 차원의 유산이다 러시아를 견제하면서 중국 대륙을 경영하기 위해 미국과 일본이라는 두 제국이 구성했던 해양연합의 전통이 그 핵심이다 아 편전쟁이 벌어져 중국이 반
식민지로 된
세기 중엽에서
세기 말 청일전쟁
까지의 시기는 중국 중심의 천하체제와 서양 중심의 질서가 공존하던 과도기였다 청일전쟁 이래 동아시아는 명실상부하게 제국체제 로 전환된다 중국은 더 이상 속방
을 거느린 천하의 중심이 아니었다 질서의 중심은 서양 제국주의와 일
본의 연합으로 구성된 해양 제국체제로 이동한다 특히 청일전쟁의 말미에 러시아 가 주도한 삼국간섭과 만주 점령 사태가 벌어진 세기의 전환점에서
년 전후
에 이르기까지 동아시아 질서는 미국과 일본이라는 아태지역의 두 제국이 한편 갈등하면서도 다른 한편 러시아 견제 와 누구도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는 거대 중국의
경영 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위해 연합했다 두 나라는 권력정치적 흥정과
협상에 기초하여 상호적응하며 협력하는 미일 콘도미니엄 의 체제를 구성하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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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다 년을 전후하여 일본은 중국에 대한 공동경영 이라는 미일 콘도미니엄의 대 전제
를 파기하고 중국 대륙 전체에 대한 일본의 독점적 지위를 추구한
대륙주의의 길을 결정적으로 선택했다 그것을 본질로 한 대동아공영권 추구는 년 일본의 진주만 폭격으로 귀결된다 그렇게 시작된 동아태 패권전쟁은 원폭 투하와 함께 막을 내린다 진주만 폭격과 원폭 투하라는 두 건의 충격적인 이미지 때문에
세기 말 이래 존재한 미일 간의 내밀한 지정학적 연합의 역사에 대한
기억은 거의 지워져서 간과되곤 한다 미일 콘도미니엄의 내적 갈등의 기억만 남 고 상호적응과 공생의 역사는 탈색된 것이다 미국은 애당초 중국 경영을 위해 일본을 개항시킨 장본인이었다 이후 미국의 동아시아 지정학적 전략에서 일본과의 관계는 그 기축이었다 역외 세력인 미국이
세기 말 이래 동아시아의 준
의 해양
대륙세력으로 발돋움한 일본과의
연합을 통해서 아시아대륙을 경영하기 위해 구성하고 유지한 일본과의 지정학적 연대는 태평양전쟁 시기를 제외한 지난 것이다 이 연합은
세기의 대부분에 걸쳐 있는 유서 깊은
년 중일전쟁 발발과 뒤이은 난징대학살 사태에도 불구하고
년 전후까지 지속되었다 일본에게 대륙침략과 전쟁 수행에 불가결했던 폐철 과 항공폭탄을
년까지 전투기와 폭격기에 긴요한 항공유는
년 중엽까지
계속 공급한 나라는 미국이었다 역시 결정적 전략물자인 석유의 대일본수출도 년 월까지 지속했다 전후 동아시아질서에 투영되는 제국체제의 두 번째 유산은 정치사회적 발전단 계의 시간적 차이에 기인하는 문명론적 타자화
의 전통이다 이 시대에 제
국의 중심부는 문명과 동일시되었다 식민지 및 반식민지는 야만 혹은 미개 의 영역으로 차별화되었다 그러한 문명론적 차별화는 전후에도 좀 다른 방식으로 이긴 하지만 재구성된다 미일동맹의 진영에서는 중국대륙을 포함한 공산권은 일 률적으로
노예의 질서 로 규정되었고
미국이 주도하는 질서는
자유세계
로 정의되었다 반면에 중국사회에서 미국이 주관하는 세계는 계급적 착취 와 약소국에 대한 제국주의적 지배로 일관하는 불의한 질서로 표상되었다 질서의 중심이 이원적이었던 만큼 문명론적 타자화 역시 팽팽한 양극적 성격을 띠었다 전후 동아시아에 투영된 제국체제의 또 다른 유산은 역사심리적 요소이다 제국 체제에 내재했던 식민주의와 침략전쟁 그리고 전쟁범죄로 얼룩진 역사의 상처는 지정학적 긴장이나 정치사회적 이질성 등에서 오는 긴장을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과 중첩되어 서로 가중시키는 방식으로 결합함에 따라 제국체제가 동아시
이삼성 선의 시대구분과 역사인식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
근대 동아시아와 말기조
한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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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사회들 사이의 관계에 준 역사적 상처의 충격은 고스란히 전후 질서에 계승되 기에 이른다 전전의 미일연합과 전후의 미일동맹의 차이 전전과 전후의 미일연합은 공통점과 함께 차이점도 있다 크게 두 가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첫째 미일연합이 공동으로 관리하고자 했던 중국의 위협에 차이가 있었다 전전에 제국체제의 안정과 이익에 대한 중국의 위협을 구성하는 것은 반 식민지 중국의 혼란 그 자체 그리고 혼란 속에서 내연하는 민족주의와 공산주의 운동이었다 전후에 중국이 제기한 위협은 통일된 거대 중국의 힘 그리고 그 힘 의 기반인 민족주의와 공산주의라는 적대적 이념체계였다 둘째 전전의 미일연합 은 비공식적인 무형의 연합이었다 반면 전후의 미일연합은 그 시작에 있어서도 점령국으로서의 미국 피점령국으로서 일본 사이에 공식화된 주종적 성격을 띠면 서 출발했다 미일연합이 보다 완벽한 내면적 일체화를 이루면서 전개되는 것이 다 동아시아 대분단 기축관계에서 긴장의 다차원성 동아시아 대분단체제의 두 번째의 구성상의 특징은 특히 대분단의 기축에 내재 하는 긴장 요소들의 다차원성이다 지정학적 긴장 전후 유럽질서는 독일과 주변국들 사이의 지정학적 긴장을 해체하고 봉쇄하는 방식으로 구축되었다 독일은 분할되었고 각각 서방과 공산진영의 동맹체제에 종 속적으로 편입되었다 이로써 제국시대의 지정학적 긴장을 해체하고 동서간 이념 대결로 완벽하게 대체했다 반면에 전후 동아시아에서는 러시아에 대한 견제 그 리고 중국에 대한 통제라는 공동의 지정학적 이익을 공유한 미일 연합이 부활한 다 중국 대륙은 러시아와 연합한 형태로 적대세력으로 부상하였다 대분단의 기 축관계는 사실상 제국체제의 지정학적 대립구조의 재현이었다 지정학적 차원에서 보면
세기 전반에 유럽질서의 지정학적 긴장은 같은 시대
지정학적 긴장 은 복수의 국가들이 동일한 지리적 공간에 대해 정치군사적 영향력을 확보하거나 확대하려는 경쟁을 함으로써 초래되는 긴장을 말한다 정치군사적 영향 력을 위한 경쟁은 직접적인 영토적 지배를 확대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고 해당 지역의 다른 사회나 국가 들을 자신의 동맹체제에 포섭하고 유지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한 정치군사적 영향력 확대의 궁극 적인 목표가 경제적 지배력의 확대일 수도 있고 경제적 지배는 부차적인 것일 수도 있다 따라서 지정학 적 긴장이라는 개념 안에는 복수의 강대국들 사이의 패권 경쟁 이 포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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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에서와 달리 갈등의 선이 훨씬 분명했다 팽창하는 공격적인 독일과 그 나머지 사이의 갈등과 긴장이 뚜렷했다 필자는 제국체제 하의 동아시아에서 러시 아를 견제하면서 중국을 통제하고 경영한다는 공동의 목표를 가진 미일연합 그리 고 그 대상으로서의 중국대륙 사이의 제국적 통제의 주체연합과 통제대상 사이의 긴장 이 존재함을 지적해 왔다 그러나 그러한 연합의 존재양식은 결코 공식적인 동맹은 아니었다 미국과 일본의 관계와 장개석 정권의 중국과 미국의 관계는 사 실상 복잡한 측면을 내포했다 연합과 갈등의 선이 복합적이며 복선적인 것이다 어떻든 미국은 일본과의 전쟁이 발발하기 불과 얼마 전까지도 석유는 물론이고 항공유와 폭탄용 페철 등의 대일본 수출을 지속했는데 그 주요한 동기의 하나는 러시아를 견제하는 가운데 중국을 공동경영한다는 미일 연합 의 대전제 안에 일 본을 머무르게 하기 위해서 혹은 복귀하기를 희망했기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유럽의 경우 냉전체제는 전전의 유럽의 지정학적 구조의 해체에 가까운 변화가 있었지만 동아시아의 경우는 전후의 질서와 전전의 질서 사이의 지정학적 구조에 변화 못지않은 연속성이 있다는 사실이다 전후 유럽은 전전의 지정학적 질서의 해체를 의미했다 전전 유럽에서 지정학적 긴장의 핵이었던 독일 은 패전과 함께 소련을 포함한 승전국들에 의해서 분할점령되어 해체되었다 결국 동서독으로 분할된 채 서로 다른 초국적 이념공동체들에게 정치군사적 경제적 이데올로기적으로 통합되었다 이로써
세기 전반기 유럽질서의 불안정의 지정학
적 기반이었던 조건이 질적으로 변화했다 동아시아에서는 이와 정반대의 현상이 벌어진다 전후 동아시아에서는 패전국가 일본은 미국의 단독점령 하에서 미국과 일체화됨으로서 전전 제국체제 하에서 불투명하게 존재했던 미일간의 지정학적 연합을 강화하고 공식화한다 이 점에서도 동아시아의 전후는 유럽과 달리 전전의 질서와의 질적인 연속성을 내포했다고 할 수 있다 정치사회적 체제와 이념의 긴장 제국체제는 제국주의라는 약소사회들에 대한 초사회적인 군사 정치 경제 및 문 화적 지배 와 그 이면으로서의 민족해방 적인 사회들 사이의 문제
의 문제가 핵심
를 구성했다 이 문제는 훗날 동아시
아의 경우 국가들 사이의 가장 첨예한 이슈가 되는 역사문제의 본질을 이루게 된 다 사회들 사이의 갈등의 문제가 핵심인 것이다 반면에 냉전의 시대에는 유럽에서도 동아시아에서도 역사가 아닌 이데올로기가 핵심적인 이슈로 된다 사회들 사이의 문제 그리고 그 연장선에서의 민족해방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권력과 시장 국가권력과 인간 그리고 시장과 인간의 관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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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보다 보편적인 인간 삶의 양식의 문제가 핵심적인 이슈가 된다 즉 인간해방 의 문제가 중심적 테마가 된다 공산주의적 사회체제는 인간해방을 향한 진보인 가 아니면 모든 인간의 노예화인가 공산주의 혁명을 인간해방의 승리로 보는 집 산주의
혹은 극단적 공동체주의
의 다양
한 형태들과 그것을 인간 노예화의 제도화로 바라보는 개인주의적 자유주의 사이 의 철학적 대립의 문제가 일차적인 문제로 된 것이다 이제 사회들 간의 갈등이 아니라 초사회적이며 초국적인 이념공동체들이 구성되고 그들 사이에 대립하는 이데올로기의 시대가 된 것이다 이로써 사회들 간의 갈등의 역사로서의 역사문 제 는 뒷전으로 밀리고 이념문제가 지배담론이 된다 다만 동아시아에서의 역사문 제는 해체가 아니라 동결을 통한 온존의 상태로 된다 이와 함께 유념할 점이 있다 정치사회적 체제와 이념의 차원에서도
세기 동
아시아질서는 그 전반기의 제국체제와 전후의 대분단체제 사이에 일정한 연속성 을 내포한다 제국체제에서 중국대륙과 해양세력을 나누는 이념의 분단선은 제국 주의 담론이었다 해양세력 안에서 일본과 미국은 식민지 혹은 반식민지를 지배하 는 제국으로서 자부하였고 이들에게 제국은 문명과 동의어였다 반면에 대륙은 식 민지 혹은 반식민지였고 그것은 미개 혹은 낙후와 동의어였다 중국인들의 일차 적인 시대적 숙제의 하나는 말할 것도 없이 제국주의 의 극복이었다 전후 대분 단체제의 동아시아에서도 제국주의 담론은 지속된다 미국과 일본이 스스로 제국 을 자칭하지는 않지만 중국대륙을 그 체제와 이념을 두고 적대적 야만으로 취급 하는 반면 중국공산당은 미국에 대한 전전의 제국주의 인식을 중국사회 전반에 보편화시킨다 정치사회적 체제와 이념의 이질성으로 인한 갈등이라는 점에서는 동아시아의 경우 유럽과 달리 유의할 점이 또 하나 있다 냉전기 동아시아에서 일본을 제외한 모든 나라의 정치체제는 권위주의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녔다 그 점에서는 근본 적인 차이가 없었다 북한과 중국이 스탈린주의적 권위주의 내지는 마오주의적 권 위주의였다면
이른바
자유세계 에 속한 동아시아의 많은 나라들은
재
였거나
혁명도
개발도
없는
약탈적
에 불과했다 필리핀의 마르코스 집권 아의 수하르토 집권
는 각각
년과
년에 불과했다
이 란코프의 지적과 같이
와 인도네시
년간의 이승만 독재와
년부터
년간의
년까지 타이완은 안드레
북한과 다소 비슷한 세습적 일당 독재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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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두정
년간 장기집권한 독재자들이었다
냉전기를 통털어 한국의 민주주의는 건국 후 군사독재 사이에 낀 단
개발독
냉전기에 동아시아의 공산 진영과 반공 진영이
정치사회적 체제와 이념에서 보인 이질성은 미국의 냉전주의자들의 허구적인 주 장처럼
공산주의적 노예사회와 자유세계 의 균열이 아니라 전체주의적 통제경제
와 권위주의적 국가 자본주의 사이의 이질성이 그 핵심이었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는 물론 냉전기에서부터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라는 경제적 차이 외에도 정치체제와 이념의 차이에서 오는 긴장이 있었던 건 사실이다 그러 나 미국인들이 타이완과 한국 필리핀과 인도네시아의 독재정권들과 긴밀한 동맹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미국의 대외정책에서 정치적 권위주의는 그다 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정치적 권위주의 문제로 미국과 중국이 첨 예한 이념적 긴장을 겪었다고 말하기 어렵다 결국
년대에 중국이 개혁 개방을 추진하기 전까지에 있어서 동아시아 대분
단체제의 정치사회적 체제와 이념의 이질성은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라는 경제사회 적 체제의 차이가 핵심이었다 미국인들이 추구하는 개인주의와 자유주의가 사유 재산과 자유기업의 영역에만 한정되지 않고 정치와 문화의 영역에까지 깊은 연관 을 갖는 것은 사실이다 다만 정치이념으로서의 자유주의는 국제정치 무대에서의 미국의 권력투쟁과 동맹의 정치에는 별 상관이 없었다는 뜻이다 역사심리적 간극 제국체제의 역사적 상처의 전후 계승 청일전쟁 이후 일본제국주의는 서양 열강과 함께 중국을 반식민지화하는 과정 에 개입했다 이어서 일본은
년대 이후 중국대륙에 대한 일본의 침탈과 제노
사이드 차원의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이 역사는 동아시아 대분단체제의 내밀한 심리적 기반이다
차 대전 기간 유럽에서도 침략국인 독일에 의하여 가공할 전
쟁범죄가 범해졌다
그러나 그 대상은 유태인이라는 유럽 공동의 타자
에 대한 폭력이었고 이 문제에 대해 전쟁기간 서방 전체가 놀라 울 정도로 침묵을 지켰다 미국인들은 근본적으로 이었다
홀로코스트에 대한 방관자들
이 현상은 유태인들이 당시까지만 해도 서양사회들 전반에서 고립된
인종적 섬과 같은 위치에 있었던 고유성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유럽에서 자행된 전시 제노사이드의 주된 피해자가 유럽 대부분의 사회 에서 주변자적 존재였다면 일본이 범한 전시 반인류적 범죄는 수천 년에 걸친 동 아시아 전통 문명의 중심을 자처하는 사회의 한 가운데에서 벌어졌다 이 사실은 향후 동아시아질서의 심리적 근저에 심오한 충격을 던지는 것이었고 그것이 동아 시아의 전후 질서에 미친 충격의 정치적 성격은 더 의미심장할 수밖에 없었다 세기 전반기의 역사가 전후 질서에 남긴 유산과 관련하여 유럽과 동아시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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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 중대한 차이는 질서 내적인 제국체제 의 여부이다 유럽의 주요 국가들 은 모두 유럽 밖의 사회들에 대해서는 제국들이었지만 유럽 안에서 상호간에는 평등한 주권국가 간 관계에 놓여 있었다 유럽의 변방에 대해 제국 질서를 유지하 고 있던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과 터키제국은 러시아제국과 함께 그나마도 대전 중에 무너졌다 그래서
차
세기 전반기 유럽은 제국과 식민지의 관계로 인한
역사적 상처는 거론하기 어렵다 반면에 동아시아에서는 제국체제의 중심부였던 일본과 미국을 제외하면 나머지 사회들은 모두 제국체제의 지배 밑에 있거나 그 로 인해 고통 받고 있었다 필리핀과 베트남을 포함한 동남아시아 사회들과 한국 처럼 상대적인 약소사회들은 완전한 식민지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전통문명의 중심이었던 중국조차 그 일부인 대만과 만주가 식민지 상태로 되었을 뿐 아니라 대륙의 나머지도 반식민지 상태의 고통을 겪는다 제국체제에 의한 지배 피지배의 역사적 경험은 동아시아 사회들의 싸이키
에 깊은 트라우마로 남는다 그
충격은 전후 질서에서 역사문제가 더 깊은 갈등의 원천이 될 수 있는 배경이었다
동아시아 대분단체제의 개념적 구성
체제 로서의 상호작용 구조
이 대분단의 질서를 하나의 체제 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을 구성하는 인 자들이 긴장의 상쇄가 아닌 긴장의 상호 보완과 상호 재충전의 방향으로 상호작 용하기 때문이다 긴장의 다차원적 요소들이 서로를 보완하면서 긴장과 갈등의 상 승 혹은 유지 요인이 된다 또한 대분단의 기축과 소분단체제들이 서로 긴장 상태 를 보완하거나 가중시키고 재충전하는 방식으로 상호작용하는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다차원적 긴장의 결합과 상호작용 앞서 논의한 바와 같이 제국체제가 전후 동아시아 질서에 남긴 결정적 유산에 는 제국의 폭력에서 연유한 역사심리적 간극이 있다 총력전으로 불린 두 차례의 대전에서 상호 파괴와 살상 그리고 전대미문의 반인류적 범죄들은 동아시아보다 유럽에서 더 웅장한 스케일로 벌어졌다 우선 주로 유럽에서 벌어진 제 차 세계대 전은 전사자
만
미망인을 낳았다
민간인 사망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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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만 명이었고 부상자는
천만 명에 달했다
백만에 이르렀다
백만 명의
럼멜 교수가 종합한
통계에 따르면 제 차 세계대전 중 유럽의 전사자 수는
만여 명이며 이와 별
도로 나찌스에 의한 민간인 포로 포함 학살 희생자는 유태인 여 약
만 명에 달한다
한편 동아태 지역에서
년
만 명을 포함하 월에서
년까지
일본군이 전투 중이 아닌 상황에서 포로나 민간인을 학살한 숫자는
만여 명이
었다 이 중 중국인 희생자는 비무장 민간인
만 명이었
다 럼멜은 난징학살의 희생자 수를
만 명을 포함한 약
만 명으로 파악했다
유럽과 동아시아에서 제국이 자행한 야만과 폭력의 규모는 어디라 할 것 없이 엄청난 것이었지만 유럽이 훨씬 더 심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야만의 역사가 전후 질서에 남긴 심리적 유산은 유럽이 아닌 동아시아에 더 깊게 자리한다 그러 한 차이는 역사심리적 간극이라는 요인이 전후 질서의 다른 두 가지 구성 인자들 인 지정학적 질서와 정치사회적 체제와 이념이라는 차원들과 어떻게 결합하느냐 에 의해서 결정된다 다시 말해서 지정학적 긴장 정치사회적 체제와 이념의 이질 성 그리고 역사심리적 간극이라는 세 가지 차원의 인자들이 서로 간에 긴장을 완 화하고 해소하는 방식으로 결합하는가 아니면 상호 지탱하고 보완하는 관계를 구 성하는가에 따라서 유럽과 동아시아의 전후 질서는 근본적으로 다르게 구축되었 던 것이다 전전 유럽에서 지정학적 긴장 정치사회적 체제와 이념의 이질성 그리고 역사 심리적 간극은 거의 모두 독일과 나머지
사이
의 긴장이라는 구조를 띠고 있었다 러일전쟁 이전까지 유럽을 포함한 세계의 지 정학에서 영국의 경쟁자는 러시아였지만 러일전쟁 후 영국의 지정학적 경쟁자는 프랑스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독일로 옮겨간다 특히 히틀러의 집권 이후에 유럽 에서 정치사회적 체제와 이념 차원의 긴장의 중요한 축도 독일과 그 나머지로 된 다 역사심리적 상처의 중심에는
년 독일 프랑스 전쟁 이래 알사스 로렌을 둘
러싼 긴장이 유럽 질서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었다 전후 유럽에 자리잡은 냉전체제는 그 세 가지 차원의 긴장의 구조를 해체하는
가사하라 토쿠시 역시 난징학살의 희생자 수를 만 안팎으로 추정한다 난징학살의 희생자 수를 만 안팎 까지로 확대하여 추정하는 관점도 있다 주로 피해자 측인 중국 쪽 연구자들의 인식이다 아이리스 장 이 년에 발간하여 난징학살 재평가를 국제적인 이슈로 만든 난징의 강간 도 이 범주에 포 함시킬 수 있다 년대에 들어 세계 학계의 대체적인 컨센서스는 난징학살의 희생 자 수를 만에서 만 명 사이로 보는 것이다
크리스토퍼 클라크는 제 차 세계대전의 구조적 배경이 된 양극화된 군사동맹체제의 첫 단추였던 프랑스 러시아 동맹의 뿌리를 년 독일제국이 유럽에 초래한 상황에서 찾는다 그 상황의 핵심은 년의 보불전쟁이 독일과 프랑스의 관계를 영구적으로 어려운 조건 에 처하게 만들었다는 데 있었다 그 중에서도 독일에 의한 알사스 로렌의 합병은 독일 프랑스 관계에 영구적인 짐 을 부과 했다고 클라크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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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식으로 구성된다 독일과 나머지 사이의 지정학적 긴장을 해체하고 정치사회적 체제와 이념의 이질성을 넘어 그들을 하나로 통합하는 초국적 이념 공동체가 구 축된다 독일과 나머지 사이에 존재했던 역사심리적 간극을 메꾸고 해소하는 방식 으로 구성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유럽의 냉전체제는 지정학적 대립구도와 역사심 리적 상처를 치유하는 장치였다 서독은 북대서양조약기구
년
월 현
재 를 통해서 다른 서방국가들과 연합한다 이것은 서독과 서방 사이에 지정학적 긴장을 해체한 안보공동체와 동시에 리버럴 자본주의
에 기초한
이념공동체를 구축한 것을 의미했고 이로써 역사적 화해를 이룬 것이었다 한편 동독은 바르샤바협정
체제라는 안보공동체 및 공산주의
에 기초한 초국적 이념공동체에 통합됨으로써 소련과 폴란드 등 공산권 세계와 동맹하고 화해했다 독일 전체와 나머지 세계 사이의 지정학적 긴장과 이념적 이 질성이 해체되고 역사문제의 화해도 이룬 것이었다 그러한 해체와 화해의 전제 는 소련과 영국 프랑스 등 전쟁의 피해자들이 전후 독일 재건의 결정과정에 참여 하였고 독일의 철저한 역사반성을 강제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동아시아에서 전후사의 구조는 반대의 길을 걸었다 어떤 의미에서 전전의 유럽 이 처해 있었던 질곡의 구조가 전후 동아시아로 이전된 양상을 보이게 된다고 말 할 수 있다 주요 사회들 사이의 지정학적 긴장 정치사회적 체제와 이념의 이질 성 그리고 역사적 상처로 인한 긴장이 한꺼번에 중첩되는 구조에 갇히게 되는 것 이다 그 결과 전후 동아시아에서는 질서의 지정학적 재구성과 정치사회적 체제 와 이념의 갈등이 역사심리적 간극을 동결하고 심화하는 방식으로 결합하게 된다 미일 간 전쟁의 상처는 재빨리 구축된 안보동맹에 의해 해소된다 그러나 제국체 제의 최대 피해자였던 중국은 전후 일본의 재건 방식을 결정하는데 참여할 수 없 었다 대분단체제는 역사적 상처를 해소하기는커녕 동결하고 응결시켰다 상대적 으로 소수의 전범들만을 제외하고 전범에 대한 처벌은 미진했다
정치와 사회
전후 독일이 역사반성을 제도화한 주요한 장치의 하나는 나찌스의 전쟁범죄에 가담한 개인들에 대한 시 효 없는 책임추궁이다 년 서독 국회는 나치스의 대량살인죄에 대해 시효를 인정하지 않고 영구히 추 급 할 것을 결의한다 이제까지 약 만 명이 재판에 회부되어 천여 명이 유죄판결을 받고 처벌되었 다 이처럼 전후 독일의 역사반성은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이라는 타자의 재판 뿐 아니라 독일인 자신 에 의한 재판이 지속되고 있다는 데 특징이 있다 이것은 도쿄 국제군사재판에 의한 타자의 재판으로 끝 나고 자신에 의한 재판은 없는 일본과 선명하게 대비된다고 한 일본 학자는 지적한다 모치다 유키오 일본의 전후 보상 일본의전쟁책임자료센터 편 서각수 신동규 옮김 세계의 전쟁 책임과 전 후 보상 동북아역사재단 일본에 대한 전범재판에 의해서 급 전범으로 교수형에 처해진 일본인은 명이었다 급 전범용의자 명은 석방되었다 이시카와 마쓰미 지음 박정진 옮김 일본 전후정치사 일본 민주주의의 보 수적 기원과 전개 후마니타스 급 전범에 대한 재판은 일본을 포함해 아시아의 개소 에서 열렸고 여기서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은 명이었다 그 중에서 명이 사형 판결을 받았는데 여 기에는 대만인과 조선인이 다수 섞여있었다 대만인은 명의 유죄판결자 중에서 명이 사형 조선인은 유죄판결을 받은 명 중 명이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 대부분은 포로수용소에서 감시원으로 동원된 군 속들이었다 결국 급을 포함한 명의 사형자 중에서 식민지인은 명으로 퍼센트에 달했다 이에 비 해 전쟁 중 악명이 높았던 일본 헌병은 총수가 만 천여 명에 달했지만 이들 중 전범으로 유죄를 받은 인원은 명에 불과했다 이런 점들을 주목하면서 우쓰미 아이코는 일본의 전쟁책임이 상당부분 식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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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각 분야에서 전전의 일본 지배층은 다수의 공직추방에도 불구하고 전후 일 본을 지도하는 위치에 남았다 성단
전쟁의 시작에 관여한 궁극적 책임자였던 천황은
에 의한 평화 논리에 근거하여 전쟁책임을 면죄받음과 동시에 전후 일
본에서 상징적 최고 권위 로서의 정신적 정치적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는
일본의 전전과 전후를 잇는 역사적 연속성의 표상이다 역사반성을 강제하는 시스 템은 없었다 지인에게 전가되었다고 비판한다 우쓰미 아이코 지음 이호경 옮김 해방되지 못한 영혼 조 선인 급 전범 동아시아 연합군 총사령부는 년 월 일자 명령으로 사상경찰의 주요 인물들을 추방하고 직업군인과 군국주 의 경향을 가진 약 천 명의 교육자들을 추방했다 년 월 공포된 공직추방령에 의해 점령기간 내에 추방된 사람은 모두 만여 명에 달했다 그 대부분인 만 천여 명은 군인이었고 정치인은 약 만 천 명이었다 이시카와 마쓰미는 이 공직추방령이 일본정치의 전전과 전후의 단절을 이루는 데 큰 효과를 발휘했다 고 평가한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전전의 지배세력이 사회 각 분야에서 가진 영향력이 완전히 제거된 것을 의미하지 않았음을 또한 주목한다 공직추방이 상당부분 진행된 후인 년 월에 실시된 전후 첫 선거에서 전전 시기의 지배정당이었던 구정우회나 민정당 소속의 인물들 상당수가 당선된 다 추방된 정치가들의 상당 부분이 자신의 혈족이나 자신의 분신을 대신 내세워 당선시킨 것으로서 그 만큼 구세력의 사회정치적 기반의 건재를 보여준 것으로 평가한다 이시카와는 선거는 국민 대다수가 기 본적으로는 아직도 구세력의 후원자들을 지지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고 지적한다 이시카와 마쓰미 이러한 상황은 곧 역사반성에 부정적이거나 소극적인 보수세력이 전후 일본의 정치를 오늘에 이르기까 지 거의 일관되게 지배하고 있는 상황의 배경이 되었다 또 일본의 국가권력에서 전전의 유산을 청산하는 데는 분명 한계가 있었다 공직추방의 수치로 보면 숙청의 규모는 커 보이지만 실제 핵심 국가기구 안에 서의 공직 추방은 경찰과 내무성 내의 몇몇 청에서 극소수의 관료를 해고시킨 데 불과하다고 펨펠은 지적한다 펨펠 지음 최은봉 옮김 현대 일본의 체제 이행 을유문화사 그는 예컨대 전후 일본의 경제정 책을 지배한 두 핵심 부처이자 대조직들인 상공성 후의 과 대장성 에서 추방된 고 위 공직자는 각각 명과 명에 불과했다는 찰머스 존슨의 지적을 상기시킨다 일본에서 맥아더가 실시한 공직추방이 일본 정치사회 권력의 전전과 전후의 연속성 단절에 갖는 제한 성은 독일과 비교하여 다음과 같은 성격에서 비롯된다 첫째 공직자 숙청의 실제 진행은 일본정부 자신 이 주도하도록 했다 둘째 새로운 일본의 건설을 위해 필요한 인물들은 숙청하지 않는다는 맥아더의 원 칙이 있었다 셋째 독일의 미국점령 지역에서 전체 인구 대비 숙청된 인사의 비율은 퍼센트에 달했다 일본의 비율은 퍼센트에 불과했다 독일의 분의 에도 못 미친 것이었다 넷째 숙청된 숫자는 만 명이지만 그 퍼센트는 군 장교였다 전쟁이 끝난 시점에서 어차피 해산 대상인 사람들이었다 다섯째 정치엘리트의 숙청은 정당 구도에 중대 개편의 계기가 되었지만 정부 내각도 의회도 점령기간 내내 보수 정당들이 지배하였다 이러한 일본의 전전 유산 청산의 제한성은 년에 진행된 역코스 의 대일본 점령 정책의 보수적 냉전주의적 전환으로 고착된다
로 불리는 미국
아시아 태평양전쟁이 쇼와 천황의 결정에 의해서 시작되었으나 이 전쟁의 종결과 전후 평화가 그의 성단 에 의해서 가능했다는 천황 성단 론은 천황의 전쟁책임을 덮어버림으로서 전쟁책임의 궁극적 소재를 불 투명하게 만드는 동시에 전전 일본의 권력구조를 전후로 이양 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이것은 결국 전 전의 보수가 새로이 치장한 전후 보수로 재생하는 정신적 정치적 기초가 되었다 코케츠 아츠시 지음 김경옥 옮김 우리들의 전쟁책임 쇼와 초기 년과 헤세기 년의 역사적 고찰 제이앤씨 한편 아메미야 쇼이치 는 천황과 그 주변에서 스스로 천황의 퇴위 를 고려한 움직임은 네 번 있 었다고 지적한다 년 월 패전 시에 년 월 동경재판 시작 시에 년 월 헌법이 공포되었을 때 그리고 년 월 강화조야 조인 시 등이 그러했다 그런데 네 번째를 제외한 세 차례에 걸쳐서 천황 이 퇴위를 통해서 전쟁책임을 지는 것을 저지한 것은 맥아더를 중심으로 한 미국 측이었다고 아메미야는 주장한다 개번 매코맥은 그의 년 저서에서 일본 지배층의 전전과 전후의 연속성에 대해 다음 몇 가지 중요한 지적을 한 바 있다 첫째 전쟁에 관한 일본인들의 기억을 지배하는 것은 도쿄를 비롯한 여러 주요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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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역사 관련 망언을 주도하는 정치인들이 속한 일본의 전후 세대는 다른 동아시아 사회들과의 역사화해를 위한 반성적 교육의 기회를 제대로 갖지 못한 집단이다 역사반성 문제에서 독일과 일본의 차이를 민족성 의 문제로 돌릴 수 없는 이유이다 전후 동아시아에서는 제국체제의 지정학적 구조가 스스로를 재구 성할 뿐 아니라 역사심리적 분단을 응결시키고 온존시키는 방식으로 부활하였고 여기에 정치사회적 체제와 이념의 이질성이라는 또 하나의 칼이 그 분단의 골을 더욱 깊게 하였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이 문제를 좀 더 개념화해보면 민족공동체와 초국적 이념공동체라는 두 유형의 공동체 사이의 결합방식에 대해 얘기할 수 있다 전후 유럽에서 침략전쟁과 전쟁 범죄의 주된 가해자였던 사회의 민족공동체는 승전국들에 의해 이중적 분할의 대 상이 되었다 나라 자체가 분할되어 동과 서의 이질적인 초국적 이념공동체에 소 속되었을 뿐만 아니라 전쟁범죄를 주도한 사회 내부의 파시즘 세력의 도덕적 정 통성을 철저하게 부정하고 책임 집단에 속한 모든 개인들에 대한 인적 청산을 규 범화했다 가해 사회 내면의 역사적 연속성이 제거된 것이다 반면에 동아시아에서 가해자 사회의 민족공동체는 그 역사의식의 통일성과 도 덕적 권위가 보호받았다 이중적 의미에서 민족공동체의 연속성이 보장된 것이다 일본에 대한 유일한 점령자의 지위를 확보한 미국은 일본의 민족공동체적 통일성 을 보호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전쟁범죄의 주체 세력에 대한 단죄를 최소한에 한정함으로써 일본 정치사회 내면과 그 의식의 연속성이 보장되었다 일본의 역사 적 정통성과 연속성 그리고 공동체성의 표상으로서의 천황제가 상징적 형태로 존 속한 것이 그 모든 것을 함축했다 전후 동아시아에서 민족공동체의 분열을 겪은 것은 유럽에서와는 정반대로 동아시아 제국체제의 주요 피해자 사회였던 중국과 한반도 그리고 인도차이나였다 피해자로서의 역사인식을 공유한 민족공동체들은 모두 분열된 채로 각각 이질적인 초국적 이념공동체에 편입되었다 이 구조 속에 서 일본은 더욱이 미국이 주도하는 리버럴 자본주의
의 초국적
이념공동체를 아시아에서 표상하는 모델하우스로 기능했다 에 대한 공습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대한 원폭 투하와 같은 일본이 겪은 참상이다 자신들이 침략자 였다는 느낌보다 전쟁의 희생자라는 느낌이 강하다 둘째 일본의 지배층뿐만 아니라 일본 사회 전반에는 전쟁의 목적에 대한 반대가 미미했다 셋째 일본국가는 천황제 관료조직 그리고 거의 예외없이 정치 적 리더십에 있어 전시와 전후 간에 기본적인 연속성 을 유지했다 넷째 일본 법정에서는 국가나 개인 의 전시행동의 범죄성 이 인정된 경우가 없다 다섯째 오늘날까지 일본사회에서는 도쿄전범재판의 전범 을 수용했던 스가모감옥에 투옥된 경력은 부끄러움이 아니라 자부심으로 통하는 경향이 있다 매코맥은 결론적으로 급 전범들 사이의 인맥이 결국 일본의 전후 국가발전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는 것은 전후 일본의 혼란스러운 도덕적 분위기 를 잘 말해주는 것이라고 평했다 개번 매코맥 지음 한경구 이숙종 최은봉 권숙인 옮김 일본 허울뿐인 풍요 창작과비평사 존 다워는 냉전시대에 서방이 비서방 세계를 바라보는 대표적 프리즘이었던 근대화 이론 을 통해서일본 모델을 사회주의 중국에 대한 비서구적 자본주의 대항모델 로 부각시킨 사실을 주목한다 같은 맥락의 얘 기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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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상황이 전후 동아시아 질서에 미친 결과는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가해자의 민족공동체의 통일된 역사의식은 그것이 새롭게 속한 초국적 이념공동 체에 의해 보호받았다 반면에 대분단체제 기축관계의 다른 한 축을 구성한 중국 대륙은 다른 이념공동체에 속했다 이로써 전후 동아시아에서 기축관계 사회들에 게 이념적 타자
와 역사인식의 타자는 일치했다
둘째 피해자 민족공동체들의 이념적 분열로 인해 이들 사회에서 과거 제국체
제의 역사 문제는 정치적・외교적 투쟁과 지적 담론의 무대에서 부차화되었다 이 것은 역사문제의 해소가 아닌 응결된 지속 을 뜻했다 이념적 타자화가 모든 정 치적 지적 담론을 우선적으로 지배했기 때문에 다만 억제되어 있었을 뿐이다 셋째 동아시아에서 역사인식의 타자화 문제는 냉전기의 담론에서 부차화되었을 뿐 이념적 타자화와 일치하였고 대륙과 미일동맹 사이의 지정학적 타자화와도 또한 일치하였다 이렇게 삼중
으로 결합된 타자화 사이의 상호유지적 상호
작용이 동아시아 대분단체제의 본질적 특징을 이루게 되었다 전후 동아시아 질서를 대분단의 체제 이게 만든 것은 이처럼 중층성과 다차원 성 모두에서 작동하는 상호작용성이다 이와 같이 중층적 분단 다차원적 긴장 요 인 그리고 이들 사이의 긴밀한 상호작용성으로 인해 소분단체제와 대분단의 기축 관계에서 모두 군사적 대치와 군비경쟁이 유지된다 이런 조건에서는 양측 사이에 존재하는 전략적 접점의 어딘가에서 긴장의 폭력화가 일어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긴장의 폭력화를 촉발할 가능성이 있는 지점은 센가쿠・댜오위다오와 같은 대분단의 기축관계의 전략적 접점일 수도 있고 대분단의 기축과 연계된 소분단체 제들에
내재한
갈등지점일
수도
있다
이
상태는
적대관계
가 현재적 잠재적으로 상존하는 상황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 이 대분단체제의 구조이다 전후 미소 냉전의 구축과 미국의 경제적 헤게모니의 정립은 유럽과 동아시아를 포함한 전 지구에 새로운 세계체제를 구축했다 하지만 지정학적 전통과 정체성 정치사회적 체제와 이념 그리고 역사인식의 문제가 결합하고 상호작용하는 패턴 은 지역에 따라 달랐다 바로 그러한 차이가 전후 유럽질서와 동아시아질서의 동 일성과 함께 차별성의 원인이 된다 탈냉전과 세계화가 찾아온
년대 이후의
세계에서 유럽과 동아시아의 질서는 중대한 차이를 보인다 이 차이는 전후 지역 질서에서 지정학적 구조와 정치사회적 체제와 이념 그리고 역사인식의 존재방식 이 결합하고 상호작용한 방식의 차이에 뿌리를 둔 것이었다 중층적
분단 사이의 상호작용성
동아시아 대분단의 기축을 이루는 미일동맹과 중국 대륙 사이의 긴장은 소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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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제들과 상호작용한다 그 상호작용은 대체로 서로를 유지시키는 성격을 띤다 기축관계는 소분단들의 형성과 유지에 기여하고 소분단체제에서의 긴장은 대분단 의 기축관계에서 때로 이완되는 긴장을 재충전시키곤 한다 년 신중국의 성립과 함께 구성되기 시작한 대분단 기축관계의 원형은 당시 한국에 이미 성립해 있던 소분단체제와 결합하면서 한국전쟁을 낳는다 한국전쟁 은 이후 동아시아의 다른 지역에서도 미국의 개입주의를 강화시킨다 그 결과 타 이완과 인도차이나에서 소분단체제들이 고착된다 워싱턴은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 발하자 한국에 개입함과 동시에 타이완해협에 제 함대를 파견하여 이 해협을 봉 쇄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장개석에게 대륙에 대한 공격행위를 승인하기까지 했다 타이완과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했으며 타이완에 군대도 주둔시켰다
타이
완해협에 이렇게 구성된 소분단체제는 중국이 갈등의 한 축으로서 직접 관련된 만큼 이 소분단의 긴장은 미중 간 기축관계의 직접적인 바로미터로 작동했다 한반도의 전쟁에서 미국과 중국은 직접 격돌했다 그것은 타이완해협에 소분단 을 구성했을 뿐 아니라 인도차이나에서도 미국이 개입한 소분단체제가 형성되게 했다 한국전쟁 이후 베트남에서 식민주의 질서를 복원하려던 프랑스의 전쟁 노력 은 미국의 지원에 의지해 지탱될 수 있었다
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가 결정적으로 패배하고 제네바협정에 의해 프랑스가 퇴장하지만 대신 미국이 개입하여 남베트남을 지탱한다 이로써 인도차이나 소분단체제가 성 립했다 이후 대분단의 기축관계인 미일동맹과 중국의 관계는 세 지역의 소분단체제들 과 상호작용하며 서로를 유지시키고 재활성화시키는 패턴을 보였다
년대 초
동아시아 국제관계는 그것을 잘 보여준다 중소 갈등을 유리하게 이용하고 베트 남전쟁에서 명예로운 후퇴를 위해서 미국은 중국과 관계개선을 도모했다 미중 데탕트는 남북관계에 처음에는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민족대단결 이라는 조국통일 그러나 그 후
년
년 자주 평화
대원칙 에 남북이 합의한
공동성명이 그것이다
개월 만에 한국의 박정희정부가 이른바
월 유신 이라는 이름의
장기독재체제를 구축하고 남북관계를 국내정치적 도구로 활용하면서 남북관계는 다시 악화된다 인도차이나의 공산화는 남한 정부의 안보 불안감을 유발하여 한반 도의 긴장 상태를 더욱 악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미국의 정치사회 전반에 반공적 보수주의를 재활성화시켰다
전후 베트남에 대한 프랑스의 식민주의 전쟁을 위한 미국의 군사원조는 년 월에 시작되었다 년 월에 미국은 인도차이나에 대한 프랑스의 주권을 공식 인정했다 년 기간에 미국이 프랑스에 제 공한 군사원조는 억 달러였는데 그 대부분은 인도차이나 전쟁에 투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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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대 말은 인도차이나 뿐 아니라 이란과 니카라과에서도 그리고 아프가니 스탄에서도 미국에 적대적인 세력이 등장하면서 미국의 대외정책 전반이 보수화 되었다 그 결과 미소관계가 신냉전에 돌입한다 이로써 한편으로는 미중관계 개 선이 촉진되었지만 미국의 반공주의 전반 또한 강화되었다
년 미국이 중국
과 관계정상화를 단행하면서도 타이완에 사실상의 안보공약을 제공한 법
은
대만관계
년대에 이룩된 미중 관계개선의 양면성과 한계
를 상징한다 타이완의 소분단체제는 한반도의 소분단과 함께 동아시아 대분단 기 축관계의 변화를 제약하는 중요한 장치였다 년대에도 대분단의 기축에서 긴장 완화가 추구되지만 한반도 핵문제 그리 고 타이완해협의 미사일위기가 미중관계를 긴장시켰다
년 타이완 마잉주 정
권의 등장은 양안관계에 훈풍을 몰고 온다 하지만 남중국해와 센카쿠・댜오위다
오의 문제로 미일동맹과 대륙 사이의 기축 관계가 긴장했다 그 여파로 타이완의 미국 첨단무기 구매는 오히려 증가한다
년 초 천안함 침몰이라는 한반도 내
적 사건도 이 시기 대분단 구조 전반에 긴장을 보탰다 모두 대분단의 기축과 소 분단체제들 사이에 작동하는 상호유지 패턴을 말해준다
동아시아 대분단체제의 역사적 형성 전후 대분단 기축의 원형 성립 신중국의 등장과 미중관계의 폐쇄 동아시아 대분단의 원형은
년
월을 전후한 시기에서
시기에 구성되었다 중국 공산주의 운동은 전후
년 초에 걸친
년에 걸친 내전을 거쳐
년
월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이름의 신중국을 성립시켰다 이것 자체가 동아시아 대분단의 원형을 성립시킨 것은 아니다 이로부터 수개월 사이에 중국의 대미 인 식과 정책 그리고 신중국에 대한 미국의 인식과 정책이 우호적 관계는 아니라도 최소한 상호 외교적 인정을 통해서 평화공존할 수 있는 길을 모색했느냐 여부가 결정되었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전후 동아시아 질서의 틀은 미소관계가 아닌 미중관계 가 그 궁극적인 결정자였다는 뜻이다 미소냉전은 물론 전후 질서 형성에 중요한 요소였다 하지만 그것은 중국의 내면적 투쟁과 선택이라는 계기에 의해서만 동아 시아 질서에 투영될 수 있었다 중국 내적 투쟁은 운동이라는 오랜 역사에 기초한 것이다 하지만 특히
년대 이래의 중국 공산주의 년 이후
년에 걸친 중
국 내전이 전후 동아시아 질서의 기축을 결정했다 소련은 중국 공산당의 정신적 기원이자 후원자였다 그러나 궁극적인 선택은 중국 사회의 몫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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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성립한 중화인민공화국과 미국은 평화적 공존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길 을 일찍 중단했다 그 결정적 시기가
년 말에서
년 초반에 이르는 시기인
것이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한 논점이자 논쟁의 대상이다 이와 관련한 주요 논의 가 코언 터커 명제
이다
이와 관련한 논의는
특히 활발하게 진행된 바 있다 토마스 크리스텐슨은 그 논의의 결론을 이에 우호관계의 기회는 없었지만 평화적 관계 있는 기회는 있었다 는 말로 요약했다
년대에 미중 사
를 정립할 수
다만 신중국의 성립을 전후한 시기에 미
국과 중국의 평화적 공존의 길을 폐쇄한 책임이 어느 쪽에 있는가에 대해서는 학 자들에 따라 의견이 갈린다 낸시 터커에 따르면 한국전쟁 발발 이전에 해리 트 루만 대통령과 딘 애치슨 국무장관은 중국 공산당과 스탈린의 관계가 멀어질 가 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년
월 미국 의회 중간선거가 끝난 후에 신중
국과 무역 및 외교관계를 모색할 것을 희망했다 결국 터커의 관점에서는 한국전 쟁 모의에 대한 중국의 참여가 미중관계 파탄의 원인이었다는 뜻이 된다 토마스 패터슨은 정 반대의 관점을 제시했다 그에 따르면
년의 시점에서
중국공산당은 미국과 적어도 두 차례의 관계개선을 시도했다 그러나 미국은 중국 공산당과의 관계개선을 위한 어떤 의미 있는 행동도 하지 않았으며 더 나아가 다 른 나라들의 대중국 외교관계 모색을 방해했다 트루만 행정부는 장개석정권에 대 한 외교승인 철회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고 마오쩌둥의 중국과 최소한의 잠정 관 계
를 모색하는 노력도 하지 않았다 무역관계나 또는 재건지원을
위한 협의를 제안하지도 않았다 영국 노르웨이 인도를 포함한 많은 나라들은 곧 마오쩌둥의 중국을 외교 승인했지만 미국은 끝내 거부했다 호주 캐나다 프랑스 등 여러 나라들은 신중국에 대한 외교승인을 원했지만 미국의 요구에 따라 승인 을 포기했다 두 개의 대립되는 관점을 종합한다면 신중국 성립 후 미중관계 초기에 어느 한 쪽 혹은 양측 모두가 평화공존을 거부함에 따라 대분단체제의 원형이 구성된 것 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필자는 이 시기 신중국과 미국의 관계의 향방을 결정한 요인에 대해서는 토마스 크리스텐슨의 연구가 가장 설득력 있는 설명을 제시한 것으로 판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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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
월에서
월에 걸친 시기에는 마오는 미국과의 외교관계
수립에 희망을 갖고 있었고 마오의 그 같은 인식과 무관하지 않게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년 전반기에 미국과의 관계개선에 깊은 관심을 갖고 이를 추구했다
크리스텐슨은
년 봄 이래 중국공산당 지도부가 미국과의 외교관계 수립에 관
심을 보인 적어도 여섯 차례의 사례들을 지적한다
또한
년 초의 시점에서
트루만행정부의 중국정책의 기본 방향은 중국공산당과 경제 정치 관계 수립 가능 성을 타진하면서 무역과 외교승인 가능성을 중국공산당의 대외정책에 영향을 미 칠 지렛대로 활용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년 가을에 작성된 미국의 대중국
정책은 중국 공산당정권에 대한 외교적 승인의 조건으로 네 가지를 내세우고 있 었다
공산당정권이 중국 영토의 태반을 장악한 상태여야 한다
이 미국의 외교승인을 얻기 위해 먼저 접근해야 한다
중국공산당
중국공산당이 중국에 있
는 미국 대표자들과 시민들에 대해 더 정중한 태도를 보여야 한다
미국은 가
능한 한 중국에 대한 승인을 협상 목적으로 보류해야 한다 단 서방 동맹국들을 설득해서 대중국 외교승인을 유보하도록 할 수 있을 때까지만 그렇게 보류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년
월이 되면 이 네 가지 조건을 신중국정부는 충족시키고 있었
다고 크리스텐슨은 파악한다 공산당이 중국의 대부분을 차지하였고 미국에게 먼 저 접근하여 외교승인을 요청하고 있었으며 셴양에서 공산당에 억류되었던 앵거 스 워드 영사와 그의 직원들이 석방되었다 그리고 미국의 가장 가까운 동맹국인 영국이 중국에 대한 외교승인을 준비하고 있었고 마침내 국 정부를 정식 승인하게 된다
중화인민공화국 선포를 앞둔
미국 총영사 에드먼드 클럽
년
월
일에 신중
월 말 주언라이는
에게 외교관을 보내서 중국공산당의
정책은 세계의 모든 나라와 외교관계를 맺는 것임을 밝힌다 아울러 마오쩌둥은 급진주의자가 아닌 실용주의자로서 서방과의 관계에 융통성을 갖고 있다고 말한 다 이어서 중화인민공화국이 공식 선포된
월
일 클럽은 신중국정부로부터 미
국과의 외교관계 수립을 요청하는 공식적인 요청을 받았다 마오쩌둥은 당시 쟝제 스 국민당정부와 관계를 단절하고 베이징의 새 정부를 중국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인정하는 어떤 나라와도 외교관계를 수립한다는 원칙을 갖고 있었다
즉
년 기간에 마오쩌둥은 미중 두 나라가 상호 적의를 갖고 있더라도 외교관 계를 수립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마오에게
미국의 중국 승인은 두 나라 사이의 우호관계의 확립이나 또는 소련 대신 미국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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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방으로 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지만 미국과 중국이 상호 평화공존의 가능성을 여는 조치로 이해한다는 것을 뜻했다 그러나 애치슨의 국무부는 이 요청을 접수하자마자 성명을 발표한다 국민당정 부에 대한 승인을 재확인하면서 이 정책에 변화가 있을 시에는 반드시 의회와 협 의한다는 내용이었다 동시에 애치슨은 상원 청문회에서 증언하면서 중국공산당은 러시아 제국주의의 도구 라는 강경한 반공적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년
월에도
년
월에도 중국에 대한 외교승인을 계속 거부한다 그 핵심
이유는 크리스텐슨에 따르면 것과 마찬가지로
미국은
년
년 말과
월 스튜어트 대사의 베이징방문을 반대했던
년 초에 미국의 국내정치적인 반대와 그에 직
면한 트루만과 애치슨의 정치적 선택이었다 애치슨은 내심 중국의 신정부에 대한 승인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하면서도 공개적으로는 중국에 대한 외교승인을 고려하 고 있다는 사실을 전면 부인했다 크리스텐슨이 파악하는 핵심이유는 미 의회와 언론 그리고 여론의 반대압력이었다
즉 국내정치적인 반대가 핵심이유였다
문제는 트루만과 애치슨 등 중국문제에 대한 미국 정책결정자들은 중국 승인이 초래할 국내정치적인 파장을 왜 그토록 우려했는가라는 것이다 미국의 승인거부 정책에는 물론 신중국정부가
년에서
년 초에 걸쳐서 보인 부정적인 행동
도 작용했다는 것은 크리스텐슨도 인정한다 대표적인 것은
년 말에서
년
말까지 셴양의 미국 영사 앵거스 워드와 그의 직원들을 첩보행위 혐의로 억류하 고 있었던 것 소련에 치우치는 외교적 행동 그리고
년
월 중국이 취한 중
국내 미국 영사관 재산의 압류 등이 그러했다 그러나 크리스텐슨이 찾은 결정적 요인은 유럽에서의 봉쇄정책 추진에 필요한 국내적 지지를 동원하기 위해 중국에 대한 반공주의 정책을 일정하게 견지할 필요가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결론적으로
년
월과
년
월 사이에 미국이 중국 신정부를 승인했다
면 비록 그로 인해 마오쩌둥이 미국을 우호적인 세력으로 볼 리는 없었지만 중국 공산당과 소련의 관계는 손상되고 일정하게 견제와 균형 속에서 평화공존이 가능 한 삼각관계가 미소중 삼자 사이에 형성되었을 가능성을 크리스텐슨은 주목한 것 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당시 스탈린이 중국과 미국의 접촉을 지극히 경계하면서 중국의 티토이즘을 강하게 경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 판단이다 자면 이것이 크리스텐슨이 말하는
년 말
말하
년 초에 걸친 시기의 미국과 신
중국 사이의 잃어버린 기회의 실체이다
승인에 대해 미국인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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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 월의 시점에서 이 문제에 대한 여론조사 결과 신중국정부에 대한 외교 대 로 반대가 우세했다
한국전쟁과 중국 그리고 동아시아 대분단체제의 완성 한국전쟁은 그 형성기 대분단체제의 산물이었다 한국전쟁은 미중 사이에 형성 된 대분단 기축의 원형과 한반도에 이미 미소 냉전의 결과로 그 원형이 형성되어 있었던 소분단체제가 파괴적인 결합반응을 일으킨 결과로 발발하게 된다 한반도 내부의 무력통일 추구세력이 전쟁을 기획하였고 신중국이 성립한 후인 월에서
년
월에 걸친 시기에 스탈린 마오쩌둥 그리고 김일성 삼자 사이에 한반도
에서의 전쟁을 위한 다자간 모의가 이루어진다 기획자는 김일성이었지만 최종승 인자는 스탈린이었다 그리고 스탈린의 최종승인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중국 내전의 승리자인 마오쩌둥의 대북한 지원 약속이었다 중국 내전의 결과가 한국전쟁의 결정적인 국제적 환경이 된 이유는 적어도 다 섯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스탈린이 대하다가
년
년 가을까지 김일성의 남침 계획을 반
월 이후 동의하고 지원하는 쪽으로 태도를 바꾼 이유에 대해
아나톨리 토르쿠노프 등의 일반적인 해석에서는 소련의 원폭 실험 성공으로 미국 의 핵무기 독점을 무너뜨린 점과 함께 중국 공산당의 내전 승리를 꼽는다 둘째
년
월
일 주평양 소련 대사 시티코프가 스탈린에게 보낸 전문은
유사시 중국의 한반도 개입의지 여부를 확인하도록 스탈린이 지시했다 는 사실 을 확인해 주고 있다
스탈린은
년
월 말 김일성 남침 계획에 대한 지지의
사를 밝히기 전에 그 전제조건으로 중국의 개입 의지를 중시했음을 말해준다 셋째 스탈린의 김일성 남침 동의의 전제 조건은 소련의 직접 참전 배제와 유사 시 중국의 한반도 군사 개입 약속이었다 중국 내전에서 공산당의 승리가 없었다 면 불가능한 조건이었다
년
월
일 스탈린이 마오쩌둥에게 보낸 전문에서
스탈린은 전쟁의 최종 결정은 김일성과 마오쩌둥의 공동 결정임을 분명하게 밝힌 다 만일 마오쩌둥이 동의하지 않는다면 되어야 한다 고 말했다
새로운 심의가 있을 때까지 결정은 연기
요컨대 스탈린은 마지막 결정적인 시점에서 김일성의
남침에 대한 승인 문제를 중국에 떠넘긴 것이었다 그 다음날인
월
일 마오쩌
둥은 김일성을 위한 만찬을 열었고 이 회담에서 마오쩌둥은 김일성의 남침계획을 수용한다
월
일 주중국 소련대사 로시친이 스탈린에게 보낸 전문은
마오쩌둥
은 모스크바에서 이루어진 스탈린과 북한 간의 해방계획 을 전적으로 수용 했다 는 내용을 담고 있다 다섯째 스탈린이 중국의 지원을 결정적 전제조건으로 판단하고 행동했다는 것 아나톨리 토르쿠노프 지음 구종서 옮김 마오쩌둥 기밀문서 에디터 토르쿠노프 토르쿠노프 토르쿠노프
한국전쟁의 진실과 수수께끼 김일성 스탈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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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재확인해주는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은 바로 그 날
월
일 전쟁 발발 이전
에 중국과 북한 사이의 우호동맹 상호원조조약 체결을 적극 독려한 일이다 스탈 린은 그 날 로시친에 보낸 전문에서
한반도에서 해방이라는 대사업이 성취되려
면 조약 중조우호동맹상호원조조약 이 즉시 조인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북한 동 지들의 성공을 보다 굳건히 하여 한반도 문제에 다른 나라가 개입하는 것을 미연 에 방지하게 될 것 이라고 말했다 넷째 션즈화
의 해석에 따르면 스탈린이 김일성의 한반도 무력 통일 계
획을 지지하게 된 이유는
년
월 중소우호동맹 체결이 결정됨으로써 소련
이 과거에 장개석정권과 맺은 협정으로 획득했던 따롄과 뤼순 등에 대한 권리를 포기해야만 했고 이를 대체할 수 있는 전략적 해군기지를 한반도에서 찾지 않으 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션즈화의 관점 역시 중국 내전에서 공산당의
승리는 스탈린의 한반도 전쟁 지지에 결정적인 변수임을 전제한다 스탈린이 국민 당 장졔스와의 협정으로 얻었던 뤼순과 다롄에 대한 소련의 권리를 포기하고 이 에 대한 대안을 한반도에서 찾을 수밖에 없게 된 이유가 중국 공산당의 내전 승 리였기 때문이다 니우 준은 한국전쟁이 실제 발발하기 전까지 중국공산당 지도자들의 관심은 한 반도가 아닌 티벳 대만 그리고 인도차이나였다고 본다 한반도에 개입할 의사도 관심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는 스탈린이
년
월 북한의 남침을 최종적으로 승
인하기 직전에야 비로소 김일성에게 마오쩌둥과 협의를 하도록 요구한 사실을 주 목한다 스탈린은 마오의 소극적 내지 부정적 태도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 이 니우 준의 해석이다
마오는
월
일에야 김일성으로부터 소련과 북한의 공
동제의에 대해 알게 되었고 그 때 마오쩌둥은 먼저 소련 측에 그 사실여부를 확 인해본다 그 후에야 김일성의 남침계획을 반대하지 않기로 결정한다 그 이유는 중국은 스탈린의 결정에 도전할 위치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 고 니우 준은 주장한다 니우 준은 또한 중국은 전쟁 발발 후에도 초기에는 한반도의 상황에 그다지 관 심을 기울이지 않았다고 본다 한반도 전쟁은 소련의 책임으로 보았기 때문이라는 토르쿠노프
한국전쟁의 기원에 대한 그간 국내외 학계의 논의의 성격에 대한 필자의 전반적 검토는 다음 논문을 참 조 이삼성 한국전쟁과 내전 세 가지 내전 개념의 구분 한국정치학회보 제 집 제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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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다 중국공산당 지도자들이
년 가을 한국전쟁에 개입하기로 결정한 것도
미국의 군사개입이 성공한 후에 비로소 전반적인 동아시아의 상황에 대한 재평가 를 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미국의 군사 개입 수준이 한반도뿐만 아니라 대만해협과 동남아시아에 걸친 광범한 것이었고 그만큼 중국 지도자들은 미국이 중국에 대한 전략적 팽창을 추진하려는 것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미국이
한반도에 개입하면서 대만해협 봉쇄도 동시에 했으며
월
일 미국의 인천상륙
성공 이래 중국의 거듭된 경고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선을 넘어 북진한 것 이
두 가지 사태가 중국의 한반도 개입을 촉발한 원인이라고 니우 준은 주장한다 요컨대 한국전쟁은 그 기획에 있어서 스탈린과 김일성의 전쟁이지 마오쩌둥의 전쟁은 아니었으며 중국이 결국 전쟁에 개입하게 된 것도 한반도 자체에 대한 관 심에서보다는 전쟁 발발 후 미국의 군사행동이 대만 문제를 포함하여 중국의 안 보에 심각한 위협을 제기한 것으로 인식이 전환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니우 준 의 주장이다 이러한 인식은 같은 중국계 학자들이지만 마오쩌둥의 이념적 패러다 임에 초점을 맞추는 첸지안이나 쟝슈광의 시각과는 크게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한국전쟁 발발의 역사적 인과관계를 판단함에 있어서 신중국의 중요성은 전쟁 기획단계에서 마오쩌둥이 소극적 혹은 적극적 태도를 보였느냐 여부에 좌우 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스탈린은
년
월 김일성의 남침
계획 승인을 처음 시사할 무렵 마오쩌둥의 인식을 확인하려 했고
월 최종 결정
또한 마오쩌둥의 동의 여부에 맡겼던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스탈린은 자신이 원 하는 답변을 마오쩌둥으로부터 받을 수 있었다 만주를 포함한 대륙 전체를 장악 한 신중국의 존재 자체 그리고 소극적이든 적극적이든 유사시 중국공산당의 한반 도 개입 약속이라는 사실이 결정적인 것이었다 이 두 사실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김일성의 전쟁계획에 대한 스탈린의 최종승인은 없었을 것이다 와다 하루키도
중국혁명 및 국공내전과 한국전쟁의 상호연관성 을 강조한다
그런데 그가 말하는 상호연관성은 특히 내전 시기의 중국지도자들과 북한 지도부 사이의 깊은
인간적 행동적 심리적 결합 을 가리킨다
내전 후의 신중국과 미
국의 긴장관계와 그것이 스탈린과 김일성의 최종 전쟁기획에서 갖는 역사적 인과 성의 구조라는 측면에서 필자가 말하는 상관성과는 차이가 있다 와다 하루키 교 수의 연구서를 번역한 서동만의 지적과 같이 와다 교수가 부각시키고자 한 것은 동북아시아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내적 연관
와다 하루키 와다 하루키
지음 서동만 옮김
한국전쟁
혹은
한국전쟁 개전 당시 존재했
창작과비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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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의 차원이었다
이것은 여기서 필자가 언급한 니우
준이나 와다 하루키가 비판한 주지엔룽의 주장과 대척점에 서 있는 인식이다 조 선의 공산주의자들이 하고자 하는 일 통일전쟁 을 중국 공산당이 이익을 따져서 반대하는 일 따위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 당시 중국공산당의 사고방식이었다고 와다 하루키는 주장한다
한국전쟁은 북한과 중국 지도부의 관계가 이익 이 아
닌 이념 에 기초한 것이었다는 차원에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와다 하루키의 인식은 첸지안과 장슈광 쪽의 해석을 다른 차원에서 뒷받 침하고 보완하는 의의를 갖는다 반면에 그것은 니우 준의 관점과는 상호배타적이 어서 양립하기 어렵다 그러나 필자가 말하는 중국 내전의 결과 및 마오쩌둥의 선 택이 한국전쟁의 결정에 갖는 의의는 와다 하루키 혹은 첸지안 및 장슈광 등의 시각과 니우 준의 주장 중 어느 쪽이 진실인가와 무관하게 역사적 인과로서 성립 한다 소련 자신이 원폭 개발에 성공하고 이어 중국 내전에서 공산당이 승리한 것을 배경으로 스탈린과 마오쩌둥이 김일성과 함께 한반도 공산화를 위한 남침을 모의 하고 있던
년 초 미국 역시 단순한 봉쇄를 넘어선 더 야심적인 세계전략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년
이 그것이다 이것은 멜빈 레플러가 지적한 바와 같이
개월 전에 조지 케난이 작성한
와 그 요점이 동일했다
의 목적은 소련의 힘을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질서에 더 이상 위협을 제기 할 수 없는 수준으로 축소시킨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한
의 처방은 미국
의 극적인 재무장이었고 이 구상에는 소련에 대해 미국의 압도적인 핵전력 우세 를 이룩함으로써 소련이 원폭을 사용할 엄두를 내지 못하게 한다는 계획도 포함 되어 있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트루만행정부는
의 전략을 현실화할 조건
을 확보하지는 못했다 또한 이러한 전략적 구상이 한국전쟁의 직접적 원인의 하
서동만 역자 후기 와다 하루키 와다에 따르면 한국전쟁 전에 중국이 북한에 보내준 조 선인 병사들은 북한이 아닌 만주가 고향인 조선족 즉 중국 국민이었다 북한이 이들의 파견을 요청하자 중국공산당은 그들이 북한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조선인이어서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의 정 신에 의거해 자국민 중국 국민 을 혁명전사 로 파견한 것이었다는 게 와다의 해석이다 와다 하루키 그들을 년 이후 김일성이 중국공산당을 지원하기 위해 보낸 조선인들의 귀환이라고 본 브루스 커밍스 등의 서술 은 잘못된 것이라고 와다는 비판한다 와다는 중국에서 조선인부대가 북한으로 이동한 것은 조선인의 귀국이 아니고 분명히 중국 동북을 고향으로 하 는 사람들이 중국혁명을 한반도로 확대한 행동이었다 그것은 중국공산당 군사위원회의 명령에 따른 행동 이다 이 사람들은 중국 국적 중국 당적을 보유한 채로 북한으로 갔다가 전쟁이 끝난 후 산 채로 혹은 유골이 되어 귀국한 것이다 라고 말하고 북한 지도부 역시 원래부터 중국혁명을 자신들이 계속한다 는 의식을 갖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와다 하루키 와다 하루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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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아직 구체적 실행의 단계에 들어간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이러한 전략적 구상을 선택한 트루만행정부의 세계인식과 전략적 사고 가 동아시아 대분단체제의 원형을 구축하는 데에 기여했으며 이렇게 구축된 대분 단체제의 원형이 한국전쟁 발발의 근본적 조건을 구성한 것은 분명하다고 생각된 다 북한 김일성이 미국이 개입할 가능성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전쟁이라는 모험을 감행한 것도 호치민이 비타협적 대미 항전전쟁 을 장기 지속한 것도 아시아대륙 에서 중국혁명의 성공이라는 조건 속에서만 성립한 사태였다 중국혁명의 성공이 라는 동아시아적 사태 없이는 한국전쟁과 인도차이나전쟁 자체뿐 아니라 그에 대 한 미국의 개입도 상상하기 어렵다 여러 학자들의 지적대로 한국전쟁과 베트남전 쟁에 대한 미국 개입의 일차적 목적은 중국혁명을 봉쇄하는 데 있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떻든 중국 내전에서 공산당의 승리와 그 지도부의 동의를 결정적인 매개변수 로 하여 스탈린이 동의한 북한 지도부의 기획으로 한국전쟁은 발발했다 미국은 즉각 군사개입했을 뿐 아니라 인천상륙 작전 성공 이후 베이징으로부터의 경고에 도 불구하고
선을 넘어 북진을 강행하고 나아가 압록강에 접근한다 이는 중국
의 개입을 촉발하였고 이로써 미국과 중국은 한반도에서 직접적인 충돌을 피할 수 없었다 그 결과 이 전쟁은 대분단체제의 기축을 결정화
하고 국지적
소분단들을 고착시키게 된다 따라서 동아시아 대분단체제의 일차적 계기는 미소 양극 사이의 냉전을 배경으로 한 가운데 중국 사회의 선택과 이로 인한 새로운 중미관계의 전개였으며 한국전쟁은 그 이차적 계기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대분 단체제와 한국전쟁은 상호 견인의 관계에 있었던 것이다 한국전쟁 이후 대분단 기축의 공식화 그리고 소분단체제들의 고착화 전전에 존재한 무형의 미일연합은 전후 의 상태를 거쳐서 화조약
년
년에 걸친 점령체제 하의 미일일체
월 일본에게 주권을 회복시킨 샌프란스시코 강 과
미일안보조약
이 동시에 서명됨으로써 공식적인 미일동맹 체제로 부활 한다 이 두 조약은 존 다워가 말하는 샌프란시스코 체제 를 구성하는 것이다 이 체제는 물론 신중국의 강력한 비판을 불러일으키는데 이는 결국
년 그 원
형이 성립하고 한국전쟁으로 공고해진 동아시아 대분단 기축의 공식화에 다름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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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었다 한반도의 소분단은
년 미소 양국의 군사적 분할 점령과 두 강대국 사이의
냉전이 발전함에 따라 형성되었다 하지만 이 소분단체제의 운명을 결정적으로 만 든 것은 역시 한국전쟁이었다 그러므로 미소냉전과 중국 공산화의 요인들이 복합 적으로 작용하여 한반도 소분단체제는 고착되었다 타이완해협을 사이에 둔 중국 내적 분단은 내전에서 공산당의 승리라는 조건과 타이완에 대한 미국의 방패 역할에 기초해 성립했다 중국 국민당 세력과 미국의 관계라는 제국체제의 유산은 타이완 정권으로 수렴되고 소련 공산주의를 배경으 로 한 중국의 자기결정은 대륙 전체를 지배하게 되면서 타이완해협 양안의 소분 단체제가 구성된 것이다 인도차이나의 분단 또한 제국체제의 유산과 깊은 관계가 있다 후 약
차 대전 종결
년에 걸쳐 전개된 베트남 소분단체제의 형성 과정은 제국체제에 저항하
며 성장한 베트남 사회 내부의 자생적인 혁명적 민족주의를 한편으로 하고 제국 질서의 복권을 노린 구식민주의 세력 프랑스 과 미국 냉전주의의 결탁을 다른 한 편으로 하는 대립구조가 그 핵심이었다
한국전쟁 발발 이전인
년
월 스탈
린과 마오쩌둥 사이에 동맹조약이 체결되고 스탈린과 마오가 인도차이나의 호치 민 공산당정부를 승인하자 미국의 트루만행정부는 호치민을 미국의 중대한 적으 로 규정한다 국무장관 딘 애치슨은 베트남인들의 대다수가 호치민의 공산당 정부 를 지지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은 프랑스의 배후 조종을 받고 있던 꼭두각시 황제였던 바오 다이
와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한국전쟁이 진
행되면서 미국의 군사활동이 한반도에 집중되어 있는 사이에 인도차이나 공산당 세력은 더욱 강화되고 결국 한국전쟁 종결 얼마 후인
년 초 그들이 프랑스
식민주의 세력을 무릎 꿇린다 이와 함께 미국의 아시아 정책의 초점은 대만을 요 새화하는 것과 함께 인도차이나에서의 공산주의 봉쇄로 옮아간다 미국이 바오 다 이 대신 노 딘 디엠을 수장으로 하는 남베트남정부의 후견을 자처함에 따라 베트 남의 분단도 고착된다 이렇게 해서 전후 동아시아질서는 중국대륙과 미일동맹을 기축관계로 하고 한 반도 타이완해협 그리고 인도차이나에서 저마다 과거 제국체제의 유산과 긴밀한 연관성을 가지며 형성된 소분단들이라는 중층적 분단의 구조로 구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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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기 동아시아 대분단체제의 내면적 변화와 그 성격 동아시아 대분단체제는 지속성과 함께 변화를 내포한다 냉전기와 탈냉전기에 물론 차이가 있지만 냉전기 안에서도 대분단체제의 성격은 내면적 차이가 있다 냉전기 대분단체제는 크게 두 시기 즉 비타협적 국면과 타협적 국면으로 나눌 수 있다 그 차이는 대분단체제에서 타이완과 오키나와의 위상 변화 그리고 인도차 이나의 상황에 압축되어 있다 비타협적 대분단체제에서 타이완 오키나와 그리고 인도차이나 신중국 성립 이후 약
년
년대 의 동아시아 대분단체제는 비타협적
국면이었다 비타협적 시기의 특징은 미중관계에서 타이완이 차지하는 위상이 보 여준다 이 기간에 타이완은 미국의 대중국 봉쇄의 전초기지였다 그래서 미국과 서방에게 타이완은 중국을 대표하는 유일 합법정부였다 한국전쟁 이래
년 동안
미중관계 란 곧 미국 타이완 관계 를 의미했으며 오늘날 미국을 괴롭히는 타이 완 문제 는 존재하지 않았다 나 문제
년대와
년대에 미국의 중국 문제는 레드 차이
였다
미일동맹과 중국 사이의 첨예한 군사적 긴장은 오키나와의 위상에서도 표현되 었다 오키나와 역시 미국의 대중국 봉쇄의 전초기지였고 형식적 주권도 미국에 속했다 미국이 주도하는 동아시아 태평양지역의 군사동맹 네트워크에서 미국의 압도적 주도성을 표상하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오키나와는 명실상부하게 미국의 식민지였다 미국 식민지로서의 오키나와는 베트남전쟁 기간 미국 전폭기의 주요 발진기지였다
제국체제 시기에 일본의 식민지였던 타이완과 제주도가 중일전쟁
때 일본의 중국 침략 발진기지 역할을 했던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인도차이나는 비타협적 대분단체제에서 미중간 긴장의 가장 첨예한 전역 이었다 중국은
년 초부터 북베트남에 무기를 공급했다 미국의 인도차이나
군사 개입을 우려해서 중국의 무기 공급은 제한적이었지만 기도 공급했다
년에는 중화력 무
년 디엔비엔푸전투에서 미국의 지원을 받는 프랑스군을 호
지민의 군대가 격파할 수 있었던 것은 중국이 제공한 대포들의 역할이 컸다
미국은 년 기간 인도차이나에서 베트남은 물론이고 캄보디아와 라오스를 공습하는 폭격기들의 발진기지로 오키나와를 크게 활용했다 미국의 이 같은 자유로운 활용은 적어도 부분적으로 는 오키나와가 년까지 지니고 있던 미국의 공식적인 식민지로서의 위상에 기초했던 것으로 볼 수 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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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까지 미국 존슨행정부의 정책은 베트남 공산당의 가장 중요한 후원자는 중국이 라는 인식에 근거해 있었다 헨리 키신저에 따르면 베트남 전쟁에서 존슨행정부 의 전쟁 전략을 제약한 최대의 요인은 중국의 군사 개입에 대한 경계심이었다 타협적 국면의 냉전기 대분단체제에서 타이완 오키나와 베트남 그리고 한 반도 동아시아 대분단체제가 타협적 국면으로 전환한 데에는 중소관계의 긴장과 함 께 인도차이나 전쟁이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중국은 핵전쟁 우려까지도 포함한 소 련과의 전쟁 위기감으로 미국과의 관계개선에 관심을 갖고 있었지만 중미관계 개 선을 위한 외교적 이니셔티브는 미국으로부터 왔다
대분단체제의 비타협적 국
면의 표상이었던 인도차이나 전쟁은 미국으로 하여금 중국과의 타협을 추구하는 일차적 동기였다 중미협상은 소련 견제라는 공동의 이익을 기초로 하면서 베트 남문제에 대한 중국의 정책 변화와 대만문제에 대한 미국의 양보를 주고받는 대 흥정이 그 핵심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대분단체제의 타협적 국면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 것은 타이완 의 위상 변화였다 미중관계와 중일관계에서 데탕트가 성립하면서 미국은 이른바 하나의 중국
개념을 수용한다 타이완의 형식상 주권이 중국
에 있음을 인정한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미국은 실질적으로는 타이완을 자신의 군사정치적 영향권 안에 유지하는 정책을 취한다 결국 타이완에 대한 명목상 주 권은 중국에 속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미국의 패권적 영향권의 일부이자 중국의 태평양 진출을 차단하는 미국 해양 패권의 중대한 바로미터의 하나로 남았다 그 런 의미에서 타이완은 이 시기 이후 현대판 중국과 미국 양국에 대한 양속체제 현상을 보이게 된다 타협적 국면의 대분단체제에서도 타이완은 미국의 동아태 해상패권 영역의 불 가결한 일부로 기능했다 미국은 한편으로는 타이완의 독립성을 부정하고 그것을 중국 영토의 일부로 인정한다고 하면서도 타이완의 독립성과 안보에 대한 미국의 키신저는 존슨행정부가 중국의 개입을 지나치게 우려한 나머지 베트남에서 보다 적극적인 전략을 추구하 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한국전쟁에서 미국은 중국의 경고를 무시하고 압록강까지 진격하는 우를 범했다 면 베트남전쟁에서는 그와 반대로 중국은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마오쩌둥의 강력한 언질을 무시하는 바람에 미국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적극적 전략을 채택하지 못했다고 키신저는 주장한다
년 월 닉슨대통령은 파키스탄정부에게 중국과의 대화를 주선해줄 것을 요청한다 당시 마오쩌둥은 불과 한 달 전인 월에 외교부장 천이 로부터 미국과의 관계 개선 건의를 받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던 중이었다 그러나 그런 건의를 한 천이 자신이 가택연금 상태에 놓여있는 등 당시 중국외교는 마비상황이 었다 중국정부의 반응은 늦어졌다 중미 사이에 실질적인 접촉이 가능해진 것은 년 월 닉슨이 제 국을 거치지 않고 저우언라이에게 직접 비밀 친서를 보낸 후였다 오드 아르네 베스타 잠 못 이루는 제 국 년 이후의 중국과 세계 까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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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을 자임했다 이 양면성을 미국은 스스로 전략적 모호성 이란 개념으로 설명해왔다 한편에는
년 이래 미국이 중국과 세 차례 합의한 공동성명이 있다
년
월에 발표된 제 차 미중 공동성명에서 중국은 타이완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근 본 정책으로 천명한 대신 미국은 장기적으로 타이완에 대한 무기판매를 하지 않 을 것이며 점차로 그 규모를 줄여갈 것이라고 약속했다 다른 한편에는 미 의회를 통과한 조와
타이완관계법
년
이 있다 이 법의 제
조는 타이완에 관한 미국의 전략적 이익과 무기판매 공약을 담았다 미국은
타이완이 충분한 자위 능력
을 유지하는데 필
요한 미국의 방어 무기와 용역
의 판매를 공약
했다 타이완이 자위를 위해 어떤 무기가 필요한지에 대한 결정에는 미 의회의 참 여를 보장했다 이처럼 세 개의 미중 공동성명과 타이완관계법 사이의 균형에 의 지하는 미국의 전략적 모호성 기조는
년대까지 유효했던 것으로 간주된다
미국 국내법상 타이완의 정치적 지위를 규정한 미국이 중국
타이완관계법
의 제 조는
과 외교관계를 맺는 것은 타이완의 미래가 평화적 수단으로 결
정된다는 기대를 전제로 함을 명확히 한다 고 했다 제 조는 또한
이 법의 어떤
내용도 국제금융기구나 그 어떤 국제기구로부터 타이완을 배제하거나 추방할 근 거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고 함으로써 국제사회에서 타이완의 국가적 독립성 을 지지하는 근거로 될 수 있었다 그 결과
타이완관계법
타이완과 사실상의 군사동맹을 유지하는 명분으로 활용되었다 년에 중국의 강력한 항의에도 불구하고
대의
은 미국이
예컨대 미국이
전투기를 판매한 것은
미중 공동성명의 취지에 정면으로 위배되지만 타이완관계법에 의거하면 정당화될 수 있었다 한편 오키나와의 위상에도 변화가 있었다 오키나와의 주권은
년 일본에 복
귀한다 그러나 동시에 오키나와는 여전히 미국의 대중국 군사적 전초기지였다 오키나와 운명의 실질적 결정자는 미국인 채로 남았다 오키나와에 대한 주권의 일본 귀속은 일본의 경제성장 등이 역할을 했지만 미국이 동아시아에서 중국과 일정한 타협을 이루게 되면서 아시아 방위에 대한 아시아 동맹국들의 역할을 확 대한다는 닉슨독트린의 맥락에서 나온 것이었고 또한 미일동맹에서 일본의 위상 과 역할을 제고하는 의미를 내포한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오키나와는 미일 군사동 맹체제의 중대한 물적 토대의 하나로 남았다 또 미국의 동아태 해양 군사패권 체 제의 핵심적인 기지로 남았다 그런 의미에서 오키나와 역시 동아시아 대분단체제
63
의 타협적 국면을 반영하면서 일본과 미국 양국에 대한 양속체제의 성격을 띤 다 인도차이나는
년대 초 이후 전개되는 대분단체제의 타협적 국면의 원인이
자 결과를 반영한다 우선 베트남전쟁이 미국에게 초래한 군사적 정치적 경제적 위기는 미국이 중국에 대해 평화공세를 펼친 가장 중요한 원인의 하나였다 과거 한국전쟁은 전후 미국의 재무장을 위한 국내정치적 조건과 함께 국제적 동맹네트 워크를 성립시켰다 이것은 미국의 전 지구적인 패권체제의 주요한 계기의 하나로 작용했다 반면에 베트남전쟁은 미국 패권의 경제적 군사적 그리고 도덕적 및 국 내정치적인 기초에 심각한 위기를 초래했다 닉슨대통령과 키신저가 이 위기로부 터 탈출하기 위해 추구한 선택이 소련 및 중국과의 데탕트였다 그 중요한 목적의 하나가 소련과 중국의 협력을 얻어 북베트남을 평화협상에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인도차이나로부터의 명예로운 퇴장을 모색한 것이다 년
월
일 리처드 닉슨은 괌에서 베트남전쟁의 베트남화 와 아시아 안보
의 아시아화 를 선언한 닉슨독트린을 발표했다
그 결과
년
월 파리에서
베트남전쟁 종결을 위한 협정 이 체결된다 미국은 철군하고 베트남은
년
월 공산주의
로 통일된다 이로써 인도차이나의 소분단체제는 해체된다 이후 베트남은 미국뿐 만 아니라 중국과도 긴장 국면에 들어가 심지어 전쟁도 치르는 등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된다 그러나 베트남의 공산화 자체는 적어도 두 가지 측면에서 동아시아 대분단체제 의 유지에 기여하게 된다 첫째 한국 박정희정권의 안보 불안을 촉발하여 한반도 소분단체제의 군사적 긴장을 심화시킨다 동아시아에 대한 개입주의에서 한 걸음 물러나려던 미국은 동아시아 친미 국가들의 동맹 이탈로 미국 주도 안보질서 자 체가 붕괴할 것을 우려한 나머지 개입주의 유지로 돌아서게 된다 둘째 베트남전 쟁에서의 패배와 베트남의 공산화는
년 중국의 공산화로 시작된 미국의 아시
아대륙으로부터의 퇴장을 완성시킨다 이 사태는 을 위시한 격심한 정치적 반동을 몰고 왔던 것처럼
년 중국의 상실 이 매카시즘 년대 후반 미국의 정치와
사회 전반에서 강한 보수적 반동을 초래한다 그것이 카터행정부 후기의 신냉전주 의의 한 배경이었으며
년대 레이건 행정부의 반공 보수주의의 기반이 되어주
었다 즉 베트남의 소분단체제는 대분단체제가 타협적 국면으로 전환되는 원동력이기 도 했지만 그 해체의 방식은 특히 미국에게 깊은 정치적 충격을 안겼다 미국과
오키나와 태생의 작가 메도루마 슌 은 미군들의 실탄 훈련이 수시로 실시되는 오키나와를 두고 이렇게 묻는다 과연 전쟁이 그리고 점령이 끝났다고 말할 수 있을까 형태만 달리했을 뿐 전쟁도 점령 도 지속하고 있는 건 아닐까 메도루마 슌 지음 안행순 옮김 오키나와의 눈물 논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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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일본 내면의 반공 보수주의는 재활성화되고 동아시아의 다른 소분단체제들 의 군사적 긴장은 다시 높아졌다 이 상황은 미중관계 및 중일관계의 개선을 상당 부분 상쇄하면서 동아시아 대분단체제의 내면적 긴장상태를 유지시키는 작용을 했다 이 점은 한반도의 경우에 특히 두드러졌다 한반도 최초의 핵무기 확산 위기는 년대 북한이 아니라 롯된다
년대 중엽 한국 박정희 정권의 핵무장 시도에서 비
년 한국은 핵무기 원료인 플루토늄을 제조하기 위한 재처리 시설을
획득하기 위해 프랑스와 협력하기 시작했다
년 한국은 매년
루토늄을 생산할 수 있는 재처리 공장의 기술적 디자인을 확보한다
킬로그램의 플 킬로그램이
면 히로시마급 원폭 두 개를 만들 수 있는 분량이었다 미국이 한국의 핵무장 계획을 파악하고 경각심을 갖게 된 것은 도의 핵실험 이후였다
년
월 주한미국대사관은 한국이
년
월 인
핵무기 개발 프로
그램의 초기 단계를 거치고 있다 고 워싱턴에 보고한다 키신저 국무장관은 서울 로 비밀전문을 보내 한국의 핵무장이 초래할 엄중한 결과를 경고한다 그는 한국 의 핵무장 시도가 미국의 안보 공약에 대한 불신 그리고 미국에 대한 군사적 의 존을 줄이려는 목적에서 비롯된 것으로 파악했다 한국의 핵무장은 한국의 전략적 위치로 인해 특히 심각한 문제라고 보았다 그것이 주변국가들 특히 북한과 일본 에 미칠 영향을 우려했다 또한 키신저는 소련과 중국이 한반도 분쟁 발생시 북한 에 핵무기 지원을 보장하게 될 것이라고 보았다 미국은
년
월 이후 박정희정권의 핵무장 시도를 중단시키려는 다양한 외
교적 압력을 행사한다
년
월 제임스 슐레진저 국방장관도 방한하여 박정희
에게 핵무기 프로그램 중단을 요구한다
년
월에는 슐레진저의 후임이 된 도
널드 럼스펠드 국방장관이 박정희정부에 대해 한미 경제 및 안보관계 재검토를 강력하게 위협한다 그 결과 한국은 프랑스와의 핵 프로그램 협정을 취소한다 겉으로는 취소했으나 박정희정권의 핵무장 시도는 내밀하게 계속되었을 가능성을 미국은 의심하고 있었다고 돈 오버도퍼는 시사한다 그는 박정희정권에서 보안사 령관을 역임한 강창성의 증언을 들었다 개발이
퍼센트 완료되었으며
년
월 강창성에게 박정희는 핵무기
년 상반기에는 원폭을 생산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는 것이다 년대 한국의 핵무장 소동은 한편으로는 한미 안보동맹 관계에 긴장을 초래 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 미국은 자신의 안보 공약에 대한 한국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서 그리고 보다 큰 맥락에서는 베트남의 공산화 이후 아시아에서 미국이 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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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된 이른바 신뢰성 위기
에 대한 대응으로서 미국은 한반도
소분단체제의 군사적 긴장을 증폭시키는 중요한 조치들을 취했다 그 하나가 한반 도에 대한 미국 전술핵무기의 존재를 공개하고 북한에 대한 핵무기 위협을 노골 화한 것이었다
년
월 방한한 슐레진저 국방장관은 북한이 남침할 경우
미
국은 핵무기를 사용하거나 더 많은 지상군을 투입할 계획을 갖고 있다 고 밝혔다 뉴욕타임스
는 슐레진저의 이 발언이 미국의 한반도 핵무기 배치를 미국정부
가 공식 확인한 최초의 일이라고 보도했다 도
바로 며칠 뒤 제럴드 포드 대통령
미국은 한국에 강력한 억지력
을 갖고 있다 고 밝힌
다 여기서 강력한 억지력은 물론 핵무기를 의미했다 이 때 한 기자가 미국은 한 국의 방위를 위해 핵무기를 사용할 용의가 있느냐고 물었다 포드는
무엇이 미국
의 국익인가를 결정할 때 최대한 융통성을 유지한다는 것이 미국의 정책 이라고 답변한다 이 발언은 북한에 대한 핵선제사용 옵션을 천명한 것에 다름 아닌 것으 로 주목을 받았다 또한 미국은 같은 시기에 북한에 대한 공격적인 전쟁계획을 노골적으로 공개하 고 이를 반영한 한미합동 군사훈련을 시작한다 제임스 홀링스워스 보고한 이른바
년
월 미국은 주한미군의
소장이 방한한 슐레진저 국방장관에게
일 전쟁계획 을 언론에 공개했다 홀링스워스는
만일 북한이 공
격을 개시하면 전쟁은 폭력적이지만 매우 단시간에 끝날 것 이라고 공언했다 에 대해 포격과 함께 매일
회의 시간차 공습을 실시할 것 이며
적
북한이
공격하면 임진강을 건너 적 군사력의 심장부를 공격할 것 이라고 밝혔다 슐레진 저는 이러한 공격적 전략을
매우 훌륭한 구상 이라고 격려했다
그와 같은 공격적인 전쟁계획을 반영한 한미 합동군사훈련인 팀스피리트 훈련 은
년에 시작된 후 훈련에 참가하는 한미 양국 군대의 규모가 꾸준히 증가했
다
년의 경우
만 명의 한미 양국 군대가 참가했다 주한미군 외에 미국 본
토와 태평양의 미군기지들로부터
만의 군대가 파견되었다 미
함대는
척의 군
함을 참여시켰다 이 훈련은 일반적으로 모의상륙공격 과 공중폭격 그리고 화학 및 핵전쟁 훈련 등을 포함한 것으로 알려졌다 인도차이나 사태를 배경으로 한반도에서 박정희정권이 선도한 군비경쟁에는 탄 도미사일 개발 경쟁도 있었다 북한이 소련으로부터 스커드 미사일을 도입하여 자
졸저
미국의 대한정책과 한국 민족주의
한길사
졸저 졸저 교 북미 핵협상과 한국 통일정책의 비판적 인식
66
한길사
한반도 핵문제와 미국외
체 생산을 시작한 것은 일 개발을 완료한 것이다
년이지만 남한은 그보다
년 앞선
년에 탄도미사
년대에는 공산권이 붕괴되면서 국제적 고립에
직면한 북한이 핵프로그램과 탄도미사일 개발로 한반도 소분단체제의 긴장과 동 아시아 대분단체제 사이의 상호작용이 이루어진다 긴장 조성의 주체는 다르지만 그 원형을 우리는
년대에서 목도할 수 있다 이 때 인도차이나의 완전한 공산
화를 배경으로 남한은 핵무기와 탄도미사일 개발을 선도하고 한미 양국은 그로 인한 양국 관계의 긴장 속에서도 북한에 대한 공격적인 전쟁계획을 수립하고 이 를 반영한 합동군사훈련을 실시하면서 한반도 소분단체제의 긴장을 심화시켰다 그로써 동아시아 대분단체제의 내면에도 깊은 연속성의 그늘을 드리웠다 중국은 중국대로 미국과의 데탕트를 추구하면서도 북한과의 동맹관계를 유지하 기 위해 북한에 대한 경제 및 군사원조를 증가시켰다 타협적 국면의 냉전기 대분단체제에서 미중관계의 성격 미국은
년대에 인도차이나전쟁에서 명예로운 후퇴를 위한 전술적 차원에서
그리고 중소분열을 이용한 소련 견제를 위해 중국과 접근하여 관계정상화를 추구 했다 그러나 미국은 기본적으로 중국에 대해 타협과 봉쇄라는 두 가지 목표를 동 시에 추구했다고 보아야 한다 베트남 통제와 소련 견제라는 공동의 목표를 위해 서 전술 전략적으로 중국과의 협력을 추구하되 한반도 소분단체제에서 북한의 동 맹세력으로서의 중국은 엄연한 견제와 봉쇄의 대상이었다 미국은 타이완에 관해 한편으로 중국의 주권을 인정하였지만 타이완에 대한 미국의 정치군사적 영향권 유지는 미국의 동아태 패권체제의 바로미터의 하나였다는 점도 유의해야 한다 말하자면
년대 중미관계 개선을 추동한 동기와 논리는 미국의 관점에서
도 주적을 견제하기 위해 제 국을 세력 균형 는 개념이 그 가장 중요한 요소의 하나였다 중 하나가 차이나 카드
의 카드로 쓴다 년대에 미국에서 가장 유행한 말
였다
미국의 동아태 해상패권체제 유지를 위해서는 미일동맹 한미동맹 미국 타이완 간 실질적 군사동맹관계 견지가 필수적이었다 이처럼 타이완과 한반도라는 소분 한국의 탄도미사일 개발 첫해인 년 한국은 미국과 탄도미사일 사거리 제한협정을 맺는다 그 때는 킬로미터로 제한했다 년에는 킬로미터로 늘어났다 년에 다시 킬로미터로 확장되면서 러시아와 중국의 항의도 촉발된다
여기서 세력 균형 이란 맥락에 따라 다양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나라들 사이에 권력의 균형이 이루어진 상태 주요 국가들 사이의 권력 분포의 상황 세력 균형을 추구하는 정책 혹은 균형을 이루기 위해 자동적으로 작동하는 시스템 등이다 설리반의 분류를 참고로 해서 재정리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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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체제의 존재와 대중국 관계의 불안정성 자체로 말미암아 미국의 대중국 협력과 봉쇄의 이중적 성격은 불가피했다 미국이 중국과 전술적 전략적 협력을 추구한 시기에도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의 기축은 엄연히 미일동맹 제일주의였다 중국은 국면에 따른 협력의 대상이지만 어디까지나 이질적인 이념과 정치사회질서로서의 심오한 경계대상이었을 뿐 아니 라 일본과의 동맹에 바탕을 둔 지정학적 통제 대상이었다 흔히
년대 초 미중 화해 이후의 미국・중국・소련의 삼각관계를
중국과
미국 사이의 전략적 동반자 관계에 의한 소련 견제 라고 요약한다 그러나 그보다 정확한 것은 이이제이
일 것이다 미일동맹의 관점에서 중국을 이용해
소련을 견제하고 소련에 의거해 중국을 견제하는 것은 미일동맹에게 이로운 입장 이 된 것은 분명하지만 중국도 소련도 미국과 일본에게 이 적인 변화가 없었다 지정학적 긴장의 축이 이원화
라는 상황은 근본
된 측면이 강했다
년대 이래 대분단체제 세 차원의 긴장의 변화와 연속성 탈냉전은 소련의 이중적 붕괴를 의미했다 소련을 중심에 둔 공산권 국제체체의 붕괴와 함께 소련 자체의 공산주의적 국내사회체제의 해체가 동시에 진행된 것이 다 이러한 탈냉전에 중국은 이중의 의미에서 기여했다 첫째 문혁체제에 대한 내 적 반성 위에서 시장화 개혁을 중국이 먼저 시작했다 범공산권 국가들 사이의 내 부 갈등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하나로 묶고 있던 통제적 계획적 평등주의적 사회주 의 경제시스템에 대한 합의가 중국에 의해서 파기됨으로써 범공산권 전반의 해체 에 중국은 중대한 작용을 했다 둘째 중국의 경제개방은 미국이 주도하는 자본주 의 세계체제라는 세계의 중심부로 공산권이 통합되는 데에 동유럽 내부의 경제사 회적 변화와 함께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런데 소련과 동구 공산권의 붕괴로 전 지구적 차원에서 중국 공산주의는 고 립되었다 미국에게 중국은 대소련 견제를 위한 전략적 파트너로서의 의미를 상실 한다 중국 공산주의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고립은 중국의 개방과 세계 자본주의 경제에의 통합 전략 추진의 근본 배경의 하나였다
년 덩샤오핑의 남순강화
와 시장화를 포함한 경제적 개혁개방 가속화 결정은 그의 창의였고 왕 후이의 지적처럼 현대 중국의 역사적 실천에서 나온 반성과 자기수정이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전 지구적 조건에서 생산력 초보 단계의 중국에게 시대
가 허용한 유일한 선택을 덩샤오핑과 그의 동료들이 수용한 것에 다름 아니라는 왕후이 지음 성근제 김진공 이현정 옮김 것이 직면한 도전 특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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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정치시대의 정치
돌베개
중국 굴기의 경험과 그
해석도 가능하다 미국과 일본에게 중국은 잠재적 거대 시장이었다
세기 전반기 제국체제에서
미일연합의 대전제였던 대중국 경제적 경영이라는 공동의 목표는 변화된 형태로 부활한다 이 상황은 미일관계의 경쟁과 균열의 요소로도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제국체제에서와 달리 중국은 반식민지가 아니라 정치군사적 통일성과 경제력을 가진 거대한 실체였다 그런 점에서도 중국은 경제적 통합과 협력의 대상인 동시 에 봉쇄와 통제의 대상으로서 지속된다 지정학적 긴장의 변화와 연속성 냉전체제의 기축이었던 미소 양극질서는 그 한 축인 소련과 공산권의 붕괴로 해체되었고 그것은 유럽질서에서 냉전구조의 완전한 해체로 이어진다 전 지구적 차원에서 미소간의 권력균형이 소련의 일방적인 붕괴로 인해 미국 중심의 단극적 질서
의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그런데 동아시아 대분단 기축의 지정학적 균형에서는 정반대의 현상이 벌어진 다 미국 헤게모니의 약화와 중국의 지정학적 부상이다 이것은 새뮤얼 헌팅턴이 문명충돌론 을 제기한 역사적 배경의 하나이기도 했다 미국인들의 지정학적 인
식에서 미국・서양과 나머지 세계
사이의 대립의 본질이
미소 대립을 중심에 둔 경제사회질서 이데올로기의 이질성의 문제로부터 미중관 계를 중심에 둔 문명적 차원의 이질성의 문제로 옮아가는 전환기적 상황에 대한 미국 지식인사회의 예민한 반응이었던 것이다 그만큼 미국이 이제 대결해야 할 근본적인 지정학적 숙제로서 중국이 부상한 것이었다 유의할 것은 중국의 부상으로 인해서 동아시아에서 지정학적 긴장의 중심축이 소련과 미일동맹이었던 것에서 중국과 미일동맹으로 단순 이행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소련과 미일동맹 사이에 그리고 중국대륙과 미일동맹 사이로 지정학적 긴장이 이원화되어 있었던 상태에서 소련의 퇴장 이후에는 동아시아의 지정학적 긴장의 축이 미일동맹 대 중국으로 단순화되는 동시에 소련의 퇴장만큼이나 중국 의 부상 속도가 빨라서 소련 붕괴로 인해 상당부분 해체되었던 지정학적 긴장이 빠르게 재충전되었던 것이다 특히
년대 들어서 중국의 부상이 본격화하면서 동아태 지역에서 미일동맹
과 중국 사이의 지정학적 긴장은 구체적인 모습을 띠기 시작했다 미국과 일본이 현상유지세력이라면 중국은 기존의 안보질서에서 일정한 수정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 세력이다 한 가지 문제는 둘 사이의 세력균형의 변동이 상당히 빨라서 관련 사회들과 국가권력이 평화적으로 관리해낼 수 있을지 아무도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이다 미국은 상대적인 쇠퇴를 겪고는 있으나 여전히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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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더욱이 일본과의 동맹을 견지하고 있다 그런 만큼 미국이 동아태 지역에서 구축하고 있는 안보질서와 그 구체적인 내용으로서의 동아태 지 역에 대한 미국의 해상 패권은 강력한 실체를 갖고 있다 그러나 중국의 힘도 누 구의 예상보다 급속하게 성장했다 그것은 거의 자연스럽게 중국의 내면적인 자아 개념 즉 자아 정체성 을 확장시켰다 중국의 영토적 자기영역 개념 이 확대되고 있는 것은 그 표현이다
동아태 지역에서 미일동맹의 기득권인 해상 패권과 직
접적으로 대치할 수 있는 접점이 확대되고 있고 그 접점들에서의 긴장이 심화되 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런 추세라고 해야 한다 그처럼 무엇보다도 대륙세력과 해양세력 사이의 지정학적 경쟁이 강화되는 추 세로 인해서 동아시아의 대분단체제는 탈냉전과 무관하게 지속되고 있다 중국대 륙의 통일국가가 갈수록 더 부강해지는 현실 속에서 미국의 동아시아전략의 핵심 요소는 미일동맹 견지와 강화에 두어져왔다 케네스 왈츠와 사유엘 헌팅턴 존 미 어쉐이머 같은 많은 현실주의 이론가들과 로스 먼로를 비롯한 신보수주의 집단 등 많은 지식인들은 중국은 어차피 미국 패권에 도전하게 될 것으로 전망해왔 모든 강대국은 필연적으로 패권을 추구한다고 가정하는
다 의 은
공격적 현실주
의 대표적 이론가인 존 미어쉐이머가 미국에 제안하는 대책 중국의
부상을
방해하고
의 전략이다
억제하기
위한
예방적
봉쇄
모든 현실주의자들이 이에 동의하는 것은 물론 아니
다 중국의 미래 향방의 결정에는 미국의 대중국 인식과 전략이 중요한 변수라는 시각도 있다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는 중국이 미국의 적이 되는 것은 미국이 중국 을 적으로 여기고 중국을 봉쇄하는 전략을 추구할 때 자기충족적 예언 이 될 것 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경쟁자
클린턴행정부와 또 달리 부시행정부가 중국을 전략적 로 규정한 데 이어 오바마행정부가 이른바 아시아 재균
졸고 세기 동아시아의 지정학 미국의 동아태지역 해양패권과 중미관계 국가전략 제 권 호 년 봄 케네스 왈츠는 미국 중심의 단극질서는 특히 동아시아에서 중국의 도전에 직면할 것으로 보았으며 미어 쉐이머는 중국의 현재와 같은 수준의 성장이 지속된다면 동북아에서 중국은 잠재적 패권국가 가 될 것으로 보았다 중국이 잠재적 패권국가가 될 경우 미국은 동북아에 군사적 현존을 유지 하여 이와 대결할 것으로 보았으며 중국의 성장이 지체될 경우 미국은 동아시아에서 군사력을 철수시키 고 대신 일본을 통해 중국을 견제하는 역할을 맡길 것으로 보았다 헌팅턴은 세기 미국 패권에 대한 최 대의 위협은 중국이 될 것으로 예언했다 로스 먼로는 신보수주의의 중국 봉쇄론을 주도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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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정책을 공식화함에 따라 중국에 대한 미국의 우려와 경계가 자기충족적 예언 이 될 가능성은 더 높아질 수 있다 미중 간에는 불행하게도 둘 사이의 지정학적 경쟁을 개연성을 넘어 필연성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근본 문제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대만 문제가 그것이다 미국은 대만에 대한 영향권 유지는 동아태지역 패권자로서의 자신의 위상을 유지하느냐 상실하느냐의 결정적인 바로미터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 미국에게 대만은 태평양 을 미국의 호수로 유지하느냐의 문제의 관건인 것이다 일본에게도 대만의 독립 성 유지를 돕는 것은 동아태지역에 대한 중국의 도전을 억지한다는 의미를 갖는 다
년대 이후 미국이 중국을 전략적 동반자로 간주하던 약
대만 문제에 대해 전략적 모호성
년간 미국은
정책을 취했다 모호성 전
략이란 미국이 대만을 향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뜻했다
미국은 대만의 방위를
도울 수 있지만 반드시 그렇게 하겠다는 공약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전략적 동반자 관계가 해소된 성에서 전략적 명료성 였다
년대 초반 이후 미국은 전략적 모호 정책으로 전환을 시사하는 움직임을 보
년의 대만해협의 미사일 위기와 그에 대한 미국의 대응 방식은
그러한 추세와 연관되어 있다 한편으로 미국의 대만 정책은 여전히 전략적 모호 성의 요소도 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미국은 베이징정부와 타이페이정부의 통 일투쟁에서 궁극적인 중재자
를 자임하지 않겠다는 선택을 한다
는 점에서 미국은 근본적으로 모호성 정책을 유지한다 그런 전제 하에서 미국은 한편으로 하나의 중국 정책
를 견지하는 동시에 대만의 방위
를 지원하는 정책의 유연성을 취할 수 있었다
그러나 모호성 정책은 미국 안
에서 레이건 정부 이래 꾸준히 도전받았는데 특히 이후 명료성 정책으로 크게 변화한다
년의 대만 미사일위기
낸시 터커는 미국이 대만에 관련한 정책
낸시 터커는 년의 대만관계법 도 대만 방위를 위한 미국의 역할에 대해 모호성 을 남겨둔 것으로 이해한다 이 법은 대만의 안보가 위협받을 경우 미국이 취할 구체적 행동에 대해 언급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년 대만 미사일 위기는 년 부시행정부가 전투기들을 대만에 판 매한 것에 대한 중국의 불만 그리고 클린턴행정부가 대만 독립을 주창한 리등휘의 미국 방문비자를 민 주적으로 선출된 지도자의 방문을 막을 수 없다 는 구실로 허용함으로서 대만 분리주의 를 지지했다는 중국의 인식에서 비롯된다 중국은 대만에 대한 중국의 확고한 입장을 미국에게 인식시키고 싶어했다 또한 중국은 미국이 중국과의 경제관계를 고려하여 중국과의 군사적 대립을 회피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대만해협에서 중국이 군사훈련 강도를 높이고 미사일을 발사해도 미국은 비난하 되 행동은 소극적일 것으로 기대했다 중국은 이런 인식을 기초로 대만해협에서 미사일을 발사했다 미국 의 반응은 중국의 예상 밖이었다 미국은 두 개의 항모 전단을 파견했다 항모 니미츠 와 또 다른 항모 인디펜던스 가 이끄는 함대들이었다 한편 이러한 미국의 행동이 모호성 정 책을 벗어난 것인지 아니면 모호성 정책의 범위 안에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다른 해석들이 제기되어 왔다 그러나 터커는 이 사건을 결정적인 계기로 미국 안에서 대만에 대한 명료성 정책으로의 정치적 압 박이 크게 강화된 점을 주목했다 리등휘 또한 미국 내의 이 같은 추세에 고무되어 년 월 한 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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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명료성 즉 유사시 미국의 대응에 대한 명확한 정의
를 추구할수록 이
해협에서 미중간의 군사적 충돌의 위험을 높일 수 있다고 우려한다 유사시 미국 의 선택지는 좁아지고 유연성이 제약될 것이기 때문이다
중국에게 대만은 주권적 및 민족적 정체성이라는 심오한 심리적・정치적 의미
를 갖는 동시에 동아태 지역에 대한 미일동맹의 일방적 해상패권 체제를 극복하 는 문제이기도 하다
미국 하원은
년
대만안보향상법
을 압도적으로 통과시켰다 클린턴행정부가 이 법안의 상원 상 정을 막아서 법으로 확정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사건은 미국 권력집단 안에
서 대만에 대한 전략적 모호성정책의 정치적 토대가 약화되어가고 있음을 보여주 는 증거였다
년 미국
개년 방위전략검토
는 동아시아 연해지역 심지역
가 대만 등을 포함하
이라는 새로운 범주를 미국의
의 하나로 첨가했다
세기 미국의 동아시아전략에서 대만
에 대한 미국의 태도는 더 분명해진 바 있는 것이다 분열금지법 을 통과시킨 것은 대만 민진당
대 핵
년
월 중국이 국가
정부의 독립지향성과 함께 미
국의 대만에 대한 전략적 명료성정책으로의 전환추세에 대한 대응이라고 볼 수 있다 대만문제를 둘러싼 중국과 미일동맹 사이의 긴장은 잠재적인 수준에 그치 는 것이 아니라 두 진영의 군사전략과 군비경쟁체제의 한 결정적인 추동력으로 이미 작용하고 있다 중국은 특히
년 이래 미국이 아시아 재균형전략
을 내세
우면서 아시아의 동맹체제를 재활성화함으로써 중국을 봉쇄하려 하고 있다고 인 식한다 이에 대응해 시진핑은
아시아인을 위한 아시아의 신안보체제
구하는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계
중국은 또한 미국에 대해
건설을 촉
신형 대국관
를 구축하자고 제안해왔다 미국인
들은 이 개념이 미중의 동등한 지위를 강조하는 개념이라고 파악한다 오바마행정 부는 이 제안에 동의를 표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그럴 경우 중국이 동중국해와 남중국해에서 제기하고 있는 다양한 영유권 주장들에 미국이 정당성을 부여하게 될 것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미일동맹의 기득권이라 할 해상패권과 중국의 확장하는 자아정체성 사이의 긴 장은 중국과 일본의 전략개념들의 충돌에도 투영되어 있다 언론인과의 인터뷰에서 대만과 중국의 관계는 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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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수한 국가 대 국가의 관점
년 덩샤오핑의 이
른바
문자 지시 에는 도광양회
같은 시기에 그가 내린
능력을 숨긴다 가 포함되어 있었고 또
문자 지시 라는 것에도
어를 위주로 한다
적은 강하고 아군이 약하면 방
는 내용이 들어있었다
세였던 셈이다 그러나 회 부주석 류화칭
다분히 방어적 자
년대 초부터 이미 덩샤오핑 휘하의 당시 중앙군사위원 의 지휘 하에 작성된 해군 건설 장기계획 은
년에 약진 후기
를 달성하여 제 열도선
을 완성한다는 청
사진을 담고 있었다 그 안에 속하는 해역에 대한 제해권을 확보하고 항공모함을 건설한다고 했다
년에는 서태평양 인도양에서 미 해군에 대항할 수 있는
해군을 건설한다는 장대한 구상이었다
아마코 사토시는
년을 전후해 중국
이 보여준 공세적 태도는 그러한 장기적 구상의 맥락과 연관이 있으며 결코 간과 할 수 없는 대외정책 기조의 변화를 내포한 것일 수 있다고 이해한다 그런가 하면 일본정부는 교
년대에 들어 미국과 함께 이른바 가치 지향적 외 를 강조하면서
호
그에 바탕을 둔
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아소 다로는 그것을
자유와 번영의
년 당시 외무장관
민주주의 자유 인권 법치 그리고 시장경제 에 대한 가치
의 공유에 기초한 외교라고 정의했다
그가 설명하는 자유와 번영의 호
를
형상화해보면 미일동맹의 강화를 전제로 하는 가운데 동북아시아에서 출발하여 동남아시아 인도 카프카스 그리고 발틱 국가들
등의 중앙아시아 중유럽과 동유럽 유럽연합 을 하나로 연결하는 거대한 지정학적 고리가 성
립한다 결과적으로는 중국과 러시아라는 두 유라시아의 대륙세력을 포위하는 모 양새를 띠게 된다 중국의 제 열도선 및 제 열도선과 일본이 미국과의 동맹 견지를 전제로 앞세우 는 자유와 번영의 호 는 미일동맹과 중국의 지정학적 전략 개념들 사이의 내면적 긴장을 예증한다 또한 중국의 확장하는 자아정체성과 동아태지역에서 미일 해상
패권 사이의 긴장과 깊이 연결된다 동아시아・태평양지역에서 미일동맹과 중국 사이의 지정학적 긴장은 미국의 역
사활적 이익
개념과 중국이 말하는 핵심이익 아마코 사토시
지음 이용빈 옮김
혹은
핵심지
사이의 긴장이
중국과 일본의 대립 시진핑 시대의 중국 읽기
한울
아마코 사토시 중국 해군의 제 열도선과 제 열도선에 대한 더 자 세한 분석은 글로벌 시큐 어리티 가 파악한 중국의 제 열도선에는 남중국해와 대만 등이 포함되는데 이는 중국이 자신의 영토적 주권 영역이라고 간주하는 곳들이다 핵심이익 지역들인 것이다 그 맥락에서 주목할 점 하나는 제 열도 선의 영역에 한반도도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제 열도선은 서태평양의 괌 섬을 경계로 삼고 있는데 그 이서 는 일본의 남해 해역과 필리핀을 포괄한다 아마코 사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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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으로 중첩되기 시작하는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중국이 말하는 핵심이 익
은 영토적 주권
영역으로서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
회의 간섭의 위협이 있는 지역을 가리킨다 대만 티베트 남중국해 등이 중국이 명시하는 대표적인 핵심이익 지역이다 중국이 아직은 전후 세계질서에서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체제의 압박으로부터 수세적 입장에 처해온 사정을 반영하는 개념 이라 할 수 있다 반면에 미국은 사활적 이익
이라는 개념을 갖고
있다 이것은 미국의 영토주권의 경계를 훨씬 뛰어넘는 자신의 패권적 영역에 관 계된 개념이다 팍스 아메리카나를 지탱하는 세계의 주요 전략적 요충을 가리킨 다 앞서 언급한대로 미국의 세계전략은
년
에서부터 동아시아를 동북아와
연해지역으로 구분함으로써 대만에서 남중국해를 거쳐 벵갈만에 이르는 아시아대 륙의 동남해안지대가 미국이 새롭게 주목해야 할 사활적 이익 지역으로 범주화했 다 이러한 미국의 사활적 이익 지역은 중국과 같은 잠재적 패권경쟁 세력의 권력 투사는 제한하고 미국의 전 지구적인 패권적 권력투사를 보장하는 세계의 핵심지 역들을 말한다 중국의 자아정체성 확장과 동아태지역에서 미일동맹의 해상패권 사이의 긴장 은 미국이 자신의 패권 영역의 전략적 요충지들에 걸려 있다고 믿는 사활적 이익 과 중국이 자신의 주권 영역이라고 간주하는 지역들에 부여하는 핵심이익 개념의 중첩과 충돌에서 표상되고 있다 대만과 남중국해를 둘러싼 미일동맹과 중국의 긴 장이 그런 곳임은 말할 것도 없다 중국은 더 나아가 주권 영역을 넘어선 주변 지 역에 대해서도 더 깊은 관심을 갖게 된다 한반도가 그러한 지역의 대표적인 곳이 라고 할 수 있겠는데 이는 중국이 스스로를 보호하고 확장하는 데 결정적인 전략 적 요충의 개념이 확장됨을 뜻한다 중국의 힘이 더욱 성장하여 국제사회가 중국이 자신의 주권 영역이라고 간주하 는 지역에 대해 감히 간섭하는 상황을 벗어나서 팍스 시니카
를 구성
하는데 성공한다면 중국 역시 자신의 주권 영역을 넘어서는 지역에 대한 패권적 권력투사를 보장할 주요 지역들에 대해 사활적 이익 이라는 개념을 부여하게 될 것이다 현재로서는 중국이 주권적 영역을 넘어선 지역에서 구현해야 할 중요한 안보이익이 걸려 있을 때 그 지역을 중대이익 지역이라 정의하고 있다 예컨대 중국은 한반도를 중대이익 지역의 하나로 간주한다 미일동맹과 중국 간의 지정학적 긴장은 말할 것도 없이 서로를 향한 핵무기 전 략에도 반영될 수밖에 없다
년
월 처음 핵실험에 성공한 이래 중국의 핵전
략은 기본적으로 주요 적대국에 대한 확증 보복
이었다
김흥규는 중국의 특히 군부 인사들의 언술에 근거하여 중국에게 한반도가 중대이익 지역으로 분류되고 있다고 밝혔다 김흥규 중국과 한반도 통일 미래전략연구원 전문가 토론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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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대까지 중국의 핵전략에서 가상적은 물론 러시아와 미국이었다 그러나
년
대 이래 중국에게 주요한 가상적은 미국이며 미국에게는 중국이다 미국은 러시아와 함께 냉전 종식 후에도 냉전시대 핵무기 운용체계를 크게 변 화시키지 않았다
냉전시대에 구축된 핵무기 운용구조가 여전히 적실한가 라는 질문이 미국의 핵전략 및 핵무기
지휘통제체제에 관련한 미국 의회 문건에서 아직도 논의되고 있다는 것 자체가 그것을 웅변한다
미국과 러시아는
년
하지 않는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미국의 있듯이
미국의
전략핵무기
월 서로를 적이나 위협으로 간주 핵전략검토
배치구조와
에서도 확인된 바
즉응발사체제
는 그대로 유지되어 왔다
미국은 러시
아와 함께 탈냉전 이후에도 핵무기를 국가안보정책의 주춧돌
로 간주
하면서 상대방의 미사일이 발사되었다는 경보가 있으면 즉시 핵미사일을 발사하 는 것을 뜻하는 경보즉시발사
의 정책을 유지하고 있다 이
것은 경보착오로 인한 핵전쟁 발발의 위험성을 내포한 지극히 위험한 정책이다 국제사회는 미국과 러시아에 대해 그 전략의 수정을 요구해왔다 미국과 러시아 모두 그러한 요구를 묵살했다 탈냉전 시대 미국의 핵전략의 역사에서 중요한 문서의 하나는 성된
대통령령
년
월 작
이 있다 이것을 근거로
미 국방부는 단일통합작전계획
을 작성
했다 전쟁 발발 시 우선 공격할 러시아와 중국의 목표물 목록
을 담고
있다 미국이 러시아와의 전략무기감축협상
을 할 때 미국이 유지해야 할
최소한의 핵무기 규모를 판단하는 기초가 되는 것이기도 하였다 미국은
년
중국과 국교정상화를 하면서 핵공격목표에서 중국을 제외한 바 있다 그러나 년의 대통령령의 핵전략 지침에 따라 중국도 로
에 포함되었다 그리고 정식으
에 포함된 러시아와 중국의 목표물 외에도 수백 개의 추가적인 목표물 목
록이 있는데 이것을 비
목표물
이라고 한다 여기에는
중
국과 러시아의 추가적인 목표물들 그리고 북한 이란 이라크의 목표물들이 포함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이삼성
년대 들어서도 지속된다
세계와 미국
이런 맥락에서 보면
한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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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 부시행정부의
핵전략검토
이 중국과 북한을 포함한
개 국가를
잠재적인 핵공격 대상으로 지목한 것은 반드시 부시행정부의 유다른 신보수주의 정책 때문이 아니라 그보다 오랜 뿌리를 가진 미국의 핵전략 사유의 전통의 연장 선에 있는 것이다 년대 말의 시점에서 중국의 목표물들이 미국의 핵무기 즉응발사체제 의 타 격대상에 다시 포함된 데에는
년의 대만 미사일위기로 표출된 미중간의
지정학적 긴장의 표면화가 중요한 배경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은 아이젠하워 행 정부 이래 대만에서의 분쟁 발생시 핵무기 사용을 위협한 일은 없다 그러나 유사 시 대만에 대한 중국의 공격을 다른 수단으로 억지할 수 없다고 판단할 때 미국 이 핵무기 사용을 전적으로 배제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평가이다 미국 오바마행정부는
년
월 공개된 핵정책 검토
에서 핵선제사용을 배제하는 소극적 안전보장 을 재확인했다 미국이 핵 공격을 받지 않은 상황에서는 미국이 먼저 핵공격을 하지 않겠다는 뜻이기도 하 고 비핵국가에 대한 핵무기 사용이나 위협을 하지 않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 데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 핵정책 검토가 두 가지 중요한 예외를 명시했다는 점 이다 첫째 핵무기비확산조약
체제 밖에 있는 국가들은 핵선제사용 배제 대
상에서 제외한다고 밝혔다 이로써 북한에 대한 미국의 핵 선제사용 위협은 변함 이 없다 그래서 이를 두고
뉴욕타임스
협을 강조한 것이라고 분석을 내놓았다
는 사실상 북한에 대한 핵선제사용 위 둘째 이 핵전략 문서는
극단적인 상
이삼성 미 국방부는 미국의 많은 핵무기들이 즉응발사체제에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성명을 발표한 바 있다 년 월 일에 열린 유엔 군축회의에서 미국대표인 크리스타나 로카 는 세 가지를 주장했다 첫째 미국 핵무기는 즉응발사체제 에 있은 일이 없으며 현재도 아니다 라고 했다 둘째 미 국 핵무기는 대통령에게 최대한의 결정시간과 융통성 을 허용할 수 있도록 기획되어 있다 셋째 우발적 발사나 허가되지 않은 발사 를 막기 위한 다양하고 엄격한 절차적 및 기술적 보호장치가 마련되어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 국제적으로 저명한 핵군축 전문가인 브루스 블레 어는 위의 첫 번째와 두 번째 주장은 전적으로 허위이며 세 번째 주장은 사실을 호도하는 주 장이라고 반박했다 그는 무엇보다 미국과 러시아가 오늘날에도 그들의 전략 핵무기의 분의 이상을 즉 응발사태세 에 두고 있다고 말했다 여기서 블레어가 말하는 미국의 즉응발사태세란 미 국이 가동하고 있는 각종의 조기경보체제 가 발사된 것으로 파악한 적 미사일이 도착하기 전에 그러니까 마사일 비행시간인 분 이내에 미국의 핵무기들을 대량으로 발사하게끔 준 비되고 프로그램되어 있음을 말한다 이런 조건에서 보고받은 대통령은 지극히 짧은 시간 내에 핵미사일 발사 결정 을 내려야 하는 엄청난 압박 속에 놓이게 된다 경보장치에서의 인간의 오류나 기술적 오작동 을 체크할 여유를 거의 허용하지 않는 메커 니즘이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핵전쟁장치 가 극도로 예민한 격발장 치 의 성격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오늘날에도 여전하다는 것이다 또한 우발적 및 허가받지 않은 핵미사일 발사를 예방하기 위한 여러 가지 장치들도 결코 충분하다고 할 수 없고 그 결과 국가나 테러집단과 같은 비국가적 행위자들이 정보기술을 활용하여 핵보유 국가들의 핵발사를 유도할 수 있는 위험성도 존재한다고 블레어는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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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에서는
핵공격 상황이 아니더라도 미국이 핵무기를
선제 사용할 수 있다고 밝혔다 그런 경우로 이 문서가 예로 든 것은 화학무기 혹 은 생물무기 상황을 들었다
를 이용한 공격이 우려되는 이 문서가 명확히 밝히지는 않았지만 미사일이 다수 동원되는
상황도 미국은 극단적 상황 으로 규정하고 핵선제사용을 정당화할 수 있을 것이 다 미국은 전통적으로 미사일을 화생방 무기와 함께 대량살상무기 로 규정해왔기 때문이다 결국 미국은 근본적으로 핵선제사용 옵션을 견지하고 있음을 재천명한 것에 다름 아니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미국은 미사일방어체제 건설을 통해 중국의 전략핵무기의 효능을 무력화하려 한다 중국은 그에 대응해 미국에 대한 침투력 그리고 적에 의한 선제공격을 당 했을 경우의 생존능력을 높인 핵무기체계 개발을 지속하고 있다 중국이 미국 전 역을 공격할 수 있는 대륙간탄도탄 체계를 이미 갖고 있을 뿐 아니라 과 같이 더 발전된 이동식 대륙간탄도탄 핵무기체계 를 개발하고 있음을 미국은 예의주시해왔다 핵군비경쟁으로 인한 긴장이 미중관계의 저변에 엄존하고 있다는 사실은 년 여름 미국 언론들이
만일 미국이 중국에 적대하여 대만을 도우면 중국은 미
국의 도시들을 핵무기로 공격할 것 이라는 중국 국방대학 주쳉후 장군의 발언을 광범하게 보도한 데에서도 확인된 바 있다 국은 새로운 대위성무기
년
월 하순 중
를 실험했다는 사실을 확인했
다 중국은 물론 우주의 무기화 경쟁에 뛰어들 의도가 없음을 강조했다
그러
나 이것이 미국의 미사일방어체제에 대한 대응임을 미국인들은 주목했다
중국이 메가톤급 핵단두를 장착하고 를 개발배치한 것은 년이다
킬로미터를 날아서 미국 본토를 공격할 수 있는
인
중국의 은 와 같이 미국 본토 공격용이지만 더 발전된 것이다 고체연료 를 택하고 있어서 발사 소요 시간이 단축되었다 개발이 시작된 것은 년대 말이다
물론 미국의 대위성무기 개발 노력은 훨씬 오래 전에 본격화되었다 년 월 일본의 차 첩보위성 발사도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이것은 년 북한의 대포동미사일 발사 이후 독자적인 첩보위성체제를 갖추기 위해 시작한 사업의 결과로 알려져 왔다 년 월 중국이 탄도미사 일로 위성을 요격하여 파괴하는 실험을 성공한 것에 뒤이어 나왔다는 점에서도 주목을 끌었다 북한 핵위협을 주된 핑계로 대고 있으나 미국 그리고 미일공동의 미사일방어체제 개발 본격화 를 계기로 동북아 강 사이에 가속되고 있는 우주의 무기화 경쟁의 한 측면임을 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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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 핵개발 이후 지
년대 말까지 중국의 핵전략은 기본적으로
최소 억
개념을 벗어나지 않았다 중국 군부 안에서 전략 개념
수정 논의가 일어난 것은
년이었다
제한적 억지
개념이
그것이다 알래스테어 존스턴은 중국이 말하는 제한적 억지 가 제 차 공격 능력 보복능력 뿐만 아니라 재래식 공격에 대한 핵선제공격 능력까지도 포괄하는 공 세적인 핵전략이라고 이해했다
그러나
년대 말 중국전략가들은 중국에서
제시된 제한적 억지 개념은 근본적으로 보복 공격 원칙을 벗어나지 않는 것임 을 강조하는 글들을 발표하기 시작한다 이들에 따르면 중국의 제한 억지 전략 개념은 미국의 전략핵무기들이 더욱 정확한 탄도미사일 및 크루즈미사일로 진화 하고 또한 전략적 미사일방어체제 구축이 추진되는 새로운 상황에서 유사시 중국 의 유효한 보복 공격 능력을 확보하기 위한 것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중국은 한편으로 자신의 핵무기체계를 미국의 선제타격으로부터 보호하여 그 생존률을 높이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데 화 그리고 해상발사탄도미사일
기지의 은폐 및 이동식
시스템의 개발배치 등에 투자해왔다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의 미사일방어망을 성공적으로 침투하는 핵무기체계 다탄두화 및 등 를 개발함으로써 그것을 무력화하는 능력을 향상시키려 노력했 다 나랑에 따르면 중국의 핵전략은 그 기조를 지금까지도 견지하고 있다 그런 가 운데 핵미사일 총수를 중국의 유일한
기 수준에서 그리고 현재 미국 본토를 타격할 수 있는
인
를
기 이내에로 제한하는 절제를 보여왔다
이
는 미국과의 핵군비경쟁을 자제하려는 의도인 동시에 일본의 핵무장을 예방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만일 미국과 일본의 미사일방어망 구 축이 더욱 본격화하고 그 결과 중국의 제한된 전략적 핵능력이 완전히 무력화될 가능성이 높아진다면 중국은
의 개발배치 및 해상발사 핵미사일의 본격 확
대를 포함한 조치에 나설 수 있다 과할 수 없다
중국이 왜 기본적으로 방어적인 보복공격 전략에 스스로 한정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크게 세 가지 설명 이 제시되어 왔다 하나는 중국의 핵무기체계 기술력의 한계를 주목한다 다른 하나는 마오쩌둥 등 중국 지도부의 핵무기 관련 전략적 사고의 특징 즉 전략문화론이다 셋째는 비핀 나랑이 제시하고 있는 것으 로 중국 특유의 당 군 관계론이다 공산당 최고지도부가 핵무기라는 특수한 무기의 사용 여부에 대한 최 종적인 결정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핵선제사용 전략은 선택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선제사용은 적의 공격 징후가 보일 때 적의 핵전력에 대한 선제타격을 감행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적의 공격 징 후 파악 즉시 먼저 발사해야 한다 그만큼 판단과 결정의 신속성을 요한다 정치지도부의 판단과 결정을 기다릴 여유가 허용되지 않는다 따라서 핵선제사용을 염두에 둔 핵정책은 최고지도부가 아닌 야전사령부 에 유사시 핵사용 결정의 권한을 위임하지 않을 수 없다 중국은 모든 중요한 결정의 중앙집중적 구조를 핵전략에서도 유지하기 위해서 그러한 권한 위임을 배제했으며 그 결과 핵선제사용은 중국의 핵전략에서 제외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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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적 핵 균형 혹은 불균형과 미사일방어망 구축을 둘러싼 미일동맹과 중국 사이의 전략적 긴장은 탈냉전에도 불구하고 지속되는 동아시아 대분단체제의 지 정학적 차원의 긴장의 중요한 단면이자 표지
라 할 수 있다
정치사회적 체제와 이념의 긴장 치환에 의한 변화와 지속 년대에 들어 중국의 개혁 개방이 본격화하면서 동아시아 대분단체제에서 공 산주의와 자본주의라는 정치사회적 체제와 이념으로 인한 긴장은 완화된다 그러 나
년대 말 이래 한국・타이완・필리핀 등은 민주화된 반면 톈안먼사태로 중
국과의 정치체제적 이질성이 재확인된다
이로써 정치적 권위주의 즉 국가권
력으로부터 개개 인간의 자유와 그에 대한 정치적 억압의 문제는 동아시아 대분 단체제에서 새로운 중요성을 띠면서 정치사회적 체제와 이념 의 이질성의 중심적 차원으로 자리잡게 된다 권위주의와 민주주의의 이질성이 또 다른 문명과 야만의 이분법으로 부상하는 것이다 결국 대분단체제를 떠받치는 차원의 하나인 정치사 회적 체제와 이념의 이질성 은
년
월
일 천안문에서 벌어진 사태로 인해 자
본주의 공산주의 대립으로부터 민주주의 권위주의 대립의 차원으로 변했다 해체 가 아닌 치환
이었다
미국은 중국과 관계 정상화를 한 후인
년대에도 대만과 비공식적 형태로나
마 적극적인 관계를 유지했지만 미국인들 일반은 대만과의 관계에 관심이 없었 다
년 톈안먼 사태는 미국 대만 관계에 전기를 마련했다 중국의 억압적 체
제와 달리 새롭게 민주주의를 달성한 대만에 대한 미국의 관심과 연대의식이 부 활한 것이다
이것은
년대에 대만이 하나의 중국 을 거부하면서 독립을 공
개적으로 추구하고 이로 인한 대만 해협의 갈등이 미중관계를 긴장시키는 배경의 톈안먼에서의 유혈사태가 중국공산당과 덩샤오핑의 사상적 정치적 신념체계에서 필연적 귀결이었는지 아니면 중국 내부의 개혁파 보수파 사이의 대립 구도에서 덩샤오핑이 정치적으로 이용된 것인가에 관한 해석에서는 서방 학자들의 일반적인 분석 경향과 일부 중국 지식인 사이에 미묘한 차이가 있다 왕단은 보수파의 농간에 덩샤오핑이 잘못 끌려간 것이며 덩샤오핑은 그 결과를 훗날 남순강화로 만회하려 했다 는 해석을 내놓고 있다 왕단 지음 송인재 옮김 왕단의 중국현대사 동아시아 이 문제는 자오 쯔양의 비밀회고록 한국어판 자오쯔양 지음 바오푸 정 리 장윤미 이종화 옮김 국가의 죄수 자오쯔양 중국 공산당 총서기 최후의 비밀 회고록 서울 에버 리치홀딩스 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의 차이와도 관련이 있다 에즈라 포겔이나 마크 블레처 등은 중국의 정치시스템과 지도자들의 신념체계상 피하기 어려웠다고 보는 쪽이다 포겔은 학생 운동에 대한 대처를 덩샤오핑이 주도한 것으로 설명한다 월 일의 논설도 직접 주도했고 계엄령 결정과 집행도 주 도한 것으로 파악한다 마크 블레처도 그것 을 필연적 사태로 보는 쪽이다 필자는 큰 틀에서 보면 유혈 사태 자체는 불가항력적 사태는 아닐 수 있었다고 본다 다만 시위대의 운동이 온건한 개혁운동으로부터 일당독재체제 자체를 문제 삼는 제도적 민주개혁 운동으로 진화할 경우 근본적인 충돌은 피하기 어려웠 던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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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가 된다 보통 현실주의자들은 국내체제의 성격이 그 나라의 국제관계에 큰 영향을 미친 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국내체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주로 자유주의적 국제 정치이론에서이다 그러나 교조적인 현실주의자들을 제외하면 상당수 현실주의자 들도 나라들의 국내체제의 성격이 국제관계에 의미 있는 차이를 만들어낸다고 본 다
예컨대
아론
프리드버그
는
와 마찬가지로 미국과 중국의
패권경쟁
존
미어쉐이머 은
필연적이라고 보는 현실주의자에 속하지만 미중간의 국내정치체제의 차이가 또한 미중관계의 미래에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고 본다 한 나라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이 고 다른 하나는 권위주의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두 나라 사이의 경쟁에 중요한 추가적 동력이 된다는 프리드버그의 지적은 타당성이 있다 그의 주장처 럼 이데올로기적 간극은
두 나라 사이에 불확실성을 줄여서 경쟁을 완화시킬 수
있는 조치들을 취하는데 장애물이 되며 상호 적대의식과 불신의 원천이 된다 물론 이러한 주장은 데이비드 샘버그가 지적하듯이 민주주의 국가들끼리는 서 로 싸우지 않는 반면 민주주의 국가와 독재국가는 서로 싸우기 쉽다고 보는 자유 주의 국제정치학 전통의 민주평화론과 상통한다
그러나 이 글에서 필자가 중
국과 미국에 관련하여 하는 얘기는 민주주의 국가와 독재국가 사이의 갈등 여부 에 관한 민주평화론에서 도출한 것은 아니다 굳이 민주평화론에 의지할 필요도 없이
정치사회적 체제와 이념 에서 이질적인 사회들 사이에서 정치사회적 및 이
데올로기적 긴장이 갈등 촉진적 효과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은 결코 특정한 이론에 구애되는 것이 아니다 텐안먼 사태는 대분단 기축관계에서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긴장을 초래했지만 타이완해협의 소분단체제에도 깊은 충격을 주었다 타이완에서 독립 추진세력이 활성화된 것은 그 결과였다 양안관계라는 소분단체제는 탈냉전 후에도 심각한 긴 장을 겪는다 이 긴장은 다시 대분단의 기축인 미중관계를 긴장시키게 된다 마침 내
년의 타이완해협의 미사일 위기가 벌어지는데 그 원인은 텐안먼 사태
와 결코 무관하지 않았다 년대 중엽에 사뮤엘 헌팅턴은
세기 세계질서에서의 기본 갈등의 소재를
문명 충돌에서 찾고 그 중요한 요소로 서양과 이슬람의 대립 못지않게 중국 문명 과 서양 문명의 이질성과 그로 인한 긴장의 필연적 발전을 예견했다 그 때 헌팅 턴이 염두에 둔 중국과 미국 사이의 문명적 이질성은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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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양식 차이는 이미 아니었다 정치적 민주주의와 권위주의 사이의 문명적 긴장 이 그 핵심을 이루는 것이었다 년대는 그처럼 서양 중심의 시각에서 중국의 문명적 이질성을 개념화하는 헌팅턴 류의 문명충돌론이 풍미했다면
년대 들어서는 중국 지식인사회가 중
국 중심의 관점에서 문명 담론을 주도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년대
에 들어 중국 지식인사회는 문명국가 론을 광범하게 수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 다 이 담론은 정치적 민주주의와 권위주의의 구별 그리고 그에 바탕한 문명과 야만으로의 차별화를 서양적 보편주의로 규정하는 경향을 띤다 이 관점에서는 중국의 국가와 사회가 머물러 있는 권위주의 질서는 야만이 아니다 다만 기준을 달리하는 대안의 문명 일 뿐이다 이로써 서양적 보편주의를 무력화하고 중국의 정치사회질서를 하나의 문명적 대안으로 내세우는 것이다 이러한 문명국가론은 주로 정치사회적 체제와 이념의 차원에서 과거 공산주의 자본주의 사이의 냉전적 이념 대결을 대체한 문명론적 긴장을 재충전시키는 한 요소가 될 수 있다 중국 지식인들의 문명국가론은 헌팅턴의 문명충돌론을 포함한 서양 중심의 문 명 담론을 반격하면서 새로운 문명의 기준에 대한 논의를 모색하는 움직임이라고 할 수 있다
년대 들어 중국 학계에서 부각되고 있는 천하 개념을 중심에 둔
새로운 담론들 예컨대 자오팅양의 천하체계 론
과 쉬지린의 신천하주의
도 중국적 문명 담론의 한 양상이다 그런가 하면 인 국가의 대두가 아니라
천년의 연면
년
등
중국의 대두는 일반적
과 끊어지지 않고 연계되어 있는 위
대한 문명의 부흥이며 인류 역사상 들어본 적이 없을 정도의 초대형 문명국가의 대두인 것이다 라는 장웨이웨이
류의 문명국가 담론도 부상해왔다
진정한 민주 와 정의로운 세계질서 의 기준이 무엇인가에 대한 중국 지식인들 의 공세적 문제 제기는 더 빈번해질 것이다
서양적 보편주의를 대체하는 새로
운 문명 기준을 제시함으로써 정치사회적 체제와 이념의 이질성에서 비롯되는 긴 장을 중국 중심적으로 극복하려는 비전도 제시될 것이다 이러한 논의는 표현과 양심의 자유를 비롯한 인간의 기본권 개념에 기초한 서구적 민주주의를 상대화하
자오팅양
이삼성 세계와 미국 지음 노승현 옮김
한길사 세기 중국의 세계인식
도서출판 길
쉬지린 다함께 누리는 보편성 신천하주의 란 무엇인가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주최 국제학술회의 동아시아 제국의 개념사 한림대학교 국제회의실 춘천 아마코 사토시 쪽 중국적 보편주의 를 담은 천하 혹은 문명 담론과 중화민족 부흥 담론 사이의 거리는 그렇게 먼 것이 아닐 수도 있다 년 중국공산당 제 차 당대회 정치보고 가 중요하게 제시한 슬로건에는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 이라는 개념이 있다 아마코 사토시의 지적처럼 이것은 년대 후반 이후 동아시아 각국 에서 활발하게 논의하기 시작한 동아시아 공동체 론과 미묘한 불협화음을 내포한다 아마코 사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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려 시도할 경우 중국판 근대초극
론으로 빠질 가능성도 없지 않을 것이
다 중국 지식인들에 의한 이 같은 문명 담론 특히 문명국가론과 천하 담론은 년대 들어 주로 일본이 주도해온 동아시아 공동체 론에 대한 대안 담론의 성격을 띠고 있다는 시각도 없지 않다 중국의 문명국가론은 일본 주도의 동아시아 공동 체론에 더 이상 연연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내포한 것으로 해석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일본의 아마코 사토시
는 중국의 문명국가론은 일본이 미국의 참여를
전제로 개진해온 동아시아 공동체 논의를 대체하여 중국이 주도하는 독자의 아 시아 신질서 구상으로 나아가는 논리적 기초로 작용할 것이라고 풀이한다 문명국가론이나 천하론은 주로 지식인사회의 문명 담론이다 더 직접적인 문제 는 중국 국가권력의 정치이념과 미국의 정치사회 사이에 존재하는 문명적 거리이 다 이 점은 데이빗 섐버그가 잘 포착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많은 관찰자들은
중미관계는 냉전 종식으로 이제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롭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중국이 마오주의 이념을 폐기했을 수는 있다 그러나 중국 공산당은 마르크스주의적 사회주의
또는 레닌주의적 권위주의
를 버리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중국 공산당은 대국주 의 이념
을 버리지 않은 것 또한 분명하다
이것은 미국과 일본을 긴장시키는 중국 공산당의 정치적 정체성 문제이다 반면에 베이징 또한 여전히 미국으로부터 직접적인 이데올로기적 위협을 인식한 다 섐버그는 후진타오
전 주석이
차 전원회의에서 발언한 내용을 주목한다 을 서양화
년
월 제 차 중앙위원회의 제
우리는 국제적인 적대 세력들이 중국
하고 분열시키기 위한 그들의 전략적 음모를 강화하고 있으
며 그들이 장기적으로 침투하려고 하는 주요 무대가 이념과 문화의 영역이라는 사실을 똑바로 인식해야 한다
그런가 하면 미국인들은 반공주의를 견지하고 있
고 민주주의 자유 개인주의 그리고 인권에 대한 생래적인 신념들이 미국의 대 중국 인식과 정책의 저변을 이룬다 섐버그는 결국 자유주의에 바탕을 둔 미국적 예외주의와 전통적 동아시아 세계 에서 문명과 질서의 중심을 자처해온 중국적 예외주의 사이의 긴장과 정치체제의 차이가 맞물리면서 두 나라 사이에 이데올로기적 대결이 지속되고 있다고 말한다 두 나라 사이의 이데올로기적 정치적 분열은 항상 존재했지만 더 큰 전략적 이 익을 위해 자주 순화되곤 했다 그러나 더 큰 전략적 공동 이익이 더 이상 존재하 지 않는 오늘날은 이념적 및 정치적 차이들이 뒷전으로부터 미중관계의 전면으로
아마코 사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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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것이다 미국의 반공주의 이념에 있어서 공산주의의 핵심은 사적 재산이나 자유기업 과 공존할 수 없는 집산주의적 경제체제가 그 하나라면 개인과 그의 사적 세계를 인정하지 않고 공산당 일당독재가 지배하는 당 국가 일체주의 적인 정치시스템이다
년대에 중국의 경제체제가 시장화로 나아가는 변화를
보여왔으나 로널드 레이건의 집권기였던 이 시기는 오드 아르네 베스타의 지적과 같이 미국적 보편주의 즉 근본주의적 반공주의의 실질적 급진화가 전개된 시기 이 기도 하였다 이 역시 미중 간의 전략적 제휴에도 불구하고 중국대륙과 미일동맹 사이의 정치사회적 체제와 이념에서의 긴장이 근본적으로는 견지되었던 한 원인 이다 역사심리적 간극의 차원 탈냉전의 세계에서는 인간의 사회경제적 삶의 양식을 둘러싼 이데올로기적 갈 등은 크게 해체된다 유럽에서는 냉전체제 안에서 이미 전전의 역사문제가 해체되 었기 때문에 탈냉전은 유럽에게는 유럽통합의 내면적 공간적 확장을 향한 디딤돌 이 된다 반면에 동아시아에서 이념적 대결의 해체는 통합을 위한 디딤돌이 아니 라 한편으로 사회들 사이의 갈등의 정신적 측면인 역사심리적 간극의 전면 등장 을 의미했다 그래서 동아시아에서 전전의 제국체제와 전후의 대분단체제 사이에는 역사 의 문제를 둘러싸고 변화와 함께 연속성이 존재한다 여기서 역사는 사회들 사이의 갈등과 상처의 문제이다 냉전시대에 역사문제는 이념의 차원에 밀 려서 상대적으로는 주변화되어 있었다 일본은 동아시아 대분단체제라는 두터운 장벽 안에서 냉전기 내내 역사문제를 망각할 수 있었다 당시 국제사회에서는 공 산주의 혁명 대 반공산주의가 지배적 담론이었고 제국 시대의 과거사 문제는 결 코 중심에 있지 않았다 하지만 동아시아에서 그것은 해체가 아닌 동결의 상태였 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문제는 탈냉전과 함께 이 지역질서에서의 일차적인 문제의 하나로 쉽게 복원될 수 있었다 이념은 퇴장하고 대신 역사문제가 그 공백을 메우 게 된 것이다 그간 응결상태로 보존되어 있던 동아시아 사회들 간의 역사심리적 간극은 탈냉전과 함께 해소되기는커녕 오히려 더 첨예해진다 탈냉전과 함께 동아 시아의 역사 담론은 민간에서는 해방기를 맞고 정부는 사회 여론에 더 민감해져 서 역사는 정치 담론의 전면에 부상했다 혁명 대 반공의 담론 체계가 붕괴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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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지적 폐허 위에 역사 담론이 지배적 위치에 올랐다 냉전에 들어 일본 정치사 회의 주역이 된 전후세대의 일본인들은 거의 반세기를 망각하며 지냈던 역사문제 를 갑자기 맞닥뜨려야 했다 그것은 그들에게 황당하고 생경한 문제였음에 틀림없 었다 이 같은 역사인식의 이질성은 과거 냉전시기 이념적 대립을 대체해 일본 미일동 맹 과 동아시아의 다른 국가들 사이에 무시할 수 없는 마음의 장벽을 드리우게 되었다 이 역사심리적 차원의 간극은 탈냉전 후의 세계에서 과거 각 사회에서 공 산주의와 반공주의를 대신해 새롭게 중요한 정치적 이념 자원으로 떠오른 민족주 의와 결합하면서 역사적 기억의 정치는 더 치열해진 것이다 중국은 경제성장이라는 업적주의가 한계에 직면할 수 있고 공산주의가 지녔던 이념적 자원의 역할도 종식된 지 꽤 되었다 중국 권력엘리트는 대체 이데올로기 개발의 숙제를 안게 되었다 제국주의 타도 즉
치욕의 세기 를 종식시켰다는 것
은 중국공산당의 유서 깊은 정통성의 주요 기반이었지만 그것이 상대적으로 더 큰 중요성을 갖게 된 것은 특히
년대 이래 공산주의라는 이념이 퇴장한 폐허
위에서였다 이 시기 이후 중국에서 이른바 담론이
극적인 증가 를 보인다
국치 한편 일본은 약
와
무망
년에 걸쳐 경
제침체와 저성장사회의 현상으로 깊은 불안의식에 시달린 바 있고 아직도 그 후 유증이 있다 전통시대 이래 일본의 정치 및 문화전통에 자리 잡은 동아시아질서 에서의 경계인적 의식 은 유서 깊다 이러한 요인들은 대분단체제에 이미 내재한 역사심리적 간극의 정치화를 해소하기보다는커녕 더 심화시킬 가능성을 안고 있 다 년에서
년에 이르기까지 사실상의 일당 지배체제를 구축한 일본 자민
일본에서 공부하는 한 중국 유학생이 일본의 대학 강의실에서 체험한 중일 두 나라 청년들 사이에 존재 하는 역사인식의 간극은 그 점을 여실히 드러내준다 그는 이렇게 증언했다 학생들의 이야기를 들어보 면 중 일 양국 학생의 지식수준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국 학생은 차 세계대전까지의 중 일간 역사에 대해 잘 알고 있지만 최근 년간의 일본의 발전과 중 일 관계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반면 일본 학생은 과거 년간의 중 일 마찰 특히 일본이 차 세계대전 당시 중국을 침략한 사실에 대해서 거의 모르며 중국과 한국 학생이 역사를 중시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런 차이 때문에 중 일 양국 국민이 서로 입장을 바꾸어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일본인은 아베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당 연한 것으로 여기며 다른 국가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중국과 한국의 국민 은 이에 불만을 표하며 분노를 느끼고 있는데 이런 시각의 차이가 학술계와 정부의 태도에서 드러나고 있다 최근 양국은 계속해서 자신들의 입장만을 강조하며 서로의 의견에 귀 기울이지도 상대의 입장에서 문제를 생각하지도 않는다 황시 조선일보 년 월 일 폴 코언은 년대의 국치 담론이 년 이래의 공화국 시대의 국치담론과의 차이점도 지적한다 년 이래의 공화국 시대에는 제국주의의 침탈에 대한 중국 정치체의 반응 능력의 결함에 대한 지적이 많았던데 비해서 년대의 그것은 제국주의에 저항하고 그것을 타도함으로써 국치 를 씻어낸 공산당 지도하의 중국 인민의 과거 업적이 강조된다 그래서 현재의 국치 담론에서 치욕은 년에 갑자기 사라진다는 특징이 있다 폴 코언은 여기에 반영된 민족주의의 부활 은 특히 년 톈안먼 사태 이후 마르크스 레닌 마오이즘의 권위가 급속하게 퇴조하는 상황에서 덩샤오핑과 장쩌민을 비롯한 중국 지도부가 애국 교육 을 통해서 민족주의를 공산주 의 이념에 대한 대체 자원으로 선택한 점도 작용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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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의 주류인 보수세력은 청일전쟁 러일전쟁 등의 제국주의 전쟁의 도발 그리고 타이완과 한국의 식민지화의 역사적 합법성을 주장함은 물론이고 개념 자체를 부정하는 태도를 견지했다
침략전쟁 의
년 자민당 일당체제의 붕괴 그리고
탈냉전에 따라 중국을 포함한 동아시아와의 소통이 시작되면서 보수세력을 포함 한 일본 정치권은 역사 반성 문제를 본격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한다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인정하고 사죄한 고노 요헤이 노 담화 와
년 무라야마 도미이치
년
월
관방장관의 고
가 이끄는 사회당정권이 주도
해 식민지배에 대한 역사 반성을 공표한 무라야마 담화 등이 그런 움직임을 대 표했다 그러나 국내 일본 전문가들의 지적과 같이 일본 보수세력의 역사관을 견제하던 사회당이
년 몰락하면서 일본 정치세력은
본의 상징으로 여겨지던 히노마루
총보수화 된다 과거 군국주의 일
와 기미가요
는 국기와 국가로
법제화된다 평화헌법의 개정문제를 다루기 위한 헌법조사회가 국회에 설치된 것 도 국제공헌이라는 명분으로 일본의 군사적 역할의 확대를 추진하기 시작한 것도 모두 이 무렵이었다 다른 동아시아 사회들의 역사 담론이 활성화된 것과 때를 같 이하여 일본의 역사 담론은 보수적인 자기방어와 자기합리화의 성격을 강하게 띠 면서 더 거칠어지기까지 한다
년대 아베 신조
대해 취한 태도는 그것을 잘 보여준다 과학상을 한 시모무라 하쿠분
정권이 역사 문제에
수상 아베 신조와 그의 정권에서 문부 은
년 자민당 내 의원연맹이 난징대학
살의 역사를 부정하는 책자를 발간했을 때 그 핵심 인물들이기도 했다
아베정
권은 전시 여성의 성노예화에 대한 제국 시대 일본 국가권력의 책임을 인정했던 고노담화를
년 월 끝내 검증 이라는 이름 아래 사실상 폐기하고 만다
고노담화는 차 세계대전 중의 위안소 가 일본군 당국의 요청 으로 설치되었고 군이 위안소 설치 관리 와 위안부 이송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역사의 진실을 회피하는 일 없이 교훈으로 직시 하겠으며 역사 연구와 교육을 통해 같은 잘못을 절대 반복하지 않겠다 고 했다 진창수 일본 정치권의 변화와 아베 정권의 역사인식 도시환・박진우・서현주・장세윤・진창수・최 운도・하종문 지음 일본 아베 정권의 역사인식과 한일관계 동북아역사재단 년 일본정부는 중국과 한국의 강력한 항의에 따라 아시아의 이웃나라들과 관련된 역사교과서검정기 준의 하나로 국제적 이해와 협력 의 정신을 고려하도록 하는 이른바 아시아 이웃나라 조항 을 규정했다 그러나 년 월 당시 문부과학성 고위관료로 있던 하쿠분 시모무라는 이 조항이 규정된 이후 학교들은 더욱 마르크스 레닌주의적으로 되어 일본역사에 대한 자학적 메조키스 트적 관점으로 흐르고 있다 고 주장한 바 있다 또한 당시 나카무라 나리아키 문부과학성 장관은 일본 제국군대의 성노예와 강제징용이라는 용어들이 학교 역사교과서에 자주 언급되는 것은 좋지 않다 고 말 했다 이로써 이른바 아시아 이웃나라 조항 을 부정한 것이었다 제 차 아베 내각 은 년 내각회의에서 고노담화 발표 전에는 일본 정부가 발견한 자료 에 일본군이나 관헌에 의한 군 위안부 강제 연행을 보여주는 직접적인 기술은 발견할 수 없었다 고 결정 했다 제 차 아베내각 현재 에서 아베 총리는 년 선거 과정에서 고노담화 수정을 언급했다 년 월에는 국회에서 위안부 강제 동원의 증거가 없다 고 발언했다 결국 아베내각은 년 월 일 고노담화 검증보고서를 발표했다 이 보고서는 일본군이 위안부를 강제 연행한 자료가 없다 고 강조 했다 고노 담화 발표 이후 위안부 문제와 관련돼 건 이상의 자료가 새로 발견된 바 있으나 이 검증보 고서는 모두 무시한 것으로 평가된다 차학봉・안준용 고노담화 검증 논란 고노담화 계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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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안에는 일본의 역사의식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많다 그러나 미국의 동아시 아 전략의 기본은 어디까지나 일본과의 연합을 통한 중국대륙을 포함한 아태지역 의 통제와 경영에 있다
일본의 역사 반성 거부로 인한 동아시아의 국가 간 긴
장은 미국에게 한편으로는 부담스러울 수 있다 그러나 기실
년대 후반부터
미일동맹체제 안에서 일본의 군사적 역할의 확대를 촉구하고 일본의 방위역할 강 화와 국제공헌이라는 명분을 앞세우며 일본 보수세력의 평화헌법 개정 내지 실질 적인 해석개헌 을 국제사회에서 정당화하고 뒷받침해 온 것이 미국이라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된다 미일연합에 기초한 아시아 대륙과 아태지역 경영이라는 더 유 서 깊고 근본적인 미국의 지정학적 대전략에서는 일본의 역사 반성 거부로 인한 중일 간의 긴장 유지 자체도 반드시 불편한 것만은 아닐 수 있다 년대 후반 이후 일본의 역사인식의 재경직화가 일본의 군사적 역할 확대에 대한 미국의 희망과 긴밀히 결부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동아시아 대분단체제 내부 의 다차원적 긴장의 상호작용이라는 측면에서도 주목할 점이다 이 시기는 한반도 의 소분단체제가 북한 핵과 미사일 문제로 긴장된 시점이었으며 타이완 독립문제 로 타이완해협에서 중국의 미사일이 발사되고 미국 해군이 중국과 대치하는 상황 이 벌어지면서 미일동맹과 중국대륙의 지정학적 긴장이 부각되는 시기였다 이 무 렵 일본의 역사인식이 미국의 원격지원을 받으며 보수적 원점으로 회귀하고 있었 던 것은 오직 우연은 아닐 수 있다 일본은 전후에 평화헌법 제 조 전쟁과 무력에 의한 위협 및 무력 행사 영구 포 기 에 관한 관한
항과 육 해 공군 및 기타의 전력 비보유 및 국가 교전권 불인정 에
항으로 구성 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일본 국민은 많은 논란과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제 조를 지켜오고 있다 한국전쟁과 냉전의 본격화 이래 미 국이 일본의 무장 강화와 헌법 개정을 독려해온 쪽이었지만 그리고 우익과 년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불과 몇 년을 제외하고는 전 기간을 집권해온 자민당 내에서 개정 움직임이 있었지만 일본 국민은 이를 뿌리쳐온 셈이다 가라타니 고 진
은 그것을 아시아 다른 국가들의 압력 때문이 아니라 파시즘 시대에 면서 곳곳서 위안부 강제동원 국제적 전쟁범죄 위안부 만의 문제로 축소 왜곡 정부가 제 공한 문서만 조사 일본 관여 물증 철저히 외면 위안부 강제동원 부정해온 극우파 학자가 검증 주도 나머진 법조인 앵커 출신 조선일보 한편 도쓰카 에쓰로 일본 류코쿠대학 법학과 교수는 년대 일본 법원의 성노예 에 대한 형사범죄 판결만으로도 일본이 가입한 노예금 지협약 등 국제법 위반을 추궁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에 따르면 년 나가사키 법원은 일본 여성들 을 속여 상하이 위안소에 보낸 인신매매범 명에게 유죄 판결했다 당시 일본 정부는 군의 명예를 위해 인신매매범들에게 군과의 관련성을 부인해달라고 명령한 공고문을 냈다 손제민 미 위안부 등 전쟁책 임 안 물어 일본은 보편적인 인권의식 결여 경향신문 미국정부 고위 관리들은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에서 일본과의 동맹이 기축이라는 명제를 일상적으로 표명 해왔다 최근의 한 예로 미 국방장관 애슈턴 카터는 년 미국의 아시아 재균형 전략을 설명하면서 이 렇게 말햇다 미일동맹은 무엇보다도 지난 년간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평화와 안정의 초석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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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출된 일본인들 자신의 자아의 공격성에 대한 반동으로 그것을 견제하고자 하는 일본인의 초자아
집단적 무의식 의 형성과 지속적 건재 때문이라고 해석
했다 전후 일본헌법을 두고 아메리카 점령군의 주도은밀한 검열에 의해 강요된 것 이라고 말했던 에토 준
의 인식을 비판하면서 가라타니는
총동원체제
하에서 싸웠던 일본 국민의 공격충동 에 대한 일본 자신의 안에서 솟아난 반작용 으로서 그러한 초자아가 생겨났기 때문에 그것은 밖으로부터 강요된 것이 아니라 고 말한다 그는 미국이 전후 일본에 끊임없이 재군비를 압박해왔지만 일본은 거 부해왔다는 점을 그런 맥락에서 강조한다 아베정권은
년에 들어 집단자위권이란 이름의 전쟁할 수 있는 권리를 공식
화했다 동아시아 대분단선의 한 가운데에 있으면서 미국의 군사기지로서의 역할 을 오키나와가 지속하는 가운데에서 그리고 핵우산을 포함한 굳건한 미일동맹을 전제로 일본의 평화헌법은 유지되고 있지만 위태로워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아베 정권은 자위대에게 허용되는 전쟁행위의 대상을 주변사태 로 규정한 기존의 주 변사태법 을 개정하여 그것이 함축한 지리적 제한을 제거해 미국과 함께 전지구적 범위에서 군사행동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중요영향사태법 으로 개정하려 하 고 있다 전후 일본의 역사의식에 남아있는 가라타니가 말하는 초자아 적인 내면으로부 터의 반성의 힘은 과연 대분단체제 기축관계의 지정학적 긴장과 가까이 있는 한 반도 문제의 압박이 증가하는 것처럼 보이는 시대에 과연 이미 많이 형해화된 것 이나마 평화헌법 을 지켜내는 힘으로 지속될 수 있을까 그 힘은 일본의 역사인 식을 성숙시키는 유의미한 힘으로 커질 수 있을까 분명한 것은 아시아 대분단체 제의 정신적 측면인 역사심리적 간극의 폐쇠회로를 뚫어내는 진정한 힘은 주변국 가들의 정치권력이 주도하는 정치외교적 압박이 아니라 일본 사회 안으로부터 나 오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가라타니가 말하는 일본인의 평화주의 적 초자아가 지속하고 더 나아가 성숙할 수 있도록 주변 사회들은 어떻게 함께 노력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우리 시대 우리를 포함한 동아시아 사회들에게 주 어진 공동의 숙제이기도 하다
가라타니 고진 지음 조영일 옮김 네이션과 미학 도서출판 년 월 아베는 중원 에서 중요영향사태법 이 말하는 중요영향사태 로 무력사태가 발생하거나 임박한 경우 일본에 전화가 미칠 가능성과 일본국민에 미칠 피해 영향의 중요성을 판단해서 객관적 합리 적으로 결정 한다고 했다 、 동아시아 역사대화의 방식의 전환을 위한 필자의 제안은 산 동아시아 평화포럼에서 있었으며 그 내용은 년 월 시아의 질서와 평화 에도 담았다
년 월 일 한겨레 부산시 공동주최의 부 일 네이버문화재단 열린연단의 강연 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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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션1: 동아시아 전후 질서와 한반도 분단체제, 그리고 역사전쟁] 발제2
역사 교과서 논쟁과 뉴라이트의 역사인식
김정인(춘천교육대학교 교수)
뉴라이트의 등장 한국 사회는
사태를 겪으면서 본격적인 신자유주의 시대에 접어들었다 동
시에 신자유주의 시대를 한껏 누려야 할 보수세력은 정권을 잃었고 정권 교체를 통해 김대중 정부가 들어섰다 이어 노무현 정부가 들어서면서 보수세력은 잃어 버린
년 을 살아야했다 이렇게 보수세력이 와신상담하던 중에 뉴라이트가 등장
하여 순식간에 보수의 혁신 을 상징하는 세력으로 주목받았다 신우익을 뜻하는 뉴라이트는
년에 본격적으로 부상했다 그 해
월 뉴라이
트 운동을 표방한 최초의 단체인 자유주의연대가 발족했다 언론도 힘을 보탰다 동아일보는 뉴라이트 운동을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뉴라이트 운동에 대한 기획연 재물을 두 차례에 걸쳐 게재했다
년
월에는 교과서포럼이 창립되었다
뉴라이트는 자신의 이념으로 자유주의를 채택하여 올드라이트는 물론 진보세력 과의 차별성을 부각시키고자 했다 진보세력과 한바탕 치룰 이념 전쟁의 터로는 고등학교 한국근
현대사
교과서 이하 한국근현대사 교과서 를 택했다 한국근현
대사 교과서의 사관이 반자본 뉴라이트가 친자본
반시장적이고 친북
친시장적이고 반북
좌경적이라는 것이었다 그건
우경적 사관을 갖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
이기도 했다 뉴라이트는 미국의 레이건 정부와 부시 정부 영국의 대처 정부 당 시에 활약했던 신우익이 신자유주의의 개척자로서 자학사관 대 애국사관 프레임 으로 역사전쟁을 도발한 것과 유사한 길을 걸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분단현실 속에서 미국과 영국의 신우익의 반공주의
반사회주의를 능가하는 반공주의가 북
한이라는 적대적 존재를 상정한 반북주의로 재현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뉴라이트는 올드라이트와 차별성이 없다는 비판을 받았다 자유주의를 표방하고 시장경제를 강조하는 일련의 흐름 역시 여기에 묻혀 주목받지 못했다 그런데 미
88
국이나 영국의 신자유주의 체제를 이끈 신우익이 시장의 자유를 강조한 세력과 국가의 힘과 권위 강화를 추구하는 세력 간의 연대이고 이질적인 그들을 하나로 묶은 것이 바로 과거 영광의 재현 이라는 역사이며 역사전쟁을 통해 내적 결속을 다졌다는 사실에 주목해보면 뉴라이트의 역사인식이 갖는 연합성도 속성상 크게 이들과 다르지 않음을 발견하게 된다 신자유주의를 지향하는 뉴 의를 통해 올드
에 반북주
와 결합한 연합성이 뉴라이트의 세력화를 가능하게 한 동력
이라 할 수 있다 뉴라이트가 역사전쟁을 도발하면서 무기로 내놓은 친북좌파 프 레임 역시 이러한 연합성에 근거한 것이었다 뉴라이트의 신자유주의와 시장주의사관 시장 주도의 자유주의 뉴라이트의 세력화는 체 이름에
년
월 자유주의연대 결성으로부터 본격화되었다 단
드러나듯이 뉴라이트는 가장 우선적인 가치로 자유주의를 들었다 무
엇보다 시장 경제 중심의 경제적 자유주의를 강조한다 자유주의연대는 창립선언 문에서
세기 시대정신은 산업화세력의 권위주의도 일부 민주화세력의 민중주의
도 아니다 세계화
정보화
자유화를 온전하게 실현할 한국적 현실에 맞는
세
형 자유주의 임을 분명히 했다 보수세력의 권위주의와 진보세력의 민중주의를 동 시에 비판하며 자유주의에서 뉴라이트의 정체성을 구하고자 했던 것이다 자유주 의연대는 경제적 자유주의 개혁방안으로 첫째 국가주도형 방식에서 시장 주도 방 식 작은 정부 큰 시장 으로의 경제시스템 전환을 통해
만 달러 시대를 개척할 것
둘째 자유무역협정의 능동적 추진을 통해 통상대국을 건설할 것 셋째 모든 특권 을 철폐하고 만인에게 기회의 균등을 보장하되 결과에 대해서는 승복하는 합리적 사회 문화를 창출할 것 넷째 청부
를 권장하며 빈부격차가 아닌 빈곤의 해
소를 추구할 것 등을 내놓았다 첫 번째 개혁방안에서 알 수 있듯이 뉴라이트는 시장과 기업에 토대를 둔 자유 주의를 표방한다 이는
년대 이후 영국과 미국을 중심으로 풍미한 신자유주의
의 논리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신일철은 하이에크 노직
의 자유시장경제론과
의 자유지상주의에 기반한 신자유주의론을 편다 그는 자본
주의 라는 이름의 사회시스템은 시민사회적 전통에 기초한 민영화와 자유 시장 시 스템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인간은 시장적 존재 이므로 시장적 사고가 필 요함을 강조한다 신일철
이러한 시장 주도의 자유주의가
평등 특히
경제적 평등의 요소가 약화된 매우 협애한 민주주의 라는 비판을 받자 뉴라이트 는 경제적 자유의 확장을 통해 번영을 이루는 동시에 공정한 분배의 정의 평등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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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를 구현할 수 있다고 반박했다 한편 박세일은 시장 주도의 자유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뉴라이트의 이념 으로 공동체 자유주의를 내놓았다 법적 표현으로서의 법치주의 정치적 표현으로 서의 민주주의 경제적 표현으로서의 시장주의를 국가운영의 구성 원리로 삼되 여기에 공동체의 결속과 연대 시민의 의무와 권리 책임의식 공익과 공공선을 강 조하는 공동체주의를 결합시키자는 것이 공동체 자유주의의 요체이다 박세일 뉴라이트의 경제적 자유주의 즉 신자유주의적 모색은
년 대통령 선거를 앞
두고 구체적인 정책제안서로 이어진다 뉴라이트정책위원회가
년
월 내놓은
뉴라이트한국보고서 가 그것이다 이 보고서에는 세금 값을 하는 알뜰 정부 활기찬 시장 교육흥국 앞서가는 통상강국 국익 우선의 외교
안보 지속가능한
복지 편안하고 살맛나는 사회 등의 순서로 전형적인 신자유주의적 정책 대안이 담겨 있었다 여기서 제기한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응집한 구호가 바로 선진화 이 다 선진화는 앞선 선진국과의 관계 강화를 지향하는 국제주의의 강조로 이어진 다 국제주의란 앞으로도 미
일 자본주의 선진국과의 관계를 강화해야 발전할
수 있다는 명쾌하고도 단순한 논리다 이는 곧 적극적인 경제 개방을 통해서만이 한국사회가 발전하고 선진화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뉴라이트의 자유주의는
년대 미국 레이거노믹스의 정
책 기조를 이룬 신우익의 신보수주의운동과 맥락이 닿아 있다 그들은 네오콘이란 이름으로 부시 행정부의 핵심 그룹으로 활약했다 네오콘과 뉴라이트의 경제노선 은
표
과 같이 신자유주의 경제정책과 일치하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감세정책이다 부시 정부는 세금 감면을 핵심으로 하는 경기부양책을 밀어 붙였다 명분은 소득세 및 법인세 인하가 기업가 정신의 고취를 가져오고 근로의 욕을 함양시키며 이런 공급 측면의 효과는 장기적으로 투자의 활성화 총세수의 증가 성장의 지속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뉴라이트 역시 법인세와 소득세율의 인하를 통한 투자 및 근로의욕 고취를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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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네오콘과 뉴라이트의 사회경제정책 비교 네오콘
조세 정부부 문 시장
뉴라이트 감세 법인세와 소득세율
감세
인하
작은 정부 효율성
시 공 공 부 경영의
작은 정부 정부조직 축소 기업의 중 규제에서 경쟁으로 공정
경쟁
효율화
민영화
문
지출 억제
산업
규제 완화 경쟁원리 강화
사 회 안 복지연금의료의 전 노동 복지
축소와
효율화 유연성과 정리해고 보수주의적 복지국가 별의 정당화
거래위원회의 전환 통합화 민영화 공무원 감축 규제철폐 출자총액제한제 도 폐지 의료 민영화와 개방 유연성과 정리해고
차
능동적 복지
이러한 뉴라이트의 시장적 자유주의 즉 신자유주의는 무엇보다 친재벌
친대기
업 위주의 시장 관행을 마치 자본주의 시장의 바람직한 질서로 인식하려 한다는 비판에 직면하게 된다 이에 대해 뉴라이트는 분명 시장 중심 원리 의 강조
자유와 시장
를 추구하지만 이것이 곧 평등 가치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라고 항변한
다 진정으로 골고루 잘사는 평등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 바로 자유와 경쟁 그리고 시장 메카니즘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뉴라이트에게 시장은 자본주의 사회의 불평등을 치유하고 자유의 가치 를 지켜낼 수 있는 절대 영역이다 보수단체의 텍스트 분석으로 통해 이데올로기 성향을 살펴본 연구에 따르면 뉴라이트를 포함하여
년대 보수단체들이 반공
보수 시장 중 가장 빈번하게 사용하는 개념은 시장이다 신진욱
년 미
국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경제 위기가 닥쳤을 때도 뉴라이트는 자유주의에 기반한 성장제일주의와 작은 정부
큰 시장을 추구하며 조세 삭감과 규제 개혁에
나섰던 레이거노믹스를 회고하며 미국처럼 시장경제 원칙을 지킨 영국 독일 스 웨덴 아일랜드 등의 성공을 강조했다 역사 교과서 논쟁 속의 시장주의사관 역사 교과서 논쟁 속에서도 뉴라이트는 시장 주도의 자유주의적 시각에서 역사 를 바라볼 것을 강조한다 이를 시장주의사관 이라 부르기로 하자 뉴라이트의 시 91
장주의사관의 출발점에는 식민지근대화론이 있다 식민지근대화론이란 식민지 시 기에 오늘날 한국 현대 문명의 제도적 기초가 닦였음을 강조하는 시각으로 식민 지 시기를 새로운 근대 문명의 학습기 근대문명의 제도적 확립기로 파악한다 뉴 라이트가
년에 펴낸
대안교과서 한국근현대사 이하 대안교과서 는 식민지
근대화론의 시각에 따라 일제 시기에는 일본에 의해 합법적인 경제 운영이 이루 어지면서 상당한 경제성장 이 있었으며 철도 도로 항만 등이 건설되고 교육 위 생 의료 등에서도 발전이 있었다는 점을 부각시키고자 한다 이영훈은 식민지근대화론을 해방 이후 한국경제사와 연결지어 대한민국은 일제 를 통해 이 땅에 들어온 시장경제 체제를 복구하고 발전시켜 오늘날과 같은 번영 하는 시장경제를 성취하게 된 것 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그는 대한민국의 건국에 정치적인 자유민주주의와 함께 경제적으로 자유시장 체제를 국제의 기본으로 하 여 출발 했다는 의미를 부여한다 이영훈 인이 시장 경제에 적응한 바탕 위에
주익종은 일제 시기에 한국 년 건국 당시에는 수정자본주의 체제가
수립되었으나 이러한 시행착오 를 거쳐 자유 시장 체제로 전환되었다고 주장한 다 그리고 이러한 자유 시장 체제를 바탕으로 한국이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고 단언한다 주익종 이대근이 제시한 한국현대사 시기 구분을 보면 시장주의사관에 입각한 현대사 인식 체계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 제 기 제 기 제 기
년
월 년 년
년 경제혼란의 극복과 자유시장경제 확립기 년 경제개발계획의 추진과 고도성장기 년 개방경제체제로의 이행과 경제조정기
이대근이 제시한 구분 기준은 경제구조의 변동과 국민의 경제적 삶의 방식 변 화 그리고 그를 뒷받침해온 정부의 주요 정책 기조의 성격 변화와 이러한 내재적 변화를 가능케 한 대외적 조건으로서의 국제적 계기 등이다 이대근 뉴라이트의 시장주의사관을 대표하는 성과물로는 지원으로 박효종 가 있다
김종석
전상인이 함께 쓴
년에 전국경제인연합회의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참고 자료
고등학교에서 한국사 과목을 가르치시는 선생님들이 대한민국 건국 이
후 한국의 경제 발전 과정을 가르치시는 데 도움을 드리기 위해 작성된 이 자료 의 머리말에는 다음과 같은 시장경제와 기업을 제대로 인식해야 한다는 주장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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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경제와 기업에 대한 왜곡이 선진화에 장애가 된다는 주장은 시장자유주의 적 논리에 입각한 것으로 그 역사인식은 시장주의사관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에서 주목할 것은 한국 경제의 발전 성공 요인에 관한 서술이다 경제개발계획 의 성공적 실천 시장친화적 민간 중심의 경제 발전 대외지향적 성장과 개방 정 책
창업 일세대
민간 기업가들의 등장 등을 성공 요인으로 보는데 이 중 두
번째 네 번째 요인이 시장주의사관의 요체라 할 수 있다 먼저 시장친화적 민간 중심의 경제 발전에서는 한국의 경제개발계획이 주로 정 부가 정책의 방향을 제시하고 민간경제 주체들에게 유인을 제공해서 이를 통해 정책목표를 달성하고자 하는 특징을 갖고 있다고 적고 있다
년대 수출촉진정
책의 경우 어느 품목을 어느 곳에 수출하는가의 거의 대부분을 민간 사업자들이 결정했고
년대 이후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에서도 정부가 직접 기업을 소유하
고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민간 기업인에게 사업권을 부여하고 이를 지원하는 방 식으로 이루어진 점이 다른 개발도상국과 다르다는 것이다 중화학 공업 분야의 주요 기업들이 포항제철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민간 기업 형태로 소유 운영되어 장기적으로 민간 경영의 효율성과 수익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경제성장 에서 시장의 역할을 매우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창업 일세대
민간기업인에 대해서는
년대 수출촉진 정책을 추진하는 과
정에서 일부 기업인들이 두각을 나타내면서 성공한 기업으로 삼성 현대 럭키 선 경 대우 등을 일구어냈고
년대에 정부가 중화학공업을 민간기업체제로 육성
하고자 했을 때 이들 기업인들이 대규모의 기업을 경영할 수 있는 검증된 능력과 기업가 정신을 가진 후보자로 선택될 수 있었다고 쓰고 있다 한국의 경제 성공 사례를 좇고자 하는 개발도상국들에는 이러한
창업 일세대 라고 불리는 기업가
정신을 가진 능력 있는 기업인들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모방에 성공하지 못하는 요인이라는 것이다 특히 이병철 정주영 박태준과 같은 경제적 발전을 일군 기 업가들의 도전정신이 경제성장의 바탕에 깔려 있다는 점을 부각시키고자 한다 종 래에 경제 성공에 있어 시장과 기업의 역할을 이렇게 적극적으로 서술한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할 것이다 뉴라이트의 시장주의사관이 시장 논리가 국가를 압도하는 신자유주의적 시각의 역사관임을 고스란히 드러낸 책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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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라이트의 반공주의와 반북주의사관 반공주의 연대로서의 반북주의 해방 이후 좌우갈등과 남북분단 과정에서 남한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한 반공세 력은 이데올로기로 반공주의를 내세웠다 이후
년이 넘게 권력을 장악한 반공세
력 즉 보수세력의 절대정신 인 반공주의에 균열을 낸 것은 김대중 정부가 추진 한 햇볕정책이었다 바꾸어 말하면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이 보수세력의 반공주 의를 위협했다 세기에 들어 세계적으로 반공시대는 저물어 갔으나 한반도 차원에서 반북주 의의 이름으로 반공주의가 온존한 데에는 남북대결보다는 남북평화의 돌파구를 마련하려는 진보세력에 정권을 빼앗긴 보수세력의 경계심과 반발 여기에 북한의 핵과 미사일 개발로 인한 북미관계의 악화가 원인으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여 기에 보수의 권력 상실감이 대북증오감으로 응집되면서 반북주의는 더욱 공고해 져갔다 그런데 뉴라이트는 자유주의를 전면에 내세우면서 보수의 이념적 보루인 반공 주의와의 거리두기를 시도했다 남북관계와 국가보안법 문제에서 다소 유연한 입 장을 개진한 것도 과거 반공주의와의 차별화를 위한 것이었다 올드라이트들이 반 공주의를 절대시하고 북한을 척결대상으로 보았다면 뉴라이트는 공산주의가 자유 시장경제에 부합하지 않기에 반공주의를 수용하며 남한 민주화의 연장선상에서 북한의 민주화를 도모한다는 것이다
주의나 주장 이론의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
고 공산주의와 얼마나 가까운지를 기준으로 판단하는 반공주의 를 지양하는 뉴라 이트에게는 반공과 반북은 없고 오직 반
수령만 있을 뿐이라는 주장도 등장했
다 하지만 이러한 이론적 노선과 구체적 실천은 괴리를 보였다 보수단체 이데올 로기 개념 구조를 분석한 연구에서 뉴라이트 단체의 반공이데올로기 표출을 분석 한 결과를 살펴 보면 뉴라이트에 속하는 선진화국민회의와 뉴라이트전국연합의 반공 개념의 사용 빈도가 올드라이트인 한국기독교총연합회보다 더 빈번했다고 한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뉴라이트는 자유 시장 경제를 옹호하는 입장에서 반공주의 를 수용함으로써 올드라이트와 반공주의 연대를 구축했다 뉴라이트와 올드라이트 의 반공주의 연대의 양상은 반북주의로 구체화되어 나타났다 뉴라이트의 반북주 의 노선은 뉴라이트가 탄생할 때부터 이미 배태된 것이었다 뉴라이트의 출현과 결집을 촉매한 사건 중 하나가 김대중 정부가 성사시킨
남북정상회담이었다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을 경계하던 보수세력에게 정상회담은 수용불가의 현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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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다 남한을 위협하는 호전적인 적과의 동침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보수세력은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 내내 북한에 대한 인도적 물자 지원의 사용처를 의심 하며 군수품 조달이라 비판했다 사실상 대북 문제는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 내내 보수와 진보를 가르는 전선이었고 뉴라이트도 이런 점에서 올드라이트와 한 배를 타고 있었다 뉴라이트 역시 햇볕정책에 대해 국내적으로는 반공주의와 안보 의식을 잠식했고 국제적으로는 한미관계의 약화를 가져왔으며 북한 인권 문제와 김정일 정권의 실상을 외면함으로써 좌파 정권의 모순을 노정한 실패한 정책이라 고 비판했다 이러한 현실 인식과 함께 뉴라이트의 반북주의를 고양시키는 데 활용되는 논리 중 하나가 문명론이다 뉴라이트는 북한을 반문명사회로 본다 이영훈은 인간 정 신의 자유를 철저히 말살하면서 인민을 기아의 늪으로 몰아넣는 북한의 수령 체 제는 처음부터 인간 본성에 거슬리는 반문명이었다고 단언한다 이에 반해 남한의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는 인간본성인 자유와 이기심이 한껏 고양되는 가운데 한반 도에서 문명사가 시작된 이래 최대의 물질적 정신적 성과를 축적했다는 것이다 이영훈
그렇기에 자유 없는 반문명의 북한에 변화를 요구하거나 기
대하는 것은 불온 하다 북한은 결국 망한다는 게 뉴라이트 반북주의의 결론이다 북한 붕괴에 대해서는 조기붕괴론보다는 언제 붕괴할지 모르지만 서서히 국가 해 체를 향한 과정을 겪고 있다는 점진적 국가해체론의 입장이 다수였으나 이명박 정부부터는 급변사태로 인한 북한의 붕괴를 예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한편 뉴라이트는 올드라이트와의 반공주의 연대를 통해 공격과 경쟁 대상인 진 보세력을 종북으로 몰아갔다
종북은 우리 시대의 몽매주의요 반동적 모험주의
전복주의일 뿐 결코 진보로 대우받을 수 없다 대한민국은 종북의 준동으로 지성 의 착란 국가적 분열 자유민주주의적 체제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는 것이다 반북주의보다 강렬한 종북주의의 등장은 진영 간 이념 갈등의 골이 더욱 깊어지 고 있음을 상징한다 역사 교과서 논쟁 속의 반북주의사관 뉴라이트의 반북주의사관은 대안교과서에 체계적으로 제시되면서 상당한 파문 을 일으켰다 기존 한국사 교과서들이 북한사를 한국현대사의 틀 안에 포함시켜 서술한 것과는 달리 대안교과서는 맨 마지막에 보론으로 배치했다 북한사는 대한 민국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북한의 건국 방
전쟁과 전체주의 체제의 시작 국
경제 병진과 주체사상의 등장 권력 세습과 김정일 시대의 개막 탈냉전 시대
의 도래와 북한의 위기 등의 순으로 서술되었는데 특히 탈냉전 이후 북한의 위기 부분에서는 탈북행렬 국가 주도의 범죄활동 무너지는 수령체제 등의 항목을 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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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북한의 현재를 붕괴론적 시각에서 서술하고 있다 또한 대안교과서는 시장주의사관에 반북주의사관을 덧붙여 시장경제를 공산주 의와 대비시키고 남한을 북한과 비교하면서 북한을 비판하고 있다
년에 가장 뜨거운 논쟁거리였던 교학사 교과서는 이보다 더 강화된 반북주 의사관을 제시했다 자유 민주 세력과 공산주의 세력의 대립을 강조하는 반공주의 가 교학사 교과서 현대사를 관통하고 있다 가령 친일파 청산이 무산의 이유도 경찰이 치안 유지와 공산 세력 저지의 공로를 주장하며 반발한 것에 초점을 맞추 고 있다 특히 반북주의가 강렬하다 반북주의사관은
전쟁 당시 북한이 남한
점령 지역에서 펼친 정치에 대한 서술에 잘 드러나 있다
년 이후 대한민국사에서도 북한 공산주의는 늘 위협적이고 사사건건 현실 에 개입하는 주체로 그려진다 이러한 서술은 나머지
종의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
서에는 찾기 어려운 교학사 교과서만의 특징이다 교학사 교과서는 대한민국은 건 국 과정부터 공산주의의 도전을 강하게 받았다고 쓰고 있다 농지개혁도 공산주의 세력이 민중에 침투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설명된다 민주주의 발전 과정에서도 북한이란 존재는 늘 질곡이 된 것으로 묘사된다
년에 민주당 정
부 하에서 각종 개혁이 이루어질 때도 김일성은 남북 연방제를 제안하는 등 은밀 한 적화를 기도하였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장면 정부는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했 다고 비판한다 북한과의 대치 상황에서 군비 축소를 약속하고 사회적으로 치안 이 어려운 상황에서
여명의 경찰을 해고하고 경찰력의 대부분을 타지로 전출
시키는 등 경찰의 치안 능력을 약화시켜 혼란을 자초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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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정부의 경제 개발 계획 추진도 박정희는 공산주의와의 대결에서 승리하 려면 경제적으로 그들을 압도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고 쓰고 있다 또한 월 유신의 원인으로는 북한의 끊임없는 남한 공산주의화 시도를 꼽는다 대에 북한은 남한을 공산화하려는 정책을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하면서 등을 저질렀는데도 불구하고 미국이 주한 미군 이러한 긴박한 분위기 속에서 박정희가 통제와 동원을 쉽게 하기 위하여
년
년
년 사태
개 사단 철수를 결정하자 결국 월 국가 비상사태를 선언하고
월 유신을 단행했다는 것이다 또한
북한은 유신체제를 교란시키기 위한 도발을 계속했는데 이것이 유신 체제를 지속 시키는 명분을 줌과 동시에 남한 사회의 긴장을 강화시켰다고 쓰고 있다 한편 북한사에 관한 직접적인 서술 중에는 무엇보다 북한의 인권 문제에 대해 종의 한국사 교과서와는 또렷이 구별되는 서술을 하고 있다
이처럼 뉴라이트는 역사 교과서 논쟁 속에서 반북주의사관에 기대어 북한을 비 판하는 데 그치지 않고 대한민국 정통성을 강조하고 경제성장의 성과를 내세우거 나 독재 혹은 권위주의 체제를 수긍하기도 하면서 반공주의를 재생산하고 있다
진영 프레임의 확산과 공공성의 위기 년에는 두 가지 상징투쟁이 전개되었다
년 재야원로
여 명이 맥아더
동상 앞에서 동상 철거를 요구하는 천막농성을 시작했다 제헌절에는 진보와 보수 단체들이 각각 동상 앞의 집회를 주도했다 진보세력이 볼 때 맥아더로 상징되는 미국도 분단의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였다 하지만 보수세력에게 미 국은 생존과 번영의 틀을 마련해 준 우방이자 혈맹이었다 해방 해
주년을 맞아 그
월에는 남북이 함께 하는 민족대축전이 개최되었다 여기에는 북한 대표단의
국립현충원 방문이 포함되어 있었다 현충원을 반공주의 공간으로 간주하는 보수 세력은 당연히 반발했다 보수단체들은 현충원에 모여 반북시위를 벌였다 이러한 극단적 분위기 속에서 뉴라이트가 세력화되고 뉴라이트 운동이 본격화되면서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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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 사회는 진영 프레임에 갇히고 말았다 미국에서도 네오콘의 등장 이후 이념 갈 등이 더 심화되었다고 한다 원칙을 강조하고 타협을 거부하며 모든 문제를 흑백 으로 재단하고 자신들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을 적으로 간주하는 분위기가 확산 되어갔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는 미국에는 없는 독특한 변수가 있다 바로 북한이라는 존재다 이 에 대한 적대의식 즉 반공주의 반북주의를 넘어서려는 저항은 민주 화 의 흐름 민주주의의 발전 과정과 맥을 같이 해왔다 하지만 햇볕정책 남북정상회담 등으 로 실질적인 남북대화가 진전되자 스스로를 자유민주주의세력이라 부르되 상대를 친북프레임으로 옥죄려는 뉴라이트가 등장하면서 진영화에 입각한 남남갈등이 본 격화되기 시작했다 여기에 신자유주의 체제로 인한 경제적 사회적 양극화가 급격 히 진행되고 사회 갈등이 격화되면서 이념 투쟁은 더욱 과열되었고 진영 간의 골 은 깊어져갔다 이것의 대가는 민주주의의 방황 혹은 위축이었다 민주주의는 자본주의적 발전과 더불어 자유주의적 민주주의로 출발하여 정치적 평등을 확대하고 이어 경제적 평등의 사회주의적 요소를 일정 수용함으로써 그 외연을 확대해왔다 그런 점에서 민주주의는 자유와 평등이라는 두 축에 의해 지 탱된다 그런데 뉴라이트는 민주주의를 신자유주의 경제적 자유주의 맥락에서 정 의하고자 한다 이에 따라 앞서 살펴본 뉴라이트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평등 특히 경제적 평등 가치를 홀대하는 협소한 민주주의를 추구한다 그런 뉴라이트의 눈으 로 보자면 분배와 평등 정책에 힘쓰는 노무현 정부와 진보세력은 좌파 정권이고 좌파세력이다 여기에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북한의 주체사상을 추종 한 과거 경 력을 덧붙이면 친북좌파가 탄생하는 것이다 즉 뉴라이트가 말하는 친북좌파는 경제적 자유주의와 반북주의의 합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렇듯 뉴라이트는 평등을 좌파적 요소로 보고 여기에 반북주의를 덧붙인 진영 프레임을 작동시킴으로써 신 자유주의를 위한 공간을 확대해 나갔다 시장 주도의 자유주의에 입각하여 민주주의를 정의하고자 하는 뉴라이트는 공 론장에도 시장의 원리를 적용하고자 한다 하지만 공론장이 냉혹한 시장의 원리 로만 움직일 때 공공성은 위기에 처하기 마련이다 공정한 규칙을 준수하도록 하 는 공정한 사회 질서가 확립되지 않는 한 사익 추구 경쟁은 공공성을 철저히 짓 밟아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뉴라이트에게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차별성 을 바탕으로 하는 것으로 민주화 의 대상이 아니라고 본다 경제에서 평등주의를 강요하면 시장 경제는 성장 동력을 상실할 수밖에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뉴라이트가 공론장을 위태롭게 했다는 비판의 가장 구체적인 증거가 바로 역사 교과서 논쟁에서 그들이 취한 태도이다 윤해동은
년 대안교과서 발간은 검정
시스템 밖에서 교과서라는 이름을 붙인 단행본을 낸 심각한 정치 행위라고 비판 한다 교과서 비판을 학문적 공론장 밖으로 끌고 가기 위한 의도를 처음부터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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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있었다는 것이다 윤해동
사실상
년대 이래 몇차례에 걸친 역사전
쟁에서 뉴라이트는 자신의 해석이나 논리를 스스로 얽어매는 권력적 접근을 도모 하면서 공공성에 도전하는 양상을 반복해왔다 정치가 역사를 지배하는 즉 역사 의 정치화를 주도하며 역사교과서를 권력투쟁의 장으로 만들어왔다 년 한국사 교과서 검정 파동에서도 뉴라이트는
년 대안교과서 파동 때
보다 더 격렬하게 교육부라는 행정부는 물론 여당 대표까지 총동원되어 정치적 공세를 펼쳤다 교학사 교과서가 국사편찬위원회의 검정을 통과했다는 사실이 언 론을 알려지던
년
월
일 때마침 교학사 교과서 집필자인 권희영 이명희가
각각 발표자와 토론자로 참석하는 교과서문제를 생각한다 는 학술회의가 열렸다 권희영은 중학교
역사 교과서의 현대사 서술을 분석하며
사회주의적 역사 해석
의 틀을 가지고 있으며 구체적으로는 스탈린 김일성 박헌영에서 나타나는 정세인 식에 입각하여 있다 거나
현행 역사교과서가 조선공산당 남로당이 사용하던 역
사인식의 프레임을 그대로 사용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권희영 한국사
고등학교
교과서의 현대사 인식을 분석한 허동현 또한 교과서의 좌편향성 문제를
제기했다 같은 날 조선일보는
남로당식 사관 아직도 중학생들 머릿속에 집어넣
다니 라는 사설을 통해 이들의 발표문을 인용하며
김일성
박헌영을 미화하고
그들의 주장을 추종하는 역사관이 우리 어린 학생들의 머리를 오염시키고 있는 것 이라고 강조했다 이전 역사전쟁보다 강도 높은 이념공세를 펼쳤던 것이다 이 에 대해 역사학계는 교학사 교과서에 학문적 검증이라는 칼을 들이댔고 보수세력 또한 소위 좌편향 교과서 를 퇴출시키기 위해 움직였다 이렇게 이념적 대립을 부추기고 상대를 적대시 하며 진영 프레임을 걸고 마는 대립으로는 민주적인 공론장이 형성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윤민재는 뉴라이트에 게 공공성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비관적인 전망을 한다 이명박 정부 이 래 뉴라이트 역시 정치를 출세의 발판으로 도구화하면서 사익이나 특정 집단의 이익을 추구하는 보수세력의 행태를 답습하고 있다는 것이다 뉴라이트 역사인식의 계보화를 시도하며 오늘날 역사전쟁은 이념 갈등에 기반한 진영화를 상징한다 역사전쟁의 한 축은 신자유주의와 시장주의사관 반공주의와 반북주의사관을 내세우는 뉴라이트다 그 들은 줄곧 시민사회 내 소통보다는 정치권력을 배후삼아 자신들의 뜻을 관철하려 했다 그렇기에 뉴라이트에 맞선다는 건 정치와 시민사회 혹은 시장과 시민사회의 경계를 허물고 공론장을 이념전쟁터로 삼아야 함을 의미한다 역사학계가 가장 곤 혹스러워 하는 것이 바로 이 지점이다 이 글은 진영 프레임을 무기로 펼쳐지고 있는 역사전쟁을 학문의 공론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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끌어 들이기 위해서는 역사 교과서 논쟁에서 드러난 뉴라이트의 역사인식을 역사 연구의 계보 안으로 끌어들여 재해석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에서 나온 것 이다 뉴라이트의 시장주의사관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 있는 반북주의사관을 아울 러 가설적으로 한국형 신자유주의사관 이라 부를 수 있다면 이 사관이 어떤 역 사학 연구의 흐름과 맞닿는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가령 현대 사의 해석을 둘러싸고 역사전쟁이 일어나는 경우가 많은데 뉴라이트의 역사인식 이 해방 이후
년대까지 현대사 연구를 이끌었던 사회과학계의 역사인식과 맥
을 같이 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또한 식민사학과 실증사학의 계보 아래 박정희 정부의 지원을 받으며 성장한 국가주의 역사학의 계보와의 연 관성도 면밀히 살펴야 할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국가주의 역사학이란 일제하 민 족 개량주의자들의 종족적 문화적 민족주의를 계승하고 미국의 근대화론을 도입 하여 극우반공정권의 역사적 정통성을 강화하고 국가 주도로 추진하는 종속적인 자본주의 산업화에 기여하는 역사인식체계를 수립하려는 역사학 을 일컫는다 이 계보선상에서 역사 교과서 논쟁에 뛰어든 뉴라이트의 신자유주의사관 을 살 피는 동시에 더욱 절실한 것은 시대의 변화를 담아 혁신의 길을 제시할 수 있는 대안적 사관에 대한 모색이다 그것은 공공성의 위기를 논할 만큼 역사 해석이 사 회 갈등을 부추기는 오늘을 극복하기 위해 사회 통합을 지향하는 방향에서 이루 어져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교과서포럼, 대안교과서 한국근현대사 , 기파랑, 2008 권희영 외, 고등학교 한국사 , 교학사, 2014. 권희영, 「2012년 검정 통과 중학교 역사교과서 현대사 서술의 문제」, 학술회의 ‘교 과서문제를 생각한다’ 자료집 , 2013 박세일, 『대한민국 선진화 전략』, 21세기북스, 2006 박효종 외,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참고자료 , 전국경제인연합회, 2011 신일철, 『뉴라이트와 시장의 철학』, FKI미디어, 2004 신진욱, 「보수단체 이데올로기의 개념 구조 2000-2006」 『경제와사회』 78, 2008 윤해동, 「뉴라이트의 운동가 역사 인식-‘비역사적 역사’」, 『민족문화논총』51, 2012 이대근
경제성장과 산업화
한국현대사의 허구와 진실
두레시대
이영훈, 「왜 다시 해방전후사인가?」, 『해방전후사의 재인식』1, 책세상, 2006 이영훈, 『대한민국 이야기』, 기파랑,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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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션1: 동아시아 전후 질서와 한반도 분단체제, 그리고 역사전쟁] 발제3
북조선 냉전분단의 시작과 조선(한국)전쟁
김수지 (럿거즈 대학 교수)
한반도 분단체제는 부인할 수 없는 자 소위 말하는 냉전 종식 이후
세기 냉전의 산물이다 그러나 분단
년이
년이 되는 올해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분단과
관련해 한국전쟁이 냉전의 심화에 있어 가지는 중요성 뿐만 아니라 냉전과 한반 도 분단체제의 진화 사이의 정확한 관계를 이해하기 위한 꾸준한 노력이 이어지 고 있다 다시 말해 냉전 종식 이후에도 분단체제가 지속된 상황을 어떻게 설명 할 것인가 냉전에 대한 전통적인 역사학은 미국과 소련의 대립에 초점을 맞춘다 그 대립은 핵무기로 인한 공멸
즉 상호확증파괴
의 가능성 때문에 막상 전면전은 없는 양극 세계를 만들어왔다고 본 다 그러나 그러한 단순한 해석은 유럽 중심의 관점을 극복하려고 노력해온 학계 에 의해 이미 도전받아 왔다 냉전의 역사를 소련이 탄생한
년 볼셰비키 혁명
으로까지 확장시킨 것은 물론 유혈사태로 얼룩진 제 세계에 냉전이 미친 영향을 조사함으로써 이러한 도전을 펼쳐 왔다 Walter LaFeber, America, Russia, and the Cold War, 1945-2006 (New York: McGraw-Hill,2006); David C. Engerman, “Ideology and the origins of the Cold War, 1917-1962,” in Melvyn P. Leffler and Odd Arne Westad, eds. The Cambridge History of the Cold War: Origins, Volume1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0).
101
이번 논문은 동아시아 대분단체제의 일부인 한국 냉전체제의 특징들을 정의하는 여러 생산적인 노력들을 인식하는 한편 한반도의 분단을 역사적으로 전 세계 냉 전체제 그리고 탈식민화 과정의 이념 경쟁에 놓고 이해하려는 시도이다
헤게모
니를 장악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상호간의 갈등을 강조하는 국가라는 행위자에 초 점을 맞추지 않았다 그보다는 국경을 넘는 초국경적인 흐름과 연결에 초점을 맞 췄다 국경을 넘는 이러한 흐름과 연결은 근대의 삶이라는 실체와 형식을 가지고 대치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년 볼셰비키 혁명은 근대 자본주의에 대항
하는 급진적인 대안을 촉발시켰고 당시 식민통치 아래 살고 있었던 많은 사람들 로 하여금 식민주의와 자본주의라는 이념 모두를 해소하기 위한 방안으로 볼셰비 키 혁명이 제시한 대안을 선택지로 받아들이게 했다
차 대전 이전인
년대
스페인내전 중에도 이미 당시 경쟁하던 이러한 이념들 사이에는 충돌이 일어난 적이 있었다 다만
차 세계대전은 파시스트의 위협에 함께 대응하기 위해 자본주
의자와 사회주의자 간의 간극을 간신히 무마시킬 수 있었다 이것이 곧 냉전이 필 연적이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년 조지 오웰이 예견했던 대
로 당시의 조건들을 고려해 볼 때 냉전체제가 가능해졌다는 뜻이다 여기서 냉전체제가 가능토록 한 필수조건의 하나는 바로 핵무기가 개발되었다는 사실이다
년
월 오웰이 처음으로 냉전 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으로 알려
진 바로 그 시대를 무시할 수 없다 서두에 언급한 바와 같이 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폭탄이 투하된지
달 뒤에 그는
년
월 초 히
당신과 원자폭탄 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그 용어를 사용했다 불길하게도 그는 이런 결론을 내렸다
당장
의 적이 없는 상황 그리고 이웃과 영구적인 냉전 상태를 유지하는 상황
평화
아닌 평화 를 무한히 연장하는 대가로 대대적인 전쟁에 종지부를 찍을 가능성이 더 크다
오웰의 예견은 적중했다 핵폭탄을 투하하는 대규모 전쟁 은 피했지만
전 세계에 이러한 리
핵 억지력 을 가지고 있지 못한 나머지 국가들로 하여금
전쟁을 치르도록 몰아갔다 만일 자본주의 그리고 사회주의 의 역사가
대 세기
를 관통하는 거대한 이념적 분단을 설명한다면 과학의 역사는 왜 이 분단이 냉 전으로
변했는지
설명한다
국제
관계의
지정학이
냉전의
구조적인
역사와 냉전에서 한반도의 위치에 주목한 반면 이 전지적인 관점은 한국을 강대국 정치 속에서 체스말과 같은 한낱
대리 에 불과한 위치로
격하시킨다 여기서 말하는 강대국들이란 냉전 시기 미국과 소련이거나 동아시아 지역의
분단
속에
놓인
미국
일본
중국이다
그러나
이삼성 동아시아 대분단체제 전후 동아시아 질서의 개념적 재구성과 냉전 한국냉전학회 창립 기념 학술대회 자료집
102
냉전의
미시사회학
냉전과 동아시아 분단체제
적인 역사는
년에서
년 사이 냉전이 펼쳐진 중요한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장소인 북조선과 같은 곳에서 살아온 이들이 냉전의 시작을 어떤 방식으로 경험하게 되었는지 드러낸다 북 남 분단 년부터 다 그 차이는
년 사이 북조선의 변화는 북남간의 큰 차이로 극적으로 묘사된 년
월 일본의 패전 이후 북쪽의 소련과 남쪽의 미국 서로 다
른 두 점령 권력에 의해 제멋대로 그어진 지리적인 분단을 이념적으로 견고하게 만들었다 그 일례는
보라 빛나는 북반부의 민주건설을 이라고 외치는 북조선
의 선전용 포스터이다 이는 노동자 계급의 유토피아를 건설하려는 열망을 가지고 북조선을 남한과는 다른 차별적인 존재로 그리려는 의도적인 시도를 보여준다 이 포스터는 사회주의 혁명의 상징적인 주체인 농민과 노동자로 보이는 두 남자를 등장시킨다 포스터 속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유토피아적 비전이 나타나는 요소들 을 지목하고 있다 그가 가리키는 먼 배경에는 식량의 풍부한 공급으로 자급자족 을 가능케 하는 기계화된 농업을 상징하는 트랙터들이 광할한 대지에 세워져 있 다 이러한 기계화된 농업은 검은 연기를 내뿜는 공장으로 대표되는 급속한 산업 화로 보완된다 이 이미지는 전면에 두 남성을 내세운 남성적인 그림이지만 한편 으로는 영웅적인 여성에 대한 묘사도 넘쳐난다
당시 북조선민주여성동맹의 기관지
조선여성 의 한 표지는 여성과 남성에게 동
일한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권리를 부여한
년
월 제정된 남녀평등법의
주
년을 기념하고 있다 남녀평등법에 따르면 여성은 선거권과 피선거권 자유롭게 결혼하고 이혼할 권리 재산권과 상속권 교육과 동일임금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 일부다처제와 성매매는 금지됐다 표지에는 한복을 입고 여성평등 혁명을 이끈 영 웅적인 조선 여성의 모습이 등장한다 쪽진 머리로 보아 그녀는 결혼한 여성이고 여맹의 깃발을 들고 있다 남쪽으로 뻗은 쇠사슬이 상징 하듯이 억압받고 있는 남 쪽의 여성들은 북쪽 여성에 의해 해방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묘사하고 있다 년
월에는 남쪽에
월에는 북쪽에 각각의 국가가 건설되어 분단이 공식화
103
되기까지 북조선의 문맹이었던 소작농들은 기본적인 읽기와 쓰기 그리고 자신의 삶이 북쪽에서 얼마나 달라졌는지 표현할 수 있는 짧은 자서전을 구성하는 법을 배웠다 평안북도 선천군의 서영준이라는 가난한 소작농은 북조선민주청년동맹에 가입하기 위해 제출한 이력서에 다음과 같은 자서전을 함께 제출했다
년에 태어난 서영준은
세가 되도록 읽고 쓰는 법을 배우지 못했고 이는
그의 자서전에서 엿볼수 있다 거친 목판 글자체와 맞춤법 오류 문장에 구두점과 짜임새가 없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해방 이전과 이후 그의 노동의 삶과 교육의 삶 사이에 큰 간극이 있었다는 것 만큼은 그의 짧은 문단 속에 무려
차
례나 생활 이란 단어를 사용했다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소작농으로서 그의 비참한 생활 과 고통은
년 토지 개혁으로
천 평의 땅을 얻은 뒤
자유스러
운 생활 로 바뀌게 된다 게다가 단기간에 여러 조직에 잇따라 가입하는 모습은 그가 단체 생활에 참여하고 싶은 열망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특히 그의 일 상은 자서전에 언급되어 있듯이 아침 운동으로 상징되는 단체 생활로 인해 변화 되었다 그러한 변화는 남한이 미국의 또 다른 식민지로서 소작농과 노동자가 착 취당하는 곳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과는 극명한 대조를 보인다 사회주의 근대성 식민지 시기 이미 사회주의 진영에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던 북조선의 당시 교 육상이었던 백남운
104
은 소련에서 이뤄지고 있던 사회주의 실험이 북조선
에
심대한 교훈 과
지표 를 제시한다고 보았다 그는 소련과
에 관한 협정 을 조인하기 위해 북조선 대표단으로서 일까지 소련을 방문한 이후에 여행기를 남겼다
년
월
일부터
월
백남운은 초콜릿 공장을 방문한
중에 소련 사회 상품 포장의 주요한 목적이 자본주의 사회의 높이려는 마술적 공작 이 아니라
경제 및 문화협조
소위 교환가격을
그 상품의 사용가치 즉 상품의 용도 형태 성
능 등을 보존하는데 치중한 것 이었다고 적었다 다시 말하면 교환가치로서 이윤 을 위해 팔고 사는 것이 아니라 그 사물의 물질성 즉 그것의 사용가치 사회적 중요성과 기능이야말로 상품을 고안하고 만드는 방법을 결정하는 요인이라는 것 이다 더욱이 그는 소련의 생산 공정 기계화가 자본주의 사회에서와 같은 노동자 의 노예화가 아니라 노동자의 통제 하에 기계의 주인으로서 생산 절차를 감독하 고 지휘하며 지루한 노동에서 해방되고 문화생활을 즐길 수 있는 여가시간을 남 기는 것이라고 보았다 공장 교육시설 박물관 미술관 등 여러 곳을 방문하면서 백남운은 다양한
서클 에서 이루어지는 오락의 집단적 형태와 일상생활이 음악
춤 조형미술 건축 등 예술에 연결되어 있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그는 이렇게 적 고 있다
실제로 그의 여행기는 인상적인 전시물의 목록 건물 실내와 공공장소의 상세한 특징 등 정밀하고 세세한 서술로 가득했다 그는 그렇게 자세하게 쓴 이유에 대해 시간성을 역사적으로 파악하여 두는 것은 과학적 세계관의 제일 조건인 만큼 인 류의 새 역사를 창조한 쏘연방의 사회상을 인식하는 데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조 건일 것
라고 적었다
소련 방문에 동행한 또 다른 북조선 대표단원이었던 상업상 장시우 역시 그의 직위에 알맞게 여러 상점에서 점원들이 입고 있던 유니폼에서부터 물 품들이 진열된 방식을 상세하게 적었다
특히 그는 판매대가 실용적으로 구성된
것에 주목했다 장시우는 고국의 유리 덮개가 더 비싸고 깨지기 쉽다고 생각했던
Ibid, 20.
105
반면 목재 판매대는 견고하고 만들기 쉬우며 구매자를 도와줄 수 있는 더 많은 공간을 제공한다며 칭송했다 그는 소련의 판매대가 화려하기보다는 실용적이고 상품을 진열하는 것보다는 구매자를 돕는 목적에 효과적이라고 판단했다 더욱이 그는 기계의 발달이 대량생산을 통해 소련의 예술 형태를 어떻게 인민들이 더욱 접하기 쉬운 예술로 전화시켰는지를 주시했다 건축물 공예품 및 여타 예술작품 이 더 이상 손이 아니라 기계화된 방식으로 제작된다는 점을 지적하며 벤야민이 기술 복제 시대의 예술작품
에서 한 지적과 비슷한 논지를 펼쳤다
그
는 예술이 일상생활의 일부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생활 그 자체가 예술적으로 되 었다며 참관기에 쓰기를
쏘련사람들은 예술을 완전히 자기생활의 한 부분으로
하고 살고 있다 마치 담배 피우는 사람이 담배 못피우면 못견디는 것처럼 그들은 춤추는 곳에 가기만하면 자연 들먹거려 못견디는 것으로 리해되었다 그들은 문길 쇠 하나를 만들어도 무슨 조각이 있어야하며 바라지 하나를 내어도 무슨 아로새 기는 것이 있어야한다
라고 적었다 글을 마무리하면서 장시우는 조선이 곧바로
소련처럼 될 수 없다는 사실을 통탄했고 자신의 부서인 상업국 일꾼들에게 소련 을 모델로 배울 것을 촉구했다 결국 대표단이 방문한 많은 장소들 지하철 콜호 쯔 협동농장
크레믈린 국립소아병원 레닌의 묘 레닌그라드 소년궁전 등은 북조
선에서 유사한 장소들의 원형이 되었다 그러나 사회주의 전위로서 소련을 모범으 로 삼는 것이 자주 독립이라는 원칙 즉 북조선 지도부가 근대조선국가 수립의 제 조건으로 내세웠던 원칙에 위반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실제로 백남운은 소 련과의 상호원조협력이
주체성 을 가진
조선의 민주통일과 자주독립을 급속히
실현 하는 기반이라고 보았다 주체사상을 처음 주창한 김일성의 전이었던
년 연설 이
년에 이미 주체 라는 개념을 언급한 것이다
임박한 전쟁 혁명은 급진적인 변화가 제도화 되면서 끝이 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북조선에 게 그 끝은 냉전과 함께 일찍 도래했다 권력의 군사화 그리고 집중화는 내전으로 치달으면서 가속화 되었다 남과 북의 분리된 국가 수립은 조시켰고 겠다며
106
년
월이 되자
선을 따라 긴장을 고
선에 인접해 있던 지역에서는 남쪽의 습격을 막
경비대와 자위대를 만들기 시작했다
년
월을 시작으로
선 지
역에 위치한 강원도 인제군 지역의 모든 로동당 회의의 의제는 위대 단위 구성이었다
선 경비 및 자
군대와 경찰을 보완하는 이러한 단위들은 공장과 정부건
물 곡식저장소 그리고 교통과 통신시설을 보호를 맡았다 또한 남쪽의 공격이 있 을 시 마을 주민들을 안전하게 보호해야 할 책임도 있었다 또한 인민들의 신분증 검사를 할 권한 뿐만 아니라 의심스러운 사람을 근처 경찰서에 데려가거나 낫이 나 칼 곤봉 등과 같은 간단한 자위 물품을 소유할 수 있는 권한도 주어졌다 지 역 사령관에는 청년 여성 농민 연맹의 지도자들을 포함했다 군사훈련 특히 청년동맹 회원들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훈련은 군사전략 무 기훈련 항공술과 같은 내용을 포함하여
년
월 시작했다
선상의 위협은
현실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준비들은 결코 과장된 행동이 아니었다
년
월 남
측으로부터 호림부대가 대규모의 공격을 하여 지역 주민들에게 광범위한 피해를 입혔다
년
월
일에는 인제군 남면에서 또 다른 소규모 접전이 있었다
인제군에서 이러한 충돌이 발생한 결과 상을 입었다 분실했다
또한
가구의
월
일부터
일까지 반면 북측은
명이 부
개 농장의 가축들을
자루의 곡식이 쓸모 없게 됐다 이에 대
선의 남쪽에 있는 남면의 남측 절반을
년
일간 점령했다 폭우로 공급로가 막히고 철수할 때까지
명의 주민들을 조직하였다 그 결과 남측에서 소실됐다
명이 납치
명은 남으로 도주했으며
채의 건물이 전소됐고
한 반격으로 인제군 자위대는
명이 사망했고
채의 집이 소실되고
명이 사망했고
채의 집이
명이 부상을 입는데 그쳤다
남면에서 싸움이 있은 직후 인제군 자위대원 모집은 확대되었다 싸움이 있기 직전 자위대원이 되려면 나이가 서
세까지 제한이 있었지만 이후
세에
세까지로 확대되었다 이로 인해 신체에 문제가 없는 한 거의 모든 주민들이
자위대로 조직되었다 남성
세에서
명 여성
전체 인제군 인구
명 중 자위대원의 수는
명 까지 증가했다 지역인구의
분의
명
에 해당하는 수가
107
조직된 것이며 적격자의
이상을 가입시켰다 결과적으로
한 경비와 감시의 네트워크가 설립되었다
개 가구당
년까지 광범위
개의 감시 단위를 구성했
다 이는 마을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불법 투숙객 낯선 사람들을 감시하거나 마을 시설이나 인프라를 보호하고 공공보건을 유지하고 화재를 예방하는 일들을 했 다
이 단위들은 지역 경찰이 아니라 인민위원회가 구성하고 지휘했다 이는 이
들의 임무를 치안 뿐만이 아니라 위생상태와 질병 확산을 감시하는 일까지도 포 함하도록 광범위하게 정의했기 때문이다 당시 남한에서는 이미 은
년 상반기에 콜레라가 발병했는데
년부터 이러한 질병 발발이 주요한 문제였다
인제군
선에 인접해 있었기 때문에 파괴행위에 반복적으로 시달려야 했던 한편 남
측으로부터 전염병이 확산될 위험에까지 노출되어 있었다 파괴행위 중 가장 심각 한 사례는 공장이나 곡식저장소와 같은 주요 시설에 대해 약탈 및 방화 등을 꼽 을 수 있다
선 근처 많은 마을 주민들은 중앙 정부가 지시하기도 전에 전화국
철로 곡식창고와 같은 공공시설을 보호하기 위해 소방대나 경비대를 꾸린다던지 하는 식으로 마을을 지킬 전략을 세워야만 했다 이들은 특히 허가없이 주변을 여 행하는 자들을 매우 경계했다 범죄 기록이 있는 사람이라던지 가족 중에 남쪽으 로 도망간 사람이 있는 경우에는 가장 의심의 대상이 되었다 이들은 특히 에 사건을 예방하기 위해
사전
감시의 대상이 되었다
전면전이 발발하기 전
년 북조선 비밀감시로 수집된 당시 인민들의 의견에
따르면 농민들은 갈등이 고조되는 것에 생존에 대한 우려를 표출했다 또한 농민 들은 직전해에 농작물 수확이 좋지 않은 것에 대해 걱정했으며 만일 공장과 광산 으로 사람들이 떠나기 시작하면 이 땅을 경작하기 위해 누가 남아 있겠냐며 의문 을 던졌다 경비를 맡고 있던 다른 사람들은 그 지역을 지키는 행위를 얼마나 오 랫동안 계속해야 하는지 의문을 제기했다 어떤 한 사람은 을 하기도 했다
년
월
골이 아프다 고 불평
일 남측에서 온 잠입자로 인해 가축을 도난당하고
한 경비원이 납치당한 후에 마을 주민들은 자신들의 능력이나 효율성 측면에서 회의감을 보이며 자위대가 이 사건에 대응하지 않은 것에 대해 환멸을 느끼게 되 었다
대 후반의 한 농민여성은 경비대들이 납치에도 불구하고 어떤 대책도 없
다고 불평하며 나가서 해보겟다
108
랍취되여도 대책도 없이 그 놈들을 하로에다 잡아죽겨쓰면 같이 고 했다
이와 같은 직접 무력충돌은 마음과 정신을 모두 장악해야 한다는 심리전으로 인 해 대치상황을 증가 시켰다 보고가 반복적으로 들어왔다
년에는 남한 비행기가 삐라 종이를 떨어뜨린다는 이 삐라에는 북조선 군인들과 자위대에게 남한으
로 내려오라고 설득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또한 자신들은 적이 아니고 오히려 김일성과 그의
일당 이야말로 적이라고 주장하며 부상 입은 군인에게 무상 의료
를 제공하겠다고 적고 있었다 한 삐라는 위하여 결사적으로 싸울필요가 있을까 중엄 멸망
다시 생각해보라 쏘련을 조국으로 하기
쏘련 스탈린 김일성 공산당 인민군패전
넘어올때는 반듯이 이종이를 갖이고 오면 친절히 안내하겠다 빨리
뉘우치고 조국의 품안으로 어서 돌아오라 국군은 따뜻이 맞이 해주마 라며 귀순 을 설득하려 했다 많은 사람들은 왜 인민군은 저들을 쏴버리지 않냐며 비행기를 향해 경멸감과 적대감을 표시하고 쉽게 흔들리지는 않았다 반면 어떤 이들은 비 행기와 같이 남한이 가진 자원에 놀라며 한 여성은 결과적으로 이 비행기들이 전 단지가 아니라 폭탄을 싣고 와 떨어뜨리게 될 것이라며
산으로 도망갈 준비를
해야 할 때 라고 걱정했다 불길한 예언이 아닐 수 없었지만 누가 과연 당시에 단 인구
에 해당하는
년의 기간 동안 한반도
만 이상의 목숨을 앗아가는 재앙적인 전쟁을 예측할 수
있었겠는가 심지어 그
년이란 시간은 한국 조선전쟁을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을
제외하고 현대사상 가장 많은 사람이 죽은 전쟁 중 하나가 되도록 만들고 말았다 전쟁기간 미군 비행기가
톤에 해당하는 폭탄과
팜탄을 북조선에 쏟아 부은 결과
년 북조선에는
톤에 해당하는 네이
더 이상 타깃이 없다 고 할
정도였다 제 차 세계대전 기간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사용된 폭탄의 양이 톤 가량되었다는 사실과 비교하면 얼마나 많은 양의 폭탄이 북조선에 사용되었는 지 짐작할 수 있다
남한의 사상자가 사망자
준이었던 반면 북조선 사상자는 약
명을 포함해
명 수
만에 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중
백
만명은 민간인이었는데 이는 즉 이 전쟁으로 인해 평균적으로 북조선의 모든 가 구 당 적어도 한 명 이상의 가족이 사망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조선 한국전쟁은 장기적인 신체적 그리고 심리적 상해를 남겼다 특히 이러한 상해는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는 북조선의 국내정책 그리고 대외정책을 형성하 RG 242, SA 2010, box 2, item 76, North Korean Workers’ Party Hwanghae Province (Top Secret)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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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데 영향을 미쳐왔다 여행자든 인터넷이든 형태에 상관없이 유별날 정도로 외세 의 침입으로부터 방어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신체적으로 요건이 맞는 거의 모든 남성들이 되었다
년이라고 하는 세계에서 가장 긴 군생활을 해야하는 징병제를 가지게 이는 전쟁 전에는 여성이 중요한 지위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전후 어
떻게 북조선의 남성들이 사회적 정치적 위계체계의 모든 단계를 장악하게 되었는 가를 설명해 줄 수 있다 전쟁이 평화협정이 아닌 정전협정으로 끝나게 되자 북 조선은 한 순간에 자신들보다 훨씬 막강한 미국을 상대로 또 다시 전쟁을 재개할 수 있도록 전쟁준비를 계속해 왔다 한국 조선전쟁은 외세위협으로 부터의 내부 결속을 위해 극단의 자급자족 방식으로 북조선 스스로를 봉쇄하도록 할 정도로 국가의 경험을 단일한 경험으로 규정짓는 것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끝나지 않은 한국 조선전쟁을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냉전의 역사 에 버려둔 채 냉전의 종식 선언이 이뤄진 것에 문제제기를 하는 것은 누가 봐도 당연하다 핵무기의 비축과 확산은 오늘날 계속해서 문제가 되고 있다 국가사회 주의가
세기의 대안적 근대 체제로는 부적절하다는 것이 판명 났지만 자본주의
근대성의 문제들은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한반도 분단의 역사가 보여주는 것은 냉전으로 인한 분단이 경제 영역에서의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 뿐만 아니라 사회적 문화적 영역에서 자유주의에 대한 대안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프롤레타리 아 국제주의라는 이름 하에 계급과 성불평등 인종과 민족의 분단을 극복하겠다는 유토피아적인 비전은 사실상 냉전의 현실정치로 인하여 버려졌다 정치적 이념을 막론하고 오늘날 분단을 극복하는 주요한 방법은 민족주의 또는 문화적 상대주의 라는 형식에 머무른다 이는 북조선 그리고 남한 이 민족통일 을 호소하는 것과도 일치한다 냉전의 또 다른 산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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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션2: 해방·분단 70년, 한반도의 현재와 미래] 발제1
한반도, 새로운 길을 찾자: 사드를 넘어 공동안보로1)
서재정 (일본 국제기독교대학 교수)
사드는 한반도 군비경쟁의 산물이자 이제 그 군비경쟁에 질적 전환이 나타나고 있다는 증거다 현재 한반도는 미국과 북이 핵무기로 서로를 위협하며 상호억제하 고 있는 공포의 균형 이 지배하고 있다 최근 부각된 사드가 보여주는 것은 이제 한국과 미국 그리고 일본이 이러한 균형을 무너뜨리고 선제공격 능력을 추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시도는 한반도 위기를 심화시키고 분쟁의 가능성을 높이 기 때문에 그 자체로도 위험하다 뿐만 아니라 미국의 동북아시아 정책을 군사화 하고 일본의 재무장을 가속화하고 중국의 군사력 강화를 촉진할 위험성도 내포하 고 있다 한국민의 안전에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한반도 및 동북아 안보를 악 화시키는 사드는 명백하게 거부되어야 한다 또 이 기회에 사드 도입 논의의 근거 가 되고 있는
작전계획 및 맞춤형 억제전략에 대한 근본적 검토에 들어가서
공동안보 개념에 근거한 새로운 안보전략을 설계해야 한다 사드는 한국 주민의 안전을 위한 것인가 현재 진행되고 있는 사드의 한국 배치 논의는 기괴하다 사드는 북의 미사일을 공중에서 요격하여 파괴하는 방어무기체계이다 이러한 방어무기 체계가 한국에 배치된다면 당연히 한국민의 안전을 위한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한국민의 안전
을 위한 방어용 무기 체계라면 한국 정부는 당연히 이를 적극적으로 공개적으로 떳떳하게 추진하는 것이 정상적이지 않을까
국민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이러
한 무기 체계를 도입할까 검토 중이라고 한국민의 안전을 위해 이런 무기 체계를 제공한다면 설령 돈을 주고 판다고 해도 미국은 홍보를 해야 정상이 아닌가 이 글은 졸고 창작과비평
사드와 한반도 군비경쟁의 질적 전환 위협의 균형 을 무너뜨리고 선제공격으로 년 여름호를 수정보완한 것임을 밝힙니다
동 계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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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국이기 때문에 미국에도 모자란 무기 체계를 우선적으로 공급하기로 했다고 하 지만 미국 정부는 사드 배치 논의를 한국정부와 했다고 했다가 하지 않았다고 하 며 치고 빠지기 를 되풀이하고 있다 한국 정부는 아예 한 걸음 더 나가 요청도 없었고 협상도 없었고 결정도 없다며 삼세번 부인하고 있다 한국 주민의 안전을 위한 것이라면 왜 이런 비정상적인 행태를 보이는 것일까 그 이유는 사드가 한국 주민의 안전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안전을 위협하는 요소가 될 위험성이 농후하다 한반도 군비 경쟁을 가속화하여 한반도 위기 수준을 높이고 동북아시아에서 미국과 중국의 군사적 대립을 첨예하 게 하고 일본이 군사력을 영토 밖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날개를 달아주는 꼴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드는 종말단계고고도 지역 방어
라
는 이름에서 알 수 있는 것과 같이 적의 미사일을 상공
킬로미터의 고도
에서 요격하도록 설계되어진 미사일 방어체계이다 적의 미사일을 일찌감치 포착 하여 그 탄두의 위치와 궤도를 정확히 추적하는 레이더 성 요소의 하나이다 또 최대 속도 마하
최고 요격고도
가 주요한 구 킬로미터 사거리
킬로미터인 요격 미사일이 또 하나의 요소이다 이 요격 미사일 앞에 부착된 단단한 요격 비행체
가 적 미사일 탄두와 직접 충돌해 이를 산산조각
내도록 설계되어 있다 총알로 총알로 맞춘다는 것이다 이동 발사대는 이런 요격 미사일을
대까지 장착할 수 있으며 사드
개 포대는 발사대를 최대
개까지 운
용할 수 있다 이 발사대와 레이더 지휘부대를 연결해주는 화력통제 통신소가 마 지막 구성요소이다 사드를 미사일방어 무기라고 하지 않고 무기 체계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와 같이 레이더 요격 미사일 발사대 화력통제 통신소 등
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중 한국의 방어와 관련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사드의 요격 미사일이 상공 킬로미터 이하에서는 그 기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설계조차 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북이
천기 이상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단거리 미사일은 고도
킬로미터 이상 비행하지 않기 때문에 사드는 이 단거리 미사일에는 완전히 무 력하다 또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에 직접적 위협이 되는 장사포에 대응해서도 완 전히 무력하다 다시 말해 한국 국민 입장에서 가장 시급한 위협인 단거리 미사일 과 장사포를 막도록 설계조차 되어 있지 않은 것이 사드이다 사드는 개발과 시험 이 완료되지도 않았고 한국과 같은 자연환경에서 제대로 작동할 수 있는지도 검 증이 되지 않았지만 정작 더 큰 문제는 아예 설계 자체가 한국에 유용하지 않도 록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설령 북이 단거리 미사일을 고고도로 쏴주고 사드가 제대로 작동을 한다고 가 정을 하더라도 한국 국민의 안전을 위해서는 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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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포대 가지고는 어림도 없
다는 분석도 있다 예를 들어 스탠포드대학 국제안보협력센터의 딘 윌케닝은 북의 스커드미사일 미사일 대
기를
이상 신뢰도로 방어하기 위해서는 한국에 사드 요격
기가 배치되어야 한다고 추산한다
이에 비해 사드 체계는 포대당 최
발의 요격미사일을 탑재하는데 현재 논의되고 있는 것은 사드
다 북이 보유하고 있는 스커드미사일 등 단거리 미사일이
개 포대이
천기가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사드로 이를 요격한다는 것은 비현실적이라는 말이 다 사드 포대 률이
개가 배치되어야 북의 단거리 미사일 모두를 요격할 수 있는 확
정도 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북의 노동미사일을 요격하기 위해서 사드가 필요하다는 주장은 마치 이런 문제 를 회피하기 위한 명분같이 등장했다
년
월에 실시한 북의 노동미사일 발사
시험이 기존 탄도미사일 요격체계를 회피하기 위한 실험 이라는 분석결과가 월이나 지난
월
일 등장한 것이다 국방부 대변인은
최고 속도 마하 로 비행했기 때문에 패트리어트
개
당시 노동미사일이 고도 로도 요격이 쉽지
않다 고 했고 언론에서는 북한이 노동미사일로 남한을 타격할 경우에 대비하려면 사드를 전력화해야 한다는 주장도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월
일 있었던 스캐퍼로티 주한미군사령관의 사드 배치 검토 발언을 뒷받침하는 분 석결과가 묘하게도 그
주후 발표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분석은 탄도비행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생긴 것이다 설령 북 의 핵탄두가 대형이라서 추진력이 강한 중거리미사일 노동미사일 을 이용해야 한 다고 하더라도
발사각도를 반드시 고각도로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아래의
그림과 같이 탄두의 무게가 같고 미사일의 초기 속도가 같더라도 동거리를 비행 할 수 있는 각도는 고각도와 저각도의 두 가지가 있다 북이 노동미사일로 한국을 공격하려 한다면 굳이 고각도로 발사해 사드의 먹잇감이 될 필요가 없다는 말이 다 저각도로 발사하면 사드와 패트리엇을 동시에 무력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김호준 지난 월 노동미사일 시험발사는 요격회피 실험 종합 연합뉴스 년 과 김무성 등 정치권에서 사드 필요론을 제기한 것도 같은 이유이다 김무성은 사드 도입이 필요한 이유에 대해 북핵 소형화 기술이 얼마 만큼 발전했는지 모르지만 에 시간은 걸릴 것 이라며 결국 북한이 보유한 핵폭탄은 대형일 수밖에 없는데 저고도 미사일에 수 없고 고고도 미사일 탑재가 유력하다 약 상공에서 요격할 수 있는 방어체계를 갖춰야 것은 기본 상식 이라고 주장했다
유승민 소형화 탑재할 한다는
113
그림
탄도체의 고각도와 저각도 비행
위의 분석에 비춰 볼 때 사드는 한국의 방어를 위해서는 하등의 도움이 되는 바가 없다 단거리 미사일은 요격이 불가능하고 중거리 미사일도 저각도에는 눈 뜨고 당하는 수밖에 없다 사드의 군사적 필요성을 주한미군 보호로 제한시켜도 그 결과는 마찬가지다 상황이 이렇기 때문에도 사드를 한국에 배치하는 것이 중 국을 겨냥한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받는 것이다 사드는 미국 방어를 위한 것 아닌가 사드가 한국 방어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미국은 과연 왜 사드 배치를 추진하 는 것인가 사드 배치를 둔 논의에서 두 번째로 기이한 점은 사드가 미국 방어에 기여하는 바가 논의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미국 국방부와 국무부가 사드 배 치를 위해서 적극적으로 움직이고 있는데 사드가 미국 안보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라면 오히려 이상하지 않은가 사드가 사용될 수 있는 여러 가지 가능성을 평가해보면 사드의 한국 배치가 미 국 방어에 직접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시나리오는 두 가지다 첫째 북이 미국을 겨냥하고 발사한
이 북극을 통과하는 경우이다 이 북극궤도 는 아래의 지
도에서 보는 것과 같이 중국 동북부와 극동 러시아 및 알래스카 상공을 지나 미 본토에 도착한다 그림 지휘통제전투관리통신
이 경우 사드용 레이더로 추적하여 미국 미사일 방어 에 전달하는 것이다 미국은 이 정보를 이용하여 알
래스카나 캘리포니아에 배치된 육상배치 요격미사일로 요격을 시도할 수 있다 한 국의 레이더로 발사 직후 이를 포착하고 일본 샤리키 알래스카에서 요격하는 릴레이도 가능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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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레이더로 추적하여
그림
북
두 번째 미국을 겨냥하고 발사한 도는
년
의 북극궤도와 남극궤도 이 남쪽을 향하는 경우이다 이 남극궤
월 은하 호의 비행궤적과 비슷하다 서해 연안과 필리핀을 지나
남극을 돌아 미국 본토에 도착한다
이 경우 한국의 사드용 레이더로 추적하여
서해나 남해에서 이지스함에 배치된 요격미사일로 요격을 시도할 수 있다
만약
물론 통상적으로는 보다 단거리인 북극궤도를 이용하겠지만 탄두가 대기권 밖 궤도에 올라 갈 수만 있다 면 비행거리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북극궤도를 비행할 수 있는 은 더 먼 거리인 남극궤도를 비행 하는 것도 가능하다 사드 요격 미사일은 종말단계용으로 설계되었기 때문에 이륙단계에서 요격하는 것은 실패할 가능성이 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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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이 함경북도와 같이 동부에서 발사한다면 한국 상공을 지날 수 있으므로 이때 사드 요격미사일로 요격을 시도할 수도 있다
북이 하와이를 향해 미사일을 발사
하는 경우에는 한국에서 이를 포착 추격하여 동해상에 배치된 이지스함에서 요격 할 수 있다 이 가운데 어느 경우든지 탐지거리가
킬로미터인
종말모드가 빛
을 발휘하게 된다 북 미사일 요격을 가능하게 할 정도의 해상도를 제공하기 때문 이다 일본에 배치된 레이더는 전방모드로 작동되어야 하기 때문에 제공할 수 없 는 기능이다 특히 북이 미사일이 남극궤도를 따라 갈 경우 속수무책인 미국에게 사활적이다 지상배치 요격미사일로 지키고 있는 북극궤도와는 달리 남극궤도는 현재 아무런 방어수단도 없는 무방비 상태이다
필리핀이나 괌 인근에서는
의 고도가 너무 높아 이지스함에서도 요격이 불가능해지므로 한국과 동중 국해 사이가 최후의 마지노선인 셈이다 그 마지노선에서 한국 배치 사드는 그 어 떤 무기체계도 할 수 없는 유일무이한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사드는 한국에 배치되더라도 그 핵심 방어대상은 미국이다 미국이 사드 배치를 주도하고 있는 것도 이 맥락에서야 제대로 이해가 된다 사드 논란이 한참이던 년
월 마틴 뎀프시 미 합참의장이 방한
통합 미사일 방어체계 를 두 차례
언급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그의 발언은 미 미사일 방어국이 지난 몇 해 동안 추진하는 미사일 방어체계 통합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년부터 미국은 패트리어트 사드
지상배치요격미사일과 같이 지
금까지 개발한 다양한 미사일 방어체계들을 통합 시너지효과를 내기 위해 노력하 고 있다 사드용 레이더는 여기에 핵심적 역할을 하고 있고 사드가 한국에 배치 된다면 통합 미사일 방어체계에 핵심적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그 통합 미사일 방어체계의 우선적 목적은 북 미사일로부터 미국을 방어하는 것이다 미사일방어에 대한 미국의 관심이 언제부터 폭증하기 시작했는가를 검토하는 것도 이러한 분석을 뒷받침한다 미사일방어가 미 국방부의 주요한 과제로 부각이 된 것은 년
년 북의 대포동 미사일 발사였다 그 이후 또 하나의 결정적 계기는 월이었다 북이 평안북도 서해위성발사장에서 은하
공하여 광명성
호
호 로켓 발사에 성
호기 위성을 궤도에 올린 것은 미국에 큰 충격을 줬다 그 궤
도가 바로 위에서 말한 남극궤도 였기 때문이다 이후 리온 패네타 미 국방장관 다 하지만 은 이륙단계에서 속도가 가장 느리고 포물선을 그리며 상승하기 때문에 발사지점에서 킬로미터 비행하는데 초가량 걸리며 그 지점에서의 고도가 킬로미터 정도 된다 북의 발사 장소 에 따라서 한국에서 요격을 시도할 골든타임이 있는 셈이다 미국 과학아카데미의 보고서는 미사일 추진단계에서 요격하는 것은 실효성이 없다고 결론을 내리면서 한 가지 예외를 인정했다 그 예외의 경우는 바로 북에서 하와이를 향해 미사일을 발사하는 경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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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일본 한국 같은 동맹국들과 함께 지역 미사일 방어망을 구축하는데 박차를 가 했다 그 후임 척 헤이글 장관은
년 유럽미사일방어계획
단계를 취소하면서
까지 아시아 미사일 방어체계를 강화한다는 결정을 내리기에 이른다 이상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미국은 북의 핵 미사일 가능성을 심각한 위협 으로 인식하고 있다
년 초부터 아시아에서 미사일 방어능력을 급속히 확장하
고 있다 미사일 방어의 예산도 이 지역에 집중되고 있다 사드는 이러한 노력의 일환이다 왜
핵무기 없는 세상을 추진하겠다던 오바마 대통령이 북과는 제대로
된 협상조차 해보지 못한 채 오히려 미국이 북의 핵위협에 노출되는 결과를 만들 었기 때문이 아닐까 사드는 이 위협 앞에 손 놓고 있지 않았다는 오바마의 정치 적 면피 용은 아닌가 어떻게 할 것인가 사드의 한국 배치가 한국의 안전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지만 미국의 안보에 도 움이 되는 것이라면 고려해 볼 만하다 동맹국으로 미국에 확실한 기여를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지 않은가 특히 아베 정부의 일본이 미국의 안보를 위해서 기 여를 해야 한다며 군사력을 사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늘리고 있으니 일본에 뒤질 수도 없는 일 아닌가 유감스럽게도 한국에는 그러한 선택이 불가능하다 비용이 너무 높기 때문이다 비용은 간접적 비용과 직접적 비용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간접적 비용은 이미 언론에서 많이 다루어진 것과 같이 중국이 강력하게 반대 하고 있다는 점이다 중국이 반대하는 이유는 두 가지로 보인다 첫째 사드용 레 이더를 한국에 배치하면 랴오닝성
이나 안후이성
등에서 발사된
을 추적하여 알래스카나 캘리포니아에서 요격을 시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
레이더의 유효거리가 타이완 해협까지 미치므로 이 지역에 배치된 중국
군의 활동을 감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장기적으로는 한국이 미국과 일본 중심 으로 형성된 지역미사일방어 체계에 편입되어 중국을 감시하는 첨단기지로 기능 할 가능성을 우려할 것이다 중국의 핵심적 전략억제력을 약화시키고 사활적 국가이익인 타이완 해협을 위 협한다면 중국 정부는 그에 상응하는 보복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 조치가 경제적인 것이던 외교 군사적인 것이던 한국으로서는 큰 후폭풍을 염려하 지 않을 수 없다 단 중국의 우려가 과장된 면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중국 서쪽에 있는 윈난성 이나 칭하이성 등에 배치된 은 한국에 배치된 레이더로도 감시가 불가능하다 또 감시가 가능한 지역에서 발사 된 은 이미 일본에 배치된 두 기의 레이더로도 추적이 가능하다 한편 대만해협에 대한 감시는 이미 이지스함 등을 이용해서 진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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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적 비용은 이 보다 더 심각하다 한반도의 전쟁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 다 왜 상호억제 상황에서 방어수단은 공격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현재 미국은 북에 대해 선제 핵공격을 하지 않겠다는 소극적 안전 보장 을 해 주지 않고 있다 선제공격을 할 수도 있다는 압박으로 북의 공격을 사전에 억제한 다는 전략을 채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응해서 북도 핵무기를 개발해서 선 제공격을 운운하고 있다 북이 실제로 그럴 능력이 있는 지와는 상관없이 북도 핵 무기로 미국을 압박해서 공격을 억제한다는 전략을 채택하고 있는 것이다 즉 한 반도 전략대치상황은 대량살상무기로 서로를 위협하는 상호억제 의 상태이다 이 런 상황에서 사드와 같은 미사일 방어 체계를 설치하면 북의 핵무기를 무력화할 수 있고 이는 결국 북의 억제력을 무너뜨리는 것이 된다 실제로 한미연합사는 맞춤형 억제전략
킬체인
작전계획 으로 북의 핵 미사일 뿐만 아니라 비대
칭적 군사력도 무력화시키려 하고 있다 북이 미사일을 발사하기 전에 선제적 타 격하기 위한 작전계획을 수립하고 무기체계를 도입하고 있다 북은 이에 대응해서 미사일에 고체연료를 도입하고 잠수함 발사 탄도미사일을 개발하는 등 불의의 장 소에서 불의의 시간에 선제적 타격할 수 있는 능력을 개발하고 있다 사드가 제기하는 본질적 문제는 바로 거기에 있다 이러한 한반도 군비경쟁을 가속화할 것인가 중단할 것인가
미국의 안보를 위해 미국의 핵무기 받이 로 나
설 것인가 핵무기 대결을 종식시키기 위해 한반도 비핵지대화로 나설 것인가 한 국의 안보를 위해 선제공격적 전략으로 나설 것인가 한반도 평화를 위해 평화체 제를 구축할 것인가
사드를 배치하느냐 거부하느냐의 문제는 한국이 미국과 중
국 중 어느 편을 드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한반도의 안보를 어떻게 설계할 것이냐 의 문제인 것이다 그러한 선택은 안보의 개념을 재정립하는 데서 출발할 수 있다 이러한 절대안 보 개념을 바꾸자는 것은 북의 군사력에 굴복하자는 것이 아니다 북의 군사력 앞 에 한국이 무방비로 노출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단지 한반도 질서는 상 호억제로 규정된다는 불편한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가 북의 군사력을 위협 으로 느끼는 것과 같이 북도 한미 당국의 군사력을 위협으로 느낀다는 상대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한반도에서 지난
여 년간 전쟁도 아니고 평화도 아닌 상태가
이어진 것은 이러한 위협이 균형을 이루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 불편하고도 불 안한 역사를 솔직히 대면하는 것이다 더불어 염두에 둘 사실은 한미 군사당국이 북에 비해 월등한 군사력으로 북을 압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위협의 균형 으로 상호억제가 이뤄지고 있다는 현실을 인정하면 군사적으로 해 결책이 없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한국과 미국이 국방비를 퍼부어 북의 위협 을 제거하려고 하는 만큼 북도 이들의 위협 을 제거하기 위해 기를 쓸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당장 시급한 것은 위협 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위협의
118
균형 을 안정적으로 관리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상황을 악화시키 는 조치를 중단해야 한다 삐라를 북에 살포하는 것을 중단하는 것을 비롯해서 사 드 및 킬체인 등의 도입을 중단 내지 동결해야 한다 이러한 무기체계 도입을 추 동하는 맞춤형 억제전략 에 대한 전면적 재검토 또한 필요하다 동시에 군사 핫 라인을 복원시키고 북 관계당국과 여러 급의 대화와 만남을 시작해야 한다 우선 적으로 상호적 안보의 한 형태인 군비통제적 조치들이 우선적으로 시급하지만 어 느 누구도 여기에는 관심을 두고 있지 않다는 것도 현 상황의 심각성을 반증한다 한편 군비통제적 조치들은 군비감축과 연결되어야 한다 군비통제만으로는 위 협의 균형 을 영구화하기 때문이다
위협의 균형 자체를 없애기 위해서는 위협
을 어떻게 동시적 균형적으로 감축 제거할 것인지 중기적 과제로 고민해야 할 필 요가 있다 한반도 안보구조의 특성을 고려할 때 유일한 방안은 북의 핵위협 과 미국의 핵위협 을 동시적 균형적으로 감축 제거하는 것이다 그 제도로서는 이미 한반도비핵지대화 가 제시되어 있다 또한 이것은 위협의 균형 을 재생산하고 있 는 정치적 구조인 정전체제가 종식되어야 가능할 것이다 지금까지는
자회담의
틀에서 비핵화를 우선적으로 추진하고 평화체제와 관계정상화가 후순위로 밀렸다 면 이제는 비핵화와 평화체제를 동시적으로 추진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는 위협 의 균형 의 원인인 전쟁상태를 우선적으로 종결시키고 이를 비핵지대화로 이어가 는 경로를 모색해볼 수 있다 지난 명하여 발표한
월
한반도 평화 지구선언
일 유엔에서 국내외 인사
백여 명이 서
은 이러한 경로를 촉구했다는 점에서 주
목할 만하다 한반도에서 평화체제와 비핵지대화는 동전의 양면이다 또 한반도에서 한국의 안보와 북의 안보는 동전의 양면이다 한반도 평화는 공동안보를 요구한다 년
월
일
119
[세션2: 해방·분단 70년, 한반도의 현재와 미래] 발제2
한국 정치의 우경화와 대중적 극우단체의 등장
김동춘 ( 성공회대학교 교수 )
머리말
이명박 박근혜 정부의 종북몰이
이명박에 이어 박근혜 보수세력의 연이은 집권은 지난
년 동안의 민주 정부
에 대한 냉전우파의 역공이자 이들의 경제정책에 실망한 중산층의 이탈의 결과라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들 두 민주정권이
년 외환위기 이후 신자유주의적인 경
제질서의 도입을 주도하였으며 그것으로 인해 경제양극화가 걷잡을 수 없이 심화 되었고 경쟁주의 질서 속에서 불안감에 사로잡힌 대중들이 보수화되었기 때문이 다 특히 경제 대통령 을 표방한 이명박의 집권과 박정희의 딸인 박근혜의 대통 령 당선은 단지 지역주의 권위주의에 대한 향수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지점이 있는데 즉 경제 불안과 이를 타개할 강력한 리더쉽을 요구하는 대중 심리가 두텁 게 깔려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박근혜 정부 들어선 이후 여당과 국정원 국방부 등 탈법적인 정치개입과 선거 개입을 했던 당사자들은 이들의 선거개입을 비판하는 사회 인사들을 종북 익
즉 국가의 적으로 규정하였다 이들은 이명박 정부 이후
좌
대강 등 각종 정치
현안에 대한 비판적 여론을 희석시킨 것이나 대선국면에서의 노골적인 선거개입 을 한 행위를 적을 향해서 심리전을 펴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정당화하였다 선거 는 전쟁이 되었고 야당 후보는 적이 되었으며 그를 지지하는 국민역시 잠재적 적
선무공작 의 대상이 된 셈이다 이들은 슈미트가 말했듯
구분하는 것
정치는 적과 나를
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선거정치 정당정치 사법부의 독립이 헌법상 보장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 제로 민주주의의 원칙이 심각하게 훼손되고 대통령과 그 직속 정보기관이 이렇게
120
국가안보의 이름으로 정치에 개입하는 현상을 우리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것은 과연 새로운 것인가 시될 수 있는 것일까
이
년 이후 한국이 민주화 되었다는 통념은 사실 의문
아니면 한국이 처한 분단 상황이나 한반도에 직접적 영향
을 발휘하고 있는 미국의 헤게모니 또는
년대 이후 금융자본의 지구화와 같은
조건들이 민주주의의 공고화 를 사실상 좌초 굴절시킨 배경으로 작용한 것인가 분명한 사실은 그 동안 권위주의에서 민주주의로의 이행과정을 설명해 온 주요 이론인 민주주의 공고화 론 혹은 포스트 민주주의론 의 등이 현재 한국의 정치 상황에 매우 제한적으로만 적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질 높은 민주 주의 에 대해 오랫동안 모색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이러한 절차적 민주주
의는 얼마든지 역전될 수 있으며 이에 따라 민주주의라는 제도나 장치도 무기력 한 것이 될 수 있음이 확인되고 있다 이는 지난 히 민주정부의
년 동안 갑자기 발생한 현상이 아니다 분명
년 민주화 이후 특
년 집권 즉 김대중 노무현 정부 이후 신자유주의와 맞물려 진행
된 한국의 정치경제의 변화 속에서 설명되어야 할 내용일 것이다 나는 한국사회 의 이러한 현재를 극우 정치세력이 집권함으로써 한국의 국가와 시민사회에 잔존 해 있는 귄위주의 전체주의 그리고 파시즘의 요소들이 새로운 방식으로 드러난 결과로 본다 한국에서 극우 행동주의의 등장 한국에서 보수우익 대중단체가 등장하게 된 계기는 김대중 정부의 등장이었다 유럽의 경우 노동당 사회민주당 등 좌파 혹은 자유주의 세력의 집권의 경험이 인 종주의 국가주의를 표방하는 우파들을 거리로 나오게 만든 중요한 계기였는데 한 국에서도 자유주의 진보세력의 집권이 보수 우익으로 하여금 위기의식을 느끼게 만들었고 더 이상 국가로부터 독적점 후원을 받을 수 없게된 현실이 이들을 행동 하게 만들었다 년대 들어서 김대중 노무현 두 민주세력이 집권을 하게 되자 과거 학생운 동이나 사회운동에 관여했던 사람들을 중심으로 신우익 단체가 만들어지기 시작 했다
년
월
일에는
운동권 출신들이 대한민군의 헌법적 규범인 자유
주의를 되살려야 한다면서 자유주의 연대를 창립하였다 이들은 수구우파와 수구 좌파를 배격한다고 표방하였으나 실제로는 작은 정부 큰 시장의 행정개혁 등을 표방하는 등 우익의 노선을 명백히 하였다 한편 이 무렵 기독교 계에서도 초교파 적 개신교 비정부기구인 기독교 사회책임 이 결성되었는데 김진홍 서경석 등 과 임현진 최장집
크라우치
등 참조
121
거 민주화 운동 진영에 몸담았던 기독교 인사들이 주도하여 좌우 양극을 모두 배 격한다고 주장하였으나 실제로는
나라를 선진국으로 만든다 고 강조하면서 우익
노선을 표방하였다 학생운동이 사라진 대학사회에도 비운동권 조직 특히 보수적 학생회가 등장했다 대학생 동하는 보수를 표방했다
명이 가입한 글로벌 리더연합 이라는 단체는 행 이들은 북한의 연평도 공격 같은 일이 발생했을 때 대
학생들도 자기 몫을 해야한다 고 생각했다면서 봉사활동과 더불어 국가관와 안보 의식을 고취하는 활동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단체는 한국자유총연맹과 결합하 여 대학생 해외 봉사활동 등을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미 이런 단체의 등장 이전에 이미 대형교회 혹은 참전자 단체 등이 주도하 는 대중적인 집회나 시위는 훨씬 더 빈번했다 여명이 베트남전 관련 기사에 항의한다며 동차를 부수기도 했다
년
무총장 등 회원
명은
한겨레 신문 에 난입해 기물과 자
년에는 일본 대사관 인근에서 엽총을 들고나
와 경찰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이들은 와
월에는 고엽제 전우회원
월 특수임무자회는 도심에서 가스통에 불을 붙여
경찰을 위협하는 시위를 벌였다 을 폭행하였고
년
년 촛불 시위 당시 진보정당 관계자들
앞에서 가스통 시위를 벌였다 특수임무수행자회 사 년
월
일 여의도 진보신당에 난입해서 현판을 부수
고 진중권 교수등을 폭행했다 대한민국특수임무자회 고엽제 전우회 등 군 출신 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들은 실제로는 국가권력의 피해자라고 볼 수 있지만 노 선과 행동은 반대로 극우 국가주의의 입장에 서 있다 년에는 대한민국 어버이연합이라는 우파 시민단체가 결성되었다 어버이연 합은 국민의례를 하지 않는다는 등의 이유로 시민단체를 공격하는 활동을 하기도 하였는데
년에는 서울대 시국선언 회견장에
년 월
일에는 시민단체
희망과 대안 창립식에서 국민의례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의사진행을 방해하였 다 이 외에도
년 월
하여 논란이 되었으며
일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 묘소를 파헤치는 퍼포먼스를 년 월
일에는 광우병 보도 무죄 판결을 낸 이용훈
대법원장 공관 앞에서 출근 차량을 저지하며 관용차에 계란 투척을 하기도 하였 다 한편
년
월
일에는 서울시의 무상 급식 방안에 반대하며 서울시의회
앞에서 무상급식 반대 집회를 가지고 서울시의회 본회의장에 난입하기도 했다 년 월
일에는 한진중공업 파업 사태와 관련해 영도조선소에서 집회를 갖는
차 희망버스를 저지하고 버스 내에 난입하여 승객 및 주변 행인들의 신분증 등 을 검사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반발하는 승객 등에서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년 월
일에는 비정규직 노동자 해고 철회를 위한 농성장에서 백기완 통일문제연
구소장에게 골통을 부숴라 는 등의 폭언과 함께 우산 등으로 폭행을 하기도 했 다 대학생
122
명 행동하는 보수 깃발들다
중앙일보
해방정국과 한국전쟁기의 우파 행동주의와 테러를 연상시키는 이들 참전군인 노인 단체의 행동은 과거와 같은 노골적인 테러로까지 전개되지는 않지만 사실상 법과 질서 그리고 합리적 대화와 논의 자체를 거부하는 폭력의 양상을 지니고 있 다 년대 접어들면서 개신교 신자들의 대중 집회가 본격화되었다
년대 들
어 두드러진 한국 개신교회의 특징을 꼽으라면 친미・반북주의이다 보수집단이 주도하는 국가보안법 폐지 반대 및 북한 민주화 촉구 집회 참가자의 상당수는 순 복음 교회 등 대형 보수 교회에서 동원된 개신교 신자들이었다 심지어 일부 교회 에서는 공공연히 북한 붕괴 기도회 를 열기도 했다 촛불시위에 반대하는 맞불집회를 열기도 했다 광장에는 약
년에는 개신교 신자들이
년
월
일 오후
시 시청 앞
만여명의 개신교 신자들이 모여 나라와 민족을 위한 평화기도회 를
열었는데 그 보다 앞선
주 전
만여명이 모여 한미
개정하라
여중생을
살려내라 등의 피켓을 들고 추모 촛불 이 등장했던 시청 광장에는 개신교 신자 들이 미군철수 반대한다
미국은 우리의 혈맹이다 등의 피켓을 들고 나왔다 이
날 참가한 개신교도들은 화해 회개 평화 라고 쓰여진 초록색 풍선을 들고 나왔 다 흥미로운 것은 개신교도들의 맞불 집회에서 태극기와 성조기를 함께 들고 있 는 참가자들도 있었다는 사실이다 즉 개신교도들은 민족회개 경제성장 주한미군 철수반대 북한 핵 포기 평화통일 국민 대화합 한국교회 화합 등
가지 주제를
내걸었는데 단상에 오른 목사들의 기도 내용의 주요 골자는 촛불시위에서 내세 우는 반미 와 주한미군 철수 주장 에 대한 반박이었다 노무현 정부가 국가보안법 폐지 등 개혁을 추진하던 국기독교총연합회 한국
여개 교단총연합회 이 주최하고
년
월
일에는 한
만여 명의 한국 보수
교단 기독교인들이 참가하는 반정부 집회가 시청 앞 광장에서 열렸다 이들은 국 가보안법 폐지 반대 및 자유민주주의 체제 수호 을 내걸었다 장로교 합동 통합 개혁 대신
그리고 사립학교법 개정 규탄
성결교 침례교 하나님의 성회 등을
비롯하여 한국 개신교 교단 대부분을 망라하는 한국기독교총연합회 선언문에서 당시 시국을 국가 정체성이 흔들리는 비상 시국으로 보고 국가보안법 등 이념 문 제로 국론분열이 심화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참가자들은 자유민주주의 체제 수 호 와 국가보안법 폐지 반대 를 재천명하였으며 사립학교법 개정을 기독교 탄압 으로 규정 반대한다고 선언했다 특히 한국에서 상당수의 한국 사학 재단이 기독 교 교단의 소유이기 때문에 노무현 정부의 사학법 개정안은 이들의 이해를 심각 하게 위협하는 것이었다 강인철이 강조하였듯이
년대 이후 가장 두드러진 양상은 개신교 반공주
의자들이 정치무대로 뛰어들어 한국의 보수세력 전체를 견인해가는 양상이 나타 강인철
한국 개신교 반공주의의 형성과 재생산
역사비평
봄
123
나고 있다는 점이었다 한국 개신교가 친정부 반공 반북주의의 선봉에 선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신도들이 거리에 나선 것은
년 이후 나
타난 새로운 현상이었다 한편 이명박 정부에서 제도 언론이 점차 친정부 성향을 지니게 되자 나꼼수 등 인터넷과
를 이용한 새로운 반정부 진보 풍자가 급격하게 확산되었다 그
러자 이에 맞서는 극우적인 풍자 농담 사이버 놀이가 젊은 층 사이에서 인기를 얻게 되었다 특히 온라인에서 극우성향의 집단이 등장한 것은 가장 주목할만 현 상이다 일베 일간베스트 저장소 가 바로 그것이다 일베는 디시 인사이드 의 정 치 사회 갤러리 의 정치성과 야구갤러리 의 호남 비하 경향 등의 용어들과 코미 디갤러리 의 막장 정서의 결합체로 등장했다 디시인사이드에 올린 저질스러운 게시물들을 저장해 놓자는 사이트로 생겨난 일일베스트저장소는 네티즌들이 옮겨 옴으로써 독자적인 극우 유머 커뮤니티로 변신하였다 일베의 극우적 성격은 반민 주진보 비체계적 반공반북 극우
반여성 반외국인 인종주의
반호남주의 지역주
의 로 요약할 수 있다 일베 구성원 자신들이 밝히는 자신들의 특징은 저격 공 감 자유 이다 이들이 말하는 저격은 개인의 신상을 들추어내는 것을 의미하며 그들에게 이것은 그것은 일종의 놀이로 간주되고 있다 또한 그들이 말하는 공감 은 극우적 정치성 여성에 대한 적대 인종차별에 대한 공감이다 일베 회원들은 자신들을 일베충 병신 장애인 잉여 게이 등으로 비하하여 지칭하며 반말을 원 칙으로 하는 평등주의에 기반하여 일종의 공동체성을 확보하며 금기를 깨는 놀이 타자에 대한 공격을 통한 재미 혹은 유희 를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일베 회원 혹은 일베에 적극적으로 글을 올리는 사람들이 누구인지는 아직 체 계저으로 조사된 것은 없지만 고등학생 대학생 등 청년층과 일부 성인들이 주로 참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한윤형은 이들이
한국사회의 진보담론이 특정세
대의 역사적 경험에서 파생 되었다는 점에서 생겨난 그 세대 즉
세대 운동권
의 독단성과 민주화 이후 두 민주 정권 하에서 삶의 질이 떨어진 경험이 일베의 등장 배경이라고 진단한다 일베는 선비질 이라는 용어도 자주 사용하는데 이것 은 그들이 진보에 대한 반정립으로서의 자신의 위치를 설정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즉
세대 운동권
깨시민 깨어 있는 시민 의줄임말
정치화된
후세대 그
룹 과 일베 는 자신들을 사회적 기득권의 피해자로 인식하고 있다 실제 일베에 적극적으로 글을 올리는 청소년이나 대학생들은 객관적으로나 주관적으로 사회적 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다수라는 지적들도 많다 한편 참전 군인이나 어버이 연합가 같은 물리적 폭력을 행사하는 우익 행동대 의 등장과 더불어 기업화된 폭력 청부 단체의 등장도 주목할만한 현상이다 년
월
일 안산의 자동차 부품회사
에 새벽 농성중인 노동자들에게 컨택터
스라는 용역회사 직원들이 투입되어 노동자들에게 무차별적인 폭력을 행사했다
124
용역직원
명이 노조원
여명에게 소화기통 작업장 내 쇳덩이 등을 던지며
공장 밖으로 내몰았다 컨텍터스의 한 이사는 이 일을 하고 있다 고 주장하기도 했다 크
발레오공조코리아
유성기업
종북세력 때려잡는다는 사명감으로
컨택터스는
뿐 아니라 상신브레이
등 여러 사업장에 사용자들의 요청으로
동원되어 노동자들에게 잔인한 폭력을 행사한 기업으로 악명을 떨쳐 왔다 이들은 유성기업 파업 노조원
명을 승용차로 깔아뭉갰고 재능교육 여성 노동자들에게
도 갖은 폭력과 성희롱을 자행했다 이들 청부 폭력조직이 동원되는 것을 보고도 경찰은 이들의 폭력을 묵인해 주었고 법원은 기업이 이러한 폭력조직을 불법으로 동원한 사실에 대해 면죄부를 주고 있다 결국
년 이후 한국의 우익집단은 이제 정치화되었으며 일부는 폭력을 사용
하기도 했다 자생적인 청년 극우층의 등장은 가장 주목할만한 현상인데 이들은 아직 군 출신 장년 노년 층들과 달리 거리에 나서거나 물리적 폭력을 행사하지는 않고 있다 배경
이명박 박근혜 정부에서의 우익 단체의 지원 강화
김대중 노무현 정부 들어선 이후 그 이전까지 국가나 지방자치 단체와의 관계 에서 각종 음성적 실질적 지원을 받아온 소위 관변단체들은 자신이 누리던 지위 를 부분적으로 상실하게 되었다 행정안전부 현재의 안정행정부 등의 지원이 제도화되면서
활동
년대 이후 새롭게 등장한 시민단체가 주요 수혜자로 등장
하게 되었다 그러자 한나라당과 조선일보 등 보수언론들은 이것이 정권과 시민단 체가 유착되고 정권의 기둥 역할을 하도록 하는 작업이라고 지속적인 공격을 가 했고 이러한 여론몰이를 의식하여 정부도 점차 지원 예산을 축소하였다 그러나 김대중 노무현 정부 기간 내에도 지방자치단체의 각종 공간과 시설은 여전히 과거의 관변단체가 무상으로 법적인 근거없이 차지하고 있었으며 지자체 의 각종 단체 지원역시 이들 전통적인 관변단체에게 유리하게 배분되었다 당시 민주노동당이 서울시
년
개구의 사회단체 보조금 지급 현황을 조사한 결과
새마을운동 바르게살기협의회 자유총연맹 등 특정단체에 과도하게 지급되고 있 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이들 특정 단체에 대해서만 한 해에 지원이라는 막대한 특혜가 주어졌다고 한다 체보조금 총액은 전년대비 약
증가한
년도 서울 억
억원이 넘는 예산 개 자치구의 사회단
만원으로 이중
억
만원이
개 정액보조단체에 지급됐고 정액보조단체 중에서도 새마을운동 바르게살기 자유총연맹 등 운동 단체에 총
개 국민운동단체에 억
억
만원 국민운동단체 중에서도 새마을
만원이 지급됐다 전체 보조금의
정도가
개 정액
시사 인
125
보조단체에 지급됐고 지급된 정액보조단체 보조금 중
정도가 새마을운동
바르게살기협의회 자유총연맹 등 국민운동단체에 지원된 것이다 수원지역의 경 우를 보면 노무현 정부 당시에도 가장 많은 액수는 관변단체에 지원되었다 년도 사회단체 보조금 지원 받은 수원지역 시민 사회단체는 모두 여개 사업에
억 천
여개 단체로
여만원이 지원되었다 그러데 바르게살기협의회에는
회원 체육대회 운영 등에
천
만원이 지원되는 등 관변단체의 단순 행사나 운
영에 보조금이 지원되고 있는 실정이다 신생 시민단체에도 일정액이 지급되었으 나 이 경우는 주로 사업 프로젝트 형태로 지원되었으며 행사나 운영을 위해 지급 되지는 않았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이들 관변단체에 대한 지원을 폐지해야 한다는 취지의 관변단체의 지원 및 육성법폐지안 이 국회에 제출되기도 했으나 통과되지 못했다 이명박 정부 들어서자 그 전
년 동안의 민주정부 기간 동안 상대적으로 불
이익을 받았다고 생각한 이들 단체들은 노골적으로 정부에 접근하기 시작하였다 더구나 이명박 정부 초반에 촛불시위가 발생하자 여당과 언론들은 정부 지원을 받는 단체가 춧불시위에 참가했다고 공격을 퍼부어 결국 김대중 노무현 정부들어 서 처음으로 지원을 받기 시작했던 시민단체 지원은 거의 완전히 끊어지고 과거 와 같이 관변단체가 모든 지원을 독식하는 양상이 나타났다 특히 한국자유총연 맹 새마을운동중앙협의회 바르게 살기중앙 협의회
개 주요 관변단체는 국유 공
유시설 무상 사용 출연금 및 보조금 지원 조세감면 등이 법에 의해 보호되는 아 주 특별한 단체다
년
억에서 시작하여
년에는
억
년에는
억
을 행정안전부로부터 지원을 받는등 정부지원을 거의 독식하였다 전경련이나 개 별 기업들도 공익 의 전제 조건으로 이들 단체를 지원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특수임무자회 등 폭력 시위를 하는 단체에 대해서도 막대한 예산을 지원하 였다 각각
년 정부는 이들 단체에 인건비 사무비 활동비 등 운영지원 명목으로 억
만원과
억
만원을 지원하기로 했다
이들 단체 중의 일부는 아예 사업체로 등장하기도 하였다 자유총연맹의 경우 는 한전산업개발의 주식
를 보유하여 한전산업개발이 상장하여 주가가 폭등
하자 수백억원의 수업을 얻었으며 매년
억원 넘는 배당을 받고 있다 자유총
연맹은 정부가 추진하는 사업에 참가해서 지원비를 받고 있다 이명박 정부들어선 이후 이들 단체는 안보 시민교육 등의 정부 사업 발주에 참가하여 거의 독식을 하였다 예를들어 자유총연맹은 격제고 사업차원에서
년 정상회의에 앞서 시민의식 향상 및 국
억원을 받기도 했다
이명박 박근혜 정부에서 이들 단체들이 특혜를 받게 되자 자연 비리도 빈발하 가스 통 시위 순수한 마음에서 정부 우익단체에 주식 종결자 자유총연맹의 수완 한겨레
126
억 지원 예정
오마이뉴스
였다 경찰청 특수수사과는 자유총연맹이 억 원 가운데
억
년과
년 지원받은 국고보조금
만 원을 전용 횡령한 혐의로 사무총장 이모 씨
운영본부장 김모 씨
기획홍보본부장 신모 씨
와 행정
를 불구속 입건했다고
일 밝
혔다 실제 이 막대한 지원액이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알고자 하여 정보공개요청이 이루어졌으나 정부는 각종 규정을 근거로 그 활동을 공개하지 않았다 경찰은 전 국경제인연합회가
년과
년 각종 공익사업에 쓰라며 제공한
억 원을 자
유총연맹이 별다른 근거도 없이 써버린 사실도 적발했다 이 씨 등 연맹 간부들은 정상적인 회계처리를 하지 않고 직원들 개인계좌로 이체해 을 사용했으며 이 가운데
억
차례에 걸쳐 자금
만 원은 해외출장비나 대외기관 격려금 언론대
책비 명목으로 직원 개인에게 현금으로 지급했다 즉 김대중 노무현 정부당시 처음 정부의 지원을 받았던 개혁적 시민단체들은 노골적으로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지지하지는 않았으며 오히려 여러 정책에서 정 부와 대립각을 세우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 이후 관변단체는 이제 아예 앞뒤를 가리지 않고 정권 홍보의 선봉대 역할을 하게 되었다 정권탈취를 전 리품으로 생각한 그들은 국민의 세금으로 이들 단체에 전폭적으로 지원할 한 다 음 그 단체가 자신의 정권 유지의 첨병 역할을 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들은 청와 대 정부와 연결되어 실제로 촛불시위에 맞불을 놓는 집회 등을 상의하는 등 정권 의 하수인 역할을 수행한 흔적이 드러났다 지난 해
월 경 국정원 선거개입으로 촛불시위가 시작되자 청와대 정무수석
실 소속 행정관이 지난
일 자유총연맹 사무총장을 만나 촛불집회에 대응하기 위
한 자유총연맹의 활동을 상의 한 사실도 드러났다 국정원과 자유총연맹 혹은 일베의 유착 선거 국면에서의 국정원과 여러 관련 단체들간의 유착 의혹도 제기 되었다 정권이 국가예산이나 정치자금을 우익단체에 제공하고 우익단체는 정권의 첨병노릇을 하던 제 공화국의 양상이 재연되고 있다 한국에서 구우익과 신우익은 다른가 극우 대중조직나 극단적 행동주의는 근대 자본주의의 위기 상황에서 주로 나타 났다 제도화된 정당이나 노조가 실업 반실업 상태의 노동자들의 경제적 욕구나 이익을 전혀 대변할 수 없고 자유 민주주의의 제도와 법이 이들의 요구를 반영하 지 못할 때 급진적인 우파가 등장하여 폭력적인 행동을 보이는 경향이 있다 세기 초 중반의 사회주의 혁명 운동과 마찬가지로 이들 우파 극단주의도 대중의 절망과 불만 소외의식과 박탈감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극우 정치집단의 선동과 지도하에서 물리적인 폭력사용을 마다하고 있다 한국에서 우익 테러 우익의 행동주의가 가장 두드러진 시기는 해방정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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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대까지였다 그 중간의 군사정권 시기는 이들 우익의 이념이나 입지가 거의 국가권력 군과 경찰 등에 흡수 대변된 기간이며 그 전과 이후의 기간은 국가가 우익들의 이해를 충분히 대변하지 못하는 상황 자체
국가 내나 정치권에 진보
혹은 좌익 들이 활동을 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들이 상대적으로 소외되었다 는 위 기의식 때문에 적극적인 행동을 하게 된 것이다
년 이후 이들은 다시 거리로
나서기 시작한 것도 민주화가 그들의 입지를 위협했기 때문이다 구 우익단체는 주로 서북청년단 등 월남 청년들 실업자들 좌익으로부터 피해 를 입은 가족들 그리고 일부 기독교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년대 이후 행동
하는 우익에는 재향군인회 고엽자 전우회 특무임무자 회등 군출신 장년들과 노 년들이 주력을 구성하였으며 대형교회 기독교인들이 새롭게 등장한 대중동원 세 력이 되었다 즉 해방정국의 우익 행동과 가장 큰 차이점은 기독교인들의 등장이 다 한기총 등 한국 보수교회 단체에 속한 신자들이 목회자의 지도에 따라 우익 행동의 동원부대가 된 점에서 한국은
년대 이후 미국과 가장 유사하다 한편 일
베에서 활동하는 청년들은 사이버 상에서만 주로 활동한다는 점만 제외하면
년
대 이후 유럽의 신나치 우익들과 유사한 특징을 갖고 있다 즉 사회적으로 충분한 인정을 받지 못하거나 실업상태에 있는 청년들 기존에 가부장 문화와 남성 우월 주의에 집착하는 문화적 경향을 가진 청년들이 신우익의 주력이 되는 경향이 있 다 그러나 이들 청년 우익들은 한국의 과거의 서북청년단이나 지금의 유럽 극우 청년들 아랍권의 테러세력들과 달리 물리적인 폭력을 사용하거나 정치적으로 동 원되고 있는 우익은 아니다 즉 박탈감 좌절과 분노가 이들로 하여금 극단적 지 역주의 반북주의 여성비하 등의 담론에 기웃거리게 만들고는 있지만 이들로 하 여금 행동할 수 있는 동기를 주는 이념은 갖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즉 과거나 현재나 한국의 극우 대중단체는 국가를 신성시하거나 절대화하는 것 외에 공통된 이념이나 사상을 견지하기지 않고 있다 특히 한국의 우익들은 서 유럽과 일본의 우익들이 견지하고 있는 민족주의 미국의 우익들이 견지하는 낙태 반대나 동성애반대 등의 사회적 담론에 대한지지 입장을 갖지는 않고 있다 오히 려 구세대 우익들은 미국을 거의 조국으로 생각할 정도로 민족주의나 민족 개념 을 포기하고 있다 즉 유럽의 극우는 인종주의라는 사상을 견지하고 있으며 민족 지상주의 국가지상주의의 파시즘적 사고를 견지하고 있다 그런데 한국에서도 조 갑제 등 일부 국가주의 반공 반북주의로 무장한 극우인사들이 있기는 하지만 대 중들의 차원에서 이러한 국가주의 사상이 지지되고 있다고는 보기 어렵다 국가숭배주의라는 것이 사실상 이념적 기초가 없는 것이다 해방정국에서 그렇 게 맹위를 떨치던 서북청년회 단 가 그렇게 쉽게 해체된 사실 역시 이들의 애국주 의는 기실은 이념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박탈감과 이해관계에 주로 기 초한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당시 서북청년회를 이끌던 문봉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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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 조직과
백여만 동지를 자랑하던 우리 청년단이 총재의 유시 하나로 해체되고 청년운동을 해오던 형체조차 없어진 것도 모두 따지고 보면 인물 중심으로 뭉쳐지고 뚜렷한 지도이념이 결여되어 있다는 데 그 원인이 있다
과감하게도 청년운동에 투신
반공투쟁을 시작한 것은 결코 자본주의를 옹호하려는 사상적 근거에서 행동한 것 도 아니었으며 그렇다고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려는 선견지명에서 출발한 것도 아니었음은 시간이 흘러갈수록 깨닫게 된다 다만 조국의 주권을 회복하고 우리의 독립을 쟁취하려는 애국정열의 발동으로서 행동하게 된 것이 우리 독립 목표를 저해하는 공산당과 맞부디쳐 싸우다 보니 곧 반공투쟁으로 발전했다고 보는 것이 다
고 그들의 무이념을 한탄했다 그래서 과거 우익 행동주의 단체는 실제 우익정당이나 정치가들에 의해 일시적
으로 이용되고 가치가 없어지면 버려지는 경우가 많았다 서북청년회를 이끌었던 선우기성도
나라를 위하여 일도 많이 하고 공산당을 타도한 위대한 업적을 지니
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젊었던 우리들은 그 동안 이기적 정치꾼들에게 이리저리 끌려 다니면서 그들의 충실한 앞잡이 노릇에 이 모양 이 꼬락서니를 면할 수 없 었던 것이다 라고 한탄한 적이 있다 실제 군 출신들이 재향군인회나 고엽제 전우회 등 우익단체의 행동에 참가하는 동기도 이념보다는 존재에 대한 인정 욕구가 깔려있기는 하지만 국가로부터의 재 정 지원 등 이들의 먹을거리 와 관련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과거의 월남 청년들 이 서북청년단에 가입하거나 반공 투쟁 의 선봉에 선 것역시 이들의 먹을거리 문제와 연관되어 있었다 반공은 해방직후 재산권 박탈의 위협에 시달리던 친일부 호들의 과거를 감추고 이익을 보장해주는 논리였고 이 점에서 월남 청년들과 친 일부호들의 이해는 일치하였다 부자들은 이들을 이용하였고 이들도 그들의 지원 으로 생계를 유지하였다 한국에서 대중적인 구우익이나 신우익이나 사상이나 이념보다는 주로 이해를 중심으로 뭉치고 흩어지고 한다는 말은 이들이 정치 이데올로기적으로나 재정 면 에서 국가에 거의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해방 후에는 서청 무소불통 이라는 속설이 있었는데 그것은 공권력이 이 조직의 불법과 탈법을 절대 적으로 비호하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년 제주
사건 당시에도 서청은 유
해진 제주 지사와 경찰의 비호 아래 태극기 강매와 강제모금 관공서의 인사업무 와 보급 문제 개입 등 준공권력을 행사하였다 조직의 자금을 모금하는 과정에서 테러를 행사하기도 하였다 지금의 행동주의 우익단체인 여러 참전군인 단체역시 정권의 적극적인 지원과
선우기성 김판석 지음 같은 책 쪽 같은 책 쪽
청년운동의 어제와 내일
횃불사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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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 검찰 등 공권력의 묵인 하에서 집회방해와 맞불집회 신문사 난입과 기물파 괴 진보당 난입과 관련자 구타 진보적인 인사들 위협 자신들의 의견과 맞지 않 은 각종 세미나나 토론회 방해 상스러운 욕설 사용 등 폭력을 저지르고 있다 얼 마 전 이들 집회 후에 발생한 여의도 어느 식당에서의 밥값 시비처럼 이들은 과 거의 서북청년단과 마찬가지로 이들은 자신들이 국가를 위해 희생했고 반공반북 의 입장을 명확하게 하는 애국자들이기 때문에 누구도 자신들을 건드릴 수 없다 고 생각하고 있으며 국가의 적인 종북 좌파 인사들을 제거하는데는 폭력의 사용 도 불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절차적 민주주의나 토론 등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한 다 그래서 이러한 동원과 폭력적인 행동이 과연 정부의 지원과 묵인이 없다면 그 리고 정부로 부터의 재정 지원이 완전히 없어진 상태에서도 지속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즉 한국 우익 대중운동은 유럽이나 미국과 달리 국가권력과 거리를 두 고 있는 시민사회의 일부를 구성하기 보다는 언제나 국가권력과 직 간접적으로 유착되었으며 공식 기관 혹은 정치 엘리트 기업가들로부터 활동의 자금을 공급 받아왔고 국가기관 혹은 보수 언론에 의해 행위의 정당성을 보장받았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일베의 경우나 보수 개신교 신자들의 행동주의는 약간 성격이 다르지 만 전통적인 관변단체 혹은 군 출신들로 주로 구성된 극우 행동주의 단체를 시민 사회의 일부로 볼 수 있을지 의문이다 맺음말 극우 행동주의의 등장은 파시즘화의 한 징후나 경향으로 해석될 수 있다 과거 에 나타났던 역사적 파시즘이나
차 대전이후 간헐적으로 나타나는 파시즘화의
경향은 거의 민주주의의 실패의 결과라 볼 수 있으며 좌파 혹은 진보적 사회운동 에 등장에 대한 우파나 부자들의 위기의식의 반영 혹은 그것에 대항하기 위해 나 타난 경우가 대부분이다 특히 파시즘은 전쟁 경제위기 등과 맞물려 제도정치가 대중들의 불만과 욕구를 대변할 수 없는 상황에서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 이후 한국의 극우 행동주의는
년
년 정전 이후 처음으로 등장한 두 민주정부가
반공 반복 독점 이데올로기를 허물고 진보정당이 북한 및 사회주의에 대해 매우 긍정적인 입장을 취하게 된 것에 대한 반발과 위기의식에서 출발하였다 특히
년대 이후 각종 시민운동 인터넷을 활용한 진보담론의 등장
를
이용한 자유주의의 비판담론에 대한 거부감도 중요한 동기가 되었다 시민운동과 진보지식인들이 표방한 도덕적 우월감과 자기 정당성에 대한 확신이 역풍을 가져 온 점도 무시할 수 없으며 진보적 입장을 표방한 두 정부가 실제로 노동자들과 빈곤층의 생활을 더욱 어렵게 만든 사실에 대한 역겨움과 불만도 우익 행동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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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배경에 깔려있다 이점에서 파시즘은 좌파의 등장과 실패를 반영하는 것이라는 오랜 공식이 한국에서도 어느 정도 적용될 수 있다 이들이 포방하는 담론은 다른 나라의 극우 행동주의와 마찬가지로 국가지상주 의를 표방하고 있으나 선진 자본주의 국의 그것과 달리 인종주의 혹은 사회적 보 수주의의 내용을 갖고 있기는 않다 그 대신 극단적 반북 반공 그리고 친미주의 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제국주의가 되어 보지 못한 한국 우익들의 일그러진 모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박근혜 정부의 핵심 구성원들은 사실 이들 극우세력과 동일한 지향 혹 은 이데올로기를 갖고 있다 따라서 이들은 자신의 정권의 유지를 위해 이들을 이 용하려는 유혹을 갖고 있으며 그들의 행동을 적극 비호하거나 지원할 의사를 갖 고 있다 정권이 이들과 거리를 두지 않으려하면 할수록 정권은 이들에 같은 처지 가 될 위험성이 높다 우익 극단주의는 독이 든 사과다 잘 못 삼키면 함께 죽을 운명이 처할 수도 있다 빈 라덴을 이용했던 미국이
테러를 당한 것이 그
실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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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션2: 해방·분단 70년, 한반도의 현재와 미래] 발제3
안보국가와 한국 평화운동
박정은 (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
우리는 어떤 평화 를 말하고 기원하는가 세월호 참사와 메르스 사태를 경과하면서 우리는 국민의 안전을 책임지지 않는 국가의 존재 이유를 묻곤 한다 국민의 안전을 돌보지 않는 국가는 구성원들이 알 아서 각자도생해야 하는 전장일 뿐이다 그 전장에서는 인간에 대한 존엄이 무너 지고 기본적인 생활조차 어려워 생을 내려놓는 사람들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국가 이익에 곧 나의 이익을 일치시키라는 정부의 광복
년 광고가 불편한 이유
이다 군인과 학생들 지자체 대상으로는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키우라며 전방 위적으로 나라사랑 교육에 나서고 있는 것은 또 어떤가 시민의 복지와 안전보 다 국방력을 키우는 것이 최우선이라고 주장하던 군인들은 자기 호주머니부터 채 웠다 군의 비리는 육해공을 가리지 않았다 최근에 밝혀진 방산비리 경우엔 전현 직 군 장성 포함해
명이 연루되었고 그 규모는
조원에 가깝다 구조함으로 건
조되었으나 세월호 침몰 당시 무용지물이었던 통영함처럼 비리로 인한 시민의 피 해는 구체적이다 국가는 존재하되 정부는 정부답지 않고 시민들은 반평화 상태에 놓여 있다 우리 역사는 정부가 정부답지 못했을 때 누가 그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지를 증명한다 그래서 묻게 된다 이런 국가와 정부 사회에 살고 있는 시민들에게 평화란 무엇 인가
아직 부족한 미완의 글입니다 인용을 삼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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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험악함 탓인지 일제 치하 이 땅의 사람들에게 평화는 무엇이었는지 생각 해보면 수탈을 모면하고 걱정 없이 먹고 사는 일 강제징용에서 벗어나는 일 등 이 당시 민중들에게 당장의 평화였을 것이다 그리고 식민지 민중이 겪어야 했던 모든 억압과 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독립과 국가 건설이 요구되었다 하지만 독 립과 국가 건설 그 자체가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었다 광복 이후 이 땅의 수많은 사람들은 분단된 조국의 통일이 없으면 한반도 평화는 요원하다며 통일운동에 헌신하고 매진해왔다 그럼 한반도 통일은 어떠한 이유로 평화인가 이러한 질문은 한국 사회 개혁과제에만 집중하는 시민운동이 한반도적 시각이 부족하다고 꼬집은 백낙청의 후천적 분단인식결핍 증후군 의 발로일지 모 른다 통일은 아직 오지 않았고 늘 군사적 긴장과 대립이 요동치는 한반도에 사 는 우리는 매일 평화를 구원한다 분단에서 기원한 비정상적인 체제가 구조화된 사회를 인식하고 궁극으로 분단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 이다 하지만 통일 한반도가 곧 평화를 가져다 줄 것이라고 믿을 근거는 무엇인 가 우리는 통일이 왜 평화 인지에 대한 대답을 제대로 준비하지 못하고 있다 흔히 평화문제라고 하면 과거 역사의 경험과 동맹으로 연결된 거대한 국가관계와 역학구조 안보담론 그리고 정치외교 군사안보 현안으로 이해된다 실제 지정학 적으로 강대국에 둘려 싸여 있는 한반도 남북 분단에서 오는 적대와 군사적 긴 장 그리고 예속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한미 군사동맹에서 비롯되는 많은 평화문제들이 있다 당장 사드
같은 무기체계 도입이나 한국 정부도 국
민도 모르게 진행되는 탄저균의 실험과 훈련도 중요한 현안이다 전시작전권 국 방예산 징병제 군 인권 국가보안법도 중요한 평화문제이다 하지만 평화는 정치외교 군사안보에 관한 것만이 아니다 평화를 위해서 분단과 통일에 관한 고담준론도 필요하고 한반도와 동북아 차원의 비핵화도 중요하다 하지만 그러한 평화는 구조적 폭력에서 자유로운 평화까지 포괄하지 못한다 이미 일상 자체가 힘겨운 이들에게 절박하지 않은 문제일 수도 있다 분단에서 오는 소 모적인 비용과 억압장치 이외에도 절차적 민주주의조차 흠결이 많은 한국의 민주 주의 사람보다 이윤 중심의 시장사회는 오늘날 대다수 시민들을 반평화 상태에 놓이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장에서 쫓겨난 노동자가 원직복직하는 것이 평화 두꺼비 맹꽁이 도롱뇽이 서식처 잃지 않는 것이 평화 가고 싶은 곳을 장애인도 갈 수 있게 하는 것이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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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을 일궈온 농민들이 더이상 빼앗기지 않는 것이 평화 성매매 성폭력 성차별도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세상 군대와 전쟁이 없는 세상 신나게 노래 부르는 것이 평화 배고픔이 없는 세상 서러움이 없는 세상 쫓겨나지 않는 세상 군림하지 않는 세상 빼앗긴 자 힘없는 자 마주보고 손을 잡자 새세상이 다가온다 노래하며 춤을 추자 노래 평화가 무엇이냐
문정현 조약골 작사 조약골 작곡
년 평택 대추리에서 처음 불려진 노래이다 이 노래처럼 평화는 인간의 생명 과 존엄이 존중되고 차별받지 않는 세상을 추구한다 누구나 안전하고 지속가능한 삶을 영위할 수 있고 갈등은 예방되고 민주적으로 조정되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평화가 가능하다 이러한 평화는 생활세계에서 공동체에서 사회에서 그리고 한 반도에서 지리적 공간에 구애받음이 없어야 한다 소수에게 갈수록 집중될 뿐 결코 나눠지지 않는 부를 두고 각자 쟁투하라 떠미는 사회에서 복지의 사각지대에서 생명을 내려놓으려는 이들에게 위험한 현장에서 목숨을 내걸고 일해야 하는 노동자들에게 일자리가 없거나 차별받는 저임금 계약 직에 목을 매야 하는 청년들에게
함께 라는 가치보다 경쟁에서 이길 것을 강요
받으면서 지구상의 그 어떤 나라의 아이들보다 불행해하는 어린이들에게 평생 일 했지만 빈곤한 노후를 보내고 있는 노인세대에게 일상에서 보장받아야 할 평화는 국가안보 라는 이름으로 유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지극히 당연하게도 시민의 평화와 안전이 없는 국가안보는 없다 따라서 평화운동 은 현상유지하려는 분단구조와 전쟁기제를 해체시키는 운동이어야 할 뿐만 아니 라 동시에 사회 전반에 만연해 있는 차별과 폭력의 메카니즘에 저항하고 인간의 존엄성이 구현되는 국가와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운동이어야 한다 결국 평화 평 화운동이 어떤 국가와 공동체를 지향하느냐에 관한 문제이다 분단에서 통일로 정전체제에서 평화체제로의 이행 못지않게 우리는 어떤 국가와 공동체를 만들고 채워야 하는지 논의해야 한다 한국 평화운동 통일운동의 흐름과 현재 종교계의 오래된 활동이 있었지만 평화운동이 대중운동으로 자리 잡은 것은 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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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오래되지 않았다 평화운동은 초기에 과거 통일운동 반기지운동이나 형성된 다양한 시민운동에서 분화되었다
년대에
년대 중후반 북한의 위기구조가 심화
되는 가운데 대규모 기아 사태에 대한 북한동포돕기운동이 전개되었고 주한미군 범죄 독극물 방류 매향리 미군 사격장 문제 등이 공론화되면서 종속적인 한미동 맹에 대한 시민들의 공분도 축적되고 있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년
선언
으로 남북관계에 새로운 전기를 열었던 김대중 정부 후반기와 노무현 정부 출범 즈음하여 평화운동은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구체적으로 구매
년 무기도입 사업에 대한 첫 시민저항운동으로 기록될만한
사업 외압의혹 규명과 무기도입 철회운동이 전개되었고 여중생 사망사
건에 대한 부시의 사과와 한미 이은
개정 촉구 촛불이 연일 이어졌다
년에
년 북미 핵 갈등이 불거지자 한반도에서의 전쟁반대와 북핵의 평화적
해결을 촉구하는 시민행동이 진행되었다 미국의 아프간 침공에 이은 크 침공 즈음하여 한국의 반전반핵운동도 불이 붙었다
년 이라
년 오태양의 공개적인
양심적 병역거부 선언 이후 대체복무제 도입운동이 시작된 것도 이 시기였다 평화운동은 점차적으로 독자적인 위상을 확보해갔고 운동의 영역도 다변화되었 다 평화운동은
년 김선일 피살사건을 거치면서 이라크와 아프간 점령 반대와
한국군 파병 반대운동을 이어갔다 노무현 정부 출범과 함께 시작된 한미동맹 재 조정 협상에 대한 대응 역시 평화운동의 당면 과제였다 미군기지이전과 주한미군 의 전략적 유연성 합의 등에 따라 몇 년에 걸쳐 평택미군기지확장저지운동이 이 어졌다 노무현 정부 막바지에는 제주해군기지 건설이 확정되면서 제주해군기지건 설을 둘러싼 갈등이 본격화되었다 이러한 한반도 정세 대응은 다양한 국제평화연 대 활동으로 이어졌는데 무장갈등예방을 위한 글로벌 파트너십 위원회 활동 일본 헌법
동북아
조 캠페인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 대응 활동 미군기지
네트워크 활동 등이 주요 평화연대 의제들이었다 이러한 평화 의제들에 대한 대 응은 현재까지도 진행형이다 한편 김대중 정부 들어 민간 대북지원 활성화 조치 발표와
년 민화협 결성
등으로 일부 여건이 개선되었으나 당시까지 비합법 공간의 운동의 성격이 컸던 민족해방적 자주 통일운동은
년
선언 이후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더
이상 북한과의 교류 자체가 통일운동의 목표일 수 없었다 정부가 통일을 가로막 는 저항의 대상이 아니라 함께 해야 할 동반자가 되면서 정부와의 대립과 갈등의 통일운동은 마침내 막을 내리고 남북의 화해와 통합을 지향하는 통일운동으로 전 환된 것이다 이승환
민간통일운동 현황과 발전방향
이에 따라 민간통일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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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은
사회문화교류협력 과
대북인도지원
사업에 집중하게 되었다
년에는
여야 합의로 남북관계발전에관한법률 도 제정되었다 년 시민운동 진영도 민화협 종단 통일연대 등과 함께 시작했다 이러한 활동은
년
남측위에 참여하기
선언이 나오면서 당시 통일 평화운동 이외
에도 에너지 환경 여성 등의 시민운동 역시 한반도 맥락에서 각 운동을 의제화 해야 하며 북한에 대한 일방적인 개발 패러다임에 능동적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논의로 이어졌다 그러나 후임정부에 의해 사실상
선언이 폐기된 후
남
측위를 포함해 통일운동은 지금까지 교착상태에 빠져있는 남북관계에서 독자적인 돌파구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년
공동위가 출범하면서
오늘의 준
비위원회 발족을 통해 민간교류가 외부의 정세변화에 의해 중단되지 않을 것이라 는 약속을 겨레 앞에 할 수 있게 되었다 고 했지만 남북해외 공동행사 등 민간교 류는
년 금강산에서
공동행사를 개최한 이후 지금까지 이루어지지 못하
고 있다 재야인사와 종교계 학생운동권으로 결합된 기존의 통일운동은 분단된 국가의 모 순을 극복하기 위해 외세로부터의 자주를 강조했고 지속적인 남북교류협력을 통 해 한반도 평화정착과 민족공동체를 구현해 갈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명박 박근혜 정부 들어 대북지원사업이 대체로 차단되고 남북공동행사와 민간교류가 좌초됨에 따라 이들 단체들의 어려움이 커지고 있다 이들 단체들이 꽉 막힌 남북 관계를 타개하기 위한 작은 돌파구라고 만들어내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지만 전 반적인 정세나 대북 인식의 악화는 통일운동의 위축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러한 가운데 평화를 지향하는 정치체로서 통일을 추구하고 그 과정에 평화와 인권 환경 생태 등 인류보편의 가치를 담아야 한다고 믿는 진보적 통일운동은 평화의제를 적극 수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과거 민족해방의 관점에서 통일운동을 지속하는 일부 단체의 경우 스스로 고립을 자초하기도 했다 사실 북한 체제는 진 보운동이 경계하는 민족주의 국가주의 군사주의 가부장주의 그리고 소수자와 이주민에 대한 편협한 인식과 태도를 보이고 있는데 통일운동 일각에서도 북한 주장에 대해 비판 없이 수용하거나 분단의 모순 극복을 위한 최대의 가치를 통일 로 두고 인권 평화의 가치를 통일의 하위 개념 정도로 인식하는 경향을 보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범민련의 성소수자에 대한 인식 년대 민중운동을 압도하던 통일운동이 전반적으로 위축되는 사이에 지난 년 동안 북한 민주화 북한 인권을 내세우는 단체들은 지속적으로 늘어났다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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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박 정부의 비핵개방
현 정부의 통일대박론 등이 나오면서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통일기금 모금과 통일 공감 확산 통일교육 등을 위한 단체들이 대거 등장했 다
년
월 현재 통일부에 법인으로 등록된 단체는
개로 양적으로 크게
늘어났다 활동분야도 통일방안연구 사회문화협력 대북 인도적 지원 새터민 지 원 경제협력 통일교육 북한인권 개선운동 등으로 다양화되었다 특히 이명박 정 부 들어서 북한민주화와 인권운동 통일교육 등을 목적으로 하는 단체들의 설립과 법인허가가 눈에 띄게 증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들 중에는 활동이 중단되었 거나 유의미한 활동을 하고 있다고 보기 어려운 단체들이 상당수 있고 등록된 단체들간의 활동의 편차 역시 매우 큰 것으로 보인다 박정은 과 발전방향
민간통일운동 현황
추가적인 자료수집과 분석이 있어야 하겠지만 김대중 노무
현 정부 출범이후 보수 우익의 대규모 조직화 북한문제에 대한 시민사회의 피로 도 증가 북한 체제에 대한 혐오 증대 등에 따라 보수단체 활동에 대한 시민 청 년들의 관심과 참여가 높아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평화운동에서 주체의 변화도 눈여겨 볼만하다 평화운동 초기 활동단체들은 통일 운동과 시민운동 조직에서 분화되었고 활동가들도 대체로 대학 학생운동이나 시 민운동 등 조직운동에서 훈련된 이들이었다 그러나 곧 평화운동에는 기존 조직운 동 이외 다양한 형태의 참가자들이 등장했다 개인과 소모임 형태도 있었고 청년 중심의 독자적인 평화운동 단체들도 등장했다 이들의 관심과 참여는 전쟁반대 한국군 파병반대 활동에 이어 평택 대추리로 제주 강정으로 이어졌다 이들은 참 가자의 자발성 비폭력 행동 평화와 인권을 수단이 아닌 추구해야 할 상위의 가 치로 삼았고 자유로운 개인으로서의 참여와 네트워크형 조직을 지향했다 이에 따라 집속탄 최루탄 등 소형무기 거래 대응 연례 군축박람회 개최 평화교육 등 의제나 활동방식 참가자 층위 등에서 평화운동의 저변은 꾸준히 확대되었다고 할 수 있다 평화운동은 어떤 국가 어떤 공동체를 지향하는가 평화운동이 언제나 마주하는 것은 남북한 모두 비정상적인 시스템으로 구조화된 분단체제이다 분단체제 하에서 평화는 곧 국가안보였고 국가안보에 관한 한 국 회든 시민사회든 개입과 통제가 예외시 되는 국가의 독점 영역이었다 그것은 년
월 항쟁 이후 일정한 정도의 민주화가 이루어진 뒤에도 달라지지 않았다 소
위 김대중 노무현 정부 당시나 이후에도 군 국정원 기무사 검찰 등 안보권력과 보수 언론세력의 압도적 우위는 유지되었다 정권의 위기 때마다 북한 위협을 활 용하는 메카니즘도 달라지지 않았다 국제사회의 엄혹한 현실이라는 이름으로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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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동맹은 수단이 아닌 이데올로기로 전파되었고 보수 우위의 지식사회와 담론 정당 지형도 바뀌지 않았다
년 외환위기 이후 심각한 양극화 사회 자본 만능
주의 사회에 접어들면서 그나마 성취했던 민주적 가치들도 심각하게 훼손되고 있 다 공정한 시장 법치주의에 대한 신뢰는 더욱 기대하기 어렵게 되었다 거대한 분단체제에서 시민의 평화와 안전은 밀려났고 시장에 던져진 개인이 스스로 살아 남아야 하는 구조가 고착화되었다 시민사회의 역동성도 서서히 약화되었다 이러한 현실 속에 이제는
년대 논쟁이 되던
자주냐 동맹이냐 라는 선택의 강박이
중국이냐 미국이냐 로 이어지고 있다 결국 가장 센 나라에게 편승해야
한다는 숙명론이 우리에게 자연스럽게 스며들고 있다 이러한 낡은 선택지는 한반 도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보편적이고 지속가능한 평화를 획득하는 방안을 제시하 지 않는다 남북 모두 군비를 증강하고 안보담론을 유지하는 것도 군사적 대립구 도를 결코 해소하지 못한다 통일도 더 이상 전 세대를 아우르는 소원이 아니다 극단적인 체제인 북한에 대한 혐오감과 피로감도 극대화되었다 통일에 무관심하 거나 흡수통일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하거나 막연히 엄청난 비용을 수반하는 것이 어서 오히려 손해라는 생각하는 이들은 더욱 많아졌다 경제적 불평등은 시민의 안전을 위협하는 것뿐만 아니라 남북관계 개선이나 분단체제 극복 과정에도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제 평화운동은 안보국가와 안보담론을 넘어서기 위해 기존에 시도해본 적이 있 는 접근을 통한 변화 가 유효한지 아니면 변화를 통한 접근 을 할 것인지 논의 해야 한다
변화를 통한 접근 이라면 우리는 어떤 국가로 공동체로 먼저 변화해
야 하는지 토론해야 한다 관련하여
년 참여연대 평화군축센터는 평화국가 담
론을 내놓은 바가 있다 평화국가 담론은 국가의 폭력성 억압적 국가장치에 기초 한 평화가 아니라 평화적 방법에 의한 평화를 추구하는 새로운 정치체를 상상하 자는 것이다
참여사회연구소는
년부터 평화복지국가의 조건과 주체에 대해
평화국가는 최소한의 방어능력을 갖추되 시민사회의 평화지향 역량과 동북아 평화연대가 전쟁억지력으로 작동하며 국가이익과 국제사회 규범을 조화시키는 평화외교 윤리외교로 공동의 협력안보를 가능하게 하 고 인간안보로의 인식의 전환을 이루며 한국의 민주주의와 평화과정을 위협하는 신자유주의 축적체제가 아니라 구조적 폭력이 제거된 적극적 평화를 지향하는 축적체제에 기초하며 북한에 대한 지원도 평화과 정과 함께 지속가능한 발전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 등을 제시하고 있다 구갑우 시민과 세계 호
이태호는 보다 구체적으로 평화국가에 대한 개념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 바 있다 평화국가는 발전된 시 민국가이며 다양한 사회적 행위자의 참여로 공동체에 닥친 위협을 판단 해결하고 공동체 안팎에 존재하 는 폭력의 근원을 해소하고 갈등을 예방하며 이로써 구성원으로 하여금 안전하고도 지속가능한 삶을 영 위하게 하는 사회이며 정체 이며 여기서 가장 유한 것이 행위자의 다양성이다 본질적으로 안보문제의 민주화를 수반하고 국방 치안 등에 대한 문민통제를 실현할 평화국가의 행위자는 안보 관료나 통치자만 이 아닌 사회구성원 즉 시민 그 자신이다 안보 행위자로서 시민을 적극 규정하는 것은 안보 영역에서의 국가 독점의 해체를 요구하는 것이며 위협 폭력 안전에 대한 시민주권의 회복을 선언하는 것이다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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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하고 있다 평화국가론이 동북아의 엄혹한 현실에서 구체적인 정책으로 이어지기엔 많은 문 제에 봉착할 것이라는 지적과 함께 무엇보다 통일의 전망 속에서 평화의 제도화 를 추구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분단체제 해소가 우선이라는 입장에서
선
언대로 남북이 지속적인 화해와 교류를 통해 국가연합 혹은 낮은 수준의 연방제 에 도달하는 점진적 통합과정을 상정하여
평화적 안보국가 혹은 평화지향의 안
보국가 로 전환하는 것이 최선의 실현방안이라는 주장이었다 평화운동이 추구해야 할 국가비전과 사회 구성 원리에 대해서는 앞선 논의를 포 함하여 더 많은 토론이 진행되어야 한다 한반도 특수주의 민족주의에 입각한 남 북관계 개선과 이를 통한 분단체제 극복 논리가 보편주의와 지속가능한 발전과의 긴장을 해소할 수 있는지 민주주의의 심각한 후퇴와 경제적 불평등 심화 속에서 실현 가능한지 평화와 인권 등 다양한 진보진영간의 연대가 가능하고 확장될 수 있는지 동북아에서 한국이 주도성을 발휘하여 신뢰를 획득할 수 있는지 등이 토 론되어야 한다 이러한 토론은 기존 통일담론을 풍부하게 해주는 과정이어야 한다
민족 동질성
회복을 위한 통일 이라는 당위나 화해와 협력이 북한 스스로를 변하게 하여 점진 적 통일로 이르게 할 것이라는 기능적 통일담론은 대중적 설득력을 갖기 어렵다 남북관계를 제로섬의 관계로 보고 통일을 정치구조와 체제이념의 통합이라는 하 나 됨의 통일 로 강조하는 통일담론을 극복하는 과정이어야 한다 즉 남한의 시스 템으로 북한의 미래를 설계해야 하는지에 관한 문제를 포함해야 하는 것이다 이 과정을 다양한 시민들이 주체적으로 참여하는 사회적 합의과정을 만들어내는 것 역시 중요한 과제이다 평화운동의 한계와 조건의 변화 정치사회 전반에 걸쳐 폭발력 있는 중대 사안이 연이어 발생하는 가운데 많은 시 민사회운동이 당면하고 있는 문제처럼 한국의 평화운동 역시 전반적으로 활력을 잃어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반도와 북한 문제에 대한 피로도 증가와 진영논 리 압도 경제력이나 삶의 질의 악화 평화의 가치를 수용하거나 대변하지 못하는
태호
시민과 세계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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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권 등 외부적 조건도 여의치 않다 활동가의 재생산과 전문성 확보 등 평화운 동이 활동기반을 마련하는 데 여전히 취약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김기종 씨의 주한미국 대사 피습 같은 돌발적인 사건의 발생이 개인적 일탈이라 는 주장도 있지만 그 이면에는 평화운동 통일운동의 위축에 그 원인이 있다는 분석이 있다 주간경향
통일운동 반전평화운동 위축의 악순환
호 되
기도 한다 운동이 취약하여 의제를 제대로 공론화시키기 못하고 있기 때문에 문 제를 극단적으로 제기한다는 것이다 또 한 예로 북핵 문제의 경우 정부도 당사 자로서의 역할을 전혀 못하고 있지만 한국 시민사회나 평화운동도 더 이상 관심 을 기울이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동북아비핵지대화 캠페인을 진행하고 핵 무기의 위험성을 알리는 활동을 하고 있지만 북한 핵무장 강화에 대한 집요한 문 제제기나 국제사회의 평화적 개입 촉구 활동은 찾아보기 어렵다 어느새 우리도 북핵에 대해 전략적으로 인내 하고 중국의 역할을 기대하고 있는 건 아닌가 이러한 진단에 대해 의견이 다를 수 있고 적절한 사례 인용이 아닐 수 있다 다 만 평화 통일문제에 대한 대중적 호소력이 과거와 같은 수준으로 발휘되기 어렵 고 운동은 집중력 있게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이슈가 장기화 되어 동력을 상실했을 수 있고 북한 미국 일본 한국 등 각국 정부나 외 국 기관 국제기구를 상대해야 하는 사안의 경우 구체적으로 개입하기란 쉽지 않 다 그럼에도 현재 평화운동은 탄저균 사드 등 많은 현안들에 대응하고 있고 일 본 재무장과 핵문제에 대한 국제연대도 이루어지고 있다 제주해군기지 안보교육 에 대한 공동대응도 진행했다 활동가와 참가단체는 부족하고 또 갈수록 줄어들 고 있지만 이들은 여전히 매우 분투하고 있다 그럼에도 현재의 평화운동이 전략 적으로 집중력 있게 진행되고 있는지 운동의 확장을 위한 연대사업과 활동방식 인지 찬찬히 돌아볼 필요는 있다 활동가 전문가 연구자의 충원과 양성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문제도 있다 많 은 단체들의 경우 활동이 축소되거나 상근자 부족 혹은 부재 상태에 있다 단체 활동력 축소와 재정 부족이 악순환 되거나 활동가 교육 같은 지속가능한 운동을 위한 기반을 갖추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단체 주력사업이 불분명해지거나 관 성적인 연대사업에 치중하다보면 활동가들의 동기부여나 성취감도 기대하기 어렵 다 정책 전문가들의 결합도 정체되거나 현격히 줄어들고 있다 압도적으로 비대 칭적인 보수 우위의 학계 사회참여 활동의 제약 등 지식사회에 전반에 걸쳐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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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시민사회운동이 보수정당체제 하에서 연속 좌절하고 있지만 평화운동의 경 우 정치사회에서 평화 의제와 가치를 적극 수용하거나 대변하는 정치가 제대로 작동된 적이 없다는 점에서 그 좌절은 차원이 다르다 평화운동에서 주목하는 외 교안보 사안은 결국 정치의 문제로 귀결된다 이에 대한 새누리당의 기조는 분명 하다 그러나 제
당인 새정치민주연합 혹은 이전의 열린우리당 민주당 등의 입
장은 단일하지 않거나 모호하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 당시의 대북포용정책 기조 를 비판적으로 이어간다는 입장을 제외하고 대체적으로 새누리당의 입장과 크게 차이가 없다 돌이켜보면 이라크파병 평택미군기지이전협정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제주해군기지건설 결정 등 평화운동의 강력한 저항을 불러왔던 사안들은 노무현 정부 당시에 결정된 것들이다 당시 현실정치 라는 나름의 명분을 앞세우 지만 보수정당과 구분되는 정책노선은 그 때도 지금도 찾아보기 어렵다 국민여 론을 의식하여 그 때 그 때 입장이 달라지기도 한다 문재인 대표가 선거를 앞두 고 천안함 침몰사건이 북한 어뢰공격에 의한 폭침이라고 발언하거나 다분히 국민 여론을 의식해 실효성 없는 북한인권법안을 제출하는 모습도 그렇다 무분별하게 각종 한국군 해외파병안을 인준해 온 것이나 각종 방산비리 군 인권 문제 등을 포함해 국방영역의 심각한 수준의 정보왜곡과 은폐를 제대로 감시하지도 제도개 선에 나서지도 못하고 있다 이는 근본적으로 새정련도 안보국가 안보담론에 갇 혀 있기 때문이다 진보정당의 경우 과거 민주노동당이 원내 진출하면서 강력한 저지선 역할을 수행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의석 수의 한계는 분명했다 통합진보당의 경우 진보정당의 분당과 통합을 거치면서 색깔 공세나 낙인효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고 이로 인해 국회 내 존재감을 상실했다 현재 의석이
석밖에 안 되는 정의당에게 역할을 기
대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한편 한국 사회에서 한반도와 북한 문제에 대한 피로도는 갈수록 커지고 있다 매 사안마다 남남갈등과 진영논리가 작동한다 정부 비판에도 손쉽게 종북 좌파라는 딱지가 붙여지곤 한다 국정원의 각종 위법 행위에도 언제나 북한 위협 이 동원 된다 천안함 침몰
등의 실체에 대한 합리적 문제제기는 북한을 이롭게 하
는 것으로 비난의 대상이 된다 북한 비판을 주요 소재로 하는 종편이 종일 장년 층에게 노출되고 있기도 하다 한 탈북자 출신 학자는 북한 사회에 대한 총체적 무지와 왜곡된 정보가 범람하는 한국사회를 보면서 고는 이 사회가 온전히 돌아가지 않겠구나 김성룡
하루라도 북한을 욕하지 않 개성공단 사람들
추천사
중 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언론에서 비춰지는 북한은 실체로서 시민들에게 수용되 고 있다 진영논리와 색깔론이 힘을 발휘하는 상황은 평화운동에 큰 걸림돌이 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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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밖에 없다 마무리하며
해방
년이 평화운동에 실천적 의미를 갖기 위해서
한국 사회 전반을 압도하는 분단체제는 우리에게 평화보다 국가안보에 길들여지 게 했다 모든 정부는 예외없이 패권에 편승하고 군비를 확장해왔다 예외와 기밀 의 영역은 확장되었고 보호받아야 할 개인의 존엄과 평화 인권은 유보되었다 화 해할 수 없고 굴복시켜야 하는 적 과의 공생관계는 연장되었다 경제적 불평등과 신자유주의 축적체제 하에서는 생활에서의 평화도 기대하기 어렵게 되었다 평화 운동이 분단체제 해소와 더불어 인간의 존엄을 지키고 안전하게 일상을 영위하는 것이 가능하도록 시민의 기본권을 획득하는 데 기여하는 운동이어야 하는 이유이 다 그런 면에서 제주해군기지건설저지운동은 많은 것을 내포한다 제주해군기지건설 저지운동은
우리가 구럼비 이다 라는 말로 표현되었듯이 주민들의 평화적 생존
은 외면하고 한반도 평화에는 오히려 위협이 되는 국가안보 논리의 허구 주민 설 득과 동의라는 민주적 절차 확보 소중한 공동체의 유지 생태환경 보호의 가치 등을 드러냈고 강조했다 그 과정에서 주민들과 국내외 활동가 전국의 시민들과 의 연대가 이루어졌다 집요한 저항에는 많은 이들의 구속과 연행 가혹한 벌금이 뒤따랐지만 운동은 강정이라는 작은 마을의 평화가 곧 한반도 평화이고 그것이 세계의 평화로 이어진다는 인식의 전환과 발전을 보여주었다 반면 미국을 방문한 여당의 대표와 주변 정치인들은 미국의 은덕을 읊으며 연거푸 큰 절을 올리는 장 면을 연출하고
우리에게는 역시 중국보다는 미국 이라고 발언했다 제주에서 강
정평화대행진이 한참 진행 중일 때였다 평화운동이 무엇을 지향하고 무엇에 저 항해야 하는지 확인시켜 주는 대조적인 장면이었다 다시 평화운동이 추구해야 할 국가 비전과 전략을 토론하고 다듬어야 한다 어떻 게 주체를 형성하고 국내외 블록을 만들 수 있을지 논의해야 한다 그물망의 한 가닥 같은 이슈에 일일이 대응하는 것으로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이슈 반응형 운동이 아니라 촘촘히 짜여진 그물망 자체를 제거할 전략과 역량 키우기가 필요 하다 그리고 평화운동은 일상의 문제로 보다 확대되어야 한다 분단비용을 줄이 는 것이 시민 개개인의 평화와 안전과 직결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활동이 강화되 어야 한다 이것은 국방예산 복지예산만의 문제가 아니다 군 복무와 군 인권 개 선과도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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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해소되지 않은 근대사의 유산들이 배타적 민족주의로 드러나고 있는 동북 아 지역에서 민간 차원의 동북아 평화협력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지고 있다 특 히 한일 동아시아 시민사회간의 평화연대가 시급히 요구되는 상황이다 최근 일 본 아베 정부가 집단적 자위권 행사에 관한 안보관련 법제들을 강행처리한 것은 안보정책의 변화를 넘어서는 것이다 전후
년 가까이 유지해왔던 국가 정체성을
바꾸려는 위험한 시도이다 이 과정에서 평화헌법은 물론 일본의 민주주의 역시 대단히 심각한 도전에 직면해있다 한미일 삼각동맹도 보다 구체화되고 있다 한 미일 군사정보공유약정이 체결되었고 사드 배치 논의가 본격화되고 있다 해외파 병법 제정이 국회 마지막 절차를 앞두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한일 정부의 움직임 에 저항하는 것은 시민사회의 몫일 수밖에 없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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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션3: 분단 그리고 전쟁을 거부하는 이들]
전쟁과 분단에 대한 예술적 성찰
제인진 카이젠 (영화감독)
이번 토크쇼 주제 전쟁과 분단을 넘어서
한반도 그리고 넘어 와 관련해서 몇
가지 아트 프로젝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눔으로써 한국 전쟁과 분단에서 유래한 이슈들에 대해 예술가이자 영화감독으로서 나를 촉발시킨 개인적으로 성찰한 것 들에 대해 나눠보고자 한다 나는 한국 해외입양이 최대에 이르던
년에 덴마크로 입양되었다 북유럽 백인
노동자계급 가족에서 자란 입양인으로서 나는 한국 역사를 전혀 배우지 못했다 그보다 나는 해외 입양의 인도주의적 구원자
라는 서사 속
에서 자라났다 이 서사에서 입양아는 역사도 없는 어떤 대상 또는 과거도 없는 사람들로 만들어진다 그러나
년 예술학교를 들어가기 바로 전 나는 입양된
이래 처음으로 한국에 가게 되었고 이 여행 중 제주도에서 내 한국인 친가족을 가까스로 찾아 재회하게 되었다 이 사건은 개인적으로는 입양의 공식적인 서사와 나의 이야기 사이의 간극을 알게 해준 경험이 된 것만이 아니라 예술적인 차원에 서도 그 동안 소외되어 왔던 역사들에 대한 관심을 촉발시켜 나를 형성하는 중요 한 경험이 되었다 내 예술 작품과 영화에서 광범위하게 다뤄지는 주제들은해외 입양 전쟁과 군사주 의의 성별 결과 일제 식민시대의 유산 그리고 제주도의 정치적 역사 등을 포함한 다 나는 이러한 주제들은 본질적으로 한반도의 분단과 연결되어 있다고 본다 동 시에 이 주제들은 한반도에 국한될 수 없으며 보다 광범위한 초국가적 지정학 또 는 역사적인 맥락하에서 바라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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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고아 그리고 호랑이 여성 고아 그리고 호랑이 는 딘 쿵
년 비주얼 아티스트이자 영화감독 구스튼 손
과 함께 공동으로 작업한 서사형식의 실험 영화다 이
영화는 홀리는 듯한 감정을 통해 과거 세대로부터 지금의 후세에까지 트라우마가 어떻게 전수되는지를 추적한다 이를 위해 영화는 돌아온 한국 디아스포라
대에서
대 즈음에 한국으로
여성들의 자취를 쫓아간다 특히 이 여성들의
돌아오는 행위가 삶정치적인
동원과 특정 지역 사람들에게 행해진 폭
력의 역사를 침묵하게 만든 서사들에 어떻게 대항하고 이를 깨어 나가는지 탐색 한다 이 영화는 세 개의 서로 다른 세대에 속한 여성들의 이야기를 통해 전략적인 가 계도를 만들어간다 우선
차 세계대전과
차 세계대전 사이에 일본군으로부터 군
성노예로 끌려간 위안부 여성이 등장한다 그리고 한반도 분단 이래로 남한에서 주한미군 기지 주변에서 성매매를 하고 있는 여성들 그리고 한국 전쟁 이후 남한 에서 서구로 입양 보내진 어린이들을 다룬다 한국을 처음 방문한 이래 나는 그동안 늘어나는 해외 입양인 예술가 활동가 그 리고 학자들 중 한명으로써 한국 그리고 서구에서 이뤄지는 해외 입양에 대해 비 판적인 입장을 견지해 왔다
년은 해외 입양인들의 조직활동에서 매우 중요한
해였다 바로 처음으로 한국에서 해외입양 한국인 모임 이 열렸기 때문이다 이 행사에는
개국
명이 넘는 입양인
들이 참석했고 여기서 입양인들은 서로 만나 자신들의 경험을 나눌 수 있었다 그 즈음에
즉 한국 입양인 연대
와
즉 한
국입양인커뮤니티를 위한 진실과 화해 라는 그룹들이 생겨났다 특히 이들 그룹들은 대개는 비정 치적인 입양인 협회와 같은 그룹에 대안으로서 만들어졌다 이 그룹들은 해외 입 양과 관련 있는 사회적 이슈들 특히 그 중에서도
미혼모와 친가족과 연계된 문
제들에 대해 집중하고 있다 여성 예술가들은 이 단체들을 구성하는데 중요한 역 할들을 했다 또한 예술가들은 자체적으로 예술가 집단
실험실
과 같은 그룹을 형성하기도 하고 코리안 디아스포라 예술가 그룹 그리고 네트워크 오리엔터티 전시회
를 구성하
기도 했다 여성 고아 그리고 호랑이 를 만들게 된 것은 바로 한국의 역사 안에 해외 입양 이라는 기록을 새기고 입양인들이 정치적으로 되어 가는 집단적인 과정의 한 단 면을 기록하고자 한 데 있었다 특히 여성 입양인 예술가들이 해외입양인 커뮤니 티 그리고 그 밖에서도 입양에 대한 담론을 형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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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하고자 했다 이러한 노력들에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몇몇의 예술가들은 영화 여성 고아 그리고 호랑이 에서도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 이들은 바로 비주얼아 티스트 나탈리 미희 레모인
작가 마자 리 랑바드
시인 제니퍼 권 돕스
작가 제인 정 트렌카
그리고 영화감독 태미 추
이다
이 영화는 입양인이 고향을 찾아 개인의 친가족을 찾는 일에 주로 초점을 맞추는 것에 대안적인 사고를 제시하여 해외입양이 발생하게 된 보다 넓은 관점의 사회 적이고 역사적 정치적 틀 특히 애초에 한국전쟁과 그 결과로 생겨난 것이라는 인식을 집단적 목소리로 표출하고자 했다 이 영화의 또 다른 동기는 해외입양의 역사와 해외이주의 역사 사이의 관계를 추 적하는 것이었다 특히 이 역사들은 전쟁과 군사주의의 결과로 성별에 따라 다르 게 나타난 영향
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 는 내가 뉴욕과
여성 고아 그리고 호랑
에서 공부하고 있는 동안 미국에 이민한 한국인 커뮤니티
를 만나게 되면서 구상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나는 미국이 한국전쟁에서 한 역할 에 매우 관심이 많아졌다 그리고 한국인 여성과 미국 군인 사이에 성적인 관계와 같은 경우에서처럼 어떻게 군사주의가 한국인 미국 이주의 한 유형을 만들어 내 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 영화의 주인공 중 한 명인 그레이스 조
는 자신의 책 코리안 디아스코라의 홀림 부끄러움
비밀 그리고 잊혀진 전쟁 에서 이러한 터부시되는 이야기 특히 가족의 비밀로 밀봉된 고통스러운 이야기들이 어떻게 부분적으로 나타나고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홀 림의 감정을 통해 전해지는지 설명한다 게다가 이 영화는 비주얼 아티스트 소니 금
의 목소리를 통해 일본 식민지 시대의 역사 그리고 일본으로 간 한
국인들의 경험을 추적한다 이 시대 일본으로 떠나간 젊은 여성들의 목소리는 주 한미군 매춘산업에 개입되어 있는 한국인 그리고 필리핀 여성들 그리고 일본군에 의해 군 위안부로 강제동원된 여성들의 증언들과 함께 비춰진다 그럼으로써 군사 주의가 여성들의 삶을 통해 세대를 거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나타내 준다 나는 예술작품을 통해 권력 대표성 그리고 의미의 생산 사이의 관계를 끄집어 내 려 시도해 왔다 특정 대상 또는 관점을 억압하거나 배제 또는 악마화하는 주류의 담론들과 대표적인 논리들을 드러내고 이를 깨는 한편 소거와 침묵과 동반되는 트라우마와 굴절에 미학적 형태를 부여할 수 있는 대안적인 글 또는 해석을 제안 함으로써 출현의 장소 여성 고아 그리고 호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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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나타내고자 했다 는 어떻게 한국전쟁이 공식적으로 대표되는가 서울
전쟁기념관의 전경 그리고 기록물 중
년대 미국의 뉴스 영화 기록을 통해서
보여주려고 하였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이러한 공식적인 이미지들에 주인공 여성 들 특히 대안적인 설명과 증언을 제시하는 이 여성들은 자신들의 목소리들로 이 의를 제기한다 공식적인 한국전쟁의 대표 상징 역시 대개는 잘 드러나지 않고 고 립돼 있기 마련인 군주둔 도시라는 공간에서 찍은 기록들로 대비된다 과거 위안부 여성들과 미군기지 주변에서 일하는 여성들 그리고 해외 입양인들 사이에 세워진 전략적인 가계도는 이러한 문제들이야말로 하나로 합쳐질 수 있다 거나 이 문제들이 직접적으로 연관되어있다고 암시하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어떻 게 이러한 역사적 이야기들이 식민주의 군사주의 그리고 전쟁이라는 유사한 결합 체들로부터 발생했는가 그리고 가부장주의 민족주의 그리고 계급에 의한 차별 등으로 인한 수십년간 이 이야기들이 터부시되고 침묵되어 왔는가를 지적하기 위 한 것이다 반항의 반복 여성
고아
그리고
호랑이 에
이어서
나는
반항적
번역
이라고 명명된 아트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이 프로젝트는 제주
항쟁의 억압된 역사와 조각조각의 기억들이 어떻게 현재의 순간에도 울
려 퍼지고 있는지 표현하기 위해 세 개의 비디오 설치 작업과 멀티미디어 아카이 브 설치 작업으로 구성되었다 여성 고아 그리고 호랑이 벗어나서
작업을 하는 동안 나는
년 한국이 일제치하에서
년 한국전쟁이 발발하기까지의 그 짧은 과도기적 시기에 일어난 일
들의 구체적 이야기들을 이해하게 됐다
제주 프로젝트를 하는 것 역시 나에게
왜 내 친가족이 한반도 분단의 이념적 갈등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어야만 하는지 그 심오한 맥락을 이해하는 기회를 제공했다 특히 이러한 이념적 갈등은 제주 사건에 대한 진실과 화해의 노력이 마침내 대중에게 구체적으로 알려지게 된 년대까지도 매우 극심했다 반항적 번역
프로젝트의 주요한 일은 멀티채널 비디오 설치와 이라는 영화 작업이었다 제주
반항의 반복
사건을 둘러싼 여러
일들을 조사하거나 구술하는데 열심히 노력해 왔던 개인들 현기영 허영선 김경 훈 김성내 정공철 김동만 송승문 고난향 김종민 김동춘 의 목소리를 통해
반
항의 반복 은 지난 역사 내내 이념적 분쟁으로 인해 대개 억압되어 왔고 지금까 지도 논쟁꺼리가 되고 있는 관점들을 전달하고자 했다 반항의 반복 은 제주
항쟁과 학살을 시간흐름대로 설명하려고 하기 보다는
사람들이 겪은 경험 사건 그리고 관점들을 다층적인 기록을 통해 보여주려고 했
147
다 이 작업은
개의 다른 비디오 서사들로 구성되었는데 이
사건 이면에 깔리 정치적 동기를 드러내고 어떻게 제주
개의 서사야 말로
사건의 해결되지 않은
트라우마가 여러가지 형태로 울려퍼져 나가는지 제주도의 현재 전경 사건을 환 기시키는 문학 작품의 대변 생존자와 그 친척들의 기억의 환기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를 연결하는 샤머니즘 의식 그리고 제주해군기지 건설로 또 다시 제주도 가 군사화되는 것에 반대하는 시위 등을 통해 보여주려고 했다 여성 고아 그리고 호랑이 와
반항의 반복 은 디아스포라의 눈을 통해 분단의
영향에 미학적 형태를 부여하는 시도라는 점에서 유사하다 한반도의 분단은 내게 있어서 아직도 끝나지 않은 한국전쟁의 성격 때문에 지금 현재까지도 관통하는 정치적으로 가장 초창기적인 어떤 장면과 트라우마를 대변한다 한국전쟁이 여전 히 지속된다는 사실로 인해 어떤 역사는 여전히 풀리지 않은채 남아 있거나 진정 한 화해와 치유의 과정이 그대로 중단된 채 남아 있는 등의 결과로 나타나고 있 다 이와 같은 단절 중단으로 인해 과거와 현재는 분리될 수 없으며 차라리 계속 해서 융합되고 있고 확실한 해결책은 보이지 않는다 내 작품은 이러한 사실을 시공간적으로 겹쳐지며 다각도의 다층적인 몽타주 형식으로 그리고 조각조각으로 난 서사들의 형태로 이야기를 전달한다 예술가로서 나에게 한국전쟁의 시기를 탐색하는 것은 일련의 점차적인 과정이었 다 그 시대로 돌아가는 것은 또한 한국인 해외 입양인으로서 나의 주체성을 좌우 하게 된 트라우마가 됨직한 교착상태의 현재 그리고 그 근본 원인에 대해 찾아가 는 하나의 과정이기도 했다
이 교착상태라고 할만한 상태는 다른 많은 디아스포
라들도 공유하는 것일지 모르겠다 헤어짐과 분리의 감정은 끝날 수가 없으며 나 는 단지 그 미묘한 뉘앙스와 근사치에 해당하는 것에 접근하려고 노력하는 것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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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션3: 분단 그리고 전쟁을 거부하는 이들]
조선적
리정애 (재일동포 3세)
안녕하세요 재일조선인
세 리정애입니다 성이 리 라는 것도 낯설지만 재일조
선인 이라는 말은 더 낯설죠
년에 제가 남쪽에 왔을 때만 해도 재일조선인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리고 제 이름이나 재일조선인이라는 말에 경계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꽤 많았습니다 재일조선인 즉 재일동포인데요 재일동포라고 하면 나라를 버리고 일본이 좋아서 갔다고 하는 사람들 또한 많은 데요 제 조부모님 외조부모님들이 다 제주에서 살고 계셨는데 그 당시 대부분 사람들이 그랬듯이 일제한테 모든 것을 뺏겨 살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셨어요 일제시대에 일본으로 건너가신 분들을 부모님은
세 그래서 저는
세라고 부릅니다 오사카에서 태어나신 제
세입니다 이제 우리 동포 사회는
세
세 세대로 이
어져있습니다 지긋지긋한 일제 식민지시대와 너무나 아픈 우리 민족의 분단시대 에 의해 우리 재일동포들의 고통이
년 넘게 계속 되고 있습니다
역사적인 관점으로 봤을 때 재일조선인이란 단어를 쓰는 것이 옳은데 여기서도 그렇지만 일본에서는 특히 조선 이란 말은 아주 부담스러운 말입니다 저는 일본 어를 쓰는 것을 싫어하지만 굳이 말하자면 조센
조센징
온갖 차별과 멸시의
대상이죠 그래서 한국국적 동포들은 스스로 재일한국인 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고 아예 민족을 나타내는 말을 숨기기 위해 재일 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합니 다 이 단어 하나를 들어도 재일동포 사회의 분단과 일본에서의 뿌리 깊은 차별의 역사를 알 수 있습니다 한가지 더 호칭에 대해 설명 드립니다 남쪽에서는 교포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 교 포가 아니라 동포라고 하는 것이 맞습니다 솔직히 저는 교포라는 말을 들으면 왠 지 기분이 안 좋은데요 뭔가 소외되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그러면 차이가 무엇일 까요
교포는 다른 나라에 아예 정착하여 그 나라 국민으로 살고 있는 동포 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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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고 동포는 같은 나라 또는 같은 민족의 사람을 다정하게 이르는 말 입니다 앞으로 남쪽 분들이 우리 재일조선인을 동포 라고 불러 주시고 다정하게 대해주 셨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그냥 재일동포 재일조선인이라면 어쩌면 이 자리에 없을지도 모릅니다 오 늘 이 자리에 온 것은 제 국적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입니다 일본에서 태어나 고 계속 살았으니까 일본국적
또한 이 남쪽에서 살고 있으니까 한국국적
아닙
니다 제 국적은 조선 입니다 그렇게 말하면 대부분 사람들이 북쪽의 국적 이냐 고 물어보죠 정확히 말하면 조선적 입니다 그러면 조선족 이냐고 하죠 지금부터 아주 복잡한 머리가 아파지는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국적이 조선 이라 지만 정확하게는 조선적 이고요 국제법상으론 저는 무국적자 입니다 한번에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이제까지 아무도 없었어요
조선적 을
재일동포 리정애의 서
울체류기 의 만화를 그려준 임소희 작가님한테도 제 남편인 김익씨 한테도 몇 번 이나 설명했죠 심지어는 조선적을 만든 장본인인 일본인들조차도 대부분 모르죠 뭐 워낙 역사왜곡이 심한 나라라 그렇지만요 그래서 일본의 출입국관리소 같은 관청에 가면 싸워야 합니다 일본정부는 조선적은 기호 라고 하지만 저는 이제까지 내 국적이라고 여기고 살 아왔어요 태어났을 때부터 할아버지 때부터 조선 이였고 조선 은 또한 내 정체 성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저는 분단된 조국을 인정하고 싶지 않습니다
한국 국
적 으로 바꾼다는 것은 바로 분단조국을 인정하는 것이기에 죽어도 안바꾸겠다는 거죠 조국이 통일된 그날 저는 통일조국의 국적 을 취득할 것입니다 인터뷰내용 재일동포
세인 리정애씨가 어떻게 하여 남편을 만나 결혼하여 한국에서 살게
되였는지 그 경위에 대해 말해주세요 남편인 김익씨를 만난 것은
년
월이였습니다 김익씨는
까지 국가보안법 위반 으로 감옥에 있었는데 그때 민족
년
월부터
월
에 련재중이던 만화
재일동포 리정애의 서울체류기 그림 임소희 이야기 리정애 를 읽었다고 해요 리 정애의 리상형이 상투머리와 바지저고리가 어울리는 운동권 미남자 라는 대목을 보고 자기가 바로 그 남자라며 감옥에서 나가자마자 바로 리정애를 찾아냈죠 김 익씨 말로는 미남자 의 미 자는 안 보였다네요
앞뒤로 해서 여름에만 남쪽
에 있을 일정이였는데 어쩌다가 여행증명서 림시여권 를 두번 갱신해서 겨울까지 체류하게 됐죠 참 인연은 인연이였나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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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공화국이든 남쪽이든 우리 땅에서 살고 싶었어요 우리 땅에서 우리 민족과 함께 우리말을 쓰면서 생활할 수 있다는 것은 저에겐 너무나 행복한 일이니까요 예전부터 조국이 통일되면 꼭 귀국하겠다고 생각했었고 머지않아 통일될 것이라 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우선 남쪽 고향땅에서 살아보기로 했어요 무엇보다 고 등학교시절부터 가지고 있던 조국과 통일을 위해 이바지하겠다는 제 꿈을 실현할 때가 드디어 왔고 이 남쪽에선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고요 남쪽에 와 서 일제식민지의 흔적을 직접 보게 되면서 일본에서 사는 게 더 고통스러워진 것 도 있어요 조선적 인 리정애씨가 한국에서 생활하는데서 고생이 적지 않다고 봅니다 몇 년 전에는 여행증명서가 발급 안된 탓에 일본 친정에 들다
년 넘게 남편과 떨어
져 살아야 했다는 신문보도도 보았습니다 한국에서 살면서 체류를 보장해주는 신 분증이랑 있는지 아무 권리도 없는 상태인지 궁금합니다 한국에서의 리정애씨 법적 지위가 어떻게 되고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런 불편함에도 불구하 고 리정애씨가 조선적 을 포기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가요 사람들이 고생이 많다 고 하지만 우리 동포들의 고생 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 다 고향땅에서 혼자 편하게 사는 것 같아서 늘 동포들에게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남쪽에서 유일하게 신분증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여행증명서 림시려권 시다시피 남쪽을 출입할 때만 필요한 것이고 보통
인데 아
개월짜리라서 안정적인 체류
를 보장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년에 결혼했는데 결혼하기 전에도 국적을 바꾸지 않는다는 이유로 입국거부 를 당해서 상견례도 못했고
년 동안 남쪽에 못들어갔어요 결혼식만 하고 다시
일본으로 돌아오겠다는 각서를 쓰고서야 여행증명서를 발급받았습니다 결혼식 약 한달 전에 겨우 들어왔는데 혹시 몰라서 먼저 혼인신고를 했습니다 전례가 없던 일이라 안될줄 알았는데 언론에서 화제가 된 것도 있어서 구청 직원도 알고 있어 서 좀 당황해 하면서도 혼인신고서를 접수했죠 본적지란에 제주도 한림면 월령 리
본관란에 전주리씨 라고 의기양양하게 썼는데 존재하지 않는다며 다 지
워버렸어요 제 뿌리를 부정당한 것 같아 충격을 받았죠 뭐 남쪽에서 정체성을 부정당한 일은 한두번 아니지만요 나중에 혼인관계증명서를 받아보니까 무국적 자 라고 기재됐더라고요 그러면 외국인으로 간주한다는 것이니까 외국인들이 신 청하는 배우자비자
를 신청하려고 출입국관리소에 갔는데 국적확인소송 을
하기도 전에 법무부가 선수를 쳐서 검토의견을 내놨어요
재일조선인은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것으로 볼 수 있다 는 내용이였는데 그러면 왜 령사관에서 국적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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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강요하며 조선적 동포들의 입국을 막느냐는 말이죠 법적으로는 대한민국 국 적자 라지만 외교부와 국정원 입장은 다르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다행히 불법체 류 가 아니라는 것이 증명됐는데 그렇다고 제 신분을 보장해주는 것은 여전히 아 무것도 없습니다 의료보험은 물론 직장도 못다닙니다 외국인한테도 주는 권리를 동포인 저에겐 단 한가지도 주지 않는거죠 얼마 전에 일본 운전면허증이 기한만 료로 말소돼버렸어요 일본 면허증을 여기 면허증으로 바꿀 수 있는 제도가 있어 서 면허증을 바꾸러 외교부에 갔는데 주민번호나 외국인등록번호가 없어서 안된 다고 했습니다 속상해도 어쩔 수 없어요 저는 한국국적 을 취득할 의사가 없으 니까요 모든 것을 감수하고 살아야죠 다만 원고료나 만화책 인세에서 세금을 떼 갈때 외국인 취급해서
내국인은
를 거두어가는 것은 화가 나죠 자기들이
편한대로 외국인 취급하거나 동포 취급하는거니까요 조선적을 포기하지 않는다고 하기보다는 끝까지 사수하겠다는거죠 이유는 여러가 지입니다 일본정부는 조선적은 기호 라고 하지만 저는 이제까지 내 국적이라고 여기고 살아왔어요 태어났을 때부터 할아버지 때부터 조선 이였고 조선 은 또한 내 정체성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저는 분단된 조국을 인정하고 싶지 않습니다
한
국 국적 으로 바꾼다는 것은 바로 분단조국을 인정하는것이기에 죽어도 안바꾸겠 다는거죠 조국이 통일된 그날 저는 통일조국의 국적 을 취득할것입니다 장기수선생님들을 모시고 활동하고있다는데 어떤 활동을 하시는가요
또한 이
활동에 참여하게 된 경위가 무엇인지 주요 활동내용은 선생님들을 모시고 기자회견이나 집회 여러 행사에 참가하거나 교도소에 면회하러 가는 것입니다 특히 제가
인방 이라고 부르는 네분은 개인
적으로 모시기도 하죠 그리고 한달에 한번
한마음통일산악회 에는 꼭 참가해
요 양심수후원회와 통일뉴스 범민련남측본부 등등 통일단체들이 함께 하는 산악 회입니다 년
에 처음으로 장기수선생님들을 뵈면서 양심수후원회 를 알게 됐어요
양심수후원회는 장기수선생님들 그리고 량심수들을 후원해온 통일운동 단체입니 다 운동권 사람들도 아직 재일조선인에 대해 잘 몰랐을때였는데도 공화국에서 내 려오신 선생님들은 재일조선인에 대해 잘 알고 계셨고 저를 특별히 아껴주셨어요 아무래도 저한테도 공화국 출신 선생님들은 특별한 친할아버지와 같은 분들이시 죠 그래서 자연스럽게 양심수후원회 회원으로 주로 활동하게 됐어요 선생님들을 옆에서 지켜보니 고향에 가고 싶어도 못가신 우리 다 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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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동포들을 보는 것 같습니
세를 넘으셨고 요즘 건강도 안 좋으세요 그동안 몇분 돌아가셨고요
하루빨리 제 차 송환 이 실현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최근년간 북남관계도 그렇고 한국 국내의 진보 통일운동을 둘러싼 정세도 워낙 안 좋습니다 현지에 사는 사람으로서 최근 정세를 어떻게 보고있습니까 이명박정권 시절보다 휠씬 정세가 안좋습니다 사람들은
년대와 비슷하다고 하
죠 통합진보당 강제해산 건으로 봐서도 그렇지만 진보진영에 대한 탄압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어요 제 주변에서도 압수수색에 련행이 일상화되어있고요 항상 긴장 하고 있어야 하는 상황입니다 현재 량심수가
명을 넘었습니다 얼마전에 유엔
이 북인권사무소 를 서울에 개소했는데 이 남쪽의 인권유린에 대해서는 아무 말 도 없죠 하도 탄압이 심해서 통일운동 단체들이 많이 위축되어있어요 래년에 총 선이 있고
년엔 대선이 있어서 진보진영의 단결이 시급한데 여러가지로 쉽지
않는 상황입니다 그리고 정권에 문제가 많은데도 제 야당인 새정치민주연합이 하 도 못해서 국민들이 차라리 새누리당을 찍겠다는 일본과 비슷한 상황이고요 현 시점에선 변수가 없으면 이기기 힘든 싸움이 될 것 같습니다 예상했던 대로 민족공동행사 성사도 어려움이 많을 것 같고 박근혜정권 막판까지 북남관계가 좋 아질 일은 없을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희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진보진영을 이토록 탄압하는 것은 그만큼 박근혜정권이 위협을 느끼고 있기 때문 이고 조미관계만 풀리면 북남관계는 문제가 안되니까요 한국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 이 최근 통일에 대해 어떤 의식을 가지고 있는지 알 고 싶습니다 일본과 마찬가지로 남쪽도 개인주의가 점점 심해져가는데다가 경제가 안좋으니까 솔직히 자기 혼자 먹고 사느라 바빠서 통일에는 관심이 없죠 통일되면 경제적 부 담을 남쪽이 가져야한다고 생각하니까 반대하는 사람도 많고요 우리는 그런 사람 들에게 통일의 필요성 정당성을 일깨워주어야겠죠 조국해방
돐을 앞둔 오늘날 아직도 조선민족은 분단의 아픔을 겪고 있습니
다 이 비극을 끝장내기 위해 과연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정애씨의 견해를 들려주세요 주한미군만 우리 땅에서 나가면 바로 통일이 됩니다 그런데 쉽지 않죠 그리고 북과 남의 수뇌들이 합의한 수 있습니다 우리
공동선언과
선언을 리행해야 통일을 앞당길
세 동포들 장기수선생님들 그리고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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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도 하루라도 통일을 앞당겨야 합니다 북과 남 그리고 해외의 동포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반미운동 통일운동을 전개해야 합니다 자기 스스로가 통일의 주인이 되어야 합니다 남쪽 현재 상황으로 봐도 특히 해외동포들이 더 단결하여 목소리 를 높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해외동포들이 민족의 분단을 끝장내기 위 해 조국통일을 위해 더 적극적으로 투쟁에 나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재일동포들이 얼마나 탄압과 차별을 받고 사는지 남쪽동포들도 잘 알고 있 습니다 그날까지 멀지 않았습니다 힘내십시오 그리고 우리 단결하여 조국통일을 앞당깁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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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션3: 분단 그리고 전쟁을 거부하는 이들]
반군사주의의 목소리를 만들어온 병역거부운동
임재성 ( 병역거부자 )1)
들어가며 년은 양심적 병역거부 로 등장한 지
가 우리 사회에서 사회운동으
년째 되는 해이다 병역거부자들은 일제시기부터 우리 사회 속에
존재해왔다 군대를 다녀온 이들에게 훈련소에서 집총명령을 따를 수 없다며 고초 를 당하는 병역거부자들은 낯선 존재가 아니다 수많은 남성 법률가들은 군법무관 의 신분으로 그들을 마주해왔다 그러나 병역거부자들에 대한 처벌이 수십 년째 계속되어온 인권침해임을 인지했던 이들은 거의 없었다
한 손에 망치 들고 건설
하면서 한 손에는 총칼 들고 나가 싸워 야 했던 병영국가 대한민국에서 총을 거 부할 수 있는 권리는 사회가 품을 수 있는 상상력 너머의 무엇이었기 때문이다 절대 다수의 병역거부자들이 여호와의 증인 신도들이었기 때문에 별난 종교의 행위 정도로 치부되기도 했다 년 병역거부 문제가 공론화되자 오랜 침묵은 뜨거운 논쟁으로 뒤바뀌었다 우 리 사회에서 군대와 병역 문제가 가진 휘발성은 이 문제를 순식간에 첨예한 이슈 로 밀어 올렸다 그 해에만
건이 넘는 언론보도가 이루어졌을 정도였다 사람
들은 신성한 병역 뒤에 감히 거부 라는 글자가 붙을 수 있다는 것에 그리고 그 것이 오랜 시간 수많은 나라에서 논의되어온 인권이라는 것에 놀라워했다 일만 명에 달하는 이들이 감옥에 갔다 왔고 1)
2)
여명의 젊은이들이 수감 중에 있다는
양심적 병역거부자(2004년 12월 13일 병역거부 선언, 2005년 1월 28일 구속, 2006년 5월 4일 충주구치소에서 석 방). 현재 법무법인 해마루 소속 변호사.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박사과정 수료(관심영역: 군사주의, 평화운동, 법사 회학 등). 병역거부를 지칭할 때 사회적으로 “양심적 병역거부”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라는 표현이 혼용해서 쓰이고 있다. 이글에서 는 “양심적 병역거부”를 사용하고자 한다. “양심적 병역거부”라는 표현이 등장하자 “군대 가는 사람들은 비양심이냐? 군대 안 간다는 것이 왜 양심적이냐“ 등 병역거부에서 사용되는 ‘양심’의 의미를 잘못 이해하고 많은 비판이 제기되었다. ‘양심적’이라 는 표현이 일상적으로 쓰이는 양심-비양심의 대립구도에서 착한 마음, 선한 마음으로 이해되기 쉬웠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에 서 병역거부운동의 주체들은 ‘양심’의 의미인 ‘내면의 진지한 신념‘이라는 뜻을 좀 더 온전히 드러내기 위해서 “양심에 따른” 으로 수식을 변경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양심적 병역거부”라는 것이 이제 하나의 용어로서 굳어졌고, ‘양심’에 대한 초창기 논쟁구도는 벗어났다고 판단하기 때문에 본 논문에서는 ‘양심적 병역거부’로 통일해서 표현하고자 한다. 용어에 대한 보다 자 세한 논의는 김두식(2007: 38-42)을 참조하라.
155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점에 부끄러워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충격 부끄러움 보다 훨씬 더 압도적이었던 것은 적대감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병역기피자와 병역거부자를 동일시하며 분노를 쏟아냈다 년
월 불교신자이자 평화운동가였던 오태양이 공개적으로 병역거부를 선언
했고 곧바로
여개의 시민사회단체가 모여 병역거부운동의 연대체를 구성하면서
한국 병역거부운동이 본격화되었다 운동의 요구는 대체복무제도 개선을 통해서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의 감옥행을 멈춰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노력의 결과로 국방 부는
년
월 병역거부자들을 사회복무제에 편입시키겠다는 발표를 했다 반세
기가 넘게 이어진 병역거부자들의 감옥행이 비로소 끝날 수 있는 결정이었다 그 러나 정권이 바뀐 이후 국방부는 국민공감대 미성숙 을 이유로 앞선 결정을 백지 화시켰다 당초 계획대로라면
년
월부터 사회복무를 수행했을 젊은이들은 지
금 이 순간에도 감옥 철문을 넘고 있다 다른 이를 향해 방아쇠를 당길 수 없다는 신념 때문에 수감된 이들은
년 월 현재
여명에 달한다
이 글은 한국 병역거부의 흐름을 사회운동에 초점을 맞춰서 다룰 것이다 운동의 가장 큰 목표였던 대체복무제 개선 즉 병역거부자들의 감옥행을 멈추지는 못했지 만 그 이유로 지난 시간을 실패라 평가할 수는 없다 오히려 운동은 대체복무제 를 넘어서서 우리 사회의 강고한 군사주의에 저항하는 실천과 언어를 끊임없이 만들어왔다 그러나 병역거부를 다루는 기존의 논의들은 대부분 대체복무제를 중 심으로 한 제도적 차원에서 이 문제에 접근했기 때문에 앞선 성과를 온전하게 담 지 못했다 이 글에서는 반군사주의 운동으로서 병역거부운동의 흐름과 그것이 만 들어낸 새로운 목소리에 주목하고자 한다 병역거부운동의 시간은 필자 개인의 삶이기도 했다
년 대학생시절 참여했던
병역거부운동 속에서 침해당한 누군가의 인권을 지키기 위해 시작한 활동에서 필 자는 총을 든다는 것의 의미 군인이 된다는 것의 의미를 새롭게 깨달았다 그 깨 달음은 과연 나 자신은 총을 들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졌다
년 이
라크 반전운동에 참여하면서 병역거부를 선택하겠다는 결심을 갖게 되었고 병역 거부운동 단체
전쟁없는세상
병역거부를 선언했고
년
활동을 시작했다 입영일이었던
년
월
일
월의 형을 받아 수감되었다 수형생활을 마친 후에는
병역거부와 평화운동의 문제의식을 평화연구로 이어보고자 대학원에 진학해서 관 련된 글들을 써왔다 이런 맥락에서 이 글은 사회운동으로서의 병역거부운동과 함께 당사자 활동가 그리고 연구자로서 살아온 필자의 고민도 함께 담아보고자 한다 물론 글 전체의 3)
군사주의란 “전쟁과 그 전쟁을 준비하는 것이 정상적이고 바람직한 사회적 활동으로 보이게 하는 태도와 일련의 제도들”이라 정의할 수 있다(Mann, 1988: 124) 그렇기에 이 글에서 사용되는 ‘반군사주의’란 전쟁과 그 준비가 결 코 자연스러운 사회적 책임이나 의무가 아님을 주장하며, 폭력을 정당화시키는 사회 구조들에 대해 저항하는 가 치체계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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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은 병역거부운동의 역사와 흐름에 맞춰지겠지만 병역거부자로서 느꼈던 감정 과 연구자로서의 문제의식을 적극적으로 드러낼 것이다 그것이 한국 병역거부운 동의 지난 시간뿐만 아니라 앞으로의 전망을 함께 말할 수 있는 방법이라 생각하 기 때문이다
병역거부자로 살아간다는 것 피해자의 얼굴 소수자의 얼굴 병역거부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일까 물론 병역거부자 개개인의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감옥을 견뎌야 한다는 것 그리고 전과자라는 신분으로 살아가야 한다 는 것이 이들의 삶을 공통적으로 연결하는 고리일 것이다 이 고리를 끊기 위한 것이 지난
년 동안의 운동이었다 이 운동이 만들어낸 담론 속에서 병역거부자
는 끊임없이 피해자의 얼굴로서 고통을 증언하고 재현해야 했다 세상은 병역거부자들에게 병역거부를 하면 얼마나 힘든가에 대해서 물어본다 감 옥에서의 고통을 전과자의 불이익을 그리고 병역거부라는 선택으로 무슨 꿈을 포기했으며 지금은 얼마나 힘들게 사는지를 듣고자 한다 출소 후
년간 고시나
공무원 시험에 응시할 수 없고 일반 기업에 취직하는 것도 극히 힘들며 그래서 많은 이들이 학원 강사나 아르바이트 등으로 생계를 유지한다는 이야기는 사람들 의 기대를 충족시켜준다 그 어려움이 크면 클수록 병역거부자들의 감옥행을 멈춰 야 한다는 주장에도 힘이 실린다 대체복무제를 통해 이들의 고통을 끝내주어야 한다는 결론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 나를 포함한 많은 병역거부자들이 고난의 증 언 을 요구받는 이유이다 이는 사람들이 병역거부자에게 기대하는
고통 받는 타자 의 얼굴에 충실하게 답
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지배적 가치관 속에서 고정된 소수자의 얼굴이란 동정과 연민의 대상이 되는 얼굴이다 이진경
사람들은 타자로 대상화된
이 얼굴에 쉽게 안타까움을 표할 수 있다 이 얼굴 속에서 한 해 천 명 정도의 소수 가 다른 방식으로 복무하는 것 정도는 기꺼이 허용해 줄 수 있다는 관용 도 생겨난다 그 누구도 총을 들지 않겠다는 결심을 품고 살면 얼마나 행복한지 묻지 않는다 세상이 원하는 소수자의 얼굴 속에 밝게 웃는 표정은 없기 때문이다 물론 병역거부자들의 감옥행은 멈추어야 한다 평생 전과자로 살아가야 하는 고통 도 끝나야 한다 내가 감옥에서 만났던 여호와의 증인 친구 중 한 명은 자신의 아 버지도 형도 감옥에 갔기 때문에 스스로도 감옥에 갈 것이라 어릴 적부터 생각했 다고 했다 그는 감옥 때문에 포기해야할 것이라면 아예 꿈조차 꾸지 않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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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이 이어져온 감옥행은 미래를 그릴 수 있는 기회조차 박탈한 것이다 초등학교 교사 신분으로서 병역거부를 한 최진은 군인이 되어 총으로 겨눌 이가 자신이 가 르치는 아이와 과연 다른 존재인지에 대해 물으며 떳떳한 선생님이 되기 위해 병 역을 거부했다 떳떳한 선생님이 되기 위한 병역거부였지만 그는 병역거부로 인 해 교단에 설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병역거부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피해자의 삶으로서만 환원될 수 없다 이들의 말에 고난의 증언이나 감옥행을 구제해 달라는 요구만이 담겨있는 것도 아니다 사회에서 병역거부자들에게 허락된 목소리는 피해자의 그것이었지만 병 역거부자들은 그 이상을 욕심냈다 총을 들지 않겠다는 자신의 선택 타인을 해하 지 않겠다는 마음 자체를 세상에 전하고자 했다 아직 미약하지만 생명에 대한 연 민과 연대를 갈구하는 지배자들이 강요하는 복종과 훈육을 거부하겠다는 목소리 를 조금씩 꺼내고 있는 것이다 끊임없이 자신을 설명하는 과정 한국에서 감옥을 갔다 오면 정말 힘들게 살잖아요 그런 결정을 하신 건데 말씀 을 들어보면 왜 그런 결정을 하셨는지는 별로 공감이 안가거든요
병역거부를 주
제로 한 특강에서 한 학생의 질문이었다 병역거부의 역사 유엔의 결의 다른 나 라의 사례 대체복무제의 필요성 등은 이해할 수 있겠단다 그러나 왜 당신이 병 역거부를 했는가는 이해하기 힘들다는 말이었다 가장 어려운 질문이었다 총을 거부할 수 있다는 상상조차 부재했던 사회에서 살아온 이들에게 병역거부의 동 기 를 몇 마디로 공감시켜야 한다 이라크 전쟁을 보면서 병역거부를 결심했습니다 총을 들지 않는 것이 군인이 되지 않는 것이 이런 추악한 전쟁을 멈추기 위한 작은 씨앗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고통을 증언할 때와는 다르게 성에 차지 않는다는 반응이 돌아온다 이 이라크에 가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당신
난 병역거부자들은 대단한 경험을 가
진 이들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당신과 내가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마땅히 특이한 종교 사상 경험을 가지고 있어야 할 병역거부자가 한 발 다가가려고 하자 사람 들은 뒤로 물러선다 동정을 던질 수 있는 타자의 고통스런 얼굴을 원했던 이들은 불편해한다 어린 시절에 구타를 당했다거나 식구 중에 상이군인이 있다는 예외적 인 사연을 말했다면 어땠을까 병역거부자들은 자신과 다른 존재임에 안도하면서 감옥에 가는 건 심하다며 대체복무에 동의해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건 나의 대 답일 수 없다 신념에 바탕을 둔 결정이지만 순교자의 마음이 아닌 더 행복한 삶 을 위한 결정이었다고 말한다 병역거부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끊임없이 이 마음을 드러내는 과정이었다 세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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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소한 병역거부자에게 전과자로서의 고통을 궁금해 했지만 진정 버거웠던 것은 전과자의 불이익이 아니라 끊임없이 나를 설명하는 과정이었다 한국 사회에서 남 성이라면 결코 피해갈 수 없는 질문이
군대는 다녀왔냐 이다 병역거부자로서 나
의 대답에 어떤 이들은 고개를 저었고 또 다른 이들은 싸늘하게 굳은 표정을 짓 기도 했지만 끊임없이 더듬거리며 자기를 꺼내 보였다 사실 군대는 가야지 라는 거대한 상식 앞에서 계인의 언어이다
왜 군인이 됩니까
대한민국 남자라면
양심적 병역거부 라는 일곱 글자는 외
왜 사람을 죽이는 연습을 해야 합니까 라
는 질문이 단 한 번도 존재해본 적이 없는 사회에서 병역거부자들은 외계의 언어 를 이해해달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매번 미끄러지면서도 스스로를 전하고자 다시 입을 벌린다 이것이 지난 시간 동안 공개적으로 병역거부를 선언한 이들이 살아가는 모습이었고 병역거부운동의 모습이었다 총을 들 수 없다는 언어 년 오태양 이후 여호와의 증인이 아닌 정치적 병역거부자들은 공개적으로 병 역거부를 선언했다
그들은 이후 재판 과정이나 여러 기회를 통해 병역거부자로
서의 발화를 이어갔다 폭력을 거부하겠다는 총과 군대를 거부하겠다는 마음 말 행동 모두 철저하게 도려내어진 사회에서 이들의 말은 빈곤할 수밖에 없었다 병 역이 도덕화된 사회에서 그것에 반하는 비도덕적 행위는 언어조차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병역거부자들은 자신의 삶을 설명하기 위해 끊임없이 새로운 언어를 만들 고 세상에 전했다 병역거부자들이 자신의 선택을 세상에 말하는 과정은 그 자체 로 군사주의에 맞서는 실천이었다 이 실천은 오랜 시간 성역화 되어왔던 군대와 징병제 속에 다른 생각이 자랄 수 있는 틈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 틈은 다시 병역 거부자들이 자신들의 언어를 키워갈 수 있는 공간 이 되었다 초창기 병역거부자 들의 소견서가 대체복무제를 설명하는 데 급급했다면 이후 병역거부자들의 글에 는 점점 더 자신이 왜 총을 들 수 없는지 왜 정상적인 대한민국 남성이 될 수 없 었는지가 담겨간 것이 이 변화의 한 모습이다 우리를 구제해달라던 목소리는 죽 이는 방법을 모르는 삶이 더 행복할 수 있다는 목소리로 번져가게 되었다 병역거부 운동 역시 다르지 않았다 감옥행만은 막아달라던 병역거부운동은 다 4)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가 집총거부를 포기한 1970년대 중반 이후 병역거부자는 대부분 여호와의 증인 신도였기에, 2001년 오태양의 병역거부 선언 이후 새롭게 등장한 병역거부자들을 “비( ) 여호와의 증인 병역거부자”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이 표 현은 구분의 의미는 있지만 이들 자체의 특징을 담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다. 이글에서는 이들을 “정치적 병역거부자”라 명명 하고자 하는데, 이는 이전까지의 종교적 신념과 구별하고 정치적 행위로서 이들의 실천을 주목하기 위함이다. “정치적 병역거 부자”(political objectors)라는 표현은 1960년대 미국에서 베트남전 반대를 이유로 병역거부를 한 사람들이나 이스라엘에서 팔레 스타인 점령을 반대하며 병역거부를 한 사람들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이미 해외에서 드물지 않게 사용되고 있으며, 일찍이 1971년 일본 정치학자 미야다 미츠오( )는 2차 세계 대전 이후 종교적 틀을 벗어난 서양의 병역거부운동을 “정치적 병역거부 운동”( )이라 명명한 바 있다( , 1971: 194-206).
159
양한 반군사주의적 활동을 만들어가는 운동으로 뻗어나갔다 이제부터는 본격적으 로 병역거부운동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먼저 양심적 병역거부의 정의와 역사를 확인하고 이후 병역거부운동의 동학과 평화운동으로서의 의미를 분석해보 겠다
군사주의에 저항하는 병역거부운동 병역거부의 정의와 역사 국제인권단체
국제엠네스티
는 양심적 병역거부를
징집
대상자로서 양심상의 이유나 종교적 인종적 도덕적 인도주의적 정치적 또는 유사 한 동기로부터 나오는 깊은 신념에 따라 군복무 혹은 다른 직간접적인 전쟁 및 무력 행위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하는 사람 이라 정의한다 한국 국가기구로는 최초로
년
권고했던 국가인권위원회는 그 권고문에서
월 양심적 병역거부를 인정하라고 자기의 신앙이나 도덕률 및 철학적
정치적 이유에 따른 양심상의 결정으로 전쟁에 참가하여 인명을 살상하는 병역의 무의 일부 또는 전부를 거부하는 행위 로 병역거부를 규정했다 국가인권위원회 이러한 정의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병역거부를 개념화하는 데서 중요한 요 소는 양심의 범위와 거부하는 행위의 성격이다 이 각각의 요소들을 확인하는 것 은 근대 이후 병역거부의 권리가 인정되고 확대되어온 역사를 되짚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를 표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표
서구 사회에서 양심적 병역거부의 인정과정 전통적인 평화교회에서 오랜 신앙생활 위의 기준과 함께 군사 훈련을 거부하 는 일반적인 종교적 신념까지 포함 위의 기준과 함께 군사 훈련을 거부하 는 세속적 신념까지 포함
출처
직접적인 집총 군사훈련 일반 군사적 목적과 관 련된 행위
비전투복무 군사적 보호 하에서 민간 대체 복무 순수 민간 영역에서 민간 대체 복무
에서 수정
위의 표처럼 서구 사회에서 양심적 병역거부가 국가에 의해 인정되고 범위가 확 대되어가는 과정은 몇몇 평화주의 교파에 한정된 종교적 신념에서 일반적인 종교 적 신념으로 그리고 정치적 도덕적 신념과 같은 세속적 신념의 순서로 이루어졌 5)
이 장의 내용은 필자의 책(임재성, 2011) 중 1부의 내용을 발췌해서 재구성했으며, 일부는 새롭게 추가했다.
160
다 또한 이들이 거부하는 행위의 범위 역시 직접적인 집총 자체에서 군사적 목적 과 관련된 행위 일반으로 넓어져갔다 이는 자연스러운 과정이라기보다는 병역거 부의 허용범위를 확대하고자 하는 이들의 저항이 만든 결과였으며 이전까지 인정 된 병역거부의 범위는 그 다음으로 가기 위한 디딤돌이 되었다 서구에서 징병제가 도입되었던 초기에는 징병절차가 확립되지 않았기에 병역거부 자들에 대한 국가의 태도는 일관되지 않았다 비공식적으로 혹은 일정한 비용을 받고 병역을 면제시키기도 했지만 사형을 비롯한 혹독한 형벌로 탄압하기도 했 다 이후 대체복무제가 시작되었지만 국가는 대체복무제를 허용하는 신념의 범위 를
전통적인
평화
교회
개신교
나 형제단 퀘이커
급진파에
기원을
두고
메노나이트
등으로 한정했다 양심적 병역거부권이
근대적 헌법체계에서 명문화된 최초의 사례로 이야기되는 아주 주 헌법 제 조
있는
년 미국 펜실베니
집총을 하는 것에 양심적 가책을 느끼는 사람이 대체복무를
하려 한다면 집총하도록 강제할 수 없다 는 사실상 퀘이커교를 위한 조항이었다 차 세계대전은 병역거부의 권리가 특정한 교파를 위한 권리에서 보다 보편적인 권리로 전환되는 중요한 계기였다 우리 사회에선 많은 이들이 병역거부는 전쟁의 가능성이 낮은 상황에서나 가능한 것이라 생각하지만 실제 역사를 보면 병역거부 는 전쟁의 한 가운데에서 인정되고 발전해왔다
차 세계대전을 통해 전쟁의 참상
을 목도한 이들 가운데 전쟁을 거부하겠다고 선언하는 이들이 이어졌다 구체적으 로는 사회주의와 아나키즘 반전사상을 필두로 하는 정치적 도덕적 신념의 병역 거부자들이다
그 결과
년의 영국을 필
두로 덴마크 네덜란드 노르웨이 등에서 대체복무제도 법안이 연달아 통과되었다 병역거부를 법적으로 뒤늦게 인정한 프랑스 년 를 제외하고는
년
벨기에
년
스위스
년대에 절차적 민주주의가 수립된 유럽 국가 대부분에서
병역거부권이 인정되었다 이 시기부터 병역거부권의 존재는 서유럽에서 민주법치 의 수준을 나타내는 주요 기준으로 인식되었다 박노자
볼셰비키 혁명
에 성공한 레닌 역시 병역거부를 인정하고 대체복무제도를 운영하였다 차 세계대전 역시 병역거부가 확장되었던 중요한 계기였다
차 세계대전을 기점
으로 많은 나라에서 병역거부의 인정범위가 모든 종교로 확대되었다 미국과 영국 에서는 농업 산림 관리 보건 분야 등의 민간대체복무로 대체복무의 범위 역시 넓어졌다 전쟁 당시 미국의 병무청장이었던 허쉬 부를
장군은 양심적 병역거
민주주의에 대한 실험이다 우리의 민주주의가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도 소
수자의 권리들을 보존하기에 충분한지 알아내기 위한 도였다 홍영일 한 기본법 우리의 헌법
에서 재인용 조
항에
척도라고까지 표현했을 정
독일 서독 의 경우
차 세계대전 이후 제정
누구든지 양심에 반하여 군복무를 강요당하지
않는다 라고 병역거부를 명문화했다 이는 나치체제가 벌였던 학살에 대한 반성과
161
군국주의 부활을 막는 장치로서 병역거부를 사고한 결과였다 또한 나치에 저항했 던 드문 세력으로서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존중과 그들이 받았던 박해를 사죄하 는 하나의 방법이었다 이재승 이러한 흐름 속에서 병역거부는 개별 국가를 넘어 보다 광범위한 차원에서 논의 되기 시작했다 천주교는 조에서
년 제 차 바티칸공의회에서 결정한 사목 헌장 제
양심의 동기에서 무기 사용을 거부하는 사람들의 경우를 위한 법률을 인
간답게 마련하여 인간 공동체에 대한 다른 형태의 봉사를 인정하는 것이 마땅하 다 라며 병역거부권에 대한 인정을 전체 교단 차원에서 공식화했다 국제연합
년부터는
차원의 논의가 시작되었고 이후 지속적인 결의를 통해
서 국제 인권으로서의 위상을 확보해나갔다 이 중 대표적인 것이 권위원회 제 호 결의안이다
년 유엔인
이 결의안은 세계
인권선언과 자유권규약의 양심과 종교의 자유에 대한 권리 속에 양심적 병역거부 의 권리가 존재한다고 명시했다 징병제를 채택하고 있는 국가는 징벌적 성격을 띠지 않는 비전투적 또는 민간적 임무를 대체복무로 시행해야 한다는 구체적 권 고까지 담고 있다
유럽연합 역시
년 기본권헌장
을 채택하면서 제 조 제 항에서
양심적 병역거
부권은 인정된다 각 국내법은 그 권리의 실행을 가능하게 해야 한다 라고 규정하 였다 이는 전통적으로 인권의 근간이라 인정되어 온 개개인의 생존권을 넘어서 서 타인의 생명을 죽이지 않을 수 있는 권리
로 나아
가는 세계사적인 흐름이었다 아시아의 경우 병역거부권 인정비율은 상대적으로 높지 않다 서구 열강에 의한 식민지 경험과 냉전이라 명명된 시기에도 이어졌던 열전 그리고 서구와는 다른 경로의 근대 국가 형성과정을 가졌던 경험의 차이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징병제를 운용하는 아시아 가가
개 국가 중에 대만 몽골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년 현재 병역거부권을 인정하고 있다 진석용정책연구소
국과의 군사적 대립을 이유로 슷한
년대 중반까지
만 대군을 유지했을 만큼 군사화된 대만은
개 국 중
천여만명의 인구에 한국과 비 년 병역거부를 인정했다
우리의 병무청에 해당하는 대만 역정서 관리는 병역거부자에 대한 처벌이
자국
내의 인권이 제대로 보호되지 않는다는 인상을 심어주므로 대외적인 국제 이미지 에 심각한 훼손을 가져 왔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병역거부 연대회의 한국 병역거부
6)
년의 침묵과
년의 변화
아시아의 징병제 국가 중 병역거부권을 인정하지 않는 국가는 대한민국, 베트남, 부탄, 북한,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중국, 카 자흐스탄, 캄보디아, 타이, 투르크메니스탄, 필리핀 등이 있다.
162
입영률
사회와 병역거부
병역거부를 둘러싸고 이루어진 은
세기의 역사가 무색하게 한국에서 병역거부자들
년 이전까지 공론장에서 철저하게 배제되어왔다 병역거부 관련 최초의 기
록이라 평가되는
년 등대사
이다 한국전쟁 직후
사건
이후 지속적인 처벌이 이어졌을 뿐
년 전후의 감옥생활이었던 병역거부자들에 대한 처벌은 박
정희 군사정권이 시작되고 난 이후 점점 더 혹독해졌다 결국 여호와의 증인과 함 께 병역거부를 이어갔던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는 높아진 처벌을 견디다 못해 년대 중반 이후 병역거부를 포기하게 된다 이후 병무청은 입영자체를 거부하 며 민간재판을 받던 여호와의 증인 신도들에 대한 강제 입영까지 자행한다 이 강 제 입영의 실상을 살펴보면 병무청 직원들이 여호와의 증인들의 종교집회장소를 급습하여 징집대상자로 보이는 청년들을 군부대로 연행한 후에 그 곳에서 영장을 발부하거나 직접 집으로 찾아가 영장 없는 불법연행을 자행하는 사실상의 납치였 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탄압은
입영률
라는 병영국가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박정희 정
권의 집요한 노력 속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대한민국 남자라면 누구나 군대를 가
야 한다 라는 상식 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결코 자연스럽지 않았다 박정희 정권 은 전 사회적인 통제 기피자에 대한 강력한 처벌과 사회적 낙인 등의 집요한 노 력을 통해 징집 체제를 완성해 나갔다 신병식
하나의 단어처럼 각
인된 신성한 국방의 의무 는 사실 오랜 시간 권력의 집요한 강압과 통제를 통해 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병역거부자들이 놓여있었다 강제 입영 이후 군사재판을 받게 된 여호와의 증인 병역거부자들은 반복처벌과 가중처벌로 더욱 힘든 고난을 견뎌야 했다 반복 처벌뿐만이 아니었다 강제 입영 이후 군 내부에서 집총하라는 명령을 거부 하는 여호와의 증인들에 대한 폭력이 가해졌고 결국 사망하는 경우까지 발생했 다
년
월
일 여호와의 증인 이춘길은 항명죄로 영창에 있는 동안 심한 구
타를 당해서 비장 파열로 숨을 거두었다 김종식은 논산훈련소에서 집총 거부를 이유로 맞아 죽었다
이러한 고통은 민주화 이후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항
명죄로 받을 수 있는 법정최고형
년형이 병역거부자들에게 그대로 선고되었는데
이렇게 법정최고형이 일괄적으로 선고되는 사안은 병역거부가 유일했다 년대에 들어와 병역거부 문제는 극적인 반전을 맞았다 7)
8)
년
월
차마 총
등대사란 여호와의 증인의 다른 이름이다. 중일전쟁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면서 일본 여호와의 증인 신도들이 병역거부를 선언 하자 일본정부는 이들을 “광적인 평화론자”로 몰아붙이면서 구속시켰고( , 1969: 150-151), 당시 식민지였던 대만과 조 선에서도 여호와의 증인 신도들을 잡아들였다. 조선에서는 1939년 6월 신사참배와 동방요배 거부 문제로 33명의 여호와의 증 인들을 구속시켰는데, 이는 당시 여호와의 증인의 교세에 비춰볼 때 거의 전원이 구속된 것이었다. 이 비참한 죽음에 대해서 국가 폭력의 책임이 밝혀진 것은 30여년이 지난 최근에 이르러서였다. 대통령소속 군의문사진상규 명위원회는 2009년 1월 15일 “국가의 반인권적 폭력과 가혹 행위로 숨진 점이 인정된다”며 국가의 책임을 인정하는 국가기관 의 첫 진상규명 결정을 발표했다. 군대서 숨진 ‘여호와의 증인’에 “국가책임” 첫 인정 , 한겨레신문 , 2009년 1월 16일.
163
을 들 수 없어요 라는 제목의 주간지 기사 로 시작된 병역거부의 공론화는 짧은 기간에 수많은 사회적 반응을 이끌어냈다 가장 먼저 움직임을 보였던 것은 병역 거부자들에게 유죄 를 선고해왔던 사법부였다 병역거부 재판이 옮겨가자 기존 것이 그 시작이었다
년
년 군사법원에서 민간법원으로
년형 관행을 깨고
년
개월 최저형량을 선고한
월 서울 남부지원 박시환 판사는 병역거부를 인정
하지 않는 병역법이 위헌이라며 위헌심판제청을 했고
년
월 이정렬 판사는
심에서 양심적 병역거부를 천부인권이라 규정하며 병역거부자들에게 무죄 를 선 고하기에 이른다 이후 최고법원의 결정에 이목이 집중되었는데 대법원과 헌법재 판소가
년
헌법재판소
월과 헌가
월에 각각 병역거부 유죄 대법원
도
병역법 합헌
판단을 내리면서 이 문제에 대한 사법적 판단은 일단락되
는 듯 했다 하지만 대법원과 헌법재판소 모두 판결문 속에서 대체복무제 입법의 필요성을 강력하게 언급하면서 병역거부에 대한 논의는 더욱 치열해졌다 입법부에선 병역거부운동과 초창기부터 함께해온 임종인 민주당 의원이 월 여야의원
년
명의 서명과 함께 병역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고 뒤이어 노회
찬 민주노동당 의원도 민주노동당
명의 연서와 함께 병역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국회에서 병역거부자들에 대한 대체복무제를 허용하는 법안이 헌정 사상 최초로 상정되고 토의된다는 것 자체가 역사적인 변화였다 법안의 주된 내용은 병역거부 자들이 심사과정을 거쳐서 현역 복무의
배 기간 동안 합숙 형태로 사회 복무
분야에서 복무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난항 속에서 결국 해당 법안은 통과 되지 못했다 이후
년
월 국가인권위원회가 국가 기관으로서는 처음으로 병
역거부를 인정해야 한다는 권고를 내리면서 병역거부에 대한 논의를 확장시켰다 유엔 역시 한국의 병역거부에 대한 입장을 밝히며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에 대한 인권탄압의 중단을 촉구했다
년
월
일 유엔 자유권규약위원회
는 대한민국 정부에 병역거부자에 대한 처벌을 중지하고 적절 한 조치를 취할 것을 권고했다 일에는 양심적 병역거부로 징역 범 씨가 제출한 개인청원
같은 해 년
월
개월의 형을 선고받고 복역한 최명진 윤여 에 대해 한국 정부가 보상
차마 총을 들 수 없어요 , 한겨레21 345호, 2001년 2월 7일. 1년 6개월은 재징집을 면할 수 있는 최저형량이다. 지금까지 1년 6개월 형량은 거의 모든 병역거부자들에게 동일하게 적용되 고 있다. 실정법상 처벌할 수밖에 없지만 그 처벌의 정당성에 대한 사법부의 고뇌를 담은 ‘맞춤형량’이라 할 수 있었다. 11) 헌법재판소의 이 결정문에서 다수 의견에 포함된 “입법자에 대한 권고” 부분은 이례적으로 입법부에 대한 권고 를 담고 있는데, 사실상 입법부에게 이 문제를 해결하라는 촉구였다. 스스로 위헌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입법부 에 책임을 떠 넘겨주었다는 점에서 비판적으로 볼 수 있겠으나, 헌법재판소의 정치성이나 사안의 민감성을 고려 한다면 고민의 흔적이 역력한 입장 표명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 부분 중 일부를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이 제는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고뇌와 갈등상황을 외면하고 그대로 방치할 것이 아니라, 이들을 어떻게 배려할 것인 가에 관하여 진지한 사회적 논의를 거쳐 나름대로의 국가적 해결책을 찾아야 할 때가 되었다고 판단된다. 국제적 으로도 이미 1967년부터 유럽공동체, 국제연합의 차원에서 양심적 병역거부를 인정하여야 한다는 결의를 반복하 기에 이르렀고, 1997년 국제연합의 조사에 의할 때, 징병제를 실시하는 93개국 중 양심적 병역거부를 전혀 인정 하고 있지 않는 국가는 약 절반에 불과할 정도로 이미 많은 국가에서 입법을 통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 9)
10)
164
까지도 포함하는 구제조치를 즉각 취해야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한국정부는 이러한 국제사회의 압력에 대해 분 단 이라는 특수상황을 이유로 들었지만 위원회는 분단 상황을 이유로 해서 권리 제한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제한은 바로 그 권리의 정수
를 손상시켜서는 안 되며 병역거부권은 그 본질에 속한다고 분명하게 말했 다 우리 사회는 한반도의 특수한 상황을 들면서 너무 쉽게 병역거부권이라는 인 권을 유보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 인권이란 그러한 조건에서도 지켜져야 하기 때 문에 인권인 것이다 한국 병역거부자들에 대한 유엔 자유권규약위원회의 개인청원 결정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년
월
일에는 정치적 병역거부자
명이 제출한 개인청원에
대해 자유권규약위원회는 권리 침해 사실을 인정하고 한국 정부의 즉각적인 시정 을 권고했다 데
년
월
일에는 여호와의 증인 신도
명이 낸 개인청원 가운
명의 통보에 대해도 같은 결정을 내렸다 그동안 누적되어왔던 병역거부자
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권 침해를 보여주는 결정이었다 뒤집어진 대체복무 결정 사회운동의 노력과 달라진 여론 그리고 여러 층위의 압력 속에서 방부는 드디어 병역거부자들에게 대체복무제를 을 내렸다 현역 복무기간의 중
년
년
월 국
월부터 허용한다는 결정
배 동안 합숙생활의 형태 난이도는 사회복무 분야
시간 근접관찰이 필요한 최고난도의 업무로 배치하겠다고 밝혔다 당시 국방
부 김화석 인력관리팀장은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병영도 날로 좋아지고 있는데
내가 이렇게 진정성을 훼손해가면서까지 그런 행위를 해야 되겠느냐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주 난이도가 높고 복무기간도 길고
병영생활에 준하는 합숙을
시킬 예정 이라며 결코 병역기피의 수단으로 악용되지 않을 것이라 자신감을 보 였다
자신감을 가질 만 했다 분명 감옥보다야 낫겠지만
배나 되는 기간 동안
최고난이도의 업무를 합숙으로 진행하는 것은 또 다른 처벌 에 가까웠기 때문이 다 그러나 이렇게 가혹한 대체복무제 안 추진에 대해서도 국방부는 정권이 바뀌고 난 이후 미온적인 태도로 일관하다가
년
월
일에 무기한 유보를 발표했
다 무기한 유보를 발표하면서 이유라고 내민 것은 달랑 한 번의 여론조사 결과였 다 병역거부 인정에 대한 국민공감대가 미성숙하다는 것이었다 소수자 인권문제 를 여론조사로 결정한다는 발상 자체도 경악스럽지만 늘 국가안보를 내세우면서 사회적 여론을 무시하던 국방부가 언제부터 여론조사로 정책을 결정했는지 심히 궁금하다 12)
국방부 “대체복무, 현역보다 힘들고, 기간도 길다” , 노컷뉴스 , 2007년 9월 19일.
165
국방부의 백지화 발표 이후에도 사법부의 문제제기는 계속 이어졌다 월 국방부의 발표 이후
년
월 헌법재판소의 결정까지 채
년
년이 안 되는 기
간 동안에만 다섯 건에 달하는 위헌심판제청이 이루어졌다 전주지법에서 위헌제 청을 한 판사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최근 정부가 대체복무제 도입을 원점에서
재검토하는 상황에서 종교적 병역거부자들은 자포자기한 상태에서 실형을 선고받 고 있는 실정 이라며
이들을 형벌로만 제재하는 것은 국가가 최소한의 의무를
다하지 않은 것 이라며 대체복무 도입을 백지화 한 것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이렇게 이어지는 문제제기에 헌법재판소는
년
월
일 자신의
년 결정보다도 후퇴한 내용들을 내놓으면서 병역법 합헌결정을 내렸다 헌가
헌가
헌바
헌바
헌바
헌가 병합
년 이후 우리 사회에서 만들어져왔던 변화와 논의들을 깡그리 무시한 결정이 었다 특히 국제인권규약 위반 여부의 검토 부분은 압권이었다 우리나라가 가입 한 자유권 규약에 병역거부가 명문화되어 있지 않으며 자유권 규약에서 병역거부 권이 도출된다고 명확히 밝히고 있는 자유권 규약 위원회 등의 국제기구는 구속 력이 없는 기구라고 말하면서 병역거부가 국제 인권 규약에서 도출되지 않는 권 리라 주장했다 더 나아가 국제인권조약의 구체적인 해석이나 적용은 개별 국가의 상황에 맞게 이루어져야 한다고까지 했다 이정도면 국민의 기본권을 지키는 것은 사명으로 한다는 헌법재판소의 결정문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수준의 논리다 모 든 구체적 개별적 권리들이 일일이 명문화 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또한 국 제적으로 가장 권위 있는 조약 해석 집행 기구의 결정을 구속력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만용에 가깝다 국제 인권 규약의 해석이 개별 국가의 상황에 따라 임의대로 가능하다면 그 어떤 독재정권도 국제 인권 규약을 지키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북한의 군사적 위협은 이제 간접적
잠재적인 것이 아니라 직접적
현실적인
것이 되고 있는 상황 이라는 대목에서는 헌법재판소가 아니라 국방부가 쓴 결정 문이라는 착각을 들게 했다 인권의 본질적 부분은 침해될 수 없다 경제상황이 안 좋아도 노동자들의 생존권은 지켜져야 하고 재개발이 아무리 중요해도 철거민 을 마구 내쫓을 수는 없다 병역거부도 그러하다 안보상황이 좋지 않으면 한 해 에 천 명의 젊은이들이 감옥에 가도 된다는 것인가
군부독재 시절
안보상황이
좋지 않다 는 논리로 수많은 인권이 유보되었다 돌아보면 국가에 의한 인권침해 의 정당화 논리였을 뿐이다 권력이 이런 상황논리로 인권을 침해하려고 해도 헌 법재판소는 엄정한 논리로 인권을 옹호해야 한다 이것이 본연의 임무이다 그 본 연의 임무를 북한의 위협을 운운하며 헌법재판소 스스로가 내팽개친 것이다 13) 14)
국방부의 백지화 결정에 대한 보다 자세한 비판은 임재성(2011: 72-76) 참조. 현직 판사가 ‘종교적 병역거부 처벌’ 위헌제청 , 연합뉴스 , 2009년 11월 23일.
166
년 국방부의 백지화 결정 이후 병역거부운동은 대체복무제와 관련해서 뚜렷 한 돌파구를 만들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대체복무라는 틀을 벗어나 병 역거부운동을 접근해본다면 점점 더 다양한 평화운동의 영역으로 성장해나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후에는
년부터 시작된 한국사회의 병역거부운동을
분석하면서 운동의 변화와 성장을 살펴보고자 한다 병역거부운동의 등장과 긴장 년 운동이 시작되다 년 왜 오랜 침묵을 깨고 병역거부의 공론화가 시작되었을까
양심적 병역거
부가 사회운동으로 등장하게 된 직접접인 요인은 외국 활동가로부터의 제안이었 다
년
월
평화인권연대
활동가
회
최정민은
미국친우봉사위원
활동가에게 병역거부에 관한 활동을
처음으로 제안 받았다 이후 활동가들은 병역거부 문제와 관련한 현황 파악과 외 국 자료 번역과 같은 기초적인 작업을 시작했다
년
월
일
양심 종교의
자유와 군 대체복무를 위한 토론회 라는 병역거부 관련 최초의 공개토론회가 화인권연대 해
인권운동사랑방
등의
평
개의 단체 주관으로 열리게 되었고 같은
월에는 대만의 대체복무실태를 조사하기 위해서
활동가를 중심으로 한
참관단을 구성해서 파견하는 등의 활동이 이어졌다 활동이 시작되자 병역거부운동은 곧바로 커다란 사회적 편견에 직면해야 했다 바로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이단 편견 이었다 한국 병역거부자의 절대 다수는 여호와의 증인 신자들이었고 때문에 병역거부 문제는 곧 여호와의 증인의 문제라 는 관념은 병역거부운동이 가장 먼저 직면해야 했던 난관이었다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오래된 이단 낙인 속에서 사회는 이들을 인권을 침해당한 시민 으로 인식하 지 않았다 이 편견은 사실상 이 문제가 오랫동안 가려져왔던 원인이기도 했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 이하 한기총 등의 보수기독교 단체가 병역거부에 조직적 으로 반대하면서 이단 논쟁은 더욱 거세졌다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논의가 병 역거부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쟁점으로까지 커져가자 병역거부 활동가들은 제칠일 안식일예수재림교회 신도들이나
년대 군인의 신분으로 양심선언을 했던 이들
의 사례를 소개하는 노력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들로도 병역거부는 이단의 행동이라는 낙인을 극복할 수 없었다 불교신자이자 대북 인도적 지원 운동에 오랜 기간 참여해온 오태양은
년
월 한국 최초로 공개적인 기자회견을 통해서 군사훈련을 받을 수 없다는 선언 을 15)
<미국친우봉사위원회>는 병역거부의 신념을 지키는 평화주의 개신교 분파인 퀘이커가 만든 단체이며, 1947년 <영국친우봉 사위원회>와 함께 노벨 평화상을 타기도 하였다.
167
했다
이 선언 이 가지는 의미는 상징적 차원에서부터 실제 사회운동의 차원까
지 다양하겠지만 당시 가장 두드러졌던 점은 병역거부가 여호와의 증인만의 문제 가 아니라 보편적인 양심의 문제라는 것이 말 이 아닌 행동 으로 증명되었다는 것이다 비록 단 한 명의 선언이었지만 오태양의 선언 이후 더 이상 병역거부 문 제를 특정 종교의 문제로 한정시키는 논리는 힘을 잃게 되었다 오태양의 병역거 부 선언 이후 달라진 분위기 속에서
년
대체복무제도 개선을 위한 연대회의 이하
월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 실현과
병역거부 연대회의 가 꾸려질 수 있
었고 한국 병역거부 운동은 더욱 본격적으로 움직여갈 수 있었다 비범죄화라는 시급한 목표 병역거부운동은 그 시작과 함께 병역거부자들의 감옥행을 멈추는 것에 가장 중요 한 우선순위를 두었다 운동은 오랜 시간 가려져온 인권침해의 사실과 규모를 알 리는 것에 집중했다 병역거부를 다루는 글들이 가장 세밀하게 묘사한 것은 병역 거부자들이 겪어온 고통이었다 몇 명이 감옥에 갔고 몇 년의 형을 살았으며 현 재 몇 명이 수감 중이라는 숫자를 통해서 이 문제의 심각성을 드러냈다 그러나 피해 에 집중하는 담론 안에서 병역거부자들은 자연스레 피해자 로서 한정될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이 총을 들 수 없다는 신념은 종교적
정치적
도덕적 신념
이라는 추상적 어구로 처리될 뿐이었다 이 속에서 병역거부자는 인권을 침해당 한 보호해 주어야 할 피해자로 규정되었고 병역거부운동의 목표는 이들의 고통 을 멈출 수 있는 대안을 만드는 것이 되었다 징병제 하에서 병역거부자 문제 를 해결하기 위한 현실적 대안은 군사 훈련을 배제한 방식의 대체복무제였다 물론 수십 년간 병역거부자들을 혹독하게 처벌해온 한국 사회에서 총을 들 수 없 다는 신념이 인정되는 것은 우리 사회의 군사주의에 균열을 낼 수 있는 중요한 변화임에 틀림없다 당장 매년 수백 명의 젊은이들이 감옥에 가지 않게 된다는 변 화 전과자의 신분으로 평생을 살아가지 않아도 된다는 변화를 만드는 대체복무제 개선의 시급함을 설명하는 데 다른 미사여구가 굳이 더 필요하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대체복무제 개선이 가지는 이러한 의미에도 그것으로 귀결된 병역거부운 동이 놓치는 것 역시 분명 존재했다 병역거부와 대체복무제가 닫힌 고리를 이루 었을 때 즉
총을 들 수 없다는 별난 신념의 소수자들이 처벌 받고 있는데 이
는 양심의 자유 를 침해한 것이고 제도 개선을 통해서 해결할 수 있다 라는 논리 로 운동이 완성될 때
총을 들 수 없다 는 병역거부자의 신념이 가지는 의미는
부차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한 제도적 개선이 시급히 이루어져야 할 목표로 부각될수록 그것에 악영향을 줄 수 있는 급진적인 언사가 내부적으로 16)
오태양 이후 공개적으로 병역거부를 선언한 정치적 병역거부자들은 2015년 7월 현재 65명이다. 이들은 기독교, 천주교, 불교 등 주류 종교적 신념이나 생태주의, 사회주의, 성정체성 등 다양한 배경을 바탕으로 병역거부를 선언했고, 출소 이후에도 병 역거부운동과 관계를 맺어가고 있다.
168
검열되는 경향도 생겨났다 양심의 자유와 반군사주의 간의 긴장 병역거부는 본질적으로 국가안보라는 성역화된 영역에 도전한다 병역거부는 다 를 수 있는 자유 를 넘어서서 국가가 강제하는 군사훈련을 거부하겠다는 선언이 며 강한 군대가 국가를 지켜주며 군인이 되는 것이 국민의 신성한 의무라는 군 사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근본적 비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범죄화 에 무게 가 실린 운동에서 병역거부자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포용되어야 하는 예외 로서 위치 지워졌으며 대상화되었다 군대를 가는 것도 양심이고 가지 않는 것도 양심 이며 각각의 양심이 존중받아야 한다는 논리 속에서 전쟁과 폭력에 저항하는 평 화운동의 당파성은 가려졌다 대체복무로 귀결되는 운동 속에서 가려져야 했던 반군사주의적 가치들에 대한 활 동가들의 고민이 생겨났고 이는 병역거부운동 내부의 긴장으로 이어졌다 월에 병역거부를 선언한 나동혁은 한 좌담회에서
년
대체복무제를 중심으로 설명
을 하면서 한편으로 보면 굉장히 국가의 의무나 그런 것을 강조하게 되었지요 저는 평화주의보다는 반국가주의가 강한 사람인데 그래서 국가라는 말을 공 동체란 말로 바꿔 쓰면서 자위를 했던 거 같
다고 회고하면서 당시 운동 속의
긴장을 전했다 병역거부 내부의 긴장은 한국만의 특이한 점이라기보다는 병역거부가 가진 중층 적 성격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보다 오랜 병역거부운동의 역사를 가진 해외 연구들은 운동 내부에 두 가지 흐름이 긴장관계를 이룬다는 점을 지적한다 하나 는 징병제 국가에서 한 개인이 신념을 존중받으며 복무 가능한 제도를 요청하는 제도 합리화 의 흐름이다 개인의 권리 차원에서 접근하는 이 관점으로 본다면 병역거부는 징병제 라는 거대한 시스템 속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문제 이고 이를 해결 하는 방법이 대체복무제다 그러나 병역거부는 이에 한정되지 않는다 개인 을 동원하는 국가 시스템과 전쟁에 대한 전면적인 저항이라는 평화운동 반군사주 의 운동으로서의 흐름 역시 존재하기 때문이다
한국
의 경우는 초기에 처벌을 막고 양심의 자유 를 지켜야 한다는 흐름이 지배적이었 다 천 명을 넘나드는 병역거부자 수감자의 숫자 앞에서 감옥행을 멈추는 것보다 우선시될 수 있는 목표가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운동이 진행되면서 반군사주의 를 향한 힘이 운동의 방향을 넓혀갔다 해외 병역거부운동 사례들을 접하고 더욱 넓어진 신념을 바탕으로 정치적 병역거부자들의 병역거부선언과 활동이 이어지면 서 병역거부운동 내부에 반군사주의적 문제의식이 깊어져갔던 것이다
17)
권인숙 교수, 평화주의자들과 이야기하다 , 오마이뉴스 , 2006년 12월 30일.
169
반군사주의 운동으로서의 병역거부운동 반군사주의 문제의식의 배태 한국 병역거부운동이 반군사주의적 문제의식을 가지게 되는 요인 중 하나는 해외 활동가들의 자극이다 운동의 시작도 그랬지만 뒤늦게 병역거부를 알게 된 한국 사회에서 오랜 역사를 가진 해외 운동의 영향력은 클 수밖에 없었다 한국에서 개 최된 국제회의에 참석한 스펙은 양심의 자유와 대체복무제도로서 접근되는 병역 거부운동의 한계를 지적했다
병역거부운동에서 반군사주의적 원칙을 강력하게 주장한 해외 활동가들의 주장과 운동 사례들은 한국 사회의 맥락에서 가지는 현실적 적합성은 별개로 하더라도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해외 병역거부운동의 사례를 통해서 한국 병역거부 활 동가들은 운동에 반군사주의적 지향이 필요하고 대체복무개선이 궁극적인 지향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공유지반을 형성해 나갔다 대체복무개선에 대한 집중력은 상 당했지만 활동가들은 대체복무제를 넘어서는 병역거부 운동의 궁극적인 지향과 목표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해외의 사례와 함께 정치적 병역거부자의 지속적인 등장과 활동은 한국 병역거부운동이 대체복무 너머 를 지속적으로 고민하게 만든 또 하나의 중요한 요인이었다 운동이 진행되면서 점점 더 많은 정치적 병역거부자들이 등장했고 이들이 드러낸 명확한 평화주의 신념은 병역거부운동의 반군사주의적 가치들을 자극해나갔다 정치적 병역거부자들은 공개적으로 스스로의 신념과 병역거부 의사를 밝혔다 이 들은 병역거부운동 활동가들과의 논의를 통해서 효과적인 전략을 고민했고 보다 대중적인 행동이 될 수 있도록 기자회견과 같은 공개적인 선언을 택했다 정치적 병역거부자들의 공개적인 병역거부 선언은 공개적으로 군사주의를 거부 하는 행 위였다 군대에 가지 않겠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것은 국방의 의무가 신성화된 한 국사회에서 금기에 대한 도전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의 병역거부 선언은 많은 언론 으로부터 주목받게 되었고 이들의 숫자가 늘어갈수록 병역거부에 대한 논쟁은 보 다 뜨거워졌다 공개적으로 병역거부를 선언하는 이들이 늘어갈수록 이들의 언어에는 보다 급진 적인 생각들이 담겨갔다 초창기 병역거부 소견서의 내용은 병역거부 자체에 대한
170
설명과 대체복무제의 필요성이 주를 이루었다 한국 사회의 강고한 군사주의 속에 서 일정한 제도적 개선을 얻기 위해 스스로의 목소리를 조절 했던 측면도 있었 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군대문화에 담긴 남성중심성과 권위주의에 대한 비판 이 병역거부의 이유로 거론되었다 제주
학살 한국전쟁 시기 민간인학살 베트
남 파병에서 광주 학살 이라크 파병으로 이어지는 가해자로서의 국가 폭력 에 대한 비판 역시 병역거부 소견서에 점점 더 명확하게 담겨갔다 병역을 거부하는 이들이 자신의 목소리로 성역과도 같았던 군대를 비판하는 과정은 새로운 언어를 만드는 과정이었고 병역거부운동을 더욱 넓혀가는 힘이기도 했다 군대는 사회의 폭력성 남성중심성 권위 위계가 가장 극단적으로 드러나는 곳이 라고 생각합니다 사회에서는 제 나름의 생활방식을 만들어가고 사회적 불평등 폭력에 저항할 수 있지만 군대는 둘 중 하나입니다 거부할 것인지 적응할 것인 지 오정록 병역거부 소견서 한국군은 베트남전 참전이라는 실로 부끄러운 경험을 진지하게 반성하지도 않은 채 다시 제국주의 침략전쟁에 발을 담그고 있는 것입니다 더욱이 그 총부리는 더 이상 낯선 땅 이름 모를 사람들에게만이 아닌 과거 광주에서 그랬듯 지금은 평택 에서 묵묵히 고된 삶을 일궈오던 사람들에게로 향하고 있습니다 군대라는 조직이 단순히 최전선에서 싸우는 전투병들로만 이뤄질 수 없는 하나의 복합적인 유기체 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런 조직에 어떤 식으로든 몸담는다는 것은 저로서는 차마 용납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송인욱 병역거부 이유서 좀 더 넓은 평화운동으로 반군사주의에 대한 문제의식은 병역거부운동을 병역거부 사안을 넘어서서 우리 사회의 군사주의에 대한 문제제기와 평화운동의 다른 이슈로 확대되도록 하는 힘 이었다
년
월 정치적 병역거부자들은
월
일로 예정되었던 국군의 날 퍼
레이드에 반대하는 퍼포먼스를 하기로 결정했다 탱크와 미사일 등이 퍼레이드를 하고 있는 광화문에서
무기로는 평화를 살 수 없습니다 라는 슬로건으로 무기
장례식 퍼포먼스를 진행한 것이다 강력한 무기가 평화를 지켜준다는 군사주의가 가장 극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무기들의 도심 퍼레이드라고 한다면 평화주의자들 은 그것에 반대하는 퍼포먼스를 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실천한 것이었다 이는 한국 병역거부운동이 했던 첫 번째 반군사주의 퍼포먼스였다 년
월
일에는
군인을 집으로 라는 캠페
인을 진행하였다 이날 진행된 퍼포먼스 역시 군사주의 문화를 비판하는 문제의식 을 담고 있었다 군복 교복과 같은 제복을 입고 국민체조 음악에 맞춰서 집단 체
171
조를 하다가 발랄한 음악이 흐를 때는 각자가 제복을 벗고 다양한 몸짓을 해나간 다는 퍼포먼스 기획은 군사주의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획일적인 집단주의 문화 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년에
월
일에는
밀리터리 인 더 시티 라는 이
름으로 문화제가 진행되었는데 이는 일상 속에 스며든 군사주의를 드러내고자 하 는 기획이었다
반군사주의 패션쇼 로 이름 붙여진 내부 행사에서는 일상생활에
서 사용되는 군사적 상징 장난감 무기 밀리터리룩과 같은 것들의 의미를 새롭게 조명했다 이러한 문화적 실천과 함께 병역거부운동은 무기거래감시 라는 새로운 평화운동 의 영역을 시도해나갔다 에 있어 주요한 고리였던 수혜자
년 병역거부 활동가들은 병역거부운동의 국제연대 전쟁저항자인터내셔널
국제회의에 참여하면서 전쟁
운동을 접했다 전쟁수혜자 운동은 전쟁으로 이익을 얻는
자들 특히 무기 관련 기업들에 대한 감시와 견제를 하나의 사회운동으로 구성한 것이었다 활동가들은 전쟁수혜자 관련 활동을 한국에서도 시작하고자 작은 세미 나 그룹을 조직했다 이를 바탕으로 꾸려진
무기제로
모임은 현재 무기관련 사
안에 대한 감시와 개입을 위한 활동을 벌여가고 있다
년에는 국회 국방위원
회
국정감사
모니터링을
하였으며
년부터는
구체적으로
확산탄
관련 사안에 초점을 맞춘 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중이다 에게 확산탄금지협약 에 가입할 것을 촉구하며 확산탄을 생산
한국 정부
수출하고 있는
국내 기업인 한화와 풍산 측에 생산 중단을 요구하는 직접행동을 꾸준히 펼치고 있다 상당수가 병역거부운동을 했던 구성원들의 이러한 활동은 자신에게서 시작 하는 폭력을 성찰한다는 병역거부운동의 문제의식이 좀 더 다양한 평화운동으로 확대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한국의 병역거부운동은 감옥에 갇힌 병역거부자들에 게 대체복무제의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관점에서 시작되었지만 점점 더 반군사주 의 운동의 지향과 모습을 띠어가는 과정이었다 비록 대체복무제 개선을 통해 병 역거부자들의 감옥행을 멈추겠다는 운동의 목표는 아직 달성하지 못했지만 운동 은 점점 더 그 너머의 가치와 활동을 지향하면서 스스로를 변화시켜나갔다
18)
확산탄(집속탄)은 공중에서 터지면서 그 안에 있던 수백 개의 소폭탄들이 반경 수백 미터로 퍼지는 방식의 산탄형 폭탄이다. ‘죽음의 비’라고 불리는 확산탄은 그 살상력도 살상력이지만, 흩어진 소폭탄 중 상당수가 불발탄으로 남아 있다가 대인지뢰처 럼 터지기 때문에 대표적인 ‘비인도적 무기’로 분류된다. 2010년 8월 1일 확산탄 사용과 보유를 금지하는 “확산탄금지협 약”(Convention on Cluster Munitions)이 107개국의 동의를 바탕으로 발효되었지만, 한국 정부는 협약에 가입하지 않았다. 확산탄 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무기제로(2012)를 참조.
172
두려움을 품는 평화의 언어 죽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병역거부자들과 병역거부운동은 군사주의에 저항하는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왔다 우리 사회에 부재했던 총을 들지 않겠다 는 언어는 군사주의에 균열을 가하는 평 화의 언어였다 이 장에서는 병역거부의 언어가 가진 의미를 레비나스의 비폭력 개념을 통해서 평가해보고자 한다 유태계 프랑스 철학자 엠마누엘 레비나스
가 말하는 비폭력이
란 폭력이 배제된 멸균실 같은 상태가 아니다 그러한 상태는 사실상 가능하지도 않으며 탈맥락적으로 모든 폭력을 악으로 고정시키는 함정을 품고 있다 그에게 비폭력이란 팽팽한 긴장 한 가운데 존재하는 무엇이다 폭력을 겪을 것이라는 두 려움과 폭력을 입힐 것이라는 두려움 사이에 존재하는 끝없는 긴장 자신의 죽음 을 무서워하지만 또한 살인을 해야 할지 모르기에 불안한 상태에서 비롯되는 두 려움이 바로 비폭력이다 버틀러 신체를 가진 인간은 필연적으로 그 신체의 훼손과 죽음에 대한 공포를 가질 수밖 에 없다 또한 자신이 누군가에게 폭력을 입힐 수도 있다는 두려움 역시 필연적이 다 그러나 군사화된 사회는 전자의 공포만을 극대화시킨다 피해자로서의 역사와 정체성만을 단절적으로 강조하면서 죽을 수 있다는 공포를 극단으로 밀어붙인다 이를 비판하는 것은 우리 를 공격하려고 하는 적을 이롭게 하는 행위로 낙인찍힐 뿐이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압도적인 사회에서 자신이 누군가를 죽일 수도 있다 는 두려움은 마비될 수밖에 없다 비폭력의 긴장은 깨지고 사회 속에서는 점점 더 우리를 지키는 좋은 전쟁과 좋은 폭력을 갈구하는 외침으로 채워진다 군사화된 대한민국에서 병역거부자의 언어는 삭제되어왔던 그 두려움을 담고 있 다 내가 당기는 방아쇠가 누군가를 죽일 수 있다는 두려움을 거세되어야 했던 두려움을 살려내 자신의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병역거부자 김태훈은 소견서에서 말한다
제가 들어야 할 총은 누구를 겨누고 있습니까 그 총이 슬픈 눈물을 간
직한 사람들을 향한다면 그 사람이 있음으로 인해서 한 사람이라도 행복할 수 있 는 사람을 겨누고 있다면 저는 총을 들 수 없습니다 군인이 되는 과정은 자신이 누군가를 죽일 수도 있다는 공포를 말살하는 과정이 다 그 공포는 정상적인 남성이라면 극복하고 제거해야 할 것이라 규정된다 그렇 지 못한 이는 부적응자 로 명명될 뿐이다 그러나 병역거부자 현민은 그 공포를 품는 것이 무능력하거나 극복해야 할 무엇이 아니라 타인의 생명에 연민하며 새 로운 관계를 맺고자 하는 새로운 갈망 이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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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실탄의 감촉 개머리판의 반동 총구에서 흐르는 연기에 익숙해지려면 적잖 이 머뭇거리고 주저하는 순간들이 있었으리라 마음 짚어봅니다 손바닥에 땀이 배 고 손가락이 떨리고 눈동자가 흔들렸을 순간들입니다
오늘날 한국사회가 이
런 무능력에 아무런 의미를 부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대신 하나의 답변 하고 극복 하라는 주문만 외기 때문입니다
극기
이런 머뭇거림과 주저함은 병적인
찌꺼기가 아니라 한국사회의 미래를 품고 있는 시간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왜 냐하면 이런 순간에는 무장한 건장한 남성을 보호자로 내세우고 그 밖의 사회성 원들을 피보호자로 밀쳐두는 일방적인 안전에 대한 의문이 웅크리고 있기 때문입 니다 또한 여기에는 타인의 생명에 연민하면서 새로운 관계를 맺고자 하는 갈망 이 숨죽이고 있습니다 현민 헌법재판소 재판관님께 나약함을 긍정하는 언어 다른 이를 죽일 수 없다는 두려움은 병역거부자의 언어 속에서 부끄럽고 없애야 할 것이 아니라 긍정하고 품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나약함을 긍정한다면 그것을 없애야 하는 강한 군인 정상적인 대한민국 남성이 되는 일이야말로 두려운 일이 다 테러진압훈련을 받는 날이 잡히면 수일 전부터 잠을 설쳐야만 했던 동성애자 유정민석에게는 대한민국의 남성이 되는 것이 두려운 일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 두려움 속에서 유정민석은 병역거부를 결심하고 그가 느꼈던 것들을 담아 자신의 말 인 병역거부 소견서 를 썼다 남성적인 가치들을 강요하는 군대에서의 경험을 통해 반작용적으로 깨닫게 된 섬 세한 정체성과 내 안의 또한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그런 여성성이 결코 부끄러 운 것이 아니라면 겁이 많고 남을 죽이는 연습을 해야 하는 시뮬레이션의 군사훈 련조차 벌컥 손부터 떨리는 아직은 사람들에게 낯설게 느껴지는 부류의 사내자 식이 계집애 같다 는 그러한 성적 소수자 로서 바라보았던 남성화된 병영문화의 병폐와 호전적이고 공격적인 남성성을 재생산하는 군대라는 진짜 남자 가 되기 위한 통과의례를 거부할까 합니다 유정민석 병역거부 소견서 유정민석이 이렇게 자신의 말 을 꺼내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년 병역거부를
고민하면서 그가 느꼈던 한국 병역거부운동의 언어는 대단한 신념을 가진 이들 의 것이라 느꼈기 때문이다 그는 당시에 자신의 언어 가 없었다고 말한다 병역 거부는 분명 다른 언어 를 만들어냈지만 초창기 병역거부의 언어는 감옥행까지 감수할 정도로 강고한 평화주의 신념을 가진 이의 것으로 한정되었다 그러나 유 정민석은 자신의 삶과 선택을 세상에 설명하기 위해 또 다른 언어를 만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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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역거부 소견서에서 그는
겁이 많고 어리버리한 제 심약함 을 병역거부의 사
유 라고 하기에는 미약할지도 모르겠다고 썼다 그 미약함이란 바로 자신 안의 여 성성을 나약함을 긍정하면서 폭력을 거부하는 언어가 병역거부의 언어에 더해짐 을 의미했다 년
월
일 병역거부를 선언한 이준규는 한 인터뷰에서 병역거부를 선언하는
이 시점에도 여전히 자신의 생각들을 말로 설명하는 것은 어렵다고 했다 상식을 거부하는 병역거부의 언어는
년이 넘어도 빈곤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는 언
어를 조금씩 보태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라 말했다
앞서 여러 병역거부자들이 죽
이지 않아도 살 방법이 있다는 것을 나에게 가르쳐주고 또 그런 생각들을 표현할 수 있는 언어를 만들어준 것처럼 나도 남에게 그럴 수 있으면 좋겠다
이준규
의 병역거부 소견서는 다른 이들을 해할 수 없는 여림 과 겁 을 긍정하는 언어를 담고 있다 그의 소망처럼 죽이지 않아도 살 방법을 담은 언어는 병역거부자들과 운동을 통해서 조금씩 불어나고 있다 저는 사람들이 저처럼 겁 많고 여리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군대도 말입니다 수 개월을 연습하고 그들은 같은 사람이 아니라 적이라고 계속 세뇌하고도 전쟁터에 선 다른 한명을 죽이지 못해 수만 발을 쏘고 살아서 돌아와선 살인의 기억을 지 우지 못해 힘들어하는 여린 사람들이 있는 곳입니다 그럼에도 다른 사람들이 공 격할까봐 다른 많은 더 큰 총을 들어야 할 것 같은 겁 많은 사람들 저와 같은 여리고 겁 많은 사람들입니다
제 여린 마음은 제게 다시 이야기합니다 도망
치라고 군대에서 도망치라고 내가 피투성이가 되는 걸 보고 싶지 않다고 다른 사람에게 약해도 된다고 아픈 건 잘못이 아니라고 이야기하고 싶다고 말입니다 이준규 병역거부 소견서
마치며 년 빈 라덴을 사살했다는 보도가 나가자 미국의
대들은 남아공 월드컵 때
유행했던 부부젤라를 불고 연못에 몸을 던지며 축제 를 즐겼다 그들은
년
테러 이후
나라에 대한 충성 맹세 가 아침마다 울려 퍼졌던 애국주의로 가득
한 학교에서
대를 보냈던 이들이었다 이들에겐 자신도 테러로 죽을 수 있다는
공포가 끊임없이 강조되었으며 그것을 막기 위해 나라를 지키고 싸워야 한다고 배웠다 빈 라덴의 사살은 공포에서의 해방이고 축제이고 승리였다 자신이 누군 19)
평화를 가져오는 것은 ‘약함’ 2일.
나는 강해지지 않겠다: 입영일에 헌재 앞서 일인시위 한 이준규 씨 , 참세상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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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를 해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갖지 못한 채 자신들이 죽을 수 있다는 공포만 으로 채워진 사람들 이들에게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미국이 자행한 수십 만의 죽음들 따위는 부수적 피해 일 뿐이다 가해자로서의 기억은 삭제된 채 피 해자로서의 자신만을 되뇌는 사람들 이 사람들이 불었던 부부젤라 소리는 분명 섬뜩했을 것이다 하나의 공포만이 하나의 목소리만이 존재하는 사회는 전쟁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 한국 병역거부운동은 지난 시간 대체복무제를 요구했다 그리고 이 목표는 지금도 병역거부운동에서 중요한 위치에 놓여있다 총을 들 수 없다는 이들을 아무런 대 안도 없이 감옥에 보내는 것은 인권침해라고 외치며 대체복무제를 요구했고 하고 있다 이 감옥행은 하루빨리 끝나야 한다 대체복무제를 통해 총을 들지 않겠다는 신념이 우리 사회에 공존할 수 있게 된다면 이 변화는 우리 사회의 군사주의를 허무는 중요한 열쇠가 될 것이다 대체복무제를 넘어 병역거부운동은 다양한 평화운동을 시도했다 그 중 하나가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누군가를 죽일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총을 내려놓겠다는 언어 자신의 나약함을 긍정하는 언어를 만들고 세상에 전했 다 철저하게 삭제 당했던 가해자로서의 목소리 그래서 죽일 수 없다는 목소리를 담아왔다 나라는 누가 지키냐는 북한이 쳐들어오면 어떻게 하냐는 상식 앞에서 제주
과 광주
을 말했고 베트남과 이라크에서 태극기 붙은 군인들의 존재
는 무엇이었는지 물었다 섬뜩한 부부젤라 소리에 가려져 아직은 미약하지만 병 역거부운동은 반군사주의 가능성을 담은 평화의 언어를 만들어 가고 있다 년 천안함과 연평도 사태 이후 우리 사회의 군사주의는 맹렬한 기세로 차올 랐다 군부대의 사격대 과녁에는 김정일 김정은 사진이 걸렸고 성
부관참시 김일
북괴군의 가슴에 총알을 박자 라는 표어까지 등장했다 팽배한 군사주의가
날 것 그대로 흘러내린 모습이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병역거부가 입이라 도 뻥긋 할 수 있겠냐는 질문을 받는다 그러나 이렇게 전쟁의 기운이 높아질수록 병역거부의 의미도 더욱 뚜렷해진다 내가 잡은 총이 내가 하는 훈련이 누군가를 죽이는 것이라는 병역거부자들의 이야기가 전쟁의 시기만큼 명확해질 때도 없기 때문이다 연평도 사태 이후 대한민국이 점점 더 전쟁으로 치달아 갔던 월
일
번째 정치적 병역거부자 문명진은 국방부 앞에서
년
끊임없는 전쟁의 시
대 살상을 거부할 권리를 이라는 이름으로 병역거부 선언을 했다 그는 자신의 병역거부 소견서에서 이렇게 호소했다
초토화되는 것은 북의 해안포가 아니라
누군가의 삶 혹은 우리의 인간성입니다
지금처럼 계속 서로에 대한 공포와 적
개심만 키워 나간다면 앞으로 눈물을 흘릴 사람들은 더 많아질 것입니다
전쟁이
다가올수록 이렇게 평화를 이야기하는 이들은 혹독한 탄압을 받게 된다 해방 후 년 동안 병역거부자들이 받아온 탄압은 우리 사회가 얼마나 전쟁과 가깝게 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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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해왔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지난 시간 병역거부운동 속에서 적지 않은 이들이 총을 내려놓겠다는 마음에 공감하고 연대를 표시했다 그만큼 우리는 전쟁과 폭력 에서 벗어나고 있는 중이다 ◈ 참고문헌 ◈ 국가인권위원회, “양심적 병역거부 결정문,” 2005. 무기제로, “죽음의 비 확산탄을 금지하라,” 2012. 김두식, 평화의 얼굴 , 교양인, 2007. 박노자, 좌우는 있어도 위아래는 없다 , 한겨레신문사, 2002. 버틀러, 주디스, 불확실한 삶: 애도와 폭력의 권력들 , 양효실 옮김, 경성대학교 출판부, 2008. 병역거부 연대회의, “타이완 대체복무제도 시찰 보고서”, 2004. 스펙, 안드레아스, “양심적 병역거부에 관한 최근의 노력과 도전들”, 병역거부 연대회의, 12·17 국제회의 자료집-전 세계 병역거부운동의 동향과 전망 , 2002. 신병식, “박정희 시대의 일상생활과 군사주의”, 경제와사회 72, 2006. 이재승, “양심적 병역거부를 처벌하는 병역법의 위헌심판사건 참고인 의견서”, 민주법학 45, 2011. 이진경, “소수자와 반역사적 돌발: 소수적인 역사는 어떻게 가능한가?”, 소수성의 정치학 , 그린비, 2007. 임재성, 삼겨야 했던 평화의 언어: 병역거부가 말했던 것, 말하지 못햇던 것 , 그린비, 2011. 전쟁없는세상·한홍구·박노자, 총을 들지 않는 사람들 , 철수와영희, 2008. 정용욱,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운동의 현황과 전망” 윤수종 외, 우리시대의 소수자 운동 , 이학사, 2005. 진석용정책연구소, 종교적 사유 등에 의한 입영거부자 사회복무체계 편입 방안 연구 , 병무청, 2008. 한홍구, “한국의 징병제와 병역거부의 역사” 전쟁없는세상·한홍구·박노자, 총을 들지 않는 사람들 , 철수와영희, 2008. 홍영일, “양심적 병역거부와 관용의 증가” 이석우 편, 양심적 병역거부 , 사람생각, 2005. Amnesty International. 1991. Conscientious objection to military service, London : AI. Lainer-Vos, Dan. 2006. “Social movements and citizenship: Conscientious objection in France, the United States and Israel.” Mobilization: International Journal 11(3). Mann, Michael. 1988. States, War & Capitalism, Studies in Political Sociology. New York: Basil Blackwell. Moskos, Charles C. and Chambers II., John Whiteclay. 1993. The New Conscientious Objection: From Sacred to Secular Resistance, UK: Oxford University Press. Speck, Andreas and Moreman, Bart. 2002. “CO as a human right vs CO as antimilitarist a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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