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main content

20131122 자료집 형제복지원 학술대회

Page 1

학술토론회

“감금의 역사, 수용의 시간과 형제복지원”

◧일

시 : 2013년 11월 22일(금) 11:00~18:00

◧장

소 : 한국방송통신대 역사관

◧ 공동주관 : 학술단체협의회, 민주주의법학연구회 ◧ 공동주최 : 형제복지원사건진상규명을위한대책위원회, ◧ 공동주최 : 김용익 의원실, 진선미 의원실 ◧후

원 : 외환은행노조, 전교조, 교수노조, 민주화를위한전국교수협의회,

◧후

원 : 한국비정규교수노조


학술토론회 순서

11:00~13:00

제1부 한국 수용・감금정책의 정치사회학 | 사회 : 강경선(한국방통대)

1. ‘새로운 시설’의 탄생 형제복지원 사건의 배경 ● 임덕영(리츠메이칸대) / 박숙경(경희대) 2. 수용정책과 정치적 커넥션

●

배성인(한신대)

3. 형제복지원, 혹은 문화적 과정으로서 야만 4. 각하의 수용소, 부랑인들의 원장

●

●

정정훈(수유너머N)

전규찬(한국예술종합학교)

1부 토론자 | 김진우(덕성여대), 안영춘(한겨레신문), 여준민(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 최정기(전남대)

13:00~14:00

중식

14:00~16:20

제2부 형제복지원 사건 진실규명과 국가책임 | 사회 : 최정학(한국방통대)

5. 형제복지원 사건 피해자 트라우마와 그 치유

●

민문경(인권의학연구소)

6. 형제복지원 피해사건에 대한 국가책임과 입법 방향 7. 인권기준으로 본 형제복지원 사건 8. 형제복지원 사건과 국가책임

●

●

●

조영선(민변 과거사위)

이재승(건국대)

김명연(상지대)

2부 토론자 | 김재완(한국방통대), 안경호(4.9평화통일재단), 조백기(민주주의법학연구회)

16:20~16:30

휴식

16:30~17:30

종합토론(한국의 수용・감금정책과 형제복지원 사건)


목 차

▪ 여는글

▪ 발표 1 ‘새로운 시설’의 탄생 형제복지원 사건의 배경 ●

임덕영(리츠메이칸대) / 박숙경(경희대)

▪ 발표 2 수용정책과 정치적 커넥션

●

배성인(한신대)

▪ 발표 3 형제복지원, 혹은 문화적 과정으로서 야만

▪ 발표 4 각하의 수용소, 부랑인들의 원장

●

●

정정훈(수유너머N)

전규찬(한국예술종합학교)

▪ 발표 5 형제복지원 사건 피해자 트라우마와 그 치유 ●

민문경(인권의학연구소)

▪ 발표 6 형제복지원 피해사건에 대한 국가책임과 입법 방향 ●

▪ 발표 7 인권기준으로 본 형제복지원 사건

▪ 발표 8 형제복지원 사건과 국가책임

●

●

조영선(민변 과거사위)

이재승(건국대)

김명연(상지대)

7

p

11

p

37

p

39

p

57

p

101

p

111

p

139

p

167

p


형제복지원 사건과 국가폭력에 관한 <학술토론회>를 열며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은 1987년 1월 울주지검의 김용원 검사가 우연히 형제복지 원 소속의 울주군 농장에서 벌어진 수용자들의 인권침해 상황을 접하고, 수사에 착 수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그 해 3월 수용자 1명이 구타로 사망하고 35명 이 집단 탈출한 사건을 계기로 그 실체가 드러났습니다.

국가기록원의 기록과 당시 언론보도 등에 의하면, 형제복지원에는 3천 5백명 가 량이 불법으로 감금되어 강제노역을 당하고 저항하면 굶기고 구타하거나 심지어 살 해하여 암매장까지 하였으며 75년부터 86년까지 12년 동안 무려 513명이 사망하였 고 일부 시신은 300∼500만원에 의과대학 해부학 실습용으로 매매되었습니다.

형제복지원은 당시 매년 20억 원의 국고지원을 받는 한편 원생들의 노임을 착복 하였으며 원장의 땅에 운전 교습소를 만들기 위하여 원생들을 축사에 감금하고 하 루 10시간 이상의 노예노동을 시켰습니다.

이와 같이 형제복지원 사건은 전면적이고 총체적이며 반문명적 인권유린사건이었 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87년 민주화운동의 과정에서 그 의미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당시의 피해자들은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한 채 당시 고문과 성폭력 그리고 노예노동 등의 후유증으로 정신병원에 수용되어 있는 등 고통 속에 생활하고 있는 반면에 이 사건의 가해자들은 지금도 복지재벌로 사회복지사업을 운 영하고 있으며, 지난 부산저축은행 비리사건에서 100억 원의 불법대출로 다시 세상 에 그 실체를 드러냈습니다.

형제복지원 사건은 또한 ‘부랑인의 신고, 단속, 수용, 보호와 귀향 및 사후관리에 관한 업무지침’(내무부훈령 제410호, 1975. 12. 15)과 당시 형제복지원에 민주화운 동 관련자 다수가 강제구금되어 있었다는 사실에서 보는 것과 같이 이른 바 ‘불순 분자의 활동 봉쇄’의 이름으로 민주화운동을 탄압하기 위하여 자행되었습니다.

7


87년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과 함께 위기를 맞게 된 전두환 정권은 정권을 보위 하기 위하여 당시 청와대, 내무부, 법무부, 보안사, 안기부, 검찰총장, 부산시장 등 권력기관을 동원하여 사건을 축소·은폐하고 진상규명을 저지하였으며, 김용준 국무 총리 후보자 지명에서 쟁점이 된 바와 같이 사법부도 권력의 시녀로 형제복지원 사 건의 축소·은폐에 가담한 국가에 의한 체제 범죄입니다.

형제복지원에서 ‘살아남은 아이’ 한종선은 우리로 하여금 과거청산운동을 성찰하 게 합니다(문주 출판사, 2012 참고). 12년 동안 무려 513명이 살해된 국가폭력에 의한 총체적인 인권유린사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형제복지원 사건은 정부의 덮어버 리기 시도 앞에 진실도 규명하지 못했으며 국가의 책임도 추궁하지 못했습니다. 지 난 개혁 정권의 과거 청산 국면에서 조차 전혀 주목받지 못한 것입니다.

형제복지원 사건은 한국의 산업화·도시화과정에서 공동체의 붕괴와 잉여노동 및 주거불안층에 대한 경찰질서법적 국가폭력일 뿐만 아니라 파행적인 한국 현대사, 특히 박정희·전두환의 불법적 군사독재정권이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치 안과 사회정화사업의 일환으로 자행된 국가에 의한 직접적·극단적 인권유린사건인 국가범죄입니다. 복지원 시설을 운영하는 사회복지법인이 여기에 가담하였다고 하여 국가의 범죄성과 책임성이 회석되지 않습니다.

형제복지원 사건은 종료된 사건이 아니라 현재 진행 중인 사건입니다. 형제복지 원 사건 이후 최근 광주 인화원사건(일명 도가니사건)에 이르기까지 반복되고 있는 사회복지시설에서의 대량 인권유린사건은 가해자에 대한 형사적 처벌에 그치고 이 러한 인권유린행위가 국가범죄로서 국가책임이 규명되지 못한 것에 중대한 원인이 있습니다. 나아가 형제복지원 사건과 같이 사회적 주변인에 대한 격리수용정책은 신자유주의 경찰국가화·감옥국가화·빈곤의 범죄화에서 보는 것과 같이 자본주의 사 회에서 그 형태를 달리할 뿐 언제든지 재현될 수 있는 사건인 것입니다.

불법국가가 정권보위를 위하여 산업화과정에서 가장 열악한 환경에서 사회적 주

8


변인으로 치부되었던 사람들을 강제구금·격리하여 총체적으로 인권을 유린한 사건에 대하여 진실을 규명하고 과거청산과 국가책임을 요구함으로서 이행기에 있어 사회 적 소수자의 인권침해에 대한 공동체의 책임과 과거청산의 범위를 크게 확장하여 인권국가와 민주주의의 발전을 심화할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형제복지원 사건과 같이 사회복지시설 인권유린사건에 대한 국가의 직접적 인 법적 책임을 규명하고 피해자의 구제와 재발의 방지를 위한 문화적·법적 환경의 정비를 요구함으로써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는 사회복지시설에서의 인권침해의 예방 과 근본적인 탈시설화의 계기를 마련하고 나아가 빈곤의 범죄화 같이 신자유주의 경찰국가·감옥국가화에 대하여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형제복지원 사건의 정치·사회적 의미와 진실규명 및 국가책임요구의 충분한 의의 에도 불구하고 과거 26년 전의 사건이고 또한 사회복지시설에서의 인권유린사건에 대하여 국가의 직접 책임이 규명된 사례가 없다는 점에서 진실의 규명과 국가책임 의 입증에 적지 않은 난관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에 관련 정치·사회학, 사회복지학, 언론학, 법학 등의 관련 전문지식인들이 한 국의 산업화와 민주화과정에서 발생한 형제복지원 사건이 갖는 의미와 진실규명 및 국가책임의 요구에 필요한 체계적인 이론화작업을 공동으로 기획·진행하고 이를 바 탕으로 공동학술대회 개최와 학술서적을 발간하여 형제복지원 사건을 체계적인 연 구에 기초하여 역사적 기록으로 남기고자 합니다.

- 학술단체협의회・민주주의법학연구회 -

9


발표 1]

‘새로운 시설’의 탄생 형제복지원 사건의 배경

임덕영(리츠메이칸대)・박숙경(경희대)

11


[발표 1]

‘새로운 시설’의 탄생 형제복지원 사건의 배경 -부랑인 개념 및 부랑인 정책의 변화 임덕영1) | 리츠메이칸대 ∙ 박숙경2) | 경희대

서론 ‘폭도’로 몰아 죽이고 ‘부랑인’으로 몰아 죽이고‘ ’부랑인이 아닌데…‘

형제복지원에 대한 고발서 형제복지원: 생지옥의 낮과 밤에 나오는 구절이다. 이 책의 중요한 내용은 잔혹한 복지원의 구타와 강제노동이다. 그러나 그 이변에는 자신은 ‘부랑인’이 아니라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아마도 이것은 지은이가 그러한 고초를 당한 이유로 ‘부랑인’으로 지적된 것에 대한 일차적인 항변일 것이다. 저자 의 머릿속의 ‘부랑인’에 대한 이미지는 무엇이었을까? ‘부랑인이 아니었다!’는 형제 복지원 피해자들의 공통적인 증언내용이다. ‘부랑인’이 아니라고 항변하는 사람들을 ‘부랑인’이라는 이유로 가둔 그곳이 존재할 수 있었던 근거가 된 ‘부랑인’은 누구였 을까?

‘누가 부랑인인가?’를 정의하는 것은 애매하고 어렵다. 이러한 어려움은 노숙인3) 실태조사 시 어떤 사람을 노숙인으로 보고 숫자를 셀 것인지?를 다룬 가이드북4)의 1) 리츠메이칸대학 박사과정, 전(前) 한국도시연구소 연구원 2)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3) 2012년 6월「노숙인등의복지및자립지원에관한법률」이 시행되면서 부랑인이라는 용어는 제 도적으로 사라졌다. 이 법률을 통하여 그동안 부랑인, 노숙자, 홈리스 등 다양한 용어로 혼용되어 왔던 주거불안정자를 ‘노숙인’이라는 용어로 통일하였다. 4) 보건복지부 2011년 노숙인일시집계조사지침 참조. 미국의 조사지침과 상당히 흡사하 나, 한국의 현실을 고려하였다.

13


두께에서도 나타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그녀들에 대해 어떤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이미지는 긴장관계를 가지며 정책에 반영되고 이렇게 마련된 정책 기준에 따라 사회적으로 안착되는 과정을 반복한다. 이러한 기준이 가장 명백 하게 드러나는 곳은 시설이다. 시설에는 ‘여러 가지 이유로 살 곳이 없는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다. 이들은 다양한 ‘욕구(needs)’를 가진 계층이다. ‘욕구’의 내용에 따 라 여성, 아동, 노인, 장애인 등의 범주로 구분되며 각 범주에 적절한 ‘서비스’와 ‘개입’, 또는 ‘보호’가 이루어질 것이 요청된다. 이에 따라 독특한 개입이 이루어지 면서 단순한 빈곤 정책 대상자가 아닌 서비스 대상자로서 여겨진다. 시설은 이 빈 곤정책과 서비스가 일체화된 모습으로 나타나는 곳이다. 그런데 시설 대상자 중 노 숙인․부랑인은 독특하다. 이른바 그 존재 자체가 ‘욕구에 대한 개입’을 필요로 하지 않는, 혹은 덜 필요로 하는 존재들로 치부된다. 예를 들어 아동의 경우 거리생활을 하지 않도록 하는 사회적 대처는 두터우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리 생활을 하고 있 다면 ‘아동시설’에 보내는 것이 적절하다고 여겨진다. 그 외 장애인, 여성, 노인 등 도 그러하다. 욕구에 대한 비교적 적극적인 정책적 지원이 이뤄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노숙인 및 부랑인은 이들 범주와 달리 욕구 충족을 위한 정책적 지원의 필 요성이 낮은 계층으로 여겨진다.5) 이들의 거리생활을 막기 위한 사회적 대처가 얕 거나 미비하다는 것이다. 남기철은 노숙인 및 부랑인의 특징으로 ‘다른 특수(인구학 적) 요인에 의한 사회복지욕구로 일차적으로 구분되지 않으면서 빈곤, 무주거, 사회 적 기능수행수준 저하’6)를 들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특수(인구학적) 요인이란 장애 인, 여성, 노인 등 다른 인구군에 비해 특별한 보호와 서비스를 필요로 하는 조건을 말한다.

현재의 노숙인 및 부랑인 시설은, 다른 유형의 시설에 들어가기에 애매한 사람들 이 대체로 입소해 있다. 대표적으로 경도 장애인이나 알코올 문제를 안고 있는 사 람, 쉽게 취업을 할 수 없는 조건에 처해 있는 사람, 그리고 고령자이다. 이들은 집 5) 남기철, 2009, 노숙인복지론 -Homeless의 사회적 통합- 집문당: 34-35. 6) 본 고에서는 직접적으로 형제복지원 사건을 다루지는 않으나,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1987년 형제복지원 사건 등과 같은 부랑인 시설 문제를 시설장 및 공무원의 ‘개인적 비 리’ 문제뿐만이 아닌, 한국 사회의 역사적 필연성이라는 관점에서 해명하고자 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된다.

14


이 없을 만큼 빈곤한 사람들이라는 점에서는 공통적이지만 아동, 장애, 노인 등 다 른 유형의 시설에 들어가기에 부적합한 사람들로 상당수는 노동 가능성의 경계선에 있는 사람들이다. 이와 같은 점들을 요약하면 한국사회에서 현재의 노숙인․부랑인이 라는 이미지는 ‘노동가능성의 경계선에 있는 자들로 집이 없을 정도로 빈곤한 자’라 고 거칠게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왜 노동가능성의 경계에 위치해 있을까? 그러나 이와 같은 개념이 예전부 터 존재해 있었는가?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노숙인․부랑인 개념은 불연속성을 가지 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중요한 변화를 겪으며 ‘형성’되어 왔다.

본고는 형제복지원의 존재 근거가 된 ‘부랑인’ 개념의 형성과정을 고찰할 것이다. ’부랑인에 담긴 이미지로 편입된 사람들이 누구인지?’ 그들이 ’어떤 사회적 맥락 속 에서 부랑인에 편입될 수밖에 없었는지?’를 고찰할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다른 범주 와의 경합․경쟁을 통한 구분을 통해 파악하려고 시도한다. 이러한 시도는 부랑인․노 숙인이라는 범주는 끊임없이 형성되어 오고, 또 변화해 왔으며, 그 변화의 기초는 한국의 자본주의 발전과 관련되어 있다는 인식에 기반하고 있다.7) 더불어 형제복지 원 사건 발생당시의 부랑인 정책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연구 대상은 부랑인․노숙인 을 둘러싼 정책이지만, 주요하게는 ‘시설’과 관련된 범주 구분에 초점을 맞춘다. 또 한 시기는 한국 전쟁 이후부터, 형제복지원 사건이 벌어진 1987년까지를 다룬다.

1. 부랑아 개념과 범주 형성

1) 전후 아동 복지의 부흥과 ‘부랑아’범주 형성

한국의 사회복지정책 역사에서 1950년대는 내전이후 극빈한 빈곤과 혼란 상태로 복지정책이라 할 만한 것이 없는 복지형성전단계로 설명되곤 한다. 그러나 의도적

8) 1957 편찬된 동 자료는 머리말에서 ‘각종 숫자의 질, 양, 공히 의문되는 것도 있으나, 현재 이를 대치 할 자료도 없어 집계결과를 그대로 발표’한다고 밝히고 있다.

15


인 정책적 개입이 있었는가와 관계없이 사람들의 삶은 무언가 변화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한국에서 수많은 거리생활자가 나타난 것은 한국전쟁이 큰 계기가 되었다. 이들 에 대한 응급조치로 급식과 시설이 제공되었다. 이때 과연 거리에서 생활하는 사람 들은 하나로 파악되었을까? ‘1957년 보건사회통계연보8)’에는 ‘후생 및 복지시설 분 포상황표’가 있어, 각종 시설들의 통계를 제시하고 있다.

이 시설에서 생활하는 이들의 공통점은 ‘집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들 은 모두 거리생활자다.

이들 거리생활자는 다양한 기준에 따라 이미 구분되고 있

었다. 우리의 눈에도 낯익은 ‘장애인 시설’, ‘부녀시설’, ‘윤락녀’시설, ‘양로원’, ‘나 환자 시설’ 등 각종 범주들이 눈에 띈다.

이러한 시설 중에 압도적으로 많은 비중을 차지한 것은 아동관련 시설이었다. 1956년 현재 후생 및 복지시설은 총 603개소였는데 이중 육아원은 396개소로 절반 이상을 차지하였다. 양로원 37개소, 윤락여성직업보도갱생원 4개소 등을 제외한 나 머지 시설들은 아동복지시설로 분류될 수 있는 시설들이었다(보건사회부, 1957: 439). 이 통계 항목 중 ‘부녀’편 이 마련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각종 아동이나 여성 과 관련된 통계표와 함께 ‘부랑아’ 시설 현황이 나와 있다. 1955년 당시 부랑아 시 설에는 43개소에 2051명이, 1956년에는 43개소에 7,335명이 입소해 있다고 보고되 었다(보건사회부, 1957: 453). 부랑아가 누구인지에 관한 법률적인 정의는 존재하지 않았다.9) 또한 영육아원의 실태 통계를 보면, ‘입소 항목’에 ‘부랑아 인수’라는 항

9) 그 이후에도 부랑아에 대한 법률적 정의는 존재한 적이 없다. 다만, 여기서 지적되어야 할 것은, 소위 부랑․노숙인계통의 법률의 시초로, 연구에 따라서는 1970년 제정된 사회복 지사업법 혹은 1975년 내무부 훈령을 들고 있으나, 1961년 12월 30일 제정된 아동복리 법에 ‘부랑아 보호시설’은 아동 시설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제3조)이 간과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 ‘부랑아 보호시설’에 대한 정의는 1976년이 되어서야 아동복리법 시행령이 제 정됨에 따라 처음으로 등장한다. ‘부랑아 보호시설’이란 ‘부랑아를 일시 입소시켜 특별한 보호를 가하고 아동개인별로 내력·성정 및 희망등을 조사·감별하여 그 아동에 대한 장래 의 양호대책 또는 기타의 보호조치를 행함을 목적으로 하는 시설’을 의미하였다(시행령 제2조의 12). 그러나 이 시기에는 이미 부랑아 보호시설은 그 사회적 중요성이 크게 감

16


목10)이 있는 것으로 보아, 부랑아라 판단된 이들 중 일부는 영육아원에 입소해 있 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60년대 신문을 보면 다양한 젊은이들이 ‘부랑아’로 개념 화되어 등장한다. ‘서울시는 부랑아 천국’이라고도 표제를 한 신문 보도도 있었 다.11) ‘부랑아’ 단속 통계는 1975년까지 그 명맥을 유지한다. ‘부랑인’ 역사의 시초 라고 할 수 있는, 이 독특한 범주의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이들은 한국 전쟁의 영향으로 발생한 고아였을 수도 있다. 전쟁으로 발생한 전쟁 고아는 5만 9천명에서 7만 명, 혹은 8만 5천명으로까지 추산되었다(김은경, 2007: 20). 이들은 고아원에 수용되거나, 입양되었지만 그 외에는 거리에서 부랑아로 떠돌 기도 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영향은 1960년대에도 계속되어 1960년 1 월 서울시 경찰국에서 실시한 부랑아 실태 조사에서 보면, 총 295명 중 42명인 14%가 전쟁으로 인한 가족 이산이 부랑아로 떠돌게 된 주요동기였다(권순영, 1960: 132).

그러나 이들 부랑아의 숫자는 전쟁의 영향이 약해지던 1960년대 중반부터 다시 증가하는 양상을 보이며, 점점 더 커다란 사회문제화되어 갔다. 부랑아 단속 수는 1965년에 절정을 달하는 데 약 2만 8천여명의 아동이 부랑아로서 단속되었다. 따라 서 전쟁이 끝난 지 10여년이 지난 이후 오히려 부랑아라고 판단된 부류들은 더욱 증가한 것으로 당국은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1960년대 당시 부랑아 증가 원인이 단지 전쟁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준다.

2) 본격화되지 않은 자본주의와 포섭되지 않은 아동들

소하고 있었다. 아동복지시설의 목적에서 ‘부랑아 보호’는 2000년 7월 아동복지법 시행 령 개정에 의해 사라졌다. 10) 1957년 보건사회통계연보에는 이 항목이 없었다. 그러나 그 이후에는 줄곧 유지된다. 1970년 통계에는 아동복지시설 재소자 성분별 실태 중 부랑아․불량아 항목이 제시되어 있는데, 영아원의 경우 1.8%, 육아원 4.1%, 부랑아시설 26.4%, 직업보도시설 17.8%로 되어 있다. 이것은 부랑아 시설에는 반드시 부랑아라 판단된 아동만 입소한 것은 아니며, 또한 영유아 시설에도 부랑아라 판단된 아동이 입소된 것으로 판단된다. 11) 경향신문 1963년 9월 21일 자 "서울거리는 부랑아의 세계"

17


전쟁의 영향이 끝나 갈 무렵 부랑아가 다시 부랑아단속수

증가하게 된 이유는 무 35,000

엇이었을까? 부랑아 증 가의 배경에는 1950년 대의 농촌의 빈곤이 있 다. 혼란한 가운데에서 도 꾸준히 진행된 토지

30,000

29,652 25,599

25,000

21,612

20,000

19,451 18,323 16,483

15,000

21,187 20,592 19,883 19,367

16,498 13,344

10,916 9,204

10,000 5,000

19,267

6,628

9,997 6,8196,853 6,114

0

개혁(1952년-59년)은 연도

상당수의 자영농을 형

<그림 2> 부랑아 단속수 출처: 보건사회통계연보 각 연도

성하였는데, 이 토지개 혁의 진전12)으로 인한 경지면적의 협소와 미

국 잉여 농산물의 유입으로 자영농들은 농촌에서 이탈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이 게 되었다. 그러나 농촌을 버린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이러한 가운데 농촌 탈출을 용감히 감행했던 것은 어린 아동들이었다.

물론 당시에 아동들만이 이농을 했던 것은 아니었다. 1960년대에도 농촌을 버리 고 대도시로 올라오는 것은 이미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들 중 1960년대 초반부터 가장 문제시되었던 이들, 그리고 ‘부랑’ 개념에 포함되었던 이들이 아동이었다는 점 은 주목할 만하다.

당시 보호되어야 할 존재로서의 아동이라는 개념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갖가지 법률에서는 아동을 성인과 구분하고, 별도의 보호 장치13)들을 마련해 놓았다. 또한 1961년 아동복리법의 제정14)으로, 정부는 전국적인 집단 실태 12) 한국의 급속한 산업화에 있어서 토지개혁 및 지주계급의 몰락을 언급한 연구로 조희연 (2010:2장), 채만수(2011:제1강에 대한 보강) 참조. 13) 아동복리법 제정은 1962년이며 아동의 보호가 명시되어 있다. 또한 1950-80년대까지 근로기준법상 근로가 금지된 연령은 특별한 조치가 없는 한 13세 미만이었다. 15세로의 개정은 1996년이다.

18


조사와 아동복리법 위반 사항을 조사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실제로는 초등학교를 마친 아동들은 중학교나 고등학교로 진학하지 못하고 집에서 농사일을 거드는 경우 가 많았다. 즉, 당시 농촌에 남아 있던 아동들은, 현재와는 다르게 대부분 노동력으 로 기능하였다.15) 이들 중 일부는 보수적 농촌과 가족을 떠나, 즉, ‘무단가출’을 하 고, 공장으로 취직을 하기 위해 무작정 대도시로 향하였다. 이러한 ‘묻지마 상경’은 1960년대 초를 상징하는 거대한 흐름을 만들어 내었다. 그러나 1960년대까지 이들 을 받아들여줄 공장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사회사업 시설들에는 규율이 엄격하였 고 비좁았으며 제대로 먹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집으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었으 며, 교육에서도 배제되었다. 아래 형제복지원 피해자 증언을 담은 「살아남은 아이들 의 낮은 목소리」에 나오는 김영수(가명)씨의 삶은 당시 상황을 보여준다.

“보육원에서 초등학교 다닐 무렵 도망 나왔어요, 그 뒤 갈 데가 없어 남 의 집에서 살았어요. …중략… 마산에서 배타고 부산으로 와서 거리에서 생 활을 했어요. 갈 데가 없었거든요. 그러다가 형제복지원에 잡혀갔어요.”

이들 중 여성들은 식모가 되거나 성매매로 유인되었다. 이들은 ‘윤락녀’라는 이름 으로, 부랑인과 다른 정책 계열로 다루어지기 시작한다. 그렇지 않은 일부는 왕초가 이끄는 부랑아 집단으로 흘러들어갔다. 마치 영국의 올리버 트위스트를 연상하는 집단들이, 한국의 1960년대에 대도시 곳곳에 형성되었던 것이다. ‘걸식아 집단’, ‘패 걸이 집단’, ‘히라이’ ‘구두닦이’ 등등으로 불렸던 이들은, 때로는 갈취와 조직들 간 의 다툼, 때로는 경찰호송차의 탈취와 4.19 혁명에서의 활약 등, 종잡을 수 없는 사 회의 혼란을 일으키는 원흉, 혹은 사회적 이질자로서 신문 상에 보도되었다. 자본주 의 이행기 아직 자본주의체제에 포섭되지 않은 이들은 활달했으며, 배제되었으며 젊었다. 극히 빠른 사회적 변동 속에, 사회 그 어떤 범주에도 속하지 못한, 성인과 아동의 틈새에 끼인 ‘부랑아’ 그것이 그들의 정체성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14) 1960년대는 5.16쿠데타 이후 무려 19개에 달하는 복지입법이 대량으로 이루어졌다. 대 부분은 국가와 관련된 군인 등 특수집단에 대한 혜택을 규정하고 있는 것이었다. 15) 한 논문은 당시의 아동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이들은 노동중심의 생활을 해온 조상과 부모들로부터 노동을 흉내 내어 익히고 사실상 시킴을 당하여 어려서부터 육체노 동의 방향으로 훈련을 받아온”(박영자, 1972: 83)

19


3) 전사회의 군대화 속의 부랑아

이들에 대한 정책은 수용으로 시작되었다. 1958년 “서울시부랑아특별대책위원회” 가 구성되어 시차원에서 부랑아 단속 및 수용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였으며, 1961년 부터 “부랑아 선도보호사업계획”이 수립되어 전국적이고 항시적인 단속 및 수용 체 계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1961년 「생활보호법」과 「아동복리법」의 제정이 이뤄지고 사회복지시설사업이 제도화되었으며 이후 대상자별 특성에 따라 사회복지시설이 증 가하기 시작했다. 수용 정책을 주도한 중심 기관은 보건복지부이며 협조기관은 내 무부, 법무부, 소년법원, 문교부, 교통부, 대책위원회 등이 망라되었으며, 대책위원 회에는 “아동복리위원회” 및 지방의 “부랑아대책위원회”가 포함되었다. 사실상 모든 기관, 사회단체들이 소속되어 있었던 것이다. 다음은 부랑아 전국적인 단속망이다.

보건사회부. 1961. 《부랑아보호선도사업계획》. p. 24

이러한 체계화되어 가는 부랑아 ‘보호선도’ 사업은 군사 쿠데타 이후 체계적 강제 성을 띄어갔다. 쿠데타 이후, 군사 정부가 가장 먼저 한 것은 ‘깡패’의 일망타진이 었다. 이 ‘깡패’라 표현된 범주와 함께 ‘부랑아’도 나열되었다.16) 군사 정부는 부랑 아 집단 안에서 연령이 높은 층들을 구분하여 국토건설사업17)에 투입하였다. ‘복지 16) 이 부분은 상당히 애매한 부분이 있다. 그러나, 부랑아와 깡패는 일반적으로 구분되는 범주였던 것으로 보인다. 17) 국토건설단을 노무동원의 성격으로 파악한 논문으로는, 이상의(2011), 부랑인에 대한 정

20


정치 없는 공포정치’라 명명한다. 이시기를 박정희 정권시절 복지정책이 없었던 것 은 아니었으나18) 민주주의란 4월 혁명의 대의를 저버리고 쿠데타로 집권한 군사정 부가 국민적 지지를 얻기 위핸 추진한 강력한 정책은 ‘절대빈곤으로부터의 탈출 ; 선성장 후분배’ 였다.

‘잘살아보세’로 대표되는 ‘성장’ 담론과 「반공법」과 「국가보안법」을 축으로 한 안 보 이데올로기가 지배한 사회에서 집 없는 거리생활자들에 대한 통제정책은 대중적 지지 속에 국책사업에 동원할 노동력을 구축할 수 있는 정책이었다. 일제 단속으 로부터 남아 있던 부랑아․넝마주이 집단은 군대식으로 편재(1962년 5월 14일)하여 행정의 관리 하에 놓이게 되었다. 일례로 1962년 5월 14일 1천 5백여명의 넝마주 이가 서울시청 뒤편에 모여 근로재건대 발대식을 거행하였다. 이들에게는 군대와 같은 유니폼도 주어졌다. 일부는 지역개발을 위해 보내졌다. 이들은 '대한청소년개 척단'과 '한국합심자활개척단' 등으로 불렸다.19) 이 밖에도 소년원에 들어가 있는 이들은 ‘갱생건설소년단’이라는 이름으로 건설장에 보내졌다.20)

그러나 아직까지 ‘부랑아’ 시설은 그다지 강조되지 않았다. 수용자의 수는 3000명 에서 5000명 선으로 큰 변동은 없었다. 부랑아 시설이 크게 증가하지 않았던 이유 는 열악한 재정 탓도 있지만 ‘부랑아’ 시설이 다른 비슷한 ‘동종의 시설’, 즉 영유아 시설, 소년원 등의 교정 시설 등과 그 대상자가 중첩․경쟁관계에 있었다는 점도 작 용했다. 1960년대 시설에서 도망친 아동들에 대한 무자비한 시설 측의 단속이 있 었고21), 자신들의 정원을 확보하기 위해 폭력적인 수단을 동원했던 사례 등이 이를 반증한다. 책의 일환으로 파악한 논문으로는 임덕영(2008: 104-112)을 참조. 군사정권 초기 3년의 기간에 36건의 복지관련 법령의 제。개정이 이루어 졌을 정도로 대대적인 제도도 입이 있었다. 이보다는 적지만 유신체제 기간동안에도 7개의 주요 복지법률이제정되고 한 개의 법률이 개 정되었다(박형신. 보수정권의 복지정치 : 복지정치의 감정사회학. 2012. 학지사. 66-67) 이 시기 복지입법은 군인 등 특수집단의 복지를 우선한 것이었다. 19) 이에 대한 상세한 설명과, 1950년대와 1960년대 부랑아 정책을 비교한 연구로 김아람 (2011) 참조. 20) 갱생건설단에 대해서는 아직 자세하게 자료를 얻지 못하였으나 간략한 설명으로는 조준 현․김성언(1997), 임덕영(2008: 112-115) 참조. 21) 대표적으로는 1962년 발생한 ‘무궁갱생원’ 사건이다. 조선일보 6월 15일 자 참조. 18)

21


1960년대 부랑아 집단의 하나로 구걸하는 한센병자를 다루거나 일부 여성들이 부 랑아 집단에 포함되어 있다는 신문기사도 있었다. 노동시장 경계 밖 성인들이 ‘부랑 아’에 섞여 있었던 것이다. 그런 ‘부랑인 및 노숙인’을 대표하는 성인 남성을 대상 으로 한 시설은 당시까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전 사회적으로 군대식 편재를 통 해, 깡패, 실업자 중 일부는 군대로 복속되었으며, 군대를 통한 노동이 이루어졌다. 또한 각종 교정시설에서도 ‘교화’ 차원에서 노동이 이루어졌다. 그러한 노동은 상당 히 엄격한 규율 속에 강한 강도로 이루어졌다. 굳이 부랑인 시설에 수용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4) 사라진 ‘부랑아’, 쇠퇴하는 ‘아동복지 시설’

그런데 이 부랑아들은, 1970년대가 되면 거의 자취를 감춘다. 단속 통계도 1975 년이 끝이다. 강압적인 통제의 ‘덕’일 수도 있지만 ‘부랑아’라 불리던 아이들이 ‘진 짜’로 정부의 주된 관심사에서 사라진 것처럼 보인다.

한편, 그동안 사회복지의 핵심을 차지하였던 아동 시설 영역이 급속하게 줄어들 기 시작한다. 영아원 및 육아원은 1960년대 후반부터 급격하게 감소하여 1970년대 후반에 이르면 1960년대의 절반에 이르게 된다. 부랑아 시설의 수용자들은 부랑아 입소자의 경우에는 그 폭은 완만하지만 1970년대 중반까지 감소하며, 그 이후에는 증감을 반복한다.

갑작스런 법적 근거 마련, 그리고 아동복지 시설의 축소와, 부랑아의 감소는 무엇 을 의미할 까? 토지개혁과 산업의 변화 시기 먹고 살기 위해 농촌을 떠나 도시로 올라온 아동들의 수가 줄어든 것일까? 먼저 아동복지 시설의 축소와 부랑아의 사회 적 관심의 소멸에 대하여. 이 시기의 아동관련 가장 큰 특징은 취학률의 대폭적인 증가이다. 중학교 입학시험이 폐지되고 중등교육이 보편화되면서 1979년에 중학교 교육이, 1985년에는 고등학교 교육이 진학률 90%를 의미하는 완전 취학을 달성하 였다. 또한 15-19세의 취업자율도 높은 수준으로 올라갔다. 자본주의 이행기 체제

22


에 편입되지 않은 부랑아들이 학교와 산업현장으로 들어간 것이었다. 이 양자의 확 장(뒤에는 양자는 경쟁관계에 놓이며 취학자의 수가 취업자 수를 압도한다)은, 중등 학교에 다니는 것이 점차 당연시되었다는 것, 그리고 폭발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산업시설22)에 그 연령대의 아동들이 다수 포섭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등학교 연령대 인구의 사회적 위치의 애매함이 거의 해소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미래의 노동을 준비하는 단계로서의 아동이라는 현재의 개념이 자리매김 되었다는 것을 의 미한다. 노동력 재생산 영역인 아동의 양육 및 교육 영역 이 안정화(=자본주의화) 되어 부랑아가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제 노동하지 않는 아동의 연령이 실질적으로 13-18세까지 확장되었다. 사회 어디에도 끼이지 못하여 ‘부랑아’로 불리 던 계층이 차츰 소멸과 더불어 아동복지시설 영역 축소도 이어졌다.

3. 부랑인 개념과 범주 형성

1) 1981 단속과 함께 갑자기 나타난 부랑‘인’

부랑인은 1981년부터 국가 정책에 공식적으로 등장하게 된다. 1981년 전두환 정 권은 사회정화위원회를 만들고, 사회정화 차원에서 4월 20일부터 8일간 부랑인에 대한 일제 단속을 실시한다. 일시 대량 단속은 1980년 8월∼12월 동안 이루어진 총 60,755명을 단속한 ‘삼청 5호 작전’ 에 이은 것이었다. 이때 발견된 부랑인의 수 치는 1,850명이다.23) 그 이후 부랑인 시설이 사회복지 관련 통계에서 집계되기 시 작하였으며, 수용자는 정책적으로 ‘부랑인’으로 불리게 되었다. 공식적으로 주무부서 도 치안을 맡은 내무부뿐만 아니라 보건사회복지부도 관여하게 되었다. 적어도 ‘형 식적인’ 복지로의 이전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로서 부랑인 ‘시설’ 정책은 1980년대 들어서 본격화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1980년대 초반 부랑인 단속은, 1960-70년대 와는 다르게, 공개적이고 대대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신문 지상 22) 1966년 19세 이하 취업자 중 “농림․수렵․어업 및 유사종사자의 비율”은 68.4%를 차지 한다. 그러나 1977년에는 “생산종사자 및 운수장비운전자, 기타”가 44.16%를 차지하게 된다(한국통계연감. 각 연도 참조). 23) 당시 단속에 투입된 공무원의 수가 연인원 19,300명인 것을 고려하면 오히려 그다지 많 지 않은 수치라 판단될 수도 있다.

23


의 보도 횟수도 크게 감소하였다.

1980년대 초반 정두환 정권은 정통성 부재를 ‘복지국가구현’이라는 구호로 무마 시키려 하였고, 정권이 사활을 걸고 획득한 1988년 서울올림픽 유치와 함께 장애인 올림픽이 열리게 되어 장애인복지문제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박형진, 2012) 박형신(2012)은 전두환 정권은 복지정치를 전면에 내세운 공포정치를 실시했 다는 데서 박정희 정권과 구분된다고 주장한다. “전두환 정권시절 공포정치로 인한 일반 국민들의 공포와 불안을 완화시키기 위한 조치가 ‘삼청교육’이었다. ‘사회악 일소’라는 명분으로 조직 폭력의 소탕을 전면에 앞세우고 진행된 이 조치는 언론통 제 상황에서 그 실체적 내용과는 무관하게 국민에게 걱정 없는 편안한 삶을 보장한 다는 이미지를 심어주고 정권에 대한 공포를 다른 세력으로 돌리기 위한 것이었다 (박형신, 2012;69). 사회에 편입되지 않는 ‘부랑인’소탕과 수용 역시 같은 맥락에서 기능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들이 부랑인으로서 단속․수용되었을까?24) 1981년 실시한 부랑 인 일제조사에 따르면 성비는 남자가 74.5%, 여성이 25.5%이며, 연령별 분포에서 는 아동이 10%, 나머지는 성인이다. 또한 이중 ‘정상인’은 40%, 나머지는 모두 ‘심 신장애자’라 파악되고 있으며, ‘심신장애자’ 중 절반은 ‘정신질환자’로 보고 있다. 주 거 실태에서는 69%가 일정한 주거가 없다고 응답하였다. 또한 구걸의 사유를 묻는 질문에 ‘생계 수단’이라 답한 사람은 72%였다(보건사회부 1989). 형제복지원은 남 성 약 83%, 여성 약 17%, 성인 약21%, 아동 약19%로 전체 경향성은 유사하지만 남성과 아동연령이 당시 평균보다 높았다.

이 내용이 어느 정도 사실인지는 확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몇 가지 두드러진 점 24) 보건사회부, 1989년, 부랑인시설생활지도원반. 이 지침서는 1987년 형제복지원 사건 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머릿말에는 다음과 같은 언급이 있다. “1987년 초에 커다란 사회문제로 부각된 부랑인시설사건은 시설운영에 있어서 많은 문제와 의미 를 내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사건으로 도출된 문제점에 대해서는 정부와 시설 측 의 많은 노력으로 상당부문 개선된 점도 있으나, 더욱 더 개선해야 할 여지가 많다고 사 료된다.”(3페이지)

24


들이 있다. 먼저 대체적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포함되었다. 남성․여성, 성인․아동, 비장애인․장애인이 구분 없이 단속되었다. 따라서 부랑인의 기준이 엄격하지 않았다 는 점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몇 가지 범주가 강조되었다. 장애인의 비율, 특히 정신질환자의 비중이 높다라는 점이 두드러졌다. 또한 예전과는 다르게 아동 보다는 성인이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는 점도 큰 변화였다. 그리고 이들을 판단 하는 데 ‘구걸’은 중요한 기준이 된 것으로 보인다.

장애인이 강조된 것은, 조사결과에만 나타난 것이 아니었다. 당시 부랑인 일제 조 사 시행 시 보건사회부는 대대적인 단속의 목적으로, "부랑인 중에 각종 장애자는 이를 종류별로 분리하여 각기 전문재활시설에 수용함으로써 보호의 내실을 기하고" (보건사회부, 1982: 356, 보건사회부 1989에서 재인용) 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보 건사회통계연보에는 1982년부터 부랑아 뿐 아니라 부랑인 시설 및 실태를 파악하고 있었는데, 실태 파악 항목으로 ‘정상인’과 각종 장애 종류를 설정하고 있다.

2) 부랑인․장애인 시설의 부흥과 아동 시설의 쇠퇴

이러한 사실들로 미루어 볼 때, 1980년대 이후부터 부랑인은 장애인 항목과 상당 히 중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이러한 경향은 1970년대 중후반부터 보였던 것 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1975년 서울시립갱생원의 실태 자료(서울특별시, 1975: 445)를 보면, 노동 불가능하다고 판단된 사람은 전체 수용자의 63.6%라 조사되었 다. 문제는 ‘실제 그 수치가 타당한가?’ 보다는, 부랑인 시설에 입소해 있는 사람들 중 쟁점이 될 수 있는 항목이 바로 노동 가능성/불가능성이며, 마치 노동 불가능한 사람들을 보호하고 있는 것이 시설의 역할인 것처럼 내보이는 통계를 작성하고 있 다는 것일 것이다.

또한 1987년 형제복지원 사건에서 주요 논쟁이 되었던 것 중 하나는 ‘장애인’이 ‘부랑인’ 시설에 있는 게 타당한 가? 라는 점이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당시 각 논 자들의 입장은 혼동되어 있었다. 당시 국회의원이었던 심완구는 "부랑인시설에 수용

25


을 하지 않아야 될 사람, 즉 지체장애자, 정신박약자 등이 어떻게 부랑인 시설에 수 용되고 있느냐"고 항의하였다(국회사무처, 1987: 24 김성욱, 2005에서 재인용). 그 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들(정신질환자, 정신박약자, 신체장애자 등)은 당연히 부랑인 시설에 들어와야 (김영모 외, 1987: 14, 김성욱, 2005에서 재인용)하며, 그둘 중 부 랑성을 수반하지 않는 건전한 장애자들은 각기 그 전문적 시설에 보호"(국회사무처, 1987: 24 김상현의 말, 김성욱, 2005에서 인용)되어야 한다.“고 주장되기도 하였다. 즉, 노동이 가능한 사람이 부랑인 시설에 있는 것이 옳은 가, 장애인과 같이 ‘보호’ 되어야 하는 사람들이 있는 게 옳은 가라는 게 논점이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 시기에 장애인을 어디에 ‘보호’해야 할 것인가는 과제였던 것이고, 부랑인 시설은 그러한 역할을 일부 담당했다고 볼 수 있다. 이 같은 현상은 최근까지 미신고시설 에 장애인과 경계선의 장애로 인한 미등록 장애인(노숙인의 약70%는 정신질환 등 장애를 가지고 있음), 실직, 빈곤, 알콜릭, 전과 등 다양한 이유로 사회에 편입되지 못한 사람들의 혼합 수용 양상으로 이어져 왔다.

이러한 부랑인과 장애인의 영역 중첩과 더불어, 1980년대 들어서 양 영역의 시설 은 급속도로 팽창하기 시작하였다는 점도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먼저 장애인 시설 을 살펴보면, 1970년대까지 장애아 시설에 집중되었던 것에 반해, 1980년대부터 성 인 장애인 시설, 정신요양 시설이 증가한다. 성인 장애인 시설은 1982년 17개소에 서 1987년 27개소(평균 수용인원 96명)로 증가하며 수용인원은 1,632명에서 2,796 명(평균 수용인원 103명)으로 늘었다. 정신질환자 시설25)은 1982년 26개소, 5,420 명(평균수용인원 208명)에서 1987년 65개소 14,835명(평균 수용인원 228명)으로 증 가하였다. 부랑인 시설은, 1981년 34개소(성인 23개소 아동 11개소)의 8,605명(평 균 수용인원 253명)에서 1986년 16,125명(성인 13,150명, 아동 2,975명, 평균수용 인원 (474명)으로 5년 동안 성인 시설 및 수용자와 시설당 평균수용인원이 크게 늘 어났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예산도 1981년도 국조지원 예산은 622백만원에 불과하 였는데 1987년도 국고예산은 6,157백만원에 달하여 5년 동안 거의 10배에 가까운 예산증가 현상을 나타내었다. 부랑인 시설이 수용인권과 평균수용인원이 여전히 많 25) 정신질환자 시설이 장애인 시설에서 독립되어 파악되기 시작한 것은 1982년부터였다.

26


지만 다른 유형의 시설의 팽창에 비해 증가속도가 정체되었다. 한편 당시 1987당시 평균 수용인원이 474명이었던 점에 비춰볼 때 3500명이 넘는 형제복지원의 수용규 모와 위용을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형제복지원 사건 직후 제정된 「부랑인 선도시설 운영규정」 제3조에는 부랑인 대 상을 규정하고 있다. 이 대상 규정에 따르면 부랑인은 사실상 주거지 없고, 장애 등 으로 노동능력이 없는 사람이 되었다.26) 이것은 형제복지원 사건에서 드러난 갖가 지 문제들에 대한 ‘전문가’ 및 ‘관료’ 들의 결론이었다. 1987년 이후 통계 상 ‘정상 인’의 비율은 1997년까지 5%를 넘지 않았다. 1997년의 경우 ‘정상인’의 비율은 1.4%에 지나지 않았다.

한편, 1960년대 확장 일로였던 아동복지시설 영역은 축소되기 시작하였다. 아래 그래프를 보면, 영아원․육아원 수용자 수는 1960년대 중후반을 기점으로 줄기 시작 하여 1980년대가 되면 1960년대의 절반 수준으로 떨어진다. 성인 부랑인 및 장애 인 영역의 확장과 대비되어 아동복지 시설 영역은 축소되었다.

<그림 1> 영아원․육아원 수용자 현황 (1958~1978) 60,000

수용자수

50,000 40,000 30,000

육아원 영아원

20,000 10,000

76 19

72

70

74 19

19

19

68 19

64

62

60

66 19

19

19

19

58 19

19

56

0

연도

26) 「부랑인선도시설 운영규정」 제3조에는 다음과 같이 부랑인을 규정한다. ① 연고자가 없 거나, 연고자가 있어도 보호할 능력이 없는 65세 이상의 노쇠자, 18세 미만의 아동, 폐 질, 정신질환 또는 심신 장애 등 생활능력이 없는 부랑인으로서 보호기관인 시장, 군수, 구청장이 보호가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자 ② 일정한 주거가 없이 구걸하는 부랑인으로서 본인이 시설에의 보호를 원하고 시장, 군수가 보호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자 ③ 제1항 또 는 제2항에 해당하는 자로서 경찰관서로부터 시설보호의 요청이 있는 자.

27


4. 부랑인 정책의 변화

1) 내무부 훈령 제410호의 위치

한편, 1970년대 중반 보안처분을 정당화한 「사회안전법27)」과 함께 부랑인 관련된 법률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1975년 12월 15일 내무부 업무지침인 내무부 훈령 제410호 「부랑인의 신고, 단속, 수용, 보호와 귀향 조치 및 사후 관리에 관한 업무 지침(이하 내무부 훈령 제410호)」이 내려진 것이다. 이 지침에 의해 최초로 부랑인 에 대한 정의가 내려졌으며 부랑인과 관련된 처우가 공식화되었다. 1970년대 중반 이 되면 ‘부랑아’에 대한 정책적 관심은 줄어들게 되는데, 이러한 시기에 ‘부랑인’ 규정이 내려진 것은 어떻게 보면 아이러니할 수 있다. 또한 반대로 말하자면, 그 이 전의 국가가 부랑아를 사회 문제시 하면서 수많은 시설들을 만들고 단속에 의한 노 동을 강제했음에도 공식적인 규정 없이 이루어진 것도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

이

른바 긴급조치의 시대였던 1975년에 내무부 훈령 규정이 만들어진 이유는 무엇일 까?

1975년 이전에는 부랑인을 단독으로 한 법령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무법적으로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은 곤란하다. 자의성이 폭 넓은 다양한 법들이, 다양한 영역에서 존재하였다. 부랑인을 대상으로 한 가장 일반 적인 법으로 ‘경범죄 처벌법’을 들 수 있다. 경범죄 처벌법은 일제시대의 경찰범처 벌규칙에 근간을 두고 1954년 제정되었다. 이 중 제3조는 “일정한 주거를 가지지 않고 제방에 배회하는 자”를 그 대상으로 하고 있었다.28) 또한 경찰관직무집행법 27) 사회안전법(社會安全法)은 대한민국의 법률(1975. 7. 16. 법률2769호)으로 특정범죄를 다시 범할 위험성을 예방하는 한편 사회복귀를 위한 교육개선이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자 에 대해 보안처분하는 법률이다. 보안처분대상자는 ①형법상의 내란·외환죄 ②군 형법상 의 반란·이적죄 ③국가보안법상의 반국가단체구성죄, 목적수행죄, 자진지원·금품수수죄, 잠입·탈출죄, 찬양·고무죄, 회합·통신죄, 편의제공죄를 지어 금고(禁錮) 이상의 형을 받고 그 집행을 받은 사실이 있는 자들로 규정했다. 보안처분은 검사의 청구에 의해 법무부장 관이 보안처분심의위원회의 의결을 거쳐 결정하고 기간은 2년이며 경신할 수 있다. 그밖 에 보안처분의 종류인 보호관찰·주거제한·보안감호와 보안처분의 면제·행정소송·보안처분 심의위원회·벌칙 등에 관해 규정했다.(위키백과)

28


(1952년 제정)에서는 제4조 보호조치에서 ‘경찰관은 수상한 거동 기타 주위의 사정 을 합리적으로 판단’ ‘응급의 구호를 요한다고 믿을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는 자를 발견하였을 때에는 조속히 경찰관서, 병원 기타 구호기관 등 적당한 장소에 이를 보호하는 조치를 취하여야’한다고 명시하였다.29)이 외에 사안별 법률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다수의 부랑인․깡패가 징용되었던 ‘국토건설단’의 경우에는 국토건설단 설치법이 1961년 12월 시행(1962년 폐지)되었다. 아동의 경우에는 소년원법, 아동 복리법(1961년 제정) 등이 있었다. 또 그 외에, 군대 징집 등의 방식도 활용되었 다.30) 따라서 ‘부랑인’ ‘부랑아’31)를 주요 대상으로 한 단독 법률은 존재하지 않았 으나, 이들이 ‘걸려들 수 있는’ 법률은 꽤 다양한 영역에 포진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법률은 현실에서 어떻게 적용되었는가? 상당히 다방면에 걸쳐 있는 법들 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듯 보이며, 그러한 자의성의 폭이 워낙 넓어 ‘애매하다’라는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즉, 다양한 법들이 충돌하거나, 어떤 구체적인 실효성을 가 지기 보다는, 이들에 대한 단속 및 수용은 어떠한 법률에 근거할 필요도 없이 당연 하게 이루어진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애매함을 설명하기 위한 논리가 ‘보안처분’이었다. 1975년 7월 16일 보안 처분의 성격을 띤 「사회안전법」이 시행되었다. 1975년 1월 법제처는 ‘각국의 보안 처분 제도’라는 보고서에서 ‘보안처분’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특별예방의 목적을 위하여 규정된 형벌 이외의 형법상의 법적 효과를 달성하는 수단”(법제처, 1975: 1)32). 즉, 범죄를 저지른 것에 대한 사법적 처벌은 이미 받았으나 재범의 우려가 있 28) 이 조항은 1989년 개정 당시 삭제되었다. 29) 1953년 제정, 1981년 개정된 내용임. 30) 소년원의 경우 1963년부터 1972년까지 총 230명을 입대시켰으며(법무부, 2004: 307) 무작정 상경자들에 대한 대책으로 정부는 강제징집을 광범위하게 시행하였다. “19살 때 무작정 상경했다가 청량리 근처에서 군기피자 단속에 걸려 강제징집을 당했다.” (신명호 외, 2002, 92: 천성휘 씨 사례 중) 31) 아동복리법 상에서는 부랑아 시설이 포함되어 있었으나, 누가 부랑아인지에 대한 규정 은 없었다. 32) 이승호(1995)는 보안처분의 속성으로 (1) 범죄의 진압, 예방을 목표로 (2) 국가가 행하는 (3) 형벌 이외의 (4) 일체의 강제조치 라 제안하고 있다.

29


는 경우, 혹은 범죄를 저지를 우려가 있어서 예방적 조치가 필요한 경우에 형사적 조치 이외의 다른 수단을 활용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설명이다.

“그 위험의 정도가 현저하여 이를 확실히 예상할 수 있는 경우에 그 위 험을 예방하기 위하여 필요한 감독 내지 조치를 하는 것은 예방경찰의 근 본사명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 논술코저 하는 특수인이란, 불량소년, 소 년걸인 및 부랑인, 외국인, 기타 방범면으로 본 예방경찰적 견지에서 전과 자, 형의 집행유예자, 가석방자, 가출소자 등이다.” “걸인 및 부랑인 중에는 노동의 능력이 있고 또 근로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태만하여 정당 한 생계를 하지 않을뿐더러 왕왕히 범죄행위를 감행(敢行)하므로 경찰은 이 에 대하여 예방적 감시를 요하는 것이다.”(김남영, 1960: 51-52)

여기서 범죄 행위의 우려에 대한 예방적 감시는, 사전(事前)적이기 때문에 그 범 위는 매우 광범위하며 자의적이다. 또한 당시에 강제 수용 뿐 아니라 종종 논란이 되었던 ‘강제노역’과 관련해서도 이를 ‘보안처분’으로 해석이 가능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도 진행되었다.33) 아무래도 법적인 틀을 마련하지 않은 것에 대해 무엇인가 설 명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논리 개발’은 크게 중요하 지는 않아 보인다. 보안처분법의 역사에 대한 연구에서 이승호(1995)는 “윤락여성수 용소나 부랑아(인) 수용소가 현실에 있어서 기능은 하면서도 적극적으로 보안처분의 논리에 의지하지 않은 채 사회의 보이지 않은 부분에 가려져 있었”다고 서술한다. 즉, 부랑인(아)에 대한 대처는 보안처분의 논리에 의지하지 않아도 기능하였다는 것 이다.

이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당시 사회에서 부

33) 예를 들어, 법률연구지 ‘노모스’에서는 “국토건설단 문제와 강제노역의 입법방향”을 1968년 국토건설단 부활에 맞추어 특집으로 다루었는데, 각자의 논자들은 “국토건설단” 과 같은 강제노역이 법률적으로 어떻게 가능한지/불가능한지에 대해서 논의하였다. 이러 한 것은 당시 국가에 의한 “강제노역”은 상상도 못할 일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30


랑아․부랑인이라 치부된 사람들에 대한 단속이나 수용 등에 대해, 다소의 논란거리 가 있었지만, 법적인 근거 없이 시행하더라도 사회적인 저항감이 적었다는 것을 의 미할 수 있다. 특히 정부는 국토건설단이나 근로재건대 등을 공식적인 국가 행사로 열 정도였으니, 이것은 ‘인기 있는’ 정책으로 여겨졌다고도 볼 수 있다. 두번째는, 부랑아․부랑인이 특정한 어떤 사회영역에 포함하지 않은 애매한 계층이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특히 부랑아는 교육․치안․사회복지․가족․노동 등 다양한 영역에 걸쳐 있는 문제계층이었으며, 그 어떤 정책에도 속해 있기 힘든 범주였다. 부랑아에 대한 애매 한 사회적 위치가 독립적인 법적 대상 영역이 아닌 광범위한 정책 대상으로 남아 있게 한 원인으로 보인다. 세번째로는 그러한 정책의 목적도 일괄하여 정의내리기 힘들었다. 부랑아․부랑인 정책의 목적이 단순한 수용도 아니었고, 보호도 아니었으 며, 노동을 통한 자활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1975년 내무부 훈령 제410호는 ‘철 지난 것’이라 할 수도 있다. 또는 지금까지 정권이 집행하였던 정책의 회고적 정의라고도 할 수 있다. 그 제정 시기 및 이유에 대해서는 보다 자료의 발굴이 필요할 것이다. 그만큼 이 내무부 훈 령은 대외적으로도 크게 선전되지 않았다. 이것을 미루어 짐작해보면 1975년 한국 최초로 제정된 공식적인 ‘보안처분법’인 ‘사회안전법’ 의 ‘덤’으로 만들어진 것이라 볼 수도 있다. 그만큼 당시 부랑인 정책은 그 사회적 위치가 중요하지 않게 되었던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2) 형제복지원 사건 이후 부랑인 정책의 전환

이러한 애매함은 1980년대에도 계속되나, 앞서 언급한 대로, 부랑인이라 여겨지 는 사회적 위치가 점차 ‘노동할 능력이 없는 자’로서 변화해가면서, ‘부랑인’을 전담 하는 부처와 그 정책의 성격이 명확해져갔다. 다소간의 편차는 있으나, 1980년대 이후 부랑인 시설은 급팽창하기 시작한 정신질환․장애인 시설과 기능이 중첩되어 가 기 시작했다. 따라서 형제복지원 사건에 주요하게 기준이 된 내무부 훈령 제410호 는 ‘시대에 맞지 않는’ ‘이례적 사건’으로서 다수의 사람들에게 인식되었다. 자본주

31


의 체제로의 이양과 공포정치를 행한 군사정권에서 수용되고 선도되어야 할 부랑인 은 점차 복지정책의 ‘노동능력이 없는 보호대상’과 이미지가 중첩되어 대중들에게 인식되게 된 것이다.

형제복지원 사건을 둘러싼 주요 초점이 ‘부랑인’이 아닌 사람(노동능력이 있는 사 람)이 ‘부랑인 시설’에 ‘강압적’으로 입소해있는 것이 문제라는 정부 관료 및 학자들 의 인식은, 부랑인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변화에 뒷받침되어 있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형제복지원 사건이 발생한 1987년 2월 3일 양지원에서 구타로 한명이 숨지는 사 건이 터지고, 대전 성지원에서도 221명이 2월 28일 집단 탈출하는 사건이 벌어지 자, 부랑인 시설이 강제 수용 및 노역장의 상징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 사건들을 계기로 정부와 여당은 ‘인권신장특위’를 발족시키고 황급히 기존의 내무부 훈령 제 410호를 폐지하고 1987년 5월 4일 보건사회부 훈령 제523호 “부랑인선도시설운영 규정”을 발표하였다. 주 내용은 입․퇴소 절차 개선, 시설수용인원 규모 적정화, 직업 교육의 강화, 시설운영 공익법인화 등이다. 곧이어 “부랑인 선도 시설 종사자 배치 지침”이 마련되었으며, 이 지침에 근거하여 7월부터 부랑인 선도 시설에 상담요원 과 생활지도원이 배치되기 시작하였고, 주무부서도 내무부에서 보건사회부로 변경되 었다.

국가는 이들에 대해 1980년대 초를 제외하면 전국적인 단속이나 노동을 강제하지 않았고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각 부랑인 시설은 국가로부터 별다른 감사를 받지 않았고 오직 일정정도의 보조금만을 받고 수용인 들에 대한 신 상을 보고하였을 뿐이다. 이러한 국가적 방관은 필연적으로 시설의 부패와 비리를 불러일으켰으며, 사적이고 노예적인 노동이 일부 부랑인 시설에서 이루어졌다. 이러 한 방관의 이면에는 공무원․경찰과 시설장들의 은밀한 결탁이 있었다. 그러나 예전 과는 다르게 국가는 적어도 이들을 강제․동원하는 정책을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다. 이제 직업과 주거지가 없는 이들은 가장 사회적 약자이자 빈자들로 강제 노동의 대

32


상이기 보다는 ‘사회적 보호’의 대상으로서 인식되기 시작했다. 즉, 부랑인 시설은 과거와는 다르게 사회의 관심으로부터 아예 멀어져버렸다.

이러한 국가적 방관과 일부 부랑인 시설에서의 노동 착취는 IMF 이전까지 큰 변 화 없이 지속된다. 1997년 양지원 사건이 터지면서 다시 세간의 관심을 끌었고, 복 지시설 민주화 투쟁과 탈시설화 운동이 전개되면서 부랑인 시설에 대한 총체적인 문제제기가 이루어지게 되지만, 본격적인 변화는 사실상 IMF 이후가 될 것이다. IMF 이후의 변화에 대한 부분은 본고의 주제를 넘어서는 것으로 여기서는 다루 지 않는다.

결론 지금까지 부랑인 계열이라 부를 수 있는 범주의 변화를 다른 범주와의 구분을 중 심으로 살펴보았다.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부랑인 계열이 자본주의 이행시기 아동과 중첩되었던 ‘부랑아’에서 노동 무 능력자이며 사회 최저층인 ‘부랑인’으로 변화되었다는 것이다. 초기 부랑아는 사회 경제적 변화과정에서 아직 체제에 순응 또는 적응되지 않은 사람들로 노동력을 갖 추고 있었으며 자발적 노동의지를 갖춘 아동과 성인의 사이에 위치한 ‘부랑아’였으 나 이들이 자본주의 발전과 함께 학교와 산업현장으로 편입되면서 점차 노동력이 없는 ’성인 부랑인‘으로 변화했다는 것이다. 요약하자면 1960-70년대 부랑아 개념 이 부상한 저변에는 단순히 군사적 강압화가 아닌, 자본주의화에 대한 본격적인 발 전의 시작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1980년대에 들어서 부랑인이 보호가 필요한 무능 력한 사회복지 대상으로 변화한 데는 자본주의의 발전 즉, 아동 개념의 완전한 성 립(노동력재생산 과정의 안전화)가 있었다는 것 밝히고자 하였다. 최근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의 증언에서 등장하는 ‘부랑인이 아닌 데…’의 의미는 ‘부랑아’로서 수용된 사람들이 ‘부랑인’의 이미지를 자신에게 투사하기 어려운 현상이 드러난 것일 것이 다.

33


둘째. ‘부랑인’ 계열의 정책도 ‘군대적 강제동원’을 ‘자의적’, ‘공개적’으로 행하였 던 1960-70년대에 반해, 1980년대에 들어서 ‘법률’에 기반 한 ‘강제 보호’와, 강제 노동의 ‘은폐’로 변화하였다는 것이다.34) 이러한 변화들은 물론 다수의 선행연구들 이 고찰하고 있는 ‘자본의 원시적 축적’ 시기의 강제 노동, 푸코를 인용한 연구들에 서 이야기하는 ‘근대적 인간’의 탄생과도 긴밀히 연관된다. 그러나, ‘부랑인’과 기타 의 다른 범주와의 중첩성과 경쟁 관계, 그리고 정책의 이면에 단순히 ‘폭력’ 일변도 가 아니라 다소 공식화․복지 영역으로의 변화를 보였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셋째, ‘형제복지원’ 사건은 이러한 변화를 드러내고 그러한 변화를 더욱 제도화시 켰다. 형제복지원 사건이 터지자 노동능력이 있는 사람(그러니까 부랑인이 아닌 보 통사람)이 수용과 비인간적인 처우를 당한 데 대한 문제제기가 이뤄졌다. 형제복지 원 사건은 ‘노동능력이 없는 인간들에 대한 수용’은 합당하다는 사회적 인식을 드러 낸 사건이기도 했다. 이 같은 인식은 시설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닌 부적합한 사람들이 시설에 수용되어있었다는 인식으로 변화하면서 시설을 세분화하고 시설에 대한 관리감독을 강화할 뿐 시설 보호가 갖는 근본적인 체제와 정책의 책임을 드러 내려는 노력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실제로 형제복지원 사건은 강제노동에 동원되거 나 강제수용을 당했던 사람들을 시설 밖으로 무책임하게 내보낸 채 노동능력이 없 는 사람들을 이름을 바꿔 분리수용하는 형태로 ‘변태’한 채 현재까지 형제복지지원 재단의 이름으로 살아남아 있다. 이곳에 수용된 사람들은 흔히 노동능력이 없는 사 람들로 치부되는 장애인이다. 초기 체제에 편입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한 ‘감금과 수 용의 공간’임이 명확했던 부랑인시설은 ‘보호와 훈련의 공간’으로 변화하여 체제의 한계를 은폐하는 공간으로 기능해 오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과정은 푸코의 ‘광기와 정신착란’의 제 9장 ‘새로운 수용소 탄생’에 나오는 ‘튜크(1784~1857)가 설 계한 가부장제 가정에서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처럼 미성숙하고 불완전한 광인들은 정신적으로 성숙하고 완성된 인간인 간수의 보호와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 구조로

34) 1990년대 이후에도 부랑인 개념은 1997년 IMF를 기점으로 한 ‘실업’ 상태의 노숙인 개 념의 강조, 그리고 다시 노동능력 가능의 경계선에 위치한 노숙인 개념의 재정립, 부랑인 에 대한 노숙인 개념의 승리, 정신장애인․알코올․여성노숙인의 대두 등으로 변화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본고에서는 논하지 않는다.

34


탄생하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형제복지원 사건은 어쩌면 새로운 ‘시설의 탄생’의 계 기로 기능한 것은 아닐까? 형제복지원 과거사를 규명하고 이 사건이 가진 보다 근 본의 문제를 드러내고 해결책을 찾기 위한 오늘의 학술대회와 같은 노력을 통해 새 로운 시설의 탄생을 넘어선 시설의 해체와 탈시설화를 위한 국가와 사회적 노력이 절실하다.

35


[참고문헌] 권순영, 1960, 「한국의 소년범죄」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편. 법학논집 제2집. 김남영, 1960, 警察全書, 榮文社. 김성욱, 2005, 정상화(normalization)담론에 대한 비판적 연구: 푸코의 처벌과 배 제의 양식을 중심으로 중앙대학교 석사학위논문. 김아람, 2011, 「516군정기 사회정책: 아동복지와 부랑아 대책의 성격」 역사와 현 실 제82호: 329-365. 김은경, 2007,『1950년대 가족론과 여성』숙명여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박영자, 1972, 한국 노동청소년교육에 관한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박형진. 2012. 보수정권의 복지정치 : 복지정치의 감정사회학. 『한국의 복지정치』. 학지사. 박형진, 2012. “장애인시설과 복지정치”, 『한국의 복지정치』. 학지사 법무부, 2004, 비행소년통계 2․4․5집 법제처, 1975, 각국의 보안처분 제도 보건사회부, 1989, 부랑인시설생활지도원반 보건사회부, 각 연도 보건사회통계연보 서울특별시, 1975, 시정개요 신명호 외, 2002, 부랑아복지시설 내 노인 인권 현황 조사 국가인권위원회. 이상의, 2009, 「한국전쟁 이후의 노무동원과 노동자생활」 한국사연구 (145): 291-327. 이승호, 1995, 「우리나라 보안처분의 역사적 전개」 형사정책 제7호. 임덕영, 2008, 한국 자본주의 이행시기의 부랑인 및 부랑인 정책에 대한 고찰: Marx 이론을 중심으로 성공회대학교 석사학위논문. 조준현․김성언, 1997, 교도작업의 실태와 개선방안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조희연, 2010, 동원된 근대화: 박정희 개발동원체제의 정치사회적 이중성 후마니 타스. 채만수, 2011, 노동자교양경제학: 정치경제학원론에서 신자유주의 비판까지 노동 사회과학연구소. 통계청, 각 연도 한국통계연감

36


발표 2]

수용정책과 정치적 커넥션

배성인(한신대)

37


발표 3]

형제복지원, 혹은 문화적 과정으로서 야만

정정훈(수유너머N)

39


[발표 3]

형제복지원, 혹은 문화적 과정으로서 야만 -형제복지원을 비롯한 수용시설의 폭력을 통해 본 문화와 사회질서의 문제정정훈 | 수유너머N

1. 섬이란 어디에도 없다

영화 <마파도>(2005)와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2010, 이하 <김복남>)은 모두 그 공간적 배경이 섬이다. 육지로부터 한 참 떨어진 어느 외딴 섬. 그래서 육지의 외부인들이 거의 드나들지 않고 심지어 제대로 된 관공소조차 없는 어떤 섬에서 벌 어지는 이야기를 두 영화는 담고 있다. 이때 섬은 고립의 공간이자 외부세계와의 단절된 공간을 의미한다. 외부의 시선이 가닿지 않는 곳, 아니 외부인들이 그 섬의 존재 자체를 잊고 있는 고립과 단절의 공간. 그래서 그 섬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 지든 밖의 세계로는 알려지는 공간이다.

하지만 이 외딴 곳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는 두 영화에서 전혀 다르다. 코미디 영 화인 <마파도>는 이런 상황을 비틀어 웃음을 유발하고 결말부분에서는 휴머니즘적 감동을 선사하지만,

스릴러 영화인 <김복남>은 그 외딴 곳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삶을 잔혹하게 보여준다. 두 영화는 전혀 다른, 차라리 상반되는 장르에 속한 영화 이다. 하지만 <마파도>의 웃음도, <김복남>의 참혹함도 모두 그 영화의 공간적 특 수성으로부터 비롯된다. 도저히 육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이 시선에 항상 노출되 어 있고 그런 사람들의 관계를 규제하는 법률과 제도, 그리고 도덕과 규범, 문화와 질서가 존재하는(혹은 존재한다고 가정된) 공간, 즉 ‘문명세계’에서는 일어날 법 하 지 않는, 혹은 일어날 수 없는 ‘끔찍한 일들’에 관한 이야기가 펼쳐지는 것이다. 외 부세계로부터의 고립과 단절된 공간에서는 어찌되었던 육지 사람들로서는 상상할

41


수 없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섬이 육지의 외부인 만큼 그곳은 문명의 외 부가 된다.

1998년 MBC 피디수첩은 양지마을이라는 이름의 복지시설의 실태를 고발하는 방 송을 내보냈다. 제목은 <노예의 섬, 양지마을>이었다. 양지마을이 진짜 바다 위에 떠 있는 섬은 아니었다. 양지마을은 충남 연기군 전동면 송성리에 자리 잡은 사회 복지시설로서 ‘천성원’이라는 사회복지법인이 운영하던 시설 가운데 한 곳이었다. 수용된 사람들을 쇠창살이 달린 방에 감금하고, 강제노동을 시키고, 폭행과 고문 등 끔찍한 인권유린을 일삼았던 이곳의 상황을 언론은 ‘섬’이라는 은유를 통해 폭로한 것이다. 아마도 언론이 섬이라는 은유를 사용한 것은 정확히 문명세계로서의 육지 와 그 문명으로부터 단절된 세계로서 섬의 대립을 이용하려 했기 때문일 것이다. 마치 <김복남>의 무대가 되는 ‘무도’라는 섬이 문명 외부의 공간, 문명의 힘이 닿지 않는 공간이고 그래서 그런 끔찍한 일들이 벌어질 수 있었듯이, 양지마을 역시 문 화와 사회질서의 외부에 있기 때문에 참혹한 인권유린이 자행될 수 있었던 섬과 같 은 공간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양지마을은 섬이 아니었다. 다시 말해 양지마을 문명세계, 문화와 사회 질 서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곳, 그 힘이 가닿지 않는 문명의 외부가 아니었다. 그곳에 서 벌어진 인간의 존엄성을 박탈하고 인간을 짐승보다 못한 존재로 만든 폭력은 결 코 우리 사회의 문화와 질서와 무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의 특정한 작동방식 이었다. 이는 결국 <김복남>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곳은 육지로부터 완전히 고립된 섬이 아니라 육지의 문화와 질서와 결탁되어 있던 곳이었고, 육지의 문화와 질서에 의해서 고립된 곳으로 규정된 공간이었다.

양지마을이 섬이 아니었듯이 부랑인이나 장애인들을 감금하여 그들로부터 인간적 삶의 형상을 철저히 박탈한 각종 수용시설들 역시 결코 섬이 아니었다. 소위 사회 복지시설로 불리는 모든 수용소는 문화와 질서 밖에 위치한 공간이 아니라 문화와 질서가 폭력의 형태로 표현된 공간이었다. 그런 섬이란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42


2. 위기 사회의 조성과 타자를 생산하는 주체만들기

이미 많은 논자들이 지적한 바와 같이 형제복지원과 같은 사회복지시설에 ‘부랑 인’들이 집단적으로 수용되게 된 것은 1975년 제정된 내무부 훈령 제410호가 발표 되면서 부터이다. 뒤집어 생각해 보면 이는 그 훈령이 발효되기 이전에는 부랑인들 에 대한 대규모의 조직적 감금이 없었다는 것을 뜻한다. 물론 그 이전에도 부랑인 에 대한 수용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는 부랑인에 대한 어 떤 법제적 정비 없이 보안 처분으로 부랑인을 강제 수용하고 강제 노역에 동원”1)했 었던 전사가 이미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왜 갑자기, ‘훈령’에 불과하지만, 없던 법 제를 정비하여 부랑인들에 대한 대대적 단속을 실시하게 된 것일까? 무엇 때문에 필요에 따라 임의적으로 시행되던 부랑인 단속과 구금이 국가조직에 의해 체계적으 로 집행되기 시작된 것일까?

이 훈령이 제정된 1975년은 익히 알고 있듯이 유신시대, 그 중에서도 ‘긴급조치’ 의 시대이다. 1974년 1월 긴급조치 1호가 발효된 이후, 1975년 4월에는 긴급조치 7호가, 5월에는 긴급조치 9호가 발효되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긴급조치란 “ 국 가의 안전 보장이나 공공의 안녕질서가 중대한 위협을 받거나 재정적·경제적 위기 에 처했을 때 대통령이 국정 전반에 걸쳐서 내리던 특별한 조치”로서 대통령은 이 를 통해 “헌법에 규정되어 있는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잠정적으로 정지”할 수 있었 다. 이미 유신체제라는 전체주의적 ‘헌정체제’를 통하여 국민의 기본권을 대폭 제한 한 박정희는 국가안보를 구실로 긴급조치를 발동하여 유신헌법이 그나마 규정하고 있는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잠정적으로 정지’시켰던 것이다. 이 당시 유신체제에 대해 비판적은 모든 세력은 국가안보에 대한 위협으로 규정되었다. 유신체제는 안 보가 국가의 절대적 과제로 제시된 체제였다.

긴급조치의 시대였던 1975년에 부랑인에 대한 일제 단속과 구금을 위한 법제적 근거가 마련된 것 역시 이런 안보지상주의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임덕영은 “부 1) 김명연, “전두환은 왜 513명 죽어 나간 그곳을 칭찬했나”, <프레시안>, 2013년 5월 9일.

43


랑인은 사회적 불순분자 혹은 범법자이거나, 사회적 불순분자가 위장하기 쉬운 계 층으로 간주되었다. 특히 안보적 측면이 강조되었다”2)고 지적한다. 내무부 훈령 제 410호 제1장 1절은 이 훈령의 목적 가운데 하나가 동 훈령 제1장 3절에서는 “범법 자, 불순분자 등의 활동을 봉쇄하는 것”이 적시된 점과, 이러한 목적의 달성을 위해 “철저한 신원 조사를 통해 범법자 및 불순분자에 대한 확인과정을 거치고 부랑인 신상기록카드를 작성할 것”을 명시한 점 등이 이러한 이 훈령의 안보적 측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3)

물론 이러한 측면은 매우 중요하다. 유신체제가 안보지상주의를 표방했던 만큼 당시의 부랑인 단속에서 안보적 차원은 중요한 계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또한 부 랑인에 대한 대대적인 단속과 구금 조치가 반드시 군사적 의미의 안보만을 위한 것 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 불순분자(혹은 범법자)를 색출하기 위해서 만 부랑인 수용을 목표로 한 행정력 발동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는 말이다. 이 훈령은 불순분자나 범법자를 겨냥하기 이전에 직접적으로 부랑인 자체를 겨냥한 것 이었다.

410호 훈령은 단속 대상으로서의 부랑인을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일정한 주거 가 없이 관광업소, 역, 버스 정류소 등 많은 사람이 모이거나 통행하는 곳과 주택가 를 배회하거나 좌정하여 구걸 또는 물품을 강매함으로써 통행인을 괴롭히는 걸인, 껌팔이, 앵벌이 등 건전한 사회 및 도시 질서를 저해하는 모든 부랑인을 말한다.” (제1장 제2절). 또한 다음과 같은 자들도 단속의 대상이 된다. “걸인, 껌팔이 등 부 랑인 외에 노변 행상, 빈 지게꾼, 성인 껌팔이 등 사회에 나쁜 영향을 주는 자.”(제 1장 제3절 제6호)

즉 부랑인이나 그에 준하는 자들이 단속, 감금되어야 하는 이유는 이들이 결국 ‘건전한 사회 및 도시 질서를 저해’하고 ‘사회에 나쁜 영향’을 주기 때문이라는 것

2) 임덕영, “박정희와 전두환은 왜 ‘부랑인’을 겨냥했나”, <프레시안>, 2013년 6월 12일. 3) 같은 글.

44


이다. 다시 말해, 건전한 사회를 보호하기 위해 이들을 사회로부터 격리시켜야 한다 는 논리를 이 훈령을 담고 있다. 그렇다면 당시 한국사회는 ‘북괴’의 침략위협과 그 ‘북괴’에 동조하는 내부 불순세력의 준동에 의해서도 안보를 위협을 받고 있는 위기 에 처한 사회였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사회질서를 저해하고 사회에 나쁜 영향을 미 치는 자들에 의해 질서가 위협당하는 위기에 처한 사회였다. 국가안보와 사회질서 의 동시적 위기. 그렇기 때문에 국가권력은 더욱 강화되어야 했고 ‘국민’들은 국가 권력에 더욱 복종적이어야 하는 것이다. 유신체제는 대한민국을 극도의 위기에 처 한 사회, 일종의 영구위기사회로 규정했다.

이러한 위기사회를 조성하기 위한 하나의 전략이 바로 부랑인에 대한 단속과 구 금이었다. 그것은 무엇보다 ‘건전한 사회질서’에 포함될 자격이 없는 자들을 식별하 고 규정하는 문제였다. 다시 말해 사회로부터 배제되어야 할 타자를 지목하여 그들 에게 사회가 위기에 처한 원인을 돌리는 전략이었다. 그래서 부랑인은 불순분자와 손쉽게 동일화될 수 있는 존재로 제시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대 중들/시민들이 동원되었다. 간첩신고, 혹은 불순분자 신고만이 대중에게 요구되었던 것이 아니라 부랑인에 대한 신고 역시 동시적으로 요구되었다. 부랑인에 대한 신고 는 지역 책임자 신고와 일반 신고로 나뉘어져 있다.

일반 신고란 일반 시민에 의한 신고를 의미하는 것으로, 훈령 제2장 제 1절에서 는 부랑인 신고 센터를 시군구 민원실에 설치하고, 민원 신고 전화를 활용하도록 하고 있었다. 덧붙여 관내 주민, 공무원, 학생, 상인 등 모든 시민이 부랑인을 발견 시 즉시 신고토록 계도하며, 이를 위해 신고절차와 신고 전화번호가 담긴 유인물을 배부하도록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제2장 제2절에서는 부랑인의 배회가 예상되는 역, 터미널, 지하도, 육교 등과 우범지역에는 지역 관리 책임자 또는 인접한 상점주 인 등을 부랑인 신고 책임자로 지정하고 부랑인 발견 즉시 즉각 신고가 이뤄질 수 있도록 긴밀한 연락체제를 유지하도록 규정되었다. 또한 통반장 주민 조직도 즉시 신고토록 의무화하였다.4) 4) 같은 글. 강조는 인용자의 것.

45


부랑인 단속과정에는 대해 단지 정부의 담당부처나 경찰과 같은 치안기구 뿐만이 아니라 일반시민과 주민조직까지 동원되어야 했던 것이다. 간첩이나 소위 좌경용공 분자와 같이 체제에 대한 중대한 위협을 끼치는 존재가 아닌 부랑인들을 신고하는 데 이러한 동원이 필요했던 것일까? 대대적인 대중동원이라고 까지는 할 수 없지만 시민들에게 부랑인을 신고하도록 적극적으로 계도한 것은 시민들이 ‘건전한 사회질 서를 저해하고 사회에 나쁜 영향을 미치는 자들’을 직접 지목하게 함으로써 자신은 그러한 존재가 아님을 확인하게 하는 효과를 가지고 있었다.

다시 말해, 이러한 동원은 시민들이 자신을 부랑인과 같은 자들과 적극적으로 ‘구 별짓기’(distinction)하도록 만들고 ‘건전한 사회질서’ 안에 포함될 수 없는 자들을 적극적으로 규정하는 주체로 만드는 장치였던 것이다. 이 장치는 시민들로 하여금 사회질서에 포함될 자격이 없는 자들, 즉 배제되어야 하는 타자를 지목하고 규정하 는 주체가 되도록 만들었다. 이는 동시에 신고자인 시민 자신은 그 사회질서 안에 포함될 자격이 있는 존재로 스스로를 인지하고 그 사회질서를 함께 만들어가는 주 체로 재인식하게 되는 효과를 창출하였다.

많은 이들이 지적하듯이 형제복지원을 비롯한 수많은 시설에서 벌어진 참담한 인 권유린에도 불구하고 시설장을 비롯한 가해자들이 비리혐의 정도의 처벌만을 받고 다시 시설을 운영하게 되는 상황에도 시민들, 혹은 대중은 거세게 항의하지 않거나 문제시하지 않는다. 시설에서 인간적 삶을 박탈당한 수용인들은 이 사회의 질서에 포함될 자격이 있다고 인정된 시민들에 의해 잊혀져 버린 것이다. 박래군이 지적하 듯이 수용시설의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 사회에는 ‘침묵의 카르텔’이 형성되어 있다. “광대한 무관심의 바다, 침묵의 바다가 우리 사회에는 존재하고 있고, 그 바다 위에 형제복지원에 수용된 이른바 부랑인들이 있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쉽게 잊힐 수밖 에 없는 존재였다.”5) 과연 이러한 침묵의 카르텔이 시민 스스로가 부랑인을 신고하 도록 만듦으로써 그 시민이 타자를 지목하는 주체로 구성하였던 장치와 무관한 것

5) 한종선, 전규찬, 박래군 지음, 『살아남은 아이 - 우리는 어떻게 공모자가 되었나?』, 문주, 2013, 372쪽.

46


일까? 타자를 직접 규정하는 주체가 됨으로써 사회질서 안에 포함될 자격을 가진 자로 자신을 재인지하게 만들었던 장치와 무관한 것일까?

3. 물신화된 규율과 폭력의 문화적 과정

유신정권 이후 들어선 전두환 정권에서도 부랑인 정책의 기조는 근본적으로 변화 가 없었다. 내무부 410호 훈령은 전두환 정권의 말기인 1987년 2월에서야 폐지된 다. 같은 해 1월 형제복지원의 실태가 세상에 알려진 이후의 일이다. 형제복지원 역 시 기본적으로는 내무부 410호 훈령이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부랑인의 타자화와 배 제의 전략 속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타자로 규정되어 ‘건전한 사회질서’로부터 배제된 자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야만적 폭력’의 지대였다.

그곳에서 행해진 잔혹한 폭력과 끔찍한 인권유린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형제복지 원은 야만이 지배하는 상태였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때 ‘야만 적’이라는 느낌은 정확히 문명적인 것의 반대편에 있어야 하는 어떤 거서에 대한 느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문화와 질서가 존재하는 문명의 공간에서는 도저히 일 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는 느낌에 우리는 ‘야만’이라는 용어를 붙인다. 하지만 과연 형제복지원은 문명과는 무관한, 문명의 바깥에 위치한, 다시 말해 문명화되지 못한 곳이었기에 그러한 폭력이 횡행하는 공간이었을까?

지그문트 바우만은 홀로코스트란 결코 서구 사회의 문명화가 미진해서 일어난 일 이 아니었다고 지적한바 있다. 그에 의하면 홀로코스튼 오히려 그러한 문명의 산물 이다. 이때 홀로코스트를 가능하게 했던 문명이란 합리성에 바탕을 둔 근대의 문화 와 질서이다. 바우만에게 문명화과정이란 일찍이 엘리아스가 지적한 바와 같이 폭 력이 일상생활로부터 제거되는 과정이 아니다. 폭력에 의해 일상이 지배되던 야만 상태로부터 폭력이 제거되고 예절(civility)이 지배하는 문명화된 상태로의 이행 같 은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바우만은 문명화 과정의 의미를 전혀 다르게 파악한다.

47


우리는 문명화 과정이 무엇보다도 폭력의 사용과 전개를 도덕적 고려에서 분리하 는 과정이며 합리성이라고 하는 절실한 요구를 윤리적 규범이나 도덕적 금기의 간 섭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과정임을 입증하는 증거를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대 안적 행위 기준들을 배제하도록 합리성을 장려하는 것과 특히 폭력을 합리적 계산 에 종속시키는 경향이 오래전부터 현대 문명의 구성적 특징으로 인정되어 왔기 때 문에 홀로코스트와 같은 현상들은 문명화 경향의 정당한 결과로 그리고 그것에 상 존하는 잠재성으로 인식되어야 한다.6)

바우만에 따르면 서구의 현대를 지배한 합리성에 있어서는 목적이 설정되면 그 목적을 성취하는 최고의 효율적 수단을 찾아서 실행하는 것만이 중요하다. 그리고 이러한 목적의 실현과정에서 도덕적 고려라는 것은 철저하게 배제된다. 또한 목적 의 성취를 위한 가장 효율적 수단이 폭력이라면 그 폭력은 더 이상 어떤 도덕적 고 려와 무관하게 합리적 원칙에 따라 선택되어 사용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바우 만에게 문명화 과정이란 폭력의 제거 과정이 아니라 폭력과 도덕의 분리 과정이 된 다. 홀로코스트와 같은 극단적 폭력은 문명의 바깥에서 이루어진 것, 혹은 야만으로 의 회귀가 아니라 문명 안에서 이루어진 철저히 문화적인 것, 합리적 질서에 의해 자행된 것이었다.

바우만의 이러한 입론은 형제복지원의 폭력을 이해하는데도 중요한 통찰을 제공 한다. 한종선의 증언에서 잘 드러나고 있듯이 형제복지원의 일상은 빈틈없는 일과 로 짜여 있었고, 철저하게 조직화되어 있었다. 짧게 깍은 머리, 짧게 자른 손톱, 단 정한 복장, 정돈된 생활공간이 요구되었다. 대략 4시 기상에서부터 20시 취침시간 까지 계획된 일정대로 수용자들은 움직여야 했다. 또한 수용자의 질서 잡힌 일상을 관리하기 위한 조직 역시 체계적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원장을 정점으로 한 위계적 조직이었다. 수용자들은 중대, 소대, 조라는 조직으로 관리되었고 각급 단위조직에 는 중대장, 소대장, 조장이라는 책임자들이 있었다. 그리고 이 수용자 조직을 총무 가 관리하였고 총무 위에는 원장이 존재했다. 6) 지그문트 바우만, 정일준 옮김, 『현대성과 홀로코스트』, 새물결, 2013, 63쪽.

48


이러한 질서는 한눈에 알 수 있듯이 군대의 그것이었다. 그리고 그 군사적 질서 는 당시 한국의 군대가 그러했던 것처럼 공식적 제도가 인정하지 않는 폭력을 권력 의 차등적 배분에 따라 행사하는 것을 당연시하는 군사문화를 형제복지원이라는 수 용소 안에서도 작동하게 하였다. 한종선의 증언에는 형제복지원에서 자행된 폭력이 얼마나 군사문화에 입각한 위계적 질서 속에서 이루어졌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부 분이 있다. 어느 추운 겨울 한종선은 얇은 추리닝을 입고 식당 근처에서 배식 시간 을 기다리다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추리닝 소매를 길게 빼서 손을 감추고 있었다. 그런데 그 모습을 원장이 보게 되었다. 이후 상황을 한종선은 이렇게 증언한다.

원장은 바로, “이곳 소대장이 누구야?”라고 고함을 쳤다. 바로 옆 중대장이 27소 대 누구 소대장이라고 귀뜸했다. 원장은 중대장 조인트를 까면서, “애들 관리가 왜 이모양이야? 똑바로 안 해?”라고 했다. 중대장이, “예, 시정하겠습니다!”라고 하자 원장은 천천히 어디로 향했다. 중대장은 소대장이 보이지 않자 조장을 불렀다. 중대 장은 우리 조장의 귀싸대기를 때리며, “나중에 소대장 나에게 오라고 해?”하면서 바로 원장을 따라갔다. 조장은, “이런 니미 씨발.”이런 욕을 하면서 나보고, “소대 가서 대가리 박고 있어!”했다. 난 그날 밥도 먹지 못한 채 소대에서 원산폭격 자세 로 있다가 식사를 하고 온 조장에게 엄청 두들겨 맞았다. 우리 소대원들은 모두가 나 때문에 전체 기합을 받았고, 빳다를 맞았다.7)

이 장면은 군대를 경험한 사람에게라면 낯설지 않을 것이다. 병사가 군대의 규정 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것을 고급 장교가 보게 되면 그 병사가 소속된 중대장이 깨지고, 그러면 중대장은 소대장을 깨고, 소대장은 분대장을 깨고 분대장은 결국 그 병사를 깨는 군대의 위계화된 폭력의 전달구조. 우리가 군대를 결코 문명 밖의 공 간이라고 이해하지 않는다면 형제복지원 역시 문명의 밖에 자리 잡은 공간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한국의 군대, 특히 군사정권 하에서 군대의 문화는 매우 폭력적이었다. 공식 7) 『살아남은 아이』, 44쪽, 45쪽.

49


적 규정이 금지하는 폭력이 규정된 질서의 위계, 즉 계급질서에 의해 임의적으로 자행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는 사실상 군대조직이 그 구성원들을 통제하는 중요한 방식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공식적 제도에 의해 규정되어 있지는 않지만 제도가 특 정한 방식으로 작동하기 위해 암묵적으로 용인됨과 동시에 요청되는 규범이 바로 문화의 또 다른 기능이다. 군사정권 시대의 군대는 흔히 ‘군사문화’를 그러한 암묵 적으로 요구되는 규범으로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와 같은 군사문화는 단지 군대라는 영역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그 것은 학교에서도, 공장에서도,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관철되는 문화였다. 선생과 학생 사이에, 선배와 후배 사이에,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상사와 부하직원 사이에 도 군대와 같은 계급문화가 작동했다. 강력한 권력의 서열구조에서 권력관계 상 우 위를 점한 자가 열위를 점한 자에게 임의적 폭력을 휘두르는 것이 암묵적으로 묵인 되고 요청되는 문화. 그런 의미에서 군사정권 하에서 군대는 일상의 관계와 질서가 조직되는 문화적 모델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군사문화가 위계적 권력구조의 각급에 위치한 이들이 임의적으 로 폭력을 하급자에게 휘두를 수 있는 배경이 된다는 것이 곧 한국적 군사문화가 일상적 폭력으로 발현되는 권력을 각 개인의 자의성에 온전하게 맡겨두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군사문화의 기능은 한국적 발전주의, 즉 개발독재라는 맥락 에서 파악해야 한다. 비록 군사정권이 국가권력을 사용하여 시민의 권리를 억압하 고 노동자를 착취하며 부정축재를 일삼은 것은 사실이지만 또한 군사정권은 국가의 경제력을 제고한다는 분명한 목표 하에서 작동했던 권력형태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 목표는 매우 ‘합리적’으로 관리되었다.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노동자는 열 악한 환경에서 고동도의 노동을 저임금을 받으면서도 생산성을 높이는 방식으로 규 율되어야 했고, 학생들은 지식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습득해야 했으며 시민은 개인 의 권리 주장 보다 국가의 이익을 위해 그것을 유보하는 순종적 존재가 되어야 했 다. 군사정권 하의 한국사회에서는 경제성장이라는 목표를 가장 효율적으로 달성할 수 있는 수단으로 군사적 모델이 채택되었고 그것이 사회의 질서를 관리하는 모델,

50


혹은 암묵적인 문화적 규범이 되었던 것이다.

형제복지원은 한국적 군사문화가 극단적으로 실현된 공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시설에서 군사문화의 ‘쌩얼’이 적나라하게 드러날 수 있었던 것은 그곳에 수용된 이들이 사회질서에 포함될 자격을 박탈당한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폭력 이전에 자격의 박탈이 먼저 있었다. 부랑인들이 ‘건전한 사회질서’를 위협하는 자들로 규정 된 이상 그들은 사회질서 안에 머무를 자격을 잃게 되며 그 사회가 그나마 인정하 던 최소한의 권리마저 박탈당한다. 그들은 모든 법적, 정치적 권리를 박탈당한 단순 한 생명체, 아감벤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벌거벗은 삶’이 되는 것이다. 또한 아 렌트의 말대로 모든 법적, 정치적 권리를 박탈당하여 벌거벗은 삶이 된 자들이 갇 혀있는 수용소에서는 “모든 일이 가능하다.”8) 더 이상 아무런 권리도 없는 존재들 이기에 그들의 권리에 대한 그 어떤 고려나 주저 없이 군사주의적 폭력이 수용자들 에게 행해지게 된다.

이러한 폭력은 철저히 수용자들에 대한 효율적인 통제와 관리라는 목적에 입각해 허용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군사문화에 입각한 폭력의 전달 구조는 시설의 직 원들뿐만이 아니라 수용자들 내부로 이식되어야 했다. 형제복지원은 수용자들을 교 정하여 다시 사회로 복귀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설립된 공간이 아니었다. 그곳의 목 적은 부랑자들에 대한 영구적 격리에 있었다. 수용자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 시설 은 모든 권리를 박탈당한 채 열악한 환경에서 평생을 살아가야 하는 곳이기도 하였 다. 형제복지원에 군사주의적 모델이 필요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수용자들이 자신들의 절망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시설의 권력에 반항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수용자들이 서로를 감시하고 통제하도록 만들 필요가 있었고, 이를 위해서 수용자 들을 군대조직을 모델로 조직했던 것이다.

그것은 수용자들을 분할하여 그 내부에 권력의 위계를 수립하는 방식으로 이루어 졌다. 중대장, 소대장, 조장 등의 직위를 가진 수용자들은 “자기 직위를 이용해 무 8) 한나 아렌트, 이진우, 박미애 옮김, 『전체주의의 기원 2』, 한길사, 2006, 218쪽.

51


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했다.”9) 군사모델에 따라 조직된 체계 속에서 수용자들 역시 철저하게 위계화되며 그 위계에서 상대적으로 상급에 위치한 자들은 하급에 위치한 다른 수용자들에게 폭력을 휘두르며 그 체계의 담지자이자 공모자가 되었다. 이렇 게 수용자들 내부로 깊숙이 침투한 위계적이고 폭력적인 군사문화는 수용자들이 스 스로를 통제하고 관리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시설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것은 매우 효율적인 통제와 관리의 기술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결코 형제복지원의 폭력이 문화와 질서와 무관한 , 문화와 질서의 외부 에 존재하는 야만성으로 규정될 수 없다. 분명 나치 독일의 유태인 수용소와는 차 이가 있지만, 그러나 그에 못지않은 동일성도 있다. 양자는 모두 당시 각 사회의 권 력이 설정한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가장 효율적 방식으로 폭력을 사용했던 것이다. 형제복지원은 군사정권 시절 한국 사회의 문화와 질서의 산물이었다.

4. ‘질서’를 보호해야 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이런 질문이 가능하다. 하지만 군사독재정권은 과거의 유물이 아닌가? 민주화를 통해 대한민국은 그 야만성을 극복하고 이제는 그런 배제와 타자 화는 더 이상 일어날 수 없지 않은가? 다시 말해 형제복지원은 군사정권이 배태한 군사적 폭력성의 산물이고 군사정권을 극복한 지금은 그저 거거의 아픔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형제복지원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활동했던 이들은 하나 같이 형제복지원 은 ‘현재 진행형의 문제’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단지 형제복지원만이 아니라 앞에 서 언급했던 양지마을을 비롯하여 무수히 많은 시설들에서 아직도 인권유린과 비리 가 저질러지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지적한다. 1987년 형제복지원의 실태가 세상 에 알려지게 되고 결국 당시 원장이던 박인근은 기소를 당한다. 하지만 그는 그저 시설 운영과정에서 저지른 비리만이 문제가 되어 징역 2년 6월이라는 형을 받았을 9) 『살아남은 아이』, 44쪽.

52


뿐이다. 그곳에서 저질러진 잔혹한 폭력과 인권유린, 직,간접적 살인, 시체유기 및 시체장사 등은 모두 묻혀버렸다. 현재도 박인근은 ‘사회복지법인 형제복지지원재단’ 을 운영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가벼운 형벌은 형제복지원과 유사한 방식으로 수 용자들의 인권을 유린해온 다른 시설장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가령 양지마을의 경우, 원장 노재중을 기소하면서 검찰은 “강제납치, 폭행, 집단감금, 암매장, 성폭 행, 강제불임수술 같은 인권유린은 기소항목에서 빼버렸거나 축소하였다.”10)

양지마을 사건은 1998년 세상에 알려졌고 원장은 기소되었다. 소위 민주화세력이 정권을 잡은 김대중 정부의 집권기이다. 하지만 그 ‘민주정부’ 하에서도 시설의 반 인권적 폭력은 법에 의해 묻혀버렸다. 형제복지원장 박인근의 경우처럼 양지마을원 장 노재중도 그들이 저지른 잔혹한 폭력으로 인해 처벌받은 것이 아니다. 이들에 대한 처벌에서 법이 확인해 준 것은 그들의 죄는 수용자들에 대해 저지른 반인륜적 폭력이 아니라 금전적 비리문제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국가의 법은 무엇보다 ‘질서’를 유지하고 보호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국가와 법이 내세우는 국민의 인권이니 복리니 하는 명분은 차치하고라도 국가는 스스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사적으로 저질러지는 임의적 폭력을 통제하고 그러한 폭력이 가 시화되었을 때에는 제제를 가할 필요가 있다. 그러한 가시적 통제와 제제를 통해서 국가는 정당성을 확보해야 한다. 법이 천명하고 있는 질서의 보호와 유지는 바로 그와 같은 정당성 확보의 핵심적 기제이다. 그런데 왜 법은 사회질서의 유지라는 원칙, 그 스스로 내세우는 정당성의 근거를 배반하면서도 이런 시설들을 단지 비리 사범 정도로 가볍게 처벌하고 말았을까? 이는 원칙에 대한 배반, 사회질서 유지의 포기를 의미하는 것일까? 아니 차라리 이는 국가와 그 법이 지키려는 사회질서가 진정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나는 대한민국의 법이 수호하려는 근본적 질서의 성격을 규정하는 문제는 그리 복잡한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강고한 기득권 동맹의 이해관계를 위한 10) 같은 책, 359쪽.

53


질서이며 그들이 성공할 수 있었던 원리에 의해 유지되는 질서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타인의 희생과 고통을 얼마든지 활용해도 된다는 원리. 오히려 타인의 고 통과 희생이 커질수록 자신의 이익도 그만큼 커진다는 원리. 이 원리가 만들어낸 질서가 바로 대한민국의 법이 지키고자 하는 질서, 한국사회의 지배질서이다. 승자 독식의 원리는 신자유주의 시기 대한민국의 특징이 아니라 이미 1948년 대한민국 수립이후 일관되게 유지되어 왔던 지배질서의 원리였던 것이다.

이 질서는 결코 추상적인 것이 아니다. 기득권자들은 촘촘한 네트워크를 형성하 고 있다. 자본가, 관료, 정치인, 언론인, 전문가 엘리트들 사이에 형성되어 있는 이 익추구의 네트워크가 바로 이 질서를 규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네트워크는 상층부 의 경우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하층부에서도 형성되어 있고 상층과 하층은 또한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연결망이 한국사회의 기득권연합을 구성하며 그들의 이익추 구의 기회구조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들이 장악하고 있는 법이 지키려는 사회질 서란 바로 기득권 연합의 이익추구를 위한 기회구조이다.

형제복지원이나 양지마을과 같은 시설은 기득권 연합의 이익추구의 기회구조가 얼마나 타인의 희생과 고통에 기초하고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구타, 강제노동, 암매장, 시체장사 등을 통해서라도 시설장은 자신의 이익을 추구했고 그 이익의 일부는 또 다른 권력자들에게로 유입되었으며 그 권력자들은 시설장을 보호 했다. 이러한 시설들에서 벌어진 잔혹이 폭로되었을 때 권력자들은 자신과 시설장 의 공모관계를 감추어야 했고 시설장의 죄는 단순한 금전적 비리로 축소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와 같은 축소를 통하여 이들은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질 서의 본질을 또한 은폐하려 하였다. 타인을 파괴하는 참혹한 폭력을 통해서라도 사 적인 이익을 추구하고 성공을 구가하는 자들이 지배하는 사회의 모습을 비가시화하 려 한 것이다.

법은 그 의미에 대해 다툼이 있는 사실을 하나의 의미로 결정하는 장치이다. 형 제복지원 사건이 터지자 그것의 의미를 두고 사회적 쟁론이 시작되었다. 이 쟁론이

54


어떻게 진행되느냐에 따라서 한국사회의 지배질서가 그 뿌리부터 드러날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법은 이 형제복지원 사건이라는 사실의 의미를 시설장의 개인적 비 리로 결정하여 공식화함으로써 이 쟁론을 종결시켰다. 그럼으로써 지배질서의 그 잔혹한 ‘쌩얼’이 드러날 수 있는 작은 틈 역시 닫혀버렸다. 이렇게 법은 질서를 지 키고 사회를 보호했다. 법이 정의나 인권과 같이 자신이 지킨다고 표명한 질서 배 반하는 방식으로 법은 진정으로 자신이 지키고자 하는 질서를 지켜냈다.

5. 아직도 타는 목마름은 해갈되지 않았다

『현대성과 홀로코스트』에서 바우만은 홀로코스트에 대항하는 길은 결국 민주주의 라고 말하고 있다. 매우 뻔한 결론인 듯 보이지만 이는 형제복지원을 비롯한 수용 시설의 폭력과의 투쟁에서도 결국 관건적인 문제이다. 이러한 민주주의는 물론 일 차적으로 시설에 대한 민주적 감시와 통제를 의미할 것이다. 또한 과거에 저질러진 시설의 인권유린에 대한 진상규명과 법적 처벌을 하는 것도 중요한 문제이다.

하지만 이 글을 통하여 살펴보았듯이 시설의 폭력은 근본적으로 한국 사회의 지 배질서의 문제이며 그로부터 연원하는 문화의 문제이기도 하다. 현재의 사회 체제 는 과거 군부독재시절의 그것과는 다른 형태의 사회체제이다. 신자유주의라고 불리 는 체제가 성립된 것이다. 이 체제 하에서는 사회조직의 기본모델은 더 이상 군사 모델이 아니며 차라리 기업이 그러한 모델로 작동하고 있다. 더불어 그러한 조직운 영을 위해 요청되는 문화역시 군사문화라기 보다는 기업적 경영문화라고 할 수 있 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타인의 고통과 희생을 활용하 는 지배질서의 근본원리는 변화하지 않았다. 그리고 여전히 이 원리에 의하여 많은 사람들이 시설과 유사한 삶의 조건 혹은 환경으로 추방당하고 있다. 민주주의가 작 동해야하는 지점은 바로 이 원리와 질서, 혹은 문화에서부터 이다. 이 수준이 민주 화되지 않는다면 한국사회에서 민주주의는 여전히 아직도 타는 목마름으로 불러야

55


하는 그리움의 대상일 뿐이다. 결국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인의 권리를 박탈하고 그들을 희생시키는 것을 통해 작동하는 사회의 원리를 바꾸어야 한다는 말이다. 우 리는 우리 사회의 조직모델과 그 조직운영을 위한 문화적 차원을 민주화하는 것을 통해 사회질서의 근본원리를 재편하는 것을 고민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설혹 구 체적인 시설들이 민주화되어도 시설과 유사한 또 다른 배제와 폭력의 장치들은 유 지될 것이다.

56


발표 4]

각하의 수용소, 부랑인들의 원장 : 형제복지원 저널리즘을 통한 80년대 대감금 역사/이야기의 재구성

전규찬(한국예술종합학교∙언론연대)

57


[발표 4]

각하의 수용소, 부랑인들의 원장 : 형제복지원 저널리즘1)을 통한 80년대 대감금 역사/이야기의 재구성 전규찬 | 한국예술종합학교∙언론연대

원생들은 단순히 기합을 받는 게 아니라, 죽음을 매일같이 몸으로 느끼고 체험한다. 자신과 자기 주변에서 빈번하게 목격하는 죽음의 공포는 이들을, 아우슈비츠의 ‘걸어 다니는 시체 (이슬람교도: 무젤만/Muselmamn)’와 별반 다를 바 없는 것들로 만든다.2)

1. 들어가며: 형제복지원 사건, 대감금 역사 정리의 포인트

형제복지원은 죽음의 시간, 살인의 공간이었다. 1975년부터 12년간 513명이 그곳 에서 목숨을 읽었다. 한해 평균 40명꼴. 수용 인원이 늘어나면서, 시신의 숫자도 증 가한다. 80년 34명이던 사망자는, 82년 52명, 85년에는 89명으로 늘어난다. 폐쇄 전해인 86년 사망자 수는 95명에 이르렀다. ‘심부전증’과 ‘뇌졸증’이 주된 사망원인 이었다.3) 86년의 경우만 해도, 두 가지 원인으로 죽었다는 원생 수가 무려 68명에 1) 여기서 ‘저널리즘’이란 지배적 이데올로기/신화를 (재)생산하는 주류 미디어 뉴스 제도와 제도화된 보도 활동을 냉소적으로 지시하는 동시에, 보다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의미로, 사실에 기초한 진실 구성과 진상 조형의 정치적 텍스트 창작/문화적 글쓰기 실천을 가리 킨다. 바디우(A. Badiou)의 말을 빌리자면, 표피에서 얼쩡거리면서 진상 파악을 방해하는 전자가 악한 저널리즘이라면, 표면 아래로 뚫고 내려가 심도의 사태를 파악코자 하는 ‘진 실과정(truth-process)’으로서의 후자는 ‘진정한’ 저널리즘이 된다. 지양할 것과 지향할 것의 양가적 의미로서 쓰이는 셈이다. 2) 전규찬(기획), 한종선․전규찬․박래군(2012). 『살아남은 아이』, 서울: 문주. 3) 형제복지원 사건 진실규명을 위한 대책위원회(준). 2013. 10. 『한국의 홀로코스트! 형제 복지원 사건의 진실을 말한다』, 165~172쪽.

59


달했다. 1/3을 넘는 숫자다. 경북 영양군 일월면 출신의 51세 박우철이 뇌졸중으로, 21세인 경남 진해의 홍진영이 심부전증으로 죽었다. 주소 미상의 김영자(7세)의 사 인은 폐혈증으로 기록된다.

반면에 한종선을 비롯한 증인들은 최근, 소대장 등의 폭행과 고문 때문에 죽은 사람도 많았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진상은 여전히 불투명하다. 한편, 서류상으로 보 면, 경남 진주의 최용(남, 38), 서울 종로구의 박명호(남, 53) 등 대부분은 죽은 후 그 시신이 연고자에게 인계된다. 부산 서구의 전동기(남, 22) 등은 ‘부산법위 감정위 원회’에 사체로 넘겨질 것이다. 복지원에서 나온 시신 중 일부가 경남지역 대학병원 등에서 해부용으로 쓰이게 될 텐데, 어떤 시신이 어떻게 상업적으로 유통되었는지 는 정확히 확인되지 않는다. 증인들은 복지원 뒷산에 무덤이 계속해서 늘어났다고 증언한다. 진실은 무엇인가?

이 공포의 시설은 대체 어떤 곳인가? 그 곳에서 어떤 참사가 벌어지고 있었나? 중대한 상황이 진행되고 있었는데, 왜 그때 ‘우리’는 아무도 모르거나 관심 갖지 못 했던가? 당시 신문과 방송은 대체 무엇을 했는가? 왜 그럴 수밖에 없었던가? 원장/ 박인근은 과연 누구이며, 그는 부산시는 물론이고 전두환 정권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었는가? 그는 87년 사건 이후 어찌 되었고, 형제복지원은 또한 어떻게 변했는가? 누구에게 책임을 물을 건가? 군인들을 내세워 광주를 잔혹하게 진압한 전두환은 전 국의 도심에서 무슨 짓을 했는가? 인․민 대중의 삶과 생명에 대해 어떤 음모를 꾸 몄는가?

쿠데타로 개시된 80년대를 우리는 어떤 시간으로 다시 봐야 할 것인가? 6월 항 쟁으로 분절된 1987년, 잠시 드러난 사태의 본질은 무엇이었나? 이 질문에 대한 답 은 이미 나와 있다. 수십 년 간 무시된 채 폐기된 대답들이 최근 들어 공개적으로 유출되기 시작했다. 살아남은 자들이 귀환한다. 야만의 수용소, 한국판 아우슈비츠 의 생존자들이 망실의 늪에서 기어 나오고 있다. 인간 사회로 생환한 한종선의 실 천적 발언이 결정적 계기였다. 그 괴물/어린이는 기록에서 생략되고 기억에서 삭제

60


된 수용소에 관해 진실성의 테스트를 만들어냈다. 재현 불능, 표상 불가의 야만적 시설을 사실적인 글과 현실적인 그림으로 표출시켰다.

책 『살아남은 아이』4)는 역사의 실종자가 그 실종된 역사를 자체 복구하는 귀중한 텍스트다. 그(들)의 고난을 외면해 온 우리에게 가해진 벼락같은 고문이었다. 한종 선은 자기가 누구이고, 형제복지원에는 어떻게 끌려가 어떤 지옥의 고통을 겪었는 지, 그리고 함께 갇힌 누이와 아버지에게는 무슨 악몽이 펼쳐졌는지 성실하게 보고 했다. 역사에서 버려진 익명의 타자가, 바로 자신의 서사를 통해, 정상의 세계를 심 문한다. 나는 누구인가요? 경악한 인권단체를 중심으로 대책위원회(준)가 구성되었 고, 학계와 정치권도 서서히 미동하기 시작했다. 더 많은 생환자/증인들이 얼굴을 보였고, 채 봉합되지 않은 상처와 분노를 드러낸다.

이 글은 더 이상 한종선의 무섭고 낯선, 슬프고 아픈 이야기를 옮기지 않는다. 용 기 있게 나선 증인들의 고발을 경청하겠지만, 그 고난의 육성은 간략히 인용되는 데 그친다. 형제복지원에서 글을 시작하지도 않는다. 대신 본인은 80년의 또 다른 공포, 삼청교육대를 다시 방문할 것이다. 그 흉물의 시설을 돌아보며, 형제복지원과 의 간과된 이음새를 찾아내고자 한다. 두 역사적 시설, 물리적 장치의 공통점/차이 점을 탐문한다. 전두환의 시대, 도심의 ‘노숙자’들은 어떻게 ‘불량배’ 일소를 위한 삼청교육대로 끌려갔으며, 주변의 아이들은 또 어떻게 ‘부랑인’ 보호를 위한 형제복 지원에 입소되었는가?

이와 함께 본인은 대감금의 시대 주류 신문과 방송의 행태, 저널리즘과 드라마의 활동을 비판적으로 되돌아 볼 것이다. 신문 뉴스는 어떻게 삼청교육대의 ‘사회악’ 척결 사업을 선전했고, TV 드라마는 또한 형제복지원 원장/소장의 ‘인간개조’ 프로 그램을 어찌 홍보했는가? 그러면서 국가가 지시․허가․지원한 사설 감금시설을 통한 도시미아, 유아납치, 인신감금의 사태를 어떻게 체계적으로 은폐, 조직적으로 왜곡 시켰는지 살펴본다. 반문(反問)의 반(反) 저널리즘, 디테일의 저널리즘을 통해 80년 4) 전규찬(기획), 한종선․전규찬․박래군(2012). 서울: 문주.

61


대 군(전두환/삼청교육대)․관(내무부/지자체)․민(형제복지원/박인근)의 교호적 커넥션 을 역사/서사로써 드러내 볼 것이다.5)

2. 삼청교육대, 동형의 수용소 감금시설

1980년 전두환 권력은 집단살해, 생계박탈, 인신구속의 체제로서 시작된다. 물리 적 치안 장비/장치를 사회전체로 확대하면서 등장한다. 광주를 진압한 전두환 일당 은 그달 말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설치한다. 무소불위의 ‘국보위’는 네 가지 과제를 내세울 것인데, 그 마지막은 ‘사회악 일소에 의한 국가 규율의 확립’이었다. ‘국가의 안전 보장과 사회 안정을 저해하고, 국민의 혐오와 원성의 대상인 고질적이 고 만성적인 조직․상습 폭력, 치기배, 기타 퇴폐적인 행위자, 그리고 재범의 우려가 있는 자’들이 ‘사회악’으로 규정된다. 도덕적 혐오와 윤리적 퇴폐, 범죄적 원성의 ‘악(惡)’을 상대로 한 사회 대청소의 선포다.

‘국민’ 인구 전체를 ‘일소(一掃)’, 즉 싹쓸이 대상으로 지목한다. 사회를 ‘정화(淨 化)’하라! 사회 부정합 요소들을 색출하고, 법적 일탈 분자들을 사회로부터 축출하 며, 그럼으로써 사회를 범죄적 무균(無菌)의 사회로 유지코자 하는 파시즘 적출의 프로그램이었다. 전체주의적 ‘사회보호’의 계획이다. 광주 봉기 진압을 위해 투입된 군에 일반 시민(사회)을 상대할 광폭의 경찰이 가세한다. 도시인구의 물리적 삭제와 강제적 축출을 위한 합동작전이 그렇게 시작된다. 도시 일정 인구를 상대로 한 환 경미화의 폭력 프로젝트. 행정부처와 치안경찰, 군부대, 지자체의 체계적인 협조 관 계를 통한 조직적 기동전이었다.

8월 4일 계엄포고 13호가 선포된다. 같은 날 국보위는 ‘사회악 일소 특별조치’를 5) 당연하게 전두환 시기의 대감금의 역사는 그 이전 박정희 시대의 파시즘적 ‘국민’ 위생담 론을 이어받고 이후 노태우 정권의 도시환경미화 프로젝트로 지속된다. 그 연속성과 공 통성을 결코 간과될 수 없다. 다만 이 대목은 『살아남은 아이』에서 일정하게 규명된 바 가 있기 때문에, 이 글에서 본인은 수만 명의 인구가 ‘부랑인’ ‘노숙자’로 분류되어 강제 구금되었으며 또한 형제복지원이 본격적인 사설 수용소 감금시설로 강화된 1980부터 87 년까지의 시간, 대감금의 특수한 시기에 초점을 맞춰보는 것이다.

62


발표한다. “사회적 독소를 뿌리 뽑아 명랑하고 정의로운 새 시대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각종 불량배를 위시한 제반 사회악 일소”의 조치를 단행하겠다는 선포였다. “우리 사회 저변의 암적 병인을 제거하지 않으면 명랑하고 정의가 넘치는 복지 사 회를 이룩할 수 없다는 대다수 국민의 여망에” 따른 것이다. “각종 사회악이 우리 나라에서 완전히 소멸될 때까지 군․관․민 협동으로 강력하게 추진될 것이며, 검거된 ‘불량배’들에 대해서는 “일정기간 선도 순화한 후 건전한 애국시민으로 사회에 복귀 할 수 있도록”6) 할 것이다.

‘사회정화위원회’가 설치된다. ‘삼청(三淸)계획 5호’가 수립되고, ‘삼청교육’ 대상 자 검거에 연 인원 80만 명의 군경이 투입될 것이다. 문교부 등 국가 공권력은 물 론이고, 일선 행정조직이 총동원된다. 폭력배는 당연하고, 10대 (여)학생7)과 노인, 대학생 등 총 6만 755명의 인․민이 군경에 의해 대량 검속된다. 그 중 3만 9,742명 은 ‘삼청교육대’로 이름 붙여진 특전사, 공수부대 등 전국 25개 부대에 끌려간다. ‘수련생’들이 온몸에 문신을 잔뜩 그린 조직폭력배거나 연고 없는 노숙자․부랑인이 었을 거라는 추측은 금물.8) 대학생과 청소년, 부녀자, 언론인, 노동자, 광주시민 등 다양한 사람들이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갔다.

‘순화’ 교육을 위해서다. 정충제도 국민학교 현직교사 신분으로, 방안에 들이닥친 사내들에 의해 잡혀간다. 계엄포고에 앞선, 8월 2일의 일이다. 교대 출신인 그가 도 착한 곳은, RNTC 1기생으로 10년 전 여름방학 병영집체훈련을 위해 들어간 그 향 토부대였다. 그곳에는 온갖 인종들이 모여 있을 것이다. 통근버스 기다리다 잡혀온 남자, 포장마차에서 술 먹다 끌려온 사내, 집에서 자다 온 사람, 해수욕장에서 반바 지 차림으로 끌려온 청년 등, 천차만별이고 각양각색이다. 어머니 마중 길에 불량배 롤 몰려 끌려온 10대, 체불 임금 요구하며 농성 중에 사장 멱살을 잡은 노동자, 광 주에서 넘겨진 ‘폭도’도 있다. 6) <1980. 8. 4. <경향신문> ‘국보위의 사회악 일소 특별조치 발표 전문’. 7) 검거자 4명 중 1명이 미성년자였다. 8) 검거자의 35.9퍼센트는 전과가 전혀 없었다. 64.1퍼센트에 이르는 소위 ‘전과자’ 혹은 재 범 우려자도 모두가 극악무도한 폭력배는 아니었다. 배고 고파서 뭔가를 훔쳐 먹다가 잡 힌 적이 있는 노인도 재범 우려가 있는 전과자로 분류될 것이다.

63


“주목!” 희미한 백열등빛 아래로 가물가물 보이는 그는 하사나 중사쯤 되는 계급장을 달고 있었 다. “지금부터 내 말을 잘 들어라. 너희들은 인간쓰레기들이다. 우리 사회는 너희 같은 암적 인 존재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방금 너희들이 옷을 벗었을 때 사회인으로서의 아니, 국 민으로서의 권리는 모두 박탈될 것이다. 그러나 신성하고 성스러운 우리 군이 너희들 같은 인간쓰레기들마저도 재생시킬 의무와 능력을 갖고 있다. 따라서 앞으로 우리가 실시하는 순화교육에…너!” 하늘을 빙빙 들던 솔개가 병아리를 순간적으로 낚아채듯, 군인의 작은 눈이 빛나며 더 욱 가늘어졌다. 공포에 질려 모두가 어리둥절 하는 순간, “이쪽 줄 끝에서 세 번째 놈! 이리나와.” 지목받은 30대 후반의 우람한 사내가 성기를 덜렁거리며 재빨리 달려나갔다. 그러나 무 자비하게 날아오는 군화발을 피할 수는 없었다. 개차반이었다.9)

스스로는 인간이 될 수 없는 ‘쓰레기’. 사회 안녕을 갉아 먹는 비위생적 병균들이 다. 결국 질병처리의 역이 국군(國軍) 그 갱생의 장치에 맡겨진다. 장충제와 같은 교사에서 고관 부인과 춤판을 벌인 제비족 등 별별 종류의 인간 군상에게 재생 교 육, 순화 프로그램의 의무가 강제된다. 빠져나갈 수 없다. 두 가지 선택지가 남는다. 살아남아 인간으로 재생하거나, 혹은 순화되지 못한 채 계속해 갇히는 것. 20대의 숫자가 가장 많겠지만, 장충제와 같은 30대, 훨씬 나이가 많은 노인도 끼어있다. 모 두 성기 덜렁거리며 불려 나가 반죽음이 될 벌거벗은 생명들이었다. 여자도 예외가 아니다.

전원 교육대에서 4주간 ‘삼청(三淸)순화교육’을 받게 될 것이다. 누구든 폭력배로 간주하라는 상부의 지침에 따라서, 군인들은 교육생들을 일단 깡패처럼 사전 제압 한다. 첫날부터 개와 돼지로 굴릴 것이다. 짐승처럼 잔혹하게 취급하는 것이다. 교 육생들은 합법화된 체벌, 가학적인 폭력에 상시적으로 노출된다. ‘악’한 존재로 전 락했기에, 하늘의 심판을 대리한 국가의 징벌을 몸으로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쓰레기의 인간되기는 그토록 험난하다. ‘수련생’들은 이미 ‘선언문’을 썼다. (상부의) 명령과 (조교의) 지시에 절대 복종하며, 선서한 내용을 위반할 시 어떤 처벌도 감수

9) 정충제(1988). 『삼청교육대 악몽의 363일』, 서울: 청사, 71쪽.

64


한다는 게 주된 내용이다.

이 선언 하에 이루어지는 처벌은 결국 명령과 지시, 절대 복종의 규칙을 위반한 악덕에 대한 자율적 징계가 된다. 요컨대 ‘처벌 감수’는 가해자를 익명화하고, 그가 자행하는 조직폭력의 죄과를 은폐한다. 위반과 그에 상응하는 처벌. 전형적인 수용 소의 규칙이다.10) 수련생들은 ‘악’한 쓰레기이기에 교육대로 끌려왔고, 그 안에서 선서 위반의 또 다른 ‘죄’를 지었기에 가해진 체벌을 감수해야 한다. 그러다가 공포 에 질려 정신이 나가고, 폭력에 노출된 신체는 급속히 허물어질 것이다. 인간으로부 터 분열되고 가족으로부터의 분리된, 사회로부터 소외된 수용소에서, 당신은 숫자수인으로 변신한다.

실제로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말라!’는 식사구호11)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내걸린 슬로건을 그대로 빼닮는다. 말했듯이, 잔혹한 폭력과 조직화된 폭행이 일상화된 이 감금의 시설에서 선택지는 간단하다. 맞아죽을 짓을 하거나, 살아남기 위해 죽는 시늉이라도 하는 것이다. 죽음은 수용소에 갇힌 신체들 을 공포로 둘러싸며, 죽임의 위협은 끊임없는 잔혹과 모독 앞 비인간적 굴종과 악 귀적인 비굴을 강제한다. 구두를 핥고, 똥물을 뒤집어쓰며, 피범벅이 될 정도로 알 몸으로 얻어맞는다. 그렇게 인간은 야수로 변모한다. 그래도 죽음은 피할 수 없다.

‘교육’ 기간 중 54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12) 무수하고 무자비한 폭력에 의한 살 인이었다. 가치 없는 생명, 가치 없는 죽음. 가족이나 연고자가 없는 노숙인, 부랑 인이 주로 죽어나갔다. “사망자는 암매장했고, 사망자들의 인사 기록 카드는 모두 10) 물론 교관과 조교들은 죽여도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지침 하에서 폭력을 자행할 것이 다. 폭력적일수록 오히려 상사로부터 칭찬을 받는 군사문화 속에서, 이들은 점차 개별적 으로 느낄 수 있는 ‘양심의 가책’을 잊고 빠르게 폭력의 가해자로 변모해간다. 폭력은 바 로 이러한 점에서 구조적이고 체계적인 것이었으며, 그 점에 있어 정확하게 형제복지원 등의 시설에서 일어난 행태와 닮았다. 11) 정길화․김환균 외(2006). 『우리들의 현대침묵사』, 서울: 해냄. 12) 공식 확인된 수치로서, 그 중 36명은 병사자로 처리되고, 10명만 구타에 의한 사망자로 기록된다. 그 보다 훨씬 많은 부상자들이 발상할 터인데, 이는 1989년 현재 400여 명이 각종 후유증으로 사망한 사실에서 쉽게 확인된다. 이에 대해 피해자 단체 등에서는 사망 자가 최대 1000여명에 이를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65


뽑아서 소각했다.”13) 경기도 파주 1시단 삼청교육 담당 조교의 이 증언은 억압된 증거, 폐쇄된 증언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얼마나 많은 수가 어떻게 죽어갔는지, 우리는, 지금까지도 정확히 모른다. 박노해는 “통퉁 부은 다리를 절뚝으며 아버지뻘 의 노약한 문노인을 돌봐주다 야전삽에 찍혀 나가떨어”진 이군 등의 이름을 시에 남긴다. 잔업 끝난 퇴근길에 팔뚝에 새겨진 문신 하나로 잡혀와 가슴 조이며 기다릴 눈매 선선한 동거하던 약혼녀를 자랑하며 꼭 살아 나가야 한다고 울먹이던 심형은 끝내 차디차게 식어버리고 일제시대 징용도 이보단 덜했다며 손주 같은 군인들에게 얻어맞던 육십고개 송노인도 홧통에 부들부들 뻗어버리고 아무 죄도 없이 전과자라는 이유로 끌려왔다며 고래고래 악쓰던 사십줄 최씨는 끝내 탈영하여 백골봉에 올라 포위한 군인들과 대치하다 분노의 폭발음으로 터져 날아가버렸다.14)

너무한 것 아니냐며 항의하다 개머리판에 찍힌 노동자 김형과 그 외의 허다한 생 명/죽음이 있다. 우리에 갇힌 짐승들의 생애가 그렇게 마감된다. 물론 각하는 이런 집단폐사의 예외상태, 그 바깥에 계신다. 다만 인자하게 수용소 내부 예외적 ‘국민’ 의 체질 개선, 신체 단련을 위해 ‘박달봉’을 하사하실 것이다. 연병장에 내몰린 벌 거벗은 신체들에게 이 몽둥이가 쏟아진다. 훈련에 골병든 몸에 가해진다. 배고픔을 참지 못해 땅에 떨어진 밥알 몇 개를 주워 먹은 자도 예외는 아니다. 모든 게 죄/ 악인 수용소. 최상층 각하로부터 위양된 조직폭력에 노출된 잡인(雜人)들의 준 익사 상태. 형제복지원의 상황과 완벽히 일치한다.

13) 정길화․김환균 외(2006). 『우리들의 현대침묵사』, 서울: 해냄, 40쪽. 1사단에 수용된 수 련생들은 그곳에서 북파공작원 교육을 받기도 했다. 14) 박노해의 서시 ‘삼청 교육대 I’, 장충제의 책 『삼청교육대 악몽의 363일』, 14∼15쪽에서 인용.

66


3. 도시질서 위해요소의 ‘적발’과 ‘민간보호시설’

죽음의 위협은 수용소 안에서 멈추지 않는다. 자살이 퇴소 후에도 그들을 쫒는다. 맥주 외상값 몇 천원 때문에 교육대에 끌려간 전남의 19세 소년(김순호)은 풀려난 후 곧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정신병동에서 계속해 감금의 시간을 보낼 것이다. 지속적인 보호가 필요한 대상은 그대로 남는다. ‘사회보호법’ 을 입안한 국가권력은 ‘보안처분제(保安處分制)’라는 것을 다시 고안해 낸다. 정상적 인 재판 절차 없이, 삼청교육대 수련생들에게 최고 5년까지의 ‘보호감호’ 처분을 내 릴 수 있는 제도다. 사회의 보호와 국가의 안녕을 위해, 수련생들을 임의로 분리․처 분하기 위한 장기적 조치다.

요컨대 비상한 계엄은 해제되겠지만, 이들을 표적으로 한 격리감금의 예외적 조 치는 쉽게 해제되지 않는다. 내륙 오지 경상북도 청송군 진보면 광덕리 산3번지, 그 깊은 산골짝에 요새 같은 청송감호소가 이미 따로 건설되어 있었다. 81년 12월, 전 방 부대에 임시 수용되어 있던 ‘감호생’들이 그곳으로 옮겨진다. ‘감호(監護)’ 즉 감 독․보호 필요 요소들을 상대로 한, 인권․기본권 무시의 별도 수용이다. ‘사회악’ 소 거의 특별 감옥이다. 교도관들조차 기피한 청송보호감호소와 그 존치의 기반이 된 ‘사회보호법’은 무려 24년이 지난 2005년 9월에서야 비로소 재소자들의 거듭된 단 식투쟁 등을 통해 겨우 폐지될 것이다.

당시 대중들이 ‘유언비어’ 등을 통해 쉬쉬대며 옮긴 이 흉흉한 참사는 오랫동안 공식기록에서 은폐된 채 개봉되지 않았다. 2002년에 이르러 의문사진상규명의원회 가 삼청교육은 위법이라는 판정을 내린다. 경계병들의 사격으로 숨진 전정배(당시 30세)에 대해서는, 집단 저항 중 발생한, 위법한 공권력 행사에 의한 죽음으로 인정 한다. 여자 문제로 아버지와 다투다가 주민신고로 파출소에 연행된 그는, ‘주민의 지탄을 받는 자’로 몰려 삼청교육대로 보내졌다. 사건 당일, 그는 구타에 항의해 수 련생 몇몇과 스크럼 짜고 위병소 근처까지 진출했다가 경비병들의 총격을 받아 숨 졌다.15)

67


80년 2월 인천 강화군에서 농사를 짓던 이택승(당시 41세)도 이웃과 다투고 술에 취해 넘어져 은행 유리창을 깨트리는 등 ‘난동’을 부린 죄로 삼청교육대에 끌려갔 다. 항의와 저항, 구타와 ‘특수교육’이 반복되다가 결국 장애를 입고 10개월 만에 ‘퇴소’한다. 그는 ‘삼청피해자동지회’ 대표를 맡아 1989년 전두환을 가혹행위․살인 혐의로 고소했다. 시민단체와 함께 UN인권위에 제소했다. 2001년에는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에 보상금을 신청하기도 한다. 기각되자 그는 소송을 냈고, 마침내 2013년 7월 법원으로부터 원고 승소 판결을 받아낸다.

“개인적인 권리구제 차원을 넘어 권위주의적 통치에 직접 항거해 민주헌정 질서 를 확립하는 데 기여하고 국민의 자유를 회복․신장시키는 활동을 하다 상이를 입은 경우로,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보는 게 타당하다”는 게 법원의 판단이었다.16) 생환 피해자가 법원에 의해 민주화운동으로 인정을 받은 최초의 사례다. 이렇게 삼청교 육대 사건은 봉인을 해제하고 역사/서사 속으로 얼굴을 드러냈다. 의혹이 사실로 밝혀졌고, 소문이 진실로 확인되었다. 2004년 삼청교육대 보상법이 제정된다. 삼년 뒤에는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가 다시 앞서 기술된 내용들을 사실상 인정하 는 보고서를 채택한 바 있다.

80년대 초 삼청교육대에서 벌어진 인권유린의 잔혹사는 이제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역사로 공인을 받았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운용에 비판적인 <동아일보> 조차 “삼청교육대 등 부당한 공권력에 의한 의문사 사건의 실체를 밝혀”내고 “국가 폭력이 지배하던 시대의 원혼을 달”랜 점에 대해서는 시비하지 않는다.17) 역사적 합의. 그렇다면 같은 시기 삼청교육대로 끌려가는 대신에 형제복지원을 포함한 사 설 민간복지시설로 잡혀간 사람들은? 그곳에서 똑같이 죽어간 인간들, 미쳐가고 불 구가 된 생명들에 대해서는? 과연 이들의 과거사는 삼청교육대 훈련생들의 역사와 얼마나 다른 것일까?

15) <한겨레> 2002. 9. 16. ‘의문사위, 삼청교육대 사망 민주화 인정’. 16) <한겨레> 2003. 7. 2. ‘삼청교육대 저항 민주화운동으로 첫 인정’. 17) <동아일보> 2004. 7. 19. ‘제3기 의문사는 달라져야’.

68


삼청교육대의 역사를 ‘국가폭력 및 민주화’의 지식에 기입한 진보진영조차, 같은 시기 동일 사태에 관해 분리된 사고와 구별된 이해의 자세를 취한 측면이 있다. 과 연 그런 구분된 인식은 타당한가? 삼청교육대의 진상을 들여다볼수록, 그 안팎에서 마주치는 것은 형제복지원 사례에서 파악한 진실이다. 양자 간 실체적 공통성, 체질 적 공동성이다. 『살아남은 아이』에서 본인은 ‘민주화’와 ‘산업화’로 이중화된 80년 역사인식의 패러다임을 ‘대감금’의 서사/역사로 해체시키고자 했다. 이제 구체적으 로 80년대 치안스테이트가 취한 ‘정화’와 ‘수용’의 이중 트랙, 군민(軍民) 연계의 실 체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요컨대 삼청교육대와 형제복지원은 겹친다. ‘사회정화’ 프로그램의 차이나는 펼침. 분명한 것은, 1980년대 초 전두환 국가권력이 ‘사회를 보호하라!’는 명분하에 ‘노숙 자’들을 마구 잡아들인 사실이다. 동일한 대상을 타깃으로 한, 동일한 내용의 작전 이었다. ‘정화’, 즉 인간쓰레기 일소의 작전. 비단 ‘노숙자’만 해당되는 게 아니었다. 거리 미화에 방해되는 모든 게 대상이다. 예컨대 80년 8월 서울시는 “거리와 주택 가에서 껌팔이, 앵벌이 등 구걸행위로 시민들에게 혐오감을 주고 도시질서를 어지 럽히고 있는 부랑인 일제단속에 나섰다.”18) 영등포 관내에서만 131명이 ‘적발(摘 發)'된다.

계엄이 포고되고, ‘사회정화위원회’가 설치된 바로 그 때의 일이었다. ‘삼청계획 5 호’에 따라, 연 인원 80만 명의 군․경찰이 교육 대상자 검거에 나섰다. 서울시는 물 론이고 전국 각지의 일선 행정 조직들이 총동원된다. 말했듯이, 1/4의 10대 미성년 자를 포함한, 부녀자와 노인, 대학생 등 6만여 명의 시민이 검거된다. 그 중 약 3만 1천 명 가량은 ‘삼청교육대’에 끌려갔음을 확인했다. 그렇다면 나머지 인원은 어찌 되었을까? 다수가 훈방 조치되어 무사히 귀가했겠지만, 여전히 상당수 인원은 전방 군부대가 아닌 도심 ‘민간’ 복지시설로 사라진 게 아닐까?

언급한 바와 같이, 삼청교육대에 ‘노숙자, 부랑인’들이 많았다. 영등포 관내에서 18) <경향신문> 1980. 8. 7. ‘첫날 131명 적발, 73명 수용 껌팔이 등 단속’.

69


검거된 131명 중 연고자가 없거나 ‘상습적’인 자로 분류된 73명이 수용시설에 입소 된다. 이들이 끌려간 데가 삼청교육대였는지는, 아니면 사설 복지원이었는지는 확인 되지 않는다. 분명 그 중 한 군데였을 것이다. 한편 미성년자는 시립 아동상담소로, 13명의 여자는 부녀보호소로, 그리고 연고자가 없는 노인 등 34명은 시립 갱생원으 로 갔다는 데, 그 또한 최종 행방이 확실치 않다. 확실한 것은, 그들에게 강제된 ‘입소(入所)’라는 공토된 체험이다. 특정 시설에 강제적으로 넣어지는, 의지와 무관 한 피동형의 행위다.

‘적(의)발(견)’은 ‘내용물로서 받아들여짐’이라는 뜻을 지닌 ‘수용:收容)’을 불가피 하게 수반한다. 그리고 사실상의 강제적인 ‘수용’은 자발적인 선택처럼 가장된 ‘입 소’로 그 의미가 위장된다. 도시 질서를 위협하고 ‘우리’ 시민의 감각을 위해하는 (공)적으로 발견된 자들이다. ‘우리’에게서 분리되고, 도시/사회로부터 추출되며, 안 전한 곳에 격리 수용되는 게 맞다. 포로에게는 수용소가 제격이다. 그 수용소가 삼 청교육대였든가 혹은 형제복지원이었던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80년대 계엄의 치 안스테이트 하에서 어차피 군과 관, 관과 민, 민과 군은 따로 떨어지지 않는다.

‘군-관-민 일체’의 전체주의 국가/상황에서, 인간쓰레기들에게 형제복지원과 삼청 교육대는 별개의 시설이 아니었다. 요컨대 거리에서 단속된 인구 중 일부가 삼청교 육대로 끌려갔고 나머지는 사설보호시설에 갇힌다. 중요한 것은, 후자에의 입소 또 한 그 실체적인 내용에 있어 전자와 하등 차이가 없었다는 점이다. 교육대와 복지 원은 ‘퇴폐 일소’, ‘사회 정화’, ‘기강 확립’, ‘정의 구현’을 위한 국가권력통치의 동 형 보충적 프로그램에 불과했다. 다만 삼청교육대가 보다 직접적으로 군 시설과 군 인․군대가 동원된 경우라면, 형제복지원 등의 경우 그 주체는 국가권력에 의해 위임 을 받은 ‘민간’권력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다만 그 실상에 대한 일반의 파악 가능성은 ‘복지’라는 언어에 의해 막힌다. 적발 과 수용, 입소가 다름 아닌 ‘그들’을 위한 사회복지사업, ‘우리’의 이웃돕기정책의 일환으로 뒤바뀐다. 이미 오래전부터의 일이다. 1975년 11월 박정희 정권은 ‘이웃

70


돕기운동 전개요강’이라는 걸 발표한다. 이에 기반 해 ‘인보복지사업(隣保福祉事業)’ 이 민관합작으로 진행된다. “사회복지분야의 재정이 빈약한 현실을 감안할 때 정부 예산의 손이 미치지 못하거나 부족한 분야를 보충하는 데 큰 역할을 해오고 있으며 국민상호간의 상부상조와 인보협동의 정신을 고취, 국민적 단합과 총화를 가져 오”19)기 위해서다.

‘노숙자 일제 단속’이 복지인보사업, 이웃돕기사업으로 탈색한다. 그리고 (민간)복 지시설의 확충이 지속적인 단속사업과 함께 이루어질 것이다. 유신 직후인 1973년 7월 서울시는 구걸 껌팔이, 무작정 상경자 등 노숙 부랑인을 일제 단속해 전원을 시립수용시설에 수용한다.20) 단속 범위와 검거의 인원이 늘어나면서, 민간수용시설 확충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이렇게 유신의 시절부터 이어진 부랑인 단속, 아니 이웃돕기는 1980년대 초 전두환이 취한 ‘정화’ 및 ‘일소’의 조치를 자연스럽게 복지 사업으로 신화화한다. 비상한 조치가 지닌 특수한 위험성에 대한 일반의 감각을 둔 화시킨다.

‘인보복지’라는 이름의 정책은 박정희가 권좌에서 사라져도 끝나지 않는다. 전두 환 정권이 출범하고, 1980년대에 들어서도 지속된다. 삼청교육대의 군사프로그램과 연계된, ‘민간복지사업’이라는 이름의 사설수용 프로젝트로 발전한다. 경제발전에서 소외된 자들에게 자립 자활의 의지를 고착시키거나, 연말에 불우한 이웃들에게 물 품과 성금을 전달하는 데 그치지 않는 사업이다. ‘부랑인수용시설’ 등 사회복지시설 의 확충 강화를 위한 재정적인 지원을 포함한다. 바로 이러한 시설에 껌팔이나 앵 벌이 등 노숙자, 부랑인들이 수용/입소되는 것은, 당연하게 ‘우리’가 ‘그들’에게 제 공할 선의의 ‘인보’적 행위가 된다.

19) <매일경제> 1980. 1. 24. ‘한발 다가서는 복지사회, 부문별 현황과 과제와 점검해 본다 (15), 민간복지사업[1], 인보복지. 20) <동아일보> 1973. 7. 7. ‘노숙자 등 일제단속’.

71


4. 인간개조 선전의 건전한 TV드라마

이렇게 인구 일부의 강제적 대감금을 획책하면서, 80년대의 전두환 정권은 사회 및 일상을 상대로 상시적인 치안 통치를 유지했다. 경찰과 정보기관, 군 등 ‘폭압적 국가정치’들이 24시간 내내 작동되며, 시민생활 전 부문이 통제권에 들어간다. 감시 의 시선 바깥은 존재할 수가 없다. 이와 함께 국가/권력은 지배를 강화할 이데올로 기/문화 통치도 게을리 하지 않는다. 담론을 유통시키고 지식을 매개하며 여론을 제조하는 중요 채널인 신문과 방송, 대중매체에 대해 한층 강화된 단속조치를 취할 것이다. 물론, 유리한 정보의 적극적인 유통과 대항적 의식의 흐름을 최대한 차단을 위해서다.

보다 구체적으로, ‘그들’의 소탕이 ‘우리’의 안전뿐만 아니라 ‘사회’의 질서 그리 고 ‘그들’의 갱생을 위한 최선의 조처라고 선전하면서, 위로부터의 지배를 아래로부 터의 지지로써 강화하기 위함이다. 물리적 폭력을 도덕적 지도력으로 치환한다. 인 간갱생의 교육 목적상 격리가 필요하다고 본 ‘그들’을 두고, 전두환과 ‘대중’ 사이에 의식적 공모․무의식적 결탁을 맺고자 한다. 헤게모니 통치의 전략이다. 전두환 권력 은 이런 통치의 테크닉을 정확히 간파했으며, 그렇기에 대중여론 제조의 핵심 장치 인 신문 방송에 대해 통제와 검열, 포섭의 다양한 기술을 발휘할 것이다.

1981년 1월, 제5공화국은 언론기본법 시행에 관해 필요한 사항을 정한 ‘언론기본 법시행령’을 의결한다. 그 주요 내용 중 하나가 TV방송과 관련하여, 교양의 편성 비율을 40%로 높이고 오락의 비중은 20% 이내로 줄이도록 한 것이었다. 이에 맞 춰 편성의 개편이 이루어질 것인데, 81년 가을 KBS는 교양 비중을 50%로 잡고 2TV를 통한 오락은 20%로 정한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편성의 내용적 측면인데, KBS측은 가을프로의 편성방침이 “▲국가발전 ▲ 좋은 프로그램을 통한 시청자의 의식구조개선 ▲ 생산적이고 건전한 오락 등에 두었다”21)고 밝히고 있다.

21) <동아일보> 1981. 8. 21. ‘TV 9월 프로 개편’.

72


‘정의 사회’를 내세워 사회 기강을 확립하고 국민 총화를 요구하며 국가 발전을 강조하던 파시즘적 사회 분위기 하 일종의 소프트파워 단속조치다. 사회 대상의 강 압 정책은 언론 상대의 강경 제도와 연동된다. 청송감호소로 이송된 인원을 제외하 고는 삼청교육대의 감금이 끝났지만 형제복지원을 비롯한 ‘민간복지시설’에의 수용 은 계속되고 있을 때, 바로 그때 텔레비전도 이렇듯 ‘의식구조개선’와 ‘국가발전’의 섬뜩한 구호를 내세우고 있었다. 전두환이 81년 4월 10일 국무총리에게 다음과 같 이 특별 지시를 하달할 때의 일이다. 총리 귀하 별첨 정보보고서와 같이 근간 신체장애자 구걸 행각이 늘어나고 있는바 실태 파악을 하여 관계부처 협조 하에 일절 단속 보호 조치하고 대책과 결과를 보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각하가 노숙자 일절단속 격리조치를 명령할 때, 방송은 ‘건전한 오락’으로 응답한 다.

도시 부랑인, 노숙자 청소가 그런 방송의 협조 하에 이루어진다. 텔레비전 오락이 라는 부문도 예외는 아니다. 치안의 스테이트를 은폐할 용도로 쓰이지만, 국가권력 이 원하는 건강사회/사회질서 전파의 수단으로도 적극 이용된다. 감시와 처벌, 배제 와 구금을 합리화하는 의미와 감각의 구축 효과다. 그 양가적인 이유로, 전두환 정 권의 관심은 비단 보도 다큐뿐만 아니라 드라마 등 오락 프로그램에도 지대한 관심 을 피력할 것이다. 전두환이 위와 같은 명령을 하달하던 바로 그 시기에, TV오락에 대한 정권의 관심은 다음과 같이 구체화되고 있었다.

11월 당시 여당인 민정당 정책연구소가 중앙당사에서 긴급 정책간담회를 갖는다. 텔레비전 오락 프로그램의 ‘개선’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서다. “최근 칼러TV방영 이 후 코미디 드라마 쇼 등 오락프로의 건정성 여부가 문제되고 있음을 감안”, 그 정 책적 ‘개선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모인 것이다. 모임에는 서강대 최창섭,22) 중앙대 22) 그는 1980년 10월 크리스천아카데미에서 열린 ‘한국 대중문화의 이상과 현실’ 토론회에 서, 80년 들어 “외래문화가 끝을 맺는 새 시대에 정립될 동일성 문화를 주체성 있게 정 립하는 일이 미디어정책수립의 대명제가 돼야 한다”면서, “소비향락적인 분위기를 조성

73


이정춘 교수 등도 참석한다. 이 자리에서 이 교수는 “TV 드라마의 발전을 위해 드 라마 수를 과감히 줄이고 이의 방영도 인기 영합에만 치우친 장기 연속을 지양, 주 제가 뚜렷한 단기 연속으로 드라마의 패턴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23)한다.

드라마의 건성성이 부각된다. 이런 분위기를 반영해서 일까, 다음 해 MBC-TV는 추계 개편을 맞이해 의욕적인 <수요드라마>를 편성한다. 수요일 밤 9시 55분부터 시작되는, 장장 두 시간짜리의 대형 드라마다. KBS-1TV의 <TV문학관>에 대응하기 위한 편성이었다. 더욱 그럴듯한 명분은, 오락성에 치중한 드라마를 줄이고 대신에 ‘작품성’ 뚜렷한 드라마를 늘여, 명실상부 공영방송의 제 역할을 다한다는 것이다. 방송이 시작된지 얼마 되지 않아 <동아일보>와 같은 신문매체로부터, “종래의 상업 성 프로그램에서 공영방송으로서의 성격을 심어주는데 상당히 기여를 하는 것 같 다”24)는 평을 듣는다.

이 드라마는 어떠한 의미를 띄었을까? 프로그램이 얼마나 지속되었고 어느 정도 의 인기를 누렸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 드라마가 지녔을 사회적인 파급 효 과나 문화적인 수용 의미를 읽어내는 것도 쉽지가 않다. 그런데 주목할 만한 것은, 이 새롭게 기획·편성된 드라마가 취하는 형식이다. 다루고 있는 소재이고, 또한 전 달코자 하는 주제다. 가령 한 에피소드는 쪽방촌의 빈민가에 뛰어들어 빈민 구제에 나섰다가 “인간적인 회의와 절망에 빠”지게 되지만 “신앙의 힘으로 간신히 어려움 을 이겨”낸, “신학대학을 갓 나온 젊은 전도사 진홍에 관해 이야기한다. 적극적인 전도의 결과 인간구제를 위한 방향을 찾던 진홍은 화성군 우전면 이화리의 간척 사업에 뛰어들어 그곳에서 활빈교회를 세우고….25)

70년대 청계천 일대에서의 빈민사목 활동으로 유명한 김진홍 목사를 실화로 다루 하는 역기능을 시정하고 제반 사회 문제를 흥미본위로 에피소드화, 문제의 심각성을 해 소시키는 현상은 지양돼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1980. 10. 31. <경향신문> ‘한국대중 문화의 이상’, 최창섭교수 주제 강연내용, 건전바탕 질서확립 기여해야‘. 23) <경향신문> 1981. 11. 7. ‘전문가 의견 들어 TV오락 프로 개선 민정 정책연 간담회’. 24) <동아일보> 1982. 11. 9. ‘문제의식 뚜렷한 수요드라마’. 25) <동아일보> 1982. 12. 1. ‘수요드라마 <MBC밤9.55>’.

74


고 있는 것이다. 실화(實話) 드라마, 다큐멘터리 드라마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실제의 현실을 다룬 이 드라마가 쪽방촌의 인간들을 주인공으로 하거나 빈민가의 빈한한 삶에 천착한 것이 아니라, 바로 그런 군상과 현실 속에서 조차 꿋꿋이 ‘신앙의 힘’으로 ‘어려움을 이겨’ 나가는 영웅에 관해 말하고자 한다는 점이다. 인간적 사목(司牧) 지도자에 관한, 인간 승리의 주제를 내세운, 인간주의적 드라마인 셈이다. 결국 비참의 대중 구제에 나선 인간적 주인공의 영웅적 서사가 내용이 된다.

그 이전 11월 3일에 방송된 제2회 ‘탄생’편도 정확하게 그러하다. 리얼리티를 강 조하고 리얼리티의 성실한 재현을 내세운 드라마는 또 다른 인간 구제의 사역(使 役), 인간 보호의 교목(校牧)을 찾아낸다. 부산 지역에서, 더욱 험악한 조건의 인간 쓰레기들을 상대로 노역 중인 인물이다. 그렇다. 이 2시간짜리 대형 드라마는 다름 아닌 부산시 북구 주례동에 있는 형제복지원을 다룬다. ‘부설 부랑아임시보호소’가 그 소재다. 아니다. 주인공은 따로 있다. 드라마가 극적으로 전하는 것은, 국가/사 회를 대신하여 부랑인 보호의 역을 자임하고 나선 아버지 박인근의 인간의지, 목회 자 원장의 인간승리일 것이다.

‘탄생’이라는 타이틀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드라마는 인간의 재탄생에 관한 것이 다. 인간갱생의 시설, 그 시설을 통한 인간으로의 재생의 극화다. 애당초 인간성이 비틀어져 있는, 그렇기 때문에 자신들을 보호해 주기 위해 마련된 시설로부터 계속 해서 탈출을 시도하는 밑바닥 인생에 관한 이야기다. 드라마는 바로 그런 뒤틀린 삶들을, 그래도 계속해서 따뜻하게 보듬어주고 인간적으로 보호해주는 형제복지원이 라는 ‘인간애’적 시설을 이야기로 꾸며낸다. 전운과 김무생, 길용호, 김윤경, 엄유신, 박은수, 이계인 등이 출연한다. <경향신문>의 소개 기사를 읽어보도록 하자. 탈출을 끊임없이 시도하며 인간애를 거부하는 비틀어진 밑바닥 인생의 실상을 작가 심영식 씨와 연출의 이병훈씨가 현지취재를 통해 실감나게 구성한 이 작품은 등장인물도 대부분 그들의 실명을 사용했다. 연출자 이씨와 총무역을 맡은 임문수씨는 리얼리티를 살리기 위 해 그곳 원생들과 이틀밤을 함께 생활하기도 했다.

75


“비틀어진 밑바닥 인생”들이기에 그곳에 있을 수밖에 없는 존재들. ‘인간애’를 거 부한 짐승들이기에 우리에서 계속해서 도망치고자 할 따름인 무리들. 그런 ‘그들’이 드라마의 주인공이다. 탈주하려던 ‘그들’, 회개하고 시설에 남아 구원을 받게 되는 ‘그들’, 결국은 인간으로 갱생해야 할 ‘그들’이 주인공이다. 그러면서 드라마는 ‘그 들’의 구제된 삶을 통해 궁극적으로는 바로 그 재탄생의 기회를 제공한 인자한 아 버지의 천국, 자비로운 천국의 아버지를 또렷이 내세운다. “인간애를 거부하는” 타 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전념하는 형제복지원 박인근 원장, 바로 그의 위대한 인간주 의를 극화한다.

요컨대 형제복지원에 수용된 부랑인 ‘그들’의 묘사는 바로 이 시설을 통해 부랑인 ‘그들’을 ‘선도’하는 원장/목자의 선행을 기술키 위한 극적 수식으로 변치된다. 드라 마는 그곳에 ‘그들’이 어떻게 수용·감금되었는지에 전혀 관심 갖지 않는다. ‘그들’이 왜 끊임없이 도주를 시도하는지, 그 환경과 이유에 관해서도 다루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과연 어떠한 존재인가? 복지원이란 누구에 의한, 무엇을 위한 시설인가? 이러한 것에 관해 텔레비전은 무엇을 말할 수 있고, 뉴스는 어떻게 말을 해 왔으며, 드라마는 또 어떤 다른 현실을 보여주어야 할 것인가?

5. 사회악 척결 홍보의 국정뉴스

이러한 질문은 한 마디로 제작자들의 공통감각(common sense) 즉 상식 바깥에 있었다. ‘수용’과 ‘감금’과 같은 것은 당시의 연출자에게서 전혀 기대하기 힘든, 일 종의 구성 가능성의 역(域) 외적 문제의식(problematic)이었다. 사유 불가능하고 상 상 불가능한 외부적 현실, 현실의 외부였다. 결국 드라마는 (형제)복지원이라는 인 간적인 공간에서 벌어지는, 불량한 ‘그들’과 선의의 ‘그(원장/박인근)’ 사이에서 벌 어지는, 인간적인 드라마로 전락한다. 그 현실과 결코 무관할 수 없는 국가/권력의 문제가 쑥 빠지고, 마찬가지로 사건과 떨어질 수 없는 ‘우리’의 삶이 사건으로부터 분리된다.

76


그러한 점에서, “주제설정에 목적성이 강했지만 이 드라마가 사회문제를 고발하 고 새로운 문제의식을 일깨운다는 성격을 분명히 했다”26)는 평가는 명백하게 거짓 말이다. 드라마의 성격적 본질을 심대하게 왜곡한다. <탄생>이 수행한 이데올로기적 기능, 신화적 효과를 그럴듯하지만 전혀 실재와 일치하지 않은 유사 비평적 언어로 은폐한다. 형제복지원 선전미화의 목적성이 뚜렷하다. 감금 폭력의 사회문제를 고발 하기는커녕, 사회적으로 낙인찍히고 배제되며 구금된 타자를 인간으로 개재할 국가 인구통치의 문제의식을 오히려 강조한다. 그런 점에서 치안스테이트의 전형적 드라 마라고 하는 게 맞았다.

1980년대 초 공영방송과 TV드라마, 드라마 연출자는 이렇듯 전두환 군사정권의 일정 인구 소각 프로그램에 성실하게 부역하고 있었다. 말하지 않음으로써, 혹은 거 꾸로 노골적으로 말함으로써, 텔레비전 오락은 사회 정화에 가담하고 인구 일부의 소각에 동참했다. 개별적 의도와 상관없이, 구조적으로 자행된 범죄였다. 그런데 이 런 잣대에서 보자면, 뉴스 보도의 반인간적․반사회적 범행이 더욱 대담했다. 신문과 방송 가릴 것 없이, 1980년대의 뉴스는 정권의 이데올로기를 수사적으로 번역하고 있었다. 사회 정화와 수용소 감금과 관련해서도, 뉴스 장르는 훨씬 노골적인 선전의 목청을 높일 것이다.

텔레비전 뉴스가 어떻게 이 선전 프로젝트에 가담했는지는, ‘땡전뉴스’의 역사성 으로 이미 입증이 되었다. 주시청시간대 TV뉴스는 물론이고 각종 대담과 다큐멘터 리, 특집 방송이 사회 기강, 안보 질서, 국민 총화의 보도를 쏟아냈다. 노숙자 등 일정 인구를 시청자들로부터 분리수거해야 하는 도덕적 당위가 이데올로기적으로 구성된다. 삼청교육대를 통한 인간개조가 얼마나 훌륭하며, 또한 이를 고안한 정권 은 얼마나 위대한 권력인지를 특별 편성을 통해 찬양한다. 부랑자 소탕에 의한 사 회 안전 보장의 논리를 매일 같이 뉴스로써 쏟아낼 것이다.

신문도 마찬가지다. ‘사회 정화’ 차원에서 불량배와 노숙자 단속이 본격적으로 이 26) <동아일보> 1982. 11. 9. ‘문제의식 뚜렷한 수요드라마’.

77


루어진 1980년 8월 13일, 중앙 일간지들은 일제히 ‘순화교육 현장 르포’를 사회면 머리기사로 게재한다. “땀을 배우는 인간교육장”<조선일보>, “검은 과거 씻는 참회 의 땀방울”<동아일보>, “그늘진 과거를 땀으로 씻어낸다”<중앙일보>, “얼룩진 과거 를 땀으로 씻는다”<한국일보>, “땀으로 과거를 씻는다” <서울신문>. 모두가 “검은 과거”, “그늘진 과거”, “얼룩진 과거”를 씻어내고 ‘새사람’이 되기 위해 ”인간교육 “에 힘쓰는 수련생들의 땀방울을 강조한다. “참회의 눈물,” “폭염도 무색”한 “새 출 발의 의지”27)다.

“주먹하나로 숱한 시민들을 괴롭혀 온 어제의 불량배들이 선량한 시민으로 새출 발”28)하고 있는 ‘인간재생’ 현장의 리포트들이다. 신문은 경북 포항에서 온 19세의 이 모군은 ‘멀고 험한 참사람의 길’을 치닫고 있는 자신의 심경을 다음과 같이 옮긴 다. 저에겐 아주 눈물이 없는 줄 알았어요. 그러나 이곳에 들어온 후 뉘우침의 눈물이 값비싼 것임을 느꼈어요. 악으로 얼룩진 과거를 씻고 새 사람이 돼 돌아가 부모에게 효도하렵니 다.29)

“사회 구석구석에서 선량한 국민들을 괴롭혀 온 깡패 불량배들을 모아 이들이 새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정신 및 육체 훈련을 시키고 있는 순화교육현장”의 “빡빡머리 에 군복차림인 이들의 모자와 상의에는 과거의 잘못을 증명이나 하듯 일련번호가 적혀”30) 있을 것이다. 공포와 불안의 수용소는 빛과 안정을 찾는 인간재생의 교육 장이 된다.

군인들의 ‘인간적’인 노력도 빛난다. “교육생들을 받아들일 때 장교들은 ‘도망’과 ‘선동’을 걱정하며 초긴장 상태에 있었지만, 부대장의 ‘새사람을 만들겠다’는 방침에 따라 기간병이 막사를 이들에게 내주고 의료진과 인근보건소의 협조로 교육생들의

27) 28) 29) 30)

<경향신문> <경향신문> <경향신문> <동아일보>

1980. 1980. 1980. 1980.

8. 8. 8. 8.

13. 13. 13. 13.

‘불량배 교육 현장 새 출발의 의지, 폭염도 무색’. ‘불량배 교육 현장 새 출발의 의지, 폭염도 무색’. ‘불량배 교육 현장 새 출발의 의지, 폭염도 무색’. ‘검은 과거 씻는 참회의 땀방울…인간재생’.

78


성병을 치료해 주는 등의 인간적인 접근을 시도하자 예상외로 교육이 순조로이 진 행”31)된 미담이 쏟아진다. “전 장병의 따뜻한 우정”, “죄인들의 열등감을 씻어주기” 위한 “최대한의 배려”가 강조된다.32) “반성문을 갖고 나가 죽을 때까지 보관하면서 생활의 지표로 삼겠다”는 원생의 결의는, “지도요원들도 함께 눈물을 흘리며 수련 생들을 위로하기도 한다”33)는 장교의 선행과 접합된다.

그렇게 특정 인구를 표적으로 한 강제 인신구속은 일반 ‘국민’을 상대로 한 선전 담론과 병행된다. 후자의 생산․유출을 통해 전자의 조치를 정당화하고, 이에 대한 일반 대중들의 동의와 지지를 유도하기 위한 여론공작의 문화정치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여론통제, 그리고 이에 부합한 선전매체의 이데올로기 뉴스 생산은 이후에 도 계속된다. 사회정화위원회위원장 이춘구)가 80년 12월 27일부터 10일 동안 이른 바 ‘사회악 사범 제4차 일제 단속’에 나서, 1,353명을 검거한다. <동아일보>를 비롯 한 주류매체들은 국가/기관의 목소리를 일방적으로 확대 전파 재생산하는 기능을 성실히 수행한다.

“사회악과 비리가 완전히 소탕될 때까지 사회악 사범을 계속 집중 단속할 것이며 순화교육을 받은 뒤에도 재범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사회보호법에 따라 7∼10년간 격리 수용, 엄격하게 다스릴 방침”34)이라는 정부의 발표를 충실하게 옮긴다. 국가권 력의 의사를 배달하는 데서 나아가, 보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자세로 사회악 구축 을 통한 ‘명랑사회건설’을 내세우기도 한다. “불량배와 폭력배․공갈범 등은 서민생활 을 불안하게 할 뿐 아니라 명랑하고 안정된 사회건설을 저해하는 가장 위험한 독버 섯”35)이라고 지목한다. 독자기고의 형식으로 ‘사회악’ 일소의 분위기 조성에 저극 동조한다.

31) 32) 33) 34) 35)

<조선일보> <한국일보> <동아일보> <동아일보> <매일경제>

1980. 1980. 1980. 1981. 1981.

8. 8. 8. 1. 1.

. ‘땀을 배우는 인간교육장’. . ‘얼룩진 과거를 땀으로 씻는다’. 13. ‘검은 과거 씻는 참회의 땀방울…인간재생’. 8. ‘사회악 사범 천153명 검거 4차단속’. 27. ‘밝은 사회와 청백리’.

79


지난해에 당국에서 사회정화의 일환으로 깡패 치기배 등 불량배들을 일제히 검거하여 순화 교육을 받게 하였음을 신문 보도나 TV의 뉴스를 통해 똑똑히 보아왔다. 그러나 이들을 일 제 검거하고 엄하게 다스림으로써 사회정화에 어느 정도의 효과는 있을 수 있으나 이들을 단시일 내에 일소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일 것이며 그렇게 기대할 수도 없을 것이다.…사회 악을 일소하기 나기기 위하여 법의 제정이나 그 운동을 통한 엄한 처벌도 중요하겠고 일시 적인 구호나 단속도 필요하겠지만 이러한 법이나 제도를 운용하는 것도 사람이요, 그 운동 의 대상이 되는 것도 사람인만큼, 우리는 국민들의 의식구조를 고쳐나가고 민도를 높여가 는데 장기적으로 꾸준한 노력을 해나가야 할 것이다.36)

‘사회정화’는 더 이상 ‘불량배 소탕’에 그치지 않는다. ‘사회악 일소’는 일부 사회 적 불량요소들을 상대로 한 단기적인 ‘순화교육’으로 절대 충분치 않다. 전 ‘국민’의 ‘의식구조’를 뜯어고치는 장기적인 재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비로소 가능해 질 것이 다. 이렇듯 악한 ‘그들’을 선한 ‘우리’로부터 분할시키던 담론의 구조는, ‘그들’에 비 춰 ‘우리’를 반성하고 또한 ‘우리’안의 ‘악성’을 뼈아프게 도려내는 전체주의적 도덕 갱신의 담론으로 변모한다. ‘의식혁명’의 프로파간다로 확대 심화된다. “뿌리내린 의 식혁명 사회정화운동 1년”37)과 같은 타이틀의 논설, “새 전기 맞은 사회정화운동 국민의식혁명으로 뿌리내려”38)와 같은 제목의 해설이 쏟아진다.

이처럼 전두환 정권 초기 신문들은 ‘국민의식혁명’의 거창한 슬로건을 내세우면서 국가권력의 파시스트적인 ‘사회정화운동’을 지지하고 나선다. 일부 인구의 수거와 인신 구속, 인권 박탈을 합리화하면서, ‘국민’ 전체를 상대로 한 훈육과 통제, 의식 재교육의 국가통치를 정당화한다. 그리고 이렇듯 ‘사회악 청소’의 의식혁명, 인간개 조의 프로젝트가 ‘범국민’적 운동으로 강조되고 있는 상황에서,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1981년 4월 전두환은 국무총리에게 특별한 지시를 내린다. 정보 보고서를 기 초로, 신체장애자와 구걸 노숙자들을 일제 단속․보호하라고 명령한 것이다. 대 소탕 전.

이미 많은 부랑인들이 명랑 사회를 해치는 ‘사회악’으로 간주되어 삼청교육대에 36) <매일경제> 1981. 7. 8. ‘[매일춘추]사회악’. 37) <경향신문> 1980. 11. 30. 38) <매일경제> 1981. 11. 30

80


감금되었고, 사회 안정을 위협하고 서민생활을 불안케 하는 ‘폭력배’로 분류되어 일 소된 상태에서, 각하는 왜 이런 별도의 지시를 내렸을까? 그에 따라 어떤 공포의 인간쓰레기 청소작업이 도심 곳곳에서 진행되었는가? 따르지 않으면 안 될 독재자/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전국 각지에서는 노숙자, 부랑인 단속의 광풍이 불어 닥친 다. 그런데 당시 신문 기사에서는 대통령의 명령은 물론이고, 그에 따른 일선 당국 의 조치 내용을 찾아볼 수 없다. 대체 이 비가시성의 암막(暗幕) 뒤에서는 어떤 일 이 벌어지고 있었나?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가?

6. 88올림픽을 위한 도시(인간)환경미화 사업

중요한 것은, 이때 전두환이 일제 단속․보호를 명령한 대상은 1980년 8월 4일 발 표된 ‘사회악’에 해당되지 않는 자들이라는 사실이다. ‘사회악 일소 특별조치’는 크 게 폭력사범, 공갈 및 사기 사범, 사회 풍토 문란사범 등 세 가지 부류를 대상으로 삼았다. 그 중 첫 번째인 폭력사범에는 강도, 절도 등 일반폭력배, 경제폭력배, 정 치폭력배, 학원폭력배가 해당된다. 공갈 및 사기 사범에는 상습적 일반 공갈 사기 배, 기관원 사칭과 같은 상습적 특수 공갈 사기배, 텃세 강요와 같은 기타 공갈․사 기를 통한 서민착취 사범이 속한다. 마지막 사회풍토 문란사범은 밀수 및 마약사범, 토색적 비리행위자가 포함되었다.

그렇게 해서 6만 여명이 검거되었고, 그 중 상당수가 삼청교육대로 끌려갔다. 그 리고 여기에는 앞선 세 범주 어디에도 해당되지 않는 평범한 시민, 학생, 노동자가 부지기수였다. 마찬가지로 일소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 노숙자, 걸인, 부랑인들도 마 구 끌려가 목숨을 잃었다. 이렇듯 이미 사회정화운동을 통해 청소되고 삼청교육대 를 통해 일소된 상황에서, 전두환은 신체장애자와 구걸 행각자들의 실태 파악과 일 절 단속, 보호 조치를 별도로 지시한다. 노숙자와 부랑인들도 마구잡이로 끌고 간 삼청교육대의 경우와 달리, 81년 4월 10일 전두환은 구체적이고 직접적으로 장애 인, 노숙자들을 거명하면서 이들의 청소를 명령한다.

81


친필 휘호로 지시했다. 17일 ‘관계기관’ 연속회의가 즉각 개최되고, 신속한 조치 가 따른다. 20일부터 연 인원 17,000명의 공무원들이 투입될 것이며, 일주일이 채 되지 않아 1,850명의 ‘부랑인’들이 단속망에 걸려든다.39) 왜 각하는 범죄인에 해당 되지 않는 이들에 대해서도 특별한 관심을 보였는가? 무엇을 노린 조치였나? 현재 로서, 그 정확한 이유를 확인하기란 불가능하다. 다만, 개인적인 결정이 아닌, ‘정보 보고서’에 따른 통치적 차원의 판단이었음은 분명하다. 과연 그 의도는 ‘부랑인’ 청 소에 국한되었을까? 아니면, 사회 총체적 기강확립/치안단속의 효과까지도 염두에 두었을까?

알 수 없다. 다만 그 사회․문화적 효과성에 비춰 지시의 의미를 추론해 볼 수 있 을 따름이다. ‘그들’의 (직접)단속과 ‘우리’의 (간접)훈육. 말했듯이, 당시의 신문과 방송은 이에 대해 일절 함구했다. 삼청교육대 입소의 경우와 달리, 침묵을 지켰다. 그리하여 각하의 지시는 사실상 비밀리에 진행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단지 그 의도와 실상을 추측해 볼 수 있는 단서가 신문을 통해 유출되는데, 81년 가을 <매일경제>의 기사도 그 일례가 된다. 그 동안에 진행된 단속 상황과 그 다음에 벌 어질 보호 조치에 관해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다. “도시의 부랑인이 없어진다”는 제 목의 기사는 이렇게 시작된다. 부랑인 없는 거리를 만든다. 정부는 88올림픽 등에 대비, 우리나라를 찾는 관광객들에게 깨끗한 인상을 주고 국민들의 불쾌감을 없애기 위해 이제까지 단속에 치우쳐왔던 부랑인 문제를 복지차원에서 해결키로 하고 내년에 재활사업을 강력히 추진할 방침이다.40)

사회 기강을 바로잡고 사회 안전을 기하며 서민 생활을 보호하기 위한 ‘사회악 일 소’의 도덕 정치에서 한층 나아간다. 단지 보기가 좋지 않고, 눈에 자주 띄어 불쾌 감을 주는 부랑인과 거지, 노숙자들이 눈앞에 나타나지 않도록 분리․관리코자 하는 인종수거 프로그램이다. 불량인 비가시(非可視)성의 아름다운 거리를 만드는 게 목 표다. 다름 아닌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 등과 같은 국가적인 행사에 대비한 일제 청소 계획이다. ‘대한민국’, 서울을 찾는 외국인/관광객들이 불쾌해하지 않도록 ‘부 39) <월간조선> 2003. 11월호. ‘전두환 정권과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 경찰 정보보고서’. 40) <매일경제> 1981. 11. 21. ‘보사부 도시의 부랑인이 없어진다’.

82


랑인’ 문제를 사회 ‘복지차원’에서 해결하려 하는 것이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재활사업’이라는 이름으로 ‘부랑인’들을 ‘민간’ 복지시설에 입소시켜 도시로부터 분리시키는 대형 국책 프로젝트다. 그럼으로써 ‘대한민국’에 대한 방문자들의 ‘인상’을 좋게 하려는, 일종의 도시환경미화 사업인 셈이다. 이미 지개선 프로그램이다. 이를 위해 불쾌를 주는 인간적 종자들을 도시/공간으로부터 빼내야 하는 데, 그 해결책이 ‘복지차원’에서 이루어진다. 보건복지부라는 행정 당 국이 시행 주체로 나서며, 복지 차원에서 관리할 ‘보호대상’이 정해진다. 이를 위한 ‘보호시설’이 다름 아닌 복지원이라는 이름으로 전국 각지에 확대 강화된다.

구체적으로, 보건사회부는 보호대상인 걸인, 부랑인, 노숙자의 수를 전국에 걸쳐 1만 1500명 정도로 파악한다. 이들은 일시 단속할 때만 잠시 자취를 감추었다가 “다시 등장해 거리질서를 어지럽히고 있음에 비추어 근본적인 해결책이 시급하다 .”41) 보건복지부가 앞장선다. 내무부/경찰과 협력하여 이들의 신변과 정신 상태를 우선 점검하고, 전체를 세 가지 부류로 나눈다. 우선, 첫째, 연고자가 있는 자들은 귀가 조처를 시켜 집단에서 단속토록 한다. 들째, 활동능력을 갖춘 사람은 자활이 가능토록 일정 기간 직업훈련을 시키며, 셋째, 가장 최악인 불구자나 병자 등은 보 호시설에 그대로 수용할 것이다.

두 번째와 세 번째 부류가 가게 되는 곳이 사설복지원시설이다. 형제복지원이다. 그중 ‘재활교육’을 받은 자들은 일정 기간 후 사회로 나와 도시생활에 참여할 기회 가 주어질 것인데, 만약 “재활교육을 받고도 다시 구걸행위에 나서는 상습적 부랑 인에게는 엄중한 처벌을 병행”할 것이다.42) 나머지 불구자, 병자들은 기약 없이 복 지원에 갇히는 신세로 전락한다. 이를 위해 보사부는 23억 2천여 만 원의 예산을 추가로 투입한다. 기존 22개 보호시설 중 4곳을 보수하고, 5개소를 신설한다. “수용 시설을 대폭 확충할 계획"을 정부 차원에서 마련할 것이다.

41) <매일경제> 1981. 11. 21. ‘보사부 도시의 부랑인이 없어진다’. 42) <매일경제> 1981. 11. 21. ‘보사부 도시의 부랑인이 없어진다’.

83


1982년 정부는 개인이 운영하는 복지원에 대해서도 보조금을 지급할 수 있도록 법 개정을 끝마친다. 사설수용시설을 ‘부랑인’ 복지정책에 적극 끌어들이기 위해서 였다. ‘노숙자’ 정리를 빌미로, 박인근의 형제복지원 등 개인(영리)사업을 적극 지원 키로 함 셈이다. 관민 유착. 외견상으로는 거리미화는 물론 도난사고를 줄이고 전염 병 예방에도 상당한 효과를 거둘”43) ‘부랑인대책’을 위해서다. 실제로 시설의 확충 은 단속의 강화와 연동된다. 부산을 포함한 전국 각 시도에서 일제히 단속이 펼쳐 지고 있었다. 말했듯이, 각하의 서슬 퍼런 지시에 다른 조치였다.

올림픽 개최 도시인 서울은 노숙인 특별관리 지역이다. 1981년 성동구에 총 154 명의 부랑인, 걸인, 껌팔이, 앵벌이들이 단속된다. 시립갱생원, 부녀보호소, 아동상 담소에 각각 21명, 30명, 103명씩 ‘송치(送致)’될 것이다. 물론 이들의 최종 도착지 는 알 수가 없다. 단속은 계속된다. 1982년 4월 서울시 영등포구도 ‘도시환경저해 요인 특별정비’ 사업을 실시한다. “모든 저해요인이 완전히 제거될 때까지 무기한 실시”44)될 것이다. 야바위꾼, 앵벌이, 노점상 등이 모두 광고물, 게시판, 가로휴지통 처럼 ‘도시환경저해요인’으로 분류․간주된다.

감시하는 공권력과 단속하는 행정력이 시시각각 도심에 출몰한다. 공적인 장소를 기웃거리는 ‘노숙자’를 적발하고, 사적인 공간의 미관을 저해할 수 있는 ‘부랑인’들 을 검거하기 위해서다. 그러한 점에서 1980년대는 학생과 시민, 노동자는 물론이고 의식화되지 않고 저항하지 않은 노숙자 부랑인들에게 공통된 비상스테이트의 시간 이었다. 거리는 저항하는 민중과 진압하는 경찰의 임시적 충돌지점이었지만, 무력한 인종들에게는 ‘박멸’을 내세운 단속 권력에 노출된 영속적 공황의 지대였다. 부유하 는 거리의 삶들은 상시적인 예외상태에, 누구도 모르는 상황에서, 위태롭게 노출되 어 있었다.

역 앞이나 버스터미널, 지하도, 육교, 주요 간선도로, 시장에서 발견되는 즉시 체

43) <매일경제> 1981. 11. 21. ‘보사부 도시의 부랑인이 없어진다’. 44) <경향신문> 1982. 4. 20. ‘영동포 중심가 환경 특별정비’.

84


포된다. 미아, 고아, 걸인, 정신이상 배회자, 무의무탁 노인 모두가 수거 대상이다. 가출 청소년도 예외는 아니다. 그렇게 포괄될 노숙자와 그렇게 포함되어야 할 부랑 인을 상대로 한 집중단속이다. 여타 시도와 마찬가지로 서울시도 지속적으로 펼치 는 소탕전이다. 물론 각하가 내린 지시에 따른 것이며, 당연하게 경찰의 협조를 통 해서였다. 잡혀온 자들 중 영아는 시립아동병원이나 녹원영아원, 성로원아기집으로 보낸다. 미아나 고아는 시립아동상담소와 마리아수녀회 등지에 임시 수용할 것이 다.45)

얼마나 많은 수가 단속되었는지, 가출 10대 청소년들이나 술 취해 비틀거리다 잡 혀온 성인들은 대체 어디로 갔는지, 그 어떤 기록도 규모나 행방을 말해주지 않는 다. 말 그대로의 행방불명 상태. 이들이 앞서 언급된 15,000명의 사전 파악된 ‘노숙 자’에 포함되었는지도 알 수 없다. 애당초 실체가 없는 숫자이기에, 규명 자체가 불 가능하다. 요컨대 쿠데타로 득세한 전두환은, 정보당국의 비밀스러운 국정통치 보고 서에 기초하여, 전국 각지 노숙자와 부랑인 일제 단속과 사설(복지)시설 ‘보호’를 지 시한다. 이에 따라 알 수 없는 수의 대중들이 ‘노숙자’로 분류되고 ‘부랑자’로 간주 되어 시설에 수용․감금될 것이다.

무엇보다 88올림픽을 위해서다. 그 성공적인 개최를 위해 각하는 물론이고 ‘우리’ 모두가 열심히 준비해야 할 것이다. 외국의 손님맞이를 위해 도시를 깨끗하게 청소 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 무엇보다 인간쓰레기 청소가 필수적이다. 달동네도 없애고, 판자촌은 철거한다. 추악한 미관을 가릴 높은 건물과 호텔을 도시 곳곳에 짓기 위 해서다. 철거민들은 도시 바깥으로 집단 퇴거시켜야 할 것이다. 그렇듯 불량주택 해 체 작업은 불량인종 격리의 프로그램과 밀접하게 연계된다. 80년대 초․중반 노숙자 정리 문제와 판자촌 철거민 퇴거 문제는 그 실체적인 내용이나 역사적 의미의 측면 에서 따로 떨어지지 않는다.

88올림픽을 위한 동일한 도시환경미화 프로젝트의 양면이었다. ‘국민’적 결의가 45) <경향신문> 1984. 3. 12. ‘가출 청소년 등 단속’.

85


다양한 행사를 통해 모아진다. 82년 3월 19일 세종문화회관에서는 서울올림픽대회 범민족시추진위원회창립총회가 사회각계 지도인사 4500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릴 것 이다. 참석자들은 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를 기원하면서, “시민정신함양”과 “질서의 식, 예의․친절운동”, “도시환경 정비 및 미화운동”을 통한 “국위선양”을 다짐한 다.46) 바로 이 ‘국민’ 운동의 대상으로서, 부랑인들은 이전의 삼청교육대 입사자들 은 훨씬 많은 수의 철거민들과 같은 운명을 겪는다. 공통된 계급성으로서 도시퇴거 의 강제 명령을 받게 된다.

7. 복지원 강제 수용이라는 말할 수 없는 뉴스

요란스럽던 삼청교육대 사업과 달리, 비위생적인 인종 척결의 작업은 소리 없이 이루어진다. 여론의 관심을 끌 뉴스의 유출도 최대한 억제시킬 것이다. 일반시민들 이 최대한 모르는 상태에서, 조용히 도시에서 축출한다. 이러한 점에서도 노숙자와 판자촌 빈민들은 서로 많이 닮았다. ‘그들’의 강제 퇴거는 비밀스러운 소식이다. ‘우 리’에게 알려봐야 재미없는 뉴스다. 예민한 정보의 사회적 유포와 관련하여, 제5공 화국은 일찌감치 검열의 지침을 정해놓고 있었다. 악명 높은 문화공보부 홍보조종 실을 통한 보도통제 가이드라인이다. 이른바 ‘보도지침’을 매일 같이 방송사 데스크, 신문사 편집부에 하달되고 있었다.

각하의 명령이었다. 삼청교육대 사업이 한참이던 1980년 10월 7일 문공부 업무 보고에서 대통령은 '해엄(解嚴)후의 언론종교 대책‘이라는 문건을 통해서 다음과 같 이 지시한다. “앞으로 언론문제는 중정에서 맡지 말고 문공부가 전담해서 추진하 라.” “국가이익을 우선하는 언론자세의 확립, 국가이익을 염두에 두고 기사화할 것 은 하고, 안 할 것은 안 해야 하며 국가이익을 떠난 선동적 기사를 쓰는 것은 적대 국에 도움을 주는 것임”을 강조한다. “문공부는 고도의 정치 감각을 갖고 각 분야 에 조예 있는 우수하고 능력 있는 요원들을 확보할 것”이다.47)

46) <경향신문> 1982. 3. 19. ‘올림픽 시추진위 창립총회, “전시민 총력 지원 다짐”.’ 47) 이철, 「제144호 국회 문교공보위원회 회의록」 제14호, 1988, 33쪽.

86


그에 따라 문공부는 “계엄 해제 후에 언론조정체제를 갖추어야 된다는 목적으로 당시 청와대 비서실에서 대통령의 재가를 얻어 계엄해제 후에 정부의 대언론 창구 를 문공부로 일원화한다. 언론협조 체제 구축을 기한다는 배경 아래, 81년 1월 6일 직제개정안을 성안한다. 총무처 협의 및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1월 9일 홍조실을 발족”48)시킨다. 계엄이 해제되기 16일 전의 일이었다. 대통영령 제10호, 제161호에 의거하여, 홍조실은 공식적으로 “정부가 외교․안보 등 국가이익과 직결된 사안 또는 사회 안전 유지를 위한 시책”에 따른 “언론의 이해와 협조”49)를 구하는 업무를 총 괄한다.

“명백한 언론말살 정책이자 위헌행위”50)였다. 국가권력은 매일 같이 뉴스를 통해 현실을 입맛에 맞게 만들어내고 지워낼 것이다. ‘크게, 눈에 띄게, 적절히, 강조해 서’ 보도할 것과, ‘보도해도 좋음,’, ‘보도하면 안 됨,’, ‘보도하면 절대 안 됨‘ 등의 체크가 일일이 이루어진다. 확인된 보도지침의 내용 중 ’인권침해‘에 해당되는 뉴스 는 모두 ‘절대불가’와 ‘불가’의 판정을 받는다. 게재되는 경우에도, 1면 ’톱‘이나 ’중 톱‘이 아닌 11면 ’1-3단‘의 판결이 내려진다.51) 그렇게 볼 때, 거리 노숙자 정리와 (형제)복지원 강제 수용은 당연히 ‘보도하면 (절대) 안 됨’의 경우에 해당했을 것이 다.52)

“사회 안전 유지를 위한 시책” 상, 일반 시민들에게 알려지는 게 바람직하지 않 는 뉴스기 때문이다. 국내외 부정적인 여론을 부추길 수 있는, “국가 이익을 떠난 선동적 기사”가 될 수 있기에, 검열․통제할 필요성이 있다. 결국 대량의 인신 구금 과 강제적 감금의 현실이 발생하고 있었음에도, 당시 신문은 물론이고 텔레비전은

48) 49) 50) 51)

이광표. 「제144호 국회 문교공부위원회 회의록」 제14호, 1988, 30쪽. 국가정보원(2007). 『과거와 대화 미래의 성찰: 언론․노동편(V)』, 189쪽. 김주언, ‘왜 보도지침을 폭로했나’, 『저널리즘』, 한국기자협회, 1988년 가을 복간호 김춘식, 「언론통제 요인으로서의 보도지침에 관한 연구: 제5공화국의 경우를 중심으로」 한국외국어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52) 해직언론인들로 구성된 1986년 9월 민주언론운동협의회가 『말』지 특집호를 통해 폭로 한 ‘권력과 언론의 음모-권력이 언론에 보내는 비밀통신문’은 1985년 10월부터 1986년 8월까지의 보도지침 내용을 게재하고 있다. 그리하여, 유감스럽게도, 1980년대 초반 지 침과 검열의 상세 내용은 확인되지 않는다.

87


침묵한다. 뉴스에서 보이지 않게 된다. 그리고 바로 이 침묵의 검열을 통해 부랑인 소탕전은 완벽한 (여론)공백의 현실, 비가시성의 현실로 은닉된다. 무지와 무관심의 현실로 남게 되는 것이다. ‘우리’와 무관한 상황이 되고, 그럼으로써 ‘그들’에게만 발생한 특수한 비현실적 예외상태가 된다.

요컨대 80년 8월 삼청교육대를 통해 사실상 개시된 노숙자 대청소 사업은, 81년 봄부터는 훨씬 체계적인 도시환경미화 및 부랑인 수거사업으로 지속 강화되고 있었 다. 현실 사회로부터의 인간 소거, 사회 현실로부터의 정보 삭제가 병행된다. 실제 가 비현실적인 것으로 밀려나고, 실제 진상이 미디어 환상에 의해 가린다. 대중매체 를 통한 시선차단상태에서 비위생적 인종처분의 프로젝트가 벌어진다. 소문이 쉬쉬 떠돈다. 사람들은 옆집 구두닦이 사내가 끌려갔다는 이상한 소문을 전하며, 부산역 에서 어린애가 잡혀간 흉흉한 이야기를 공유한다. 불안감이 높아진다. 민심이 흉흉 해진다. 80년 광주 때와 똑 같다.

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사라진다. 눈앞에서 끌려가는 무서운 일이 벌어지지만, 누구도 그것을 입에 올리지 못한다. ‘완장’ 찬 사내들이 떼를 지어 도심을 활보한 다. 재수 없으면 나도 마구잡이로 잡혀갈 수 있다. 경찰차도 아닌 ‘부랑인, 부랑아 선도차’에 태워질 것이다. 사람들은 이게 국가/권력의 ‘민간’ 대행 사업임을 직감한 다. 대통령/독재자의 비상한 조치다. 하기에 어떤 항의도 하지 못한다. 폭력이 곧 권력이다. 그런 불안․공포의 시국이다. 지식인은 물론이고 언론이도 그러했다. 이상 한 기운과 흉흉한 분위기를 눈치 챘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모르는 일이라 체 념하며, 알아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 변명한다.

물론 언론매체가 완전히 침묵을 지킨 것은 아니다. 광주의 상황과 관련해 신문과 방송은 진상에 관해 최대한 침묵을 강제당하면서도 국가/권력의 선전에는 성실히 복무한다. 이때도 마찬가지다. 단속이 수반한 폭력의 실상에 대해 침묵하면서, 아주 드물게 단속 현실을 의도치 않게 옮긴다. 예컨대 86년 정부는 ‘생활올림픽추진단’을 ‘민간합동’으로 구성한다. 보사부 내에 식품위생반과 환경위생반 등 5개 반으로 구

88


성된 ‘생활올림픽 지원사업본부’를 둘 것이다. 본부 내 종합상황실은 ‘부랑인 보호’ 에도 신경 쓸 텐데,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을 “명랑한 분위기 속에서 치를 수 있 도록 하기”53) 위해서다. 이런 식이다.

87년 11월 서울시가 다시 나선다. “전화기를 틈타 떼 지어 몰려다니며 민폐를 끼 치고 있는 부랑인들을 특별 선도키로” 한 것이다. <동아일보>는 이 소식을 “올림픽 환경 밝고 분류하고 있다. 정부 당국의 방침을 일방적으로 전달한다. 오는 연말까지 계속될 이번 선도 기간 중 시는 걸인, 껌팔이, 폐질 환자 등 구걸 행위자와 노숙자들을 발견 즉시 시 산하 부랑인수용소에 보호 조치키로 했다. 시는 경찰과 합동으로 지하도, 육교, 시장, 상가 등 번화가와 터미널, 지하철, 서울역 등 상습구걸지역에서 배회하 는 부랑인들을 중점 단속할 방침이다.54)

그렇게 해서 올림픽 직전 ‘대한민국’은 복지원의 천국으로 발전한다. 수용소 공화 국으로 성장한다. 1986년 말 현재 전국에는 약 600개의 ‘사회복지시설’이 사업을 펼치고 있을 것이다. 그곳에는 무려 7만 6,228명이 수용되어 있었다. 이중 공식적 으로 부랑인 시설로 분류된 것은 총 36개소(불랑아 시설 9개소 포함)로, 시립 시설 5개소와 종교단체 시설 10곳을 제외하고 나머지 21개가 사회복지법인이 운영하는 사설 시설들이었다. 서울과 경기, 강원, 충분, 부산 등 전국각지의 시설은 대략 16,000명을 인원이 가두고 있었다.55) 공교롭게도, 전두환의 지시에 따라 계산된 전 국 부랑인의 숫자(15,000여명)와 거의 일치한다.

시민들의 불편을 덜어주기 위한, 정의사회구현의 사업이었다. 맑고 아름답고 명랑 한 도시 경관, 거리질서를 확립하기 위한 최선의 조치라고 했다.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을 위한 일이며, ‘그들’을 위한 조치라고 각하는 설명하신다. ‘그들’의 생명 문 제에 관심을 갖는 것은, ‘우리’의 안전한 생계 문제에서 눈을 돌리는 매우 어리석고 잘못된 일. 광주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국가이익과 사회질서, 생활안정을 위해 모

53) <매일경제> 1986. 2. 17. ‘생활올림픽추진단 구성’. 54) <경향신문> 1987. 11. 14. ‘민폐 부랑인 보호조치’. 55) <경향신문> 1987. 2. 17. ‘부랑인 시설 현황’.

89


르는 척 하는 것이 맞다. 무엇보다 88올림픽이라는 국가대사를 대비하고, 번영한 조 국 ‘대한민국’의 이미지를 해외에 알리기 위한 사전 행사이지 않은가?

도시/인간 환경미화의 필요성/불가피성을 홍보하고 ‘국민’들의 적극 동참과 이해 를 요청하는 밝고 긍정적인 뉴스가 유포된다. 인간(쓰레기)청소에 관한 어둡고 부정 적인 보도는 공론의 장에서 최대한 차단된다. 물론 예민한 독자는 무슨 일이 벌어 지는지 ‘행간’에서 읽어낼 수 있다. 그럴지라도 사태의 실상을 정확하게 간파하고, 이를 대중적으로 공유하며, 구체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나서는 것은 애당초 무리 였다. 기대하기 힘든 일이었다. 냉정하게 ‘내’ 일, ‘우리’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통제의 망, (자기)검열의 체계 하에서 형제복지원은 80년대에 새로운 전기를 맞 고 있을 것이다.

8. 형제복지원의 80년대, 그 유괴․감금의 숨겨진 이야기

국가 주도의 대청소에 ‘민간’으로 참여한다. ‘명랑사회구현’을 위한 전두환의 도심 인간쓰레기 처리사업을 주도적으로 떠맡는다. 인신 구속, 인간 삭제의 대행서비스 다. 도시미화라는 시대의 과업에 발 맞춰, 수용 인원을 늘리고 더 많은 정보 보조를 타내며 이에 맞춰 사업의 규모를 확장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이하게 된 것이 다. 물론 이 시설은 61년 5.16쿠데타 직후에 개설된 이후, 박정희 정권 내내 '민간‘ 수용소로서 작동하고 있었다. 1975년의 ‘내무부훈령 410호’56)는 원장 박인근에게 사설 수용(소)의 법적인 근거를 나름대로 제공하고 있었다. 그때부터 이미 부산시는 형제복지원과 부랑인 수용보호 위탁 계약을 맺는다.

그런데 80년 전두환 치안스테이트의 등장은 이 수용 시설의 위상과 역할을 대폭 강화시킬 것이다. 무엇보다 81년 4월 전두환이 내린 특별한 지시는 형제복지원이 56) ‘부랑인의 신고, 단속, 수용, 보호와 귀향 조치 및 사후관리에 관한 업무지침‘이다. 훈령 은 매월 1회 이상의 정기적인 ‘기동단속반’ 운영을 명령한다. ‘부랑인단속일지’를 매일같 이 작성해야 할 것이며, ‘신고’가 있을 시 부랑인의 인상착의, 인적사항, 발견 일시 및 장 소 등을 기재한 ‘신고접수부’를 작성해 시장과 구청장, 군수, 경찰 등 ‘단속반장’에게 신 속히 보고토록 하고 있다.

90


수용소로서의 기능을 더욱 잘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국가/권력 대행기관으 로서 도시 인간쓰레기 청소에 직접 나설 수 있게 된 것이다. “경찰에서 보호 의뢰 한 부랑아” 선도 기관을 자임한다. 명실상부 ‘부랑인 선도·수용·보호 위탁업체다. 무 소불위의 국가/권력을 배후로, 경찰의 지원과 지자체의 협조 하에서, 형제복지원은 사실상의 공권력이자 경찰인력으로서 치안을 단속하고 사회 기강을 바로 잡으며 도 시환경미화를 책임지는 역할을 도맡는다.

그 업적을 높이 평가받아, 1981년 박인근 소장은 장애인의 날 국민포장 석류장을 받는다.57) 보건사회부가 적극 추천을 했다. 1984년 5월에는 국민훈장까지도 받는 다.58) 같은 해 그는 모 협회로부터 ‘무궁화사자대상’을 수상한다. 곧이어 ‘전국부랑 인복지시설연합회’ 회장으로 선임된다. 85년 11월에는 부랑인 임시 수용소 실적을 높이 평가받아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는다. 그는 사회적 명사였다. 신망 있는 원로 다. 87년 1월 김용원 검사를 통해 이른바 ‘형제복지원 사건’이 터져 나올 때까지도, 그는 평통자문위원으로 활약 중이었다. 모든 게 전두환의 시대에 이루어진 일이었 다.

실제로 그는 형제복지원 사건이 논란이 일어나자 전두환을 비롯한 정관계의 유력 인사들로부터 적극 비호를 받는다. 전두환은 5월 21일 제16차 소년체육대회 참석차 부산을 방문한다. ‘VIP’의 부산방문에 맞춰, 검찰 수뇌부는 박인근을 보호하고 부산 시 공무원들을 두둔하는 취지의 공소장 변경을 직무상 명령으로 하달한다. 각하가 ‘거리의 거지를 없앤 훌륭한 사람’이라 칭찬한 소장이다. 결국 횡령액수가 낮게 조 정된다. 그렇게 형제복지원이라는 사설복지시설은 구조적으로 국가의 행태를 빼닮았 을 뿐만 아니라, 사적으로도 통수권자와 긴밀하게 유착되어 있었다. 검찰의 보호까 지 받는, 무소불위의 기관이었다.

1980년대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요컨대 전두환 정권과 형제복지원와 함께 시작

57) <경향신문> 1981. 4. 20. ‘장애자의 날 포상자 명단’. 58) <매일경제> 1984. 5. 11. ‘새마을지도자에 훈장’.

91


하고 함께 끝난 일종의 공동운명체였다. 전두환은 끝까지 형제복지원을 보호코자 했으며, 처음부터 박인근을 적극 후원했다. 반대로 박인근의 형제복지원은 그 상시 적인 운용으로써 국가/권력의 강화에 복무한다. 전두환 정권과 박인근의 수용소는 80년대 대감금의 시대를 구성하는 관민의 양 축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피해 자들이 유독 이 시기에 대거 복지원으로 끌려간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전두환/ 박인근에게 그들이 필요했다. ‘복지’의 국책과 ‘보지원’의 사익 간 긴밀한 파트너십.

부랑인이나 노숙자, 걸인, 장애인들만 재활교육/장기수용을 위해 잡혀 간 게 아니 었다. 부산에서 구두닦이 생활을 하다가 1982년 9월 잡혀간 황영식(남, 다시 18세) 의 증언을 들어보자. 교통부가 있었나 봐요. 부산에, 교통부라 그러면 부산 사람 다 알아요. 거기서 친구들하고 술 먹고 벤치에 누워 있었는데 그만 잠들어 버린 거예요. 그걸 보고 누가 신고를 했는데, 새벽에 일어나 보니까 차 안이더라고요. 창문 없고, 흔히 닭장차라고 그러는, 앞에 형제복 지원이라고 써져 있고, 여하튼 눈 뜨니까 차 안인데, 다른 사람들은 안 끌려가려고 발버둥 을 치는 거예요.59)

당시 13세였던 최준수(가명)는 동생과 고아원에 있다가 원장에 의해 “더 좋은데 있는데 보내줄 테니까 거기 가서 공부 열심히 하라고, 그 말”과 함께 형제복지원에 보내진다.60) 입소한 그는 다른 원생들과 함께 채 완성되지 않은 건물들을 짓는데 투입된다. 82, 83년 막 불어난 인원을 수용하기 위한 대대적인 공사였다.

국가 통제 및 검열하의 신문 방송의 보도 기능이 사실상 불구화된 상태에서, 오 직 소문으로만 흉흉하게 이야기가 떠도는 상황에서, ‘노숙자’ ‘부랑인’의 범주에 해 당되지 않는 무수한 아이들까지도 사실상 납치되어 부모들과 헤어지고 있었다. 도 시에서 사라지고, ‘우리’와 분리된다. 연고가 있건 없건 상관이 없다. 한종선의 경우 처럼 실제로 경찰이 부모를 대신하여 ‘보호’를 의뢰한 경우도 있지만, 경찰을 자임

59) 형제복지원 사건 진실규명을위한 대책위(준) 2013. 10. 『87년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 피해자 증언대회 자료집』, 143쪽. 60) 같은책, 127쪽.

92


한 복지원의 ‘부산시 부랑인․부랑인 선도차’가 마구잡이로 부산역 등지에서 잡아온 사례가 더 많았다. 예외 없이 노숙과 구걸, 구전, 똘만이, 가출 등의 사유가 덧씌워 진다.

당시 10~11세였던 정양이 형제복지원에 가게 된 것도 1982년 봄이었다.61) “저녁 을 먹고 밖에 나가서 놀았어요. 우리 집이 시내 안쪽이었는데, 어떻게 하다 놀다가 시내까지 갔는데, 그때가 그렇게 늦은 시간은 아니었던 거 같아요. 차들이 다니고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갑자기 검은 지프차가 있잖아요. 검은 지프차가 한 대 내 앞 에 서더라고요. 문을 열더니 너 집이 어니냐고 물어서 저기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늦었으니까 집에 데려다 줄 테니까 일단 타래요.”62) 사실상의 어린이 유괴였다. 그 녀는 그곳에서 거의 5년 동안 산다. 부끄러움과 수치, 치욕의 삶을 살아낸다.

따라서 그녀가 박인근은 물론이고 전두환의 사죄와 책임을 요구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전두환이 지시한 거잖아요.”63) 한 살 많은 양모군이 부산역 벤치 아래에서 자다 잡혀간 것도 82년 4월의 일, ‘앵벌이’인 게 죄였다. 반면에 14세로 나이가 좀 더 많은 이모군은 까까머리로 범어사를 찾아 나섰다가 부산역에서 잡혀 간다. 1981년 가을에 벌어진 백주대낮의 피랍 사건이었다. 82년 여름부터 87년까지 3차례나 형제복지원에 들어간 경우도 있다. 모두 앞서 증언한 한종선처럼, 아동소대 등에 배속된다. 원생/소년병으로 변신하며, (성)폭행의 고난을 똑같이 겪게 될 것이 다.64)

명백하게, 형제복지원은, 1980년대 초․중반, 전두환 폭압정권의 특별한 지시와 특 수한 지원에 힘입어 흥성한 사설 수용소이자, 무엇보다도 엽기적이고 탈법적인 어

61) 남녀로 구분할 때, 여성은 총 3,164명 중 353명으로 1/10에 그친다. 그렇지만 9세 이 하의 경우에는 107명 중 37명, 그리고 10~세의 경우에는 808명 중 140명으로 그 비중 이 훨씬 높아질 것이다. 나이가 어릴수록, 남녀 구별이 약했던 셈이다. 62) 형제복지원 사건 진실규명을 위한 대책위원회(준). 2013. 10. 『한국의 홀로코스트! 형제 복지원 사건의 진실을 말한다』, 124쪽, 피해자 인터뷰 중. 63) 124쪽, 피해자 인터뷰 중. 64) 여기에 19~30세에 속하는 643명 중 일부를 포함시키면, 그 숫자는 더 늘어날 수 있다.

93


린이․청소년 감금의 시설이 맞았다. 그리고 바로 이 사실로서, 전두환이 지시한 “신 체장애자 구걸 행각” “실태 파악”과 “관계부처 협조” 하 “일절 단속 보호 조치”의 무법성과 비정상성, 폭력성을 여실히 반증한다. 말 그대로 아무나 끌려갈 수 있었던 것이다. 삼청교육대가 모든 이를 ‘폭력배’로 지목해 수용할 수 있었듯이, (형제)복지 원 또한 심지어 무고한 어린 소녀조차 ‘부랑인’으로 몰고 ‘노숙자’로 지목해 감금하 고 학대하고 (성)폭행할 수 있었다.

실제로 형제복지원 원생의 다수가 어린이였다. ‘형제복지원 사건’으로 세상에 얼 굴을 드러낸 1987년 현재, 원생 중 1~9세가 107명, 10~18세는 무려 808명에 이르 렀다. ‘유아소대’에는 남아 17명, 여아 18명이 각각 ‘소속’되어 있을 것이다. 둘을 합치면 915명으로, 전체 인원의 약 1/3을 차지했다.65) 한종선을 비롯해, 위에서 언 급된 증인들과 그 외에도 무수한 청소년 어린이들이 여기에 해당했다. 주로 20대 이상의 ‘불량배’들을 상대로 공공연하게 자행된 삼청교육대 사업과 달리, 민간의 탈 을 쓴 사설복지원에의 은밀한 ‘노숙자 부랑인’ 수용 프로젝트는 어린 생명들을 벌거 벗기고 있었던 점에서 더욱 사악했다고 할 수 있다.

1979년 ‘형제육아원’에서 법인 명칭을 바꾼 주례2동 산18지의 형제복지원은 83년 1월 이렇듯 늘어난 인구수용을 위해 건물을 대폭 늘인다. 총 6,974평의 대지에 35 동의 ‘소대’ 바라크들이 질서정연하게 건축된다. 대형교회와 식당, 실습장, 운동장, 학교 등도 마련될 것이다. 1984년 1월에는 ‘정신요양시설’도 개원한다. 완벽한 수용 소 시설로의 재탄생이다. “광대한 원사의 모습을 보면 부랑인들의 자원노력으로 이 루어낸 건물이란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이며,” 복지원 측의 설명에 따르면, “정부보 조나 지방비 보조를 받지 않고 오직 박인근 원장의 개인 재산만을 가지고 투자해서 완공”한 사실이다.66) 과연 사실일까?

65) 같은 책, 158쪽. 66) 형제복지원재단(2010). 『형제복지원 운용자료집 6권~10권』, 형제복지원 사건 진실규명 을 위한 대책위원회(준) 자료집 『한국의 홀로코스트! 형제복지원 사건의 진실을 말하다』, 97쪽에서 재인용.

94


수용인원이 늘자, 그에 따라 지방자치단체를 통한 정부 예산지원도 대폭 증대한 다. 82년 형제복지원과 형제정신요양원은 생계비와 운영비, 피복비, 김장 부식비, 기능보강 장비구입 등의 명목으로 부산시(북구)로부터 총 8억 1천 여 만원을 지원받 았다.67) 이 지원 보조금은 84년 17억 9천만 원 대로 상향되었다가, 86년 21억 원 대로 훌쩍 오를 것이다. 불과 4년 사이에 예산 지원이 3배 가까이 늘어난 것이다. 원생 증가에 따른 증액이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83년과 84년 사이에 형제복 지원 시설이 대폭 확충되면서 이를 채우기 위한 수용 인구가 크게 늘어났고, 그에 따라 정부 보조금도 대폭 상향 조정되었다.

실제로 그 이전과 달리, 83년부터는 ‘입원’자 중 퇴원하지 않고 ‘잔류’하는 인원 이 크게 늘어난다. 80년 전까지는 매년 10여 명에 불과했던 잔류 인원이 81년 78 명, 82년 120명이다가 83년 259명, 84년 457명, 85년 601명으로 급증했다. 그리고 아시안게임이 벌어진 86년에는 3,975명이 새로 입소했다가 2,385명이 퇴소한다. 무 려 1,590명이 잔류하게 되는 셈이다. 이렇듯, 아시안게임/올림픽에 가까이 이를수 록, 시설이 확충된, 형제복지원에, 매년, 수백에서 천명에 이르는 인원이 새롭게 추 가되고 있었다. 84년 2,861명이던 형제복지원의 전체 (잔류)원생 수도 86년 3,164 명으로 크게 늘어난다.

경찰은 물론이고 형제복지원의 관활 구청인 부산직할시 북구청에서 계속해서 ‘요 보호자 수용 의뢰’를 보내오기 때문이다. 1985년 12월 27일, 크리스마스 연말연시 로 온 도시가 들썩일 때도, 북구청은 꾸준하게 ‘보호자’를 모집 공급한다. 부산동래 의 남모씨(남, 35), 주거 미상의 이모씨(여, 15)를 비롯한 총 12명의 인원이 새롭게 수용 의뢰될 것이다.68) 이양 외에도 2명의 10대가 포함되어 있을 텐데. 이들이 과 연 누구이고 왜 형제복지원에 가야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비고란에 ‘동래연 천파’라 적혀 있는 것으로 볼 때, 한종선 등의 경우와 똑같이, 여러 이유로 파출소 에서 인계를 받았을 개연성이 높다. 67) 형제복지원 사건 진실규명을 위한 대책위원회(준). 2013. 10. 『한국의 홀로코스트! 형제 복지원 사건의 진실을 말한다』, 158쪽, 68) 같은 책 188쪽의 자료 참조.

95


9. 나가며: 87년 폐쇄 이후 20년, 그 너머의 시간을 위한 우리의 숙제

요컨대 정부가 사실상 공금을 제공하면서 사설 수용소의 배를 불린다. 덩치를 키 우고 배가 부른 사설 수용소는 어린 아이와 부녀자를 포함한 수천의 민간인들을 수 용·구금한다. 전체주의적 관민 합작의 관계다. 군부 독재에 맞선 민주화 투쟁의 시 기, 바로 1980년대 전두환의 시간에 지속적으로 벌어지던 또 다른 상황이다. 국가 를 대행한 잔혹한 폭력과 고문이 행해지고 불법적인 강간과 살인까지 자행되는 형 제복지원은 끔찍한 파시즘의 세계 그 자체였다. 박인근은 전두환의 나라를 빼닮은 전체주의 미시 가국(家國)을 영도했다. 많은 생명이 그곳으로 사라졌고, 많은 영혼 들이 아무도 모르게 그곳에서 꺼졌다.

그런 점에서도 형제복지원 시설 내부의 상황은 전두환 체제 일반의 형상을 복사 하고 있었다. 삼청교육대와 형제복지원이 연속되고 있었듯이, 형제복지원의 가국과 전두환의 국가도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 ‘폭력배’ 상대의 삼청교육대에 끌려갈 수 있었던 인․민이, ‘노숙인’을 위해 확대 개편된 형제복지원으로 잡혀갔다. 두 범주 어 디에도 포함되지 않는 일반 시민, 무고한 어린이가 원생으로 변신한다. 예외적인 상 태의 ‘그들’은 결코 예외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같은 80년대를 살면서도, 각하에 의 해 별도로 관리된, 보편적 억압체제의 비상한 피해자/증인들이다. ‘우리’도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많은 수가 비명조차 남기지 못한 채 죽어갔다. 수용소의 워킹 데드(walking dead)들은 사회로 귀환해서도 반쯤 죽은 목숨을 겨우 연명했다. 정신병원에 여전히 감금된 자가 어찌 종선의 누이 뿐이겠는가? 역사적 무명(無名)씨로 무명(無明)의 역 사를 떠도는 복지원 출신들이 허다할 것이다. 소수가 겨우 살아남아 획득한 인간의 언어로 말문을 열었다. ‘파르헤시아(parhessia)’ 즉 진실발언의 용기를 발휘한다. 침 묵에 맞선 공개적 발언, 외면에 대항한 주체적 표출의 행동을 시작한다. 대중교통의 언어 실천을 통해 역사에 귀중한 흔적을 새긴다. 자신의 이야기를 역사에 새롭게 기재한다. 한종선을 비롯한 생존자/증인들이다.

96


이들에게 빚진 우리가 해야 할 미뤄진 과제, 남은 숙제는 무엇인가? 증인 발굴․증 언 채취의 생애사/미시사 작업이며, 대감금의 새로운 역사/서사 글쓰기다. 삼청교육 대와 형제복지원을 연관시켜 전두환의 치안스테이트를 고발하고, 심청교육대․형제복 지원 연관시설을 통해 80년대를 새롭게 규정하는 몫이다. 형제복지원에 그칠 일이 아니다. 전국 각지에서 소집된 많은 생명들이 여기저기서 벌거벗겨지고 강간당하고 익사했다. 나와서도 정신 나간 병자로, 익명의 주거불명자로 이곳저곳을 헤매야했 다. 속계(俗界)를 떠난 영계(靈溪)에서조차 배회한다. 그 무참한 폐사의 역사, 그 대 감금의 참사를 고통스럽게 복원해야 한다.

이와 함께 언어의 책임을 묻는다. 말하는 입이면서 말하지 않은 ‘언론인’과 ‘지식 인’의 책무를 따진다. 87년 ‘형제복지원 사건’이 터질 때까지, 신문과 방송은 철저하 게 침묵을 지켰다. 조직적으로 사태를 방관했고, 음모적으로 몰살을 조장했다. 국가 검열과 감시 탓이라 돌릴 수 없는 프로파간다 조작의 모의다. 홍보용 인간재생의 드라마를 방송한 TV다. “부산시에 따르면, 내년부터 걸인, 껌팔이 앵벌이 등 부랑 인을 수용하고 있는 북구 주례동 형제원안에 자체 기능 훈련원을 설치, 이발 재봉 미장 석공 전공 용접 도금 목각 등 기능을 익히게 해 매년 2백 명 씩의 기술인력을 배출키로 했다”69)는 기관전단지 수준의 신문이었다.70)

87년 이후 ‘민주화’ 시대에 80년대 인구 대감금의 총체적 실상이 제대로 밝혀지 지 않은 데도 ‘언론인’ ‘지식인’ 책임이 크다. 87년 충격적인 강제 노역 및 학대 살 인 사건으로 세상에 소개되자 신문과 방송은 일제히 주목했다. 다만 흥미위주로 잠 시 취급한 후 눈을 돌려버릴 것이다.71) 이후 운동진영은 어떠했나? 87년 이후 20 69) <매일경제> 1981. 12. 35. ‘걸인 등 무의탁자 직업훈련’. 70) 그 역은 87년 형제복지원이 폐쇄된 이후, 그리고 전두환 정권이 무너진 직후에도 사실 상 계속될 것이다. 노태우가 대통령이 되고 올림픽 준비가 막바지에 이른 1988년 신문과 방송들은 여전히 도시환경미화와 노숙자 부랑인 단속의 소식을 태연하게 전하고 있을 것 이다. 71) 1월 14일 발생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1월 17일에 최초 보도된 형제복지원 사건이 공교롭게도 겹쳤다. 시민사회/운동진영은 물론이고 일반 대중들의 관심은 당연히 전자에 집중되어 이었다. 한편 정권의 입장에서는 두 사건의 동시적인 발생에 따른 민심의 동요 를 심각하게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검열을 통해 조직적으로 여론을 조작코자 했던 전두환은, 박종철의 정확한 사인 공개를 최대한 지연하면서, 형제복지원 사건의 보도도

97


년 동안의 시간에 말 많은 진보, 현학적 수사의 좌파는 이 유기된 역사에 관해 대 체 어떤 이론적 구상, 구체적 탐사, 성찰적 대화의 노력을 보였나? 학계는? ‘수용 소’와 ‘예외상태’을 어떻게 삼청교육대의 예외적 사태, 형제복지원의 비상한 수용과 연결시켜 사유했는가?

‘벌거벗은 삶(precarious life)’은 노숙자/부랑인의 내부 역사의 구체성과 유리된 채 추상성의 외부적 개념으로 유행하고, 벤야민의 역사철학 또한 대감금의 역사적 구성 필요성과 무관한 사변적 글쓰기로 유통된다. 현학적 문화연구의 일방통행은 그래서 오히려 형제복지원에 구현된 공포의 비상체제, 치안의 예외상태에 대한 대 중적 이해가능성, 사회적 복구가능성을 방해하는 걸림돌이 된다. 그런데 이제 ‘그들’ 이 나서니 ‘우리’도 양심껏 입을 열어야 하는 것인가? 당연히 공분의 발언의 가담할 텐가? 그러면 침묵으로 일관하고 세련된 사변을 즐기면서 결국은 역사적 사태를 방 임한 과오가 면제될까?

당시 저널리즘의 실패를 돌아보는 의미도 바로 여기에 있다. 역사는 글쓰기/말하 기다. 대감금은 과연 끝난 일인가? 인신구속과 강제수용의 체제는 돌아오지 않을 과거인가? 민주주의 비상상황, 국가/권력 선전일색의 반복가능성은? 87년 형제복지 원은 문을 닫았다. 아니다. 이름만 바꿔 번영을 구가하며, 원장도 일가의 복지에 열 중한다. 전두환과 똑같은 자유의 행적이다. 현 정권은 그 이전 아비의 레짐을 승계 한다. 아감벤(Agamben)72)은 아우슈비츠라는 역사적 수용소에서 어떤 교훈을 찾아 야 한다고 했던가? 파시즘의 재도래 및 역사 글쓰기와 관련하여, 벤야민이 송부한 경고문은 또한 무엇이었나?

최대한 제어코자 노력한다. 이 두 가지 경향성이 맞물리면서, 당시 신문과 방송의 의제는 급속도로 형제복지원에서 빠져나갈 것이다. 이는 당시 사건을 최초로 보도한 <중앙일보> 허상천 기자(현 뉴시스 부산취재본부장)의 증언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72) 조르조 아감벤(2012) 정문영(역). 『아우슈비츠의 남은 것들』, 서울: 새물결. 아겝벤은 구 체적으로 이렇게 말했다. “아우슈비츠는 죽음의 수용소이기 이전에 오늘날사유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는 어떤 실험, 유대인이 ‘이슬람교도’로 화하고 인간이 비인간으로 화하는, 삶과 죽음 너머의 실험이 일어난 장소이다. 따라서 우리가 만약 ‘이슬람교도’는 누구이고 정체가 무엇인지를 먼저 이해하지 못한다면, 즉 우리가 ‘이슬람교도’와 함께 고르곤을 응 시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다면 아우슈비치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79쪽)

98


한때 나는 개였고 소였다. 하지만 그렇게 한 나 역시 아니 우리 가족 역시 당신들과 같은 가정이 있었던 사람이었다. 사람에서 짐승이 되긴 쉽다. 그렇지만 짐승에서 사람으로 온전히 돌아간다는 것, 그것은 말로는 쉽지만 너무나 힘이 든다. 죽을 정도로 말이다. 나는 지금 힘들지만 짐승에서 사람으로 돌아가려 한다. 이해할 수 있는가?73)

73) 전규찬(기획) 한종선․전규찬․박래군(2012). 『살아남은 아이』서울: 문주, 126쪽

99


100


발표 5]

형제복지원 사건 피해자 트라우마와 그 치유

민문경(인권의학연구소∙김근태기념치유센터)

101


[발표 5]

형제복지원 사건 피해자 트라우마와 그 치유 민문경 | 인권의학연구소∙김근태기념치유센터

1. 형제복지원 사건과 트라우마

- 형제복지원은 지옥이었습니다. 말 그대로 지옥. 군대보다 더한 지옥이었습니다.

- 두 달 간의 잊고 싶은 기억, 하지만 잊혀지지 않는 악몽 - 수십 년이 흘렀고, 다 기억도 안 나는데 여전히 영향을 주는 거죠. 이건 지금 까지 이어지는 그 시대의 아픔이에요. - 나이가 44살인데 아직도 그 아이의 고통 속에 있다고 볼 수 있죠. 위 진술들1)은 형제복지원 사건 생존자들의 증언이다. 트라우마(trauma)란 심리 적 외상을 말한다. 심리적 상처와 고통으로 이어지는 경험이나 사건 그 자체를 지 칭하기도 하고 이러한 경험으로 인한 상처를 말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 충격적인 사건이 끝났는데도 여전히 사건이 계속되는 것처럼 스트레스가 지속되는 증상들을 일컬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이하 PTSD)라고 부른다. 형제복지원 사건은 그 자체가 일상적인 강제노역과 폭력, 굶김, 학대, 성폭 력 등이 자행되었다는 점에서 트라우마틱하다. 또한 생존자들의 생생한 증언으로 미뤄볼 때 사건이 세상 밖으로 알려진지 3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생존자들이 PTSD로 고통받고 있을 가능성이 보인다는 점에서 치유 방안에 대한 논의가 시급한 사안이다. 1) 본 발제문에 인용된 생존자들의 증언은 2013년 10월 10일(목) 형제복지원 사건 진실규명 을 위한 대책위(준) 주최로 카톨릭청년회관에서 열린 [87년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 피 해자 증언대회] 증언록자료집에서 발췌하였습니다.

103


트라우마틱한 사건은 공통적으로 경험이 생존자를 압도하고 사건의 영향에서 벗 어날 수 없다는 무력감을 느끼게 만든다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형제복지원 사건은 사건이 대인 간에 의도적이고 지속적으로 벌어진 외상 사건이기에 더욱 참 혹하고 반인권적이다. 누군가는 진실을 은폐하려 하지만 생존자들의 목소리, 생존자 들이 호소하는 후유증(증상)들이 그 실상을 여실히 보여주는 증거로 존재하고 있다. 이에 본 장에서는 생존자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외상 사건으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심리적 증상들에 대해 살펴봄으로써 생존자들의 고통을 이해하고 생존자 들의 심리적 치유 방안을 모색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끝났지만, 누군가의 삶에서는 끝나지 않은 사건으로 남아 현재형으로 진행되고 있는 형제복지원 사건을 되짚어 보고 더 이상의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우리 사회에 경종을 울릴 수 있기를 바 란다.

2. 트라우마로 인해 겪을 수 있는 증상들(DSM-52)의 PTSD 준거)

* 침투(Intrusive symptoms)

- 요즘 가끔 자다가 거기 꿈도 꿔요. 부산 근교 있는 사람들은 거진 다 한번 다 갔다 온 사람들 많을 거야. 그 정도로. 침투란 외상 사건에 대한 기억이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불쑥불쑥 떠오르는 것을 말한다.

이는 심상의 형태로 떠오르는 것이 가장 흔하지만 냄새, 맛, 소리,

감정으로 경험되기도 한다. 생존자들은 외상 경험 후에도 마치 현재 계속해서 위협 이 일어나는 것처럼 사건을 반복 체험한다. 외상 기억은 깨어 있는 동안에는 플래 쉬백(flashback)3)으로, 잠자는 동안은 외상성 악몽으로 거침없이 의식 안으로 침입 하여 생존자로 하여금 심리적, 신체적으로 강한 불편감을 느끼게 한다. 사건과 연관 된 다양한 자극들 또한 외상을 상기시키는 촉발인(trigger)으로 작용하여 재경험으

2) Diagnostic and Statistical Manual of Mental Disorders (DSM-5; 2013년 개정; 정 신장애의 진단 및 통계 편람) 3) 마치 외상 사건이 현재 다시 일어나는 것처럼 생생한 지각, 착각, 환각, 해리성 환각이 재현된다.

104


로 이어질 수 있으며 극단적인 경우에는 떠올리기 너무도 고통스러운 기억에 대한 반응으로 해리(dissociation) 경험을 불러올 수 있다. 이와 같은 침투 증상은 생존 자들의 통제감을 빼앗아 가고 일상적인 삶을 반복적으로 훼방 놓으면서 생존자들이 삶의 건강한 경로에 다시 서는 것을 어렵게 한다.

* 회피(Avoidance symptoms) - 전에 19, 20 이때는 술 먹고 길거리 막 걸어다녔는데 그 때 부산에 가고 그런

뒤로, 몇 년 후에 부산 가서 그러는데, 그렇더라고 생활이. 밖에서 휘청거리고 안다녀요. 그게 머릿속에 있지요. 회피란 트라우마 사건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사람, 장소, 물건, 대화, 활동, 상 황 등을 피하는 것을 말한다. 뿐만 아니라 트라우마 사건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생각, 감정, 신체 감각등을 피할 수도 있다. 이러한 회피 행동은 의식적, 무의식적 차원 모두에 일어나는데 특히 내적 경험의 회피는 무의식적인 경우가 많다. 때로는 회피 행동에 사용되는 도구로 강박적인 걱정, 물질 등이 이용되기도 한다. PTSD가 실제로 물질남용, 우울증과의 공병률이 높은 것은 이 때문이다. 이렇게 회피를 하다 보면 사건과 관련한 고통을 마주하지 않을 수 있어 일시적으로는 적응적인 효과를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생존자들이 자신의 삶의 기회들을 제한하고 미래를 계획하고 대비하는 것과 관련된 어떠한 주도성도 포기하도록 만들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생존 자를 관계에서 고립시키며 삶의 질을 협소하게 만든다.

* 사고와 기분의 문제(Negative changes in thoughts and moods) - 마지막으로 형제복지원에 강제로 잡혀가서 다시 도망쳐 나오기까지는 이상하

게 기억이 없습니다. 아마도 기억하기 힘든 끔찍한 기억들이었나 봅니다. 형 제복지원에서 나와서 저는 지금까지 일용직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형제복 지원에 있으면서 폐결핵을 앓게 된 것 같은데 그 역시 잘 기억이 나지 않습 니다. - 요즘 와서 진짜 죽고 싶다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부끄러움, 수치심, 내 안에

105


치욕… 남편이 알게 될까봐 병원에 가지도 못하겠어요. 알리고 싶지 않아요. 결혼 초창기에 우여곡절이 많았고, 내 몸이 힘든데 애들은 내 말을 잘 듣지 않는 것 같고 그러니까 나도 폭력적으로 나가게 되고. 이런 내가 싫어지니까 자살 충동을 느껴요. (중략) 고통 없이 한 번에 죽을 수만 있다면… 충동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에요. 죽기 전에는 절대 이거 안 지워져요. 앞으로도 저 는 그 기억들을 안고 가야 되는데… 외상 사건으로 인해 생존자는 사건의 중요한 부분을 기억하지 못할 수 있다. 이 는 머리 부상, 술이나 약물 등으로 인한 것이 아니며 전형적으로 고통스러운 외상 경험에 따른 해리성 기억 상실증4) 때문이다. 또한 외상 사건을 겪은 후 사건 이전 과 비교하여 자신, 타인, 세상에 대해 지속적이고 과장된 부정적인 신념이나 기대를 갖는 변화를 겪기도 한다. 예를 들어 자신은 존재가 본질적으로 나쁘고 영원히 손 상된 존재이며, 타인은 더 이상 신뢰할 수 없고, 세상은 완전히 위험하다는 식의 사 고들이다. 뿐만 아니라 사건의 원인과 결과에 대해 자신이나 타인의 탓으로 왜곡된 귀인을 하기도 한다.

사건의 원인과 결과에 대해 자신이나 타인을 비난하는 것은 수치심과 분노의 정 서적 문제들로도 이어질 수 있다. 생존자는 공포, 분노, 죄책감, 수치심 등의 부정 적인 감정 상태를 지속적으로 느끼며 한편에서는 과거에 즐겼던 활동에 대한 흥미 를 상실할 수 있다. 대인관계에 대한 무관심과 거리감을 느끼며 행복감, 사랑, 즐거 움과 같은 긍정적인 정서를 느끼지 못하기도 한다. 사건은 계속 입력되지만 의미화 되지 못하고 지각은 둔해진다. 이러한 사고와 정서에 있어서의 부정적인 변화로 인 해 생존자는 치유에 필요한 통합 과정을 방해 받게 된다.

* 각성(Arousal symptoms)

- 불꺼진 방에 들어가지 못하고 수면제를 복용하는 등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고 4) 기억에 저장되어 있지만 개인에게 중요한 정보를 갑자기 회상하지 못하게 되는 장애이다. 주로 개인의 생활사의 측면들에 대한 회상에 있어서의 단절을 보고하는 것으로 나타난 다.

106


있다. 일반적으로 인간이 위협을 느끼면 일시적인 경계 태세에 따라 각성 반응을 보인 후 위협이 사라짐에 따라 경계 태세를 푸는데 외상을 경험한 뒤에는 사건이 지나갔 음에도 불구하고 영속적인 경계 태세를 갖추기도 한다. 언제 올지 모르는 위험에 늘 대비하는 것으로 침습적인 기억이 오는지 ‘망 보고 있는 상태’인 것이다. 과하게 각성이 되면 쉽게 짜증을 내거나 화낼 수 있다. 조금만 건드려도 분노가 폭발하며 잦은 말싸움, 과격한 비판, 참을성 부족 등이 목격되기도 한다. 외상 생존자는 더 이상의 상처를 입지 않도록 지나치게 조심하여 안전에 대한 강박적 염려를 나타내 며 항상 깨어있기 때문에 안전한 장소에서도 마음이 가라앉지 않는다.

한편, 과도한 각성은 주의 집중 및 기억의 문제로 이어지기도 한다. 과도한 놀람 반응, 잠들거나 깊은 수면의 어려움, 충분히 휴식하지 않은 느낌 또한 외상 사건과 관련한 각성의 변화로 인한 것들이다. 외상 생존자들이 침습적 기억과 계속 전쟁 중이라면 이러한 어려움들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는 결과적으로 일상적인 과제 수행 및 인간관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

3. 생존자들을 위한 치유 방안

- 단지 형제 복지원에 있었다는 기억만 있는 거예요... 전 어린시설 사진 한 장 없어요. - 그때는 뭣도 모르는 어린 나이였는데 나중에 커서 보니 어린 시절을 그 안에 서 다 보냈다는 게, 그 시간이 너무 아깝습니다.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이니까 요. 제 젊은 시절을 그렇게 보낸 것에 대해 국가에, 박인근 회장에게 손해배 상 받고 싶습니다. 지난 추억과 살아온 시간, 그런 거를 전부 보상받아야 하 지 않겠습니까. 잃어버린 세월을 다시 찾고 싶습니다. - 사람의 과거가 늘 완벽하지는 못해요. 그렇지만 그런 잘못이 있으면 그걸 현 재에 와서 되새겨보고 다시는 이런 일을 세상에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하는

107


건데. 그래야 발전이 있는 거지, 그걸 얼버무리고 대충 이렇게, 세월이 지났으 니까 없던 일로 해가지고 그냥 역사 속으로 파묻어 버리면 언제든 반복될 수 도 있는 문제잖아요. (중략) 이제 사람들이 알아야지요. 그래야 다시 반복되지 않을 테니까. - 억울한 거는 공부하고 부모 사랑 받을 나인데. 매일매일 맞아가면서 컸다는 게 그게 참.. 지금 생각해도 안타깝고. 인생에 그런 게 자꾸 떠오르고 하다 보 니까 99프로 차지하는 거다. 힘들어도 생각나고. 1프로는 내 운명이다 생각하 고 살아요. 외상 사건으로 인한 각성, 주의, 지각, 정서의 변화 등은 적응력을 드러내는 정상 적 반응이며 심한 스트레스에 대한 보편적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반응들 은 위협당한 사람이 싸우거나 도망갈 수 있도록 힘을 주기 때문에 상황에 대처하여 자신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그렇지만 상황이 종료된 이후에도 증상이 유지되는 것은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일이며 생존자들이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데 엄청난 에너 지를 빼앗아 가기 때문에 외상 이후의 삶 재건에 방해가 된다. 형제복지원 사건의 생존자들은 충격적인 사건의 결과로 지금까지 심리적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들은 하나같이 사건으로 인해 삶의 한 부분이, 소중한 어린 시절의 경험이 송두리째 파 괴당하고 없어졌다고 보고한다. 그 시간들은 생존자의 연속적인 삶 선상에서 단절 된 시간이며 다른 사람들에게도 온전히 이해받을 수 없기에 역시 단절된 시간이다. 시간을 돌이킬 수 없다면 누가 무엇으로 그 단절을 연결시키고 생존자들의 아픔을 치유할 것인가.

생존자들은 말한다.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아야 한다고 말이다. 형제복지 원 사건과 같이 집단으로 발생한 트라우마의 경우에서는 특히나 외상 생존자 개인 에 접근하는 심리적 치료 뿐만 아니라 배상적 정의(reparative justice)가 치유적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Danieli5)에 따르면 배상적 정의는 그 자체로 충

5) Danieli, Y. (2009). Massive trauma and the healing role of reparative justice. Journal of Traumatic Stress, 22(5), 351-357.

108


분하지는 않지만 집단 트라우마 이후의 치유 과정 중에서 필수적인 요소이다. 관련 된 예로 고문 생존자 중에서 인권을 유린한 고문 집행자가 무죄로 방치된 상태에 있는 것에 대해 분노를 느낀 사람이 정신적 후유증이 지속될 가능성이 높으며 고문 과 고문 생존자에 대한 사회 정치적인 결정은 심리 치료의 효과와 밀접하게 관련되 어 있다는 연구결과6)가 존재한다. 사회적으로 생존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다시는 이같이 일이 되풀이되지 않게끔 정당한 배상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은 생 존자들이 자기 자신과 또한 타인 및 공동체와 잃어버렸던 연결감을 회복시키는 효 과를 가져올 것이다. 전문적인 심리 치료 역시 지원돼야 할 중요한 부분이지만 외 상 기억을 통합하여 궁극적으로는 외상 사건 이전의 연결감을 복구시킨다는 점에서 는 크게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은 Herman의 저서 「트라우마」 중 한 단락을 인용한 것이다. 생존자들이 더 이상 형제복지원 사건의 영향력 아래에 서 무력함을 느끼지 않도록, 우리 사회가 생존자들의 치유를 촉진하는 “집단”으로 기 능할 수 있기를 바란다.

「외상 사건은 개인과 공동체를 연결하는 끈을 파괴했지만, 살아남은 사람들은 다 른 사람과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으로 존재감, 자기 가치감, 인격을 지켜낼 수 있음 을 배운다. 결속된 집단은 공포와 절망에 대항할 수 있는 강력한 보호책을, 그리고 외상 경험에 강력한 해독제를 제공한다. 외상이 고립시킨다면, 집단은 소속감을 재 생한다. 외상이 수치심을 느끼게 하고 낙인을 가한다면, 집단은 증인이 되어 경험을 인정한다. 외상이 피해자를 격하시킨다면, 집단은 그녀를 존중한다. 외상이 피해자 의 인격을 부정한다면 집단은 그의 인격을 회복시킨다.」 [참고문헌] 조윤화, 주혜선, 박철옥 (2013). 「트라우마 심리치료 기본과정」 자료집. Herman, J. L. (1997). Trauma and recovery : Aftermath of violence. Basic Books. 최현정 역(2007). 트라우마: 가정폭력에서 정치적 테러까지. 서울: 플래닛.

6) 심은지, 민성길, 이창호, 김주영, 송원영 (2004).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들의 로샤 반응 특 성. 한국심리학회지: 임상, 23(1), 169-187.에서 재인용

109


110


발표 6]

형제복지원 피해사건에 대한 국가책임과 입법 방향

조영선(민변 과거사위)

111


[발표 6]

형제복지원 피해사건에 대한 국가책임과 입법 방향 조영선 | 민변 과거사위

1. 들어서며 국가가 ‘위탁’이라는 형식으로 만든 ‘아우슈비츠’, 형제복지원.

누군가는 ‘또 다시’, 또는 ‘이제 와서’ 형제복지원 문제가 왜 ‘문제가 되느냐’고 되묻는다. 과거 1975년 또는 1987년으로부터 30년이 다 지난 문제를 이제 와서 꺼 내느냐고 묻는다. 그러나 ‘이제야’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과거 30년 전의 문제는 형제복지원 박인근 개인의 횡령 등에 대한 문제로 왜곡, 축소되었을 뿐 당시 수용 자 3000여명1)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왜, 이곳에 강제격리2)되어 강제노동을 당하 여야 하였는지, 그리고 누군가는 왜 폭행으로 사망에 이르렀는지 밝혀진 바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박인근에 대한 특수감금죄가 무죄가 되었고, 피해자들에 대한 폭행, 치사 등에 대한 조사가, 공소제기가 왜 이뤄지지 않았는지 밝혀진바 또한 없다. 그 런 면에서 늦었지만 이제야 말할 수 있다 라고 밖에 할 수 없다.

인권침해가 위탁한 ‘사회복지법인’에서 일어났다는 이유로 국가의 책임이 면해지 는 것은 아니다. 특히 강제격리수용의 근거가 된 훈령은 여전히 당시 헌법이나 형 사소송법 등 관련 법률에 위반한 위헌적, 위법적이었으며, 감독관청인 정부와 부산 시의 관리감독 부실 또한 제반 사정에 비추어 드러나고 있다. 1) 김용원 변호사, 박인근에 대한 감금죄 등 논고문에 따르면 ‘형제복지원 수용자수는 1987.1.15.현재 3,174명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2) 신민당 보고서에 의하면 당시 포항제철 직원(연련과) 서상렬(당시 27세)는 휴가차 부산에 왔다가 역 대합실에서 공안원 직원 김대수씨에 의해 연행되었다고 밝히고 있다.(4면)

113


2. 형제복지원 피해사건에 대한 국가책임

가. 형제복지원의 인권침해

형제복지원에서 행해진 인권침해에 대해서는 한종선의 ‘살아남은 아이, 끝나지 않 은 이야기’를 비롯한 몇몇 피해자들의 진술서, 그리고 김용원 변호사의 수사기록 및 증언, 신민당의 ‘부산형제복지원 신민당 진상조사 보고서’(이하 신민당 보고서라 한 다) 등이 일부 말해주고 있다. 대체로 이들은 부산역 등지에서 ‘배회’하다 경찰에 붙잡혀 강제로 들어온 이들도 있고, 일부는 그곳에 가면 배불리 먹을 수 있다, 기술 을 배울 수 있다는 허언에 속아 ‘걸어’ 들어온 이들도 있었다.

형제복지원에서 행해진 인권침해는 소위 부랑인이라는 이유로 행해진 영장에 의 하지 아니한 체포‧강제격리, 복지원에서 본인의 의사에 반한 감금(강제수용), 강제노 동, 폭행, 상해, 성폭력 그리고 이로 인한 치사(살인), 정신적 장애 등 이루말할 수 없는 고통으로서 ‘아오지 탄광’ 내지 ‘생지옥’3)에 다름 아니었다.

먼저, 체포 및 강제격리‧수용과 관련해서는, 신민당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경찰 내부 근무평점 관련하여 구류자 2-3점, 형제원 입소는 5점으로서 매겨져 있었으며 (2면), 1986년 전체 수용자 3,975명 중 수용의뢰기관이 경찰인 것이 3,117명, 구청 이 253명이었다(2면)고 밝히고 있는데, 이는 복지원에의 강제격리, 수용이 수용자의 자발적 의사가 아닌 경찰 내지 관공서에 의해 조직적으로, 정화차원에서 ‘강제’로 수용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또한 강제감금과 관련해서는, 김용원 변호사는 1987.1.16. 형제복지원에 내려가보 니, ‘건물마다 출입문에는 안팎으로 견고한 자물쇠 장치가 되어 있었다. 이 시설은 사회복지시설이 아니고 완벽한 감금시설이었다. 병동이라고 하는 것도 있었다. 안에 사람들이 있는데도 밖으로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안내하던 사람이 이곳은 중증 3) 신민당 보고서에 의하면, 조사내용에 대한 소견에서 수용자들은 형제원을 ‘아오지 탄광’, ‘감옥보다 더한 곳’, ‘박인근 공화국’ 등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박인근을 아바이 동무, 그 의 둘째 아들 박두선 (요양원 총무)을 정일동무로 부르고 있었다고 밝히고 있다.(7면)

114


결핵환자들이 수용되어 있는 곳이니까 들어가지 말라고 하였으나 나는 자물쇠를 열 게 한 후 들어가 보았다. 그곳에는 죽음의 그림자들이 짙게 드리워진 흉측한 몰골 의 사람들이수십 명 여기저기 모여 있었다.’라고 회고하고 있다.4) 말하자면, 본인의 자유의 의사에 의해 출입할 수 없는 구조였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강제노역과 관련해서는, 신민당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복지원의 건강한 사람은 하 루 300-500원, 지체부자유 등은 200원, 그리고 요양원은 3일에 토근 1개였다(4면) 이었다고 밝히고 있는바, 이는 강제노동을 당하였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한편, 신민당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1975년부터 1986년까지 형제복지원 기간지 ‘새마음’에 나와있는 자료를 재정리하였는데 총 인원 18,521명 중 513명이 사망하 였으며, 특히 재소자가 3000명에 초과하였던 1985년 1986년에는 각 89명, 95명에 이르는 사망자가 발생하였다고 밝히면서(10)5), ‘수용인원이 너무 많아 관리능력이 한계에 달하였거나 예전보다 현재 인권상황이 매우 악화된 것에 기인’한다고 밝히 고 있다.

또한 신민당 보고서는 사인에 대한 의혹을 버릴 없다면서, ‘86년 사망자 95명 중 구포남 등 6명은 연고자에게 사체가 인계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본적 주소가 4) 2013.3.22. 형제복지원 사건 진실규명 및 해결방안 모색을 위한 토론회. 발표문 24면. 5) 아래 표1은 신민당 보고서 10면을 재인용한 것임. 보고서에 따르면 ‘아래 도표는 형제복 지원 계간지새마음지에 나온 자료를 재정리한 것임’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또한 ‘()앞 수 치는 보고서의 수치이며, ()안의 수치는 재계산 결과 수치임’라고 밝히고 있다. 결국 1975.-1986년까지 총 수용인원(연도별 인원 총계)은 21,685명이나, 1년이상 초과 수용인원 등을 감안하면 실제 수용자는 이보다는 적을 것으로 판단된다. 표1. 연도별 사망자 현황 년도별 75 76 연도말 인원 561 816 사망자 2 2 사망률(%) 0.4 0.3(0.2) 년도별 81 82

77 1,111 26 2.3 83

78 1,392 44 3.2 84

79 1,325 36 2.7 85

80 1,221 34 2.8 86

연도말 인원

1,713

1,985

2,525

2,861

3,011

3,164

사망자 사망률(%)

36 2.1

53 2.7

57 2.6(2.3)

39 1.4

89 3.0

95 3.0

115

총계

18,521 (21,685) 513


불상으로 되어 있고(새마음 1987.1월호 페이지 193-201)’, ‘김상택 등 31명은 사체 처리가 불명하고, 연고자에게 사체가 인계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이천용의 경우도 주소지에 연고자가 없는 것으로 확인되었다(이상 8면)’고 확인하고 있다. 이에 보고 서는 ‘사체가 병원 등에 실험용으로 팔려간다는 면담자 주장에 유의하지 않을수 없 으며, 적어도 새마음지에 기재된 사인과 사체인계 등의 기록이 많은 경우가 허위기 재이며, 사실과 다르다는 점은 확인할 수 있었다’(이상 8면)고 의견을 개진6)하고 있 다. 말하자면, 사망 경위는 원내의 폭행에 의해 자행되었으며, 사체 또한 병원에 불 법으로 매도되었음을 반증하고 있는 것이다.

나. 형제복지원 피해사건에 대한 국가의 책임

소위 부랑인에 대한 수용의 근거는 1975.12.15. 내무부 훈령 제410호로 발령한 ‘부랑인의 신고‧단속‧수용‧보호와 귀향 및 사후 관리에 관한 업무처리지침’에 의한 것이었다. 훈령에 의하면 ‘일정한 정주가 없이 관광업소, 접객업소, 역, 버스터미널 등 많은 사람들이 모이거나 통행하는 곳과 주택가를 배회하거나 좌정하여 구걸 또 는 물품을 강매함으로써 통행인을 괴롭히는 걸인, 껌팔이, 앵벌이 등 건전한 사회 및 도시질서를 해하는 모든 부랑인’(제1장 제2절)을 그 대상으로 하였으며, 심지어 ‘노변 행상, 빈 지게꾼, 성인 껌팔이 등 사회에 나쁜 영향을 주는 자들’을 준 부랑 인으로 규정(제1장 제3절 제6호)하여 부랑인 대책에 준하는 단속조치를 하였다. 말 하자면 이들은 제거되어야할 대상이었던 것이다.

다른 한편, 1981.4.10.자 전두환이 총리에게 보낸 지휘서선에 의하면, ‘총리귀하. 근간 신체장애자 구걸행각이 늘어나고 있다는 바, 실태 파악을 하여 관계부처 협조 하에 일정 단속보호조치하고 대책과 결과를 보고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여, 전 국적으로 부랑인 검속을 강화하도록 지시하였다7). 결국 내무부 훈령이 존속하는 전 6) 또한 김용원 변호사는 작업장에서 맞아 죽은 수용자의 사체처리경위를 조사하다가 복지 원 의사가 사망진단서를 신부전증이라고 허위로 기재한 것이 밝혀져, 구속하려고 하였으 나 검찰총장 동생이라는 사람이 나타나 검사장에게 청탁하여 불구속 수사지휘가 떨어졌 다고 회고하고 있다. 2013.3.22. 형제복지원 사건 진실규명 및 해결방안 모색을 위한 토 론회 (발표문 27면)

116


제에서 대통령의 이러한 지시는 복지원 수용인원을 대폭 증가하게 하는 한편, 복지 원의 수용, 감금을 정당화함으로써 반사적으로 인권침해가 대폭적으로 확대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복지원 내에서의 인권침해는 별론으로 하더라도, 최소한 훈령에 의한 체포, 강제 격리, 강제수용은 당시 형사소송법, 경찰관직무집행법, 경범죄처벌법, 사회복지사업 법, 생활보호법 등 그 어떤 근거에 있지 않은 것으로서, 오직 내무부 장관의 내부 업무지침인 ‘훈령’에 의한 것이었다.

당시 유신 헌법8)에 의하면, 법률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체포·구금·압수·수색·심문· 처벌·강제노역과 보안처분을 받지 아니할 자유(제10조 제1항)을 비롯하여 고문을 당 하지 않을 자유(제2항), 영장에 의한 체포, 구금(제3항), 거주이전의 자유(제12조)를 규정9)하고 있는바, 법률에 의하지 아니한 ‘훈령’에 의한 체포‧격리‧구금 등은 당시 헌법에 위반되는 것임이 명백하다. 물론 헌법이 인정한 제 권리를 구체화한 형법, 형사소송법상의 제 규정을 위반한 것임을 재론의 여지조차 없다.

한편, 신민당 보고서에 의하면, ‘당시 형제복지원은 부산시로부터 위탁받아 운영 하는 비영리 법인체이며, 전체 예산의 80%를 국고 및 시비로 지원받고 있었’는데, ‘결산보고, 안전점검, 교육의 실효성, 원생에 대한 행정지도, 감사가 전혀 없’었다고

7) 김용원 변호사. 전게서 31면 참조 8) 대한민국헌법 [시행 1972.12.27.] [헌법 제8호, 1972.12.27., 전부개정] 9) 대한민국 헌법 [시행 1972.12.27.] [헌법 제8호, 1972.12.27., 전부개정] 제10조 ①모든 국민은 신체의 자유를 가진다. 누구든지 법률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체포·구금·압수· 수색·심문·처벌·강제노역과 보안처분을 받지 아니한다. ②모든 국민은 고문을 받지 아니하며, 형사상 자기에게 불리한 진술을 강요당하지 아니한다. ③체포·구금·압수·수색에는 검사의 요구에 의하여 법관이 발부한 영장을 제시하여야 한다. 다만, 현행범인인 경우와 죄를 범하고 도피 또는 증거인멸의 염려가 있을 때에는 사후에 영 장을 요구할 수있다. ④누구든지 체포·구금을 받은 때에는 즉시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 다만, 법률 이 정하는 경우에 형사피고인이 스스로 변호인을 구할 수 없을 때에는 국가가 변호인을 붙 인다. 제12조 모든 국민은 법률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거주·이전의 자유를 제한받지 아니한다.

117


밝히고 있으며, 관계공무원은 전혀 업무파악조차 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시예산 중 2년 동안 4억여원의 횡령한 사실을 보아도 ‘부산시의 명백한 직무유기임이 인정’ 된다고 밝히고 있다(이상 5면 참조).

또한, 당시 내무부 훈령에 의하면, ‘지 파출소 소장은 수용기관에 1주에 1회 순찰 해야한다고 되어 있는데, 한 번도 이를 지키지 아니함으로써 구타, 가혹행위 등 인 권유린을 방치하였으며, 오히려 형제복지원과 유착되어 있다고 수용자들은 주장하고 있다’10)고 밝히고 있다.

따라서 형제복지원을 비롯한 당시 복지원에의 최소한의 체포‧강제격리‧강제수용은 헌법, 형법, 형사소송법 등에 위반한 위헌‧위법한 훈령에 의한 것이었을 뿐만 아니 라 공무원의 위헌. 위법적인 훈령에 근거한 위와 같은 행위는 ‘고의’에 의한 불법행 위를 구성하고, 나아가 복지원내에서의 감금‧ 강제노동, 그리고 폭행 등 가혹행위, 치사 등에 대서는 적어도 관리감독의 소홀에 따른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없다11) 할 것이다.

3. 형제복지원 피해사건의 진상규명 등을 위한 입법방향에 대한 논의 가. 입법방향의 기조

형제복지원 사건은 좌우, 진보-보수의 문제도 아닌 인권문제이다. 또한 과거 한때 의 문제가 아니라 현재 피해자들의 고통속에서, 혹은 형제복지원지원재단의 건승속 에서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해결해야할 과제에 다름 아니다.

10) 신민당 보고서에 의하면, 당시 수용자들은 경찰이 자기들을 잡아오면 근무평점 5점, 형 제원에서 일정한 수수료를 받고 있다고 주장한다고 밝히고 있다. 11) 형제복지원 내에서의 인권침해를 국가에게 그 책임을 물을 수 있느냐와 관련해서, 관리 감독의 범위, 형제복지원과 부산시 내지 보건복지부 등 관계기관과의 관계, 관리감독 행 태 등 다각적인 조사 등을 통하여 밝혀야할 부분이기도 하나, 적어도 관리감독 책임을 면할 수는 없다 할 것이다.

118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형제복지원 피해사건의 강제격리(체포), 강제수용 등에 대해서는 최소한 국가의 ‘고의’에 의한 불법행위 책임을, 인권침해에 대해서는 관리 감독상의 (중)과실 책임을 면할 수 없다고 본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국가의 불법 행위 배상책임까지 물어야한다고 할 수 있으나, 입법적인 문제, 배상책임의 한계 등 에 비추어, 입법적인 측면에서는 ‘훈령’에 의한 손실보상적 측면에서 생활지원, 의 료지원 및 보상까지 입법을 하고, 배상은 국가배상책임이 조사과정에서 밝혀진 경 우에는 국가로 하여금 입법적으로 해결하도록 권고하는, 2원적인 방식이 현실적인 것으로 보인다.

담겨야 할 입법적인 내용이야 다다익선임은 다언을 요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현 실적으로 여야구조를 혜량하지 아니하면 안 될 것이어서, 최소한 입법적으로 담겨 야할 가치 내지 지향점을 입법방향에서 논하기로 한다. 아울러 ‘최소한’ 형제복지원 사건의 현재적 해결을 위한 바람직한 법률안의 내용은 무엇이어야 하는가라는 측면 에서 의견을 개진한다는 점 또한 밝힌다.

입법안의 내용과 관련해서는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기본법(이하 진화위법이라 한닫), 이낙연 및 진선미 의원의 진화위법 개정안,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 등에관한법률(민주화운동관련자법), 한센인피해사건진상규명및생활지원등에관한법률 (한센피해자법), 5.18민주유공자예우에관한법률, 5.18민주화운동관련자보상등에관한 법률,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특별법(5.18특별법) 등을 기초로 최정학 교수의 형 제복지원 입법안을 상호 비교적으로 검토하였으며, 몇가지 구별징표라고 할 수 있 는 목적, 진상규명 내지 활동범위, 위원회의 조사권한, 보상 및 생활지원문제, 명예 회복방안 등으로 나눠서 검토한다.

나. 법안의 명칭

통상 과거청산의 방법에 대해 역사가 볼프손(Wolffsohn)은 4W(Wissen[앎], Werte[가치], Weinen[슬퍼함], Wollen[의지])를 제안한 바 있다. 즉 과거청산이란

119


무엇이 일어났는지 알아야 하고, 그 행위를 악한 것으로 가치를 판단해야 하고, 희 생자를 위해 최소한 상징적으로 슬퍼해야 하며, 다른 좀 더 도덕적이고 일반적인 어떤 것으로 승화시키려는 의지를 내보이는 것을 포함한다는 것이다12).

2005.5.23 진화위법이 제정되고, 위 법에 기초하여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 원회13)가 조사활동을 개시하였는데, 위 기본법은 주로 진상규명에 주안을 두면서 배상,명예회복 등에 대한 조치는 별도의 입법적. 행정적 방식을 염두에 두었다고 볼 수 있다. 민주화운동관련자법은 민주화운동관련자로 인정된 자에 대해서 보상과 생 활지원 등을 염두에 두고 있으며, 한센피해자법은 한센인들의 경제적, 의료적으로 어려운 현실적 사정을 고려하여 생활지원과 의료지원 등을 그 효과로 부여하고 있 다.

그런 면에서, 형제복지원 사건 또한 최소한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그리고 피해 자 보상 및 생활지원 등의 내용이 담길 필요가 있다. 또한 피해‘배상’과 관련해서는 본 입법안에 담길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으나, 입법전략 등에 비추어 별도의 국가 배상소송 절차, 별도의 입법절차 등을 통하여 해결하는 것이 현실적인 것으로 보인 다. 따라서 형제복지원 입법안의 명칭과 관련해서는 ‘형제복지원 피해사건 진상규명 및 피해자 생활지원 등에 관한 법률’(안) 입법목적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다. 법안의 목적에 관한 사항

12) 김민철 [한국과거청산의 성과와 과제]. 9면 일부 요약 이에 대해 김민철(민족문제 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책임 규명을 추가하여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방 식을 통해 과거청산이 진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서, ① 무엇이 일어났는가(진상 규명) ② 그 때 일어난 일이 옳았는가 틀렸는가(가치), ③ 일어난 일에 누가 어떤 책임이 있는가(책임 규명), ④ 피해자의 슬픔을 이해하고 같이 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슬퍼함), ⑤ 이를 통해 현실의 문제를 개선 하려는 의지가 있는가(의지) 등을 들고 있다. 이재승 교수는 [국가범죄]에서 과거청산의 5대원칙인 ① 진실규명, ② 책임자 처벌, ③ 피해 배 상,④제도개혁, ⑤ 문화적 구축 등을 제기하기도 하였다. 13)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2005년 12월 활동을 시작하여 2006.4.24.부터 2010.6.30.까지 조사활동을 마친 후 2010.12.31.해산하였다.

120


진화위법은 진상규명을 통한 화해.국민통합14)을, 민주화운동관련자법15)은 피해자 및 유족의 명예회복과 보상 등을 통해 생활안정 등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이법은 ‘형제복지원 피해사건의 반인권적 인권유린을 조사하여 은폐 된 진실을 밝혀냄으로써 이와 관련하여 희생된 자와 그 유족에 대하여 국가가 명예 회복 및 보상을 행하고, 이들의 생활안정과 복지향상을 통하여 국민의 인권신장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한다’로 함으로써, 최소한의 보상을 행하는 것을 요건으로 할 필 요가 있다.

라. ‘형제복지원 피해사건’의 법적 의미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사회복지법인 형제복지원은 1975.7.25부터 1987.1.17. 폐쇄될 때까지 부산시 북구 주례 2동 산18번지를 중심으로 3,000여명 이상의 소위 부랑인을 수용하였다. 특히 본인의 주거 이전 및 퇴거 자유와 무관하게 수용 감금 되었으며, 강제노동, 폭행 등 가혹행위, 성폭력 등을 당하였으며, 심지어 513명에 이르는 수용자가 사망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형제복지원 피해사건이란 1975.7.5.부터 1987.1.7.까지 사단법인 형제복 지원에 격리 수용되어 폭행, 협박, 감금, 강제노역, 성폭력 등을 당하거나 이러한 방법으로 인해 사망, 행방불명, 상이 등에 이른 사건’으로 정의하고자 한다. 또한 ‘피해자’는 ‘형제복지원 사건으로 인하여 피해를 입은 사람으로서 위원회로부터 피 해자로 인정된 사람’이라 함이 적절할 것이다.

14) 제1조(목적) 이 법은 항일독립운동, 반민주적 또는 반인권적 행위에 의한 인권유린과 폭력․학살․의문사 사건 등을 조사하여 왜곡되거나 은폐된 진실을 밝혀냄으로써 민족의 정 통성을 확립하고 과거와의 화해를 통해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국민통합에 기여함을 목적 으로 한다 15) 제1조(목적) 이 법은 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희생된 자와 그 유족에 대하여 국가가 명 예회복 및 보상을 행함으로써 이들의 생활안정과 복지향상을 도모하고, 민주주의의 발전 과 국민화합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한다.

121


마. 형제복지원 피해사건 진상규명 위원회의 구성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정부에 속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활동하며, 상 임위원 4인을 포함한 15인의 위원으로 구성하되, 국회가 선출하는 8인, 대통령이 지명하는 4인, 대법원장이 지명하는 3인으로 구성되도록 하고 있다. 또한 민주화운 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심의위원회는 국무총리 산하에 위원장을 포함하여 9인 이내 로 대통령이 임명하여 구성하되, 대법원장 3인, 국회의장 추천 3인이 포함되도록 하 고 있으며, 한센피해자법에 의하면, ‘한센인피해사건 진상규명위원회’는 국무총리산 하, 위원장 1인을 포함한 20인 이내로 구성하고, 하위에 한센인피해사건 진상규명 실무위원회를 두고 있다. 말하자면 물론 구성원 수에서도 차이가 있지만, 국무총리 등 산하에 설립하는지, 대법원, 국회 등의 추천에 의해 구성하는지 등에 차이가 있 다.

전국적, 일제강점기 이후의 피해사건에 대한 진상규명 등을 목적으로 하는 진화 위와 달리 일정시점, 일정사건을 중심으로 그 진상규명을 목적으로 하는 만큼 독립 적일 필요는 없고, 국무총리 산하의 15인 정도의 위원회를 구성하되, 한센피해사건 실무위원회 또는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심의위원회 산하의 민주화운동관 련자분과위원회 등 업무적으로 중복하는 구조보다는, 위원회의 업무 보조를 위하여 별도의 소위원회를 두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단된다.

바. 형제복지원 피해사건 진상규명 위원회의 조사권한

종래 진화위법이 동행명령만을 규정함으로써 특히 국정원 등 국가 공권력행사의 당사자들에 대한 실질적인 조사의 한계를 가졌다는 지적이 있었다. 특히 형제복지 원과 관련해서는 증거보전 절차, 압수, 수색 등 강제수사절차, 그리고 청문회 등의 절차를 인정할 필요가 있는지 논의할 필요가 있다.

특히, 형제복지원 관련 자료는 형제복지원을 이은 형제복지원지원재단이나 부산

122


시 등에 있을 가능성이 있는 만큼, 최소한 증거보전 절차와 압수수색 절차는 필요 하다 할 것이다. 또한 청문회 등과 관련해서는 형제복지원 구금시설의 형태, 조직, 인권침해 상황 등에 대한 조사, 그리고 소위 수용 내지 구금시설에 대한 반성적 검 토를 위하여 청문회를 규정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아울러, 위원회 조사권한과 진상규명의 취지를 확보하기 위해서, 최소한 위원회의 의결로 관계기관에게 자료나 물건의 제출을 명령할 수 있고, 기관 등은 정당한 사 유 없이 자료 및 물건의 제출을 거부할 수 없도록 하고, 이를 위반한 경우에는 과 태료에 처함이 적절할 것이다.

사. 형제복지원 피해사건 피해자들을 위한 보상 및 생활지원금 등 절차

진화위법은 국가로 하여금 피해자를 위한 피해 및 명예회복을 위한 적절한 조치 를 취할 의무 (제34조 내지 36조)와 더불어 희생자를 위한 특별사면.복권을 건의할 수 있도록 하고 있을 뿐 보상, 배상 등에 대한 규정을 두고 있지 않았다. 다만 민주 화운동관련자법에 의하면 특별사면.복권의 건의 및 전과의 말소(제5조의 3), 복직의 권고(제5조의 5), 학사징계기록 말소 등의 권고 (제5조의 5), 사망, 행방불명, 상이 자에 대한 보상(제7조), 의료지원금(제8조), 생활지원금(제9조)을 지급하도록 하는 한 편, 다만 보상금 등을 받은 경우 재판상화해가 성립된 것으로 보고 있다(제18조 제 2항)

이와 유사한 한센피해자법은 피해자에 대하여, 의료지원금, 생활지원금을 지급할 수 있도록 하고 있으며, 다만 다른 법령에 의해 지급받는 경우에는 이중청구를 제 한하고 있다. 다른 한편 한센인주거복지시설 등의 설치를 규정하고 있다.

형제복지원 피해사건의 피해자로 인정된 경우 어떠한 명예회복 및 생활지원을 할 것인가, 아니면 개인적 국가배상절차로 가도록 할 것인가 등은 의회의 결단일수 있 다. 다다익선으로 명예회복과 보상, 배상 등이 함께 규정할 수 있다면 다행이라 할

123


것이나, 피해자의 규모나 정도 등이 밝혀지지 않은 이유 등으로 국가배상은 별도의 법률이나 소송 등의 절차를 통해 하는 것이 현실적일 것이다. 물론, 진선미 진화위 법 개정안에 따르면 2년 내에 배상과 보상 등에 관한법률을 제정하도록 하고 있다.

형제복지원 피해사건 피해자들은 사회적으로 소위 ‘부랑아’로서 대표적인 사회적 약자이자 자기 방어능력이 열위에 있는 사람들이다. 513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사망 에 이르렀으며 상당수가 상이를 입었으며, 현재에도 경제적 여력이 열위에 있거나 정신병력이나 상이 등이 잔존하고 있는 실정이고, 그리고 국가의 강제격리 정책으 로 인해 고통을 받았던 점을 고려하여, 일정한 사망, 상이자, 구금기간에 따른 보상 과 별도로, 최소한 생활안정과 및 그 후유장애 등에 대한 의료지원이 필요할 것이 다.

또한, 복지원이 해체된 이후 자립적으로 생존의 기본을 갖고 있는 사람이 많지 않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정신적, 육체적 곤란을 겪고 있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그 런 면에서 최소한 의료지원, 생활지원을 하도록 규정하되, 배상에 대해서는 국가의 불법행위 책임이 인정되는 경우 2년 내에 국가가 입법할 수 있도록 권고하게 하는 것도 한 방법일 것이다.

부연하여 설명하자면, 유감스럽게도 정부의 보상, 의료지원, 생활지원 등에 따르 는 경제적 부담은 사실 그렇게 많지 않을 전망이다. 일단 사망자의 경우 개인신상 을 파악할 수 있는 경우가 많지 않고, 수용자의 경우 당시 30-40대가 가장 많았던 점에 비추어 보면 이들은 대부분 현재 60-80대16)로서 고령,사망할 가능성 높으며 16) 아래 표2은 신민당 보고서 10면을 재인용한 것임. 보고서에 따르면 표1과 마찬가지로, ‘아래 도표는 형제복지원 월간지 새마음지에 나온 자료를 재정리한 것임’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아래 표2에 의하면, 1986년 당시 40-59세 사망자가 가장 많게 나오는 것을 보면 최소한 당시 위 연령 수용자가 많았고, 또한 가장 인권침해에 노출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표2. 86년도 사망자 현황(연령별) 10 20 30 40 50 60 70 연령별 0~9 총계 ~19 ~29 ~39 ~49 ~59 ~69 ~79 사망자수 3 5 10 10 28 29 5 1 91

124


그 소재파악이나 스스로 신청하는 경우는 드물 것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아. 피해자들을 위한 명예회복 방안

진화위법 제40조에 의하면 정부는 위령 사업 및 사료관 운영·관리 등을 수행할 과거사연구재단을 설립하기 위하여 기금을 출연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고, 민주 화운동관련법에 의하면, 기념사업(제23조), 추모단체 등에 대한 재정지원 등(24조) 등을 규정하고 있고, 한센피해자법은 기념사업(제8조)으로서 기념관 건립, 한센인 피해사건 관련자료의 수집.조사.연구.보존관리 및 전시, 위령공원 조성, 그밖에 관련 사업을 할수 있도록 하고 있다.

통상, 피해자들을 위한 명예회복 방안으로서는 보고서 작성, 기념관 등 역사적 사 료정리작업, 위령사업 등을 들 수 있는바, 형제복지원 피해사건 또한 이러한 명예회 복을 위한 작업이 필요할 것이다.

자. 위원회의 조사 및 활동기한

진화위법은 2005.5.31.제정하면서, ‘이법은 공포일로부터 6월이 경과한 날로부터 시행한다. 다만 위원 및 소속 직원의 임명, 이법의 시행에 관한 위원회의 규칙의 제 정, 위원회의 설립준비는 시행일 이전에 할 수 있다’(부칙 제1조, 제2조)고, 4년간 진상규명 활동을 하되, 2년의 범위에서 연장할 수 있다고 규정(제25조)하였다. 또한 한센피해자법은 공포후 1년이 경과한날로부터 시행하며, 위원회는 그 구성을 마친 날로부터 2년 이내에 한센인 피해사건 관련자료의 수집 및 분석을 완료하여야 한다 고 규정하고 있다.

평균재원 일수 사망률

440

624

504

162

408

516

234

37

391

3.3

5.5

10.9

10.9

30.8

31.9

5.5

1.1

100

125


그런데, 형제복지원 사건의 경우, 대부분 고령이거나 사회적으로 열위에 있는 지 위에 있음으로써 수용자들이 적극적으로 신청을 하는 경우보다는, 위원회가 직권으 로 조사를 해야 할 가능성이 높고, 형제복지원측 및 부산시, 그리고 정부의 협조가 반드시 필요한 상황이다. 따라서 최소한 활동기간을 2년 정도는 보장하되, 필요할 경우 1년 정도 연장할 수 있도록 함이 적절하다는 의견이다.

4. 마치며 형제복지원 피해사건은 현재 진행형이다. 독일에 아우슈비츠가 있다면 한국에는 형제복지원이 있다. 아직도 자신의 형제복지원 수용경력을 당당히 말하는 사람은 드물다. 아니 이러 한 형제복지원 진상규명을 한다는 소식조차도 접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아직도 많은 형제복지원 수용자들은 사망으로 인해, 또는 여전히 남아 있는 복지원 의 악몽으로 인해, 또는 아직도 벗어나지 못한 가난과 무지로 인하여 스스로 자기 표현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에게는 비록 형제복지원에서 벗어났지만 현실의 삶은 여전히 형제복지원인 것이다.

여전히, 형제복지원 관련해서는 김용원변호사가 밝히는 바와 같이, 박인근에 대한 수사 및 공소축소, 그리고 재판과정에서 형량이 대폭적으로 감축되고 감금 등에 대 해 무죄가 나왔는바, 이러한 검찰 및 재판과정에 제3자가 개입하였는지에 대해서, 특히 일정한 외압이 있었는지 등에 대해서도 조사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끝.

126


[별첨] ‘형제복지원 피해사건 진상규명 및 피해자 생활지원 등에 관한 법률’(안) 2014. 제정 제1장 총칙 제1조 (목적) 이법은 형제복지원 피해사건의 반인권적 인권유린을 조사하여 은폐된 진실을 밝혀냄으로써 이와 관련하여 희생된 자와 그 유족에 대하여 국가가 명예회 복 및 보상을 행하고, 이들의 생활안정과 복지향상을 통하여 국민의 인권신장에 기 여함을 목적으로 한다. 제2조 (정의) 이 법에서 사용하는 용어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1. 형제복지원 피해사건이란 1975.7.5.부터 1987.1.7.까지 사단법인 형제복지원에 격리 수용되어 폭행, 협박, 감금, 강제노역, 성폭력 등을 당하거나 이러한 방법으로 인해 사망, 행방불명, 상이, 정신적 장애 등에 이른 사건을 말한다. 2. 형제복지원 피해자는 형제복지원사 피해사건으로 인하여 피해를 입은 사람으로 서 위원회로부터 피해자로 인정된 사람 3. 유족이란 피해자의 배우자(사실상의 배우자를 포함한다) 및 직계존비속을 말한 다. 다만, 배우자 및 직계존비속이 없는 경우에는 형제자매를 말한다. 제3조 (진상규명의 범위) 1. 형제복지원 사건 2. 형제복지원 피해사건과 관련하여 위원회가 조사‧심의·결정한 사건 제2장 형제복지원 피해사건 진상규명위원회의 구성 제4조 (형제복지원 피해사건 진상규명위원회) ① 형제복지원피해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고 이 법에 따른 피해자의 심사·결정에 관 한 사항을 심의·의결하기 위하여 국무총리 소속으로 형제복지원 피해사건 진상규명 위원회를 둔다. ② 위원회는 다음 각 호의 사항을 심의·의결한다.

127


1. 형제복지원 피해사건의 진상조사를 위한 국내외 관련 자료의 수집 및 분석에 관 한 사항 2. 직권 또는 신청에 의한 조사대상 선정 및 그에 따른 조사개시결정 3. 피해자의 심사·결정에 관한 사항 4. 보상금 및 의료지원금, 생활지원금 등 (이하 "의료지원금 등"이라 한다)의 지급 결정에 관한 사항 4. 진상조사보고서 작성에 관한 사항 5. 그 밖에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을 위하여 위원회가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사항 ③ 위원회는 위원장 1인을 포함한 15인 이내의 위원으로 구성 하되, 위원장은 국무 총리가 지명하고, 위원은 관계 공무원 및 형제복지원 피해자 대표를 포함한 학식과 경험이 풍부한 자 중에서 국무총리가 임명한다. ④ 그 밖에 위원회의 구성 및 운영에 필요한 사항은 대통령령으로 정한다. 제5조 (소위원회) ① 위원회는 진실규명 등 그 밖의 위원회 업무의 일부를 수행하게 하기 위하여 소 위원회를 둘 수 있다. ② 소위원회의 구성·업무 및 운영 등에 관하여 필요한 사항은 위원회의 규칙으로 정한다. 제6조 (회의 의사 및 의결정족수) 위원회 및 소위원회의 회의는 해당 위원장이 주재 하며, 이 법에 특별한 규정이 없는 한 재적위원 과반수의 찬성으로 의결한다. 제7조 (사무처 등의 설치) ① 위원회의 사무를 처리하기 위하여 위원회에 사무처를 둔다. ② 사무처에는 사무처장 1인과 그 밖의 직원을 두며, 사무처장은 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위원장이 임명한다. ③ 사무처장은 위원장의 지휘를 받아 사무처의 사무를 관장하고 소속 직원을 지휘· 감독한다. ④ 사무처 및 위원회의 조직과 운영에 필요한 사항은 위원회의 규칙으로 정한다.

128


제3장 위원회의 업무와 권한 제8조 (진상규명 신청) ① 희생자, 피해자 및 그 유족이나 이들과 친족관계에 있는 자나 위원회 진실규명 사건에 관하여 특별한 사실을 알고 있는 자는 위원회의 직권조사에도 불구하고 위 원회에 진실규명을 신청할 수 있다. ② 제1항의 규정에 의한 신청은 최초 진상조사 개시결정일로부터 1년 이내에 하여 야 한다. ③ 제1항의 규정에 의한 친족관계에 있는 자와 특별한 사실을 알고 있는 자의 범위 는 대통령령으로 정한다. 제9조 (신청의 방식) ① 제19조의 신청은 다음 각 호의 사항을 기재한 문서로 하여야 한다. 다만, 문서 에 의할 수 없는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경우에는 구술로 할 수 있다. 1. 신청인의 성명과 주소 2. 신청 취지와 신청의 원인이 된 사실 ②제1항의 규정에 의한 신청의 절차와 방법 등에 관하여 필요한 사항은 대통령령으 로 정한다. 제10조 (각하결정) ① 위원회는 진상규명 신청이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경우에는 그 신 청을 조사하지 아니하고 각하한다. 1. 진상규명 신청이 위원회의 진실규명 조사대상에 해당하지 아니한 경우 2. 진상규명 신청 내용이 그 자체로서 명백히 허위이거나 이유 없다고 인정되는 경 우 3. 위원회가 각하한 신청과 동일한 사실에 관하여 다시 신청한 경우. 다만, 신청인 이 종전의 신청에서 제출하지 아니한 중대한 소명자료를 갖춘 경우에는 그러하지 아니한다. ② 위원회는 조사개시결정을 한 후에도 그 신청이 제1항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 하는 경우에는 그 신청을 각하한다.

129


제11조 (진실규명 조사개시) ① 위원회는 진상규명 신청이 제10조 제1항에서 정한 각하 사유에 해당하지 아니하 는 경우에는 조사개시결정을 하고 지체 없이 그 내용에 관하여 필요한 조사를 하여 야 한다. ② 위원회는 조사개시결정 이전에 필요한 경우에는 조사개시 여부를 결정하기 위한 사전 조사를 할 수 있다. 제12조 (진상규명 조사방법) ① 위원회는 조사를 수행함에 있어서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조치를 할 수 있다. 1. 신청인, 피해자 및 참고인에 대한 진술서 제출 요구 2. 신청인, 피해자 및 참고인에 대한 출석요구 및 진술청취 3. 신청인, 피해자 및 참고인, 그 밖의 관계 기관·시설·단체 등에 대한 관련 자료 또 는 물건의 제출요구 및 제출된 자료의 영치 4. 관계 기관·시설 또는 단체 등에 대하여 조사사항과 관련이 있다고 인정되는 사실 또는 정보에 대한 조회 5. 감정인의 지정 및 감정의뢰 ② 위원회는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에는 위원 또는 소속 직원으로 하여금 제1항 각 호의 조치를 하게 할 수 있다. ③ 위원회는 그 의결로 위원 또는 소속 직원으로 하여금 진실규명 사건의 원인이 된 사실이 발생한 장소 그 밖의 필요한 장소에서 관련 자료나 물건 또는 관계 행정 기관·시설 및 단체(이하 "기관 등" 이라 한다)에 대하여 실지조사를 하게 할 수 있 다. ④ 위원 또는 직원이 제1항 제2호의 규정에 따라 진술을 청취한 경우에는 「형사소 송법」 제147조 내지 제149조 및 제200조제2항의 규정을 준용한다. ⑤ 제3항의 규정에 의하여 실지조사를 하는 위원 또는 직원은 실지조사의 대상인 국방부 직할부대 및 기관 등에 대하여 필요한 자료나 물건의 제출을 요구할 수 있 으며 자료나 물건의 제출요구를 받은 기관등은 지체 없이 이에 응하여야 한다. ⑥제1항제3호 또는 제5항의 규정에 의하여 필요한 자료나 물건의 제출요구에 대하 여는 「형사소송법」 제110조 내지 제112조, 제129조 내지 제131조 및 제133조의 규정을 준용하되, 자료나 물건의 제출을 거부하는 기관등은 그 사유를 구체적으로 소명하여야 한다.

130


⑦위원회는 제6항의 규정에 따른 소명을 검토한 결과 이유가 없다고 인정되는 경우 위원회의 의결로 자료나 물건의 제출을 명령할 수 있다. ⑧위원회로부터 실지조사 또는 진실규명과 관련하여 자료 및 물건의 제출 명령을 받은 기관 등은 정당한 사유 없이 자료 및 물건의 제출을 거부해서는 아니된다. ⑨ 제8항 단서의 규정에 불구하고 자료 및 물건의 제출요구를 받은 기관 등의 장은 위원회에 대해 해당 자료 및 물건에 한하여 열람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하여야 한 다. 다만, 자료 및 물건을 열람한 위원회는 이를 공개하여서는 아니된다. 제13조 (동행명령 등) ① 위원회는 제12조 제1항 제2호의 규정에 의한 출석요구를 받은 자 중 형제복지원 피해사건의 왜곡되거나 은폐된 진실에 관한 결정적 증거자료를 보유하거나 정보를 가진 자가 정당한 사유 없이 3회 이상 출석요구에 응하지 아니하는 때에는 위원회 의 의결로 동행할 것을 명령하는 동행명령장을 발부할 수있다. ② 제1항의 규정에 따른 동행명령장에는 대상자의 성명·주거, 동행명령을 하는 이 유, 동행할 장소, 발부연월일 그 유효기간과 그 기간을 경과하면 집행하지 못하며 동행명령장을 반환하여야 한다는 취지와 동행명령을 받고 거부하면 과태료에 처한 다는 취지를 기재하고 위원장이 서명·날인하여야 한다. 대상자의 성명이 분명하지 아니한 때에는 인상, 체격 그 밖에 대상자를 특정할 수 있는 사항으로 표시할 수 있으며 주거가 분명하지 아니한 때에는 주거기재를 생략할 수 있다. ③ 동행명령장의 집행은 동행명령장을 대상자에게 제시함으로써 한다. ④ 동행명령장은 위원회의 직원으로 하여금 이를 집행하도록 한다. ⑤교도소 또는 구치소(군교도소 또는 군구치소를 포함한다)에 수감 중인 대상자에 대한 동행명령장의 집행은 위원회 직원의 위임에 의하여 교도관리가 행한다. 제14조 (증거보전의 청구와 그 절차) ① 위원회는 미리 증거를 보전하지 아니하면 그 증거를 사용하기 곤란한 사정이 있 을 때에는 관할 지방검찰청 검사장에게 압수․수색, 검증, 증인신문 또는 감정의 청 구를 의뢰할 수 있다. ② 위원회가 제1항의 규정에 의하여 증거보전의 청구를 의뢰하는 경우에는 「형사소 송법」 제184조제2항 내지 제4항을 준용한다.

131


제15조 (청문회) ① 위원회는 그 업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경우 참고인, 증인, 감정인 또는 이해관계인으로부터 증언․진술의 청취와 증거의 채택을 위하여 그 의결 로 청문회를 열 수 있다. ➁청문회는 공개한다. 다만, 위원회의 의결로 청문회의 전부 또는 일부를 공개하지 아니할 수 있다. ➂제1항의 규정에 의한 청문회에서의 증언․감정 등에 대하여 이 법에서 정한 것을 제외하고는 「국회에서의 증언・감정등에 관한 법률」의 관련 규정(제4조 제2항․제3항, 제12조, 내지 제15조는 제외함)을 준용한다. 이 경우 “국회”를 “진실·화해를위한과 거사정리위원회”로, “안건심의 또는 국정감사나 국정조사” 및 “국정감사나 국정조 사”를 “진실규명”으로, “국회사무처 소속공무원”을 “위원회사무처 소속직원”으로, “본회의”・“본회의 또는 위원회” 및 “해당위원회”를 “위원회”로, “의장 또는 위원장 (국정감사나 국정조사를 위하여 구성된 소위원회 또는 반의 소위원장 또는 반장을 포함한다. 이하 이 조에서 같다)” 및 “의장”을 “위원장”으로, “국회규칙”을 “위원회 규칙”으로 각각 본다. ➃제1항의 규정에 따라 위원회가 실시하는 청문회의 절차와 방법에 관하여는 위원 회규칙으로 정한다. 제16조 (조사기간) ① 위원회는 위원회가 구성되어 최초의 진실규명 조사개시 결정일 이후 2년간 진실 규명활동을 한다. ② 위원회는 제1항의 규정에 의한 기간 이내에 진실규명활동을 완료하기 어려운 경 우에는 기간 만료일 3월 전에 대통령에 보고하고 1년 이내의 범위에서 그 기간을 연장할 수 있다. ③ 위원회는 제1항 및 제2항의 규정에 의한 조사기간 만료 이전에도 조사의 필요성 이 없다고 판단할 경우에는 위원회 의결로서 조사기간을 만료할 수 있다. 제17조 (진실규명결정) 위원회는 조사가 종료되어 진실규명이 된 경우 진실규명 조 사결과를 의결로써 결정한다. 제18조 (진실규명불능결정) 위원회는 진실규명 조사결과 진실을 밝히지 못하거나, 밝힐 수 없는 경우 진실규명 불능임과 그 사유를 기재한 결정을 하여야 한다.

132


제19조 (결정통지 및 이의신청) ① 위원회는 제10조의 규정에 의한 각하 결정, 제11조에 의한 조사개시결정, 제18 조에 의한 진실규명결정, 제19조에 의한 진실규명불능결정 등을 한 경우 지체 없이 그 사유를 명시하여 이를 제8조의 규정에 의한 진실규명 신청인과 제12조의 규정에 의한 피해자, 참고인에게 통지하여야 한다. ② 진실규명 신청인, 조사대상자가 사망하였거나 소재불명인 경우에는 그 배우자 또는 직계존비속에게 통지하여야 한다. ③ 위원회는 제1항 및 제2항의 규정에 의한 통지를 함에 있어서 통지대상자에게 이 의신청의 제기 및 그 절차와 기간 그 밖에 필요한 사항을 알려야 한다. ④ 제1항 및 제2항의 규정에 의하여 통지를 받은 자는 통지받은 내용에 이의가 있 는 경우 통지를 받은 날부터 60일 이내에 위원회에 서면으로 이의신청을 할 수 있 다. ⑤ 위원회는 이의신청을 받은 날부터 60일 이내에 이의신청에 대하여 결정하고 그 결과를 이의신청인에게 지체 없이 서면으로 통지하여야 한다. ⑥ 제4항의 규정에 따른 이의신청의 절차에 관하여 필요한 사항은 대통령령으로 정 한다. 제20조 (국가기관 등의 협조의무) ① 위원회의 업무 수행을 위하여 국가기관 및 지방자치단체 등 관계 기관은 적극 협조하고 진실규명에 필요한 편의제공 의무를 진다. ② 위원회는 업무 수행상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때에는 그 업무 중 일부를 지방자치 단체 등 관계 기관에게 위임하거나 또는 공동으로 수행할 수 있다. ③ 진실규명 관련 국가기관은 자체 진실규명을 위한 위원회 등 특별기구를 설치할 수 있다. 제21조 (비밀준수 의무) 위원회 위원 또는 위원이었던 자, 위원회 직원이나 직원이 었던 자, 감정인 또는 감정인이었던 자, 위원회의 위촉에 의하여 조사에 참여하거나 위원회의 업무를 수행한 전문가 또는 민간단체와 그 관계자는 위원회의 비밀에 해 당하는 정보·문서·자료 또는 물건을 다른 자에게 제공 또는 누설하거나 그 밖에 위 원회의 업무수행 외의 목적을 위하여 이용하여서는 아니된다.

133


제4장 피해자의 보상 및 명예회복 등에 관한 조치 제22조 (불이익 처우금지 등) ① 누구든지 형제복지원 피해사건과 관련하여 자유롭게 발언할 수 있으며, 이로 인 하여 불이익을 받지 않는다. ② 피해자 및 유족은 위원회의 피해자 결정 및 보상금 등으로 인하여 어떠한 불이 익이나 부당한 처우를 받지 아니한다. 제23조 (피해 보상 및 명예회복) ① 정부는 규명된 진실에 따라 희생자, 피해자 및 유가족의 피해 및 명예를 회복시 키기 위한 적절한 조치를 취하여야 한다. ② 피해자와 그 유족에 대하여는 피해자의 사망, 상이, 구금 등 희생의 정도에 따라 대통령령에 의해 보상하되, 그 생활정도를 고려하여 보상의 정도를 달리할 수 있다. 제24조(의료지원금) ① 형제복지원 피해사건과 관련하여 상이를 입은 자중에서 이 법 시행 당시 그 상 이로 인하여 계속 치료를 요하거나 상시 보호 또는 보장구의 사용이 필요한 자에 대하여는 대통령령이 정하는 바에 따라 치료·보호 및 보장구구입에 실질적으로 소 요되는 비용을 일시에 지급한다. ② 제1항의 규정에 의한 의료지원금을 지급할 때에는 법정이율에 의한 단할인법으 로 중간이자를 공제하여야 한다. ③ 의료지원금의 지급범위와 금액의 산정 및 지급방법 등에 필요한 사항은 대통령 령으로 정한다. 제25조 (생활지원금) ① 위원회는 형제복지원 피해사건 피해자들에게 구금기간, 피해정도 등을 고려하여 대통령령에 의해 그 생활을 보조하기 위한 지원금을 지급할 수 있다. ② 제1항의 규정에 의한 생활지원금은 관련자의 지원을 위하여 기부된 성금으로 지 급할 수 있으며, 정부는 그 재원의 일부를 지원할 수 있다. ③ 생활지원금의 지급기준·지급액 및 지급방법 등에 관하여 필요한 사항은 대통령 령으로 정한다.

134


제26조 (보상금 등의 지급신청 및 시효) ① 피해자 또는 그 유족으로서 이 법에 의한 보상금·의료지원금·생활지원금(이하 " 보상금등"이라 한다)을 지급받고자 하는 자는 대통령령이 정하는 바에 따라 관련증 빙서류를 첨부하여 서면으로 위원회에 보상금등의 지급을 신청하여야 한다. ② 제1항의 규정에 의한 보상금등의 지급받을 수 있는 권리는 그 보상금 지급결정 서 정본이 송달된 날로부터 3년간 행사하지 아니하면 시효로 소멸한다. 다만 이 법 에 의한 보상금등의 지급에 관한 소송이 제기될 경우에는 소송의 제기가 있는 날부 터 확정판결이 있는 날까지 시효가 정지된다. 제27조 (보상금 등의 양도 등 금지) 의료지원금 등을 지급받을 권리는 양도 또는 담보로 제공하거나 압류할 수 없다. 제28조 (조세면제) 이 법에 의한 보상금등에 대하여는 국세 및 지방세를 부과하지 아니한다. 제29조 (심의와 결정) 위원회는 보상금등의 지급신청을 받은 날부터 90일 이내에 그 지급여부와 금액을 결정하여야 한다. 다만, 행방불명된 자의 경우에는 120일 이내로 한다. 제30조 (결정서 송달) ① 위원회가 보상금등을 지급하거나 지급하지 아니하기로 결정한 때에는 30일 이내 에 그 결정서정본을 신청인에게 송달하여야 한다. ② 제1항의 송달에 관하여는 민사소송법의 송달에 관한 규정을 준용한다. 제31조 (형제복지원 피해자 주거복지시설 등의 설치) ①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는 피해자를 위하여 형제복지원 피해자 주거복지시설 및 의료복지시설을 설치할 수 있다. ② 제1항에 따른 피해자 주거복지시설 및 의료복지시설의 시설기준 및 입소대상 등 에 필요한 사항은 보건복지부령으로 정한다. 제32조 (의료지원금 등의 환수) ① 국가는 의료지원금 등을 받은 자가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경우에

135


는 그가 받은 의료지원금을 환수하여야 한다. 1. 거짓이나 부정한 방법으로 의료지원금 등을 지급받은 경우 2. 착오 등으로 지급된 경우 ② 제1항에 따라 환수하는 경우에 의료지원금 등을 반환할 자가 기간 이내에 이를 반환하지 아니한 때에는 국세 체납처분의 예에 따라 환수할 수 있다. 제33조 (국가배상 법률제정 권고) 위원회는 조사결과 피해자들의 피해회복 등을 위하여 배상조치가 필요한 경우 국가 에 대하여 국가배상에 관한 입법조치를 권고할수 있다. 제34조 (진상조사보고서 작성) 위원회는 제16조의 기간이 종료되는 날부터 6개월 이내에 형제복지원 피해사건진상 조사보고서를 작성하여야 한다. 제35조 (기념사업) ①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는 형제복지원 피해사건의 피해자를 위령하고 역사적 의미 를 되새겨 인권을 위한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다음 각 호의 사업을 수행 할 수 있다. 1. 기념관 건립 2. 형제복지원 피해사건 관련 자료의 수집·조사·연구·보존·관리 및 전시 3. 위령공원 조성 4. 그 밖에 기념 관련 사업 ②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는 법인 또는 단체가 제1항 각 호의 사업을 수행하는 경우 에 예산의 범위 안에서 사업경비의 전부 또는 일부를 지원할 수 있다. 제5장 벌칙 제36조 벌칙 규정 제37조 과태료 규정

136


부칙 제1조 (시행일) 이 법은 공포 후 6월이 경과한 날부터 시행한다. 다만, 위원 및 소 속 직원의 임명, 이 법의 시행에 관한 위원회의 규칙의 제정, 위원회의 설립준비는 시행일 이전에 할 수 있다. 제2조 (위원의 임기개시에 관한 적용례) 이 법에 의하여 임명된 위원의 임기는 이 법의 시행일부터 개시하는 것으로 본다.

137


138


]

발표 7

인권기준으로 본 형제복지원 사건

이재승(건국대)

139


[발표 7]

인권기준으로 본 형제복지원 사건 이재승 | 건국대

I. 서론 국가범죄의 희생자들은 세 가지 범주로 구별된다. 첫 번째 주요범주는 권위적인 지배세력과 경합하다가 박해받은 대항세력이다. 두 번째 범주는 지배세력뿐만 아니 라 대항세력까지도 기득권자로 간주하고 이들을 전면적으로 거부하는 변혁세력이다. 세 번째 범주는 강고한 사회위계제 아래서 배제되는 소위 쓰레기집단이다. 과거청 산이 정상적으로 진행되는 경우에는 첫 번째 그룹이 과거청산의 목표와 방향을 수 립하고 억압적 세력에 대해 청산작업을 공세적으로 수행한다. 억압적 가해집단이 여전히 헤게모니를 유지하거나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을 때에는 과거청산은 타협적 이거나 방어적으로 진행된다. 과거청산의 국면에서 첫번째 그룹은 사회대중의 정치 적 지지를 통해 명예를 회복하고 기성체제의 한 축으로 확립된다. 한국사회에서 개 혁정치인과 70-80년대 운동권의 주류를 이러한 그룹에 넣을 수 있다. 첫 번째 그룹 의 정치적 인정―민주화보상법의 맥락―을 넘어 보편적 인권을 기준으로 국가폭력을 재검토하게 된다면 과거청산 작업은 질적으로 비약한다. 이제 변혁세력과 소위‘쓰레 기’집단에게까지 인권이 돌파구를 제공한다. 두번째 유형의 희생자중 일부가 정치적 인정과 명예회복을 달성하게 되면, 세 번째 그룹도 희생자로 인정받게 된다. 사회적 의식과 이데올로기 속에서 이러한 인정의 서열은 워낙 확고한 것이기 때문에 법칙 이라고 말할 정도이다. 세 번째 유형의 대표적인 사례로 삼청교육대 희생자들과 형 제복지원 사건의 피해자들을 들 수 있다.

141


형제복지원 사건은 2013년 <살아남은 아이>의 출판을 통해서 세상에 던져졌다. 형제복지원은 1987년 전두환 정권말기에 대서특필되다가 복지원 원장 박모씨의 개 인비리의 문제로 유야무야되었다. 형제복지원 사태에 대한 국회의 조사활동 및 수 용자들의 퇴소조치를 통해 문제 상황이 해소되고, 박모씨에 대한 형사소송도 용두 사미가 되었다. <살아남은 아이>는 그런 형제복지원 사건을 살아 있는 사건이자 해 법을 기다리는 과거사로 만들었다. 우선 형제복지원 사건이 중대한 인권침해사건에 해당하는지, 그리고 이 사건에 대하여 국가의 책임도 존재하는지, 따라서 피해자들 의 권리구제가 필요한지, 가해책임자들에 대한 형사상 민사상 책임을 추궁할 수 있 는지 등의 법적인 문제를 제기했다. 나아가 복지원 등 다양한 사회적 의료적 수용 시설이 입소에서 퇴소까지 국제적인 인권 기준을 만족시키고 있는지에 대한 정책적 인 문제도 제기했다. 실제로 형제복지원이 중대한 인권침해사건이라고 한다면 현재 한국사회의 구성원은 이러한 인권침해에 어떠한 책임을 져야 하는지도 근본적으로 물어왔다.

아마도 보통의 시민이 져야할 정치적 책임이란 인권침해사건과 같은 과거의 잘못 을 교정하는 것을 넘어서 잘못을 야기하는 구조와 여건을 근본적으로 변혁하자는 실존적 과제이다.1) 국가주도의 민형사책임을 추구하는 이행기 정의(transitional justice)에서 구조를 개혁하려는 변혁적 정의(transitional justice)로 시선을 이동해 야 한다.2) 변혁적 정의는 사회구조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다. 아마도 시대적으로 고령인구 구성비가 커짐에 따라 수용 메커니즘을 인권친화적으로 구축 하는 일은 중요한 인권과제라고 생각한다. 인권친화적인 시설정책뿐만 아니라 탈시 설정책까지 확립하지 않는다면 시설은 언제나 자유의 적이 될 것이다. 정부의 권력, 예산지원과 사적인 역량의 결합으로 탄생한 수용시설이 민주적인 공론의 영역에서 배제된다면 취약집단은 지속적으로 관료제의 완전한 먹이감으로 전락할 것이다. 무 책임한 관료제와 무사려, 맹목적인 복종, 이것이 수백만명의 생명도 거리낌없이 앗 1) 아이리스 M. 영/허라금 외(역), 정치적 책임에 관하여, 이후, 2013. 2) Dimitrijevic, Nenad, Duty to Respond- Mass Crime, Denial, and Collective Responsibility, CEU Press, 2011, 192쪽 이하: Daly, Erin, “Transformative Justice, Charting Path to Reconciliation”, International Legal Perspective Vol. 12(2002), 73-183쪽.

142


아가는 근거로서 악의 평범성이었다.3) 형제복지원은 이른바 지난 10여년의 과거청 산 작업과정에서 전혀 다루어지지 못했다. 형제복지원 사건이 제 때에 부상했다면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대상에 포함되었을 것이다. 진실화해법이 말하는 “기타 중대 한 인권침해사건”4)이라고 규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 글에서 현재의 수용 시설을 인권친화적으로 혁신하는 과제보다는 인권침해사건으로서 형제복지원 사건 을 앞으로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검토해보겠다.

Ⅱ. 인권기준 1. 형제복지원은 누구의 범죄인가?

형제복지원은 당국의 강압적 수용정책과 시설운영자들의 이해관계가 결합하여 주 거부정자, 부랑아, 장애인 등 하층민들의 인권을 심각하게 유린한 사건이다. 그것은 시간적으로 유신독재에서 전두환 정권에게 까지 이어졌다. 필자는 이러한 인권침해 행위를 국가범죄라고 규정한다. 형제복지원은 박인근의 개인적인 범죄에 국한되지 않는다. 박인근의 행위는 국가정책적 범죄의 완성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한 불 법적인 정책을 기안하고 법령을 만들고 행정력을 동원하여 부랑인을 체포하고 복지 원에 인계하고 탈출자를 체포하여 다시 인계하는 국가권력이 더욱 중요하다. 불법 감금과 강제노동 정책을 수립한 자들의 공동불법행위이자 공동범죄이다. 국가의 입 법적 조치와 시당국과 경찰의 행정적 동원과 지원이 없었다면 강제수용이나 강제노 동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국가(부산시)가 박인근에게 부랑인관리사업을 적극적으 로 권유하고 위탁했다는 정황도 들어나고 있다.5) 따라서 형제복지원장 박모씨에 대 3) 아렌트/김선욱(역),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한길사, 2006. 4)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기본법 제2조 4. 1945년 8월 15일부터 권위주의 통치시까지 헌정질서 파괴행위 등 위법 또는 현저히 부 당한 공권력의 행사로 인하여 발생한 사망·상해·실종사건, 그 밖에 중대한 인권침해사건 과 조작의혹사건 *필자가 4호를 언급한 이유는 이 호가 가장 포괄적인 의미에서 국가범죄와 중대한 인권 침해를 나열하고 있기 때문이다. 5) 부산시와 형제복지원 사이에 ‘부랑인아 일시보호 사업 위탁계약’이 체결되었다. 여준민, 형제복지원, 침묵의 카르텔은 어떻게 가능했나, 형제복지원대책위원회, 자료집: 한국의 홀로코스트, 형제복지원 사건의 진실을 말하다(2013/10), 141쪽 이하.

143


한 형사소송은 본질적으로 국가범죄의 책임을 박인근 일개인에게 전가하려는 저질 의 재판이자 진실을 왜곡하는 작태였다. 진실왜곡은 감금죄 부분에 대한 대법원의 최종판결에서 분명하게 확인된다. 대법원은 시설주(박인근)가 무고한 민간인을 재판 도 없이 잡아가두는 행위를 최종적으로 법령(훈령)에 의한 정당한 행위로 규정하였 다.6) 강제수용이 정당하다면 그 안에서 자행된 폭력은 정상화될 수밖에 없었던 것 이다. 따라서 대법원 판결은 국가범죄의 책임자를 처벌한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국 가범죄로서 복지원범죄를 법리적으로 완성한 것이다. 대법원은 바로 국가범죄의 최 종적 완결자였다.

형제복지원은 법령상의 근거를 가지고 있다.7) 그래서 대법원은 감금죄부분을 무 죄로 하였다. 사람을 강제로 수용하고 강제로 노동시키는 데에 법령상의 근거가 있 다고 모든 법적 의문이 해소되지 않는다. 그러한 법령이 법치주의 제원칙을 준수하 고 있는지에 대한 검토가 필요한데 대법원은 이러한 인권중시적 통제논리를 전혀 가동하지 않았다. 대법원의 논리대로라면 나치의 홀로코스트나 강제수용소나 여타 악행도 법령상의 근거를 갖추고 있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논리를 제시한 셈이 다. 타인에게 구체적인 위해를 가하지 않는데도 미관, 도시정화, 위생적 근거에서 인간을 강제로 수용하고 강제노동을 부과하는 것은 법치국가의 정신에 위배된다. 노동 혐오자에게 노동윤리를 주입하기 위해 강제로 구금하는 것도 자유주의적인 국 가의 책무가 아니다. 인간이라면 가능한 한 노동에서 해방되어야 하고 최소한 유한 계급처럼 빈둥거리고 살 권리를 향유해야 하기 때문이다. 국가가 그러한 권익을 향 유할 수 있게 하든지 그렇지 않다면 방임하든지 해야 한다.8) 2010년에 대법원이 유신시대의 긴급조치(제1호)마저 당연히 무효라는 취지에서 위헌결정을 내렸듯이,9)

6) 대법원 판결 1988.3.8. 선고 87도2671. 7) 1970년 사회복지사업법에 근거하여 1975년 12월 15일 내무부 훈령 410호(부랑인의 신 고, 단속, 수용, 보호와 귀향 및 사후관리에 관한 사무처리지침“이 제정되고 전국 각시와 경찰에 내부 업무 지침으로 전달되었으며, 이것이 이른바 부랑인의 예외상태(exlex 法外 人)를 합법화하는 장치이다. 8) 홈리스에 대한 처벌이 위헌이라는 미국 대법원의 결정에 대해서는 이호중, ‘가난은 죄’처 벌 강화한 MB 정부... 박근혜 정부도?, 형제복지원대책위원회, 자료집: 한국의 홀로코스 트, 형제복지원 사건의 진실을 말하다(2013/10), 283쪽 이하. 9) 대법원 2010.12.16 선고 2010도6986 판결.

144


형제복지원의 근거법령은 당연히 무효인 법령이 될 것이다.

형제복지원의 입소와 운영은 일반적인 복지시설의 입소과정과는 다르다. 입소자 의 권익과 복지를 위해 본인과 가족의 의견을 반영하여 입소․퇴소가 결정되지 않았 다. 전반적으로 형제복지원은 복지시설이 아니라 강제수용소(concentration camp) 에 해당한다. 내무부훈령 410호는 나치시대의 인종법시행령(1938)과 흡사하다. 나치 독일은 반사회적 존재(Asoziale)로서 집시들을 강제로 수용하고, 강제노동을 부과하 고, 절멸까지 시도하였다. 나치수용소가 인종주의적 관점을 가지고 배제와 박멸까지 도 추구하였다면10), 형제복지원은 국가의 사회적 배제정책과 시설운영자의 사적 이 익을 동시적으로 반영하였다. 독재자들은 언제나 우열에 입각한 인종주의, 인간구실 론에 입각한 산업주의적 노동교화, 부랑아 주거불안정자 장애인이 없는 청결유토피 아, 사이비진화론에 기초한 인류개조론을 신봉하며 반사회적 존재에 대한 추방과 박멸을 거리낌 없이 추구한다.

형사소송은 다른 모든 책임을 덮어버리는 작용을 한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11) 예컨대, 아이히만의 재판은 홀로코스트 악행을 아이히만 개인의 죄악으로 만드는 과정에 가깝다. 거기에는 아이히만을 둘러싸고 작동하는 독일의 국가관료제와 권력 기제들이 사라지고, 더구나 그러한 죄악을 특별한 어려움 없이 자행하도록 작동하 는 대중적 문화를 조성하는 데에 기여했던 보통사람들의 책임도 사라지고 만다.12) 이와 같이 형사책임의 추궁이 때로는 더욱 거대한 책임을 은폐하기도 한다.13) 하층

10) 이것은 민감한 주제이다. 나치배상법은 인종을 이유로 한 박해와 피해에 대해 배상하겠 다고 규정하였는데, 독일의 법조는 집시에 대한 수용은 인종주의에 입각한 것이 아니라 ‘단순’부랑인 사회정책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신티족과 로마족은 스스로 하나의 ‘민족’임을 주장함으로써 권리를 구제받을 수 있었다. 11) 필자는 중대한 인권침해행위에 대한 형사책임보다는 민사배상책임을 더욱 중요한 수단 으로 이해한다. 형사책임은 궁극적으로 민사책임을 희석시키거나 배제하고 전체적인 책 임연관에서 최고책임자들을 빠져나가게 하며 직업범죄 수준의 중간관리자들을 처벌하는 경우가 흔하다. 이러한 책임전가과정에서 대중은 관리자에게 분노하면서 공범의식을 동 시에 희석시킨다. 이제 희생자들의 권리는 방치된다. 12) Fletcher, George P., “Liberals and Romantics at War: The Problem of Collective Guilt”, Yale Law Journal Vol. 111(2002), 1449쪽 이하. 13) 이재승, 과거사와 시민의 집단적 책임, 한국사회사학회 2013 추계학술대회 발표문(11.2)

145


계급에 대한 범죄는 국가의 범죄이지만 시민의 집단적 범죄에 해당한다.

보통사람들의 책임과 관련해도 주목해야할 부분이 있다.‘사회적으로’―‘정치적으 로’와 대비되는 의미에서― 배제된 유형이나 집단의 심각한 인권침해는 반드시 파시 스트 사회에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사회적으로 배제된 집단에 대한 인권침해는 일반대중의 집단적 의식과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정당화되기 때문에 자유주의적 사 회에서도 빈발하기도 한다. 정확히 말해서 사회적 쓰레기들에 대한 억압적 방침은 파시스트적인 사회이든 자유주의적 사회이든 동일하게 관철시켜왔다. 전체주의 사회 에 사는 ‘사회적 쓰레기’들은 정치적 억압뿐만 아니라 문화적 ․이데올로기적 억압이 라는 이중고를 겪게 된다. 그래서 정치적 압제가 해소되더라도 인간으로서 인정을 획득할 수 없게 된다. 문화적 ․이데올로기적 억압을 견지하는 것은 대중적 의식이므 로 바로 이러한 의식을 타파해야만 사회적 쓰레기에 대한 억압이 종식될 것이다. 정치적 억압은 제도와 구조를 개혁함으로써 가시적으로 청산할 수 있겠지만, 문화 적․이데올로기적 억압은 미시적으로, 비제도적으로, 시민참여적 정화의 방식으로만 변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14)

2. 국제인권기준

형제복지원 사건은 인권의 총체적 침해이다.15) 사회적 주변인이라고 상정된 그룹 을 그 의사에 반해서 사냥하여 수용하고, 노동과 훈련을 부과하고, 심지어 죽음에 이르게 하는 정책은 체계적인 인권범죄이다. 국가측의 공격적이고 체계적 프로그램 과 시설측의 수용관리가 결합한 총체적인 인권침해였다. 또한 국제법상의 범죄 (crimes under international law)16)라고 할 수 있다. 복지원의 수용과 박해는 세 계인권선언, 자유권 규약, 고문방지협약이 말하고 있는 “잔인하고 비인도적이고 굴 욕적인 처우(cruel, inhuman or degrading treatment)”에 해당하고, 지금까지 피

14) 필자는 야스퍼스, 아렌트, 파농, 사르트르, 매이, 영의 실존주의적 책임론을 염두에 두고 이 개념을 사용한다. 15) 자세한 실상은 한종선/전규찬/박래군, 살아남은 아이, 문주, 2012. 16) 세계인권선언, 제11조 2항 참조.

146


해자와 그 가족들에게 진실을 은폐하고, 적절한 배상을 시행하지 않는 상황도 “잔 인하고 비인도적이 굴욕적인 처우”에 해당한다. 형제복지원 시설은 강제노동철폐협 약, 노예제철폐협약, 고문방지조약, 강제실종협약에 대한 위반함으써 국제인권기준 에서 보자면 국제인권법의 총체적 침해이다.

1)강제노동협약 형제복지원은 기본적으로 강제노동협약(Forced Labour Convention 1930)이 금 지하는 강제노동(forced labor)에 해당한다. 강제노동은 빈곤, 억류, 폭력, 법적인 강제의 위협 아래서 의사에 반하여 이루어지는 노동을 의미하며, 온갖 형태의 노예 제(채무노예, 농노, 봉건적 부역, 노동수용소)를 포함한다. 국제노동기구(ILO)도 이러 한 모든 형태를 강제노동으로 규정한다. 그러나 국제노동기구도 다음의 경우를 강 제노동에 포함시키지 않고 있다(협약 제2조). ①병역의무 이행의 일환으로서 군사적 성격의 활동과 역무 ②완전히 자치적 권한을 가진 국가의 시민의 정상적인 대체의 무의 일부를 구성하는 활동과 역무 ③법원의 유죄판결의 결과로서 개인에게 부과된 활동과 역무 ④전쟁과 재난의 상황에서 부과된 활동과 역무 ⑤지역공동체의 이익을 위하여 정상적인 시민적 의무로서 부과된 활동과 역무. 형제복지원의 수용과 노동 은 강제노동폐지협약이 규정하고 있는 강제노동 예외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

강제노동철폐협약(Abolition of Forced Labour Convention 1957)은 ILO당사국 에 강제노동(forced or compulsory Labour)을 금압할 의무를 부과하고 있다. 다 음과 같은 이유에서 부과된 노동을 금지해야할 노동으로 열거하고 있다(제1조). (a) 정치적 견해 또는 확립된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체제에 이데올로기적으로 반대하 는 견해를 보유하거나 표현했다는 데에 대한 정치적 강제나 교육의 수단으로서 또 는 처벌의 수단 (b)경제개발을 위한 노동의 동원과 이용의 방법 (c)노동규율(labour discipline)의 수단 (d)파업에 참여했다는 데에 대한 처벌 (e)인종적, 사회적, 민족적 또는 종교적 차별. 형제복지원의 노동은 법령의 문언을 살피더라도 강제노동철폐협 약이 금지하고 있는 (c)와 (e)에 해당하는 강제노동에 해당한다고 판단된다. 수용의 목적이 노동규율을 주입하고, 사회적 특정유형의 인간에 대한 공격으로 이루어지기

147


때문이다.

2)자유권규약 형제복지원은 자유권규약(The International Covenant on Civil and Political Rights 1966/1976/1990)에 총체적으로 위배된다. 자유권규약 제7조는 고문, 잔인 하고 비인도적이고 굴욕적인 처벌을 금지하고 있다. 강제수용, 폭행, 강제노동은 전 체적으로 제7조가 금지하는 전형적인 행위이며, 동시에 고문방지협약(convention against torture)이 금지하는 고문 또는 잔인하고 비인도적이고 굴욕적인 처우에 해당한다.17) 자유권규약 제8조는 병역, 대체복무, 형사처벌을 제외하고 노예제와 강 제적인 예속상태를 금지하고 있는데 형제복지원 수용과 노동은 이 조항에도 위반된 다. 자유권규약 제9조는 신체의 자유와 안전에 대한 권리를 규정하며, 자의적인 체 포, 구금을 금지하고, 자유의 박탈이 법률에 근거해서만 이루어져야 한다고 규정하 고 있다. 자유를 박탈당한 자에게 법원에 호소할 권한을 허용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권리는 형사소송을 통해 구금된 자뿐만 아니라 정신질환, 마약중독, 부랑 (vagrancy), 교육목적, 이민통제 등을 이유로 구금된 자에게도 인정된다.18) 자유권 규약 제10조는 자유를 박탈당한 사람이 존엄과 인간성을 가진 존재로 취급할 것을 요구한다. 이는 죄수뿐만 아니라 이민통제나 정신치료를 위해 구금된 사람들에게도 적용된다.19) 제10조의 권리는 권리는 제9조의 권리를 보충한다. 형제복지원은 자유 권규약의 가장 기본적인 자유권의 침해에 해당한다.

3)강제실종협약 강제실종협약(International Convention for the Protection of All Persons from Enforced Disappearance 2006)은 남미 군정 아래서 운동권에 대하여 자행

17) CCPR General Comment No. 20: Replaces general comment 7 concerning prohibition of torture and cruel treatment or punishment. UN OHCHR. 10 March 1992 18) CCPR General Comment No. 08: Right to liberty and security of persons. UN OHCHR. 30 June 1982. 19) General Comment No. 21: Replaces general comment 9 concerning humane treatment of persons deprived of liberty. UN OHCHR. 10 April 1992.

148


된 납치 살해 은닉에 대한 규제틀로서 발전하였다. 한국정부는 이 협약에 가입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강제실종이 특정한 정치세력에 대한 국가의 실종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강제실종협약에 따르면 강제실종(enforced disappearance)은 국가의 기관 원들이나 국가의 수권, 지지, 묵인을 얻은 개인이나 집단이 자행한 체포, 구금, 납 치, 여타 온갖 형태의 자유박탈로서, 이러한 자유박탈의 시인의 거부 또는 실종된 자의 운명이나 행방의 은폐를 수반한다(제2조). 형제복지원 시설이나 구금된 사람 전체가 강제실종에 해당하는지는 추가적인 검토가 필요하지만 가족에게 적절한 연 락을 취하지 않고 자의적으로 수용하거나 수용중에 가혹행위를 하거나 열악한 생활 조건에서 사망에 이르게 하는 하고 그러한 망자에 대한 진실과 사인을 분명하게 규 명하지 않는 것은 실종범죄(crime of disappearance)라고 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실종범죄에 대해서는 시효가 진행되지 않는다는 것이 현재 인권법원이나 인권위원 회의 결론이다.

필자는 여기에서 국제인권법을 중심으로 검토하여 국제인권법의 총체적 침해 (gross violations of international human rights law)라는 결론을 제시하겠다. 물론 한국정부가 이러한 규약에 당시에 가입하지 않았다는 점을 반론의 근거로 삼 을 수 있겠지만 형제복지원의 수용과 노동이 모두 심각한 인권침해행위이고 범죄이 자 불법행위라는 점을 국제인권법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이 논리는 국내법 차 원에서도 동일하게 규정할 수 있기 때문에 이 논점은 보조적이다. 어쨌든 부랑인정 책의 미명하에 강제수용과 강제노동 등을 자행한 국가와 시설의 조치는 유신헌법상 의 인신에 관한 권리를 침해한 조치이고, 근거로 사용되는 법령도 당연히 위헌 무 효라고 보아야 한다.

Ⅲ. 역사적 사례들 형제복지원의 해법을 찾기 위해서 유사한 사례와 처방을 예시해보겠다. 해외사례 는 관련성이 떨어지므로 국내의 과거청산과정에서 나온 불법구금에 대한 형사보상 이나 국가배상에 준하는 해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149


1. 나치독일의 수용소와 강제노동

나치독일이 수행했던 작전 T4(Aktion T4)과 노동기피 왕국 작전(Aktion Arbeitsscheu Reich)을 거론해야 할 것 같다. 작전 T420)는 유전보건법(Gesetz zur Verhütung erbkranken Nachwuches 1933년 7월 14일)에 기초한다.21) 이 법에 입각하여 안락사와 강제적인 불임수술이 시행되었다. 40만명의 남녀가 불임시 술을 받았으며, 그중에서 6,000명이 사망하였다. 동시에 뉘른베르크 인종법으로 알 려진 혈통보호법(Gesetz

zum Schutz

des

deutschen

Blutes

und

der

deutschen Ehre 1935.9.5.), 그리고 혼인보건법(Gesetz zum Schutz der Erbgesundheit des deutshcen Volkes 1935.10.18.)도 제정되었다. 작전 T4 안락 사프로그램에 따라 1939년 5천명 이상의 아동이 살해되었고, 이어서 장애를 지닌 시설수용자를 포함하여 7만 명의 성인안락사가 시행되었다.

이른바 살 가치가 없는 생명의 절멸(Vernichtung lebensunwerten Lebens)은 전후에 소련 점령지구에서는 인도에 반한 죄(crime against humanity)로 규정되었 다. 그러나 미군당국은 강제불임의 기초가 된 이 법에 대하여 찬반 의견을 표시하 지 않았다. 전쟁범죄로 다루지 않는 이유는 20세기 초부터 독일과 미국간의 우생학 적 공동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었고,22) 유럽의 다른 나라들은 독일의 우생법을 반 대했지만 미국은 오히려 지지하였고, 전쟁직전까지도 협력하였으며, 1937~38년에 유전병에 관한 독일영화를 미국의 대학에서 상영하였을 정도이다. 1957년 독일의회 는 우생학적 사고는 전형적으로 독일적인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이 발언은 이 러한 조치의 희생자는 ‘나치불법’의 피해자가 아니고 따라서 보상할 필요도 없다는 결론을 함축한다. 1956년의 미국에도 27개주에서 불임 프로그램(강제불임 포함)이 20) T4는 특별한 암호가 아니며 이러한 업무를 담당하는 기관이 소재하는 거리의 첫 글자와 번지를 결합한 것이다. 21) 이 법은 유전병판정재판소의 불임결정 파기법률(1998.8.25)d에 의하여 무효화되었다. 이 재승, 국가범죄, 518쪽 참조. 22)나치시대에 형법이데올로기를 대변하였던 전형법학 잡지에 인종주의와 우생학에 입각한 학문공조가 눈에 띤다. J.H.Landmann, “Sterilisierung in den Vereinigten Staaten”, Zeitschrift für die gesamte Strafrechtswissenschaft, Vol. 53(1934),712–747쪽; 이 재승, 나치즘과 형법이데올로기, 일감법학 제26호(2013.10), 3~42쪽.

150


운영되었다. 따라서 미군당국이 나치패망 직후에 이른바 살 가치가 없는 생명에 대 한 공격을 나치적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심각한 자기모순을 범하는 것이었다.23)

1938년 인종법시행령(1935년 독일혈통과 독일명예보호법) 이후에 비록 범죄행동 은 아니지만 반공동체적 행위를 하는 사람을 반사회적 존재라고 규정하였다. 경찰 은 노동 혐오 왕국(Arbeitsscheu Reich) 작전을 통해 1938년 6월 13일부터 18일 사이에 ‘반사회적’이라고 분류된 사람들을 20,000명 이상 체포하여 강제수용소로 이 송하였다. 작센하우젠 수용소에만 약 6,000명이 구금되었고, 수용소에서 반사회적 존재로서 검정색(처음에는 갈색) 인식표를 패용했다. 나치체제에서 노동혐오라는 비 난은 이른바 반사회적 존재를 지칭하는 데에 사용되었다. 부랑자, 걸인, 매춘부, 집 시, 알콜중독자, 전염병 및 성병 보균자가 여기에 해당한다. 이러한 식의 감금조치 는 서브프롤레타리아 집단의 훈육에 봉사하였다.

독일은 나치배상법(Bundesentschädigungsgesetz 1956)을 제정하여 나치희생자 들에게 연금형태의 금전적 보상을 장기적으로 지급하였다.24) 그러나 이 배상법은 나치불법체제 하에서 발생한 모든 손해를 전보하려는 것이 아니었으며, 불법행위의 시점에 독일인 또는 그에 준하는 지위를 가진 사람으로서 일정한 유형의 피해를 입 은 경우에만 보상청구권을 인정하였다. 세계관, 종교, 인종, 정치적 이유에 의하여 나치의 박해를 받은 자만이 여기에 해당한다. 동일하게 박해받더라도 박해의 이유 가 결정적인 기준이 되었다. 박해의 이유가 나치즘과 직결되어 있지 않으면 그가 입은 피해는 이 법에 의해 보상받을 수 없었다. 나아가 독일의 전후 보상과정에서 자유민주적 질서와 양립할 수 없는 자들(공산주의자들)25)이나 반사회적인 존재 (asoziale)26)는 배제되었다. 후자의 대표적인 사례들은 탈영병, 병역거부자, 선동행 23) von dem Knesebeck, Julia, The Rome Struggle for Compensation in Post-War Germany, University of Hertfordshire Press, 2011, 133-34. 24) 이재승, 국가범죄, 191쪽 이하. 독일의 보상법에 대한 상세한 연구로는 야노 히샤시, “독일의 과거극복”, 나카노 도시오․김부자(편저), [역사와 책임], 2008, 236쪽 이하. 25) 나치배상법 제6조 제1항 2호는 ‘1949년 5월 23일 이후에 독일헌법상의 자유민주적 기 본질서(fdGo)에 대항한 자’에게 배상청구권자의 자격을 배제하고 있다. 26) Sinti und Roma fordern Entschädigungen(1998.9.4.), <http://www.welt.de/print-welt/article625894/Sinti-und-Roma-fordern-Entschae

151


위처벌법 위반으로 구금된 자(외국방송 청취자 등), 이른바 반사회적 인물, 강제노 동자, 동성애자, 강제불임자, 안락사-생존자 등이 이러한 부류에 속했다.

반사회적 존재도 차츰 나치 희생자라고 재평가되어 보상금도 수령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에게 제공된 보상금은 엄밀히 말해서 보상금이라기보다 생활지원금의 성격에

가깝다.

이들은

앞서

언급한

그룹은

나치배상법

(Bundesentschädigungsgesetz 1956)에 의하여 보상을 받지 못하고, 전쟁결과조정 법(Kriegsfolgengesetz 1957)에 따라 지원금을 받게 되었다. 유전병후손방지법은 나치적 성격을 갖지 않으며 법치국가적으로 성립한 법이라는 견해가 당시에 지배적 이었기 때문이다. 독일재무부자료를 살펴보면,27) 강제불임수술자는 2,556.46유로의 일회적인 청구권을 행사할 수 있었고 매월 100마르크 한도(88년 기준)에서 연금을 수령하였다. 이 액수는 2011년에는 291유로로 인상되었다. 강제불임 시술자가 추가 적인 경제적 곤궁상태를 증명하면 더 많은 보상을 받을 수 있었다. 이러한 방침은 1990년 이후에 동독지역의 희생자들에게도 확대적용되었다. 1980년부터 1999년 사 이에 강제불임 시술의 희생자들은 13,709건의 일회적 보상금을 수령하였으며, 9,485건의 정기금을 수령하였다. 안락사 희생자들도 일회적인 2,556.46유로의 지원 금과 매월 291유로를 지급받았다. 예외적인 경우에 추가적인 정기지원금을 수령할 수 있다.28) 동성애자들의 경우에는 수용소 강제수용으로 인한 손해에 대해 지원금 을 받았다. 형기를 마치고 예방목적으로 수용소에 수용되어 강제노동을 한 상습범 죄자들, 노동기피, 노동거부자, 부랑아, 반사회적 인간이라는 이유로 수용되어 강제 노동을 한 사람들도 전쟁결과조정법에 따라 보상금을 받게 되었다.

강제노동에 대한 독일의 보상방안도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독일통일과정에서 강제노동에 대한 보상문제가 논의되었으나 1990년 2+4조약에서는 이 문제를 배제 하였다. 통일이후 1990년대에 ‘독일-폴란드 화해기금’을 시작으로, ‘독일 벨로루시 digungen.html> 27) Bundesministerium der Finanzen, Entschädigung von NS-Unrecht, (2012/11), 22쪽 이하. 28) 피해자들의 명예회복 과정은 http://www.euthanasiegeschaedigte-zwangssterilisierte.de/bez_rehabilitation.html

152


화해기금’, ‘독일 우크라이나 화해기금’, ‘독일 러시아 화해기금’으로 이어졌다. 여기 에 독일은 18억 DM를 출연하였다. 독일정부는 강제노동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경 제적 궁핍자에 대한 인도적 지원으로 의미를 한정하였다. 받는 피해자 쪽에서도 액 수가 적어 보상이라고 이해하지 않았다.29) 1998년 3월 강제노동 피해자들이 미국 에서 포드 본사와 독일의 포드사에 대한 집단소송을 시작했다. 독일정부는 독일제 품에 대한 불매운동 우려하였으며, 98년 사민당과 90연합녹색당 연립정권이 출범한 시점에서 12개의 독일기업이 미국법원에 피소되었다.30) 쉬뢰더 총리 <나치강제노동 보상을 위한 연방기금>을 설립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하였고, 독일기업에 참여를 요 청하였다.31) 99년 2월 16일 12개 독일기업 <독일경제의 기금 이니셔티브 기억 책 임 미래> 설립하고, 강제노동에 대한 기업의 법적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해당기업 의 도의적 책임을 인정하는 선에서 마무리되었다. <용서를 비는 연설(1999/12)>을 하였으며,

당시 대통령 요하네스 라우가

독일정부와 독일기업은 미국에 거주하

는 유대인 생존자들과 합의에 이르러 2000년에 <기억, 책임, 미래 재단(Stiftung Erinnerung, Verantwortung, Zukunft)>에 각각 50억 마르크를 출연하기로 결정 하였다.32) 2004년 3월 말까지 170만명의 권리자 중에서 150만이 보상금급부를 받 았다.

29) 외국의 피해자들에 대한 독일정부의 정책의 변화과정에 대해서는 야노 히사시, 「독일의 과거극복」, 나카노 도시오/김부자(편저), 『역사와 책임』, 2008, 236쪽 이하. 30) 헤이든 법은, 캘리포니아주 민사소송법(Code of Civil Procedure)에 제354조 제6항으 로 추가되었으며, 그 제354조 제6항 (b)에서, “제2차 세계대전 노예노동 피해자 또는 그 상속인, 제2차 세계대전 강제노동 피해자 또는 그 상속인은 누구든지, 제2차 세계대전 노예노동 피해자 또는 제2차 세계대전 강제노동 피해자로서 수행한 노동에 대하여, 직접 적으로 또는 자회사 혹은 제휴회사를 통해서 그 노동으로부터 이익을 얻은 모든 자 또는 그 이익승계자를 상대로 배상을 구하기 위한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고 하고, (c)에서 “이 항에 따라 제기되는 소송은, 2010년 12월 31일 또는 그 이전에 제기되는 경우에는, 적용될 수 있는 시효규정(statute of limitation)의 기간 내에 제기되지 않았다는 것을 이 유로 각하되지 않는다”라고 명시하였다. 31) Bardo Fassbender, “Compensation for Forced Labour in World War II”, Journal of International Criminal Justice Vol. 3(2005), 243쪽 이하. 32) Agreement Concerning the Foundation “Remembrance, Responsibility and the Future,” July 17, 2000, U.S.-FRG, International Legal Materials Treaties and Agreements Vol. 39(2000), 1298쪽 이하.

153


2. 호주의 빼앗긴 세대

호주에서는 18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원주민의 문명화라는 명분아래 원주민 아동들을 그 가족에게서 강제로 격리하여 백인가정이나 시설에 위탁하여 양육하였 다. 애버리진과 토레스 해협 도서민들이 주된 피해자들이었는데 강제격리된 아동수 가 약 10만명에 이르렀다. 격리정책의 성격규정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논란이 되었 다. 호주인권위원회는 1997년 공식적인 보고서(Bringing Them Home)에서 그러한 격리는 부도덕하고 불법적이었다고 선언했다. “원주민 아동 격리에 대한 호주의 행 태는 국제법에 규정한 체계적인 인종차별이자 제노사이드이다. 호주가 자발적으로 가입한 조약에 의해서도 격리는 명시적으로 금지되었지만 당국은 조약에 가입한 후 에도 오랜기간 격리를 공공정책으로 계속 시행하였다.”고 지적하였다.33) 위원회는 아동격리가 법적인 수권에 의한 것일지라도 그것은 차별적이고 제노사이드와 같은 것(genocidal)34)이라고 지적하였다. 위원회는 강요, 협박이나 부당한 압력에 의한 원주민 아동 격리가 보통법에 근거한 것임을 인정하지만, 그러한 법률들이 원주민 이나 여타 호주인이나 동등하게 향유했어야 했던 보통법상의 근본적인 권리를 침해 한 것이라는 점도 인정했다.35)

호주인권위원회는 빼앗긴 세대에 대하여 공식보고서를 발간하여 피해자들을 위하 여 반보벤 원칙36)에 따라 해법을 제시하였다. 2008년 호주 총리 케빈 러드가 원주 들에게 사죄문—도의적 책임의 인정37)—을 발표하였였지만, 사죄에 상응하는 실질적 인 피해회복 조치는 취하지 않았다. 그와 동시에 빼앗긴 세대의 피해자들이 호주당 국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였으나 법원은 소멸시효(limitation of actions), 합법적

33) Bringing Them Home, 231쪽. 34) 제노사이드 방지조약 제2조 본 협약에서 집단살해라 함은 국민적, 인종적, 민족적 또는 종교적 집단을 전부 또는 일부 파괴할 의도로서 행하여진 아래의 행위를 말한다. (e)집단의 아동을 타집단으로 강제적으로 이동시키는 것 35) Bringing Them Home, 241쪽. 36) 제2절에서 다루는 피해자 권리장전에 반보벤의 성과들이 반영되었다. 37) Apology will not legally impact compo claims: Law Society, <http://www.abc.net.au/news/2008-02-13/apology-will-not-legally-impact-comp o-claims-law/1041134>

154


인 조치--원주민 아동의 격리를 밑받침하는 당시의 법률(Aboriginal Ordinance 1918)이 당시 헌법을 위반하지 않았다는 논리--, 증거부족 등을 내세워 빼앗긴 세 대의 권리구제를 외면하였다.38)

초기 사건에서 뉴 사우스 웨일스 항소법원은 시효규정을 적용하는 것은 부정의하 고 불합리하다고 결정하였다.39) 후속재판인 큐빌로 사건에서 법원은 원고들이 시설 에 수용되는 과정에서 당국의 불법행위를 증명하는 사실을 발견하지 못했다면서 증 거불충분으로 원고의 청구를 기각하였다.40) 빼앗긴 세대 중에서 유일하게 승소한 인물이 트레보로우이다. 남호주최고법원은 소제기에 필요한 정보를 국가만이 알 수 있었고, 국가가 정보를 원고에게 불법적으로 공개하지 않았다는 점을 확인하고 시 효를 연장하였다.41) 승소판결후 1년도 못되어 원고가 사망하였으며, 이 결정은 남 호주 항소법원에 의해 유지되었고,42) 주정부는 상고하지 않았다. 이 사건은 우리나 라 신의칙에 입각한 판결과 유사하다. 어쨌든 호주에서는 아동격리의 본질에 대하 여 여전히 논란중이며, 그에 대한 적절한 배상프로그램도 아직 마련되지 않고 있다. 일반적으로 식민주의와 연결된 인종주의 정책은 대체로 문화정책으로서 강력하게 옹호되는 경향이 존재한다.43)

38) Buti, Antonio, The Stolen Generations and Litigation Revisited, Melbourne University Law Review, Vol. 32(2008), 382, 416-17. 39) Williams v Minister, Aboriginal Land Rights Act 1983 (No. 1) (1994) 35 NSWLR 497, 514-15. 이 사건에 대해서는 Read, Peter, The Stolen Generations, the historian and the court room, ABORIGINAL HISTORY, Vol. 26(2002), 51, 53. 40) Cubillo v Commonwealth (No. 2) (2000) 103 FCR 1, 443), Cubillo v Commonwealth (2001) 112 FCR 455, 572. 41) Trevorrow v South Australia [2007] SASC 285, para. 911. 1956년생인 원주민 브 루스 트레보로우는 두 살이 안 되어 부모와 강제로 격리되어 백인가정에 위탁되었다. 그 는 열 살이 되서야 생모를 상봉할 수 있었고 67년에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다. 트레보로 우는 강제격리를 이유로 주당국에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였다. 남호주 최고법원은 당국 에 대해 트레보로우에게 775,000달러를 배상하도록 결정하였다(2007.10.1). 이 사건에 대해서는 Genovese, Ann, Metaphor of Redemption, Myths of State: Historical Accountability in Luhrmann's Australia and Trevorrow v South Australia, Griffith Law Review, Vol. 20(2011), 67쪽 이하. 42) Trevorrow v South Australia [2010] SASC 56. 43) 언어교육 자체를 문화적 제노사이드로 다루는 견해로는 Skutnabb-Kangas, Tove, Linguistic Genocide in Education or Worldwide Diversity and Human Rights, Lawrence Erlbaum, 2000.

155


3. 미국의 우생학적 불임수술

미국에서도 우생학적 유전학적 억압이 나치독일과 마찬가지로 크게 유행하였다. 원주민과 흑인에 대한 차별이 미국 대중의 의식을 부패시켰다는 것에 비추어보면 놀랄 일은 아니다. 최근에 주목을 끌었던 노스 캐롤라이나주 우생학위원회(The Eugenics Board of North Carolina (EBNC))는 1933년 노스 캐롤라이나주 강제 불임법(Bill 1013, entitled 'An Act to Amend Chapter 34 of the Public Laws of 1929 of North Carolina Relating to the Sterilization of Persons Mentally Defective')에 의해 설치된 주립위원회이다. 위원회의 직무범위는 처음에는 순수한 유전학에 관한 것이었으나 시간이 가면서 빈곤 및 복지비용과 투쟁하는 수단으로서 불임수술을 고려하였다.44) 원래의 의도는 공공시설의 재소자나 환자로서 정신적으 로 결함이 있거나 심신이 박약하다고 당국이 판정한 자에 대하여 불임시술을 관리 하는 것이었다. 미국 전역에서 시행된 우생학 프로그램과 달리 노스캐롤라이나 위 원회는 군복지담당부서에 고객의 불임시술을 신청하도록 허용했다. 위원회는 1977 년까지 운용되었으며, 이러한 위원회가 존속하는 동안에 수천명이 불임조치를 당했 다. 1977년에 의회는 위원회에 권한을 부여하는 법을 철회하였지만 2003년이 돼서 야 비자발적인 불일시술 법이 폐지되었다.45)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정부로부터 7,600명의 여성이 강제불임수술을 당했으며, 성생활이 문란하거나 학습장애, 빈곤층, 알코올 중독이 있는 여성 등을 대상으로 강 제 불임수술을 벌였다. 대부분 아프리카계나 소수계 여성이었다. 우생학 프로그램을 운영한 주는 노스캐롤라이나를 포함해 31개 주에 달했다. 대부분 1929년부터 1974 년까지 이 법을 시행하였으며 상당수 여성들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강제불임수 술을 받았다. 2000년 들어 우생학 프로그램을 운용했던 노스 캐롤라이나주는 불임 수술을 당한 피해자들에게 50,000달러를 보상하기로 약속하였다.46) 44) 우생학적 조치에 대하여 적법절차, 법의 평등한 보호를 이유로 정부의 정책을 무효화하 려는 판결이 없지 않았다. 1927년 Buck v. Bell 사건(274 U.S. 200)에서 홈즈(Oliver Wendell Holmes) 판사는 우생학적 견해를 지지하였다. 45) Eugenics Board of North Carolina, <http://en.wikipedia.org/wiki/Eugenics_Board_of_North_Carolina>

156


Ⅳ. 피해자의 권리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이 어떤 권리를 가질 수 있는가? 지난 과거청산국면에서 과 거사위원회의 각종보고서들은 피해자들의 권리를 구제하는 다양한 수단을 제시하였 다. 이러한 권리를 실현하는 것이 후속과제라고 할 수 있다. 이 문제에 관해 국제적 인 원칙으로서 <권력범죄와 남용의 피해자를 위한 정의의 기본원칙(1985)>47)과 <국제인권법의 중대한 위반행위와 국제인도법의 심각한 위반행위의 피해자의 구제 와 배상에 대한 권리에 관한 기본원칙과 가이드라인(2006)>48)을 들 수 있다. 전자 가 국내적인 범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후자는 국제적인 범죄, 특히 국제인도법 과 국제인권법의 심각한 위반에 초점을 맞춘다. 후자는 "피해자의 국제권리장전 (international bill of rights of victims)"으로 불리고 있다. 바수오니는 이 원칙이 종래 갈등중심적인 국제인도법이나 국제인권법에 피해자 시각을 도입한 것이라 평 가한다.49) 두 문서는 중대한 인권침해를 청산한다는 기본 목적에서 보자면 동일한 법리를 발전시킨 것이다. 2005년 유엔인권위원회(Commission on Human Rights) 가 채택한 <증보불처벌투쟁원칙>50)은 1985년 불처벌투쟁원칙을 발전시킨 것이다. 피해자 권리장전 제11조는 피해자의 권리를 재판받을 권리(right to justice), 배상 받을 권리(right to reparation), 알 권리(right to know)로 요약하고, 불처벌투쟁 원칙도 같은 취지에서 피해자의 권리를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피해자 의 권리는 단순히 가해자처벌이나 피해에 대한 금전배상에 한정되지 않는다. 피해 46) 고은아, IQ 70 이하는 애 가질 자격 없다? 강제로...,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691478> 47) Declaration of Basic Principles of Justice for Victims of Crime and Abuse of Power(A/RES/40/34) 48) Basic Principles and Guidelines on the Right to a Remedy and Reparation for Victims of Gross Violations of International Human Rights Law and Serious Violations of International Humanitarian Law(A/60/509/Add.1) 49) Bassiouni, M Cherif, International Recognition of Victim's Rights, Human Rights Law Review Vol. 6, 204 이하. 50) PROMOTION AND PROTECTION OF HUMAN RIGHTS: IMPUNITY -Report of the independent expert to update the Set of principles to combat impunty, Diane Orentlicher: Addendum-Updateded Set of principles for the protection and promotion of human rights through action to combat impunity, E/CN.4/2005/102/Add.1 8 February 2005.

157


자의 개인적 권리구제에 머물지 않고 인권침해의 재발을 야기할 수 있는 사회구조 들을 겨냥하고 있다.

1. 피해자의 권리

1)진실에 대한 권리 진실에 대한 권리는 국제법적으로는 제네바 협정 제1추가의정서 제32조에 처음 등장하였 다.51) 강제실종협약 전문은 “강제실종의 상황 과 실종자의 운명에 대하여 진실에 대한 피해 자의 알 권리”를 규정하고 있다. 진실에 대한 과거청산의 5대과제

권리는 유엔총회, 인권기구의 수많은 결의와

선언에 나타나고 있다. 인권법상의 개념으로서 진실에 대한 권리는 가족의 운명에 대한 진실을 알고자 하는데 권한을 부여하는 법적인 권리들을 의미한다. 진실에 대 한 권리가 실종자의 가족에 의하여 미주인권법원에 의해서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권리의 기초가 되는 원칙들은 유럽인권법원과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인권법정에 의 해서도 인정되었다.

진실에 대한 권리가 존재한다면 국가는 강제실종이나 의문사 등 중대한 인권침해 사건의 피해자나 그 가족이 진실에 접근하는 것을 방해해서는 안 되며 그러한 활동 을 지원해야 하고 스스로 적절한 조사기구나 수사기구를 통해서 진실에 대한 권리 를 실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물론 국가는 과거사위원회 등에 대한 피해자들의 조사신청권을 부여함으로써 이러한 권리를 보호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기구가

51) 제32조(일반원칙) “본 장(실종자 및 사망자)의 시행에 있어 체약당사국, 충돌당사국과 제협약과 본 의정서에 언급된 국제적 인도주의기구들의 활동은 주로 친척들의 운명을 알고자 하는 가족의 권리 에 의해 촉진되어야 한다.” Protocol Additional to the Geneva Conventions of 12 August 1949, and relating to the Protection of Victims of International Armed Conflicts(Protocol 1), June 8, 1977.

158


존재하지 않거나 일반적으로 국가기구가 조사요구를 수용하지 않는 경우에는 진실 에 대한 권리가 피해자의 독자적인 권리가 될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

유럽인권법원이나 미주인권위원회, 미주인권법원의 결정은, 국가가 실종자의 최후 에 일정한 관련성이 있는 경우에 지역인권협약상의 진실에 대한 가족의 권리를 침 해한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위원회나 법원이 진실에 대한 권리의 근거로 들고 있 는 지역인권규약상의 권리조항은 비인도적 처우금지규정과 재판받을 권리 등이다. 이는 시민적정치적권리에관한국제규약(ICCPR)의 비인도적 또는 굴욕적 처우금지(제 7조), 재판받을 권리(제14조)와 같다. 실종과 같은 중대한 인권침해의 진실을 규명 하지 않고 효과적인 권리구제를 시행하지 않는 경우에는 지속적인 권리침해 (continuous violations)로서 시효에도 걸리지 않는다.52) 따라서 한국헌법의 규정 이나 ICCPR 해당조항들을 원용하여 진실에 대한 권리를 논증하여 국가에게 조사의 무를 부과할 수 있을 것이다.

<불처벌 투쟁원칙>은 진실에 대한 국민의 불가양의 권리, 기억을 보존할 국가의 의무, 희생자의 알권리를 규정하고 있다. 진실을 알 권리, 진실에 대한 권리가 피해 자의 권리이기에 앞서 국민 전체의 권리라고 규정한 점을 주목해야 한다. “모든 국 민은 끔찍한 범죄의 발생에 대하여, 대량의 또는 체계적인 침해를 통해 그러한 범 죄의 발생에 이르게 되었던 상황과 이유에 관해 진실에 대한 불가양의 알 권리를 가진다. 진실에 대한 권리의 완전하고 효과적인 행사는 권리침해의 재발을 방지하 는 데에 필수적인 안전판이다(제2원칙).53) 나아가 억압의 역사에 대한 국민의 지식 52) Case of the "Street Children" (Villagran-Morales et al.) v. Guatemala, Inter-American Court of Human Rights (IACrtHR), 19 November 1999, available at: http://www.unhcr.org/refworld/docid/4b17bc442.html [accessed 9 October 2012] ; Cyprus v. Turkey, 25781/94, Council of Europe: European Court of Human Rights, 10 May 2001, available at: http://www.unhcr.org/refworld/docid/43de0e7a4.html [accessed 9 October 2012] ; Groome, Dermot, The Right to Truth in the Fight against Impunity, Berkeley Journal of International Law Vol. 29, 175ff. 53) 진실에 대한 권리가 사회전체의 권리라는 취지의 결정은 Inter-Am. Ct.H.R.,(ser.C) No. 70(Nov. 25, 2000) http://www.corteidh.or.cr/docs/casos/articulos/seriec_70_ing.pdf; Las Los

159


은 유산의 일부이며, 이러한 지식은 인권법과 인도법의 침해와 관련하여 문서고와 여타 증거를 보존할 국가의 의무 및 이러한 침해에 관한 지식을 접근하기 용이하게 할 국가의 의무를 이행하는 데 적절한 조치들을 통해 확보해야 한다. 그러한 조치 들은 집단적 기억이 멸실되지 않도록 해야 하며, 특히 수정주의나 부인주의 주장 (revisionist or negativist arguments)에 맞서서 이루어져야 한다(제3원칙).54) 온 갖 법적 절차에 상관없이 피해자와 그 가족은 인권침해가 발생했던 상황, 그리고 피해자가 사망하거나 실종된 경우에는 그 피해자의 운명에 관한 진실에 대하여 시 효로 소멸하지 않는 알 권리(the imprescriptible right to know the truth)를 가 진다.(제4원칙) 국가는 알권리를 실효적으로 만들기 위하여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 이러한 권리를 확보하는 적절한 조치들 속에는 사법부의 역할을 보완하는 비 사법적인 과정이 포함될 수 있다. 대량으로 또는 체계적으로 자행된 끔찍한 범죄를 겪은 사회는 그러한 인권침해를 둘러싼 사실을 확정하여 진실을 발견하기 위하여 특별히 진실위원회나 증거의 일실을 방지하기 위하여 진실위원회나 여타 조사위원 회의 설치로부터 이점을 활용할 수 있다. 국가가 그러한 기구를 설치했든 하지 않 았던 관계없이 국가는 인권 및 인도법의 침해에 관한 문서들의 보존과 그에 대한 접근을 확보해야 한다(제5원칙).

진실을 알 권리는 시효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진실에 대한 권리를 매개로 최소 한 국가 책임범위 안에서 자행된 실종, 사망, 피해에 대하여 진실규명을 요구할 수 있다. 이 권리가 모든 과거사의 논의의 출발점이자 매개고리이다. 진실에 대한 권리 가 소멸시효에 걸리지 않는다는 결론은 국가재정법 제96조의 반대해석에 의해서도 가능하다. 국가재정법은 금전지급을 목적으로 하는 채권에 관해서 소멸시효를 규정 하고 있으므로, 재정적 부담을 지우는 의무가 아닌 경우에는 시효에 걸리지 않는 것이다.55) 예컨대 불처벌 투쟁원칙, 정보공개법, 헌법상의 재판청구권에 기초하여 Erres Massacre v. Guatemala, Inter-Am. Ct. H.R.(ser. C) No. 211, http://www.corteidh.or.cr/docs/casos/articulos/seriec_211_ing.pdf(Nov. 24.2009) 54) 홀로코스트 부인자에 대한 처벌논쟁은, 이재승, 국가범죄, 2010, 541쪽 이하. 55) 제96조(금전채권·채무의 소멸시효) ① 금전의 급부를 목적으로 하는 국가의 권리로서 시 효에 관하여 다른 법률에 규정이 없는 것은 5년 동안 행사하지 아니하면 시효로 인하여 소멸한다.

160


이러한 알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

2) 재판받을 권리 <피해자 권리장전> 제12조는 재판에 대한 권리(right to justice)를 규정하고 있 다. 중대한 인권 피해자는 국제법상의 사법구제뿐만 아니라 국내법상의 권리구제 절차에 대한 접근권을 향유하며, 국가는 다음과 같은 조치를 취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a) 공적, 사적인 장치를 통해 국제인권법의 중대한 위반 또는 국제인도법의 심각 한 위반에 대한 이용가능한 모든 구제조치들에 관한 정보를 전파하는 것 (b) 피해자의 이익에 영향을 미치는 사법적, 행정적, 여타 절차의 개시전, 진행중, 종료후에도 피해자와 그 대표자들의 불편을 최소화하고, 그들의 사생활에 대 한 불법적인 간섭으로부터 적절히 보호하고, 그들의 안전을 복수와 위협으로 부터 확보하고, 피해자의 가족과 증인들의 안전도 확보하는 조치를 취하는 것 (c) 재판에 대한 접근을 추구하는 피해자에 적절한 지원을 제공하는 것 (d) 피해자가 국제인권법의 중대한 위반 또는 국제인도법의 심각한 위반에 대한 구제조치에 대한 권리를 행사할 수 있도록 필요한 모든 법적, 외교적, 영사적 수단을 이용할 수 있게 하는 것

재판에 대한 개별적인 접근 이외에도 국가는 피해자 집단이 배상청구를 제기하고 배상을 받을 수 있도록 허용하는 절차를 개발하기 위하여 적절히 노력해야 한다(제 13조).56)

②국가에 대한 권리로서 금전의 급부를 목적으로 하는 것도 또한 제1항과 같다. ③금전의 급부를 목적으로 하는 국가의 권리에 있어서는 소멸시효의 중단·정지 그 밖의 사항에 관하여 다른 법률의 규정이 없는 때에는 「민법」의 규정을 적용한다. 국가에 대한 권리로서 금전의 급부를 목적으로 하는 것도 또한 같다. ④법령의 규정에 따라 국가가 행하는 납입의 고지는 시효중단의 효력이 있다. 56) 2013년 5월 16일 진도판결은 권리구제의 문을 하루빨리 닫기 위하여 신의칙에 입각해 서 제소기간을 6개월로 잡은 폭거적 원칙을 채택하였다.

161


국제인권법의 중대한 위반 또는 국제인도법의 심각한 위반에 대한 적절하고, 효 과적이고, 즉각적인 구제는 피해자가 당사자적격을 갖는 모든 이용가능한 적절한 국제적 절차를 포함하며, 어떠한 국내법상의 구제조치를 해하지 아니한다(제14조). <불처벌투쟁원칙>도 공소시효, 형의시효를 배제하고 있다.

따라서 형제복지원의 피해자들은 국가에 대한 재판청구권을 행사할 수 있을뿐만 아니라 국가가 적절한 진실조사와 그에 기초하여 권리구제를 게을리 하는 경우에는 자유권규약위원회에 개인청원을 활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3) 배상에 대한 권리 피해자권리장전은 적절하고 효과적인 배상을 규정하고 있다. 적절하고, 효과적이 고, 즉각적인 배상은 국제인권법의 중대한 위반 또는 국제인도법의 심각한 위반을 시정함으로써 정의를 촉진하기 위한 것이다. 배상은 위반행위와 피해의 중대성에 비례해야 한다. 국내법과 국제법상의 의무에 일치하여, 국가는 국제인권법의 중대한 위반 또는 국제인도법의 심각한 위반에 해당하고, 국가에 그 책임이 귀속될 수 있 는 작위 또는 부작위에 대해 피해자에게 배상을 제공해야 한다. 개인 또는 법인, 기 타 단체가 피해자에게 배상할 책임이 있는 경우에는 그 당사자는 피해자에게 배상 을 제공해야 하고, 또는 국가가 이미 피해자에게 배상을 제공한 때에는 당사자는 국가에게 변상해야 한다(제15조).

국내법과 국제법에 따라, 개별적인 상황을 감안하여, 국제인권법의 중대한 위반행 위와 국제인도법의 심각한 위반행위의 피해자에게는 각 사례의 위반의 중대성과 상 황에

비례하고

(compensation),

필요한

범위

내에서

재활(rehabilitation),

원상회복(restoration),

만족(satisfaction),

금전배상

재발방지의

보증

(guarantee of non-repetition) 등 완전하고 효과적인 배상이 제공되어야 한다(18 조).

원상회복은 가능하다면 피해자를 국제인권법의 중대한 위반행위 또는 국제인도법

162


의 심각한 위반행위가 발생하기 이전 상황으로 회복시켜 놓아야 한다. 필요한 경우 원상회복은 자유의 회복, 인권․정체성․가정생활․ 시민권의 향유, 원래 거주지로 귀 환, 고용회복, 재산의 반환을 포함한다(제19조).

국제인권법의 중대한 위반행위와 국제인도법의 심각한 위반행위로부터 야기되는 경제적으로 환산가능한 다음과 같은 손해들에 대해서는 위반행위의 중대성과 각 사 건의 상황을 감안하여 적합하고 비례적인 범위 안에서 금전적인 피해배상이 제공되어야 한다. (a) 신체적 또는 정신적 장애 (b) 고용, 교육 및 사회적 편익 등 기회의 상실 (c) 물질적인 손해와 잠재적 소득의 상실을 포함하여 소득의 상실 (d) 정신적 고통 (e) 법적 원조 또는 전문 가 원조, 약과 의료 서비스, 심리적 사회적 서 비스에 소요된 비용(제20조)

재활조치는 의료적 심리학적 보살핌뿐만 아

배상의 다양한 차원

니라 법률적 사회적 서비스를 포함해야 한다 (제21조).

실제로 중대한 인권침해행위자에 대한 효과적인 제재와 처벌이 관철되지 못하는 완만한 이행의 상황에는 대체로 피해자에 대한 배상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배상에 관한 권리 중에서 매우 간접적이고 공공적인 성격의 권리구제수단이 만족과 재발방 지이다. 현재 한국의 과거청산 현황을 비추어보면 오히려 이러한 공공적 차원에서 배상조치의 이행 수준은 낮다. 미래의 재발방지라는 측면에서 과거사정리작업의 성 과를 평가한다면 인권피해자 권리장전의 제22조와 제23조는 매우 중요한 장치라고 생각한다.

만족은 필요한 경우 이하의 전부 또는 각부분을 포함한다. (a) 지속적인 침해의

163


중단을 겨냥한 효과적인 조치 (b) 진실의 공개가 추가적인 피해를 야기하지 않거나 피해자, 피해자의 친척, 증인 그리고 피해자를 돕기 위하여 또는 위반행위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하여 개입한 사람들의 안전과 이익을 위태롭게 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사실의 검증과 진실의 완전한 공개 (c) 실종자의 소재, 납치된 아동들의 신원, 피살 자의 시신의 수색, 시신의 발견, 신원확인, 피해자의 명시적 또는 묵시적 희망, 가 족들의 문화적 관례에

따른 시신의 매장에서 지원 (d) 피해자 및 그와 밀접하게

연결된 사람들의 존엄, 명예, 권리를 회복시키는 공식적인 선언 또는 사법적 결정 (e) 사실의 인정과 책임의 수용을 포함한 공식적 사과 (f) 위반행위에 책임 있는 개 인들에 대한 사법적 행정적 제재 (g) 피해자에 대한 기념과 헌사 (h) 국제인권법과 국제인도법 연수와 모든 수준의 교육자료 안에 자행된 위반행위에 대한 정확한 설 명의 포함(제22조)

재발방지의 보증은 필요한 경우 방지에 기여할 다음의 조치들의 전부를 포함해야 한다. (a) 군대 또는 보안부대에 대한 효과적인 민간 통제를 확보하는 것 (b) 모든 민간 또는 군사 절차가 적법절차, 공정성, 불편부당성에 관한 국제기준을 준수하도 록 보장하는 것 (c) 사법부의 독립을 강화하는 것 (d) 법조, 의료, 보건 직역, 미디 어 및 여타 관련 직종의 종사자들 그리고 인권옹호자들을 보호하는 것 (e) 우선적으 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사회의 전부문에 인권 교육과 국제인도법 교육, 그리고 법집 행공무원, 군인, 보안부대 요원에게 이러한 교육을 제공하는 것 (f) 법집행공무원, 교정, 여론매체, 의료, 심리, 사회적 업무를 포함한 공무원뿐만 아니라 경제 기업들 의 행동강령과 윤리규범, 특히 국제적 기준의 준수를 촉진하는 것 (g) 사회갈등의 예방과 감시, 그 해결을 위한 장치를 촉진하는 것 (h) 국제인권법의 중대한 위반과 국제인도법의 심각한 위반을 허용하거나 조장하는 법률을 재검토하고 개혁하는 것 (제23조)

164


Ⅴ. 후속과제 후속과제를 설정하는데 있어서 피해자의 권리를 주목해야 한다. 특히 삼청교육대 사건처럼 피해자들에게 몇 푼의 보상금으로 사태를 마감하는 우를 반복하지 않았으 면 한다.

첫째로, 형제복지원뿐만 아니라 75년 이후 다양한 시설들의 인권침해관행에 대한 전반적인 자료수집이 필요하다 정보공개청구권을 활용하고 피해자들은 진실에 대한 권리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자료수집에 기초하여 형제복지원이나 당시 시설 들에 대해 법률적으로 정밀하게 정의를 내려야 할 것이다. 특히 입소의 계기나 방 식, 목적 등에서 입소자 유형별로 차이가 드러날 수 있으므로 가능한 한 다양한 실 례를 수집하여 시설의 성격을 총체적으로 규정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법에 따라 형 제복지원 사건조사위원회가 발족된다면 이러한 작업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로, 총체적인 진실을 규명하기 위하여 우리는 진실에 대한 권리를 매개로 활 용해야 한다. 진실에 대한 권리의 상대를 누구로 삼아 법률적 투쟁을 시작할 것인 지 고려해야 한다. 어쨌든 이 권리는 시효에 걸리지 않으므로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다. 국가인권위원회, 국회, 국민권익위원회, 안전행정부, 보건복지부 등 가능한 한 국가기관을 진실에 대한 권리의 상대로 상정할 수 있겠다. 이러한 국가기구가 조사 와 진실공개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경우에는 헌법소원을 활용할 수 있고, 심각한 피 해자들을 중심으로 자유권규약위원회에 개인통보제도를 활용할 수 있을 것 같다.(아 직 자유권위원회가 이 문제에 대하여 결정을 내리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미주인 권위원회나 인권법원의 결정을 통해 긍정적인 방향에서 유추해 볼 수 있다.) 진실을 공개하지 않고 적절한 배상을 제공하지 않는 행위는 그 자체로 자유권 규약상의 “기타 잔혹하고 비인도적이거나 굴욕적인 처우(제7조)”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고문 방지위원회의

통보제도는

의정서(The

Optional

Protocol

to

the

Anti-Torture Treaty)에 가입하지 않았기 때문에 활용할 수 없을 것 같다.

165

UN


셋째로, 공개된 정보에 입각하여 피해자들이 최근에 집단살해와 관련하여 내려진 대법원의 판결에 준하여 접근로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손해배상을 받는데 장애물 은 내무부훈령이라는 법적 장치에 입각한 수용이기 때문에 불법행위가 아니라는 정 부측의 주장이 있을 수 있다. 이 경우에는 고민을 해야 하지만 긴급조치에 대한 대 법원의 위헌판결이나 독일 법철학자 라드브루흐의 법률적 불법에 입각하여 법적 조 치가 불법적이라는 점을 주장해야 할 것이다. 그에 따라 손해배상청구를 할 수 있 을 것이다.

넷째로, 현재와 같이 보상법을 제안하는 경우에도 수용기간을 중심으로 고려하기 보다는 불법구금이라는 점을 감안하여 특별위자료(징벌적 손해배상)를 반영하는 법 안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다섯째로, 형제복지원의 시설주의 책임은 국가배상이든 보상이든 동시에 고려되 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의 미지불 임금을 반환하는 문제를 포함해서 공동불법행위자 로서 책임을 적절하게 반영하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독일의 <기억, 책임, 미래재 단법>이 참조가 될 것이다.

여섯째로, 피해자들의 트라우마를 치유하기 위한 방안도 보상방안으로 고려되어 야 한다.

일곱째로, 한국의 과거청산은 주로 피해배상과 명예회복을 위주로 한 신원모델이 었다. 그러나 인권침해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한 구조개혁적인 작업과 시각이 필요 하다. 따라서 공론화과정을 통해 현재의 수용시설의 혁신을 위한 계기로 삼고, 이른 바 대중의 병적이고 적대적인 ‘청결유토피아’를 청산하는 문화운동도 추구해야 한 다.

166


]

발표 8

형제복지원 사건과 국가책임

김명연(상지대)

167


[발표 8]

형제복지원 사건과 국가책임 김명연 | 상지대

Ⅰ. 부랑인에 대한 피의 입법사 인권에 대한 전면적이고 총체적인 유린으로 규정되는 형제복지원 사건은 ‘인간에 게 있어 법이란 무엇인가’, ‘인간에게 있어 법은 어떠하여야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 질문과 회의를 가져 온다. 부랑인 문제는 자본주의 모순구조를 그대로 반영한다. 부 랑인에 대한 법적 규제는 노동강제와 노동착취의 목적으로 등장하였다. 영국에서 본격적인 부랑인법은 1349년 노동자법령(the Statute of Labourers)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대체로 견해가 일치하고 있다.1) 1348년 흑사병은 노동력을 급감시키고 노 동임금을 현저히 상승시키게 결과를 낳게 된다(당시 흑시병으로 영국 인구가 절반 으로 감소). 이에 따라 영주는 상승된 임금을 지불하기 위하여 농노에게 더욱 무거 운 부담을 지우게 되고, 농노는 보다 나은 생활조건의 유인을 좇아 도망하게 되었 다. 1349년 노동자법령은 이러한 배경에서 영주에게 자기의 농노와 소작인에게 대 하여 우선권을 보장하여 영주 상호간의 농노 쟁탈전을 제한하고, 농노의 이탈을 방 지하기 위하여 걸식과 유랑을 금지시키고 걸인이나 부랑인에게 자선을 하거나 받는 것도 처벌하였다. 또한 임금의 한도를 1347년으로 한정하고 이 한도액을 초과하여 지불하거나 지불받는 자를 금고형으로 처벌하도록 하였다.2)

한편 고전적 자본주의발달과정에서 노동력의 확보는 농민의 토지로부터 추방과 1) 남궁호경, “미국 부랑법(Vagrancy)에 대한 고찰(상)”, 형사정책 제2권(1987), 219쪽. 2) 프랑스에서 영국의 노동법령에 대응하는 것이 존(John)왕의 명의로 발포된 칙령인데 당 시 영국의 입법과 프랑스의 입법은 병행해 가고 있으며 내용도 기본적으로 동일하다.

169


무일푼의 자유로운 프롤레타리아화를 요구한다. 부랑인은 자본주의발전에 따른 농민 의 끝없는 하향분해의 산물이다. 15세기를 경과하는 과정에서 중세의 장원제도가 붕괴되고 자본의 본원적 축적으로 인클로저운동(폭력적 토지수탈. 양이 인간을 먹는 다)에 의하여 추방된 사람들은 그들이 세상에 나타난 것과 동일에게 신흥 매뉴팩처 에 흡수될 수는 없었다. 또한 자신의 생활궤도에서 갑자기 내몰린 그들이 새로운 환경에 순응할 수도 없었다. 이들은 선택의 여지도 없이 도시빈민을 형성하게 되고 대규모의 부랑자로 전락하게 된다.3) 이에 따라 14세기와는 다른 시대적 상황에서 15세기말과 16세기 전체 기간을 통해 유럽의 모든 나라에서 부랑자(vagabondage) 에 대한 피의 입법이 실시되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입법된 첫 부랑인법은 헨리 8세 시대인 1530년 법률이다. 이 법 률에 의하면 노동력이 있는 자가 구걸하거나 부랑자인 경우 초범인 경우 태형과 감 금형, 2범인 경우 다시 태형에 처하고 귀를 절반 자르며 3범인 경우 중죄인으로 또 는 공동체의 적으로 사형된다. 이 후 부랑인법은 처벌규정을 보다 강화하는 데, 가 슴이나 이마에 낙인찍기, 부랑인 신고자의 종신노예화·부랑인 자녀의 도제화·노예화 (노예법), 재범으로 18세 이상으로 2년간 이들을 사용할 사람이 없는 경우에 있어 사형(엘리자베스 여왕의 1572년 법률), 3범인 경우 반역죄로 사형되었다.4) 부분적 인 수정을 거쳐 250년간 유지된 구빈법(Poor Law) 역시 부랑인을 교정원에 보내고 태형과 낙인을 찍는 등 진압적 성격을 유지하고 있었다. 영국과 유사한 법령이 프 랑스에도 있었으며, 17세기 중엽 파리에 이른 바 ‘부랑자 왕국’(royaume des truands)이 세워졌다. 루이 16세의 칙령(1777년 7월 13일)에 의하며 16세부터 60 세에 이르는 건강한 사람으로 생활수단과 일정한 직업이 없는 사람은 갤리선을 젓 는 형벌에 처한다.5) 한편 미국의 부랑인법은 식민지 시대 이래로 영국의 부랑인법

3) 교회의 보호를 받던 빈민들도 종교개혁으로 수도원이 해체됨으로써 도시빈민과 부랑인의 문제를 야기하는 요인이 된다. 헨리 8세의 통치시대에 부랑자 7만 2천명이 사형을 당했다고 한다. 그리고 엘리자베스 여 왕의 행복한 통치시대에도 매년 300 내지 400명이 교수형을 당했다고 한다. 칼 마르크 스, 김수행 역, 자본론Ⅰ(하)(비봉출판사, 2011), 1011쪽 주2)). 자본주의형성기에 있어 영국과 유럽의 부랑인법에 대해서는 칼 마르크스, 김수행 역, 앞 의 책, 1009-1013쪽; 남궁호경, 앞의 논문, 217-226쪽 참고.

4) 5)

170


을 계수하였다. 따라서 규정 내용은 거의 영국의 입법들과 동일한 것이 많지만, 영 국이 1824년의 부랑인법(The Vagrancy Act)에 의해 행위범죄로 전환하기 이전의 신분범죄의 형태의 영향이 강하였으며, 영국보다 강한 범인 내지 혐기자의 통제에 대한 관심을 보여 준다.6) 미국의 부랑인법은 이후 계속 수정되었으나 기본적인 내 용은 크게 변함없이 1972년 Papachristou v. City of Jacksonville 판결에 의해 위헌이 선언될 때까지 유지되었다.7)

이 시대의 부랑죄의 법률적 특징은 일정한 부류의 인간에 속하면 범죄의 위험성 이

있고

그로

인해

부랑자는

범죄자가

된다는

점에서

‘신분범죄’(status

criminality)의 특성을 갖는다. 즉 신체가 건강하고 일할 능력이 있는 자가 부랑하 는 경우 처벌하는 ‘부랑자라는 신분’에 의해 처벌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폭력적으 로 토지를 수탈당하고 추방되어 부랑자가 된 농민들은 그 다음에는 무시무시한 법 령들에 의해 채찍과 낙인과 고문을 받으며 임금노동의 제도에 필요한 규율을 얻게 된 것이다. 초기 자본주의발전단계에서 이들은 부랑자와 극빈자로 부득이 전락한 죄(罪) 때문에 징벌을 받은 것이다. 입법은 이들을 자발적 범죄자로 취급하였다.

Ⅱ. 한국에 있어 부랑인의 형성과 정책과정 1. 한국에 있어 부랑인의 형성과 특수성

해방 이후 ‘거지’라는 개념의 부랑자들이 한국전쟁과 함께 상이군경을 비롯한 ‘양 아치’로 불리던 무리들이 1970년대에 들어와서 ‘부랑인’이라는 개념으로 변하여 왔 다. 이들은 산업화 이전의 시기부터 근대화시기에 이르기까지 일반인들에게 부정적 시각으로 낙인 되어 왔고 실제 정책의 대상에서도 소외되어 왔다.8) 6) 미국 부랑인법과 운영실태에 대해서는 남궁호경, 앞은 논문 226쪽 이하 참고. 7) Papachristou v. City of Jacksonville 판결에 대해서는 김지혜, “구결행위금지조항의 위헌성 : 미국 주요판례를 통한 비교법적 고찰”, 서울대학교 법학 제53권 제3호(2012. 9), 77-79쪽. 8) 고주현, 최창무, “1990년대의 부랑인 복지서비스에 관한 연구”, 복지행정논총 제11집 제1권(2001. 6), 5쪽.

171


그 동안 국가가 단속과 수용대상으로 삼고 있는 부랑인은 누구인가? 이농현상은 자본주의의 발전에 따라 진행되는 농민의 끝없는 하향분해의 산물이다. 1960년대에 수출대체 산업화 전략에 따라 노동집약적인 경공업 부문에 투자를 집중하는 한편 이농을 부추겨 도시 내에 광범위한 유휴노동력을 양산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영세 소농·소작농의 형태로 농촌에 잠재되어 있던 빈민들이 생존을 위하여 대규모로 도 시로 이주하여 일자리를 잡지 못한 유휴노동력이 부랑인계층을 형성한다. 또한 산 업화와 함께 도시 공간의 합리적 활용이라는 이유로 1960년대부터 무허가판자촌의 철거와 도시정비가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는데 그 결과 주거의 불안정이 취업의 불안 정과 함께 대규모의 부랑인을 양산하게 된다. 이와 같이 산업화와 도시화의 과정에 서 정당하게 배려 받지 못하고 배제된 浮游層이 부랑인인 것이다.

한편 한국에 있어 부랑인의 문제는 자본주의의 일반적 경로와 함께 파행적 현대 사에서 그 특수성을 찾아야 한다. 특히 당시 정치권력의 반민주성과 반민중성에서 그 가장 큰 원인을 발견해 내야 한다. 한국에 있어 부랑인의 문제는 자본주의의 모 순과 이 나라 현대사의 모순이 합작·증폭하여 빚어낸 특수한 계층이며 권력자는 이 들을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사회로부터 격리·수용해 버리는 것이다.

2. 한국에 있어 부랑인정책의 전개과정

(1) 1960∼1974년 : 보안처분과 국가사업을 위한 강제노동의 시대 1950년대와 1960년대에는 부랑인에 대한 어떠한 법제적 정비 없이 보안처분으로 부랑인을 강제수용하고 강제노역에 동원했던 시기이다.9) 1961년 군사정권이 들어서 면서부터 잠재적인 범죄자로 낙인·취급하면서 부랑인에 대한 일체의 단속과 강제수 용을 반복하며 정신교육과 징벌적 강제노동을 부과하였다. 이들은 서산매립공사, 국 토건설단설치법(법률 제779호, 1961. 12. 2.)에 의하여 태백산지역종합개발사업, 특 정지역의 종합개발사업, 다목적수자원개발 및 대간척사업, 천재 또는 지변에 의한 9) 국가인권위원회 광주지역사무소, 부랑인시설 생활인 인권에 관한 기초조사 연구, 2007, 33쪽 주)4. 1955년과 1956년에 43개소의 부랑아수용시설이 있었으며, 1963년에는 24개 소의 부랑아수용시설과 16개의 부랑인수용시설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172


긴급복구사업 등에서 강제노역 등의 취로사업에 동원되었다(동법 제6조).10) 1970년 사회복지사업법(법률 제2191호, 1970.1.1, 제정)이 제정되어 사회복지사업으로 부랑 인선도사업을 규정하였으나(동법 제2조 제1항) 부랑인에 대한 개별복지정책에 관해 서는 아무런 규정을 두고 있지 않았다. 이 시기 역시 여전히 내무부 관할 하에서 부랑인에 대한 단속과 수용은 이어 졌다. 즉 내무부의 주관 하에 정권 안보 차원에 서 치안문란행위를 방지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서 부랑인을 수용하고 이들을 다 시 개간지나 노역장으로 이송하여 강제노동에 동원한 것이다.11)

(2) 1975∼1987년 : 경찰법의 시대 이 시기는 유신정권의 말기와 제5공화국의 시기이다. 부랑인 정책에 대한 법제적 환경변화는 1975년 ‘부랑인의 신고, 단속, 수용, 보호와 귀향조치 및 사후관리에 관 한 업무지침’(1975. 12. 15. 내무부훈령 제410호)이 제정되면서 부터이다. 물론 이 는 법령이 아니라 훈령에 지나지 않는 것이지만, 국가가 경찰법적인 차원에서 부랑 인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최초의 공식문서이다. 다만 내무부훈령은 법률이 아 니라 행정규칙이며 따라서 부랑인 강제수용의 법적 근거가 될 수 없다. 또한 부랑 인에 대한 국가개입도 사회복지차원이 아니라 그 명칭과 관할부서, 지침의 제정목 적과 임무 등에서 보는 바와 같이 경찰법적 대응이라는 점이다.12)

특히 심각한 정치적 정당성의 위기에 직면한 제5공화국 전두환 정권은 정권 출범 초기부터 국민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하여 복지국가의 건설이라는 슬로건을 제시하 10) 국토건설단은 삼청교육의 효시로서 국군의 지원을 받았으며(동법 제4조) 건설원의 충원 은 내무부장관이 이를 관장하고(동법 제4조 제3항) 건설원이 도망 등을 하는 경우 1년이 상 3년이하의 징역에 처하도록 한 점(동법 제13조) 등에서 볼 때 이 법의 성격을 볼 수 있는 바, 한국의 부랑인법이라고 할 수 있다. 국토건설단설치법은 1963년 폐지되었으나 이후에도 국토건설단의 이름으로 건설현장에 강제로 끌려간 사례는 많았다고 한다. 11) 김동인,“부랑인 복지정책의 전개과정에 관한 연구”,계간 사회복지 2008년 봄호, 7쪽. 12) 내무부훈령의 제정목적은 “이 지침은 걸인, 껌팔이 등 건전한 도시질서를 저해하는 부 랑인을 신고, 단속, 수용, 보호하고 귀향 및 사후관리를 하는데 있어…도시생활의 명랑화 를 기하고 범법자 등 분순분자의 활동을 봉쇄하는데 만전을 기하여야 한다”고 하고, 부 랑인 단속의 기본적 임무는 첫째, 윤리적 측면에서 모든 부랑인을 친부모 형제와 자식과 같이 대해야 하고 둘째, 안보적 측면에서 범법자, 분순분자 등의 활동을 봉쇄하며 셋째, 사회적 측면에서 불우이웃을 도와 건전하고 명랑한 사회 질서를 확립하고 도시환경을 정 화하는데 있다(지침 제1장 제1절).

173


고 나아가 사회정화와 정의사회구현이라는 이름으로 삼청교육대, 녹화사업과 함께 내무부훈령 제410호에 근거하여 부랑인에 대한 일체단속과 강제수용정책을 전개하 였다. 또한 86 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을 대비한 ‘거리정화프로그램’을 통하여 부랑 인에 대한 단속과 수용을 강화하였다. 이와 같이 부랑인에 대한 일체단속과 강제수 용의 결과 수용시설의 수용능력에 한계에 이르게 됨에 따라 부랑인의 장기수용이 곤란하고 과밀 혼합수용의 문제가 야기되었다. 국무조정실의 자료에 의하면 수용시 설 확충 수요를 조사한 결과 성인시설 7.975개소와 아동시설 3.526개소 등 11.501 개소가 필요하였고, 이에 따라 수용시설 부족의 완전 해소를 1단계 목표를 설정하 고 기존의 시설을 활용하여 수용가능한 시설이 8.847개소가 있어 2.654개소를 확충 하고 전문화하였다고 한다.13) 이 기간에 건축된 부랑인수용시설의 면적은 현재 시 설 전체 면적의 85.6%에 해당하며, 이 기간에 수용된 사람들이 거의 퇴소하지 못하 고 지금까지 시설에 수용되고 있고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14)

1987년 부산 형제복지원과 대전 성지원 사건은 그 동안 강제수용정책으로 일관한 결과로서 부랑인시설에서의 총체적인 인권유린을 집약적으로 보여 주었다. 이에 당 시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과 함께 정권보위에 중대한 위협이 되었는바, 정권 보위 차원에서 이 사건들을 조직적으로 축소하는 한편 ‘부랑인 복지시설운영개선 종합대 책’을 마련하고 같은 해에 내무부 훈령 제410호를 폐지하고 관할부서를 보건사회부 로 변경하여

‘부랑인선도시설 운영규정’(보건사회부 훈령 제523호. 1987. 4. 6)을

제정하였다. 그러나 부랑인을 “일정한 주거가 없거나 무의탁한 사람 또는 연고자가 있어도 가정보호를 원하지 않는 사람으로 거리를 방황하면서도 시민들에게 위해와 혐오감을 주는 등 건전한 사회질서의 유지를 곤란하게 할 뿐만 아니라 신체적, 정 신적 결함으로 정상적인 사고와 활동능력이 결여된 정신착란자, 알코올 중독자, 걸 인, 앵벌이, 18세 미만의 불구 폐지자 등”으로 규정하여 부랑인의 문제를 경찰법적 으로 대응하고 있음은 변화가 없다. 또한 이 운영규정 역시 훈령으로 부랑인을 단 속하고 강제수용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되지 못한다. 한편 내무부는 내무부 훈령

13) 국무총리 국무조정실, 국무조정실 30년사, 2003, 87쪽. 14) 김동인, 앞의 글, 13쪽.

174


제410호를 폐지하면서 ‘부랑인 등에 관한 업무처리지침’의 훈령을 발급하였는 바, 이에 의하면 부랑인을 수용소에 수용하는 방법이 아니라 경범죄처벌법, 경찰관직무 집행법 등에 의거하여 치안차원에서 처벌, 보호조치하는 방법으로 통제하도록 하고 있다.

(3) 1988년부터 현재 : 법제정비기 부랑인은 지금까지 공공의 안녕과 질서를 위협하는 반사회적 질서교란자로 사회 적 배제와 격리의 대상이었을 뿐 ‘권리를 가질 권리’ 조차 없는 법적 무지위의 상태 에 있어 왔다. 이에 따라 어떤 사회복지분야 보다 부랑인 복지정책에 대한 법제정 비는 현저히 지연되었다. 부랑인과 관련한 한국법제의 중요한 특징은 입법의 불비 그것이다.15)

위에서 본 내무부 훈령 제410호나 형제복지원 사건 이후 제정된 ‘부랑인선도시설 운영규정’은 행정규칙에 불과한 것으로 부랑인의 단속이나 강제수용 등의 법적 근 거가 될 수 없다. 부랑인 사회정책과 관련하여 1999년 4월 사회복지사업법을 개정 하여 부랑인 보호시설의 설치·운영에 관한 사항과 부랑인 보호를 위한 시설의 입·퇴 소 기준과 절차 등에 필요한 법적 근거를 비로소 마련하였다(동법 제34조 제4항).16) 이 법의 위임에 따라 2000년 8월 ‘부랑인복지시설설치·운영규칙’(보건복지부령 제 165호. 2000. 8. 1)이 제정·공포되었다. 이 규칙은 부랑인을 “일정한 주거와 생업수

15) 물론 법적 정비를 통해 부랑인을 강제수용하고 사회로부터 분리하고 격리했어야 했다는 것이 아니다. 16) 사회복지사업법(법률 제5979호, 1999.4.30, 일부개정) 제34조 (시설의 설치) ① 국가 또

는 지방자치단체는 사회복지시설(이하 "시설"이라 한다)을 설치·운영할 수 있다. ②국가 또는 지방자치단체외의 자가 시설을 설치·운영하고자 하는 때에는 보건복지부령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시장·군수·구청장에게 신고하여야 한다. 다만, 제40조의 규정에 의하 여 폐쇄명령을 받고 1년이 경과되지 아니한 자는 시설의 설치·운영 신고를 할 수 없다. <개정 1999.4.30> ③삭제 <1999.4.30> ④제2항의 규정에 의한 시설중 사회복지관 및 부랑인보호를 위한 시설의 설치·운영에 관 한 사항과 부랑인보호를 위한 시설의 인·퇴소의 기준·절차 및 직업보도 등에 관하여 필요 한 사항은 보건복지부령으로 정한다. <개정 1999.4.30> ⑤제1항의 규정에 의하여 국가 또는 지방자치단체가 설치한 시설은 필요한 경우 보건복지 부령이 정하는 바에 따라 사회복지법인 또는 비영리법인에게 위탁하여 운영하게 할 수 있 다.

175


단 없이 상당한 기간 거리를 배회하거나 구걸하는 자”(동규칙 제2조 제1호)로 정의 하여 부랑인의 개념에서 부랑인의 반사회적 질서교란자의 징표를 배제하고 있다. 그러나 보호기관(시장·군수·구청장)이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경우 강제수용을 규정(동 규칙 제3조·제4조·제8조·제9조)하여 부랑인에 대한 경찰법적 강제구금의 성격을 크 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사회복지사업법은 강제수용의 기준과 절차 등에 관하여 아무런 규정을 두지 않고 포괄적으로 부령에 위임하고 있다. 이는 헌 법상 포괄적 위임금지원칙과 명확성의 원칙 및 의회유보의 원칙 등에 반하는 위헌 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한편 IMF 이후 노숙자의 문제가 본격적으로 사회문제로 대두되었다. 이 과정에서 부랑인의 문제가 사회구조적 문제임을 명확하게 되고 그 동안 부랑인이나 행려자로 인식되어 오던 ‘거리의 사람들’은 ‘노숙자’로 불리워지고, 이들에 대한 사회적 인식 이 개선되게 되었다. 그러나 법제는 이러한 사회적 인식의 개선을 전혀 반영하지 못하였다. 2005년에 생계수단의 존부를 기준으로 부랑인과 노숙인을 구별하여 ‘부 랑인복지시설설치·운영규칙’을 ‘부랑인및노숙인보호시설설치·운영규칙’으로 개정하였 다(보건복지부령 제307호, 2005.1.5.). 그리고 2011년에 들어서야 노숙인과 부랑인 으로 이원화 되어 있던 정책대상집단을 노숙인 등으로 일원화하고, ‘주거로서의 적 절성이 현저하게 낮은 곳에서 생활하는 자’를 포함함으로써 잠재적 홈리스를 포괄 하는 ‘노숙인 등의 복지 및 자립지원 등에 관한 법률(홈리스법)’(법률 제10784호, 2011. 6. 7)이 제정되고 2012년 6월 ‘부랑인및노숙인보호시설설치·운영규칙’이 폐지 되었다. 이로써 지난한 부랑인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낙인의 일반화를 종식하는 법 제정비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Ⅲ. 국가범죄의 의의와 요건 국가범죄란 형법전에 수록된 범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권력에 의하여 자행 된 중대한 인권유린행위를 말한다.17) 국가범죄의 개념과 관련하여 삼청교육대 사건

17) 국가범죄의 의의에 대해서는 이재승, 국가범죄(앨피, 2010), 17-61쪽 176


에 대한 대법원 전원합의체판결(대법원 1996. 12. 19. 선고 94다22927)의 반대의견 은 “국가 소속의 공무원이 통상적인 공무수행을 하는 과정에서 개별적으로 저지르 게 된 일반적인 불법행위가 아니고…국가에 의하여 대규모로 그리고 조직적으로 실 시된 삼청교육 과정에서 피고 소속 공무원들이 대량으로 저지르게 된 특수한 불법 행위”라고 판시하여 주목할 만한 개념을 제공한다.18)

국가범죄는 통상 국가 안보, 범죄와의 전쟁, 적의 박멸을 위해 시작되는 바, 정치 적·인종적·민족적·종교적 이유 등으로 자행된 집단살해, 살인, 녹화사업, 강제전향, 의문사, 실종사, 강제실종, 고문, 구금, 강제불임, 강간, 강간갬프, 강제임신, 강제수 용, 강제입양, 강제격리, 해직, 숙청, 강제이주, 재산 강탈, 강제합명, 토지침탈, 자 원수탈, 인간사냥, 노예화 등을 국가범죄라고 할 수 있다. 국가범죄는 전쟁과 식민 지지배를 통해 강대국이 약소국에 자행하는 경우도 많지만 한 국가 안에서 지배집 단이 소수자 집단에게도 자행된다. 권력자들은 전시나 평시를 가리지 않고 자국의 시민 가운데 비판적 세력 또는 이질적 집단을 적으로 규정하고 학살과 박해를 일삼 기 때문이다.

국가범죄는 첫째, 일반적으로 계획적으로, 대량으로 그리고 체계적으로 자행된다. 그러나 의도성과 대량성, 체계성이 국가범죄의 필수요건은 아니다. 제1차 행위가 우 발적으로 발생했더라도 그 행위의 진상 규명을 방해하거나 피해자에 대한 효과적 구제 조치를 저지하는 제2차적 또는 제3차적 행위가 더해져서 체제의 범죄로 상승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공권력의 관행이 중요한 의미가 있다.

둘째, 국가범죄의 주체에는 제한이 없다. 위기상황에서는 군사조직, 보안경찰, 권 력자의 조종을 받는 반(半) 공식적 폭력집단, 민병대가 주로 자행한다. 이에 비해 평화 시에는 세련된 논리를 갖춘 법 장치들이 학살자의 역할을 수행한다. 그러나 반드시 공식적인 국가기구나 국가의 후원을 받는 집단만 국가범죄를 자행하는 것은

18) 정부범죄, 인권범죄, 국가에 의해 조종된 범죄, 국제법상의 중대한 범죄, 중대한 인권침 해행위 등이 국가범죄와 유사 내지 동일한 의미의 개념으로 사용된다.

177


아니다. 국가는 어떠한 경우에도 영향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수단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사기업이나 민간조직조차 국가범죄의 도구가 될 수 있다.

셋째, 국가범죄가 자행 당시 국내법적으로 위법한 것인 때에는 공소시효와 국가 배상에 대한 소멸시효의 문제를 야기한다.19) 그러나 국가범죄는 많은 경우 합법적 으로 자행되기 때문에 사후처벌이나 국가배상책임 인정 등과 관련하여 많은 법적 논쟁을 야기한다. 그러나 법률이 일반적으로 승인된 국제법의 원칙들 또는 자연법 과 충돌하거나 정의에 대한 실정법의 모순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에 이르러서 법률 이 ‘부정의한 법’으로 정의에 양보해야 하는 경우 법률은 한계에 직면한다. 이 경우 법률은 법적 성격을 상실하며 전혀 법이 아니다. 따라서 실정법이 극도로 부정의한 경우 실정법은 법이 아니라 법의 탈을 쓴 불법, 즉 법률적 불법(gesetzliches Unrecht)이다. 표면적으로 합법적인 행위일지라도 법적으로 효력이 없으며 그러한 행위가 잔혹한 것인 때에는 범죄로서 마땅히 처벌해야 한다.20)

국가범죄에 대한 국가책임의 추궁은 진실규명, 책임자처벌, 피해배상, 제도개혁, 문화적 구축의 5가지를 기본적 내용(과거청산 5원칙)으로 한다.21)

Ⅳ. 형제복지원 사건과 국가책임 1. 불법정부의 계획적·조직적·대량적 통치기제로서 부랑인 강제구금

(1) 통치전략으로 적과 친구의 구별과 박멸 형제복지원 사건은 피수용자의 진술22), 당시 수담담당 검사의 기록23)과 언론보도

19) 국가범죄에 대한 공소시효와 소멸시효의 문제는 상당한 학문적 진척이 있다. 발제문에 서는 이에 관해서는 다루지 않는다. 20) 합법적으로 자행된 국가범죄의 사후처벌과 국가책임의 법리에 관해서는 이재승, 위의 책, 71-111쪽. 또한 같은 책 <부 4> 라드브루흐의 「법률적 불법과 초법률적 법」 참고. 21) 국가범죄의 의의와 요건은 이재승, 위의 책, 17-61쪽. 22) 한종선, 전규찬, 박래군, 살아 남은 아이(문주, 2012); 23) 김용원, 브레이크 없는 벤츠(예하, 1993), 13-35쪽.

178


등에서 보는 것과 같이 인권에 대한 총체적인 침해 그 자체이다. 그리고 그것은 국 가에 의하여 아주 계획적이고 조직적이며 대량적으로 자행되었다. 정치적 정당성이 취약한 통치권력은 국민적 지지를 획득하는 통치수단의 하나라 의도적으로 국민불 안을 조성하여 적과 친구를 구별하고, 그 적을 박멸함으로써 정당성을 획득하는 반 동적 방어전략을 필사적으로 구사한다. 적의 실체가 없으니 내키는 대로 조작하고 가공할 수 있다. 불법적 군사정부에서 이른 바 부랑인은 공공의 안녕과 질서를 교 란하는 게으로고 나태한 ‘적’으로 항상 등장하다.

정치적 정당성을 완전 결여한 불법적 파시스트 정권이었던 제5공화국 정부도 형 님 독재자 박정희가 그러했던 것과 같이 복지국가건설을 정책과제로 제시하며 헌법 개정을 통하여 행복추구권을 규정하고(동법 제9조) 생활보호법, 노인복지법의 전면 개정과 국민연금법을 제정한다. 이와 동시에 사회정화와 사회악 일소를 동시에 내 세워며 1980년 8월 ‘사회악일소특별조치 및 계엄포고령 제19호’에 의한 삼청교육, 중앙행정기관으로 사회정화위원회 설치(대통령령 제10054호. 1980. 10. 28), 대학 생에 대한 학원정화사업인 녹화사업과 함께 무질서의 원인제공자로 사회악의 주된 적으로 부랑인을 지목하고 이들에 대한 강제구금과 사회격리의 통치전략을 수립·시 행한다. 형제복지원 사건은 그러한 과정에서 발생한 비극적이고 파탄적인 국가범죄 의 인권유린 사건이다. 이 과정에서 부랑인은 생물학적으로는 사람이데 법적으로 인간실격(人間失格)의 더러운 물건에 불과하여 청소되어야 했다.

(2) 대통령의 훈령 1981년 4월 10일 전두환은 국무총리에게 “별첨 정보보고서와 같이 근간 신체장 애자 구걸행각이 늘어나고 있다는 바 실태파악을 하여 관계 부처 협조 하에 일체 단속하고 대책과 결과를 보고해 주시기 바랍니다”의 특별훈령을 하달한다. 아울러 1981년 10월 18일에는 “구걸행위자 수용보호에 있어서는 심신장애자와 일반 구결 행위자를 구분 보호하되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농촌지역 등에 수용시설을 설치하여 지방장관 책임하에 농촌 일손돕기나 야산개발 등으로 영농기술을 익혀 자할할 수 있도록 할 것과 구걸행위자에 대해서는 내무부에서 대공적인 측면과 범법자의 색출

179


을 위한 신상파악을 철저히 하고, 읍·면·동 지소와 파출소 등에 구걸행위자 신고창 구를 상설하여 신속한 단속과 수용조치를 할 수 있도록 조치하라”고 별도의 훈령을 하달하였다.24)

이러한 대통령의 훈령에 따라 국무총리는 ‘구걸행위자 보호대책’을 수립하여 대통 령에게 보고하고 부랑인에 대한 월 1회 이상의 일체단속과 강제구금에 나섬과 시· 군에 부랑인 신고센터를 상설 운영(사회과) 하는 등 행정체계를 정비하였다.25) 또한 86 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을 대비한 ‘거리정화프로그램’을 통하여 부랑인에 대한 부랑인에 대한 일체단속과 강제수용 정책을 강화하였다.

(3) 일체단속과 강제구금의 대상 : 부랑인과 준부랑인 부랑인 단속과 강제구금의 가장 직접적인 근거는 대법원의 형제복지원 사건 판결 에서 보는 것과 같이 1975년 ‘부랑인의 신고, 단속, 수용, 보호와 귀향조치 및 사후 관리에 관한 업무지침’(1975. 12. 15. 내무부훈령 제410호)이다.26) 이 규정에 의할 경우 단속의 대상이 되는 자는 부랑인과 준부랑인이다. 즉 “일정한 정주가 없이 관 광업소, 접객업소, 역, 버스터미널 등 많은 사람들이 모이거나 통행하는 곳과 주택 가를 배회하거나 좌정하여 구걸 또는 물품을 강매함으로써 통행인을 괴롭히는 걸인, 껌팔이, 앵벌이 등 건전한 사회 및 도시질서를 행하는 모든 부랑인”(이 규칙 제1장 제2절)과 “노변행상, 빈 지게꾼, 성인껌팔이 등 사회에 나쁜 영향을 주는 자들”에 대한 조치도 부랑인 대책에 준하여 점차적으로 단속 조치한다(규칙 제1장 제3절 6 호). 이와 같이 단속대상은 매우 포괄적인 바, 거리에서 외관상 아름답지 못하다고 생각되는 모든 자가 그 대상이 된다. 거리미화사업인 것이다.

24) 국무총리 국무조정실, 앞의 책, 84쪽. 25) 부랑인을 단속하기 위하여 동원되는 규모는 우리의 생각 보다 상당하다. 대통령의 훈령 에 따라 1981. 4. 20∼4. 27까지 8일간의 1차 단속기간 동안 218개의 단속반을 편성하 고 19.322명의 공무원이 동원되었다. 그리고 7. 27∼8. 2의 두 차례의 일체단속에서 2,701명이 단속되어 이 중 1.813명의 강제구금되고 나머지 888명이 보호자에게 인계되 었다. 국무조정실, 앞의 책, 84쪽. 26) 대법원 1988. 11. 8. 선고 88도 1580 판결.

180


(4) 예비검속·민주화운동 탄압 및 무급의 노동력 확보 미국 부랑법의 운용실태에서 보는 것과 같이 부랑인 단속은 추방과 장애인의 수 용, 노동운동의 탄압, 소수집단에 대한 차별 등 다른 목적을 위해 다양하게 운용되 었다.27) 한국에 있어서도 부랑인의 단속은 범죄인 색출을 위한 예비구금과 민주화 운동을 탄압하는 역할을 한다.28) 즉, 부랑인의 단속과 강제구금은 대통령의 훈령에 서 뿐만 아니라 규칙의 제정목적, 부랑인 단속의 기본적인 임무, 업무처리지침에서 보는 것과29) 같이 예비구금과 민주화운동을 탄압하는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30) 수용기관의 장은 신원특이자 및 우범자로 판단되는 부랑인이 있는 때에는 관할 경 찰서장에게 즉시 통보하여야 하며, 관할 경찰서장 및 지·파출소소장은 주 1회 이상 정기적으로 수용시설을 순찰하고, 신원특이자대장, 범죄인명부와 대조·확인하여 불 순분자와 범법자를 철저히 색출하여야 한다(규칙 제4장 제5절).

또한 수용된 부랑인들은 무급의 필요한 노동력을 공급하는 역할도 한 것으로 보 인다. 노동능력이 있는 부랑인은 직업진도 및 갱생을 위한 취업장 등에 강제취로를 하는 바(규칙 제5장 제8절) 1987년 4월 부산시 형제복지원운영개선대책에 의하면 형제복지원은 자활사업장을 기술습득훈련 보다는 수익증대에 치중함으로써 갱생자 활조치를 소홀한 것으로 그 문제점이 지적되고 있으며 노예임대와 같이 다른 복지 원이 필요로 하는 경우 임대를 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고 한다.31) 또한 대전 성지 원의 사례이기는 하지만 복지원에서 노동인력이 필요하면 대전역 부근으로 단속을 나가 필요한 부랑인을 공급받고 4개의 외부기업체를 유치하여 노동자를 노동하게 하여 월 3천만원이상의 소득을 수취한 것으로 보도되었다.32) 27) 미국 부랑법의 운용실태에 대해서는 남궁호경, 앞의 논문, 230-234쪽. 28) 실제 국가보안법위반 전과사실이 있었다는 등의 이유로 부산 부랑인 수용소에 6년간 수 용되어 헌법소원을 청구했으나 각하된 사례가 있다(헌법재판소 2003. 2. 18. 2003헌마 46). 대통령의 훈령뿐만 이 규칙은 안보적 측면에서 범법자, 분순분자 등의 활동을 봉쇄하는 것을 기본임무의 하나로 하고(규칙 제1장 제1절), 단속된 부랑인은 신원 파악을 철저히 하여 범법자, 불순분자 등을 색출할 것을 기본업무방침의 하나로 규정하고 있다(규칙 제1 장 제3절 제2호). 국가기록원의 자료에 의하면 형제복지원의 퇴원자 중 경찰과 검찰에의 인계는 1984년 92명, 85년 142명, 86년 65명에 이른다. 김용원, 앞의 책, 25쪽.

29) 30) 31)

181


(5) 예비검속·민주화운동 탄압 및 무급의 노동력 확보 불법정부에 의한 계획적·조직적·대량적 부랑인 단속과 강제구금으로 1981년 이후 불량인 수용시설뿐만 아니라 수용인원이 크게 늘어 났다. 1981년 전국 부랑인 수용 인원은 7.156명이었으며, 형제복지원 사건이 발생한 1987년에는 2배 이상인 15.487명이 수용된다. 국가기록원의 자료에 의하면 형제복지원 역시 입소인원이 1980년에 비하여 1986년의 경우 2.5배 이상 증가하였다. 형제복지원 사건에 대한 전두환이 “박 원장은 훌륭한 사람이오. 박 원장 같은 사람 덕분에 거리에 거지도 없고 좋지 않소”에서33) 보는 바와 같이 이 시기는 쓰레기 청소하듯이 부랑인을 수 용·격리하여 비로소 거리가 완전 정화된 시기로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형제복지원 연도별 입소인원> 년

도

1986

1981

1982

1983

1984

1985

1986

입소인원

1785

3115

2997

4019

4355

3948

3975

2. 국가기관과 국가의 조정을 받는 민간기구에 의한 강제구금

형제복지원 사건은 대통령의 명령에 따라 국가조직에 의한 단속체계에 의하여 대 량적으로 자행된 강제구금이며, 또한 국가의 절대적 영향력 하의 지원과 조종을 받 는 단체에 의하여 자행된 원시적이고 반문명적인 인권유린사건이다. 또한 사건발생 이후에는 정권보위 차원에서 조직적으로 은폐·축소되어 피해자에 대한 효과적 구제 조치가 저지된 체제의 범죄이다.

(1) 부랑인 단속 체계 가. 부랑인단속반 및 상설부랑인신고센터의 설치 시장, 군수, 구청장은 경찰과 합동으로 부랑인단속반을 편성하여 월 1 회 이상 정 기단속과 필요한 경우 임시단속을 실시하며, 상설 부랑인신고센터를 민원실에 설치 하여 범국민적 단속체계를 확립한다(규칙 제1장 제3절 제1호). 32) 월간 말 1987년 3월호(통권 제10호). 33) 김용원, 앞의 책, 30쪽.

182


나. 신고체계의 구축 1) 일반신고 부랑인신고센터에 부랑인 신고가 접수되는 경우 즉시 부랑인 기동단속반에 통보 하며, 관내 주민, 공무원, 학생, 상인 등 모든 시민들이 부랑인을 발견한 때에는 즉 시 신고하도록 계도한다(규칙 제2장 제1절).

2) 지역책임자신고 부랑인의 배회가 예상되는 역, 터미널, 지하도, 육교 등과 우범지역에는 지역관리 책임자 또는 인접한 상점주인 등을 부랑인신고책임자로 지정하고, 부랑인 지역신고 책임자는 발견 즉시 신고가 되도록 시청, 구청, 군청의 부랑인신고센터와 긴밀한 연 락체계를 유지한다. 또한 통·반장을 중심으로 주민조직을 활용하여 주택가 등을 배 회하는 부랑인을 즉시 신고하도록 한다(규칙 제2장 제2절)

다. 기동단속반의 편성운영 부랑인 기동단속반은 경찰서와 합동으로 업무담당자 중 시·구의 경우 5명, 군의 경우 3명으로 편성하며, 기동단속반의 차량은 보유하고 있는 차량 중에서 우선적으 로 배치하여 사용한다(규칙 제3장 제1절)

(2) 신고처리체계(강제수용절차) 일반신고 및 신고책임자의 신고가 있는 때에는 즉시 신고접수부에 등재하여 기동 단속반장에 그 내용을 보고하고, 보고를 받은 기동단속반장은 지체 없이 현장에 출 두하여 신병을 인수하며, 신병인수 후에는 주민등록증 등 제 증표의 소지여부와 개 인신상에 관한 면밀한 조사를 하여 해당 수용기관에 수용조치한다(규칙 제2장 제3 절). 수용기관은 5일 이내에 연고자확인의뢰서를 발송하고(제4장 제4절), 연고자가 확실한 경우에 한하여 연고자 중 보호책임자를 지정하여 귀향조치하고 그 밖의 경 우에는 강제수용한다(제5장 제3절).

183


신고처리체계

접객업소

주민·공무원

지역신고책임자

⇓

신고센터 √신고접수증등재 ⇓ 보고

기동단속반 √신병인수 및 신원파악 ⇓ 인계인수

수용시설 (3) 사회정화위원회 불법정부인 제5공화국정부는 이른 바 사회정화업무의 효율적인 수행을 위하여 정 부조직법상 중앙행정기관인 사회정화위원회를 국무총리위원회에 설치하였다. 사회정 화위원회는 사회정화업무에 관한 연구 및 기획, 대통령 및 국무총리의 명에 의한 사회정화업무에 관한 관계행정기관·공공단체 및 그 산하단체에 대한 조정과 통제, 사회정화운동추진을 위한 교육 및 홍보 기타 사회정화에 관한 수명사항 등을 그 직 무로 하였다(사회정화위원회설치령 제3조). 사회정화위원회는 국민운동 차원의 사회 정화사업을 추진하기 위하여 전국 시·군·구 단위까지 민간단체의 형식으로 사회정화 추진위원회의 관변단체를 조직한다. 사회정화추진위원회는 권력을 등에 업고 부랑인 을 사회 정화의 대상인 ‘악’의 존재로 낙인하고 불법정부의 정치슬로건 중 하나였던 ‘정의로운 사회 구현’을 구현이라는 미명 하에 전국을 순회하며 부랑인들을 검거하 여 수용하거나 정신병원에 입원시켜 도시로부터 추방하였다. 사회정화추진위원회가 활동을 하던 시기에 형제복지원의 경우 1979년∼1982년 4년간 평균 입소인원이 7.85명이었던 것이 1983년∼1986년에는 11.5명으로 증가하였다.34)

184


(4) 형제복지원에서의 인권유린과 국가책임 부랑인의 단속과 강제구금은 위에서 본 바와 같이 국가조직에 의하여 자행되었 다. 그러나 형제복지원에서의 총체적 인권유리에 대해서는 국가책임이 면제되는가? 지금까지 사회복지법인이나 사회복지시설에 있어 인권유린에 대해 국가책임이 추궁 된 바 없지만 다음에서 보는 바와 같이 사회복지법인에서의 인권유린은 가해자의 형사책임은 별론으로 하고 직접적인 국가책임이 인정된다.

가. 사회복지법인의 법적 지위와 국가책임 사회복지증진의 책임은 국가에 있다. 사회복지사업법은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사회복지를 증진할 책임이 있다고 규정하여 이를 분명히 하고 있다(사회복지사업법 제4조). 국가는 사회복지의 공적 책임원칙에 따라 사업복지사업을 순수한 민간사업 자인 사인에 의하여 수행되기 보다는 조직성과 공공성을 명확하게 확보할 수 있는 사회복지법인을 설립하여 국가의 사회복지증진의무를 분담할 것을 기대한 정책적 대응인 것이다. 따라서 국가는 사회복지법인을 지원하고 보호하기 위하여 인건비․운 영비․시설보강비 등 사회복지법인에게 필요한 비용의 전부 또는 일부를 보조금을 지 급하여 직접적으로 지원하고(동법 제42조제1항), 국․공유재산을 우선 매각하거나 임 대하며(동법 제42조의2) 사회복지법인이 운영하는 사업에 출연 또는 기부한 재산은 상속세와 증여세, 법인세 및 지방세가 감면되고, 사회복지법인의 고유한 목적사업에 대하여는 법인세가 면제되는 등 세제상의 간접적인 지원을 주고 있으며, 사회복지 관련 법률에 의하여 지급된 금품과 이를 받을 권리는 압류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 (동법 제48조).

사회복지법인은 조치제도에서 보는 것과 같이 국가의 사회복지증진의무의 분담자 로서 공사협력의 역할을 기대하여 창설된 것이며, 종래 사회복지생활시설의 경우 사회복지법인만이 설치․운영할 수 있도록 한 것에서 보는 것과 같이 의한 사회복지 사업의 운영의 주체로서 활용하고자 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설립허가를 받은 사회 복지법인은 지위에 있어 사법상의 주체일지라도 기능적으로는 공익실현을 위한 공 34) 김동인, 앞의 논문, 13쪽.

185


적 주체로 편입되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회복지법인의 법적 지위에서 볼 때 사회복지법인에서의 총체적 인권유린은 국가행위로 의제도어야 하며 따라서 형제복 지원에 의한 부랑인 인권유린에 대한 책임은 국가책임으로 의제되어야 한다.

나. 국가·형제복지원 및 피수용자의 삼면관계와 국가책임 사회복지법인이 사법상 사인의 지위에 있다고 하더라도 사회복지법인에서의 인권 유린에 대한 국가책임은 면제되지 않는다. 이 경우에는 국가와 복지법인 그리고 피 수용자의 3면관계이다. 부랑인 선도사업의 업무위탁에 관하여 당시 사회복지사업법 에서는 이에 관한 규정을 두고 있지 않았다. 생활보호법(법률 제913호. 1961. 12. 3)상 요보호자에 대한 위탁보호의 규정은 있으나(동법 제27조) 부랑인시설은 생활보 호법상의 보호시설이 아니다(동법 제25조). 부랑인 선도사업은 부산시와 형제복지원 간 ‘부랑인선도사업에 대한 위탁계약’에서 보는 바와 같이 내무부 훈령 제410호의 위탁경영에 관한 규정이다(제4장 제7절 제2호). 이 위탁계약은 그 내용에서 보는 바 와 같이 공공서비스라는 공역무의 제공을 내용으로 하는 전형적인 공법상 계약이다. 이에 따라 사회복지법인인 형제복지원은 내무부 훈령이 정하는 바의 수용보호를 위 한 사회복지서비스를 사실행위로서 피수용자에게 제공한다(규칙 제4장 8절).

이 경우 국가와 피수용자는 국가의 조치에 의해 수용된 공법관계이며, 국가와 형 제복지원인 사회복지법인은 공법상 계약관계로서 형제복지원은 서비스제공의무 및 관리의무를 부담하고 국가는 비용지급업무와 지도감독의 권한을 갖는다. 그리고 형 제복지원은 피수용자에게 사실행위로서 보호에 필요한 서비스를 제공할 뿐 피수용 자와는 직접적인 법률관계를 형성하지 않는다. 따라서 사회복지법인에서 자행된 인 권유린에 대하여 그 행위자에 대한 형사책임은 별론으로 하고 피해자에 대한 배상 책임은 관리자로서의 책임이 아니라 국가가 직접 피수용자에게 부담하는 직접책임 이며, 배상을 한 경우 사회복지법인인 형제복지원에 구상권을 행사하여야 한다. 물 론 선택적으로 형제복지원은 민법상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책임이 있음은 물론 이다.

186


3. 불법적인 국가범죄

국가책임과 관련하여 행위시에는 적법행위임을 이유로 항변이 많으나 형제복지원 에서의 인권유린은 행위시부터 불법행위였다.

(1) 내무부훈령 제410호 이 훈령은 행정규칙에 불과하며 따라서 이 규칙에 근거한 단속과 강제구금은 불 법이다.

(2) 경찰관직무집행법 경찰관집부집행법상 보호조치를 위하여 부랑인을 일시 보호조치할 수 있다(동법 제4조). 즉 경찰관은 정신착란자·미아·주취자·자살기도자 또는 부상자로서 긴급구호 를 요한다고 믿을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는 자를 발견한 때에는 보건의료기관 또는 공공구호기관에 긴급구호를 요청하거나, 경찰관서에 보호하는 등 적당한 조치를 할 수 있다. 긴급구호요청을 받은 보건의료기관이나 공공구호기관은 정당한 이유없이 긴급구호를 거절할 수 없다. 경찰관이 보호조치를 한 때에는 지체없이 이를 피구호 자의 가족·친지 기타의 연고자에게 그 사실을 통지하여야 하며, 연고자가 발견되지 아니할 때에는 피보호자를 적당한 공중보건의료기관이나 공공구호기관에 즉시 인계 하여야 한다. 그러나 경찰관집부집행법상의 보호조치는 구체적 위험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당시 부랑인의 단속과 강제구금은 부랑자라는 신분에 의한 단속으로 경찰법 상 보호조치의 한계를 벗어날 뿐만 아니라 경찰관집무집행법상의 보호조치는 장기 구금의 근거가 되지 못하며, 보호기관에의 보호는 보호기관의 결정에 의하는 바, 이 는 다시 내무부훈령에 근거하게 되어 같은 불법행위를 구성하게 된다.

(3) 경범죄처벌법 부랑자와 관련하여 1954년 경범죄처벌법은 “일정한 주거를 가지지 않고 제방에 배회하는 자”를 경범죄로 처벌하였으나(동법 제1조 제3호), 1983년 전두환 정권은 부랑인 일반에 대하여 “(떠돌이) 일할 능력은 있으나 다른 생계의 길도 없으면서 취

187


업할 의사가 없이 여기저기 떠돌아 다니며 사는 곳이 일정하지 아니한 사람”을 구 료 또는 과료로 처벌하였다(동법 제1조 제3호). 이 조항은 1988년 개정된 법률에서 ‘국민의 의식수준의 향상으로 현실과 맞지 않다는 이유로 삭제되었다. 경범죄처벌법 도 부랑인에 대한 사회복지법인 부랑인시설에서의 구금의 근거가 되지 않는다.

(4) 사회복지사업법 및 생활보호법 당시의 사회복지사업법에는 부랑인의 선도사업을 사회복지사업의 일종으로 규정 은 하고 있었으나 부랑인의 보호를 위한 구체적인 규정내용은 두고 있지 않았다. 당시 생활보호법은 연령 65세이상의 로쇠자, 연령 18세미만의 아동, 임산부, 불구, 폐질, 상이 기타 정신 또는 신체의 장애로 인하여 근로능력이 없는 자, 기타 보호기 관이 본법에 의한 보호를 필요로 한다고 인정하는 자로서 부양의무자가 없거나 부 양의무자가 있어도 부양할 능력이 없는 경우의 자로 하였다(동법 제3조). 그리고 생 계보호는 피보호자가 주거가 없거나 주거가 있어도 그곳에서는 보호의 목적을 달성 할 수 없을 때와 피보호자가 특히 희망할 때에는 피보호자를 본법에 의한 적당한 보호시설에 수용하거나 다른 보호시설이나 개인의 가정에 위탁하여 보호를 행할 수 있도록 하였다(동법 제8조 제2항). 그러나 생활보호법 역시 부랑인 단속과 강제구금 과 강제노역 등의 근거가 될 수 없다.

188


발행일 2013. 11. 22(금) 발행처 ◧ 공동주관 : 학술단체협의회, 민주주의법학연구회 ◧ 공동주최 : 형제복지원사건진상규명을위한대책위원회, 김용익 의원실, 진선미 의원실 ◧후

원 : 외환은행노조, 전교조, 교수노조, 민주화를위한전국교수협의회,

◧후

원 : 한국비정규교수노조

주소 서울시 영등포구 당산동3가 395-25 한얼빌딩 3층 문의 형제복지원사건진상규명을위한대책위원회 사무국 02-795-0394 | http://footact.org

189


Turn static files into dynamic content formats.

Create a flipbook
20131122 자료집 형제복지원 학술대회 by 참여연대 - Issuu